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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8호 - 2024.9.10. 화요일(음력 : 8.8.)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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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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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시시한 루머가 다른 점은 큰 소리로 말하는가 작은 소리로 말하는가의 차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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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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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시’와 ‘지긋이’
‘지그시’와 ‘지긋이’는 소리가 같아서 적을 때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소리대로 적는 ‘지그시’는 ‘슬며시 힘을 주는 모양’ 또는 ‘느낌이나 감정을 억누르는 모양’을 나타낸다. “지그시 눈을 감은 환수 씨의 기억 속에 오랜 옛일이 떠올랐다.”(최일남, 거룩한 응달) ‘지그시’ 대신 ‘자그시’나 ‘재그시’를 쓰기도 한다. 이 말들은 ‘지그시’보다는 정도나 세기가 덜함을 나타낸다. “봉실이는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자그시 누르며 다정한 눈길로 쳐다보았다.”(정기수, 아버지의 고뇌)
‘지긋이’는 ‘지긋하다’의 ‘지긋’과 접미사 ‘-이’가 결합한 말이어서 소리대로 적지 않고 원형을 밝혀 적는 것이다. ‘지긋이’는 ‘나이가 비교적 많아 듬직하게’ 또는 ‘느긋하고 참을성 있게’라는 뜻을 나타낸다. “엉뚱한 생각 말고, 이 사설로 한가락 읊을 테니 지긋이 앉아 듣게.”(송기숙, 녹두장군)
‘반드시’와 ‘반듯이’도 함께 알아 두면 좋다. “다음엔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다.”와 같이 ‘틀림없이, 꼭’의 뜻으로 쓸 때는 ‘반드시’를 쓰고, “벽에 기대지 말고 반듯이 서 있어라.”와 같이 ‘기울거나 굽지 않고 똑바르게’, 즉 ‘반듯하게’의 뜻으로 쓸 때는 ‘반듯이’를 쓴다.
‘반듯이’보다 큰 느낌으로 말하고 싶을 때는 ‘번듯이’를 쓰면 된다. “이쁜이는 … 풀밭에 번듯이 드러누운 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김유정, 봄봄) ‘번듯이’는 ‘버젓하고 당당하게’라는 뜻으로도 쓸 수 있다. “어머니께 옷 한 벌 번듯이 해 드리지 못했다.”
‘어연번듯이’라는 말도 있다. ‘세상에 드러내 보이기에 아주 떳떳하고 번듯하게’라는 뜻이다. “늙으신 아버지와 이 어미를 보더라도 어연번듯이 그 사람과 부부가 되어 다오.”(현진건, 무영탑)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님이 좋아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누리소통망(SNS)을 통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다. 그 대화의 한 방식으로 누군가가 글을 올리면 읽는 이들은 호감의 표시로 ‘좋아요’를 누른다.
그런데 ‘좋아요’를 누르면, 그 다음부터 해당 글에 “○○○님이 좋아했습니다.”라는 글귀가 달린다. ‘좋아했습니다’는 과거에 좋아했다는 뜻일 뿐이니, 이 표현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누군가 ‘좋아요’라고 했다면 지금도 좋아하는 것이고, 그러니 ‘좋아합니다’라고 말할 일 아닌가.
이를테면 누군가로부터 “널 좋아해”라는 고백을 들었다고 하자. 그런 상대방의 마음을 두고 “그가 나를 좋아한다”라고 하지, “그가 나를 좋아했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상대방이 고백한 일 자체를 가리켜서는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그가 나를 좋아했다”라고는 하지 않는다.
‘좋아요’를 누른 일은 “널 좋아해”라고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가 나를 좋아한다”라고 말하듯이 “○○○님이 이 글을 좋아합니다”라고 해야 하며, 아니면 “○○○님이 ‘좋아요’라고 했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님이 좋아했습니다”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이 이상한 표현은 영어의 ‘liked’를 직역한 결과일 것이다.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옮긴다면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정도일 텐데, 어법을 무시하고 ‘좋아했습니다’라고 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누리소통망의 파급력을 생각한다면, 하루 빨리 운영자가 “○○○님이 ‘좋아요’라고 했습니다.”, “○○○님이 이 글을 좋아합니다.”, 또는 “○○○님이 이 글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처럼 우리말 어법에 맞는 표현으로 바꾸어 주었으면 한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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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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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 천상병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보내어
이제 파도도
빛나는 가슴도
그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아오르는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
별 - 정지용
누워서 보는 별 하나는
진정 멀- 고나.
아스름 다치랴는 눈초리와
금실로 잇은 듯 가깝기도 하고,
잠살포시 깨인 한밤엔
창유리에 붙어서 엿보노나.
불현 듯, 솟아나 듯,
불리울 듯, 맞어들일 듯,
문득, 영혼 안에 외로운 불이
바람 처럼 이는 회한에 피여오른다.
흰 자리옷 채로 일어나
가슴 우에 손을 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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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 김수영
남의 일하는 곳에 와서 아무 목적 없이 앉았으면 어떻게 하리
남이 일하는 모양이 내가 일하고 있는 것보다 더 밝고 깨끗하고 아름다웁게 보이면 어떻게 하리
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져도 좋다는 듯이 구수한 벗이 있는 곳
너는 나와 함께 못난놈이면서도 못난놈이 아닌데
쓸데없는 도면 위에 글씨만 박고 있으면 어떻게 하리
엄숙하지 않은 일을 하는 곳에 사는 친구를 찾아왔다
이 사무실도 네가 만든 것이며
이 많은 의자도 네가 만든 것이며
네가 그리고 있는 종이까지 네가 제지한 것이며
청결한 공기조차 어즈러웁지 않은 것이
오히려 너의 냄새가 없어서 심심하다
남의 일하는 곳에 와서 덧없이 앉았으면 비로소 설워진다
어떻게 하리
어떻게 하리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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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 이해인 (16~20)
16
당신은 늘 나를 용서하는 어진 바다입니다.
내 모든 죄를 파도로 밀어내며 온몸으로 나를 부르는 바다.
나도 당신처럼 넓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삶이 당신에게 업혀가게 하십시오.
17
당신은 늘 나를 무릎에 앉히는 너그러운 산.
내 모든 잘못을 사랑으로 덮으며 오늘도 나를 위해 낮게 내려앉는 산.
나를 당신께 드립니다.
나도 당신처럼 높여 주십시오.
18
당신은 내 生에 그어진 가장 정직한 하나의 線.
그리고 내 生에 찍혀진 가장 완벽한 한 개의 點.
오직 당신을 위하여 살게 하십시오.
19
당신이 안 보이는 날.
울지 않으려고 올려다본 하늘 위에 착한 새 한 마리 날으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내 無言의 높고 재빠른 그 나래짓처럼.
20
당신은 내 안에 깊은 우물 하나 파 놓으시고 물은 거저 주시지 않습니다.
찾아야 주십니다. 당신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갈증.
당신은 마셔도 끝이 없는 샘, 돌아서면 즉시 목이 마른 샘
- 당신 앞엔 목마르지 않은 날 하루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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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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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3
행복한 인생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주말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저수지의 담이 무너지면 사방에서 물이 밀려든다.
불안과 미망의 한계가 명상으로 제거되면 인간의 의식은 무한히 퍼져나가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영혼으로 합쳐진다. -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불행 끝 행복 시작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따뜻한 마음과 너그러움, 그러면서도 용기까지 겸비한 성격일 것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일찍이 위대한 현인이 이루어야 할 덕으로 지, 인, 용 세 가지를 강조하였다. 이 중에서 나는 인을 정(Passion)으로 바꾸고 싶다. 정이나 영어의 Passion이나 모두 성적 열정이라는 좁은 뜻에서 나왔지만 그보다는 좀더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
장조란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정이 있는 사람은 항상 이성을 사랑하지만,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정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정은 인간 세계의 바탕을 지배하는 것이지만, 재주는 그 지붕을 채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이 없으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인생의 기쁨, 빛나는 별, 음악의 곡조, 꽃의 환희, 새의 날개, 여자의 아름다움, 학구적인 생활..., 이것들은 모두 정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표현이 없는 음악을 생각할 수 없듯이 정이 없는 마음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정이란 인생을 유쾌하게 살 수 있는 따스한 생명력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다감한 성격조차 환경에 휩쓸려 냉각되고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순수한 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은 개인의 태만이거나 무력감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쉽게 냉혹해지고 기교에 빠져든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재주와 굳센 결의만이 드러날 뿐 인간으로서의 인정이란 남아있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는 인정 같은 것은 감상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터부시하기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정열이나 인정이란 간혹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짓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세상은 한 장의 만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할머니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나의 78년 동안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죄를 저질렀을 때처럼 기분 좋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미련하게 행동했던 때가 떠오르면 이 나이가 되어서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도량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철학을 가지고 자신을 지켜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가혹해서 온정만으로 살아가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은 지와 용과 함께 있어야 한다. 슬기로운 용기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용기란 인생을 잘 이해할 때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언제나 용기가 있다. 우리가 쓸데없는 야심을 닫고, 사상이라든지 생활에 있어서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슬기와 용기가 접속이 되는 것이다. 정이 있는 삶, 그것은 분명히 현명한 판단과 실행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정을 이어가자. 그것의 행복의 시작이다.
성공의 노예가 되지 말라
교양 있는 사람은 부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유혹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우리들은 진실로 위대한 인간이라는 찬사를 보낸다. 한 승려가 세속적인 번뇌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명예욕을 버리는 것보다는 금전을 버리는 것이 보다 쉽다. 숨어사는 학자나 승려들조차도 동료들보다 앞서기를 원한다. 많은 신도가 있는 자리에 나가 설교를 하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너와 나 단 둘이서 스승과 제자로 깊은 산골에 숨어 있고 싶어하진 않는다."
이런 종교적인 설명은 완전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현인의 고백은 오히려 우리 인간들의 욕망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생의 욕망은 이 승려의 시각에 하나를 더하여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곧 명예, 부귀, 권력이다. 이 세 가지를 미국적인 한 가지로 통합시킨 단어가 바로 '성공' 일 것이다. 이 성공이란 말은 어쩌면 실패, 빈곤, 무명이란 공포를 벗어나기 위한 완곡한 모델이다. 실제로 이러한 공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단 명성이나 권력에 집착하게 되면 인간은 그를 따르는 숱한 집착의 노예가 되고 만다. 남의 생활을 개선하고 덕성을 높이며 악을 뿌리뽑겠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이 가치 있는 어떤 일을 한다고 생가하며 스스로 우쭐대곤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집착의 서열에 다른 사람에게 멋있게 보이고자 하는 '체재' 라는 것을 포함시키고 싶다. 자기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유지하는 용기 있는 사람은 사실 드물다. 그리하여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스토는 자신이 두 가지의 가장 큰 공포, 즉 신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으므로 위대하다고 자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죽음과 신의 공포만큼이나 보편적인 또 하나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공포이다. 실제로 이웃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누가 있는가를 살펴보라. 우리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생의 배우이다. 배우들은 관중의 갈채가 크면 클수록 무대 뒤에서 고뇌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대중이 좋아하는 식으로 자기역할을 연출한다 할지라도 결코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단지 우려되는 것은 그 연극의 대사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은 결코 연극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것은 연극일 뿐임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간소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삶의 모범으로 추앙받는 것은 그런 환각에 빠져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위대함을 내세우는 사람들이다. 거만한 관리들이나 국회의원, 졸부들, 허풍선이 작가들이 그런 착각에 빠져 있는 대표적인 군상들이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연극적인 본능은 심각하다. 그 무대가 진실로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잊는 것이다. 우리들은 땀흘려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것은 참된 본능이 아니라 사회의 시선에 걸맞는 몸짓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각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삶을 살아간다. 중국 속담처럼 '다른 처녀의 혼례복을 만들고 있는 노처녀' 가 되지 말자. 그것은 자신의 호구지책이 될지라도 결혼이라는 순수한 욕망을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 그것을 이루어나가도록 힘써야 한다. 남의 시선보다는 스스로 바라보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직시하자.
당신은 어리석다
큰 지혜는 우둔함과 같고
뛰어난 웅변은 오히려 눌변과 같다.
자꾸 움직이면 추위를 이기고
가만히 있으면 더위를 이긴다.
조용히 덕을 베풀면 천하의 주인이 된다.
자연의 큰 도에 있어서는 영원히 우위에 있는 것도 없거니와, 평생 역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큰 어리석은 자도 없다. 이런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당연한 결론으로서 인생은 하등 다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노자는 '현자는 그 다투지 아니함으로써 천하 또한 다투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힘으로 밀고 나가는 자는 곱게 죽지 못한다. 나는 이 교훈을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으리라.' 지금까지 약자의 힘, 평화애의 승리, 스스로 낮추는 것의 유익함을 노자보다 효과적으로 설파한 사람은 없었다. 노자에게 있어서 물은 영원히 약한 자의 힘의 상징이었다. 조용히 한 방울씩 떨어져 바위에 구멍을 뚫는 물의 힘, 그는 이렇게 말했다. '큰 강이나 바다가 온 골짜기의 왕이 됨은, 그것이 낮게 처하여 겸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은 중국인들에게 깊숙이 스며 있는 어리석음의 힘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짜 완전한 것은 어딘지 모자란 듯 보이고, 진짜 웅변은 도리어 눌변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자는 '작은 지혜에서 떠나라.' 고 소리쳤던 것이다. 중국 문학에서도 이런 '어리석음' 에 대한 찬미는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으뜸가는 현인은 때로는 몹시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역사에는 이 때문인지 유명한 광인들이 꽤 많다. 그들은 모두 정말 미쳐 있거나 미친 체하는 사람들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원나라 때의 화가 예운림은 속세에 대한 공포감과 까다로운 결벽증으로 유명하다. 시인 한산은 쑥대머리에 맨발로 나다니며 절간의 배회하면서 삯일을 하고는 승려들이 먹다 만 밥을 얻어먹고, 절이나 부엌의 벽에 불후의 시를 남겼다. 또 제정이란 괴짜 승려는 마법과 영약, 괴벽과 만취의 세계에 살면서 수만 리 밖의 외국을 제집 드나들 듯이 날아다녔다고 전한다. 18세기 사람 정판교는 이런 괴이하고 익살스런 풍채나 언행을 지닌 현인들을 평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어리석음도 어렵고 현명함도 어렵다. 그러나 현명함을 끝내고 어리석음으로 들어가는 길은 더더욱 어렵다.'
사람의 마을로 돌아오라
중국에는 노상 사상보다 좀더 위대한 철학의 숨결이 살아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철학이다. 중국 사상의 최고의 이상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행복을 지키기 위해 인간 사회와 인간 생활로부터 도피해 버릴 필요가 없다는 견해이다. 인간의 마을에서 도피하여 산 속에 홀로 사는 은자는 지금도 여전히 환경에 지배를 받는 이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큰 은자는 시장에 숨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키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으므로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로 돌아와서 돼지를 잡아먹고 술을 마시며 여자를 가까이 하고도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현자인 것이다. 때문에 유교와 노장 철학의 모순은 상대적이고, 단지 두 극단에서 출발한 교의이며, 둘 사이에 많은 중간 단계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간 단계를 중용이라고 한다. 반은 속세에 머물고 반은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중용의 미묘한 정신이 간직되어 있다. 즉 반쯤 게으르고 반쯤 부지런하며, 바쯤 일하고 반쯤 노는 정도, 가난하지 않고 부자도 아니며, 독서는 하되 지나치지 않고, 학문은 하되 전문가가 되지 않는 안빈낙도의 생활, 이것이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건전한 생활의 모습으로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이밀암의 '중용의 노래'에는 이런 철학이 적나라하게 담겨져 있다.
세상일은 중용이 최고라고 믿고 살았네.
그러나 이상하군.
이 중용은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네.
중용의 기쁨보다 더한 것 없네.
재미있다. 모든 것이 절반.
당황치 않고 서둘지 않으니,
마음도 편하다.
천지는 넓은 것.
도시와 시골 사이에 살며,
산과 산 사이의 농토를 갖네.
알맞게 지식을 얻고, 알맞은 지주가 되어.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노네.
아랫것들에게도 알맞게 대한다.
집은 좋지도 않지만, 추하지도 않고,
가꾼 것도 절반, 가꾸지 않음도 절반.
입은 옷은 헌옷이 아니고, 새옷도 아니네.
먹는 것도 적당하게.
하인은 바보와 똑똑이의 중간.
아내의 머리도 알맞은 정도이고
그러고 보니 나는, 반은 부처이고 반은 노자일세.
이 몸의 절반은 하늘로 돌아가.
나머지는 자식들에게 남기고,
자식의 일도 잊지는 않되.
죽어서 염라대왕께 올릴 말씀,
이럴까 저럴까 생각도 절반.
술도 알맞게 취함이 좋고,
꽃도 반쯤 올린 배가 제일 안전하고,
말고삐는 반 늦추고 반 당김이 제격일세.
재물이 지나치면 근심이 있고,
가난하면 둔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
인생은 달고도 쓴 것임을 깨닫고 보면
절반 맛이야말로 제일이라네.
개인이 가장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생활에 걱정이 없으며, 그렇다고 전혀 근심이 없는 것도 아닌 정도의 유명 속의 무명이다. 그것은 일면 하찮게 보이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높은 것만을 지향한다면 끊임없이 불만과 불안밖에 없을 것이다. 분수를 알고 자신의 안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것만이 바른 생활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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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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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저자소개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 7월 도쿄에서 태어나 1963년 학습원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뒤 이듬해인 19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어떤 공식교육기관에도 적을 두지 않고 혼자서 보고 읽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학과 역사를 넘다드는 도전적이면서도 신중한 작품들을 지금까지 발표해왔다. 작품에는 그의 데뷔작인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비롯하여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바다의 도시 이야기-베네치아공화국 1천년의 메세지](상,하) [로마인 이야기](1~7권)등이 있으며, 그외에도 [남자들에게] [남자의 초상] [사일런트 마이노리티] 등 다수의 에세이가 있다. 그는 1970년에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으로 '마이니치 출판문화상'을, 82년에 [바다의 도시 이야기]로 '산토리 학예상'을, 83년에는 그간의 저작활동을 인정받아 '키쿠치 히로시 상'을 수상하였으며 88년에는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로 '여류문학상'을 그리고 93년에는 [로마인 이야기] 제1권으로 '신조학예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그는 [로마인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다. 2006년까지 전 15권으로 완성될 이 대작 [로마인 이야기]는 그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는 라이프워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전쟁을 두려워해서도 안되지만 먼저 도발해서도 안된다.
조직에는 책임 소재가 분명해지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당사자 자신이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종다양한 인간이 섞여 사는 게 인간 사회니까 이런 부류의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런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그 조직의 기능은 퇴화한다.
선정은 요컨대 정직한 사람이
무참한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란 참으로 복잡미묘한 존재여서, 호평을 받은 일은 계속하고
악평을 받은 일은 그만두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호평을 받았다고 해서 계속하다 보면 싫증을 내고,
악평을 받은 정책을 그만두고 정반대의 정책을 택하면
그때까지 비난을 퍼붓는 데 열심이었던 사람들이 뒤늦게
이전의 정책을 필요성을 깨닫고 부활을 요구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독자들에게
사실을 말하면 나는 지금 꽤나 난감하다. 그 곤혹스러움의 원인을 비유로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은 느낌이 되지 않을까 싶다.
로마사 수업을 듣는 학생들 가운데 타키투스라는 우등생이 있었다. 그가 왜 우등생인가 하면, 교수의 질문에 다른 학생들이 저마다 의견을 피력한 뒤에 전개되는 그의 견해가 그 간결한 문체와 적절한 어휘 선택, 그리고 마치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온 것처럼 현장감 넘치는 묘사력으로 다른 의견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라고 감탄한 것은 동료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교수까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의 뜻을 표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때 내가 뒷자리에서 손을 들어 발언권을 청한다. 그리고는 말한다.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실까지 시야에 넣어 생각하면, 타키투스가 내린 해석과는 다른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나의 <악명높은 황제들>은 타키투스의 <연대기>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나의 <위기와 극복>은 그의 <아그리콜라>와 <역사>가 있었기에 성립된 작품이었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대학으로 돌아가보니 그 우등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동료 학생들한테 물어보니, 아버지의 임지가 바뀌는 바람에 학교를 옮겼다고 한다. 맙소사, 이를 어쩌나, 나는 난감해지고 말았다.
이 책-<로마인 이야기> 제9권-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등 세 황제다. 연대로 치면 서기 98년부터 161년까지의 시대다. 타키투스가 사망한 것은 서기 120년이니까, 이들 세 황제의 치세를 다룬 저술까지는 바랄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98년부터 117년까지 재위한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는 그가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타키투스가 트라야누스를 다룰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69년의 내전부터-현재 남아있는 것은 69년 한 해 동안의 서술뿐이지만-96년에 일어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까지, 그러니까 타키투스로서는 '동시대'를 다룬 <역사>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 쓴 뒤에도 나의 목숨이 남아 있다면, 그 노년기는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황제를 이야기하는 데 바칠 작정이다."
그런데 타키투스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집필 자체를 그만 둔 것은 아니다. 네르바와 트라야누스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지만,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뒤부터 시작하여 네로 황제의 자결로 끝나는 <연대기>를 썼기 때문이다. 더구나 50대 후반부터 60때까지라면 역사가에게는 가장 좋은 시기라도 할 수 있다. 그런 시기에 왜 타키투스는, 서술 순서로 보아도 <역사>의 속편이 되는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황제를 쓰지 않고 그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연대기> 쪽을 선택했을까. 현대의 연구자들 중에는, 아직 생존해 있는 권력자를 다루면 여러 가지 불편이 예상되기 때문에 과거의 황제들에 대해 쓰는 쪽을 택한 게 아닐까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타키투스보다 한 세대 젊은 수에토니우스가 <황제열전>에서 다룬 것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도미티아누스까지이고 네르바 이후의 황제들은 다루지 않았으니까, 이 추측은 어쩌면 정곡을 찔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키투스는 <역사>를 다 쓴 뒤에도 아직 살아 있다면 네르바와 트라야누스에 대해 쓸 작정이라고 말한 뒤 이런 말을 덧붙였다. "사료도 풍부한데다, 어떻게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신변의 안전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보기 드물게 행복한 시대니까." 그런데도 그는 쓰지 않았다. 당초 예정에 없었던 <연대기>를 다 쓴 뒤에 쓸 작정이었는데 그만 목숨이 다해버린 것일까. 그렇기 하지만, 또 다른 추측도 가능할 듯 싶다. 그것은 역사가로서 타키투스의 성격을 고려한 추측이다. 역사 서술의 동기는 크게 다음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호기심이 풍부하여, 그로써 알게 된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천성적으로 좋아하는 경우.
(2) 과거를 서술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에 교훈이 되기를 바라는 경우.
(3)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포에 대한 강렬한 분노.
(1)의 전형은 <역사>를 쓴 그리스의 헤로도토스, (2)는 <로마 제국 쇠망사>를 쓴 영국의 에드워드 기번. (3)의 전형으로는 <전사>의 저자인 투키디데스를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심 양면으로 우세했을 터인 조국 아테네가 왜 스파르타에 패했는가.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수도 없는 아테네 사람 투키디데스의 깊은 회한과 뜨거운 분노가 역사 저술의 최고 걸작을 남겼다. 상상하건대, 제정 로마 시대의 최고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2)와 (3)의 혼합형이었던 듯한. 아니 (2) 4분의 1, (3)이 4분의 3을 차지하는 혼합형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분통이 터져야 창작욕을 자극받는 기질의 작가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 자신이 '보기 드물게 행복한 시대'라고 평가한 트라야누스 시대를 쓰지않은 이유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동포를 비난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애국자였던 타키투스에게, 트라야누스 치하의 행복한 시대는 오히려 집필 의욕이 나지 않는 시대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시대를 쓰겠다고 말해놓고도, 그의 저술 활동에 '산소' 역할을 하는 분노를 불러 일으켜주는 시대-티베리우스부터 네로까지-를 다룬 <연대기>를 쓴 게 아닐까. 물론 타키투스 자신이 트라야누스 시대를 쓰지않은 이유를 밝히지 않았으니까 나의 이런 생각은 모두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사실은 하나밖에 없다. 후세에 오현제의 한 사람으로 꼽았을 뿐 아니라 동시대의 로마인들마저 '최고의 제일인자'(Optimus Princeps)로 찬양하고, 게다가 이것을 공식 칭호로 삼기로 원로원이 의결했을 만큼 평판이 좋았던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에 관해서는 신뢰할 만한 문헌자료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동시대 사람인 타키투스나 수에토니우스만 쓰지않은 게 아니다. 200년 뒤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여섯 명의 역사가가 분담하여 쓴 <황제실록>은 도미티아누스 황제로 끝난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 속편을 쓰는 것이 목적이었는데도 하드리아누스 황제부터 시작했다. 여기서도 네르바와 트라야누스는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빠져버렸다. 1년 박밖에 재위하지 않은 네르바를 무시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20년이나 재위한 트라야누스를, 게다가 온갖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트라야누스를 다루려 한 로마 시대의 역사가가 한 사람도 없다니!
아니, 한 사람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아시아 출신의 그리스 사람인 카시우스 디오였다. 원로원 의원으로 속주 총독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그의 저술에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현자증인'이었던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기술뿐이고, 나머지는 확실한 방증이 없는 한 신빙서이 희박하다는 것이 후세 연구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사정이 이래서는, 문헌자료에만 의존했다고 해도 좋은 기번(1737~94) 시대의 로마사 연구자들이 사료가 없음을 한탄한 것도 당연하다. 우등생 타키투스의 '전학'으로 난감해진 것은 그이 의견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동료 학생들이나 교수였으니까. 후세에 쓰여진 연구서를 흔히 '제2차 사료'라고 부르는 로마사 연구자들이 '제2차 사료'나 '원사료'라고 부르는 것은 다음 여섯 가지이다.
(1) 문헌자료(로마시대 사람이 써서 남긴 글)
(2) 고고학적 성과
(3) 금석문(비석, 동판 등)
(4) 금화, 은화, 동전
(5) 초상 등의 조형미술
(6) 파피루스 문헌(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중동 일대의 것에 한함)
(2)~(6)의 사료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였다. 2천 년 전의 로마인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극히 최근의 일이라고 해도 좋다. (1)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기번 시대 학자들의 한탄을 오늘날의 우리는 공유하지 않아도 된다. 타키투스가 거리낌없이 비난한 티베리우스나 클라우디우스나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다시 보게 된 것도 (2)~(6)의 연구 성과를 참고할 수 있게 된 결과다.
그렇긴 하지만 문헌자료의 중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후세의 우리에게도 타키투스의 '전학'이 유감스러운 노릇인 것은 변함이 없다. 게다가 역사 서술에 관심을 가진 삶에게는 가장 좋은 시기인 43세부터 62세까지의 세월을 타키투스는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 살았다. 네르바 황제 밑에서 보결 집정관에 선출된 것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맡지 않았으니까, 정신적으로나 시간적으로도 여유있는 시기였을 거다. 그 여유를 <아그리콜라>와 <게르마니아>, <역사>, <연대기>를 집필하는데 투입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성숙한 어른의 눈으로 바라본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를 쓰지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시대에 대해서는 '보기 드물게 행복한 시대'라는 한마디 말을 남겼을 뿐이다. 하지만 이 한마디가 트라야누스에 대한 후세 역사가들의 견해를 결정했다. 그리고 고고학, 금석문, 화폐, 조형미술, 파피루스 문헌 등이 이 견해를 실증했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타키투스를 '원안'으로 삼을 수 없게 된 내 입장도 결정된다. 제7권과 제8권에서는 "타키투스여, 당신은 트라야누스가 못된 황제라고 단죄하지만 정말로 그랬을까"하는 의문을 중심축으로 삼은 반면, 이 제9권에서는 "그가 현제라는 데에는 뭇사람의 의견이 일치된 모양인데, 그렇다면 현제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이유로 로마인들을 그를 현제로 찬양했을까"가 내 생각의 중심축이 될 것이다. 어쨌거나 그 시대를 '오현제의 시대'라고 부른 것은 후세지만, 동시대 로마인들도 'Saeculum Aureum'(황금 시대)이라고 불렀으니까.
제1부 트라야누스 황제 (재위 : 서기 98년 1월 27일 ~ 117년 8월 9일)
제위로 가는 길
왕정 시대부터 명문 귀족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말할 것도 없고,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초대 황제에 즉위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칼리쿨라·클라우디우스·네로 등 이른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은 모두 수도 로마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있었다. 네로의 자결로 촉발된 1년의 내전 기간 동안 차례로 바뀐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황제 역시 '본적지'가 로마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내란을 수습하고 제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부터 제국의 최고통치자의 출신지는 수도 로마라는 전통이 무너졌다. '플라비우스 왕조'라고 불리는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본적지'는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70킬로미터 떨어진 레아테(오늘날의 리에티)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본체인 이탈리아 반도를 11개 주로 분할했는데, 수도 로마는 나폴리를 포함한 '제1주' 리에티는 '제4주'에 속한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뒤 후임 황제가 된 네르바의 '본적지'는 수도 로마니까 흐름이 역류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네르바로 말미암아 흐름이 더욱 빨라진다.
네르바가 후계자로 지명한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janus)는 서기 53년 9월 18일 에스파냐 남부의 베티카 속주에 있는 이탈리카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에도 로마 시대의 이름 그대로이탈리카(Italica)라고 불리는 이 소읍은 로마 시대의 히스팔리스(오늘날의 세비야)에서 북서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작은 교외 도시는 아니다. 이베리아 반도를 지중해에서 대서양까지 관통한 당시의 간선도로 가운데 하나로서 카디스에서 세비야와 메리다를 거쳐 북상하는 가도가 이탈리카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 전역에 가도망을 간 로마인도 순환도로의 개념만은 갖고 있지 않았다. 가도란 도시든 읍이든 촌락이든 거주지역한복판을 지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읍인 이탈리카에서도 사람이나 물산의 왕래는 익숙한 풍경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탈리카에는 다른 도시에는 없는 특수성이 있었다 이탈리아인의 도시를 뜻하는 '이탈리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로마인이 본국 이외의 땅에 건설한 최초의 식민지(콜로니아)였기 때문이다. 기원전 206년에 이탈리카 건설을 결정한 사람은 그로부터 4년 뒤에 자마회전에서 명장 한니발을 무찌르게 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 그 무렵은 로마와 카르타고가 사투를 벌인 포에니 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카르타고에서 빼앗아 로마 영토로 삼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베리아 반도를 지키기 위해 파견된 퇴역병들이 이탈리카 최초의 주민이 되었다.
당시 로마 군단은 본국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편성되어 있었다. 병역을 마치기 전에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으니까, 그들은 모두 독신자였다고 해도 좋다 그 후에 생겨난 로마 식민도시의 주민들이 그러했듯이, 이탈리카에 정착한 퇴역병들도 현지 여자와 결혼했을 것이다. 배우자는 에스파냐의 원주민 아가씨였을지도 모르고, 좁은 지브롤터 해협(고대에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불렸다)을 건너에스파냐와 왕래가 잦았던 북아프리카 출신의 여자였을지도 모른다. 또는 카르타고인의 피를 이어받은 여자였을지도 모른다. 로마 영토가 되기 전에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것은 카르타고인이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모국 이탈리아에서 여자를 불러들인 예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스인과 달리 로마인은 타민족과의 혼혈에 전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트라야누스의 조상이 본국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 시민이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의 몸 속을 흐르는 피는 혼혈이었을 게 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트라야누스가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라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속주 출신 로마인이라는 이 특수한 사정 때문에 트라야누스의 청소년 시절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로마 역사에 트라야누스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 때부터였고, 그때도 트라야누스의 처지는 28개인 로마 군단 가운데 1개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의 아들에 불과했다. 그와 이름이 같았던 아버지는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 계속된 유대전쟁 당시 총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 밑에서 제10군단을 지휘했고, 총사령관이 티투스로 바뀐 예루살렘 공략전에서도 공격에 참가한 4개 군단 가운데 하나를 이끌고 눈부신 전공을 세운 무인이다. 이 무렵 아들은 17세의 성년식을 치렀을까 말까 한 나이였다. 어쩌면 유대교의 본산인 대신전의 화재로 종결된 예루살렘 함락의 자초지종을 제10군단의군단장 막사 앞에서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로마의 지도층에 속하는 가정에서는 자녀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어머니가 양육을 책임지고, 성년이 된 뒤에는 아버지가 그 임무를 계승하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트라야누스도 고향 이탈리카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베티카 속주의 도읍이었던 코르두바(오늘날의 코르도바)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뒤에는, 제국의 동방에서 군무를 수행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보내졌을 것이다. 현실적인 로마인은 현장 교육을 중시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현직이 무엇이든 현장 교육은 군단에서 받는 것이 상례였다. 지도자 계급의 등용문인 회계감사관에 입후보하려 해도 보통 10년, 적어도 3∼4년은 군단 경험을 쌓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사춘기를 갓 벗어난 트라야누스도 예루살렘 함락을 체험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군단 생활을 시작했을지 모른다. 다만 어느 전선에서 군단생활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가 지휘한 제10군단은 유대 땅에 남아 있었으니까, 아버지 밑에서 견습기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로마로 불려간 아버지와 동행하여 난생 처음으로 제국의 수도 로마를 본 것도 이 무렵일지 모른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이 부하를 원로원 의원에 천거했을 뿐만 아니라 귀족(파트리키)의 반열에 올려주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본국 이탈리아의 지방자치단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황제가 된 사람이지만, 자기와 같은 계층에 속하는 이탈리아 지방 출신만 우대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흥미롭다.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제국의 서방인 에스파냐 출신이지만, 제8권에서도 말했듯이 제국의 동방에 있는 속주 출신도 베스파시아누스의 천거로 원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트라야누스의 황제 즉위로 더욱 높아지는 본국 이탈리아와 속주의 균등화 물결은 그보다30년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출세 덕택에 청년 트라야누스의 처지도 완전히 달라졌다 서기 75년,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총독 관저가 있는 안티오키아로 간 트라야누스는 견습기간을 끝낸 뒤 '대대장' (트리부누스)으로 진급했지만, 그것도 군단의 밑바닥부터 잔다리를 밟으며 한 계급씩 올라온 사람들이 백인대장을 거친 뒤에야 겨우 손에 넣을 수 있는 대대장이 아니라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 (Tribunus laticlavius)였다.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이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는 이 계급은 10 명의 대대장 가운데 가장 높은 수석 대대장이었다. 이 대대장만은 원로원 의원의 옷자락 장식과 같은 주홍색으로 물들인 '숄'을 어깨에 두르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린다. 이것은 원로인 의원의 자제들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지만, 수석 대대장으로서 책임도 막중했다. 27대 초반의 나이인데도, 군단장이 어떤 사정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대신해서 군단을 지휘하는 임무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경험도 모자란 풋내기한테 이런 중책을 맡기는 것도 지도자 예비군인 그들에게만 주어지는 현장 교육의 일환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문인으로 더 유명한 타키투스와 소 플리니우스도 원로원 계급에 속했기 때문에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을 지냈다. 이들의 군대 경력은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으로 끝나버렸지만, 트라야누스는 22세 때 군단장 차석에 취임했다. 제국의 안전보장에 가장 중요한 전선 가운데 하나인 시리아가 그의 첫 임지였다.
아버지 트라야누스가 부임한 시리아 속주 총독은 30명이나 되는 다른 속주 총독들과 한 묶음으로 논할 수 없다. 로마 제국의 중요한 방위선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이지만, 시리아 속주는 예로부터 줄곧 로마의 가상 적국이었던 파르티아 왕국과 유프라테스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위치에 있다. 당시 로마와 파르티아는 평화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로마는 우호관계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나라였다. 이 시리아속주에는 3개 군단이 상주해 있었다. 게다가 파르티아 북쪽에 있는 아르메니아는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이곳 국경에도 2개 군단을 상주시켰다 그리고 반란을 진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대에도 1개 군단, 이집트에는 2개 군단이 주둔해 있었다. 제국 동방의 안전보장을 맡고 있는 이들 8개 군단은 주전력인 군단병만 해도 4만 8천 명에 이르고, 보조 병력까지 포함하면 10만 명이나 되는 막강한 전력이다 이들에 대한 총지휘전이 시리아 총독에게 맡겨져 있었다. 시리아 총독이라면 로마에서는 전통적으로 동방군 총사령관과 동의어였다.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에서 유대 전쟁을 치르기 전의 경력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도 베스파시아누스와 마찬가지로 백인대장부터 잔다리를 밟아 출세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75년부터 79년까지 4년 동안 이 어려운 임무를 무난히 수행한 것만 보아도 상당한 역량을 가진 사람임은 분명하다. 아들 트라야누스에게도 가장 좋은 스승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을 2년 뒤인77년에 자기 슬하에서 떠나보낸다. 당시 24세였던 트라야누스는 여전히 왼쪽 어깨에 주홍색 띠를 두른 군단장 차석의 지위를 유지한 채, 제국 서방에서 가장 중요한 전선인라인 강 주둔 군단으로 보내졌다. 오리엔트와는 전혀 다른 풍토 속에서 추위와 비를 견디며 3년을 보내게 된다. 그동안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티투스의 명령으로 아시아 속주총독에 부임해 있었다. 이 노장과 함께 싸운 경험이 있는 티투스 황제는 4년 동안의 격무에 보답할 셈으로 적과 대치할 필요가 없는 평화로운 소아시아 서부의 속주로 보내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 문명의 발상지이자 에페수스나 밀레투스처럼 문화와 생활 수준이 높은 도시도 많은 속주에 부임해 있으면서도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덕분에 트라야누스의 변경 '수업'은 24세부터 27세까지 계속된다.
서기 81년, 28세가 된 트라야누스는 로마인들이 '명예로운 경력(쿠르수스)'이라고 부른 엘리트 코스에 첫걸음을 내딛는다. 국고 출납 책임자인 회계감사관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근무지는 수도 로마, 임기는 1년이었다. 아버지는 이 무렵 아시아 속주 총독의 임기도 무사히 마쳤을 테지만, 그 후 거기에 버금가는 요직에는 앉지 않았다. 수도 로마에서 종신직인 원로원 의원만 지냈거나, 아니면 고향 이탈리카로 돌아가 은둔했을까.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은, 비록 귀족의 반열에 올랐다해도 결국 신흥계급 제1세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2세대인 아들이 밟은 경력은 이미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회계감사관 임기를 마친 뒤에는 다시 전선에 복귀하여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의 임무를 재개한다. 어느 전선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로마 군단에서는 병사가 근무지를 이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도 장교 급의 전근은 활발했으니까 각지의 군단을 옮겨다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때는 탁월한 인사(A폴)로 정평이 있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였다. 83년 무렵에는 원로원에도 들어간 것 같다. 그리고 87년, 34세가 된 트라야누스는 '명예로운 경력'의 두 번째 단계인 법무관에 당선되었다. 법무관도 근무지는 역시 수도 로마이고, 재판장처럼 사법을 담당하는 관직이지만, 법무관을 거쳐야만 비로소 군단장을 맡을 자격을 가질 수 있다. 전시에는 이 조건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평시에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로마인이었다. 트라야누스도 법무관 임기를 마치자마자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근무지는 로마화가 오랫동안 진행된 탓에 적과 대치할 일이 전혀 없는 히스파니아(오늘날의 에스파냐), 그에게 맡겨진 군단은 오래 전부터 이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제7군단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에스파냐 면적 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도 겸했기 때문에, 군단기지가 있는 레온과 총독 관저가 있는 타라고나를 오가는 데만도 바빠서 고향 이탈리카를 찾을 여유는 전혀 없었다. 이렇게 35세의 1년이 지나간다. 그대로 계속 에스파냐에 머물러 있었다면 훗날의 트라야누스는 없었겠지만, 운명의 전환점은 1년 뒤에 벌써 그를 찾아왔다.
서기 89년, 라인 강 상류의 방위를 맡고 있던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수도 로마에 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몸소 근위대를 이끌고 북상하는 동시에 트라야누스 휘하의제7군단에도 출동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반란은 라인 강 하류를 담당하는 저지 게르마니아군이 당장 행동을 개시했기 때문에 도미티아누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진압되고, 사령관 사투르니누스는 자결하여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더구나 트라야누스가 군단과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고 프랑스를 횡단하여 라인 강에 도착했을 때는 진압 과정에 파괴된 마인츠 군단기지를 복구하는 일까지도 다 끝난 뒤였다. 그렇긴 하지만 36세의 트라야누스에게는 결코 헛걸음이 아니었다. 두 살 위인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근무지로 돌아가는 제7군단과 행동을 함께한 모양이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이 젊고 우수한 군단장을 에스파냐 같은 평온한 곳에 계속 놓아둘 마음이 없었다. 사투르니누스의 자결로 가장중요한 전선 가운데 하나인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러나 법무관만 거치면 맡을 수 있는 1개 군단장과 4개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은 다르다 전략단위인 2개 군단 이상의 전력을 지휘하려면 집정관 경력이 있어야 했다. 트라야누스는 90년에 치러진 91년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하기야 황제의 천거를 받았으니, 입후보는 곧 당선이나 마찬가지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트라야누스는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벌써 '명예로운 경력'의 세 번째 단계에 도달한 셈이다 그것도 집정관 경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던 '보결 집정관' (consul suffectus)이 아니라 1월 1일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정규 집정관 (consul ordinarius)이었다.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자의 책무인 '명예로운 경력'에 따라 법무관과 집정관을 경험한 타키투스나 소 플리니우스는 '보결 집정관'밖에 지내지 못했다. 트라야누스는 아버지 대에야 겨우 원로원 계급에 들어왔지만, 이 단계에서 이미 그들을 앞지른 셈이다.
서기 9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집정관 경력으로 충분한 자격을 갖춘 39세의 트라야누스를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도 겸하는 중책이다. 이런 트라야누스의 경력은 군대 경력과 민간 경력이 혼연일체를 이룬 로마의 엘리트 육성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또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다른 전선과 달리 고지 게르마니아 전선에는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고지 게르마니아를 맡고 있는 4개 군단 가운데 2개 군단이 상주하는 마인츠에서 라인 강을 따라 레겐스부르크까지 이어지는 '게르마니아 방벽' (Limes Germanicus)의 방위도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이 맡고 있었는데, 이 방벽 건설을 시작한 것은 도미티아누스였다. 황제는 이런 지방을 트라야누스에게 맡긴 것이다. 72년부터 97년까지 5년 동안, 트라야누스는 황제의 신뢰에 훌륭하게 보답한다. 96년 가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살해되었다. 그러나 황제가 네르바로 바뀐 뒤에도, 트라야누스의 출세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천거 덕택임이 분명한데도 그의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트라야누스가 5년 동안 쌓은 업적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기록말살형' (제8권에서 상세히 설명함)으로 단죄하더라도 그의 뛰어난 업적은 계승하는 것이 로마인의 평소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줄기차게 비난한 타키투스도 자신이 공직에서 출세한 것은 도미티아누스 시대였다고 솔직하게 말하고있다.
네르바는 제위에 오른 해에 이미 70세였다 아들이 없고 고령이라는 점이 원로원이 네르바를 추대한 이유라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진짜이유는 네르바의 출신 가문이었다. 그 자신의 출생지는 이탈리아의 지방도시인 나르니지만, 공화정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명문 귀족이다. 이런 귀족 가문은 서기 1세기 말의 시점에서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은둔했을 때 동행한 몇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네르바의 할아버지였다. 교양인이었던 티베리우스는 자신과 대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교양을 가진 사람만 카프리 섬에 데려갔다. 티베리우스와 네르바의 할아버지의 관계는 황제와 원로원 의원의 관계라기보다 풍부한 교양을 가진 친구 사이였을 것이다. 네르바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원로원 의원이었지만, 정치가로서보다 교양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원로원과 험악한 관계에 있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도 자신과 함께 집정관을 맡을 사람을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골라야 했을 때는 네르바를 선택했다. 자기가 죽은 뒤에 그 네르바가 황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요컨대 네르바는 플러스 요인보다 마이너스 요인이 없었기 때문에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가 걱정해야 할 상대는 네르바를 제위에 앉혀놓고 만족해 있는 원로원이 아니라 도미티아누스 지지파라 해도 좋은 근위대나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군단이었다. 병사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봉급 인상을 실현하고 전선에도 자주 찾아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병사들에게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서기 96년 9월 18일, 45세 생일을 한 달 앞둔 젊은 나이에 살해되었다. 15년에 이르는 치세 뒤의 죽음이다 이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한테는 미움을 받았지만, 로마사 연구의 획기적인 업적을 쌓은 19세기의 역사가 몸젠은 그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암살은 원로원 내부의 도미티아누스 반대파가 음모를 꾸민 결과가 아니었다. 네로 황제 때처럼 속주에서 일어난 불만이 도화선 역할을 한 것도 아니다. 궁중 측근들이 잠자고 있는 황제를 기습하여 살해한 사건이다. 하수인은 황후를 토시는 해방노예였다. 하지만 원로원이 전혀 무관했다고도 말할 수 없다. 황제가 살해된 날 밤에 이미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공동 집정관을 지낸 적이 있는 네르바에게 연락이 가고, 이튿날 아침 일찍 소집된 원로원 회의는 일사천리로 네르바를 황제로 승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를 '기록말살형'으로 단죄한다는 결의안까지 가결해버렸다. 한밤중부터 이튿날 아침까지의 짧은 시간에 이처럼 솜씨 좋게 일을 처리한 것만 보아도, 누군가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하지만 그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는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원로원도 추적하지 않았다. 온후하고 비정치적인 네르바의 성격 때문에, 아무도 누가 주모자일지 모른다는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진상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겨졌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것을 알고도 수도의 근위대나 변경의 군단들 은 움직이지 않았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솜씨로 '정권 교체'를 기정 사실화해버린 원로원의 방식이 주효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병사들의 방관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도미티아누스에게 심취하여 암살 주모자가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근위대는, 1년이 지나도록 네르바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자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다. 마침내 네르바황제를 방에 감금하고, 주모자를 색출하여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네르바도 사태 수습의 필요성을 느꼈다. 71세인 네르바가 자신의 신변 안전을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위대의 불만이 변경 군단에 파급되는 것을 더 우려했을 게 분명하다. 네로 황제가 죽은 뒤 1년 반 동안 계속된 내전은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뒤에도 로마인들에게 악몽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한 대책을 네르바는 원로원에 맡기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한 듯하다. 그 대책이 공표 되었을 때 누구보다 놀란 것은 원로원 의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서기 97년 10월 27일, 카피톨리노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유피테르 신전 앞에서 제사를 끝낸 네르바 황제는 오른손을 들어 막 자리를 뜨려는 참석자들의 발을 붙잡았다.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본 사람들에게 황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첫째,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맞이한다.
둘째, 트라야누스에게는 '호민관 특권' (Tribunicia potestas)과 '로마군 최고통수권' (Proconsulare maius)도 할양한다.
셋째, 트라야누스는 이듬해인 98년도 집정관에 황제 자신과 함께 입후보한다
요컨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 황제로 지명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리하여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 시대의 상식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겨울철 휴전기간을 이용하여 수도 로마에 돌아와, 원로원에서 실시되는 집정관 선거-당선이야 따 놓은 당상이지만-에 출마하고, 이듬해 1월 1일 열리는 원로원 첫회의에 참석하여 네르바에게 감사하는 연설을 하고, 그런 일을 모두마친 다음에 라인 강 연안의 군단기지로 돌아가는 게 당연했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44세의 트라야누스는, 전투에서 이기려면 예측불허의 작전을 구사함으로써 적의 의표를 찔러야 한다는 것을 아는 무인이기도 했다. 속주 출신인 그에게 제위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으니, 로마로 곧장 달려가 네르바에게 감사 인사를 늘어놓을 거라고, 원로원 의원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서기 98년 1월 1일에도 트라야누스는 수도 로마에 없었다. 1월 27일 괼른에서 네르바의 죽음을 통고 받은 뒤에도 그는 계속 전선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된 이상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반도의 질서 유지는 그의 책임이다. 본국 안에 배치된 유일한 군사력인 근위대가 현직 황제를 감금하는 사태가 일어나서는 질서 유지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당분간 수도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트라야누스는 근위대장과 그 동조자 몇 명만 괼른으로 불러들인다. 황제의 명령이니까 응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괼른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살해되었다. 이것으로 근위대 내부의 불온분자 문제는 해결되었다. 수도에 남아 있던 1만 명의 근위대 병사들은 네르바한테는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트라야누스는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엄격한 조치에 복종했다. 덧불여 말하면 네르바는 1개 군단도 지휘해본 경험이 없고 민간 경력만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트라야누스가 수도 귀환을 미루면서까지 완수하려고 생각한일은 무엇이었을까. 네르바의 부음을 트라야누스는 괼른에서 받았다. 괼른은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의 관할구역이다. 로마군의 담당 구역을 중시한다면,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트라야누스가 '월경'할 수 없는 지역이다. 하지만97년 10월에 네르바의 양자가 되었을 퍼 트라야누스는 황제의 독점적 권한인 로마군 최고통수권까지 할양 받은 상태였다. 그가98년 1월에 괼른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은 네르바의 사망으로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공동 황제의 지위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45세 생일을 8개월 남겨둔, 남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성숙한 나이에 제위에 오른 이 속주 출신 황제는 정식으로 제위 에 오르기 전에 이미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이루려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사업의 계승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을 금지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유훈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것을 결행하는 이상은 반드시 성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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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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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11. 보화(普化)스님
보화(普化)스님은 반산 보적(盤山寶積) 선사의 제자로 항상 미친 사람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교화하였습니다. 그당시 그런 기행을 하는 스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오직 임제(臨濟)스님만이 심중을 알고 흉허물없이 잘 지냈습니다. 하루는 진주(鎭州)의 저자거리에 나와서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나에게 장삼 한 벌을 해달라."하며 졸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화스님에게 장삼을 지어 드렸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이것은 내가 입을 옷이 아니다."하며 받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더욱 이상히 여기며 미친 중이라고 수군댔습니다. 어느 날 임제스님이 그 소문을 듣고는 장삼 대신에 관(棺)을 하나 보내니, 보화스님이 웃으며 "임제가 내 마음을 안다."하고는 그 관을 짊어지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일 동문 밖에서 떠나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음 날 동문 밖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는데 보화스님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오늘 여기서 죽지 않겠다. 내일 서문 밖에서 죽겠다."고 하며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욕을 하고는 흩어졌습니다. 다음 날 서문 밖에 또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 않고 내일 남문 밖에서 죽겠다."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습니다. 다음 날 남문 밖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는데,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않고 내일 북문 밖에서 죽겠다."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비록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였지만미친 중이 거짓말만 하여 사람을 속인다고 삿대질을 하며 분위기가 살벌하였습니다. 다음 날 북문 밖에는 과연 보화스님이 관을 메고 나타났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화스님은 관 위에 묵묵히 앉아 있는데 마침 한 길손이 지나가므로 그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이 관 안에 들어가 눕거든 관 뚜껑을 닫고 못질을 해달라."고 하고는, 그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며 관 뚜껑을 닫으므로 그 길손이 못질을 하고 떠나갔습니다. 길손이 성중에 들어가 그 이야기를 하니 진주성 사람들이 놀래며 북문 밖으로 보화스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못질한 관 뚜껑을 열고보니 그 속에 있어야 할 보화스님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때 마침 공중에서 은은히 요령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그 요령 소리가 나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수없이 절을 하며 보화스님의 법력을 알아보지 못한데에 대해 통탄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보화스님이 보인 전신탈거(全身脫去)의 이적입니다.이 사실은 선종 어록 가운데 가장 권위있는 임제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2. 왕가(王嘉)
왕가는 후진(後秦) 때 숨어사는 사람으로 유명한 도안(道安)스님과 친하였습니다. 도안스님이 돌아가실 때가 되어 왕가가 찾아가니 도안스님이 말하였습니다.
"나와 같이 가지않으려는가?"
왕가가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아직 빚이 좀 있어서 빚을 갚고 가겠습니다."
그 뒤에 요장이 장안(長安)을 빼앗을 때 왕가는 일부러 성 안에 있었는데, 요장이 물었습니다.
"내가 곧 천하를 얻겠는가?"
"조금 얻겠다."
요장이 그말을 듣고 왕가를 죽여버렸으니 왕가가 말한 빚이란 바로 이를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요장의 아들 요흥(姚興)이 천하를 얻었는데 요흥의 자(字)가 자략이었습니다. 그러니 '조금 얻겠다'란 말은 자략이가 요장을 죽이고 천하를 얻는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왕가가 죽던 날, 어떤 사람이 농상(壟上)에서 왕가를 만나니, 왕가가 자기를 죽인 요장에게 편지를 보내자 요장은 그 편지를 받아보고 크게 놀래며 탄복하였다고 합니다.
13. 동빈거사(洞賓居士)
동빈거사(洞賓居士) 여순양(呂純陽)은 당나라의 현종(玄宗) 천보(天寶 742~755) 때 하양(河陽)에서 났습니다. 그 무렵 신선도(神仙道)를 닦아 크게 유명해진 종리권(鐘離權)이 동빈을 보고 "세상의 영화(榮華)는 잠깐 동안이니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신선도를 배우라"고 권하였습니다. 동빈은 그 말을 좇아 종리(鐘離)를 따라 공부 길을 떠났습니다. 한곳을 지나다가 종리는 큰 금덩어리를 하나 주어 가지고 대단히 기뻐하며 말하였습니다.
"자네가 도(道)를 닦으러 가니 하늘이 그것을 알고 도(道) 닦는 밑천을 하라고 주는 것이니 이것을 팔아서 모든 비용에 쓰자."
그러면서 동빈에게 그 금덩어리를 주자, 동빈은 크게 성내며 그 금덩어리를 집어던지며 말하였습니다.
"내 들으니 도(道)하는 사람은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데 금덩어리 하나 보고 그렇게 좋아하는 놈이 무슨 도(道) 닦는 놈이냐? 너는 도인(道人)이 아니라 분명코 도적놈이니 너 같은 놈은따라갈 수 없다."
그러고는 뿌리치고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종리는 크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금덩어리를 자세히 보라."
동빈이 자세히 보니 그것은 금이 아니라 썩은 돌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종리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깊은 산골에 가서 움막을 짓고 공부를 하는데, 하루는 종리가 어디 갔다 온다 하며 더 깊은 골짜기에 가서 무슨 약을 캐어오라 하므로, 동빈은 지시한 곳에 가서보니 아주 잘지은 초가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이런 깊은 산골에 어찌 이런 집이 있는고' 하는 의아심이 나서 그 집 마당에 가서 보니, 방안에서 세상에 보기드문 예쁜 여자가 반기며 나오더니, "우리 남편이 먼 길을 떠난 지 오래 되어 대단히 적적하더니 마침 잘 오셨습니다" 하며 동빈의 손을 잡아 당기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동빈이 번개같이 발로 차며 꾸짖기를, "이 요망한 년 이것이 무슨 짓이냐?"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집과 그 여자는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자기 스승인 종리가 "허허" 하고 손뼉치며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동빈은 또 다시 시험당한 줄 알았습니다. 종리가 하는 말이,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이 재물과 여자인데 네가 그만큼 뜻이 굳으니 이제는 너의 집에 가서 부모를 아주 하직하고 참으로 공부 길을 떠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리와 같이 자기 고향에 가서 집으로 갔는데 대문이 잠겨 있고 아무리 소리쳐도 안에서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담을 넘어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자기의 부모, 형제, 처자가 누군가에게 맞아 죽어 사지(四肢)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온 마당에 가득 널려 있었습니다. 종리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벌벌 떨며 동빈더러 '그 시체를 전부 주워 모으라' 하였습니다. 동빈은 처음부터 조금도 놀라는 빛이 없었습니다. 시체를 주워 모으면서 얼굴을 조금도 찌프리지 않고 마치 나무 막대를 주워 모으듯 아주 태연하였습니다. 종리가 그것을 보고 또 한 번 크게 웃으니 모든 시체는 간곳 없고 집안에서 자기 가족들이 반기며 쫓아나왔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종리에게 시험당한 줄 알고 동빈은 크게 탄복하며 수없이 절하였습니다.
그 뒤로 동빈은 신선도를 닦아 세상에 으뜸가는 신선이 되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을비롯하여 기묘한 재주를 많이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천하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황룡산(黃龍山)에서 회기(晦機) 선사의 도력(道力)에 항복하고 그 밑에서 크게 깨쳐 불법(佛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천여 년 동안 그 몸 그대로 돌아다니며 많은 불사(佛事)를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너무나 유명한 사실들입니다. 일례를 들면, 송나라의 휘종(徽宗) 선화(仙化) 원년(元年 1119)에 휘종(徽宗) 황제가 임영소(林靈素)라는 사람에게 속아서 그와 모든 것을 의논하는데, 문득 동빈이 그 자리에 나타나서는 임가를 꾸짖고 황제에 게 속지 말라고 타이른 것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14. 유안(劉晏)
유안(劉晏)은 당나라의 대종(代宗 763~779) 때의 유명한 재상인데, 어릴 적부터 이인(異人) 만나기를 소원하여 많은 애를 써 왔습니다. 한 번은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 웬 이상한 사람들이 서너명이 술을 마시고 놀다가 한 사람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왕십팔(王十八)이 있지 않는가!"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 깊이 간직하였습니다. 그 후 자사(刺史)가 되어 남중(南中)으로 가서 형산현(衡山縣)을 지날 때 그 현청(縣廳)에서 쉬었습니다. 때는 봄철인데 좋은 채소들을 내어오는데, 하도 이상한 것들이 많기에 물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좋은 것들을 구하여 왔느냐?"
"여기 왕십팔(王十八)이라는 채소 가꾸는 사람이 있는데 솜씨가 참으로 묘합니다."
그 말에 문득 이전에 이름을 들은 생각이 나서 '그 사람을 한번 가서 만나보자' 하였습니다. 관인들이 그를 불러오려는 것을 말리고 자기가 직접 가서 보았습니다. 왕십팔은 떨어진 의복에 그 모양이 대단히 흉하였는데, 유안을 보더니 겁을 내며 벌벌 떨면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그를 데리고 가서 술을 권하니 겨우 조금만 먹었습니다. 무엇을 물어도 도무지 '모른다'고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더 기이하게 여겨 '같이 가자'하니 처음엔 사양하다가 못 이겨 같이 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데, 배안에서 유안은 자기 가족에게 왕십팔을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모두 예배하도록 하였습니다. 며칠을 가다가 그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 하더니 계속하여 똥을 싸서 배안의 사람들이 크게 곤란해하였습니다. 모두가 그를 원망하는데 유안만은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앓더니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유안은 크게 슬퍼하며 정성을 다하여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뒤에 유안이 벼슬이 바뀌어 딴 곳으로 갈 때 또 형산현에 들렀더니, 군수가 나와 반겨 맞으며 그때에 데리고 갔던 왕십팔이 얼마 후 돌아와서 '도로 가라' 하기에 '그만 돌아왔다'고 말하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크게 놀라 '지금도 있는가?' 하고 확인한 뒤에 그 처소에 가보니, 빈 집뿐이었습니다. 이웃 사람 말이 '어제 저녁에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울며 여러 번 절하고 나서 사람을 보내어 옛날에 그를 장사지낸 묘를 파보니 과연 의복뿐이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듣고 그 때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몇 해 뒤에 유안이 큰 병이 들어 정신을 잃고 거의 죽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왕십팔이 찾아와서 유안에게 약 세 알을 먹이자 배 속에서 큰 소리가 남과 동시에 유안이 일어나 앉는데 병이 씻은듯이 나았습니다. 가족들로부터 왕십팔이 병을 낫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유안이 일어나 울며 절하자, 왕십팔이 말하였습니다.
"옛정을 생각하여 와서 구하였는데 앞으로 삼십 년은 더 살 것이다. 삼십 년 뒤에 만나자."
그러고는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유안이 아무리 붙들어도 소용없고 많은 보물을 주어도 "허허" 크게 웃기만하고는 받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그 후 유안은 재상(宰相)이 되어 천하의 정사를 잘 다스리다가 못된 사람의 중상으로 대종(代宗) 황제의 미움을 받아 충주(忠州) 땅에 귀양을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왕십팔이 또 찾아와서는 웬 약을 주어 받아먹으니, 삼십 년 전에 먹은 약이 그대로 다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왕십팔은 그것을 물에 씻어 지니고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습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유안이 죽자, 이 신기한 사실이 세상에 널리 전하여졌습니다.
15. 법수(法秀)
법수(法秀)는 당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가 현종(玄宗) 개원(開元) 26(738)년에 꿈에 이상한 스님을 만났는데 가사(袈裟) 오백벌만 지어 회향사(廻向寺)에 보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법수가 곧 가사를 만들어 회향사를 찾아가려 하였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길에서 꿈에서 본 그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탁한 가사는 어떻게 되었는가?"
스님은 대뜸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사는 다 되었으나 회향사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법수가 대답하자, 그 스님이
"따라오라."
하기에, 며칠 동안 따라가다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주 궁벽한 곳으로 가서 한 곳에 이르니 돌로 쌓은 단(壇)이 나왔습니다. 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스님과 함께 오래도록 예배드리자, 어느 사이엔가 층암절벽 위에 있는 많은 기와 집들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과 같이 올라가 보니 그곳에 과연 회향사라는 현판이 보였습니다. 건물과 경치가 모두 인간 세계에서는 보지 못하던 훌륭한 것들이었으며,대중스님들도 많은데 다 성인들 같이 보였습니다. 그 스님은 가사를 전부 나누어주고 나서 한 빈방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것이 당나라 임금이 불던 것이니 가져가 주라."하였습니다. 하룻밤도 더 못자게 해서, 이튿날 산을 내려와 쳐다보니 절은 간 곳 없고 오직 바위만 보일 뿐이였습니다. 법수가 여러 차례 예배한 뒤에, 대궐로 가서 옥퉁소를 올리고 그 연유를 말하니, 현종 황제가 받아 불어보는데 정말로 많이 불던 사람같이 소리가 잘 났습니다. 그래서 현종은 천하에 둘도 없이 뛰어난 문장가인 이태백(李太白)을 불러 글을 짓게 하고, 자신은 옥퉁소를 불며 노래하고 양귀비를 시켜 춤추게하니 마치 인간을 떠난 신선놀음과 같았습니다. 이 소문이 천하에 퍼지자 기이하다고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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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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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의 마지막 수업 - 모리 슈워츠
사랑으로 생기는 오해
가족들과 친구들은 우리의 몸 상태를 실제보다 더 좋게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우리의 병이 낫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내 친구들, 가족, 간병인들은 내가 화장지를 좀 달라고 하면 언제나 화장지 상자를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좋아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거리에 갖다 놓는 것이겠지만, 내 손은 거기까지 닿지 않습니다. 이미 내 팔이 너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가 그런 말을 하면 그들은 다시 상자를 가까운 곳으로 옮겨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내 팔이 그렇게 약해졌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행동을 통해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우린 아직도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2주전, 아니 4주 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말이죠.' 그들이 내 몸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나도 어떤 부분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화장지를 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문득 내 손이 거기까지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물론 나는 주변 사람들보다는 내 몸의 변화를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변화를 내 몸으로 직접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가족이나 친구들은 그저 내가 지금보다 몸을 더 잘 움직일 수 있게 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예전에 습관적으로 하던 일들을 지금도 모두 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화장지 상자에 손이 닿지 않는다고 말하면 상자를 가까이 옮겨주지만, 다음 번에는 또 멀리 떨어진 곳에 상자를 놓아두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을 보며 나는 그들이 나의 변화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상자를 더 가까이 놓아 달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내가 내 몸의 상태에 적응하고 잇는 것처럼 언젠가 그들도 내 몸의 상태를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곤 합니다.
사랑의 기억
다른 사람들의 애정, 사랑, 염려, 관심, 존경심을 있는 그대로, 풍요롭게 받아들이십시오.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향한 자기 나름의 사랑과 애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사랑과 애정에 응답해 주는 일이 언제나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내게 '아름답다'거나 '빛이 나는 게 꼭 천사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혼자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 나? 지금 내 얘기를 하는 거야? 난 환자야, 환자."
그렇지만 이것은 옳은 행동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내게서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는 것이므로 나는 그들의 말이 내 기분과 모순되는 것이라 해도 그들의 느낌을 향해 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나는 좋은 것들을 모두 내 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자신에게 타이릅니다. 나쁜 것들이 물리적으로 우리 몸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것들을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으로 가득 찬 기억들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고, 우리 마음의 평화를 지켜 줄 것입니다.
여덟. 새로운 삶의 시작
스스로를 향한 친절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동정할 줄 알고,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친구로 삼으십시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못살게 굴고, 감정적으로 자신을 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변변치 못한 인간이라거나 할 일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정한 기준이나 남이 정해 준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진작에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학교나 직장에서 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책망하고 처벌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스스로를 못살게 구는 이유는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몸이 아플 때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병이 걸렸을 때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병에 걸린 것이 마치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생각하고, 옛날의 잘못 때문에 그 벌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심한 경우, 몸이 아프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더 이상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까지 들지 모릅니다. 일단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못살게 굴고,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에게 상처를 줍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자아는 하나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도 친구로 삼아야 합니다. 자신을 슬퍼하고 용서하는 것을 연습하다 보면, 자신을 부드럽게 대하는 방법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면에서 경쟁을 부추김으로써 우리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승자가 있으면 반드시 패자가 잇다는 논리만이 유일한 진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최고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책망합니다. 그러나 2등이나 3등을 하는 것이 과연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어 가며 자신을 평가하는 짓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자신을 못살게 굴고 싶어질 때마다,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들, 무언가 긍정적인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좀더 친절해지는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에게 친절해지는 길은 부모가 되는 과정과 매우 비슷합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서 받았고, 스스로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보여주었던 인내심, 격려, 상냥함을 자신에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스스로에게 친절해지는 방법인 것입니다. 나의 경우, 새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친절하고 부드러운 태도의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재혼하신 후, 우리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정서적으로는 훨씬 부자가 되었습니다. 새어머니는 아이가 없는 분이었기 때문에 나와 내 동생을 아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새어머니는 내 인생의 아주 소중한 일부였으며, 나는 그분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분은 나의 구세주였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나는 그분에게서 윤리적인 교훈을 많이 얻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정직해지고, 진실해지고, 그들을 상냥하게 대하고, 염려해 주는 것에 대한 교훈 말입니다. 나는 새어머니에게서 배운 이 사랑의 원칙들을 나 자신을 대하는 내 태도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위한 사생활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사생활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생활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에도 내적인 사생활만은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이 아플 때는 사생활을 지키기가 훨씬 어려워집니다. 나의 경우에도 실제로 몸의 기능이 점점 약해져 감에 따라 내 사생활은 점점 더 많이 침범당하고 있습니다. 스물네 시간 내내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 곁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있습니다. 물론 나를 도와주는 분들은 아주 사려가 깊은 사람들입니다. 혼자 있고 싶을 때 그들은 나를 혼자 잇게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혼자 있고 싶어도 혼자 있을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남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나만의 사생활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사생활이란 자기 자신과 내면의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최대한으로 그런 내면의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 우리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이 세상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속에 나만의 대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생각과 감정이 존재하는 나의 사적인 공간이며, 명상과 사식을 위한 공간입니다. 내면의 사적인 공간은 병마에 시달리는 우리 모두에게, 남보다 남이 날이 많지 않은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그런 공간입니다.
마지막 기회
몸이 아플 때는 훨씬 더 자유롭게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잃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일정한 시기가 되면 현재의 자신에 대해, 그리고 과거에 꿈꾸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해 되돌아보게 됩니다. 자기가 무엇이 되기 위해 태어났는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 되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찾아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해에도 가능합니다. 사실, 그때가 되면 잃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변화를 꾀하기가 더 쉬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더 친절하고 인정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당장 친절하고 인정 많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시작하면 됩니다. 명상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명상을 시작하면 됩니다. 당신이 젊었을 때, 또는 건강했을 때 갈망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여러분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아홉. 감정의 파도타기
감정의 조절
몸이 불편하면 감정이 먼저 흔들립니다. 감정의 방향을 통제하는 능력을 높임으로써 몸을 통제하는 능력의 상실을 보상하십시오. 길게 계속되는 질병은 환자의 감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변덕스러운 감정에 끌려 다니는 대신, 감정의 방향을 바꾸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력만으로, 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감정을 다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손톱을 깨무는 버릇 같은 것을 고쳐 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톱을 그만 깨물자'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그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는 왜 자기가 손톱을 깨물고 있으며, 손톱을 깨무는 행위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정적인 이해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이런 이해는 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감정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면하고 잇는 감정 자체에 압도당하지 않으면서, 실질적인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정서적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정서적 공간'이란 어떤 한가지 생각이나 느낌에만 얽매이지 않고 폭넓게 다른 대안을 찾아볼 수 있는 여유를 말합니다. 자신이 감정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나는 반응과 대응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대개 스스로 느닷없이 우리의 뺨을 때린다면 우리는 화가 날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흉을 본다면 우리는 분개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한다면 우리는 기분이 좋아질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반응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을 보인 다음 순간에 우리는 한 발 물러서서 '난 이런식으로 반응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상황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언가에 대한 나의 반응을 바꾸고 싶을 때, 나는 왜 내가 그렇게 반응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왜 그렇게 분개했을까?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 일처럼 느껴졌을까? 그가 나에 대해 나쁜 말을 했기 때문에? 그건 그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냐'라고 나는 혼자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감정적인 반응을 더 잘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도록 일깨워 줄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해 주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 후로, 나는 수많은 편지와 카드를 받고 있습니다. 때로 나는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놓고 그런 편지들에 대한 답장을 쓰는 데 도움을 받곤 합니다. 그런 편지 중에 여러 해 동안 나와 관계가 소원했던 한 부부에게서 온 편지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편지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답장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아들 녀석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인정 많은' 가슴은 어떻게 된 거죠?"
나는 대답했습니다.
"내 감정에 솔직한 게 더 중요해."
그러자 아들 녀석이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 사람들에 대해 아버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바꿔 보는 게 어때요?"
그 녀석 덕분에 나는 한동안 멀리했던 친구들에 대한 나의 감정을 바꿨고, 더욱더 내 마음을 열 수 있었습니다.
자신과의 거리 두기
자기 자신의 목격자가 되십시오. 자신의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영적 상태를 관찰하는 객관적인 관찰자로 행동하십시오. 특별히 의미가 크거나 매우 감정적인 경험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은 그 경험에 지나치게 몰두하곤 합니다. 때로는 그 경험이 너무나 강렬하게 사람들을 끌어당겨 그만 압도당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경험에 대한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 없게 됩니다. 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몸이 아플 때는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일을 직접 경험하는 사람이자, 동시에 그런 과정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관찰자로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정신 질환에 대한 연구를 위해 몇 년 동안 체스트넛 로지라는 이름의 요양소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나는 환자와 병원 직원 사이의 상호 작용을 관찰하고 분석했으며, 이 과정을 통해 관찰자가 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나는 우선 내가 관찰하고 있는 환자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 자신이 미쳐 버렸을 것입니다. 나는 바깥에 서서 내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점점 키워 갔습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감정적으로 매우 강렬한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 나는 운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직접 경험하면서도 동시에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기 자신을 관찰하기 위해 반드시 나처럼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심리 치료를 받을 때에도 나 자신을 관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심리 치료의 요체는 바깥에 서서 자신이 되풀이하는 행동과 생각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몇 가지 행동 패턴을 바꿔서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 과정의 성공 여부는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내적 자아를 얼마나 잘 분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는 명상을 통해서도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관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명상 중에 스쳐가는 감정, 생각, 느낌을 마음속에 새긴 다음 그것들을 흘려 보내고, 다음으로 찾아오는 감정과 생각을 다시 마음속에 새기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계속해서 관찰하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리를 둔다고 해서 아예 경험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하건 순차적으로 하건 간에 관찰과 경험 모두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없다면, 조금 기다렸다가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보면 됩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지? 내가 어떻게 그것과 거리를 둘 수 있지? 내가 거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이렇게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자기를 관찰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 방법은 자기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뒤로 물러나서 그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이를 흔히 '타인의 역할 떠맡기'라고 부릅니다. 조지 허버트 미드는 1930년대에 쓴 자신의 책 [정신, 자아, 사회(Mind, Self, and Society)]에서 이런 종류의 역할 떠맡기를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 놓음으로써, 그 사람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같이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뒤로 물러나서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을 잠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내 자신을 바라볼 때, 나는 때때로 내가 혼자서는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반면에 가끔은 나 자신이 현명한 노인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일을 바라보듯이 내게 일어나는 일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것을 겪고 있다면, 그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내 경험을 외부로 투사함으로써, 나는 병 때문에 겪고 있는 주관적인 경험과 나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아도 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과 거리를 둘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종이에 적어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종이에 적음으로써 우리는 객관성을 얻게 됩니다. 내가 느끼는 고통, 내가 잃어버린 신체적 기능 등에 대해 적어 가다 보면, 나는 나 자신의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내 병으로 인한 증상은 순수하게 주관적인 경험이라기보다는, 내가 분석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객체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누구나 그 느낌에서 떨어져 거리를 두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나는 내 병과 관련된 중요한 변화들에게 나 자신을 조금 떨어뜨림으로써 그 변화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어딘가 다른 장소로 자신을 이동시키는 것도 눈앞의 경험과 거리를 둘 수 있는 방법입니다. 명상이 바로 그런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명상은 우리의 정신을 다른 공간, 또는 대안적인 현실로 옮겨 놓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같은 효과를 얻기도 합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경험을 피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화가 나거나, 분하거나, 혐오스럽거나, 절망스러울 때는 그 감정을 자신이 느끼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그런 감정과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진정으로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하는지조차 명확하게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감정 조절을 위한 노력
자신의 감정을 쉽사리 조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한 노력은 계속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회의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감정 상태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스스로를 의심하는 마음을 떨쳐 버리기보다는 그 마음에 무조건 항복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심은 바뀔 수 있고, 불안감도 사실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게는 50대인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는 자기가 혼자 살 수 있는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혼자 살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게다가 나는 그 문제에 관한 한 그 자신보다 대가 그를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불안감이 사실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물론 그는 내 말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그 문제를 좋은 방향으로 해결해 나갔습니다. 내 통찰력에 대한 그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감에 질문을 던지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계속 노력하다 보면, 우리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병에 걸린 이후 좀더 사려 깊은 태도를 보여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곤 했습니다. 짜증은 내가 그들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이렇게 혼자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도 자기 나름의 인생이 있어. 난 그들이 가능한 한 많이, 또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 내게 신경을 써 주고 잇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
그들을 이런 식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짜증을 내지도, 화를 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해주는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그리 권할 만한 일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력은 자신을 강화하기 위한 연습의 과정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지나치게 결과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차분하고 단호한 자세로 노력을 계속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야. 나는 노력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할 거야'라고 자신에게 다짐해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제임스 원칙을 이용하는 것이 어쩌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원칙은 윌리엄 제임스가 살았던 19세기의 상식과는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20세기 이전의 사람들은 사람이 이러이러한 것을 느끼면 이러이러한 행동을 보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윌리엄 제임스는 이 생각을 뒤집어서 사람이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면 이러이러한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사랑을 담아 행동을 하면, 기분도 그렇게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행동을 하면, 그 사람도 아마 틀림없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되돌려 줄 것입니다.
희망을 위한 용기
이 세상에서 희망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병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평균 이하의 희망밖에 지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희망을 갖되, 어리석은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큰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당연히 그 병이 보기보다 덜 심각한 것이기를 바라게 됩니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에는 이미 그런 희망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기대한 것이 비현실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살아 있는 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죽기 전에 루게릭 병의 치료약이 개발되기를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희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병세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기를, 악화되더라도 좀더 천천히 악화되기를 바라는 것은 현실적인 소망입니다. 그러면 나는 좀더 오랫동안 쓸모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용기라는 것은 아주 재미있는 것입니다. 병에 걸리기 전에 나는 내가 지금처럼 용감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육체적 고통에 관한 한 나는 그리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고문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다면, 나는 아주 금방 심문자가 원하는 자백을 해 버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늘 얼마쯤은 불안감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육체적 고통이나 사고에 용감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또 다른 종류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특히 지난해에 나는 그런 용기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생각을 많이 하고, 마음을 열고, 자신과 거리를 두기 위해 노력하고, 침착하게 내 병에 대처하면서 살아가기 위해 그 밖의 노력을 하면서, 용기를 발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게 내적인 평화를 가져다주었으며, 내가 자존심과 유머를 잃지 않고 기운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며, 평화롭게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적인 평화를 느끼며 죽을 수 있기를, 마지막까지 이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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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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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5장 속국의 반란과 발렌티노의 행적
피사는 요새라는 무력을 통해 막고 피스토이아는 파양을 이용해서 지킨다는 것이 피렌체의 오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피사를 지킬 만한 히도 없고 피스코이아를 붙잡고 잇을 만큼 파당도 튼튼지 않은 상태로 보였다. 마키아벨리가 프랑스에 사절로 강 있었던 1500년 8월, 피렌체 정부가 약하고 분열된 모습을 보이자 도시를 가르고 있던 파당간의 묵은 원한이 때를 맞추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무리를 들고 일어난 법치파 i Cancellieri는 방화와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며 만복콕파(만복파,i Panciatici)를 내몰았다. ((법치파)란 평시민 정부를 지향하는 반메디치파이다. (cancelliere)란 법정의 수호자라는 뜻의 라틴어 (cancellarius)에서 유래하였다. 반면 (만복파)란 말은 배가 부르다는 뜻의 (Panciata)에서 나왔으며 유복한 친메데치파를 기리킨다 - 옮긴이). 콘타도 condado(도시의 통제권 아래에 놓인 주변 농촌 지역을 가리킨다 - 옮긴이) 역시 같은 처지로, (외부의 원조를 받고 싸우는 정규전과 거의 흡사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국경 바깥에서 탐욕스러운 보르자가 이를 갈고 있는 상황에서, 그 같은 무질서는 공화국에 불명예일 뿐만 아니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당시 도시는 이미 내부적으로 전쟁에 지친 데다 불신이 만연하고 재정까지 고갈되어, 사람들의 마음은 갈가리 찢긴 상태였다. 이는 곧 피스토이아인들의 마음까지도 분열시켰고, 그 영향은 다시 피렌체인들에게로 되돌아왔다. 만목파가 메디치 가의 주총자엿던 반면 법친파 ㅡ 평시민 정부를 지지했던 것과 같이, 피렌체의 명망 있는 시민들도 공공연하게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기울거나 어는 한편을 지지하였다. 또 피렌체 땅 바깥에서도 볼로냐의 참주인 조반니 벤티볼리오는 법치파 쪽인 반면, 체사레 보르자 휘하에서 종군하던 비텔리 가와 오르시니 가는 만복파의 편을 들고 있었다. 병이란 원래 미리 막아야 하는 것이지만, 병이 낫을 때라도 곧 잡지 못하면 치료가 힘들어지는 법이다. 피스토이아는 물론이고 특히 그 주변 평야의 구릉지대는 공화국의 손에서 거의 벗어나 버렸다. 반란군 무리가 콘타도를 휩쓸었다. 이들 중 한떼는 카르미냐노에까지 진출해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전권 대리인)으로서 사태를 파악하고 어떤 조치가 필요하니즐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고 그곳에 파견되었다. 그때가 2월 초이틀로 프랑스에서 돌아온 지 겨우 2주만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 말을 타고 가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임지에 머문 시간 역시 그보다 더 소요되지는 않았다. 피스토이아 사태는 4월에 들어 피렌체가 그소문을 다시 통제할 수 있을 만한 군대를 사절과 함께 보냄으로써 일단 진정 기미를 보였다. 바로 이때 보낸 사절들 중에는 우리 서기장의 사촌인 니콜로 디 알레싼드로도 들어 있었다. 그는 우리의 서기장과 같은 이름을 가졌으나,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니콜로 마키아벨리나는 위대한 이름으로 부르려 하지 않았다. 하여간 사절들이 이러한 상처를 돌보고 있는 동안, 공화국은 훨씬 더 큰 위험 앞에서 고통받게 되었다.
봄이 되자, 발렌티노는 다시 파엔차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그곳 시민들은 작년 겨울 추운 날씨의 도움을 받으면서 격렬히 저항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날씨가 좋아진 데가 그렇게 강력한 침략군을 맞아 도시를 방어할 세력이라고는 오직 시민들뿐이었기 때문에 화평을 맺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승리 후 아버지로부터 로마냐공이라는 칭호를 하자받은 발렌티노는 이제 볼로냐를 빼앗을 수 있으리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기수를 그곳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는 피렌체인들에게 피옴비노 공략을 위한 길을 열라고 요구하면서,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국경을 넘어 들어왔다. 그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가는 길이 막혀 있을 때에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일단 그것을 넘어서자 곧 거칠고 무례하게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원하는 바는 더도 덜도 아니고 피렌체가 자신과 동맹을 맺어야만 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군사 행동을 위해 거금의 돈을 지불해야 하며 정권을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에게 넘겨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는 이러한 요구에 힘을 실어주기 위하여 군대를 성벽 거의 바로 아래의 캄피에 까지 진군시켰다. 피에로 데 메디치는 볼로냐 국경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비텔로초와 오르시니 가 사람들은 발렌티노와 함께 있었다. 그는 마키아벨리가 피스토이아에 가 잇는 사절들에게 정부를 대표하여 쓴 편지에서 말했듯이, (하늘과 운명의 도움 아래) 군세를 몰아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적은 성문 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문 안에도 있었다. 도시 내에는 메디치 가의 추종자들과 불만을 가진 유력시민들이 있었고, 이러한 분열로 말미암아 무력해진 피렌체 정부는 동맹을 받아들이고 돈을 지불한다는, 그래도 치욕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협정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피렌체인들은 문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쯤 왕으로부터 피렌체인들을 다치게 하지 말라는 새로운 명령이 내려왔기 때무이다. 결국 보르자는 한 푼의 돈도 거두지 못한 채 5월 176일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는 기수를 돌려 가는 길마다 닥치는 대로 약탈과 폭력과 파괴를 자행하면서 피옴비노롤 진군하였다. 발랜티노의 침입으로 피스토이아 사태가 이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피렌체는 다시 것을 통제하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7월 23이 마키아벨 리가 재차 그곳으로 파견되었으나, 그의 체류 기간은 2, 3일을 너지 않았다. 이보다 조금 앞서 그는 카쉬나에 가 있었다. 또 얼마 후인 8워 18일에는 시에나로 보내졌는데, 그 임무에 대해서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발렌티노의 행로와 관계 있다는 점 외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0월 들어 만복파의 복귀와 함께 불행했던 도시가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을 무렵, 다시 피스토이아로 돌아왔다. 이처럼 그는 이러한 국외 임무와 서기국의 평상 업무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일했다.
이 당시 마키아벨리의 일이란 이런 것이었다. 우리가 그 내용을 아는 것은 이뿐이지만, 이것이 그의 일의 전부는 아닐엇을거이다. 아직 이야기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운명한 이후 그의 인생 행로는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프랑스에서 이제는 텅 빈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아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페이지에 나타나는 시기에도 토토가 여전히 그와 함께 살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려져 있진 않다. 그러나 만일 그랬다면, 당시 스스로와 동생의 처지를 생각하는 니콜로의 심정은 언젠가 자신의 가장 잘 알려진 희극 작품 속에서 그렇게 쓴 것처럼, (그들은 집에 여자가 없어 짐승처럼 살고 있다네)라고 한말과 흡사했으리라. 그래서 그는 뤼지 코르시니의 딸 마리에타와 혼인하였다. 처가 쪽의 지참금과 가문됨은 그리 많지 않은 재산이나 평시민의 신분과도 그저 어울릴 만한 정도였다. 이 혼인은 앞서 이미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501년 8월에 막 이루어질 단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그 뒤의 문제에서야 비로소 이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혼인이 전기 작가나 그가 쓰는 전기의 주인공 양자 모두에게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사건은 되지 않았다. 물론 니콜로는 장차 자식에게 친근한 아버지이자 양처 마리에타에게도 분명히 조용한 가운데 애정을 키워 나간 남편이 되겠지만, 결코 아내에게 지나치게 매달리는 그런 성향이 아니었을뿐더러, 설사 그가 그렇게 하려고 했어도 바쁜 일 때문에 그럴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 무렵, 체사레 보르자는 피옴비노를 공격하고 있었고, 프랑스인들은 나폴리 왕국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점령하였다. 그들은 처음 이를 에스파냐와 나누기로 약속했지만, 그것은 거짓이었으므로, 차후 이탈리아를 두고두고 전쟁과 불행에 휩싸이게 할 사악한 씨앗이 뿌려진셈이었다. 1501년 9월 3일 피옴비노가 보르자의 군대에 넘어감에 따라, 피렌체인들은 점점 더 그의 군대와 그의 탐욕사이에서 오갈 데 없는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보르자의 아버지인 교황이 그들의 도시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기미가 농후해지자, 그들의 의심도 더욱 커져갔다. 이미 8월 25일 이후, 이 일 때문에 당시 사절로 로마에 가 있던 베스푸치는 교황청의 방종한 분위기를 질타하는 내용을 담아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사신(사신)에서, 보르자가 카메리노와 우르비노를 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귀띔하였는데, 이허한 전투들이 어디서 끝날지는 도무지 예측 불능이었다. 이러한 사태에 진면한 피렌체는1502년 4월 16일 프랑스 왕과 새 동맹을 맺게 되었다. 조건은 예상보다 좋은 편이었는데, 왜냐하면 와동 이제는 피렌체가 당시 이탈리아로 진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신성로마 황제 막시밀리안편에 서서 그를 공격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의 조약에 기운을 얻은 피렌체인들은 피사 부근을 초토화 시키기로 작정하고 그곳에 포병 부대를 보내려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 새로운 정복 구상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죽 그랫듯이 기존의 것을 지키기 위하여 또다시 애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이유는 56월 4일 밤 아레초가 비텔로초 비텔리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5월초부터 발텐티노 군과 함계 발디키아나외 국경 부근에 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반란이 일어나자 많지는 않지만 자기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즉시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피렌체 정부는 뒤늦게 피사 부근에 있던 군대를 불러들었다. 이 때문에 피사는 다시 한숨 돌리 수 있게 되었고, 아레초 역시 연일 보르자의 군세가 증대됨으로써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피에로 데 메디치는 이미 도시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피렌체 공화국이 와해 직전까지 몰리게 된 것은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공격보다는 내부의 허약성과 평시민 정부의 의심과 무능, 그리고 유력 시민들의 두려움과 불만 때문이었다. 발디키아나의 기름진 땅들이 공격을 기다릴 새도 없이 하나둘 차례로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몬테 아 산 사비노, 코르토나 시, 카스틸리오네, 앙기아리, 보르고산 세폴크로 등도 마찬가지로 적의 포병대가 시야에 나타나기도 전에 버림받고 말았다. 모든 영토가 찢겨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란두치는 특유의 대중적인 문체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하여 피렌체인드은 비유하자면 흡사 자신드의 창자까지도 모두 내어주고 있는 양상이었다. 부근의 모든 사람들이 피렌체인들을 비웃었다.)
발렌티노는 프랑스 왕의 분노가 점점 더 커가는 데에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분명히 아레초의 반란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사라인) 베텔로초가 그곳에 간 것은 단지 사적복수를 위해서임을 맹세한 바 있었다(그러나 베텔로초는 아레초 체류 동안 편지에다(교황 군영으로부터)라고 명기하였다). 그가 반란 사건에 관련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피렌체와 전쟁중이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행동 하나한가 거미줄처럼 엉킨 간계의 연속이었다. 아레초 공략에 투입된 군대는 외면상 카메리노 공략을 위해 규합한 군세의 일부였다. (그의 사람)이 실질적으로 아레초를 치는 동안, 그는 카메리노를 공격하였다. 그런 후 , 발렌티노는 그쪽 일에 전념하고 있다는 모두가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믿기 어려울 정도의 기동력으로 (먹고 마시지도 않은 채) 우르비노 쪽으로 움직여서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그 소국을 빼앗아버렸다. 그는 이에 앞서 미리 우르비노에 카메리노 공략을 위한 원조를 요청하여 그곳의 포병대와 병상들을 이동하도록 만드는 계략을 썼다. 그는 똑같은 행운으로 카메니노 역시 곧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직전에 앞서, 그리고 프랑스 왕의 명령이 다시 한번 그의 계획을 망쳐놓게 되기 전에, 그는 자신의 그 같은 모든 성공과 피렌체의 그 같은 불운이 과연 더 큰 도박으로 이어질지 어떨지를 시험해 보고 싶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우르비노를 공략하기 위해 떠나는 바로 그때에 맞추어 피렌체에도 매우 중요한 문제를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피렌체인들은 그들의 영토 안에서 그러한 분란을 일으킨 인물, 그리고 그것을 단 한번에 잠재우거나 또는 거꾸로 더 확대 시킬수도 있는인물이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고 매우 고심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 원군이 도착할 대까지 그를 지켜보며 그의 행동을 지연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서기로서보다는 분별있는 조언자로서 마키아벨리를 딸려 보냈다. 그들은 6월22일 서둘러서 길을 떠났고, 최대로 말을 달려 같은 날 폰티첼리에 도착하여 정무위원회에 편지를 올렸다. 이 편지는 통상 그렇듯이 마키아벨 리가 쓰고 소데리니 단독으로 서명한 것이었다. 그들이 전광석화 같은 우르비노 점령과 그 작전에 이용된 계략에 관해 들은 것은 그곳으로 가는 길인 폰타씨에베에서였다. 편지는 마티아벨리다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다. (여기 정무위원님들께서는 이러한 계략과 기민성이 최고의 호기와 맞아떨어진 상황을 눈여겨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논쟁과 숙고만을 거듭할 뿐, 정작 결단에서는 미적거리기 일쑤인 피렌체 정부에 대해 던지는 하나의 교훈이었다.
그들은 24일 저녁 우르비노에 도착하여 두 번째 밤을 맞았다. 보르자가 바로 앞서 승리에 대한 사절들의 축하와 약간은 빈정대는 듯한 보르자의 답례가 오고간 뒤, 서로를 비난하고 그에 변명하는 설전이 시작되었다. 비난전의 내용은 발렌티노가 피렌체 성벽 아래까지 왔던 때로 돌아가, 그가 강요해 놓고는 다시 스스로 지키지 않은 협정들과 당시 그에게 보냈던 사절 및 편지들이 언급되었다. 이 자리에 마키아벨리가 같이 있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을 자신이 직접 처리했거나, 혹은 처리 과정을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편지를 쓴 것도 내내 자신으로서 사실상 모든 일의 실마리를 한 손에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렌티노의 결론은 위협적이었다. (나는 당신들의 현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신뢰할 수 있다. 당신들은 이 정부를 교체해야 되며, 지금까지 나에게 약속한 것은 모두 지키겠다고 맹세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런 식으로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당신들이 나를 우방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적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에 대해 피렌체 현정부를 최상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 그에 만족하고 있으므로, 다른 우방들도 역시 그러하다고 응답하였다. 두 시간에 걸친 논쟁 끝에 양쪽은 서로 좀더 전향적인 입장에서 다음날 다시 논의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두 사적이 매우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데, 이들에게는 발렌티노의 일 처리방식이 마치 (병을 앓는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전에 부음이 전해졌던) 우르비노 공의 경우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집에 버티고 않아 잇는 형상)이라고 생각되었다.
다음날, 그들은 오르시나 가의 방문과 환대를 받았다. 이들은 사절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득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즉 프랑스 왕은 사실 보르자가 피렌체인들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락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만일 일을 빨리 처리하지 않고 고의로 지연시킬 때는 피렌체에 원군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절들은 이러한 일이 발렌티노의 간계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차렸으나, 그래도 일이 어떻게 될지 걱정스러운 마음 떨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삼경쯤에 그들은 다시 발렌티노를 접견했으나, 그는 전날 밤과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4일 안에 대답을 달라고 못받았다. 이렇게 되자 그들의 걱정은 한층 더 커졌다. 그들이 함께 피렌체로 돌아 갈것이라는 작정을 한 적도 없었지만, 형편상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일단 말을 더 잘 타는 니콜로 혼자 피렌체로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발렌티노가 준 시간을 하루는 더 아낄 수 있을 것이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담고 특별 전령 편으로 즉시 우송되었던 바로 그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는 보르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군주의 용병술은 매우 놀랍고 위엄이 있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매우 용맹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이 오히려 사소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그는 영광과 권력을 얻기 위해 피로도 위험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가 머물던 곳을 떠났다는 마을 듣기 전에 이미 다른 곳에 가 있곤 합니다. 그는 병사들의 마음을 얻고 있으며, 그래서 그의 병사들을 이탈리아에서도 최정예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들 덕분에 그는 상승의 위업을 이루고 있으며, 변함없는 행운도 손에 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의 글 아래 소데리니 주교의 서명이 적힌 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무언가 위조나 실수의 결과라고 생각될 것이다.
일은 편지에 쓴 대로 진행되었다. 마키아벨리는 밤새워 보르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일에 대해 오랜 시간 소데리니와 논의하고는 날이 낡기 전에 긴 편지를 쓴 뒤, 말에 올라 최대한 빠른 속력으로 피렌체를 향해 달렸다. 주교는 곤경을 헤쳐나가기 위해 우르비노에 남았다. 하지만 떠난 사람이나 남은 사람이나 발렌티노의 무시무시한 태도에 심적으로 시달리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하루하루 날은 흘러갔는데, 이 마지막 며칠은 교황의 아들에게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왕의 전령이 전하는 명령이나 그 유명한 프랑스 군이 피렌체를 돕기 위해 아느로 계곡으로 전군해 오고 있는 데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는 척 했으나. 사실은 자신의 요구를 좀더 온건하고 적절한 수준으로 양보하여 옛 협정을 지키라고 촉구하는 정도에서 만족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렇게 되자 피렌체인들은 최대한 왕에 대한 그들의 채권은 늘리고 적에 대해서는 줄이려는 욕심으로 조건을 흥정하였다. 결국, 소데리니는 협상을 중단하고 돌아오라는 훈령을 받았고 보르자는 아무것도 얻은게 없는 (불안한 상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피렌체는 프랑스 왕을 이용하여 그 위험스러운 적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왕은 지금까지 교황인 아버지나 그 아들 모두가 질색이었고, 그래서 결국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낭트에서 왕의 재상에게 요청했던 것이 실현됨 셈이었다. 왕은 친히 보르자를 벌하기 위해 진군해 오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이는 투르크 토벌만큼이나 경건하고 성스러운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쳔명하였엿다.) 왕의 군대와 왕의 분노를 목격한 발렌티노는 어쩔 수 없이 비텔로초에게 퇴각을 명하였다. 당시 앙보 휘하의 프랑스 군은 아래초로 진격하고 아스티로부터 내려온 다른 군세른 파르마에서 트스카나 쪽으르 방향을 막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라초만은 여전히 이전 상태로 있었는데, 그 이유는 협상을 통해 비텔로초로부터 그곳을 탈환한 앙보가 주둔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레초는 랑그르의 군주가 그곳을 돌려주라는 왕의 급로를 가지고 왔을 때에야 비로소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 태풍은 지나갔고, 공화국으로서는 유능한 정부가 키를 잡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정무위원회의 명복상 수반은 보잘것없은 인물이었으나, 사실상의 지도자는 알라만노 살비아티였다. 피렌체의 이 일이 좋은 결과로 매듭지어진 데에는 그와 함께 기백 있는 사절 안토니오 자코니미의 힘이 컸다. 이 모든 사건들의 와중에서 아무리 편지 써 보내는 일로 바쁜 때라 해도, 마키아벨 리가 서기국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서기보인 베스푸치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말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은가)라고 말했을 것인가. 그는 아레초에 세차례 갔다. 첫 방문은 대략 8월 15일에서 19일 사이였는데, 랑그르를 맞아 그를 접대하고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다음 두 번은 역시 랑그르에 대한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9월 11일과 17일의 방문이었다. 우리는 9월 13일에도 그가 그곳에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가 다음날 떠났다는 아무런 언질이 없는 점으로 보아 두 번째와 세 번째 방문 사이에도 그는 거의 피렌테에 머물 틈이 없었음을 알 수가 있다.
피렌체 영토 내의 다른 임무들이 거의 그렇듯이, 이러한 임무들이 그어게 어던 중요한 계기로서 작용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최근의 이러한 공화국 내부 사건들, 즉 피스토이아의 파당 사건과 아레초 반란 사건들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도 서기국의 이름 나지 않는 일을 통해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잠시 있다 가는 정무위원들과는 달리 그는 그들을 보좌하여 죽 계속해서 같을 일을 했기 때문에, 때로는 신중하게 사건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역할로, 때로는 편지 작성의 역할을 함으로써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전기 작가나 그의 책에 대한 주석가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바로는, 그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피스토이아와 아레초와 같은 종속 도시들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정무위원들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처럼 엄한 조치를 선호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비록 입중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조치를 조언한 인물이 바로 그일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사 그가 그런 조언을 했다손 치더라도, 일의 진행 과정은 그것이 그렇게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마키아벨리의 경험들이 피렌체의 정치에 미친 영향보다는 스스로의 지성의 성숙에 미친 영향에 더 관심을 기울여왔다. 물론 내가 프랑스에서의 임무에 관해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관심사는 아직 그가 딴 열매보다는 그가 뿌린 씨앗에 잇다. 이 씨앗들은 후일 그가 무력함과 비탄에 빠지게 되엇을 때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다. 그가 매일매일 생각했던 피렌체 정부의 구조적 취약성은, 특히 그것의 원인과 결과를 그가 감탄해 마지 않은 발렌티노가 가진 힘의 원인 및 결과와 비교할 때, 그에게는 이미 끊엄없는 교훈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 종속국들의 반란은 그에게 결코 적지 않은 관찰과 연구의 재료가 되었다. 그의 (피스토이아 반란 보고서 De rebus pistoriensibus)는 단지 새로 취임한 정무위원이나 대사에게 정보 차원에서 쓴 많은 공식 보고서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 그 중에서도 가장 단조롭고 재미없는 글에 속한다. 하지만 미완성으로 추정되는 (발디키아나 반란민의 처리 방식에 대한 논고 Del modo di trattare I popoli della Valdichiana ribellati)는 또 다른 경우이다. 그 도시를 탈환한 지 한 해 후에 씌어진 이 글은 일반적으로 마키아벨리의 정치저작들 가운데 회고적 성격을 지닌 최초의 경우로 간주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지난 시기의 처벌 과정에 관한 글이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회고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렌티노라는 외적 위협이 계속되는 한 아레초를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점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이 당장 서기국이 필요로 하는 문제 때문에 씌어진 것은 아닌 최초의 경우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것은 앞서의 공식 보고서들과는 달리 거의 문학적 풍미를 느끼게까지 해준다는 점에서 처음이며, 피렌체의 서기장이 (과거사에 대한 끊임없는 공부)를 당 시대에 적용한 예로서도 처음이었다. 이러한 적용의 밑바닥에 깔린 명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에나 지금이나 항상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으로서, 이는 그의 신 과학의 근본 원리들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짤막한 글을 마키아벨리 저술의 많은 부분을 핵심적으로 예고.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에 담긴 정치적 내용을 넘어 어떤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핵심이란 우리가 마키아벨리로부터 개대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즉 반란을 일으킨 나라들은 확실히 감싸주든지 아니면 아예 절멸시켜 버려야 하며, 어정쩡하게 중간적 입장에 취했다가는 큰 재난을 입을 것이라는 점이다. 고대의 현인이 말한 중용적 덕성도 적어도 정치에 있어서는 그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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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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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부자들의 농담은 항상 우습다
예기는 ‘소인은 가난하며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나쁜 짓을 하고, 부자가 되면 교만하고 방자하게된다'고 이르고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 어렵지만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쉽다‘고 하였지만 말이다. 빈 수레가 요란한 소리를 내듯, 실력 없는 사람은 큰소리로 자기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떠들다가 아무런 결과를 못 내고 만다. 짖어대는 개는 물지 않듯, 말이 많은 사람은 그의 에너지가 모두 입으로 나와 버리기 때문인지 실천력이 별로 없다. 하지만 무서운 실력을 갖춘 사람일수록 말이 없다. ‘물어 뜯는 개는 짖지 않는다’는 말이나, ‘조용히 눈만 껌벅거리는 두꺼비가 나는 파리를 잡아 먹는다’는 속담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말이 많은 사람도 조심하여야 하지만 말이 전혀 없는 사람도 조심하여야 한다.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잘 까는 사람‘도 앞에서는 모두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한 입후보자가 선거운동을 하러 유권자집을 들렀는데 그 집 개가 맹렬히 짖어댔다. 집주인이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잖아요? 그러니 걱정말고 들어오세요.”하고 말했다. 그러자, 입후보자는 “예, 그러지요.”하고 대답하면서 “그 속담, 당신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저 개도 그걸 알고 있는지 그것이 걱정되네요.”라고 말했다 한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
피와 물
장자의 산목편의 일화 한 편을 보자. 임회라는 사람이 있었다. 전쟁이 나서 적군이 침범해 오자 그는 많은 보물을 내버려 두고 갓난아이 하나만 들쳐 업고 도망을 갔다. 그러자 옆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돈으로 따지면 갓난아이는 보물보다 훨씬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보물은 보리고 귀찮은 갓난아이만 업고 도망을 갑니까?“하고 그에게 물었다. 이에 임회는 “보물은 나와 이익으로 맺어져 있지만 이 아이는 나와 운명으로 맺어져 있소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익으로 맺어진 것은 위급을 당했을 경우 쉽게 벗어버리지만, 혈육은 위급한 경우 더욱 보전이 된다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관계 중에서 가장 우선하는 것이 혈연이다. 공자는 “재주가 있건 없건 부모는 항상 제 자식이 잘났다고 생각한다”고 했으나, 자기 자식이라고 해서 제자보다 더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공자에게 있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제 자식이 잘났다고 생각하더라도 자식의 능력을 냉정히 판단하여 자식의 능력에 맞는 삶의 방법을 강구하여 주라는 말이었지, 능력 없는 자식을 그 능력에 맞지 않게 대우하여 감싸안으라는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를 만나러 예수의 어머니와 친동생들이 왔다. 하지만 예수는 “내 어머니와 형제가 누구입니까?”고 묻고는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다“라고 말했다. 예수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다 내형제자매요 어머니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 온 세상사람들이 모두 형제자매들이다”라고 한 공자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혈연 관계를 다른 관계보다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라든가,‘하느님은 우리에게 피붙이를 허락하였다. 반면에 우리는 친구를 인위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라는 말들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혈연으로 맺어진 딸에게는 죽먹은 그릇을 설거지시키고, 인위적으로 선택한 며느리에게는 기룸 묻은 그릇을 닦게 해서는 안된다. 피로 맺어진 형제 자매와 똑같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예수나 공자의 성품을 보통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우리들은 그러한 성품을 갖추려고 노력은 하여야 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부자들의 농담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대할 때 갖청하듯이 말을 하지만 부자는 거만하게 대답한다. 아무래도 부자가 되면 거들먹거리게 되고, 가난한 사람을 ‘똥치운 막대기’같이 함부로 대하게 되기 싶다. 그래서 예기는 ‘소인은 가난하면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나쁜 짓을 하고, 부자가 되면 교만하고 방자하게 된다’고 이르고 있다. 비록 공자가 논어에서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지만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쉽다고 하였지만 말이다.
부자의 선행
부자는 이렇게 가난한 사람을 ‘심심풀이 땅콩’과 같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지만, 그들에게 베푸는 큰 선행(?)이 하나 있다. 먹을 것을 주어 입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농담을 통해 그들의 ‘귀’만을 즐겁게 하여 주는 것이 그것이다. 1960년대말, 한 신문사는 박정희 대통령과 주위에 있는 사람이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을 실은 적이 있다.‘대통령의 미소’란 제목의 이 사진은 박 대통령이 한마디하고 멋쩍게 미소를 지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주위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 떼들이 모여들 듯이, 부자나 권력자 주위에는 그들의 눈에 들어 ‘한 건’잡아 보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갖은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하여 부자나 권력자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성경 시편은 ‘권력있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도울 힘이 없는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 의지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 눈에 보이는 인간에게 더 큰 기대를 하게 되는가 보다.
가난한 사람의 고통
맹자는 ‘몸을 굽실거려 웃는 것을 억지로 하면서 남에게 아첨하는 수고로움은 여름날 땡볕에 밭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고되다‘고 하였다. 정말 그렇다. 몸을 굽실거려 웃는 것을 식은 죽 먹듯이 하여야 하는 사람의 고충을 이루 말할 수 없을정도다. 필자도 사업을 한답시고 ‘불난 산의 토끼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이마를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과 상대해야 했던 적이 있다. 그가 하는 농담은 정말 밥맛나지 않는 수준의 것이었지만‘한 건을 잡으려고’ 아첨의 웃음을 지어야 했는데, 그 고통은 땡볕에 밭에 나가 일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맹자 어른의 말씀을 확실히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아무리 재미있고 배꼽 잡고 포복 졸도할 농담을 하더라도 그 말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없다. ‘지혜를 얻는 것은 금을 얻는 것보다 낫고 지식을 얻는 것은 은을 얻는 것보다 낫다’는 옛말도 있긴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인 듯하다. 아무리 지혜가 많고 현명한 사람이라도 돈이 없으면 ‘비단 옷 입고 밤길 가기’와 같이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소진의 친척
동주 사람 소진은 고향을 떠나 유학하면서 돈을 벌지 못해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였다. 이 때 형제, 형수, 누이 등은 그의 무능함을 비웃으며 그를 ‘과천나무장수 나무라듯이’ 박대하였다. 그는 그럴수록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후에 그는 천하를 돌면서 여섯 나라의 합종의 맹약을 성사시켜 이들 연합국의 수상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고향인 주나라로 돌아왔고, 자신의 명망과 위세에 눌린 주나라 임금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금의환향한 그가 자신의 가족들을 초대하여 화려한 만찬 식사를 할 때의 일이었다. 소진의 형제와 형수들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 척하면서 곁눈으로 서로 볼 뿐,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였다. 소진은 웃으면서 “전에는 그토록 나를 ‘쥘 데 없는 똥바가지’같이 대하시다가, 지금은 이토록 공손히 조아리시니 웬일들이십니까?“하고 물었다. 소진의 형수가 지난날 잘못을 크게 뉘우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린 채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솔직히 말했다. “계자의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기 때문입니다.” 계자는 소진의 자였다. 소진은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인데 부귀하면 상감마마 모시듯 하고 빈천하면 발꿈치의 때만도 여기지 않으니, 일반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구나....“라며 장탄식을 하였다. 그러면서 발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날이 있지 못할 것이다!”하고는 가족들에게 많은 돈을 나누어 주었다.
부자들의 농담은 항상 웃음꽃을 피운다
변함없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친구이며 위급할 때 서로 돕는 것이 형제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이 가난하면 피를 나눈 형제에게도 업신여깁을 받는데 어찌 부자인들 멀리하지 않겠는가? 가난한 자가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이야기하고 싶어도 그들을 만나주지 않을 것이다. 시인 토마스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애송이들아, 돈은 꿀보다 달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의 농담은 항상 웃음꽃을 피우지!’ 부자들의 농담은 항상 웃음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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