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92 호
4339.12.22 (11.03) : Music Off = Esc
-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용량제한으로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나가 보이지 않습니다. 않보이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
[발행지원본보기]
|
|
편지 |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나무를 심는 사람은 자기 이외에 남들도 사랑하는사람. / 영국 속담
|
|
글터 → 국사 |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돈 이야기 - 최연식(서울대 강사)
우리 나라 최초의 돈, 고려 동전 현물화폐가 아닌 순수화폐로서 우리 나라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의 동전이다. 삼국시대나 그 이전의 유적에서 명도전이나 오수전과 같은 중국의 동전들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던 지역 혹은 중국과 교역하던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유통된 것일 뿐 우리 나라 자체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화폐가 사용된 사실은 물론 당시 경제상황의 커다란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와 아울러 문화. 사상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변동이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비록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같은 비중은 아니지만 ‘돈’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기능은 전근대사회에서도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의 동전에는 ‘동국통보’,‘동국중보’,‘삼한통보’,‘삼한중보’, ‘해동통보’,‘해동중보’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름만 다를뿐 형태와 크기는 거의 동일하였다. 고려의 동전은 명칭과 형태, 크기 등 모든 면에서 중국의 동전을 모델로 하였다. 중국은 이미 천 년 이상 동전을 사용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 고려와 활발한 무역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려가 새롭게 화폐경제를 수립하려 할 때 쉽게 모범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려 동전의 형태와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동전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 최초의 동전은 춘추전국시대에 나타났다. 이 시기는 각 국이 부국강병을 위해 상업장려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가운데 동전이 출현하였다. 당시 최고의 부국이던 산동지방의 제는 포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도전과 포전은 당시에 사용하던, 구리로 만든 칼과 쟁기를 일정한 규격으로 통일시킨 것으로 화폐와 생활용구의 기능을 겸하던 반 순수화폐였다. 더욱이 크기가 커서 소액의 거래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 후 경제적 발달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일상 경제생활에도 사용할 수 있는 소규모의 동전이 나타났다. 둥근 형태의 이 동전은 원래 둥근 구멍을 가지고 있었는데, 진시황에 의해 통일제국의 법정화폐가 되면서 원형방공으로 바뀌었다. 둥근 외형과 네모 구멍은 각기 하늘과 땅을 상징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동전은 이후 중국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 나아가 중세 일본 화폐의 모델이 되었다. 진시황 때의 동전은 그 무게가 반량(18. 75그램)이었기 때문에 ‘반량전’으로 불렸는데, 한나라 때에는 무게가 반 이하로 줄어 ‘오수(약7. 8그램)전’이 되었다. 이처럼 동전의 크기가 작아진것은 상업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시장에서 필요한 화폐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세계제국으로서 경제적 번성을 구가했던 당나라에서는 동전의 크기가 더욱 줄어 3. 75그램이 되었다. 당나라 이후에도 경제적 번영은 계속되었지만, 그 이상 동전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더 작은 크기의 동전을 만들기도 어려웠으므로, 이제 동전의 크기를 줄이는 것보다 은화나 지폐와 같은 새로운 화폐의 제작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3. 75그램 짜리 동전은 화폐제도뿐 아니라 도량형 특히 중량의 단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원래 고대 중국의 중량단위는 량(37. 5그램)을 기본으로 하여 작은 단위로는 량의 24분의 1인 수(약1. 6그램)가 있고 큰 단위로는 16량(600그램)에 해당하는 근이 있었다. 그런데 3. 75그램 죽 량의 10분의1에 해당하는 동전이 일상화되면서 이 동전 하나의 무게가 독립된 중량단위로 등장하였다. 이 단위는 돈의 무게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전이라고 불렀다. 한편 고액의 거래에서는 동전 천 개를 하나의 줄에 꿰어 사용하였으므로 천 개 꿰미를 관이라고 불렀는데, 그 결과 동전 천개의 무게 즉 3. 75킬로그램을 나타내는 관도 곧 새로운 도량형단위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동전 하나의 무게를 기초로 하여 전(1개),- 량(10개)- 관(1000개)의 10진법 도량형 단위가 자리잡게 되자 량과 관의 중간에 있던 근에도 변화가 생겼다. 즉 기존의 600그램 근과 별도로 10량 즉 동전 100개에 상응하는 375그램도 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고려가 모델로 한 송나라의 동전은 당나라의 동전과 같은 형태였다. 따라서 고려의 동전도 하나의 무게가 3.75그램이었고, 그 결과 우미 말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3. 75그램의 무게를 가리키는 용어와 화폐를 가리키는 말이 같게 되었다. 한돈의 무게를 갖는 동전이 우리 나라 최초의 화폐였으므로 화폐를 돈이라고 하였는지, 돈 하나의 무게와 같기 때문에 3. 75그램을 돈이라고 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원래 동전 하나를 가리키던 말이 그 동전의 무게와 화폐자체 두가지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물건의 종류에 따라 한근의 중량을 600그램 혹은 375그램으로 다르게 계량하는 것도 동전의 사용과 관련된 현상이다. 당나라의 동전은 크기뿐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이후 중국 동전의 모델이 되었다. 그 이전의 동전들이 화폐의 앞면에 반량, 오수와 같은 동전의 무게를 새겼던 것과 달리, 중앙정부의 화폐발행권을 더욱 공고히 한 당나라에서는 황제의 연호를 동전의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즉 개원, 건원과 같은 연호에 통보 중보라는 용어를 결합한 개원통보, 건원중보라는 동전의 이름을 구멍의 사방에 새겨넣었다. 통보와 중보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보배라는 뜻으로 해당 연호 기간 중 첫번째로 만든 동전을 통보, 그 후에 추가로 발행한 것을 중보라고 하였다. 고려에서는 연호 대신에 동국이나 해동 삼한 같은 용어를 사용한 중국과 다른 고려 자체적으로 발행한 동전임을 나타내었다.
동전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려에서는 국가재정과 유통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정책하에 동전을 발행하였다. 하지만 화폐경제의 발전이 일반인들의 경제상황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와 같은 입장의 차이는 자연히 동전의 사용에 대하여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갖게 하였다. 특히 동전이 중국의 것을 모델로 하였다는 점에서 외국제도의 수용에 대한 입장 차이도 나타났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몸은 하나이지만 기능이 네 가지입니다. 먼저 그 생김새를 보면 몸은 둥글고 구멍은 네모난데, 둥근 것은 하늘을 본 뜬 것이고 네모난 것은 땅의 모양입니다. 이것은(하늘과 땅처럼)만물을 완전하게 덮고 받쳐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돈은 샘처럼 끝없이 흘러 한이 없습니다. 셋째로 돈을 민간에 퍼뜨리면 위와 아래에 골고루 돌아다녀 영원히 막힘이 없게 됩니다. 넷째로 돈은 이익을 가난한 사람과 부자에게 나눠주는데 그 날카로움이 칼날과 같아 매일 써도 둔해지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일어나는 그 많은 불행을 매일같이 경험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순진하게 들일 이 돈 예찬론은 다름아닌 고려 중기의 고승 의천이 국왕에게 동전의 사용을 건의하기 위하여 지은 글의 일부이다. 재물에 초연해야 할 승려가 돈의 사용을 건의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라고 생각되겠지만, 당시 의천은 국왕인 숙종의 동생으로서 국정에 적지 않게 관여했던 인물이었다. 독실한 승려로서 청정한 생활을 이상으로 삼았던 그가 돈을 예찬하면서 적극적으로 사용하자고 주장한 것은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돈을 사용하자는 주장은 의천 자신의 실제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2년 동안 송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발전된 화폐경제의 편리성을 경험한 후, 화폐의 사용이야말로 중국 정부와 백성들이 부유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하였다. 반면 고려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고려에서는 백성들이 실생활에 사용할 쌀이나 옷감으로 상거래를 하기 때문에 물자가 부족하게되고, 나아가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이 쌀에 흙을 섞고 옷감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농간을 부려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가난한 백성들이 시장에서 어렵게 구한 쌀로 제대로 밥을 해먹을 수도 없고 옷감으로 옷을 해입으면 속이 훤히 드러날 정도여서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 또한 일부 권세가와 부자들은 곡식이 부족한 시기에 쌀을 빌려준 후 몇 배의 이자를 쳐서 받기 때문에 일반 백성뿐 아니라 청렴한 관료들까지도 어려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금속화폐는 실생활에 사용되지 않는 그리로 만들기 때문에 쌀과 옷감의 부족과 품질 저하를 막을 수 있고, 부자들의 모리행휘도 근절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의천은 이러한 자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중국 역대 화폐정책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들고 그 원인을 설명한 후, 결론적으로 금속화폐의 사용은 국가와 백성들에게 만세의 복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의천은 화폐의 역사와 기능을 비교적 정확하게 이해한 후 화폐정책을 통하여 경제발전과 부의 균등한 분배를 이루려 한 우리 나라 최초의 화폐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천보다 한 세기 뒤에는 동전의 사용을 반대하는 다른 경제이론이 제기되었다.
공방(돈)은 겉은 원만하지만 속이 모나고 시세에 따라 임기응변을 잘하였다. 한나라에서 벼슬하여 홍로경(재무장관)이 되었다. 성격이 탐욕스럽고 청렴하지 못하였다. 재물을 관장하면서 백성들과 작은 이익을 다투고, 물가를 조작하여 곡식을 싸게 하여 백성들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몰려 농사를 망치게 하였다. 또 권귀들과 사귀어 그 집에 다니며 벼슬을 사니 관리들의 승진이 모두 그 손에서 결정되었다. 관료들이 지조를 꺽고 다투어 뇌물을 바치니 거둬들인 문서가 산더미 같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사람을 사귈 때에는 인간성을 따지지 않고 시정 잡배라도 돈 있는 사람이면 함께 몰려 다녔다.
돈을 공방(네모구멍)이라는 인물로 의인화하여 화폐가 갖는 탐욕과 부패를 예리하게 풍자한 이 글은 무인 집권기의 문인 임춘이 지은 <공방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글에서 중국 역대의 화폐정책은 공방 집안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이들은 부국강병을 추진한 임금들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끝내는 탐욕과 부패 때문에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사회의 혼란과 부정부패는 늘 이들과 함께 하였다. 이처럼 돈의 부정적 성격을 강조한 임춘은 동전이 사용되면서 인간 사회의 탐욕과 이기심이 증대한다고 보았다. 또 국가재정의 확대만을 목표로 하는 정책은 은율을 내세우는 부패한 관료만 득세하게 하고 정직한 관료와 선량한 백성들은 피해를 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하였다. 비록 화폐의 기능에 대하여 의천과 같이 논리적인 주장은 제시하고 있지 못하지만 단순히 화폐만이 아닌 화폐와 재정정잭과의 관계 민생보다 부국강병에만 치중하는 재정정책의 단점을 지적한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의천과 임춘이 이처럼 상반3된 화폐관을 가진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달랐던 데 연유한다. 의천은 고려가 활발하게 발전적인 사회를 만들려 했기 때문에 동전을 사회 구성원 모두의 부를 창조하는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임춘은 정통성 없는 무인들이 권력을 장악한 시기에 끝내 등용되지 못하고 소외된 채 경제적으로도 불우한 생활을 감내해야 했으므로 화폐경제의 발전이 일부 권세가와 부자들의 재산 축적에 기여할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돈 그 자체는 우리의 경제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도구일뿐 그것이 우리의 삶을 궁핍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하는가는 오히려 사회제도에 관한 것으로서 실제적으로는 사회에 부가 얼마나 고르게 분배되어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고려시대의 화폐; 쌀, 옷감, 은, 동전, 지폐 동전이 사용되기 이전에 고려에서는 주로 쌀이나 옷감과 같은 현물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금속화폐를 사용했고 일본에서도 8세기 초부터 동전이 유통되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 금속화폐의 사용은 상대적으로 늦었다. 일반적으로 화폐의 발전은 상업의 발전과 비례하는 것이므로 금속화폐의 사용이 늦은 것을 우리 나라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상업이 그렇게 부진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상업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은 은의 활발한 유통이다. 고려의 시장에서는 은이 가장 중요한 교환수단으로 유통되었고, 대부분의 상품은 은으로 그 가격이 환산되었다. 귀금속인 은을 화폐로 활발하게 사용할 정도로 당시의 상업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한편 옷감도 단순한 옷의 재료로서의 기능을 벗어나 순수한 교환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강화시켜가고 있었다. 고려말 이전에는 아직 목화가 전래되지 않아 면포는 없었고, 비단과 마포(삼베), 저포(모시)가 주요한 옷감이었는데 이중 시장에서 교환수단으로 유통된 것은 일상복의 재료가 되는 마포와 저포였다. 마포와 저포가 순수한 교환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던 것은 당시 시장에서 품질이 조악한 옷감이 유통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원래는 5승포, 즉 400올이 들어간 것이 마포와 저포의 표준 규격이었지만 시장에서는 날실의 수를 대폭 줄인 2승포 혹은 3승포가 유통되었다. 만일 이러한 옷감으로 옷을 해입으면 의천이 말한 것처럼 추위를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속이 훤히 비쳐 옷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옷감은 원래부터 옷을 해입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화폐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옷감의 가치는 들어간 실의 양에 따라 결정되었으므로, 2승포나 3승포는 각기 정포 즉 5승포의 5분의 2 또는 5분의 3의 가치를 갖는 교환수단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량옷감의 사용이 유통질서에 커다란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인들의 경우 옷을 해입기 위해서서는 5승포 이상을 구했지만 보통의 상거래에서는 별다른 불편함 없이 2승포나 3승포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품질이 떨어지는 옷감의 출현은 상거래의 문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업이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하지만 당시에 금속화폐의 필요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적은 액수의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는 경우에는 은이나 포로 거래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쌀을 사용하였는데, 주식인 쌀을 식용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쌀에 흙을 섞어 유통시킬 경우 그 피해는 심각하였다. 은에 비하여 훨씬 가치가 적은 동전을 사용할 경우 이러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국가의 재정운영에서도 동전의 사용은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재정은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곡식과 옷감 같은 현물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흉년이나 세금 운송사고를 당할 경우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실제로 지방의 세금이 중앙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해 관료들의 녹봉을 몇 개월씩 지급하지 못하고 미루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현물 이외에 동전을 사용할 경우 국가의 재정을 보다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더욱이 동전과 같은 금속화폐는 원칙적으로 정부만이 만들 수 있었으므로 경제생활에서 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고려정부는 여러 차례 금속화폐의 유통을 추진하였다.
이미 의천의 건의가 있기 한 세기 전인 996년(성종15)에 첫 시도가 있었고, 숙종은 의천의 건의를 받아들여 보다 적극적으로 동전사용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때 정부에서는 동전의 원활한 사용을 위하여 동전만을 사용하는 술집과 음식점을 설치하기도 하였고, 관료들의 봉급을 동전으로 지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강제력에도 불구하고 일반 백성들은 동전의 사용의 회피했던 것이다. 은이나 옷감, 쌀과 같은 현물화폐에 익숙해 있던 당시에 동전이 매력을 갖기 위해서는 상업의 발전이 한 단계 비약하거나 조세를 돈으로 걷는 것과 같은 변화가 필요했는데, 그러한 변화는 17세기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도 여러 차례 동전을 만들고 상거래에서 사용하도록 강제하였지만, 언제나 고려에서처럼 외면 당하고 정부는 화폐정책을 변경해야만했다. 동전과 달이 또다른 법정화폐인 은병은 별다른 무리없이 사용되었을 분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은병은 공식적으로는 은 1근 즉 16량의 가치를 가졌는데, 실제로는 은 12.5량과 구리 2.5량을 혼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공식가치와 실제함량 사이의 차이는 정부에서 주조비와 조주이익으로 차지하였다. 은병은 쌀 수십 석의 가치를 갖는 초고액화폐였지만, 실제 상거래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12세기에 고려를 방문했던 중국 사신은 개경 시내 시장에서의 주된 유통수단으로 은병을 들고 있다. 동전과 달리 은병이 법정화폐로서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은 당시 고려 사회에서 은이 이미 중요한 유통수단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원 간섭기에는 일시적으로 원나라의 지폐가 고려에서 유통되었다. 송나라 이래 상업 특히 먼 지역간의 거래가 크게 발전했던 중국에서는 상인들 사이에 약속어음 종류의 문서가 활발하게 이용되었는데, 원나라에서는 이러한 제도를 국가에서 관장하여 정부가 직접 동전의 지급을 보장하는 지폐적 성격의 보초를 발행하여 유통시켰다. 원나라의 간섭을 받고 있던 고려는 간접적으로나마 원나라의 경제권에 편입되었으므로 이 보초가 유통되었는데, 세게 제국인 원나라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보초는 고려 국내세서도 별다른 저항없이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하지만 원나라가 몰락하면서 보초의 가치는 땅에 떨어져 종이조각에 불과하게 되었다. 고려말과 조선초에는 이러한 보초를 모법으로 하여 지폐인 저화를 발행하고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였지만 동전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외면받아 곧 사라지고 말았다.
|
|
|
글터 → 삶속의 글
|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기중이와 명주의 자랑
우리 동네 언덕 아래 골목길은 시장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어느 날 유치원 아이들과 연극 관람을 하고 시장 길을 막 지나칠 때였다.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기중이 녀석이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기! 저기요! 저기 우리 할머니 있었요. 우리 할머니가 순대 팔아요."
순대 장수 할머니가 자기 할머니라는 것을 알리려는 녀석의 목소리는 다급하기까지 했다. 아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내다보니 머리에 보자기를 쓰고 커다란 양푼 위의 도마에 순대를 썰고 있는 초라한 할머니가 보였다. 내가 창 밖을 보며 "그래, 너희 할머니니?"라고 하자 기중이는 자랑스럽게 "예!"하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얼마쯤 지나려니 이번엔 명주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야! 우리 엄마가 일하시는 냉면집이다. 선생님, 우리 엄마가 저기서 일하세요."
명주의 깍듯한 높임말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그 천진스러움은 도리어 우리 선생들을 당혹하게 했다. 행여 다른 사람이라도 들을까 봐, 마치 내 비밀을 들켜 버린 양 얼굴을 붉혔다. 아이들을 한 명씩 내려주고 유치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시장 앞을 지나게 되었다. 명주 엄마가 일하는 냉면집도 지나고 순대 파는 기중이 할머니의 좌판도 지나쳤다. 일부러 창 밖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내 속의 천진함과 맑음은 어느새 가식으로 치장되고 채워져 부끄럽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운 것을 당당해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기중아, 명주야, 나도 너희 처럼 순대파는 초라한 할머니가 내 할머니라고, 냉면집에서 일하는 엄마가 바로 내 엄마라고 자신있게 외치고 싶구나.'
석미진 님/서울시 종로구 명륜3가
|
|
|
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90 -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J.S.밀의 "공리주의"(1863년) 그때 세계에서는 1863년: 미국 링컨, 전국에 노예해방 선언 1864년: 스위스 뒤낭, 국제적십자사 창설
밀 [Mill, John Stuart] 1806. 5. 20 런던~1873. 5. 8 프랑스 아비뇽.
|
밀에게는 두 사람의 은인이 있었다. 교육을 맡아 밀을 학자로 키워준 아버지 제임스 밀이 그 첫째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테일러 부인이었다. 밀은 독신으로 있던 테일러 부인과 사랑하게 되었고 후에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테일러 부인은 드물게 보는 지성적인 여인이었다. 교양과 모든 정신적 분야에서 밀과 비교해 손색이 없는 귀부인이었다. 밀은 저작에 착수할 때 그 내용을 테일러 부인에게 알려주면서 협조를 구했고, 저작이 끝났을 때는 같이 읽음으로써 수정과 비판을 얻었다고 자술하고 있다. 지적 소양이 높은 귀부인으로 그녀는 평생 밀의 친구이면서 아내의 역할을 잘 감당해주었다. 밀은 당내에 요구되는 여러 분야의 학문에 손을 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주목할 만한 저서로 고전적 의의를 남겨주었다. 그는 학분적 성숙기인 30대 후반기에 "논리학 체계"를 저술해 내놓았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대표적인 체계를 갖춘 논리학이라고 평했다. 경험주의적 귀납법을 체계화하여 논리적 방법으로 도입시킨 명저다. 다음에 그는 "경제학 원론"을 저술했다. "논리학"이 나온 지 5년 후의 일이다. 고전적 경제학의 원리를 체계 있게 저술해주었다. 다음해에는 "자유론"을 완성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애독한 책 중의 하나다. 사회, 정치문제가 가미된 자유론이다. 그리고 4년 뒤인 1863년에는 "공리주의"라는 사회철학의 대표적인 저서를 완성시켰다.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저서가 되었다. 2년 후에는 "A. 콩트와 실증주의"를 통해 콩트의 학설과 명성을 일깨워주었다. "종교론"이 마지막 대표적인 저서가 되었고, 그 2년 전에 유명한 "자서전"을 발표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취급하고 싶은 과제는 그의 사회사상으로서의 공리주의 철학이다. 최대댜수의 최대행복을 지표로 삼는 공리주의 사상은 제레미벤담 때부터 제창되었고 밀의 아버지 제임스 밀이 이에 동조했었다. 그 정신은 쉽게 말하면 '어떻게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찾아 사회의 변화방향과 이상을 제시해주는 사상이었다. 지금 우리들의 위치에서 본다면 타당성 있는 사회이론으로 문제시될 수 없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위험성이 있는 급진사상으로, 기성사회의 가치관의 척도로 보았을 때는 반대와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을 만한 것이었다. 우선 그들은 그 당시까지 영국사회를 이끌어온 전통적 종교관을 경시하는 풍조를 지니고 있었다. 반기독교적이거나, 전통적 신앙과 대치한다는 것은 국민대중의 지지를 얻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리주의 가치관은 합리적인 가치관을 강조하고 있어, 기성도덕과 윤리관에서 볼 때 적지 않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밀도 대다수의 과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나 행복의 본질과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를 제기해야 했다. 행복의 양과 질은 어떻게 계산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들의 삶을 규제하는 사회기능, 즉 종교, 도덕, 정치, 법률 등의 규제역할은 어떤 것들인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큰 역사적 흐름에서 보았을 때 공리주의는 영국사상의 정치, 사회, 윤리적 방향설정에 기여한 바가 컸다고 하겠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논리는 마침내 정치에 있어서는 의회 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있었고, 경제면에서는 복지체제에로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영국이 북유럽의 복지국가들과 호주, 캐나다의 사회체제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은 이러한 정신적 선구성에서 가능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미국은 이러한 영국의 보수적인 제도와 체제를 좀더 개척적이며 창의성 있는 방향으로 발전시켜 오늘의 활성화된 아메리카 정신을 창안해내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미국인들의 프래그머티즘이 뒷받침했음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보다는 그 발전적 의의를 택한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우리 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실용주의의 학설 자체나 그들의 철학사상을 교단에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러한 정신적 풍조를 직간접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국과 미국의 정신사적 전통은 경험주의와 공리주의 그리고 그 발전적인 결과를 볼 수 있는 실용주의의 과정을 밟아 오늘에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미계통의 철학과 사상이 갖는 강점은 그들은 현실과 거리가 먼 이론을 위한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현실과 윤리성을 동반한 경험과 현실의 철학을 개척, 계승했다는 점이다.
|
|
|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바바리 코트'는 상표에서 나온 말
날씨가 추워지면서, 길거리에 '바바리 코트'를 입은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요즈음은 '바바리 코트'를 입은 사람은 자가용이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도 들을 정도로 이 옷을 입은 사람이 적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바'(overcoat)가 두텁고 무거워서 대부분 '바바리 코트'를 선호했었습니다. 가을이나 겨울 아무때나 입어서 전천후 코트가 되었었지요. 이 '바바리 코트'는 영국 Burbery 회사가 만들어낸 비옷(레인코트)의 상표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
|
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신성한 영혼의 병 - 도스토예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 [Dostoyevsky, Fyodor Mikhaylovich] Dostoevsky라고도 씀. 1821. 11. 11(구력 10. 30) 러시아 모스크바~1881. 2. 9(구력 1. 28) 상트페테르부르크
|
어떤 특수한 천재성은 본인의 지병과도 깊숙이 상관되어 있음을 언급한 것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파가니니의 비사회적 여러 이상성 및 완벽한 예술적 명기를 그가 앓았던 홍역 병원체에 의한 만기성 뇌염이라는 병명에 케르너박사는 그 근거를 두었지만 여기에 또 다른 학설이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과 그를 괴롭혀 온 간질과의 상관관계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온몸을 파르르 떨며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죽음의 상태를 수없이 반복하게 하였던 그 간질이 한계상황에서의 직관력을 배양해 주었다 는 것이다. 이 신성한 영혼의 병 간질이 발작되면서 겪게 되는 심묘경의 체험. 발작 직전의 육체적 심리적 한계상황으로부터 야기되는 직관력과 예언적 통찰력이 그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바로 그 점이다. 그의 대표작의 작중 인물, <백치>에서의 뮈슈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스케치코프, <악령>의 키킬로프의 언행을 통해서 그러한 심묘경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백치>의 주인공, 뮈쉬킨공작은 날 때부터 간질을 앓고 있었으나 남다른 직관력과 투시력을 지닌 선량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작가 자신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자신의 간질 체험을 이렇게 밝힌 적도 있었다. 이승과의 단절, 그것은 저승의 시작인 듯하다. 발작 직전, 바로 그 찰나에 더할 나위 없는 황홀감이 간질병 환자를 어떻게 사로잡는지 여러분들은 모를거요. 마호메트가 짧은 기간 동안 천국에 있었다고 말했듯이 나도 그처럼 발작이 일어나는 동안 천국에 있었소. 이쪽에서 보면 한없이 무서운 고통이, 저쪽에서 보면 한없는 기쁨으로 넘치오. 그는 생의 한가운데서 무수한 죽음을 체험하며 그때마다 고통과 기쁨을, 죽음의 양면으로 보았던 것이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빈민구제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의 군의관이었으며 7남매의 둘째였다. 그는 18세가 되던 해, 농노에 의해 살해되는 아버지를 지켜보아야 했다. 1849년 스스로 반정부운동(페트라셉스키 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사형언도를 받고 그는 처형 직전까지 가는 특수한 경험을 체험하게 된다. 12월 22일 오전 9시, 영하 22도의 추위속에서 셔츠바람으로 그는 세묘노프광장에 마련된 처형대 앞에 다른 사형수들과 두 줄로 나란히 세워졌다. 그때의 체험이 <백치>에 이렇게 나타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숨쉴 수 잇는 시간은 5분 뿐이다. 2분은 동지들과의 결별에, 다음 2분은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의 자신의 일을 위해, 그리고 최후의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봐 두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는데 쓰기로 했다. 그러나 처형 직전(5분전)에 황제의 특사로 감형이 되어 극적으로 사형을 면하게 된다. 그해 12월 25일 시베리아의 오스크감옥에 와서 유형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것은 생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고 형에게 써 보낼 정도의 고통스런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의 만년은 명성과 부로 안정이 되어갔다. 죽기 3개월 전만하여도 의기양양하게 다음 20년 동안 살아가며 써야 할 것들 에 대해 적어두었다고 그는 말했다. 간질의 빈도도 점차 줄어들고, 지병이던 폐병도 악화되지 않아 모처럼 의욕에 찬 만년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누이동생들과 유산문제를 놓고 다투던 날 밤, 폐의 동맥이 터졌고 각혈이 시작되었다고 그의 딸이 <전기>에서 밝혀 놓았다. 도스토예프스키으 어머니도 폐병으로 쓰러졌고, 첫 번째 아내 마리아도 폐병으로 죽었다. 안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알로샤는 세살 때 간질발작으로 죽었다. 가계의 병력은 이러하였다. 그는 펜을 들어 카트코프에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나머지 원고료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신부를 불러 고해를 하고 종부성사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7시에 그는 젊은 아내인 안나를 불렀다. 오늘 자신이 죽을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하며, 안나에게 촛불과 성경을 가져오게 하였다. 시베리아 감옥에서부터 늘 갖고다니던 성경책이었다. 안나가 아무렇게나 편 곳은 마태복음 3장 15절이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는 잠시 동안 허락하라. 그 말은 내 죽음을 말하는 거야. 됐어. 그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고 손으로 제지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이들을 불러 작별인사를 하고 아들에게 손때 묻은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1881년 1월 31일 밤 8시 30분. 입에서 피를 흘리며 그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61세였다.
1996년 여름, 나는 알렉산드르네프스키 수도원에 있는 그의 묘지를 찾아 무덤앞에 서 보았다. 늠름한 그이 흉상이 반기는 듯 하였다. 장례날 약 3만명의 조객이 이곳에 와서 추도를 했으며 추도사가 낭송될 때마다 무덤 위에 꽃다발이 하나씩 놓여졌는데 그 숫자는 무려 74개나 되었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또 아침 10시에 시작한 영결식은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는 걸 기억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몇사람의 여행객이 조용히 지나갈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를 최상으로 대접하였다. 그는 궁핍과 신병의 고통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 <죽움의 집의 기록> <학대받은 사람들> <도박자> <죄와 벌> 등을 써 냈다. 신성한 영혼의 병 을 몸에 지닌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 외에도 카이사르와 나폴레온, 마호메트, 반고흐, 몽테뉴 등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
|
글터 → 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46. 천황의 품으로 돌아간 일본의 자유 정신
현재 일본에서 통용되고 있는 만 엔짜리 지폐에는 학자풍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이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로 일본의 명문사학 게이오 대학의 전신인 게이오의숙을 창시한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 계몽사상가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 계몽사상가인가? 김옥균, 박영효 등 한국의 개혁파들이 그를 스승으로 모실 정도로 당시 입헌 정부를 수립하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동양의 혁명가들에게 그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로 일찍이 미국, 영국 등을 견학한 바가 있는 그는 서양의 의회제도, 교육, 인권사상 등을 소개하는 데 정열을 불태웠다. 1870년대에 쓴 <학문을 권함>은 1872년부터 76년까지 낸 17편의 소책자를 묶은 것으로 진보적인 계몽사상가로서의 후쿠자와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에 앞서 영국과 미국을 다녀와서 쓴 <서양사정>(1866-69)이 20만 부가 팔려나간 데 이어 <학문을 권함>도 소책자로 370만부나 팔렸다니 가히 일본 자유주의사상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학문을 권함>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당연한 관념이 되어 버린 인권 평등, 실학의 중요성, 국가 독립, 국법의 준수 등을 주장하고 있다. 서양의 계몽사상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논리와 충만한 기백을 담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투쟁했던 데 비해 후쿠자와의 유일한 목표는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의 독립을 보전하는 것과 나아가 일본도 열강의 대열에 끼는 데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국민 일반을 문명 개화의 문에 들여 놓아 이 일본국을 군사적으로 강하고 상업이 번창한 대국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 나의 가장 큰 소망`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후쿠자와의 계몽적 자유주의는 언제나 일본이라는 국가의 이해에 종속되어 있었다. 여기에 이미 후쿠자와의 자유주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애국을 위한 것이었지 애국을 초월하는 상위 개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본래의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고 있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명치 정부는 급속히 보수화되어 갔다. 부농, 지식인을 중심으로 조속한 헌법 제정과 의회 설치를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을 무력으로 억누르고 정부내의 자유주의 세력을 축출해, 소수의 실권자를 중심으로 독재 정부가 성립했다. 경제적으로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이뤄져 대다수 농민의 희생 위에 소수의 정상배들(미츠비시, 미츠이 등)이 급성장했다. 대외적으로는 서양 각국이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노골화하면서 대외 위기감이 조장되고 해외침략노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명치정부의 보수화 경향에 발맞춰 후쿠자와 유키치도 <학문을 권함>에 나타난 계몽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고에서 변질되어 갔다. 그는 천황을 문명 개화의 중심이라고 숭배하는가 하면 지도자가 되어 서양 열강의 침략에 맞서야 한다는 `아시아맹주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1900년 중국에서 터진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이 서양 열강의 군대와 함께 중국에 파견되자 후쿠자와는 `그 전쟁 보도의 기사를 읽을 적마다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것을 금할 길 없어 다만 감격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했다. <학문을 권함>에서 자신이 주장했던 국가간의 평등은 온데간데없고 제국주의 군대가 되어 중국 땅을 주름 잡는 것에 대한 감격만이 말년의 후쿠자와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1901년 그가 사망했을 때 일본 국회는 이 일개 야인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미 후쿠자와는 자유 일본의 상징이 아니라 중국와 조선 침략을 목말라 하는 일본 지배계급의 정신적 지주였다. 후쿠자와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일본 지식인들은 자유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마음 깊은 곳에서는 국가와 천황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 근현대사를 통해 서양의 여러 사조를 받아들였던 그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자신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사상으로 쉽게 전향해 버리곤 했다. 1930년대 수많은 일본 공산당원이 불과 다섯 손가락에 꼽을 사람만을 남겨 놓고 모두 `천황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전향 바람을 일으켰던 것은 그 뚜렷한 예이다. 적어도 그들은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천황의 아들이었고 후쿠자와 유키치의 후예들이었던 것이다.
|
|
|
글터 → 사회/문화/인물 |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3장 시들어 가는 미국, 일어서는 중국
7. 폐어풀레이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영국의 유명한 외상이었던 맥밀란은 '영원한 친구는 없으며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이미 국제 간의 합작에 진실이 되었다. 이 장의 첫머리에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소련의 사회제국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숨김없이 토로하였고 아울러 중국사회에 '전소련(前蘇聯) '이란 말이 표준용어로 등장하여 마치 온 국민이 하릇밤 사이에 역사적인 상전벽해라도 된 듯이 걸핏하면 '전소련'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소련은 소련일 뿐이고 그것은 영원한 구체적 실체이며 시간과 시간적으로도 영원히 현실이다. 만약 우리가 비교적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면 나는 소련의 계승자인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에게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조금의 숨김도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호감은 소련이 해체되던 그날부터 질적인 비약을 하였다. 광활하고 장엄했던 한 나라가 한 차혜의 수렵을 한 후 사분오열로 갈라진 현상은 나에게 숙명적 비애 같은 것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게도 강력하던 나라가 누적된 국민의 소비품 부족이라는 물질적 이유로 하루 아침에 깡그리 사라지는 현상은 나에게 놀라움과 곤혹감을 안겨 주었다. 동독의 예도 나에게 곤혹감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동독은 그 경제력이 영국에 바짝 쫓아갈 만큼 막강하여 동구권에서는 유난히 돋보였었다. 그러나 통일이 된 후에 서독 재벌들의 밑 없는 독이 되어버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이념과 질서의 붕괴는 일순간에 일어났고 붕괴된 국가들은 통한 속에서 그 신세가 완전히 전락하여 카프카가 묘사한 벌레처럼 변하여 언어능력조차도 상실한 채 앵앵거리기만 하고 있는 듯하다. 5년 전 주중 러시아대사관에서는 중국의 어느 기업에서 발행한 백설탕이나 돼지고기 같은 식품류가 가득 실린 팜플렛을 러시아 국내에 배포하는 것을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독립국가연합에서 배포금 지령이 내려 어이없어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하마터면 기본적인 어떤 것을 망각할 뻔하였다. 러시아가 앞으로도 몇 년 간을 더 암담한 상태로 지낸다 해도 절대로 이류국가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란 점 말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스스로를 통렬히 질책한다거나 우리의 하드 및 소프트웨어의 결핍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다거나 하면, 우리 스스로 현대화된 강대국의 기본조건들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신념을 더욱 공고히 다지는 것처럼, 소련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중국과 러시아가 미래의 원대한 목표를 위해 합작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또 다른 독립국가연합의 나라들과 우호적인 상호협력체제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우리는 러시아인들의 고통을 존경스런 심정으로 바라보며 이를 '하늘이 그들에게 내린 대임'이라는 복음으로 간주하고 있다. 21세기를 겨냥해서 중국과 러시아는 사상적으로나 양국의 국익을 보더라도 틀림없이 맹방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비교적 장래성이 있다고 보여지는 독일이나 동유럽의 여러 나라와 바르샤바조약 가맹국이나 남아프리카와 같은 나라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측은 감상적인 비약이 아니라 세계 변화추세의 필연적사실인 것이다. 우리의 이익을 영원히 지켜야 한다는 원칙은 미래에 그 보상을 바라지않는다는 원칙에 기초한 것으로 이는 불교의 '공덕'관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대동(世界大同)의 사상 원천은 중국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이 점은 이미 나폴레옹으로부터 시작하여 200여 년 동안의 여론을 조성해온 것이며 오늘날에는 이미 현실적인 공간과 모델을 가지게 되었다. 원대한 목표에 대한 희망은 가볍게 현실을 포기하거나 서양에 대해 고립주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이익을 영구히 지킨다는 원칙은 서양의 주요 국가들이 채용해야 할 쌍방 간의 표준이지 절대로 도량이 모자라거나 하찮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식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맥밀란은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이다'라고 소곤대지만. 리펑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할 때 영국인이나 미국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아주 많은 오더를 싸들고 갔는데 이 점에 대해 나는 대찬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서양 국가들와의 무역에 대한 정치인의 의지에 대해 극단적인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니 나에게 '정경 분리' 정도의 사치스러운 말을 할 필요는 없으며 이 원칙은 서양의 정객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우리가 보기에 서양 7개국이 우리나라 시장에 대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것은 우리가 ' 맥밀란 정신'을 관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계기이다.
서양 대국에게 페어플레이는 종래 성공한 적이 없는 상업법칙이었다. 사리에 어둡고 완고하기만 한 서양 열강이 걸린 병인. 원인을 망각하는 병의 치료약으로는 주문서를 취소하는 것이 가장 좋은 약이 될 것이다. 아직 사상적 활력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 오더를 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대환영이다. 동시에 양호한 대국 풍모를 지닌 독일에 오더를 발급하는 것도 대찬성이고, 이후 끊임없이 정치적인 풍토가 일관되게 발전하는 국가에 오더를 발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대찬성이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중국의 국익에 근본적으로 부합하는 것이고 최상의 페어플레이다. 같은 이치로 '페어플레이는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제목과 관련하여,중국이 미개발 국가에 대해 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일찍이 마오쩌똥 시절에 탄자니아와 잠비아를 연결하는 탄잠철로()를 무상으로 건설해 준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책임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면, 일반 대중들은 거부감을 가지기도 한다. 우리는 대만 당국의 ,돈 뿌리기 외교'쯤은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과 힘을 겨루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높은 경지의 전략을 채택하여 우리에게 유리한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하고 우리의 경영수완을 개발하며 우리 근로자에게 국제적 경험을 풍부하게 쌓을 수 있도록 하여 우리가 전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전면적인 준비로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제3세계는 선진국과 페어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이유로 고통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러므로 전세계의 빈곤지역과 약소민족에게 보내는 원조는 증가시켜야 하는 것이 중국이 취해야 할 최상의 페어플레이인 것이다
|
|
|
글터 → 명상/지혜/처세 |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운명의 손길
장군은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중과부적이라 할지라도 이대로 후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적의 군사가 열 명이라면 아군의 군사는 단 한 명.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은 수효였다. 더구나 아군 병사들은 몇 차례 접전 끝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적은 곧 다시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적의 진지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공격의 북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진퇴양난. 천 근이나 되는 바위가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전멸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먼저 공격을 감행하거나 도망칠 수 있는 데까지 도망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장군은 드디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늠름한 자세로 백마를 타고 병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나를 따르라! 우리가 먼저 공격을 감행한다! 승리는 승리하려고 하는 자만의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우리가 승리한다!"
장군은 목청껏 소리를 드높여 승리를 장담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전의마저 상실한 채 묵묵히 장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적진을 향하는 병사들의 행렬이 마침 한 불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장군은 잠시 병사들을 멈추게 하고 혼자 불당 안으로 들어가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나왔다. 그리고는 병사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보라, 내가 지금 너희들 앞에 동전 하나를 던지겠다. 동전이 앞면이 나오면 우리가 이길 것이요. 뒷면이 나오면 우리가 지고 말 것이다. 자아. 기다려라, 운명의 손길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장군은 떨리는 손으로 동전을 높이 던졌다. 동전은 급히 땅에 떨어지면서 앞면이 나왔다. 병사들은 갑자기 사기가 충전되었다. 그들은 그 길로 적진을 향해 달려가 대승을 거두었다. 다음 날, 한 병사가 장군에게 말했다.
"장군님, 저는 이번 전투에서 운명의 손길은 그 아무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장군이 말했다.
"그렇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면서 장군은 어제 던졌던 동전을 병사에게 보여주었다. 그 동전은 양쪽이 다 앞면인 동전이었다.
|
|
|
글터 → 이글저글 |
모나코 왕국은 뉴욕 시 센트럴 공원의 반 정도 넓이밖에 안되는 조그만 나라이다. 국립 오케스트라 단원은 85명, 군인들은 82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루이 암스트롱은 달에서 지구로 1.3초만에 말을 전했다. 하지만 옛날 유럽 신문들은 미국 링컨 대통령의 죽음을 2주 만에 보도했고,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소식을 이사벨 여왕에게 전하는 데 5개월이 걸렸다.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편의 유명한 구절이다. 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할까? 양은 잔잔한 물에서만 물을 마시고 흐르는 물에서는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의 바빌론 사람들은 결혼 적령기의 처녀들을 매년 경매에 부쳤다. 가장 매력있는 처녀는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남자의 차지가 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생긴 돈은 처녀들의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되었으니 제 아무리 못생긴 처녀라도 남편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헤로도투스는 이 관습을 바빌로니아의 가장 뛰어난 관습 중 하나로 평가했다.
고대의 소는 몸집이 매우 작은 동물이었고 그 크기가 불과 다섯 개의 발톱을 가진 고양이 정도였다고 한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