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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7호 - 2024.9.9. 월요일(음력 : 8.7.)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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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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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색은 단연 灰色(회색) - 앙드레 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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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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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그림문자
다음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호들이다. 누구나 잘 알듯이, 순서대로 비상구, 소화기, 화장실을 뜻한다.
이와 같이 그림을 통해서 어떤 정보를 나타내는 기호를 픽토그램(pictogram)이라고 한다. 픽토그램은 가장 원시적인 문자인 그림문자의 일종이다. 쉽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불조심, 흡연 금지, 물놀이 금지, 노약자석, 에스컬레이터, 올림픽 종목 표시 등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된다. 의사소통의 문자적 수단이라는 점에서 픽토그램도 크게 보면 우리말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주위에서 들은 아이디어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위의 세 번째 예처럼 화장실 픽토그램은 남녀 사람의 모습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그림에다 장애인 칸 유무도 표시하자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작지만 참신한 발상이다. 몸이 불편한 이가 급한 용무로 힘들게 화장실까지 갔는데 장애인 칸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무척 난감할 수밖에 없다. 이때 멀리서도 장애인 칸 유무를 알 수 있는 그림 표지가 있다면 그런 곤란함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화장실에 장애인 칸을 갖추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픽토그램만이라도 개선하면 좋을 것이다. 작은 그림문자 하나로 소수자를 배려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따뜻한 우리 사회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픽토그램이 되지 않을까.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국민을 궁민으로 발음하는 이유
국어의 자음은 조음 방법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데, 코로 공기를 내보내면서 내는 비음(ㄴ, ㅁ, ㅇ)과 폐에서 나오는 공기를 막았다가 막은 자리를 터뜨리며 내는 파열음(ㄱ, ㄲ, ㅋ, ㄷ, ㄸ, ㅌ, ㅂ, ㅃ, ㅍ), 입안이나 목청 사이의 통로를 좁혀서 마찰시켜 내는 마찰음(ㅅ, ㅆ, ㅎ), 입안의 날숨을 막았다가 터뜨리며 마찰시키는 파찰음(ㅈ, ㅉ, ㅊ), 혀끝을 잇몸에 댄 채 날숨을 그 양 옆으로 흘려보내면서 내는 유음(ㄹ)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서로 조음 방법이 다른 자음들이 함께 이웃하게 되면 연이어 발음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민’에서 받침 ㄱ은 파열음인데 반해 다음에 오는 초성 ㅁ은 비음이기 때문에 받침 ㄱ과 초성 ㅁ을 연이어 발음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발음의 편의를 위해 이웃한 말소리가 서로 영향을 받아 비슷하거나 같은 소리로 바뀌게 되는데, 이를 ‘소리의 동화’라고 한다. ‘국민’의 발음이 [궁민]이 된 것은 받침 ㄱ이 이웃한 초성 ㅁ의 영향을 받아 ㅁ과 조음 방법이 같은 비음인 ㅇ으로 소리가 바뀐 경우이다.
그럼 ‘협력’을 [혐녁]으로 발음하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협력’은 소리의 동화가 앞뒤로 함께 이루어진 경우인데, 먼저 ‘협력’의 첫째 음절 받침 ㅂ 뒤에서 둘째 음절 초성 ㄹ이 ㄴ으로 바뀌어 [협녁]으로 동화된 다음 그 ㄴ 때문에 첫째 음절의 받침 ㅂ이 다시 ㄴ과 조음 방법이 같은 비음인 ㅇ으로 역행동화되어 [혐녁]으로 발음된 것이다. ‘협력’을 글자 그대로 [협력]으로 발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앞으로는 [혐녁]으로 소리를 동화시켜 발음하도록 하자.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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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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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 천상병
피리를 가졌으면 한다
달은 가지 않고
달빛은 교교히 바람만 더불고
벌레소리도 죽은 이 밤
내 마음의 슬픈 가락에 울리어오는
아! 피리는 어느 곳에 있는가
옛날에는
달 보신다고 다락에선 커다란 잔치
피리 부는 악관이 피리를 불면
고운 궁녀들 춤을 추었던
나도 그 피리를 가졌으면 한다
볼 수가 없다면은
만져라도 보고 싶은
이 밤
그 피리는 어느 곳에 있는가.
∼∼∼∼∼∼∼∼∼∼∼∼∼∼~~~~~~~~~~~~~~~~~~~~~~~~~~~~~~~~
은혜 - 정지용
회한도 또한
거룩한 은혜.
깁실인 듯 가느른 봄볕이
골에 굳은 얼음을 쪼기고,
바늘 같이 쓰라림에
솟아 동그는 눈물 !
귀밑에 아른거리는
요염한 지옥불을 끄다.
간곡한 한숨이 뉘게로 사모치느뇨?
질식한 영혼에 다시 사랑이 이실나리도다.
회한에 나의 해골을 잠그고져.
아아 아프고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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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파수병 - 김수영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산정에 서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는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우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늦은 거미같이 존재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간과 마루 한간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나보다
날아간 제비와같이
날아간 제비와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과 파수병인 나.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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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 이해인 (11~15)
11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詩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 방을 밝힙니다.
12
나무가 미련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을.
13
바람이 붑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내 고뇌의 분량만큼 보이지 않게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14
숲 속에 앉아 해를 받고 떨어지느 나뭇잎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승에 뿌리내린 삶의 나무에서 지는 잎처럼 하나씩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때
아무도 그의 혼이 태우는 마지막 기도를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는 잎처럼 그의 삶이 또한 잊혀져 갈 것을
"당연한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15
은행잎이 지고 있어요. 노란 꽃비처럼, 나비처럼 춤을 추는 무도회.
이 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당신을 사랑한 나의 언어처럼 쏟아지는 빗소리
- 마지막으로 아껴 두었던 이별의 인사처럼 지금은 잎이 지고 있어요.
그토록 눈부시던 당신과 나의 황금빛 추억들이 울면서 웃으면서 떨어지고 있어요.
아프도록 찬란했던 당신과 나의 시간들이 또다시 사랑으로 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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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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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마음의 빛깔을 보라
예술은 창조인 동시에 오락이다. 여기에서 나는 창조보다는 오락, 즉 정신적인 유희로서의 예술이 훨씬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참된 예술적 정신이란 불후의 걸작을 남긴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더 가치가 있다. 이 말은 곧 예술의 전 분야의 아마추어리즘을 주장하는 것이다. 악기를 겨우 다룰 줄 아는 친구가 들려주는 한밤의 소나타가 어떤 일류 음악가의 능숙한 연주보다 못할 것이 없다. 우리는 거기에서 무한한 기쁨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 속에서 친구가 보여주는 서툰 마술의 묘기를 보는 것처럼 행복한 일도 드물다. 또 서툰 아이들의 연극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셰익스피어의 극을 보는 것보다 훨씬 감동적이지 않겠는가. 아마추어 예술은 자발적인 것이다. 예술의 참정신은 오직 이 자발성에만 있다. 우리가 이런 자발적인 유희 정신을 잃지 않을 때 예술은 비로소 상업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예술의 본질이 유희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그것은 예술이 단순한 육체적 에너지와 정신적 에너지의 흘러 넘치는 여유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유롭고 속박없는 그 자체를 위한 행복의 기술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이 곧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론이다. 이것은 어떤 정치가도 참견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상업 예술이 예술적 창조 정신을 해치는 것이라면 정치적 예술은 그것을 아예 말살하고 만다. 왜냐하면 예술의 넋은 자유인 까닭이다. 사실 춤추고 있는 동안 애국이니 돈벌이를 생각하는 예술가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용의 유희성을 파괴하고 쓸모 없는 목적을 갖게 만들 것이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약간의 휴식, 정신적인 창조의 예술조차도 국가나 돈이라는 괴물에 침식당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다. 예술의 본질은 분명 유희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운 자태일 뿐이며, 그것은 명화나 아름다운 다리와 마찬가지로 행위에도 있다. 예술이란 의미는 회화나 음악, 무용보다도 훨씬 그 범위가 넓다. 그것은 아름다운 자태이기 에 운동 선수에게서나 공원에서 배회하는 노인의 걸음걸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작전에 최선을 다하는 군인에게도 있고 땀흘려 일하는 노동자의 땀방울에도 그 자태는 존재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자태와 표현이 있고 그것은 당연히 예술의 범위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조화가 잘 이루어진 시의 운율처럼 우리 몸의 운동도 우아한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침착한 우아함은 자신이 육체적으로 능력이 있다는 의식, 즉 일을 보통 이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의식에서 태어난다. 이처럼 깨끗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런 아름다움이 있다. 깨끗한 일, 즉 솜씨 있는 일을 하고자하는 충동은 본래 미적 충동이다. 교묘한 살인이나 재간 있는 교묘한 음모, 그런 것들은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지만 예술적일 때가 있다. 이처럼 좀더 구체적인 일상의 사소한 일 중에도 이런 침착함과 우아함의 능력은 실제로 있거나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생활의 예절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가 이런 범주에 속한다. 사람에게 정중하고 때에 맞는 인사를 하면 얌전한 사람들이라고들 하지만, 격에 맞지 않으면 경박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좋은 형식에는 전부 움직임이 있다. 그것이 골퍼의 스윙이든 미식축구선수의 돌진이든 최선의 것에는 최고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처럼 예술에는 개성적 표현이 넘쳐흘러야 한다. 그것은 어떤 기법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의 약동이다. 커브를 돌 때의 기차, 돛에 바람을 가득 안은 요트에도 그것이 있다. 공중을 나는 제비나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 결승점을 통과하는 마라토너에게도 그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술가의 품격이다. 품격이 없으면 예술 작품의 생명은 끊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미적 식견이나 기능이 최고라 할지라도 그것이 없다면 그 자체는 평범하고 저속해진다. 예술의 품격, 거기에는 학식과 교양이 모두 필요하다. 교양은 취미 쪽에 가까운 것으로 예술가에게는 절로 생겨나는 것이겠지만, 최대의 기쁨을 주는 것은 역시 학식의 뒷받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성된 작품의 미와 예술가의 넋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거기에는 변덕스럽고 자유분방한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고 난폭한 힘의 미도 있을 것이다. 또 웅혼한 기상, 로맨틱한 속삭임, 소박하고 둔탁한 미, 단정하고 깊은 미, 어떤 면에서는 고의적인 누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단 하나 보이지 않게 때문에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불가능한 미의 형식이 있다. 그것은 분투 노력의 미, 즉 분투하는 생활의 미이다.
인간의 향기를 읽으라
책을 읽는 즐거움은 예로부터 생활의 매력으로 알려져 왔다. 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책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에게조차 부러움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왜 그리 선망의 대상이 되는가? 그것은 평소 책을 일지 않은 사람의 생활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자신의 틀에 갇혀 있다. 그들의 친구는 극소수의 사람들뿐이며 그가 갖는 즐거움이란 대부분 가까운 신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일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일단 책을 손에 들기 시작하면 사정이 너무나 확연하게 바뀐다. 그는 홀연 세계 제일의 이야기꾼과 만난다. 그 이야기꾼은 그를 별천지로 데려가 고민을 덜어주고 그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인생의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그는 아득한 옛날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먼 미래의 일을 예측하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색과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하여 책은 우리에게 현실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명상으로까지 이끌어가곤 하는 것이다.
송나라 때 시인이며 소동파의 친구였던 황산곡은 책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선비가 사흘을 독서하지 않으면 스스로 깨달은 말에 맛이 없고, 거울 속의 자신을 대해도 가증스럽게 보인다.'
이것은 책이 자신을 읽는 사람에게 매력과 품격을 준다는 것이다. 독서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책을 읽는 이유를 정신의 향상으로 꼽는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독서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런 부산물을 생각하면서 책을 대한다면 독서의 즐거움은 금방 고역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셰익스피어를 읽어야만 한다, 나는 엘리어트의 황무지를 독파해야만 한다.' 등등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사람일 것이다. 그와 같은 독서는 단지 의무이며 악몽일 뿐이다. 황산곡에 따르면 독서의 목적으로 인정해 줄 만한 것은 사람의 얼굴에 매력을 더하고, 그 말씨에 풍미를 주는 것밖에 없다고 한다. 그것은 물론 단순한 매력이나 미모가 아니다. 오로지 인간의 향기뿐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말투는 그 사람의 독서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가 어떤 책을 읽었는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가에 따라 사람마다 맛이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음식에 대한 기호와 마찬가지로 책을 고르는 것 역시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몸에 어울리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교사는 자신의 독서 취미를 학생에게 강요해서는 곤란하다. 읽는 데 흥미가 없다면 독서란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원중랑은 이렇게 말했다.
'읽기 싫은 책은 주저없이 버려라. 그리고 다른 사람이 읽게 내버려두어라.'
세상에 누구나 읽어야 하는 책이란 없다. 있다면 오직 누군가, 언제, 어디서, 어떤 사정 하에서, 생애의 어느 시기에 읽어야만 할 책뿐이다. 나는 독서가 결혼처럼 운명이나 인연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성경과 같은 종류의 책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독자 같은 책이라도 읽는 시기가 다르면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를테면 저자와 직접 이야기를 나눈 후, 혹은 그의 강연을 들은 후 읽은 책의 맛은 그저 손에 집히는 대로 읽는 책의 맛과는 다르지 않겠는가.
책장을 덮어야 할 때
어떤 사람은 밤에 독서를 하다가 졸리면 송곳으로 정강이를 찔러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녀를 곁에 세워두고 자신이 졸면 깨우도록 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그 동안 어떤 찬사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게 보일 뿐이다. 책을 펼치고 고인들의 말을 경청하다가 졸리면 지체없이 자야 한다. 송곳으로 정강이를 찌르고 하녀가 잠을 깨우게 해서 읽는 책이 그 사람에게 무슨 이득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는 데는 때와 장소가 없다. 읽고 싶으면 읽고 피곤하면 읽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책을 읽는 데 방이 춥다거나, 불빛이 어둡다거나, 모기가 많다거나, 종이가 너무 빛이 나서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등의 푸념을 늘어놓는다. 이런 사람들은 책 읽는 진정한 재미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책을 학대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당신이 그런 타입이라면 한 여름에 벌거벗고 책을 읽었던 구양수의 다음과 같은 말을 경청해야 한다.
봄에 책 읽는 것은 봄의 뜻을 어기는 것이며,
여름은 그저 잠자기 좋은 계절이니라.
겨울이 저물어 조급해지거든
잠시 기다리라. 다시 올 봄을.
책을 읽는 것은 자유로움이다. 그 기쁨은 실로 자신의 마음이 시킬 때만이 느낄 수 있다. 어느 계절이든 날씨가 어떻든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어느 날 문득 시집 한 권을 들고 연인과 강가로 나가 시를 읽어라. 그때 아름다운 구름이 눈을 잡아당기면 책을 덮어라. 그리고 조용한 즐거움으로 구름을 음미하라. 그때 담배 한 대, 차 한 잔이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으리라. 혹은 눈 내리는 한밤, 난로 위에서는 차 끓는 소리가 들리고 그윽한 음악이 공간을 흐른다. 그때 당신은 손에 들려 있는 오래된 책 한 권..... 이것이야말로 독서의 참맛이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 분위기는 책을 읽는 사람만이 갖추어 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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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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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8부 네르바 황제(제위:서기 96년 9월 19일 - 98년 1월 27일)
네르바 이후 다섯 명의 황제를 후세는 '오현제'라고 부르게 된다. 따라서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 서기 96년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서기 180년까지를 로마 역사에서는 '오현제 시대'라 부르고 있다.
'구원투수'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Marcus Cocceius Nerva)는 수도 로마에서 그리 멀지 않은 플라미니아 가도 연변의 나르니아(오늘날의 나르니)에서 태어났지만, 예로부터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집안이다. 태어난 해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인 서기 26년. 42세 때 일어난 내전을 무사히 넘긴 뒤, 44세부터 53세까지는 베스파시아누스 치하에서 살았고, 그후 티투스를 거쳐 55세부터 70세까지는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 보낸 인물이다. 44세 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함께 집정관을 지낸 경험이 있다. 서기 90년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함께 두 번째로 집정관을 지냈다.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원로원 귀족은 제정 이후 얼마 남지 않게 되었지만, 네르바는 그 원로원 귀족의 한 사람이었다. 도미티아누스에 대해서는 찬성파도 반대파도 아니었다. 균형감각이 풍부한 신사였지만, 야심가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특출한 재능이 없었기 때문인지. 속주 총독을 지낸 경험도 없고 군단을 지휘해본 경험도 없다. 수도 로마의 상류층 중에서도 질좋은 요소로서 평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왜, 그리고 누가 이 네르바를 황제로 추대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네르바는 자진해서 나설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황제로 추대한 것은 실로 적절한 선택이었다. 친도미티아누스파가 아니었으므로 반대파의 반발을 살 염려도 없고, 반도미티아누스파가 아니었으므로 친도미티아누스파를 자극할 염려도 없었다. 그리고 타키투스 같은 중류계급 지식인이 좋아하는 '고귀한 혈통'이기도 했다. 또한 '율리우스 클라디우스 왕조'에 이어 '플라비우스 왕조'가 계속되면서 그 결함을 깨닫게 된 이들에게는 네르바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 70세의 나이로는 이제 자식을 낳을 수도 없다는 것이 무시할 수 없는 좋은 조건으로 여겨졌다. 원로원 의원인 네르바의 즉위를 원로원이 환영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파로 여겨지고 있던 근위대도, 변경에 근무하는 군단도 새 황제 네르바에게 순순히 충성을 맹세했다. 일반 시민들은 흔히 있는 권력자의 교체로 받아들였다. 네르바는 황제 즉위를 시민과 함께 축하한다는 이유로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근위대와 변방의 군단과 시민들이 네르바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아니다.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고 표현하는 게 타당할 만큼, 소극적인 지지를 보냈을 뿐이다. 27년 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로마 군단끼리 맞붙어 싸운 내전의 기억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변방의 군단들은 서로 행동을 조심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직후의 제국은 표면상으로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것은 미묘한 상태에서의 평온에 불과했다. 네르바는 고령일 뿐 아니라 건강도 좋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네르바를 '과도기에 잠깐 등장한 구원 투수' 정도로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도미티아누스의 돌연한 퇴장으로 한숨 돌린 원로원파도 네르바를 '구원 투수'로 생각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원로원 계급의 전형 같은 네르바의 즉위를 계기로 제국 통치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한 모양이다. 공화정 시대와 같은 형태의 원로원 체제로 돌아가려 한 것은 아니다. 황제의 권한이 계속 강력해지는 현상태를 바꾸어, 황제와 원로원이 병립하는 형태로 나아가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네르바 황제도 거기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황제에 즉위한 뒤 처음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네르바는 원로원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성립시켰다. 원로원은 황제의 사법권 밖에 있다는 것이 이 법률의 요점이다. 이로써 원로원 의원들은 아무리 황제가 '델라토르'를 이용하여 법정에 끌어내도 처형당할 염려는 없어졌다. 다만 치외법권이라 해도, 그것은 황제의 사법권에 대해서만 효력을 발휘하는 '치외법권'이고, 그밖의 일반 형법이나 민법에서는 원로원 의원도 치외법권을 누릴 수 없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네르바는 실질적으로 '델라토르'의 힘을 줄이는 법률도 성립시켰다. 이 법의 제정으로 해방노예나 노예가 주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또한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그의 시대에 추방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한 이들의 귀국이 허용되고 몰수 재산이 반환되었다. 하지만 이것말고는 네르바도 도미티아누스의 정책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계승했다. 이런 네르바에 대해 원로원도 전혀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인간은 재미있는 동물이어서, 살아 있을 때에는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던 사람도 죽고 나면 더 이상 관심을 쏟지 않는 법이다. 도미티아누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토록 반대했던 원로원 의원들이,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정책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균형감각을 가진 네르바는 친도미티아누스파에 대해 보복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지만, 반도미티아누스파를 우대하지도 않았다. 그의 인사 기준은 어디까지나 적재적소였다. 프론티누스의 수도청 장관과 비슷한 '쿠라토르 아콰룸'(curator aquarum)에 임명되었고, 이때의 경험은 '로마 시의 수도에 관하여'(De aquae ductu urbis romae)라는 저서로 열매를 맺는다. 소 플리니우스도 네르바에게 발탁된 인재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국세청장이라 해도 좋은 자리에 임명되었는데. 부를 추구하지도 않았지만 경멸하지도 않은 그에게는 딱 알맞은 자리였을 것이다.
네르바는 운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우선 베스파시아누스처럼 제국의 재정을 재건하느라 씨름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공사비와 군사비를 쓰고도, 도미티아누스는 건전한 재정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착공은 도미티아누스가 했지만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 직후에 완공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두 개의 건축물이 그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하나의 '네르바 포룸'이고 또 하나는 오스티아에서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가 접안하는 항구 근처에 세워진 '네르바 창고'였다. 그러나 소극적인 지지는 언제 반대로 돌아설지 모른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위험이 결정적으로 현실화하기 전에 손을 쓸 필요가 있었다. 네르바가 즉위한 지 1년이 지났을 때쯤에는 누구나 그 필요성을 공감하게 되었다. 도미티아누스에게 심취해 있던 근위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후계자는 원로원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네르바가 스스로 결정한 모양이다. 서기 97년 10월에 느닷없이 후계자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후계자를 지명한 게 뜻밖이어서가 아니라, 지명된 제위계승자가 예상 밖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의 등장
입양 형식으로 후계자에 지명된 것은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다. 이베리아 반도 남부 출신이니까, 말하자면 속주 출신이다. 그렇긴 하지만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에서 군단장을 지냈고,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의 천거로 원로원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귀족까지 되었으니까, 전통적인 명문 집안은 아니지만 사회 지도층에 속해 있었다. 서기 97년 당시 트라야누스의 지위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포함한 고지 게르마니아 방위군 사령관이었다. 나이는 44세. 사회적 지위도, 군사 경험도, 연륜도 흠잡을 데 없는 인물이었다. 아무리 완고한 공화주의자라 해도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원로원 색체가 짙은 네르바를 소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던 변경의 군단들도 트라야누스라면 대환영이었다. 빈정대기 좋아하는 어느 역사가는 이렇게 말했다. 네르바가 오현제에 포함된 이유는 오로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고른 한 가지 업적 때문이라고. 71세의 네르바는 44세의 트라야누스를 단순히 후계자로만 지명한 것이 아니었다. 지명과 동시에 트라야누스에게는 '임페라토르'라는 존칭이 주어졌고, 황제의 권한 가운데 하나인 '호민관 특권'도 부여되었다. 또한 이듬해 1월 1일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서기 98년도 집정관에 네르바 황제와 함께 출마하기로 결정되었다. 집정관은 원로원에서 선출하지만 황제와 함께 출마하면 그것만으로도 당선은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다. 요컨대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을 뿐 아니라. 공동 통치자로도 지명한 것이다. 로마는 앞으로도 계속 제정으로 나아간다는 것. 황제는 죽어도 황제 통치의 제정은 계속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서기 98년 1월 27일. 네르바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자연사였다. 1년 4개월의 치세다. 유해는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역대 황제들이 잠들어 있는 황제묘에 매장되었다. 네르바가 죽었을 때 트라야누스는 콜로니아(오늘날의 퀼른)에 있었다. 그런 그에게 소식을 전한 사람은 당시 22세였던 하드리아누스였다. 클라우디우스의 친척이기도 한 하드리아누스는 도나우 강 연안에서 멀리 떨어진 콜로니아까지 말을 타고 달려가 그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1월 1일 집정관에 취임할 때도 수도로 돌아가지 않은 트라야누스는 45세에 새 황제가 된 뒤에도 로마로 돌아가지 않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발탁되어, 1개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에서 3개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뛰어오른 트라야누스는 알고 있었다. 군인인 자기가 황제가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네르바가 한 일과는 다르다는 것. 그가 황제로서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도미티아누스가 유일하게 못다 한 일. 아니 유일하게 하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트라야누스가 수도 로마로 돌아간 것은 제위에 오른 지 1년이 지난 서기 99년 여름이었다.
로마의 인
성자필쇠. 한번 성한 자는 쇠하게 마련이라는 것은 역사의 이치다. 로마인의 역사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로마인의 역사를 쓰고 있노라면, 성자필쇠 앞에서 감상에 젖기보다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로마 역사는 릴레이 경주와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기성 지도층의 기능이 쇠퇴하면, 어김없이 새로운 인재가 배턴을 넘겨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 없기 때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선발 투수가 힘이 빠졌는데도 마땅한 구원 투수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 던지게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바꿔 말하면 마땅한 후계자를 구하지 못한 구인난 덕분에, 기능 부조에 빠진 기존 지배층도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그 결과 공동체는 쇠퇴를 거듭한 끝에 결국 붕괴된다. 배턴을 넘겨받을 사람이 없어서 계속 달리다가 급기야 트랙에 쓰러져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로마 역사는 이와는 다른 길을 걸은 것 같다. 그렇긴 하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국정과 체력을 겨루는 릴레이 경주는 역시 다르다. 국정의 경우에는 지금 달리고 있는 주자 자신이 다음 주자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권력에는 후계자 결정권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마 역사를 보면, 현재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육성한 것을 알 수 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티베리우스 문하생' 으로 출발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 등용되었고, 트라야누스 자신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발탁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속주에서 널리 인재를 등용했고,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사회의 제2계급인 기사계급을 제국 운영에 활용했다. 이들 모두가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자질을 가진 인재를 등용하고 육성하여 지도자층을 충실하게 키웠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언제든지 자기를 대신해서 달릴 수 있는 릴레이 요원을 충분히 갖추어둔 셈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 기회를 주어 육성한 것은 제국을 통치하는 데 협력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 결국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것, 다시 말하면 사익과 공익이 부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는 최고의 행운이다. 따라서 사익과 공익을 부합시키든, 아니면 문호를 개방한 클라우디우스 황제처럼 사익을 무시하고 공익을 우선하든, 문제는 동기가 아니라 결과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로마 지도자들은 차세대 지도자를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제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가 등장했다. 속주의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한 시인의 삶과 죽음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마르티알리스(Marcus Valerius Martialis) - 그는 서기 40년째 에스파냐 북부의 작은 도시 빌빌리스에서 태어났다. 빌빌리스는 사라고사와 톨레도 사이를 잇는 로마 가도 연변의 작은 도시로서, 사라고사에서 남서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역시 에스파냐 출신인 교육자 퀸틸리아누스가 태어난 칼라오라와도 10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마르티알리스는 거기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받았다. 고등교육은 타라코넨시스 속주의 수도 타라고나에서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 정도니까, 유복하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음이 분명하다. 24세 때, 야심만만한 이 젊은이는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제국의 수도 로마로 떠난다. 공화정 시대에는 키케로나 베르길리우스나 호라티우스 같은 이탈리아의 지방 출신들이 출세하기 위해 로마로 떠났지만, 제정 시대에는 이런 경향이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 싶은 사람은 초목이 바람에 휘듯 로마로 몰려들었다. 에스파냐 출신인 마르티알리스도 그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렇기 하지만, 에스파냐 출신 문인으로는 눈부시게 빛나는 선배가 있었다. 바로 네로 시대의 세네카다. '세계의 수도'에 나오긴 했지만, 세네카처럼 원로원 의원의 아들도 아니고, 놀고 먹을 수 있을 만큼 부자도 아닌 마르티알리스는 스스로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려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교육을 받았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퀸틸리아누스처럼 교사가 될 수도 있고, 수요가 끊이지 않는 국가 공무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는 타키투스나 소 플리니우스처럼 변호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르티알리스에게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붓 하나로 입신출세할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고대에는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팔리는 작품을 쓰면 출판사에서도 환영하고, 다음 작품을 발표하기도 쉬워진다는 이점은 기대할 수 있었지만, 책이 팔리는 만큼 수입도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파트로네스'(후원자)를 찾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나 호라티우스를 계속 지원해준 마이케나스처럼 이해심 많은 후원자가 서기 1세기 후반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마르티알리스가 쓰는 작품은 권력자나 부유층이 후원자로 나서기를 꺼릴 만한 성질을 띠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태어난 베르길리우스나 호라티티우스는 웅장하고 장엄한 서사시나 축제에서 신들을 찬미하는 송가를 장기로 삼은 반면, 마르티알리스의 작품은 현세의 삶을 재치와 풍자와 유머로 도려내어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베르길리우스나 호라티우스의 문학이 '중후'하다는 평을 받은 반면, 마르티알리스의 문학은 '경박'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문학사에서 마르티알리스는 '에피그램'(Epigram)의 달인으로자리매겨져 있지만, 이 영어 낱말의 어원인 '에피그람마'(Epigramma)는 원래 '묘비명'에서 생겨난 문장 형식이다. '에피그램'이 묘비명을 뜻하지 않게 된 뒤에도(묘비명을 뜻하는 영어 낱말은 epigraph). 이 문장 형식은 단시라는 의미로 살아남았다. 따라서 경구나 풍자시로 의역하는 사람이 많다. 분량은 대개 10행 이내로 이루어져 있다. 3행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마르티알리스가 지은 '에피그램'을 몇 편 읽어보면, 로마 시대의 '에피그람마'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변호사 네불루스에게-
방청석의 소란스러울 때에만 그대는 목청을 높인다. 네불루스여, 그대는 변호사인가, 아니면 싸구려 약장수인가, 그 소란 속에서는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그대가 변호사인지 약장수인지 아무도 판단할 수 없으련만. 그런데 이제 방청석이 조용해졌으니, 네불루스여, 지금이야말로 말하게나. 그대의 본색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비평가 라일리우스에게-
제 작품은 발표하지 않고 내 작품만 비평하는 라일리우스여. 비평일랑 그만두게. 그보다 먼저 그대의 작품을 남들 앞에 내놓게나.
-파블루스에게-
정말 멋진 향수였네. 그대가 어젯밤 잔치에서 손님들한테 뿌려준 것은. 그런데 식사는 닭모이 정도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네. 세련된 대접일세. 향수 냄새에 감싸여 허기를 참는다는 것은. 그렇긴 해도 나의 벗이여. 먹지 않고 향수 냄새만 킁킁거리며 맡는 것은 향료에 싸인 신선한 미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네.
-돌팔이 의사에게-
전에 안과의사를 하더니, 지금은 검투사를 직업으로 삼고 있구나. 하기야 그대가 지금 경기장에서 하고 있는 일은 과거에 진료실에서 했던 일인 것을. 이래서는 체면에 신경을 쓰는 상류층이 그의 후원자가 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로마에 나온 지 20년, 마르티알리스의 후원자가 된 것은 문학이 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벼락부자들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후원자들을 찾아다니며 생활과 창작에 필요한 양식을 얻고 있었지만, 후원금도 빈약했는지, 공동주택 3층에서 셋방살이하는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인술사(섬이라는 뜻)라고 불린 이런 아파트는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집세가 쌌다. 그래도 마르티알리스의 창작욕은 시들지 않고, 이 '에피그람마'의 달인은 여전히 의기양양했다. 머나먼 브리타니아 땅에서도 그의 작품이 읽히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과 같은 글을 쓸 정도니까, 베스트셀러 작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플라쿠스에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장엄하고 웅장하고 비장한 문학을 존경하고 칭찬하고 숭배한다고.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문학은 무엇보다 먼저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이 마르티알리스의 후원자가 된 사람이 바로 도미티아누스 황제였다. 교육자인 퀸틸리아누스와 풍자시인인 마르티알리스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에스파냐 북부에서 태어난 속주민이다. 나이는 퀸틸리아누스가 세 살쯤 위였으니까, 동년배라고 해도 좋다. 도미티아누스는 마르티알리스보다 열 살쯤 젊고, 퀸틸리아누스와는 열서너 살 차이였다. 퀸틸리아누스는 속주 출신이지만, 아버지가 교육자였다. 그래서 교사와 의사에게는 출신지에 관계없이 로마 시민권을 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법에 따라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로마 시민권은 세습권이기 때문에. 아들인 퀸틸리아누스는 17세에 이미 로마 시민이었다. 요컨대 직접세를 면제받는 신분이었다. 한편 마르티알리스는 교육자의 아들도 아니고, 자신도 교사가 되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로마에 나온 지 2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속주민이었다.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소맥법'에 따라 하루 1킬로그램의 밀을 공짜로 배급받을 권리도 없고, 무료배급 증명서를 보여주면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콜로세움 같은 경기장에서 공짜로 경기를 즐길 수도 없다. 무료배급과 무료입장은 둘 다 로마 시민권 소유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사회복지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마르티알리스는 오랫동안 로마 속의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퀸틸리아누스에게 1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연봉을 지급하고, 변론술이나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사용 교과 과정인 '변론술 대전'을 써달라고 의뢰한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마르티알리스에게 해준 대우는 이처럼 공적이고 진지한 것은 아니다. 황제와 풍자 시인의 관계는 후원자와 예술가의 관계에 가까웠다. 마르티알리스는 베스트셀러 작가였기 때문에 작품을 펴내기 위해 고생할 필요는 없었지만, 황제가 열 살 위인 에스파냐 시인에게 요구한 것은 궁전에서 식사를 같이하거나 알바와 치르체오의 별장에 동행해 달라는 것이었다.
같은 에스파냐 출신이라도 근엄한 교육자와 신랄한 풍자시인을 나름대로 다르게 활용한 것은 흥미롭다. 퀸틸리아누스에게는 제위계승자인 두 소년의 교육도 맡기고 있었지만, 마르티알리스에게는 황제 자신의 말벗이 되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풍자시인의 라틴어가 교육자의 라틴어에 비해 불완전했기 때문은 아니다. 마르티알리스의 라틴어는 완벽했다. 문제는 그 라틴어를 구사하여 표현하는 내용이었다. 마르티알리스 자신도 "내 책은 인간의 더러운 냄새를 풍긴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요컨대 마르티알리스는 인간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관심이 있었다. 황제가 풍자시인에게 연금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속주민에 불과한 마르티알리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을 뿐 아니라, 단번에 기사계급에 넣어주었다. 로마 사회에서 원로원 계급에 버금가는 기사계급에 들어가려면 4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가난뱅이 시인에게 그런 재산이 있을 턱이 없으니까, 황제가 돈을 준 게 분명하다. 또한 이 무렵부터 마르티알리스는 작지만 정원까지 딸린 단독주택에서 살게 되었으니까. 이 집을 살 돈도 도미티아누스가 주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내성적인 성격으로 홀로 산책하기를 즐긴 도미티아누스가 촌철살인의 경구를 무기로 독자들에게 쓴웃음을 짓게 하는 '에피그람마' 작가와는 함께 지내기를 좋아했다. 시인은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풍자시를 써주었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에게-
황제여, 저의 다섯 권째 작품을 바칩니다. 여기서 저는 모든 대상을 풍자했지만, 저의 풍자 대상이 된 이들은 아무도 불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평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제 글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으로 얻는 수입은 얼마나 되느냐고. 돈벌이 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저 자신이 만족할 만한 작품을 쓰고 있다면 말입니다. 이런 솔직함이 도미티아누스의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황제에게 사소한 것을 조르기도 한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에게-
당신이 통치하고 계시는 이 로마 시내에 저는 작은 집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좁은 골짜기에 면한 고지대에 있어서 언제나 물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근처를 지나는 마르키아 수도에는 콸콸 소리를 내며 많은 물이 흐르고 있는데, 우리집 정원은 물 한 방울도 없이 사막이나 마찬가집니다. 이런 형편이니, 제발 저의 누추한 오두막에도 물을 주십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저에게는 유피테르 신이 내려주는 단비 같은 은총이 될 것입니다. 웬만한 집이라면 수도요금을 내고 물을 끌어다 쓰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마르티알리스의 집에도 당장 수도국 기사가 찾아가서 수도관을 연결해주었을지 모른다. 더구나 좁은 골짜기에 면한 고지대이니까. 그 지형적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상당한 전문기술을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를 알려주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카이사르에게-
('임페라토르'는 병사들이 부르는 호칭이고, '아우구스투스'는 너무 장중하다는 이유로. '카이사르'를 황제의 호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카이사르여. 가까이에 제 작품이 있다면 꼭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장담하건대. 세계 통치자의 엄격한 표정이 한결 부드럽게 누그러질 것입니다. 양미간에 깊이 새겨진 주름이 사라지리라는 것도 보장합니다. 개선식에도 농담은 허용되어 있습니다. 개선장군조차도 병사들의 놀림을 받는 것은 불명예가 아닙니다. 그러니 읽어주십시오. 제가 쓴 몇 구절을. 당신도 농담이나 유머까지 거절할 사람은 아닙니다. 검열(도미티아누스가 종신 독재관이 된 것과 관련되어 있다) 덕분에 저도 무해한 표현밖에 쓸 수 없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글은 추잡한 구절과 짓궂은 장난으로 가득 차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의 작가혼은 건전합니다! 서기 96년 9월 18일 이후, 시인의 쾌적했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되었기 때문이다. 후임 황제인 네르바는 보복행위를 금지했기 때문에, 선제와 친했던 마르티알리스도 목숨이 위태로워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생계 수단을 잃게 된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시인은 네르바에게 빌붙으려고 했다.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모든 공포는 사라지고, 자유와 행복과 도덕이 돌아왔다"는 시를 발표하여 네르바의 환심을 사서 후원을 받으려고 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품격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던 '에피그람마' 작가의 후원자가 된다는 건 신사인 네르바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네르바가 죽고 트라야누스가 제위에 오른다. 마르티알리스는 트라야누스한테도 시도를 꾀했지만, 이 황제는 다키아 전쟁에 전념하느라 수도에는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트라야누스 황제는 시인이라는 족속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서기 98년이 되자 마르티알리스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나이도 환갑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미티아누스와의 관계가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에.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인물과 친했던 시인의 후원자로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도시 로마에서의 생활에 피로와 권태를 느끼고 있을 무렵. 후원자가 나타났다. 동향 출신의 돈푼깨나 있는 여성 애독자가 집과 생활비를 마련해줄 테니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제의를 해온 것이다. 이 제의를 마르티알리스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간단히 말하면, 줄곧 독신으로 살았던 '에피그램'의 달인도 드디어 결혼할 마음이 났다는 뜻이다. 34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르티알리스에게 여비라는 명목으로 얼마간의 돈을 쥐여준 것은 소 플리니우스였다. 문인으로는 동업자이나, 두 사람은 성격도 작풍도 태생도 경제 환경도 정반대라 해도 좋을 만큼 달랐다. 하지만 소 플리니우스는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죄다 잘라버리는 타키투스와는 달리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고, 인품도 온화했다. 마르티알리스에 대해서도 사회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편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르티알리스는 고향 에스파냐에서 평온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작가에게는 생명이나 다름없는 창작욕이 감퇴해버렸다. 마르티알리스에게 창작의 원천은 현실의 인생이었다. 잡다하고 혼란스러운 로마. 선도 악도 지나칠 만큼 충분히 있는 국제 도시 로마를 그토록 조롱한 주제에, '내 작가혼은 건전하다'고 큰소리친 주제에, 로마를 떠난 뒤에는 창작욕이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시골에서의 일상은 평온했을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에게는 '독'이 필요하다. 이런 종류의 '독'은 시골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대도시만이 가지고 있는 '독'이었다. 그래도 소 플리니우스의 권유를 받아들여 열두 권째의 '에피그람마'를 간행했지만, 로마 시절에 쓴 작품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서기 102년에 시인은 작가혼이 돌아오지 않은 채, 즉 로마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은 채, 그 로마가 자신에게 준 것을 잃어버린 현재를 한탄하면서 눈을 감았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지 6년 뒤였다. 이때쯤 마르티알리스는 수도에서도 잊혀진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죽음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소 플리니우스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그 소식을 전해준 덕택이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창의적이고 강렬하고 격렬하고 신랄하고, 짠맛과 쓴맛은 충분했지만 단맛은 약에 쓰려고 해도 없었던 것이 마르티알리스와 그의 에피그램이었다." 참으로 멋진 비평이다. 그런데 이런 경박한 작품은 금세 사라질 거라는 동시대 지식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마르티알리스의 풍자시는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계속 간행되고 있다. 좋은 번역이 있다면, 한번 구해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한때나마 엄격한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고, 양미간에 새겨진 주름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마르티알리스의 글을 인용하겠다.
-포스투무스에게-
인생을 즐기는 것은 내일부터 하자고? 그러면 너무 늦다네, 즐기는 것은 오늘부터 해야 돼. 아니, 그보다 현명한 건 어제부터 이미 인생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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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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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1. 선로(宣老)스님
송(宋)나라 때, 시인이며 대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곽공보(郭功甫)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 사람을 잉태할 때 그의 어머니가 이태백의 꿈을 꾸었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이태백의 후신(後身)이라고 했는데, 뛰어난 천재였다고합니다. 곽공보의 불교스승은 귀종선(歸宗宣) 선사인데 임제종의 스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귀종 선 선사가 곽공보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앞으로 6년 동안 곽공보의 집에 와서 지냈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곽공보는 스님께서 연세가 많긴 하지만 어째서 자기의 집에서 6년을 지내려 하시는지 알 수 없어 이상하게 생각 하였습니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안방에서 잠을 자다가, 문득 부인이 큰 소리로 "아이쿠, 여기는 스님께서 들어오실 곳이 아닙니다."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깨어났습니다. 부인이 꿈에 큰스님께서 자기들이 자고 있는 방에 들어왔다고 하는 말을 듣고 곽공보는 낮에 온 편지 생각이 나서 불을 켜고 부인에게 그 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튿날 새벽, 사람을 절에 보내 알아보니 어젯밤에 스님께서 가만히 앉아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편지 내용과 꼭 맞았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곽공보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편지를 보낸 것이나 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귀종 선 선사가 곽공보의 집에 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달리 지을 수가 없어, 귀종 선 선사의 '선(宣)'자를 따고, 늙을 '노(老)'를 넣어 '선로(宣老)'라고 했습니다. 생후 일 년 쯤 되어 아이가 말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누구를 보든'너'라고 하며 제자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법문을 하는데 스님의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어린애 취급을 할 수가 없어 무두다 큰스님으로 대접하고 큰절을 올렸습니다. 아이의 엄마, 아버지도 큰절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났습니다. 당시 임제종의 정맥(正脈)을 이은 유명한 백운 단(白雲端) 선사가 이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세살 되는 어린애를 안고 마중을 나갔더니 이 아이가 선사를 보고 "아하, 조카 오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생의 항렬로 치면 백운 단 선사가 귀종 선 선사의 조카 상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니 "사숙님" 하고 어린아이에게 절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백운 단 선사 같은 큰스님이 넙죽 절을 하였던 것입니다. 백운 단 선사가 "우리가 이별한 지 몇 해나 됐는가?" 하고 물으니, 아이는 "4년 되지. 이 집에서 3년이요, 이 집에 오기 1년 전에 백련장에서서로 만나 이야기하지 않았던가"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을 말하자 백운 단 선사는 아주 깊은 법담(法談)을 걸어 보았습니다. 법담을 거니 병에 담긴 물이 쏟아지듯 막힘이 없이 척척 받아 넘기는데, 생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법담은 장황하여 다 이야기 못하지만 <<전등록(傳燈錄)>>같은 불교 선종 역사책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것이 유명한 귀종 선 선사의 전생담입니다.
그후 6년이 지나자 식구들을 모두 불러 놓고는 "본래 네 집에 6년만 있으려 하였으니 이제 난 간다" 하고는 가만히 앉아 입적 했습니다. 이처럼 자유자재하게 몸을 바꾸는 것을 격생불망(隔生不忘)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전생, 후생으로 생을 바꾸어도 절대로 전생의 일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원관(圓觀)스님
중국의 역사책인 <당서(唐書)>에 나오는 것으로, '이원방원관(李源訪圓觀)'이라 하여 이원이라는 사람이 원관이라는 스님을 찾아간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나라 안록산의 난리(755~763) 때 당 명황(唐明皇)의 신하중에 이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원은 그의 아들입니다. 이증은 당 명황이 안록산의 난리로 촉나라 성도로 도망갈 때 서울인 장안(長安)을지키라는 왕명을 받고 안록산과 싸우다 순국했습니다. 뒤에 국란이 평정되고 환도한 후, 나라에서 그 아들인 이원에게 벼슬을 주려 했으나 그는 도를 닦겠다고 하며 거절하고는 자기의 큰 집을 절로 만들고 혜림사(蕙林寺)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원관이라는 스님이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고승전(高僧傳)>>이나 <<신승전(神僧傳)>>에는 '원관'으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더러 '원택(圓澤)'이라고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보통 흔히볼수 있는 스님으로 마음 씀씀이가 퍽 좋았습니다. 한번은 원관스님과 이원 두 사람이 아미산(峨眉山)의 천축사 구경을 갔습니다. 구경하는 도중에 어느 지방의 길가에서 한 여인을 보고 원관스님이 "내가 저 여자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태어난 지 사흘 후에 찾아오면 당신을 보고 웃을 테니 그러면 내가 확실한 줄 아시오. 그리고 열두 해가 지난 뒤 천축사(天竺寺)로 찾아오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미산으로 가다가 이렇게 말하고 그는 길가에 앉아 죽어버렸습니다. 원관스님의 이야기가 너무 이상해서 이원이 스님의 말대로 수소문해서 여인의 집을 찾아가 보니 사흘 전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원이 아이를 보자 그 아이는 이원을 보고 웃는 것이었습니다. 이원이 이로써 그 아이가 원관스님의 환생인 줄 확실히 알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 사람들이 스님께서 가시면서 이번에 가면 안 온다고 말씀하시고, 어느 곳의 누구 집에 태어날 것이라고 모두 말씀하셨다고했습니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뒤 팔월 추석날 이원은 전당(錢塘) 천축 사로 찾아갔습니다. 갈홍천(葛洪川)이라는 개울이 있는 곳에 이르자 달이 환히밝은데 저쪽을 보니 웬 조그만 아이가 소를 타고 노래를 하며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 오더니 "이 선생은 참으로 신용있는 사람이오. 그러나 가까이는 오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약속을 어기지 않고 찾아왔으니 신용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세속 욕심이 꽉 차 마음이 탁하니 가까이 오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원이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멈칫멈칫하며 서 있는데 아이는 저만큼 떨어져 소를 타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생돌 위 옛 주인이여
달구경 풍월함은 말하지 마라.
부끄럽다 정든사람이 먼 곳에서 찾아 오니
이 몸은 비록 다르나 자성은 항상 같다.
전생 내생 일이 아득하여 알 수 없는데
인연을 말하고자 하니 창자가 끊어질 것 같다.
오나라 월나라 산천은 이미 다 보고
도리어 배를 돌려 구당으로 간다.
三生石上舊情魂 (삼생석상구정혼)
賞月吟風莫要論 (상월음풍막요론)
慙愧情人遠相訪 (참괴정인원상방)
此身雖異性長存 (차신수리성장존)
身前身後事茫茫 (신전신후사망망)
欲話因緣恐斷腸 (욕화인연공단장)
吳越山川尋已遍 (오월산천심이편)
却廻煙掉上瞿塘 (각회연도상구당)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가는 것을 보고 이원은 그제서야 그 스님이 도를 통한 큰스님인 줄 알고, 더 가까이 하여 법문을 듣고 공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돌아가서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뒤에 나라에서 이원에게 간이대부라는 높은 벼슬을 주었으나 이원은 이를 거절하고 팔십여 세까지 살았습니다. 이것이 '이원방원관' 이야기의 내용으로, 이 이야기도 영겁불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전생의 일을 조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기억하고 있으며 자유자재한 것입니다. 노래 가운데 '삼생돌 위에 옛주인'이란 누구를 가리키느냐하면 천태지의 선사의 스상인 혜사(慧思)스님을 말합니다. 혜사스님(515~577)은 만년에 대소산(大蘇山)에서 남악형산(南嶽衡山)으로 처소를 옮기고 형산의 천주봉(天柱峰) 봉우리밑에 있는 복암사(福岩寺)라는 절에 주석(住錫)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전생에도 이 복암사에서 대중을 교육시켰는데 그 전생일이 그리워서 이곳으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대중을 거느리고 나가더니 아주 경치가 뛰어난 한 곳에 이르러 "이곳이 옛날 절터야. 지금은 오래되어 아무 자취도 없지만, 내가 전생에 토굴을 짓고 공부하던 곳이야. 근처를 파 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그 주변을 파 보니 과연 기왓장과 각종 기물이 나왔습니다. 또 큰 바위가 있는 곳에 이르러 "이곳은 내가 앉아서 공부하던 곳이야. 죽어 이 바위 밑으로 떨어져 시체가 그대로 땅에 묻혔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땅을 파 보니 해골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혜사스님의 삼생담입니다. 금생에는 복암사, 전생에는 토굴터, 그 전생은 바위 위이므로 삼생석인 것입니다. 혜사스님은 그 도력이나 신통이 자재한 유명한 스님으로, 그런 분이 분명히 증거를 들어 확인한 것이니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삼생의 해골이 나온 그 자리에 삼생탑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남악 혜사스님의 삼생탑으로, 유명한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 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원관스님이 말한 삼생석 위의 옛주인이란 바로 혜사스님을 가리킨 것입니다. 곧 혜사스님이 돌아가셨다가 나중에 당나라에 태어나서 원관이라는 스님으로 숨어 살았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모든 생활이 범승(凡僧)과 같았지만 실제 생활은 자유자재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대자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3. 불도징(佛圖澄)스님
신승(神僧) 불도 징(佛圖澄)은 인도 사람입니다. 도(道)를 통한 후중국으로 와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는데 그 가운데서 후조(後趙)의 황제 석호(石虎)가 제일 신봉하며 지도를 받았습니다. 불도 징스님이 349년 12월 8일에 석호에게 하직하고 입적하니 석호가 통곡하며 크게 장사지냈습니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서 옹주(壅州)에서 스님들이 왔는데 '불도 징대사를 보았다'고 하기에 탑을 헐고 보니 정말 아무 것도 없고 큰 돌덩이 하나뿐이었습니다. 석호가 그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습니다.
"돌(石)은 나의 성인데 큰 스님이 나를 묻고 갔으니 나도 또한 오래 살지 못하리라."
그 뒤에 과연 황제 석호가 죽고 그 나라까지 망하였습니다.
4. 지자(智者)스님
수나라의 양제(瘍帝) 대업(大業) 원년(元年;605) 11월 24일, 천태산 지자 대사(智者大師) 제삿날에, 양제가 그 신하 노정방(盧正方)을 보내어 천승재(千僧齋)를 올렸습니다. 사람 수를 엄밀히 조사하여 정돈하였 는데 나중에 보시를 돌릴 때 보니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더 있는지는 모르나 확실히 한 사람이 더 있는 것을 다들 말하였습니다.
"지자 대사가 몸을 변하여 재(齋)에 참여한 것이다."
모두들 가서 지자탑의 문을 열고 보니 과연 빈 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다시 보니 지자 대사의 육신은 여전히 탑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5. 은봉(隱峰)스님
당나라의 헌종(憲宗) 원화(元和) 12년(817년) 은봉(隱峰) 선사가 채주(蔡州)를 지나가는데, 그때 오(吳)의 원제(元濟)가 난리를 일으켜 관군과 채주에서 크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은봉 선사가 그것을 가련하게 여겨서 육환장을 타고 몸을 공중에 날리니 양군이 보고 감복하여 싸움을 그쳤으며, 얼마 있지 않아서 오의 원제가 항복하였습니다. 은봉 선사는 이러한 신통을 부린것이 부끄러워 오대산으로 가서 금강굴(金剛窟) 앞에 거꾸로 서서 죽으니 옷자락까지 전부 몸을 따라 거꾸로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화장을 하려고 몸을 밀어도 쓰러지지 아니하여 모두들 더욱 탄복하였습니다. 선사의 여동생으로 출가하여 공부하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 달려와서는 스님을 보고 꾸짖어 말하였습니다.
"몸이 생전에 돌아 다니며 기이한 행동으로 사람을 속이더니 죽어서도 또한 사람들을 미혹하게 한다."
이렇게 소리 지르며 손으로 미니 마침내 죽은 몸이 쓰러졌습니다.
성철스님 법어집 "영원한 자유"의 다음이야기는 <영원한 자유인. 혜숙(惠宿)스님.>>입니다.
6. 혜숙(惠宿)스님
혜숙(惠宿)은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 597~631) 때 스님으로 적선촌(赤善村)에 이십여 년 동안 숨어 살았습니다. 그 때 국선(國仙)인 구담이 그 근처에 가서 사냥을 하니, 혜숙도 같이 놀기를 청하여 구담과 함께 사냥을 하였는데, 많은 짐승을 잡아 삶아서 잔치를 하였습니다. 혜숙은 고기를 잘 먹다가 구담에게 문득 물었습니다.
"더 좋은 고기가 있는데 드시렵니까?"
그 말에 구담이 좋다고 하자, 혜숙이 한 옆에 가서 자기의 허벅지 살을 베어다 구담 앞에 놓는 것이었습니다. 구담이 깜짝놀라니 혜숙이 꾸짖었습니다.
"내 본래 그대를 어진 사람으로 알았는데 이렇듯 살생함을 좋아하니 어찌 어진 군자의 소행이라 할 수 있겠소?"
말을 마치고 가버린 뒤에 그가 먹던 쟁반을 보니 담았던 고기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구담은 이 일을 매우 이상히 여겨 진평왕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그를 청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신이 가보니 혜숙은 술집에서 술이 많이 취하여 여자를 안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신이 나쁜 놈이라고 만나지 않고 궁중으로 되돌아가는데 얼마 안가서 또 혜숙을 만났습니다. 혜숙의 말이 "신도 집에 가서 7일재(七日齋)를 지내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신이 놀라 왕에게 가서 전후사를 말하여 왕이 신도 집과 술집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니 다 사실이었습니다. 수년 후 혜숙이 죽으니 마을 사람이 이현(耳峴) 동쪽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장사 지내는 바로 그 날 마침 이현 서쪽에서 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길가에서 혜숙을 만나게 되어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이곳에 오래 살았으니 딴 곳으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헤어진 후 조금 있다가 돌아보니 혜숙이 공중에서구름 타고 가는 것이 뚜렷이 보였습니다. 그는 크게 놀랐습니다. 그래서 걸음을 재촉하여 급히 이현의 동쪽에 와서 보니 장사 지낸 사람들이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묘를 파헤쳐보니 묘 속에는 과연 아무 것도 없고 헌신 한 짝뿐이었습니다.
7. 혜공(惠空)스님
혜공(惠空)은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 632~646) 때 사람인 천진공(天眞公)의 집 종의 아들로서, 아명(兒名)은 우조(憂助)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이 생각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아도 그것을 다 알아 맞추는 등의 신기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천진공은 그에게 예배하며 "지극한 성인이 내 집에 계신다"고 크게 존경하였습니다. 그가 자라서스님이 되어서는 항상 술을 많이 먹고 거리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미친 사람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또 번번이 깊은 우물 속에 들어가서 여러 달 동안 나오지 않곤 하였습니다.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에 있었는데, 그 때에 원효(元曉)대사가 경전의 주해(註解)를 지으며 어렵고 의심이 나는 것은 혜공에게 물었습니다. 하루는 원효와 같이 강에 가서 고기를 잡아 먹고 똥을 누는데 산 고기가 그대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혜공이 원효를 보고 희롱하여 말하기를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눈다[汝屎吾魚]"라고 하니, 그 뒤로 절 이름을 오어사(吾魚寺)로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하루는 구담 공이 많은 사람들과 산에 놀러 갔다가 길에 혜공스님이 죽어서 그 시체가 썩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중(城中)에 돌아와 보니 혜공스님은 여전히 술에 취해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돌아 다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 무렵 진언밀종(眞言密宗)의 고승 명랑(明朗)이 금강사(金剛寺)를 새로 짓고 낙성을 하는데, 당대의 유명한 승려가 다 왔으나 오직 혜공스님만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명랑이 향을 꽂고 마음으로 청하자, 혜공스님이 그것을 알고 "그렇게 간절히 청하므로 할 수 없이 온다" 하며 그 곳에 왔습니다. 그 때에 비가 몹시왔으나 옷이 조금도 젖지 않았을 뿐더러 발에 흙도 묻지 않았습니다. 혜공스님은 승조(僧肇) 법사가 지은 [조론(肇論)]을 보고 자기가 전생에 지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자신이 전생에 승조 법사였다는 말입니다. 승조 법사도 깨달음을 얻어 자유자재한 분이었습니다. 혜공스님이 배운 바 없어도 이처럼 원효스님이 모르는 것을 물어볼 정도이며 또 신통이 자재하여 분신까지 하는 것을 보면, 스님의 말을 거짓말이라 하여 믿지 못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혜공스님은 죽을 때에 공중에 높이 떠서 죽었는데, 나중에 화장을 하니 사리(舍利)가 수없이 많이 나왔습니다.
8. 법연(法演)스님
임제종의 중흥조라고 하는 오조 법연(五祖法演) 선사는 오조산(五祖山)에 살았다고 해서 오조 법연 선사라고 불렸습니다. 이 스님 밑에 불감(佛鑑), 불안(佛眼), 불과(佛果)의 세 분 스님이 있었는데, 이 분들을 삼불(三佛)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분 스님의 자손이 천하에 널리 퍼져 그뒤로 불교는 선종 일색이 되었고, 또 선은 오조 법연 선사의 법손 일색이 되었습니다. 그 오조 법연스님이 오조산에 처음 들어가면서 오조 홍인(弘忍)선사의 탑인 조탑(祖塔)에 예배를 하였습니다. 오조 홍인 선사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륙백년이 지났지만 육신이 그대로 탑에 모셔져 보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조탑에 예배를 드리면서 오조 법연 선사가 이렇게 법문을 하였습니다.
옛날 이렇게 온몸으로 갔다가
오늘에 다시 오니 기억하는가
무엇으로 증거 삼는고
이로써 증거 삼노라
이것은 오조 홍인 선사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곧 그전의 오조 홍인선사가 돌아가셨다가 다시 오조 법연 선사가 되어 돌아왔는데 알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 이것이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조 홍인 선사는 사조 도신(道信) 선사의 제자입니다. 도신 선사는 나이가 많도록 제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에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은 사람(栽松道者)이 있었는데, 나이 많은 노인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노인이 도신 선사에게 와서 "스님께서 연세가 많은데 법(法)제자가 없으니 제가 스님의 제자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그래서 도신 선사가 "당신도 나이가 많아 나와 같이 죽을 터인데 제자가 되어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고 대답했더니, 그 노인은 "그럼 몸을 바꾸어 오면 어떻겠습니까?"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 노인이 산 밑에 있는 마을의 주(周) 씨 집의 아들로 태어나 사조 도신 선사를 찾아와서 그의 제자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오조 홍인 선사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조 홍인 선사는 재송 도자(栽松道者)의 후신이고, 오조 법연 선사는 오조 홍인 선사의 후신인 것입니다. 이 삼대(三代), 곧, 재송도자에서 도조 홍인 선사로 이어지는 삼대의 전생은모두 밝혀져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영겁불망하는 열반묘심을 성취한증거인 것입니다.
열반묘심을 성취하면 정신적으로만 어떤 작용이 있다고 생각 하지만, 그러나 육체적으로도 뛰어난 작용이 있어 분신도 하고 또 부사의(不思議) 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성상 불이(性相不二)'라하여 성과 상이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 '심신일여(心身一如)'라고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라 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으로 열반묘심을 성취하면 육체적으로도 그만큼 자유자재한 활동이 자연히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신일여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 속에 들어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면, 물질적인 것에 자유자재한 색자재(色自在)를 얻을 수 있고, 심리적인 것에자유자재한 심자재(心自在)를 얻을 수 있으며, 또 모든 법에 대한 자유인 법자재(法自在)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해 자재를 얻게 되면 여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진여위에서 자유자재하게 분신(分身)도 하고 화신(化身)도 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유자재, 영겁불망의 크고 작은 마음은 누구든 열심히 수도하여 자기 자성(自性)을 확철히 깨침으로써 성취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성취하면 자기 해탈 곧 색자재, 심자재, 법자재는 자연히 따라오게 마련인데, 이것이 불교의 근본 목표이며 또 부사의 해탈경계(不思議 解脫境界)라고 하는 것입니다.
9. 달마스님
달마스님을 보기로 들어보겠습니다. 불교인이라면 거의 알고 있는 달마스님의 이야기가운데 '척리서귀'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짝 하나를 들고 서천(西天) 곧 인도로 가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달마스님이 혜가(慧可)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앉은 채로 열반에 드시자 웅이산(熊耳山)에다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 송운(宋雲)이라는 사람이 인도에 가서많은 경(經)을 수집하고 귀국하는 길에 총령(파밀고원)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어떤 스님 한분이 신짝 하나를 메고 고개를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님, 어디로 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제 너희 나라와는 인연이 다하여 본국으로 간다. 그런데 네가 인도로 떠날 때의 임금[효명제(孝明帝 ; 516~528)]은 죽었어. 가 보면 새 임금이 계실 테니 안부나 전하게"라고 말씀하시고는 고개를 넘어가셨습니다. 송운이 돌아와 보니 과연 먼저 임금은 죽고 새 임금[동위(東魏)의 효정제(孝靜帝)]이 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도에서 달마스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달마스님은 돌아가신 지가 여러 해가 지났다고 했습니다. 송운은 너무 놀라 자기 혼자만 본 것이 아니라 수십 명이 함께 달마스님을 보았으니 절대 거짓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여 달마스님의 묘를 파 보기로 했습니다. 무덤을 파보니 빈 관만 남아 있고 관 속에는 신 한짝만 놓여 있었습니다. 달마스님의 '척리서귀'라는 말은 선종에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사후(死後)에도 이처럼 대자유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에 대한 조주스님의 법문이 있습니다.
조주 남쪽 석교 북쪽
관음원 속에 미륵이 있도다.
조사가 신 한짝 남겨두었으나
지금에까지 찾지 못하도다.
'조주스님' 하면 천하만고에 다 아는 대조사로서, 달마스님과 연대가 그리 떨어지지 않은 때에 사셨습니다. 그런 조주스님이 달마스님이 신 한짝 버리고 간 것에 대해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이 게송 하나만 보아도, 달마스님이 신 한짝만 들고 간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그런 것이 아니며 반드시 대자유가 따릅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신비한 어떤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기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10. 승가(僧伽)스님
서기 708년 당나라의 중종(中宗)황제가 승가(僧伽) 대사를 국사(國師)로 모셨습니다. 대사의 속성은 하(何)씨인데, 어느 때는 몸을 크게도 나투고 어느 때는 작게도 나투고 또는 십일면 관세음보살(十一面觀世音菩薩)의 얼굴로도 나투고 하여 그 기이한 행동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스님께서 710년 3월 2일에 돌아가시자 중종이 장안 근처의절에다 그 육신을 모셔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며 시체 썩는 냄새가 온 도성 안을 덮어서 사람들이 코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중종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신하들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대사가 본래 사주(泗州) 보광왕사(普光王寺)에 많이 계셨는데 죽은 육신도 그리로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라고 신하들이 황제께 아뢰었습니다. 그래서 중종은 향을 피우고 마음으로 축원하기를, "대사의 육신을 보광왕사로 모시겠습니다."하자, 잠깐 사이에 온 장안에 향기가 진동하였습니다. 그해 오월 보광왕사에다 탑을 세우고 대사의 육신을 모시니, 뒤로 탑 위에 자주 나타나서 일반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탑에 와서 소원성취를 빌게 되었고 그럴때마다 가서 탑 위에 모습을 나타내곤 하였는데, 그 얼굴이 웃음을 띠우고 자비로우면 소원성취하고 찡그리면 소원성취하지 못하는 등 신기한 일이 많아서 세상에서 부르기를 사주대성(泗洲大聖)이라 하였습니다. 또 799년 7월에는 궁중에 나타나서 그 때에 천자로 있던 대종(代宗)에게 법문을 하였습니다. 이 일로 대종이 크게 감격하여 그 화상(畵像)을 그려 궁중에 모셔놓고 항상 예배하였습니다. 822년에는 큰 화재가 나서 대사의 탑이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대사의 육신은 조금도 상함이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869년, 나라 안에 큰 난리가 났을 때에, 도적들이 사주(泗洲)로 쳐들어오다가 대사가 탑 위에 몸을 나타내자 놀라서 다 물러갔습니다. 당시의 종(懿宗)황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증성대사(證聖大師)라는 호를 올렸습니다.
1119년 당나라의 서울에 대홍수가 났을 때였습니다. 대사가 또 궁중에 나타나므로 천자인 휘종(徽宗)황제가 향을 꽂고 예배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사가 육환장을 흔들며 성(城) 위로 올라가니, 성 안의 온 백성들이 다 보고 기꺼워하는 가운데 큰 물이 곧 빠져버렸습니다.
이상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을 몇 가지 보기를 든 것일뿐으로, 그밖에도 기이한 사적(事蹟)은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듯이 승가 대사가 사후에 보광왕사의 탑 위에 그 모습을 자주 나타낸 사실은 그 근방 사람들이 다 보게 됨으로써 천하가 잘 아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실이 확실하여 의심할 수 없는 것을 가리켜 '사주 사람들이 대성을 보듯 한다(泗洲人見大聖)'는 관용구까지 생겨나게 된 것을 세상이 다 잘 아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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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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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의 마지막 수업 - 모리 슈워츠
즐거움의 발견
가능한 한 즐거움을 많이 느끼도록 노력하십시오.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을 향해 마음을 열어 놓기만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 생기는 세제 거품에 어린 색깔에 감탄하고, 접시를 보면서 지난 주말에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했던 즐거운 식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세심하게, 의식적으로 해보십시오. 공연히 불안해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에 전념하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질구레한 허드렛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거기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일곱. 친구만들기
친구가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위해, 가능한 한 오래, 가능한 한 넓게, 마음을 열어 두십시오. 병상에 눕게 된 이후 나는 전에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새로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을 해온 옛 제자들을 포함해서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시 이어졌습니다.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 새로 친구를 사귀거나 예전에 알았던 사람들과 다시 연락을 취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여러분이 상냥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아직 자신을 변화시킬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습니다. 물론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당장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자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달라지고 싶어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데 와도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나는 이것과 관련해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우선 자신의 어떤 행동을 바꾸고 싶은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심술궂은 면은 고치고, 유쾌한 사람 또는 사교성이 풍부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 '부탁합니다', '고맙습니다'와 같은 말을 전보다 자주 하십시오. 이런 아주 간단한 일이 가족이나 친구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를 바꾸는 첫 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 자주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면, 먼저 주의 깊게 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더 자주 찾아와 주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여러분을 찾아왔을 때 즐거운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한동안은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겉으로 시늉만 내고 잇다는 느낌이 들거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심술쟁이인 것은 심술쟁이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만약 여러분이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처럼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언젠가 정말로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붙이거나 너무 빨리 자신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칫 자신에게 실망해서 포기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또한 가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변화된 모습을 금방 알아차려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여러분이 원하는 반응을 결코 보여 주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마음을 열고 여러분과 사귀고 싶어하게 될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변화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리고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성공을 했든, 여러분은 노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
살다 보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단순히 원하는 것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병이 진행됨에 따라, 나는 점점 더 많이 다름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어디를 가든지 나는 다른 사람이 밀어 주는 휠체어를 타야 합니다. 음식을 먹는 것도, 목욕을 하는 것도, 화장실 변기에 걸터앉는 것도 모두 남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혼자서 해냈던 그 수많은 일들, 내 삶의 일부로서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일들을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남에게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나의 정신은 아직 독립적이며 분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독립성을 통해 본질적인 자아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특히 나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관계에 대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성숙한 인간, 완벽하게 독립적인 인간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도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으며, 누구도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은 개성이라는 것을 너무나 중시하는 나머지 공동체에 대한 의식을 점점 잃어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성인이 되기 전에 먼저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만 노력할 뿐 아무도 공동체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필요하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는 보다 성숙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성숙한 공동체란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일정한 책임을 지는 사회나 세상을 말합니다. 예수를 비롯한 많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말했듯이, '우리는 모두 형제 자매들'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소외된 떠돌이들이 아닌 것입니다. 어릴 적에 우리는 가정과 놀이터에서 공동체 의식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학교에 갈 무렵이 되면 사람들은 그 공동체 의식을 잃어버립니다.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남들과 경쟁을 해서 그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인간으로 개조되기 때문입니다. 직장에 들어가고 정치적인 세상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공동체 의식은 점점 더 희박해집니다. 회사든 국가든 서로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생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 사람들은 누구나 남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요청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남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합니다. 누군가를 돕다 보면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자기가 좋은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모두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고 싶어합니다. 게다가 남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들일 때, 사실은 여러분도 그 보답으로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들일 때는 먼저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하는 것 같이의 차이점을 명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새 차를 살 필요가 있어."
그러나 사실 우리는 새 차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고'있는 것입니다. 차 자체를 필요로 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새 차를 필요로 하는 경우란 극히 드물 것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구별해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특히 중요합니다. 타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이 둘을 반드시 구별해야만 합니다. 예컨대 좋은 음식이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것은 원하는 것이고,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필요한 것은 반드시 행동을 통해 해결되어야 하지만, 원하는 것에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원하는 것은 대부분 당장 얻을 수 없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경우, 우선 내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욕구를 해소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편입니다. 건강할 때의 나는 수줍음을 많이 타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발이 휠체어 바퀴에 끼여서 불편하다면 나는 간병인에게 명확하고 직접적인 어조로 발을 빼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워서 실내 온도를 조절하고 싶을 때는 그보다 덜 다급한 어조로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고통에 대해 흥미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삶을 고통 그 자체로 이해하며, 사람들에게는 고통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명상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고통에 대해 명상을 함으로써, 고통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감소시켜 고통을 다룰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굳이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렇게 고통을 다스릴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때, 이런 방법이 없다면 고통은 점점 심해질 것입니다.
질병을 화제로 한 대화
이야기를 들어 줄 만한 사람과 함께 자신의 병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약해진 마음은 물론,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의 약한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문명 사회라고 하는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질병을 환자 자체의 허약함이나 죄악과 연결시키는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치 몸이 아픈 것이 정신의 허약함이나 개인적인 결점의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병에 대해 부끄러워하도록 조건화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병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자신의 병에 대한 부끄러움의 강도도 점점 심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몸이 아픈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심지어는 자신을 경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때로는 불치병을 잃고 있는 사람의 가족과 친구들마저도 환자가 자신들의 사랑과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때에 환자에게서 멀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질병은 종종 마치 무슨 비밀이나 되는 것처럼 다뤄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몸이 아픈 사람은 남들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그래서 비참한 기분에 빠지기 쉽습니다. 게다가 질병은 환자의 가족이나 친구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인 환자와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만듭니다. 환자와 그 주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매우 중요한 화제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피함으로써, 그들은 공포와 경계심을 느낄 뿐만 아니라, 고독감에도 시달리게 됩니다. 나는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내 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나는 그들이 내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정신적인 후원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또한 내가 실제로 어떤 일들을 겪고 있는지 그들이 알게 된다면, 그들이 실제보다 더 비참한 상상을 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내 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병 자체가 우리의 관계 전체를 규정짓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병에 너무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그 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거리에서 아무나 붙들고 내게 이러이러한 병이 있노라고 이야기하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 줄 만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속에다 꾹꾹 눌러 담아 두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자신을 닫아 버려서도 안 됩니다. [나이트라인]이라는 텔레비젼 프로에 출연한 후, 나는 에릴 밍크라는 칼럼니스트가 [뉴욕 데일리 뉴스]지에 나에 대해 쓴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내가 출연했던 날의 그 프로그램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모리는 텔레비전을 이용해 사자(죽을 사, 놈 자)들의 마음속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도 루게릭 병을 앓았으며, 그 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고도 썼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좀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은 아버지가 어떤 일들을 겪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밍크는 텔레비전에서 나를 보고, '마치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생각 일부를 이제서야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썼습니다. 우리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면, 우리의 친구들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도와줄 것이고, 그러면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해 훨씬 더 나은 기분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친구라는 이름의 끈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해서는 안 됩니다.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누군가 돌봐 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병에 걸렸거나, 치료 기간이 긴 병에 걸렸을 때는, 아무리 독립적인 사람이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때 누군가 우리를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우리가 자신의 치료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 누군가 우리의 의견을 대신해 주고 옹호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계속해서 보살펴 줄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런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 잘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병에 걸려서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걸 기운이 없을 때, 우리를 돌봐 주는 사람은 우리에게 생명 줄과도 같은 존재가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를 돌봐 주는 사람은 예전에 사이가 멀어진 친척이나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환자가 정말로 당신을 보고 싶어해요. 한번 꼭 만나러 오세요' 라고 대신 말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더 이상 사람들을 만날 수 없을 때,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면 대신 전화를 받아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어요. 다음 주에 다시 전화하면 안 될까요?' 라고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는 내 주의에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손님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항상 가족이나 가까운 몇몇 친구들하고만 같이 있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어느 쪽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만나러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한번 찾아와 달라고 말하십시오. 만약 그 사람이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을까?'라고 물으면 공연히 자존심 같은 것을 내세우려 하지 마십시오. 그저 '가끔 자네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게 나한테 아주 큰 도움이 되거든' 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도저히 그렇게 솔직한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여러분을 돌봐 주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여러분의 의사를 대신 알리도록 하면 됩니다.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수많은 친구들이 나를 만나러 찾아오기 때문에, 나는 내가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나의 후원회원들, 나의 천사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상당히 규칙적으로 나를 찾아와서 내 몸 상태가 어떤지 물어 보고, 영적인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자기들이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때로는 저녁 식사 거리를 사 가지고 오기도 합니다. 그들은 나와 식사를 같이 하기 위해, 그날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능하면 내 조언이나 충고를 듣기 위해 나를 찾아옵니다. 사실, 우리들 사이에는 수많은 것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나에게서 배우는 것이 많다고 말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의욕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 역시 그들을 통해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들에게서 나는 너무나 많은 에너지와 사랑, 좋은 느낌, 염려 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주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세상과 이어 주는 끈과 같습니다. 그들이 바깥 세상을 내 집안으로 들여오는 덕분에 나는 어느 정도 바깥 세상과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요구를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가족들이 가능한 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요구했을 때. 그들이 거절해도 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나는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지에 대해 민감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 요구를 하기 전에 그에게 병든 부모님은 없는지, 돌봐 줘야 할 아이들은 없는지, 직장에서 힘든 일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정 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그 사람이 이미 고민거리를 한 가득 안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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