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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9호 - 2024.9.11. 수요일(음력 : 8.9.)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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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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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란 할 때는 말로 주고 싶고, 받을 때는 되로 받고 싶은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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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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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공기가 차네요
한국어는 표기와 발음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한국어를 표기하는 원칙과 발음하는 원칙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한국인이 사용하는 말이고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하는 글이다. 말의 사용은 입과 귀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지각 행위인 반면 글의 사용은 손과 눈의 사용으로 이루어지는 지각행위이기 때문에 감각기관이 서로 다르게 작동된다. 예를 들어 ‘눈빛으로 말한다.’라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한글맞춤법’이라는 어문 규정을 지각하고 눈과 손의 감각기관을 작동시켜 글을 쓰는데 비해 이것을 [눈삐츠로말:한다]라고 읽고 말하기 위해서는 ‘표준발음법’이라는 어문 규정을 지각하고 입과 귀의 감각기관을 작동시켜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어의 표기와 발음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데도 표기대로 잘못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밤공기가 차다’라는 문장을 발음할 때 ‘밤공기’를 표기대로 [밤공기]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는 [밤꽁기]라고 된소리 발음을 해야 한다. ‘인기척’과 ‘안간힘’ 역시 표기대로 [인기척], [안간힘]으로 발음하면 안 되고 [인끼척], [안깐힘]으로 발음해야 한다. 또한 ‘눈시울’, ‘몰상식’, ‘종소리’도 [눈씨울], [몰쌍식], [종쏘리]로 발음을 해야 한다. 이처럼 표기대로 발음하지 않고 된소리로 발음해야 하는 이유는 표기상으로는 사이시옷이 없더라도 관형격 기능을 지니는 사이시옷이 있어야 할 합성어의 경우에는 뒤 단어의 첫소리 ‘ㄱ, ㄷ, ㅂ, ㅅ, ㅈ’을 된소리로 발음한다는 표준발음법 규정에 따른 것이다. 한국어는 표기와 발음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발음을 해야겠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가엾다’와 ‘가엽다’
‘마음이 아플 만큼 딱하고 불쌍하다’를 뜻하는 말은 ‘가엾다’일까, ‘가엽다’일까? 둘 다 맞다. 즉, ‘가엾은 아이’도 가능하고 ‘가여운 아이’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가엾다’는 ‘가엾고, 가엾은, 가엾어’ 등으로 활용하고, ‘가엽다’는 비읍불규칙용언이므로 ‘가엽고, 가여운, 가여워’ 등으로 활용한다.
‘웃어른에게 말씀을 올리거나 인사를 드리다’를 뜻하는 ‘여쭈다’와 ‘여쭙다’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다. ‘여쭈다’는 ‘여쭈고, 여쭌, 여쭈어(여쭤)’로, ‘여쭙다’는 ‘여쭙고, 여쭈운, 여쭈워’로 활용한다. “선생님께 여쭈어/여쭈워 보아라.”
‘웃어른을 대하여 보다’라는 뜻의 ‘뵈다’와 ‘뵙다’도 둘 다 표준어이다. ‘찾아뵈다’와 ‘찾아뵙다’도 그러하다. 단, ‘뵙다’가 ‘뵈다’보다 더 겸양의 뜻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뵈다’는 ‘뵈고, 뵌, 뵈어(봬)’로 활용하고, ‘뵙다’는 ‘뵙고, 뵙는’으로 활용한다. ‘뵙다’는 ‘-어’나 ‘-은’처럼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들과는 함께 쓰이지 못한다. “할아버지를 봬야 해요.” “할아버지를 뵙고 가겠다.”
‘잡수다’와 ‘잡숫다’는 둘 다 ‘먹다’의 높임말이다. ‘잡숫다’는 ‘잡수시다’의 준말인데, ‘잡수다’보다 조금 더 높이는 뜻이 있다. ‘잡수다’는 ‘잡수고, 잡순, 잡수어(잡숴)’로 활용하고, ‘잡숫다’는 ‘잡숫고, 잡숫는’으로 활용한다. ‘뵙다’와 마찬가지로 ‘잡숫다’도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와는 함께 쓰이지 못한다. “진지 잡수고/잡숫고 가세요.”
참고로 ‘마음이 안타깝거나 쓰라리다’를 뜻하는 말로 곧잘 쓰이는 ‘애닯다’는 표준어가 아니다. ‘애달프다’만 표준어이므로 ‘애달프고, 애달픈, 애달파’ 등과 같은 활용형만 가능하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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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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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 천상병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톳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
임종 - 정지용
나의 임종하는 밤은
귀또리 하나도 울지 말라.
나종 죄를 들으신 신부는
거룩한 산파처럼 나의 영혼을 갈르시라.
성모취결레 미사때 쓰고 남은 황촉불 !
담머리에 숙인 해바라기꽃과 함께
다른 세상의 태양을 사모하여 돌으라.
영원한 나그네ㅅ길 노라로 오시는
성주 예수의 쓰신 원광 !
나의 영혼에 칠색의 무지개를 심으시라.
나의 평생이오 나종인 괴롬 !
사랑의 백금 도가니에 불이 되라.
달고 달으신 성모의 이름 부르기에
나의 입술을 타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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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뜰 - 김수영
무엇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뜰이여
나의 눈만이 혼자서 볼 수 있는 주름살이 있다 굴곡이 있다
모오든 언어가 시에로 통할 때
나는 바로 일순간 전의 대담성을 잃어버리고
젖먹는 아이와같이 이즈러진 얼굴로
여름뜰이여
너의 광대한 손을 본다
「조심하여라! 자중하여라! 무서워할 줄 알어라!」하는
억만의 소리가 비오듯 내리는 여름뜰을 보면서
합리와 비합리와의 사이에 묵연히 앉아있는
나의 표정에는 무엇이지 우스웁고 간지럽고 서먹하고 쓰디쓴 것마저 섞여있다
그것은 둔한 머리에 움직이지 않는 사념일 것이다
무엇때문에 부자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때문에 자유스러운 생활을 피하고 있느냐
여름뜰이여
크레인의 강철보다 더 강한 익어가는 황금빛을 꺾기 위하여
너의 뜰을 달려가는 조그마한 동물이라도 있다면
여름뜰이여
나는 너에게 희생할 것을 준비하고 있노라
질서와 무질서와의 사이에
움직이는 나의 생활은
섧지가 않아 시체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름뜰을 흘겨보지 않을 것이다
여름뜰을 밟아서도 아니될 것이다
묵연히 묵연히
그러나 속지 않고 보고 있을 것이다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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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 이해인 (21~25)
21
이 가을엔 안팎으로 많은 것을 떠나보냈습니다. 원해서 가진 가난한 마음 후회롭지 않도록
나는 산새처럼 기도합니다. 詩도 못 쓰고 나뭇잎만 주워도 풍요로운 가을날,
초승달에서 차오르던 내 사랑의 보름달도 어느새 다시 그믐달이 되었습니다.
22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은 변함이 없고 내 마음 위에 우뚝 솟은 사랑도 변함이없습니다.
사랑은 밝은 귀, 귀가 밝아서 내가 하는 모든 말 죄다 엿듣고 있습니다.
사랑은 밝은 눈, 눈이 밝아서 내 속마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읽어 냅니다.
사람은 늙어 가도 늙지 않는 사랑. 세월은 떠나가도 갈 줄 모르는 사랑.
나는 그를 절대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23
잊혀진 언어들이 어둠 속에 깨어나 손 흔들며 옵니다. 국화 빛 새옷 입고,
석류알 웃음 물고 가까이 옵니다. 그들과 함께 나는 밤새 화려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찔레열매를 닮은 기쁨들이 가슴 속에 매달립니다.
풀벌레가 쏟아 버린 가을 울음도 오늘은 쓸쓸할 틈이 없습니다.
24
당신이 축복해 주신 목숨이 왜 이다지 배고픕니까. 내게 모든 걸 주셨지만 받을수록 목마릅니다.
당신께 모든 걸 드렸지만 드릴수록 허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끝이 나겠습니까.
25
당신과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아침 미사에서 나팔꽃으로 피워 올리는 나의 기도 - 나의 사랑이 티없이 단순하게 하십시오. 풀숲에 앉은 민들레 한 송이처럼 숨어 피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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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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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그는 그렇게 살았다
우리들은 마음의 소극적인 부분과 적극적인 견해를 적당히 융합시키면서 중용의 삶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매사에 안달하지 않고 헛되이 수고하는 것도 아니며 인생의 책임에서 도피한단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으로써 조화로운 개성을 배양하여 인생의 기쁨과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애를 산 대표적인 사람으로 나는 중국 문화가 낳은 최대의 시인이며 조화로운 인간 도연명을 떠올린다. 그는 기실 높은 벼슬을 지낸 것도 아니고 권세나 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의 삶은 몇 권의 서책에서 우러나오는 참되고 솔직한 맛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은 활기차고 이론을 숭상하는 무리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세속적인 욕망에 반항하였으되 도피하려 하지 않았으며 관용을 잊지 않는 생활과 조화를 잘 유지해 나간 인물이다. 도연명은 4세기 말 세상에 나왔다. 그는 젊은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한 무더기의 기왓장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나르고, 오후에는 그 반대의 일을 되풀이하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청년 시절 노친을 부양하기 위해 말단 관직에 나서기도 했지만 곧 은퇴하여 전원으로 돌아가 평범한 농부가 되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술을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손님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술만 있으면 누구와도 흔쾌히 잔을 기울였다. 간혹 자신이 초청한 술자리에서는 먼저 거나해지면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취해서 졸립군. 이제 그대는 돌아가게나.'
그는 술에 취해서 음악적인 감흥이 일어나면 줄 없는 칠현금을 쓰다듬으며 '거문고 속의 흥취를 얻었거늘 어찌 줄로써 소리내기를 원하랴.'하면서 흥겨워했다고 한다.
그가 가난하지만 담백하고 빼어난 인물임을 안 강주자사 왕홍이 사귀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귐을 즐겨하지 않았던 그는 이런 말로 그 제의를 물리쳤다. '내가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천성이 사교에 둔하고 또 건강이 좋지 않은 까닭이다. 결코 명성 때문이 이런 것이 아니다.'
그 무렵 도연명이 살고 있던 여산에는 선종이라는 불교 종단이 있었다. 이 종단은 당시 사영운이라는 대시인도 가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한 종단이었다. 그런데 이 종단의 주지인 혜원법사가 도연명의 명성을 듣고 그를 흠모해 마지않았다. 어느 날 도연명은 그 장단의 사람들로부터 술을 마셔도 좋다는 조건으로 초청을 받았다. 그는 흔쾌히 기분으로 가마를 타고 산을 오르는 데 입구에서 종단가입 서명을 종용받았다. 그러자 도연명은 이마를 찡그리고 곧장 가마를 집으로 돌려버렸다. 혜원법사는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았지만 이후에는 호의를 버리지 않았다. 어느 날 노장파의 친구인 육수정과 함께 도연명을 술자리에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불교를 대표하는 혜원법사, 유교를 대표하는 도연명, 노장을 대표하는 육수정이라는 3인이 모여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당시 혜원법사는 매일 산책할 때 호계교란 다리를 넘지 않는다는 규칙을 세우고 엄히 지키고 있었는데, 이날 친구와 함께 도연명을 전송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규칙을 깜박 잊고 다리를 건너버렸다.문득 그 사실을 깨달은 세 사람은 다 함께 껄껄껄 웃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세 노인이 웃고 있는 장면은 호계삼소도라고 하여 중국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제가 되었다. 그것은 거침없는 세 현인의 즐거운 대화와 쾌활함의 상징이었다. 유, 불, 도 세 종교의 가르침이 하나의 유머 감각으로 일치되었음을 그 상황은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도연명은 이런 열린 삶을 살다가 떠나갔다. 그가 생전에 술이나 전원을 노래한 작은 시편, 산문들, 편지 등을 살펴보면 얼마나 완전무결하게 자연에 도달하고, 또 어느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조화로운 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가 405년 태수 자리를 내놓고 귀향을 결심하며 지은 시"귀거래사"는 그가 지녔던 그런 인생에 대한 사랑과 성찰의 깊이를 담고 있다.
돌아가거라. 고향의 전원이 황폐해 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요.
이미 마음은 육체의 종이 되었으니 어찌 헛되이 슬퍼하리요.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장래의 일은 이제부터 늦지 않았음을 알았다.
실로 길 잃음이 오래되지 않았으니, 오늘이 옳고 어제가 잘못되었음을 알겠다.
배는 가볍게 미끄러지고, 바람은 가만히 옷깃을 스친다.
길손에게 앞길을 물으니, 새벽빛의 희미함을 원망한다.
이제야 누추한 내 집을 보고 기뻐 달려가니, 하인들이 반겨 맞이하고 아이들은 문에 나와 기다린다.
정원의 오솔길은 황폐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만은 여전하구나.
한 손으로 어린것의 손을 잡고 방에 드니 술독에 술이 가득하다.
술잔을 당겨 자작하여 뜰의 나뭇가지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
남쪽 창가에 기대여 앉으니 집은 좁으나 편안함이 그만이다.
뜰을 날마다 거닐어 정을 붙이고, 무는 있으나 종일 닫혀 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뜰을 거닐다, 때로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본다.
구름은 무심히 산간을 빠져나가고, 날기에 지친 새는 둥지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바야흐로 해는 뉘엿뉘엿 지려 하는데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쓰다듬으며 거니노라.
돌아가리라. 세상과 인연을 끊으련다.
세상도 나도 서로 잊어버렸으니, 다시 수레를 타서 무엇을 구하리요.
친척과 정담을 즐기고 거문고와 책을 벗삼아 세상사를 잊으리라.
농부가 내게 봄이 옴을 고하니, 장차 서쪽 밭에 일이 생기겠구나.
혹은 포장 달구지를 몰고, 혹은 외딴 배를 젓는다.
때로는 조용한 골짜기를 찾고, 또 허위허위 언덕을 오르내린다.
초목은 나날이 무성해가고, 샘물은 졸졸 흐르기 시작한다.
만물이 때를 만나 생동함을 볼 때 내 인생은 휴식을 찾는구나.
두어라 몸이 세상에 머묾이 언제까지냐.
가고 머무는 일을 어찌 자연에 맡기지 않으리요.
어찌 황황히 떠나고자 하리요.
부귀는 내 소원이 아니며, 하늘나라는 기약할 바 못되느니라.
알맞은 때에 혼자 생각에 잠겨 거닐며,
혹은 지팡이를 세워놓고 밭고 갈리라.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냇가에 앉아 시를 쓴다.
얼마간 자연의 조화에 다다르다가 천명대로 돌아가리니, 천명을 한껏 즐긴다면 또
무엇을 염려하랴.
도연명은 결코 은자가 아니었다. 그가 도피하려 했던 것은 정치였지 인생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인생에서 도피하고자 했다면 승려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에게는 참으로 사랑하는 삶이 있었다. 아내와 자식들은 그에게 참된 존재였고, 전원이나 안뜰의 나뭇가지, 언덕의 외로운 소나무주차 하나의 의미였다. 그는 세상에 속한 인물이었다. 험한 세상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때라 싶으면 밭에 나가 김매고 북도 돋워주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전원과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생활, 도연명의 조화로운 삶은 그것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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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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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기개를 가슴에 품고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유훈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로마 제국의 공식 주권자인 원로원과 로마 시민을 납득시킬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로마 황제는 이 양대 주권자한테서 정치를 위임받은 로마 시민 중의 '제일인자' (프린켑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납득시킬 만한 이유'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라는 양대 유권자 계층이 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방식에 납득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하면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제8권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다를 때 자세히 설명했으니까 여기서는 그 부분을 간단히 요약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라인 강 방위선을 철벽화하고 '게르마니아 방벽'을 구축함으로써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상류 지역의 방위체계도 완성한 로마인 앞에 새로운 적으로 나타난 것이 도나우 강 하류 일대에 세력을 키우고 있던 다키아족이다. 도나우 강이라는 천연 방위선 바깥에 사는 부족들의 존재 자체가 로마에 위협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부족들이 단결했을 경우였다. 다키아족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은 족장이 '왕을 자칭할 만큼 주변의 약소 부족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키아족의 세력은 유능한 지도자 데케발루스의 등장으로 더욱 강해진다. 데케발루스는 부족의 거주지인 도나우 강 하류 지역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헝가리에서 유고슬라비아에 이르는 중류지역의 다른 부족들까지 통합하여 도나우 강 북쪽 일대에 거대한 왕국을 세우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야망을 실현시킬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로마 영토인 도나우 강 남쪽으로 침입한 것이다. 불의의 습격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이들을 맞아 싸운 로마 군단은 참패하고, 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모에시아 속주 총독은 전사했다. 도미티아누스는 몸소 전선에 나가기로 결정한다. 로마군 최고사령관인 황제를 맞아, 5개 군단이나 되는 병력을 투입한 전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다키아 왕이 사절을 보내 강화를 제의했으나, 로마는 검토도해보지 않고 거부했다. 두 번째 전투에서는 로마군이 도나우 강을 건너 북쪽으로 진격하여, 다키아족의 본거지를 공격할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전보를 선물로 안고 수도 로마에 돌아와 있던 도미티아누스에게 보고된 두 번째 전투 결과는 참패였다. 1개 군단과 근위대 절반이 궤멸했고, 총지휘를 맡고 있던 근위대장 푸스쿠스도 전사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단기인 은독수리 깃발마저 적에게 777앗기는 수모까지 당했다. 두 번째 전투는 오늘날의 세르비아에서 루마니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벌어졌는데, 로마군은 다키아족의 본거지인 사르미제게투사로 쳐들어가기는커녕, 도나우 강을 건너자마자 협공을 당하여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통렬한 타격이긴 했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기가 꺾이지 않았다. 꼬박 1년 동안 설욕전을 준비한다. 후임 사령관에는 도나우 강 방위선에서 오래 근무하여 현지 사정에 밝은 율리아누스가 임명되었다. 서기 88년, 군대를 이끌고 도나우 강을 건너 다키아 땅으로 쳐들어간 율리아누스는 교묘한 책동으로 적을 유인하여 평원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로마군은 평원을 무대로 벌어지는 회전에서는 천하무적이었다.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다키아족 병사들을 이번에는 로마군 병사들이 추격하여 마구 죽였다. 하지만 다키아족의 본거지까지는 쳐들어가지 못했다. 겨울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지방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알고 있는 율리아누스는 도나우 강 남쪽으로 철수한 뒤, 배다리를 해체하고, 이듬해 봄까지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89년, 로마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지 않았다. 도미티아누스가 다키아족과의 화해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가 화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는 몇 가지 정세 변화들을 수 있다.
첫째, 한 달도 지나기 전에 해결되긴 했지만,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사투르니누스 반란의 사후 처리가 필요했다
둘째, 가짜 네로 황제를 내세워 만(◎)로마 기운이 다시금 높아지고 있던 파르티아 왕국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로마군에 패배한 다키아족 따위는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도나우 강 중류 일대에서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게르만계 부족들에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도나우 강 하류의 전선이 중류 지역까지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도미티아누스와 참패를 당한 뒤 열세를 만회할 필요에 쫓기고 있던 데케발루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다키아 왕의 대리인 자격으로 로마를 방문한 다키아 왕자를 도미티아누스는 우호국군주처럼 환대했다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족과 강화를 맺으면 도나우강 중류 일대에서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게르만족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로마군은 다키아와 강화를 맺은 뒤 도나우 강 중류 일대에 전력을 집중한다. 그 결과, 빈에서 부다페스트와 베오그라드로 이어지는 로마 군단기지를 공격하고 있던. 게르만부족들은 원래의 거주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뒤에 내려진 '기록말살형' 때문에 그가 다키아왕과 맺은 평화협정의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려져있다. 로마가 다키아에 참패했을 당시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을 돌려 받는 대가로 1인당 1년에 2아시스를 지불한다는 조항이다. 포로가 몇 명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키아족의 본거지로 쳐들어갈 가능성이 멀어진 이상, 포로로 붙잡혀 있는 로마 병사를 구출하려면 돈으로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2아시스는 공중목욕탕 입장료의 네 배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밀가루 500그램 값에 불과하다. 병사 연봉을 기준으로 셈하면 450분의 1이다. 이만한 비용으로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 대한 걱정을 접을 수 있다면 값싼 대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협약이 로마인들의 비난을 사게 되었다. 원로원파인 타키투스가 내린 혹평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원로원과 황제의 관계는 갈수록 험악해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일반 시민의 평가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일로 시민들까지 황제에게 차가운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1개 군단에다 근위대 절반을 합한 1만 명의 병사가 희생된 것도 참아냈다. 그러나 평화를 돈으로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설령 그 돈이 상징적인 액수에 불과하다 해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패자가 승자에게 바치는 연공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평화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제정 중기에 접어든 이 무렵에도 로마인들에게는 새삼 생각해볼 필요도 없을 만큼 분명했을 것이다.
도미티아누스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다키아와의 평화협정을 제반정세가 호전될 때까지의 일시적인 조치로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뒤에 그는 살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도미티아누스에게 발탁되어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이 된 트라야누스는 도나우강 방위선과 맞닿아 있는 임지에서 이 사태의 자초지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보다 두 살 위였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된 지 1년 뒤, 트라야누스는 네르바 황제로부터 단순한 후계자가 아니라 공동 황제의 지위를 받았다. 로마군 최고통수권을 네르바 황제와 공유할 수 있는 권한이다 그는 당장 이 권한을 활용한다. 관할구역 밖에 있는 괼른에가 있었던 것이 그가 주어진 권한을 재빨리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그리고 석 달 뒤에 네르바가 죽었다. 단독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가 수도 로마로 귀환을 미루면서까지 '사업'을 속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20세기의 미국인이 실제적인 로마 황제들 중에서도 한층 더 실제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한 트라야누스다운 선택이었다.
그가 네르바의 부음을 괼른에서 받았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그 '사업'이란 당시에 '저지 게르마니아' (Germania Inferior)라고 불린 라인강 중류와 하류 지역의 방위체계를 완비하는 일이었다. '고지 게르마니아' (Germania Superior)와 도나우강 상류 지역을 잇는 '게르마니아 방벽'의 방위체계를 완비하는 작업은 그가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이었던 5년 동안 끝내놓았을 것이다. 그가 라인 강 일대와 도나우강 상류 지역까지의 방위체계 완비를 서두른 것은 다키아족을 상대로 전력을 투입했을 경우 배후에 대한 걱정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로마군이 도나우강 중류와 하류 지역에 전력을 집중시킨 틈을 타서,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방위력도 허술해진 라인 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는 것은, 호시탐탐 침입할 기회만 노리고 있는 야만족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냉철하고 세심한 통치자일 뿐 아니라 전략적인 통찰력도 갖추고 있었지만, 그의 '아킬레스 힘줄'은 군단에서의 실전 경험이 없었다는 점이다. 군단에서 견습을 시작할 무렵에는 네로 황제가죽은 뒤에 일어난 내전으로 기회를 놓쳤다.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단에서 잔다리를 밟아 지휘관까지 진급했으면서도, 자신이 제위에 올라 세상이 안정된 뒤에도 무엇 때문인지 둘째아들 도미티아누스한테는 군무를 체험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형 티투스에 이어 두 번째 제위계승자가 된 도미티아누스를 대대장이나 군단장으로 임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덕분에 도미티아누스는 군단 경험을 쌓기에 가장 좋은 19세부터 30세까지의 시기를 제왕 교육만 받으면서 보내게 된다. 게다가 형 티투스 황제가 요절했기 때문에, 30세의 젊은 나이에 로마군 최고사령관이 되어버렸다.
경험이 없어도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다면 결함도 수정되었을 게 분명하다. 또는 군사적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어도, 아그리파를 활용한 아우구스투스처럼 적절한 인재를 등용하여 그 사람에게 일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브리타니아 전선에서 활약한 아그리콜라라는 인재도 있었다 하치만 도미지아누스는 군무를 경험하치 않은 탓인지, 군단 생활에 대한 동경이 남보다 훨씬 강했다. 게다가 자기한테는 군사적 재능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을 착상하고 실행한 공적은 인정할 수 있어도, 다키아 전쟁을 보면 그에게 군사적 재능이 없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다. 첫째, 계속 뒷북만 치고 있다.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뜻이다. 둘째, 전선의 총사령관이 둘이나 전사한 것은 명확한 전략도 없이 전투에 들어갔기 때문에 간단히 난전에 말려든 것을 보여준다. 셋째, 다키아족의 힘을 경시했다. 따라서 전력의 집중적인 투입을 게을리 하여 2승 2패가 되었고, 모든 정세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치욕적인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동년배이긴 하지만 군무 경험이 훨씬 많은 트라야누스가 이런 결함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리고 로마의 뛰어난 무인은 적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투입하여 싸우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는 인종이었다 많은 전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면 사태를 빨리 해결할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값이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군비만 싸게 먹히는 것이 아니다. 전쟁 상태가 오래 지속될수록 전쟁터 근처에 사는 주민들의 불만은 높아지게 마련인데, 조기 해결은 그 불만을 해소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사전에 따르면 병참은 후방에서 식량이나 무기 같은 군수품 일체의 보급과 수송 등을 맡는 기능이다. 병참에서 만전을 기하려면 전쟁터인접 지역의 민간인의 협력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족을 상대로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갑절이나 되는 전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를 실행하려면 도나우 강 방위선의 현재 전력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인접한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병력을 이동시킬 필요가 있었다. 병력이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에서도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라인 강 방위체계를 완비해두어야 했다. 트라야누스는 통치 첫해인 서기 98년의 대부분을 라인 강 연안에서 보낸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는 도나우강 연안으로 이동하여, 이번에는 전쟁 재개를 염두에 두고 만반의 준비를 지휘했다. 네로 황제 시대의 명장 코르불로는 '로마군은 곡괭이로 이긴다"고 말했다 로마군에는 공병대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군단병 전원이 토목기사이자 인부이기도 했다. 트라야누스가 도나우강 연안에서 한 '사업'은 서기 98년 겨울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이미 원형경기장이나 공중목욕탕까지 갖춘 항구적인 군단기지를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트라야누스는 그 기지들을 잇는 도로와 교량을 포장하는 데 진력한 모양이다. 로마인은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그만한 '인프라'를 정비해버리는 민족이다. 도로와 교량을 정비해두면, 전쟁에 졌을 때 적의 추격도 쉬워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보다는 아군의 진격이 용이해진다는 점을 우선했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이루어진 토목사업의 흔적만 더듬어보아도, 트라야누스가 그 후에 시행한 토목공사의 특색이 벌써 뚜렷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절벽이 앞을 가로막으면, 우회하지 않고 절벽을 깎아버린다. 이것은 트라야누스만이 아니라 로마인의 토목공사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색이지만, 이 속주 출신황제는 로마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훨씬 로마인다웠는지도 모른다. 트라야누스가 황제의 신분으로 수도 로마에 처음으로 입성한 것은 서기 99년 여름도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로마 귀환
도나우강에서 로마로 갔다고 되어 있으니까, 이때 트라야누스가 택한 길은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지나 아드리아해에 이른 뒤, 배를 타고 꼬박 하루를 항해하여 이탈리아 중부의 항구도시 안코나에 상륙한 다음, 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발레리아가도를 따라 로마로 들어가는 코스였을 것이다.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이 경로를 택했다면 수도 로마에는 동쪽에서 들어갔을 것이다. 역대 황제들의 노력으로, 바닷길 외에는 완전 포장된 로마 가도를 이용할 수 있었다. 거리로는 로마에서 프랑스를 가로질러 런던까지 가는 거리의 절반이다. 지도만 놓고 보아도, 당시로마의 지도층이 도나우강 방위선의 행방이 제국의 안전보장을 결정한다고 믿었던 이유를 납득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에서 베오그라드까지의 거리는 로마에서 파리까지보다 가깝다. 로마 시대에는 지도상의 거리가 실제 거리와 같았다고 생각해도 좋다. 오늘날에는 발칸지방보다 서유럽의 도로망이 훨씬 충실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로마에서 베오그라드까지 가는 시간보다 로마에서 파리까지 가는 시간이 짧지만, 로마 시대에는 이 두 지방에 깔려 있는 도로망에 밀도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
동쪽에서 수도에 들어간 트라야누스 황제는 그를 보려고 몰려든 수많은 인파의 마중을 받았다 서민들은 트라야누스가 2년 가까운 세월을 들인 '준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들의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째, 트라야누스는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였다.
둘째, 이제까지의 경력을 대부분 속주에서 보낸 트라야누스는 수도로마에서는 미지의 '얼굴' 이었다.
셋째, 황제에 즉위했으면서도 1년 반 동안이나 수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원로원 의원들도 모두 마중을 나왔다는데, 그들도 아마 호기심 쪽이 더 강했을 것이다 원로원은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도 승인했고, 네르바가 죽은 뒤 트라야누스가 제위에 오르는 것도 승인했다. 하지만 이 속주 출신 황제가 즉위한 뒤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는 점에서는 그들 역시 서민들과 다를 게 없었다. 트라야누스는 성문 앞에 이르자 말에서 내렸다. 로마군 최고사령관이기도 한 황제답게 하얀 투니카 위에 은빛 강철 흉갑을 대고 어깨에는 진홍빛 망토를 걸치고 있었지만, 말을 탄 채 수도에 입성할 거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걸어서 로마에 들어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만큼 키가 작았다면 마중 나온 인파 속에 묻혀버렸겠지만, 트라야누스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도 그의 머리만 우뚝 솟아 있었다고 한다. 서민들이 이 황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말을 타고 당당하게 입성한 편이 그들을 더욱 만족시켰을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가 타키투스도 끼여 있었을 터인 원로원 의원들은 이 일로 당장 트라야누스에게 호감을 가졌다.
로마 시민과 더불어 제국의 양대 주권자인 원로원은, 선거로 뽑히는 것도 아니고 임기도 종신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입법기관이라는 점에서 현대 국가의 국회와 비슷한 존재다 또한 국가 요직은 대부분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선출되었다. 제정으로 바뀐 뒤에는 명예로운 경력' 이라고 불리는 공직인 회계감사관도 법무관도 집정관도 모두 원로원에서 선거로 결정된다. 트라야누스도 원로원 의원들이 표를 던져주었기 때문에 명예로운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2년 전 네르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될 때까지 트라야누스는 600명이나 되는 원로원의원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제 로마 최고의 권력자가 된 그가 말을 타고 그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과 나란히 걸어서 수도에 들어간 것이다. 나이도 의원들의 중간 세대인 40대. 공화정 지지자인 타키투스조차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려면 권력은 한 사람에게 집중해 있는 편이 적절하다고 말할 만큼,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제정이라는 정치체제에 찬성하는 여론이 정착해있었다 다만 공화정 시대에 비하면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들 편에 서면,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황제로서 수도 생활을 시작한 트라야누스의 일상은 그런 면에 대한배려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 화려한 궁전 따위는 지을 필요가 없었다. 도미티아누스가 팔라티노 언덕을 거의 절반이나 사용하여 관저와 공저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기능적인 궁전을 지어놓았기 때문이다. 별궁도 도미티아누스가 지은 것으로 충분했다. 산의 맑은 공기를 쐬고 싶으면 알바의 산장, 바다를 보고 싶으면 치르체오의 별궁이 있었다. 트라야누스 자신이 지은 별궁은 치비타베키아 별궁 하나뿐인데, 이것도 특별히 호화롭지는 않고, 게다가 나중에 이곳이 항구가 되었을 때 지은 것이었다. 궁중에서 열리는 야회도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베풀 수 있는 수준이어서, 초대받은 원로원 의원들이 그 소박함에 놀랄 정도였다. 트라야누스는 사생활에서 지출이 아주 적은 황제였다. 아내인 플로티나도 남프랑스의 니스 태생이니까, 최초의 속주 출신 황후였다. 교양있고 현명한 여자였지만, 미인도 아니고 사치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부러움이나 질투의 대상이 될 염려는 없었다. 황후는 원로윈 의원 부인들보다 지위가 높지만, 여자는 같은 여성의 미모나 재산에는 부러움이나 질투를 느낄지언정 교양이나 명석한 머리는 부러워하지도 않고 질투도 느끼지 않는 법이다. 트라야누스의 '도보 스타일'은 그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가마타기를 싫어했다. 시내라면 어디를 가든 걸어다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정한 법률에 따르면 도심에서는 기혼부인만 가마를 탈 수 있도록 되어 있었지만, 황제들 중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꺼리는 사람은 가마를 타는 경우가 많았다. 가마를 자주 이용한 황제는 티베리우스와 도미티아누스인데, 이것도 이들 두 사람이 나쁜 평판을 얻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지 모른다.
긴급한 사항이 없는 한 원로원 회의는 한 달에 두 번 열렸는데, 트라야누스는 반드시 참석했다. 의장을 겸한 집정관이 입장할 때는 의원들이 모두 일어나서 맞이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고, 트라야누스도 당연하다는 듯 다른 의원들과 함께 일어나곤 했다. 회의 도중에 자리를 뜨는 일도 드물었다니까, 그 성실한 태도는 철저했을 것이다. 원로원 토의에서도 트라야누스의 '도보 스타일'은 변함이 없었다. 고압적인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연설도 참을성 있게 경청했다 그러면서도 자기 의견은 분명하게 밝혔다. 트라야누스는 타키투스나 소 플리니우스와는 달리 변호사로 일한 경험이 없다. 즉 화려한 변론술을 구사하여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웅변가는 아니었다. 그래도 원로원 의원인 소 플리니우스가 증언했듯이, '팔에 담긴 진실감, 강하고 의연한 음성, 위엄에 찬 얼굴, 솔직하고 성실한 눈빛"으로 누구나 경청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트라야누스는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국가반역죄라는 이름으로 원로원 의원을 처형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완벽하게 지켜졌다. 그의 치세 20년 동안 살해되거나 유배된 원로원의원은 한 사람도 없다. '국가반역죄'라는 죄목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황제에 대한 반역이다. 이 죄목이 원로원 의원들을 공포에 떨게 한 이유는, 실제로 반역이나 암살을 기도하지 않아도 단지 황제에게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 죄를 뒤집어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반대파 의원을 숙청할 때 '국가반역죄'를 도구로 이용한 사례가 과거에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 황제 말년의 공포정치는 유명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마지막 몇 년은 트라야누스와 같은 세대였던 타키투스의 분노가 보여주듯 잊기 어려운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공정하고 성실하기만 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 는 20년에 걸친 치세 동안 단 세 번밖에 집정관에 취임하지 않았다. 그 결과 원로원 의원들은 명예로운 경력'의 정점인 집정관에 취임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누리게 되었다. 또한 트라야누스는, 매년 1월 1일 취임하는 '정규 집정관'이 임기를 마치기 전에 죽거나 사임하면 ◎결 집정관이 그 뒤를 이어 취임하는 제도도 활용한다. 그 결과 집정관을 경험한 원로원 의원의 수가 늘어났다. 이래서는 원로원이 트라야누스에게 더욱더 호감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집정관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었다. 공화정 시대에는 문자 그 대로 '정무 집행'의 최고 책임자였지만, 제정 시대로 넘어온 뒤에는 황제가 집정의 최고 책임자가 된다. 그러나 제정에 대한 원로원의 알레르기 반응을 배제하고 싶어했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 자주 집정관에 취임하여, 실제로는 제정인데도 겉으로는 공화정이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암살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위장할 수밖에 없었다 브루투스는 죽었어도 공화정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정관에 여러 차례 취임한 황제로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있었다. 이 사람도 아우구스투스로 시작되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에서 끊긴 뒤에 창설된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조라는 점에서는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 집정관에 자주 취임하여 원로원과의 일체감을 호소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저지른 잘못 가운데 하나는 '플라비우스 왕조'가 자리를 잡은 뒤에도 아버지의 방식을 계속 답습한 것이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달랐다.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울피우스 왕조'를 개설할 필요도 없었다 집정관을 대량 배출하여 원로원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집정관 대량 배출은 시대의 요청과도 일치했다. 광대한 로마 제국은 황제를 도와서 정무에 종사할 '인재'를 늘상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제국의 통치체제가 정비되어갈수록 점점 더 많은 인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로마에는 요직을 맡는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도 특별히 '집정관급' (corlsulares)이라고 불리는 계층이 있었다. 집정관을 지낸 사람이라는 뜻이다. 국난이 발생했을 때 집정관급에 속하는 사람이 책임자로 취임하는 것만으로도 그 문제에 국가가 얼마나 진지하게 대처하고 있는가를 가능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연 재해에 따른 사후 대책에서도 '집정관급'이 담당 책임자로 취임하면, 그것은 단순한 홍수 대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치수 사업이 시행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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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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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16.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 불리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남에게 얻어 먹고 다니는 거지 스님인데 살림살이라고는 큰 포대 하나 뿐이었습니다. 포대 하나만 들고 다니다가 사람들의 뒷꼭지를 똑똑 치면서 돈 한닢 달라 하곤 하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었습니다. 또, 예를 들어, 생선 장수를 보면 생선 한 마리만 달라고 하여 한 입만 베어 먹고 포대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무엇이든 눈에 뛰기만 하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장차 가뭄이 계속될 것 같으면 흐린 날에도 삿갓을 쓰고 다니고, 장마가 계속될 것 같으면 맑은 날인데도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이런 식으로 앞일을 예견하는 데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포대화상이 돌아가신 때(916년)에는 명주(明州) 악림사(嶽林寺) 동쪽 행랑 밑에서 법문을 하면서 앉은 채로 입적했습니다. 그 때 이런 게송을 남겼습니다.
미륵, 참 미륵이여
천만억 몸을 나투는구나.
때때로 사람에게 보이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구나.
彌勒眞彌勒 (미륵진미륵)
分身千萬億 (분신천만억)
時時示時人 (시시시시인)
時人自不識 (시시자불식)
포대화상의 죽은 시체는 전신(全身)을 그대로 절 동당(東堂)에 모셔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니 곳곳에서 포대화상이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17. 배도(杯渡)스님
배도(杯渡)스님은 당나라 때 스님으로 성도 이름도 알 수 없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큰 강을 만나면 지고 다니던 걸망에서 조그마한 접시를 꺼내서 강물 위에 뛰우고는 그것을 타고 강을 건너곤 하여, 사람들이 '접시를 타고 건넌다'는 뜻의 배도(杯渡)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접시를 타고 물을 건너는 스님이 접시가 없다고 강을 못 건널 까닭이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모두 장난입니다. 배도스님은 그렇게 하며 여러 곳을 다니며 중생을 교화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죽은 뒤에도 이것 저곳에서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18. 지공(誌公)
지공(誌公) 화상은 신통력이 뛰어난 스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양(梁)나라 무제(武帝)는, 이상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미혹케한다 하여, 스님을 잡아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자유롭게 다니는 지공 화상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옥졸이 잘못 지켜서 그런가 하고 옥에 가보면 스님은 옥 안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보고받고서 무제는 크게 놀랐습니다. 무제는 지공화상을 궁중에 모셔놓고, 잔치를 베풀어 참회를 올리며,
"스님, 몰랐습니다. 옥에 모실 것이 아니고 대궐로 모시겠습니다. 궁중에 머물러 계시면서 법문을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습니다.
지공 화상은 그 청을 받아들여 궁중에 머물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계시던 절에서도 예전과 똑같이 지공 화상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리가 없다 하며 가서 알아보니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이에 양나라 무제는 크게 발심하여, 천자 자리에 있던 40여년 동안 불교를 더없이 융성시켰습니다. 지공스님이 돌아가실 즈음에 무제가 물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내 탑이 무너질 그때까지…"
지공스님이 돌아가신 뒤에 무제가 몸소 종산(鐘山) 정림사(定林寺)에가서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전신(全身)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지공 화상이 구름 위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장사 지내러 온 수천, 수만의 대중이 그것을 보고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얼마나 환희심을 내었겠습니까? 그 일을 기념하여 개선사(開善寺)라는 절을 짓고 천하에서 으뜸가는 탑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무제는 급한 생각에 목조탑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드디어 나무로 지은 그 탑이 다 만들어지자, 무제는 비로소 '아차! 잘못했구나. 지공스님께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 탑이 무너질 때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는데, 목조탑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탑을 헐고 새로이 석조탑을 짓기로 결심하고는, 사람들에게 시켜 그 목조탑을 헐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후경이 쳐들어와서 양 무제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양 무제가 어느 때인가 지공 화상께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목의 두 곳을 가리켰습니다. 그 때에 무제는 '무슨 말씀인가, 목이 달아난다는 뜻인가?' 하고 의아 해 하였습니다. 나중에 후경이 쳐들어오자 그제서야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공스님이 목을 두 번 가리킨 것은 바로 목 후(喉) 자, 목 경 자를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19. 사명대사
이러한 무애자재한 경계는 옛날 이야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보기로 사명대사의 비석을 들 수 있습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함께 승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유명한 스님입니다. 스님의 출생지는 경상남도 밀양의 무안입니다.나라에서는 그곳에 스님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비석에서 이상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라에 좋은 일이나 궃은 일이 생기려 하거나, 아니면 어떤 중대한 일이 일어나려고하면, 이 비석에서 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물이 나오는데, 조금 흐르다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양이 나온다고 합니다. 많이 나올 때는 대두(大斗) 일곱 말에서 여덟 말까지도 나왔는데, 그동안 동학혁명,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 31운동, 그리고 815해방, 625사변, 여순반란사건, 419의거, 516혁명 때 그 돌에서 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516 때에는 다섯 말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그 때각 신문에서 이 사실을 많이 보도하였는데 특히 동아일보에서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신문을 통해서 보고, 또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믿기는 어려워 직접 가보았습니다. 비석은 무안 지서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흙으로 대를 모아 놓고 여러 층층대를 올라가서 큰 돌로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새까만 돌로 비석을 세워 놓았는데 마치 방금 만든 비석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레 다시 지붕을 씌워 놓고 비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습기 같은 것은 찾아 볼래야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비각 주변에는 비각을 지키는 집이 서너 채 있고 구연이라는 노스님이 계시는데, 표충사 주지스님을 오래 한 분이었습니다. 그 노장스님이말씀하기를, 비석에서 물이 나오는데 샘처럼 펑펑 쏟아지는 게 아니고 글자 사이사이의 매끄러운 데에서만 마치 구슬 맺히듯 땀 나듯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 이 물은 비석 전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비석 밑에는 물이 고이게 되어 있어서 그 양을 알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비석의 물빛은 보통 물빛과 같고, 또 물맛도 보통 물맛과 같다고 합니다. 내가갔을 때는 물이 나오는 날이 아니라서 그냥 사진을 몇 장찍고 내려 왔습니다. 가는 길이 무안 장날이었는데, 사람들을 잡고 사명대사 비석 이야기를 하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비석에서 땀이 난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했습니다. 물이 나오는 것도 신기하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글자에는 전혀 물이 흐르거나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사를 끝내고 표충사를 들러서 부산으로 왔는데 당시에 동아대학교 총장으로 있던 분이 달려와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임이 분명하다고 이야기 해 주었더니 "스님께서도 남의 말만 듣고 믿습니까?" 하고 반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삼십년 검사 생활을 했다는데, 그렇다면 그 때에 증인들 말을 안 믿고 또 보지 않은 것은 재판 안 하고 직접 본 것만 재판합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수백 명의 증인이 있으면 확실한 것입니다. 사면대사가 그 비석을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도 그것은 사명대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법당의 부처님도 부처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과 관계가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절도 하고 기도도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사명대사는 사백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물을 흐르게 해서 나라의 중대사를 예시하는 신기한 힘을 아직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명대사의 무애자재한 능력이 사후에도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보기입니다.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영원한 생명 속의 무한한 능력을 개발한다면, 귀종 선 선사도 될 수 있고 또 원효스님의 스승인 혜공스님도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자재한 해탈을 성취할 수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히 부지런히 공부하여 큰 스님들처럼 자유자재한 해탈도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본이 되는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영겁불망이니, 곧 영원토록 다시 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겁불망, 이것은 허공이 무너질지라도 조금도 변함없는 대해탈의 경계입니다.
이때 대중들 가운데서 한 스님이 일어서며 말했다.
"스님의 너무도 넓고 박학다식한 법문에 저희들 무지몽매한 중생들이 불같은 의심을 금할 수 없어서 몇 가지 여쭈어 보아야겠습니다."
"몇 가지 물어 보겠으면, 천천히, 날씨도 시원할 때, 그 때 며칠이고 이야기해 보자. 이리 더운데, 대중이 모두 네 이야기 때문에, 그래 네 이야기 들으며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냐, 쌍놈아."
"그러면 스님은 어떤 분인지, 이것 하나만은 꼭 여쭙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냐고! 내가 성철이지. 해인사 방장 성철, 나이는 칠십이고…(웃음)"
맺는 말
이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결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종교의 목표는 상대, 유한의 세계에서 절대, 무한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고(一切苦)에서 벗어나 구경락(究境樂)을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개의 종교는 초월신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상세계에 둡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우주과학시대에 있어서는 그러한 초월신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초월신을 전제로 한 종교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만 역사의 한면을 장식하는 데 그치고 맙니다. 불교는 본래부터 초월신을 부정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현실세계가 그대로 곧 절대의 세계이며, 이 세계를 벗어나 따로 절대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불교의 근본 태도입니다. 그것을[법화경]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고, [화엄경]에서는 '일진법계(一塵法界)'라고 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중도세계(中道世界)인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나 물질과학에서도 현실이대로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현실의 차별만 보고 한계만 보려고 합니다. 한계없는 절대의 세계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와 절대, 유한과 무한에 대한 한계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우주를 감싸고 있다 해도 눈 감은 봉사는 이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 전체, 삼천대 천세계, 미진수법계 이대로가 불국토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아닌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번뇌 망상의 구름에 가려서 눈뜬 봉사가 되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와 상대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그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모두 광병입니다. 눈을 감은 사람이 볼 때는 암흑이고, 눈을 뜬 사람이 볼 때는 광명인 것처럼, 눈만 뜨면 이 처소(處所) 이대로가 모두 절대입니다. 또동시에 사람 사람이 부처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중생이 본디 부처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앉은 자리, 선자리 이대로가 극락세계, 황금세계, 절대세계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함은 중생이 진리의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눈만 뜨면 내가 바로 진금체(眞金體)이고, 내가 사는 곳 전체가 진금체이며 극락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본래 정신 자체가 영원불멸이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불멸은 그대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공부를 하든 않든 간에 정신의 불멸은 그대로이나 그 쓰는 작용은 다르니, 공부를 않는 사람은 진흙 속에 싸인 옥(玉)과 같아서 그 옥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항상 생전에 지은 선악(善惡)의 업력(業力)에 따라 생사로상(生死路上)에 돌아다니며 무한한 윤회를 거듭하는 업보를 받게 되어, 조금도 자유가 없는, 고(苦)가 연속하는 생사의 불멸(不滅)입니다.
공부를 성취한 사람은 진흙을 다 씻어 버린 깨끗한 옥과 같아서 업력(業力)에 끄달리지 않아 생사로상(生死路上)에서 헤매이지 아니하고 모든 고(苦)를 벗어나 영원히 자유자재한 대활동을 하게 되는 해탈의 불멸(不滅)입니다. 비유하면 공부를 성취하기 전에는 눈 감은 장님의 생활과 같고 공부를 성취한 후에는 눈 뜬 사람의 생활과 같으니, 사람의 생활은 같으나 눈 뜨고 안 뜬 생활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진리의 눈을 뜰 수 있는가? 생각을 한곳에 집중해서 삼매(三昧)를 얻으면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이 현실 또한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현실 자체가 틀린 것이라면 이 현실을 떠나야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바세계라고 하지만, 현실을 바로 보면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결국 중생을 부처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바세계를 극락세계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원래 사바세계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불교에서 '현실이 곧 절대'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을 중도(中道)에 두고 있습니다. 양변을 여의고 또 양변이 서로 합해서 원융무애한 원리가 바로 중도입니다. 부처님은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인 중도를 바로 깨쳐서 영원토록 무애자재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일체 중생에게 '각자가 본래 지닌 부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 품팔이하고 마는 정신으로는 대법(大法)을 절대 성취할 수 없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지속되고, 공간적으로는 무한에서 무한으로 계속되는 무한한 큰 세계를 바로 보려는 큰 결심을 가지고 생활 방침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자체가 절대적인 자유세계임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눈을 감고 밖으로 찾아 헤매다닌다면 끝내 이 세계를 바로 보지못할 것입니다. 밖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황금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돈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눈만 뜨면 영원토록 무한으로 쓸 수 있는 보물입니다. 자기 속이 광산이요, 자기 자신이 순금덩어리요, 자기가 앉은 자리, 선 자리가 전부 순금덩어리입니다. 이 광산을 개발하는 도구가 바로 화두(話頭)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무심삼매(無心三昧)를 성취해서 화두를 깨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화두를 깨칠 것 같으면 본래의 광산을 내 눈으로 분명히 보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로 쓸 수 있습니다. 이 절대세계, 진금세계, 제법실상의 세계를 중생에게 소개하려면 여러 억천만 부처님이 출세하시어 미래겁이 다하도록말해도 터럭만큼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도 결국 금덩어리에 똥칠하는 격입니다. 그렇지만 금덩어리를 가진 모든 사람 가운데에 눈 뜬 사람은 적고, 눈 감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서 눈 뜬 사람이 금덩어리를 던져주면 눈 감은 사람은 흙덩어리라고 하며, 오히려 그 사람을 때리고 주먹질을 합니다. 만일 어느 집에 가서 마당에 금덩어리가 있으니 파서 쓰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믿는다면 아무리 땅이 깊어도 그것을 파서 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래 지닌 무한하고 절대적인 보배는 마당 안의 금덩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보배입니다. 이 처럼 우리는 보배산에서 살고 있음을 바로 알아 보배를 바로 찾아 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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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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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의 마지막 수업 - 모리 슈워츠
열. 성숙해지는 영혼
영적인 유대
혼자서 살 수 없듯이 혼자서 죽어서는 안 됩니다. 가능하다면, 여러분에게 위안이 되는 영적인 유대를 찾으십시오. 사람들은 모두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들에 대처하는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들이란 이런 것입니다. '맨 처음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매우 당혹스런 것들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 답을 찾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 중의 일부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답변이 가능하지만, 나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우리보다 더 높은 힘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강력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나는 유대교의 전통 속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유대교의 하느님이었습니다. 열여섯 살 때의 어느 날, 나는 유대인 학교 선생님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서 프로이트를 읽고 선생님과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프로이트가 하느님을 아버지의 대용물로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혼자말인지, 아니면 선생님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저한텐 아버지가 있어요. 대용물은 필요 없어요."
선생님은 내가 선생님의 말을 잘못 이해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발언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적인 발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선생님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부터 불가지론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정통파 유대교회에 다녔는데, 곧 거룩하고 영적인 느낌을 심어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교회의 가르침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몸을 흔들면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히브리 말을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거기에서는 내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모두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며, 나는 더 이상 그런 의식에 참가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의식이 현실로 변화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유대교의 가르침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1933년 무렵이었습니다. 히틀러의 등장과 그 뒤를 이은 유대인 학살은 내게 하느님은 믿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히틀러가 독설을 퍼붓는 것을 라디오로 듣고 있던 생각이 납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몸을 떨곤 했습니다. 나중에 동부 유럽의 유대인들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듣고 나서, 나는 전능한 하느님을 믿기가 더욱더 어려웠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둘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유대교의 신비주의에 흥미를 느껴서 최근에야 알게 된 관련 서적을 읽고 있습니다.
영적인 유대로 가는 길
여러분이 신성하고 거룩하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서, 그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섬기고 예배하십시오.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약 십 년 전부터 나는 불가지론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 영적인 것이 깃들이기를 원했고, 그래서 명상이 내 나름의 원칙에 맞는 영적인 경험이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명상을 잘 하지도 못했고, 매일 하지도 않았지만, 명상에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나는 내가 호흡하는 것을 바라보며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는 방법으로 명상을 했습니다. 육체적인 병에 대처하기 위한 나의 심리학적, 사회학적 접근 방법을 훌륭하게 강화해 준 것이 바로 이 명상이었습니다. 명상에 대한 나의 관심은 1949년 아니면 1950년대 초에 만난 인도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내 심리 치료를 맡은 정신분석학자가 그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워싱턴에 왔을 때 강연을 들으러 갔다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아마 50대였을 것입니다. 깡마른 몸매에 회색 머리와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굉장히 위엄이 있어 보였습니다.
삶과 죽음, 자신이 맺고 잇는 모든 인간 관계, 자신이 속한 사회, 자기 자신. 자신이 기대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한 일체의 가정에 의문을 품으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이 세상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백 년 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현실에 대한 우리의 감각까지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개인의 재산 중에서도 필수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차를 타고 돌아다녀야 하며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차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연 법칙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차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면, 곧 차를 가지고 있거나 만들거나 사용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자동차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맨 처음 원자탄이 떨어졌을 때,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시작이 얼마나 빠르고 완벽하게 바뀌어 버렸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고작 몇백 명의 사암들이 결심만 하면 인류 전체가 한순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은 크리슈나무르티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직접적인 표현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사악한지, 우리가 얼마나 잔인한지, 우리가 얼마나 피에 굶주려 잇는지,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한번 살펴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는가? 그는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 이러한 깨달음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각성의 길인 것입니다.
명상은 병에 걸려서 죽음과 맞서고 잇는 현실 속에서 내가 평정을 잃지 않고 중심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명상이 없었어도 나는 같은 상태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나는 내적인 평화를 얻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찾으려고 계속 노력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어떤 신앙이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마음의 고요와 위안을 얻기 위해 언제나 기도에 의지해 왔습니다. 특히 병에 걸리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기도는 큰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영적 토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심각한 질병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다름 방법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예컨대 심리 치료도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심리 치료란 본래부터 사람들이 삶과 이어져 있음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되도록 고안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정서적인 평정을 되찾거나 유지하기 위해 명상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법이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니 모두가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아 헤매야 합니다.
삶과 죽음에 관한 마지막 질문
삶과 죽음에 관한 영원하고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십시오. 그러나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즐기십시오. 병에 걸렸을 때는 궁극적인 의문들, 예컨대 탄생과 죽음의 수수께끼, 자기 존재의 의미, 인류의 운명, 조화로운 우주를 만들어 낸 조건, 완전히 인간적이 된다는 말의 의미, 영혼의 본질 같은 것을 탐구해 보기에 좋은 때입니다.
1960년대에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함께 일을 했던 내 친구 잭 실리는 매주 로스엔젤레스에서 내게 전화를 겁니다. 어느 날 그는 내가 영적인 문제를 탐구하고 있으며, 자기는 자신의 영적인 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읽은 구절 하나를 들려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들려 주었습니다.
"네가 이미 나를 찾지 않았다면, 지금 나를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심오한 말이었습니다.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영적인 유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 지금 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내가 이미 영적인 유대를 확립했으며 신을 찾았다는 의미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을 찾아 헤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신앙이란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내 친구들 중에는 왜 내가 영적인 탐구를 하겠다며 애를 쓰는지 그 이유를 계속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명상 선생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리, 당신은 이미 영적인 사람입니다. 당신은 연민을 갖고 있고, 사랑을 갖고 있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많은 것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나는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영적인 징표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명백한 영적 승인을 원한다고 말입니다. 명상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쩌면 온 세상에 징표가 널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뿐이지요."
또 다른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자신의 질병을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발판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충분한 징표 아닌가? 자네가 이 끔찍한 병에 걸렸고, 그 병에서 뭔가 창조적인 것을 일구어 낸 것이 전부 우연이었단 말인가? 뭔가 강력한 것이 자네에게 손짓을 하면서, 이것이 자네의 마지막 임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말인가?"
내가 찾고 있는 영적인 하나됨을 아직 경험하지 못해서 지금 내가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그저 이 문제에 대해 사색하기를 좋아하고, 특별한 경험을 실제로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실제로 영적인 하나됨의 경지를 경험했다면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을 테지만, 아직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자기들이 그런 경험을 했으며, 하느님 혹은 강력한 힘을 가진 어떤 존재와 연결된 느낌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나도 그런 경험을 할 가능성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 내가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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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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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6장 발렌티노에 대한 사절 시기 (1/2)
피렌체는 언제나 법률상의 결점을 시민들의 능력으로 보완해 왔으나, 이 즈음에 들어 상층 시민 cittadini migliori일수록 공직에서 더 소외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평시민들의 시기로 인해 마음이 이반되고 불만과 경계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재력을 국가를 위해 쓰려들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이익 관계와 세력간의 각축속에서 구습들이야말로 공화국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었다. 극히 짧은 임기의 정무위원을 추첨으로 선출하는 이상한 방식 때문에, 종종 아무런 능력도 경험도 없는 인물들이 권좌에 앉게 될 뿐 아니라 그들 역시 공직에 대한 경험을 쌓기도 전에 그 직에서 물러아야만 했다. 이러저러한 난맥상이 초래한 결과는 당시 공화국이 겪은 재난들 속에서 잘 나타나 있었다.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서 결국 모두들 정부를 개혁하고자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국정의 기초이자 상징인 대평의회를 폐지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심 그것을 무척 바라는 사라들 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평시민 정부의 틀을 유지하되 베네치아의 소평의회 I Pregiti(원로원적 성격을 띤 베네치아의 통치기구. 베네치아에서는 pregado라고 함 - 옮긴이)와같이 거의 유력 시민 회의 il consiglio di ottimati에 해당하는 소수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직제을 도입하여 공화국의 중대 현안을 다루자는 안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평시민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으므로, 결국은 당분간 종신제 곤팔로니에레를 임명하여 시기를 봐가면 좀 덤 충분한 고려 아래 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하나의 절충안에 불과하였다. 최초의 (종신 곤팔로니에레)를 선택하는 일은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력 시민과 평시민의 요구 사이에 끼인 상태였으므로, 결국 평범한 인물이 권좌에 오르는 것이 낙착되었다. 선출은 대평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가장 똑똑한 인물보다는 평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 뽑힐 가능성이 많았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 여러 계층이 두루 받아들일만한 성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에로 소데니가 바로 그 같은 인물이었다. 명문가 출신의 상층 시민이었던 그는 평화기였다면 자신의 소임을 재무 잘 해나갈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관직에서나 사절에서나 소임을 매우 잘 해나갈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관직에서나 사절에서나 자기 차례를 거부한 적이 없었으므로 평시민 정부의 강력하나 지지자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공직에 기용되고, 또 그것이 다른 인물들의 공직 기피 때문임을 알지 못한)평시민들은 결코 유력 시민들이 만족스러워 할 만한 선택은 아니었으나, 모든 점을 감안할 때 공화국으로서는 괜찮은 결과였다.
이는 마키아벨리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성실하고 헌신적이 자세로 국정에 임했던 마키아벨리는 곧 그와 비슷한 성향인 소데리니의 눈에 띄었다. 이와 더불어 그는 마키아벨리의 날카로움, 기민함, 단호함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이 모든 품성은 관대하기만 해서는 안되는 곤팔로니에게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나쁜 점은 나타내고 좋은 점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약간 건방진 듯하면서 장난기 어린 태도에다, 처음 만남 평범한 사람들과는 잘 부딪혀서 그들에게 자신을 오만하거나 혹은 묘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 그런 성품 때문에, 우리의 니콜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 반면, 그를 오랫동안 잘 알고 그의 예의바름과 재능을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뛰어난 인물로 비쳤다. 우리는 훗날 그가 소데리니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과의 친분을 맺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과거에 소데리나가 여기저기 많은 공적을 옮겨 다니는 동안, 서기국 일으 통해 그와 지속적으로 접촉한 바 있었다. 또한 바로 전에 있었던 우르비노 사절단에서 그의 동생인 주교와 동행했을때에도 마키아벨리는 곧 주교의 마음을 얻었었는데, 이 역시 신임 곤팔로니에레의 마음을 열게 해준 열쇠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마키아벨리는 그의 취임 즉시 10인위원회 명의의 공한과 함께 사적인 축하의 편지를 쓴 것으로 보이나. 그가 소데리니의 동생인 주교에게 라틴어로 편지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그가 소데리니의 동생인 주교에게 라틴어로 격식을 갖추어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리고 주교는 곧 답장을 보내어, 그의 (품위 있는)편지에 감사하면서 자신의 가문과 국가를 위해 애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때쯤 발렌티노는 왕에게 자신의 변호하기 위해 급히 가서는 프랑스식의 무책임한 사면뿐 아니라, 이제는 희생양이 되어버린 비텔로초로부터 치타 디 카스텔로를 돌려받고, 나아가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으로 왕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벤티볼리오로부터 볼로냐를 차지해도 좋다는 백지 위임장을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보르자의 이러한 복귀는 피렌체인들에게 다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정작 이를 더 두려워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의 성공 도구였던 소군주들, 즉 비텔리를 비롯하여 오르시니 가, 빌리오니 가,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 판돌표 페트루치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보르자가 자신들의 무덤을 파는 데 오히려 일조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어떻게 하면 이를 미연에 방지 할 수 있는지 숙고하기 시작하였다.
보르자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은 피렌체 공화국에게나 어제의 적들에게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들은 판돌포 페트루치를 통해 접근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파랑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피렌체는 이러한 기미가 분명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종립을 지키면서 발렌티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발렌티노가 피렌체와의 동맹을 모색하기 위해 사절을 이몰라로 보내 주기를 청했을 때에도, 그들은 자산들이 알레싼드로 6세의 환속과 건달 아들을 싫어하는 이상으로 그와의 동맹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그와 계속 접촉하면서 가까이서 그들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보르자에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파악해 낼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마키아벨리를 그에게로 보냈다. 그는 최대한 속력으로 말을 달리라는 훈령을 받고 1502년 10월 6일 길을 떠났다. 그는 이 훈령을 곧이곧대로 따랐는데, 이는 그의 일행이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자 스카르페리아에서 짐과 하인들을 뒤에 남겨둔 빌린 말을 타고 이몰라까지 단신으로 달려간 데서 잘 나타난다. 다음날 도착 즉시 그는 (승마복 차림 그대로)발렌티노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몇 마디 서로 반가운 듯이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의 임무를 설명하였다. 말의 요점인즉, 피렌체인들은 오르시니 가와 빌리오니 가, 빌텔리,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 마조네에서 소집된 구수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프랑스 왕 및 발렌티노와의 친선을 확고히 지키기 위해 그것을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발렌티노는 이러한 배려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는 한때 자신과 같은 편이었다가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자신과 공화국 모두에게 손해를 입히고 약탈을 자행하고 배신을 일삼았다고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그 (패잔병 집단)을 애써 경멸하면서, 그들이 부추겼던 우르비노 공국의 반란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설사 그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을 다시 되찾는 방법까지 잊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왕이 이탈리아에 있고 교황이 여전히 살아 잇는 한, 이 둘이 (환히 밝혀주는 불을 끌 만큼 물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다면 결코 자신을 쉽사리 없애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과 공화국 사이를이간질하는 오르시니 가와 비텔리를 제거한 뒤, 서롤 힘을 합치자고 제의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 리가 (그러한 동맹의 세부 사항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끝내 함구하였다.)
다음날, 발렌티노는 마키아벨리를 불러 왕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내용의 프랑스 발 편지를 몇 통 보여주면서 그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발렌티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아는 마키아벨리는 편지의 서명을 이전에 프랑스로부터 받은 편지들의 경우와 비교 확인해 보라고 10인 위원회에 요청하는 시중함을 보였다. 또한 그는 발렌티노의 새로운 동맹 제안을 전했으며, 아울러 용병 대장들의 변절 이후 얼 마 안 남은 군대의 세부사항을 보명, 기병, 포병, 현재 소집중인 새로운 군대, 그리고 다른국가와의 관계, 자신의 신민들과의 관계별로 조목조목 전달하였따.
벌써 이 첫 번째의 편지에서부터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사람들의 찬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니콜로 발로리가 이에 앞장섰다. 마키아벨리는 이미 피스토이아에 사절로 가 잇는 동안 일을 잘 처리해 그의 신임을 얻은 바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정무위원의 위치에 올라 젊은 서기장을 치하하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시하였다. 그는 거듭거듭 마키아벨리의 편지쓰기와 판단력을 칭찬해 마지 않앗다. 그는 편지에서 (모두가 당신만큼만 한다면 실수는 일어나지 않을 텐데!)라고 썼다. 또 그는 11월 1일 공직에 취임할 예정인 새 곤팔로니에레에게 얘기하여 마키아벨리에겍 30두카토의 격려금을 보내도록 하엿다. 그 직후 쓴 편지에서 그는 돈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마키아벨 리가 발렌티노를 다루는 방법이나 출중한 판단력에다 힘이 넘치는 편지 내용에 대한 자신의 공적. 사적 찬사로써 모자라는 액수를 메우게 해달라고 말하였다.
비아조 부오나코르시 역시 그를 찬양하였는데, 언제나 니콜로의 예찬자였던 그는 때로는 연인의 질투심이 묻어나는 듯한 편지를 쓰기까지 할 정도였다. 한번은 그조차도 감연히 마키아벨리를 비판하고 나선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편지를 씀에 있어서 자신의 그 간명하고 명쾌한 판단은 좀 유보해 두고 단지 사실들을 전달하는데 거쳤어야 했다는 내용이었다. 비아조가 지적한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당시 발로리가 칭찬해 마지 않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사람 좋은 비아조가 그를 비판한 것은 그가 마키아벨리를 경외했기 때문이고 그러한 경외심은 또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러한 애정은 이성적 판단보다 더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이는 다음의 솔직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부디 신의 가호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를.)
적어도 후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니콜로는 그 건달 같은 군주의 모든 행적을 자신의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되씹어봄으로써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뤼지 델라 스투파가 자신이 사절로 가 있던 플랑스로부터 니콜로에게 쓴 편지 속에서 (기류의 변화와 함계 이러한 품성을 지닌 다양한 인물들을 보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예리하게 만든다) 고 말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군주를 좋아하였다.그의 이름은 체사레엿고 그의 일생은 그 이름에 값하는 것이었다. 그의 군기에는 (체사레냐 무(무) 냐)라는 명문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탈리아어 (체사레 Cesare)란 라틴어 (카이사르 Caesar), 즉 황제란 뜻임 - 옮긴이). 그는 정복과 계략을 거듭하면서 (하늘과 행운의 도움으로) 피렌체 성문 앞에 모습을 나타냈던 그때 이후 줄곧 마키아벨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그가 마키아벨래의 호감을 얻게 된 것은 여전히 승리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던 몬테펠트로의 웅장한 성채에서 그를 접견했을 때였다. 용병 대장들과 휘하 소국들과 그리고 운명까지 그에게 반기를 들었을 당시에조차도 그를 좋아하는 마키아벨리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10월 17일 적들은 그나마 그의 수중에 남아 있던 소수의 군세마저 궤멸시켜 버렷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빼앗았던 모든 것을 잃은 채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처지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참고 숨기고 가다리면서, 또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신민을 다독거리고 요새를 강화하면서,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체사레는 그 사이사이에 이미 평화를 위태롭게 할 조짐을 보이고 잇던 반군 수장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속삭임으로써 (그, 일부를 이탈케) 하력고 시도하였다. 그는 많은 비용을 감수하면서, 프랑스, 로마, 밀라노, 레라라 등지에 끊임없이 전령을 보내 협상을 하거나 무기와 친선과 군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사용한 수단과 그 결과를 만사에서 절약을 지향하는 피렌체 공화국의 경우와 비교하고 있다. 그는 이몰라체류 2주쯤 되는 어느 날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제가 여기 온 이후, 그는 우리 정부가 두 해 동안에도 다 쓰지 못할 정도의 큰 금액을 전령과 사절의 비용으로 다 써버렸습니다.) 그가 생각지 못한 것이 있다면, 자신의 동료 시민들이 스스로의 지지갑에서 돈을 지불해야 한는 반면, 체사레의 돈은 교황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며, 교황은 추기경들을 마치 닭장 속의 닭처럼( 이 비유는 베체치아 대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좋은 값에 만들어서는 잔치에 쓸 요량으로 살찌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발렌티노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보다 악한 정도에서 열 배는 아래인 어떤 피렌체인은 단지 그가 교수대에 서는 것을 보고 싶어했겠지만 말이다. 카미아벨리가 발렌티노를 좋아한 것은 그가 강력한 국가를 이룩한 상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발렌티노 공이 외교와 전쟁에서 보여준 불국의 끈기, 그 저동성과 분별력, 숨김과 가장의 능력 그 능숙한 정책과 기민한 실천력에 찬사를 보냇다. 그의 인생 행로는 마키아벨리를 현혹시켰고, 특히 그가 그 과정에서 보여준 신념은 더욱 그러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를 요모조모 뜯어가며 연구하엿고, 그가 자신의 마음에 새겨준 모든 말드과 사실들을 남김없이 피렌체에 알렸다. 한번은 그가 친구 비아조에게 프르타프코스의 (영웅전 Vite)을 보내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그가 이미 마음속으로 현재의 경험과 과거의 사실들을 서로 새롭게 비교하려 했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으리라. 발렌티노 역시 그의 드높은 위신과 에스파냐, 로마적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이보잘 것없는 지위의 서기장을 결코 불쾌하게 생각지 않았다. 흑자가 그렇게 믿고 또 쓰고 있는 바와 같이 마키아벨리가 사절로 가 있는 동안 발렌티노의 마키아벨리즘을 흡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생각이 되겠지만, 그가 마키아벨리에게 이례적일 만큼 접견을 쉽사리 그것도 장시간 허용했던 사실이나 양자간 대화의 성격 등으로 미루어볼 때, 이 사심 없는 피렌체 사람의 재능과 격식 없고 날카로운 판단력이 발렌티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명확해 보인다.
어쨌든 당분간 보르자는 계속해서 피렌체와의 협정을 고집하였다. 히지만 피렌체는 통상 그렇듯이 말로는 좋은 듯이 하면서도 그것을 행동을 옮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의 변명이란 이 일을 왕에게 알리고 그의 동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히지만 한 주일 한 주일 시간은 흘러가도 답은 오지 않았다. 발렌티노는 비록 여전히 우호적이긴 했지만 그 특유의 놀랍고도 초연한 태도로 자신의 새로운 방식에 따를 것을 재차 촉구하였다. 그에게 정말로 중요했던 것은 이미 물의를 빚어왔던 자신의 용병료, 즉 세례 요한의 상이 새겨진 양질의 피오리노 금화였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에게는 자신의 나라 피렌체를 위해 이 펜싱 선수와 겨루어야 하는 임무가 맡겨졌으며,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피렌체 정부가 그에게 준 무디고 녹쓴 무기를 가지고 이 일을 해냈다. 어느 날 둘은 피렌체 공화국이 새로이 고용한 만토바 후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발렌티노가 물었다. (그래, 당시네 정부가 나에게 맡긴 일은 뭐요?) 마키아벨리는 이에 대해 전하는 일을 맡기보다는 일을 끌어가실 분이라고 농담 조로 응답하였다.
왕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변명이 더 이상 먹혀들어가지 않자, 피렌체인들은 이제 교황과 의논하고 싶다고 말을 바꾸었고, 이어서 다시 소데리니 주교를 프랑스로 보냈으니 모든 결정은 그 결과에 달렸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발렌티노는 압력을 넣을 요량으로, 그가 오르시니 가 및 비텔로초와 거의 조약을 체결하기 지적이며, 그렇게 되면 피렌체인들은 매우 난처한 지경에 처할 것이라고 들러대었다. 마키아벨리로서는 만약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다면 돈으로 발렌티노와의 친선을 사는 데에 기꺼이 일만 두카토 정도는 걸 마음이 있었으나 정무위원회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그는 결국 어느 날 피렌체가 그에게 무언가 괜찮은 일감을 주기는 힘든 처지에 있으며, 그렇다고 사소한 일을 맡기 수도 없지 않느냐고 말할 도리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발렌티노의 한 관리가 용병료라는 말이 적절치 않다면 수고비로 명복을 바꿀 수도 있다고 제의하자, 마키아벨리는 이름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피렌체가 발랜티노와의 친선에 단돌 한 두카토도 내지 않으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관측했듯이 그들간의 친선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쓸모없는 것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피렌체 정무위원회는 그 즈음 마키아벨리와 발렌티노 사이의 모든 협상과 논의를 중단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한 상태였다. 그래서 친구 비아조는 피렌체 발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르 다음과 같이 놀려대었다. (이보게 니콜로, 자넨 허탕을 쳤어, 아마 자네는 발렌티노의 마음에 들 만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네만.) 이 일로 인해 그는 앞서 어떤 때보다도 더 본국으로의 귀환을 정부에 요청하게 되었다. 그가 귀환하고 싶어하는 데는 자신이 10인위원회에 보낸 편지에 적힌 것 말고도 상당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그에게는 가사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고, 게다가 당시 집 사정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외국 출장중에 자신과 공화국의 품위를 위해 버는 액수보다 돈을 더 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는 편지에서 아마 인색한 정무위원회로서는 그리 달갑게 들리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저는 제 몫으로 돈을 쓸 수 도 있었고 또 지금은 그러한 돈을 공작으로부터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돈은 바라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그럴 만한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일은 우리 정부에게나 제 자신에게나 결코 명예롭지 못한 것이라 생각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도 제가 한푼 두 푼 비용을 구걸하다시피 하면서도 정말 기꺼운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생각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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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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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혁명에 대하여
혁명은 장미향수 같은 감상적이고 미적지근한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혁명은 이상이나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The French Revolution)
1789년 프랑스 외회는 국왕 루이 16세에게 의회에 출두하여 서정쇄신에 대한 공약을 하라고 촉구하였으나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는 1791년 9월 의회의 끈질긴 요구에 굴복하여, 봉건제를 철폐하고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였으나, 실질적인 개혁에 비협조적이고 오히려 의회 내의 왕정 반대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당시 프랑스 국민들은 누적된 사회문제, 부정부패, 국제적 전쟁 떼문에 도탄에 빠져 있었다. 마침내 1793년 의회는 이러한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기 위하여 공화정을 선포하고 루이 16세와 왕비 앙투아네트를 길로틴이라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고, 이로써 프랑스 혁명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길로틴과 로베스피에르 단두대인 길로틴은 프랑스 사람 길로틴이 사람의 목을 빠른 시간 내에 자를 수 있게 고안한 것으로, 그는 기계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나, 자신도 길로틴에 의해 목이 잘리는 운명에 처했다고 한다. 하여간 누적된 부정과 부패는 과격하고 혁명적인 방법에 의해 처리되어야 한다는 자코뱅당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권력을 잡자 서정쇄신이라는 명목으로 수천 명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정치의 철권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극단적인 정치행위는 더욱 큰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와 민심의 이반을 일으켰고, 그 역시 1794년에 길로틴에 목이 잘렸다. 길로틴에 목을 대고 사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는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천명의 생명을 무참하게 죽인 자신의 잘못을 신에게 용서를 구하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행동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었고 지금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되새겼을까? 프랑스는 그가 처형되고 난 후 일종의 회복기에 들어갔지만 그가 남긴 악의 씨앗은 향후 25년간 치료할수 없는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 그가 죽고 난 후 프랑스 정치는 음모와 중상모략이 판을 치며 더욱 부패되어 갔고 날마다 팽창하는 통화는 누구도 억제하지 못했다.
나폴레옹
프랑스 남부 코르시카섬 태생의 포병 지휘관 나폴레옹 보나파트는 이러한 혼란한 시기를 적절하게 이용하였고 1799년 쿠테타를 일으켰다. 나폴레옹은 강력한 지도력을 원하는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여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의 질서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조세핀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1804년에는 스스로 자기 머리에 황제 왕관을 올려, 프랑스에는 다시 왕정이 부활되었다. 혁명은 장밋빛 이상향 건설에 목표를 두기 때문에 이루어지기 힘들다. 혁명 공약도 혁명이 실패했을 때, ‘그래도 그 뜻이난 동기가 좋았다’는 한마디를 남기기 위한 의미 밖에는 없다. 세계 어느 나라 혁명을 보든 간에 ‘공약대로 된 혁명’은 하나도 없다. 혁명 주동자들은 구악을 없앤다고 혁명을 일으켜 구악보다 더한 신악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경의 마태복음은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있다.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쉴 곳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쉴 곳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귀신은 ‘내가 나온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하고 가보니 그 집이 비고 깨끗이 소제되고 정돈되어 있었다. 그 귀신이 자기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그곳에 들어가 살자 그 사람의 상태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다.
일모도원
중국 초나라 평왕은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죽였다. 오자서는 평왕의 체포명령을 피하여 도망을 갔고 우여곡절 끝에 오 나라에 갔다. 그 곳에서 그는 이를 갈면서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15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오자서는 전략가 손무의 도움으로 초나라에 쳐들어가 수도를 점령하였다. 복수심에 불탄 그는 이미 10년 전에 죽은 평왕의 묘를 파헤쳐 그 시체에 매질을 하였다. ‘시체에 매질하기 300대. 그 때서야 멈추다’라고 사마천은 사기에 적었다. 이에 오자서의 친구인 신포서는 이 말을 듣고 “아무리 부형의 원수라고 하지만 너도 한때 평왕의 신하였는데 시체에까지 매질한 것은 너무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었다. 오자서는 “해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그래서 내가 천방지축 거꾸로 다니면서 이치에 어긋난 행동을 하였을 따름이다“고 말했다.
결론
혁명이란 순리에 따라 침착하게 진행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해야 할 일은 많고 남아있는 시간은 짧은 것이다. 짧은 시간 내에 큰 업적을 만들어내려 하니 무리가 따르고 과격한 행동이 일어난다. 역사는 항상 교훈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혁명을 주동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혁명도 일어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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