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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04 호
단기 4340. 1. 11 (음력 11.23)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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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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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SBS-R 인터뷰서 “문학 외적인 의도…소설통해 정치적 발언”
▲ 김정란 상지대 교수(자료사진) ⓒ2007 데일리서프라이즈
김정란 상지대 교수가 ‘호모 엑세쿠탄스’의 저자인 이문열 씨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그가 이 소설을 통해 현 정부와 386 인사들을 비난한 데 따른 것이다.
김 교수는 4일 SBS라디오 ‘김신명숙의 SBS전망대’에 출연, 이 씨의 신작에 대해 “문학 외적인 의도를 갖고 있다. 그동안 이 선생을 불편하게 했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매우 신학적인 언어로 단죄한 것이다”라고 평가하면서 이 같은 입장을 밝혔다.
그는 신작의 제목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이날 인터뷰를 시작했다. 처형자라는 의미를 가진 이 책의 제목과 관련해 “이 선생이 자주 사용하는 수사법이다”라면서 “라틴어처럼 일반대중에게 지적 두려움을 주는 말을 사용해 ‘당신은 나보다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설정한 뒤 시작하는 전략이 아닌가 싶다”고 꼬집었다.
그리고 나서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현 정치적 상황 등 우리나라가 그동안 원하든 혹은 원하지 않든 변화의 물결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며 “선생은 처형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 모든 것을 신학적 언어로 저주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어 이 씨가 문학을 매개로 해 정치를 비판하고 나선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가 논란이 된 작품을 통해 현 정부에 부정적인 태도를 밝혔다는 진행자의 지적에 “선생의 정치적 견해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이 있어도 막바로 얘기할 수 없다”면서도 비판의 형식만큼은 문제로 삼은 것이다.
그는 “문학 작품에 대해 일반 대중은 여전히 경외감을 갖고 있다”고 전제한 후 “선생은 (문학이라는) 일종의 선점된 상징적 가치를 십분 누리면서, 정작 그 안의 내용을 통해 매우 현실적인 발언, 매우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며 “그것을 문학으로 포장해 이야기하는 방식에 지적 폭력성 같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 씨가 문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불쾌한가”라는 이어진 질문에 “불쾌하다기보다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면서 “나는 칼럼을 쓰면서 현실적인 발언을 하고 있지만, 문학 속에서는 전혀 그런 얘기를 안 한다”는 말로 이 씨와 자신의 차이를 비교해보였다.
그러면서 “그렇다고 문학이 현실정치에 대한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발언은 하되 여러 가지 룰이 공정해야 한다”며 “그런데 선생은 비판을 차단한다. ‘이것은 문학일 뿐이다’라고 하는데 상당히 문제가 된다”고 부연했다.
김 교수는 이 씨와 그의 작품에 대한 발언을 마무리 한 뒤 현 정부,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내놓았다. 우선 그는 참여정부의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진행자의 말에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 참여정부가 잘못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바로 “내가 보기에 실제적인 잘못보다 과다하게 부풀려져서 비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며 그 원인을 비정상적인 여론시장 탓으로 돌렸다. 노 대통령 등이 일부 거대언론사의 잘못된 여론몰이로 인해 수난을 겪고 있다고 강조한 셈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 언론은 정치집단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편파적이다”라면서 “대통령이 제스처를 취할 때 그 맥락을 완전히 배제시킨 채 불량해보이는 사진들을 사용하는 식으로 매우 노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정상적인 여론이 형성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 의문을 가진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노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조금 더 매끈한 어법을 사용했으면 좋겠다”면서도 “정작 오징어로 경비원을 때리고, 성희롱을 한 정당은 비판을 당하지 않는데, 말을 거칠게 했다는 이유로 그렇게까지 비난을 당해서야 되겠는가”라면서 반론을 폈다.
김 교수는 마지막으로 “현 정부는 무능하다”는 평가에 대해 “그것은 참여정부의 여러 일들이 단기간에 효과를 나타내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면서 “(현 정부에) 공은 있는데 그 점이 부각되지 않았다”는 자신의 견해를 청취자들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현 정부의 추락 등으로 인해 보수 중심의 대선구도가 형성되고 있는데 대해 “보수세력이 총공세를 펴고 있기 때문에 (선거) 지형이 어렵지만 대한민국의 역동성은 여전히 세계최고다”라면서 “어떤 변수가 다시 생겨날지 알 수 없다. 아마 유권자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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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남에게 손가락질할 때마다 세 개의 손가락은 항상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잊지 말 것. / 무명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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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10 FCC의 젊은 혁명가: 리드 헌트
"필요하다면 대통령도 갈아치울 수 있다." 평소 이렇게 말할 정도로 세상 그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 이들이 바로 ABC, CBS, NBC 등 미국의 3대방송사이다. 그러나 이처럼 기고만장한 이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천적이 있다. 바로 지난 1934년 커뮤니케이션법에 근거해 설립된 미국 통신행정의 최고 핵심기관인 연방통신위원회이다. 준정부, 준사법 기관인 FCC는 TV, 라디오, 유선 TV, 통신위성 등의 국내외 통신과 요금을 규제하는 절대권한을 가지고, 대중의 필요 및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방송을 하거나 독점금지법 등을 위반했을 경우에 즉각 방송국 면허를 취소시킬 수 있다. 한 예로 1994년 들어서는 미국 내 12개 TV사를 인수해 기존의 3대방송사를 능가하는 폭스 TV 네트워크를 구축한 '미디어계의 조스' 루퍼트 머독이 FCC의 도마 위에 올라 엄격한 독점금지법 위법 심사를 받기 시작해, 진땀을 흘리고 있다. FCC는 이에 앞서 1993년 미국의 3대 방송사에 대해서는 어린이들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을 신설하지 않을 경우 즉각 방송사 허가를 취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각 방송사가 앞다퉈 어린이프로를 신설하게 만들기도 하는 등 미국 방송, 통신, 미디어계에 절대적 영향력을행사하고 있다. 1984년에는 독점금지법을 적용해 당시 세계최대 통신기업이던 AT&T사를 8개로 분리해, AT&T는 장기통신업무만 취급토록 하고 단거리 지역통신은 7개의 베이비 벨사가 운영토록 하는 경쟁체제를 도입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전화요금을 60p나 인하시키고 통신서비스를 대폭 개선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5명으로 구성되는 FCC위원은 임기 7년으로 의회의 승인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며, 조직은 방송국, 케이블 TV국, 공중전기 통신국,개인서비스국, 현장운영국으로 구성돼 있다. 현 FCC 위원장은 앨 고어 부통령의 절친한 죽마고우이자 빌 클린턴 대통령의 예일 대학교 동창이며, 반트러스트법 전문 법조인으로 유명한 46세의 리드 헌트Reed Hundt이다. 1993년 11월 그의 부임 후 FCC는 미국정부가 정력적으로 추진중인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의 추진본부로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헌트 위원장은 1994년부터 고어 부통령의 정보 초고속도로 구상에 발맞춰 장거리통신과 단거리통신, 통신과 방송간의 상호불침범 장벽을 부숨으로써 업자간 경쟁력을 최대한 촉진시키는 혁명조치를 정력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고어가 제시한 정보 초고속도로 구상의 핵심브레인 역할을 해온 헌트는 "정보 초고속도로를 정부가 아닌 민간의 힘으로 구축하겠다"면서 이 부문에 경쟁원리를 도입, 차세대 정보혁명을 자신의 임기 내에 완료시키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현재 4조 5천억 달러(3,600조 원)의 누적 재정채무에 시달리는 정부에게 수천억 달러대의 막대한 투자가 불가피한 정보 초고속도고 건설을 의존하려 하다가는 이 구상의 실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이다.
"우리(FCC)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일자리가 없어지도록 하는 데 두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완전한 경쟁시장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업자들은 우리의 통제를 받던 시절보다 훨씬 더 일을 열심히 할 게 틀림없다." 각종 행정규제를 무기삼아 업계 위에 군림하는 관료주의의 타성을 평소 크게 혐오해온 헌트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말이다. 그의 이같이 강력한 경쟁체질 강화정책은 미국의회의 공감을 얻어, 1994년 6월 미국의회는 방송과 유선방송, 통신의 장벽을 해체하는 일련의 경쟁법안들을 통과시켰다. 헌트 위원장은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인 자본주의 신봉자도 아니다. 그는 "자본의 눈에는 본디 사리사욕만 보일 뿐 공익은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의 전권은 자본가들에게 맡기되, 그 성과물이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정부가 할 일"이라는 게 그의 확고부동한 신념이다. 이런 원리원칙에 따라 그는 1994년 2월 6,500만 가구가 애용하고 있는 유선TV의 시청료를 7p나 강제인하시켰다. 이는 불과 5개월 전 10p를 인하시킨 데 이어 곧바로 단행된 조치여서 업계의 저항은 대단했다. 한 예로 정부의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 구상에 호응해 그 무렵 매머드 유선 방송국 TCI를 210억 달러에 사들이는 세기적 협상을 진행중이던 지역전화회사 벨 아틀랜틱은 헌트의 시청료 인하 조치에 반발해 즉각 이 협상을 취소시켰다. 그러나 헌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정보혁명의 혜택이 있는 이들에게만 돌아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요금인하는 더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단행한 당연한 조치이다.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이 정말 돈벌이 수단밖에 안 된다면 추진할 값어치도 없을 것이다. 싫으면 관둬라."
헌트의 이같은 배짱은 시민, 소비단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마침내 미국 정보통신업자들은 헌트에게 굴복해 속속 정보 초고속도로건설에 재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정보 초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정부 재원도 가급적 국민세금이 아닌 민간자본에서 조달한다'는 방침아래 봉이 김선달식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세웠다. 1994년 가을 사상 최초로 대화형 무선호출용 주파수대 전파를 미국통신회사 및 휴대용 전화회사들에 100억 달러에 판 것이다. 헌트가 있기에 고어가 있을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평가는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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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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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할아버지의 증명사진은 초상화
에어컨이 고장난 사무실은 찌는 듯한 더위 때문에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를 무색하게 했다. 모두들 더위에 지쳐누구 하나 말을 하지 않았고 사무실 앞 커다란 나무에서 나는 매미소리만이 요란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여기가 동사무소 맞수?"
오랜 침묵을 깨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얀 머리에 중절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 한 분이 서 계셨다.
"예, 할아버지. 어떻게 오셨는데요?" "갱노증(경로증)만들려고."
이빨이 빠졌는지 바람이 빠진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래서 요즘은 경로증을 만들지않고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더니 잃어버렸다며 다시 해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집에 가서 사진 두 장을 가지고 오시면 만들어 드리겠다고 설명해 드렸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할아버지가 다시 오셨다. 순간 나는 아연 질식해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할아버지 손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들려 있는 것이었다.
"아가씨, 사진 가져 왔는디."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들고있던 초상화를 창구위에 턱 하고 올려 놓으셨다.
"예?"
할아버지는 주민등록증에 쓸 증명사진으로 집에 걸려있던 대형 초상화를 가지고오신 것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해 큰 소리로 웃어 댔고, 이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던 사무실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참을 웃고 나니 다시 사진을 가지러 가야 하는 할아버지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다음에는 자세하게 가르쳐 드릴께요."
임영숙 님/경남 하동군 하동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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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1장 철학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
1.미신
현대의 전자 산업 시대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 사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합리적 사고는 다분히 수학적이면서도 은연중에 경제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이 요구하는 소위 합리적 사고는 비합리적 사고와 흔히 결합되어 있으며 또한 결합하려는 강한 경향을 가진다. 그와 같은 경향이 반영해주는 것은 현대인은 여전히 미신을 최선의 무기로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고대, 중세, 근대, 현대가 뒤범벅이 되어 있으며,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가 혼합되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자본주의와 기계 문명이 숨가쁘게 질주하는 지금 이곳에는 미신 내지는 미신적인 요소들이 강한 세력을 소유하고 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일정한 과정이 역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역사뿐만 아니라 자연사에도 특정한 과정이 있다. 그렇다면 돌연변이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실은 돌연변이란 말도 인정한 과정을 인정하며 그 과정이 빠르다는 것 이외의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 추측하건대 아득한 태고적의 인간들은 오늘날의 인간들처럼 발달되고 복잡한 지성 능력을 소유하지 않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해와 달과 바람 그리고 돌과 꽃 등 모든 자연 대상이 살아서 숨쉰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본능을 충족시키려는 동기에서, 곧 배불리 먹고 편히 자려는 목적에서 특정한 대상들을 의존하였다. 신화에 등장하는 곰이나 호랑이 또는 알과 같은 개념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정확하게 반영하여 준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졌을 때 씨앗 자체가 빈약하거나 토질 등의 조건이 알맞지 않을 때 돋아나는 싹은 가냘프기 짝이 없다. 인간의 초기 상태는 마치 이러한 씨앗에서 돋아나오는 싹과 다를 것이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싹이 적절한 영양분과 햇빛에 의하여 자발적인 유기체의활동으로 스스로 성장해나갈 때 가지와 잎이 생기를 얻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튼튼한 식물로 성장하여 드디어는 탐스러운 꽃을 피우며 씨앗을 맺는다. 이러한 과정을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이자 문화이다. 한 사물 또는 사태가 자신의 전체 과정을 거칠 때 인간의 의식은 전체성을 파악한다. 전체과정을 거치지 않고 부분에만 머물 때 인간의 의식은 부분밖에 파악하지 못하며, 동시에 부분만을 파악하는 의식은 아직 자신과 대상의 구분 및 자기 자신에 관한 올바른 앎을 가지지 못한다. 우리는 코끼리와 장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다리만 만지고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든가, 몸통만 쓰다듬고 코끼리가 벽과 같다든가 하는 것은 결국 사물을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상태에 불과하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며 자신과 대상을 구분할 줄 모르는 의식은 미신에 물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얼핏보기에 미신은 인류의 역사 초기에 삶을 좌우한 것으로 보기 쉬우며 또한 오늘날에도 미개한 인종 사이에서 번창하는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보다 더 날카롭게 살펴볼 경우 상당한 문화 수준을 소유한 현대인도 다분히 미신을 신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신의 형태는 나라마다 지방마다 다르지만 그 본질은 동일한 것이다. 미신의 뿌리는 샤머니즘에 있다. 해룡을 섬기는 예를 보자. 어부들은 많은 물고기를 잡아서 생존 본능을 충족시키려고 하나 뜻하지 않는 순간 바다의 재앙을 당하여 배와 인명의 손실을 당하는 체험을 가지고 있다. #1 바다에 대한 두려움 #2 생존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자기 방어 #3 자신의 능력이나 가치에 대한 불확실성 등은 어부들로 하여금 의존 대상을 상징적으로 구성하게 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섬기게 되는 대상이 바로 용왕신으로 나타난다. 우리들이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미신은 #1 구체적인 양상에서 #2 내면적인 윤리관에서 #3 종교적인 초월에서 살필 수 있다. 미신을 구체적인 양상에서 보면 그 형태가 지나치게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점.굿.성명 철학 등 우리 주변에 일반화된 현상만을 음미해보기로 하자.
미신이란 인간의 비합리적인 행동 방식의 한 가지로 불행을 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미신은 비단 인간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일부 심리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특정한 동물도 일종의 미신을 지닌다. 예컨대 비둘기가 우연히 날개를 퍼덕였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모이가 앞에 떨어졌다고 하자. 다음부터 비둘기는 배고플 경우 날개를 퍼덕이는 미신을 지닌다고 한다. 또 다른 예로 개가 귀를 긁적거리고 있을 때 돌이 날아와 개를 때렸다고 하자. 이 경우 개는 얼마간 좀처럼 귀를 긁적거리지 않는 미신을 가진다고 한다. 굿.점.성명 철학 등은 사회적인 미신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와는 달리 각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각양각색의 미신도 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신 중에는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소식이 있다",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다", "꿈에 돼지를 보면 횡재수가 있다", "임산부가 뱀꿈을 꾸면 사내 아이를 낳는다" 등등 무수한 많은 미신들이 있다. 물론 이러한 미신들 중에는 상징적인 근거를 배후에 깔고 있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허황된 것들이다. 예컨대 눈이 충혈되었을 경우에 실에 꿴 바늘을 바라보면 치료된다든가 발이 저릴 때 콧잔등에 침을 바르면 낫는다고 하는 미신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예로 든 미신들은 어느 정도로 일반화된 미신이고 이 밖에 아무도 모르게 각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미신이 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착수할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전을 던져서 앞이나 뒤가 뒤집어지는 것에 따라서 행동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부터 다섯까지 헤아린 다음에 시작한다. 또 어떤 사람은 길을 걸어갈 때 언제나 가능한 한 길의 가장자리를걸어가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반드시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려고 한다. 각 개인은 남의 눈에 띄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저마다의 미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인 미신은 습관 및 심리적인 갈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개인적인 미신은 거의 한 개인에게 습관화되어 있어서 그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미신을 저버리기 어려우며 #2그러한 미신은 행운을 가져다주리라는 무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비록 현실이 그렇지 않을지라도 각 개인은 욕구와 현실의 갈등 속에서 우연적으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신념으로 자신의 미신을 은연중에 고집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개인적인 미신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미신이 성립한다.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지금 이곳의 사회적인 미신의 형태로는 굿과 점 등이 있는데 굿이나 점 등은그 종류를 헤아리자면 수없이 많으므로 여기에서는 간단히 일반적인 특징만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사람들은 막연하게나마 우주와 아울러 인간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절대자(또는 절대자들)를 믿으며 그것을 일컬어 신령님이라고 부른다. 보이지 않는 신령님의 힘을 빌어 인간의 앞날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을 사람들은 무당이니 점쟁이니 심한 경우에는 도인이니 하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무당이나 점쟁이나 도인의 행동방식을 철학이라고 일컫는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연을 손바닥에 놓고 보듯이 환하게 알아서길흉화복을 좌우할 수 있는 이들을 사람들은 원하며 또한 그러한 이들이 실제로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볼 때 미신이란 결국 앎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미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미신 자체를 확실한 앎, 선과 악에 대한 가치,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기준을 결정해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신과 철학을 혼동할 뿐만 아니라 미신을 유일한 철학으로 믿는다. 그들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며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대상이나 힘에 자신의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미신의 일반적인 특징을 밝히기 위하여 나와 남들의 몇가지 구체적인 예들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첫번째 예로 김군은 중학교 3학년이고 그의 형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김군과 그의 형은 모두 자기 반에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 입시가 두 달 가량 남아 있었다. 김군의 모친은 두 아들에게 온갖 희망을 걸고 있었으며, 아들들이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와 대학에 입학하기를 고대하면서 두 아들을 뒷바라지하여 왔다. 어느 날 동네에 쪽집게처럼 점을 잘 친다는 관상쟁이 할머니가 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김군의 모친은 두 아들을 데리고 마침 관상쟁이 할머니가 점치고 있는 집으로 갔다. 관상쟁이 할머니는 김군에게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문제없겠다"라고 말했고 김군의 형에게는 "누워서 대학에 들어갈 테니 아무런 근심도 말아라"라고 말하였다. 두 달이 지나서 김군은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그의 형은 대학 입시에 떨어져서 재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번째 예로 최교수는 풍수지리에 밝았으며 또 실제로 묘자리를 보아주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시골에 가서 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그곳에서 역학에 정통한 은사를 만나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심지어는 신선의 도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인상을 받았다. 사십 중반에 어느 대학의 교수가 된 그는 강의 시간에도 자신의 믿음을 간간이 털어놓곤 하였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통일하면 앉은 채로 허공에 둥둥 뜬다." "마음을 집중하면 십리길도 한걸음에 치달릴 수 있다." "벽을 바라보며 마음을 깨끗이 하면 온누리의 진리가 다 보인다." 이와 유사한 예로는 임모씨의 예를 들 수 있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지위에 있으며 학문도 깊은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몇 대 할아버지 때부터인지 집안이 계속 기울어가고만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 그는 문중에서 한사코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10개의 무덤이 모두 벌레와 습기 투성이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양지바른 곳으로 묘를 옮겼더니 그 다음부터는 집안이 점차로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번째 예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박군이 정신병 증세를 나타낸 지 네 달째나 접어들고 그 동안 박군집에서는 교회 목사를 불러 안수 기도를 받게 하기도 했으며 정신 병원에 두 달 입원도 시켜보았으나 차도가 없자 이름난 무당이라고 하는 쌍둥이 무당을 불러 굿을 벌리기로 했다. 쌍둥이 무당은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3일 동안 굿을 하면서 박군은 분명히 정상인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장담을 하였다. 박군은 보름 후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세 가지 예를 들어보았다. 첫번째 예는 관상의 경우이다. 사실 잘 먹고 잘 살아온 과거를 지닌 사람의 얼굴은 윤기가 흐르며 앞으로도 얼마간은 그 상태가 계속될 확률이 많다. 인간은 자기의 마음을 얼굴로 표현한다. 근심 걱정이 많은 사람은 자연히 어두운 얼굴일 테고 노력하며 꾸준히 자기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칠 것이다. 점쟁이에 따라서 그러한 감각이 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보다 둔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장님 점쟁이가 점쟁이 업을 청산한 다음 자신은 손님의 목소리와 옷 스치는 소리에 따라서 점을 쳐주었노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점을 치거나 굿을 하거나 또는 지관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현실의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들은 물질의 욕망을 만족시키면 정신적인 욕망도 따라서 충족되리라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다. 점, 굿, 작명 등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나와 우리 집의 부유함과 편안함만을 목적으로 하고 우리들 모두의 행복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삶이 스스로의 결단과 노력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적인 힘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믿는다. 철학은 필연적으로 전체성에 관한 통찰을 전제로 삼는다. 철학이 인간 사회를 문제로 삼을 때 개인과 가정과 사회 및 국가 모두가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나만이 존귀한 것은 아직 미신의 차원이다. 왜냐하면 미신은 오직 부분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앎을 문제로 삼을 때, 인간이 앎을 구성하는 과정과 능력에 의하여 분명히 참다운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하려고 한다. 그러나 미신은 무조건 어떤 대상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으며 그 이외의 것은 모두 헛된 것이라고 고집한다. 선과 악을 다루는 가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미신은 확실히 인간에게 어느 정도 감정적인 만족을 채워주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이 의지하여야 할 곳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을 때 미래의 행복을 분명히 보장해준다고 하는 상징은 욕구불만을 얼마간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인간이 무한히 외적인 것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려고만 한다면, 그의 욕구충족은 끝까지 완성되지 못한 채로 언제까지나 외부적인 힘에만 자기 자신을 맡기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미신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이며 그것도 발전되지 못한 하나의 방식이지 결코 삶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미신이 널리 퍼져 있어서 세력이 강한 사회에서는 자연적으로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 방식이 발전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회에서는 정치, 경제적으로는 영웅주의가,예술에서는 천재론이, 종교에서는 절대적인 인간만이 엄청난 힘을 소유하여 여타의 인간들은 자신의 삶을 결정하기를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기를 포기하게끔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점, 굿, 풍수지리, 작명 등을 통하여 자신과 가정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욕구가 달성될 수 있기는 해도 언제나 달성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의 의식이 자기 반성을 하지 못하는 단계에서 우리는 미신을 철학과 동일시한다. 미신은 철학이 출발할 수 있는 시초가 되기는 해도 전적으로 철학과 동일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미신은 여전히 부분적이며 외부적인 데 비하여 철학은 전체적이며 내면적인 성격을 본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미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인간 의식과 문화가 현실적으로 전개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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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가물치'는 '검은 고기'라는 뜻
물고기 중에 '가물치'가 있지요? 이 중에 '-치'는 물고기 이름을 나타내는 접미사임은 누구나 다 아실 것입니다. '꽁치, 넙치, 준치, 멸치' 등등 많습니다. 그런데 '가물'이란 무엇일까요?
천자문을 배울 때, '하늘 천, 따 지, 가물 현' 하지요. 물론 지금은 '검을 현'이라고도 합니다. '가물'은 오늘날의 '검을'에 해당합니다. 옛날엔 '검다'를 '감다'라고 했었으니까요. 그래서 '가물치'는 '감-+ -을 + -치'로 구성되어 있지요. 결국 '검은 고기'란 뜻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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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1. 빛은 오리엔트에서
비옥한 초승달 지대
아시아 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긴 시간 동안 진행된 인류의 초기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 초승달 모양의 땅은 서쪽으로는 팔레스타인, 시리아로부터 위로 구부러져 올라갔다가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내려오고 있다. 이는 서로는 지중해에 연했고, 북으로는 동쪽 아나톨리아와 아르메니아, 동으로는 자글로스 산맥으로 경계지어졌다. 이 초승달의 양끝 뿔 아래 남쪽으로 아라비아 사막이 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는 말은 19세기에 고대 근동지역을 연구한 미국의 역사가 브레스티드(J.H. Breasted)가 명명한 말이다. 여기에서 '비옥한'이라는 말뜻에 너무 좋은 자연환경만을 연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노력이 거기에 보태져서 비옥하게 만든 요인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그 지역들의 구체적인 역사를 알아보면 금방 이이 이해가 갈 것이다. 우선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동쪽 뿔에 해당하는 지역, 즉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하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미 기원전 3500여 년경부터 사람들이모여들면서 큰 촌락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에 제일 먼저 정착한 주민은 수메르인이었다. 그들이 강 하류에서 처음 본 것은 해마다 되풀이되는 홍수와 그로 인해 생긴 초목이 우거진 늪지였다. 그들은 이 늪지를 개간하고 간척해서 경지를 만들었다. 또한 홍수에 의해 상류 지역에서 하류로 실려온 흙은 기름진 농지로 변했고, 물도 풍부했기 때문에 천수에 의존하던 종전의 원시농업에 비해서 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생산이 늘자 불어난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한곳으로의 인구집중에 의한 도시가 성립되었고, 문명생활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비옥한 초승달 지대가 그렇게 유리한 조건만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제방을 쌓고 수로를 내는 일, 특히 홍수가 휩쓸고 간 뒤에 경지를 다시 정비하는 일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자연조건도 인간의 삶에 완전히 적합한 것은 아니었다. 낮과 밤의 격심한 기후차, 집중호우가 내리기 전에 오래 계속되는 가뭄, 황량한 언덕과 사막, 그리고 습한 늪지대 등은 수메르인들의 삶을 고달프게 했다. 또한 강 유역의 황량한 늪지를 기름진 농토로 변모시키는 데는 사람들의 노력, 특히 지속적인 협동작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러한 협동작업은 그 범위가 넓을수록 더욱 효과적일 수 있었다. 이래서 한 지역의 여러 촌락들이 서로 연합하게 되었고, 그 중심으로서 도시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비옥한 초승달의 동쪽 끝에서 성립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농경에 근거한 도시문명이었다.
한편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서쪽 끝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보다 다소 출발은 늦었지만, 페니키아인들과 헤브라이인들이 독특한 문화를 건설했다. 페니키아인들은 기원전 1400년부터 1200년 사이에 레반트의 북부 해안지역에 번성했던 가나안인들의 후예였다. 기원전 1300년 이후 동부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시돈, 티루스 등 도시국가를 건설한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연안 각지와의 해상무역으로 번영하였다. 그들은 동부지중해를 무대로 상업활동을 확대하면서 각지에 식민시를 건설했다. 항해술이 뛰어났던 그들은 지중해 연안 일대는 물론이고 대서양에까지 진출하였으며 심지어 아프리카대륙을 회항했던 것으로 짐작될 정도이다. 기원전 800년경에 페니키아인들이 북부아프리카의 튀니지에 건설한 식민시 카르타고는 도시가 쇠퇴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패하기는 했지만 지중해 패권을 두고 로마와 자웅을 겨루었던 포에니전쟁은 유명하다. 페니키아인들이 인류 문화사에 끼친 공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발달된 표음문자를 만들어 그리스에 전파했다는 점이다. 한편 기원전 18세기경에 가나안에 정착을 시작한 헤브라인들은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통해서 서양 문화에 기여했다.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등장한 기독교의 모체가 되었는데 기독교는 그 이후 서양 문화의 한 기둥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로부터 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사방으로 열려 있어서 역사를 통하여 이민의 이동과 침략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자연환경 이외에도 이러한 주변정세가 인류문화사적으로 이 지역의 가치를 높였다. 왜냐하면 이곳은 고대문명의 발생지일 뿐만 아니라 그 뒤를 이어 여러 문명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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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58.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효과는?
침략 문명을 상징하는 기계에 반대하여 물레로 실을 잣고 신식 옷 대신 흰색 천을 몸에 두르고 둥근 안경을 쓴 간디의 모습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인도 민중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런 간디의 모습과 함께 다가오는 것은 그가 주장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다. 영국 유학을 통해 변호사 자격을 얻고 돌아온 간디(20세)는 봄베이에 변호사 사무실을 냈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남아프리카의 인도인 회사가 고문 변호사를 구하고 있어 그 일을 맡기 위해 처자식을 인도에 둔 채 남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인종차별에 큰 충격을 받았다. 변호사였던 간디도 인종차별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역마차의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았다가 끌려 나온 일이나 밤늦은 시간에 백인전용 도로를 걷다가 백인 경찰에게 구타당한 일 등은 간디로 하여금 자신의 반제국주의적 신념을 더욱 굳게 하는 경험들이었다. 또한 그는 그곳 광산에서 일하고 있는 인도 노동자들의 무권리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권 획득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렇게 남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은 간디가 이후 인도에서 본격적인 반영운동을 벌이는데 굳건간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18세기 중엽부터 본격화된 영국의 인도 지배에 맞선 투쟁이 최초로 폭발한 것은 1857년 세포이 반란이었으나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영국은 인도 지배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전에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지배하던 것을 1877년 영국 왕을 황제로 하는 인도제국을 만들어 직접 통치하에 두었고 인도인의 모든 정치활동에 대한 단속도 강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도인들도 독립을 위한 새로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885년 말 봄베이에서 최초의 국민회의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국민회의운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내부가 급진파와 온건파로 갈라졌고, 또 영국의 공작으로 1906년 전 인도 이슬람 연맹이 결성되어 종교의 대립이 나타났다. 독립운동은 침체한 채 1차대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1차대전으로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 영국은 인도의 협력을 얻기 위해 전쟁이 끝나면 자치를 허용할 것을 약속하면서 인도를 회유했다. 국민회의는 이를 따를 태세를 취했으며 당시 남아프리카에 있던 간디도 이에 응했다. 영국에 대한 협력이 인도의 자치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대는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 대전중 인도는 영국을 위해 150만 명의 병사와 식량, 광석, 고무, 목재 등 총 1억 4,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물자를 부담했다. 이 중 전사자는 3만 6,000명이 넘었고 부상자는 그 두배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의 희생에 대한 영국의 보상은 롤라트 법이었다. 이 법에 의하면 개인이든 단체든 간에 영국의 시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모두 재판없이 투옥할 수 있었다. 전쟁중이던 1915년 병 때문에 귀국하여 조국에 머물고 있던 간디는 즉시 이 법에 대한 저항을 전 인도인에게 호소했다. 이 저항은 전 도시의 파업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모든 시민의 합심에 의해 대도시의 상업이나 교통을 마비시켜 식민지 당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샤티아그라하` 투쟁이라고 한다. 사티아그라하란 `진리를 파악한다`라는 뜻이다. 이 진리란 간디에게 사회에서 악한 것을 배제하는 올바른 힘을 의미했다. 그것은 모든 비폭력 수단을 사용하여 현실 정치에서 압제자의 마음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당국은 이 비폭력 저항 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간디의 저항 운동이 시작된 꼭 일 주일 만인 1919년 4월 13일 암리트살에서 열리고 있던 저항 집회를 영국군이 습격했던 것이다. 여기서 379명이 죽고 1,200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도 전역은 들끓었다. 국민회의는 12월 암리트살에 모여 학살 사건의 책임 규명과 롤라트 법의 철폐 요구를 결의했다. 이듬해 1920년 간디는 국민 회의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영국에 대한 철저한 불복종 운동을 추진해 간다. 식민지 당국의 지배하에 있는 입법 기관에 대한 참가 거부,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 당국 관리하에 있는 학교에 가지 않고 인도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가기, 영국인 은행에 예금하지 않기, 관직 사직 등, 동시에 인도제 면직물의 생산과 소비를 장려하는 스와데시(국산품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전개 속에서 간디의 명망은 높아졌으며 인도 민중은 그를 마하트마(위대한 혼)라고까지 불렀다. 하지만 불붙은 대중 운동은 당국의 탄압 속에서 간디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발전했다. 1922년 2월 인도 북부의 촐리촐자 농민들이 경찰서를 습격, 경관 22명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충격을 받은 간디는 불복종 운동을 중단했고 그도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그 후 1928년까지 투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또한 1930년 시작된 제2차 불복종 운동 때 경찰 무기고 습격이나 시 행정권의 장악이 일부 지역에서 일어났을 때 간디는 단호히 이에 반대했다. 또한 민족 운동의 발전과 나란히 자본가나 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의 투쟁도 많이 나타났는데 간디는 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자본이나 토지 등 기득권에 대한 침범은 간디에게 일종의 폭력으로 보였던 것이다. 간디의 독특한 철학에서 나오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두 번에 걸친 투쟁은 스와라지(독립)를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영화 <간디>에 나오는 불복종 운동 참가자들의 모습, 즉 경찰봉에 맞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전진하는 모습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다음 단계의 투쟁을 위한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실제 이 투쟁의 최대의 공헌은 국민 회의가 인도 전역에 조직되어 모든 계급, 계층의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그들의 민족 의식, 정치 의식을 고양시킨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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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11. 미국의 대통령 선거전에 약소국만 희생된다
안으로는 아첨하고 밖으로는 속임수를 쓰는 것이 부패한 미국정치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유와 민주의 나라'라 일컬어지는 미국.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적당히 번갈아가며 통치권을 주고 받는 나라가 미국이다. 정부는 한 개이나 백악관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둘이라, 공화당 사람이든 민주당 사람이든 서로를 적대시한다.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과 민주당은 사활을 걸고 싸운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야당이 여당에 신랄한 공격을 한다는 것이다. 거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인 면에서의 공격이 많으며, 심지어 인격, 성격 가릴 것 없이 공격할 만한 것은 모두 찾아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안으로는 아첨하고 밖으로는 속임수를 쓴다는 것이다. 안으로 아첨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두 당의 후보자는 유권자들로부터 표를 얻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역대 미대통령 선거에서는 숫제 수염을 길러 남성미를 과시함으로써 여성 유권자들의 표를 끌어들이려는 사례도 있었다. 두 당의 대통령 후보자는 선거기간중 각 주를 돌아다니면서 선거활동을 한다. 유권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 그들은 유순한 아들로 혹은 자상한 아버지로 혹은 충실한 남편으로 가장한다. 그들은 유권자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며, 이것은 자신들의 이미지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다. 상대를 공격하는 데는 상대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는 것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상대의 정보를 대량으로 수집하기도 하는데, 공화당은 클린턴이 월남전 때 병역을 기피했던 사실을 들추어내기도 했다. 상대 후보의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함으로써 자질을 문제삼은 것이다, 총괄하자면 매번의 대통령 선거 때에야 비로소 미국의 유권자는 한 차례 주인 행세를 하는데, 대통령 후보자에게는 유권자가 왕이므로 미국의 유권자가 되어 대통령 당선자 혹은 퇴임 대통령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미국의 대선이 어떤 재난의 시작일 수도 있다. 현재의 서구 국가, 특히 미국은 국내 경제가 침체되고 각 방면의 모순이 불거져 나왔으며, 누적된 문제는 마땅한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몇몇 대통령 선거를 보자면, 공화당 사람이든 민주당 사람이든 동성연애, 낙태, 종족갈등등과 같은 지엽적인 부분만 다루고 있으며 국내문제에 대해서는 해결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정치를 잘 해결하지 못할 때 미국의 정치가들은 그들의 정치적 재능을 국외문제에서 발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미국정치의 이상한 특색이 되었다. 사실 백악관은 국내보다 국외에 훨씬 더 쉽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군사조약을 맺지 않은 곳에 미군을 파견하여 세계의 주목을 끌며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던 것은 역대 백악관 주인이 항상 즐겼던 상투적인 방식이다. 일단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건 전쟁이 발발하기만 하면 국내의 시선을 국외로 돌릴 수 있으며. 이렇게 되면 자신의 정치적 재능을 과시하려는 목적도 달성할 수 있음과 동시에 국내문제를 효과적으로 전도시킬 수 있다. 그래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경쟁에서 국외문제는 국내문제보다 더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 국내문제처럼 조금만 실수해도 다른 이익집단의 분노를 사 시위가 발생하거나 상대편 후보에게로 지지가 옮겨 가는 현상이 야기되지 않기 때문에, 국외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그들 상호간에 공격이나 힐난의 고삐를 과감히 늦출 수 있는 것이다. 1996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있을 즈음 공화당은 대만문제를 들고 나와 맹렬하게 중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국문제를 크게 확대하여 심지어 중국위협론을 제시하면서까지 유권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 민주당 클린턴 정부의 나약함을 공격한다. 중국을 제재하지도 못하고 세계를 영도할 능력도 없는 클린턴 정부는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권익을 보호하지 못하고 이 지역의 형세를 혼란에 빠트리게 될 것이며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부시가 페르시아만에서 큰 전적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4년 전에 클린턴이 부시를 맹비난하고 나섰던 것처럼, 공화당은 지금 클링턴을 맹비난하고 있다. 이런 정치는 부패한 것이다. 연임하려고 한다면 지구의 어느 곳에서라도 문제를 찾아야 하며 아무 일이 없더라도 일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너무 평화로우면 당연히 미국 군사력의 존재가치를 발휘 할 수 없으며 이것은 집권당이 무능하다고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겨도 잘 해결하지 못하면 또다시 상대의 공격목표가 된다. 카터가 이란문제 및 이란에 억류된 인질구출문제를 처리함에있어서 크게 실패하자. 레이건은 이를 물고 늘어져 카터의 연임을 좌절시켰다. 이것은 일종의 악순환으로, 이런 악순환의 과정 속에서 다른 나라들이 희생양이 되고 있다.
미국과 미국의 정치가들 때문에 이 세상의 일은 정말로 기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들이 국회 복도에서 산보를 하거나 하와이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거나 혹은 아프리카의 원시림 속에 있더라도 그들의 머리 속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모종의 음모-예컨대 군대를 파견할 것인지,혹은 어떤 나라에 대해 경제제재를 취할 것인지 등둥-를 만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국 자신뿐만 아니라 서구 맹방들도 그 나라와는 무역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가만히 집에 앉아 커피나 얼음을 탄 코냑을 마시면서 만든 안건이 국회의 상하원에 제출되면, 그가 마음먹은 국가나 지역은 생각지도 못한 재난을 당하게 되고 만다. {뉴욕타임즈}, CNN, {타임즈}, 로이터통신사. 연합통신,유럽공동체, 아프리카통일기구, 동남아국가연맹, 각국의 옵서버, 평론가, 뉴욕주식시장, 런던주식시장. 동경주식시장 등의 기기가 작동하면서 떠들썩하게 되는 것이다. 왕복외교, 분쟁 조정국, 각서, 굴복 혹은 대항. 난민문제, 철군시간표, 군비경쟁억제, 핵실험중지, 핵확산방지, 인권기록, 민주화 과정등등 그가 생각하기에는 대단한 문제들로 그의 정치인생은 숨 돌릴 틈이 없다. 그리고 시간은 정말 빨라 어느덧 미국의 저명한 정치가의 회고록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팔려 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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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목기러기를 날려보낸 목공
나무 다루는 솜씨가 너무나 뛰어난 사람들은 그를 목공의 귀재라고 불렀다. 길가에 버려진 나무토막 하나라도 그 청년의 손에 건네 지기만 하면 때깔 나고 쓸모 있는 것이 되었다. 특히 그는 어릴 때부터 새를 잘 만들었다. 새 중에서도 기러기를 가장 잘 만들었다. 초례상에 그가 만든 목기러기를 놓고 혼례식을 올리면 누구나 복을 받고 잘 산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는 장가를 갈 때는 자기가 만든 목기러기를 안고 신부집으로 가서 전안례을 올리고 혼례를 치르었다. 그리고 첫날밤에는 신부에게 사랑의 징표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목기러기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는 자기가 만든 목기러기를 하늘로 날려 보는 게 평생의 꿈이었다. 예전에 어는 유명한 목공이 나무로 새를 깎아 하늘로 날려보내자, 그 새가 사흘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하늘로 날려보내기 위해 부지런히 새를 만들었다. 한 마리 한 마리 만들 때마다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다.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일단 한번 일을 시작하면 밤잠도 자지 않고 식음까지 전폐했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을 들이고 노력을 기울여도 그가 만든 새는 날지 않았다. 높은 산 위에 올라 목기러기를 하늘로 날려보내면 날기는커녕 그대로 산 아래로 곤두박질칠 뿐이었다. 그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면 되풀이될수록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 그러나 그의 새 만드는 일은 계속되었다. 아무리 온 정성을 다 바쳐도 하늘을 나는 새를 만들 수 없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첫날밤 신부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다. 목공은 어느새 노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목공의 귀재라고 불렀다. 그는 이제 그런 말을 듣기 싫어했으나 사람들은 그가 만든 목기러기 한 쌍을 갖게 되면 집안의 큰 영광으로 삼았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늙은 목공은 어린 손자와 함께 논길을 걸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무논엔 여기저기 이삭들이 떨어져 있었고, 참새들이 그 이식을 쪼아먹으려고 우르르 떼지어 날아다녔다. 목공은 참새 떼를 보자 평생 목기러기 한 마리 날려보내기 못한 자신의 무능함에 대해 가득히 자괴감이 있었다. 그 때 병든 참새 한 마리가 논둑에 앉아 퍼드덕거리고 있는 게 눈이 띄었다. 목공의 손자가 얼른 달려가 참새를 두 손에 담아 올렸다.
"할아버지, 우리 이 참새, 집에 데려가서 살려줘요. 네?"
손자가 목공에게 참새를 건네주었다. 목공의 손에 참새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손끝을 타고 참새의 심장 뛰는 소리도 전해졌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새를 만들어 온 목공이었지만 새의 온기와 숨소리를 느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목공은 한 마리 병든 참새를 살리기 위해 목기러기를 만들 때보다 더 큰 정성을 기울였다. 맑은 물과 모이를 주고 통풍이 잘 되는 방안에 있게 했다. 물론 잠시도 참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참새는 며칠만에 원기를 회복했다. 그리고는 곧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어 작은 날개를 푸덕거렸다. 목공은 얼른 방문을 열었다. 참새가 몇 번 방안을 날더니 문 밖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푸르른 가을 하늘 속으로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그때 목공은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목기러기를 하늘로 날려보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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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의 동산
예루살렘의 동쪽, 올레베트산 기슭에 있는 올리브의 동산.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수난에 앞서 최후의 만찬을 가진 다음 제자들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 그는 마지막 기도를 드리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도록 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나의 아버지시여,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하여, 자기가 갚으려 하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추악한가를 보고 또한 다가오는 수난을 슬퍼했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로 돌아온 '예수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잠들어 있음을 보고,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하고 깨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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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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