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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23 호
단기 4340. 2. 02 (음력 12.15)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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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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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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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노아가 진정 지혜로웠다면 파리 두 마리는 찰싹 때려잡았어야 할 것 아닌가. / 헬렌 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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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十二章 (노자 - 도덕경 : 제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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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田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오색령인목맹 오음령인이롱 오미령인구상 치빙전렵령인심발광 난득지화령인행방 시이성인위복불위목 고거피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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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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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째 장
직역
다섯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다섯 맛은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한다. 말 타고 수렵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동을 어지럽게 한다. 이래서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눈. 감각 기관)을 버리고 이것(배)을 취한다.
해석
인간이 감각 기관에 몰입하면 자신의 실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감각의 충족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망친다. 외부에 대한 추구는 만족을 모른다. 한번 자극을 받아서 쾌락을 느꼈으면 그 자극을 뛰어넘는 자극이 아니면 다시 쾌락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더 큰 자극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길일뿐이다.
외부에 대한 추구는 결국 내부의 빈곤을 가져온다. 다이아몬드를 하나 구하기 위해서 평생 고생했다. 그래서 평생토록 즐기거나 배부르게 먹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죽기 전에 다이아몬드를 얻었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어떤 가치가 있는가. 이미 몸은 병들고 죽어 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그 다이아몬드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눈을 위해서 평생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눈에 좋은 음식을, 입에 맞는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그러한 음식일 수록 사람의 몸에 나쁜 경우가 있다.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도 더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한번 입맛을 들이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노자가 경계한 것이다.
이 부분은 노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읽지 말기를 바란다.
노자는 내면으로 돌아올 것을 말한다. 실질을 취하라. 그대의 본질을 바라보아라. 외부에 대한 추구는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한다. 자신의 본질에 대한 추구가 중요한 것이다.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가기 바란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문제를 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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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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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오색의 화려한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의 아름다운 소리는 사람의 귀를 멀게 하고, 오미의 좋은 맛은 사람의 입맛을 나쁘게 만들며, 말을 타고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발광케 하며, 손에 넣기 어려운 진귀한 물품은 사람으로 하여금 나쁜 길로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배를 소중히 할뿐 눈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배부름(내실)을 선택하는 것이다.]
주
오색: 청, 황, 적, 백, 흑의 다섯 가지의 색깔을 뜻함. 여기서는 호화스러운 옷감이나 화려한 그림 등을 의미. 오음: 궁(상성), 상(금성), 각(목성), 치(화성), 우(수성)의 다섯 음계를 말함. 이 장에서는 오음 계가 어우러져 이루어 낸 장려한 음악을 지칭하고 있음. 오미: 산(시고), 함(짜고), 신(맵고), 감(달고), 고(쓴)의 다섯 가지의 맛을 말함. 이 장에서는 갖은 양념으로 맛을 낸 최고급 요리를 지칭한 것임. 상: 여기서는 상(다칠 상)과 같은 뜻으로 입병이 나게 하다, 입맛을 망치게 한다, 미각을 둔화시키다 등의 의미로 쓰이고 있음. 치빙: 말을 달리는 것. 전렵: 사냥. 거피취차: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는 뜻임. 저것은 감각적 쾌락을 지칭한 것이며, 이것은 내실 즉 정신적 수양을 가리킨 말로 쾌락과 욕망에 대하여 제동을 걸 수 있는 수양 인의 자세를 말임.
해
이 장에서는 노자는 문명사회가 제공하고 있는 사치와 향락 등의 감각적 쾌락주의에 몰두하지 말 것을 교훈하고 있다. 평범한 보통 사람도 쾌락에 빠지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하물며 정치적으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군주가 쾌락에 몰입하게 되면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장려한 음악, 산해진미, 수렵의 즐거움 등은 군주의 총명을 흐리게 하는 감각적인 쾌락이다. 이런 것에 몰두하고 있는 군주 주변에는 아부하는 신하들이 인의 장막으로 군주와 백성간의 통로를 차단하게 된다. 자연히 군주는 민생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쾌락과 욕구 충족에만 매달리게 된다. 주지육림의 쾌락에 빠지다가 멸망한 임금이나 민가를 헐어 사냥터로 삼다가 패위당한 군주의 비극을 역사가는 증언하고 있다. 인간의 욕구 충족, 쾌락 추구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므로 내부적인 수양을 통해 미리 제동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성인은 배(내실)를 위하고 눈(감각적 쾌락)을 위하지 않는다는 말은 정신적 수양을 통한 소박하고 건전한 생활인의 자세를 강조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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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28 일본의 파워와 그 한계: 엔
1994년 5월 일본 대장성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의 1993년 말 현재 대외 순자산은 6,108억 달러 (490조 원)로, 1991년 이래 3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일본의 대외자산은 1982년 이래 단 한 차례도 줄지않고 수직으로 가파르게 증가해왔다. 엔고로 상징되는 미국의 환율공세 등에도 불구하고 아직 엔파워의 저력은 변함없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이다. 일본 정부와 민간기업이 해외에 갖고 있는 자산에서 부채를 뺀 대외 순자산은 민간기업의 직접투자와 대외중권투자의 증가로 전년도보다 18.9p나 급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대외자산의 8할 이상은 민간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한편 1993년 말 일본의 대외자산 총액은 2조 1,808억달러(1,745조원)로, 이역시 전년대비 7.1p가 증가됐다. 이 가운데 투자기간 1년 이상의 장기자산은 1조 4,129억 달러, 단기자산은 7,118억 달러를 차지했다. 서방선진 7개국 가운데 일본 다음으로 대외순자산이 많은 나라는 독일로, 2,576억 달러를 차지해 일본의 40p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나머지 국가 중 순자산국은 375억 달러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영국뿐이며, 5,213억 달러의 순부채로 고민하는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2,379억 달러), 이탈리아(1,241억 달러), 프랑스(664억 달러)가 모두 순부채국이다. 더욱이 1990년에 일본을 제치고 제 1위를 차지했던 독일의 대외 순자산이 1991년 통일의 여파로 급속히 줄어들고 있어, 당분간 G7 중 감히 일본의 독주를 막을 나라는 없을 전망이다. 그러나 국제경제 무대에서 영원한 승자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일본 최대 경제전문지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얼마전 미쓰비시 은행의 고위 외환딜러의 말을 인용해 일본이 직면한 금융위기를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1970년대는 오일 머니, 1980년대는 저팬 머니 시대였던 데 반해, 1990년대는 아메리칸 머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소로스 머니 시대가 됐다. 그런데 이 아메리칸 머니 시개는 과거와는 결정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 하나는, 과거에는 중동 산유국이든 일본이든 모두가 무역흑자국이었던 데 반해 현재의 미국은 재정수지와 무역수지 모두가 천문학적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지금까지 총누적액이 4조 5천억 달러에 달할 만큼 살인적이다. 요컨대 아메리칸 머니는 적자국인 미국을 회전무대로 부단히 유출입을 거듭하는 까닭에 항상 세계기축통화(달러화)의 불안요인을 내포하고 것이다. 다른하나는, 현재의 아메리칸 머니가 금융파생상품 등으로 중무장한 투기성이 강한 자금이라는 점이다. 과거 오일 머니나 제팬 머니가 기본적으로 장기투자였던 데 반해, 아메리칸 머니는 환차익을 노리며 전세계시장을 부단히 누비고 있다. 세계금융시장이 이렇게 위태위태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일본금융시장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논리화에 뛰어난 일본인다운 논리정연한 상황분석이다. 실제로 아메리칸 머니의 환투기가 본격화되면서, 1980년대 중반 한때 전 세계 10대 상위은행 중 9개를 차지할 정도로 욱일승천하던 일본 금융계는 최근 들어 세계최대 수신고를 자랑하는 다이이치 간교 은행을 비롯해 모든 금융기관이 예외없이 막대한 환손실을 입으며 크게 휘청대고 있다. 한때 도쿄 증시에 모여들었던 외국계 자본은 일제히 런던과 뉴욕, 싱가포르로 빠져 나가고 있으며, 1980년대 말 월 스트리트 등 세계금융계 금융기관들은 겨우 일본상장주나 만질 정도로 사실상 개점 휴업상태에 놓여 있다. '조만간 엔화를 달러화 대신 세계기축통화로 만들겠다'고 큰소리치던 일본의 자신감은 지금 그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다. 특히 미국이 1994년부터 무역적자 해소 차원에서 집요하게 가하고 있는 엔고 압력으로 일본 금융권 전체가 크게 골병들고 있다. 엔고 파동을 틈탄 미국 환투기 전문가들의 파상 공세에 대처할 전문인력이 거의 전무한 때문이다. 게다가, 그나마 극소수 존재하던 일본인 환달러들마저 연봉제 등 인센티브를 앞세운 외국계 금융기관에게 모조리 뺏겨버린 까닭에 어려움은 한층 심화되고 있다. 일본인들로 부터 '검은 눈의 외국인'이라고 비판받는 외국계 금융기관 소속 일본인 딜러는 도쿄 외환시장에만 삼사백 명 존재하는데 이들은 거액의 환차익을 챙겨 국외로 반출하고 있다. 이는 제조업에만 신경썼을뿐, 각종 규제 및 보호장치로 온실 안에서 금융업을 키워온 '제조업 만능국가'의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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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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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1장 선각의 인맥
근대적인 금석고증학의 선구자 추사 김정희
1928년에 최초의 한국 서화가 인명사전인 위창 오세창의 편저 (근역서화징)이 간행되었을 때 육당 최남선은 신문에 기고한 서평의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선이 세계에 있어 오랜 문화국이요, 가장 의의 있는 문화적 일민방임은 이제 새삼스레 들출 것 아니어니와 예술 업적도 타국에 떨어지지 아니함을 본다. 다만 타에 비하여 조선은 그러함을 아는 이가 적고, 또 누구든지 그러함을 환히 알도록 작품을 많이 또 고루 전존하지 못하고, 또 작가와 작풍 및 그 계통·영향 등에 관한 기록·연구가 행하지 아니하여 예술적인 외관이 번듯하지 못할 따름이다. 오늘날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어의에는 당연히 조선예술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음으로 인함이다." 이어서 육당은 위창의 (근역서화징) 편저와 그의 수십 년의 연구생활이야말로 "조선의 예술적 기업을 호지함이며 가장 암혹한 운중에서 가장 섬삭한 전광" 이라고 감격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다. 사실 위창 오세창은 이 땅의 문화유산, 곧 민족문화재에 대한 최초의 근대적인 연구가였고 수집가였다. 3·1운동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항일투쟁의 선봉에도 섰던 위창은 서예와 서화감식안에서도 당대의 제일인자였다. 위창의 선각적인 문화재 연구 업적과 공헌은 오늘의 고고학 및 미술사학계의 선구였다. 그러나 문화재에 대한 근대적인 인식과 새로운 가치관은 18세기 이후 중국에서 전파된 새로운 과학적 학풍인 고증학의 실학사상이 싹틀 때에 여명기를 가졌다. 이 여명기의 최대의 거인은 말할 것도 없이 추사 김정희였다. 24세 때(1809년)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다녀온 후로 추사는 '실사구시' 의 실학사상으로 근대적인 금석고증학의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처음으로 한국 금석학의 체계를 세운 연구학자였다. 추사의 금석학 연구의 가장 전설적인 기록은 서울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서 그때까지 아무도 정확히 그 역사와 내용을 알지 못했던 이끼 낀 돌비석의 비문각자를 판독·고증한 일이다. 순조 16년(1816년) 7월 어느날의 일이었다. 금석학과 고증학에 한창 심취하고 있던 31세의 추사는 김경연이란 친구와 비봉 꼭대기의 수수께끼의 옛 비석을 조사·판독하기 위하여 가파른 암벽을 기어 올라갔다. 그들은 조선 한양 도읍 때의 유명한 배후인물인 무학대사와 관련이 있다는 막연한 전설의 비문을 이끼 속으로 짚어 나가다가 깜짝 놀랐다. 비문내용이 무학대사는커녕 1천 수백 년 전 신라 진흥왕(6세기 중엽)의 순수비임을 선명하게 밝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추사 자신도 예기치 못했던 감격적인 발견이었다. 추사가 김경연과 더불어 북한산 승가사에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비봉의 정상까지 올라가서 고색 짙고 마멸이 심한 돌비석의 비문을 처음으로 판독·고증할 때까지 그것이 (삼국사기)에도 빠져 있는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기념비임을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보다도 오히려 엉뚱한 전설이 비석의 역사적 가치와 정체를 흐려놓고 있었다. 가령 1750년께에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는 이런 전설을 적고 있다. "무학대사가 이태조를 도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자 백운대로부터 산줄기를 따라 내려오다가 이 비봉에 이르렀더니, '무학은 이곳을 잘못 찾아왔다' 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어 발길을 되돌렸다." 추사는 비봉의 비문을 탁본해 가지고 내려와서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의 내용을 더욱 신중히 고증하였다. 그는 비문의 '남천군주' 라는 네 글자를 주목했다. 그리고 결론짓기를, (삼국사기)의 기록인 "진흥왕 29년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두다" 로 미루어 진흥왕 29년(568년) 이후에 세워진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 결론은 오늘의 학자들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문화재대관) 국보편 해설, 문공부 발행). 한편 추사가 비봉의 비를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로 고증했다는 사실에 누구보다도 놀라움과 반가움을 표시한 사람은 운석 조인영이었다. 뒷날 영의정을 지내는 운석은 그해에 마침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그곳의 금석학 연구가인 유희해와 친교를 맺게 되었고, 귀국하면서 조선의 금석문 탁본을 수집하여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던 터라 추사가 새로 발견했다는 신라 비문은 그의 청나라인 친구를 위해 다시 없는 선물감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다음해(1817년) 6월 8일, 추사는 운석을 데리고 두번째로 비봉에 올라가서 그들이 실력껏 읽을 수 있었던 68자를 최후로 확인하였다. 그런 후에 그들은 그 비문 탁본을 즉시 중국의 유희해에게 보내주었다. 그 외에도 운석은 태고사의 '원증국사비' (고려말) 등 97종의 금석문 탁본을 마련하여 보내줌으로써 유는 청나라에 가만히 앉아서 (해동금석원)과 (해동금석존고)라는 조선의 금석문 책을 2권씩이나 펴낼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추사가 발견한 북한산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새로운 귀중한 금석문사료는 국내가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청나라에서 꾸며진 책 속에 먼저 수록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비봉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판독한 추사는 또 그러한 사실에 대해 큰 자부심과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비석측면에 굳이 새겨놓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각자가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는 병자년(1816년) 7월에 김정희·김경연이 와서 읽었다." "정축년(1817년) 6월 8일에는 김정희·조인영 같이 와서 읽을 수 있는 68자를 심정했다."
오늘 같으면 문화재의 현상 변경으로 법에 저촉되는 행위이다. 전의 고구려와 백제 땅이었던 곳을 점령하여 신라의 국토를 크게 확장시킨 진흥왕은 재위 29년(568년)에 새로운 국경을 순방하며 국위를 선양했다. 그리고 그때의 행차를 기념하여 여러 곳에 '순수정계비'를 세웠다. 추사가 북한산 비봉에서 발견한 것은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이 '진흥왕 정계비' 는 북한 지역인 함경남도의 황초령과 마운령의 두 곳과 경남 창녕 것을 합해 모두 네 곳에서 발견되었고, 창녕 것은 지금 국보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창녕 것은 맨 먼저 세워진 것으로 건립연대가 서기 561년(진흥왕22년)으로 비문에 나타나 있다. 추사 자신은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를 처음으로 발견한 후, (동국문헌비고)에 이미 (해동집고록)을 빌려 기록되어 있는 황초령비의 내용을 참작함으로써 그의 북한산비의 고증에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황초령비를 직접 볼 기회는 없었고, 다만 간접으로만 그 내용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1852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추사는 그와 친숙한 사이였던 함경관찰사 윤정현의 도움으로 일찍부터 알려져 있던 황초령의 진흥왕 정계비 탁본을 입수하여 북한산 것과 대조하며 자신의 눈으로 또 한번 고증·판독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학문적인 기쁨과 고증의 감동을 또다시 기념하기 위하여 '진흥북수고경' 이라는 여섯 자의 현판글씨를 자신의 독창적인 '추사체'로 자필하여 함경도로 보내주었다. 그후 이 현판은 황초령비를 보호하기 위해 관찰사가 지은 비각에 걸려 있었고, 현재 우리는 그 목각현판의 탁본을 볼 수 있다. 현판뿐 아니라 추사는 그에게 탁본을 보내준 관찰사 윤정현을 대신하여 황초령비의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재인식시키는 새로운 비문을 짓고, 또 스스로 써서 보냄으로써 유적의 해설비로서 옆에 세우게 하였다. 비문에는 '윤정현 서' 라고 되어 있으나 그 자체가 추사의 글씨라고 금석학자 임창순 선생은 감정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이 신라 진흥왕비는 동북 정계로 구지는 황초령인데 돌이 위아래로 떨어져 나가고 글자가 185자만이 남았다. 지금 중령으로 옮겨 비각으로 덮고, 암벽에 끼워놓았다. 황초령과 멀지 않아 경계에 큰 차는 없다. 옛날 탁본을 가지고 보면 첫줄 '왕' 자 아래에 '순수관경간석명기' 의 글자가 있다. 아울러 기록하여 없어진 것을 보충한다." 황초령비를 위해 특별히 현판과 새로운 비문을 쓴 직후, 추사는 근대 한국 최초의 고고학적 연구논문인 (금석과안록)을 남겼다. 곧 그가 직접 발견한 북한산비와 탁본으로 확인한 황초령비에 대한 고증과 해설을 기록한 필사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다. (금석과안록)에서 추사가 시도한 과학적 논증은, 1) '진흥'은 시호가 아니라 생존시에 사용한 칭호이며, 2) (삼국사기)는 진흥왕의 북순 사실을 빠뜨렸고, 신라의 국경을 안변까지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3) 진흥왕은 독자적인 연호를 썼고, '짐'·'제왕' 이란 말을 쓴 것은 그때 신라가 독립국으로서의 체제를 확고히 갖추고 있었음을 뜻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 추사는 비문에 나타나는 신라의 지명·관명·인명 등을 분석했다.
1786년에 판서의 아들로 태어나서 1856년에 71세로 타계한 추사 김정희는 일찍이 청나라에 갔을 때, 당시 북경의 유명한 석학이던 완과 옹방강을 가까이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이후 추사는 그들과 계속 친교를 맺으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의 타고난 총명과 끊임없는 탐구는 이윽고 경학·사학·고증학·서예·금석학에 걸쳐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깊고 넓은 학문과 예술의 경지를 개척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암행어사와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나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전후 10년간의 귀양살이-제주도와 북청에서-를 당하는 파란 많은 생애를 보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속에서 그의 학문과 예술은 찬연하게 연마되었다. 그의 글씨는 대단히 창조적이고 뛰어난 명필로서 한국미술사에 빛나고 있고, 또한 서화의 감정과 평론에서도 그는 당대의 거벽이었다. 따라서 그의 학문과 예술사상은 그의 뒤를 잇는 세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대대로 청나라를 내왕하던 역관 집안에 태어나 역시 역관이 되었던 역매 오경석은 추사보다 45세나 아래였으나 어려서부터 추사의 학문과 예술의 경지를 흠모한 문인이었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23세 때(1853년)부터는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저쪽의 새로운 학문사상과 서양의 문물을 접촉하였다. 그렇지만 청나라를 내왕하기 전부터 가졌던 금석학에 대한 관심이나 시·서·화에 대한 각별한 취미와 연구는 당대의 거성인 추사와 그의 직계 제자들에 의해 자극과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대의 역관 집안이어서 청나라의 진귀한 서화를 포함하여 국내외의 미술품이 집에 많았다는 가정환경이 역매를 당시 서울 장안의 대표적인 교양인사들과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 행운의 조건이었다. 그가 추사의 가장 가까운 제자이며 친구였던 우선 이상적을 진작부터 접촉하면서 많은 것을 가르쳐 받고 또 그를 통해 추사의 세계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이었던 것은, 그러한 가정적인 조건이 작용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역매보다 27세나 위인 우선은 당시 추사 다음 가는 안목과 교양을 지닌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매가 청나라에 가기 훨씬 전에 이미 수차례에 걸쳐 그곳을 다녀왔고, 그때마다 그가 수집 및 입수할 수 있었던 중국의 금석문과 서화들을 추사와 더불어 감상하고 고증하는 기쁨을 나누곤 했었다. 그때의 여러 가지 일화들을 우선은 그의 (은송당집)(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풍부하게 기록하여 남기고 있다. 추사는 멀리 제주도에 유배당해 있을 때 우선을 생각하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렸는데 ,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유명한 '세한도' 가 바로 그것이다. 고고한 품격으로 문기 짙은 노송과 초당을 그리면서 지기지우를 생각한 추사의 '세한도' 를 서울에서 전해 받은 우선은 감동하였고, 1844년에 청나라에 가는 길에 그것을 가지고 가서 일찍부터 추사를 알고 있던 그곳 명가들에게 보여 절찬을 받았다고 전한다. 우선은 추사보다 18세 아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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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4장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아는가
6. 감성과 오성과 이성
철학에서 앎의 문제를 다루는 분야를 인식론이라고 한다. 인식론에서는 앎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앎이 성립하는가를 밝히려고 한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인식론에는 두 가지 커다란 흐름이 있으니 하나는 감각 경험에 의하여 앎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경험론이고 또 하는 이성적 자아에 의하여 앎이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합리론이다. 그러나 이들 양자의 극단적인 입장을 파악하여 종합적이고도 통일적인 앎의 이론을 전개하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었다. 나는 이 절에서 앎의 문제에 있어서 경험론과 합리론을 통일하는 칸트의 인식론을 비교적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철학에 낯선 사람들에게 매우 거리가 먼 것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철학을 비롯하여 학문 일반에 끼친 공로는 지대하다. 그것은 그만큼 그의 사상이 내면적으로 심오하고 풍부하다는 증거이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앎, 가치, 아름다움으로 구성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앎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앎의 문제를 기초로 하여 가치 및 아름다움의 문제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칸트의 앎의 문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낱말들은 감성과 오성과 이성이다. 감성은 감각의 성질로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오성이라는 말은 일상언어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오성은 이해력 내지는 분별력이라는 말로 대치되어야 이해하기 쉽다. 서구 사상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상당수가 일본 사람들이 번역한 후에 일제하에 우리들에게 그대로 소개되었으므로, 우리 스스로가 번역하여 우리 몸에 배인 말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색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이해하기 곤란한 것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성이라는 개념이다. 여하튼 감성과 오성 및 이성이라는 개념을 보더라도, 우선 감성은 경험론 쪽에서 앎의 성립 근거로 보는 개념이고 이성은 합리론 쪽에서 앎의 성립 근거로 보는 개념이므로, 감성과 오성과 이성의 개념을 종합적으로 내세우는 칸트가 경험론과 합리론의 앎의 이론을 통일시키려는 시도를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성이 부여하는 것은 지각이고 오성이 부여하는 것은 판단이다. 판단에 의해서 비로소 개념이 성립한다. 지각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은 표상이다. 앞에서 설명한 이론은 쉽사리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므로 간단한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지금 내 앞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고 하자. 나는 소나무를 자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내 앞에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을 나는 눈으로 보게 된다. 곧 감성으로 그 대상을 일단 파악한다. 이때 마치 겨울에대상의 모습이 비추어지는 것과 같이 나에게 상이 생긴다. 내가 감각적 성질에 의해서 지각할 때 생기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표상이다. 아직 내가 그 대상을 "소나무"라고 개념화하지 않고 있는 상태의 상이 표상이다. 이것은 감각 경험에 의해서 앎이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경험론의 입장과 일치하지만 앎의 전체적인 문제에서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경험론적인 앎의 이론을 보충하면서 확장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감각 성질이 상대적인 감각 경험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형식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감성은 이중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 하나는 감각 경험이며 또 하나는 감성형식이다. 소나무를 볼 때 직접 소나무를 대하는 것은 시각이라고 하는 감각 경험과 동시에 감성 형식이다. 대상에 대한 우리들의 상은, 대상이 얼마만한 크기이며 또한 얼마만한 속도로 움직이는가를 우리들 내면의 고유한 틀로 움켜잡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소나무에 대한 상은 소나무의 크기가 얼마만한 하다는 것이 틀에 잡힐 때 그리고 그것이 정지해 있는지 아니면 얼마만한 속도로 움직이는지가 우리들의 틀에 잡힐 때 비로소 성립한다. 개미나 고양이도 감각 경험을 하지만 그들에게는 감성 형식이 없으므로 그들은 대상을 본능적으로 대하고 지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감성 형식은 인간의 감성에 고유한 틀이다. 새나 물고기를 잡을 때 우리들은 그물을 사용한다. 감성 형식은 감성의 그물로서 그것은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다. 소나무의 크기는 공간이라는 틀에 의해서 그리고 소나무의 움직임은 시간이라는 틀에 의해서 붙잡혀서 결국 소나무의 상이 맺어진다. 경험론에서는 감각 경험에 의해서 인상이 생긴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다른 동물이나 인간이나 모두 인상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인간만이 대상에 대한 인상을 가진다면 다른 동물의 감각 성질과 인간의 감각 성질에는 차이가 있음이 밝혀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차이를 밝힌 점에 있어서 칸트는 경험론을 보완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감성 형식만을 중심으로 지각이 성립하는 것을 해명하지 않고 감각 경험과 감성 형식의 결합에 의해서 지각의 표상이 성립한다는 것을 밝힌 점에서는 합리론을 보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칸트에게 있어서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관념이 경험에서 생기지 않는, 인간에게 본래부터 고유한 지각의 순수한 형식으로서 그것들은 지각으로부터 추상된 것이 아니다. 감성이란 시간이나 공간 아니면 시,공간에 주어진 개별적 대상을 움켜잡는 능력이다. 그리고 또한 감성은 공간과 시간 자체를 붙잡는 능력이므로 공간과 시간은 순수한 감성 형식이라고 일컬어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감성이라는 용어의 뜻을 그것도 칸트의 인식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오성이란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감성에 의해서 어떤 대상에 관한 상이 생기면 우리들의 분별력이 내지 이해력은 그 상을 "한 그루 소나무"라는 개념으로 만든다. 감각적으로 주어진 상을 특정한 의식의 틀로서 확정시키는 능력을 우리는 오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판단의 논리적 형식에 관한 전통적인 분류와 칸트의 차이를 논의하지 않은 채 나는 여기에서 칸트 자신의 분류를 규정하고 그것에 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칸트에게 그러한 분류를 궁극적으로 여겨졌으며 그는 인식론의 피안에 놓여 있는 사고 영역에서 예컨대 자신의 도덕 철학, 목적은 철학 그리고 종교 철학에서까지도 그것을 사용하였다. (1) 양이라고 일컬어진 것에 따르면 모든 판단은 형식상 "모든 사람은 죽는다"에서 처럼 전칭 적이거나 "일부의 사람은 죽는다"에서 처럼 특징적이거나 아니면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에서 처럼 단칭 적이다. (2) 질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따르면 모든 판단은 예컨대 "소크라테스가 죽는 것은 사실은 아니다."처럼 부정적이거나 또는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처럼 제한적(무한적)이다. 부정 판단과 제한 판단 사이의 구분은 또다른 구분에 의해서, 말하자면 긍정적인 개념과 그 보어, 예컨대 "죽는다", "죽지 않는다"와 "초록이다", "초록이 아니다"의 구분에 의해서 설명된다. 부정 판단에 있어서 우리들은 어떤 사물이나 또는 어떤 사물의 계층이 특정한 긍정적 개념에 속하는 것을 부정하며, 여기에 비해서 제한 판단에서 우리들은 어떤 사물이나 또는 어떤 사물의 계층이 그러한 개념의 보어에 속하는 것을 긍정한다. 형식 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방법의 판단은 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3)관계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따르면, 모든 판단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처럼 정언적이거나 또는 "만일 완전한 정의가 존재한다면 지속적으로 사악한 자는 벌을 받을 것이다''처럼 가언적이거나, 아니면 "세계는 맹목적인 우연에 의해서이거나 또는내적 필연성에 의해서이거나 아니면 외적 원인에 의해서 존재한다"처럼 선언적이다. 정언판단이 아니라 가언적 및 선언적 판단에서 우리는 명제들 관의 관계를 주장한다. 선언판단에서 우리들은,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명제들은 상호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며 또한 모든 가능성을 공동으로 소멸시킨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그의 논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믿는 일부 논리학자들의 견해에 분명히 반대한다. 이들 논리학자들은 "가언 판단 및 선언 판단은 정언 판단에 관한 상이한 기만일 뿐이고 따라서 예외없이 정언 판단은 환원 가능하다."칸트가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 사이의 기본적인 구분에서 그와 같은 환원의 불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4) 양태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따르면 모든 판단은 형식상 개연적, 논리적으로 가능적이거나 또는 단정적, 즉 참다웁거나 또는 옳은 것으로 주장될 수 있다. 아니면 그것은 필연적이다. 즉 그것은 필연적이거나 또는 선험적인 근거에서 주장될 수 있다. 달이 초록빛 치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그것은 예컨대 연역추리의 본질을 설명하고 이 본질을 어떤 사례의 전제로 사용하는 논리학 교사에 의해서 생각될 수 있다. 쇠가 자석의 성질을 가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옳게 주장될 수 있다. 2+2=4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것은 선험인 근거에서 주장될 수 있다. 한 그루의 소나무를 볼 때 하나라고 하는 것은 단칭적이다. 한 그루의 소나무라고 하는 말은 "한 그루의 소나무"라는 것은 "이것은 한 그루의 소나무이다"로 고칠 수 있으므로 정언적이다.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는 것은 참다웁게 주장되므로 단정적이다. 칸트에 의하면 감성이 형식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성도 형식을 가진다. 감성 형식인 시간과 공간은 수동적인 틀로서 대상이 틀에 붙잡히는 데 비하여 오성형식은 능동적인 틀로서 대상이 감성형식에 의해서 생긴 상을 자발적으로 붙잡는다. 오성의 틀을 범주라고 부르며 칸트의 경우 범주는 다음과 같은 12가지가 있다. 단일성,수다성,전체성,실재,부정,제한,실체와 우연, 원인과 결과, 상호작용. 감성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이 있으며 오성에는 12가지의 틀이 있다. 이 틀들은 경험과는 상관없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앎이란 결국 #1대상 #2감각 #3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 형식 #4 12가지 오성의 틀인 범주에 의해서 성립한다. "한 그루의 소나무"를 놓고 볼 때 이"한 그루의 소나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생길 경우 우리는 "한 그루의 소나무"를 알게 되는데 이러한 앎은 결국 어떤 대상과 우리의 눈과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및 능동적인 오성 형식(이해력의 형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들이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말할 때의이성은 사고하는 능력을 일컫는다. 이성이란 이념을 사용하는 능력이다. 칸트에 의하면 이념이란 신이나 자유 및 영혼 불멸을 가리킨다. 지각에서 추상되지도 않았으며 지각에 적용 가능하지도 않은 종류의 일반적인 개념을 일컬어 이념이라고 한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대상들은 지각에 의해서 표상이 만들어지고 이 표상은 능동적인 오성 형식(범주)에 의해서 개념으로 성립됨으로써 우리의 앎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오성도 지각에 관계한다. 그러나 지각과는 관계없는 개념들이 있다. 신, 자유 및 영혼 불멸의 개념은 감성적인 지각의 대상이나 오성 대상이 될 수 없다. 또한 범주로 파악할 수도 없다. 오성의 한계 안에서는 신, 자유 및 영혼 불멸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으므로 스스로 모순에 빠진다. 따라서 신, 자유 그리고 영혼 불멸은 오성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 자유 및 영혼 불멸은 이론적인 영역에서는 해결될 수 없고 오히려 실천의 영역에서 가치를 지니다. 이론의 영역은 고유하게 특정한 범위를 가지고 있음에 반하여 이론 영역을 넘어서서 이론 영역에 의미를 부여하고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 실천 영역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자연 과학자도 그리고 자유 분방한 예술가도 교회에 함께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오성을 이론 이성이라고 한다면 이념을 다루는 이성은 실천 이성에서만 가치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칸트에 의하면 실천 이성은 이론 이성을 능가하며 동시에 초월한다. 물론 칸트는 이성을 두 가지 의미에서 사용한다. #1넓은 의미에서의 이성은 감성, 오성 및 이념을 사용하는 이성 모두를 가리킨다. #2좁은 의미의 이성은 이념을 사용하는 이성만을 말한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칸트의 앎의 문제를 대체적으로 살피면서 그의 감성, 오성 및 이성이라는 개념 어떤 의미에서 쓰여지고 있는 가를 검토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칸트가 #1앎의 문제에 있어서 경험론과 합리론의 이론을 종합, 통일하고 있으며 #2앎의 이론은 필연적으로 행동의 문제와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엄밀한 수학 계산을 하더라도 우리들은 일정한 사회적 예술적 종교적 또는 정치적인 행동 안에서 그러한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앎의 문제는 가치 문제와 직결되며, 비록 앎은 감성과 오성의 한계에서 결정될지라도 앎의 전체적인 방향을 이끌어주는 것은 가치를 동반하는 행동이다. 여기에서는 칸트의 앎의 이론에 대한 비판은 보류하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이 곳의 목적은 앎의 이론에 관한 고전적인 하나의 예를 살펴봄으로써 감성과 오성과 이성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를 음미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개념이 철학함이라는 작업에 직면하게 되면 그것은 자연적으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개념은 삶의 전체성에서 고찰되기 때문이다. 안개 자욱히 낀 새벽길을 산책하노라면 주변의모든 것은 구별하기 어려우리 만치 희미하다. 그러나 차차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비치는 동적인 작업이다. 철학함의 길을 따라갈 때 감성, 오성 및 이성의 개념이 앎의 전체적인 문제에서 어떻게 전개되며 또한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점차로 밝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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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망태
본뜻 : '고주'는 술을 거르는 틀을 말하는데, 여기에 망태를 올려 놓으면 망태에 술기운이 배어 들어 망태 전체에서 고약한 술냄새가 난다. 이렇듯 고주 위에 올려놓은 망태처럼 잔뜩 술에 절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고주망태다.
바뀐 뜻 :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곤죽
본뜻 : 곤죽은 본래 곯아서 썩은 죽처럼 상하거나 풀어진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사람이나 물건이 엉망이 되어 갈피를 잡기 어려운 상태거나, 혹은 몸이 상하거나 늘어져서 까라진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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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3.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기원전 2-1세기에 소아시아 흑해 연안에 폰투스라는 왕국이 있었다. 그곳의 지배자 미트리다테스왕은 당시의 로마에게는 골치아픈 존재였다. 대부분의 왕국들은 로마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미트리다테스는 강력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라와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의해 미트리다테스의 군대 역시 많이 약화되더니, 급기야 자기 아들 파르케나스의 반란까지 겹쳐 좌절감에 휩싸인 그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 부왕에게서 왕권을 빼앗은 파르케나스는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음으로써 얼마 동안 로마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에 내전의 불길이 거세게 일자, 파르케나스는 독자 노선을 채택하면서 영토확장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로마가 이를 좌시할 리가 없었다. 특히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던 카이사르는 파르케나스를 혼내 줄 기회를 찾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일차적으로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일에 몰두했다. 질풍같이 쳐들어오는 카이사르의 군대로 수도 로마는 대혼란에 빠졌다. 원로원이 기대를 걸었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 군대의 기세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다가 자기편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브룬디시움을 거쳐 바다 건너 그리스로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우선 에스파니아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공격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아드리아해를 건너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폼페이우스에게도 도움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동방에서 보호관계를 맺었던 왕들과 그에게 개인적으로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 직접 오거나 군대를 보내 주었기 때문에 실제 군대규모는 폼페이우스쪽이 더 강했다. 그러나 그 군대는 아무래도 혼성군에다 미숙한 병사가 많아서 카이사르의 정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폼페이우스 역시 로마에서 이미 정치 생활에 맛을 들이고 오랫동안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더 컸다. 게다가 그가 대동한 많은 원로원 의원들은 전쟁터에서까지 파벌싸움을 일삼아 전투에는 방해가 되기만 했다. 결국 그리스 북부 텟살리아의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 군대는 카이사르 군대에 대패당하고 말았다. 몇몇 부하 장군들과 함께 겨우 목숨을 건진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탈출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보호를 요청했다. 이집트 쪽에서 보면 폼페이우스를 받아들이는 것이 적지 않게 부담스런 일이었다. 왜냐하면 카이사르가 이미 로마에서 대권을 장악한 상황이었고, 폼페이우스는 이제 세력을 상실한 패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정을 생각하면 그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이집트 왕은 그를 환영하는 것처럼 마중 나갔다가 배 위에서 그를 살해했다. 기원전 48년의 일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살해당한 다음날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에게 이집트 왕은 의기양양하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쳤다. 그러나 이집트 쪽의 기대와는 달리 카이사르는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집트에서 포로상태에 있었던 폼페이우스의 측근들을 모두 석방시켜 자기 세력으로 흡수했다. 희곡으로 소설로 또 영화로 우리에게 익숙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여왕과의 사랑이 싹튼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처럼 폼페이우스를 마지막으로 정적들이 제거되자 카이사르는 여세를 몰아 군대를 소아시아로 이끌고 나가 파르케나스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소아시아 젤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파르케나스는 전사하고 로마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여기에서 카이사르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문구를 담은 편지를 로마에 있는 친구에게 보냈다. 이 말은 카이사르의 정예부대가 얼마나 막강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또한 단 세 마디로써 전쟁의 승리를 표현한 대문장가 카이사르의 진가를 다시 한번 알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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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배주
8∼10월이 제철. 배로 술을 담그려면 끝물보다는 먼저 출하되는것이 좋다. 만져 보아 단단한 것을 구입한다
재료 - 배 1kg, 설탕 400g, 소주 1800cc
담그기
1. 배는 깨끗이 씻어 껍질을 벗기고 반갈라 속의 단단한 심부분을 도려낸후 적당한 크기로 썬다. 2. 용기에 배와 설탕, 소주를 담아 밀봉해 2개월 정도 서늘한 곳에 보관한다. 3. 술에 연한 갈색이 들면 배는 건지고 맑은 술만 주둥이가 좁은 병에 옮긴다.
배는 사과처럼 씨와 껍질을 모두 이용해도 된다. 껍질때 썰어서 용기에 담는다. 오래 숙성시킬수록 맛있는 배주는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 탄산음료와 토닉 등과 섞어 마셔도 좋다.
당류는 다량 함유되어 있지만 비타민 C등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칼륨을 비롯하여 수분은 많이 때문에 생리대사, 이뇨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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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지도자의 자질이 미래를 열고
장영실과 흠경각
세종시대를 빛낸 또 한 사람의 걸출한 과학자는 대호군 장영실일 것이다. 그는 동래관노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공천의 신분일 뿐, 실상은 다섯 형제가 모두가 전서의 벼슬을 지낸 반가(본관: 아산)의 핏줄을 이어받고 있었다. 소년 장영실은 이순지에게 발탁되어 세종대왕에게 천거되는 행운을 입었고, 스승의 지도를 받으면서는 이론과 실제를 겸한 당대제일의 과학자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장영실이 발명한 천문기기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우리가 항용 해시계라고 부르는 '앙부일구'의 정확도는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세종께서는 그것을 사람들의 내왕이 많은 혜정고(지금의 삼각동에 있었다.)와 종묘의 앞에 설치하게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각을 헤아릴 수 있게 하였는데 그로부터4년 후인 세종 20년 에 이르러 마침내 장영실은 그가 평생을 염원하였던 거대하면서도 신묘한 대형 시계를 완성하였다. 그 시계의 형상은 이러했다.
전각의 한복판에는 일곱 자 높이의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물먹인 종이를 오려붙여 만든 것이었지만, 어찌나 정교하고 세밀한지 기슭마다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산 안에 설치된 '옥루전기'가 작동하면서 물을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오색 구름이 서려 있는 울창한 산마루 위에는 둥근 해가 떠 있었는데, 그 해는 하루에 한 번씩 돌아서 낮에는 산 밖으로 나타나고, 밤에는 산속으로 들어가면, 그 운행하는 법칙도 모두가 천행과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또 극의 멀고 가까운 거리와 돋고 지는 분수가 각각 절기에 따라 다르게 되어 있다. 해 밑에는 옥으로 만든 여자 인형 넷이 구름을 탄 형상으로 서 있었고 그녀들의 손에는 금목탁이 쥐어져 있다. 그들의 위치는 동, 서, 남, 북 네 방향에 각각 서 있어서 인시, 묘시, 진시가 되면 동쪽에 있는 여자 인형이 목탁을 두들겼고 사시, 오시, 미시가 되면 남쪽에 서 있는 여자 인형이 목탁을 쳤다. 서쪽과 북쪽의 인형들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제시간이 오면 목탁을 두들기도록 되어 있다. 또 여자 인형 바로 곁에는 네 가지 귀형을 만들어 배치하였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방향을 나타내는 일이다. 즉 인시가 되면 청룡신이 북쪽으로 향하고, 사시가 되면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동시에 주작신이 동쪽으로 향하는데, 그 방식은 청룡신이 행하는 것과 같다. 산기슭 남쪽에는 높은 축대가 있어 사간을 맡은 인형 하나가 붉은 비단옷 차림으로 산을 등지고 서 있는데 그 앞에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인형 무사 세 사람이 손에 종과 방망이, 북과 북채, 징과 채를 들고 서 있다가, 시간이 되면 시간을 맡은 인형이 종을 치고, 경이 되면 경을 맡은 인형이 북을 치고, 점이 되면 점을 맡은 인형이 징을 치도록 되어 있다. 그때 비단 옷을 입은 인형도 각 시간, 경 점이 되면 방향을 틀어 무사 인형들에게 시각을 알리라고 지시를 하게 되어 있다. 또 산밑 평지에는 쥐(자), 소(축), 범(인), 토끼(묘), 용(진), 뱀(사), 말(오), 양(미), 원숭이(신), 닭(유), 개(술), 돼지(해) 등 12간지를 나타내는 짐승의 형상으로 조각된 방위신들이 엎드려 있고 그 뒤에는 각각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은 평시에는 닫혀 있으나 자시가 되면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인형 옥녀가 지시패를 가지고 나옴과 동시에 쥐 형상의 방위신 이 벌떡 일어난다. 자시가 지나면 옥녀는 저절로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쥐형상의 방위신도 도로 자리에 엎드린다. 축시가 되면 구멍에서 옥녀가 축시패를 들고 나오면서 역시 소의 형상을 한 방위신이 벌떡 일어난다. 인시, 묘시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또 오방위 앞에는 대를 하나 세워 놓고, 그 대 위에 그릇 하나를 놓았다. 그릇 북쪽에는 관복을 입은 인형이 있어, 금병을 가지고 그 그릇 물을 따르는 형상을 통해 끊임없이 그릇 속으로 흘러드는데, 가득 차면 엎어져서 다시 옥루전기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위에 적은 형상은 상상을 해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형상을 문자로 옮겨 본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전각 안에 빽빽이 설치되어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의 풍랑과 함께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면 어찌 되는가.
독자들이여 당시에는 컴퓨터도 컴퓨터칩도 없었던 때였고, 정밀하게 깎고 다듬을 수 있는 설비도 물론 없었다. 그런데도 천지 자연의 절묘한 이치를 하나의 건물 안으로 옮겨와 움직이게 하면서 한치의 오차도 용인하지 않았다면, 전체적인 설계가 얼마나 정확하고 치밀한 것인지는 말할 것도 없고, 또 장영실의 손끝에 의해 만들어진 각가지 기물들이 얼마나 정교하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경복궁의 경회루 곁에 우뚝하였던 이 전각의 이름을 '흠경각'이라고 지었다. '서경' '요전에 적혀 있는, 공경함을 하늘같이 하여 백성들에게 절후를 알려 준다. 라는 명구에서 따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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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을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해 주셨다. 하나님은 20세기 후반기에 가서는 폭발적인 인구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줄 미처 몰랐던 모양. 그러나 세월이 가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차츰 타락하여 지상에는 악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때서야 하나님도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고 인류를 멸망시키기로 결심했다. 다만 의인 '노아'만은 악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는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되 간을 막고 안팎으로 역청을 칠하라. 방주의 길이는 3백큐빗(약 150m), 폭은 50큐빗(약 25m), 높이는 30큐빗(약 15m)으로 하되 상중하 3층을 만들고 위에서 1큐빗되는 곳에 창문을 내어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있는 육체를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라고 일렀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에 타며 모든 생물 한 쌍씩과 먹을 양식을 준비하도록 했다. '노아'는 하나님 명령대로 오랜 세월을 두고 방주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노아'는 가족 및 짐승들과 함께 방주에 탔는데, 방주에 탄지 이레 째 되는 날부터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밤 낮 40일 동안을 잠시도 쉬는 일 없이 내리 퍼부었다. 그 결과 온 세상은 흙으로 덮이고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죽고 말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2월 17일, 그친 다음에도 1백 50일이 지나서야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7월 17일 방주는 아라랏 마루에 닿았다. 물은 계속 줄어들어 10월이 되자 여기저기 산봉우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시 40일이 지나 '노아'가 까마귀와 비둘기를 창 밖으로 내보내자 앉을 곳이 없어 하늘을 날아다니기만 했다. 그 후 7일이 지나 비둘기를 내보냈더니 저녁에 감람 잎사귀를 물고 왔다. 다시 7일이 지난 비둘기를 날려 보냈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해 1월 1일, 물이 완전히 비었으므로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한 번 혼이 나고서도 '노아'와 그의 아들에게 또 '성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을 내리셨는데 그 결과는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되었다. '노아'는 홍수 때 나이 6백살이었는데 3백 50년을 더 살아 9백 50에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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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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