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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26 호
단기 4340. 2. 05 (음력 12.18)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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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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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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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논쟁에서 무식한 사람한테 이기다니 어림없는 말씀. / W.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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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十五章 (노자 - 도덕경 : 제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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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焉,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儼兮, 其若容, 渙兮, 若氷之將釋, 敦兮, 其若樸, 曠兮, 其若谷, 混兮, 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 動之徐生? 保此道者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고지선위사자, 미묘현통, 심불가식.부유불가식, 고강위지용. 예언 약동섭천,유혜 약외사린. 엄혜, 기약용, 환혜, 약빙지장석,돈혜, 기약박, 광혜. 기약곡, 혼혜, 기약탁.숙능탁이정지서청? 숙능안이구, 동지서생? 보차도자불욕영. 부유불영, 고능폐불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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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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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다섯째 장
직역
예로부터 잘 행하는 자는 미세하고, 묘하며 그윽하고 통해서 깊어 헤아리지 못한다. 헤아릴 수 없기에 억지로 다음과 같이 형용한다. 머뭇거리네, 겨울날 천을 건너는 것 같이, 쭈물거리네, 사방이 두려운 것 같다. 근엄하도다, 그것은 손님과 같네, 흩어지도다, 그것은 얼음이 녹으려 하는 것 같네, 도탑도다, 그것은 통나무와 같네, 텅 비었도다, 그것은 계곡과 같다. 혼돈하도다 그것은 흐린 물과 같네,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그것을 고요히 해서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자기를 안정시켜서 오래가게 하고, 움직여서 온갖 것을 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도를 보존하는 자는 채우려 하지 않는다. 채우려 하지 않기에 그러므로 능히 낡은 것을 새로이 이루지 아니한다.
해석
석수장이가 돌을 다듬어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어 낸다. 그가 하는 행동을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을까. 아니 백미터 달리는 운동선수의 움직임을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단지 달리고 있다라고 만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세히 들어가면 수천 권의 책으로도 그의 행동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이름하는 것이다. 微妙玄通은 이러한 것을 표현 한 것이다. 모두 말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도에 있는 자는 일을 할때 조심스럽게 한다는 말이다.
개울을 본적이 있는가. 물이 맑아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줄 아는가. 그것은 흙모래이다. 물은 흙모래를 투과하면서 정화가 된다. 이때 물이 통과하면서 그 부분은 흙탕물이 된다. 그러나 그 곳을 지나온 물은 깨끗한 물이 된다. 누가 이러한 일을 하는가. 바로 도를 보전하려는 자이다. 그는 채우려 하지 않는다. 채우는 순간 그는 물을 정화시키지 못한다. 스스로 새로워지려 하지 않는다. 정화된 물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흙탕물로 남는다. 그것이 도를 보전하려는 자의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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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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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옛날의 훌륭한 선비들은 미묘하고 깊이가 있으며 사물의 원리를 깨달아서 그 마음의 심오한 경지를 다른 이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 심오한 모습을 억지로 표현해 보고자 한다. 신중한 태도는 겨울에 맨발로 냇물을 건너기를 머뭇거리는 것 같고, 조심스러운 모습은 마치 주변의 이웃을 무서워하여 두리번거리는 것 같고, 그 위용을 갖춘 의젓한 모습은 점잖은 손님과 같다. 온화한 모습은 흡사 얼음이 녹아 풀리듯하며 그 순박한 모습은 갓 베어 낸 통나무 같고 그 활달한 마음은 탁트인 산골의 공동과 같으며 만사를 포용하여 시비를 가리지 않는 태도는 흡사 탁류와도 같다. 누가 능히 이 흐린 물결을 멈추게 하여 서서히 다시 맑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능히 안정된 것을 작동시켜 서서히 살아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선비의 도를 체득한 이는 가득 차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차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도는 능히 만사를 덮을 수 있고 또한 새로이 그 무엇을 성취하려고 기도하지도 않는다.
주
미묘현통: 도를 깨우친 모습을 표현한 말임. 미: 정밀하다, 세밀하다. 묘: 미의 극치로 변통자재한 모습을 뜻함. 현: 깊고 신비스러운 것, 유원하고 심원하여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 통: 만물의 원리와 이치에 통달한 모습을 뜻함. 강: '억지로, 무리하게 ~하다'라는 뜻임. 용: 형용해 본다, 그려본다, 표현해본다의 뜻. 환연: 얼음이 녹아서 풀리는 모습을 뜻함. 박: 통나무. 광: 비다, 넓다의 뜻임. 이장에서는 시원하게 탁 트인 모양을 표현한 말임. 혼: 여러 가지가 어지럽게 귀섞인 모양. 불신성: 새로운 것을 이루려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뜻임.
해
도의 원리에 통달한 사람은 그 미묘함과 깊이를 남이 헤아릴 수 없고 그 몸가짐은 항상 의젓하여 삼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남에게는 포용력이 있게 대하고 소박하면서도 활달한 것이 산골의 공동과도 같다. 청탁을 가리지 않는 그는 무엇이나 버리지 않고 받아들이므로 모든 흙탕물을 가리지 않고 흘러 보내는 계곡의 탁류와도 같다. 그는 탁류를 정지시켜 정화하면서도 결코 이를 정체시키지는 않는다. 도에 통달한 선비는 어지러운 세상과 어울리면서도 그것에 물들지 않고 정화시켜 도의 너그러운 품속에서 생동케 한다. 도는 언제나 비어 있고, 고요하며, 무위하므로 모든 것을 덮고 있을 뿐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지는 않는다. 탁월한 선비는 자연의 섭리에 적응하여 무엇인가 새로운 것, 인위적인 것을 채우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직 자연(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임)에 맡길 뿐이다. 이 장에서 노자는 도를 터득한 이상적인 인간상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유가의 이상적인 인간상과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맹자에는 유가의 이상적인 인간상이 묘사되어 있다. 부동 심과 호연지기를 기를 것을 강조한 맹자는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공자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는 유약의 말을 인용하며 공자를 최고의 이상적 인물로 추앙하였다. 독자들은 유가와 도가의 이상적 인간상이 매우 대조적인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유가는 치욕에 대하여 염결로서 몸단속을 하며, 타협을 거부하고 시시비비를 끝까지 추궁하여 포폄으로 매듭짓는다. 도가가 세상의 모든 것을 차별 없이 포용하면서도 그 청징함을 간직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유가는 본질적으로 사대부 계층의 가치관을 대변하며 남성적이요, 강의함을 이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배계급의 철학으로 영속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유가 철학이 2천여년동안 동아시아의 지배적 정치사상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도가 철학은 시비와 포폄을 초월하여 부드럽고, 겸손하며 여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대지에 뿌리를 박은 피지배 계급의 정치적 이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권력과 세속적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먼 민초의 어려움을 어루만져 주는 생활 철학이기도 하다. 상류 사회의 화사한 가든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아웃사이더의 비애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친절함, 부드러움, 자상함이 깃든 철학이다. 우리는 이 두 위대한 사상을 모순과 대립 관계로 풀이해서는 안될 것이다. 유가와 도가의 두 사상은 어느 한쪽만이 있었다면 초래되었을 심리적 불균형에 안정감과 균형을 이루는 데 크나큰 공헌을 하게 된다. 동아시아의 지식인은 도가의 처세관을 통하여 유가의 위계질서 속의 의무감에서 잠시 벗어나 개성의 창달과 지성의 방랑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재직 중에는 공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에 충실하던 유교적 관리가 퇴직 후에는 자연을 벗삼는 도가적 처사가 되는 것은 조금도 모순된 일이 아닌 것이다. 유가 철학이 적극적, 현실적인 양의 성격을 지니는데 반하여 도가 철학은 보다 소극적, 둔세적인 음의 성격을 띄면서 동아시아의 문화에 깊이와 폭과 다양성을 주었다는 점은 이미 기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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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1장 선각의 인맥
한국미술사 연구에 바친 열정의 생애 우현 고유섭
1928년 4월,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 법문학부에 미학 연구실이 창설되어 일본인 교수들이 미학과 동·서양의 미술사 강의를 시작했을 때, 누구의 강의시간이건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는 너무나 열심인 학생 하나가 있었다. 그는 교수들의 주목을 끌어 2년 후에는 연구실 조수로 임명되었다. 이름은 고유섭, 그해에 그는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있었는데, 전공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인 미학 및 미술사였다. 이후 그는 한국미술사의 실질적인 개척자로서 눈부신 연구와 조사활동 그리고 정력적인 집필생활을 시작했는데 그의 학문적인 기초는 미학연구실에서 3년간 조수로 있을 때 틀이 잡혔다. 규장각 도서를 샅샅이 뒤져 미술사 자료와 화론을 뽑기 시작하는 한편, 전국 각처의 유적지와 도요지를 현지 답사하는 왕성한 연구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우현 고유섭의 출현은 구한말 이후 이 땅의 역사적인 모든 유적과 미술문화재의 근대적인 학술조사 및 연구가 일본인 전문가와 학자들에게 거의 독점되고 있던 그 당시의 현실을 고려할 때 참으로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이었다. 1933년에 그는 일제 밑에서 가장 배일 기질이 강했던 개성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그곳 시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했는데 그때 나이 30세였다. 이후 그의 한국미술사 연구는 본격화되고, 일본인 전문가들 속의 유일한 조선인 소장학자로서 민족적인 기개를 펴 나갔다. 이 땅의 문화유산과 미술문화재를 말하는 그의 글들이 개성과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잡지에 끊임없이 실렸고, 일본인이 중심이었던 관계 학계에서의 그의 존재는 당시 뜻있는 조선인 지식층과 학도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족했다. 원 태생지가 강원도였다는 설이 있는 우현은 소년기를 인천에서 보내고 거기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가 이미 대학 교육을 받았다고 알려진 선택된 가정이었으나 생활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울의 보성고보(지금의 보성중고교)를 거쳐 경성제대를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를 비교적 부유했던 인천의 처가에서 많이 대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후의 학문 생활도 언제나 가난을 면치 못했다. 개성박물관장으로 있을 때에 그가 받은 보수란 기껏 시청의 과장급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자적인 자세는 언제나 고고했다. 우현의 뚜렷한 목표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사명은 오직 하나, '한국미술사의 완성' 이었다. 그러한 그의 열의와 뜻을 재정적으로 다소 협조해준 사람이 있긴 했으나 그는 많은 어려운 조건을 민족애로써 극복해 나갔다. 그는 개성박물관 사택에서 정열적으로 연구논문을 집필하는 한편, 민족문화재의 재인식을 호소하고 그것들을 주목케 하는 교양물을 신문·잡지에 계속 기고했다. 위창의 뒤를 잇는 새세대인 우현의 과학적인 한국미술사 연구·개척은 사랑방 취미의 감상과 감식 위주로 고미술을 관심했던 그전까지의 귀족주의시대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개성박물관장으로 있으면서 우현은 당시 개성에서 발행되던 (고려시보)에 개성 일원의 고적을 조사·소개하는 수년에 걸친 장기 연재물을 집필했다. 그때 우현의 존재에 심취한 3인의 젊은 학도가 있었다. 모두 개성에 집을 갖고 있던 이 학도들은 가까이에서 우현의 민족적인 미술사연구와 고적 조사의 중요한 의미에 감명을 받는 동안 어느덧 우현의 뒤를 계승하려는 열렬한 제자가 되었는데, 이때의 그들의 지연에 의한 접촉과 인연이야말로 한국인에 의한 한국미술사학계의 여명이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3명의 학도, 곧 동경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황수영과 메이지대학에 재학 중이던 진홍섭, 그리고 개성의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있던 최순우는 우현이 1944년에 41로 요절한 후 모두 한국미술사의 전문가로 성장·활약하면서 학계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들 밑에서 많은 제3세대의 연구학도들이 배출됨으로써 오늘의 한국미술학계가 틀 잡혀졌기 때문이다. 해방 후 그들과 함께 한국미술사학계 형성에 크게 기여한 김원룡 교수가 있으나 이 김교수만이 우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애석하게도 우현의 생애는 너무 짧았으나 그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본격적인 한국미술사 연구는 개성에서 그의 후배이자 제자들인 황·진·최에 이어져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개발되면서 그는 영광된 개척자의 상으로 살아 있게 되었다. 동시에 이 땅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난날의 그의 과학적인 접근과 연구 업적은 오늘날 한국미술사학계에 하나의 우상이 돼있다.
사실 우현은 그의 짧은 생애에 기적에 가까운 연구 업적을 남겼다. 한국미술사와 문화재에 대한 그의 학문적 정열은 1930년부터 불과 10여 동안 (진단학보)를 비롯한 학회지와 신문·잡지에 발표된 약 150편의 연구논문, 유적조사, 혹은 답사기, 연구 여화, 화가론 외에도 민족문화재를 보호를 위한 시평, 해설, 수필 들이 대변해주고 있다. 그 밖에도 상당 분량의 미발표 유고 뭉치와 조사 노트가 있었다. 이 유고들은 우현이 타계하면서 3명의 문도 중의 한 사람인 황수영 교수가 보관하였다가 해방 직후부터 순차적으로 출판되었는데, 곧(송도고적)(1946년), (조선탑파의 연구)(1948년), (조선미술문화사논총)(1949년), (고려청자)(1954년), (전별의 병)(1958년), (한국미술사급 미학논고)(1963년), (조선화론집성 상.하)(1965년)이다. 이는 3인의 제자 황·진·최의 스승을 기리는 헌신적인 협력의 소산이었다. (송도고적)은 1936년부터 4년에 걸쳐 (고려시보)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우현이 살아 있을 때 주위에서 간곡히 출판을 권유하여 조판까지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저자는 인쇄본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애석한 유래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 마침내 출판이 되었을 때 그 첫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는 우현의 자서가 있었다.
"고적은 인간 생활의 전통을 보여주는 증징체다. 창조는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역사는 생활의 잔해가 아니라 창조의 온상이며 고적은 한낱 역사의 조백(생명이 없는 유물)이 아니라 역사의 상징, 전통의 현현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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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5장 행복을 찾아서
2.이론과 실천
일반적으로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이론가라고 부르고 묵묵히 할 일만 하는 사람을 실천가라고 부른다. 고금동서를 통하여 이론과 실천의 문제는 학문뿐만아니라 삶 자체에서 중요한 문제로 거론되어 왔다. 우리 나라 이씨 조선 대 4번에 걸쳐서 많은 목숨을 처참하게 희생시킨 사화들은 공리공담이 빚어낸 결과이다. 물론 이기론의 근거는 철학적임이 명백하지만, 그것이 개념의 유희에 극단적으로 빠지게 되면 공허한 이론에 흐르게 되어 사람들을 무리짓게하여 현실적으로 서로 모함을 하게 되고 실천적인 삶의 건설은 전혀 무의미해진다. 공허한 이론을 배격하고 이론과 실천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 선한 삶의 구축하는 방책이라고 보아 양지양능을 주창하는 입장이 중국에서 일어났으며 그것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양지는 참다운 이론이며 양능은 선한, 곧 가치있는 실천적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현대를 진단할 때 현대는 극단적으로 이론이 우세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것은 서구적인 분석적 사고가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때문이다. 이론적 분석의 결과 #1자연 과학이 극도로 발달하여 자연 과학 만능의 시대가 만들어졌고 #2종래에는 통일을 이루었던 예술 종교 학문 등이 극단적으로 세분화되었으며 #3사회마저 분업화되어 극심한 계층 형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따지고보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산업 공해라든가 전쟁의 위험 등은 분석적 이론, 다시 말해서 자연 과학이 극단적으로 발전한 결과에서 생긴 것이다. 이론이 실천을 도외시할 때 나타나는 결과는 이처럼 부정적이지 않을 수 없다. 바람직한 삶은 이론과 실천의 조화에서 기대되기 마련이다. 서구적인 삶의 방식이 다분히 이론적이라면 전통적으로 동양적인, 특히 한국적인 삶의 방식은 실천적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4계절에 맞추어 사는 태도는 추상적인 이론적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근대 이후 서구 문물이 쏟아져 들어올 때 우리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석적 사고 방식을 결여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거의 강압적으로 분석적 이론이 밀려들어왔으며 드디어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분석적인 사고에 물들게 되었다. 우리는 결국 극에서 극으로 전환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혼관 하나를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전통적인 결혼관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두 사람보다는 두 집안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결혼하는 두 사람만의 삶을 염두에 두는 것이 보통이다. 삶에 있어서 실천만을 중시한다면 비록 전체는 조용히 바라본다고 할지라도 발전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으며, 이론만을 중시한다면 부분적이고도 극단적인 발전은 보장된다고 할지라도 삶 전체에 대한 안목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실천없는 이론은 극단적이며 이론없는 실천은 답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론과 실천이 조화될 때 비로소 이론은 실천의 근거를 제시하고 실천은 이론을 현실화시킴으로써 조화로운 삶의 전체성이 구성될 수 있다. 조화로운 삶의 전체성이 구성될 때 선한 삶이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우리들은 행복을 찾아서 한 걸음 더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론을 중시하는 입장과 실천을 중시하는 입장을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성품을 덕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실천적인 덕을 통하여 인간은 행복에 이룰 수 있다. 사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우리들은 실천적인 행동을 통하여 인간 관계의 조화를 꾸미며 스스로 평온함을 찾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인 덕이란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고 분다. 왜냐하면 실천적인 덕에 의해 선한 행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인 덕에 선행하여야 하는 것은 이론적인 덕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이 것은 이론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론과 실천이 나뉘어지며 여기에서 실천보다는 이론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라고 하는 주장이 성립한다. 이러한 이론은 서구적인 전통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공리주의라든가 마르크스주의도 부분적 현실적인 삶을 분석하여 모든 사람의 이익 또는 공동 생산이 행복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초라고 주장하지만 (이들도 서구적인 전통에 충실히 서 있으므로) 동양에서는 실천적으로 행복에 도달하려고 하지 특정한 이론을 내세워서 행복을 실현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천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입장은 칸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앎의 장에서 칸트의 인식론과 윤리관을 어느 정도 언급했으므로 여기에서는 핵심적인 것만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칸트에 의하면 감성의 틀과 오성의 틀에 의해서 우리의 앎이 형성된다. 그러나 실천적인 행동은 이러한 형식적인 틀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다. 앎은 일정한 틀과 제한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행동은 이 틀을 넘어선다. 따라서 실천은 이론보다 앞선다는 결론이 성립한다. 이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는 다르지만 역시 실천과 이론을 분리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앎의 세계와 행동의 세계를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볼 경우 어떤 것이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선적인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앎과 행동이 인간이 삶에서 전체적인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실천과 이론 중에서 어떤 것이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론과 실천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만 비로소 삶 자체가 윤택해질 수 있으며 행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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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남세스럽다
본뜻:남의 웃음거리가 될 만하다는 뜻을 가진 '남우세스럽다'가 줄어서 된 말이다
바뀐 뜻:남의 조롱이나 비웃음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다 흔히 쓰는 '남사스럽다'나 '남새스럽다'는 잘못된 표현이다
내숭스럽다
본뜻 : 원래는 '내흉스럽다'라는 한자어에서 나온 말로서 글자 그대로 속이 음흉하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온유하고 얌전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은 딴 생각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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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3.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영원한 도시' 로마도 초기에는 티베를 강변에 있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이탈리아반도를 정복했을 때 그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로마시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전역에 비교될 수 있는 아피아가도가 로마에서 동남부 이탈리아 브룬디시움까지(576km) 뻗어 있다. 기원전 312년 감찰관이었던 아피우스가 처음 도로를 건설했을 때에는 로마에서 카푸아까지였으나 나중에 동남부 이탈리아인 브룬디시움까지 연장되었다. 북쪽으로는 플라미니우스도가 유명하다. 기원전 220년의 감찰관이었던 플라미니우스가 로마에서 아리미늄까지 건설했는데, 우리의 경원선에 해당한다. 그 외에도 로마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여러 도로들이 건설되었다. 이러한 도로망은 로마가 지중해 세계에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 속주 전체로 확대되어 제국통치에 크게 기여했다.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중심부가 되었다. 로마시에서 제국통치와 관련된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지고 그것이 해당 속주로 전해졌다. 또한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속주에서 일어난 일들로 로마로 보고되었다. 로마제국의 발달된 도로망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물론 로마의 도로는 일차적으로 군용도로였다. 정복전쟁뿐 아니라 해외 속주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도 도로는 유용했다. 또한 그 도로를 통해 상인들과 여행자들이 손쉽게 움직일 수 있었다. 따라서 그 도로망은 로마제국 5백 여년 동안 로마의 문화와 문물의 교류에도 크게 기여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은 이미 로마제국 당대부터 유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속담을 널리 알린 사람은 14세기의 영국 시인 초서(Geoffrey Chaucer, 1340-1400?)였다. 복카치오와 같은 르네상스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초서는 이 말을 이탈리아에서 들은 듯하다. 어쨌든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유럽 곳곳에서 확인되는 로마 도로의 흔적은 고대 로마제국의 역사를 그 어느 것보다도 잘 전해 주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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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외로움은 스승
뉴욕의 구석진 거리를 한 청년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의 머릿속엔 오늘도 그렇고 그런 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꿈을 꼭 펼치고 말것이라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별로 크지 않은 키, 매부리코에 호감을 사지 못하는 얼굴, 게다가 그는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는 가난뱅이였습니다. 그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허름한 건물로 접근해 가면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오늘도 퇴짜를 맞으면 어떻게 하나... 청년의 마른 엉덩이를 가려주는 청바지 뒷주머니에는 예외없이 원고뭉치가 꽂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간만 있으면 쓰고 가다듬던 원고였습니다. 부모님이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그 원고를 썼고, 학교에서 친구들이 여학생과 즐겁게 대화를 나눌 때에도 그는 그들을 부러워하며 교실 한구석에서 원고를 마주했었습니다. 그는 예쁜 여자친구가 하나 생겨 맥도날드에서 빅맥 햄버거를 함께 먹으며 데이트를 즐기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그에게는 꿈 같은 일일 뿐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마저 소외된데다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싸우는 부모님 때문에 소외된데다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싸우는 부모님 때문에 그는 종종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책상머리에 앉아 뭔가를 끄적거리곤 했습니다. 가까스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추잡하기 이를 데 없는 포르노 영화에 출연하며 몇 푼 되지 않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정식으로 영화계에 뛰어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건물 앞에서 심호흡을 해보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가는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용기를 잃을 것 같아 손을 문에 대고 무조건 안으로 밀고 들어갔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카운터에 앉아 있는 예쁘장한 얼굴의 여자가 물어왔습니다. 무슨 일로 왔느냐니? 청년은 이번에도 실망이었습니다. 그는 이 영화사에서 엑스트라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그가 엑스트라감으로 보이지 않았는지 그에게 찾아온 용건을 물은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조금 창피했지만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얼떨결에 객쩍은 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혹시 소형영화 시나리오는 모집하지 않으시나요?” 그러면서 청년은 바지 뒷주머니에 꽂혀 있는 원고뭉치를 꺼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당시의 영화계는 대형영화가 대유행이라서 소형영화를 제작하려는 사람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을 때였습니다. 여자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청년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었습니다. 그때 어떤 중년신사가 들어왔으나, 청년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밖으로 나와 몇 발자국을 걸어갔습니다. “여보세요, 잠깐만요.” 여자가 문을 열고 그에게 손짓을 했습니다. 청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지금 막 소형영화 시나리오를 찾고 계신 분이 오셨는데, 만나보실래요?” 청년이 문을 열고 나갈 때 들어온 바로 그 신사였습니다. 신사는 청년이 내민 원고를 슬슬 넘겨보더니 지금 당장 2천 달러를 줄테니 자기에게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원고는 청년에게 있어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외로움을 그 원고를 쓰고 개작하면서 이겨냈으니까요. 수중에는 빵을 사먹을 돈조차 없었지만 청년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 정도로는 안 되겠습니다.” 청년은 빈민가의 아파트로 돌아왔고, 예전처럼 막노동 일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신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번에도 2천 달러에 원고를 팔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좋습니다. 대신 저를 주인공으로 써주십시오.” 신사는 기가 막힌지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는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이 차갑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사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시 전화를 걸어와 소형영화 제작에 관심을 가진 제작자를 찾았는데, 함께 그를 만나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신사와 함께 제작자를 만난 청년은 원고를 보여주고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써달라고 무리한 부탁을 했습니다. 그말에 제작자도 어이없어 하면서 일단 원고를 읽어보겠으니 두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제작자로부터 청년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한번 같이 영화를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너무나 좋아서 심장마비에 걸릴 것 같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습니다. 청년은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았고, 몸과 혼을 다하는 연기로 기라성 같은 헐리우드의 영화배우들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영화는 얼마 들이지 않은 제작비로 공전의 대히트를 쳤고, 아카데미상을 휩쓸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이 바로 (록키)이며, 청년의 이름은 실버스타 스탤론입니다. 그 후 한 인터뷰에서 청년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거둔 대성공에는 사실 운이 따라주었습니다. 골프장에서 홀인원을 거둔 셈이지요. 저는 일단 골프장까지는 갔습니다. 골프장에 가지 않고서는 절대로 홀인원을 거둘 수 없지 않습니까?” 그에게 있어서 외로움은 스승이었고, 오늘날의 그가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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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압구정과 칠삭동이 한명회
경덕궁직의 큰 꿈, 계유정란
한명회가 처음으로 벼슬자리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38세 때 경덕궁직이 되면서부터였다. 말이 벼슬이지 개경에 있는 경덕궁(이성계가 살던 집)의 문지기가 무슨 벼슬이겠는가. 그것도 불혹의 나이를 눈앞에 둔 서른 여덟 살 때의 일이라면 이만저만한 늦깎이가 아니지만, 그 형편없는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그 이듬해 한명회는 권남의 천거로 수양대군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이 한명회를 정치의 중심부로 끌어들이면서 조선 왕통의 흐름을 뒤바꾸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문종이 세상을 뜨고 소년 단종이 보위에 오르자 조정의 실권은 세종대왕의 총신들인 황보인, 김종서 등의 손아귀에 있었고, 그들은 나이 어린 단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종친들의 손발을 묶은 이른바 분경 금지령을 발효하게 한다. 이에 수양대군이 격분하자 한명회는 조정의 훈구대신들을 일지에 쓸어내는 비상대책을 제시하게 된다. 이른바 '계유정란'의 실행계획이었다.
"경은 나의 장자방이다!"
이때부터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장자방에 비유하였다. 이 또한 한명회의 비상한 두뇌와 경륜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 아니겠는가. '계유정란'은 한명회의 계획과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성사된다. 이 일로 한명회는 정란1등공신에 책록되었지만, 그가 맡은 벼슬은 겨우 군기녹사의 자리를 거쳐 곧 사복시소윤으로 옮겨졌을 뿐이었다. 참으로 미미한 자리였다 여기에도 한명회의 서둘지 않는 성품이 잘 나타나 있다. 수양대군이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고, 대부분의 개혁정책이 그의 머리에서 짜여지고 있었으니 그가 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더 높고 좋은 자리를 차고 앉을 수가 있었을 것인데도 한명회는 스스로 미관말직에 머물 만큼 대범하였다. 그리고 1년 후,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선위를 받고 보위에 올랐을 때 한명회는 또다시 좌익1등공신에 책록되면서 비로소 왕명을 출납하는 요직인 좌부승지의 자리를 거치면서 우승지에 이른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째가 되던 해에 성삼문을 비롯한 이른바 사육신 등이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했던 '병자옥사'는 한명회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그날 창덕궁에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가 베풀어지게 되어 이었고, 조정의 대소신료들도 대거 참례하게 되어 있었다. 이같이 외교사절을 접대하는 큰 연회에는 운검을 세우게 된다. 바로 이날의 운검이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강골의 무장 유응부 그리고 다른 한 사람까지 모두 세 사람이었으므로 세조와 세자는 연회장에서 주살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침 한명회는 다른 날보다 일찍 입궐하여 은밀히 세조를 배알하였다. 그 자리에서 한명회는 세자는 연회장이 좁아서 몹시 무더울 것이며, 또 임금과 세자가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이 금기인지라 세자는 경복궁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조는 즉석에서 허락한 것이 아니라 한명회에게 여러 차례 꼬치꼬치 캐물은 다음에야 그의 주청을 가납하였다. 한명회는 한술 더 떠서 연회장에서의 모든 절차를 자신에게 맡겨 줄 것을 다시 간청하자, 세조는 연회장의 일이 예조의 소관임을 들어서 승지인 한명회에게 맡길 수 없음을 단호하게 천명하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좁고 무더운 연회장에서 돌발사태라도 일어난다면 예조의 관리들에게 임기웅변의 능력이 없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구실을 들어 세조를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가장 흥미롭게 느껴지는 사실은 성삼문 등이 주도하는 엄청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한명회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명회가 몰랐다는 사실은 곧 설명이 되겠지만, 모르고 있는 한명회가 어찌하여 이같이 빈틈없는 조처를 할 수가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어찌 되었건, 한명회는 연회장으로 들어서려는 운검 세 사람의 입장을 금지시켰다. 물론 어명의 사칭이었다. 이때 운검을 들지 못하게 한 것이 결과적으로 세조의 목숨을 구한 셈이 되지만, 연회가 끝난 다음 세조는 한명회를 호되게 나무랐다.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장에 운검을 세우지 않은 것은 나라의 위신을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그때 한명회는 아무 대답도 하질 못했다. 김질의 고변이 있기 하루 전날의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명회의 날카롭고 예민한 통찰력이 영감이나 직감에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의 일생을 통해 보면 이 같은 예감으로 위기를 넘긴 일이 여러 번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 영통사의 노승이 그의 머리 위에 빛이 서리는 것이 귀징이라고 말한 것이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지금의 압구정동, 그 '압구정동'이라는 동명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한명회의 별장 '압구정'에서 유래되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때의 실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시의 압구정이 얼마나 컸으며, 어떤 규모의 별장이었는가를 소상하게 알리는 사료는 없다. 다만 대단히 크고 호화로웠다는 것은 여러 가지 기록에 미루어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압구정의 운치는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면 멀리 중국에까지 소문이 나서 조선으로 온 중국의 사신들이면 누구나 압구정에서 연회를 베풀어주기를 갈망하였겠는가. 그때의 법도로는 임금의 허락이 없이는 중국에서 온 사신들을 개인이 초청할 수가 없었다. 사정이 이와 같고 보면 압구정의 주인인 한명회로서도 난처한 노릇이지만, 임금이나 조정으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융숭하게 예우해야 할 중국의 사신들의 간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한명회의 난처한 심회를 적어 놓은 사료가 있어 여기에 옮겨 보기로 한다. 성종 11년 6월 7일자 "성종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신이 압구정을 지은 것을 깊이 스스로 뉘우칩니다. 신이 옛날 사명을 받들고 중국 조정에 들어갔을 때에 학사 예겸과 더불어 접화하고자 하여 드디어 청하기를 '한강에 조그만한 정자를 지었으니, 원컨대 아름다운 이름을 내려 주십시오' 했더니 이에 압구라고 이름하고 또 기를 지어 주었습니다. 중국 사신이 이것으로 인하여 이 정자가 있는 것을 알고 가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한림학사 예겸의 인품 탓인지 중국의 학사들이 앞을 다투어 압구정에 부치는 시를 지어서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압구정이 호화롭고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연율 마땅히 자랑스러워야 할 압구정임이 분명하지만, 그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한명회가 '신이 압구정을 지은 것을 깊이 스스로 뉘우칩니다'라고 토로 하였겠는가. 설사 그렇기로 압구정이 건재하고서는 말썽이 이어지게 마련이어서 그 후에도 중국에서 온 사신들은 압구정에서 연회하기를 간청하는 지경이었다. 그들이 귀국한 다음에 압구정에 들려보지 못했다면 조선에 다녀 온 보람이 없다는 풍조가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압구정의 문제는 성종의 진노를 사기에 이르렀으니, 역시 "성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성종의 노여움이 보인다.
내가 듣건대, 재상 중에 장가에 정자를 지은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한다. 지금도 중국의 사신들이 압구정에서 놀자고 하거니와, 뒤에 오는 사신들도 반드시 강가에 있는 정자에서 놀자고 할 것이니, 나는 강가에 있는 정자를 헐고자 한다. 올해 안에 모두 헐어 없애도록 하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한명회는 성종의 장인이다. 임금의 지위에 있는 사위가 장인의 별장을 헐어 없애라고 명했다면 압구정으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압구정의 역사지만 언제 지어져서 언제 헐렸다는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명회의 압구정이 화려한 소비문화를 상징하고 있는데, 그로부터 5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그 이름을 딴 지역이 또다시 소비문화를 상징하게 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역사가 무심이 흘러가는 과거만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맥락임을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라면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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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는 눈을
'모세'는 만약 남의 생명을 빼앗았을 때는 목숨으로써 보상케 하고 눈을 다쳤을 때는 눈을, 이를 다쳤을 때는 이로써 보상케 한다는 율법을 정했다. 이는 원시적인 형벌법으로서 동해복수법 혹은 동태복수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법적으로 이러한 복수를 인정했음은 3천 6백여 년 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왕이 발표한 법전 제196조와 200조에 명기되어 있다. 이러한 법 원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은 유태인 사이에도 행해지고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복수를 인정하지 않고 자비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유명한 '산상의 설교'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말라. 누가 네 오른 편 빰을 치거든 왼 편 뺨을 돌려대기에 앞서 오른 쪽 주먹이 올라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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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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