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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9호 - 2024.10.21. 월요일(음력 : 9.19.)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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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은 가장 늦게 하는 사람이 가장 잘 지킨다. - 장 자크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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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명사의 띄어쓰기 (2)
의존명사로도 쓰이고 어미로도(정확히는 어미의 일부로도) 쓰이는 말들이 있다. ‘지’와 ‘데’가 그런 말들인데, 의존명사라면 띄어 쓰고 어미라면 붙여 써야 한다. 두 경우를 구분하려면 어떤 말들과 잘 어울리는지, 또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지’가 ‘어떤 일이 있었던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동안’, 즉 ‘시간’과 관련된 뜻으로 쓰인 경우에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쓴다. 이때는 주로 ‘~한 지’와 같은 형식으로 쓰인다. (집을 떠나온 지가 3년이 흘렀다. /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어미를 잃은 강아지)
‘-지’가 막연한 의문과 관련된 뜻으로 쓰인 경우에는 어미의 일부이므로 앞말에 붙여 쓴다. 어미의 일부라는 말은 ‘-지’가 그 자체로 어미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는지, -은지, -던지, -ㄴ지’ 등과 같은 어미의 부분이라는 뜻이다. (아이들이 얼마나 떠드는지 책을 읽을 수가 없다. / 누구 말을 믿어야 옳은지 모르겠다. / 얼마나 춥던지 손이 곱았다. / 그는 얼마나 부지런한지 세 사람 몫의 일을 해낸다.)
‘데’가 ‘곳, 일, 경우’ 등의 뜻을 나타낼 때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쓴다. 대개 ‘~하는 데, ~할 데, ~하던 데’와 같은 형식으로 쓰인다. 조사와의 결합이 자연스러운 것을 보아도 의존명사임을 알 수 있다. (예전에 가 본 데가 어디쯤인지 모르겠다. / 손님을 대접하는 데만 쓰는 그릇.)
뒤에서 다룰 내용과 관련되는 상황을 말하는 경우에 쓰는 ‘-데’는 ‘-는데, -은데, -던데, -ㄴ데’와 같은 어미의 일부이므로 붙여 쓴다. (자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가구는 많은데 방이 너무 좁다. / 요새 결석을 자주 하던데 무슨 일 있니? / 그곳은 내 고향인데 경치가 참 좋아.)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아저씨
뜻이 하나인 낱말도 자주 쓰이다 보면 이런저런 언어 환경의 영향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이렇게 되면 확장된 의미와 원래의 의미를 구별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확장된 의미가 원래의 의미처럼 행세할 수도 있다. 그런 말 중 하나가 ‘아저씨’다.
[큰사전](1957)에는 ‘아저씨’가 “부모와 한 항렬되는 사내”로 풀이되어 있다. 그런데 [새우리말큰사전](1974)에 뜻 하나가 추가된다. “친척 관계가 없는 부모와 같은 또래의 ‘젊은 남자’에 대하여 주로 어린이들이 정답게 부르는 말”. ‘아저씨’의 의미가 친족 명칭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 이후 사전에선 ‘어린아이의 말’과 ‘젊은’이란 설명이 빠진다. 결국 [고려대한국어대사전](2009)에는 “혈연관계가 없는 남자 어른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 ‘아저씨’의 첫 번째 뜻으로 기록되기에 이른다. ‘아저씨’가 나이든 남자를 예사로이 부르는 말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저씨’는 실질적으로 친족명에서 이탈한다. 아저씨를 ‘당숙’으로 부르다 보니 나이 차가 적은 아저씨를 부르는 말인 ‘아재’도 자리를 잃었다.
친족명에서 이탈한 ‘아저씨’의 추락은 가파르다. 이젠 남자 어른을 ‘아저씨’로 부르는 것조차 망설여지고, ‘아재’는 ‘아재 개그’나 ‘아재 취향’ 등의 말 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 ‘나이 들고 뒤떨어지고 뻔뻔한 남자’의 의미에까지 근접하는 ‘아저씨’의 추락 속도는 그 대응어인 ‘아주머니’를 앞지른다. 이 상황에서 등장한 ‘개저씨’(몰지각한 아저씨). 그렇다면 이제 ‘아저씨’는 부정적 의미를 ‘개저씨’에게 넘길 수 있을까? 그러나 ‘개저씨’를 부름말로 쓸 수는 없으니 ‘아저씨’는 당분간 지금의 ‘아저씨’일 수밖에 없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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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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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리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리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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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찬가(家屋讚歌) - 김수영
무더운 자연 속에서
검은 손과 발에 마구 상처를 입고 와서
병든 사자처럼
벌거벗고 지내는
나는 여름
석간에 폭풍예보를 보고
배를 타고가는 사람을
습성에서가 아니라 염려하고
삼년전에 심은 버드나무의 악마같은
그림자가 뿜는 아우성소리를 들으며
집과 문명을 새삼스럽게
즐거워하고 또 비판한다
하얗게 마른마루틈 사이에서
들어오는 바람에서
느끼는 투지와 애정은 젊다
자연을 보지 않고 자연을 사랑하라
목가가 여기 있다고 외쳐라
폭풍의 목가가 여기 있다고 외쳐라
목사여 정치가여 상인이여 노동자여
실직자여 방랑자여
그리고 나와같은 집없는 걸인이여
집이 여기 있다고 외쳐라
하얗게 마른 마루틈 사이에서
검은 바람이 들어온다고 외쳐라
너의 머리 위에
너의 몸을 반쯤 가려주는 길고
멋진 양철 채양이 있다고 외쳐라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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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보며 - 이해인
고개가 아프도록
별을 올려다본 날은
꿈에도 별을 봅니다
반짝이는 별을 보면
반짝이는 기쁨이
내 마음의 하늘에도
쏟아져 내립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혼자 일줄 아는 별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는 별
나도 별처럼 살고 싶습니다
얼굴은 작게 보여도
마음은 크고 넉넉한 별
먼데까지 많은 이를 비추어 주는
나의 하늘 친구 별
나도 날마다
별처럼 고운 마음
반짝이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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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16~20) - 이해인
봄꽃들의 축제 - 이해인
16
참된 사랑 안에선 누구나 가족이 됨을 느낀다. 나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가끔은 아기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해서 지어 준 고운 이름들 - 시내, 단비, 은비, 서인, 이슬, 보리, 아린, 수아 등을 불러 보며 기도 안에 아기들을 자주 안아 준다. 아직다 자라지도 않은 머리에 아증스런 꽃핀을 꽂아 찍어 보낸 아기의 사진들을 보면 내가 그애들의 대모가 된 듯한 마음이다. 언젠가 나와 같은 이름의 딸을 가진 시인 승희가 `수녀님은 우리 아이의 `엄마 요정(fairy-godmother)` 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어린 딸을 위해 기도해 주시겠어요?` 라고 써 보낸 편지의 한 구절도 떠오른다. 아직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으로 가깝게 이어지는 고운 인연이 많음을 오늘은 새삼 고마워한다.
17
어느 날 “눈이 빠지게 널 기다렸다”고 내게 눈을 흘기며 마실 물을 건네 주던 고운 친구야,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안에서 찰랑이는 물소리를 내는 그리운 친구야. 네 앞에서만은 항상 늙지 않은 어린이로 남아 있고 싶다. 내가 가끔 싸움을 걸어도 싸움이 되지 않는, 넓은 대지 같은 친구야. 네가 가끔 `돌깍쟁이` 라고 부르는 나도 네 앞에서만은 늘 솔직하지 않을 수 없다. 네 앞에서만은 피곤하고 목마르다는 투정도 좀 부리고 싶다.
18
내가 세상을 떠날 때는 너를 사랑하던 아름다운 기억을 그대로 안고 갈 거야. 서로를 위해 주고 격려하며 설레임으로 가득했던 그 기다림의 순간들을 하얀 치자꽃으로 피워낼 거야. 사람은 가도 사랑은 영원할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졸음이 막 쏟아질 때 들어가 누리는 달콤한 잠의 나라에서처럼 네가 내 곁에 있으면 아무 말 안해도 편안하고 넉넉하구나. 모든 시름을 잊고 행복할 뿐이구나. 진정 우리의 우정은 아름다운 기도의 시작이구나. 친구야.
19
이른 아침에 몹시 힘이 들고 무거울 때마다 창 밖에서 나를 깨우는 새들의 가벼움이 부럽다.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가 다른 이의 무게를 덜어 주기엔 서로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힘이 없는 것 같다. 우선은 자기가 밝고 건강해야 남에게도 기쁨과 위로를 줄 수 있는게 아닐까?
20
물 속이 잘 보이게 해를 등지고 선 해오라기처럼 나도 오늘은 해를 등지고 서서 강물을 바라보네. 아무 생각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쁨이 되는 강물. 나 역시 강물 같은 사랑으로 여기까지 흘러왔음을 강물이 조용히 말해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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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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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 박민호
어머니 저는
하늘이 되고 싶어요.
하얀 구름다리에서 방패연과 함께 뛰노는,
아이들 마음 속에서 새 세상을 내다보는
무지개 빛 꿈동산이 되고 싶어요.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코흘리게 어깨동무들이 뛰노는,
몸이 가난하기에
마음과 마음으로 얹혀 살아가는
달동네 하늘이 되고 싶어요.
비오는 날, 까막까치들이 어깨동무로 만든 다리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할머니 목소리가
마음에서 쟁쟁 울리는
이야기 하늘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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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 이주홍
산
산
깊은
산
한밤같이
고요한
산
별안간
탕! 하는
한 소리에
벼락같이 튀는
사슴 한 마리
있었던가
했더니
산은 이내
소리를
삼키고
또다시 깊은
잠 속에
오므라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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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외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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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에게 바치는 송가(頌歌) - 네루다
아침마다 너는 기다린다.
옷이여, 의자 위에서
나의 허영과 나의 사랑과
나의 희망, 나의 육체로
너를 채워 주길 기다린다.
거의 꿈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물을 하직하고
너의 소매 끝으로 들어간다.
나의 발은 너의
발의 빈 구멍을 찾는다.
그렇게 해서
나는 너의 지칠 줄 모르는 성실성에 힘입어
목장의 풀을 밟으러 나온다.
나는 시 속으로 들어간다.
창문으로
사람들을 바라본다.
남자들, 여자들
사실들과 싸움들이
나를 이루어 간다.
나와 맞서서
나의 손을 만들고
나의 눈을 뜨게 하고
나의 입이 닳도록 한다.
그렇게 해서
옷이여
나도 너를 이루어 간다.
너의 팔꿈치를 빼고
너의 실을 끊고
그렇게 해서 너의 일생은 나의 일생의 모습으로 성장해 간다.
바람에
나부끼고 소리를 낸다.
나의 영혼처럼.
불행한 순간에는 넌 나의 뼈에 붙는다, 밤이면 텅 비는 나의 뼈
어둠과 꿈이 도깨비 모습을 하고
너의 날개와 나의 날개를 가득 채운다.
나는 어느 날
어느 적의
총알 하나가
네게 나의 핏자국을 남기지 않을까
걱정해 본다.
또 어쩌면
일은 그렇게 극적으로 벌어지지 않고
그냥 단순하게
네가 차차 병이 들어가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옷이여
너는 나와 함께
늙어 가며
나와 나의 몸과 함께
같이 살다가 같이 땅 속으로
들어가리라.
그래서
날마다
나는 네게 인사를 한다.
정중하게. 그러면 또 너는
나를 껴안고 나는 너를 잊어도 좋다.
우리는 결국 하나니까.
밤이면 너와 나는
바람에 맞서는 동지일 것이고
거리에서나 싸움터에서나
어쩌면 어쩌면 언젠가 움직이지 않는
한 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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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의 감성사전
정오
도시의 광장 시계탑이 그림자를 발밑으로 불러들이고 시계가 모든 바늘을 열 두시 정각에 합체시키면 바람이 숨을 죽인다. 고양이의 눈꺼풀이 가라앉는다. 정오다. 꽃들은 가장 눈부신 자태로 그 환희를 드러내고 숲들은 묵상에 잠겨 먼 강물 소리를 듣고 있다. 하루 한번씩 태양의 해탈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시각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대부분 그 시각에 배를 채울 궁리나 하는 것이 고작이다.
시간
탄생과 소멸의 강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강에서 태어나고 그 강에서 죽는다. 그러나 흐르지는 않는다. 흐르는 것은 시간의 강이 아니라 그 강에 빠져 있는 물질들이다.
모래
주로 해변에 많이 산재해 있는 최소 단위의 금빛 혹성
그림자
언제나 무심지경에 빠져 있는 실체들의 참 모습이다,
생노병사, 희노애락에 걸려들지 않는다.
빛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실체를 떠나지 않는다. 모든 형태와 동작을 실체가 갖추고 있는 대로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실체가 아무리 높은 신분을 가진 인격체라 하더라도 그림자는 그 계급장까지를 반영해 주지는 않는다.
명예박사
자신이 진짜 박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학이나 학술단체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람
가난뱅이
빈곤을 재산으로 삼아 경제를 꾸려 가는 생활인. 어리석음이 밑천인 가난뱅이와 무소위가 밑천인 가난뱅이로 대별된다. 전자는 가난을 불행으로 생각하여 물질에 대한 탐욕을 키우고 후자는 가난을 수행으로 생각하여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린다. 그럼으로써 결국 가난에서 모두 탈피하게 된다. 그러나 진실로 성공한 가난뱅이는 가난에서 탈피하는 순간 신이 자신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려 했던가를 명확히 알게 된 사람이다.
식인종
인구증가와 식량증가를 동일시하는 종족
불만
불연소된 욕심의 찌꺼기다. 성냥개비 한 개만한 능력으로 대궐 만한 집을 지으려 드는 사람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말씀의 진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감정이다. 가열되면 증오로 변하거나 배반으로 변한다. 그러나 불만이 없으면 개선도 없다.
고성방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자신은 훌륭한 가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취중에 만인에게 발악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행위. 외로움과 소외감의 또 다른 표현. 비틀거리는 인생에 대한 절규. 소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 불필요성을 타인에게 확실하게 알리는 행위.
총알택시
승객과 기사를 장약하여 죽음을 향해 발사되어진 지상용 교통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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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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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2-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영화관에 대하여
장편 소설을 쓰는 작업이 간신히 마무리되고, 교정쇄의 교정도 다 보고, 그 다음은 책이 출판되기를 기다리는 일뿐인 때가 내게는 가장 마음이 즐겁고, 또 평온한 시기이다. 쓰고 싶은 것은 일단 다 썼고, 서둘러 해야 할 일도 없고 해서 - 라고 말하면서 때로는 생활을 위하여 이런 원고를 쓰기는 하지만 - 멍하니 봄볕을 쬐며 고양이와 함께 툇마루에서 놀고 있다. 나는 자신이 쓴 글이 활자가 되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도무지 그 다음 소설에 착수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몇 개월쯤은 싫든 좋든 간에 빈둥거리며 지내게 된다. 이런 하강 기류와도 같은 공백 기간에는 대개 일괄하여 영화를 본다. 최근에는 비디오 소프트도 많이 보급되어 있어 나도 곧잘 대여점 신세를 지는데, 이렇게 한가할 때는 역시 전철을 타고 영화관까지 출두하여 캄캄한 어둠 속에서 스크린은 노려보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생맥주 집에서 한 잔 하는 게 상수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한, 마누라가 '저 말이죠, 지금 저 다이안 키튼이 입고 있는 스커트 멋있지 않아요?' 라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일도 없고, '잠깐 좀 되돌려 볼래요, 저 플로어 스탠드 비쌀 것 같죠'하는 일도 없다. 플로어 스탠드가 비싸든 말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
이번 봄에도 그런 연유로 정말 영화를 많이 봤다. <듄 모래의 혹성>을 보고, <2010년>을 보고, <터미네이터>와 <리틀 드러머걸>을 보고, <네버 엔딩 스토리>를 보고, <아마데우스>를 두 번 보고, <사랑에 빠져서>와 <슛 더 문>을 보고, <베스트 키드>를 보고, 바빠서 놓치고 말았던 <바디 더블>과 <젊은 사자들>(이 영화는 <에스콰이어> 선정 1984년 워스트 필름)을 재개봉관에서 보충하고, 오래간만에 방화도 보고...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봤다. 이런 정도로 연달아 영화관 출입을 하고 나면 과연 영화를 봤다 싶은 보람 같은 게 느껴진다. 영화라는 것은 의자에 턱 앉아 머리를 텅 비워 놓으면 제편에서 제멋대로 쓱쓱 앞으로 나아가 주니 무척 편하다. 그게 연극이나 콘서트 같으면 '오늘은 좀 흥이 덜 나는 게 아닌가'라든지, '어디 불협화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든지, '박수는 이 정도면 될까'라든지 하고, 그 나름으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니까 머리를 텅 비우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까 내 쪽의 기분이 낙하해 있을 때는 아무 해가 없는 헐리우드 영화를 멍청하게 보고 있는 게 제일이다. 자극을 받거나 하면 오히려 불쾌해지는 일마저 있다. 이번에 본 영화는 그 어느것이고 비교적 재밌고, 신랄한 자극을 받는 부분도 없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트루먼 캐포티는 그의 소설 중에서 영화를 종교적 의식에다 비유하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그런가 싶기도 하다.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홀로 댕그마니 스크린과 대치하고 있으면, 웬지 자신의 혼이 어떤 잠정적인 장소에 보류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몇 번이고 계속하여 영화관을 드나드는 사이에 그런 기분이 자신의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하고 여겨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게 소위 시네마딕트(영화 중독)라는 건가. 내게도 과거에 그런 시기가 있어, 그 당시에는 거의 매일처럼 영화관에 다녔다. 바로 학원 분쟁으로 소란스러웠던 무렵으로 강의 따위 없는 거나 다름없었으므로, 내 방과 아르바이트 하는 가게와 영화관이라는 트라이앵글을 뱅글뱅글 맴돈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매일 매일 새로운 영화를 볼 수 있을 만큼 개봉되어 있는 영화 수가 많지 않으니까 결국 같은 영화를 몇 번 거듭해 보거나, 도저히 구제불능인 B급 C급 영화를 뼈다귀라도 쪽쪽 빠는 기분으로 보게 된다. 그러고 있노라며 꿈 속에서 MGM의 심볼 마크인 사자가 어흥하고 울기도 하고, 토에이의 파도가 부서지기도 하고 20세기 폭스사의 라이트가 커머셜과 함께 회전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이런 정도까지 되면 그야말로 완전한 병이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소위 '명작'이라고 하는 영화보다는 볼거리가 없어 할 수 없이 거듭해 본 영화나, 명명백백하게 내용이 없는 작품 쪽이 훨씬 더 기억에 착 달라붙어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별내용이 없는 B급 C급 작품은 소위 '명작'이라고 하는 영화와는 달리 자신이 어떻게든 좋은 부분을 찾아내려고 애쓰며 보지 않으면 순전히 시간 낭비다. 그래서 그런 긴장감이 그대로 가슴 속에 뚜렷하게 새겨져 먼 훗날이 되어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한마디로 영화라 하지만 보는 방법에는 실로 여러 가지가 있다. 이번에 본 필름중에서 그렇게 B급 C급 영화 감상의 묘미를 맛보게 해 준 영화는 뭐니뭐니 해도 존 밀리어스 감독의 <젊은 사자들>이다. 모두들 이 영화를 두고 호전적이니 황당무계하니 하는데,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꼼꼼하게 보면 제법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생각한 것은, 미국이 소련과 쿠바의 연합군에게 침략, 점령당한 데 대하여 미국의 소년들이 게릴라전을 펴며 저항한다는 상황 설정인데, 이 상황은 생각해 보면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인의 입장과 위치 관계가 정반대로 역전되어 있는 셈이다. 물론 상황 설정 자체에 상당히 무리가 있어, 작품 자체로서는 지리멸렬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끈질기고도 강인한 반전 영화로 해석될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없는 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타입의 영화를 비교적 좋아한다.
- 그 후, <젊은 사자들> 비디오 테이프를 사서 새로이 보았지만, 역시 그렇게 나쁜 영화는 아니었다. <록키4>나 <람보2> 같은 훨씬 노골적인 반공 영화가 출현한 지금은, 어떤 장면에 있어서는 품위롭게까지 비춰진다. 밀리어스가 너무 일찍 나타난 게 아니었을까.
- 이 글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출판되기를 기다리는 중에 씌어진 글인 모양이다.
왜 나는 이발관을 좋아하는가
요즘늬 젊은 남성들 대부분은 유니섹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르는 모양인데, 나는 옛날 그대로의 이발관을 애호하는 편이다. 도대체가 개성이 없는 천편일률적 머리 스타일로 만들어 놓는 다는 까닭도 있지만, 미용실에 가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여자 손님들 옆에 앉아 여자 미용사가 내머리를 감겨 주고, 이리저리 깍아 주고 하는 게 아무래도 불안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머리카락에 세트를 말고 있거나, 안면도를 하고 있거나, 건조기를 뒤집어 쓰고 넋 빠진 얼굴로 주간지를 읽고 있는 여성의 모습을 보는 것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훨씬 이전부터 그런 것들이 신경에 거슬리던 터라, 몇몇 여자를 붙잡고는 '미용실에서 옆자리에 남자가 앉아 있으면 이상하지 않아?' 하고 물어 봤더니 그녀들 역시 일단은 '응,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줄곧 남녀 공학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여자와 동석을 하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저항감이 없지만, 머리를 자르는 일에 관한 한 남녀 따로따로 쪽이 편하다. 그래서 예의 꽈배기 과자 같은 간판이 서 있는 동네 이발관을 내내 애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일 뿐, '남자는 모두 이발관에 가야 한다'는 확고한 주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만약 그렇게 되면 이발관이 북적거려 안된다. 미용실레 가고 싶은 사람은 사양말고 미용실로 가 주세요.
개인적인 애기를 하자면- 이라니 이 연재에서는 개인적인 일밖에 쓰지 않는데- 내단골 이발관은 센다가야에 있다. 나는 지금 후지사와에 살고 있으므로, 두 달에 세 번꼴로 오타큐선의 로맨스 카(오타큐선은 신주쿠와 오타와라를 잇는 전철. 그중 로맨스 카는 특급급행 열차로 친절한 서비스로 인기가 높다.)를 타고 센다가야까지 머리를 깍으러 간다. 이래저래 편도에 한 시간 반은 걸리니까, 세월이 좋다면 좋은 거고, 유별나다고 하면 유별난 얘기다. 후지사와에 살기 전에는 나라시노에 살았는데, 그때도 역시 편도에 한 시간 반이나 들여가며 지금의 이발관에 다녔다. 하지만 소부선 쾌속보다는 오타큐선의 로맨스 카쪽이 운치도 있고, 값도 싸고, 애플 티도 마실 수 있어 내게는 지금이 훨씬 편리하다. 나라시노로 이사하기 전에는 그 이발관근처에 살았다. 그러니까 그럭저럭 팔 년이나 같은 곳엘 다니는 셈이다. 어째서 그렇게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면서도 끈질기게 이발관은 같은 곳을 고집하는가 하면, 다른 이발관에 가는 게 매우 귀찮기 때문이다. 다른 이발관에 가면 여러 가지 사항들을 처음부터 일일이 다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나는 회사원이 아니니까 그다지 단정한 머리 모양을 할 필요도 없고, 삼 주에 한 번은 머리를 자르니까 그렇게 짧게 깍을 필요도 없다는 기본적인 방침을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고는 세부적인 설명으로 옮아가, 귀 위는 어느 정도 길이로 하고, 가리마는 어디쯤에 있으며, 수염은 깍지 말고, 매일 아침 머리를 감으니까 샴푸질은 대충 한 번이면 족하고, 헤어 리퀴드는 필요없고... 하고 설명을 하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지쳐 축 늘어지고 만다. 게다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설명한대로 깍아 준다는 보장도 없다 - 고 할까, 아니 전혀 설명한대로 깍아 주지 않는다. 특히 지방 도시의 경우는 정도가 심해서 대개는 국민 학생처럼 뒷머리를 바싹 쳐 놓고 말아, 사나흘간은 의기소침해져 집 안에 처박혀 있게 된다. 이런 경우는 참으로 막막하다.
그 반면 단골 이발관에 가면, 문을 열고 들어가 '안녕하세요'하고 한마디만 하고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하면, 그 나머지는 끄덕끄덕 졸고 있어도 여느 때와 다름없게 빈틈없이 깍아 준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이발관의 조건, 그 첫째는 이발사 아저씨가 들락날락 자주 바뀌지 않는 것이다. 어쩌다 갈 때마다 이발사가 바뀌는 이발관이 있는데, 그래가지고서야 손님 쪽도 신뢰감이 없어지고, 그럴 때마다 다시금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단골 이발관을 만드는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발사가 자주 바뀌지 않는 이발관은 그 나름의 안정된 분위가가 있고, 태도도 침착하다. 이 점은 생선 초밥집 요리사와 마찬가지다. 두 번째는 수다스럽게 말을 걸지 않은 것이다. 전혀 얘기를 하지 않는 것도 따분한 일이지만, 나는 이발관에서는 멍하게 있는걸 비교적 좋아하는 편이라, 말을 너무 많이 걸면 피곤해진다. '벌써 봄이로군요' '따뜻하지요' '벚꽃 놀이는?' '아니요, 바빠서요' 정도가 이상적이다. 나의 단골 이발관에는 조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가끔가다 경주 얘기를 짤막하게 나누곤 한다.
세 번째는 좀스런 라디오 프로그램을 틀어 놓지 않는 것이다. 요즘엔 오후 시간대에 주부를 상대로 한 야한 프로그램이 유독 많아, 그런 프로그램을 듣고 있으면 정말이지 피곤하다. '우리 남편은 말이죠, 내가 부엌에서 설거지 같은 걸 하고 있으면 언제나 등 뒤에서 치마 속에다 손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렇지만 나도 싫어하는 편은 아니라서...'하고 주절거려대면 머릿심지가 흔들흔들한다. 요즘 주부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걸까? 정말은 NHK FM의 '오후의 클래식' 같은 프로그램이 흐르면 이상적이겠지만, 뭐 이발관에서 브라암스를 듣는다는 것도 약간은 속물 같으니가, NHK 제1방송쯤이 바람직하겠다. NHK라디오 같은 건 이발관에서나 들을 수 있고,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제법 재밌기도 하다. 적어도, '세상은 넓고도 넓구나' 싶은 기분이 들어 감회가 깊다. 퍼시 페이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푸른 산맥>은 아오야마에 있는 미용실에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아침 열한 시 반경에 하는 소설 낭독도 이발관 의자에서 듣기에는 적격인 품위있는 프로그램이다.
- 지금은 더욱 멀어져 편도 두 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변함없이 같은 이발관에 다니고 있습니다. 퍼시 페이스의 <푸른 산맥>에는 도중에 격조 높은 포 버스의 응수가 끼어 있기도 하여, 상당한 열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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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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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24장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
죽음이란 결국은 사람들 각자에게 합당한 이름과 안식을 선사하는 법이지만, 그것이 마키아벨리에게 처음으로 가져다준 것은 무자비한 공격과 오명 분이었다. 불운은 그의 생애를 통해 그렇게도 그를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마치 화형주처럼 그 피곤한 영혼의 유해를 활활 태우고 있었다. 시대의 배경은 바르게 바뀌었고, 반면 인간의 본성은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렌체의 서기장은 (비록 위대했지만 동시에 불운했기 때문에 죄악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한 교황의 은총과 특권으로 인쇄되었던 그 불멸의 저작들은 이제 다른 교황에 의해 탄핵을 받고 금서화되었다. 반마키아벨리즘의 아버지이자 자식인 그 악명 높은 (마키아벨리즘)은 프랑스 땅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는 언젠가 프랑스인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말했던 그 사람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때 어떤 찬사도 충분치 않다고까지 얘기되었던 그 이름이 이제 와서는 모욕과 경멸이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명사, 형용사, 동사, 부사들이 만들어졌다. 나아가 그 이름을 둘러싸고 악마 연회의 분위기를 풍기는 하나의 전설이 형성되었다.
한 사람이 어떤 과학적 발견을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스스로의 야심을 채우는 데 이용하거나 또는 그것을 빙자하여 전혀 칭송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발견자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 것이 마치 정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 사악한 과학의 법칙들을 탐색하고 그것을 만천하에 알린 책임은 마키아벨리에게로 쏠렸다. 또 그의 저작들을 공부하고 그것을 칭송한 사람들의 행동까지도 모두가 그의 탓으로 돌려졌는데, (가장 최근의 폭정들을 제외하고라도) 나폴레옹 1세가 그 한 보기이다. 그 역시 (한 명의 신군주)였던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부당한 오명이 그토록 오래 지속되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 마키아벨 리가 마침내 자신의 시대를 맞아, 이전에는 위대하지만 차갑고 비인간적인 저술가로 취급당했던 바로 그곳에서, 민족의 부흥과 함께 열정적이며 고결한 인물로서 되살아난 그때에조차도, 그 동안의 편견들은 단지 진정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통치자의 폭정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편견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파스콸레 빌라리처럼 훌륭한 제일급의 전기 작가가지도 그 오랜 죄악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언제나 그에게서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피스텔 리가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그는 (비록 자신의 주인공을 칭송하고 있으며 또한 언제나 최선을 다해 그를 변호하려 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것이다. 반면에 나는 그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를 변호하기보다는 이해하고, 한 인간으로서 그가 겪은 역경들 속에서 그에게 가가이 다가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오늘날에는, 그를 가리켜 (사악한 천성)을 가졌다고 한 카포니의 말을 감히 되풀이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분명코 그 (절망적인 경구들의 잔인함)은 틀림없이 산 세바스티아노 가의 대저택에서는 너무나 시큼한 맛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나 역시 그곳에서 초년을 보냈고 같은 공기를 호흡하였다. 부디 솔직 담백한 지노 아저씨께서 이 어긋나는 조카의 말들을 용서하시기를! 그 시대에 또 그런 집에 살면서 달리 생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조차도 철학자들은 마키아벨리의 철학에 관해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 좀더 잘 알고 있다. 즉 일부 철학자들이 마침내 인정했듯이, 그런 인물은 분명히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시종일관 정치가이자 예술가였고 아울러 시인이었다. 그는 과학적 판단력과 함께, 예술가와 시인의 즉각적이고도 다기다양한 충동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어느 때부턴가 마키아벨리의 수수께끼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던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사상이 지닌 근본적 논리와 일관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충동적 열정과 함께 모순되면서 복잡다단한 그의 기질 또한 반드시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미 이 책 앞부분에서 그의 성격을 나 자신이 말로써 묘사해 보려고 했던 바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바로 서기장 자신이 또 하나의 위대한 피렌체인에 대해 섰던 그 말을 빌려 그의 성격을 표현해 보는 쪽이 더 낫겠다. (그의 내부에는 두 개의 다른 인격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절망적인 경구들)에 대해,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에서 모든 외적 맥락들을 애써 잘라낸 채, 단지 순순하고 견고한 과학적 명제로 생각하도록 배워왔다. 그것은 국가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부과된, 도저히 물리칠 수가 없는 어떤 가혹한 필요성의 표현인 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키아벨 리가 종종 (stato)란 말을 (patria)의 뜻으로 쓰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stato)란 국가, 정권, (patria)란 조국, 교향이라는 뜻-옮긴이). 더욱이 (리비우스 논고)와 (군주론)에는 (조국이야말로 마키아벨리적 도덕성의 한계이자 기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다수 있을 것같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도덕성에 대한 관념을 지니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하며, 그의 저작들 속에서 (엄격함과 함께 고통스런 도덕적 양심의 명확한 징후들)을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윤리학을 가리켜 (높고 원대하다 d'alta montagno)라고 규정한 경우가 있었다. 이 말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미적인 종류가 아니라 어떤 의미 표출적인 종류일 것인데, 우리는 이를 그의 종교에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가 국가에 관한 이론화 과정에서 종교를 거의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까지 만들면서 그것을 국가에 적응케 하려 했다는 생각이 논리적으로 보인다. 다음과 같은 말처럼 말이다. (모든 형태의 인간 활동은 그것이 행해지는 과정에서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강화할 힘을 얻는 법이다.) 하지만, 그 엄격하면서도 격노의 화염에 휩싸이기 쉬운 반종교개혁의 시대에, 마키아벨리의 사상이라는 전체 구조물로부터 어떤 문구들을 따로 떼어내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런저런 예배의 방식들에 대한 피렌체 서기장의 냉담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기 자신까지도 스스로 비방하는) 인물에 의해 과장적으로 표출된 수많은 조롱 조의 농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로마 교회의 부패 때문에 신앙심과 이탈리아가 파멸에 이르렀으며 (하늘이 무장해제당했다)고 비난한 그의 유명한 조소 띤 구절들을 그러한 경구들과 연관시키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산더미 같은 편견들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적 윤리의 대담성에 의해 야기된, 그렇지 않아도 이미 커다란 오해와 스캔들의 더미를 더 키워놓았다. 이렇게 해서 몇백 년의 세월이 흘러가자, 편견의 더미들은 층층이 싸이고 다져져서 피렌체 서기장의 종교적, 그리스도교적 양심은 그 밑에서 형체도 없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편견은 그 무게와 힘이 대단한 데다 더욱이 시간이 흐름 속에서 굳어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는 그 저자의 그리스도교 사상이 절정에 이른 것이라 보고 나의 경우는 인간적으로 고통당한 한 인생의 봉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참회 권유)이 그 경건하고도 서글픈 내용에 대해서조차, 평소에는 그의 도덕성과 신앙심을 옹호해 마지않던 가장 명석한 현대의 학자들까지도 그것을 번잡스런 농담 조의 이야기 정도로 치부해 오지 않았던가!
마키아벨 리가 만년에 이르러 (그 위대한 인물)에 대해 썼던 존숭의 말들도, 그의 사신과 시구들에 담긴 불경함과 경멸조의 반사제주의적 태도를 잊게 만드는 데는 결코 충분치 못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앙 원래의 순수성을 보존해 온 민족들에 대한 그의 특별한 애정도, (그리스도의 삶을 귀감으로) 그 뒤를 따른 사람들과 (성프란체스코의 발자취를 좇았던) 사제들과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병사들에 대한 그의 칭송도, 그 굳어진 편견들을 제거하는 데는 오랫동안 충분치 못했다. 어느 것도 충분한 것이 없었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주목한 극히 미묘한 측면들 역시 편견을 바로잡기에는 아마도 충분치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란 미묘한 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보다 가면을 보여 그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그들은 결코 그 밑에 있는 진면목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것으로도 충분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그리스도교적 본질)과, 그의 저작 어디에나 스며들어 있는, 내적 종교성에 기반한 양심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 다음과 같은 말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신앙심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종류의 선을 기대할 수 있는 반면, 그것이 없는 곳에서는 그 반대의 모습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와 비슷한 경구들은 그의 글 속에서 많이 보이는데, 실제로 지난 세기에 신자들ㅢ 교화를 목적으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서 충실히 추출한 종교적 경구 선집 Massime religiose estratte frdelmente dalle opere di Niccolo Machiavelli)이란 책을 편찬한 사람이 있었다. 이 괴상한 선집은 현대의 몇몇 변명론자들의 글들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너무나 기세 좋게 안장 위로 뛰어오르다가 오히려 말 저편으로 나가덜어져 버리는 기수를 연상케 한다. 변명론자들이란 가장 무자비하게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해로운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이 (아직까지 누구도 지나가지 않았던) 길을 택함으로써 방향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마키아벨리의 예언과 선량한 필리포 다 카사베키아가 (유대인들 또는 다른 민족의 후예들에게서나 봄직한 가장 위대한 예언자의 모습)을 서기장에게서 발견했노라며 농 반 진 반으로 썼던 말들을 되새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는 예언자였으나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였고, 자기 스스로가 한때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며 밀어넣었던 그 운명의 구렁텅이에 그 또한 빠져들었다. 물론 화형주에 매달린 것은 그의 초상과 책들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 화형주로부터 (사후에) 다시 솟아나,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를 무장시켜 그를 무적의 존재로 만들 그러한 무기를 손에 쥐고는 복수를 위해 되돌아올 운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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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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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7. 고전으로 되새기는 우리 인생관
기쁨과 슬픔
로마 시인 호레이스는 ‘즐거움이 있는 사람과는 즐거움을 나누고, 슬픔이 있는 사람과는 슬픔을 나누어야 한다‘고 했다. 신약 로마서에도 이와 똑같은 말로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 기쁨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지만 슬픔은 같이 나누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혼자서 슬퍼하게 되기 마련이다. <마지막 잎새> 의 작가 오 헨리는 ‘네게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기쁨을 나누려는 자가 많지만 너에게 슬픔이 있으면 그들은 너의 슬픔에 회심의 미소를 띄울 것이다‘라고 얄팍한 세상 인심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지혜의 글을 쓴 솔로몬은 “마음의 고통과 즐거움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면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다“고 하여 인생은 혼자 가는 길이라고 말하였다. 미국의 여류시인 엘라 윌콕스는 <혼자라는 것, 즉 고독>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기쁜 일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지려 하지만, 슬픈 일은 혼자서 삭여야 하느니 쓴 바다와 같은 이 세상 힘이 들고 고통의 연속이라도, 고통은 고통에 맡기고 즐거운 세상 살아보자꾸나.“
누가 나의 속사정을 알아줄까? 누가 나의 가려운 곳을 찾아내어 긁어줄 수 있을까? 나 자신뿐이 아닐까?
기쁜 일은 여러 사람이 나누려고 하지만 슬픔은 혼자 슬퍼하기 마련이다.
(Laugh and the world laughs with you, weep and weep alone.)
남녀의 노화
남자는 정신적으로 나이를 먹는 데 비하여 여자는 육체적으로 먹는다고 한다. 남자는 생각이, 여자는 주름살이 나이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 남자는 나이가 많아도 마음만 젊게 가지면 젊어지나 여자는 마음을 젊게 갖더라도 주름살이 걸림돌이 된다. 이러한 현상은 남자에게 그 원인이 있다.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외모만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는 “세상 사람이 모두 아름다움이라고 알고 있는 아름다움은 참 아름다움이 아니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피부 표면에 나타나는 아름다움만을 구한다. 조강지처는 이 세상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주름이 진 늙은 아내를 이유없이 학대하면서 젊은 여자를 찾아나서는 사람이 있다. 젊은 여자에게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늙은이같이 멍청한 사람은 없다. 이런 사람 중에는 대머리가 많다. 젊은 여자는 영감을 젊어보이게 하려고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고, 늙은 아내는 그 영감을 늙어보이게하여 젊은 여자가 떨어져 나가게 하려고 검은 머리를 뽑아주기 때문에 삽시간에 대머리가 되어 버리고 만다.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표정으로 늙는다.
(A man is as old as he feels, and a woman as old as she looks.)
자업자득
재액이나 환란, 행복이나 행운이 찾아드는 문은 따로 있지 않다. 모두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결과이다. 불가의 윤회사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화복은 자업자득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로 생기는 일은 감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파렴치한도 많다.‘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한다고 하듯 말이다. 맹자는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 돌아간다”며 자신이 뿌린 씨에 따라 그 열매를 수확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행하여 얻어지는 것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반성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불에서 불티가 솟아오르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인생은 자신이 뿌린 씨를 자신이 거두어가는 과정이므로 악의 씨보다는 선의 씨를 뿌리는 것이 좋다.
자업자득 (As you make your bed, so you must lie upon it.)
잠자리를 잘 준비하지 못했으면 밤새 불편하더라도 참아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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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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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1891) 1/2
해설
하디는 영국 소설계에서 조지 메러디스(George Meredith, 1828-1909)와 더불어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존재였다. 4편의 장편 소설과 4권의 단편집 8권의 시집(918편의 시 수록)과 2편의 서사극시를 남겼으며 하디 문학의 금자탑을 이룩한 "테스"로 이름을 떨쳤다. "테스"가 많은 애독자를 가지게 된 까닭은 인생의 비극적인 실상을 직시하는 하디의 페시미즘 사상이 불안과 동요의 도가니 속에서 허덕이는 현대의 시류와 일맥 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은 후 영국인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기장 즐겨 읽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여기서 "테스"가 발표되었던 빅토리아 시대를 잠깐 살펴보자 이 때는 치기와 위선의 시대였다. 민주적 경향과 과학 정신으로 조성된 물질 문명의 세례를 받은 속물주의와 체면주의가 판을 치던 속된 분위기였다. 이런 시대는 윤리관이나 도덕관이 지극히 편협해지기 마련이어서 인간성을 자연스럽게 묘사할 수 있는 문화적인 배경이 아니었다. 하디는 편협한 윤리 도덕관에 반기를 들고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통해 윤리 도덕 정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시도하였다. 하디는 "테스"에서 두 개의 순결성을 보여 준다. 나아가 육체의 순결성보다 정신의 순결성을 위에 두고 있다. 테스가 알렉에게 빼앗긴 육체의 정조는 한낱 외형의 순결성을 상실했기 따름이지 본연의 순결성은 여전히 테스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기본 골격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결국은 알렉 살해의 책임은 테스를 둘러싼 환경의 편협함의 결과로 돌리는 것이다. 테스가 놓여 있는 환경이란 야수적인 알렉과 이기적이고 결벽증인 에인젤의 횡포에 의해 초래된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이 테스의 운명이라 할 수밖에 없다. 테스의 불행은 스스로의 성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운명의 희생자인 것이다. 하디는 인생을 하나의 비극으로 인식한다. 우주에는 인간사에 무심한 맹목적 대의지가 있고, 지상의 인격들 제각기의 소의지가 있다. 인간의 소의지는 우주의 대의지에 휩쓸려 결국 자멸이란 비극을 치르게 마련이라는 것이 하디의 기본적인 세계관이다.
"테스"가 발표되었을 때 타임즈는 "테스"에 대하여 인습적 관념을 다루는 데 대담하고 애틋한 비애감을 서리게 하여 지극히 감동적인 비극감을 자아냈다고 평했다. 시인 윌리엄 윗슨 경(Sir William Wastson)은 테스는 인간의 지적이고 정서적인 경험의 폭을 항상 넓혀 준다고 했으며 웨스트민스터의 평론가는 조지엘리가 별세한 뒤의 최고 역량의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테스"는 출판된 지 3년 만에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그 후 전문적인 연구 서적과 논문도 많이 발표되었다. 또한 영화와 연극으로 상연되었다.
작가 약전
하디는 1840년 6월2일 영국 남부 지방 웨섹스의 중심지 도셋의 하디북햄프턴이란 삼림 지대와 황무지 사이의 두메 초가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산된 순간 사산인 줄 알고 한구석에 내버렸던 것을 이웃의 거들던 아낙네가 의사에게 "죽다니요! 가만 계세요 꼭 숨을 쉴 테니!"하고 외치는 바람에 다행히 소생했다. 7, 8세 때에 친구들은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될까 하며 신나게 이야기했지만 하디는 어른이 되고 싶지도, 무엇을 갖고 싶지도 않았으며, 지금 그 자리에 그냥 남아 있고 싶을 따름이었다. 야심이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하디를 목사로 만들고자 했으나 하디가 원하지 않으므로 건축가로 출세시키려 했다. 18세 때에는 도체스터의 교회 건축가 조힉스의 제자가 되어 5년 동안 건축에 관한 경험을 쌓는 한편 친구의 지도를 받아 고전 중에서도 특히 희랍 비극과 영문학을 탐독하여 차츰 글을 쓰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새벽에는 일리아드를 읽고 낮에는 건축 일에 시달리고 일이 끝나면 바이올린을 들고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에 바빴다. 21세 때는 당대 굴지의 건축가인 부룸 후일드의 조수로 런던으로 오게 되어 10년간 과학적 사회적 문학적 사조를 접하였다. 1865년에 시를 쓰기 시작 이듬해 잡지상에 투고했으나 반환되는 바람에 시작의 붓을 꺾고 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865년에 "내가 집을 지은 이야기"라는 단편을 발표했으며 1871년 "궁여지책", 1872년 "푸른 숲 그늘에서", 1873년 "푸른 눈동자"를 각각 발표했고 1874년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를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1874년 엠마 라비니아 깁후드 양과 결혼했다. 1878년 하디의 4대 걸작의 하나인 "귀향"을 발표 그 후 "케스터브리지 시장", "웨섹스 이야기", "귀부인들", "테스", "아내를 위하여" 등을 발표하였다. "테스"가 간행되자 에인젤과 같은 과거가 있는 아내를 가진 남편들로부터 그리고 테스와 같은 과거를 지닌 아내들로부터 하디에게 많은 서신이 쇄도하였다. 1928년 1월11일 88세로 세상을 떠날 떄까지 14편의 장편 소설과 4권의 단편집과 8권의 시집과 2편의 서사극시를 냈다. 생전에 이미 그의 문학적 공헌이 인정되어 애버딘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옥스퍼드 대학 등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 받고 70세에는 국왕으로부터 유공 훈장을 받았다.
줄거리
5월 어느 날, 저녁 세스톤에서 블랙모어의 말로트 마을로 한 중년의 사나이가 길을 가고 있다. 사나이는 두 다리를 비척거리며 똑바로 걷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몰락한 귀족의 자제로 지금은 무식하고 가난하여 그 자신이 더버빌 가의 피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술에 취해 집으로 향했다. 그는 옆구리에 빈 달걀 광주리를 들고 있었다. 귀족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안다한들 달라질 것은 없으나 집으로 향하던 도중 그는 목사로부터 그가 몰락한 귀족의 자제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말로트 마을은 아름다운 분지의 동북쪽에 파도처럼 굽이친 산줄기 한복판에 자리한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외진 고장이다. 런던은 네 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으나 아직도 유람객들이나 풍경화가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고장이었다. 이 지방은 지형상 뿐만 아니라 역사상으로도 매우 흥미 깊은 곳이었다. 헨리 3세 시기의 기묘한 전설 때문에 이곳 분지는 일찌기 '휜 사슴의 숲'이라 불리웠다. 지금도 얼마간 옛 풍습이 남아 있는데 5월의 무도회 같은 것이 그 한 예였다. 이 무도회는 여자들의 친목 모임으로서 수백 년 전부터 해마다 같은 행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5월은 기쁨의 계절이라고 하여 회원들은 하나같이 흰 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저마다 껍질을 벗긴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왼손에는 한아름 흰 꽃을 들고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춤을 추고 행진을 했다. 정해진 장소에 도착하면 곧 춤놀이가 시작되는데 회원은 여자들 뿐이므로 여자들끼리 춤을 추었다. 그러나 하루의 일이 끝날 무렵이 되면 마을 사나이들이며 도보 여행자들이 모여들어 함께 춤을 추는 향연이 벌어졌다. 그 날도 역시 이 마을에서 모임을 하는 날이었다. 어깨에 작은 바랑을 메고 손에는 지팡이를 든 상류 계층의 젊은이 셋이 여인들의 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제지간이었다. 맏이는 흰 넥타이에다 목까지 닿는 조끼와 좁다란 차양이 달린 모자를 쓴 부목사의 정복 차림이었고 둘째,는 보통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셋째는 얼른 보아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들 삼형제는 성령 강림절 휴가를 이용하여 도보 여행 중으로 동북쪽에 있는 세스톤 마을을 떠나 서남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두 형은 오래 지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으나 셋째는 남자 상대자 없이 여자들끼리 춤을 추고 있는 광경에 흥미가 끌렸다. 그는 이윽고 바랑과 지팡이를 생울타리 위에다 걸어 놓고 잔디밭으로 들어갔다. 두 형은 에인젤에게 곧 뒤따라오도록 당부를 하고는 먼저 떠났다. 여자들은 에인젤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하였고 에인젤에 뒤이어 마을 청년들도 일을 끝마치고 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들과 함께 춤추는 아가씨와 아낙네들은 요란하게 떠들어댔다. 그가 춤 한 곡을 끝내고 나올 때 수줍은 표정의 어여쁜 처녀가 눈에 띄었다. 테스 더버빌이었다. 처녀의 큼직한 눈동자는 자기를 택해 주지 않은 에인젤에게 원망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젊은이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나 곧 형들의 뒤를 따라야 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테스는 언덕 위로 사라져 가는 젊은이가 저녁 햇살 속에 모습을 감출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테스는 감정이 드러나기 쉬운 작약과 같이 어여쁜 입술과 순진한 매력이 넘쳐 흐르는 커다란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머리에는 리본을 달고 단 한 벌의 외출복인 린네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시골 학교를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청초한 처녀였다.
향연은 끝나고 다시 살기 힘든 생활이 반복되었다. 뒤늦게 밝혀진 몰락한 귀족 신분이 가난하기만 한 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테스의 부모는 허황한 공상을 하였다. 테스는 많은 동생과 어머니가 좀더 편히 살 수 있도록 이것저것 돈 되는 일을 찾아 나섰다. 테스는 귀족의 혈통이므로 신사에게 시집을 가서 편히 잘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공상을 무시하고 어려워져 가는 집안 사정 때문에 얼마 후 집을 떠나 양계장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 테스는 그 집의 관리인이요, 사료 조달인이요, 간호인이요, 외과 의사요, 친구가 되어야 했다. 아직 육십이 안 된 여주인인 알렉의 어머니와 하녀의 틈에서 테스는 모든 일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닭을 기르는 데는 휘파람도 잘 불어야 했다. 도착한 이튿날은 오랫동안 안 불었던 휘파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안뜰의 담장의 가지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담장 꼭대기에서 한량꾼인 알렉 더버빌이 테스를 엿보다가 담장에서 뛰어 내렸다. 알렉은 그 전날 테스가 살고 있는 오두막의 문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자연 속에도 예술 속에도 당신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어 내 사촌 누이 테스!"
그리고 그는 휘파람 연습을 시켜 주겠다고 하며 계속 추근거렸다. 테스는 웬지 이 사람이 싫었다
"싫어요"
"바보. 누가 저를 만지기라도 한데나?"
알렉은 이 집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자기에게 얘기하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이 트란트리지 일대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지루하며 단조로운 마을에서 힘겨운 일을 하는 그들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여자들도 여기에 가담하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이면 으레 2,3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볼품없는 장터 체이조바라로 나가서 술을 마시고 놀다 이튿날 새벽 한두 시 경에야 돌아왔다. 테스는 처음 매주마다. 한 번씩 있는 이 행차에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노동의 휴식을 위해 자기와 별로 나이 차이가 없는 동네 부인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일 주일 내내 갑갑한 양계장 일에서 나와 보니 자기도 덩달아 즐거웠다. 그 후로도 테스는 종종 동행하게 되었고 원래 미인이고 매력이 있는 데다 나이 열 일곱의 한창인 아가씨였기 때문에 사나이들의 능글맞은 시선을 끌었다. 한두 달이 지나고 명절과 장날이 겹친 9월 어느 토요일 트란트리지에서 놀러 나온 패들은 다른 때보다 더 신이 났다. 밤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 트란트리지와 이곳은 워낙 떨어져 있는 곳이라 밤 늦은 시간에 홀로 돌아갈 수는 없었으므로 테스는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이미 취기가 오른 알렉이 테스에게 손짓을 했다.
"테스, 난 오늘 말을 타고 왔으니 주막으로 와요. 마차를 불러 데려다 줄 테니"
테스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가겠노라면서 이를 거절했다. 열한 시가 훨씬 넘은 후에야 몇 사람씩 떼를 지어 돌아가게 되고 테스도 그 안에 끼었다. 그날 밤 유난히 밝은 달빛이 밤길을 훤히 비치고 있었다. 술에 취한 남녀들은 비틀거리면서 노래를 부르며 떠들어댔다. 테스는 이런 경우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테스는 여자들의 수다를 들으며 묵묵히 걷고 있었다. 이 때 동행자 중에 카아라는 여자가 물건이 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있었는데 꿀이 쏟아져 머리카락에 붙어 마치 뱀처럼 꿈틀거렸다. 모두가 이 모양을 보고 큰 소리로 웃었을 때 테스도 아무 생각없이 같이 웃고 말았다. 카아는 화를 내면서 테스에게 달려들었다.
"왜 날 비웃는 거야. 요 악마 같은 것"
카아는 알렉의 정부였다. 알렉이 요즘 테스에게 눈이 팔려 쫓아다닌다는 것을 시기한 카아는 공연히 테스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가슴에 쌓였던 연적에 대한 분노가 일시에 폭발한 듯이 갖은 욕을 퍼부어가며 대들었다. 같이 가는 사람들이 말리려고 했으나 술에 취한 카아는 좀체로 진정하지 않고 점점 더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때 말을 타고 달려오던 멋쟁이 알렉이 이 광경을 보고 테스 곁으로 가서 몸을 굽히며 말을 했다.
"그런 것 하고 싸울 필요 없어. 자, 내 말에 같이 타요"
테스는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카아의 욕설을 듣자 그녀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가벼운 심술이 발동했던 것이다. 평상시 알렉을 경계했던 테스는 보란 듯이 알렉의 말 위에 올라탔다. 테스는 말을 타고 밤길을 알렉과 함께 간다는 사실에 은근히 불안해졌다. 알렉은 유쾌하게 말을 몰면서 테스에게 말을 걸었다.
"왜 테스는 내가 키스하려고 하면 싫어하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키스한다는 건 싫은 일이지요"
"사랑하지 않는다고? 정말 내가 싫어?"
테스는 아무 말 없이 알렉의 등을 꼭 붙들고 있었다. 테스는 이 젊은 주인이 추근거리는 것이 몹시 싫었다. 지금도 말 위에서 알렉은 말을 걸었다. 골짜기에서 자욱이 드리웠던 안개는 차츰 사방으로 퍼져 두 사람을 감싸 버렸다. 안개는 달빛을 가로막아 활짝 갰을 때보다도 한결 더 골고루 빛을 퍼지게 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몽롱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인지 혹은 졸리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큰 길에서 트란트리지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난 지가 꽤 오래 되었는 데도 사나이가 트란트리지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테스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테스는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한 주일 동안 아침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온종일 서서 지냈고 더구나 이 날 저녁에는 체이조바라까지 3마일이나 걸어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느라고 1마일의 길을 걸으면서 그 야단법석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기진 맥진했다 벌써 새벽 한 시가 가까웠다. 피곤한 나머지 정신없이 잠든 순간 테스는 사내에게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알렉은 말을 세우고 등자에서 발을 빼어 안장 위에 옆으로 돌아앉아 테스를 부축할 양으로 허리에다 두 팔을 감았다. 그 순간 테스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불현 듯 치미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알렉을 떠밀었다. 하마터면 사나이는 떨어질 뻔했다.
"이런 욕을 당하다니 내 꼴이 뭐야? 근 석 달 동안이나 남의 감정을 희롱하고 요리조리 피하면서 골탕 먹이기가 일쑤니 이젠 참을 수가 없어!"
"전 내일 떠나겠어요"
"안 되지, 그러지 말고 내 팔에 안겨 줘. 자 어서. 당신과 나와 단 두 사람 뿐 아무도 없어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
테스는 안장 위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알렉은 소원대로 테스를 두 팔로 껴안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죠?"
"체이조 숲의 한 귀퉁이야. 잉글랜드에서도 제일 오래된 숲이지. 밤도 아름답고 하니 좀더 오래 말을 타요"
"내려 주세요. 전 집까지 걸어가겠어요"
"내가 당신을 이런 외딴 곳으로 데리고 왔으니 당신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난 당신을 집까지 무사히 보내 줄 책임이 있어 아무튼 여기가 어디쯤인가를 내가 보고 올 테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말 곁에서 기다리겠다고 약속한다면 여기다 내려 주지"
그는 말고삐를 나무에 매놓고 낙엽을 모아 자리를 만들었다.
"자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그런데 이렇게 옷이 얇아서 춥겠군 그래"
알렉은 자기 코트를 벗어 테스의 어깨를 감싸고 단추를 끼워 준 다음 비탈로 올라갔다 달도 져서 푸른 빛마저 사라져 혼자 남아 낙엽 위에서 꿈길을 더듬는 테스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테스는 힘없이 앉아서 쉬고 있는 동안 어느 사이에 잠이 들고 말았다. 알렉은 일부러 엉뚱한 길로 말을 몬 나머지 지금 그들이 접어든 곳이 체이조 숲의 어디쯤 되는지 분간을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듬더듬 산마루를 넘어 낯익은 신작로를 발견하고 위치를 짐작했다 그리고는 겨우 테스와 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사방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알렉은 무릎을 꿇고 몸을 굽혀 테스를 살펴보았다. 여자의 입김이 느껴졌다. 테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속눈썹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엷은 비단결처럼 감촉이 부드럽고 티없는 눈과도 같이 새하얀 테스의 살은 알렉에게 더 없는 유혹이었다. 알렉은 테스를 이렇게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색색거리는 나른한 숨소리와 어렴풋한 테스의 얼굴 살내음은 알렉의 자제력을 몽땅 앗아갔다.
시월 그믐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테스가 한밤중에 말을 타고 체이조 숲 속에서 난생 처음 무서운 경험을 겪은 지 몇 주일이 지난 뒤였다. 아직 이른 아침 테스는 무거운 짐을 들고 더버빌의 양계장을 나왔다. 등 뒤의 지평선을 노랗게 물들인 빛은 테스의 눈 앞에 보이는 산마루를 환히 비쳐 주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테스는 걱정하는 어머니의 목에 매달려 눈물을 흘리며 숲 속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가난에 시달린 더버빌 부인은
"그래, 그러고도 넌 그 사람더러 결혼하자구 말을 안했단 말이냐? 그대로 바보처럼 집으로 돌아오다니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일단 그런 일이 일어난 이상 넌 버젓하게 그 사람에게 결혼 신청을 할 수 있지 뭐냐?"
"어머니도 참, 결혼이라니요. 전 그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걸 어떻게 해요"
"사랑하지 않는다구..."
어머니는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계속 책망을 했다.
"여자란 건 그렇게 되고 나면, 어떠한 남자한테라도 따라가게 마련이란다. 더구나 알렉 같은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지. 남자 치고 그만하면 훌륭하고 게다가 부자가 아니냔 말이다"
알렉 같은 남자의 성질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테스는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는 어머니를 테스는 슬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머니, 저에겐 그 남자를 사랑할 마음이 도무지 없었어요. 저쪽에선 여러 가지로 말해 왔지만"
"아내가 될 생각이 없었다면 좀더 정신을 차렸어야 할 게 아니냐?"
테스는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남자라는 건 정말 징그럽고 무서운 것이라고 왜 진작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테스의 아름다운 큰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흘려내렸다. 그러나 이미 도리가 없었다. 자기는 이제 처녀가 아니다. 비록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속절없이 정조를 빼앗긴 여자였다. 테스에게 심신이 모두 괴로운 날이 계속되었다. 해가 바뀌고 봄이 왔다. 그리고 불행을 안은 채 숙명의 어린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테스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 운명을 중오했으나 일단 태어난 생명에 대해서는 애정을 느껴 아이를 안고 기도했다.
"오, 자비로우신 주님이시여! 이 가련한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에게는 어떠한 벌을 주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만은 부디 많은 복을 주시옵소서"
아이는 사생아였으므로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아이는 튼튼하지 못했다. 테스는 어느 날 밤 동생들을 불러 자신이 신부를 대신하여 아이에게 세례를 주겠다고 말했다. 테스의 얼굴은 맑고도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테스는 이 가련한 아이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확고히 생각했다. 자신이 세례를 주어도 이 아이는 천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순박한 믿음이었다. 테스는 어린아이를 안고 물이 담긴 그릇 곁에 서고 동생은 교회에서 하듯이 기도서를 펴들고 언니 앞에 섰다. "이름을 뭐라고 지을 테야?" 하고 동생이 물었다. 테스는 구약 성경의 소로우라는 이름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자기의 자식을 위한 신성한 생각으로 선언했다.
"소로우, 아버지이신 주님과 주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을 받들어 나는 너에게 세례를 주노라"
테스는 아이의 머리에 물을 뿌렸다.
"우리들은 이 아이를 받아 십자가의 표시를 너에게 하노라"
테스는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이 소로우라고 이름지은 갓난아이는 곧 죽고 말았다. 함부로 이 세상에 뛰어든 자 사회의 법도 모르는 염치 없는 자연이 준 사생아는 불과 며칠이라는 시간을 영원한 때로 알고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테스는 변했다.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성숙해진 그녀의 눈은 깊었으며 차분해진 표정이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트란트리지에서 돌아온 지 2년 남짓한 5월 어느 날 아침 테스는 어느 목장에 취직하여 집을 떠났다. 모든 기억들로부터 해방되어 자연의 딸로서만 살아가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전세 마차에 몸을 싣고 스타워카슬이란 조그만 읍내를 향했다. 이번 길은 첫 번째 집을 떠나던 때와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스타워카슬에서 마차를 갈아 타고 웨터베리를 거쳐 아름다운 탈보나이조의 낙농장에 이르렀다. 한없이 뻗은 녹색의 초원 희고 검고 붉은 무늬가 아롱진 소의 무리가 장미빛처럼 빛나는 낙조 속에서 노닐고 있는 곳 젖 짜는 곳에서는 여러 남녀들이 명랑하게 노래를 부르며 일을 하고 있었다. 테스는 2년 동안 고민에 찬 세월을 고향에서 보낸 뒤 꿈을 꾸며 맑고 즐거운 생활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이었다. 젖 짜는 여인으로서 테스는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이 건강한 생활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슬픈 추억으로 고통에 잠겼던 침울한 눈은 다시 이 맑은 태양 속에서 빛났으며 창백한 볼에도 처녀 시절의 아리따운 장미빛이 감돌았다. 이 목장에는 다른 일꾼들과 달리 기품이 있고 상당한 교육을 받은 청년 하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에민스터의 유명한 목사의 막내 아들인 에인젤로 학교를 나온 후 목장의 견습생으로 여기 와서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이한 존재였으므로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청년이었으나 그는 여자들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목장 주인도 이 청년에게는 젊은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경의를 표했다. 테스는 이 청년을 보았을 때 전에 본 일이 있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테스가 아직 철모르는 소녀였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동네 처녀들과 같이 부인회의 무도회에 갔을 때 끝내 자기와는 춤을 춘 일이 없이 총총히 떠나가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테스는 에인젤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얀 능금꽃이 떨어지는 초여름의 황혼 아래 테스는 공기가 맑고 고요한 정원에 나와 반짝이는 별들을 쳐다보았다. 모든 생각을 떠나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보다 차라리 이렇게 홀로 조용히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더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 때 뒷집 지붕 밑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그 구슬픈 음조는 테스의 마음을 꿈 같은 세계로 끌어들였다. 잠시 후에 바이올린 소리는 그쳤으나 테스는 다시 들려오기를 기다리며 황혼에 비치는 흰 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바이올린을 켜던 사람은 에인젤이었다. 그는 악기를 치우고서 바람을 쐬려고 밖으로 나왔다. 담 주위를 한 바퀴 돌다가 우연히도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테스를 만났다. 사실 에인젤은 테스에게 끌렸으므로 간단한 음악을 연주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볼 생각이었다. 테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면서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에인젤은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도망가다시피 하세요? 제가 두려우신가요?"
"아녜요"
테스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무서운 건 없어요. 별이 이렇게도 아름답게 비치는 걸요"
"그럼 뭐가 두렵습니까? 아니 당신 눈에 눈물이 고였군요"
에인젤은 유심히 테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테스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별을 보고 있노라니까 인간의 행동이 흙탕물같이 더럽게 여겨져서 갑자기 쓸쓸해졌어요"
"슬퍼한다는 것은 때로는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맑게 씻어 주니까요"
에인젤은 테스가 이 목장에 왔을 때부터 용모가 아름다운 그녀에게 끌렸다. 또한 지금은 그녀가 영리한 여인임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목장 한 모퉁이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에인젤의 마음에서는 테스의 얘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들은 아침 일찍 젖 짜는 곳에서 자주 만났다. 젖을 짜기 위해서는 다들 이른 아침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에인젤과 테스가 제일 빨랐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얘기하며 명랑하게 웃기도 하고 아침 햇살에 빛나는 목장을 같이 산책하기도 했다. 아침 해의 장미빛에 비치는 테스의 모습은 에인젤에게는 자연의 여왕과도 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무더운 여름철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다음 날 테스는 오랜만에 이 마을에서 2, 3마일 떨어진 교회로 세 명의 처녀들과 함께 예배를 보러 갔다. 길은 질퍽했다. 한참 가다 보니 언제나 뛰어 넘을 수 있었던 작은 냇물이 불어서 신을 벗고 건너가도 물이 무릎까지 닿을 것만 같았다. 네 명의 처녀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 냇물을 건너지 않는다면 훨씬 먼 곳에 있는 큰 길로 돌아가야 했다. 에인젤은 일꾼들이 교회에 가는 날이면 언제나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들판을 거니는 습관이 있었다. 멀리 네 처녀가 소나기에 넘친 개울가에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본 에인젤은 그들을 못본 척하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 중에 테스도 끼어 있었으므로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인젤은 네 처녀가 몰래 사모하는 대상이었으므로 그가 점점 가까이 오자 아가씨들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청년은 가까이 와서 친절히 한 사람씩 안아서 냇물을 건네 주었다. 물 깊이는 그의 장화를 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테스를 마지막으로 남겨 두었다. 세 처녀는 마음을 조이며 에인젤이 테스를 데리러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어젯밤에 에인젤과 같은 훌륭한 남자는 없으며 에인젤이라면 언제라도 결혼하겠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에인젤은 테스를 좋아하고 있다고 하며 풀이 죽어 있었다. 테스는 괴로운 심정이었다. 자신도 에인젤을 사랑하고 있으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용없이 그분은 테스를 좋아하고 있는걸"
테스는 에인젤에게 안겨 건널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동요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에인젤이 가까이 왔을 때 테스는 말했다.
"전 저쪽 국도로 돌아가겠어요. 세 사람이나 건네 줘서 퍽 피곤하시잖아요 에인젤 씨"
"아니 조금도 사실 당신을 건네 주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겁니다"
테스의 부드러운 몸은 에인젤의 가슴에 끌리듯 안겼다. 에인젤은 아름다운 꽃다발이라도 안은 듯이 여인을 안고 내를 건넜다.
"무겁죠?"
"무겁다뇨. 당신이 입고 있는 모슬린처럼 가볍습니다"
테스를 건네다 주자 에인젤은 물에 젖은 길을 저벅거리며 혼자 돌아갔다. 네 처녀들이 다시 교회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한 처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틀렸어, 우린 이제 기권이야"
"그게 무슨 말이니?"
테스가 물었다.
"그분은 널 제일 좋아해 그분이 널 안고 건널 때 우린 확실히 알았어 만일 네가 조금이라도 유혹만 했다면 그분은 네게 키스를 했을 거야"
"얘가, 별말을 다 하네"
테스는 이렇게 부정하면서도 얼굴이 화끈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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