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첫쪽 ♧……………독서편지 T기본글꼴 기본글꼴✔ 나눔고딕✔ 맑은고딕✔ 돋움✔ ✔ 뷰어로 보기 2006.11.11 06:11 【독서편지】: 제 57 호 風磬 조회 수 7,606 추천 수 10 댓글 0 게시물 주소복사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독서편지】: 제 57 호4339.11.11 (09.21)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이로인해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오가시며 → 자유글판 문학소식 제10회 계간 에세이문예 본격수필신인상 작품 공모고급 수필전문지 에세이문예가 한국문단에서 찬란한 꿈을 펼칠 신인 여러분의 도전을 기다립니다. 무지개 빛깔 삶의 현장으로, 다가올 수필 시대의 주역으로, 당신을 모십니다. 대한민국 1등 수필전문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에세이문예는 참신한 수필가를 꿈꾸는 여러분들에게 최고의 무대가 될 것입니다.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여 수필의 미래를 밝히고자 하는 에세이문예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수필로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신념이면 충분합니다. 최고 수준의 수필작가로 성장하고 싶으시면, 지금 제9회 에세이문예 본격수필신인상 작품 공모전의 문을 두드리세요. 모집 부문본격수필: 2편 이상(원고지 15매 내외)원고마감: 2006년 12월 20일보낼 곳: 607-060 부산시 동래구 온천1동 172-35협성스카이라인 1019호 O/T 에세이문예사 편집실문의: 051) 557-5085, 016-572-3862(주간), 018-571-5003(편집인)방법: 우편 또는 이메일- essaylit@hanmail.net심사: 응모된 작품은 본지 본격수필신인상선정위원회에서 심사함발표: 2007년 봄호( 2007년 2월 발행)-사전 개별 통보대우: 1) 당선자는 수필가로 문단에 등단되고, 본격수필가로 인정2) 수시 작품 발표 및 특집 기회 부여 및 문단활동을 적극 지원3) 에세이문예사가 추진하는 각종 행사에 특별 초대3) 발표 작품에 대한 전문 해설 및 평론 지원4) 작품집 발간에 따른 전문 서평 지원및 대표 작품의 영어번역 지원 응모요령:-.응모봉투에 <본격수필신인상 응모작품>이라고 적을 것-.별지에 응모자의 본명, 주소, 나이, 전화번호, 직업, 약력을 반드시 첨부할 것-.원고는 A4지에 워드로 작성한 이메일 접수를 원칙으로 함-.응모작품은 반환의 책임을 지지 않음-.메일 보내는 사람에 반드시 본명을 적을 것계간 에세이문예 편집주간 송명화 글터 → 명언 / 격언 권태의 치료제는 호기심이지만 호기심을 고치는 약은 아무 것도 없다. / M.F.A.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그 겨울 우리 마누라가 먹은 세 개의 참외 나는 마누라가 임신만 하면 입덧을 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다. 더러 그런수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건 정말로 남자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역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헛구역질도 그렇고 입맛이 떨어지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는 개살구 따위를 한번 실컷 먹어 보고 싶다는 충동 때문에 거의 환장할 지경에 이르는 것까지 마누라와 흡사했었다.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특히 큰애를 임신했을때는 더욱 심했다. 몇 개월째였더라, 겨울인데 마누라가 갑자기 참외가 먹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자 나도 참외를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참외란 말인가. 고드름이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는데. 방세는 석 달치나 밀려 있고 연탄은 두 장밖에 안 남았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며칠 전에 마누라가 친정에 가서 몰래 퍼온 몇 됫박의 쌀도 이제는 거의 다 떨어져 간다는 사실까지 역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취직자리도 생기지 않았고 글도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 마누라는 신경이 날카로와질 대로 날카로와져 있었다. 아주 작은 일에도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며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몰아 붙이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역시 입덧중에 있었으며 사사건건 일이 뒤틀리기만 했었으므로 자주 마누라와 극렬한 부부 싸움을 일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서 아는 사람 하나를 만났다. 나는 취직하면 갚을셈치고 모든 자존심을 버린 채로 거의 애원하다시피 하여 얼마간의 돈을 꾸었다. 툭하면 굶던 시절이었으므로 수중에 몇 푼의 돈만 있어도 천만금을 얻은 듯이 마음이 든든했었다. 나는 마누라가 참외를 먹고 싶다고 말했던 일을 생각해 내고는 혹시나해서 춘천 시내의 모든 시장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과나 배 따위는 흔해 빠졌는데 참외는 좀처럼 발견되어지지 않았다. 멀리서 노란색만 눈에 띄어도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당시 나는 너무도 무능한 남편이었으므로 내가 그 어떤 장래에 대한 희망을 설계해 주어도, 마누라는 절대 믿으려 들지 않았었다. 그래서 마누라가 나를 보고 웃는 모습을 보기가 여간 힘이 들지 않았었다. 한마디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냉전 상태에 놓여 있었다. 참외를 구하면 ... 참외를 구하면 마누라는 최소한 손톱만큼이라도 내 진심을 알아 주리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거의 아침 나절부터 해질녘까지 여러 지역의 시장 바닥을 헤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네 개의 참외를 진열해 놓은 가계 하나를 찾아내었다. 처음에 나는 내 눈을 의심했었다. 서울에서는 구하기가 수월하죠. 요즘 돈 가지고 안 되는 게 어디있나요. 하 지만 여기만 해도 촌 아닙니까. 하도 비싸서 사갈 사람이 있나요. 가게를 차린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구색을 갖추느라고 몇 개 갖다 놓았지만 찾는 사람이 전혀 없었어요. 아마 다른 가게에는 갖다놓지도 않았을 겁니다. 주인 남자의 말이었다. 참외들은 모두 주먹만한 크기였는데 무슨 품종인지 표면에 전혀 굴곡이 없었으며 유난히 동그랗고 매끈매끈했다. 냄새를 맡아 보니 참외는 참외였다. 가격을 물으니까 참외 한 개의 값이 거의 연탄 스무 장 값과 맞먹는 액수였다. 하지만 나는 냉방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마누라에게 참외만은 사다 주고 싶었다. 봉투에 넣어서 깨끗한 종이에 포장해 주십시오. 나는 세 개를 샀다. 돈이 모자라서였다. 그것을 사들고 샘밭에 있는 월 삼천 원짜리 어두운 셋방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왠지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참으로 개떡 같은 인생이로구나. 참외는 샀으나 쌀과 연탄이 다시 크나큰 걱정거리로 내 가슴을 짓눌러왔다. 집으로 들어서니 예상대로 마누라의 표정은 예전과 다름없이 암울해 보였다. 나는 그즈음 공처가에서 마악 공포처가로 변해 가는 중이었으므로 아주 조심스럽게 사온 참외를 꺼내 놓았다. 혹시 쌀이나 연탄을 사지 않고 참외를 사왔다고 역정을 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마누라는 역정을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마운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당신도 좀 드세요. 마누라는 내가 자기와 마찬가지로 입덧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내게도 한 개를 권했다. 그러나 나는 딱 한 조각만 입에 넣고 더 이상은 사양했다. 솔직이 말해서 한 개 정도는 나도 먹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오죽 못난 남편이면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참외를 겨우 세 개밖에 못 사왔으랴. 나는 가게에다 남겨 두고 온 한 개의 참외가 눈에 선했다. 참외를 먹은 이후로도 우리는 자주 부부 싸움을 했고 이유는 역시 가난 때문이었다. 자기 아내가 임신을 했으면 궁금해서 병원에라도 한번 가봐야 할거아녜요.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허세로 곧잘 마누라를 공박했다. 예수님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어요. 여긴 마굿간이 아니라 엄연히 방이란 말요. 그러니 한결 좋은 환경이 아니고 뭐요. 우리네 옛날 사람들은 병원 한번 안 가보고도 애들만 무사고로 척척 잘 낳지 않았는가말요. 첨이니까 무서워지는 걸 어떻게 해요. 무섭긴, 당연한 걸 가지고 무섭긴, 임신했으면 애 낳는다는 건 여자가 남자보다 더 잘 알지. 그래요. 당신 소원이라면 나도 남의집 마굿간에서 낳겠어요. 이 동네엔 마굿간은 없어요. 그러니까 적당한 외양간을 찾아봐요. 티격태격하던 끝에 으례 마누라는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었다. 그러다가 어느 새 오월이 왔다. 오늘 아니면 내일 애가 태어날는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준비라고는 그저 하나님 부디 저를 좀 도와 주소서 라는 기도 뿐이었다. 기저귓감도 없었고 배냇저고리도 없었고 쌀도 미역도 없었다. 나는 마누라의 진통이 심해질때마다 정말로 죽고싶은 심정이었다. 오월 구일. 드디어 역사적인 날이 닥쳤다. 아무래도 마누라의 진통이 심상치가 않았다. 고통도 극도에 달한 모양이었다. 나가 계세요. 혼자 낳겠어요. 마누라는 무엇인가 굳은 결심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차마 나는 나갈수가 없었다. 나가시라니까요! 마누라는 다시 소리쳤다. 나는 부끄러워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마누라는 어느 정도 자신 있다는 듯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하나님 제발 무사하게 해주옵소서.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면서 마당으로 나왔다. 그러나 도무지 제대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나는 안절부절을 못하고 마당만 바삐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마누라가 다시 방 안에서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곤란하다는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나는 황급히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누라로 하여금 내 허리를 끌어안게 하고 나는 두 손으로 문고리를 힘주어 부여 잡았다. 두 시간 동안 우리는 거의 사경을 헤매었다. 마누라는 고통을 참느라고 어찌나 세게 입술을 깨물었는지 피까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내 팔뚝이라도 대신 물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고리가 두 번이나 빠져서 바깥 문고리에다 허리띠를 매고 다시 마누라를 격려했던 기억까지는 나는데 그 다음은 어찌나 혼이 났던지 전혀 기억에 없을 지경이었다. 남들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때가 가장 엄숙하고 경건했었다. 비록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우리에게는 일생일대의 중대사였다. 애를 받아 놓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장모님이 오셔서 일을 거들고 계셨다. 죄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낼세. 앞으로 이 애를 위해서라도 부디 열심히 살아야 하네. 그 한마디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햇빛이 눈부시고 사방은 고요했다. 왠지 눈물이 고여 왔다. 하나님 잘 키우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나처럼 살게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그 길로 나는 시내로 나와 월부 책 장사가 되었다. 아는 사람들에게 , 또는 사람들에게 카드를 꺼내 놓으면서 차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이라도 도우신 것일까. 이상하게도 모두들 부담없이 서명들을 해주곤 했다. 그 동안 무슨 일을 해도 제대로 되지 않더니 그 날만은 한꺼번에 만사가 다 형통할 것처럼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갔다. 나는 그날 놀랍게도 십만 원이라는 거액을 벌었다. 사람들이 카드만 꺼내 놓으면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나를 도와 주곤 했던 것이다. 나는 날이 어두워서야 일을 중단했다. 그리고 미역을 사서 옆구리에 낀 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정육점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산모한테는 양지머리가 좋다던데 그걸로 두 근만 주십시오. 사실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고기를 사보는 겁니다. 우리 마누라가 아들 낳았거든요. 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정육점 주인은 그저 나를 한번 흘깃 쳐다보고는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썩둑썩둑 칼질을 시작했다. 저울에 다는 걸 보니까 고기가 전체적으로 허연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내 손으로 소고기라는 걸 사보는 터였으므로 양지머리라는 것은 으례 허연 빛을 띠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었다. 미역과 소고기(특히 양지머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절로 휘파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더구나 나는 이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집에 돌아와 보니 장모님도 마누라도 별로 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오늘 같은 날 하루종일 어딜 그리 쏘다니다 이제야 나타나누. 자네도 참 한심하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양지머리라는 걸 펼쳐 보신 장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나를 한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천치로 취급하시는 듯한 느낌까지 주고 있었다. 이 서방. 자네 몰라도 어찌 그리 모르는가. 이게 양지머리라니, 어디가서 비계 덩어리만 얻어 왔구만. 주는 사람도 그렇지. 아무리 거저 주는 것이라고는 해도 살점이 한 사람 한 끼 반찬거리는 되어야 할 게 아닌가. 장모님께 허연 것은 전부 비계고 뻘건 것만 살코기라는 말을 듣자 나는 당장 정육점 주인에게로 달려가 놈의 모가지를 시궁창에다 쑤셔박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잡놈들의 세상. 다시 나는 굴뚝 뒤로 돌아가 벽에 머리를 기대고 혼자 울었다. 놈은 그야말로 얼씨구 호구 하나 만났구나 싶었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살의로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하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칼을 사용하는 자와 펜을 사용하는 자의 마음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느냐고, 내게는 이제 아들이 하나 있지 않느냐고, 더욱 깨끗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참으면서 그 일을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기로 작정했다. 이제 세월이 제법 흘러서 큰애의 나이가 일곱 살이 되었다. 추석을 앞두고 즈이 엄마가 떡을 빚으면서 묻는다. 한얼아. 아빠는 추석날 태어나셨단다. 그러니까 아빠의 생일은 추석이지. 한얼이는 아빠 생일 선물 뭘로 해 드릴래 ? 그러니까 녀석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양말하고 옷 사드릴 거예요. 돈이 어디 있어서 지가 그런 엄청난 선물을 사 주랴만 나는 주책없게도 공연히 기분이 좋아지는 걸 숨길 수가 없어 절로 입가에 웃음이 새어나온다. 짜아식, 너 돈 있니? 양말하고 옷은 아주 비싸단 말야. 만약 내가 그렇게 물으면 녀석은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빠가 벌어다 줄 거잖아요. 그렇거나 말거나 기분은 역시 마찬가지다. 문득 녀석이 뱃속에 들어있을 때의 일들이 떠오른다. 석 달치나 밀린 방세, 구멍 가게의 외상값 독촉, 구해지지 않는 취직자리,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 막막한 장래, 잦은 부부 싸움, 끝없는 방황, 겹치는 액운, 어제도 가난했었으며 오늘도 가난하며 영원히 가난하리라는 생각, 모든 치욕과 외로움을 참으며 글을 쓰던 일, 한 편도 완성해 보지 못하고 좌절만 거듭했던 나날, 그리고 입덧을 하던 일도 생각난다. 세 개의 참외도 생각난다. 누가 말했던가.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그럴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없는 것은 죄일는지 모르지만 돈이 없는 것은 결코 죄가 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내가 입덧을 했던 일, 세개의 참외를 내 마누라에게 사 주었던 일, 그런 일들은 극도로 가난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랑법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내 마누라와 뱃속에 든 아기에 대한 사랑의 발로에서 행하여졌던 일들일는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이여. 가난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보라. 그 겨울에 우리 마누라가 먹은 세 개의 샛노란 참외는 추석이 가까와 오는 오늘 내 가정의 일곱 살 먹은 달이 되어 저리 환하게 밝아 있다. 비록 가난과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되 착하고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사회생활의 테두리 - 원님이 없어도 고을은 돌아간다 - 윤경진(서울대 강사) 속현의 감소와 향리지위의 변화 고려는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민이 크게 늘어나고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대책이 요구되었다. 특히 속현지역의 사정이 더욱 어려웠다. 이에 고려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속현에 감무를 파견하여 유민을 안정시켰다. 감무가 대량으로 파견되면서 대신 기존의 속관들이 크게 감축되었다. 그리고 지방사회의 운영도 점차 개별 군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따. 한편 원 간섭기에 들어오면서 국가재정이 크게 악화되었다. 세금을 내지 않는 농장이 증가하였고, 원나라에 보내야 하는 공물과 일본정벌을 위해 내놓아야 했던 군비의 부담이 컸다. 이를 채우기 위해 지방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각 군현은 보다 많은 세원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수령은 속현의 세금납부까지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오히려 속현을 수탈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의례적으로 군현의 격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외적의 침입을 격되한 군현이나 공신. 왕비를 배출한 군현, 국왕의 태를 묻은 군현은 그 격이 올라갔다. 속현인 경우에는 수령을 파견하였고, 현은 군으로, 군은 주로 승격하였다. 그 결과 군현의 격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어 각 군현은 격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격이 높아졌다고 해서 토지나 인구 면에서 그에 걸맞는 규모를 마련해 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군현 사이에는 이를 마련하기 위한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원종 때 예천군의 향리였던 임지한은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자 정부에서 관직을 상으로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상주의 속현이던 다인현을 옮겨 줄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 또한 영해부는 동여진이 침입했을 때 성이 함락된 벌로 격이 강등되고 속현이던 보성부는 복주(안동)로 이속되었는데, 뒤에 향리인 박성절이 정부에 호소하여 돌려받은 일도 있었다. 한편 우왕 2년 예안현은 당시 권세가인 지윤에게 뇌물을 주고 우왕의 태를 묻었다. 그 결과 안동의 속현이던 예안현은 군으로 승격하면서 수령이 파견되었으며, 나아가 안동과 땅을 다투게 되었다. 이에 안동은 예안현이 태를 묻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조정에 보고하면서 두 군현의 갈등은 중앙 정계의 분쟁으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속현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발생하면서 속현은 점차 예속적인 위치로 변질되어 갔다. <고려사>악지에 수록된 <동경>이라는 가요에서는 동경(경주)과 속현인 안강현 사이의 관계를 군신관계나 부자관계에 비유하였는데, 그만큼 속현은 예속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예속의 정도가 깊어지면서 속현은 독자적인 행정구역으로서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에 조선 초기에는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속현을 전부 없애고 직할 촌락으로 만들었으며, 남아 있는 일부 속현도 공해전을 폐지하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통합하기 어려운 경우에만 속현으로 유지되다가 16세기에 이르면 거의 소멸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지방행정도 점차 향리중심에서 수령중심으로 바뀌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정부는 많은 속현에 수령을 파견하는 한편, 향리들이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도록 법제화하는 등 수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향리는 종전과 같은 지위를 잃고 점차 수령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로 떨어졌다. 고려의 향리는 처음에 호장을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었지만 고려 후기에 이르면 향리조직이 점차 분화되어 문서 등 행정 실무를 보던 조문기관의 지위가 점차 높아져 호장과 대등한 지위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수령의 업무를 보조하는 육방 중심의 향리조직이 마련되었다. 육방은 향리의 직책을 이.호.예.병.형.공 등 6개로 나눈 것으로서 중앙관서인 6조를 모방한 것이다. 수령의 관부는 중앙정부의 축소판이었고, 수령은 사실상 국왕의 권한을 대행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한편 향리에게 지급되었던 토지도 모두 폐지되었고, 신분도 점차 떨어져 중인신분으로 고착되었다. 고려의 향리는 과거를 통해 중앙관직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하는 관리들의 상당수가 향리출신이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향리는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사실상 막혀 있었다. 지방사회 내부에서도 사족층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가 형성되면서 향리의 지위는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고려말부터 중앙의 품관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거주하면서 유향소라는 자치기구를 두고 지방사회를 주도하였다. 이와 함께 향리들은 재지세력으로서 힘을 잃고 수령의 권위에 기생하게 되었다. 별도의 급여를 받지 못한 채 수령의 부림을 받아야 했던 향리들은 행정 실무를 담당한 것을 이용하여 농간을 부리고 민폐를 끼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우리가 고전소설이나 텔레비젼 사극 등을 통해 익숙해진 향리의 모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사탕 팔십 개를 사먹던 시절의 행복 초등학교 때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마치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학교에 어떻게 갈까 걱정하는 저를 보더니 어머니께서는 창고에서 가져온 비닐로 제 몸을 둘둘 말아주셨습니다. 백원만 있으면 버스타고 금방 가는데, 걸어가라며 비옷도 아닌 비닐을 내놓은 어머니가 참으로 미웠습니다. 그런데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어머니께서는 저를 다시 불러 세우고 주머니에서 이백원을 꺼내 주시며 버스를 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들고 나와보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비닐하우스도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비바람을 이기지 못해 계속 몸을 뒤로 젖혀지는데도 버스를 타지 않았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백원 짜리 두 개 덕분에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 개의 동전에 불과하지만 제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국제 캔디라고 해서 십원에 네게하는 사탕이 있었는데, 이백원이면 그 사탕을 무려 팔십개나 살 수 있었습니다. 비바람을 이겨낼수 있는 힘, 그것은 맛있는 사탕을 맘껏 먹을 수 있다는 희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겨우 학교에 도착했는데 수업이 다 끝나도록 비바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에 갈 때도 등교할 때랑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비닐로 온 몸을 감사고 집을 향해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럴 때 언니랑 마주칠 게 뭡니까. 언니는 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화를 냈습니다. "어머니가 너를 이렇게 그냥 보내든?" 나는 고개를 흔들며 자랑스럽게 손에 쥐고 있던 이 백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언니는 알밤을 때리며 저를 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했습니다. "무섭지 않았어?" "응 사탕 생각하니까 무섭지 않았어. 언니도 그랬잖아. 지금 공부하는거 힘들어도 먼 훗 날을 생각하면 힘들지 않다고 말이야." 저는 꽤 그럴듯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조금 뒤에 언니는 제가 감기몸살로 며칠동안 앓아 눕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사흘 동안 심하게 앓았는데, 언니는 한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종종 언니에게서 동전을 몇 개씩 받곤 했습니다. 지금은 백원이 껌값도 되지 않는 돈이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 몇십 갑절 되는 돈을 벌지만 버스비를 아낀 돈으로 사탕 팔십개를 살 수 있었던 그때가 더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정혜정 님/경기도 이천시 갈산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47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R. 데카르트의 방법론 "방법론 서설" 그때 세계에서는 1628년: 영국의회, 권리청원 제출 1636년: 조선, 병자화란 발발 F 베이컨이 참신한 영국의 경험주의적 철학을 정착시키고 있을 때, 대륙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R. 데카르트는 그와 상반되는 대조적인 철학을 개척해갔다. 두 사회와 언어와 민족성의 차이는 그만큼 상반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데카르트를 소개하기 이전에 하나의 가상적인 이야기를 먼저해보자. 여기 한 경험주의 철학자가 있었다고 하자. 그는 내 눈으로, 본것, 내 손으로 만져본 것, 내가 직접 듣고 접해보지 못한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굳게 지니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친구를 찾아 산길을 지나게 되었다. 가다가 보니까 길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구렁이를 한 마리 발견했다. 깜짝 놀란 그는 소나무들 뒤로 몸을 숨겼다. 하마터면 구렁이에게 물려 죽을 뻔했다고 큰 숨을 내쉬었다. 얼마 후에 다시 바라보더니 그 구렁이느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다시 몸을 숨긴 철학자는 혹시 저놈의 구렁이가 죽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역시 움직이질 않는다. 돌을 던져보았더니 여전히 꼼짝 않는 것이다. 철학자는 안심하고 나와 구렁이가 있는 곳까지 가까이 가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구렁이가 아니고 썩은 밧줄이었던 것이다. 철학자는 고뇌에 빠졌다. 언제나 믿을 수 있는것은 내 눈으로 본 것과 내 손으로 만져본 것이라고 믿어왔는데, 내눈이 나를 속이면 어떻게 되는가.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찾아가는 사람이 내 친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머리를 숙인 철학자는 맥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앞에 서서 썩은 밧줄을 구렁이로 본 내가 이 집이 내 집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바로 알 수 있겠는가. 망설이고 있는데 아내가 나오면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그느 저 여자가 내 아내인지 아니면 옆집 여자인지, 또는 다른 물건을 잘못 보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겠느냐는 회의에 빠져든 것이다. 의심은 계속해서 더 큰 의심으로 바뀌고, 진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밤 깊도록 의심과 회의에 빠져 있던 철학자는 한 가지 사실만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것은 '의심하고 있다'는 원초적인 사건이었다. 의심한다는 것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의심을 하고 있는가? 내가 의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심하며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의심의 대상이 되는 무엇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확대해나가다 보니까 의심의 베일은 조금씩 벗겨지고 점차로 새로운 지식을 확대새켜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다. 그러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드물게 보는 천재였다. 넉넉한 가정에 태어나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 당시에는 세계적인 학자들이 대부분 프랑스에 있었고 파리는 학문의 본고장과 같았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일찍부터 여러 스승들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당시 모두가 연구에 몰두해 있던 수학, 기하학 등의 기초학문을 터득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필요한 것은 거의 습득했다. 그런데 두 가지 점에서 공허함을 느꼈다. 새롭고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방법론이 없다는 사실과, 모든 철학의 기초적인 연구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고대 철학자들의 학설은 주관적인 가상의 산물이었고, 중세기의 철학적 논쟁들은 근거도 확실성도 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임을 발견했다. 실망한 데카르트는 내가 새로운 학문의 방법과 철학을 개척해야 하겠다는 자부심에 찬 학문적 탐구를 시작했다. 그 자신이 유명한 스승들에게서 실망해버렸다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였다. 더 찾아서 학문적 지도를 받을 스승이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때 데카르트는 확실하고 그 자체가 명백한 지식을 찾아야 히며, 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식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확신했다.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를, 의심의 대상이 되는 온갖것을 회의로 돌리자. 회의에서 회의에의 과정을 끝까지 추구해나갔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그의 유명한 "방법론 서설"이 된 것이다. 베이컨이 부정을 통한 긍정의 길이었다면 데카르트는 회의를 통한 진리의 길을 모색해 나갔다고 하겠다. 그러다가 전혀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로서의 명제를 얻게 된다. 그것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 말이 데카르트 철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대륙 이성론의 기초가 될 줄은 그 자신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데카르트의 회의가 근대철학을 탄생시켰다고 밀한다. 소크라테스의 회의가 그리스철학을 탄생시켰고,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의가 중세철학의 발단이 되었다면, 데카르트의 회의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새'는 '동쪽'의 의미...'샛별'은 동쪽에 제일 먼저 뜨는 별 동쪽에 제일 먼저 뜨는 별, 이 별이 곧 '샛별'이지요. 보통은 '금성'이라고도 하고요. '샛별'의 어원은 무엇일까요? '별'은 알겠는데, '샛'은 무엇일까요? '샛'은 '새'에 '시옷'이 붙은 것인데, 이때의 '새'는 동쪽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동풍을 '샛바람'이라고 하지요. 동쪽에 제일 먼저 뜨는 별, 그래서 '샛별'입니다. 이와 연관지어서 생각할 것은 '새벽'일텐데, '새벽'의 '새'는 동쪽이란 뜻 같지만, '벽'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중세국어에서는 '벽'이 다른 음이었었지요. 즉 가벼운 비읍으로 시작하는 단어였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2장 사라진 사람들 5척 단구의 거인 - 등소평 150센티미터의 단구로 지구상에서 제일 큰 땅 덩어리를 가진 중국을 지배하며 12억 중국인의 식량문제를 해결한 사람 등소평, 그는 97년 2월 19일 영면에 들었다. 등소평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 작은 마을 패방촌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일찍 어머니을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법정학교를 나온 청말의 인텔리였다. 등소평은 16세에 파리로 유학하여 23세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귀국한다. 당 중앙비서장, 팔로군 129사단의 정치위원, 52세 때는 모택동, 주은래, 유소기와 함께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다. 1978년 모택동이 지목한 후계자 화국봉을 제치고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까지에는 세 번의 커다란 정치적 좌절을 겪는다. 첫 번째는 모택동의 노선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당에서 추방을 당하고 두 번째로 66년 문화혁명 때 주자파로 낙인이 찍혀 실각된다. 이때 홍위병이 그의 큰아들 박방을 북경대학 건물에서 창 밖으로 내던지는 바람에 하반신 불구자가 되는 불행을 겪었다. 세 번째는 모택동 사망 뒤 그의 부인 강청 등 4인방에 밀려 모든 직위가 박탈되는 일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일어났다 하여 오뚝이 란 별명이 붙여졌다. 1978년 권력을 잡은 뒤, 개혁과 개방으로 사회주의 실험에 성공을 거두자 개혁의 설계사 로 불리워진다. 그의 좌우명 처변불경(어떤 변화에도 경솔하지 않게) 을 실천에 옮겨 전투에 공을 세웠어도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몇 번씩이나 실각을 당했어도 조용히 때를 기다려 다시 일어서곤 하였다. 또한 그는 모주석은 말년에 문화혁명이라는 과오를 범하기는 했지만 그의 생애의 대부분은 옳은 것이다. 모주석이 말년에 저지른 잘못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공산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 남긴 수많은 업적들을 인정해야 한다 라며 남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기도 했다. 89년 천안문 광장 시위때 유혈강경 진압으로 국민들에게 인기를 잃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이름 소평 과 같은 발음인 소병 으로 낚시대에 매달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는 1990년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7년을 더 살면서 이미 깊어진 파킨슨씨병과 호흡, 순환기능의 쇠퇴로 병마에 시달리다가 향년 93세인 1997년 2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장례는 간단하게, 유해 고별의식은 거행하지 말 것, 집에 반소를 설치하지 말며 각막을 기증하고 유체를 해부해 의학연구에 제공할 것, 그리고 유골은 바다에 뿌려줄 것등을 가족에게 당부하였다. 장례위원회는 소평 동지가 마지막 당부한 바대로 가장 소박하고 가장 장엄한 방식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려 한다고 발표했다. 1997년 2월 24일 밤, 나는 텔레비젼에서 북경의 혁명묘지로 운구되고 있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왠지 모르게 편안하고도 경건한 마음이 되었다. 소평 이 아닌 대평 의 마음으로 영면한 등소평 한편 부질없는 불로초만을 갈구하던 진시황의 용마갱이 그 위에 겹쳐졌다. 사람이 다르면 죽음도 이렇게 다른 것인가?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 거세된 사마천이 눈물로 쓴 <사기> 사마천이 <사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28,9세경이고 50세가 다 되어 죽을 때까지 수정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약 20년의 작업 기간을 거친 셈이다. 그 전에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각종 서적을 섭렵하고 중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미담은 사마씨의 집안이 상고 이래로 사관의 직을 세습해 왔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아들에게 들려 주곤 했다. 그 자신이 한나라 조정의 태사령 (문서의 수집과 관리를 믿는 직책)이었던 사마담은, 그러나 자신이 훌륭한 사서를 짓지 못한 것을 통분하여 임종 직전 아들에게 유언했다. “우리의 선조는 주나라의 태사였다. 이제 내 대에 와서 끊어지려는가!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 선조의 가업을 이어라. 이제 한나라가 일어나고 천하가 통일되었는데 나는 태사가 되고서도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아아, 두렵도다. 너는 명심하여라!”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듣고 있던 천은 “소자 불민하오니, 선인들의 문헌들을 빠짐없이 정리해 쓰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이 같은 상황이 젊은 사마천을 사기 집필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37세(기원전 99)때 그를 덮친 `이릉의 화`는 그를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 갔다. 사마천이 천거한 장군 이릉이 흉노와의 전투에서 분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항복하여 포로가 되자 한무제를 비롯하여 조정의 모든 신하는 그를 규탄했다. 이 때 사마천만은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진노를 사 궁형(죄인의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에 처해지게 되었다. 공자는 위나라 영공이 환관과 같은 수레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나라로 떠났을 정도로 당시 지식인들은 궁형을 혐오했다. 사대부로서 가장 큰 치욕을 당한 사마천은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뒤틀렸으며, 집에 있으면 마치 무언가를 잃은 것처럼 불안하고 나가면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우왕자왕` 극도의 수치감에 시달렸다. 사마천은 사대부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부끄러움을 씻어야 할 처지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마천은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 “그 옛날 주문왕도 유리에서 구금된 적이 있고 이사는 승상이었으나 다섯 가지 형벌을 모두 받았으며 한신 장군도 차꼬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 지위는 왕후장상에 이르렀고 명성은 이웃 나라에 알려졌지만 그 곤욕을 당해서도 자결할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라고 유명인들의 행적을 들추기도 하고 “제가 불행하여 양친을 일찍 여의고 형제 친척이 없는 홀몸이니 제 처지는 어찌되겠습니까”라며 동정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자살을 마다한 진짜 이유는 이미 초고가 완성된 <사기>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노비라도 능히 자결할 상황이로되 내가 그것을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은연자중하며 구차히 살려고 분토 중에 떨어지는 것도 불사한 것은 마음속에 미진한 바가 있어 한으로 여겼고 죽은 후 문채가 후세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라며 사마천은 밀려오는 좌절감과 싸웠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사기>는 본기 12권, 세가 30권, 표 10권, 서 8권, 열전 70권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 각 항목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타사공왈`이 삽입되어 있고 말미에는 이 책의 서문인 `태사공자서`가 있다. 이 책은 중국 상고의 황제 시대부터 사마천 당시의 한무제 때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전국책, 춘추, 좌전, 국어, 세본 등 당시까지 중국 문명이 낳은 거의 모든 기록을 참고로 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까지 중국 문명의 총결산이라 할 만하다. 또 본기(황제에 대한 기록)와 열전(유명한 인물에 대한 기록)을 기둥으로 하고 세가(제후에 대한 기록), 표(연표), 서(문물 제도에 대한 기록)로 구성되는 기전체는 사마천이 처음 시도한 기념비적인 역사 서술 방법으로 그후 역사 서술의 본보기가 되었다. 19세기 말의 청나라 역사책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편찬하는 정사는 모두 이 기전체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춘추전국 시대는 이전의 신화적인 세계관에서 인간 자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가는 철학적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철학적 유산을 이어받은 <사기>는 신들의 역사를 인간의 역사로 대체한 것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그가 당시의 사서로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열전을 설정해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은 그 단적인 증거이다.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눈은 매우 날카로워 많은 후세 학자들의 경탄을 자아내곤 했다. 어떤 학자는 현대 역사학자들이 저술한 중국 고대사와 관련된 노저 중에서 <사기>에 제시된 이해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을 정도이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전국을 통일할 때 사람들은 위나라가 신릉군을 기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전국 말기의 사회 상황이 이미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릉군을 기용했더라도 위나라의 멸망은 피할 수 없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잇다. 즉 `하늘의 의지` 앞에서는 어떠한 현군명신이 있더라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인물 평가에서도 시세를 예민하게 읽고 정확히 대응한 사람들이 역사상에 족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즉 역사는 백아숙제 같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아니라 한초의 공신인 소하나 조참 같은 시세를 탈 줄 아는 사람들이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본기를 중심으로 한 체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마천의 기본적인 역사관은 황제를 정점으로 한 제국 질서가 그 바탕이었다. 당시 창성하고 있던 한제국의 위세와 기본적으로 유교적 지식인이었던 그의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관점이었다. 그러나 <사기> 곳곳에는 당시 무제의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배어 있다. 예컨대 8서 중의 하나인 평준서는 주로 무제 시대의 소금, 철 전매정책을 중심으로 한 각종 경제정책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표적은 당시 실력자이며 경제정책의 주역이던 어사대부 상홍양이었다. 무제는 상과 작위를 내릴 정도로 그를 총애했는데 사마천은 평준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싣고 있다. “어느 해 가뭄이 들어 점술가에게 자문을 구하니 말하길 `황제는 마땅히 조세만으로 경비를 충당해야 하는데 지금 상홍양은 관리를 시장에 앉혀 물건을 판매시켜 이를 구하고 있으니 상홍양을 삶아 죽이면 하늘이 곧 비를 내릴 것입니다.” 열전의 마지막 편인 화식열전에서도 비판은 이어진다. 화식열전은 전국의 간략한 경제지와 춘추시대 이후 대상인들의 활약을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사마천은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경제 생활과 그 자체의 원리로 움직이는 경제 원리를 논하고 경제 불간섭주의의 장점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무제와 그의 관료들이 추진하던 획일적인 통일 경제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2. 제재와 앙거 그깁고 또다시 제재 1) '중국제재'는 미국의 장기전략이다 미국 본토의 지식인은 미국 정부에 대해 '중국과는 냉전을 벌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고 전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 같은 사람도 중국에 대항하는 것은 미국에게 그만한 대가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하였으나 미국은몇 년 간 끊임없이 중국에 대해 분명한 제재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강온양책'인데 이 둘은 형식은 다르지만 실제로 그 목적은 동일한 것이다. 이것도 역시 중 . 미 관계가 현재와 같은 위험수위에이르게 된 주요 원인인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심각한 차이. 서양문명이 동양문명보다 우월하다는 자세,미국이 제일이고 세계를 이끌어 가고자 하는 욕심이 바로 미국이 가하는 '제재'의 기본 출발점이다. 여기에 또 모든 미국인이 가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지식이 상당부분 잘못되어 있는 반면에 중국인의 미국에 대한 이해는 훨씬 심도있고 분명하며 전면적이라고 여겨진다. 1992년 초 베이징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미국유학생과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티베트문제에 대해 너무 다른 견해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불쾌하게 헤어졌다. 그의 주장은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 한 뒤 매년 그곳에서 몇 백억의 재산을 약탈하였고, 그 때문에 티베트는 낙후되었고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아예 토론을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달라이 라마시대의 티베트는 아주 풍요로운 태평성대였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우리 미국인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강조하였다. '자유 "발전''공정' 면에서 고도로 발전한 매스컴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이렇게도 '유치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동양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이토록 잘못 인식하고 있으니 얼마나 두렵고 안타까운 일인가! 중국을 소련식의 세력확장주의 국가나 사악한 제국이라고 여기고 미국의 한 의원이 발언했듯이 '우리 안에 가둬놓고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게해야 한다'는 인식은 미국이 중국에 대해 제재조치를 시행하는 또 다른이유 중 하나이다, 최근에는 중국군대가 대만해협에서 시행한 군사훈련과 중국 정부가 일관되게 가지고 있던 남사군도와 조어도 문제 등에 대한 입장을 미국측은 중국의 군사적 세력확장의 징조라고 간주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미국 정부와 의회에 묻고 싶다. 엄연히 자기 나라에 속해 있는 영토에 대해 외국의 몇몇 나라가 문제 삼아 논쟁을 벌이고 있는 데도 그 영토에 대해 주권을 논할 권리가 없다는 말인가? 중국은 항상 너그럽게 양보해야만 비로소 야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대만문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첫째 대만이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고. 두 번째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속셈이 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부 정치가들은 내심 중국대륙과 대만이 순조롭게 통일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만약 중국과 대만이 통일된다면 그들 수중에 있는 중국에 대한 중요한 카드 한 장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중국인은 명확하고 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우리는 대만과 평화적인 통일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하고, 둘째 만약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는다면 우리들도 무력을 행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에 대해서는 지식인들이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리떵후이가 어떤 식으로 해명을 하든 그가 일본작가 루오따로 시바(司馬舊太郞)와 한 대담을 읽으면 그 속셈을 꿰뚫어볼 수 있다. 중.미 관계에 형성된 현재의 사태를 양국간에 빚어진 오해 정도라고 이해하는 것은 억지라고 할 수 있다. 왜 중국만 무력사용을 억제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미국은 왜 남북전쟁에서 무기를 버리고 대화로 풀지 않았는가? 그래서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공자 말씀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 미국인들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거나 세계를 이끌 어가는 것이 마치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대만해협에서 훈련할 때 미국의 결정은 참으로 우둔하고 신중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제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진입한 것은 공공연한 도전이라 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페리 미국무장관은 '미국의 해군이 세계 제일인 것을 그 누구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중국을 위협하였다.나는 이에 대해 '중국의 인구가 세계 제일인 것을 그 누구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미국에 충고하고 싶다. 만약 누군가가 대만문제를 빌미로 중국과 협상을 하려고 든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패권적 지위와 냉전 이후의 구도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모를 꾸미며 헛소문을 퍼트리고 무력위협을 일삼으며 무역제재 등의 수단을 동원하는 행동은 단기간 동안 중국의 현대화 과정을 지연시킬 뿐 아니라 결국 미국 및 전 서구세계에 불행한 재난을 초래 할 것이다. 1995년 {중국청년보}에서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은 이미 중국청년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가 되었다. 십억이 넘는 인구와 몇천 년의 문명사를 가지고 지금 막 새롭게 일어서려는 동방의 대국을 적으로 보는 저의가 숨어 있는 한 그 정책은 현명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노다지의 주인 신씨는 조상 대대로 물려 오던 밭뙈기를 팔아 금광 한 구덩이를 산 일이 후회되었다. 광산에서는 중요한 몇 몇 광구 외에 나머지 광구는 '분광'이라고 해서 몇 구덩이씩 나누어 파는데, 다른 분광에서 금이 나오는 것을 보고 신씨는 밭을 팔아 분광 하나를 샀다. 신씨는 노다지를 캐겠다는 다소 허황된 꿈이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집에서 자는 일보다 금광에서 자는 일이 더 많았다. 남들처럼 힘든 일을 한다고 술에 의지하는 일도 드물었다. "신씨는 노다지 캘 거야. 틀림없어. 두고 보라구.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신씨가 안 캐고 누가 캐겠어."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하는 신씨를 보고 다들 그렇게 말했다. 그의 성실성을 봐서 군소리 없이 돈을 빌려주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신씨는 3 년째 구덩이를 파고 들어갔으나 금줄이 박힌 광석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웃한 다른 구덩이에서는 가끔 노다지를 발견했다는 말이 들려 왔으나 신씨한테만은 그런 행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 신씨는 낙망한 나머지 몸과 마음이 차차 지쳐 갔다. 술을 마시지 않던 신씨가 차츰 술청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이제는 노다지를 캐는 일보다 이리저리 빌린 돈을 갚는 일이 더 급선무였다. 신씨는 고민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걸 팔아 치우고 당장 빚잔치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아냐, 난 할 수 있어! 해낼 수 있어!' 신씨는 딱 한 해만 더 열심히 해 보기로 하고 부지런히 구덩이를 파 나갔다. 그러나 스스로 약속한 한 해는 또 아무런 소득 없이 지나갔다. 신씨는 나머지 남아 있던 농토를 다 팔아 우선 급한 빚을 갚았다. 그리고 또 한 해를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 한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신씨는 그제서야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금광에 매달리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신씨는 즉각 금광을 팔려고 내놓았다. 금광은 내놓자마자 당장 임자가 나섰다. 신씨로서는 금도 나오지 않은 금광을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런데 신씨가 금광을 판 뒤 한 일 주일쯤 되는 날이었다. 주막에 나가 술을 들고 있는데 김씨가 노다지를 캤다는 말이 들려 왔다. 신씨는 놀라 술사발을 팽개치고 김씨에게 달려갔다. "아니 내가 5 년이나 파도 안 나오던 구덩이에서 금이 나왔다니, 그게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이걸 한번 보십시오!" 김씨는 흥분한 목소리로 주먹만한 금광석 하나를 신씨에게 보여주었다. "일을 시작한 지 이틀만에 한 1 미터쯤 파고 들어가자 이렇게 노다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신씨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자신이 피땀 흘려 파던 구덩이만 쳐다보았다. 1 미터만 더 파면 될 것을 그것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금광을 판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게 느껴졌다. 글터 → 이글저글 미해군성에서는 지금까지 금요일이 되는 13일에 새로이 배를 진수시킨 적이 없다.보르네오와 말레이시아 원주민들은 죽은자의 매장을 몇 달 동안 늦추고 죽은 자의 앞에 음식과 음료수를 차려 놓고 그와 대화를 한다.한국에는 4자가 붙은 병원 입원실이나 호텔방이 없다. 일본에도 ‘4’와 ‘9’가 붙은 호텔방이나 병원입원실이 없다.고대 이집트와 남태평양에 살았던 처녀들은 결혼하기 전에 처녀막을 수술해서 찢고 또 피를 내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피와 잘라낸 피부는 다산(多産)과 풍년을 약속하는 신에게 바쳐진다. 또 중세 유럽에서는 신랑은 신부와의 첫날밤을 자신의 영주에게 양보하는 풍습이 있었다.13 왜 싫어할까? 가롯 유다의 이름이 ‘Judus Iscariot’로 13자로 되어있기 때문이다.1519년에 스페인 원정대가 멕시코에 도달해서 처음 본 것은 인간을 살육하는 인간 도살장의 전경이었다. 수많은 인간을 희생시켜 그들의 신에게 바친 흔적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멕시코의 원주민인 에르텍 인디언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신들의 양식으로 매일 밤 인간의 피를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야만적인 제사에 1년에 적어도 25,000명 이상의 인간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술 취한 채 운전하는 사람은 미국과 한국에서는 구속되고 산살바도르에서는 사형 당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10 추천 0 비추천 목록 위로 아래로 인쇄 쓰기 목록 수정 삭제 ✔댓글 쓰기 에디터 선택하기 ✔ 텍스트 모드 ✔ 에디터 모드 ?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독서편지 List Zine Gallery FirstThumb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글쓴이 조회 수 1388 제1388호 - 2024.11.08. 금요일(음력 : 10.08.) 2024.11.08 風文 409 1387 제1387호 - 2024.11.06. 수요일(음력 : 10.06.) 2024.11.06 風文 345 1386 제1386호 - 2024.11.04. 월요일(음력 : 10.04.) 2024.11.04 風文 371 1385 제1385호 - 2024.11.02. 토요일(음력 : 10.02.) 2024.11.02 風文 381 1384 제1384호 - 2024.10.28. 월요일(음력 : 9.26.) 2024.10.28 風文 338 1383 제1383호 - 2024.10.25. 금요일(음력 : 9.23.) 2024.10.25 風文 544 1382 제1382호 - 2024.10.24. 목요일(음력 : 9.22.) 2024.10.24 風文 320 1381 제1381호 - 2024.10.23. 수요일(음력 : 9.21.) 2024.10.23 風文 933 1380 제1380호 - 2024.10.22. 화요일(음력 : 9.20.) 2024.10.22 風文 798 1379 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2024.10.21 風文 790 1378 제1378호 - 2024.10.18. 금요일(음력 : 9.16.) 2024.10.18 風文 802 1377 제1377호 - 2024.10.17. 목요일(음력 : 9.15.) 2024.10.17 風文 509 1376 제1376호 - 2024.10.16. 수요일(음력 : 9.14.) 2024.10.16 風文 500 1375 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2024.10.15 風文 605 1374 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2024.10.14 風文 403 1373 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2024.10.13 風文 426 1372 제1372호 - 2024.10.11. 금요일(음력 : 9.09.) 2024.10.12 風文 452 1371 제1371호 - 2024.10.10. 목요일(음력 : 9.08.) 2024.10.10 風文 401 1370 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2024.10.09 風文 348 1369 제1369호 - 2024.10.08. 화요일(음력 : 9.06.) 2024.10.08 風文 337 1368 제1368호 - 2024.10.07. 월요일(음력 : 9.05.) 2024.10.07 風文 299 1367 제1367호 - 2024.10.06. 일요일(음력 : 9.04.) 2024.10.06 風文 364 목록 Search 검색 제목+내용제목내용댓글닉네임태그 전체검색 제목+내용+댓글 확장 변수 쓰기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64 Next / 64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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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에 따른 전문 서평 지원및 대표 작품의 영어번역 지원 응모요령:-.응모봉투에 <본격수필신인상 응모작품>이라고 적을 것-.별지에 응모자의 본명, 주소, 나이, 전화번호, 직업, 약력을 반드시 첨부할 것-.원고는 A4지에 워드로 작성한 이메일 접수를 원칙으로 함-.응모작품은 반환의 책임을 지지 않음-.메일 보내는 사람에 반드시 본명을 적을 것계간 에세이문예 편집주간 송명화 글터 → 명언 / 격언 권태의 치료제는 호기심이지만 호기심을 고치는 약은 아무 것도 없다. / M.F.A.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그 겨울 우리 마누라가 먹은 세 개의 참외 나는 마누라가 임신만 하면 입덧을 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다. 더러 그런수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건 정말로 남자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역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헛구역질도 그렇고 입맛이 떨어지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는 개살구 따위를 한번 실컷 먹어 보고 싶다는 충동 때문에 거의 환장할 지경에 이르는 것까지 마누라와 흡사했었다.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특히 큰애를 임신했을때는 더욱 심했다. 몇 개월째였더라, 겨울인데 마누라가 갑자기 참외가 먹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자 나도 참외를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참외란 말인가. 고드름이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는데. 방세는 석 달치나 밀려 있고 연탄은 두 장밖에 안 남았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며칠 전에 마누라가 친정에 가서 몰래 퍼온 몇 됫박의 쌀도 이제는 거의 다 떨어져 간다는 사실까지 역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취직자리도 생기지 않았고 글도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 마누라는 신경이 날카로와질 대로 날카로와져 있었다. 아주 작은 일에도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며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몰아 붙이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역시 입덧중에 있었으며 사사건건 일이 뒤틀리기만 했었으므로 자주 마누라와 극렬한 부부 싸움을 일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서 아는 사람 하나를 만났다. 나는 취직하면 갚을셈치고 모든 자존심을 버린 채로 거의 애원하다시피 하여 얼마간의 돈을 꾸었다. 툭하면 굶던 시절이었으므로 수중에 몇 푼의 돈만 있어도 천만금을 얻은 듯이 마음이 든든했었다. 나는 마누라가 참외를 먹고 싶다고 말했던 일을 생각해 내고는 혹시나해서 춘천 시내의 모든 시장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과나 배 따위는 흔해 빠졌는데 참외는 좀처럼 발견되어지지 않았다. 멀리서 노란색만 눈에 띄어도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당시 나는 너무도 무능한 남편이었으므로 내가 그 어떤 장래에 대한 희망을 설계해 주어도, 마누라는 절대 믿으려 들지 않았었다. 그래서 마누라가 나를 보고 웃는 모습을 보기가 여간 힘이 들지 않았었다. 한마디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냉전 상태에 놓여 있었다. 참외를 구하면 ... 참외를 구하면 마누라는 최소한 손톱만큼이라도 내 진심을 알아 주리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거의 아침 나절부터 해질녘까지 여러 지역의 시장 바닥을 헤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네 개의 참외를 진열해 놓은 가계 하나를 찾아내었다. 처음에 나는 내 눈을 의심했었다. 서울에서는 구하기가 수월하죠. 요즘 돈 가지고 안 되는 게 어디있나요. 하 지만 여기만 해도 촌 아닙니까. 하도 비싸서 사갈 사람이 있나요. 가게를 차린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구색을 갖추느라고 몇 개 갖다 놓았지만 찾는 사람이 전혀 없었어요. 아마 다른 가게에는 갖다놓지도 않았을 겁니다. 주인 남자의 말이었다. 참외들은 모두 주먹만한 크기였는데 무슨 품종인지 표면에 전혀 굴곡이 없었으며 유난히 동그랗고 매끈매끈했다. 냄새를 맡아 보니 참외는 참외였다. 가격을 물으니까 참외 한 개의 값이 거의 연탄 스무 장 값과 맞먹는 액수였다. 하지만 나는 냉방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마누라에게 참외만은 사다 주고 싶었다. 봉투에 넣어서 깨끗한 종이에 포장해 주십시오. 나는 세 개를 샀다. 돈이 모자라서였다. 그것을 사들고 샘밭에 있는 월 삼천 원짜리 어두운 셋방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왠지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참으로 개떡 같은 인생이로구나. 참외는 샀으나 쌀과 연탄이 다시 크나큰 걱정거리로 내 가슴을 짓눌러왔다. 집으로 들어서니 예상대로 마누라의 표정은 예전과 다름없이 암울해 보였다. 나는 그즈음 공처가에서 마악 공포처가로 변해 가는 중이었으므로 아주 조심스럽게 사온 참외를 꺼내 놓았다. 혹시 쌀이나 연탄을 사지 않고 참외를 사왔다고 역정을 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마누라는 역정을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마운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당신도 좀 드세요. 마누라는 내가 자기와 마찬가지로 입덧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내게도 한 개를 권했다. 그러나 나는 딱 한 조각만 입에 넣고 더 이상은 사양했다. 솔직이 말해서 한 개 정도는 나도 먹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오죽 못난 남편이면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참외를 겨우 세 개밖에 못 사왔으랴. 나는 가게에다 남겨 두고 온 한 개의 참외가 눈에 선했다. 참외를 먹은 이후로도 우리는 자주 부부 싸움을 했고 이유는 역시 가난 때문이었다. 자기 아내가 임신을 했으면 궁금해서 병원에라도 한번 가봐야 할거아녜요.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허세로 곧잘 마누라를 공박했다. 예수님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어요. 여긴 마굿간이 아니라 엄연히 방이란 말요. 그러니 한결 좋은 환경이 아니고 뭐요. 우리네 옛날 사람들은 병원 한번 안 가보고도 애들만 무사고로 척척 잘 낳지 않았는가말요. 첨이니까 무서워지는 걸 어떻게 해요. 무섭긴, 당연한 걸 가지고 무섭긴, 임신했으면 애 낳는다는 건 여자가 남자보다 더 잘 알지. 그래요. 당신 소원이라면 나도 남의집 마굿간에서 낳겠어요. 이 동네엔 마굿간은 없어요. 그러니까 적당한 외양간을 찾아봐요. 티격태격하던 끝에 으례 마누라는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었다. 그러다가 어느 새 오월이 왔다. 오늘 아니면 내일 애가 태어날는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준비라고는 그저 하나님 부디 저를 좀 도와 주소서 라는 기도 뿐이었다. 기저귓감도 없었고 배냇저고리도 없었고 쌀도 미역도 없었다. 나는 마누라의 진통이 심해질때마다 정말로 죽고싶은 심정이었다. 오월 구일. 드디어 역사적인 날이 닥쳤다. 아무래도 마누라의 진통이 심상치가 않았다. 고통도 극도에 달한 모양이었다. 나가 계세요. 혼자 낳겠어요. 마누라는 무엇인가 굳은 결심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차마 나는 나갈수가 없었다. 나가시라니까요! 마누라는 다시 소리쳤다. 나는 부끄러워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마누라는 어느 정도 자신 있다는 듯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하나님 제발 무사하게 해주옵소서.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면서 마당으로 나왔다. 그러나 도무지 제대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나는 안절부절을 못하고 마당만 바삐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마누라가 다시 방 안에서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곤란하다는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나는 황급히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누라로 하여금 내 허리를 끌어안게 하고 나는 두 손으로 문고리를 힘주어 부여 잡았다. 두 시간 동안 우리는 거의 사경을 헤매었다. 마누라는 고통을 참느라고 어찌나 세게 입술을 깨물었는지 피까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내 팔뚝이라도 대신 물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고리가 두 번이나 빠져서 바깥 문고리에다 허리띠를 매고 다시 마누라를 격려했던 기억까지는 나는데 그 다음은 어찌나 혼이 났던지 전혀 기억에 없을 지경이었다. 남들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때가 가장 엄숙하고 경건했었다. 비록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우리에게는 일생일대의 중대사였다. 애를 받아 놓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장모님이 오셔서 일을 거들고 계셨다. 죄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낼세. 앞으로 이 애를 위해서라도 부디 열심히 살아야 하네. 그 한마디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햇빛이 눈부시고 사방은 고요했다. 왠지 눈물이 고여 왔다. 하나님 잘 키우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나처럼 살게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그 길로 나는 시내로 나와 월부 책 장사가 되었다. 아는 사람들에게 , 또는 사람들에게 카드를 꺼내 놓으면서 차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이라도 도우신 것일까. 이상하게도 모두들 부담없이 서명들을 해주곤 했다. 그 동안 무슨 일을 해도 제대로 되지 않더니 그 날만은 한꺼번에 만사가 다 형통할 것처럼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갔다. 나는 그날 놀랍게도 십만 원이라는 거액을 벌었다. 사람들이 카드만 꺼내 놓으면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나를 도와 주곤 했던 것이다. 나는 날이 어두워서야 일을 중단했다. 그리고 미역을 사서 옆구리에 낀 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정육점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산모한테는 양지머리가 좋다던데 그걸로 두 근만 주십시오. 사실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고기를 사보는 겁니다. 우리 마누라가 아들 낳았거든요. 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정육점 주인은 그저 나를 한번 흘깃 쳐다보고는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썩둑썩둑 칼질을 시작했다. 저울에 다는 걸 보니까 고기가 전체적으로 허연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내 손으로 소고기라는 걸 사보는 터였으므로 양지머리라는 것은 으례 허연 빛을 띠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었다. 미역과 소고기(특히 양지머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절로 휘파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더구나 나는 이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집에 돌아와 보니 장모님도 마누라도 별로 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오늘 같은 날 하루종일 어딜 그리 쏘다니다 이제야 나타나누. 자네도 참 한심하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양지머리라는 걸 펼쳐 보신 장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나를 한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천치로 취급하시는 듯한 느낌까지 주고 있었다. 이 서방. 자네 몰라도 어찌 그리 모르는가. 이게 양지머리라니, 어디가서 비계 덩어리만 얻어 왔구만. 주는 사람도 그렇지. 아무리 거저 주는 것이라고는 해도 살점이 한 사람 한 끼 반찬거리는 되어야 할 게 아닌가. 장모님께 허연 것은 전부 비계고 뻘건 것만 살코기라는 말을 듣자 나는 당장 정육점 주인에게로 달려가 놈의 모가지를 시궁창에다 쑤셔박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잡놈들의 세상. 다시 나는 굴뚝 뒤로 돌아가 벽에 머리를 기대고 혼자 울었다. 놈은 그야말로 얼씨구 호구 하나 만났구나 싶었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살의로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하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칼을 사용하는 자와 펜을 사용하는 자의 마음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느냐고, 내게는 이제 아들이 하나 있지 않느냐고, 더욱 깨끗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참으면서 그 일을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기로 작정했다. 이제 세월이 제법 흘러서 큰애의 나이가 일곱 살이 되었다. 추석을 앞두고 즈이 엄마가 떡을 빚으면서 묻는다. 한얼아. 아빠는 추석날 태어나셨단다. 그러니까 아빠의 생일은 추석이지. 한얼이는 아빠 생일 선물 뭘로 해 드릴래 ? 그러니까 녀석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양말하고 옷 사드릴 거예요. 돈이 어디 있어서 지가 그런 엄청난 선물을 사 주랴만 나는 주책없게도 공연히 기분이 좋아지는 걸 숨길 수가 없어 절로 입가에 웃음이 새어나온다. 짜아식, 너 돈 있니? 양말하고 옷은 아주 비싸단 말야. 만약 내가 그렇게 물으면 녀석은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빠가 벌어다 줄 거잖아요. 그렇거나 말거나 기분은 역시 마찬가지다. 문득 녀석이 뱃속에 들어있을 때의 일들이 떠오른다. 석 달치나 밀린 방세, 구멍 가게의 외상값 독촉, 구해지지 않는 취직자리,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 막막한 장래, 잦은 부부 싸움, 끝없는 방황, 겹치는 액운, 어제도 가난했었으며 오늘도 가난하며 영원히 가난하리라는 생각, 모든 치욕과 외로움을 참으며 글을 쓰던 일, 한 편도 완성해 보지 못하고 좌절만 거듭했던 나날, 그리고 입덧을 하던 일도 생각난다. 세 개의 참외도 생각난다. 누가 말했던가.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그럴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없는 것은 죄일는지 모르지만 돈이 없는 것은 결코 죄가 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내가 입덧을 했던 일, 세개의 참외를 내 마누라에게 사 주었던 일, 그런 일들은 극도로 가난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랑법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내 마누라와 뱃속에 든 아기에 대한 사랑의 발로에서 행하여졌던 일들일는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이여. 가난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보라. 그 겨울에 우리 마누라가 먹은 세 개의 샛노란 참외는 추석이 가까와 오는 오늘 내 가정의 일곱 살 먹은 달이 되어 저리 환하게 밝아 있다. 비록 가난과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되 착하고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사회생활의 테두리 - 원님이 없어도 고을은 돌아간다 - 윤경진(서울대 강사) 속현의 감소와 향리지위의 변화 고려는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민이 크게 늘어나고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대책이 요구되었다. 특히 속현지역의 사정이 더욱 어려웠다. 이에 고려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속현에 감무를 파견하여 유민을 안정시켰다. 감무가 대량으로 파견되면서 대신 기존의 속관들이 크게 감축되었다. 그리고 지방사회의 운영도 점차 개별 군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따. 한편 원 간섭기에 들어오면서 국가재정이 크게 악화되었다. 세금을 내지 않는 농장이 증가하였고, 원나라에 보내야 하는 공물과 일본정벌을 위해 내놓아야 했던 군비의 부담이 컸다. 이를 채우기 위해 지방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각 군현은 보다 많은 세원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수령은 속현의 세금납부까지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오히려 속현을 수탈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의례적으로 군현의 격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외적의 침입을 격되한 군현이나 공신. 왕비를 배출한 군현, 국왕의 태를 묻은 군현은 그 격이 올라갔다. 속현인 경우에는 수령을 파견하였고, 현은 군으로, 군은 주로 승격하였다. 그 결과 군현의 격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어 각 군현은 격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격이 높아졌다고 해서 토지나 인구 면에서 그에 걸맞는 규모를 마련해 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군현 사이에는 이를 마련하기 위한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원종 때 예천군의 향리였던 임지한은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자 정부에서 관직을 상으로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상주의 속현이던 다인현을 옮겨 줄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 또한 영해부는 동여진이 침입했을 때 성이 함락된 벌로 격이 강등되고 속현이던 보성부는 복주(안동)로 이속되었는데, 뒤에 향리인 박성절이 정부에 호소하여 돌려받은 일도 있었다. 한편 우왕 2년 예안현은 당시 권세가인 지윤에게 뇌물을 주고 우왕의 태를 묻었다. 그 결과 안동의 속현이던 예안현은 군으로 승격하면서 수령이 파견되었으며, 나아가 안동과 땅을 다투게 되었다. 이에 안동은 예안현이 태를 묻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조정에 보고하면서 두 군현의 갈등은 중앙 정계의 분쟁으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속현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발생하면서 속현은 점차 예속적인 위치로 변질되어 갔다. <고려사>악지에 수록된 <동경>이라는 가요에서는 동경(경주)과 속현인 안강현 사이의 관계를 군신관계나 부자관계에 비유하였는데, 그만큼 속현은 예속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예속의 정도가 깊어지면서 속현은 독자적인 행정구역으로서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에 조선 초기에는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속현을 전부 없애고 직할 촌락으로 만들었으며, 남아 있는 일부 속현도 공해전을 폐지하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통합하기 어려운 경우에만 속현으로 유지되다가 16세기에 이르면 거의 소멸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지방행정도 점차 향리중심에서 수령중심으로 바뀌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정부는 많은 속현에 수령을 파견하는 한편, 향리들이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도록 법제화하는 등 수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향리는 종전과 같은 지위를 잃고 점차 수령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로 떨어졌다. 고려의 향리는 처음에 호장을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었지만 고려 후기에 이르면 향리조직이 점차 분화되어 문서 등 행정 실무를 보던 조문기관의 지위가 점차 높아져 호장과 대등한 지위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수령의 업무를 보조하는 육방 중심의 향리조직이 마련되었다. 육방은 향리의 직책을 이.호.예.병.형.공 등 6개로 나눈 것으로서 중앙관서인 6조를 모방한 것이다. 수령의 관부는 중앙정부의 축소판이었고, 수령은 사실상 국왕의 권한을 대행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한편 향리에게 지급되었던 토지도 모두 폐지되었고, 신분도 점차 떨어져 중인신분으로 고착되었다. 고려의 향리는 과거를 통해 중앙관직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하는 관리들의 상당수가 향리출신이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향리는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사실상 막혀 있었다. 지방사회 내부에서도 사족층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가 형성되면서 향리의 지위는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고려말부터 중앙의 품관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거주하면서 유향소라는 자치기구를 두고 지방사회를 주도하였다. 이와 함께 향리들은 재지세력으로서 힘을 잃고 수령의 권위에 기생하게 되었다. 별도의 급여를 받지 못한 채 수령의 부림을 받아야 했던 향리들은 행정 실무를 담당한 것을 이용하여 농간을 부리고 민폐를 끼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우리가 고전소설이나 텔레비젼 사극 등을 통해 익숙해진 향리의 모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사탕 팔십 개를 사먹던 시절의 행복 초등학교 때의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마치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학교에 어떻게 갈까 걱정하는 저를 보더니 어머니께서는 창고에서 가져온 비닐로 제 몸을 둘둘 말아주셨습니다. 백원만 있으면 버스타고 금방 가는데, 걸어가라며 비옷도 아닌 비닐을 내놓은 어머니가 참으로 미웠습니다. 그런데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어머니께서는 저를 다시 불러 세우고 주머니에서 이백원을 꺼내 주시며 버스를 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들고 나와보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비닐하우스도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비바람을 이기지 못해 계속 몸을 뒤로 젖혀지는데도 버스를 타지 않았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백원 짜리 두 개 덕분에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 개의 동전에 불과하지만 제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국제 캔디라고 해서 십원에 네게하는 사탕이 있었는데, 이백원이면 그 사탕을 무려 팔십개나 살 수 있었습니다. 비바람을 이겨낼수 있는 힘, 그것은 맛있는 사탕을 맘껏 먹을 수 있다는 희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겨우 학교에 도착했는데 수업이 다 끝나도록 비바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에 갈 때도 등교할 때랑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비닐로 온 몸을 감사고 집을 향해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럴 때 언니랑 마주칠 게 뭡니까. 언니는 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화를 냈습니다. "어머니가 너를 이렇게 그냥 보내든?" 나는 고개를 흔들며 자랑스럽게 손에 쥐고 있던 이 백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언니는 알밤을 때리며 저를 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했습니다. "무섭지 않았어?" "응 사탕 생각하니까 무섭지 않았어. 언니도 그랬잖아. 지금 공부하는거 힘들어도 먼 훗 날을 생각하면 힘들지 않다고 말이야." 저는 꽤 그럴듯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조금 뒤에 언니는 제가 감기몸살로 며칠동안 앓아 눕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사흘 동안 심하게 앓았는데, 언니는 한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종종 언니에게서 동전을 몇 개씩 받곤 했습니다. 지금은 백원이 껌값도 되지 않는 돈이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 몇십 갑절 되는 돈을 벌지만 버스비를 아낀 돈으로 사탕 팔십개를 살 수 있었던 그때가 더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정혜정 님/경기도 이천시 갈산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47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R. 데카르트의 방법론 "방법론 서설" 그때 세계에서는 1628년: 영국의회, 권리청원 제출 1636년: 조선, 병자화란 발발 F 베이컨이 참신한 영국의 경험주의적 철학을 정착시키고 있을 때, 대륙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R. 데카르트는 그와 상반되는 대조적인 철학을 개척해갔다. 두 사회와 언어와 민족성의 차이는 그만큼 상반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데카르트를 소개하기 이전에 하나의 가상적인 이야기를 먼저해보자. 여기 한 경험주의 철학자가 있었다고 하자. 그는 내 눈으로, 본것, 내 손으로 만져본 것, 내가 직접 듣고 접해보지 못한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굳게 지니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친구를 찾아 산길을 지나게 되었다. 가다가 보니까 길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구렁이를 한 마리 발견했다. 깜짝 놀란 그는 소나무들 뒤로 몸을 숨겼다. 하마터면 구렁이에게 물려 죽을 뻔했다고 큰 숨을 내쉬었다. 얼마 후에 다시 바라보더니 그 구렁이느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다시 몸을 숨긴 철학자는 혹시 저놈의 구렁이가 죽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역시 움직이질 않는다. 돌을 던져보았더니 여전히 꼼짝 않는 것이다. 철학자는 안심하고 나와 구렁이가 있는 곳까지 가까이 가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구렁이가 아니고 썩은 밧줄이었던 것이다. 철학자는 고뇌에 빠졌다. 언제나 믿을 수 있는것은 내 눈으로 본 것과 내 손으로 만져본 것이라고 믿어왔는데, 내눈이 나를 속이면 어떻게 되는가.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찾아가는 사람이 내 친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머리를 숙인 철학자는 맥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앞에 서서 썩은 밧줄을 구렁이로 본 내가 이 집이 내 집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바로 알 수 있겠는가. 망설이고 있는데 아내가 나오면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그느 저 여자가 내 아내인지 아니면 옆집 여자인지, 또는 다른 물건을 잘못 보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겠느냐는 회의에 빠져든 것이다. 의심은 계속해서 더 큰 의심으로 바뀌고, 진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밤 깊도록 의심과 회의에 빠져 있던 철학자는 한 가지 사실만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것은 '의심하고 있다'는 원초적인 사건이었다. 의심한다는 것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의심을 하고 있는가? 내가 의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심하며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의심의 대상이 되는 무엇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확대해나가다 보니까 의심의 베일은 조금씩 벗겨지고 점차로 새로운 지식을 확대새켜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다. 그러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드물게 보는 천재였다. 넉넉한 가정에 태어나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 당시에는 세계적인 학자들이 대부분 프랑스에 있었고 파리는 학문의 본고장과 같았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일찍부터 여러 스승들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당시 모두가 연구에 몰두해 있던 수학, 기하학 등의 기초학문을 터득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필요한 것은 거의 습득했다. 그런데 두 가지 점에서 공허함을 느꼈다. 새롭고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방법론이 없다는 사실과, 모든 철학의 기초적인 연구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고대 철학자들의 학설은 주관적인 가상의 산물이었고, 중세기의 철학적 논쟁들은 근거도 확실성도 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임을 발견했다. 실망한 데카르트는 내가 새로운 학문의 방법과 철학을 개척해야 하겠다는 자부심에 찬 학문적 탐구를 시작했다. 그 자신이 유명한 스승들에게서 실망해버렸다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였다. 더 찾아서 학문적 지도를 받을 스승이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때 데카르트는 확실하고 그 자체가 명백한 지식을 찾아야 히며, 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식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확신했다.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를, 의심의 대상이 되는 온갖것을 회의로 돌리자. 회의에서 회의에의 과정을 끝까지 추구해나갔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그의 유명한 "방법론 서설"이 된 것이다. 베이컨이 부정을 통한 긍정의 길이었다면 데카르트는 회의를 통한 진리의 길을 모색해 나갔다고 하겠다. 그러다가 전혀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로서의 명제를 얻게 된다. 그것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 말이 데카르트 철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대륙 이성론의 기초가 될 줄은 그 자신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데카르트의 회의가 근대철학을 탄생시켰다고 밀한다. 소크라테스의 회의가 그리스철학을 탄생시켰고,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의가 중세철학의 발단이 되었다면, 데카르트의 회의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새'는 '동쪽'의 의미...'샛별'은 동쪽에 제일 먼저 뜨는 별 동쪽에 제일 먼저 뜨는 별, 이 별이 곧 '샛별'이지요. 보통은 '금성'이라고도 하고요. '샛별'의 어원은 무엇일까요? '별'은 알겠는데, '샛'은 무엇일까요? '샛'은 '새'에 '시옷'이 붙은 것인데, 이때의 '새'는 동쪽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동풍을 '샛바람'이라고 하지요. 동쪽에 제일 먼저 뜨는 별, 그래서 '샛별'입니다. 이와 연관지어서 생각할 것은 '새벽'일텐데, '새벽'의 '새'는 동쪽이란 뜻 같지만, '벽'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중세국어에서는 '벽'이 다른 음이었었지요. 즉 가벼운 비읍으로 시작하는 단어였었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2장 사라진 사람들 5척 단구의 거인 - 등소평 150센티미터의 단구로 지구상에서 제일 큰 땅 덩어리를 가진 중국을 지배하며 12억 중국인의 식량문제를 해결한 사람 등소평, 그는 97년 2월 19일 영면에 들었다. 등소평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 작은 마을 패방촌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일찍 어머니을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법정학교를 나온 청말의 인텔리였다. 등소평은 16세에 파리로 유학하여 23세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귀국한다. 당 중앙비서장, 팔로군 129사단의 정치위원, 52세 때는 모택동, 주은래, 유소기와 함께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다. 1978년 모택동이 지목한 후계자 화국봉을 제치고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까지에는 세 번의 커다란 정치적 좌절을 겪는다. 첫 번째는 모택동의 노선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당에서 추방을 당하고 두 번째로 66년 문화혁명 때 주자파로 낙인이 찍혀 실각된다. 이때 홍위병이 그의 큰아들 박방을 북경대학 건물에서 창 밖으로 내던지는 바람에 하반신 불구자가 되는 불행을 겪었다. 세 번째는 모택동 사망 뒤 그의 부인 강청 등 4인방에 밀려 모든 직위가 박탈되는 일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일어났다 하여 오뚝이 란 별명이 붙여졌다. 1978년 권력을 잡은 뒤, 개혁과 개방으로 사회주의 실험에 성공을 거두자 개혁의 설계사 로 불리워진다. 그의 좌우명 처변불경(어떤 변화에도 경솔하지 않게) 을 실천에 옮겨 전투에 공을 세웠어도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몇 번씩이나 실각을 당했어도 조용히 때를 기다려 다시 일어서곤 하였다. 또한 그는 모주석은 말년에 문화혁명이라는 과오를 범하기는 했지만 그의 생애의 대부분은 옳은 것이다. 모주석이 말년에 저지른 잘못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공산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 남긴 수많은 업적들을 인정해야 한다 라며 남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기도 했다. 89년 천안문 광장 시위때 유혈강경 진압으로 국민들에게 인기를 잃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이름 소평 과 같은 발음인 소병 으로 낚시대에 매달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는 1990년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7년을 더 살면서 이미 깊어진 파킨슨씨병과 호흡, 순환기능의 쇠퇴로 병마에 시달리다가 향년 93세인 1997년 2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장례는 간단하게, 유해 고별의식은 거행하지 말 것, 집에 반소를 설치하지 말며 각막을 기증하고 유체를 해부해 의학연구에 제공할 것, 그리고 유골은 바다에 뿌려줄 것등을 가족에게 당부하였다. 장례위원회는 소평 동지가 마지막 당부한 바대로 가장 소박하고 가장 장엄한 방식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려 한다고 발표했다. 1997년 2월 24일 밤, 나는 텔레비젼에서 북경의 혁명묘지로 운구되고 있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왠지 모르게 편안하고도 경건한 마음이 되었다. 소평 이 아닌 대평 의 마음으로 영면한 등소평 한편 부질없는 불로초만을 갈구하던 진시황의 용마갱이 그 위에 겹쳐졌다. 사람이 다르면 죽음도 이렇게 다른 것인가?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 거세된 사마천이 눈물로 쓴 <사기> 사마천이 <사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28,9세경이고 50세가 다 되어 죽을 때까지 수정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약 20년의 작업 기간을 거친 셈이다. 그 전에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각종 서적을 섭렵하고 중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미담은 사마씨의 집안이 상고 이래로 사관의 직을 세습해 왔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아들에게 들려 주곤 했다. 그 자신이 한나라 조정의 태사령 (문서의 수집과 관리를 믿는 직책)이었던 사마담은, 그러나 자신이 훌륭한 사서를 짓지 못한 것을 통분하여 임종 직전 아들에게 유언했다. “우리의 선조는 주나라의 태사였다. 이제 내 대에 와서 끊어지려는가!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 선조의 가업을 이어라. 이제 한나라가 일어나고 천하가 통일되었는데 나는 태사가 되고서도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아아, 두렵도다. 너는 명심하여라!”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듣고 있던 천은 “소자 불민하오니, 선인들의 문헌들을 빠짐없이 정리해 쓰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이 같은 상황이 젊은 사마천을 사기 집필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37세(기원전 99)때 그를 덮친 `이릉의 화`는 그를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 갔다. 사마천이 천거한 장군 이릉이 흉노와의 전투에서 분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항복하여 포로가 되자 한무제를 비롯하여 조정의 모든 신하는 그를 규탄했다. 이 때 사마천만은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진노를 사 궁형(죄인의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에 처해지게 되었다. 공자는 위나라 영공이 환관과 같은 수레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나라로 떠났을 정도로 당시 지식인들은 궁형을 혐오했다. 사대부로서 가장 큰 치욕을 당한 사마천은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뒤틀렸으며, 집에 있으면 마치 무언가를 잃은 것처럼 불안하고 나가면 어디를 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우왕자왕` 극도의 수치감에 시달렸다. 사마천은 사대부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부끄러움을 씻어야 할 처지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마천은 열심히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 “그 옛날 주문왕도 유리에서 구금된 적이 있고 이사는 승상이었으나 다섯 가지 형벌을 모두 받았으며 한신 장군도 차꼬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 지위는 왕후장상에 이르렀고 명성은 이웃 나라에 알려졌지만 그 곤욕을 당해서도 자결할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라고 유명인들의 행적을 들추기도 하고 “제가 불행하여 양친을 일찍 여의고 형제 친척이 없는 홀몸이니 제 처지는 어찌되겠습니까”라며 동정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자살을 마다한 진짜 이유는 이미 초고가 완성된 <사기>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노비라도 능히 자결할 상황이로되 내가 그것을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은연자중하며 구차히 살려고 분토 중에 떨어지는 것도 불사한 것은 마음속에 미진한 바가 있어 한으로 여겼고 죽은 후 문채가 후세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라며 사마천은 밀려오는 좌절감과 싸웠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사기>는 본기 12권, 세가 30권, 표 10권, 서 8권, 열전 70권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 각 항목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타사공왈`이 삽입되어 있고 말미에는 이 책의 서문인 `태사공자서`가 있다. 이 책은 중국 상고의 황제 시대부터 사마천 당시의 한무제 때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전국책, 춘추, 좌전, 국어, 세본 등 당시까지 중국 문명이 낳은 거의 모든 기록을 참고로 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까지 중국 문명의 총결산이라 할 만하다. 또 본기(황제에 대한 기록)와 열전(유명한 인물에 대한 기록)을 기둥으로 하고 세가(제후에 대한 기록), 표(연표), 서(문물 제도에 대한 기록)로 구성되는 기전체는 사마천이 처음 시도한 기념비적인 역사 서술 방법으로 그후 역사 서술의 본보기가 되었다. 19세기 말의 청나라 역사책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편찬하는 정사는 모두 이 기전체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춘추전국 시대는 이전의 신화적인 세계관에서 인간 자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가는 철학적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철학적 유산을 이어받은 <사기>는 신들의 역사를 인간의 역사로 대체한 것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그가 당시의 사서로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열전을 설정해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은 그 단적인 증거이다. 사마천의 역사를 보는 눈은 매우 날카로워 많은 후세 학자들의 경탄을 자아내곤 했다. 어떤 학자는 현대 역사학자들이 저술한 중국 고대사와 관련된 노저 중에서 <사기>에 제시된 이해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을 정도이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전국을 통일할 때 사람들은 위나라가 신릉군을 기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전국 말기의 사회 상황이 이미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릉군을 기용했더라도 위나라의 멸망은 피할 수 없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잇다. 즉 `하늘의 의지` 앞에서는 어떠한 현군명신이 있더라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인물 평가에서도 시세를 예민하게 읽고 정확히 대응한 사람들이 역사상에 족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즉 역사는 백아숙제 같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아니라 한초의 공신인 소하나 조참 같은 시세를 탈 줄 아는 사람들이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본기를 중심으로 한 체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마천의 기본적인 역사관은 황제를 정점으로 한 제국 질서가 그 바탕이었다. 당시 창성하고 있던 한제국의 위세와 기본적으로 유교적 지식인이었던 그의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관점이었다. 그러나 <사기> 곳곳에는 당시 무제의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배어 있다. 예컨대 8서 중의 하나인 평준서는 주로 무제 시대의 소금, 철 전매정책을 중심으로 한 각종 경제정책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표적은 당시 실력자이며 경제정책의 주역이던 어사대부 상홍양이었다. 무제는 상과 작위를 내릴 정도로 그를 총애했는데 사마천은 평준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싣고 있다. “어느 해 가뭄이 들어 점술가에게 자문을 구하니 말하길 `황제는 마땅히 조세만으로 경비를 충당해야 하는데 지금 상홍양은 관리를 시장에 앉혀 물건을 판매시켜 이를 구하고 있으니 상홍양을 삶아 죽이면 하늘이 곧 비를 내릴 것입니다.” 열전의 마지막 편인 화식열전에서도 비판은 이어진다. 화식열전은 전국의 간략한 경제지와 춘추시대 이후 대상인들의 활약을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사마천은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경제 생활과 그 자체의 원리로 움직이는 경제 원리를 논하고 경제 불간섭주의의 장점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무제와 그의 관료들이 추진하던 획일적인 통일 경제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2. 제재와 앙거 그깁고 또다시 제재 1) '중국제재'는 미국의 장기전략이다 미국 본토의 지식인은 미국 정부에 대해 '중국과는 냉전을 벌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고 전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 같은 사람도 중국에 대항하는 것은 미국에게 그만한 대가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하였으나 미국은몇 년 간 끊임없이 중국에 대해 분명한 제재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강온양책'인데 이 둘은 형식은 다르지만 실제로 그 목적은 동일한 것이다. 이것도 역시 중 . 미 관계가 현재와 같은 위험수위에이르게 된 주요 원인인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심각한 차이. 서양문명이 동양문명보다 우월하다는 자세,미국이 제일이고 세계를 이끌어 가고자 하는 욕심이 바로 미국이 가하는 '제재'의 기본 출발점이다. 여기에 또 모든 미국인이 가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지식이 상당부분 잘못되어 있는 반면에 중국인의 미국에 대한 이해는 훨씬 심도있고 분명하며 전면적이라고 여겨진다. 1992년 초 베이징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미국유학생과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티베트문제에 대해 너무 다른 견해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불쾌하게 헤어졌다. 그의 주장은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 한 뒤 매년 그곳에서 몇 백억의 재산을 약탈하였고, 그 때문에 티베트는 낙후되었고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아예 토론을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달라이 라마시대의 티베트는 아주 풍요로운 태평성대였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우리 미국인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강조하였다. '자유 "발전''공정' 면에서 고도로 발전한 매스컴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이렇게도 '유치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동양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이토록 잘못 인식하고 있으니 얼마나 두렵고 안타까운 일인가! 중국을 소련식의 세력확장주의 국가나 사악한 제국이라고 여기고 미국의 한 의원이 발언했듯이 '우리 안에 가둬놓고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게해야 한다'는 인식은 미국이 중국에 대해 제재조치를 시행하는 또 다른이유 중 하나이다, 최근에는 중국군대가 대만해협에서 시행한 군사훈련과 중국 정부가 일관되게 가지고 있던 남사군도와 조어도 문제 등에 대한 입장을 미국측은 중국의 군사적 세력확장의 징조라고 간주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미국 정부와 의회에 묻고 싶다. 엄연히 자기 나라에 속해 있는 영토에 대해 외국의 몇몇 나라가 문제 삼아 논쟁을 벌이고 있는 데도 그 영토에 대해 주권을 논할 권리가 없다는 말인가? 중국은 항상 너그럽게 양보해야만 비로소 야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대만문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첫째 대만이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고. 두 번째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속셈이 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부 정치가들은 내심 중국대륙과 대만이 순조롭게 통일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만약 중국과 대만이 통일된다면 그들 수중에 있는 중국에 대한 중요한 카드 한 장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중국인은 명확하고 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우리는 대만과 평화적인 통일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하고, 둘째 만약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는다면 우리들도 무력을 행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에 대해서는 지식인들이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리떵후이가 어떤 식으로 해명을 하든 그가 일본작가 루오따로 시바(司馬舊太郞)와 한 대담을 읽으면 그 속셈을 꿰뚫어볼 수 있다. 중.미 관계에 형성된 현재의 사태를 양국간에 빚어진 오해 정도라고 이해하는 것은 억지라고 할 수 있다. 왜 중국만 무력사용을 억제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미국은 왜 남북전쟁에서 무기를 버리고 대화로 풀지 않았는가? 그래서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공자 말씀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 미국인들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거나 세계를 이끌 어가는 것이 마치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대만해협에서 훈련할 때 미국의 결정은 참으로 우둔하고 신중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제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진입한 것은 공공연한 도전이라 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페리 미국무장관은 '미국의 해군이 세계 제일인 것을 그 누구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중국을 위협하였다.나는 이에 대해 '중국의 인구가 세계 제일인 것을 그 누구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미국에 충고하고 싶다. 만약 누군가가 대만문제를 빌미로 중국과 협상을 하려고 든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패권적 지위와 냉전 이후의 구도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모를 꾸미며 헛소문을 퍼트리고 무력위협을 일삼으며 무역제재 등의 수단을 동원하는 행동은 단기간 동안 중국의 현대화 과정을 지연시킬 뿐 아니라 결국 미국 및 전 서구세계에 불행한 재난을 초래 할 것이다. 1995년 {중국청년보}에서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은 이미 중국청년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가 되었다. 십억이 넘는 인구와 몇천 년의 문명사를 가지고 지금 막 새롭게 일어서려는 동방의 대국을 적으로 보는 저의가 숨어 있는 한 그 정책은 현명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노다지의 주인 신씨는 조상 대대로 물려 오던 밭뙈기를 팔아 금광 한 구덩이를 산 일이 후회되었다. 광산에서는 중요한 몇 몇 광구 외에 나머지 광구는 '분광'이라고 해서 몇 구덩이씩 나누어 파는데, 다른 분광에서 금이 나오는 것을 보고 신씨는 밭을 팔아 분광 하나를 샀다. 신씨는 노다지를 캐겠다는 다소 허황된 꿈이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집에서 자는 일보다 금광에서 자는 일이 더 많았다. 남들처럼 힘든 일을 한다고 술에 의지하는 일도 드물었다. "신씨는 노다지 캘 거야. 틀림없어. 두고 보라구.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신씨가 안 캐고 누가 캐겠어."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하는 신씨를 보고 다들 그렇게 말했다. 그의 성실성을 봐서 군소리 없이 돈을 빌려주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신씨는 3 년째 구덩이를 파고 들어갔으나 금줄이 박힌 광석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웃한 다른 구덩이에서는 가끔 노다지를 발견했다는 말이 들려 왔으나 신씨한테만은 그런 행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 신씨는 낙망한 나머지 몸과 마음이 차차 지쳐 갔다. 술을 마시지 않던 신씨가 차츰 술청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이제는 노다지를 캐는 일보다 이리저리 빌린 돈을 갚는 일이 더 급선무였다. 신씨는 고민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걸 팔아 치우고 당장 빚잔치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아냐, 난 할 수 있어! 해낼 수 있어!' 신씨는 딱 한 해만 더 열심히 해 보기로 하고 부지런히 구덩이를 파 나갔다. 그러나 스스로 약속한 한 해는 또 아무런 소득 없이 지나갔다. 신씨는 나머지 남아 있던 농토를 다 팔아 우선 급한 빚을 갚았다. 그리고 또 한 해를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 한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신씨는 그제서야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금광에 매달리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신씨는 즉각 금광을 팔려고 내놓았다. 금광은 내놓자마자 당장 임자가 나섰다. 신씨로서는 금도 나오지 않은 금광을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런데 신씨가 금광을 판 뒤 한 일 주일쯤 되는 날이었다. 주막에 나가 술을 들고 있는데 김씨가 노다지를 캤다는 말이 들려 왔다. 신씨는 놀라 술사발을 팽개치고 김씨에게 달려갔다. "아니 내가 5 년이나 파도 안 나오던 구덩이에서 금이 나왔다니, 그게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이걸 한번 보십시오!" 김씨는 흥분한 목소리로 주먹만한 금광석 하나를 신씨에게 보여주었다. "일을 시작한 지 이틀만에 한 1 미터쯤 파고 들어가자 이렇게 노다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신씨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자신이 피땀 흘려 파던 구덩이만 쳐다보았다. 1 미터만 더 파면 될 것을 그것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금광을 판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게 느껴졌다. 글터 → 이글저글 미해군성에서는 지금까지 금요일이 되는 13일에 새로이 배를 진수시킨 적이 없다.보르네오와 말레이시아 원주민들은 죽은자의 매장을 몇 달 동안 늦추고 죽은 자의 앞에 음식과 음료수를 차려 놓고 그와 대화를 한다.한국에는 4자가 붙은 병원 입원실이나 호텔방이 없다. 일본에도 ‘4’와 ‘9’가 붙은 호텔방이나 병원입원실이 없다.고대 이집트와 남태평양에 살았던 처녀들은 결혼하기 전에 처녀막을 수술해서 찢고 또 피를 내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피와 잘라낸 피부는 다산(多産)과 풍년을 약속하는 신에게 바쳐진다. 또 중세 유럽에서는 신랑은 신부와의 첫날밤을 자신의 영주에게 양보하는 풍습이 있었다.13 왜 싫어할까? 가롯 유다의 이름이 ‘Judus Iscariot’로 13자로 되어있기 때문이다.1519년에 스페인 원정대가 멕시코에 도달해서 처음 본 것은 인간을 살육하는 인간 도살장의 전경이었다. 수많은 인간을 희생시켜 그들의 신에게 바친 흔적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멕시코의 원주민인 에르텍 인디언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신들의 양식으로 매일 밤 인간의 피를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야만적인 제사에 1년에 적어도 25,000명 이상의 인간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술 취한 채 운전하는 사람은 미국과 한국에서는 구속되고 산살바도르에서는 사형 당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