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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00 호
단기 4340. 1. 1 (음력 11.13) / 발행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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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5.16 박정희의 군사구테타 이후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면서 일본의 요구에 의해 우리는 서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연호는 단기였습니다. 인터넷시대이고 무역의 중요성과 세계화 속에서 단기는 불편합니다. 그러나 알고는 있어야 합니다. 왜 대한민국이 2천여년의 역사를 스스로 날려 버리고 서기를 쓰는지 한국인이라면 알고 있어야 합니다. 홈페이지의 게시판날짜도 단기로 표기되도록 하고 싶지만 지식이 모자라 수정을 못하고 있습니다만 단기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설날은 다음달에 옵니다. 오늘은 서양의 새해입니다. 우리민족의 새해는 다음달입니다. 새해라며 너무 들뜨지 마시고 늘 새로왔던 매일매일처럼 오늘을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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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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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낡았으나 편안한 의자가 하나도 없는 집은 혼이 없는 곳. / 메이 사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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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06 창조적 혼란과 언론: 로이터
지구촌 최대 거미줄 뉴스 네트워크 로이터Reuter 통신은 현재 세계 79개국에 1,800여 명의 특파원을 주재시킨 뒤 세계 각지에서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는 각종 뉴스를 취재, 분초를 다퉈 이를 전세계 150개국 7천여 개 신문사에 판매하고 있다. 영국신문협회(PA)와 신문발행인협회가 공동 소유하고 있는 이 통신사는 AP, AFP, UPI 등 여타 '4천왕'들과는 달리 단지 사건기사 서비스만 하는 게 아니라 전세계 기업체들에게 최고급 금융, 경제 정보를 신속히 제공하고 있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금융정보업체이기도 하다. 로이터는 1994년 6월부터 퍼스널 컴퓨터 단말기를 통해 주요기자회견 영상을 유럽 전역에 공급하는 서비스를 시작하여 통신과 방송사이의 장벽을 가장 먼저 허물어버렸다. 로이터의 이같은 시도는언론부문에서 멀티미디어시대를 가장 앞서 개막한 것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또 로이터는 1994년 10월부터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는 등 멀티미디어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여 귀추가 주목되고있다. 로이터 통신이 문을 연 것은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의 일이다.당시 독일에서 출판업을 하던 유태계 파울 J.로이터는 정치적 박해를 피해 1851년 영국으로 이주해 런던거래소 부근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전신사무소를 열었다. 처음에 그는 은행, 중개소, 기업체에 금융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상업통신에 주력했다. 그러나 그 무렵 "모닝애드버타이지" 등 영국의 일간신문들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자 신문발행인들을 설득해 고객으로 가입시키면서 뉴스통신사로 변모해 나갔다. 그 후 당시 세계최대강국이던 '영국의 눈과 귀'로서 성장을 거듭해, 현재에는 AP, AFP, UPI 등 여타 세계 4대 통신사 중에서도 가장 뉴스가 빠르고 신뢰도가 높으며 특히 아시아 지역 뉴스에 정통한 매체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로이터 통신은 1925년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던 영국신문협회로 경영권이 넘어갔으며 1941년에는 완전히 영국신문협회 소유가 됐다. 영국신문협회는 같은 해 로이터 통신의 주식 절반을 런던 신문사주들의 대표기관인 신문발행인협회에 매각했고, 1947년에는 영국연방 산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신문협회로까지 회원자격을 확대함으로써 로이터는 명실상부한 영국연방의 공용정보센터가 됐다. 1980년대 들어 로이터는 큰 위기를 맞았다. 신속성과 생생한 현장성을 무기로 앞세운 CNN 등 24시간 뉴스방송이 출연하는가 하면, 글로벌 시대를 맞아 각 기존언론매체들이 독자적 해외취재 네트워크를 크게 강화함에 따라 존재가치가 급속히 하락해, 경영난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이에 1991년 대대적 인사개편을 단행해 30년간 로이터에서잔뼈가 굵은 베테랑 기자 피터 조브(53)를 사장에 전격 임명했다. 조브는 사장 취임사에서 "로이터는 그동안 명성을 먹고 살았다"고 질타하며 '살을 깎는 경영혁신'과 '뉴스공급자보다 뉴스수요자를 중시하는 시각혁명'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조브는 기자들에게 관급기사에 안주하지 말고 생생한 삶의 현장을 취재하라고 요구했고. 특히 세계최대 성장지대로 자리매김된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지역에 대한 취재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인도, 콸라룸푸르, 일본, 자카르타 등지에서 오랜 기간 특파원 생활을 한 아시아통 조브의 이같은 경영전략은 그대로 적중해 로이터는 다시금 생동감 넘치는 정보산업체로 재탄생했다. 영국의 최고 권위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와 관련, 조브를 관행에 젖어 있던 늙은 로이터를 1990년대의 대표적 언론그룹으로 변화시킨 인물이라고 높게 평했다. 조브 사장의 혁신경영 중 특히 높게 평가된 대목은 철저한 인재제일주의이다. 기자출신답게 "통신사 조직은 창조적 혼란이 유지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지론을 조브는 "통신사는 정예기자들이 모여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들이 최대한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경영자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 이라면서 취재여건 강화에 전력함으로써 기자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그 결과는 양질의 기사로 나타났다. '편집권 독립'과 '인간에 대한 투자'로 다시 태어난 로이터. 세계 언론계로부터 로이터가 4천왕 가운데 왕 중 왕으로 꼽힌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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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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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천사가 가져다 준 행복
나는 항상 그 할머니를 퇴근 길 집앞 골목에서 마주쳤다. 허름한 보랏빛 외투와 버선이 삐죽 나온 흰 고무신에다 국방색 모자를 눌러 쓴 할머니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고물 장사를 하신다. 이리 저리 리어카에 실어 드렸더니 이빨이 다 빠진 잇몸을 활짝 드러내면서 어린애처럼 좋아하셨다.
"젊은이! 고맙구먼. 복 많이 받을 거여."
어느 날은 리어커를 끌고 가는 게 너무 힘들어 보여서 얼른 밀어 드렸다.
"젊은이! 이 늙은 것이 고물 장사한다고 돌아 다니는 게 우습지?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네."
할머니는 이 년 전에 할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보냈는데, 하나뿐인 아들마저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게 되었다. 그나마 있던 집은 원인 모를 화재로 날려 버렸다. 그런 사연을 듣고 있자니 할머니가 너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하늘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많은 고민 끝에 나는 그 할머니를 돕기로 했다. 나는 한달 용돈 팔만원에서 매월 만 오천원씩을 떼어 모으기 시작했다. 나역시 막노동을 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벌어 먹고 사는 입장이지만 그 할머니의 딱한 처지를 그냥 두고 볼 수 만은 없었다. 그렇게 모은 돈이 어느 정도 되어 나는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 돈을 할머니 집에 몰래 가져다 놓았다. 며칠 뒤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무척 반가워하며 말했다.
"글세, 어떤 사람이 우리집에 돈 봉투를 두고 갔어. 누군지 몰라도 그 사람은 틀림없이 천사일 거야."
얼마 되지 않는 돈이었는데 저렇게 기뻐하시다니...... 이번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휘영청 밝은 달이 유난히도 따뜻하게 느껴지던 밤이었다.
배한호 님/부산시 진구 부암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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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98 - 다양한 철학유파의 용광로: 오늘의 미국철학 그때 세계에서는 1975년: 전유럽 암보수뇌회의(헬싱키, 35개국) 1979년: 미국, 중국 국교정상화
존듀이와 프레그머티즘을 계기로 순수한 미국철학은 끝난 셈이다. 미국 자체가 세계적인 국가로 성장했고, 지금은 미국철학이나 독일철학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지구촌의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별을 한다면 영미철학과 대륙철학 으로 나누어보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 같다. 문화의 유형이나 언어의 분포로 보아서도 그럴수 밖에 없어진 까닭이다. 미국 철학이 세계적인 철학으로 등단하는 데는 중요한 계기가 한 가지 생겼다. 그것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수립되면서 정치적 탄압과 사상적 통제가 극심해지면서 많은 독일 및 독일어 문화권의 학자, 사상가, 철학자들이 자유가 보장된 새로운 나라 미국으로 대기 망명한 데서 비롯된다. 유대인이나 유대인과 결혼을 한 사람, 유대인 족보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히틀러의 정권 밑을 떠났다. 그들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망명해왔다. 아인슈타인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자유를 갈망하는 사상가와 철학자들은 나치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소련의 공산주의 치하에서 망명하는 사람들도 프랑스 또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수는 엄청난 것이었다. 1920년대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빈 학단이라는, 수학, 과학, 철학을 중심삼는 학자들이 (인식) 이라는 학술지와 더불어 새로운 철학의 분야를 개척하고 있었다. 그 학회에 속하는 철학교수들의 많은 수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래서 미국은 학자와 교수 풍년을 맞이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우수한 대학들은 경제적 보수를 앞세워 유럽 여러 나라에서 명성 있는 학자들을 대거 초청 해왔다. 신학자 가운데 파울 틸리히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며, 시카고 대학의 유럽의 최고 종교사학자였던 엘리아데 같은 학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미국 대학의 탁월한 교수들은 서툰 영어발음이 인기가 있었고 유행이었다. 교회의 훌륭한 목사들은 영국식 영어로 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즈음에 미국으로 망명한 철학자들만 해도 적지 않은 수였다. 이탈리아의 피렌체가 사상적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를 가능케 했으며, 학자들이 모여든 적이 있었다. 미국이 바로 그런 혜택을 받게 된것이다. 프랑스에는 상당히 많은 소련 철학자들이 망명했다. 베르다예프 같은 사람도 그러했다. 솔제니친 까지도 미국에 머물렀을 정도였다. 이와 반대로 정신 및 사상적 자유를 억압한 히틀러 정권과 소련은 그 많은 지성인들과 학자들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 50년대와 60년대 전반기까지는 미국식 영어가 아닌 교수들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미국 학생들이 예기 하고 있다. 하버드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소로킨도 러시아에서온 학자였다. 미국에서는 교수들의 봉급이 개인계약으로 되어 있고, 대학들의 예산이 그 당시에는 풍부했기 때문에 유럽의 저명한 학자들은 미국행은 꺼리지 않았다. 프랑스의 학자들이 제일 이동이 적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이 되면서 프래그머티즘은 전통적인 미국 철학자들 의 과제로 남게 되고, 많은 미국대학에서는 과학적 논리주의가 성행하게 되어, 그것이 오늘의 언어분석의 철학으오 언어분석의 철학으로 흐름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과학적 논리주의는 오스트리아의 빈 학단의 철학자들이 계승, 발전시켰고, 언어분석 철학은 영국 학자들을 통해 미국으로 접목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들까지도 철학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타고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륙의 현상학파와 영미계통의 분석철학이다. 아주 가까운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 두가지 흐름이 서로 연결되어 지식학 같은 영역에서 호흡을 같이하고 있으나, 미국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온 교수들은 역시 분석철학 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공부한 학자들은 현상학과의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는 또 어떤 철학으로 발전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철학, 동양철학과 더불어 서양철학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당분간은 서양철학을 배우며 들여오는 과정을 밟아야 할것같다. 우리 철학자들 가운데는 동서양 또는 한국철학과 서양철학을 접목해서 새로운 철학을 시도해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바람직하지 못한 위험성도 따르고 있다. 한국철학과 동양 및 중국철학은 문제적 연결성이 있어 그 개척이 가능할지 모르나, 서양철학은 전통과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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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식사 후 "양이 찼느냐?"에서 '양'은 '위장'의 '위'에 해당하는 토박이말
음식을 먹은 후에 '양이 찼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의 '양'은 '질량'의 '양', 즉 한자어 '양'이 아닙니다. 이 '양'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양'은 '위장'이라고 할 때의 '위'에 해당하는 우리말입니다. 그래서 쇠고기 중에 '곱창'도 있고, '양'도 있지요. 그래서 '양이 찼느냐?' 하는 것은 '위가 찼느냐?'는 뜻입니다. 즉 '배가 부르냐?'는 뜻이지요. 그리고 '곱창'의 '곱'은 '기름'이란 뜻을 가진 우리말이었습니다. '눈곱'의 '곱'과 같은 것입니다. '곱창'은 '곱'+ '창자'의 '창'이랍니다. 기름이 많은 창자이지요. '애'가 '창자'라는 사실 은 이순신 장군의 시조에 '나의 애를 끊나니'에서 배워, 알고 계시겠지요.
한 가지 더 말씀 드리지요. '폐'는 우리말로 '부아'(옛날에는 '부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아가 난다.'고 하지요. 화가 나면 숨을 크게 들어 마셔서 '허파'가 크게 불어나지요. 그래서 '부아가 난다'는 '화가 난다'는 뜻이 되었습니다.
우리 국어에서는 이렇게 신체 부위를 가지고 감정을 표시하는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몇 예를 들어 볼까요? 머리 아프다. 골치가 아프다.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귀가 가렵다. 귀가 따갑다. 눈꼴이 시다. 눈물이 날 지경이다. 부아가 난다. 손이 근질근질한다. 애가 탄다. 애간장을 녹인다. 입이 나온다. 핏대가 난다. 이 이외에도 무척 많지요.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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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8장 화려항 명성, 처참한 최후
운명이 바뀐 피의 일요일 - 니콜라이 2세 / 레닌
로마노프왕조의 최후와 니콜라이 2세
니콜라이 로마노프는 아버지 니콜라이 1세가 죽자 스물 여섯 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1894년 11월 1일 오후 2시 30분. 그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이자 절대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기뻐하기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내게 어떤 일이 닥쳐올까요. 러시아는 장차 어떻게 될까요. 나는 황제가 될 준비를 하지 못했어요. 나는 황제가 되길 원하지 않았어요. 나는 통치하는 일을 전혀 몰라요. 그는 국장을 치른 뒤 일 주일이 지나서 알릭스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알릭스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며, 독일의 공주였다. 결혼식에 앞서 루터파 신자인 공주는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였고 러시아의 세례명도 받았다. 공주도 어떤 불행을 예감한 듯 이날의 일을 일기에 이렇게 써 두었다. 내게는 우리의 결혼식이 마치 장례미사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검은 드레스가 아니라 흰 드레스를 입었다는 것 뿐이었다. 황제의 대관식 축하행사는 굉장하였다. 모스크바 호딘카 연병장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과 맥주가 배급되었다. 약 50만 명 정도가 새벽까지 흥겹게 놀았다. 그러다가 이른 아침 음식이 부족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군중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줄을 쳐놓고 음식을 나누어 주는 가건물을 습격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밟혀 죽었다. 불길한 예고였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 1세는 영토확장을 위해 페르시아, 터키 등과 전쟁을 치뤄 기존의 거대한 국토에다 새로운 영토를 더했다. 1880년대에는 러시아의 국토가 지구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였고 러시아 제국의 인구는 1억 2천5백만 명이 넘었다. 이렇게 방대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니콜라이에게 벅찬 일이었다. 그는 결단력이 부족한 통치자였다. 니콜라이는 러시아가 겉보기와는 달리 그 기반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산업이 꾸준히 발전되고 있다는 관리들의 거짓 보고에 그저 만족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톨스토이로부터 그는 편지를 받는다. 러시아 사람들은 가혹한 학정에 신음하고 있다는 것과 황제의 대신들은 위기를 맞은 통치자를 돕는데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만약 황제가 백성들의 바램을 계속 외면하고 부호들에 의해 독점된 토지를 재분배하지 않으면 혁명이 불가피하게 될 것 이라는 것도 경고했다. 1905년 1월 22일 아침 3만 명의 군중들이 동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페테스부르크의 노동자들은 공정한 대우를 위해 황제에게 탄원하려고 무기도 들지 않고 일요일이라 좋은 옷을 입고 성상과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를 들고 동궁으로 향하는데, 군인들은 즉각 발포를 시작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200명의 노동자가 죽었으며 800명이 부상 당하는 이 참사를 역사는 피의 일요일 이라 부른다. 니콜라이의 동궁은 바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계속되는 파업, 농민들의 봉기, 군인들의 반란에 직면해서도 니콜라이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일부는 때늦은 대책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하여 일어난 대규모의 총파업이 온 나라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혁명가인 레온 트로츠키가 소비에트(노동자 농민평의회) 를 구성했다. 트로츠키는 황제를 의지도 없고, 목적도 없고, 상상력도 없는 이 마법사는 고대와 현대 역사의 어느 폭군보다 더 지독하다 고 혹평했다.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혁명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 는 러시아말로 다수 를 뜻하는데 이 정당의 명칭은 레닌이 득표에서 많은 표를 획득했을 때 붙여졌다. 레닌은 이 정당을 통해서 황제의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마르크스의 정치 경제사상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1905년 정치적 위기에 놓인 니콜라이는 할 수 없이 입헌군주제를 채택한다는 내용의 10월 선언 을 발표했다. 1914년 6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두 달 뒤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자 영국이 분노했고, 독일이 중립국 선박을 공격하자 미국도 영국, 프랑스, 러시아편을 들기 위해 참전했다. 이로써 유럽 국가간의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독일군은 수송과 통신면에서 모두 우수했다. 러시아는 25만 명의 병사를 전사 또는 부상으로 잃었다. 한편 왕실에서는 알렉산드라가 네 명의 딸을 낳은 뒤 아들 알렉세이를 낳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황태자는 혈우병을 갖고 태어났다. 알렉산드라는 황제가 될 아들을 돌보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녀는 가짜 성자인 라스푸틴에게도 매달렸다. 그는 왕실을 믿고 권력을 남용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계속 실패하고 있는 동안 라스푸틴은 1년에 국방대신, 농무대신을 7명이나 갈아치우는 등 국가의 내정을 주무르고 있었다. 이에 분노한 보수파 당원이 그를 암살해 버렸다. 황제는 혁명세력의 수중에 놓여지게 되었다. 니콜라이는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양위하기로 했다. 3월 15일, 그는 담담하게 사무적으로 퇴위성명에 서명했다. 이로써 304년간의 로마노프 왕조는 갑작스럽게 끝장이 나버렸다. 그의 가족들은 극비리에 어느 조용한 곳으로 옮겨졌다. 1918년 4월, 예카테린부르크의 한 저택으로 이송된다. 우랄지역 소비에트의 감시하에 놓여 있는 그들 황족에게는 사생활이 허용되지 않았다. 볼셰비키의 공산당은 적러시아, 황제 지지파는 백러시아라 불렸는데, 백러시아 군대가 황족을 구출하려고 한다는 보고를 받은 레닌은 비밀경찰 지역 책임자인 유로프스키에게 황족과 하인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유로프스키는 7월 18일 새벽 2시에 황족을 깨웠다. 전진해 오는 백러시아 군대를 피해 철수해야 하니 어서 옷을 입으라고 서둘렀다. 황족과 하인은 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1층의 작은 방안에 모여 있었다. 유로프스키는 트럭 엔진소리를 효과음으로 틀어놓고 병사들을 데리고 그 방으로 들어가서, 겁먹은 니콜라이에게 다가가 지역 소비에트이 명령으로 그와 가족은 총살한다고 선언했다. 니콜라이가 벌떡 일어나 뭐냐? 하고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유로프스키는 권총으로 황제의 머리를 쏘았다. 그의 부하들은 나머지 가족과 하인들에게 발포했다. 약 20분 동안 총탄을 난사하였다. 어찌나 빈틈없이 총을 발사했는지 공주들이 입고 있던 코르셋에 박힌 보석들이 산산조각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몇몇 사람들은 십자가를 그리며 죽어갔다. 병사들은 시체를 트럭에 싣고 광산으로 가져갔다. 시체를 토막낸 뒤 거기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그런 다음 타고 남은 유골 위에 다시 황산을 부었다. 로마노프 황족과 하인들의 유해라고도 할 수 없는 나머지를 광산 갱 아래로 쳐넣어 버렸다. 일주일 뒤, 황족을 구출하려는 군대가 에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는 굶어서 죽어가는 알렉세이의 개 한 마리만 발견되었을 뿐. 이것이 로마노프 왕조의 최후였다.
불꽃 같이 산 혁명가 레닌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죽은 날은 1918년 7월 18일이었고, 레닌이 권좌에 앉은 날은 1918년 7월 10일이었다. 그는 원수가 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초대 헌법을 공포하였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28년이란 세월의 노고가 뒤따랐다. 이제 정점에 막 도달했는데 레닌의 몸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창백한 안색과 움푹패인 눈 둘레, 뇌 전체가 동맥경화에 침범되어 있었던 것이다. 레닌은 1870년 4월 22일 심비리스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형 알렉산드르가 러시아 전제군주를 암살하려다가 들켜서 처형당한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형이 읽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그도 읽기 시작했다. 1891년에는 페테스브르크대학 법학과에서 전과목 우등생으로 졸업한다. 이 시기에 레닌은 노동자를 중심으로 혁명을 주도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1897년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그는 <이스크라(불꽃이라는 뜻)>라는 지하 신문을 만들었다. 그 뒤 1905년 러시아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레닌은 숨어서 글만 쓰고 있었다. 10월 중순 당이 무장봉기하여 카렌스키 정부를 무너뜨리자 드디어 레닌이 새 정부의 의장이 된다. 1921년 말부터 레닌은 뇌동맥경화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1918년 카플란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한 후유증도 있었다. 1922년 4월 외과의들은 레닌의 몸 속에 박혀 있는 두 개의 탄환중 하나밖에 뽑아내지 못했다. 그 이상의 수술은 레닌의 용태로 보아 무리였기 때문이다. 1917년 모스크바 근교의 미켈손 공장에서 모임이 끝났을 때 레닌은 판야카플란이라는 사회혁명당의 여자 투사가 쏜 두 발의 탄환을 어깨와 가슴에 맞았는데, 5년을 끈 것은 그가 수술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쇠약해 있었기 때문이다. 두통이 심해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구토와 복부의 통증, 가끔 생기는 언어장애의 증세를 보고 독일 전문의 폴터 교수는 심상치 않은 때가 온 것임을 예감했다. 1922년 5월 26일, 레닌은 뇌졸중을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졌다. 혈괴가 동맥을 막은 혈전증이다. 세 번째의 뇌졸중, 이번에야말로 언어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강인한 이마를 가진 레닌은 식물인간으로 8개월을 살다가 네 번째의 뇌졸중으로 1921년 1월 21일 모스크바 근처 고르키에서 사망했다. 권좌에 앉은 지 겨우 5년,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들의 삶에는 그토록 잔인한 일은 많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럽지 않다. 우리 세대는 놀랄만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일을 성취했으니까. 우리가 처한 조건에서 불가피했던 모든 잔혹한 일은 결국 이해되고 변호될 것이다. 모든 것이. 이것은 레닌이 마지막 투병기간에 절친한 친구 막심 고리키와 혁명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면서 남긴 말인데, 그대로 그의 묘비명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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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54. 1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킨 두 암살 사건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보스니아(당시 오스트리아령)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울린 두 발의 총성이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세르비아의 비밀 결사 소속 한 청년이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권총으로 암살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라예보 사건`이다. 이 사건이 1차대전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기는 하지만 전쟁의 검은 그림자는 이전부터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19세기 말 유럽의 열강들은 독점 자본주의 단계로 들어서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으며 아프리카, 발칸 반도, 중근동, 동아시아 등의 지역에서 시장과 식민지 분할을 둘러싸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3국 동맹국과 러시아, 프랑스, 영국의 3국 협상국으로 나뉘어져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대립의 한 초점이었던 발칸 반도는 당시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릴 정도였다. 15세기 이래 발칸 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7세기가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고 이를 기화로 유럽 열강들은 저마다 발칸 반도에 대한 지배욕을 드러내게 된다. 여기에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도 독립의 의지를 높여 가고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아직 힘이 미약해 이웃의 강대국인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이런 독립 의지의 고양과 열강들의 간섭은 발칸 반도를 국제적 분쟁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한편 1389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패한 이래 강대국의 지배를 받다가 1878년에야 독립을 쟁취한 세르비아의 국왕과 귀족들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가 1908년 이 두 지방을 병합하여 세르비아 인들의 소망을 꺾어 버렸고 세르비아 인의 반오스트리아 감정은 고양되었다.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18세의 청년은 이런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분쇄하려는 민족주의 비밀 결사의 일원이었다.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했다. 하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은 복잡한 정세는 이 사건이 두 국가 사이의 전쟁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유럽 아니 전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갈 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암살 사건이 있다. 그것은 프랑스 사회당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장 조레스의 죽임이다.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해 7월 31일 밤 장 조레스는 파리의 한 카페에서 다른 사회당 간부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도중 총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깨지고 조레스도 쓰러졌다. 주위는 그가 흘린 피로 흥건했다. 의사가 곧 왔지만 머리에 총을 맞은 조레스는 금방 사망하고 말았다. 체포된 범인은 라울 발렝이라는 국가주의에 사로잡힌 청년이었다. 조레스는 왜 암살당했는가? 20세기 초 유럽 각국에서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 운동은 이미 주요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다가오는 전쟁을 각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면서 전쟁 반대를 외쳤다. 당시 사회주의 정당의 국제 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은 이 전쟁에서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국민 대다수는 피를 흘릴 뿐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수차례 반전을 결의하고 각국 정부에 평화 외교를 요구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공동 행동을 호소했다. 프랑스 사회당의 장 조레스도 다가오는 전쟁을 막는 반전 평화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던 참이었다. 조레스의 암살 사건은 전쟁 반대를 외치는 사회주의와 평화주의자에 대한 호전적인 국가주의자의 테러였다. 그리고 조레스를 죽인 총성은 사라예보에서 울릴 총성에 덧붙여 전 유럽이 아니 전 세계가 전쟁으로 돌진하고 있다는 신호탄이었다. 조레스가 암살당한 다음날 프랑스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전쟁 반대의 목소리는 조레스의 죽음과 함께 사그라들고 있었다. 조레스가 암살당하기 며칠 전인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한 상태였다. 러시아를 필두로 유럽 각국이 줄줄이 전쟁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 참이었다. 7월30일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리고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바야흐로 이후 4년간이나 계속될 최초의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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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7. 사라지지 안는 매카시즘
지금 미국은 후기 매카시즘시대로 들어선 것 같다. 이 '매카시즘의 논리를 전수받은' 자들이 비밀리에 법을 세우고, 대만 총통을 워싱턴으로 초청하고 있다. 그들은 또 미국회에서 티베트가 중국을 벗어나 독립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승인하고, 독립적인 대만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앉힐 것을 지지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 후기 매카시즘주의자들은 매카시시대의 어둠과 부끄러움들을 다시 미국인에게 선사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미국에 눈꼽만큼의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마거릿 제시 스미스가 '양심선언'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공화당이 타인을 멸시하고 모독하기 위해 앞세우는 네 기사 즉 공포. 무지. 고집, 비방에 기대어 정치적 승리를 얻는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하리라 여긴다. 매카시즘시대는 미국 정치의 가장 어둡고 가장 지저분한 시대였다. 그것은 정의감을 가진 모든 미국인을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생활로 몰아넣었다.그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이미 40년 전이었다. 매카시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정치적으로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 미국인들은 다시 깨어나 그 시대와 역사를 복습해 볼 필요가 있다. 1960년 위스콘신의 요셉 R. 매카시 상원의원은 정부기관에서부터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자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은 미국을 지키고 국내외의 적들로부터 침략을 막는 애국자가 되었다. 매카시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터무니없는 망언과 교묘한 낭설로 타인을 매도했다고 분노했다. 매카시는 공화당 상원의원으로서, 트루먼 정부가 임명한 국무원들은 모두 매국노이며 그들은 국가를 버렸다고 비난하면서 덧붙여 공화당이 정권을 잡아 공산주의를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0년 초부터 1954년 12월까지 매카시는 국무원 내에 국가전복 분자세력들이 가득하다고 부르짖었다. 이 악명 높은 공화당의원은 동료의원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미국 전역은 매카시주의의 그늘에 가려졌다. 그 기간동안 미국은 실로 명실상부한 공포의 경찰국가였다. 누구든 언제든지 악의성 고발로 국가세력을 전복하려는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안정이라곤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어느 누군가가 일어났다. 그들은 더이상 매카시의 터무니없는 거짓말과 멸시와 비방의 횡포를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바로 공화당 상원의원인 뉴햄프셔 주의 찰스 토비. 버몬트 주의 조지 D. 이컨, 오리건 주의 웨이스 L. 모스, 미네소타 주의 에드워드. 사이크, 뉴욕 주의 오웬 M. 애버스, 뉴저지 주의 로버트 C. 헤드릭슨, 그리고 맨하탄 주의 마가렛 제시 스미스였다. 그들은 매카시의 책략에 반대하는 '양심선언'에 서명했다. 이 선언은 상원의원 중 유일한 여성의원인 스미스가 초안을 잡고 아울러 상원에서 발표되었다. 지금 이 여성 상원의원의 '양심선언'을 읽으면 정의감과 진실이 가득한 그녀의 인격에 감동할 것이다. 또 미국 국회의원들의 인격과 태도를 지금과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스미스는 '양심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수파 정당의 성원으로 우리에겐 우리 정부의 정책을 결정할 권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책임은 분명 있습니다. 건설적인 비판을 통해 문제를 분명히 밝히며, 성실하고 진실되며 책임있는 시 민의 행동으로 이 공포감을 없애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부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의 어머니, 아내, 언니, 동생, 딸들 이 그들의 가족이 미 상원의 변론 중에 정치적 공격을 받게 된다면 그들의 심정은 어떠할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변론' 이라는 단어는 깊이 생각하고 고심해서 하는 말입니다. 미국 상원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의원들에게 공식적인 이 자 리를 빌어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나돌고 있는, 무책임하며 사람들의 귀를 한쪽으로 쏠리게 만드는 일련의 소문들에 대해 전혀 자부심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 허무맹랑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고발들에 대 해서도 부끄럽습니다. 너무도 거만하고 신중하지 못하며 보복성이 가득한 질책들에 대해서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의원들이 멸시와 비방 속에 상처받은 것들, 타인의 명예를 훼손시 키고 국가의 통일에 장애를 주면서 정치적 이익만 가지려는 행동에 나는 화가 납니다. 우리 의원들이 외부인사를 비방하는 것에 대해 우 리 자신은 면책특권이라는 보호막을 부여받고, 의원석에 근엄하게 앉아서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나는 부끄럽습니다. 한 사람의 미국인으로서 나는 민주당 정부가 어둠과 혼란을 감추 고 태평한 것처럼 꾸며 대면서 무조건 이 허물들을 덮으려고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공화당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방 하고 정치적 박해를 가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스미스 의원의 '양심선언' 속의 이 말들은 매카시를 향한 것이며, 동시에 매카시주의자들에게 던진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권력을 쥐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진 것이었다. 그것은 양심의 소리였다. 이러한 선언이 발표된 지 40년이 흘렀다. 그러나 오늘날의 후기 매카시주의자들이 다시금 이 '양심선언'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겠는가? 매카시의 논리에 따르자면 오직 '반공'만이 올바른 것이었다. 알다시피 중국은 공산당이 이끄는 국가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를 반대해야만 그는 옳은 것이고 애국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중국을 반대할 이유를 찾아야했다. 그러니 가장 좋은 돌파구, 다시 말해 중국에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대만독립을 부추기고 달라이 라마의 세력을 지지해 줌으로써 중국으로부터 대만과 티베트의 분리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 후기 매카시주의자들 은 스미스가 질책한 것처럼 타인을 멸시하는 네 기사(騎士), 즉 공포, 무지, 고집, 비방으로써 정치적 승리를 얻고 자한다. 국회라는 공식적인 연단을 빌어 헛소문을 퍼트리고 대중을 현혹시키며 세계평화와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 나는 양심이 있는 미국인이 라면 모두 이를 부끄러워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후기 매카시즘은 이제 과거와 같은 시장 기반을 상실했다. 냉전이 이미 종식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과장해서 떠벌인 바와 같은 미국에 대한 그런 위협은 없다. 사람들도 다시는 미국 국회 내에 국가전복세력들이 가득 찼다고 믿지 않는다. 매카시와 같은 심리를 가진 사람, 즉 지금 내가 말하는 후기 매카시주의자들은 더이상 과거 매카시가 거둔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의 분위기는 오늘날과 다르다. 그때는 2차 대전이 끝난 지 오래지 않은 때라 전승국이든 패전국이든 많은 나라들이 전후의 폐허에 놓여 있었다. 오직 미국만이 전쟁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에 사실상 영국을 대신해 동맹국들의 맹주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고, 이로써 그들의 발언권이 널리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매카시는 수많은 영웅이 흘린 피의 대가로 얻은 지위를 마음대로 가지고 날뛰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후기 매카시주의자들이 상대하는 세계는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원화된 세계다. 미국이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천하를 통일할 방법이 없다. 문화적으로도 갈수록 매카시시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많아져서 미국의 이러한 매카시주의로의 복고에 대해 상당히 불만스러워 한다.
우리는 냉전종식 후 미국의 냉전전문가들이 실업을 걱정하며 우왕좌왕하던 모습도 기억해야만 한다. 이들은 소련과 동구에 겨누었던 목표를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돌렸다. 그들은 과거의 부활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시장경제로 나아가고 있고, 정치, 경제 등 각 분야가 그들도 예측하지 못했던 수준으로까지 발전해 나가고 있다. 한편 구소련 과 동구사람들은 그들이 막 서구의 모델을 따르려 할 때 미국의 냉전전문가들이 단지 이익만 앞세워 의리를 저버렸던 것과, 또 냉전시대 때 만큼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명분상의 지원도 없고 경제적 협력도 없을 때, 결국 자기 문제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세계의 규율은 '복숭아를 먹으려면 직접 심어라'는 중국 속담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후기 매카시즘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소홀해서도 안 되고 또방심해서도 안 된다. 그들이 미국 내에서는 스미스의 말처럼 그럴지 몰라도 국외에서만큼은 질서교란의 기회를 결코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성가시게 할 것이며 지금도 무언가 계책을 꾸미고 있다. 그들은 분명 부추기고 선동하는 재주가 있다. 특히 중국과 국가문제에 있어서는 은근히 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리하여 아시아에 손을 댈 수 있는 구실을 얻음으로써 위협을 느킨 유권자들의 표를 획득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후기 매카시주의자들에게 말해야 한다. 만약 역사의 부끄러운 심판대에 서고 싶지 않다면 반성하고, 사람됨의 기본원칙을 배우며, 최소한의 인격마저 포기하지는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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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배추흰나비의 기쁨
산기슭 배추밭에 배추 애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30 밀리미터 정도 되는 몸길이에 녹색의 피부를 지닌, 잔털이 빽빽하게 나 있는 그는 매일같이 배추 잎을 갉아먹는 것이 일이었다. 한없이 먹을 것도 많고 초봄의 햇살도 눈부셔서 사실 그는 요즘 부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밤마다 배추잎 위로 기어올라 밤하늘을 바라보면 별빛마저도 눈이 부셔 행복했다. 그런데 그에게도 고민이 하나 생겼다. 아침저녁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배추밭을 찾아보는 경애 할머니가 배추밭에 와서 화를 벌컥 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고, 이놈의 벌레들 때문에 배추 농사 망치겠네. 껍데기만 남기고 다 갉아 치우니, 아이고, 이걸 어떡하나? 벌레 먹은 배추잎 같다는 말이 왜 생겼는지 이제 알겠네."
그는 경애 할머니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오늘 또 아들 내외가 한바탕 부부 싸움을 했나 보다. 그래서 배추밭에 와서 화풀이를 하나 보다'하고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경애 할머니는 며칠째 배추밭에 올 때마다 그런 말을 해대었다.
"아이고, 이놈의 벌레들 때문에 정말 배추 농사 못 짓겠네. 오늘은 꼭 애비한테 얘기해서 이놈들을 약을 쳐서 다 죽여 버려야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배추 한 포기도 못 건지겠네."
경애 할머니가 약을 쳐서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건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날 밤, 그는 잠이 오지 않아 건너편 배추 포기에 사는 친구한테 살짝 말을 걸었다.
"친구야, 경애 할머니가 요즘 왜 그래? 난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응, 그건 우리가 배추 잎을 갉아먹기 때문이야." "우리가 배추 애벌렌데, 배추 잎을 먹지 않으면 무얼 먹고살아?" "글쎄 말이야. 사람들은 우리를 배추잎에 기생하는 해충이라고 해." "해충? 그게 무슨 뜻인데?" "사람들한테 해로움을 주는 벌레라는 뜻이야. 사람들이 자기들 입장에서 자기들 멋대로 지어낸 말이야." "아냐. 난 해충이 아니야. 나는 그냥 배추 애벌레야."
그는 눈물이 막 나왔다. 사람들이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울지 마. 지금은 울어도 아무 소용없어. 우리가 배추흰나비가 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해.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우리를 또 익충이라고 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익충이라는 말도 사람들이 자기들 입장에서 마음대로 지어낸 말이야. 사람들한테 이익을 주는 벌레라는 뜻이야. 우리가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농작물들의 꽃가루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주는 일을 한다고 그러는 거야." "우리가 나비가 된다고?" "그럼, 우리가 나비가 되어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씨앗을 맺지 못해. 배추씨는 모두 우리가 만든 거야. 배추꽃이 폈을 때 암술과 수술 머리 위로 우리가 막 날아다녔기 때문이지. 그런데 원래부터 익충과 해충의 구별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이해 득실에 따라서 그렇게 여기는 것뿐이야." "순 사람들 마음 대로군. 사람들은 참 나뻐."
그는 슬펐다. 살고 싶지 않았다. 해충이 되어 사람들의 욕을 먹느니 깊은 잠에나 빠져 죽고 싶었다. 그는 정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생각을 하다가 배추잎에 붙어 차차 회황색 번데기로 변해 갔다. 그는 정말 죽음이 자기에게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온몸에 땀이 나고 열이 나고 통증이 왔다. 그는 조용히 경애 할머니와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애벌레들은 이렇게 번데기가 되어 죽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 날 아침, 죽은 줄 알았던 자기가 죽기는커녕 배추밭 위로 훨훨 날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신의 몸을 놀란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날개가 있었다. 온몸이 눈부시도록 희디휜 흰빛이었다. 앞날개에는 은은한 검은 반점이 두 개나 있었다.
"할머니! 저기 나비다! 나비!"
이제 막 여섯 살이 된 경애가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끌며 소리쳤다.
"할머니, 저 나비 이름이 뭐예요?" "배추흰나비!" "아, 참 이쁘다." "그래, 참 이쁘지? 우리 경애도 저렇게 이뻐야 된다. 알았지?" "네." 그는 기뻤다.
가슴속에는 오직 기쁨만이 가득 차 올랐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춤을 추고 싶었다. 아름답게. 배추밭 위에서. 봄 하늘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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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강한 자의 주장이 항상 옳다
18세기 프랑스의 우화시인 '라 퐁떼느'(1621-1695)의 '우화집' 제1권에 실려 있는 '늑대와 새끼양'의 이야기는 봉건시대 지배자의 압정을 통렬히 풍자한 이야기이다. 새끼양이 골짜기의 개울물을 마시고 있는데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는 새끼양을 잡아 먹기 위한 구실을 만들려고 억지를 쓰지만 새끼양은 하나하나 조리있게 대답하여 마침내 늑대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러자 늑대는 이유를 대주지도 않고 새끼양을 잡아 먹어 버린다. 즉 약자는 강자의 억지를 당해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고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도 강자와 약자는 있게 마련이며 손해는 항상 약자가 보게 마련이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것은 뒷골목 똘마니들의 세계지만, 국사를 다루는 국회를 주장하고 다수의 횡포를 규탄해도 국정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은 다수당인 여당이며 야당은 소수의 비애만을 되씹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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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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