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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97 호
4339.12.29 (11.10)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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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언론은 좌파 vs 우파대표 격돌로 쓸거 아니냐" |
백낙청 '인물과사상' 인터뷰, "안병직 재반박 안한 이유" 밝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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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파 지식인에 대한 실명비판으로 올 한해 주목을 받았던 백낙청 '창작과비평' 편집인이 그동안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실명비판과 안티조선 논쟁 등에 대해 입을 열었다.
백낙청 편집인은 최근 발행된 월간 '인물과사상'(2007년 1월호)과의 인터뷰에서 안티조선·문학권력·언론개혁 논쟁 등에 대해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그동안 언론계와 문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소극적인 입장을 보여온 '창비'의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이번 인터뷰는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실명비판은 문학평론 하는 사람에겐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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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낙청 '창작과비평' 편집인 ⓒ이창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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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백 편집인은 최근 자신의 실명비판과 관련해 "창비 40년을 맞으며 개인적으로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실명비판을 새삼스럽게 시작한 것처럼 보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면서 "실명비판에 대해 요즘 말이 많지만 문학평론을 하는 사람에게 실명비판은 기본"이라고 말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실명비판을 안한 적이 없다고 자부한다"고 덧붙였다.
백 편집인은 "조선일보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일관된 입장을 견지해왔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안티조선 운동이 전개될 당시) 창비의 태도를 보수주의라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조직적인 안티조선 운동에 직접 가담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면서 "당시 안티조선 운동에 여러 단체들이 합세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선언한 대로 일관되게 행동하고 있는 큰 단체가 몇이냐 되냐"고 반문했다.
백 편집인은 "(나는)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 사건이 났을 때부터 조선일보에 기고나 인터뷰를 하지 않았고, 그 입장은 오늘날까지 변함이 없다"면서 "'창비'의 모든 상임편집위원들 또한 그 입장을 지키고 있으며 '창비는 일관되게 견지하는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는가 보다' 하고 인정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언론, 비판의 내용보다 흑백논리식 선정적 보도 일삼아"
백 편집인은 올해 들어 최장집 이인호 안병직 손호철 교수 등을 실명 비판한 것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언론보도에는 내가 안(병직) 교수를 비판한 데 대해 안 교수가 '시대정신'을 통해 반론을 한 것처럼 나왔지만 사실은 '시대정신' 잡지가 '창작과비평'보다 조금 늦게 나왔을 뿐, 나와 안 교수의 글은 거의 동시에 씌어졌을 것"이라면서 "안 교수의 신념에 대해서는 내 입장을 이미 밝힌 셈이라 더 이상의 반론이 시급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백 편집인은 자신이 반론을 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를 우리 언론의 풍토 때문이었다고 밝히기도 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안 교수의 비판에 대해 내 나름대로 아무리 차근차근 설명을 해도 언론은 보나마나 좌파대표와 우파대표가 격돌했다고 쓸 거 아니냐"면서 "이런 판국에 내가 나서서 선정적인 언론에 자료를 제공할 필요가 있겠나 싶었다"고 강조했다.
손호철 교수가 김대중 정부를 평가하면서 '신자유주의에 완전 투항했다'고 평가한 것에 대해 백 편집인은 "손 교수가 투항적인 행태들과 완전 투항을 구별했으면 한다"면서 "IMF의 신자유주의적인 요구에 투항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사회의 모든 면에서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것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2000년 6월에 열린 남북 정상회담이 신자유주의로의 완전 투항을 막아낼 가능성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본다"고 언급한 백 편집인은 "장기적으로 신자유주의를 견제하거나 방지하려면 남북을 아우르는 한반도권 경제에 대한 구상을 가져야지, 그거 없이 덮어놓고 '신자유주의는 나쁘다'는 주장만 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시민방송 발전 가능성 무궁무진하다"
백 편집인은 "분단체제를 제대로 극복한 통일을 하자고 할 때는 남쪽의 사회를 바꾸고 시민사회 스스로도 바뀌면서 한반도에 훌륭한 통합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니까, 그런 관점에서 일반 시민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전문적으로 방영하는 텔레비전 방송의 역할을 중요하다"는 말로 자신이 시민방송 RTV에 참여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섣불리 이사장직을 맡았다가 죽을 고생을 했다"면서 "하지만 지금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시민방송의 발전 가능성 또한 무궁무진해서 '분단체제의 극복'에 값하는 통일을 하는 데 상당한 몫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백 편집인은 "지금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2007년 9월에 두 번째 임기 끝나는 대로 그만두기로 이미 합의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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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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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낙관론자와 비관론자는 모두 사회에 기여한다. 낙관론자는 비행기를 만들고 비관론자는 낙하산을 만들어 내니까. / 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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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경제/경영/성공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 - 박태견 지음
POWER 003 광고계의 절대군주: 덴츠
도쿄 스키지거리에 위치한 일본 광고대행회사 덴츠는 1993년 한해 동안에만 1조 1,906억 엔(9조5천억 원)의 엄청난 매출액을 기록, 전세계 광고대행회사 중 당당히 랭킹 1위를 차지했다. 같은해 일본의 전체 광고비는 4조 4,175억 엔. 이 가운데 4분의 1을 덴츠 한 군데서 독식하다시피 한 것이다. 덴츠의 매출액은 랭킹 2위부터 10위까지의 나머지 대형 광고회사 전체의 매출액과 맞먹는 엄청난 규모이며, 덴츠는 또 이 기간중 1,457억 엔(1조1,500억 원)이라는 엄청난 매출이익을 기록하기도 했다. 덴츠가 영업을 시작한 것은 20세기가 막 개막된 1901년 그후 신문, 잡지 등의 광고대행을 통해 꾸준히 사세를 확장하다가 2차대전 후 일본 광고기업 중 최초로 라디오, TV 광고를 개발하는 등 급변하는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세계최대 광고대행사로 급성장했다. 현재 덴츠는 국내영업을 하는 일본 내 24개 지사 외에 세계 34개국의 45개 주요도시에 자회사를 두거나 미국의 Y&R 및 유럽의 HCM 같은 세계적 광고회사들과 제휴해 최첨단 다국적광고를 생산해내고 있다. 덴츠의 광고는 국제광고계에서도 명성이 높아, 지난 5년간 칸국제광고페스티벌, 클리오상, 뉴욕페스티벌, 국제방송상(IBA) 등 4대 국제광고대회에서 132건이나 입상하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광고제작은 각 기업이 극비리에 개발한 새 상품이나 사업 전개전략에 기초해 진행된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일본 대기업의 광고를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는 덴츠에는 자연스레 일본 재계의 최고기밀이 속속 쌓여, 그렇지 않아도 정확하기로 정평 높은 덴츠의 상황판단력과 정세분석 능력을 항상 최고로 유지시켜주고 있다. 일본 재계에서는 덴츠의 정보수집력과 정세분석력을 높이 평가해 덴츠에게 '그림자 정보성' '스키지의 CIA'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있다. 덴츠의 오늘날 성공을 가능케 한 기반은 '인재가 유일한 재산'이라는 덴츠의 창업이념이다. 창업 후 지금까지 평생고용 및 연공서열 원칙을 철저히 지켜온 덴츠는 현재 전체 일본기업 중 최고의 보수를 지급하고있다. 덴츠가 1993년도에 4천여 명의 사원에게 지급한 평균임금은 사원 1인당 1,593만 엔(1억 2,700만 원)이나 된다. 이같은 인건비 총액은 같은해 덴츠의 매출 총이익 1,457억 엔의 3분의 2에 달하는 액수다. 덴츠가 얼마나 인재를 아끼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덴츠는 이같은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현재 전체매출의 1할 정도만 차지하고 있는 해외영업 수주를 대폭 늘리고, 이익률을 더욱 끌어올리기 위해 다각적인 개혁조치를 취하고 있다. 덴츠는 이를 위해 현재 사내에 정보기술본부(ITC)를 설치해 멀티미디어시대의 도래에 대비한 전자도서관, 케이블방송, 위상TV, NHK TV와의 미디어 공동사업, 하이비전 등의 뉴미디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창업 후 처음으로 그룹을 5개 지역법인으로 분리해 독립채산제를 도입하는 등 경쟁체질을 강화하기 위한 리엔지니어링에도 열심이다. 이같은 노력의 결과 덴츠가 컴퓨터기법 등을 총동원해 제작한 최첨단 영상광고는 소비자들에게 호소력이 높아, 그룹 내에 광고회사를 갖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대기업들조차 앞다퉈 이곳에 광고를발주하고 있다. 한 예로 최근 덴츠가 미래 멀티미디어시대에 대비해 실험적으로 제작해 발표한 자동차 광고의 경우 소비자가 집에서 홈쇼핑 네트워크를 작동시킬 경우 자동차의 외양, 가격, 기능 등 기초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각부문 성능까지도 화면을 클로즈업해 입체적으로 상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밖에 3차원 입체가상현실 Virtual Reality 기법을 이용해 고속도로나 험악한 산길등에서의 주행속도나 승차감 등을 고객이 구입 전에 미리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등 새로운 광고기법의 개발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어 광고계의 최정상을 지키려는 덴츠의 자세는 다른 광고 업체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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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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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붕어빵의 비밀
우리 동네 길모퉁이에 있는 '우리 밀로 만든 맛있는 붕어빵'이란 글씨를 큼지막하게 붙여 놓은 그 붕어빵집은 무언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듯 어제도 집으로 향하던 내 발길은 어김없이 그 붕어빵 포장마차 앞에 멈추었다.
"어서 오세요!"
주인 아저씨의 아들로 보이는 꼬마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붕어빵 천원 어치만 주세요"
빵이 구워지기를 기다리며 우연히 아저씨의 손동작을 보게 되었다. 아저씨는 붕어빵 틀을 뒤집을때마다 매번 성호를 긋는 것이었다.
"아저씨, 매번 그러려면 팔이 아프지 않으세요?" "아니요, 붕어빵 드시는 모든 손님들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도하는데 팔이 아프긴요 뭘."
아저씨는 껄걸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꼼꼼한 손놀림을 계속해서 열심히 붕어빵을 만들었다. 아저씨가 건네주는 봉지를 받아들고 포장마차를 나서는데 이번에도 꼬마는 싹싹하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집으로 가는 동안 입가에 흐믓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왜 유독 그 집 붕어빵이 맛있고 그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지.....
김화란 님/경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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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95 - 유럽 철학과 미국 철학: R. W. 에머슨(1803-1882) 그때 세계에서는 1959년: 이집트, 수에즈 운하 기공(-1869) 1882년: 조선, 임오군란 발발
본래 미국은 유럽에 비하면 자기 나라의 전통적인 철학은 없는 사회다. 만일 미국이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사용했다든지 독일어를 쓰는 나라가 되었다면, 오늘의 미국은 프랑스 철학이나 독일 철학의 전통을 계승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영어를 사용하는 국민을 주축으로 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늘의 미국과 같은 성격의 나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철학과 정신적 전통은 유럽 문화의 지점이나 출장소와 같이 되었으며, 특히 영국철학의 계보를 이어받는 결과 가 되었다. 그 계보를 이어받는 실례로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하자. 미국의 하버드 대학의 역사는 미국 건국의 역사보다 1세기 반 이나 앞선다. 하버드 대학의 철학관은 '에머슨 홀'로 명명돠어 있다. 그 홀 한 가운데는 대단히 큰 에머슨 동상이 기념으로 건립되어있다. 그러나 에머슨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 또 그의 철학을 누가 계승했는지 등에 관해서는 미국인 자신들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에머슨(R. W. Emerson, 1803-1882)은 미국 사상과 철학계의 공로자로 되어 있으나, 영국적인 사상의 도입자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는 광범위하게 초창기 미국 정신계에 영향을 끼쳤으나 독창적인 철학사상은 전해준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대부분의 각자와 사상가가 그러했듯이 에머슨도 자주 영국에 건너가 영국 사상을 얻어 갖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에는 J. S. 밀이나 H.스펜서 같은 철학자가 활약하고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사)의 저자이며 (영웅 및 영웅숭배론)의 저자인 칼라일(Thomas Calrlyle. 1795-1881)의 사상이 크게 보급돠고 있었다. 에머슨 도 칼라일과 오랜 친교를 맺으면서 주로 칼라일의 철학설을 받아들였다. 에머슨이 자연론을 철학적으로 취급했고, 자연과 더불어 그 초월주의를 택한 것은 칼라일의 뒤를 따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 대신 에머슨은 초창기 미국 철학계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역할을 잘 담당해준 셈이다. 에머슨이 영국에 가게 되면 칼라일의 소개를 받아 영국의 여러학자들을 만나곤 했다. 그런데 칼라일과 상반되는 위치에 있던 J. S. 밀은 소개해주지 않은 것 같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 밀에 비해, 한 사람의 영웅을 위해서는 수많은 평민이 뒤따라 좋다는 칼라일은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에머슨이 소개받은 영국 사상가 중에 한 사람이 스펜서(H. Spencer, 1820-1903)였다. 스펜서는 대단히 앞서 있으면서도 새로운 사회이론을 갖고 있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진화의 원리로 받아들여 특색 있는 사회이론을 전개시켰던 것이다. 에머슨은 스펜서에게 왜 그렇게 훌륭한 주장과 학설을 저술화해 내놓지 않느냐고 권고해보았다. 스펜서는 그럴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고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 중에는 에머슨이 가장 생각이 현실적이면서도 앞서 있었기 때문에, 에머슨이 만일 당신의 책이 출판된다면 영국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큰 호응을 얻게 되며 그 수입도 좋을 것이라는 권고를 했다. 그 실리적인 권함에 응해서 생긴 것이 스펜서의 (제1원리)로 나타났다. 오히려 칼라일이나 에머슨의 철학보다도 비중이 큰 저서가 된 셈이다. 영국인들에게는 진보 및 진화론적 사회학의 정설로 되어 있으며, 사회변화와 발전이론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우리들 가운데서도 영국계통의 철학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은 관심을 갖는 책이다. 스펜서는 A. 콩트와 비슷한 성격과 재질을 갗춘 학자였다. 누구의 책을 읽어도 서문과 3분의 1 정도의 읽기로 끝냈다는 것이다. 그 정도를 읽었으면 나머지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식이었던 것 같다. "제1원리"도 그런 의미에서 보기 드문 독창성 있는 학설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당시의 어떤 영국이나 유럽 학자들도 미국을 방문한일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성인과 학자는 문화의 본고장인 유럽을 떠나 개척지 이며 문화적으로는 후진사회인 미국을 방문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는 동안에 사태가 변했다. 지점이 본점보다 커지며 분가해나간 집이 본가보다도 엄청나게 부자가 되면, 지점의 세력이 커지고 분가한 집이 본가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과정이 유럽과 미국의 상황이 된것이다. 그만큼 미국은 성장했고 장점을 속히 살려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자연과학 분야는 미국이 유럽을 앞지르고 있으며, 사회과학에서도 유럽의 관심과 주목을 환기 시키고 있다. 오직 인문분야에 있어서는 아직도 유럽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정도다. 그것은 역사 자체가 미국은 유럽을 통해 르네상스로 올라가게 되어 있으며, 중세기와 고대철학까지 거슬러올라가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의 과정을 무시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여행을 계획한다면 적어도 그리스 문화를 본뒤에 로마의 유적들을 살피며, 중세기의 문물을 본 후에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역사를 알게 되며, 다시 영국, 프랑스, 독일을 거쳐 미국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은 어쩔 수 없는 역사의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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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곶감'은 꼬챙이에 꽂아서 말린 감
'곶감'에 얽힌 이야기는 무척 많습니다. 호랑이가 자기보다도 무서운 것으로 알았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속담도 많지요. '곶감이 접 반이라도 입이 쓰다'(마음이 언짢아서 입맛이 쓸 때),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 먹듯'(알뜰히 모아 둔 것을 힘들이지 않고 하나씩 빼어 먹어 없앤다는 뜻), '곶 감 죽을 먹고 엿목판에 엎드러졌다'(연달아 좋은 수가 생겼다는 뜻) '곶감죽을 쑤어 먹었나'(왜 웃느냐고 핀잔 주는 말) '당장 먹기엔 곶감이 달다' 등등. 이 '곶감'의 '감'은 물론 과일의 하나인 '감'이지요. 그리고 '곶'은 '곶다'의 어간 '곶-'입니다. '곶다'는 현대국어에서는 된소리가 되어 '꽂다'로 되었지요. 그래서 일부 방언에서는 '꽂감'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니까 '곶감'은 꼬챙이에 꽂아서 말린 감을 말합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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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8장 화려항 명성, 처참한 최후
애첩의 자살 - 양귀비 / 우미인
장한가의 주인공 양귀비 치세를 잘하던 당나라 현종은 원헌왕후와 무혜비가 차례로 죽자 깊은 슬픔에 빠져 정사도 등한시하게 된다. 이에 환관 고력사는 여산에 있는 온천궁으로 임금이 행차할 적에 양귀비를 수행토록 하게 했다. 계획한대로 양귀비의 미색은 현종의 눈에 띄게 되었고, 현종은 그녀를 가까이 불러들이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현종의 18번째 태자인 수왕의 비가 아니던가. 자신의 며느리를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수왕과 이혼을 시켜 며느리와의 인연부터 먼저 끊게 했다. 수왕궁을 나와 도관(도교의 사원)으로 들어가 양옥환은 여도사가 되었고(법호는 태진이었다) 절에 맡겨져 있다가 후에 궁으로 들어오니 옥환의 나이 22세, 당시 현종의 나이는 58세였다. 천하의 부모들이 아들보다 딸 낳기를 원하노라. 이런 풍자가 나올 만큼 당현종의 총애는 극진하였고 양씨 가문의 영광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라버니 국충은 재상까지 되었고, 천하의 땅은 모두 양귀비 일가에 점령이 되었다. 양국충은 제1의 실권자가 되어 재물을 탐하며 나라를 어지럽히니 이에 안록산이 반기를 들어 안사의 난을 일으킨다. 서쪽으로 장안 도성문을 빠져나간 현종 일행은 한밤중에 마외파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평소 양씨 일문에 불만이 많았던 근위병들은 행진을 멈추고 더는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군사들은 우선 말 위에 있는 양국충을 활로 쏘아 떨어뜨렸고 잇달아 양귀비의 언니인 한국 부인과 진국 부인을 차례로 죽였다. 그리고 현종의 거처를 에워싸고 양귀비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밖에서는 고함치는 병사들의 성난 목소리가 드높았다. 분위기를 간파한 환관 고력사는 현종에게 귀비를 떼어놓을 수밖에 없음을 아뢰고 처단의 결심을 촉구한다. 귀비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있다면 내가 귀비를 총애한 것이 죄이지. 현종은 뇌까리면서 하는 수없이 고력사에게 귀비에게 죽음을 내렸다는 뜻을 병사에게 전하라 고 말한다. 왕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귀비와의 마음 아픈 작별의 순간이 왔다. 그러나 그 순간도 길지는 못했다. 고력사는 양귀비를 작은 불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거기에서 흰 명주천으로 목을 매어 자결케 했으니 그녀의 나이 38세. 당 현종을 모신 지 16년째가 되는 해였다고 한다. 시인 백낙천은 이들의 비극을 <장한가>에 담았다. 끝 구절은 이러하다.
칠월 칠일 장생전에서 깊은 밤 아무도 모르게 주고 받은 맹서.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땅에는 연리지가 되고자 높은 하늘, 넓은 땅도 다할 때가 있을지언정 두 사람의 서러운 한은 끝없이 면면하리라.
항우와 우미인의 죽음 장기판의 한왕과 초왕처럼,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는 2년을 넘게 전쟁을 하고 있었다. 서로들 지친 끝에 정전협정을 맺고 천하를 양분하여 동은 항우. 서는 유방이 영유한다고 정했다. 항우는 즉시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장량과 진평의 계략으로 유방은 협정을 위반하고 즉시 항우를 추격했다. 항우의 군대는 해하에 머물고 있었으나 식량도 이미 떨어지고 전력은 저하되어 있었다. 무범자 유방에게 항우는 포위 당해 버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소리에 항우는 크게 놀란다. 한은 이미 초를 점령 하였단 말인가? 한군에 초인이 많기도 하구나! 그날 밤 항왕은 일어나 장막 안에서 술을 마셨다. 항우는 우라는 미인을 언제나 곁에 두었으며 추라는 준마를 타고 다녔다. 처연한 심정으로 그는 시를 지어 읊었다.
산도 뽑던 그 힘! 세상을 뒤덮던 그 기세 (역발산혜 기개세) 때가 불리하니 추도 달리지 않는구나 (시불리혜 추불거) 추야, 너도 달리지 않으니 내 무엇을 하겠는가? (추불서혜 가내하) 우야 우야! 너는 어찌 될것인가? (우혜우혜 내약하)
항왕은 노래를 되풀이하여 불렀고, 우미인은 이에 화답을 하였다.
한나라가 이미 초 땅을 덮었고 사면은 온통 초나라 노래인데 대왕은 의기조차 이미 다하니 내 구차히 살아서 더 무엇하리이까.
눈물이 그녀의 뺨을 흘러내렸고, 곁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흐느끼며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고 <사기>는 전하고 있다. 우희는 어렵게 노래를 마치고 항우의 옆구리에 찼던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찔러 자진하고 말았다. 그 후 우미인의 무덤 위에서는 예쁘고 가녀린 꽃이 피어 났다. 우희가 자살할 때 흘린 피에서 빨간 꽃이 피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우미인초라 하기도 하고 혹은 개양귀비라 부르기도 한다. 항우는 사태가 틀린 것을 알고 죽기를 결심하고 나가 싸웠다. 그가 혼자서 죽인 한군만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여러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한나라의 여마동이 눈에 띄었다. 너는 나의 옛 부하가 아닌가? 내 머리에 현상금이 걸렸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너에게 덕을 베풀겠다. 항우는 스스로 자기의 목을 쳐 죽고 말았다. 한군의 병사들이 항우의 시체를 놓고 서로 다투니 손과 발이 떨어져나갔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 사면초가는 장량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한나라의 참모 장량이 초나라 노래를 알고 있는 군인들을 시켜 초가를 부르게 했던 것. 그래서 중국천하는 한왕 유방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양귀비의 자진은 우희의 죽음과는 달랐다. 우희는 스스로 선택한 결단이었다. 여기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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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51. 파나마 운하를 둘러싼 미국의 음모
1915년 파나마 운하가 정식으로 개통되었다. 1513년 스페인의 탐험가 발보아가 파나마 지협을 확인하면서부터 간직한 꿈인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시킨다는 생각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파나마 운하의 개통은 사실 파나마 국민에게는 굴욕적인 역사의 시작이었다. 양 대양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생기는 전략적, 상업적 이익이 엄청날 것이라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분명했다. 남북 전쟁 후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재임, 1869~77)은 운하의 입지 조건을 살펴 보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적이 있으며, 미국 회사가 지협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먼저 운하 건설에 나선 것은 수에즈 운하 설계를 담당했던 프랑스 사람 페르디당 레셉스(Ferdinant Lesseps)였다. 그는 당시 콜롬비아 땅이었던 이곳에 운하를 만들기 위해 1880년 수천 명의 투자자를 모아 회사를 만들고 운하 건설권을 따냈다. 곧 운하 건설에 착수했지만 이 회사는 경영상의 부패, 설계상의 결함, 풍토병, 가혹한 자연 조건 등으로 인해 어려움에 부딪쳤고 1889년 마침내 공사를 포기했다. 레셉스의 운하 건설이 좌초하자 미국 정부와 독점 자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일에 뛰어들었다. 1902년 테오도르 루즈벨트 행정부는 운하 건설권을 4,000만 달러에 사들였고 또 콜롬비아 정부와 운하 사용에 관한 조약을 맺으려 했다. 이 조약의 내용은 1,000만 달러에 매년 25만 달러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파나마 운하를 99년간 조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콜롬비아 의회는 이 조약 내용이 자국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비준을 거부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미국은 아니었다. 미국의 정책은 이 지역에서 콜롬비아를 쫓아 버리고 미국의 말을 잘 들을 나라를 세우는 쪽으로 정해졌다. 다행히도 당시 파나마 지역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열망하고 있었다. 1903년 11월 프랑스 운하 회사의 이사였던 프랑스 인이 파나마 인들을 데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물론 그 배후에는 미육군의 지원이 있었다. 반란이 일어나자 미국은 전함까지 파견하여 콜롬비아를 위협하면서 신생 파나마 공화국의 탄생의 산파 노릇을 했다. 이렇게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하에 파나마는 태어났고 따라서 파나마 운하의 운명도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미국은 앞서 콜롬비아와 맺으려던 조약과 같은 조건으로 파나마 운하의 사용권을 획득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조차 기간이 99년에서 `영구적`으로 되었고 또 운하와 운하 지대에 대해 파나마가 주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운하와 운하 지대에 대한 주권이 미국에 있다는 `신화`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1904년 공사에 착수한 미국은 레셉스가 겪었던 어려움에 시달리긴 했지만 결국 윌슨 대통령 임기중인 1914년 운하를 완성했다. 이 운하의 완성으로 미국은 엄청난 이익을 보게 되었지만 동서로는 짧고 남북으로 긴 파나마 영토는 미국이 지배하는 운하 지대에 의해 양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운하의 안전을 핑계로 한 미국의 끊임없는 간섭에 시달리게 되었다. 미국의 지배와 간섭이 계속될수록 파나마 국민의 주권 회복 운동도 시간이 갈수록 열기를 더해 갔고 마침내 1977년 파나마의 민족주의적인 군부 정권은 카터 행정부와 파나마 운하 신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골자는 1999년 12월31일 정오를 기해 운하와 운하 지대에 대해 파나마가 주권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파나마 운하의 운명이 결정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실 미국은 신조약을 체결하긴 했지만 가능하면 파나마 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1981년 정권을 잡은 노리에가 장군이 반미적인 민족주의 노선을 표방하자 미국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노리에가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면서 파나마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한편 그를 마약 거래 혐의로 미국 법정에 기소했다. 게다가 1989년 5월의 파나마 대통령 선거를 무효라고까지 선언했다. 이제 남은 것은 미국의 직접 행동이었다. 1989년 12월 부시 행정부는 파나마를 침공하여 노리에가를 미국으로 잡아갔다. 명목은 미국 시민의 보호, 파나마의 민주화, 마약 범죄자 노리에가의 체포였지만 누가 그러한 침략 행위를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1977년 맺은 파나마 운하 신조약이 발효되기까지 6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사실 파나마 운하가 파나마 국민에게 돌아올지는 아직 쉽게 단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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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4. 싸움을 시켜놓고 말리는 미국의 지졸한 수법
어떤 때는 미국의 영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아메리카대륙에 있다는 것은 어떤 때는 아주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미군은 전세계에 주둔하고 있고. 온 대양에 미군함이 떠 있으며, 해마다 미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미국의 총소리를 듣고 있다. 미국은 민가에 함부로 쳐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며,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해결사를 자처하고 나선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고, 난동꾼이 없으면 난동꾼을 보내 주기도 한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은 그들의 이런 심리를 아주 잘 대변해 주고있다. 걸프전 이전에 미국은 소위 페르시아만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구실로 미군을 페르시아만에 주둔시켰다. 파병 직후 그들은 이라크에게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이라크를공격하겠다는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하지만 이라크는 철수하지 않았고 미국은, 심한 타격을 가했다 . 그런데 당시 이라크가 철수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지 만약 철수했다면 정말 난처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부시는 말한 적이있다. 그 난처한 점은 다름 아니라, 미군이 페르시아만에 계속 주둔할 충분한 명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2차대전이 끝난 지도 50년이 지났지만 미군은 아직도 일본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다. 지금 미군의 주둔을 반대하는 일본 국민들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가고 있으며, 심지어 오키나와 현도 미군의 토지사용권 계약서에 서명하기를 꺼려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필칭 ' 민주' 와 '인권'을 표방한다는 미국이 일본 국민들의 소리를 듣고 있을까? 짐작컨대, 듣기는 분명히 들었을 텐데 그들은 왜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극동에서의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미국인들의 말이다. 그러나 미주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가 무엇 때문에 멀리 극동에까지 와서 군사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일까?미국인들은 '중국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시니컬하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불원천리하고 달려와 다른 사람 집 대문 앞에 와서 칼을 빼어들고, 호시탐탐 또다른 사람들의 위협을 견제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잠시 접어두자. 다만 우리는 미국 본토에서는 워싱턴의 경찰이 뉴욕에 가서 장기간 근무를 할 수 있는 것인지만 묻고 싶다. 중국은 단 한 명의 군인도 외국에 주둔시키지 않고 있으며 오로지 국내 경제발전에만 전력하고 있는데 '위협'이란 말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중국군대가 미국에 가지도 않았고, 미군이 오히려 중국 주변에서 머물고 있는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협한단 말인가? 미국은 이미 변했다. 영국의 식민지하에서 독립했으며, 2차대전 때는 반파시스트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신생국가인 이 나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구조적인 결함을 드러내고 있다. 영광과 몽상으로 가득찬 이나라가 대영제국이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세계를 제패하기 위해 했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미국의 { L A 타임즈}는 '얼마나 많은 방위력을 갖추어야 충분하단 말인가?' 라는 제하의 사설을 실어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사설은 국제전략연구소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미국의 군사비 지출은 타국의 최고액보다 두 배나 많으며, 실제로 그 액수는 적대국의 군사비 총액보다 많은 것이라고 적고있다. 미군보다 더 좋은 훈련을 받고 더 좋은 군사장비를 갖춘 군대는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그러나 국가의 매년 국방예산이 2천6백억 달러에 달하는데도 어떤 관찰자-꼭 국회의원만은 아니다-들은 미국의 국가 안전성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 40여 년 간의 냉전 속에서 형성된 방위계획과 정책. 그리고 이에 맞추어 짜여진 국방예산은 냉전시대가 이미 끝난 지금에는 맞지 않다. 미국은새로운 시대에 맞는 미군의 군사적 사명에 대해 일관된 정책을 펴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년 간 미국의 국방지출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미국 연방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약 17퍼센트-이나 미국내 생산총액의 비율로 보더라도 지금의 군사비 지출은 몇십 년 이래 최저이다. 국회의 원들은 이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국방예산을 늘이도록 요구하고 나섰지만, 왜 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예산을 늘이겠다는 목적만으로 예산을 확대편성하는 것은 방위전략을 확정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블루긴스 학회'의 로룬스크프가 계간지'외교]의 최근호에서 지적한 것처럼, 국방비 지출은 잠재적인 적과 동맹국의 노력에 근거해서 산정해야지 이전의 행정부 자료에 근거해서 산출해서는 안 된다.상식적인 기준으로 추산해 보더라도 2천억 달러의 군사비 예산은 너무 많다. 그것은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명확해진다. 러시아는 8백억 달러에 불과하며, 중국은 3백억 달러에도 못 미치고,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북한. 쿠바의 예산은 다 합치더라도 약 1백30억 달러에 불과하다. 클린턴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무성은 냉전 후 미국의 군사적 전략에 대해 전면적인 수정작업을 실시했는데, 최종 결론은 미국이 동시에 두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을 치르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대상이 된 작전지역은 서남아시아, 아라비아 반도 및 그 주변과 한반도였다. 이러한 평가에 근거해 계획을 세운 결과 필요한 총병력은 자그마치 2백50만이었다. 그 중 1백만은 예비역으로 충당하며, 12개 항공모함부대와 3백46척의 함대가 필요했고, 20개의 항공부대와 1백84기의 전략폭격기 및 3천5백 개의 핵탄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소위 '방어'라는 미명하에 편성된 이런 예산으로 그들은 아라비아반도와 한반도를 초토화시키겠다는 것인가? 역시 미국의 또다른 속셈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냉전시대에는 미국에게 소련이라는 강력한 적수가 있어 그들 군사력의 존재가치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냉전시대가 종식된 후 미국의 국방계획은 크게 복잡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도 잠재적인 적수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미국인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백악관 당국자들에게는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적수가 없는 미국은 어떻게 그들의 국방계획을 세울까? 여기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한 것으로, 국방분야의 투자를 경제분야로 돌려 경제발전을 가속화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일부 '지각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으며, 오히려 방어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상비군의 힘을 동시에 두 곳에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규모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각 있는' 이런 사람들은참으로 두려운 존재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이미 전세계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사실상 미국의 군사적 위협은 이미 세계인들이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는 심지어 미국의 핵탄두를 전세계 인구 몇 사람당 하나씩 이고 있는지를 계산해 낼 수 있을 정도이다. 요컨대 미국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둔 재난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들 미국 백악관 당국자들이나 국무성의 사람들을 그저 돈만 쓸 줄 아는 귀공자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또 매년 2천6백억달러라는 천문학적 군사비를 헛되이 낭비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이런 투자의 회수율은 아주 높으며, 미국의 콩이나 밀 생산에서 얻는 이득과는 필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전쟁으로 전력을 키우는 것은 백악관이나 국무성의 기본적인 전략이다. 예를 들어 걸프전의 승자는 쿠웨이트인가 아니면 아랍세계인가? 아니다. 그러면 서구 맹방들인가? 모두 아니다. 유일한 승자는 미국뿐이다. 미국은 페르시아만에서 명성과 이익을 모두 챙겼고 고성능 전략무기를 실험했으며, 미군의 작전능력을 단련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군사력을 과시하려는 소정의 목적까지달성했다. 아울러 미국산 전략무기에 대해서도 전례없는 리허설을 했다. 그들은 단기적인 이익을 얻었을 뿐 아니라 무기수출 경쟁면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패트리어트미사일 주문서 하나만으로도 국무성의 무기상들은 득의의 미소를 짓는 것이다.
걸프전에서 이익을 나누어 갖기를 원했던 미국의 맹방들은 그들이 단지 1회용 들러리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전투기, 탱크, 미사일은 미국산 앞에서는 제대로 빛을 발휘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기존의 무기시장마저 위협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금을 대고 무기를 대어 미국을 도와 게임에 참가한 격이 되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게임의 명분은 사담을 혼내 주자는 것이었다. 미국은 국지적인 긴장을 조장시켜 정세를 더욱 혼란하게 하고 있으며, 군사적 도발 빌미를 만들어 잠재적 전쟁의 위험에 처한 나라들로 하여금 거액의 달러를 가지고 국무성으로 무기를 사러오게 만들고 있다. 이로 볼때 달러화의 상승에는 미사일과 군함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미국무성이 매년 각국으로부터 얼마의 돈을 벌어들이는지는 국무성만 알고 있다. 미국은 군비면에서 절대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전략무기를 계속 새 것으로 교체하고 있다. 이러한 무기의 교체와 고품질화는 당연히 대량의 구식 장비를 도태시키는데, 이러한 도태가 거대한 무기시장의 지지없이 미국민의 세금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 또한 소위 미국의 '지각 있는'사람들이 '방위비 지출은 잠재적인 적과 맹방의 노력에 근거해서 산정해야지 이전의 행정부 자료에 근거해서 산출해서는 안 된다'고 감히 말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왜 이렇게 큰소리 칠까? 당연히 미국의 무기수출 때문이다. 총명한 미국인들은 서구의 맹주가 되기에 손색이 없으며, 그들보다 훨씬 일찍 발달한 서구의 맹방들도 이에 설득을 당하고 있다. 미국식의 지혜가 하는 역할은 정말로 대단하다. 미국은 이미 낡은 무기를 계속해서 다른 나라에 팔면서, 군사력의 상대적 우위를 토대로 영월히 다른 나라를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물론 미국 무기시장의 고객도 상당한 공격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사담 후세인에 대해서도, 아랍세계는 그가 사라지기를 바랐지만 미국은 그를 사지에 몰아넣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철저하게 사담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했더라면 아랍권 국가들이 그렇듯 열렬히 미국의 무기를 사려 했을 것이며, 또 아랍이 기꺼이 미군을 페르시아만에 주둔시키려 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사실상 정세가 불안정한 지역일수록 그곳에서 미국의 무기판매는 호황을 이루게 마련이다. 사담 후세인의 실패에는 또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즉 혹자는 '음모'라고까지 표현하는 미국의 소극적인 행동이다. 미국은 사담이 국외로부터 무기를 도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그들이 구입하게 될 컴퓨터로 통제되는 방공시스템에다가 미국에서 만든 칩을 넣었다. 이 칩에는 미국이 사전에 만들어둔 조작 가능한 컴퓨터바이러스가 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이 이라크로 공격해 들어갈 때, 사전에 이라크 방공시스템 컴퓨터 안의 바이러스가 활동하도록 조작하여 이라크의 방공시스템을 교란시킴으로써, 이라크는 막대한 돈을 들여 한낱 고철덩어리를 사온 꼴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도 미국이 항상 쓰는 교활한 전술의 하나이다. 군인들이라고 해서 속임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 정도야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미국의 본질은 국가독재주의이다. 이 점은 미국이 왜 중국의 핵실험을 싫어하며, 아울러 왜 고성능 컴퓨터는 중국에 수출하기를 꺼리는가에 대해서 명확한 이유를 알게 한다. 미국은 중국군의 현대화를 싫어할 뿐 아니라 그들의 맹방, 심지어 세계 어느 나라 군대의 현대화도 싫어한다. 다른 나라 군대의 현대화는 미군의 절대적인 우세를 상대적으로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무기수출은 극도로 혐오한다. 그들은 '이미 고성능의 미제 무기가 판치고 있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다른 나라로부터 무기를 사들이겠는가? 혹은 다른 나라들이 무슨 권리로 미국의 무기시장을 빼앗아갈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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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두 눈을 가린 스승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다소 체벌을 심하게 한 생활 지도 교사를 해직시키라고 요구했다. 학교측에서는 학생들의 그런 부당한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면서 주동 학생들을 징계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수업을 거부하고 운동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우르르 교무실로 들이닥쳤다. 개중에는 손에 몽둥이를 들고 있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기세에 놀라 얼른 자리를 피했다. 급히 학교 뒷산으로 달아나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어느새 교문 밖으로 내뺀 교사들도 있었다. 그런데 유독 김철후라는 나이 많은 한 교사만은 학생들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교무실에 않아 있었다.
"네 이놈들! 밖으로 썩 나가지 못해? 학생들이 교무실에 와서 난동을 부려도 되는 거야. 도대체 이게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김 교사는 학생들을 향해 대성 일갈했다. 학생들은 앞뒤 가리지도 않고 흥분한 채 김교사를 둘러쌌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김 교사를 마구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 교사는 얼른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학생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가린 두 손을 떼지 않았다. 한 학생이 김 교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흔들어도 한사코 얼굴에서 두 손만은 떼지 않으려고 들었다. 그 뒤 사태가 진정되자 학생들에게는 큰 고민 거리가 한가지 생겼다. 그것은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김 교사를 흥분한 나머지 집단 폭행했다는 사실이었다. 학생들은 크게 뉘우치다 못해 김 교사를 찾아가 사죄했다.
"선생님, 저희들이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스스로 깨달았다면 그것으로 그만이야. 이 세상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사람만큼 훌륭한 사람도 없어."
빙그레 미소까지 띠며 그런 말을 하는 김 교사에게 학생들은 다들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러자 푹 고개를 숙이고만 있던 한 학생이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런데 그때 왜 한사코 손으로 두 눈을 가리셨습니까?" "하하, 그게 그리 궁금한가? 나는 나를 때리는 학생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어. 수양이 모자라는 내가, 나를 때리는 학생의 얼굴을 본 이상, 그 학생에게 늘 나쁜 감정을 가지게 될 게 아닌가? 그래서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그랬네?"
학생들은 김 교사의 말에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진정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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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은 샌프란시스코의 골든 게이트 다리에서 자살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내민 손이 끝내 그 자살자의 손을 놓치는 순간을 잡은 사진이다. 이 다리는 1937년에 완공되었는데 그 때부터 1992년까지 떨어져 자살한 사람이 700명이나 되고, 이처럼 자살 충동을 강하게 불러 일으키는 다리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관광객이 1년에 10,000,000명이나 된다.
파리의 에펠탑은 1889년 만국 박람회장에 세워졌는데 설계자인 에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처음 이 탑이 개방되었을 때 수 많은 남녀들이 모여들어 사랑을 속삭이는 보금자리(love nest)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교회는 미국 캔터기 주 코빈콘 시에 있는 몬테카지노 교회이다. 이 교회에는 세 명밖에 들어가지 못한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는 고층건물이 없다. 이 곳에 있는 국회의사당의 높이가 229미터인데 이보다 높은 건축물은 지을 수 없도록 규제하는 건축법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이상한 도시는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이다. 이 도시는 나무가 전혀 없는 평지 위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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