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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86 호
4339.12.15 (10.25)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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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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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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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나는 자기의 스케줄에서 나를 위해 시간을 찾아 주는 친구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자기의 스케줄을 보지도 않고 나를 위해 시간을 내 주는 친구를 더욱 소중히 여긴다. / R.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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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4부 창업의 새 아침
여왕이 불밝힌 통일의 전야 -선덕 여왕
진평왕은 좌우 대신들을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연방 기쁨의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자리에는 전에 없이 왕의 장녀인 덕만 공주도 나와 있었고, 왕비 마야 부인도 나와 있었다. 왕은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앞에 놓고 대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런데 아직 나이 어린 덕만 공주가 한참 동안 모란꽃 그림을 감상하고 나더니 진평왕을 바라보고 자기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바마마, 이 모란꽃 씨를 뿌려서 꽃이 피어도 꽃에는 향기가 없겠나이다." "그러냐? 엇허허허, 어째서 이 꽃에는 향기가 없다는 게냐?" 왕은 귀여운 공주의 의견이 기특하게 생각되었다.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에 관심을 보이는 공주는 그만큼 어른스러워 보이기까지 하였다. 모란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라는 덕만 공주 말에 대신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되었는지 공주 쪽을 바라보았다. "이 그림을 보옵소서, 아바마마." "그래, 그림에 무슨 잘못된 점이라도 있다는 얘기냐, 공주?" "그렇사옵니다. 당나라에서 보내온 이 모란꽃 그림은 매우 아름답게 그려졌지만, 그림 안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을 보니 앞으로 씨앗을 뿌려서 모란꽃을 가꾸어도 향기가 없겠나이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놀라워하였다. 왕은 더욱 공주가 사랑스러워서 연방, "엇허허허, 공주의 생각이 그럴듯하구나. 엇허허허........" 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덕만 공주는 조금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지 말을 이었다. "무릇 여자로서 나라 안데 제일가는 국색이면 남자들이 색에 흘러 빠지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들이 따르는 법 아닙니까? 거듭 아뢰옵니다만 당나라에서 보내온 이 모란꽃이 아주 아름답기는 하오나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겠나이다." 두 번씩이나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공주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왕은 곧 모란 씨앗을 뿌려 꽃나무를 가꾸어 보라 일렀다. 과연 모란꽃이 탐스럽게 피었으나 덕만 공주의 말대로 그 꽃은 향기가 전혀 없었다. 덕만 공주. 뒷날 선덕 여왕이 된 그 덕만 공주는 이렇듯 어릴 때부터 모든 일을 판단하는 식견이 명석하였다.
신라 제 26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덕만 공주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사리에 밝고 민첩하였다. 진평왕이 대를 이을 왕자가 없이 돌아가자 나라 사람들은 덕만 공주를 임금으로 세우고 성조황고라는 호를 올렸다. 신라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상 이례적으로 여왕이 된 선덕은 신라의 귀족 성골 출신이었다. 여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이웃 백제와 고구려의 세력을 견제해 가며 이른바 삼국 통일의 초석을 다졌다. 여왕 5년(636년) 5월의 일이었다. 두어 달 전부터 여왕은 병환이 나서 치료를 받아오고 있었으나 이렇다 할 효력이 없자 황룡사에다 백고좌를 열어 중들이 인왕경을 강독하는 등 경황이 없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나라 안에 변고가 일어난 것이었다. "변고라니,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이오?" 여왕은 아직도 쾌차하지 않은 몸을 일으켜 왕 앞에 나타난 대신을 바라보았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하도 기이한 일이라 아뢰지 않을 수 없나이다." "글쎄 슨 일인지 냉큼 말하오." "궁성의 서쪽 옥문지에 두꺼비와 개구리떼가 모여 들었나이다, 마마." "두꺼비와 개구리떼가?" "예, 마마. 실로 기이하고 불길한 일이라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줄 아뢰오." 여왕의 심상치 않은 분부가 떨어지자 군신들은 하던 일을 제쳐놓고 달려왔다. "경들은 들으시오. 옥문지에 떼지어 나타난 두꺼비와 개구리떼는 참으로 흉한 징조이니, 지금 곧 알천과 필탄 두 장군은 궁성 서남쪽에 있는 여근골 이라는 데로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적을 토평토록 하오." "적이라니오, 마마?" "필시 그 곳에 가면 적병이 잠복해 있은 터이니 사각을 다투어 달려가도록 하오." 알천과 필탄 두 장군은 무슨 영문인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어떻든 적이 나타났다는 데는 시각을 지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여왕이 지시한 대로 여근골에 가 보니 과연 백제 군사 500 명이 그 곳에 와서 복병을 설치하고 있었다. 신라 군사는 알천, 필탄 두 장군의 작전 지시를 받아 백제 군사를 남김없이 잡아 죽였다. 알고 보니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지금의 충주와 괴산 부근)을 치기 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숨어 있었던 것이다. 두꺼비와 개구리떼가 모여든 것을 보고 적병이 잠입해 왔다는 것을 알아낸 선덕 여왕은 그 같은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었는지 궁금해 하는 군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옥문이라는 함은 곧 여근(여자의 중요한 곳)이란 뜻이요, 내 일찍이 여근골이라는 곳이 궁성 서남쪽에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적병은 반드시 그 여근골에 있음을 알겠으며, 또한 개구리나 두꺼비는 성낸 눈을 가졌으므로 곧 적병이 왔음을 알겠으며,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여근이 죽는 법임은 음양의 이치이니 적병을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도다." 듣고 있던 남자 대신들은 남근이니 여근이니 하는 은근한 비유로 적병이 신라 영토 안에 들어왔음을 알아낸 여왕의 기지에 탄복하고 얼굴을 붉히며 혀를 내두를 따름이었다. 여왕이 보위(왕좌)에 오른 지 오륙 년 동안은 분황사를 완공하고 각 고을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등 제세와 치적에 힘쓰며 대평성대를 구가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나라 안팎 사정은 늘 선덕 여왕 편만은 아니었다. "이런 변이 있나. 칠중성(지금의 경기도 적성) 남쪽에 있는 큰 돌이 저절로 35보나 옮겨 앉았다는군." "돌이 저절로 옮겨 갔다? 35보나?" "그렇다니까." "흉조로고." 흉한 징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노란 비가 내렸다네, 이번엔." "노란 비라니?" "꽃과 같은 노란 비가...... 저 봐. 여기에도 지금 내리고 있잖은가!" 스스로 옮겨 간 돌. 노란 비. 언젠가는 또 크기가 밤알만한 우박이 내리질 안았던가. 선덕 여왕은 지난번 우소의 백제 군사 500여 명을 섬멸시킨 공으로 대장군에 오른 알천을 급히 불러들였다. "장군은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칠중성에 나아가 적을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시오." 여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머지않아 고구려 군사가 칠중성을 노리고 침공해 올 줄을 알았던 것이다. "칠중성 남쪽에 있는 돌이 저절로 옮겨 앉았다 함은 고구려의 군사가 남침을 하여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함이니, 오래지 않아서 침공해 올 고구려 군사를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섬멸시키도록하오." 여왕의 예감이나 판단은 언제나 정확했다. 선덕 여왕 7년 10월, 기어코 일은 터지고 말았다. "전하, 급보를 아뢰옵니다." "말하오." "고구려 군사가 마침내 칠중성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하옵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었다. 대장군 알천의 군사가 이미 적을 맞아 싸우기 위해 왕성을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알천 장군은 사방으로 도망가는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칠중성 밖에서 고구려 군사와 격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이 무렵 신라, 백제, 고구려 등 3국을 포함하여 동양 여러 나라에서는 전쟁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등장하여 한반도의 여러 나라를 기웃거렸고, 신라의 북쪽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나타나 영류왕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는가하면, 신라의 서쪽에 자리잡은 백제는 호탕한 의자왕이 왕위에 올라 신라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때마침 동해 바닷물이 붉게 끓어올라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라 안은 다시금 술렁거렸다. 미구에 무슨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아니나다를까, 백제 의자왕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로 쳐들어왔다. 적지에서는 속속 불행한 소식만이 날아들었다. "우리 신라의 서쪽 지방 성이 10여 개나 적의 수중에 들어갔나이다." 그런 보고가 있던 것은 그나마 싸움을 시작한 지 얼마 뒤의 일이었다. 날이 갈수록 신라군 전지는 사기를 잃어갔다. "40개 성, 실로 나라의 위기로다." 선적 여왕 11년 7월, 녹음을 틈탄 백제군은 신라 영토를 침범 40개 성이나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2월에 또다시 의자왕은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당나라로 가는 지름길인 당항성(지금의 수원 서쪽 남양)을 쳐서 차지하였다. 일은 참으로 급박했다. 여왕은 즉각 당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고 방책을 구했다. 그 사이 백제군은 또다시 장군 윤층을 보내어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공격해 왔다. 전지에서는 여전히 비보가 날아들었다.
-대야성이 함락되었다. -도독 김품석 장군이 전사했다. -죽과 용석이 전사했다. -춘추공의 딸(품석의 아내)도 함께 죽었다.
여왕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찬 김춘추를 불러 들었다. 자기 딸이 죽었다는 비보에 접하고 김춘추는 기둥에 의지하여 서서 종일토록 눈도 깜박이지 않고 비통해하다 대궐로 들어갔다. "마마, 대야성의 원수를....... 기필코 대야성의 원수를 갚겠나이다." 김춘추는 어전에 꿇어 엎드려 다시 울부짖었다. 나약하기 쉬운 여왕의 눈에서도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찬, 어떻게 해야 원수를 갚을 수 있을지 말해 보오." "신이 원하옵기는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여 백제를 치는 것이 어떠할까 하옵니다." "좋은 생각이오. 고구려도 우리 신라의 적국이나 장차 백제를 치기 위해서는 고구려와 손을 잡지 않을수 없구려." 여왕은 김춘추가 고구려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장왕은 '죽령은 본디 우리 땅이니 신라가 만약 죽령 서북 지방을 돌려보낸다면 군사를 내어 신라를 돕겠다.'고 나왔다. 결국 김춘추의 고구려행은 실패로 끝나 보장왕은 김춘추를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이에 김춘추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자 여왕은 대장군 김유신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김춘추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 보장왕은 이 말을 듣고 겁이 나서 김춘추를 돌려보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선덕 여왕은 장차 고구려를 쳐서 통일시킬 것을 결심하였다. 여왕은 재위 12년 1월에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그 뒤에 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백제를 치기 위한 군사를 청하였다. 선덕 여왕은 왕위에 오른 지 16년 만에 삼국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여왕이 계획한 통일의 의지는 그 뒤 진덕 여왕을 거쳐 태종 무열왕대에 이르러 기어코 실현을 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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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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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정치, 경제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나라 살림의 벌이와 쓰임새 - 안병우(한신대 교수)
매년 가을 열리는 정기국회에서는 다음해에 집행할 예산과 지난해 집행한 예산을 심의하고 결산한다. 예산안 심의를 정치 문제와 연결시키는 고질적인 관행 때문에 정작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예산안은 불과 2~3일 정도 형식적으로 심의하고 졸속으로 통과 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예산 심의는 국민에게서 세금을 얼마나 거두고 어떻게 쓸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국민의 기분의무와 권리에 관계된 중요한 일이다. 고려시대에는 어떻게 예산을 세우고 집행했을까?
토지로 편성한 1년 예산 고려시대에는 현대적 의미의 예산 수립과 집행 절차를 밟지는 않았고, 지금의 재정경제원처럼 국가의 재정을 일원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관청도 없었다. 국가에서는 토지를 기준으로 예산을 짰다. 그것은 조준이 1391년 토지제도를 개혁하자고 주장하면서 올린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 6도의 관찰사가 보고한 개간된 토지의 수는 50만 결이 채 못됩니다. 왕실에 지원하는 경비는 넉넉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10만 결을 우창에, 3만 결을 왕실에 속한 네 개의 창고에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녹봉용으로 10만 결을 좌창에 주고, 문무관리에게 과전으로 경기도의 토지 10만 결을 나누어 주면, 17만 결 정도만 남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6도의 군사·나루·원·역·사원에 지급할 토지와 향리나 지방관리의 녹봉 등 지방관청에서 사용하기에도 오히려 부족하여, 국방비가 나올 곳이 없습니다.
이처럼 지출할 용도별로 토지를 해당 기관에 나누어주는 방식이 재정구조의 기본 특징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조세를 화폐가 아니라 쌀이나 포 같은 현물로 거두어야 했던 경제발전 수준 때문에 국가운영에 필요한 현물을 중앙정부가 모두 거두었다가 다시 나누어 줄 수 없어서 생겨난 것이다. 모든 토지가 정부의 세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과전이나 사원전 같은 토지는 관리나 사원에 토지세를 거두는 권한을 위임하였고, 왕실의 토지도 왕실에서 직접 세를 거두어 사용하였으므로, 정부의 재정에서는 제외시켜야 한다. 실제로 정부가 조세를 거두어서 사용하는 토지는 1년 예산의 규모를 나타낸다. 과전법을 시행할 때 6도의 토지는 대략 50만 결, 경기의 토지가 13만 결이었다. 경기도의 토지는 과전으로 지급했고 왕실에 3만 결을 지급했다고 보면 47만 결 정도가 정부재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결에서 2석씩 거두는 것으로 보면 일년 예산은 약 90여 만석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양계의 조세는 현지에서 국방비로 사용하였으므로 재정규모는 실제 이보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재정운영의 관리와 통제 재정운영을 담당한 관청은 호부와 삼사였다. 호부는 가장 중요한 재정 담당 관청으로서, 기본재정원인 토지와 호구를 파악하고 관리하였다. 호부는 고려 이전까지 여러 관청이 나누어 맡아 오던 재정업무를 통합하여 수행한 관청으로서, 성종 때 설치되었다. 호부의 설치로 전국의 세원을 집중적이고 효율적으로 파악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호부가 파악한 세원을 바탕으로 조세를 거두고 지출하는 일 즉 재정운영을 계획하고 총괄한 것은 삼사였다. 그러므로 모든 재정부문이 직간접으로 호부와 삼사의 지휘와 통제를 받았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재정을 운영하는 관청이 독립적으로 세원을 배분받아 세입과 세출을 관장하였으므로, 호부와 삼사의 관리 기능은 제한을 받았다. 특히 삼사는 조세와 녹봉에 관한 행정을 담당하고 재정출납에 관한 회계사무를 관장하는 정도에 그쳤다. 삼사가 회계의 출납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는 가운데, 국가 운영의 중심이 되는 쌀이나 베를 저장하고 지급하는 일은 창이라고 불린 관청이 나누어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좌창은 관리의 녹봉을, 우창은 일반 비용을, 용문창은 군량을, 상평창은 물가조절을, 그리고 의창은 진휼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독립관청인 동시에 거기에 소요되는 곡물을 보관하는 창고의 기능도 하였다. 창과는 달리 각 관청에는 시탄고, 유밀고 같은 부속창고가 있었다. 여기에는 보물, 무기, 잡다한 물건을 보관하였다. 곡물을 보관하고 지출하던 좌창이나 우창의 관리자는 왕의 측근인 재시로 임명하였는데. 이를 통해 왕이 재정운영에 마음대로 간여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국왕과 관리들이 충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또한 재정을 맡은 관리들도 멋대로 집행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왕이나 담당 관리가 마음대로 지출할 수 없도록 여러 부서가 지출에 간여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녹봉용 곡물을 관리하고 지급한 것은 좌창이었지만, 관리들이 정월과 7월에 지급하는 녹봉을 받기 위해서는 녹패가 있어야 했다. 녹봉 지급 증명서인 녹패는 삼사가 발급하였다. 녹패 발급을 통해 좌창이 멋대로 녹봉을 지급할 수 없도록 견제하였지만, 그래도 비리가 발생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사대의 감찰어사가 지출 과정을 감독하였다.
어디에 지출하였나 중앙정부는 관리의 녹봉과 일반 비용, 국방비,그리고 왕실재정 따위를 지출하였다. 녹봉은 현직 문무관리는 물론 왕비, 종실, 퇴직관원, 공장 등에게까지 지급하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당시 녹봉을 받는 관리가 3천여 명이라고 하였다. 문종 때 좌창에 들어오는 쌀, 보리, 조 등은 약 14만 석으로, 이는 조선 정종 때 10만 석이나 태종 때 12만 석보다 약간 많은 수준이었다. 일반 비용에 속하는 지출항복은 왕실의 공적이 경비, 각종 제사와 연등회, 팔관회에 드는 비용, 왕의 하사물, 건물의 건축비나 수리비, 전함이나 무기 제조비 따위였다. 일반비용의 규모는 녹봉과 비슷하였다. 그런데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은 별도의 재원을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팔관회는 팔관도감 혹은 팔관보에서 관장하였는데, 팔관보는 원금을 마련해놓고 거기서 생기는 이자를 받아 팔관회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국방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요즈음에는 1년예산의 4분의 1정도가 방위비로 들어가 교육이나 사회보장 등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을 크게 한정시키고 있다. 고려시기에도 거란 족과 여진족, 그리고 몽고와 계속하여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때로는 수십 년 동안 전쟁을 치뤄야 했기 때문에 막대한 방위비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군인의 개인용 무기는 스스로가 조달해야 했고, 식량도 본인이 조달해야 하는 등 요즈음과는 다른 국방체제를 유지하였으므로, 오늘날의 군대 유지에 드는 비용이 그대로 드는 것은 아니었다. 방위비를 조달하기 위해 군인에게는 군인전이라는 토지를 주어 생활비와 군 복무기간 동안의 식량 따위를 조달하게 하였다. 또 접적지역이어서 군량미가 가장 많이 필요한 양계지방에는 개인이 토지세를 거두는 사전은 두지 않고, 그 지역에서 거둔 세금을 모두 방위비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양계에서 거두는 조세만으로는 부족하여 남도의 조세도 운송하여 국방비에 충당하였다. 특히 개경으로 조운하기 어려운 경상도, 강릉도, 교주도 등 동해안지역의 조세는 해로를 통해 동계로 옮겨 군량으로 사용하였다. 국방비는 남쪽 지방에서도 필요하였으므로, 요충지에 군량을 비축하는 창고를 두어 가까운 군현의 미곡을 보관하였다. 한편 변방 국경지역처럼 군대가 항상 주둔하는 곳에서는 군인들을 동원하여 토지를 경작시키고, 그 생산물을 군량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토지는 군둔전으로 불렀다.
관청 운영 경비의 조달 중앙과 지방의 관청은 나름대로 독립된 재정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에서는 시행하는 사업에 드는 예산은 우창에서 지급하였지만, 각 관청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관리하였다. 이러한 운영경비를 조달하는 재원으로 공해전이라는 토지가 있었다. 중앙관청이 가지고 있던 공해전의 규모를 보여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단지 태자궁을 관리하는 관청인 첨사부에 공해전 15결을 지급한 기록이 있을뿐이다. 관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무용품비, 점심비, 숙직비 등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공해전의 수입은 관청의 운영 경비로 넉넉치 못하였기 대문에 운영 경비의 일부를 사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관직도 있었다. 물론 그러한 관직에 근무하기 위해서는 집안이 부유해야 했다. 권수평이라는 사람은 군세가에게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선망의 직책인 견룡직에 임명되었지만, 집에 가난하여 사양하였다. 또한 최고 관청인 중서문하성이 녹사와 중추원 당후관은 해당 관청의 관리들이 궁궐에서 숙직할 때 드는 비용을 사적으로 조달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직을 맡으면 승진할 때 매우 유리하였으므로, 재산이 많은 집안의 자식들이 맡는 것으로 여겨졌다. 때로는 그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빚을 내었다가 뒤에 지방관으로 나가서 백성에게 강제로 빼앗아 갚는 폐단까지 있었다. 권수평은 돈 많은 부인을 얻어서라도 견룡직을 맡으라는 주위의 권고를 뿌리쳤지만, 그 손자 권단이 부유한 아버지의 배려로 문하부 족사가 된것은 재미있는 일화이다. 지방관청 역시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중앙정부에 납부하려고 거둔 세금 가운데 일부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경비를 마련하도록 토지가 지급되었다. 이 역시 보통 공해전이라고 불렀다. 지방관청의 공해전에는 지방관의 녹봉을 비롯한 운영비를 조달하는 공수전과 종이를 마련하는 지전 따위가 있었다. 지방관이 녹봉은 반은 중앙에서, 반은 현지에서 지급하였으므로, 현지에도 토지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공해전 역시 경비를 조달하기에 넉넉치 못하였고, 그 때문에 지방관청이 독자적으로 토지를 개간하여 소유하는 현상도 발생하였다. 또한 교통시설인 역이나 관에도 공해전을 지급하여 경비를 자체적으로 조달하도록 하였다.
나라의 벌이, 세금 걷기 수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국민에게서 거두는 세금이다. 세금은 토지서 거두는 토지세와 집집마다 거두는 공물, 그리고 부역이 있었는데, 거두는 기준과 내용은 매우 복잡했다. 무역은 직접 사람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었으므로, 가장 고달픈 세금이었다. 그래서 ‘부역 나가서 땀 흘리면 3대가 주린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부역은 현물의 형태로 정부에 들어오지는 않으므로, 재정에 포함시키기는 곤란하다. 역시 국가의 기본이 되는 재정은 쌀과 포 같은 현물 수입이었다. 세금을 부과하는 대상은 토지와 호구였다. 토지는 논과 밭으로 나누어 조세를 거두었는데, 비옥도에 따라 토지의 등급을 나누어 거두었다. 거두는 양은 생산량의 10분의 1로, 이것은 ‘천하통법’으로 여겨졌다. 교회에서는 예전부터 십일조를 내도록 정해져 있고, 소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요즘의 봉급생활자들이 대략 10분의 1을 갑종근로소득세로 내는 것을 보면, 수입의 10분의 1을 내는 것은 동서양 모두 오랜 옛날부터의 전통이었다. 고려말 과전법에서는 쌀 20석이 생산되는 땅을 1결로 삼아서 2석을 조세로 받았다. 그러나 이전에는 일정한 면적을 1결로 삼앗기 때문에, 1결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양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면 성종 당시에는 상등전 1경의 생산량이 18석정도 였다. 따라서 토지세는 토지의 비옥도를 기준으로 3등으로 나누어 매겼다. 공물은 특산물을 호구에서 거두는 것으로, 주로 베로 거두었다. 특정한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을 소로 지정하여 생산된 물품을 중앙에 납부하도록 하였다. 물론 흉년이 들면 그 정도에 따라 세금을 깎아 주었다. 세금을 거두는 일은 수령의 책임이었고, 향리들이 실무를 담당했다. 군현마다 논밭과 인구의 크기를 기준으로 중앙에 납부해야 할 세금의 액수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군세가 있는 어떤 집이 세금을 안 내면 힘이 없는 다른 집이 그 세금을 대신 내야했다. 이 때문에 힘없는 백성이 피해를 많이 입었고, 마침내는 조세부담을 견디지 못해 몰락하거나 도망가는 경우도 생겼다. 백성에게서 거두는 것만으로 중앙에 잡부해야 할 세금이 모자라는 경우에 대배하여 군현이 스스로 토지를 확보하고 경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은 개인이나 관청은 직접 토지세를 거두었다. 관리는 자기 집의 노비를 보내 과전에서 토지세를 거두어 갔으며, 공해전을 받은 관청도 직접 토지세를 거두었다. 군현에서는 과전을 제외한 백성의 토지에서 조세를 거두어 정해진 곳에 냈다. 즉 녹봉용 미곡은 좌창으로, 일반 비용 미곡은 우창으로 정해진 기일 안에 납부했으며, 일정한 액수의 곡물은 지방의 창고에 군수용이나 진휼곡으로 보관하였다.
왕실의 재산과 국가재정 운영 ‘화가위국’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왕조국가에서는 왕실과 국가는 엄격하게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또한 ‘모든 땅은 왕의 땅’이라는 왕토사상이 관념적으로나마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때이므로 왕실의 재산과 국가의 재산, 왕실의 재정과 국가의 재정도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왕실과 국가의 재정을 구분하여 편성하고 운영하려고 노력하였다. 왕실의 재정은 내장택. 내고 같은 관청에서 관장하였다. 내장택은 왕실의 소유지인 내장전과 장처전을 관장하였다. 장처전은 왕실에 예속된 마을인 장과 처의 토지였는데, 이러한 장처는 360여 개나 되었다. 왕이 거주하는 왕궁에 속하는 토지가 있었던 것은 물론 왕비에 딸린 궁이나 왕족이 거주하던 궁에 예속된 토지도 있었다. 궁장이라 불린 이 토지는 왕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으므로, 왕자나 공주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이러한 왕실 토지 이외에도 왕실경비를 조달하도록 국가가 따로 지급한 토지도 있었다. 또한 국가에서는 상숭국(말). 상사국(포설). 상의국(옷). 상약국(약품). 상식국(음식)의 5국과 중상서(그릇). 양온서(숙). 수궁서(장막)등의 관청을 설치하여 왕실을 지원하였다. 국가의 재정은 기본적으로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고, 고려시기 세금의 원천은 토지와 백성이었다. 특히 토지는 부와 조세의 원천이었으므로, 토지를 개인이나 관청에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재정구조를 짰다. 이 점의 고려를 포함한 우리 나라 중세 재정구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낸 세금이 어떻게 쓰여지는가, 내가 얼마나 세금을 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과정에 국민이 참여하는 것이 민주의 시작이다. 그러나 왕조국가에서는 백성이 이 권리를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세금은 위정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였고, 백성은 이를 내는 의무만 지고 있었으며, 백성들은 최소한이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여건에서는 생산활동을 포기하고 저항하였다. 이러한 관계에 의해서도 고려의 재정구조는 결정되고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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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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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들
지현이가 날마다 지각하는 이유
무거운 책가방을 드에 양손에는 실내화 주머니, 도시락 가방, 준비물 가방을 주렁주렁 들고 아침마다 정류장까지 기를 쓰고 달리던 중학교 시절, 그때 나는 마치 달리기 선수가 된 듯했다. 일분만 늦어도 버스를 놓치고, 그 버스를 놓치면 지각을 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달려야 했다. 그렇게 있는 힘을 다해 달려서 버스에 오르면, 옆으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이 꽉찬 사람들 때문에 또한번 숨이 차 오르곤했다. 아침마다 만원 버스에 시달리다 지친 나는 고민 끝에 한가지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가까운 동네에 사는 친구 몇 명을 모아 봉고차를 빌려 타고 다니기로 한 것이다. 내 생각에 찬성하는 친구들이 제법 많아 우리는 바로 봉고 한 대를 빌릴 수 있었고, 그 지긋지긋한 만원 버스에서 해방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봉고차로 함께 통학하던 지현이가 조금씩 늦게 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현이를 기다리느라 꽤 여러번 지각할 고비를 넘기곤 했는데, 결국은참다 못한 친구들이 지현이에게 불만을 털어 놓으며, "왜 자꾸만 늦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나 지현이는 얼굴만 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 우연히 지현이와 단둘이 만날 기회가 있었다. 지현이가 늦잠 때문에 지각하는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조심스럽게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지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일찍 집을 나서서 골목길을 걷다 보면 한 쪽 다리가 불편한 고등학생 오빠가 저만치 내 앞에서 힘겹게 걸어가는 것이 보여,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오빠 앞을 휙 지나쳐 바쁘게 걸어가는데 난, 난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더라구. 열심히 걷고 있는 오빠 옆을 빠르게 지나쳐 버리면 그 오빠가 너무 속상할 것 같아서....." 쑥스러운 듯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지현이가 그날따라 더 예뻐보였다.
임형선 님/전남 순천시 가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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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82 - 실존적 초월로 나아가는 길: 실존철학의 후반기(1920년-40년대) 그때 세계에서는 1930년: 런던에서 해군군축회의 열림 1933년: 독일국회, 바이마르헌법폐기, 히틀러독재권 확립.
야스퍼스가 지적하는 삶의 내면적인 또 하나의 체계는 출발점이나 철학적 체계의 과정은 달라도 하이데거와 통하는 바가 있다. 인간들의 삶은 평범한 다수의 것으로 자리잡히게 된다. 그 평범한 다수는 그저 살고 있을 뿐이다. 일상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으로 먹고 마시며 생명을 이어가는 생활을 산다. 여기에는 정신적 고뇌도 없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려는 노력도 없다. 주어진 삶을 습관적으로 계속해간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 삶이나 삶의 가치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의식 일반의 단계로 옮아간다. 삶이 먼저 있고 기초적인 행위가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앞서고 사고의 뒤를 행위가 따르는 생활을 하게 된다. 우리들이 쉽게 표현하는 일반적인 의식구조와 사고방식을 갖고 사회생활을 영위해가는 것이다.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찾아서 살아가는 삶이다. 야스퍼스는 이 단계의 삶을 좌우하는 기초는 과학적인 삶에 해당한다고 본다. 과학적 사고는 일반성을 갖고 있으며, 일반적 사고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의식주를 위해서 사는 생활이 아니라. 의식주를 이끌어가는 의식적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수의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나, 제 3의 단계라고 볼 수 있는 정신의 위치로 올라가는 정신적 영역의 삶이 있다. 문화를 창조하고 가치를 추구하며, 삶의 영구한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 삶이 이어진다. 사상, 진리, 예술등이 있으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적 존재와 삶의 본질적 의의를 추구해가는 삶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신적 창조의 삶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어떤 관계, 난파, 좌절, 회의, 때로는 허무에 직면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불안의 본질적 근원은 죽음에 뿌리를 드리우고 있다고 본다.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의 삶은 충일하며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도 바로 그 속에 죽음에 대한 예감, 다가올 죽음에의 소식을 얻는다. 죽음과 삶은 괴리관계에 있어 공간적 공통성은 있을 수 없으나, 삶의 한가운데 죽음이 둥지를 틀고 삶을 위협하며 죽음의 힘을 갖고 엄습해오는 것이다. 그것을 느끼는 것이 곧 불안인 것이다. 그 불안은 삶의 본질이기 때문에 회피할 수도 거부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유한과 무한, 생과 사,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라질 것과 영존할 것을 대립시키듯이, 정신적 단계에서는 이러한 단계의식과 삶의 난파를 겪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단계에 직면하는 단계, 제 4의 단계-그것을 야스퍼스는 실존의 단계라고 보는 것이다. 이 실존의 단계에서 자아를 좌초와 파국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그 단계를 초극하는 가함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실존적인 초월이 삶의 궁극적인 과제가 되는 것이다. 과거의 철학들은 이 전단계인 정신의 단계에 머물렀고 그것으로 자족해야 했으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는 이 실존적 단계에 도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대사회가 원하는 철학적 과제에 대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해결의 길은 무엇인가? 해결의 길은 제각기 달랐다.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마르셀은 종교적인 신앙에서 그 암시를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방향을 유신론적인 실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철학을 제창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는 자아중심의 고독한 실존을 추구했으나, 야스퍼스, 마르셀 사르트르는 고독한 자아를 사회적 자아로 확대시킴으로써 참여의 방향으로 실존사상을 발전시켰다고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앞선 세 철학자의 유신론이 다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스스로를 초월할 수도 없으며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다. 오로지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초월과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비하여 야스퍼스는 인간의 이성이 한계와 난파를 겪으면서 포섭자인 신의 포괄성에 안기는 자신의 선택과 결단이 필요하다. 자아의 초월적 노력과 자기부정에서 긍정의 길을 택하면 된다고 본다. 이에 비하면 마르셀은 카톨릭 철학자답게 인간의 선택과 신의 사랑의 결합에서 실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키에르케고르를 아우구스티누스,루터의 뒤를 계승하는 신학적 사상가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보면 야스퍼스는 전통적인 이성주의 철학자의 신학이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사회참여의 실존도 그렇다. 야스퍼스는 성실한 인간관계를 호소했고, 마르셀은 인격적인 사귐의 길을 열어주었으나, 사르트르는 사회행동주의자인 마르크스의 뒤를 계승하는 방향을 택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대표적인 여섯 사람쯤으로 실존철학은 일단 시대적 사명을 다했다고 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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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
'미역국을 먹다'는 여러가지 어원이 있습니다.
'미역국을 먹는다'는 말은 요즈음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미끄러져서 떨어진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원래는 미역국은 애기를 낳은 산모가 먹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해서 시험에서 떨어진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미역국의 미역이 미끌미끌하니까, 그렇게 사용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름도 있을텐데, 하필이면 미역국을 비유의 대상으로 삼았을까요?
아직까지 이 말의 원래뜻은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설이 있습니다. '미역국을 먹는다'는 말은 원래 취직자리에서 떨어졌을 때를 속되게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도 유래가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우리나라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을 때, 그 '해산'이란 말이 아이를 낳는다는 '해산'과 말소리가 같아서, 해산할 때에 미역국을 먹는 풍속과 관련하여 이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역국을 먹었다'는 말은 '해산' 당했다는 말의 은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취직자리가 떨어진 것과 시험에 떨어진 것과 같아서 '미역국을 먹었다'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 설은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니,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은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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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문화/인물 |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6장 예술, 그 광기와 죽음
이중섭의 망우리 무덤
이중섭 [李仲燮] 1916. 4. 10 평남 평원~1956. 9. 6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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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명한 분인데 어떻게 아무도 몰랐을까요? 그의 임종 후, 주인을 몰라 시체실에 나흘이나 방치되었던 데 비하여 비교적 성대하게 치뤄진 장례식을 보고 병원측에서 한 말이다. 이중섭, 그는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일본 유학 중, 야마모또 마사꼬를 만났다. 마사꼬는 미쓰이(삼정)물산 중역의 막내딸이었다. 미인은 아니지만 조용하고 성실한 아내였다. 이중섭과 함께 한국, 원산으로 돌아와 이름을 이남덕이라 고쳐 부르고 아이들도 낳고 그들은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이중섭은 고향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한때는 그곳 국전미술심사위원에 추대된 적도 있고, 소련 미술가로부터 절찬을 받기도 했다. 6.25의 발발로 그는 1.4후퇴 때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월남을 감행하게 된다. 엘에스티편으로 부산항에 당도한 것은 1950년 12월 10일.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그의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도일을 결행한다. 이때부터 중섭의 동가식 서가숙의 비참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불안하던 당시의 사회상과 영양실조는 그의 정신을 서서히 병들게 했다. 대구 피난시절이었다. 이중섭은 느닷없이 파출소로 쫓아 들어가서 순경 선생, 저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저는 미술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수사관의 심문과 취조 도중 구상씨의 이름이 나오면 구상 선생은 자다말고 파출소로 불려가야만 했다고 한다. 중섭은 음식도 거절하였다. 처자를 먹여살리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면서 음식거부 소동을 벌였고 그림 이 아닌 일 을 하겠다고 나서며, 여관 마당을 쓸기도 하고 동네 아이들을 데려다가 씻기는 등, 그때부터 중섭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을 속였어! 미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후일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 남들은 저렇게 세상과 자기를 위해 바쁘게 봉사하는데, 난 그림만 신주처럼 모시고 다니며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병의 초기 증상은 자학으로 나타났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완전한 자포자기였다.
어떤 날은 남덕일 죽인다 고 외치면서 자기 손등을 비벼 피를 냈다. 분열증세의 시작이었다. 중섭이 쓰러지자 종군화가란 명목으로 친구들은 서둘러 수도육군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모금운동을 벌여 그를 유석진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했다. 두 달 만에 병세는 호전되는 듯 했다. 어느 날 자유 외출을 한 그는 병원에 돌아가지 않고 화우 한묵과 어울려 자취방에서 그림을 그렸다. 반고흐처럼 정신착란증세가 재발된 것이다. 채 겨울도 못 나고 그는 청량리 뇌병원으로 옮겨가야 했다. 무료병실 한 구석에 쳐박히게 된다. 이제 황달까지 겹쳐 누렇게 뜬 얼굴에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어 버렸다. 적십자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평소에 자기 의사를 잘 표현할 줄 모르던 그는 현실과 점점 유리되면서 공상과 그림에만 빠져들게 되었다. 가족 이별의 처절한 은박지 그림은 이 시기에 해당된다.
아직 노염이 남아 있는 9월 6일. 무료병실에서 정오가 다 될 무렵에 그는 혼자서 숨을 거두었다. 나이는 마흔 살, 직접 사인은 간질환이었다. 죽은 지 나흘 만에 달려온 친구 김병기는 이렇게 오열했다.
굶어 죽었다 해도 좋고 미쳐 죽었다 해도 좋고, 자살했다고 해도 좋다.
친구들은 그가 가는 길을 성대한 장례로 배웅하였다. 1956년 9월 10일. 근심을 잊는다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그를 갖다 묻었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버린 그에게 아직 잊어야 할 게 더 남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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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세계사 |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40. 영국에도 부정 선거구가 있었다.
현대 정치의 기본적인 형태인 의회가 가장 먼저 벌달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7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의회는 의회 정치의 본보기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직후인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영국의 의회 정치는 현재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관건은 `얼마나 민의를 고루 대변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의회는 영국의 전 지역과 전 계급, 계층을 골고루 대변하고 있지 못했다. 18세기 시작된 산업혁명은 급속한 인구 이동과 사회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영국 의회는 명예 혁명(1688) 이후 별다른 변화없이 유지되어 왔다. 우선 19세기 초 영국 인구의 대다수는 참정권을 가지지 못했다. 일정한 규모 이상의 토지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주었기 때문에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민은 물론 새롭게 대두하고 잇던 중간계급(자본가계급)도 선거권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국민의 2-3%, 성인 남자만 따져도 10%가 조금 넘는 숫자만이 선거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산업화에 따른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과 그로 인한 도시의 비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선거법은 과거의 인구 기준에 따라 선거구를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인구 300만이 조금 넘는 남부의 10개 주가 의회에서 236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 400만에 가까운 북구 6개 주에 할당된 의석수는 불과 68개였다. 그리고 멘체스터와 리버풀 같은 신흥 공업도시는 단 한 명의 대표도 선출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른바 불합리한 선거구(rotten boroughs: 부패 선거구) 문제였다. 이는 산업화에 따른 인구 이동 등의 이유로 유권자가 거의 없는 선거구를 말한다. 이를테면 유권자가 50명 미만인 어떤 선거구는 2명의 의원을 선출했는가 하면, 단윅(Danwick)의 선거구는 그 대부분이 바다에 매몰되어 배 위에서 투표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불합리를 고치려는 움직임은 선거법 개정 운동으로 일찍부터 나타났지만 그것이 강력해진 것은 1820년대였고 드디어 1832년 6월 선거법 개정안이 의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그 주된 내용은 불합리한 선거구를 없애고 이를 인구가 증가한 신흥 공업 도시에 배정하는 한편 선거인의 재산 요건을 완화하여 토지 소유 이외에 동산 소유도 재산 요건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권자수가 약 50% 정도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거법 개정으로 중간계급의 대다수는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지만 재산이 거의 없거나 적은 하층민들은 여전히 선거권이 없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1832년 선거법 개정은 의회 개혁의 출발점에 불과했다. 선거권을 갖지 못하고 정치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주장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을 통해 참정권의 획득과 정치 개혁을 요구했다. 이 정치 운동은 1837년 `런던 노동자 협회` 지도자들이 작성하고 이듬해 8월 버밍엄의 군중 집회에서 채택된 <인민 헌장(People's Charter)>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그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이 <인민 헌장>의 골자는 성년 남자의 보통 선거, 의원의 재산 요건 폐지, 의원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당시 7년), 인구 비례에 의한 평등한 선거구 설정, 의원에 대한 봉급 지불, 비밀 투표제 등이었다. 노동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참가한 이 운동은 1839년, 1842년, 1848년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통하여 6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를 하원에 제출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하원을 지배하고 있던 귀족과 신흥 자본가계급들로서는 만약 보통 선거권을 부여하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계급이 권력을 장악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인민 헌장>에 담긴 내용은 이후 의회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대부분은 이후 성취되었다.
<인민 헌장>의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인 보통 선거권은 실현되는 데 가장 오랜 시일이 걸렸다. 1867년 디즈레일리(Disraeli, 1804-81)가 이끄는 보수당은 제2차 선거법 개정을 통해 도시의 대부분인 임금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자유당의 글래드스톤(Gladstone, 1809-98)은 1884년과 1885년 선거법 개정을 통해 농민에게 투표권을 확대했다.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권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1918년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여성이 선거권을 가지게 된 것은 1928년이 되어서였다. 선거구의 평등은 1885년 글래드스톤의 선거법 개정 때 실현되었는데 대략 인구 5만 명당 의원 한 명의 비율로 되었다. 비밀 투표제는 1872년에 실현되었다. 이렇게 의회 정치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에서조차 현대와 같은 의회 정치의 골격이 마련되기까지는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소요되었고 차티스트 운동과 같이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요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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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3장 시들어 가는 미국, 일어서는 중국
1. 내가 '친미감정'을 가지게 되기까지
나는 1964년에 태어나 사상해방의 시대인 70년대 말부터 세상 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토론의 분위기가 만연하여 어떤 가치관도 인정 되던 시기인 80년대에 쌍하이(上海)에서 대학을 다녔다. 당시에는 나와 같은 자유사상을 지닌 중국청년이 미국에 대해 깊은 관심과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것은 무척 보편적인 일이었다. 이런 감정은 광적인 형식으로 표현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따뜻한 향기까지 내뿜고 있어 우리들이 현실을 인 식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고 나아갈 방향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1987년 여름, 나는 싼뚱(山東)에서 뜻이 맞는 대학친구와 어려운 생활을 함께 하고 있었는데 우리 둘은 모두 문학청년으로 부정적인 면이 강하였다. 당시 우리는 아주 낡은 흑백Tv 한 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루는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초원의 집[이라는 미국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유치하며 지나치게 과장되고 심지어는 기만적이라고 할 정도의 드라마였으나. 당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한 편의 미국 드라마가 가져다준 희열은 너무나 강렬하였다. 그 당시 친구는 즐거운 얼굴로 야, 우리도 뿌리를 찾는다면 우리들의 뿌리는 모두 미국에 있는 것 같다. 미국 드라마가 이렇게 친근하게 느껴지니 말이야'라고 한 적이 있다.그리고는 웃고 넘긴 적이 있는데 나는 이 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없이 내뱉은 이 한 마디로부터 나는 무엇인가 절박하게 와 닷는 느낌을 받았었다. 생각해 보라. 동방 대국인 중국의 한 아이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단조롭게 청년기를 지냈다. 그들은 야영을 해본 적도 없고 남의 과일을 훔쳐 본 경험도 없이 아주 조용하고 단순하게 자랐다. 청년이 되어서도 기껏해야 그림책을 들여다보는 - 물론 이런 방면의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지만 -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권위있는 신문의 국제면을 통하여 적어도 정치,군사 면에서는 '조숙'하였고, 철이 들면서부터 소설이나 탱크포탄에 ' U S A'라고 표기된 서양의 강대국 '미국'이란 존재를 차츰 인식하게 되었다. 청년은, 미국 군인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각기 '투항서' 를 미리 준비해 다닌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점이 청년에게 미국 군인이 일본 군인보다 더욱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가장 먼저 인간을 달에 착륙시킨 나라이고 가장 먼저 원자탄과 수소폭탄을 제조하였으며, 그 나라의 스파이들은 무성권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정도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대단하지만 결코 잔인하지 않은 나라이고, 국가관도 동방의 나라처럼 그렇게 투철하지는 않으며 노동자와 농민을 특별히 박해하지도 않고 고급간부를 무자비하게 숙청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낙천적이고 활기 넘치는 나라라고 청년은 알고 있었다. 중국 전역에 반미감정이 만연되어 있을 때에도 대개의 청년들은 미국에 대해 일종의 막연한 호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또한 같은 또래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영화 {햇빛 찬란한 날[]}에서 보여 주었던 것처럼 사회제국주의의 전쟁위협은 우리 세대들에게 전쟁의 충동을 느끼게 하였고, 닉슨의 중국 방문은 우리들을 제국주의와 수정주의의 어느 한 편에 있게 하였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는 무슨 비밀이라도 털어놓듯이 '만약 중국이 소련과 전쟁을 벌인다면 미국은 중국을 도울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우리들은 무척 술렁거렸다. 사실 우리들은 미국을 특별히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비록 한국전쟁 때 충돌이 있긴 했지만 미국은 후에 평화서명을 하는 등 현명한 처신을 하였기 때문에 이 정도는 용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첫째로 소련의 통치집단은 스탈린 주변에 숨어있는 반역자들이었다. [레닌 1918에 보면 레닌 주변의 반역자들은 아주 흉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구 차르() 황제에서 신 차르 황제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사실들은 우리들이 죽기 전에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1900년 7월 중 .러 국경지대인 하이란파오(海蘭泡)에서 러시아인이 자행한 수천 명의 중국인 대학살사건에서부터 60년대의 쩐빠오따오(珍寶島) 국경 충돌사건에 이르기까지 양국 간에 일어난 각종 사건으로 볼 때 악랄하기 비길 데 없는 사회제국주의 소련과는 절대로 우방이 될 수 없다는점이다. 셋째, 소련인은 그 품성이 비열하다는 것이다. 전 소련의 '국가안전위원회'인 KGB의 음흉한 활동이나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원에 보낼 수있는 인간성 따위는 우리가 소련 자체를 형편없는 국가로 보지 않을 수없게 하였다. 림비아오(林舊)도 결국 이러한 소련으로 도주하려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 동안 받은 교육과 직감으로 볼 때, 반역자와 KGB가 통치하고 있는 소련을 증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쭈펑보(朱逢舊)가 부른 {붉은 삼나무[]}라는 노래를 배웠었다.
아름다운 서호(西湖) 가에, 서 있는 붉은 삼나무 한 그루. 바다 건너 피안(彼岸)에서 와, 우정의 이슬을 맺고 있구나. 삼나무야 붉은 삼나무야, 너는 미국 사람의 우정을 가져와, 동방의 아름다운 땅에서 자라는구나. 아-.너는 튼튼하게 자라는구나, 우뚝 솟은 붉은 삼나무야.
이 노래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고 많은 노인들도 젊은 시절의 양코배기 미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떠올리며 흥얼거렸다. 비록 정부에서는 '미 .소 양 강대국'의 패권주의를 절대 반대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고 있었지만 우리 또래의 청년들은 중국과 미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십대에 이미 국제 정치상황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알다시피 브레즈네프 때의 소련은 국제 정치무대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고 따라서 세계의 혁명세력과 좌파세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마오쩌똥은 이에 불안을 느끼며 당시의 미국무장관 키신저에게 '나는 우파를 좋아하며 우파가 좌파보다는 낫다'고 하면서, 빌리 브란트( )를 싫어해 반동적 제국주의의 두목격인 닉슨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 나는 위인들의 언행에 대단히 공감하고 있었다. 나는 극우의 관점에서 국제관계를 바라보았다. 박정희(), 환원싸오(阮文稻). 장지에쓰(외에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친미적 경향을 가지기만 하면 현명하고 깨끗한 정치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반면 칠레의 알랜드 살바도르( )는 정치 난쟁이로 알았고. 시인네루다 파브로(는 수치스러운 KGB 스파이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기니() 의 세쿠 투레는 구제할 약도 없는 인물로, 이집트의 낫세르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알고 있었다. 친소적일 뿐 아니라 반중국적인 인도의 인디라 간디 부인에 대해서는 원한까지 품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중국을 지지한다고 믿었던 아프리카에서조차 반중국의 물결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디오피아혁명 후의 정부기관지인 사인 아프리카=洲號角]에 중국을 공격하는 언론이 실릴 정도였다 나는 제3세계에서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소련의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남예멘에서 일어난 사건은 사회제국주의국가의 음흉한 음모를 극명하게 보여 주기에 충분하였다. 로바야 대통령의 특사가 북예멘으로 날아가 북예멘 대통령 카스미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특사의 가방을 여는 순간 폭발물이 터져 카스미 대통령이 즉사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대다수의 아랍국가들이 남예멘과 외교를 단절하기도 하였다. 며칠 뒤 미그기가 남예멘 대통령궁을 공격하였고, 중국에 대해 우호적이던 누바이 대통령은 의자에 묶인 채로 쿠데타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소련은 이렇게 잔악한 방법으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어 결국 두 나라는 소련의 세력권으로 넘어갔다. 70년대 말은 사회제국주의국가인 소련의 기세가 등등한 시기였다. 이에 반하여 미국은 실패를 거듭하였고 나는 이런 미국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며 반미활동을 혐오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반미 성향을 띠는 것은 몰상식하고 문화수준이 낮아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70년대 말 북경에서 공연된 {정글의 북소리[라고 기억되는 연극을 보고 소년이었던 나는 공포를 느끼기까지 하였다. 이 연극을 본 중국인들은 모두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아프리카 어느 나라 해방전선 참모장이 우연히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소련의 흉계를 알게 되었는데. 아름다운 소련 여간첩의 방해공작을 뿌리치고 이 사실을 폭로하려 기자회견을 열자마자 암살당하는 내용이었다. 아마 모든 중국 관중들은 참모장이 예정대로 흉계를 폭로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안타깝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이때부터 제3세계의 정세에 대해 마음 아파했다. 온갖 고통을 다 겪고 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있는가? 우호조약에 서명하고 소련 교관을 받아들이고, 미대사관을 점령하고, 미국 지원자들을 가해하는 일 따위가 전부란 말인가? 적과 우방을 분별하는 아주 간단한 이치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캄보디아와 아프간사건으로 미국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미국과 중국이 나란히 모스크바올림픽에 불참한것에 대해 박수를 쳤으며. 루마니아와 중국이 당당하게 로스앤젤레스 을림픽에 참가하자 환호를 보냈다. 내가 겪은 이런 모든 경험은 자연스럽게 대학시절에 미국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었다. 스무 살을 갓 넘은 사람이 대학교수가 되고 준수하게 생긴 젊은 대통령이 탄생하는 나라, 열광적인 선거분위기, 관중을 매료시키는 훌륭한 영화, 혜밍웨이에서부터 피츠제랄드에 이르기까지 미국으로부터 받은 충격은 혜아릴 수 없이 많았다. 생각해 보면 정신생활을 위주로한 거의 모든 것들이 미국과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우리들은 자기도 모르게 미국의 체내로 빨려들어가고 있음에도 이런 사실에 대해 심사숙고해 볼 방법이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 당시 절대다수의 학생은 미국의 가치관으로 자신의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추세였다. 페르시아만전쟁을 받아들이는 중국인의 인식에서도 보이듯이 미국의 가치가 중국인의 가치척도가 되는 현상은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미국은 인류 모두에게 여전히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항한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혼란과 불행을 자초한다고 보았다. 나는 그때 레이건 대통령을 극도로 숭배하였다. 나와 함께 일하는 방송국의 아나운서 한 분이 나에게 '레이건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 중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 같다'고 한 적이 있었다.그 해에 마침 레이건이 쌍하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레이건이 보여 준 행동은나를 매료시켰다. 레이건이 어느 텔레비전공장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그는 보좌관들을 따돌리고 작업대로 다가가 예의바른 태도로 납봉인두를 빌려 아주 숙련된 솜씨로 여공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아마 그 여공은 틀림없이 '이 순간이 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나와 함께 방을 쓰던 친구는 레이건 같은 훌륭한 정치인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한탄에 한탄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그가 마치 '영원불변의 여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러워하였다.
80년대는 경제와 사회개혁의 심화시기로 과거의 모든 가치관을 재조정하지 않을 수 없는 때였다. 민주주의 정치관이나 대학의 학제가 변했고 상품경제가 등장하는가 하면 어느새 연애관까지도 변하였다. 모든 것이 일순간에 변하였다. 자유라는 특징을 가진 대학생들은 오직 미국식 가치관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정색을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지나치게 강력해진 반면 다시 소생하고 있는 중국은 아직도 나약하다. 또 직감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사물에 접근하고 관찰하도록 가르친 미국문화는, 우리를 앞 세대에 비하여 훨씬 실질적이고 명쾌하게 만들었다. 밝고 자신감에 넘치는 행동은 어린 양과 같은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들이 내가 친미적 경향을 띠게 된 첫 번째 이유이다. 중국의 국가 언론기관은 대부분 미국의 CBS나 영국의 BBC로부터 국제뉴스를 제공받아 내보내기 때문에 우리들이 접할 수 있는 세계 각국의 소식들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어쨌든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국가일 수밖에 없으며 미국의 각종 외교적 조치는 국내신문의 머리 기사로 등장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객관적인 사실 때문에 우리가 오류를 범했거나 가치관에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깊고 넓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관찰하는 데도 이러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볍게 '에이, 어제와는 작별하고 싶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제는 우리의 일부분인데 어떻게 어제와 고별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쯤에서 내가 친미감정에 빠져 들면서도 지울 수 없었던 감응(感應), 이것은 어쩌면 참회인지도 모를 한 가지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대학 3학년 때인 1986년의 일이다. 내 바로 위의 침상에는 쩌장(料뚱)쌍위 사람인 뤼( 군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쌍하이 학생연맹 회장이었다. 우리는 그 당시 중동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레바논으로 축출하였다. 이 사건은 전략적인 면에서나 전술적인 면에서 모두 낭만적인 색채가 농후하였으나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스스로의 일관된 잣대를 가지고 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루는 뤼 군이 잔뜩 흥분하여 달려오더니 팔레스타인 전국학생연합회 대표단이 쌍하이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데 좌담회에 참석할 인원이 우리 학교에도 배정되어 있어 나를 추천해 두었다는 것이다. 뤼 군은 나에게 함부로 말하여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입조심히고, 모든 문제는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먼저 언급하도록 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특히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내부 파벌과 투쟁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는 당부까지 하였다. 비록 나는 나대로의 견해와 할 말이 있었으나 학생은 규율을 지켜야 하고 특히 이는 국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이들과의 만남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신념'으로 여겼던 일들이 그들의 원시자료 앞에서는 완전히 무력하였기 때문에 그들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것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여기에서 나는 우리가 평소에 매우 '진보적'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을 쫓아가는 것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가정과 국가를 잃어버린 민족이 그들의 기본권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데도 나는 대학가의 카페에 앉아 마음 편하게 '이스라엘의 영웅'이니 엉클 샘()들의 나라, 미국의 '국제적 책임'이니 하면서 사치스러운 입방아를 찧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가식적인 정신적 풍요로 진지함과 진리에 접근하려는 의지를 망각하고 있었으며, 거리낌없이 정부의 견해를 부정하면서 약소민족의 투쟁을 야비한 태도로 보아왔었던 것이다. 눈앞의 권세와 이익에만 집착하여 노골적으로 미국에 대해 환호를 보내고 있었으니, 이런 것을 두고 우리가 성숙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태도가 우리 세대에게 희망이 있다고 보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스스로를 질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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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금강산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한 지 7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하느님은 너무나 피곤해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지나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들고, 낮과 밤을 갈라놓고, 예쁜 새들을 날게 하고, 온갖 짐승들을 골고루 만든 데다가 어제는 하루 종일 자신의 형상대로 아담과 이브를 만든 탓인지 몸과 마음이 너무나 피곤했다. 하느님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도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오늘 하루 만이라도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편히 쉬고 싶었다. 이제는 천지를 만드는 일도 거의 마무리되어 더 이상해야 할 일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하루쯤 뒤로 미루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느님은 자리에 누운 채 가만히 천지를 내려다보았다. 그 동안 잠 한 숨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생 고생해 가면서 만든 세상을 지그시 내려다보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돌았다. 비록 온몸이 쑤시고 팔다리가 저려 왔지만 마음만은 편안하고 흐뭇했다. "빛이 있으라." 해서 있게 된 아름다운 아침해가 두둥실 바다 위로 떠올라 눈이 부셨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 막 잎을 터뜨리기 시작한 나뭇가지 위로 한없이 반짝거리는 아침 햇살과, 이리저리 들녘을 오가며 풀을 뜯는 갖가지 짐승들과, 포롱포롱 하늘을 나는 새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마음을 잔잔한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운 것은 에덴 동산에서 첫날밤을 지낸 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강가를 거니는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었다. 하느님은 어여쁘기 짝이 없는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그만 드렁드렁 코까지 골면서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나 하느님이 7일째 되는 날 하루를 쉬겠다고 생각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것은 이브가 찾아와 하느님을 깨워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느님, 하느님, 주무세요? 잠깐 저 좀 보세요. 전 하느님이 왜 저를 만드셨는지 모르겠어요." 이브는 깊이 잠든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떼어 내어 하느님이 자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부스스 눈을 뜬 하느님이 이브를 향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요?" "그래, 바로 사랑 때문이다." "하느님, 전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이해할 수가 없니? 네 모습을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아라. 네가 나를 그대로 닮았지 않았느냐? 사랑은 서로가 닮는 것이다." 하느님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눈길로 이브를 쳐다보았다. 이브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을까 하고 곰곰 생각해 보았으나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아침해는 어느새 하늘 한가운데로 훌쩍 솟아오른 산들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다. 에덴 동산에 살면서도 그런 아름다운 산에서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이제 막 다시 잠이 들기 시작한 하느님을 또 흔들어 깨웠다. "하느님, 하느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을 하나 만들어 주세요." "허허, 그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냐?" 하느님이 두 번이나 잠을 깨운 이브가 그래도 사랑스러운지 처음보다 더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에덴 동산보다 더 아름다운 산을 만들어 주세요. 저는 그 산에서 살고 싶어요." "글쎄다, 내가 지난 엿새 동안 만든 그 많은 산들 중에서 하나 고르려무나." "아니에요. 저를 위해 새로 하나 만들어 주세요. 그래야만 제가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허허 참 욕심도. 사람은 욕심이 많으면 불행해진단다." "그래도 그게 제 소원이에요." "그게 진정 너의 소원이냐?" "네 하느님." "그럼 좋다. 오늘 당장 만들어 주지. 그러나 다음부턴 절대 그런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지구별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하루 종일 조금도 쉬지 않고 봉우리가 1 만 2천 개나 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을 하나 만들었다. 그 산이 바로 금강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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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속에는 산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질소가 78%이고 1%는 아르곤이며, 산소는 21%밖에 없다.
당신이 적도 위에 있다면 다른 곳에서보다 몸무게가 덜 나갈 것이다.
사하라 사막에 있는 모래 언덕의 두께는 300미터나 된다.
북극에는 육지가 없고 모든것이 얼음 위에 떠있다. 북극에서는 모든 방향이 다 남쪽이다.
남극대륙은 영원히 녹지 않을 2,438미터의 두꺼운 얼음으로 둘러싸여 있다.
번개는 1초에 100번정도 지구글 강타한다. 이것은 하루에 86,400번 정도의 번개가 도처에서 지구를 치고 있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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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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