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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0호 - 2024.10.09. 수요일(음력 : 9.07.)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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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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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우리 마음 속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로 쓰여지는 것. -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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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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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맞춤법 제1항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한글 맞춤법 제1항이다. ‘소리대로’란, ‘봄 다음 계절’을 가리키는 말의 소리가 [여름]이면 ‘여름’으로 적어야지, ‘*여룸’이나 ‘*야름’으로 적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열음’도 소리가 [여름]이지만 이리 적지 않는 것을 보면 ‘열’과 ‘음’, 즉 둘로 나누어 볼 근거가 딱히 없는 것은 굳이 끊어서 적지 않는다는 원리가 밑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먹물’의 발음은 [멍물]이지만 소리대로 적지 않는다. 이때는 ‘어법에 맞도록’이라는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어법에 맞도록’이란 본래 형태를 밝혀 적는다는 뜻이다. 그래야 개별 어휘들의 표기가 통일성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값’의 경우를 보자. ‘값, 값이, 값만, 값도, 술값’은 각각 [갑, 갑씨, 감만, 갑또, 술깝]으로 소리 난다. 소리대로 적는 원리만 적용하면, ‘값’이 때로는 ‘갑’, 때로는 ‘감’, 때로는 ‘깝’이 되어 표기가 어지러워진다. 동음이의어도 마구 생겨나 읽기에도 방해가 된다. 이로 보건대, 소리대로 적는 것이 읽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어법에 맞추어서, 즉 본래 형태를 밝혀 적는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글 맞춤법에서 요구하는 ‘어법’에 관한 지식은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다. 명사니 조사니 하는 용어를 모르더라도 ‘사람이’를 ‘*사라미’로 적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람’과 ‘이’가 결합한 것이라는 수준의 지식, 이때의 ‘이’는 ‘손이, 밥이, 건물이’에 쓰인 ‘이’와 같은 것이라는 수준의 지식만 있으면 ‘사람이’로 적을 수 있다. 여기에 우리말을 사랑하는 마음만 더하면 한글 맞춤법도 그리 어렵지 않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강추위에 손이 시려요
부쩍 날이 추워졌다. 겨울철의 심한 추위를 흔히 ‘강추위’라고 하는데, 이 말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로 고유어 접두사 ‘강-’이 결합한 ‘강추위’가 있는데, 눈도 오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으면서 몹시 매운 추위를 가리킨다. 이 접두사 ‘강-’는 ‘마른’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강기침(마른기침), 강모(마른논에 억지로 심는 모), 강서리(늦가을의 된서리)’ 등의 말에서 볼 수 있다. ‘강더위’는 비는 오지 않고 볕만 내리쬐는 심한 더위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 ‘강추위’의 반대말이 된다.
두 번째로 한자어 접두사 ‘강(强)-’이 결합한 ‘강추위’가 있다. 이는 눈이 오고 매운바람이 부는 심한 추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폭설이 내리는 강추위’라고 한다면 이 두 번째 ‘강추위’가 된다. 얼핏 한 낱말로 보이는 ‘강추위’지만 실은 두 가지 다른 말인 것이다.
추위와 관련하여 흔히 잘못 쓰는 말로 ‘시려워’가 있다. 동요 ‘겨울바람’에서도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과 같이 ‘시려워’라는 표현이 쓰이지만, 의외로 이는 표준어가 아니다. 표준어는 그냥 ‘시려’이다.
‘시려워’는 ‘시렵다’가 ‘두렵다->두려워, 어렵다->어려워’처럼 활용한 것인데, 이 ‘시렵다’가 표준어가 아닌 것이다. 표준어는 ‘시리다’이고, 이것이 활용하면 ‘시려’가 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언론 기사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시려워, 시려워요’ 등은 ‘시려, 시려요’로 쓰는 것이 옳다.
“추워진 날씨에 손이 시려워” -> 시려
“코가 시려워요” -> 시려요
올 겨울은 “강추위에 손이 시려요.”와 같은 표현을 쓸 날이 많지 않았으면 한다. 날씨는 춥더라도 마음만은 따뜻한 겨울이 되기를 소망한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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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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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1 - 천상병
아름다워라, 젊은날 사랑의 대꾸는
어딜 가?
어딜 가긴 어딜 가요?
아름다워라, 젊은날 사랑의 대꾸는
널 사랑해!
그래도 난 죽어도 싫어요!
눈 오는 날 사랑은 쌓인다.
비 오는 날 세월은 흐른다.
∼∼∼∼∼∼∼∼∼∼∼∼∼∼~~~~~~~~~~~~~~~~~~~~~~~~~~~~~~~~
유선애상 - 정지용
생기생김이 피아노보담 낫다.
얼마나 뛰어난 연미복 맵시냐.
산뜻한 이 신사를 아스팔트 우로 꼰돌라인 듯
몰고들 다니길래 하도 딱하길래 하루 청해 왔다.
손에 맞는 품이 길이 아조 들었다.
열고보니 허술히도 반음키-가 하나 남았더라.
줄창 연습을 시켜도 이건 철로판에서 밴 소리구나.
무대로 내보낼 생각을 하예 아니했다.
애초 달랑거리는 버릇 때문에 궂인날 막잡어부렸다.
함초롬 젖여 새초롬하기는새레 회회 떨어 다듬고 나선다.
대체 슬퍼하는 때는 언제길래
아장아장 팩팩거리기가 위주나.
허리가 모조리 가느래지도록 슬픈 행렬에 끼여
아조 천연스레 굴든 게 옆으로 솔쳐나자-
춘천 삼백리 벼루ㅅ길을 냅다 뽑는데
그런 상장을 두른 표정은 그만하겠다고 꽥- 꽥-
몇킬로 휘달리고나서 거북 처럼 흥분한다.
징징거리는 신경방석 우에 소스듬 이대로 견딜 밖에.
쌍쌍이 날러오는 풍경들을 뺨으로 헤치며
내처 살폿 엉긴 꿈을 깨여 진저리를 쳤다.
어늬 화원으로 꾀여내어 바늘로 찔렀더니만
그만 호접같이 죽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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奢侈(사치) - 김수영
어둠속에 비치는 해바라기와.......주전자와...... 흰 벽과......
불을 등지고 있는 성황당이 보이는
그 산에는 겨울을 가리키는 바람이 일기 시작하네
나들이를 갔다 온 씻은 듯한 마음에 오늘밤에는 아내를 껴안아도 좋으리
밋밋한 발회목에 내 눈이 자꾸 가네
내 눈이 자꾸 가네
새로 파논 우물전에서 도배를 하고난 귀얄을 씻고 간 두붓집 아가씨에게
무어라고 수고의 인사를 해야 한다지
나들이를 갔다가 아들놈을 두고 온 안방 건넌방은 빈집같구나
문명된 아내에게 [실력을 보이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발이라도 씻고 보자
냉수도 마시자
맑은 공기도 마시어두자
자연이 하라는대로 나는 할 뿐이다
그리고 자연이 느끼라는대로 느끼고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의지의 저쪽에서 영위하는 아내여
길고긴 오늘밤에 나의 사치를 받기 위하여
어서어서 불을 끄자
불을 끄자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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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앞에 나는 - 이해인
당신 앞에 나는 꼼짝도 할 수 없는 항아리에요
비켜 설 땅도 없는 이 자리에서
당신만 생각하는 길고 긴 밤 낮
나는 처음부터 뚜껑없는 몸이었어요
햇빛을 담고,바람을 담고,구름을 담고
아직도 남아있는 비인 자리
당신만이 채우실 자리
당신 앞에 나는 늘 얼굴없는 항아리
기다림에 가슴이 크는 항아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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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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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 전영관
맴
맴
맴
매미가
감나무 가지 위에서
감을 세고 있다.
쓰르르르 쓰르르르
쓰르라미가
뒤따라 다시 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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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 윤운강
한여름 숲 속의
매미 소리다.
밤 하늘에 쏟아 붓는
별빛이다.
내 속앓이를
말끔히 씻어 주는
하느님의
약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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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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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3장. 의를 기른다
37.자녀를 꾸짖을 때는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꾸중은 부모로서의 의무
"당신들 유태인들은 신앙심이 깊으니 자녀를 꾸짖을 때,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고 말함으로써 착한 일과 나쁜 일을 구별시키지는 않습니까?"
이 말은 내가 흔히 듣는 질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대답으로 일관한다. 유태인들은 자녀들을 꾸짖거나 타이를 때, 절대로 하나님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가정교육이란 한마디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인 만큼 거기에는 좋으냐, 나쁘냐의 기준 이외에는 다른 말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뿐만이 아니다. 동양에서는 '그런 짓 하면 못써!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라는 말로 자녀들을 꾸짖는데, 이는 옳지 못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꾸짖을 일이 있다면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면 되는 것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꾸짖음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은 부모들이다.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꾸짖는다는 것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자녀들을 꾸짖을 때는 절대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 만큼 하나님 핑계를 대거나 다른 이유를 둘러대며 부모로서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초 인간적인 덕보다 현실적인 덕을 행하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추리소설 중 '랍비 시리즈'라는 것이 있다. 이 소설은 유태계 작가인 해리 케멜만이 쓴 것으로서, 그의 첫 작품인 <화요일에 랍비가 격노했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유태인의 종교는 매일 매일 의식하면서 선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더욱이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인간적인 덕이지 초인간적인 성인의 덕은 아니다. 이것은 소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스몰이란 랍비가 한 말이다. 선과 정의는 인간으로서 살아나가기 위한 조건으로, 날마다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만큼 구태여 하나님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현실세계에 적용하는 착실한 방법을 우리들 스스로 알아서 실천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의 잘못을 꾸짖을 때도 그 목적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탈무드>에는, 대홍수 때 선이 노아의 방주에 함께 타려고 했지만 '무엇이든 짝이 있는 것만을 태워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거부당함으로써, 짝이 되는 악을 찾아 함께 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선과 악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언제나 상반된 위치에 놓여 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먼저 그것이 어느 쪽에 해당되는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올바른 가치 기준을 심어주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꾸짖는다'는 것은 선과 악 중 한 가지 기준만을 부모의 책임 아래 자녀에게 심어주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포인트!
잘못을 저지른 자녀들을 꾸짖을 때는 선과 악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해야 하며, 절대적인 의미가 내포된 것이 안 된다. 선과 악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언제나 상반된 위치에 놓여 있다. 따라서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먼저 그것이 어느 쪽에 해당되는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38. 최고의 벌은 침묵이다
'침묵'이 매보다 효과적이다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벌을 줄 것인가-이것은 가정 교육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벌을 어떻게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예를 들면, 자녀들이 관여해서는 안 될 일에 나섰을 때, '그런 일에 나서지 말라고 했지'라며 말로써 꾸짖는 경우도 있겠고, 조금 심한 경우에는 매질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어느 정도 잘못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벌인데, 벌은 미워서가 아니라 예방적인 차원에서 절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이것을 잘못 다스리게 되면 부모의 경고나 꾸중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버릇없는 아이로 자라기 십상이다. 이런 사정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유태인 어머니들 역시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을 만큼 체벌의 강도가 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학교나 외출에서 돌아와 책가방이나 입었던 코트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면 큰 소리로 꾸짖는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을 경우에는 엉덩이나 뺨을 때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유태인 어머니들은 이런 체벌보다 한 차원 높은 방법을 항상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침묵이라는 무기이다. 언젠가 겨우 세 살밖에 안된 딸아이가 제 친구한테서 받은 유리컵을 들고 다니면서 장난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말했다.
"얘야, 깨뜨리기 전에 엄마에게 오렴."
"안 깨뜨려요."
그러고는 유리컵을 건네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이내 단념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랬더니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쨍그렁'소리와 함께 마루에 떨어진 유리컵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나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봐, 엄마가 말했잖니. 너하고는 이제부터 말도 하기 싫으니 너도 엄마한테 말 걸지 마!"
그때부터 30분 동안 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이처럼 의사 소통의 수단인 대화를 끊는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최대의 벌이 아닐 수 없다. 즉, 자녀들의 존재를 아주 무시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매질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면서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아무때나 이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로써 타일러도 안 듣거나, 부모를 모욕하는 언동을 하는 등 가정교육의 근본에서 벗어났을 최악의 경우에만 비상수단으로 써야 하는 '무기'인 것이다.
침묵은 부모에게도 반성의 기회가 된다
한편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부모 자신에게도 매우 가혹한 벌이라고 할 수 있다. 유태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말이 많은 민족이라는 딱지가 붙었으리만큼 대화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탈무드>에는 '입'이나 '말'에 대한 경구가 수없이 많은데, '이스라엘은 누에이다. 유태인은 쉬지 않고 입을 움직인다'라는 말도 그 중의 하나이다. 누에가 항상 뽕잎을 먹고 있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고 있다, 즉 유태인은 언제나 말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가정 교육에 불충실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도 된다. 이렇든 '침묵'이 보통 벌과 다른 점은, 벌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에게 독특한 심리작용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가정교육에 불충실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녀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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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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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북아프리카
수도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에서 배를 타고 카르타고로 달린다. 제3차 포에니 전쟁 때 소금까지 뿌려서 불모지로 만든 카르타고도 그로부터 3세기가 지난 이제는 로마 제국의 도시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현대의 해양고고학자들이 로마와 카르타고를 잇는 항로의 해저에서 엄청난 양의 난파선 유물을 인양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 영토가 된 이후 카르타고가 포에니 전쟁 시대와 마찬가지로 북아프리카의 중요한 물산 집산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물자만이 아니다. 하드리아누스가 원로원 의석을 주었을 뿐 아니라 소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교육까지 맡긴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는 이름만 보면 라틴인인 것 같지만, 옛날 같으면 카르타고인이었다. 카르타고를 도읍으로 하는 아프리카 속주는 로마화의 역사가 길고 안정된 속주를 의미하는 원로원 속주라서, 카르타고에는 갈리아의 리옹과 마찬가지로 1천명의 병사밖에 주둔하지 않았다. 이집트를 제외하고 키레나이카에서 마우리타니아까지(오늘날 리비아에서 모로코까지) 길게 뻗어 있는 장대한 방위선을 지키면서 사막 부족의 습격에 대비하는 군단은 아프리카 속주 서쪽에 붙어 있는 누미디아 속주에 기지를 두고 있었다. 이 군단을 시찰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카르타고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서남쪽으로 떠났다. 북아프리카에도 그물눈처럼 깔려있는 로마 가도를 지나 람바이시스(오늘날의 알제리의 랑베즈)로 들어간다. 이곳이 아프리카 방위선을 지키는 유일한 주전력 집단인 제3군단의 기지였다.
랑베즈에서 발굴된 기념비(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에 새겨진 글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순행중인 하드리아누스의 음성을 접할 수 있다. 황제의 시찰 방문을 기념하여 세워진 이 돌비에는 황제 앞에서 훈련을 벌인 뒤 정렬한 병사들을 향해 하드리아누스가 연설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실전 같은 훈련에 참가한 것은 제3군단 전원과 제2 히스파니아 기병대, 그리고 로마 군단에 딸려 있는 속주민 보조부대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우선 군단병들의 뛰어난 전술 훈련을 치하한다. 게다가 쉴새없이 부과되는 전선 근무를 완수하는 한편 성벽이나 요새 같은 방어시설을 세우는 틈틈이 이룩해낸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칭찬할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병사 개개인이 전사로서 기량을 높이면 높일수록 제국의 방위체제는 보다 적은 인원으로도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고, 결과적으로 제국의 방위비 부담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이어서 군단장 파비우스 카툴리누스의 통솔력을 치하한다. 카툴리누스는 그로부터 4년 뒤에 황제의 천거로 집정관에 취임하게 된다. 다음은 기병대를 언급한다. 기병의 전술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그 전법을 완전히 익히려면 오랫동안 고된 훈련을 쌓아야 한다. 제2히스파니아 기병대는 무거운 완전군장을 갖추고 긴 창을 들고 돌격하는 숙련된 전술과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주었다고 칭찬한다. 끝으로 보조병들이 부대장 코르넬리아누스의 지휘에 따라 요새 건설작업에 종사한 노고를 치하한다 하지만 그 노고야말로 군단병이나 기병대의 활동에 도움이 되고, 결국에는 너희들의 집과 땅과 가족을 사막 유목민의 습격으로부터 지키는 결과가 된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의 개인적 독후감에 불과하지만, 최고사령관이 휘하 장병들에게 행하는 연설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연설에 버금가는 걸작인 것 같다. 동시대의 문헌이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병사들의 지지는 절대적이라고 전하는 것도 납득이 간다. 아마 다른 순행지에서도 이런 연설은 되풀이되었을 테고, 황제의 시찰을 기념하고 먼 훗날까지 병사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같은 종류의 기념비를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는 순행지에 도착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황제의 책무를 수행하고 있노라"고 말하는 듯이 그 사실을 새긴 통화를 발행했다.
키레나이카에서 마우리타니아까지 이르는 전선에서 근무하는 모든 지휘관이 랑베즈의 군단기지에 소집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들의 보고를 듣고 필요한 조치를 내렸다. 역대 황제들의 시책이 축적된 결과, 아프리카 전선도 기본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문제는 군사력을 요소요소에 어떻게 배치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리비아에서 모로코까지의 전선을 1개 군단 6천 명과 대대 규모의 기병대, 그리고 비슷한 숫자의 보조병을 합해서 많아야 2만 명이 채 안 되는 병력으로 지키는 것이므로, 효율과 기능성을 끝없이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막 부족의 습격은 반드시 격퇴해야 했다. 그들은 쳐들어와서 약탈해갈 뿐, 땅을 점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습격이 거듭되면 주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해변 도시로 피난한다. 주민이 떠난 농경지는 황무지로 변한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사막화밖에 없다. 사막화를 피하고 싶으면, 농사를 계속하여 땅이 늘 초록빛을 유지하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다. 고대의 북아프리카는 오늘날처럼 사막화되지는 않았고, 녹지가 제법 많았다. 처음에는 카르타고, 다음에는 로마가 농업 진흥에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인은 농업 기술서를 가진 민족이고, 그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도 페니키아어로 된 이 서적을 당장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이 두 강대국은 정착민인 농민을 비정착민인 사막 부족한테서 지켜주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과거에 대부분유랑민이었던 북아프리카 주민은 푸른 초목이 있어야만 비도 내린다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푸르름을 확보하는 유일한 방책은 평화밖에 없다는 이치도.
랑베즈를 떠난 하드리아누스는 바로 동쪽에 있는 타무가디(오늘날의 팀가드)를 방문한다. 이곳은 트라야누스 시대에 황제의 명을 받아 제3군단의 만기 제대자를 위한 식민지로 건설되었다. 도시를 세운 것은 제대를 앞둔 군단병들이었다. 퇴역한 뒤에 정착할 곳을 자기 손으로 지은 셈이다. 그 때문인지, 도시는 군단기지를 그대로 확대한 듯한 느낌을 주는 정사각형이다. 하지만 기지는 아니니까 원형극장도 있고, 물론 공공광장인 포룸도 있고, 공중목욕탕의 수는 규모가 작은 것까지 포함하면 14개나 된다. 사막지대 앞에서 완벽한 로마식 생활이 영위되고 있었던 것이다. 통칭하여 식민토시라고 부르는 이런 공동체는 대부분 현지 여자와 결혼한 제대병이 정착하여 이루어진 도시다 로마의 중앙정부는 식민도시의 자치를 인정했을 뿐 아니라 여러 가71 특전을 주어 발전을 도왔다. 이런 도시들이 그 지방의 경제력 향상의 핵심이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전보장면에서도 효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은 군무의 '베테랑'이었던 사람들이다. 현역 군단병의 기지 근처에 퇴역병들의 거주지역이 있으면, 그 지방의 방위력은 훨씬 강해진다.
로마는 아프리카 전선만이 아니라 다른 전선에서도 이런 방식을 채 택했다. 또한 군단기지 근처에는 '카나바이'라는 민간인 취락도 있었다. 로마의 군단기지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군단기지, 보조부대 기지, 성채, 감시용 요새와 망루로 이루어진 군사적 '방벽' 바로 안쪽에는 기지촌이라 해도 좋은 '카나바이' , 제대병들이 정착한 '식민도시· , 로마가 자치권을 부여한 원주민의 '지방공동체' 등이 산재해 있고, 이런 지역들이 모두 로마 가도로 연결되어 훨씬 높은 발휘하는 커다란 유기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광대한 제국을 15만 명 안팎의 군단병으로 방위할 수 있었고, 제국 전역에 도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유럽의 주요 도시들은 거의 다 로마의 군단기지에 기원을 두고 있다. 군단이 주둔하는 기지일 뿐이라면, 로마군이 떠나버린 뒤에는 폐허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군의 기지는 민간인도 포함된 연합체였다. 민간인은 군단이 떠난 기지에 이주했고, 그래서 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에도 사람들의 생활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로마군 최고사령관인 하드리아누스가 시찰 여행에서 전선의 군단기지 방문을 우선한 것은 당연하지만, 가는 길에 현지 주민-로마인의표현으로는 속주민-이 사는 '지방자치단체'를 방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들도 로마가 지켜주어야 할 대상일 뿐 아니라, 함께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제대병의 도시인 팀가드를 방문한 뒤, 로마 가도를 따라 동쪽의 아프리카 속주(오늘날 튀니지와 리비아 북부)로 돌아가서 바닷가에 줄지어 있는 사브라타, 트리폴리, 렙티스 마그나를 차례로 방문한다. 이들 도시는 포에니 전쟁 당시에는 카르타고 영토였고, 따라서 주민들도 카르타고계였다. 오늘날에도 훌륭한 유적으로 남아 있는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는 이곳 출신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황제 덕분에 웅장하고 화려한 대도시로 탈바꿈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이 카르타고계 로마인 황제가 태어나기 20년 전에 이미 대규모 로마식 '공중목욕탕'을 지어서 이 도시에 기증했다. 로마 제국은 이 일대의 도시에 군단병 1개 부대도 배치하지 않았다. 목욕탕을 짓는다는 것은 곧 상수도를 정비한다는 뜻이다. 로마 시대의 북아프리카는 로마 가도가 깔리고, 산지에서 도시까지 물을 끌어가기 위한 고가 수도가 길게이어져 있는 지방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렙티스 마그나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돌아왔다. 서기 126년 봄부터 시작된 순행이지만, 수도 로마로 돌아왔을 때는 아직 여름도 다 지나지 않은 계절이었다고 한다 상당한 강행군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 후 약 1년 반 동안 하드리아누스는 수도 로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기간에 로마법을 집대성하는 대사업에 착수했을 것이다.
로마법 대전
법률은 '선과 공정의 기술' (ars yoni et aequi)이란 말은 하드리아누스가 이 대사업을 맡긴 법률학자 유벤티우스 켈수스가 남긴 말이다. 내가 '기술'이라고 번역한 '아르◎ (ars)라는 라틴어는 이탈리아어에서는 'arte', 에스파냐어도 역시'arte', 프랑스어로는 'art', 영어도 'art', 독일어에서는 Kunst'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선과 공정의 기술'로 여겨진 로마법은, 법률이란 시대에 따라 보완 ·개정되어야 한다는 로마인의 법률관을 반영하여, 크게 다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기원전 753년부터 기원전 150년 무렵까지 600년. 건국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거쳐, 강대국 카르타고와 벌인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지중해 세계의 완전 제패를 향해 출발할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자국민인 라틴 민족만 염두에 두고 법률을 제정하면 되는 시대였다. 제2기-기원전 150년부터 서기 300년까지 450년 많은 민족을 아우른 보편제국 로마의 시대로서, 법률도 다인종,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의 공존공영에 적합한 것으로 바뀌어간다. 이 시대의 로마법은 그 자체가 이미 국제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3기-서기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25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한 뒤부터 동로마 제국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가 <로마법 대전>을 편찬할 때까지의 시대다. 한마디로 말하면 제1기와 제2기의 로마법은 진정으로 로마적이고, 제3기의 로마법은 오리엔트적, 기독교적으로 바뀌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아직 진정으로 로마적일 수 있었던 시대에 로마법을 집대성하려고 시도한 것은 하드리아누스가 처음은 아니다. 기원전 1세기에 이미 두권력자가 그것을 시도했다. 처음 시도한 사람은 독재관 코르넬리우스 술라였다(제3권에서 상세히 기술). 그러나 명석한 두뇌와 대담한 실행력에 목표를 향한 끈질긴 의지력도 충분히 갖고 있던 술라였지만, 그 의지가 한결같이 발휘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독재관에 취임하면서까지 시행하려고 애쓴 원로원 강화정책은 이루어졌지만, 그 목표를 달성한 뒤에 은퇴한 그는 법령을 집대성하는 작업에서도 '은퇴'해버렸다. 이때는 특히 형법을 집대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된 뒤, 술라의 은퇴로 묻혀버린 법령 집대성 작업을 발굴하여 그 범위를 민법까지 확대한 법령 집대성에 도전했지만, 그의 의지는 브루투스 일당에 의한 암살로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왜 이런 시도로부터 170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하드리아누스황제가 거기에 도전할 마음이 내켰을까? 그가 제국 각지를 순행한 목적은 방위선을 돌아다니며 쓸모 없다고 판단된 것은 폐기하고 필요한 것은 살려서 제국의 안전보장체제를 정비하고 재구축하는 것이었다. 법령 집대성도 단순히 법령을 모으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악법으로 간주되거나 시대에 맞지 않거나 하여 사실상 사문화한 법은 폐기하고, 필요한 법은 새로 제정하는 방법으로 방대해진 법령을 정비하고, 로마 사회의 규범인 로마법을 재구축하는 작업이다. 정비하고 재구축한다는 점에서는 군사도 법률도 마찬가지다. 하드리아누스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제국의 '구조조정'을 단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드리아누스가 로마법 집대성 작업을 맡긴 법률학자들 가운데 세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있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유벤티우스 켈수스, 살루비우스 율리아누스가 그들이다. 이들 세 사람이 법률 전문가였던 것은 당연하지만, 법률만 연구하는 학자 타입일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세 사람 다 실무 경험이 풍부하고, 게다가 법률 지식도 넓고 깊은 사람들이었다. 하드리아누스가 실무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일부러 골라서 등용한 것은 아니다. 로마에서는 법률에 정통한 사람은 모두 실무 경험도 풍부했다. 즉 선발 기준은 법률 지식에만 두어도 충분하고, 그 기준에 합격한 사람이라면 실무 경험도 풍부할 게 틀림없었다.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 여겨지는 프리스쿠스의 경력은 확실치 않지만, 트라야누스 시대에 이어 하드리아누스 시대에도 황제 '내각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알려져있다 원로원 의원이고, 따라서 명예로운 경력' 이라고 불린 국가 요직도 다 지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보다 몇 살 위인 듯한 켈수스는 트라야누스 시대에 법무관을 거쳐 집정관을 두 번이나 경험했고, 역시 하드리아누스 '내각'의 일원이었다. 남프랑스 태생으로, 39권에 달하는 <법령집>(Digesta)에 서간집과 평론집 등 다방면에 걸친 저술을 남겼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발탁되었을 당시 서른 살 안팎이었을 것으로여 겨지는 율리아누스는 옛날 카르타고 영토였던 아프리카 속주 출신이다 루키우스 옥타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살루비우스 율리아누스라는 이름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조상은 정복자 로마인의 노예가 되었다가 해방되어 옛 주인의 가문 이름을 받은 카르타고인일 가능성이 크다. 제정 시대 로마에서는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았다. 이 사람도 '명예로운 경력'을 차례로 경험했다. 회계감사관, 군단 대대장, 국세청장. 국세청은 원로원 속주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총괄하는 부서인데, 켈수스는 국세청장에 이어 황제 속주에서 들어오는 세금을 총괄하는 부서에서도 일했다. 율리아누스는 그 후 원로원 의원만 취임할 수 있는 법무관에 당선되어, 하드리아누스 시대에는 명예로운 경력'의 중간 단계까지 승진한 모양이다.
다음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에 들어서자마자 집정관에 당선되어 황제를 최고제사장으로 모시는 제사장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을 지냈다. 율리아누스는 장수를 누린 듯, 그 다음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도 활약하여, 이 황제 밑에서 에스파냐 타라고넨시스 속주 총독을 지냈고,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경력을 마쳤다. 90권에 이르는 <법령집>(Digesta)도 남겼다.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독자적으로 <법령집>을 남긴 것으로 보아, 하드리이누스는 세 사람이 모인 편찬위원회에 '로마법 대전'을 맡긴 것이 아니라 부문별로 맡겨져, 각자 맡은 부문을 책임지고 집대성한 게 아닌가 싶다. 프리스쿠스도 몇 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법령집>을 남겼기 때문이다. 특히 율리아누스는 황제가 원로원 의결을 기다리지 않고 발령할 수 있는 잠정조치법을 해마다 1년 단위로 집대성하는 일도 맡았다. 그는 이것을 <법령집>과는 별도의 독립된 저술로 남겼다 이들 세 사람의 작업에서 기본자료가 된 것 가운데 하나는 공문서 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는 판결문이었다. 해마다 판결문을 기록하여 보존하는 것은 그 해의 법무관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이 대사업이 완성되어 『로마법 대전』이 편찬된 것은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지 14년째인 서기 131년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로마 제국에서 법령이나 판례를 알 필요가 있는 사람은 정치가도 행정관도 검찰관도 변호사도 모두 자신의 '로마법 대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6세기 중엽에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로마법 대전>(Codex Justnianus repetitae Praelectionis)을 편찬하기 400년 전에 이미 로마인은 자신들의 법령을 집대성한 것이다. 그리고 오리엔트적 ·기독교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조차도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세 법률가가 정리하여 집대성한 법령이나 판례를 엄청나게 많이 전재했다는 것이 로마법 학자들의 정설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이룩한 로마법 재구축의 성과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에 흡수된 셈이다. 이것이 하드리아누스가 법률면에서 이룩한 업적의 역사적 ·법률적 의미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깊이 탐구하는 작업은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하고, 이들 세 사람의 <법령집>에서 흥미로운 부분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1) 국가반역죄로 고발하는 것을 '금지'했다 하드리아누스 자신이 즉위하자마자 이 죄목으로 네 명의 집정관 경험자를 처단한 것을 생각하면 위선처럼 들리지만, 그 후로는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또한 이 법률만큼 후세의 권력자들에게 무시당한 법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 고의에 의한 살인, 고의가 아닌 살인, 정당방위에 따른 살인을 각각 구분하여, 두 번째와 세 번째 살인은 무지라고 못박지는 않았지만 무죄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디딘 법률을 제정했다.
(3) 이전까지는 사형 또는 추방형에 처해진 자의 재산을 전부 몰수하여 국고에 귀속시켰지만, 이후로는 가족에게 12분의 1을 남겨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만 이것은 황제의 은전이라는 형태로 이미 시행되고 있던 것을 법제화한 데 불과하다.
(4) 유산상속권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일찍부터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있던 로마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하드리아누스가 제정한 법률에는 모르는 사람한테 받은 유산은 사양해야 하고 아는 사람한테 받았다 해도 그 사람에게 자식이 있을 경우에는 사양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황제를 비롯한 사람들의 유형 ·무형의 압력에서 가족의 상속권을 보호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로 여겨진다.
(5) 복무중인 병사는 원래 결혼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 병사가 복무하는 동안 태어난 자식은 서출로 취급되지만, 이제는 그런 자식이라도 가족으로 간주되어 유산상속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병사가 복무 중에 사망했을 때는, 군율 위반에 따른 처형으로 사망하지 않은 한, 전사든 병사든 자살이든 가족에게 유산상속권을 인정한다고 명문화했다. 이런 법률은 하드리아누스의 군사력 재구축과 같은 선상에 있는 법적 조치가 분명하다. 병사들의 사회적 환경을 향상시키기 위한 법률이라는 뜻이다.
(6) 난파선의 조난자가 해변까지 헤엄쳐왔을 때 습격하여 가진 것을 빼앗는 행위는 불문에 붙여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앞으로는 절도행위로 간주하여 엄벌에 처하게 되었다.
(7) 임신중인 여자에 대한 처벌은 엄금한다.
(8) 노예에 관한 법률도 개정하여, 어떤 이유로든 주인이 자기 소유의 노예를 죽이거나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것을 엄금했다. 아무리 주인이라도 노예를 개인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금지되고, 처벌할 사유가 있으면 고발하여 법정 판결에 맡겨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또한 집안에 노예나 하인을 가두는 감옥을 설치하는 것도 엄벌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사유재산인 노예라도 매춘업자나 검투사 업자에게 팔아 넘기는 것은 금지되었다. 주인이나 그 가족이 노예에게 살해되었을 경우, 고용인을 심문하면서 증언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가하는 일이 잦았지만, 앞으로는 고용인을 전부 심문할 필요는 없고 살해 현장이나 그 근처에 있었던 사람만 심문하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노예가 범인으로 밝혀져 사형이 확정된 경우, 종래에는 그 집안의 노예를 모두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이 조항은 폐지되고 범인만 사형에 처하도록 명문화했다 물론 과거에도 연대책임제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집행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네로 황제 시대에 400명이나 되는 노예에게 연대책임을 물어 처형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들을 동정한 시민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여 그 후로는 연대책임으로 처벌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9) 땅에 묻혀 있던 금품이 발견되었을 경우의 소유권도 명문화했다. 이 법률에 따르면, 발견자의 소유지에서 발견된 금품의 소유권은 발견자에게 있다. 공유지의 경우, 종래에는 그 땅의 주인인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소유권을 갖도록 되어 있었지만, 소유자와 발견자가 소유권을 양분하도록 바뀌었다. 또한 타인의 소유지인 경우에도 거기서 금품을 발견한 사람과 토지 소유자가 소유권을 반씩 나누어 갖게 되었다. 얼마 전에 영국에서 한 농부가 자기 소유의 농지에서 다량의 로마시대 동전을 발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발견물의 소유권은 발견자인 그 농부에게 있다는데, 그렇다면 현대 영국에도 하드리아누스 법이 살아 있는 것일까 나의 관심은 땅에서 캐낸 로마 시대의 통화를 영국박물관이 몽땅 구입해주지 않을까 하는 데 있었다. 영국박물관에는 무려10만 점이나 되는 로마 시대 동전이 소장되어 있다 그냥 소장만 하고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하여 연구하고, 관람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기꺼이 보여주기도 한다 경매에 붙여서 여기저기 흩어놓기보다 한곳에 모아서 보존하여 사람들이 언제라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공동 유산에 어울리는 대우가 아닐까. 영국 농부가 발견한 동전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10) 상거래에서 무게나 길이를 잴 때 사용하는 계측기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개조한 자는 엄벌 대상이 된다. 경제활동의 기본은 정직과 공정에 있다는 것이 하드리아누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11) 건축용 자재를 싼값에 구하기 위해 유서 질은 건물을 파괴하는 행위도 금지되었다. 현대식으로 생각하면 문화재보호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 법률은 기독교가 국교로 지정되어 다른 종교가 모두 배제되자마자 완전히 사문화된다.
(12) 공중목욕탕에서 남녀가 혼욕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로마인은 신상을 통해 나체를 보는 데 익숙해져 있고, 경기대회에도 선수들이 반라로 출전하기 때문에 나체와 친숙했다. 그래서 남녀 혼욕이 금지대상이 된 적은 그때까지 한번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자의 나신을 보면 살아 있는 비너스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역시 '성희롱' 같은 행위가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공'과 '사'의 구분에 상당히 과민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런 종류의 사고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녀 혼욕은 금지되었지만, 공중목욕탕은 남녀가 따로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지어져 있지 않았다. 또한 약간의 개조도 불가능할 만큼 견고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중목욕탕 입장시간을 남자와 여자로 구분했다. 제7시(13시)까지의 오전에는 여자, 제8시(14시)부터 일몰(18시 전후)까치는 남자라는 식으로. 로마 시대 남자들은 해가 뜬 뒤부터 오후 1시까지 집중적으로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속주에서는 그 지방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시간을 할당할 수 있었고, 광산이 있는 지방에서는 밤 9시까지 목욕탕 문을 열었다. 이 남녀 혼욕 금지법은 법이니까 누구나 따랐지만, 속으로 불만을 느낀 것이 남자뿐이었을까. 아니면 여자도 불만이었을까? 어쨌든 남녀 혼욕 금지에는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대찬성이었기 때문에, 느긋한 로마식 목욕은 그 후 영원히 모습을 감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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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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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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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8장 (나막신 공화국) 사절 시기
1521년 5월의 어느 날, 마키아벨리는 아펜니노 산맥의 정상을 뒤로한 채 볼로냐 쪽으로 말을 몰아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안장 주머니속에는 공화국 시절의 10인위원회를 대체한 8인집행위원회 gli Otto di Pratica의 명령서가 들어 있었다. 그 문서는 그가 오랫동안 근무하던 바로 그 부서에서 씌어졌고, 그것에 서명한 사람 역시 그를 대신하여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니콜로 미켈로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시 한번 정부 신임장을 들고 공화국의 경계 너머 토스카나를 벗어나 사절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의 조국이 그 날카로운 관찰자이자 예견력 있는 정치가인 그를 다시 기억해 냈단 말인가? 그리하여 그는 지금 또 다시 프랑스 왕과 황제에게로 가고 있는 것인가?
오 가엾은 마키아벨리여! 그는 단지 카르피에서 열리고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총회 모임 참석차 가고 있었을 뿐이었따. 그는 그곳에서 정무위원회 및 피렌체의 실질적인 군주인 메디치 추기경의 이름으로, 피렌체 영내의 프란체스코 수도원들은 여타 토스카나 지방의 수도원과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전할 것이었다(피렌체 내의 프란체스코 수도원들을 좀더 쉽게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정책이었음-옮긴이). 간단히 말해서, 추기경은 전용 교서로 자신의 뒤를 밀어주는 교황의 승인 아래, 일찍이 사보나롤라가 도미니쿠스 교단의 대역을 함으로써 안렉산드로 6세로 하여금 그를 파멸시킬 핑계를 주었던 그러한 일을 피렌체 영내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을 대신하여 해줄 심산이었다. 이러한 임무는 정치가에게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고, 더욱이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의 위대함과 천재성과 품성들, 그리고 (만드라골라)의 작자로서의 평판을 감안할 때, 그가 이러한 임무를 맡았다는 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결코 그것을 거절할 리 없었다. 그는 바로 그 메디치 군주들에게 (하찮은 일)이라도 좋으니 제발 자신을 써주십사고 간청했던 바 있었고, 그래서 이제 그들은 그에게 하찮은 일 하나를 내려준 셈이었다. 다시 한번 그는 운명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짓밟아 스스로를 부끄렇게 만들어보려는 심술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 길은 그를 어느 순간에 프란체스코 수도외의 총회장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 일은 그에게보다는 그것을 그에게 맡긴 사람들에게 더 부끄러움을 안겨줄 만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에 억눌렸던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는 더 나아지겠지 기대하면서 자신의 쓰라린 고통을 우스갯소리와 웃음 속에 감추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마키아벨리는 이 감미로운 계절에 아펜니노 산맥의 마지막 구릉지 사이를 막 감아돌아 내려가는 길이었고, 그의 발 밑에는 풍요로운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이 길을 잘 알았다. 그것은 이전에 다른 기대 속에서 수없이 오고 갔던 길이었다. 그는 이러저러한 곳을 알아보았고, 더 자신만만했던 당시의 여행들 도중에 자신이 했던 생각들을 되새겨 보았다. 여기는 그가 황제를 배알하려고 독일로 가는 길에 잠깐 묵었던 농가 오두막이었지. 그리고 또 여기는 1510년 무더웠던 여름날 그가 프랑스 궁정으로 가는 세 번째 사행길에 산등성이로부터 이리저리 급하게 말을 내리몰아 찾아왔던 그 시원한 냇물이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그는 탁발승들과의 협상을 위해 카르피로 가는 길이었고, 주머니 속에는 (나막신 공화국 la repubblica degli Zoccoli)(탁발승들이 신는 (나막신 zoccolo)에다 비유한 말. 여기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가르킴-옮긴이)에 관계된 훈령과 신임장이 들어 있었다.
피오 가의 고도인 카르피는 모데나로부터 12밀리오 떨어져 있는데, 마키아벨 리가 지나갈 예정이었던 그곳의 당시 총독은 또 다른 피렌체 사람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였다. 이 위대한 정치가 두 사람은 이미 서로간에 안면이 있었다. 1509년 니콜로는 뤼지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베로나 발 편지에서 그의 형 프란체스코에 대해 무언가 친구 사이의 일을 떠맡긴 적이 있었다. 니콜로가 정무궁에서 서기장으로 있고 프란쳇코가 에스파냐 주재 대사로 있을 당시, 둘 사이에 서로 교류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사실 프란체스코는 니콜로가 그에게 라벤나 전투를 (편향된 시각에서) 얘기했다고 불평한 적까지 있었다. 귀치르디니는 1513년말 자신의 임지에서 되돌아온 즉시 교회령 국가내의 명예와 부가 함께 보장되는 자리들에 임용되었던 반면, 마키아벨리는 촌구석에 갇혀서 그에게 그처럼 수많은 불행과 그토록 커다란 영광을 동시에 가져다줄 그 무료한 시간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이후 지금까지 그들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도 서로 만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탈리아의 폭풍이 그들을 한 배에 태우기 전까지는 이 둘 사이에서 의기상통한 어떤 감정이나 진정한 우정이라는 것을 찾기란 힘든 일이었다는 점이다. 귀차르디니는 귀족적인데다가 차갑도록 이기적이고 진중하며 예의가 깍듯한 인물이었으나, 마키아벨리는 평민적이며 피가 뜨겁고 마음이 너그러운 편인 데다 좀 경박스러울 정도로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전자가 실제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데 반해, 후자는 이론적이고 이상주의적이었다. 둘은 모두 그들의 진정한 위대성을 내밀하게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귀차르디니가 격조 높은 품격이라는 암벽 속에 그것을 가두어놓고 있는 데 반해, 마키아벨리는 일상이라는 옷을 입고 건달 같은 행동을 하고 돌아 다니는 데 개의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일생이 귀차르디니가 풍족하게 누렸던 명성과 권위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해서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시인과 혁신가들에게 흔히 퍼부어지는 비난의 소리는 제쳐두고라도, 바로 이러한 점이 그와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 넘기 힘든 물줄기를 뚫어놓았던 것이다. 반면 귀차르디니는 자신의 그 차가운 위엄으로 몸을 감싼 채, 후대의 사람들까지도 포함한 모두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 사람의 행운과 다른 한 사람의 불운 간에는 너무 간격이 져서 생전의 그들 사이에 경쟁이라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었다. 경쟁 관계는 그들 사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시간쯤이면, 마키아벨리는 그 고통스러웠던 여가 속에서 인쇄본으로든 필사본으로든 간에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작들을 이미 쓰고 펴낸 상태였을 뿐 아니라, 지금은 (피렌체사)를 집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부 일을 비롯한 다른 사무로 바빴던 귀차르디니는 별로 글을 쓰지 못했고 간행된 저작도 전혀 없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것에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재능에 마음이 이끌렸다. 그리하여 그와 편지를 주고받노라면 그의 뜨거운 열정이 자신에게로 옮아오는 덧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마키아벨리에게 쓴 편지들이 그의 서신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인간적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시인과 철학자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치를 하는 데는 그들이 오히려 위험스런 존재로 비쳤다. 카르피로 가는 이 사적 시기에 그가 친구에게 한 말을 들어보면, 마키아베리를 당시의 사람들과 갈라놓은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게 된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가리켜 (언제나 도에 지나친 주장을 펴고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썼던 것이다. 물론 이 말 속에는 어떤 아이러니컬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표적이 된 사람의 명예에 누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마키아벨리는 귀차르디니를 정말 좋아했으며, 장차 어느 땐가의 편지에서 자신의 이러한 감정을 불쑥 토로하게 될 것이었다. 귀차르디니가 시인이자 혁신가적인 그의 (과장성)을 이해해 주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슬펐지만 결코 그에 대해서 어떤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그의 성품이 그렇듯이, 그는 오히려 귀차르디니의 덕성을 칭찬하였고 더욱이 그의 행운을 찬탄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메디치 군주들)이 그렇게 큰 일들에 쓴 인물, 조국을 빛낸 피렌체인에게 존경의 염을 표하였다. 그는 자신과 동등한 입장에서 국가사를 논할 수 있었던 정치인,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만은 그의 단단하고 차가운 껍질을 깨고 나왔던 인물을 좋아하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틀림없이 카르피 가는 길에 모데나에 들렀고 돌아오는 길에도 다시 그곳으로 갔을 것이다. 둘은 함께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당면 문제들에 대해서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기이한 사행을 두고 질탕한 농담을 주고받았으리라. 이때가 그의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산 카쉬아노의 곰팡내 나는 생활을 떠나 그토록 먼 거리를 말 잔등에 얹혀왔던게 아니었는가 말이다. 이제 여독을 느낄 때도 되었을 것이다. 그는 5월 11일이나 12일에 피렌체를 떠나 모데나에서 하룻밤과 한나절이 채 못 되는 동안을 묵었다. 그는 탁발승들이 저녁 기도를 위한 종을 울리기 전에 도착했는데, 그것은 일라리오네라는 이름의 수도사가 그렇게 하도록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모두를 상전으로 모셔야 할 판이었다.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도 친구와 계속 대화하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에게는 이어서 더 기이한 임무가 맡겨졌는데, 이 덕분에 그들간에 나눌 이야기 거리도 더 많아진 셈이었다. 양모 조합의 조합장들이 그에게 쓴 5월 14일자 편지에는, 그곳 수도사들에게 잘 얘기해서 조반니 괄베르토 다 피렌체라는 저명한 수도사(별칭이 (북풍)일 정도였다)로 하여금 다가오는 사순절에 두오모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는 부탁의 말이 담겨 있었다. 이 전언은 마키아벨 리가 길을 떠난 때보다 이삼 일 뒤에야 부쳐졌으나, 우편이 더 빨라서 카르피에는 그와 거의 동시에 도착하였다. 아마 한 친구의 편지를 통해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것으로 생각되는 귀차르디니는 그럴 더 놀려먹을 기회를 갖게 된 셈이었다. 그는 17일자로 마키아벨리에게 편지를 써서, 피렌체의 유명한 대식가이자 동성연애자인 파키에로토로 하여금 (친구에게 아름답고도 우아한 아내를 찾아주도록 한 것)처럼, 그에게 설교자를 구하게 한 것은 정말 기막힌 생각이라고 농을 던졌다. 그리고는 이어서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자네가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자네의 명예를 지키면서 일을 하리라 믿네. 하지만 이 나이에 새삼 신심을 새롭게 해서 명예를 흐리게 하지는 말게나. 지금까지 언제나 그 반대로만 살아온 자네 처지에 신심을 돈독히 한다는 건 미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치함으로 치부될 테니 말일세.) 그는 끝으로 수도사들이 그를 위선자라고 비난하기 전에, 그리고 유구한 영향력을 가진 카르피의 분위기가 그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기 전에, 서둘러 일을 마치라고 조언하면서 글을 맺었다. 아니 한 가지 더. 얄궂은 운명의 장난에 의해 만일 그가 어떤 카르피 사람의 집에 묵게 된다면, 그의 병에는 약이 없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시지스몬도 산티라는, 그 도시의 군주인 알베르토 피오의 서기장 집에 유숙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는 곧 집주인과 수도사들을 놀려먹을 생각으로 반짝거렸다. 즉 귀차르디니로 하여금 그에게 특별 전령을 자꾸 보내게 해서, 사람들이 그를 귀하신 분으로 보도록 만들어 더 존경도 받고 식사 대접도 나아지도록 하려는 게획을 세운 것이다. (이 얘기를 들려주지 않을 수 없겠네. 그 궁수가 편지를 가지고 도착하여 땅에 코가 닿다록 절을 하면서 급한 일로 특별히 왔다고 말하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우왕좌왕하ㅇ며 존경스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네. 그 중 몇 사람이 나에게 새소식을 묻더군. 그래서 나는 내 위신을 높일 겸 이렇게 말해 줬지. 사람들은 황제를 트렌토에서 기다리고 있고 스위스는 새 의회를 소집했으며, 프랑스 왕은 가서 그 왕과 만나려 하지만 그의 자문관들은 그것에 반대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네. 그랬더니 사람들은 모두 입을 헤 벌린 채 모자를 벗어들고는 내가 편지를 쓰는 동안 내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지 뭔가. 내가 장문의 편지를 쓰는 양이 그들에겐 신기한지 마치 무엇에 홀린 듯이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네. 나는 그들을 더 놀래줄 양으로 가끔 펜을 멈추고는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지. 그랬더니 모두 침을 질질 흘리더군. 만약 그들이 내가 무엇을 쓰고 있었는지를 알았다면, 더 놀라 자빠졌을걸세.)
그는 5월 17일자 같은 편지의 서두에서 설교자를 택하는 일에 대해 우스갯소리를 장화하게 늘어놓았다. 수도원들을 격리시키는 문제는 모든 것이 수도사들의 선거가 끝날 때를 기다려야만 했는데, 이 또한 그에게 새로운 농짓거리의 소재가 되었다. (난 이곳에서 할 일없이 빈둥대고 있네. 수도회 총장과 감독관들이 선출될 때까지는 아무것도 일을 볼 수가 없는 형편이라네. 그래서 일을 한번 꾸며보기로 했지. 스캔들이 일어나도록 해서 그들이 나막신을 끌고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도록 말일세. 내가 잘만 한다면 성공하리라 믿네. 자네의 조언과 도움이 있다면 훨씬 낫겠지.) 카르피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칠 거라는 귀차리디니의 농에 대해서 그는 뻔뻔스러운 어조로 지금까지 거짓말 박사로 지내온 마당에 자신이 배울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믿는 것을 말하지 않고, 내가 말하는 것을 믿지 않으며, 혹시라도 진실을 말할 때가 있다 해도 그것을 알지 못하도록 이러저러한 거짓말 속에 숨겨버리기 때문이네.) 또다시 그는 스스로가 가지고있지도 않은 악습들을 마치 가지고 있는 양 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귀차르디니는 친구의 장난에 같이 마음이 동해서 이 게임을 계속하기로 하고는, 마치 그가 중요하고도 극히 비밀을 요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것처럼 꾸며 시지스몬도를 놀려먹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일 하룻동안 두 통의 편지를 마키아벨리에게 보냈다. (친애하는 마키아벨리 보게나. 난 자네에게 조언할 시간도 재간도 없을 뿐 아니라 보통은 아무 보수도 없이 그런 일을 하지도 않네만, 자네의 그 험난한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력하나마 도움을 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네. 그래서 여기 궁수 하나를 전령으로 보내네. 그에게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하므로 최대한 빨리 전하라는 지시를 미리 내려두었으니까, 아마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뛰어들어갈 테지. 그가 들어오는 양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주접거리는 모습을 보면, 모드들 자네가 귀하신 몸이며 자네의 일이 탁발승과의 일과는 다른 중요한 것이라고 믿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네. 그리고 우편물이 두꺼워야 주인이 믿을 것이므로, 내가 취리히로부터 받은 통신문들을 동봉할 테니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든지 자네 손에 들고 있든지 알아서 편리할대로 사용하게나.) 마키아벨리는 이 편지를 받고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자신하건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고 말할 수 있네. 숨이 턱에까지 찬 전령의 모습과 두꺼운 편지 뭉치 사이에서 이 집과 이웃의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어버렸지 뭔가. 나는 메쎄르 시지스몬도를 특별히 생각해 주는 척하며 그에게 스위스와 왕 사이의 조약 내용을 언급한 부분을 보여주었다네. 그는 이를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네. 그래서 황제의 병환과 그가 프랑스로부터 사고 싶어하는 나라들에 대해 말해 줬지. 그랬더니 그도 놀라 침을 질질 흘리더군.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뭔가 미심쩍어하는 눈치일세. 왜 그 많은 편지들이 갑자기 탁발승만이 가득한 이 아라비아의 사막에 나타났는지 도대체 의심스럽고 이해할 수 없다는 거겠지. 그리고 나 역시 그에게는 자네가 편지에서 썼던 바와는 달리 그렇게 대단한 사람으로 비치는 것 같지는 않네. 노상 집안에 죽치고 있으면서,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아니면 그냥 찍 소리 않고 처박혀만 있으니 왜 안 그렇겠나. 그래서 자네가 나와 그를 두고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쩌나 싶네. 그가 뭔가 캐물어도 난 엉뚱한 쪽으로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다가올 홍수나 언젠가는 우리를 침공해 올 투르크에 대한 이야기, 또는 이 시대에 심자군을 일으키는 것이 합당한지 어쩐지 등등 술집에서 흔히 하는 잡담들을 늘어놓는다네. 그는 아마 자네를 대면해서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묻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걸세. 그도 그럴 것이 자네야 말로 그를 이 혼란에 빠뜨린 장본인이 아닌가 말이야. 나야 뭐 집에서 괜히 그를 바쁘게 만드는 성가신 존재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는 이 장난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눈치네. 그래서 그런지 계속 환대하는 얼굴에다 식사도 연일 진수성찬이라 나도 얼싸 좋다 하고 먹어치우지. 그리고는 점심 때면 '야! 오늘 아침엔 2줄리오 giulio (교황 줄리오 2세가 처음 만든 은화-옮긴이) 벌었네,' 저녁 식사 때는 '오늘밤엔 4줄리오'하고 중얼거린다네.) 두 피렌체인은 이런 식으로 게속 농을 주고받았고, 마키아벨리는 이에 더해서 대접까지 잘 받고 있었다.
장난기를 거두고 이야기를 먼저 진지하게 되돌린 쪽은 귀차르디니였다. 그는 1일자로 된 것들 중 두 번째 편지에서, 마키아벨리 정도의 인물이 설교자 구하는 일 때문에 탁발승들에게 사절로 보내졌다는 이 희극적 장면 속에 담긴 거의 비극적인 비애감을 표시하였다. (나는 공화국 및 수도사 사절 이라는 자네의 직함을 보면서, 엣날 자네가 상대했던 그 많은 왕과 제후들을 생각했다네. 그리고는 리산드로스 Lysandros(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격파한 스파르타의 장군-옮긴이)를 기억해 냈지. 그토록 많은 승전과 전리품을 뒤로 하고 스스로 영예롭게 이끌었던 바로 그 병사들에게 급식하는 일을 맡게 되었던 그 인물 말일세. 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지. 바뀌느니 사람의 얼굴과 사물의 외양뿐이요, 사건은 언제나 되풀이될 뿐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이미 일어나지 않았던 일은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건의 이름과 얼굴이 바뀜으로써 오직 현명한 자만이 그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법. 역사가 우리에게 좋고 유인한 것은, 우리에 앞서 존재하면서 우리가 결코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일들을 다시금 알고 보도록 해주기 때문이 아니겠나. 사제식 추론법에 따르자면, 이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이 나오지. 자네에게 역사를 쓰도록 배려한 사람들은 칭송받아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자네는 자네에게 맡겨진 그 일을 지체 말고 부지런히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것일세. 이를 생각하면 지금의 이 사절 임무도 깡그리 쓸데없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네. 이 삼 일 간의 여가 동안 자네는 나막신 공화국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이 실례를 자네의 다른 에들과 비교 대조해 봄으로써 자네의 목적에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네.) 이러한 말 속에는 그가 마치 (리비우스 논고)나 (군주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그는 곳 평소의 쾌활함으로 돌아온다. (난 자네가 시간을 죽이거나 운세가 좋을 때 그것을 잡지 못하는 것은 자네에게 유익함이 없는 것으로 보았네. 그래서 늘 하던 대로 다시 전령을 보냈다네. 그게 다른 일에는 별 소용이 닿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내일 아침 파이 하나는 더 얻게 해주지 않겠나.) 하지만 이제 농담 거리도 떨어졌고, 그가 맡은 일도 끝나 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19일자 편지에서 보듯이, 그는 자신의 총독 친구에게 주인집 사람의 의심스러운 눈치에 대해 말하면서 장난에 종지부를 찍었다.
제기랄! 이 작자에게 신경 좀 써야겠네. 눈치 빠르기가 흡사 악마 삼만을 합친 것 같다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가 자네의 장난을 알아차린 듯하이. 왜냐하면 전령이 오자 그자 이렇게 말했거든. (이것 봐. 틀립없이 뭔가 내막이 있어. 전령이 너무 잦거든.) 그리고는 자네의 편지를 읽고 나서 또 이렇게 말했다네. (내 생각으로는 총독이 나와 당신을 놀리고 있는 것 같은데.) (...) 그래서 난 지금 변도 제대로 못 볼 지경이라네. 그가 빗자루를 들고는 나를 여인숙으로 쓸어내 버리면 어쩌나 하고 말일세. 그러니 내일 하루는 쉬어주게나. 이 장난이 지나쳐서 여태까지 좋았던 사정이 완전히 뒤집히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어쨌든 요 삼 일 동안은 좋은 음식에 편안한 잠자리에 여러 모로 참 잘 지냈다네.
오늘 아침에 수도원 분리 문제에 착수했네. 이 때문에 아마 온종일 바쁠걸세. 내일이면 끈날 것 같네만. (...)
역사와 나막신 공화국에 대해서라면, 내가 여기 와서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지는 않네. 왜냐하면, 난 여기서 나름의 장점을 지닌 수많은 규율과 제도적 장치들을 접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이를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일세.
탁발승들의 제도와 규율을 관찰한 것에 대한 이 마지막 구절은 그야말로 마키아벨리 그 자체, 즉 만사에 자신의 끝없는 호기심을 발휘하는 마키아벨리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점, 좋은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를 논외로 할 때, 그가 이 사절 시기 동안 얻은 것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설교자 문제에 관해서는 실제로 그는 비아냥거리는 어조이긴 하지만 dpt 역사 사실들을 방편으로 삼아 그 축복받은 북풍 신부의 고지식함은 완화하고 피렌체 사람들에게는 그 고귀한 성인의 설교를 통해 위안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려 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잠깐 동안이지만 무례한 농짓거리는 거둔 채 이렇게 썼다. (보건대 신앙이라는 외투 속에 스스로를 감춘 악한들이 얼마나 신뢰를 받고 있는지, 가장이 아니라 진실로 프란체스코 성인이 걸었던 궂은 길을 따르는 선인들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난 쉽게 간파할 수 있다네.) 하지만 북풍 신부가 난색을 표했고, 이 기묘한 사절께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그의 말로는 자신이 더 이상 피렌체에서 합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세. 그리고 그가 이전에 그곳에서 설교할 당시, 창녀가 대중 앞에 나설 때엔 반드시 황색 베일을 써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누이가 보내온 편지로는 청녀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옷을 입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전보다 더 꼬리를 치고 다닌다며 이러한 점들을 매우 못마땅해했다네. 하지만 난 그를 달래려고 이렇게 말했네. 큰 도시에서는 어떤 일도 오래 지속됨이 없이 오늘 다르고 내링 다른 것이 보통이므로, 그 일에 너무 놀라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일세. 그리고는 로마와 아테네의 경우를 보라고 했더니, 그는 비로소 마음이 한층 가라앉아 나에게 거의 언질을 주었다네.) 그러나 다음날 그는 또다시 마음이 흔들렸고, 그의 상급자가 찾아와서는 그가 다른 곳에 가기로 정해졌다는 말을 전했다. 나로서는 이 일이 결국 어떻게 끝났는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 결과를 꼭 알아야 할 만큼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수도원 분리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미 얘기했듯이, 그 일은 19일날 시작되어 20일에 끝나 버릴 정도였다. 어쨌든 이 일에서도 마키아벨리 특유의 솜씨는 수도사들의 어지러운 강변들 속에서 어느틈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총회 평의원들을 한 사람씩 따로 만나서는, (그들 모두에게 말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하고 날카로운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전했다). 그는 이 일을 교황이 원한다는 정치적 무기를 내 보였고, 그런데도 이 사안이 수도회 200년 이래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반응이 나오자 마침내는 (인간의 지혜란 자신이 지킬 수도 그렇다고 누구에게 팔 수도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포기할 줄 아는데 있다)는 말까지 내뱉기에 이르렀다.
(소인배들 같으니.)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하며 그 형편없는 탁발승들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추기경과 8인집행위원회로부터 오는 새로운 공한들이 그들의 숙고 과정에 보탬이 될 것이었으리라. 일라리오네 신부가 미키아벨리에게 빨리 말에 올라 피렌체로 가서 그 편지들을 받아로라고 권하자, 지금까지 카르피에 있을 만큼 있었던 그로서는 이것이 여기서 벗어나 그를 파견한 사람들을 놀려먹을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모데나에 도착하자 22일까지는 피렌체로 들어가라는 신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추기경에게 거침없는 논조로 장문의 보고서를 올렸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신은 (약간 몸이 불편한 관계로) 말을 빨리 달릴 수 없다는 말을 집어넣었다. 그리하여 그는 총독의 말 잘 타는 전령 하나를 대신 보내고는, 8인집행위원회와 추기경과 프란체스코 수도외의 조바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데나에 눌러앉아 귀차르디니를 벗삼아서 며칠을 즐기며 보낸 뒤, 여유작작하게 피렌체로 돌아왔다.
바로 이러한 것이 카르피에서의 임무였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흡사 마키아벨리의 전 생애를 상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가 얻은 것은 단지 좋은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만은 아니었다. 그는 비록 자신에게 그 일을 맡긴 어리석은 사람들의 마음에 쏙 들게 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처럼 쾌활한 얼굴을 잃지 않음으로써 후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아울러 역경의 시기에도 그 유쾌한 편지들을 남김으로써 명예를 얻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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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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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6. 지혜의 샘
간결함은 지혜의 샘이다.
무지한 사람의 꿈은 틔우기 쉬워도 설익은 지식을 뽐내는 자의 꿈은 틔우기 힘들다. 무엇에 혹해 있는 사람을 설득하기란, ‘하루살이’에개 ‘내일’과 ‘모래’를 설명하는 것처럼 어렵다. 종교를 모르는 사람보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을 설득하기가 훨씬 힘든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유
무덤에 부채질
장자가 산책하던 중 상복차림의 여인이 무덤 옆에서 부지런히 무덤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호기심 많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그가 그 여인 옆에 가서 물었다.
“무덤 속에 계신 분이 누구십니까?”
“제 남편입니다.”
“남편이 화병으로 돌아가셔서 그 화를 식혀 드리려고 부채질을 하시는지요?”
“아녜요. 남편은 술에 취해 물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래서 남편 몸의 물기를 바짝 말려 하늘나라에 보내시려고 부채로 부치고 계시는군요?”
“아녜요, 제가 부채를 부치고 있는 것은 남편의 시체가 아니고 무덤의 흙입니다.”
“아니, 무덤에다 부쳐요,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남편이 죽기 전 나에게 자신의 무덤 흙이 마르기 전에는 절대로 다른 사내에게 시집가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빨리 무덤의 흙을 말리기 위하여 이렇게 부지런히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첩
중국 노나라 사람 하나가 멀리 장사를 나갔다. 그 사이 그의 아내는 딴 남자와 눈과 배를 맞추었다. 남편이 돌아올 날이 가까이 오자 간통한 남자가 걱정을 태산같이 하면서 안절부절하였다. 여자가 말했다.
“근심할 것 없습니다. 남편이 돌아오면 독약 탄 술을 먹여 영원히 잠재워 버리고, 우리 서로 마음놓고 삽시다.”
며칠이 지나자 남편이 집에 돌아왔다. 아내는 첩을 시켜 독약을 넣은 술을 갖다주게 하였다. 첩은 술에 독약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고 싶었으나, 말하면 그 아내가 죽을 것이고 하지 않으면 남편이 죽을 것이므로, 둘 다 살리는 방법을 썼다. 거짓 쓰러지는 척 하면서 술잔을 뒤엎어 버린 것이다. 화가 난 남편은 첩을 채찍으로 여러번 때렸다고 한다. 무덤에 부채질하고 술잔을 뒤엎는 등 해괴망칙하게 보이는 행동에도 반드시 그 까닭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남이 이상한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을 비웃지 말고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그 원인을 분석하여야 한다. 그러고 보면 반드시 곡절이 있게 마련이다. 자기를 살려준 현명한 첩을 채찍질하는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 이 세상에 너무 많다.
처녀가 아기를 가져도 할 말이 있다. (There is reason in the roasting eggs.)
간결함의 지혜
촌철살인이란 말이 있다. 촌이란 성인 남자 손가락 하나의 폭을 말한다. 촌철이란 한 치도 못되는 칼날을 말하며, 살인은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 아니라 속된 마음의 생각을 없애준다는 뜻이다. 간단하고 짧은 말로 문제의 핵심을 찔러 사람을 감동시킬 때 쓰는 어구이다. ‘말이란 뜻을 전달할 따름이다’라고 논어는 말한다. 말과 문장은 뜻을 나타내는 수단이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상대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하면 충분하다. 공연히 말을 붙이거나 늘어놓으면 진실성이 없어진다. ‘말은 전체의 뜻을 뚜렷이 하면서 간결해야 한다’라고 서경은 말하므로 함부로 늘어놓지 말아야 한다. 또 주역에 이르기를 ‘글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말은 가지고 있는 뜻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하므로, 말이나 글은 아무리 늘어놓아 봐야 뜻하는 바를 모두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간단하고 짧게 하는 습관을 기르자. 간단한 말은 웅변과도 같다고 하지 않는가?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에서 노신 포로니어스가 왕과 왕비에게 햄릿의 정신상태를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간단하고 짧은 말이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하므로,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는 미쳤습니다.”
짧고 재치 있는 대화를 보자.
말이 많기로 유명한 이발사가 손님에게 물었다.
‘머리를 어떻게 깍아 드릴까요?’
‘가능하다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깍아주세요.’
간결함은 지혜의 핵심이다.(Brevity is the soul wit.)
여기서 'the soul of wit'는 ‘essence of wisdom'의 뜻으로서 wit는 유머를 뜻하지 않고 의사전달의 측면에서 재치나 기지를 뜻한다. 짧고 간결해야 재치를 더하게 된다는 말이다.
불에 놀란 아이
어떤 일에 크게 낭패를 보거나 혼이 난 경우 그에 대한 경험은 쉽게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불에 데인 어린아이는 또 데일까 무서워 불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하고, 개에게 한번 물리고 나면 개를 겁내기 마련인 이치와 같다. <삼국지>의 제갈공명은 출사표를 올리고 위나라와의 결전을 위해 싸움터에 나갔다. 그는 위나라의 사마중달을 계략을 써서 여러번 속였고 이에 중달은 점차 공명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갈공명과 같은 기재도 천수는 어떻게 할 수 없었던지 의도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54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죽었다. 제갈공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마중달은 그것 역시 제갈공명의 계책으로 알고 군대를 거두어 갑자기후퇴하였다. 백성들이 이 사실을 알고 ‘죽은 제갈공명이 산 중달을 도망치게 하였다’고 하며 중달의 겁 많음을 비웃었다. 하지만 사마중달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 “살아 있는 사람의 책략이라면 쉽게 간파할 수 있으련만, 죽은 사람의 책략인데 어떻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했다 한다. 땡볕에 더위 먹은 소는 달빛만 봐도 헐떡거린다고 하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은 빈말이 아닌 게 틀림 없다.
불에 놀란 아이 부지깽이만 보아도 놀란다. (A burnt child dreads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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