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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18 호
단기 4340. 1. 26 (음력 12.08)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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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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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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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내가 오늘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내 인생의하루를 그것과 바꾸고 있으니까. / 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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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七章 (노자 - 도덕경 : 제7장) |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 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綿綿若存, 用之不勤.
천장지구 천지소이능장차구자 이기부자생 고능장생 시이성인 후기신이신선 외기신이신존 비이기무사야? 고능성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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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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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장
직역
하늘은 넓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능히 넓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그 몸을 뒤로 하나 그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밖으로 하나 그 몸이 존재한다. 이것은 그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를 이룬다.
해석
자기를 이롭게 하려는 행동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로운가. 생각을 해보기 바란다.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들, 재화, 출세 등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것인가 생각을 해보라. 재화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스러운 사람이 몸을 뒤로한다는 것에 대한 예를 들겠다. 몸이 아픈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먼저 아름다운 옷을 사야 하겠는가. 약을 사야 하겠는가. 누구나 약을 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그러한가. 자신의 몸을 쥐어짜면서 옷을 사지는 않는가. 노자는 몸을 위해서 약을 사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 몸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태어남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옴을 뜻한다. 탯줄이 끊긴다. 이것은 어미와의 구분을 뜻한다. 하늘과 땅의 어미는 도이다. 하늘과 땅은 이 어미와 구분 짖지 않는다.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다. 아직 탯줄이 연결이 되어 있다. 하늘과 땅은 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가는 것이다. 스스로 태어난다는 말은 자신이 스스로 자연, 도와 벽을 쌓는다는 것이다. 벽을 쌓지 않으면 하나의 개체가 성립할 수가 없다. 개체로서의 태어남은 도와의 분리를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태어남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억지로 태어나지 않을 뿐이다.
私邪와 私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앞의 사사로움은 개인적인 이기심이다. 그것도 착각하고 있는 이기심이다.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사로움을 버리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앞의 예를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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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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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 하늘과 땅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스스로 살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자신을 타인보다 뒤에 놓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남의 앞에 서게 되고 자신의 이익을 제쳐 두기 때문에 자신의 거기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사사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심이 없기 때문에 능히 그 자신의 이익이 거두어 지게 되는 것이다.]
주
천장지구: 당의 현종 황제와 양귀비의 비극적인 연애 담을 그린 저 유명한 장한가(백거이 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구절로도 인용된 명구임. '천지는 장구해도 다하는 때가 있겠지만, 내 가슴속에 품은 한이야 길이 끊일 때가 없으리라' (천장지구유시진 비한선선무절기) 자생: 자신의 생을 영위하기 위하여 남과 싸우며 남의 소유물을 빼앗아서 자신을 기르는 일(하상공 주) 사: 사리사욕 및 그것을 충족시키는 행위를 뜻함.
해
하늘과 땅이 능히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은 무위자연의 법칙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남을 먼저 내세우고 자신의 이익을 뒤로 미룬다. 그는 사심이 없기 때문에 도리어 자신의 복리를 취득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의 경우에도 성인은 천도의 무위자연을 요체로 삼아 그 자신의 임지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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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23 개발동상국 경제고문관: 제프리 삭스
'경제학을 안락한 순수경제이론 영역에서 험난하고 복잡한 정치영역으로 이끌어낸 존 케인스와 버금가는 거물.' 이 말은 흔히 국제 경제학계 및 금융계에서 미국 하버드 대학경제학과의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39) 교수를 일컬을 때 쓰는 최고의 찬사이다. 현재 제3세계 및 동구권 경제개발정책 결정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는 폴 크루그먼 MIT 대 교수(41), 로렌스 서머즈 하버드 대 교수 검 세계은행 부총재(39)와 함께 미국 경제학계의 '3대 슈퍼스타'로 불리고 있다. 그는 학부시절부터 대학원 수업을 듣고 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학원시절부터 전세계의 주목을 끄는 논문을 잇따라 발표해온 세계적 경제학 천재로서 20대부터 국제경제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왔다. 미국 디트로이트 시의 유명한 노동인권 변호사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제3세계와 사회주의권에 평소 관심이 많던 그는 29세에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교수가 된 이래 1985년 남미 볼리비아의 경제자문으로 살인적 인플레를 진압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한 1990년대부터는 러시아, 폴란드, 몽골 등 채무문제 및 시장경제로의 전환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개발도상국에 직접 들어가 대통령 경제고문 자격으로 그 나라 정부의 입장에 서서 경제정책을 입안하거나 국제통화기금(IMF) 대응책을 세워주고 있다. 그는 IMF나 주요 선진국들이 채무국에 대해 취하고 있는 우월주의적 정책을 일관되게 신랄하게 비판하고 채무경감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 결과 개발도상국들은 그에 대한 강한 동지적 유대감을 느끼고 있으며 유엔 등 국제기구도 그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그는 특히 러시아와 폴란드 등 구 사회주의 블럭의 시장경제 도입을 돕기 위해 1991년부터 3년간 학교를 쉬기도 했다. 그는 1991년 소련 경제학자들과 함께, 향후 7년간 소련의 자유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급진적 '소련 경제개혁대강'을 작성했으며, 소련 해체 후에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의 경제고문으로서 가격자유화 등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가들이 일치된 견해를 보여줘 상당한 결실을 거두었던 폴란드와는 달리, 1994년 1월 러시아가 보수파의 압력에 밀려 반개혁으로 선회하자 즉각 경제고문직에서 사임했다. 러시아 외에 폴란드에서도 대통령 경제자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현재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싱크 탱크로 평가된다.
삭스는 1994년 10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1940년대 만들어진 브레튼우드 체제, 즉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GATT의 기존 한계를 극복할 청사진을 제시해 세계경제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기술혁명과 국가이데올로기 붕괴가 함께 작동한 결과, 세계경제는 지금 상품교역뿐 아니라 서비스, 금융, 다국적생산 교역을 통해 급속히 하나로 통합돼가고 있다. 중국의 시장경제도입으로 10억 명이 절대빈곤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1991년 경제개방정책을 도입한 인도의 9억 명도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오랜 기간 경기침체로 고통받던 라틴 아메리카의 4억 5천만 명도 세계시스템과 결합함으로써 마침내 경제성장과 저인플레의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구사회주의 세계는 아직 혼란에 빠져있으나 폴란드, 체코, 에스토니아 등은 이미 성장으로 진입해 세계경제와의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IMF 등 국제기구는 새로운 상황에 거의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통화를 책임맡고 있는 IMF는 1971년 고정환율제가 깨지면서 오래전 그 기능을 상실했다. 가난한 국가들의 경제발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IBRD는 런던클럽이나 파리클럽 같은 다국적 빚쟁이 모임들에 의해 그 역할이 교란되고 있다. IMF와 IBRD, 그리고 GATT의 후계자인 세계무역기구(WTO)는 요즈음의 범지구적 통합화 과정에 새로운 각오로 중차대한 시대적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러시아 등 구 사회주의권의 개혁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IBRD의 과감한 외채탕감과 자금제공을 통해 아프리카 등의 최빈국들을 절망적 질병과 내전, 사회자본 붕괴로부터 구해내야 한다. 동시에 WTO를 중심으로 국제교역에서 공정한 시민정신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국제법의 틀을 지금보다 더욱 확대해야 할 것이다." 그가 쓴 "지구 연계(Global Linkages)"라는 저서는 냉전종식 후 글로벌 경제하에서 각국이 갖춰야 할 사고방식 및 구체적 대처방안을 제시한 명저로 이름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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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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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웃고 있는 사람
작가 호퍼는 노동자 출신으로 오랫동안 실업자가 되어 우울하게 하루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는 로스엔젤레스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직업소개소에 아침마다 나가 일자리를 구해 보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이 무려 5백여명이나 앉아 있었던 것이다. 가끔 어떤 남자가 나타나 '잔디 깎을 사람이요! 가구 운반할 사람이요!' 라고 소리치며 5백명의 사람들 중 한 두 사람을 뽑아 갔다. 호퍼는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 중에 무엇을 기준으로 한 사람을 뽑아가는 걸까? 그것만 안다면 일자리를 구하기 쉬울텐데.' 호퍼는 그 비결을 찾기 위해 날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써 보았다. 하루는 맨 가운데 앉아 보기도 하고 또 하루는 맨 앞에, 어느 땐 맨 뒤에 서 있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엔 좀 더 눈에 띄게 하기 위해 책을 들고 있기도 하고 진한 색깔의 옷을 입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방법 역시 호퍼에게 일자리를 주지는 못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맞아, 내가 정말 직업을 구하는 게 시급한 사람처럼 보이면 뽑히지 않을 거야. 행복하게 보이고 직업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 가능성이 있을거야.' 다음날, 호퍼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었다. 소개소엔 역시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윽고 한 남자가 들어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이야기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 가운데 웃고 있는 사람!" 그는 호퍼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뒤, 호퍼는 매일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을 가꾸는 지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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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 4장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아는가
1. 나는 무엇인가
일상 생활은 물론이고 학문,예술 및 종교에 있어서도 앎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앎의 문제이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어떻게 아는가?" 이 문제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물어왔으며 또한 수없이 다양한 입장에서 무수히 많은 종류의 답을 제시하여왔다. 앎의 문제에서 무엇보다도 앞서서 밝혀야 할 것은 아는 자인 "자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교실에서 가끔 학생들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경우가 있다.
"정양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책입니다." "책이라고 말했는데 책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지?" "눈으로 보아서 압니다." "그렇다면 장님은 이것이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을까?" "손으로 만지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양, 이번에는 우리들의 관심의 방향을 좀 바꾸어 보기로 하세. 한 살 먹은 어린아이도 이것이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아마 모를 것 같습니다." "한 살 먹은 어린 아이도 눈으로 보고 만지는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어째서 이것이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까?" "......" "정양, 그렇다면 좋아. 이제는 정양 자신의 문제로 돌아가서 대화를 해보기로 하세. 내 손에 있는 이것이 책이라고 아는 것은 지금 누구인가?" "저 자신입니다" "정양이 지금 저 자신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곧 나라는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정양의 '나'와 정양 옆에 지금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심각하게 앉아 있는 송군의 '나'와는 서로 다른 '나'인가 아닌가?" "물론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면 정양의 '나'가 이것을 책으로 안다면 송군의 '나'는 이것을 다른 것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 "정양, 그렇다면 정양의 '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
위의 대화에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대화에는 주관과 객관의 문제, 앎의 과정 문제, 앎의 타당성 문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들은 이 장의 각 절을 통하여 비교적 상세히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잠시 침묵 속에서 정리할 시간적 여유를 0 진 다음에 또다른 학생과 같은 대화를 가진다.
"송군, 자네의 '나'와 자네 앞자리에 앉은 최양의 '나'는 분명히 서로 다른 '나'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군, 자네가 이것이 책이라는 것을 알고 마찬가지로 최양도 이것이 책이라는 것을 안다면, 자네의 '나'와 최양의 '나'는 똑같은 '나'가 아닐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나"와 최양의 "나"는 같은 '나'이면서 동시에 다른 '나'라는 결론이 성립하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은데 답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 각 개인들이 자기들을 가리켜서 "나"라고 할 때 그 "나"는 상당히 애매한 의미에서 쓰여지고 있다. 이와 같은 애매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나는 다른 학생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계속한다.
"김군은 지금까지 우리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으리라고 생각하네. 우리들 인간은 처음에 부모의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여 성장함으로써 인간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면서 모체로부터 양분을 섭취하고 열달 후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네. 태어난 후 우리들 각자는 비록 조금씩 차이는 날지라도 우유,밥,쇠고기,돼지고기,김치찌개,된장국 등을 먹으면서 커지기 마련이지. 그와 아울러 우리들은 부모나 형제 또는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의 흉내를 내면서 말을 배우게 되고 차차 학교에서 글도 배우고 책과 신문,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통해서 여러 가지 지식을 소유하게 되네. 그렇다면 김군, 자네의 '나'는 결국 우유나 된장찌개 그리고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나온 요소로 된 것이 아닐까?"
이러한 대화는 사실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우리들은 염증을 느끼고 빨리 피하거나 또는 별로 신통치 않은 문제로 믿어버린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앎의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심리적.물리적인 차원과 철학적인 차원을 구분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철학적인 차원에서는 앎의 문제를 어디까지나 필연성과 보편성의 입장에서 다루고 심리적.물리적인 차원에서는 자연적인 앎의 과정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앎의 과정은 각 개인에 따라서 그리고 심지어 한 개인의 다양한 상황에 따라서 천차만별일 수 있다. 그러나 철학적인 차원에 있어서의 앎은 보편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철학은 기초 학으로서 모든 다른 개별 학문들의 성립 근거를 밝혀주며, 나아가서는 개별 학문들의 나아갈 방향에 관한 의미와 가치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앎의 주체인 자아의 성격이 확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자아의 성격이 밝혀지지 않을 경우 극단적인 회의론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자아의 성격을 어떠한 입장에서 확정 시키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의 앎의 문제를 다툼에 있어서 경험론이라든가 합리론의 주장을 옹호하게 되며 또 어떤 경우에는 직관론의 주장을 지니게 된다. 우리들은 행위와 믿음의 주체로서 그리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별하며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주인으로서 또한 대상을 아는 주관으로서 자아를 전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지금까지 여러 가지 입장에서 주장한 각각의 자아를 절대적인 것이라고 옹호할 수 없다. 비록 철학적인 입자에서 자아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견해의 차이에 따라서 상이한 모습을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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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소련식 기관단총에 '또아리' 같은 게 달려 '따발총'이라고 불렀답니다
6.25를 겪으신 분은 '따발총'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소련식 기관단총이지요. 이것을 보통 '다발총'(많을 다, 필 발, 총 총)이라고 해석해서 한자어인 줄로 알고 계신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국어사전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니까요. 그래서 '그 사람 말은 따발총 같애.' 라고 말하여 마치 속사포를 일컫는 것으로 이해하여 지금도 사용하고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고 계신 것입니다. '따발총'을 직접 보신 분이 계신가요? 탄창이 어떻게 생겼던가요? 마치 '또아리'(물동이 등을 머리에 일 때에 머리 위에 얹도록 만든, 짚으로 둥글게 틀어서 만든 물건)처럼 생기지 않았던가요? 이 '또아리'를 함경도 방언에서 '따발'이라고 합니다('또아리'를 '또바리'라고 하는 방언도 있습니다). 함경도에서 소련식 기관단총에 '또아리'와 같은 것이 달렸다고 하여, 이 총을 그 방언에 따라 '따발총'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따발'이 한자의 '다발'과 비슷하니까, '다발총'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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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3.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비우스의 승리
오늘날의 지중해가 표시된 지도를 펴보면 유럽대륙에서 지중해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이다. 아프리카대륙에서는 튀니지가 돌출해 있다. 그리고 지중해 중앙에는 작은 섬 시칠리아가 있다.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로마와 오늘날의 튀니지에 터를 잡고 당시 지중해를 무대로 해상 제해권을 장악했던 카르타고와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카르타고는 동부지중해의 상업도시 페니키아인들이 북부아프리카의 튀니스만에 건설한 식민시였다. 그 전에는 두 나라가 서로 공수동맹을 맺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 나폴리, 레기움, 타렌툼 등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시와 동맹을 맺자, 서부 지중해의 실세인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로마와 카르타고는 3차례에 걸친 포에니전쟁을 치뤘다. 제1차 포에니전쟁(BC 264-241)은 시칠리아 쟁탈전이었다. 왜냐하면 시칠리아를 사이에 두고 양국의 세력권이 만났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로마인들이 승리함으로써 시칠리아를 그때 이래로 이탈리아반도와 정치적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그러나 서부 지중해의 해상무역으로 세력을 과시하던 카르타고인들이 한 번의 전쟁으로 쉽게 물러날 리가 없었다. 카르타고인들이 로마 본토의 공략에 나섬으로써 마침내 제2차 포에니전쟁(BC 218-201)이 시작되었다. 일명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알려진 이 전쟁은 사실상 서부 지중해 헤게모니 쟁탈전이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Hannibal, BC 247-183)은 코끼리부대를 거느리고 에스파니아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고, 프랑스 남부를 거쳐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당시로서는 예상하기 어려운 대장정이었다. 한니발 군대가 이탈리아로 공격해 오자 이탈리아반도 통일과정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로마군도 그 위세에 눌려 혼비백산했다. 상대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복병술과 책략을 종횡무진으로 구사한 한니발의 군사전략은 제갈량에 비유될 만했다. 또한 '문앞의 한니발'이라는 말 한 마디에 로마인들이 벌벌 떨 만큼 그의 잔인성은 로마군에게 공포를 심어 주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부하 장병들과 침식을 같이 하고, 일개 병졸처럼 싸우면서 그들의 동료처럼 행동했다. 잡다한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의 충성심을 함몸에 모으고 15년의 이탈리아 체류기간 동안 한사람의 탈주자도 생기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한니발군대에게 로마군은 홈그라운드였지만 연전연패했다. 기원전 217년에는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마저 트라시메네 전투에서 전사하는 참패를 당해 로마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로마원로원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독재관에 파비우스 장군을 임명했다. 그러나 로마군의 통수권을 위임받은 파비우스 장군은 한니발 군대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식량징발대의 본대를 차단시키는 작전을 폈을 뿐 직접적인 싸움은 피했다. 지연작전으로 한니발 군대가 스스로 지치기를 바랬던 것이다. 비겁자라는 온갖 비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비우스 장군은 독재관으로 있으면서 지연작전을 계속 추진했다. 그런데 기원전 216년에 한니발과의 전면전으로 승부를 내야 한다는 강경파에게 로마군 지휘권이 넘어갔다. 로마 군대와 한니발 군대는 칸네에서 맞섰다. 칸네 전투는 로마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끝났다. 그때서야 비로소 파비우스의 진가가 사람들에게 인정되기 시작했다. 파비우스는 로마인들에게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 준다.
시인 엔니우스( Quintus Ennius, BC 239-169)는 그의 용기를 찬양한 시를 썼다. "한 사람 오직 그만이 지연작전을 써서 우리 공화국을 부활시켰노라. 그는 자신의 명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조국의 안전만을 중히 여겼노라. 지금 그의 명성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고,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명예는 더 고귀하게 되리라." 즉 진정한 용기가 있는 정치가는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고, 오직 국가의 이익을 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파비우스의 전술이 당시는 인기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로마를 구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니발은 파비우스 장군이 지연작전을 하는 동안 로마시를 공격하지 않고 남부 이탈리아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파비우스의 위대함은 칸네 전투에서 패장들을 따뜻이 맞이하는 데서도 나타났다. 집정관 바로가 로마로 패주해 왔을 때, 파비우스는 원로원 연설에서 바로가 전투에는 해했지만 절망하지 않고 법률과 시민을 구하기 위하여 로마에 돌아온 것을 오히려 칭찬했던 것이다. 카르타고에 대한 로마의 승리는 바로 이러한 파비우스의 조국애에 힘입은 바가 컸다. 한니발이 남부 이탈리아에서 박이 묶여 있는 동안 스키피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은 에스파니아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해서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것을 현명하게 대처한 파비우스는 위대한 정치가의 상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피로스의 승리'가 상처뿐인 영광이라면, '파비우스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도 싸움에서 이긴, 지혜로운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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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 |
전통주
레몬주
기본적으로 완숙된 상태의 것을 이용한다. 수입산이 대부분이므로 일년 내내 수입이 가능하므로 언제든지 술을 담글 수 있다.
재료 - 레몬 300g, 설탕 200g, 소주 900cc
담그기
1.레몬은 흠집이 없는 것으로 골라 따뜻한 물에 씻은 후 물기를 닦아 과육이 으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겉껍질을 벗긴 다음 속껍질에 붙은 과육을 2-3등분한다. 2.소독한 용기에 레몬 과육과 겉껍질, 설탕, 소주를 넣어 밀봉한다. 3.1주일쯤 지나면 겉껍질을 벗겨내고 다시 밀봉해 1개월쯤 두었다가 노르스름한 색이 우러나면 알맹이는 건지고 다른 용기에 옮겨 저장한다.
탄산수와 검시럽을 기호에 맞게 타서 식전에 마신다. 뜨거운 물과 꿀을 타서 식사 후에 마시면 소화가 잘된다. 또 드레싱이나 육류, 생선의 밑간을 하는 데 사용해도 좋다.
비타민 C, 쿠엔산, 사과산 등이 함유되어 있으며, 껍질에는 페리진이라고 하는 물질이 있어 원기회복과 해열효과, 그리고 인후통, 기침을 진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또 미용에도 효과적인 레몬주는 모세혈관의 활도을 활발하게 하는 작용이 있어 고혈압 예방효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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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5 캄캄한 서양 반짝이는 동양
6. 반짝이는 동양과 캄캄한 서양
아시아유럽정상회담이 1996년 3월 1일 태국의 수도 방콕에 있는 국가회의센터에서 개막되었다. 아시아에서 온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국가 연맹 7개국과 유럽국가연맹 15개국의 지도자와 대표 그리고 유럽국가연 맹위원장이 이 역사적인 대회에 참석했다. 3월 2일 회의는 '의장섭명'을 통과시켰고, 아시아 유럽 관계의 기본적인 틀을 황립했다, 이 회의에서 제2차 아시아유럽회의를 2년 후 영국에서 개최하고 제3차 회의는 2000년에 한국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역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의 문화는 서로 충돌과 융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했다. 이것은 좋은 일면이고 다른 한편, 19세기 초부터 유럽국가들이 아시아에서 식민통치를 시작함으로써 아시아 여러 나라에 불행과 굴욕의 역사를 가져다주었다, 유럽인의 완고한 유럽중심론은 유럽의 안목을 흐리게 하였고 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가 세계에 끼치는 중요한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였다. 냉전종식과 함께 동서의 대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유럽국가연맹은 아시아의 광활한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나날이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결국 아시아와 한 테이블에서 마주 앉아 공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동남아국가연맹은 아시아유럽정상회담에 중국을 초청함으로써 중국의 역할에 거는 기대를 보여주었다. 중국 경제의 안정적이고도 지속적인 고도성장은 이미 아시아와 세계의 안정과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동력이 되었으며 동시에 세계와 아시아 평화유지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아시아유럽정상회담을 통해 중국은 아시아 및 유럽 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개혁과 개방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중국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역사적인 전환에도 보탬이 된다. 그리고 미국으로 하여금 패권주의, 강권정치의 시장은 갈수록 작아지고, 또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갈수록 줄어들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해 줄 것이다. 아시아유럽정상회담은 대등한 동반자 관계의 시대를 만들어 줄 것이다. 한편, 회의가 개최되고 있던 바로 그 시각에 미국이 느끼는 소외감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세계를 제패하려는 꿈에 사로잡힌 미국에게는 결코 유쾌한 소식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2차대전의 종식이 유럽시대의 종말을 고했다면 냉전의 종결은 아시아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역사의 발걸음이 미국의 패권주의, 강권정치의 위협과 협박 때문에 멈추어질 수는 없다. 1월 16일 유엔의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ESCAP)는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경제 및 사회 조사'의 내용을 베이징에서 각 언론사에 공개하였다. 이 조사 보고서에서는 중국의 점진적 경제개혁이 거둔 성공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사회복지 방면에 대한 중국 정부의 노력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경제가 건강하게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1980년에서 1995년에 이르는 15년 간 중국은 국민총생산액을 두 배로 증가시켰으며, 2000년에는 1980년에 비해 인구가 3억 정도가 늘어나는 상황 아래 평균 GNP를 1980년의 두 배로 상승시킬 수 있을 것이다. 10년마다 한 배씩 늘어난다는 계산이다. 이런 추세라면 2005년에는 평 GNP는 1천 달러가 되고, 2015년에는 2천 달러, 2023년에는 4천 달러, 2030년에는 8천 달러, 2040년에는 1만2천 달러가 될 것이다. 만일 경제성장의 효율이 상승작용을 한다면 어떤 시기의 성장 속도는 더욱 빨라질 수도 있으므로 평균 GNP가 1만2천 달러가 되는 목표를 몇 년 앞당겨 실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대부분의 선진국은 일인당 1만 달러를 달성하는 데 100여 년이 넘게 걸렸으나 중국은 30년이면 가능하다. 이러한 예상은 우리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한 청사진이지만 미국은 당연히 이런 결과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중화민족에게 발전의 계기를 부여했다.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결국 남들에게 당하고 말 것이다. 뒤지면 당하게 되고 당하면 더욱 뒤지게 된다. 이것은 역사가 준 경험이다. 이 경험을 중화민족은 아편전쟁 이래 참혹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었다. 위기감이 없는 민족은 발전의 기회를 잡을 힘이 없다. 인류발전사 도처에 약육강식을 볼 수 있다. 중화민족은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이 논리를 더욱 깊고 독창적이며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이후,사회주의에도 시장경제를 접목할 수 있다는 떵샤오핑의 말이 나오기까지는 130여 년이 걸렸다. 시간은 생명이다. 중국은 지금보다 이 말의 무게를 더 잘 이해한 적이 없었다. 개혁과 개방이 없다면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불가능하다. 시장경제의 배양과 성장은 개혁개방을 더욱 전진시킬 것이다.
시작이 늦었다고 걸음마저 느릴 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빨리 걷게 되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나아가야 할 현실이다. 발전 속도가 너무 느려서도 안 되겠지만 또 대폭 상승이나 대폭 하락의 폐단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의 경제학자는 향후 다소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9~10퍼센트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세계는 새로운 판또를 형성하여 유럽, 아시아, 미국의 삼각구도로 균형을 이루었고, 이는 객관적으로 볼 때 중국의 경제발전에 더욱 유리하다. 미국이 비록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지만 정치, 경제 방면에서 유럽국가연맹, 일본, 러시아의 견재를 받고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경제학자이며 [프랑스는 도전받고 있다 유럽은 도전받고 있다]의 저자인 미땔 아벨은 신작 [두 가지 자본주의의 전쟁]을 발표하여 서구사회에 자본주의의 두 가지 모델, 즉 신미국모델과 라인모델이 출현했음을 지적했다. 신미국모델 자본주의는 전적으로 영국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강자를 위해 설계된 것이다. 이 모델에서는 일반 대중이 개인을 중시하고 단체를 경시하기 때문에 기업은 장기적인 설계를 할 수 없어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게 된다. 투기풍조가 만연되는 상황에서 기업 병, 불량 채권, 돈놀이등이 성행한다. 이 모델의 폐단은 이미 드러났다. 오늘날 미국은 빈부격차가 더욱 커지고, 교육의 질은 떨어지며,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고 정부는 엄청난 적자를 보고 있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 된 사실은 좋은 예이다. 라인모델은 독일, 일본, 북유럽으로 대표되는데, 사회의 대등한 평등을 중시하고 공공이익을 개인이익보다 우선시한다. 이런 모델의 나라는 생산을 강조하고 부단히 생산품의 질을 개선하며 생산효율을 높이고 원가를 낮추며 전면적인 연구개발과 직업훈련을 추진한다. 그들은 단체효과를 중시하고 장기적인 설계를 한다. 이러한 국가는 빈부의 차가 비교적 작고 사회복지도 비교적 잘 되어 있다. 이 두 모델의 우열은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으며 라인모델의 국가들도 오히려 신미국모델을 따르려는 추세이다. 신미국모델이 사람을 끄는 이유는. 하늘에서 큰 부자를 만들어 준다는 몽상을 제공하며, 라인모델보다 더 안정되고 용이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와 일하기 싫어하는 풍조 그리고 돈놀이 등이 지금 독일, 일본의 사회를 침식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자본주의 모델은 냉전이 종식된 후에 양보할 수 없는 암투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 싸움은 한 몸에서 갈라진 손과 발이 서로 싸우는 격이다.
아벨의 경제사상은 당면한 자본주의의 현실적 모순을 인식하는 데 아주 중요한 암시를 주고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는,끊임없이 상품의 판로를 확장해야 하기 때문에 자산계급을 전세계로 분주히 돌아다니게 하여 도처에 정착하게 하고 가는 곳마다 연줄을 만들도록 내몰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논지는 130년이 흘렀지만 자본주의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적절하고 효과적이다. 미국의 패권자본주의는 제3세계국가 발전의 걸림돌이며 동시에 미국의 장기적 이익 도모로 가기 위한 최후의 갈림길이다. 어느 누가 이빨로 무장한 국제 헌병과 사귀려 할 것이며, 어느 누가 인권이라는 탈을 쓴 무역 낭대와 장사를 하려 할 것인가. 미국은 무역제재와 인권외교를 축으로 삼아 중국과 같은 대국을 상대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지렛대를 잘못 놓은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미국이 얼마나 더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제재에 대한 저항은 상대의 수를 본 다음에 반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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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정도전의 줄 서기와 문민 독재
줄 서기
옛날에는 눈을 아주 잘게 떠서 만든 그물을 못에 넣지 못하게 하였고, 초목의 잎이 다 떨어진 뒤에야 도끼를 들고 산에 들어 가게 하였다. 이것은 천지 자연이 주는 이익을 아껴서 쓰고 사랑으로 기르기 위한 것이다. 이야말로 재목과 물고기를 이용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6백년 전에 쓰여진 정도전의 글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가 자연보호헌장의 한 구절로 인용한다 하여도 아무 손색이 없는 철학을 담고 있다. 이렇게 가이없는 학덕과 도학의 사상으로 세상 일을 내다보면서 살았음직한 삼봉 정도전도 정치적인 줄 서기에 실패하여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게 된다. 쿠데타에 의해 수립된 정권은 후계구도를 짜기 위한 암투를 벌이는 것이 통례지만, 조선조 초기의 사정은 좀 특이하였다. 고려조의 지배 계급들은 대개 두 사람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다 출신 지역에 홀로 있는 조강지처를 향처라고 하였고, 도성인 개경에서 동거하는 아내를 경처라고 불렀다. 이성계도 경기도 포천 농장에 조강지처인 향처를 두고 있었고, 그녀와의 사이에 6남 1녀의 소생을 두었으나 불행하게도 한씨는 조선왕조의 창업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개성에 있었던 경처가 곤위(중전의 자리)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그녀와의 사이에는 2남 2녀가 있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면서 향처(적실) 소생의 장자인 방우를 후사로 정하려 하였으나, 진안대군으로 봉해진 방우는 불법으로 세워진 나라의 세자 자리를 끝내 마다한 채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후사는 여기서부터 뒤틀리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의 창업을 여느 쿠데타의 주체 세력 중에서도 제2인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었다. 장자가 상속을 거부하면 차자가 후사가 되어야 마땅하고 그 또한 여의치 못하다면 힘의 서열, 다시 말하면 쿠데타의 제2인자인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중전 강씨 소생의 둘째 아들이자 순서로서는 여덟 번째 아들인 의안대군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때 방석의 나이 겨우 열두 살이었다. 일이 이 지경으로 뒤틀리자면 중전 강씨의 강력한 요청과 베갯밑 정사가 주효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이성계의 총신이나 다름이 없는 봉화백 정도전, 의성군 남은, 부성군 심효생 등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물론 이일은 이방원과 그 일당에 대한 견제를 예고하는 것이지만, 이방원에게 있어서는 분노와 통한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태조 5년 8월 13일, 신덕황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고, 다음해 1월 3일에 무사히 장례를 마치자 정안대군 이방원은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부당하게 세자를 책봉하여 왕통의 흐름을 변질케 했으면서도 부단히 지신을 음해하려는 이성계의 주변 세력에게 응징의 철퇴를 가하려는 계책이었다. 마침내 8월 23일, 이날은 번개와 천둥이 요란하고 우박까지 쏟아지는 불순한 날이었다. 정안군 이방원은 휘하를 거느리고 입궐하여 자신의 이복 동생이자 7년 동안이나 세자의 자리를 지킨 방석을 주살하였고 궐 밖으로 달려나와서는 그를 에워싸고 있던 정도전, 남은 심효생까지 처단하였다. 역사는 이 피비린내 나는 도륙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적고 있지만, 정도전에게는 죽은 다음에도 족쇄가 채워지는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즉 이 사건 후 정도전에 관해서는 그 이름조차도 거명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선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마무리 역사를 읽는 일에 '가정'이 설립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도전의 줄 서기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구심이 남는다. 그의 학문은 하늘보다 높았고, 그의 경륜은 종묘의 대문에 창엽문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앞날의 일을 예견하는 예지까지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성계가 연부 역강하였고, 그의 총애를 받는 신덕황후의 영향력이 또한 막강하였기에 정도전은 나이 어린 세자를 갈고 다듬어서 성군의 자질로 키워 보리라는 명분, 다시 말하면 그로 인해 자신의 명망과 공덕이 더 빛날 것이며 새왕조의 기틀이 잡힐 것이라고 믿으면서도 그것이 현실 정치와 얼마나 유리되어 있는가를 정도전은 정말로 몰랐던 것일까. 역사를 보면, 폭군이나 살인광의 위정자도 있었다. 한때는 그들이 무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멸망하였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을 하는 우리는 또 다른 카리스마와 같은 존재들과 번번히 만나게 되고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줄 서기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새삼스럽게 인도 독립의 아버지인 간디의 명언을 곱씹어 보면 저절로 미소짓게 된다. 이 미소 또한 역사를 읽는 재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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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
틈만 나면 거울을 들여다보고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가씨, 자기의 알몸을 거울에 비춰 보고 황홀감을 느끼는 사춘기의 소녀, 이러한 자기도취의 현상, 즉 '나르시시즘'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람마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남이야 뭐라든 제 잘난 맛에 사는 게 사람이니까. 정신분석학자의 창시자 '프로이드'는 인간에 있어서 리비도(애욕)의 발전단계를 자연애, 자기애, 동성애, 이성애의 네 가지로 구분하고 리비도가 자기애에서 머무르는 것을 '나르시시즘'이라 불렀다. '나르시소스'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에코'라는 님프가 그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로지 강물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만 애착을 느낀다. 그러다가 마침내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으며 그가 죽은 자리에는 수선화가 피어났다. 한편 사랑을 못이룬 '에코'는 목소리만이 남아서 골짜기를 헤매며 '나르시소스'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그래서 영어로 '수선화'를 '너시서스', 메아리를 '에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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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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