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 - A.J. 크로닌
제2부 기묘한 천직 - 6
1892년의 부활절 기간동안에 일어난 사건은 산 모랄레스에 있는 영국계 신학교에 놀라운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신학과 학생 하나가 꼬박 4일간이나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물론 이 학교에서도 50년 전에 이 아라곤 고원에 학교를 설립한 이래 이것이 처음 있는 소동은 아니다. 학교 앞 주점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고, 화주를 마시고, 양심은 물론 위장까지도 망치면서 열두 시간이나 학교 당국과 맞섰던 학생도 있었고, 비아 아모로사('사랑의 거리'란 뜻)에 있는 지저분한 주점에 숨어 들어가 당국의 단속반에게 붙들려 오는 주정뱅이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과 같이 학생의 신분으로 대낮에 당당히 정문으로 나가 나흘이나 지난 후에 다시 그 정문으로 절름거리면서 먼지투성이에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고 머리칼은 산발한 채, 누가 봐도 기가 찰 만큼 방탕한 모습으로 태연히 들어와, 더구나 '산책하러 갔다 왔다'고 하는 말 이외에는 확실한 변명을 하려고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눕자 하루 내내 잠만 잤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언어도단의 배교적인 행동인 것이다. 휴식 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햇볕이 내리쬐는 언덕바지의 포도밭길과 그 아래의 황토땅에 하얗게 빛나고 있는 학교 앞을 거닐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이러쿵저러쿵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치셤은 틀림없이 퇴학 처분을 받을 것이다'-이것이 그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사문 위원회가 지체없이 설치되었고, 지금까지의 교칙 위반 문제의 예에 따라서 위원회는 학장, 부학장, 사감 신부, 그리고 신학부 학생 대표 한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사문 위원회는 신학부 강당에서 프랜치스가 귀교한 이튿날 예비 토의를 거쳐 개최되었다. 그날밖에는 동풍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으로 다 익은 까만 올리브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지며 껍질이 터져 벌어졌다. 오렌지꽃 향기가 부속병원 위의 숲에서 풍겨 왔다. 불타는 것 같은 대지가 태양의 열로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 프랜치스는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의자가 줄지어 있는 서늘하고 어두컴컴한 강당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검은 알파카 제복이 야윈 몸뚱이를 한층 야위어 보이게 한다. 머리를 짧게 깎아 인상이 더욱 뚜렷했다. 까만 눈동자와 자기를 억제하고 있는 태도는 한결 더 음산하게 보였다. 특히 두 손이 어쩐지 이상하게 생기가 없는 느낌이다. 그의 앞 단상에는 오늘의 사문회 위원인 마그냅 신부, 타란트 신부, 고메즈 신부, 그리고 밀리가 각각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프랜치스는 자기에게 집중되는 불쾌함과 우려가 뒤섞인 시선을 의식하면서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 사감인 고메즈 신부가 빠르게 죄상을 낭독했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으나 이윽고 타란트 신부가 말문을 열었다.
"뭐라고 변명할 말이 있는가?"
주위에 아무도 없었으나 프랜치스는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머리를 들고 대답을 했다.
"저는 산책을 나간 것입니다." 답변이 좀 애매한 것 같았다.
"그것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그 의도의 선악을 불구하고 걷는 데에는 다리를 사용한다. 허가 없이 교문을 나갔다고 하는 명백한 죄상은 차치하고라도 네가 어떤 악의로 그런 짓을 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밖에서 술을 마셨는가?"
"아닙니다."
"투우라든가, 축제 또는 도박장에 갔었는가?"
"아닙니다."
"윤락가의 여자와 접촉했는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바로 대답은 못했지만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이해하실 수 없습니까? 저는, 저는 산책을 하러 나갔던 것입니다."
타란트 신부는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너는 우리에게 오로지 4일간이나 쉬지 않고 시골길을 걸어다니고 있었다고 이해시킬 작정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럼 마지막에는 어디를 갔었는가?"
"코사에 갔었습니다."
"코사라면! 여기에서 5마일이나 되는 곳이 아닌가?"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코사에 갈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타란트 신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간 생각은 손발을 뒤틀어 조이고 혹은 형틀에 매달거나 하는 옛날 식의 고문이었다. 중세기의 사람들이 그런 기구를 사용한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치셤!"
"거짓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억누르는 듯한 부르짖음이 밀리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그야말로 형식적인 것이고, 반장으로서 학생을 대표하고 있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밀리는 프랜치스에게 소리를 치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탁이야, 프랜치스! 우리 학생 전체를 위해서......자네를 사랑하고 있는 우리들 모두를 위해서......솔직히 고백해, 부탁해."
그래도 프랜치스는 잠자코 있었으므로 사감인 고메즈 신부가 타란트 신부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시내에서 증거가 될 만한 정보는 아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만......그러나 코사의 사제에게 편지로 문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타란트는 이 스페인 신부의 얼굴에 날카롭게 시선을 던졌다.
"과연 좋은 생각입니다."
두 신부가 대화를 하는 기회를 틈타 학장이 말을 걸었다. 호리웰 시절보다 나이가 들어 더욱 대범해진 그는 약간 몸을 앞으로 내밀고 천천히 동정심이 어린 어조로 말했다.
"생각해 볼 문제야, 프랜치스. 이러한 경우에 그런 막연한 설명은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아라. 무단 결석이란 중대한 사건이니까. 단순히 교칙을 위반한 것만이 아니야. 오히려 너에게 그렇게 행동하게 한 동기가 무엇인지 나에게 말해라. 여기에 있는 것이 행복하지는 않는가?"
"아닙니다, 행복합니다."
"좋아. 그럼 너는 천직을 의심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것이 아닌가?"
"네, 요즘은 전보다도 훨씬 세상에 뭔가 선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좋은 생각이야. 그럼 퇴학이라고 하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은 게로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야, 왜 그렇게 되었는가 너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보란 말야. 너의 그 이상야릇한 모험을 말야."
부드러운 학장의 말에 프랜치스는 겨우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을 하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저는 그때 성당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 뒤숭숭하여 침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동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 뜨거운 바람 때문에 더욱 침착성을 잃은 것 같습니다. 학교 생활이 갑자기 하찮게 생각되고 귀찮아졌습니다. 문득 교문 밖을 바라보니 길바닥이 하얗고 무척 상쾌해 보였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이미 자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순간 저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 밤을 내내 걷기만 했습니다. 몇 마일이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 이튿날도 계속 걸었다는 말인가" 하고 타란트 신부가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은 내 평생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다! 위원회를 모욕하는 것도 분수가 있지."
학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뭔가 결심을 뜻을 보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잠시 휴회를 제안합니다."
다른 두 사람이 놀라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학장은 프랜치스를 향하여 확실하게 말했다.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도 좋다. 필요하면 다시 부를 테니까."
프랜치스는 죽은 것처럼 적막한 강당을 물러나왔다. 프랜치스가 나가자 학장은 모두를 향해서 냉정한 목소리로 확실하게 말했다.
"여기는 학생을 학대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신중히 처리해야 해요. 아무래도 알 수 없는 문제가 그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니까."
학장의 일방적인 처리에 분개한 타란트 신부는 안달을 하면서 강당을 왔다갔다했다.
"멋대로 하는 것도 분수가 있어야지요."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하고 학장은 말했다.
" 그는 여기에 온 이래 모든 일에 열심이고, 대단한 인내를 하고 있어요. 품행표에도 나쁜 점은 아무것도 기재되어 있지 않지요, 고메즈 신부?"
고메즈는 자기 앞의 책상 위에 있는 품행표를 뒤적여 보았다.
"없습니다" 하고 그는 천천히 눈으로 읽으며 대답했다. "장난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작년 겨울에 데스퍼드 신부가 담화실에서 읽고 있던 영자 신문에 느닷없이 불을 지른 일이 있습니다. 왜 그런 짓을 했는가 하고 질문한 데 대하여 그는 웃으면서 '악마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손에 일을 주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괜찮지?" 학장은 빠른 어조로 말했다. "데스퍼드 신부가 학교에 배달되는 신문을 모조리 혼자서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일이오." "그리고" 하고 고메즈 신부는 계속했다. "식당에서 독서 낭독의 대리에 명해 졌을 때 말입니다.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전>대신 은밀히 가제고 온<이브가 사탕을 훔쳤을 때>라고 하는 소설을 읽었답니다. 그래서 중지 명령을 받을 때까지 폭소를 터뜨리게 했습니다.
"죄가 없는 장난이오."
"그 외에......" 고메즈는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학생들이 일곱 가지 성사(카톨릭에서 세례, 견진, 성체, 고백, 혼인, 신품등 7성사를 말함)를 나타내는 가장 행렬 때-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세례라고 해서 한 사람이 갓난아이의 옷을 입거나, 결혼이라고 해서 한 사람이 신부로 가장하거나 한 때의 일 말입니다-물론 모두 허가가 있어서 한 것입니다만, 그러나......" 고메즈는 수상쩍은 눈으로 타란트를 힐끗 쳐다보았다.
"병자 성사라고 해서 치셤은 시체를 들쳐 메고 왔었는데, 그 시체의 등에 카드를 붙여 '여기에 타란트 신부 잠들다, 사망 증명은 내가 기꺼이 쓴 것. 만일......"
"이제 그만" 하고 타란트는 재빨리 고메즈 신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바보 같은 장난보다 더욱 중대한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학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엉터리야, 그러나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오. 나는 때에 따라서 장난을 치는 젊은이가 좋아요. 더구나 치셤은 유별난 성격이라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전적으로 괴짜야. 그에게는 큰 심연의 불이 있소. 감수성이 강하고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성격이지만, 그것을 그익살스러운 장난으로 감추고 있는 거요. 아무튼 녀석은 대단한 고집이 있으니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거요. 어린애 같은 단순성이 있으면서도 정직한 고집은 매우 이론적인, 또 거기에다 철저한 개인 주의자거든."
"개인주의라고 하는 것은 신학자에겐 오히려 위험한 성격입니다."
타란트가 신랄하게 말했다. "종교개혁도 개인주의에서 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종교개혁이 카톨릭 교회의 법규를 개선해 주기도 했지."
학장은 천장으로 눈을 돌리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데 그거 약간 포인트를 벗어난 것 같군. 하여간 이번 일이 교칙에 크게 위반되는 것은 나도 부정하지는 않아요. 징벌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징벌도 서둘러서는 안 되오. 치셤과 같은 성격의 학생을 타당한 이유도 규명하지 않고 퇴학 처분을 하는 것은 나는 불가하다고 생각하오. 그러니까 며칠 더 기다려 보도록 합시다. 그는 어린애 같은 동작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세 신부는 강당에서 나와 헤어졌다. 고메즈와 타란트는 함께 갔다. 프랜치스는 이틀 동안 엉거주춤하고 불안한 기분으로 지냈다. 금족령을 당하지도 않았고, 수업 참석도 금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도서관에서도 식당에서도 또 휴게실에서도-그가 가면 모두 부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어 버리고 급히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취하지만, 그것은 누가 봐도 어색했다. 자기가 학교 안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하는 의식은 그를 불쾌하게 했다. 호리웰 시절부터 친구이며 똑같은 보좌 신부인 허드슨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언제나 다가와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를 위로해 주었다. 안셀모 밀리가 리더인 그룹은 또 달라서 모두 분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밀리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절대로 궁지에 빠져 있는 너를 괴롭히려는 것은 아니야. 프랜치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우리들 전체의 문제이고 학생 전체의 명예에 관한 일이야. 그래서 우리들은 네가 흉금을 털어놓고 정직하게 말해 주면 네가 얼마나 훌륭한 사나인가 하고 생각할 걸세."
"정직하게 말하라니, 무엇을 말하지?"
밀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을까. 밀리는 일행과 함께 가려고 하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너를 위하여 노베나(9일 기도)를 드리기로 했네.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견딜 수 없는 심정이라네. 너는 나의 첫째가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프랜치스는 그대로 평정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그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그는 교정을 거닐다가도 갑작스럽게 발길을 멈추고는 걷는 것 그 자체가 이번 사건의 원인이 된 것이다,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도 그는 자기도 모르게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타란트나 그 외의 교수들 모두 이미 자기의 존재를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았다. 교실에서 번쩍 정신을 차려 보면 강의 같은 것은 듣지도 않고 있었다.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학장의 호출도 없었다. 긴장감은 점점 심해져 갔다. 이젠 자기 자신을 가늠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자기는 목적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너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없다'고 예언처럼 말해 준 사람들이 결국 진실을 말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결국 프랜치스는 자기는 성직자로서가 아니라 한낱 수도사로서 어딘가 쫓겨 갈 것 같은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리하여 아무도 몰래 기도실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학우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더욱 조심했다. 고메즈 신부가 문의한 회답이 도착한 것은 그후 3일이 지난 수요일 아침이였다. 신부도 그 회답 내용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자기의 계략이 보기 좋게 주효한 것에 크게 만족하면서 당장에 그 편지를 가지고 부학장의 방으로 달려갔다. 타란트 신부가 편지를 읽고 있는 동안 그는 마치 영리한 개가 칭찬하는 부드러운 말을 듣거나 고기가 달라붙은 뼈다귀라도 물고 있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생략
성령 강림절에 문의하신 편지에 대하여 회답 드립니다. 유감천만이오나 문의하신 키가 크고 안색이 창백한 신학생 한 사람이 4월 14일 코사에 틀림없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늦게 그 학생이 로사 오얄사발이라는 여성의 집에 들어갔다가 다음날 아침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 문제의 여성은 독신녀로서 7년 동안 성당을 한 번도 찾아온 일이 없는 인물입니다. 총총. 귀하의 형제인 코사 본당 주임 사제 살바돌 볼라스
고메즈가 실눈을 뜨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떻습니까, 좋은 전략이었지요?"
"으응."
타란트는 험악한 얼굴이 되어 고메즈를 밀어젖혔다. 그리고 뭐 부정한 것이라도 된 듯이 그 편지를 가지고 복도 끝에 있는 학장실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그러나 학장은 미사에 나가고 없었다. 삼십 분쯤 걸릴 것 같았다. 타란트 신부는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질풍처럼 교정을 가로질려 노크도 하지 않고 프랜치스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거기도 텅 비어 있었다. 프랜치스도 역시 미사에 참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그는 놀란 말처럼 자기의 격분과 싸우고 있었으나, 그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하여간 기다리자 하고 무리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그러나 까무잡잡하고 야윈 몸뚱이는 전류라도 통하는 것처럼 경련이 일었다. 프랜치스의 방에는 침대와 옷장, 책상 그리고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의자밖에 없고, 다른 학생의 방보다 몹시 초라했다. 옷장 위에는 괴상한 모자를 쓴 중년 여자가 하얀색 옷을 입은 작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퇴색한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에는 '폴리 아주머니와 노라로부터'라고 씌어 있었다. 타란트는 간신히 냉소를 참았다. 그러나 흰 벽에 딱 하나 걸려 있는 '시스틴 마돈나'의 작은 복사판 사진을 보고는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때 문득 그의 눈길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노트에 멈추었다. 프랜치스의 일기장이었다. 타란트는 다시 놀란 말 같은 발작을 일으키며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눈에는 어두운 불꽃이 타올랐다. 잠시 꼼짝 않고 망설이고 있다가 마침내 그 노트 쪽으로 다가갔다. 그도 신사였다. 야비하게 함부로 남의 비밀을 엿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그 일기 속에 또 어떤 죄악이 숨어 있는지 누가 알 것인가. 그는 냉혹하리만큼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기장을 넘겼다.
......무분별하고 완고하며 비뚤어져 있다고 자기 자신을 말한 것은 성 안토니우스(3, 4세기경 이집트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수도원을 창설한 사람)였던가. 이 말만이 타락의 구렁텅이에 있는 나를 위로해 준다. 만일 여기에서 퇴학을 당하면 이미 그것으로 내 인생은 파멸되고 말 것이다. 나는 참으로 비참하리만큼 비뚤어졌고, 남들처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수도 없고, 남들과 보조를 맞추지도 못한다. 그래서 나는 전령을 다하여 하느님께 마음으로부터 봉사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할 곳이 많다' 하였다! 쟌 다크와 같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그렇다, 온몸에 이가 득실거리는 성 베네딕트 라브레(5,6세기경의 이탈리아의 수도사이며 베네딕트회의 창시자)와 같은 사람도 살 곳이 있었다. 나에게도 틀림없이 살 곳이 없을 것이다!
모두들 나에게 설명하라고들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아니 명백히 수치스러운 일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알의 프랜치스(1567~1622년, 스위스의 카톨릭 주교)는 '나도 하나의 규율을 파괴하기보다는 연자맷돌에 깔려 가루가 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교문을 나갈 때 그런 규율을 생각지도 않았으며 규율을 어길 생각도 없었다. 사람의 의식 속에는 무의식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이렇게 쓰고 있으면서도 나는 나의 죄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나는 가장 두려울 뿐이다.
나는 이미 몇 주일째나 잠을 자지 못하고 이 더운 여름밤을 내내 열에 들뜬 것처럼 전정 긍긍하고 있다. 어쩌면 다른 사람보다도 나는 이곳에 익숙하기 어려운 사람인지 모른다-여러 가지의 해박한 서적을 보면 성직자가 되는 길은 한 걸음 한 걸음 아무런 심로도 없이 매우 즐거운 것처럼 씌어 있다. 아아, 이 괴로움! 얼마나 자기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최소한 친애하는 속인이 알아나 주었으면! 여기에서의 나의 최대의 고통은 폐쇄되어 있다는 느낌, 육체적 무위, 이것이다-그러니까 나 따위가 성직자가 된다면 최하등일 것이다-외부로부터 스며드는 반항과 잡음에 끊임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스물세 살이 된 주제에 아직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불안하여 온몸이 열에 들뜨지 않을 수 없다. 윌리 탈록의 편지는-고메즈 신부의 말을 빌린다면-가장 위험한 흥분제인 것 같다. 윌리도 지금은 훌륭한 의사가 되어 간호사 자격을 얻은 누이동생 진과 함께 타인카슬의 무료 진료소에 근무하고, 빈민가에서 여러 가지로 스릴 있는(필사적인 모험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도 한가하게 있을 수 없고 세상에 나이가 크게 활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절실하게 생각한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무슨 일이나 인내가 필요하다. 이상하게 침착할 수 없는 마음은 네드와 폴리의 편지로 한층 더 그렇다. 이제껏 살던 주점 이층집을 두고 교외의 크라몬트로 아사하여 노라의 딸인 쥬디와 살고 있다고 들었을 때는 참으로 기뻤었다. 그러나 네드가 병에 걸렸고 쥬디는 아주 말을 듣지 않으며, 주점은 길포일에게 맡겨 버린 것 같다. 그와 동업을 한다는 것은 무리다. 네드는 이미 자포자기가 되어밖에 나가지도 않으며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한다. 그 상상할 수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래 완전히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린 것이다. 좀 불순한 사람이었다면 그런 쇼크 정도는 견뎌 낼 수 있었을 텐데. 매일같이 규칙적인 생활이 때로는 큰 신앙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그리운 노라! 그 가냘픈 평범한 인생은 얼마만큼의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가. 타란트 신부는 '유혹에 대항해서'라는 강의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어떤 종류의 유혹과도 싸울 필요가 없다-그러한 것에는 눈을 돌려버리고 피하는 길밖에 없다"고. 내가 코사에 간 것도 그러한 도피였던 것이 틀림없다. 처음 교문을 나섰을 때는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머리까지 갈 작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끝없이 자신을 걷게 한 것은 그 격렬한 동작에 의하여 답답증나는 자기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고 욕구였다. 들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처럼 나는 엄청난 땀을 흘렸다-그 흐르는 것 같은 짭짤한 땀이 인간의 더러움을 씻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는 가벼워지고 마음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쓰러질 때까지 어디까지나 걸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마시지도 먹지도 않고 걸었다. 차츰 저녁때가 되자 바다 내음이 풍겨 오는 것을 보니 아주 먼 곳까지 와 버린 것 같았다. 별이 검푸른 하늘에 반짝이기 시작할 무렵 나는 어느 산마루에 이르렀는데, 그 산밑이 바로 코사 마을이었다. 바닷물이 철썩거리는 깊숙한 후미진 마을, 그 마을을 지나고 있는 곧은 신작로 양옆에 핀 아카시아 가로수는 마치 천국의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발은 부르터서 커다란 물집이 생겼다. 그러나 마을로 내려가니 그 마을은 조용한 어둠에 싸여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작은 광장에는 마을 사람들이 아카시아꽃 향기가 충만한 시원한 바람을 쐬며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앞의 어두컴컴한 곳에서 노인 몇 사람이 공굴리기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물가에서는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고, 아이들은 한데 뒤엉켜 뛰놀고 있었다.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주머니에 1페세타(스페인 화폐 단위)도 없는 것을 알았지만 여인숙 앞 벤치에 걸터앉았다. 휴식이란 얼마나 기분 좋은 것인가. 나는 지쳐 버린 머리가 멍해져 있었다. 그때 갑자기 가로수 밑 어둠 속에서 가타로니아풍의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조용한 밤 분위기에 어울리는 소리였다. 참으로 격조가 높은 이 지방의 독특한 리듬을 들어본 사람이 아니면 그 순간의 기쁨을 도저히 알지 못하리라. 나는 정신없이 그 리듬에 귀를 기울였다. 스코틀랜드인인 나의 핏속에는 피리의 멜로디가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피리 소리와 어둠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빠져 황홀하게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는 물가 모래톱에서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벤치에서 일어서려는데, 바다에서 안개가 일기 시작했다. 그것이 마치 베일처럼 마을을 휩싸 버렸다. 오분쯤 지나자 광장은 수증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가로수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하는 수가 없었다. 마을 신부에게 가서 사실대로 고백하고 하룻밤 잠자리를 애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저쪽 벤치에 앉아 있던 여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아까부터 그 여자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으나 그 여자는 줄곧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국에서 신부에게 보내는 동정과 경멸이 뒤섞인 눈초리로. 그리고 내 기분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노랭이들뿐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정해도 잠자리를 주지 않을 거예요."
그 여자는 서른 살 정도의 수수한 검은 옷을 입고 창백한 얼굴에 눈이 새까만, 좀 뚱뚱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 여자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말을 계속했다.
"당신만 좋다면 우리 집으로 오세요. 비어 있는 침대가 있으니까."
"난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그녀는 안됐다는 듯이 웃었다.
"기도를 해주시면 돼요."
어느 사이에 안개는 비로 변해 있었다. 여인숙은 문을 닫아 버렸다.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사람의 흔적이 없는 광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아카시아 나무 아래 젖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런 데에 있는 것이 볼썽사납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일어섰다.
"나는 가겠어요. 당신도 바보가 아니라면 모처럼의 친절을 베푸는 거니까 오세요."
나의 얇은 제복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추위에 떨고 있었다. 학교에 돌아가서 돈을 좀 부쳐 주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그녀를 따라 좁은 골목을 걸어갔다. 그녀의 집은 그다지 멀지는 않았다. 돌계단을 내려가니 부엌이었다. 그녀는 램프에 불을 켜고 나서 검은 숄을 벗어 던지고 코코아를 불에 올려놓고 화덕에서 빵을 꺼냈다. 그리고 빨간 격자무늬 식탁보 위에 코코아와 뜨거운 빵을 올려놓았다. 맛좋은 냄새가 작고 깔끔한 방안에 가득 찼다. 투박한 컵에 코코아를 따르면서 그녀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식전 기도를 하세요, 그래야 맛이 훨씬 좋아질 테니까."
그 말은 분명히 야유였으나 그래도 나는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먹고 마시고 했다. 기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줄곧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옛날에는 대단한 미인이었겠다고 생각되었으나 아직도 남아 있는 아름다움이 까만 눈동자에 올리브색 얼굴을 한층 엄숙하게 해주었다. 작은 귀에는 묵직한 금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두 손은 루벤스의 마돈나의 손처럼 보송보송했다.
"애송이 신부님, 여기에 오기를 잘했어요. 나는 신부라면 딱 질색이에요. 바르셀로나에선 신부를 만나면 큰 소리로 비웃어 주거든요."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비웃음은 조금도 겁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런 것을 배웁니다. 남에게 비웃음을 사는 것을.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 중에는 언제나 노천에서 설교를 하시고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비웃었답니다. 그 사람을 바보 취급하여 다니엘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요즘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위선자거나 아니면 바보예요."
그녀는 코코아를 천천히 마시면서 나를 의미 있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당신은 바보가 아니에요. 네, 말해 봐요. 내가 당신의 마음에 드나요?"
"당신은 매우 아름답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친절한 것은 내 천성이에요. 나는 무척이나 슬프게 살아왔어요. 아버지는 카스티리아의 귀족이었지만 마드리드 정부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되었어요. 남편은 해군 장교였고 큰 군함의 함장이었어요. 결국 바다에서 죽었지만요. 나는 여배우였지만-지금은 아버지의 재산이 반환되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여기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물론 당신은 이것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죠."
"그야, 물론이지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이것을 농담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약간 얼굴을 붉혔다.
"당신은 참 영리해요. 그렇지만 왜 여기까지 왔는지 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들은 모두 똑같으니까요." 그러면서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말했다.
"어차피 이브 때문에 교회를 단념할 테니까 말이야."
나는 얼른 알아듣지 못했으나 겨우 그 의미를 깨달았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큰 소리로 웃어 주고 싶었지만 여기를 나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빵과 코코아를 다 먹고 일어나 모자를 집어들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참으로 잘 먹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 표정이 싹 달라졌다. 놀랐는지 심술궂은 표정이 씻은 듯이 가셔 버렸다. "역시 당신은 위선자군요."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내가 문 쪽으로 가려고 하자 그녀는 소리를 쳤다.
"가지 말아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에는 덤벼들 것같이 빠른 말로 지껄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무슨 짓을 하건 내 멋대로가 아닌가요. 이것으로 나는 즐거워요. 토요일 밤엔 언제든지 바르셀로나의 카바레에 있으니까 언제든지 오세요. 당신들의 비참한 생활이 참으로 재미있다니까. 자아, 이층에 가서 쉬세요."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도 이번에는 평상시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밖에서 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망설였으나 그래도 좁은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발목이 시큰시큰 아파서 절뚝대자 그녀는 황급히 말했다.
"발을 다쳤나요?"
"괜찮습니다......약간 부르튼 겁니다."
그녀는 속셈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씻어 드릴게요, 내가."
한사코 사양했지만 결국 나는 의지에 앉혀졌다. 그녀는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을 가져 와서 무릎을 꿇고 나의 구두를 벗겼다. 부르터진 살갗에 양말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뜨거운 물에 적셔서 가만히 벗겨 냈다. 뜻하지 않은 그녀의 친절에 나는 어안이벙벙했다. 상처를 깨끗하게 닦고 약을 발라 준 다음 그녀는 일어났다.
"이제 됐어요. 괜찮을 거예요. 양말은 내일 아침까지 말려 드릴 테니까 안심하세요."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이상하게 울적한 어조로 대꾸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나 같은 여자는 고작 이럴 수밖에 없지요."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그녀는 끓는 물주전자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나에게 설교는 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 주전자를 머리에 엎어 씌워 줄 테니까. 침대는 이층에 있어요. 편히 쉬세요."
그녀는 등을 돌리고 화덕 쪽으로 가 버렸다. 이층에 올라가니 창 아래 작은 침대가 놓여 있었다. 나는 눕자마자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 아래로 내려가니 그녀는 부엌에서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아침 식사를 내놓았다. 작별을 할 때 감사의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참으로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신부님이 되기엔 너무나 죄가 없어요. 틀림없이 대실패를 할 게예요."
나는 산 모랄레스의 길로 접어들었다. 발을 절룩거리는데다가 학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그것이 두려워 시간을 허비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타란트 신부는 창가에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살그머니 일기장을 제자리에 놓았다. 그때 이 일기를 쓰게 한 것이 자기인 것을 문득 생각해 냈다. 그는 들고 있던 편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의 얼굴은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험악한 얼굴 표정 대신 깊은 자책감에서 오는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 얼굴에서 관용과 사려 깊음이 넘치기 시작했다. 갈기갈기 찢은 편지를 손에 쥔 채 천천히 자기 가슴을 세 번 두들겼다. 그리고 발을 돌려 그 방을 나왔다. 그가 큰 계단을 내려가려고 할 때에 안셀모 밀리의 건장한 모습이 나선형의 난간 너머 저쪽에서 나타났다. 타란트 신부를 보자 그 모범생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는 부학장을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자기가 상대의 주의를 끄는 것은 더할나위없는 기쁨인 것이다. 밀리는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선생님, 실례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뭐 새로운 일이 있습니까......치셤의 일 말입니다."
"무슨 말이지?"
"저......퇴학이라든가......"
타란트는 불쾌한 얼굴로 안셀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치셤은 퇴학감이 아니야!" 그리고 격렬한 어조로 덧붙였다. "이 바보자식아!"
그날 밤, 프랜치스는 자기가 용서를 받고 퇴학 처분을 면했다는 기적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정신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사환이 소포를 들고 와서 그에게 전했다. 소포에는 흑단에 새긴 훌륭한 몬트세라트(스페인 북동부 카타로니아 산악 지방의 순례지. '슬픔의 성모상'으로 유명함)의 성모상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15세기 스페인의 명장의 유명한 걸작품이었다. 정교한 그 조각에는 아무 편지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때 문득 프랜치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타란트 신부의 방에 기도대 위에 있던 성모상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학장과 마주쳤을 때 비로소 사건의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대단히 모순된 논리였던 것이다.
"이봐, 프랜치스. 무슨 수로 그렇게 쉽게 해결되었지? 그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이 말이야. 내 학창 시절에 무단 결석은 무조건 퇴학이었지. 별 도리가 없었거든......"
그는 날카로운 눈을 반짝거리면서 프랜치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벌로 논문을 써서 나한테 가져오게. 단 길이는 2천 자 내외로 제목은 '산책의 효능'이야."
신학교라고 하는 작은 세계에서는 언제나 벽에 귀가 있고 항상 열쇠 구멍은 악마가 엿보고 있었다. 프랜치스의 무단 이탈 이야기도 점점 널리 퍼져서 어느 사이 조금씩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달될 때마다 꼬리를 하나씩 달기 마련이다. 훌륭한 다면체의 보석 마냥 그것은 하나의 고전으로서 이 신학교의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고메즈 신부는 상세한 점까지 조사하여 친구인 코사의 사제에게 사건 경위를 적어 보냈다. 볼라스 신부는 매우 감격하여 곧바로 다섯 페이지나 되는 답장을 보내 왔다.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최대의 귀결은 마땅히 로사 오얄사발이란 여성의 귀의에 있다고 봅니다. 그 여성이 청년 사도의 방문으로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다른 여자 친구와 바로셀로나에서 술집을 시작했으며, 더구나 그 술집이 대단히 번창하고 있는 것을 보고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