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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25 호
단기 4340. 2. 04 (음력 12.17)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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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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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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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논쟁에서 무식한 사람한테 이기다니 어림없는 말씀. / W.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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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十四章 (노자 - 도덕경 : 제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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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狀, 是謂恍惚,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시지불견 명왈이 청지불문 명왈희 박지부득 명왈미 차삼자 불가치힐 고혼이위일 기상불교 기하불매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 시위무상지상 무물지상 시위황홀 영지불견기수 수지불견기후 집고지도, 이어금지유 능지고시 시위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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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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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넷째 장
직역
보이지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라고 한다.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라고 한다. 만져도 느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미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섞어서 하나로 삼는다.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데 이름할 수 없다. 다시 물 없는 데로 돌아가니, 이를 일컬어 모습 없는 모습이오, 물 없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홀황惚恍-없는 것 같지만 있는 것. 恍-있는 것 같지만 없는 것.-이라 한다. 앞에서 맞아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를 따라가도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옛의 도를 잡아, 지금의 있음을 규정한다. 능히 옛시작을 아니 이것을 일컬어 도의 줄기라 한다.
해석
아지랑이를 본적이 있는가. 아지랑이는 보인다. 그러나 만져지지는 않는다. 바람을 본적이 있는가.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있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다. 도는 이와 같다. 도는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려지지 않는다. 즉 인간의 감각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규정되고 잘려진 것들뿐이다. 물은 그런 구분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럼 물 자체가 구분되어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럼 그 것을 구분하는 것은 누구인가. 사람이다. 사람이 물의 특성을 보고 구분하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팔과 손이 구분되어 있다고 보는가. 어디서부터 구분이 되어 있는가. 팔과 손을 분리시키는 순간 손은 죽는다. 그리고 전체도 죽어 간다. 팔과 손을 구분하는 것은 팔과 손 자체가 아니다. 인간의 의식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물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다. 이러한 인간의 의식이 개입하지 않는 상태가 이희미의 상태이다. 밝음과 어둠의 상대성을 뛰어넘은 상태를 일컫는다. 홀황은 비몽사몽간이라는 말이다. 술에 취해본적이 있는가. 그때 세상이 어떻게 보이던가. 마구 돌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도는 것인가 내가 도는 것인가. 그리고 그때 본 세상이 참세상인가 술이 깬 뒤에 본 세상이 참세상인가. 그리고 우리가 지금 술에 취해서 세상을 보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말이 많이 빗나갔다.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바람을 앞에서 맞아 보아라 그럼 그 머리가 보이는가. 바람을 뒤따라 가 보아라 그럼 바람의 꼬리가 보이는가. 바람은 시작과 끝이 없다. 도는 시작과 끝이 없다. 동양의 사상에는 시작과 끝은 없다. 원만 있을 뿐이다. 시작과 끝의 사상은 서양의 사상이다. 도를 알 수 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도를 알겠는가. 그것은 옛날의 도를 잡아서 보면 된다. 즉 지나간 자연현상을 살펴보면 지금 무엇이 일어날지를 아는 것과 같다. 능히 옛시작을 아는 것은 바로 도의 규칙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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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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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것은 보려고 애써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라고 한다. 그것은 들으려고 해 보아도 들리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희라 한다. 그것은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결코 잡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셋을 통틀어 하나라고 한다. 그 하나는 윗부분이 더 밝은 것도 아니고 아랫부분이 더 어두운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길게 길게 이어져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결국 아무것도 없는 무물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그것을 형체 없는 상이라고 하며, 물체 없는 상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바로 황홀하고 말할 수 있다. 전면에서 마주 보아도 그 앞부부을 볼 수 없고, 뒤에서 보아도 그 후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의 도리를 구명하여 지금의 일을 다스린다면 능히 태초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도의 본질이라 한다.
주
이희미 : 본체계는 인간의 시각, 청각, 촉각에 포착되지 않는 초감각적 존재임을 강조한 말임. 즉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다는 뜻임. 치힐: 끝까지 밝혀 내는 것, 추궁하다, 구명하다. 교: 흰 것, 밝은 것, 분명한 것을 뜻함. 매: 어두운 것, 애매한 상태를 뜻함. 승승: 끊임없이 길게 길게 이어지는 무한 정한 모습을 뜻함. 무상 지상: 상은 형상을 뜻하며, 무상 지상은 형상 없는 형상이란 뜻으로 형상이 있으나 우리의 오관으로는 지각이 불가능한 본체계의 초월성을 뜻하는 말임. 홀황: 황홀한 것, 어렴풋해서 분간할 수 없는 상태. 홀: 없는 듯 하면서도 있는 모습. 황: 있는 듯 하면서도 없는 모습. 어: 다스리다, 통치하다, 통제하다, 관리하다, 치와 동일한 의미임. 고시: 태고의 시초. 도기: 도의 근본, 도의 본질, 도의 실마리를 의미함.
해
노자는 이 장에서 도의 절대성과 인간 지각의 한계성을 여러 말로 잘 설명하고 있다. 도는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는 포착이 불가능한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잡을 수도 없다. 도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유한한 언어로 감각적으로는 포착이 불가능한 무한한 본체계를 표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것은 우주 삼라 만상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라고 말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무엇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주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천지 만물이 그것으로 인하여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있다고 말하자니 그 형체를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형체 없는 상이요, 물체 없는 상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것은 인간 감각 기관의 인식을 거부하는 점에 있어서 칸트의 물자체에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앞으로도 뒤로도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신비하고 황홀하기만 하다. 우리는 도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태고의 시초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구 불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 장에서도 형체 없는 상, 물체 없는 상 등의 역설을 구사하여 자신의 도특한 형이상학을 전개하고 있다. 역설과 부정과 반어는 노자서의 문학성을 이루는 근간이 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이나 저 역설과 날카로운 풍자로 유명한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도 노자서의 신랄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동서양의 최고 지성들이 철학으로서의 노자 서 못지 않게 문학으로서의 노자 서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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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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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1장 선각의 인맥
최초의 한국 미술가 사전 엮어낸 위창 오세창
위창 오세창은 4∼5대에 걸친 집안의 전통을 이어서 20세 때에 역관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사역원 역관이 됐다. 3년 후인 1886년에는 조정의 인쇄 출판기관이었던 박문국의 주사로서 (한성순보)(최초의 근대적인 신문) 기자를 겸했다. 이후 1896년에 일본 문부성 초청으로 도쿄의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로 1년간 가 있게 될 때까지 그는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02년에는 개화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에 망명, 5년만에 귀국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 손병희·양한묵 등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이렇듯 개화운동의 적극적인 참가자였던 위창은, 망명지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인 1906년에는 천도교를 배경으로 손병희·권동진·이인직 등과 민족적 개화사상을 계몽하기 위해 (만세보)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했고, 1909년에는 다시 대한협회를 배경으로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대한민보) 창간에 협력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다음해에 가서 국운은 마침내 기울고 국토는 일제의 식민지로 병합당하고 말았다. 통탄스런 시대의 격변과 망국의 암흑기를 목격하면서 위창은 집안의 민족문화 컬렉션을 새로운 감회로써 되만지기 시작하였다.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그는 떠돌아다니는 민족문화의 유산들, 특히 서화를 힘 자라는 대로 더욱 찾아 모았다. 위창의 서화 수집은 여유를 즐기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그는 역대 서화가의 이름과 확실한 관계기록 및 진적을 조사·정리하여 우선 후학들을 위해 이 땅의 서화가 인명사전을 펴낼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1910년대 중엽에는 상당히 진척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매일신보) 기자가 위창댁을 방문하여 그의 서화 컬렉션과 연구·정리 생활을 보고 쓴 (별견서화총)이라는 기사가 있다.
"근래에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서화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에 오세창 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가히 경하할 일이로다. 씨는 십수년 이래로 조선의 고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을 것이 없을 것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275점에 달하는데, 그중 1,125점은 글씨요 150점은 그림이다. 세종·선조·숙종·영조·정조 시대의 것이 많고, 신라·고려 때 것도 적잖이 모았으니 명현석유와 고래화가의 필적을 망라하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로다. 씨는 앞으로 100여 점만 더 구득하면 조선의 명서화는 누락됨이 없으리라 하여 고심 수집 중이며, 다만 서화를 수집함에 그치지 않고 그 필자·별호·연대·이력 등을 상세히 조사하여 참고케 하였는데, 그 목록만 하여도 세상에서 가히 구득치 못할 가치가 있겠더라. 기자는 씨에게 그를 사진판으로 출판하여 조선의 고미술 동호자에게 할애할 것을 권유했고 씨도 그런 계획이 있어 그 기회를 엿보는 중이라며 우선 그 목록을 정리·출판하여 서화 동호자의 참고자료가 되도록 하리라더라."
1910년대 중엽의 위창의 생활내막과 컬렉션을 가장 상세히 알려주는 글은 1916년 12월 7일부터 5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된 만해 한용운 선사의 위창댁 방문기인 (고서화의 삼일)이다. 3년 후의 3·1독립운동 때에 가선 다같이 33인 민족대표에 끼지만 만해와 위창이 만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작부터 서로의 존재와 민족사상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만해의 위창 방문기를 쉽게 풀어 긴요한 대목의 요지만 인용해 본다.
"11월 26일(1916년) 하오, 박한영·김기우 두 분과 동행하여 조선 고서화의 주인되는 위창 오세창 선생을 돈의동으로 방문하다. 나는 그가 조선 고화를 수집한다는 말을 들은 지 이미 오랜지라, 일찍부터 구경하고 싶었으나 여러 일로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기우의 소개로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되었다."
"위창댁에 이르러 중문을 들어서니 마당에는 국화분 몇이 놓여 있다. 응접실에 들어가 앉으니 기우가 나를 위창에게 소개하여 지면의 예를 나누었다. 그런 후 위창은 그의 오랜 친구인 기우를 시켜 별실에서 서화 축을 가져오도록 하였는데, 그전에 벽에 걸린 서화를 보라 한다. 나는 머리 들어 사벽을 돌아보았다. 북쪽 벽에는 '주정의 명' 을 탁본한 것이요, 서쪽 벽의 것은 석각을 탁본한 5폭을 이어서 표구한 것이다. 첫 번째 행의 '물하소형' 4자는 성벽의 각자이니, 위창은 내가 그것을 보고 있었을 때에 나무상자 하나를 열더니 한 조각의 돌을 보여주는데, '물하소형'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성석이라. 나머지 4행은 '통격석비' (백제의 유허 비문), '동우불광청' (단곡사의 신라 신행선사 비문), '대사유악장' (정토사의 고려 자등탑비 비문), '일시동인실개유지' (승암사의 이조 무학선사 비문)이었다."
"어느 겨를에 기우는 일곱 축의 화첩을 가져다 놓고 열람을 독촉하는지라, 벽에서 눈을 돌리니 (근역화휘)라고 표제가 적혔는데 위창이 직접 화첩을 꾸미고 쓴 것이라. 제1축은 31인의 그림 41점으로 되었는데 첫장은 고려 공민왕의 양 그림이요, 그외 신사임당의 '초충도' 등이 들어 있다. 제2축은 30인의 41점, 제3축은 31인의 41점, 제4축은 20인의 29점…. 나는 눈으로는 그림을 보고 손으로는 화가의 이름을 짚어 나가기에 바빴다. 이렇게 그리워하던 영예스러운 우리 고인의 수택을 접촉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계속해서 29인의 그림 32점을 모은 제5축, 24인의 34점이 들어 있는 제6축, 26인의 33점이 든 제7축을 모두 보았다. 도합 191인의 역대 화가가 그린 250점의 그림을 5시간 반이나 걸려 배람하였다. 다시 서첩까지 보려 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되고 하여 다음날로 미루고 발길을 돌렸다."
"다음날에는 오래 전부터 약속이 있었던 김남천, 강도봉 두 스님을 청하여 동행하려던 차에 마침 광문회에 머무르고 있던 김노석이 찾아왔길래 동행 여부를 물으니 그도 좋은 기회라고 흔연히 나서는지라, 4인이 동행하여 서첩을 보기 시작한 것이 하오 1시 반이었다. 표구는 화첩과 똑같고, 표제는 (근역서휘)니, 모두 23축으로 되어 있었다. 제1축에는 조선 최고의 명필 김생의 금니서와 최고운의 은니서가 있는데 이것이 진적(진짜)인지 아닌지 약간 의심의 여지가 있다지만, 그 밖에 정몽주의 글씨는 어제 공민왕의 그림을 보던 감회가 그치지 않았던 터라 더욱 감명을 받았다. 제2축 이하에는 성삼문·이황·정철·허난설·송운대사·한석봉·이괄·송시열·허미수·정약용·김정희의 각체 각종 내용의 글씨들이 모아져 있는데, 모두 692인의 진묵이라, 그것들을 불과 3시간에 다 보고 나니 속첩이 또 있단다. 그러나 그것은 내일 또 보기로 하고 일어섰다."
"다음날엔 혼자서 찾아가다가 중로에서 김노석을 만나 돈의동 위창댁에 이르니 조선 제일의 호고가인 최남선과 최성우가 먼저 와 있었다. 서로 오랜만의 인사를 나누고 곧 (근역서위.속)을 보기 시작하였다. 이 속첩은 모두 12축으로 408인의 글씨를 보충한 것인데 그 속엔 고려 때의 금니자를 비롯하여 임경업·이삼만·민영익 등의 필적이 수집되어 있었다. 본첩것과 합치면 실로 1,100인의 글씨가 모아졌고, 화첩이 그림까지 치면 도합 1,291인의 수적이라. 더구나 그것들이 신라의 김생으로부터 현대까지 1,200여 년에 걸쳤으니 이렇듯 잔편단간의 고서화를 채집하는 데 성공한 위창에게 그 동안의 고로를 위로하기보다 그 행복을 축하하겠도다."
만해는 그 외에도 미처 표구를 하지 못한 채로 있는 고서화와 탁본, 그밖에 살아 있는 서화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끝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선의 고서화를 이렇듯 수집함은 실로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며, 그 가전의 사업인데, 그가(위창이) 전력으로 수집을 착수하기는 7년전의 일로써 그 애씀과 성의는 누구도 동정을 표하지 않을 수 없도다. 서화의 원본을 수집함에 있어 어떤 땐 힘겨운 값으로 사기도 하고 혹은 어떤 이의 기증도 있었다. 그렇게 얻은 후에 필주(작가)의 역사기록을 찾아 연구하고, 그 연대를 찾아내어 순서를 정리하느라 정신과 체력을 모두 바쳤도다. 조선의 고인의 수적을 이같이 모음은 누구를 위함인가. 고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조선인의 안목으로는 이상하게 보이기 쉬우리로다. 나는 그 나라의 고물은 그 국민의 정신적 생명의 양식이라고 듣고 있다. 나는 위창이 모은 고서화들을 볼 때에 대웅변의 연설을 들은 것보다도, 대문호의 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큰 자극을 받았노라. 만일 훗날 조선인의 기념비를 세울 날이 있다면 위창도 일석을 점할 만하도다."
위창의 컬렉션에서 민족의 정신적 생명의 줄기를 본 만해는 크게 감동했던 모양이다. 불교계의 거인으로 독립투사였고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민족시인인 만해 한용운이 1916년 가을에 컬렉션에서 보고 감동한 (근역화휘)와 (근역서휘)는 그보다 10년 후에 이루어지는 위창의 필생의 업적인 (근역서화징)(한국 최초의 역대 미술가 사전)의 기본 자료였다. 위창은 그의 컬렉션의 분류·정리와 편저에서 '조선' 이란 말 대신에 이 땅의 상징적 명칭의 하나인 '근역' 으로 표기했다. 그는 (근역인수)라 하여 역대 서화가와 명인들이 직접 사용한 각종 도장의 인영도 체계적으로 모으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 서화사 자료의 입체적인 조사와 개척적인 정리는 위창의 생애를 영광되게 한 문화적 업적이지만, 반면 민족문화에 대한 그의 사랑과 집착은 그가 3·1운동 때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기개를 보인 투철한 독립정신과 함께 당시 조선사회에 참으로 값진 영향을 끼쳤다. 많은 뜻있는 학도와 인사들이 그의 주변에서 정신적인 영향을 받았고, 또 이땅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과 긍지를 높였다. 그러한 위창의 영향력은 한국 근대문화 초기의 커다란 사회적 공헌이었다. 서예와 전각, 그리고 서화감식안에서 모두 당대의 대가였던 위창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직후인 1921년 10월에 민족 미술가들의 단체인 서화협회가 기관지 (서화협회 회보)를 창간할 때 그동안 (삼국사기)와(삼국유사)를 비롯한 약 150종의 각종 문헌에서 뽑아 모았던 역대 서화가의 기록들을 '서가열전' 과 '화가열전' 이라는 제목으로 동시 연재를 착수했었다. '탑원초의' 라는 필명으로 '나대편' 을 소개하고, 이어서 '여대편'을 착수했다가 (서화협회 회보)가 제2호로 중단(1922년)되는 바람에 계속 활자화되지 못하고 말았지만 앞의 두 '열전' 은 한국미술 사료의 최초의 정리 작업이었다. 위창의 역대 서화가의 행적 및 사료정리는 1928년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곧 (근역서화징)인데, 이 최초의 한국 미술가 사전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 방면의 유일한 문헌으로서 학계와 교양인 사회의 긴요한 사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위창의 공적은 너무나 크다. 1959년에 나온 김윤영 편저의 (한국서화인명사서)는 약간의 보충은 있으나 대체로 (근역서화징)을 국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집안의 풍부한 컬렉션과 근대적인 집념의 소산인 위창의 명저 (근역서화징)이 처음으로 출판되었을 당시의 반응은 앞에서 이미 소개한 육당 최남선의 표현, '암흑한 운중의 전광' 으로 대표되지만, 삼국시대 이후의 392인의 화가, 576인의 서가, 그리고 서화를 겸했던 149인의 기록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수록한 (근역서화징)의 출현에 대해 육당은 또 '참으로 일대경이에 속하는 업적' 이라고 신문에 썼다. (근역서화징)에 앞서는 것이 있다면 추사에 완전히 심취했던 문도인 우봉 조희룡이 1844년에 기록한 (호산외사)를 꼽을 수 있다. 18∼19세기의 대표적인 명인 41인의 평전인데, 그러나 여기엔 화가로 최북·임희지·김홍도·김영면·이재관·전기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근역인수)는 수집 정리자인 위창이 작고하고 15년 후인 1968년 가을에 서울 국회도서관에서 출판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치는 856명의 서화가가 애용했던 성명, 아호, 별호, 자, 기타 별칭, 이명의 도장 약 3,800종을 실제의 날인본(종이에 찍힌 상태)으로 모았던 이(근역인수)의 방대한 유고는 위창이 한국전쟁 중 대구에 피난하고 있다가 1953년에 90세로 별세한 후 유가족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것을 국회도서관의 강주진 관장이 출판을 전제로 인수함으로써 (근역서화징)과 더불어 위창의 필생의 큰 업적으로 쌍벽을 이루는 (근역인수)의 내용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의 전각예술의 역사적인 전통과 실제 사용을 한눈에 보여주는 최대의 자료 집성이기도 하다. 위창은 이 야심적인 인수(도장의 숲)를 반세기에 걸쳐 수집하는 동안 조선시대의 각종 인보·인집·인첩·인책을 모두 참고, 흡수하고 있다. 한편 역대 서화가의 진필 수집이었던 (근역화휘)의 일부는 3·1운동 이후 위창의 생활이 차차 어려워지던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당시 서울의 부호로서 미술품 수집가였던 다산 박영철에게 넘어갔다가 1940년에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에 기증되어 지금도 대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근역화휘)에선 (천)·(지)·(인)의 세 화첩(도합 67점의 소폭 그림이 들어 있다)이, 그리고 (근역서휘)에선 모두 35첩이 다산의 기증으로 역시 서울대박물관에 고스란히 전해지게 되었는데, 당시 기증자의 친일색이 개운찮게 뒤따르긴 해도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행선지였다. (근역서휘)와 (근역화휘)에 들어가지 않은 1,116점의 글씨와 그림(주로 근대의 문인화)들은 따로 (근묵)이라는 압축된 표제로 묶어(모두 34권) 위창이 끝까지 간수하고 있다가 유족에게 물려줬다. 그러다 1964년에 성균관대학에 들어가 현재 대학박물관에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위창이 직접 쓴 '근묵' 이라는 제자 밑에 '팔십위' 라고 낙관 한 것을 보면 이 속첩이 꾸며진 것은 1943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 대로부터 이어졌던 위창의 컬렉션엔 진귀한 책도 많았다. 희귀한 고려본과 조선 초기의 진본들이 포함돼 있는 이 문고는 1962년에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갔는데, 약 3,200책이었다. 그밖에 낙랑시대의 명문이 있는 귀중한 전 2점(하나는 서기 335년명)과 역시 글자가 들어 있는 삼국시대의 기와조각 44점, 그리고 앞에서 이미 소개한 '고구려 성벽각자' 는 1965년 10월에 이화여대박물관이 위창의 유족으로부터 인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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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5장 행복을 찾아서
1.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우리는 매일매일 신문과 텔레비젼을 대하여 살아가고 있다. 사실 현대는 매스콤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신문과 텔레비젼에는 언제나 착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함께 등장한다. 신문의 사회면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강도, 살인, 사기, 밀수 등에 관한 기사가 실리며 그러한 기사의 주인공 등은 악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보다 적은 양이기는 하지만 신문에는 또한 이웃을 도와준 이야기, 심장병 어린이를 치료해준 이야기, 불우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이야기 등이 실리며 이러한 선행의 주인공들은 착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텔레비젼의 경우도 신문과 유사하다. 특히 매일 연속극에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오랜 기간 동안 갖은 사연을 지닌 채 관계를 유지해오다가 결국에 가서는 내용적으로 선한 사람이 승리하게 된다. 왜 우리는 사람들을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며 또한 행동을 착한 행동과 악한 행동으로 구분하는가? 우선은 습관적으로 악한 행동과 착한 행동을 구분한다.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들은 거의 습관적으로 살아간다. 번화한 길거리에서 몇 사람이 짜고서 아무 일도 없는데 갑자기 하늘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무슨 일이 없는가 하고 하늘을쳐다본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심리적인 사실이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좌석에서 어떤 친구가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그 김씨라는 인간은 아주 나쁜 놈이고 악한 놈이야! 그 인간은 남을 배신만 하고 그뿐만 아니라 남을 이유없이 해치고 자기 이익밖에 생각하는 것이 없는 놈이야!"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 후 우연한 기회에 친구가 이야기했던 김씨를 만날 경우 나는 김씨가 아마도 나쁜 사람일지 모를 거라고 경계하게 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습관적으로만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나는 김씨와 사귀면서 점차로 나 자신의 판단에 의하여 김씨가 과연 선한지 아니면 악한지를 스스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교실에서 학생들과 나누는 대화를 돌이켜보기로 하겠다.
"최양, 자네는 오늘 아침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걸어서 학교에 왔겠지? 물론 내일도 그렇게 하겠지?" "예" "자네 집이 수유리 쪽이거나 아마 버스를 타고 왔을 거야. 왜 버스를 탔다고 생각하는가? 내 물음이 너무 어처구니 없겠지만 대화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진지하게 답해 주기 바라네." "그거야 물론 학교에 오기 위해서지요." "여러분, 정신 이상이 아니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버스를 탈 경우 직장에 가거나 놀러가거나 아니면 학교에 오기 위해서 버스를 탑니다. 그렇다면 최양, 학교에는 왜 와서 앉아 있는가?" "마찬가지 질문인데요. 공부하러 와서 앉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부는 왜 하는가?" "보다 좋은 직장도 얻고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자, 최양, 시간 여유를 가지고 좀더 생각해보세. 왜 공부를 하는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좋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훌륭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네. 최양, 자네가 원하는 훌륭한 사람은 그러한 사람인가 또는 어떤 다른 유형의 사람인가?"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은 사회에서의 위치가 어떻든간에 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최양, 자네는 이제 우리들이 대화하는 문제의 핵심에 거의 다 와 있다고 생각하네. 선한 사람은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일까?"
위의 대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인간은 행복을 찾아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가지각색이어서 간단히 이야기하기란 힘들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정성을 쏟으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면 행복해지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앞의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든지간에 선하게 사는 것이 행복하리라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하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당연히 제기되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선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된다. 선과 악이 무엇이며 그 관계는 어떤가에 관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매우 많은 이론들이 전개되어 왔다. 나는 여기에서 그러한 이론들을 일일이 살펴보는 일은 피하고 지금까지 논의하여온 맥락에 따라서 선과 악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선과 악은 도덕의 문제이자 윤리의 문제이다. 선과 악은 또한 가치 있음과 가치 없음으로도 이야기될 수 있다. 나보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공감하여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줄 때 나의 행위는 가치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친구에게 꾼 돈을 갚지 않을 때 내 행동은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과 악은 행동의 문제이다. 앎의 문제가 참다움과 거짓됨으로 나뉜다면 윤리적인 문제는 선과 악으로 나뉘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일상 생활에서의 반성되지 않은 선과 악은 실상 나 개인의 직접적인 이해에 깊이 상관된다. 어떤 사람이 피해를 입으면서도 나를 위해서 헌신하거나 나에게 도움이 될 때 나는 "그 사람은 참으로 착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또 내가 부당한 이익을 몰래 취하려고 했을 때 정당하게 그것을 지적하고 시정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매일매일의 삶에서는 어리숙한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그리고 정당하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려는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일컬어지기가 일쑤이다. 이렇게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습관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반성된 의미의 선과 악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만일 "당신의 이익 추구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과연 착하고, 방해가 되는 사람은 악한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 곧 당위를 행하면 그러한 행동을 선하다고 하며 그렇지 않으면 악하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행동이 조화를 이루면 그것은 선이요,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악이다. 그러한 뜻에서 최상의 선은 곧 행복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물론 나는 여기에서 절대적인 선이나 절대적인 행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삶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지속성이 있으며 조화를 이루는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은 선하다. 그 반면에 순간마다 변화하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행동은 악하다. 쉽게 말해서 선이란 행동의 충만함이며 삶 전체와의 일치이다.
예컨대 내가 어떤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자. 만일 내가 그 여인의 돈을 탐내어 사랑한다면 그 행위는 선한 것인가? 내가 몸매만을 탐내어 그 여인을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행위는 선한 것인가? 내가 어리숙하고 그 여인이 총명하므로 그것을 이용하려고 그 여인을 사랑한다면 그 행위는 선한 것인가?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인격과 인격으로서 이해하며 공감할 때라야만 그 여인에 대한 나의 사랑은 선할 것이다. 그러기에 선이란 삶 전체와의 일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일까?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에서는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으로 가고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고 흔히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인간의 착한 심정을 기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에서는 천국이 왜 선한 세계이고 지옥이 왜 악한 세계인가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앞에서 선이 삶 전체의 조화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행동의 완전함을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선행을 했을 때 학교나 사회 단체에서는 그 사람에게 보상을 주며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형벌을 가한다. 선을 행동의 완전함이라고 한다면 악은 행동의 부조화요 불완전함이다. 나의 삶이 충만할 때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다. 그러나 나의 삶이 결핍되었을 때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들어 있다. 선과 악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일상적인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선은 천국에서 내려오고 악은 지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은 우리들의 삶 자체에 같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행동이 조화롭고 충만할 때 그것은 선이라고 일컬어지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결핍될 때 그것은 악이라고 일컬어진다. 따라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곧 악한 행동을 했을 때 그 행동은 결핍된 행동이므로 그 행동을 충만하게 해주어야 선의 실행이 가능할 수밖에 없다. 죄인을 처벌한다는 생각은 원한 감정이나 복수 감정에서 나온다. 죄인은 결핍된 행동을 행하였으므로 처벌할 것이 아니라 행동을 수정시키거나 개선시킴으로써 행동을 조화롭게 그리고 충만하게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범죄를 범한 사람의 행동을 교정하는 장소를 형무소라고 부르는 것이다. 선과 악이 삶 자체에 있으므로 선한 사람이 악하게도 되고 악한 사람이 선하게도 된다. 만일 선가 악이 전혀 별개의 것이라면 선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선한 것이고 악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악한 것이므로 교육은 전적으로 무의미해질 것이다. 선은 삶의 충만함이다. 선과 앎과 아름다움은 하나의 지혜는 결국 삶의 행복에 일치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 방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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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투리
본뜻 : 콩, 팥, 완두 등 콩과 식물의 씨가 들어 있는 껍질을 가리킨다.
바뀐 뜻 : 콩이나 팥의 모태가 되는 것이 꼬투리인 것처럼 어떤 일이나 사건의 실마리를 가리킬 때 졸 꼬투리란 표현을 쓴다. '꼬투리를 잡는다' 같은 표현이 여기서 나왔다
나리
본뜻 : 옛날에 왕자를 높여 부르던 말이 '나리'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정3품 이하의 당하관을높여 부르는 말로 정착되었다. 이것을 보면 옛날에도 직함이나 호칭 인플레가 있었던 것 같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주로 일정한 관직 이상에 있는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로 쓰고 있으나, 때로는 지위가 높은 사람을 비아냥거리는 말로 쓰기도 한다. 흔히들 '나으리'로 쓰고 있으나 틀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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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3.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팍스 로마나
원로원 의사당에서 공화정 수호세력이 카이사르를 살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역사는 그들 편이 아니었다. 현실은 이상주의자들을 냉혹히 대했다. 공화정의 회복을 꾀하던 카이사르 암살자들은 오히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등 친카이사르파에 의해 제거되었고, 사태는 제2전의 내전으로 치달았다.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측근인 안토니우스, 그리고 레피두스가 제휴해서 성립한 제2차 3두정치도 오래가지 않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로 압축되었고, 이들의 마지막 결전이 아드리아해의 그리스 앞바다인 악티움에서 펼쳐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서부지중해 지역을 세력권으로 한 반면, 안토니우스는 동부지중해 지역과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지배하에 있는 이집트의 후원을 받으며 싸움에 임했다. 양자의 운명이 걸린 이 싸움에서 안토니우스의 패배는 예견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옥타비아누스보다 육군이 강했던 안토니우스가 육전을 주장하다가 해전을 고집하는 클레오파트라의 주장에 넘어가 해전을 택했기 때문이다. 해전에서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전세가 불리해지자 클레오파트라의 배가 먼저 전장을 이탈했고, 뒤이어 안토니우스가 탄 배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병사들은 장군이 도망친 줄도 모르고 계속 싸웠으나, 이미 승패는 결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쳐 그곳에 진을 쳤고, 싸움은 이듬해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미 승리의 여신은 옥타비아누스 편이었다. 기원전 30년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함으로써 세기의 대결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는 단지 한 개인의 승리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장기간 계속된 로마 시민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이집트로부터 개선하였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누구의 눈에나 광대한 로마제국의 실질적이고 유일한 지배자였다. 장기간에 걸친 외정과 내전에 지친 사람들은 계층의 상하를 막론하고, 로마 시민, 속주민 할 것 없이 모두 평화와 안정을 염원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도 또한 그 기대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보여 주었다. 로마는 이미 지중해를 에워싼 모든 지역을 평정했었다. 지중해는 명실상부하게 '우리의 바다'가 되었다. 이탈리아반도내의 동맹국들뿐 아니라 해외의 속주들도 이제 로마의 지배질서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는 유럽 북부에서는 라인강, 다뉴브강으로 이어지는 자연국경선을 공고히 하고 더 이상의 정복전쟁을 하지 않았다. 로마의 내정 역시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으로 시작 또한 1백여 년에 걸친 로마 시민간의 내전도 사실상 끝났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약 2백여 년간의 로마지배 시대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는 말로 상징된다. 그것은 하나의 국제질서를 말한다. 그 이후 역사상 여러 비슷한 말들이 만들어 졌다. 19세기에는 '팍스 브리태니커', 20세기 후반에는 '팍스 아메리카나' 등 내정도 끝난 오늘날이 마치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팍스 로마나'에서 그 평화의 본질은 힘이었다. 고상하게 '평화'라는 말로 위장되었지만, 그것은 힘에 의해 유지되는 하나의 제국의 질서를 의미했다. 힘이 정의였고, 모든 세력이 힘있는 자에게 복종할 때에만 유지되는 평화였다. 힘있는 자가 불의를 행한다면, 그리고 약한 자들이 그 질서를 거부한다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런 일시적인 질서였다. 한 마디로 참 평화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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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엘비스의 마지막 선물
산새들이 울고 꽃이 피었지만, 카렌은 세상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나무 그늘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의 이 장애아 기숙학교에서는 적어도 3월말이 되어야만 마당에 나와 햇볕을 쬐면서 놀 수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여전히 녹지 않은 눈이 보였지만 아이들은 선생님들, 그리고 면회 온 부모님들과 술래잡기를 하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카렌은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이곳으로 데려다준 엄마가 요즘 들어서 통 오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엄마가 슬그머니 미워지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 미워하고 싶은 엄마의 얼굴조차 아른거렸습니다. 선생님들도 이제는 카렌을 포기했습니다. 심한 뇌성마비, 그것도 상태가 진행되고 있는 심각한 환자라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자격지심으로 선생님들에게 행패를 부리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푼으로 음식을 떠먹여 주는 선생님의 얼굴에 음식을 퉤퉤!하고 내뱉기, 휠체어를 탄 채 옆으로 쓰러지기, 경우에 따라서는 이마로 벽을 들이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도 카렌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챈것 같았습니다. 이곳에 몇 년째 있지만, 여러 선생님이 카렌의 태도를 고쳐보겠다고 나섰다가 일주일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한적한 산골에서도 카렌은 혼자였습니다. 외롭지만 그렇다고 그런 표정을 짓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남들에게 약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오늘 처음 온 레나 선생님이 카렌을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녀도 다른 선생님처럼 친절한 척하다가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겠지요. 아무리 얼굴이 예쁘면 뭐하나요.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야단을 치고 “네 마음대로 해봐!”하면서 악담을 늘어놓을 텐데. 레나 선생님이 다가왔습니다. 학교를 갓 졸업한 그녀는 아주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생기 발랄해 보였습니다. 카렌도 10여 년만 있으면 그녀처럼 장애아를 위한 선생님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 전에 병이 낫는 것이지요. “왜 저 아이들하고 같이 놀지 않지? 나하고 같이 술래잡기할까?” 카렌은 심통이 난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버려둬요. 그 아이는 원래 그런 아이예요.”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레나는 다른 아이들에게로 가면서 혼자 눈 덮인 산 정산을 바라보는 카렌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레나는 카렌의 신상에 대해서 대충 들었습니다. 부모가 이혼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어머니 혼자서 그녀를 데려왔고, 1년 전부터는 소식이 일절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점점 난폭해지는 것이 다루기가 어렵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레나는 카렌을 자신이 맡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카렌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목욕을 시켜 주었습니다. 카렌은 있는 힘을 다해 반항했지만, 레나 선생님의 고집도 대단했습니다. 카렌이 아무리 음식을 뱉어내도 레나는 기어코 카렌의 입에 음식을 집어넣었고, 그리고 아무리 물벼락을 맞아도 카렌을 씻기고야 말았습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흘러갔습니다. 레나가 며칠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가고, 마침내 카렌도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카렌은 마음의 문을 열면서 펑펑 울며 레나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고, 레나 선생님은 그렇다고 답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단짝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잘 때까지 항상 붙어 있었습니다. 카렌의 학교 생활도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부모님들이 면회 오는 날이었습니다. 카렌은 아침부터 우울해져 있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카렌! 우리 마을로 내려갈까? 쇼핑도 하고 영화 구경도 하자.” “그, 그랬으면 해요, 레, 레나. 하, 한 번도 마을 구경을 한 적이 없어요, 저는. 카렌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레나는 카렌을 차에 태우고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차를 주차시켜 놓고, 휠체어에 카렌을 태우고 다니며 상점에서 쇼핑을 했습니다. 카렌의 눈이 극장 앞의 영화관에 머물렀습니다. 그녀는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마이크를 들고 열정적으로 노래 부르는 간판 속의 사람을 유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저, 저 사람... 누구예요?” “응,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아주 유명한 가수지. 우리 들어가서 볼까?” “아, 아니에요. 저, 저는 여, 영화 싫어해요. 그, 그리고 전 나, 남자 싫어요.” 레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휠체어를 극장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잘 보이는 가운데 자리에 카렌을 내려 놓았습니다. 카렌은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카렌도 이제는 남자에게 연정을 품을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레나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사람도 아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른다니... 엘비스가 달콤하면서도 슬프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 아주 달콤하게 말이에요. 내 곁을 떠나지 말아주세요. 당신이 없으면 나는 불완전하게 된답니다. 그래서 나는 이토록 당신을 사랑합니다.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 아주 진실하게 말이에요. 그대만 같이 한다면 내 모든 꿈이 채워진답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그리고 영원히 사랑할 테니까요.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 아주 오랫동안 말이에요. 내 마음을 받아주세요. 내 마음은 이미 당신 곁에 있고 결코 멀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 아주 진실하게 말이에요. 그대와 같이 한다면 내 모든 꿈이 채워진답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그리고 영우너히 사랑할 테니까요.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 아주 애틋하게 말이에요. 그대가 나의 여인이라 말하도록 허락해 주세요.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나는 당신의 사람이 될 테니까요.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 아주 진실하게 말이에요. 그대만 같이 한다면 내 모든 꿈이 채워진답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그리고 영원히 사랑할 테니까요.
레나는 카렌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카렌은 헉헉거리면서 숨을 고르지 못했습니다. 레나는 그녀를 휠체어에 태우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괜스레 극장에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외출에서 돌아온 다음, 카렌이 외로워하는 증상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녀는 음식도 잘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엘비스 프레슬리를 짝사랑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하나... “카렌, 엘비스에게 편지를 써보지 그래?” “그, 그런다고 그, 그 사람이 나 같은 아이에게, 더, 더군다나 이런 환자에게 다, 답장을 보, 보내줄까요?” “그럼. 엘비스는 너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리고 너를 사랑할 거야.” 레나의 끈질긴 조언으로 카렌은 엘비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매주 한 통씩 보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습니다. 카렌은 우체부가 올 때쯤이면 우체통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있다가 레나가 편지 뭉치를 들고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비가 오고 눈이 와도 우체부는 왔지만, 기다리는 엘비스의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엘비스에게 펴, 편지를 쓰지 않을래요. 그 사람은 나 같은 아, 아이에게는 관심도 없다고요." 카렌은 예전처럼 심한 우울증에 빠져들었습니다. 레나는 엘비스에게 편지를 쓰라고 한 자신의 책임인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버에는 자신이 직접 엘비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 무척이나 바쁜 사람인 줄은 알지만 뇌성마비 환자인 카렌이라는 소녀가 당신의 편지를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다고, 그녀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도 카렌은 우체통을 지켜보고 있었고, 레나 선생님이 우체부로부터 우편물을 받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우편물을 넘기는 그녀의 표정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담담했습니다. 그녀가 카렌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편지 한 통을 내밀었습니다. “자, 편지.” “...” “편지라니까?” “누, 누구한테서...?” 레나가 갑자기 카렌을 포옹햇습니다. “엘비스, 엘비스한테서 온 거야!” 두 사람은 너무 좋아서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산속이 울리도록 소리를 지르자 그 소리가 메아리쳐 되돌아왔습니다.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편지를 읽는 카렌을 둘러쌌습니다. “그, 그 동안 너무 바빠... 다, 답장을 쓰, 쓸 수 없었대요. 직접 받을 수 있는 주, 주소가 여기 있어요.” 카렌은 최고로 인기있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엘비스로부터 편지를 받은 카렌을 무척이나 부러워했습니다. 초콜릿, 인형, 그리고 엘비스의 레코드판이 수시로 배달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몰래 찾아와 자신도 엘비스에게 편지를 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사정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카렌은, 편지는 마음대로 써도 되는데 답장받는 것은 장담하지 못하겠다고 으스대었습니다. 레나는 그런 카렌을 보면서 하늘을 훨훨 나는 것 같았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엘비스는 직접 오고 싶었지만 공연 일정이 너무 촉박해 그럴 수 없었다면서, 대신 자신의 사진과 커다란 곰인형을 보내왔습니다. 카렌은 이제 자랑하는 것에도 세련되어 있었습니다. 호들갑을 떨지 않으면서 자신과 엘비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은근히 과시했습니다. 카렌은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그 선물들을 놔두고 침실에 들었습니다. 기숙사는 조용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과 짐승들이 멀리서 울어댔습니다. 달빛이 유난히 환해서 레나는 눈을 떴습니다. 새벽 2시 경이었습니다.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그녀는 살며시 침실에서 나와 카렌의 방으로 갔습니다. 불을 켜지 않고 카렌에게 다가갔습니다. 카렌은 엘비스가 보내준 곰인형과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레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곰인형과 사진을 카렌의 품에서 빼내고는 그 애의 얼굴에 자신의 뺨을 대보았습니다. 레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카렌의 몸은 바깥 온도처럼 차가왔습니다. “카렌... 카렌... 카렌.” 작은 목소리로 불러보았지만 카렌은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꿈속에서 엘비스를 만나고 있는지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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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압구정과 칠삭동이 한명회
* 처음에는 부지런하지만, 나중에 이르러 태만해지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다. 끝까지 신중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여라. (한명회)
유언
단종, 세조, 예종, 성종에 이르는, 4대에 걸쳐 33년간을 정치일선에서 활약하는 동안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의 자리를 두 번이나 거쳤고, 성종 초에는 원상의 자리에 올라 국가의 위기를 관리했던 당대의 경세가이자 국구(임금의 장인)인 한명회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누운 것은 성종 18년 11월이었다. 그의 나이 73세. 성종은 덕종(세조의 장자, 추존된 임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면서도 형님인 월산대군(덕종의 장자)을 제치고 보위에 올랐다. 성종이 열두 살 어린 보령으로 순서를 무시하면서까지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가 있었던 것은 빙부인 한명회와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야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명회는 자신의 사위인 성종의 시대를 태평성대로 이끌어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마침내 성군 세종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는 영욕이 곤두박질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불편해진 심기를 조금도 내색하지 않은 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큰 인물이었다. 빙부이기 전에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던 한명회가 병석에 누웠을 때 성종의 춘추 31세였다. 성종은 좌승지 한언을 보내서 그를 문병하게 하여 하고 싶은 말을 들어오게 하였다. 한명회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성상께서 백왕의 으뜸이신데, 국가의 일에 대하여 신이 어찌 말하겠습니까. 다만 천광을 다시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을 신이 마음 아파하는 바입니다."
성종은 왈칵 눈물을 쏟으면서 감동하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으면서도 사사로운 일을 입에 담지 않는 한명회의 충정이 아름다워서였다. '아들을 당부하리라 믿었거늘!' 그랬다. 한명회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인품이 변변치 못하여 학문은 고사하고 벼슬 또한 보잘것이 없었다. 성종은 한명회가 유언으로라도 자식(성종에게는 처남이 된다)의 일을 당부하기를 바랐고, 그것을 계기로 빙부가 세상을 뜨기 전에 사은을 베풀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성종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그 후에도 좌승지 한언을 한명회의 병상으로 여러 차례 보냈으나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한명회가 세상을 떠난 것은 11월 14일. 그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접한 성종은 내의를 한명회의 집으로 보내고 그를 돌보게 하였고, 승지를 보내서 다시 한 번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어 오게 했다. 이때 한명회는 스스로 명이 다 했음을 알고 시중을 드는 사람으로 하여금 관대를 몸에 가하게 하고, 간신히 입 속으로 말했다.
처음에 부지런하고 나중에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하소서
바로 이것이 한명회가 살아서 마지막으로 입에 담은 말이며, 또 한 그의 철학이자 계명이었다. 한명회는 사람을 많이 사귀었으되 언제나 돌보아 주는 일에 몰두했고 배신을 하지 않았다. 또 그는 옳다고 생각한 일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이루어 놓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한명회의 성품은 소박하고 솔직했으며 권세를 빙자하여 사사로운 욕심을 내지 않았다.
한명회는 청주한문에서도 명망이 자자한 한상질의 손자로 태어났다. 한상질은 고려 말에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조선왕조가 창업되자 태조 이성계의 주문사가 되어 명나라로 달려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지어 오기도 하였다. 그후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는 등 이성계의 신임이 돈독했던 인물이었다. 한명회의 아버지 한기는 벼슬이 겨우 감찰에 이르렀을 뿐이니 한명회가 세상에 태어날 때는 가문이 몰락해 있던 시절이었다. 한명회의 탄생(태종 15년, 1415)은 대단히 드라마틱하다. 그는 일곱달 만에 세상에 태어난 소위 '칠삭둥이'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몸이 제대로 여물지 않았다 하여 집안 식솔들이 내다 버리라고 했다. 인큐베이터가 없었던 시절이라 오죽했겠는가. 늙은 노복 한사람이 핏덩이를 솜뭉치에 싸서 돌보았는데 살과 뼈가 거기서 여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명회에 관한 기록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신기하게도 모두가 신비로운 것일 뿐, 그를 헐뜯거나 비방한 대목은 찾아 볼 수가 없다. 한명회의 배에 점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태성과 두성에 흡사하여 사람들은 신비하게 여겼다던가, 한명회가 밤길을 걸으면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를 등에 태우고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으며, 영통사의 노승이 한명회를 보고, "그대의 머리 위에 밝은 빛이 돌고 있으니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는 등 그를 언급한 글에는 반드시 적혀 있는 전설 같은 기록이라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후일 신숙주가 그에게 준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음도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결발동유독서
한명회와는 더벅머리 소년시절에 함께 뛰놀면서 책을 읽었다는 뜻이다. 후일 평생의 동반이자 사돈으로 맺어지는 신숙주와의 인연은 위의 구절에서 보듯 이미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비록 조실부모하여 가세가 빈한하였지만, 명문의 후예답게 한명회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유방선의 문하로 들어가면서였다. 세종대왕이 중사를 보내 자문을 구할 정도로 유방선의 학문은 높았으나, 그는 단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재야의 대석학이었다. 그 지조 높은 유방선이 늘 말하기를, 내 문하에서 크게 될 인물은 한명회, 권남, 사거정이다. 여기서도 한명회의 만만치 않은 인물됨이 잘 나타나 있다. 한명회와 권남의 사이를 흔히들 망형우의 사이라고 말한다. 망형우란 문자 그대로 용모나 지위 등을 문제삼지 않고 오직 참마음으로 사귀는 벗이란 뜻이다. 또 다른 말로는 관포지교라고도 할 것이지만, 실상 한명회와 권남은 혈연으로 묶어져 있었다. 권남의 여동생이 한명회의 아우인 한명진의 아내였던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지만 서로의 개성만은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다. '권남은 문장이요, 한명회는 경륜이다'라는 말은 남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스스로가 정한 것이기에 더욱 신빙성이 있으며, 그들의 삶 또한 그렇게 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 외면할 말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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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 바그(nouvelle vague)
프랑스어로 '새로운 물결'의 뜻. 1958년 경부터 프랑스에서 일기 시작한 영화 운동을 말한다. 처음으로 이 말을 사용한 사람은 여류 평론가 '프랑소와 지루'라고 한다. '사촌들' (클로드 샤브롤작). '멋대로 해라' (J·L·고다르), '어른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프랑소와 트뤄포) 등이 이 파의 대표적 영화 감독. 기성 감독의 작품이 아니고 영화 평론지 '카이에드 시네마'에 기고하고 있는 영화 평론가들의 감독 작품이 많다. 배우도 대부분이 신인들. 세트는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배경에는 실지 경치를 그대로 사용하는 일이 많다. 대기업적 영화 제작에 반기를 들며 아마추어적 정신이 넘쳐나고 즉흥적 연출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테마로서는 현대에 반항하며 살아가는 청년의 현실적 모습을 즐겨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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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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