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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4호 - 2024.07.31 수요일(음력 : 06.26)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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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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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모든 것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을 막아주는 자연의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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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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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발톱을 깎이다
얼마 전 한 독자 분의 문의가 있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부부의 대화에서 ‘고양이 발톱을 깎이다’가 올바른 표현인가 하는 것이었다.
남편: 산책하러 갈까요?
아내: 네, 고양이 발톱 좀 깎이고요.
이 경우 일반적인 표현은 ‘고양이 발톱을 깎다/깎아 주다’이다. 그런데 요즘 위 대화처럼 ‘깎이다’라는 표현이 새로 쓰이고 있다.
독자 분의 질문은 이것이 ‘맞는’ 표현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우선 표준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국어사전에 ‘깎이다’가 올라 있지만, 이는 “엄마가 딸에게 고양이 발톱을 깎였다”처럼 누군가에게 그 일을 시키는 경우에만 쓰는 말이다. 자신이 직접 고양이 발톱을 깎아 주는 경우 ‘깎이다’는 표준어가 아니다.
다만 이 ‘깎이다’가 어법적으로 엉뚱한 말은 아니다. 우리말에는 유사한 상황에 대해서 ‘(아이의) 머리를 감기다, 발을 씻기다’와 같은 표현이 흔히 존재하고, ‘깎이다’는 이러한 예들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감기다, 씻기다’처럼 ‘깎이다’도 얼마든지 가능한 말이다.
물론 ‘감기다, 씻기다’의 경우 ‘머리를 감다/감아 주다, 발을 씻다/씻어 주다’라고 할 수 없는 반면, ‘깎이다’의 경우 ‘발톱을 깎다/깎아 주다’라고 할 수 있는 차이점은 있다. 그러나 ‘깎다/깎아 주다’가 있다고 해서, ‘깎이다’라는 새로운 표현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법칙은 없다. 더욱이 ‘깎이다’는 ‘깎다/깎아 주다’와 달리 고양이, 아이처럼 스스로 행동할 능력이 부족한 대상에만 쓰이는 고유한 용법이 있기도 하다.
‘깎이다’는 아직 생소한 말이고, 표준어도 아니다. 이 말이 앞으로 널리 쓰이게 될지, 그래서 표준어가 될 수도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소리의 길이
미국의 비타민 제품의 광고 카피에 “Just eat it(그냥 드세요).”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eat’은 [i:t]으로 길게 발음해야 하고 ‘it’은 [it]으로 짧게 발음해야 한다. 또한 좌석을 뜻하는 ‘seat’은 [si:t]로 길게 발음하지만 ‘앉다’를 뜻하는 ‘sit’은 [sit]로 짧게 발음한다. 이처럼 영어에는 단어를 발음할 때 소리의 길이를 짧거나 길게, 서로 달리 발음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말에도 같은 형태의 단어지만 소리의 길이를 달리 발음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눈’을 짧게 발음하면 ‘인체의 시각 기관’이지만 길게 발음하면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체’가 된다. ‘밤’을 짧게 발음하면 ‘해가 져서 어두워진 때부터 다음 날 해가 떠서 밝아지기 전까지의 동안’이지만 길게 발음하면 ‘밤나무의 열매’가 된다. ‘말’을 짧게 발음하면 ‘말과의 포유류’지만 길게 발음하면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목구멍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나타내는 소리’가 된다. ‘광주’를 짧게 발음하면 ‘광주(光州)광역시’이지만 길게 발음하면 ‘경기도에 있는 광주(廣州)시’가 된다. ‘영동’을 짧게 발음하면 ‘강원도에서 대관령 동쪽에 있는 지역[嶺東]’이지만 길게 발음하면 ‘충청북도 영동(永同)군’이 된다. ‘여권’을 짧게 발음하면 ‘여성의 권리[女權]’나 ‘패스포트[旅券]’이지만 길게 발음하면 ‘여당과 여당을 지지하는 세력 안에 드는 사람이나 단체[與圈]’가 된다. ‘경사’를 짧게 발음하면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태나 정도[傾斜]’지만 길게 발음하면 ‘축하할 만한 기쁜 일[慶事]’이 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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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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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가 - 천상병
저쪽 죽음의 섬에는 내 청춘의 무덤도 있다. (니체)
태고적 고요가
바다를 딛고 있는
그곳.
안개 자욱히
석유불처럼 흐르는
그곳.
인적 없고
후미진
그곳.
새 무덤
물결에 씻긴다.
∼∼∼∼∼∼∼∼∼∼∼∼∼∼~~~~~~~~~~~~~~~~~~~~~~~~~~~~~~~~~~~
귀로 - 정지용
포도로 나리는 밤안개에
어깨가 저윽이 무거웁다.
이마에 촉하는 쌍그란 계절의 입술
거리에 등불이 함폭! 눈물 겹구나.
제비도 가고 장미도 숨고
마음은 안으로 상장을 차다.
걸음은 절로 드딜데 드디는 삼십적 분별
영탄도 아닌 불길한 그림자가 길게 누이다.
밤이면 으레 홀로 돌아오는
붉은 술도 부르지않는 적막한 습관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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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판彈(탄) - 김수영
너를 딛고 일어서면
생각하는 것은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나의 가슴속에 허트러진 파편들일 것이다
너의 표피의 원활과 각도에 이기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나의 발을
나는 미워한다
방향은 애정 -
구름은 벌써 나의 머리를 스쳐가고
설움과 과거는
오천만분지 일의 부감도보다도 더
조밀하고 망막하고 까마득하게 사라졌다
생각할 틈도 없이
애정은 절박하고
과거와 미래와 오류와 혈액들이 모두 바쁘다
너는 기류를 안고
나는 근지러운 나의 살을 안고
사성장군이 즐비한 거대한 파아티같은 풍성하고 너그러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에게는 잔이 없다
투명하고 가벼웁고 쇠소리나는 가벼운 잔이 없다
그리고 또하나 지휘편이 없을 뿐이다
정치의 작전이 아닌
애정의 부름을 따라서
네가 떠나가기 전에
나는 나의 조심을 다하여 너의 내부를 살펴볼까
이브의 심장이 아닌 너의 내부에는
「시간은 시간을 먹는 듯이 바쁘기만 하다」는
기계가 아닌 자옥한 안개같은
준엄한 태산같은
시간의 퇴적뿐이 아닐 것이냐
죽음이 싫으면서
너를 딛고 일어서고
시간이 싫으면서
너를 타고 가야 한다
창조를 위하여
방향은 현대 -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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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노래 2 - 이해인
하늘은 높아가고
마음은 깊어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이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있는 친구가 보고싶고
죄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없이
강이 흐르게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시간 아껴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때마다
한 웅큼의 시들을 쏟아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가고
가을은 깊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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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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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 4 편 영원한 자유
제 2 장 자유로 가는 길
3. 세 가지 장애
그러면 생사해탈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화두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깨치면 그만이지만, 그 공부하는 데 가장 방해되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세 가지만 피하면 공부를 좀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돈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돈이 눈에 보이면 공부는 그만입니다. 세상이 시끄럽고 종단이 수난을 겪는 것도 그 근본을 따지고 보면 전부 돈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승려가 타락하고 돈 때문에 출가자가 썩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돈을 독사보다 무서워하고 비상(砒霜)보다 겁을 내야 합니다. 참으로 돈에 끄달리지 않고 돈을 멀리하고 초탈한 그런 사람이면 실제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돈만 보면 모두 거꾸러지고, 돈만 보면 모두 미쳐버립니다. 옛말도 있습니다. '황금흑리심(黃金黑吏心),' 곧 누런 황금이 관리의 마음을 검게 한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내가 보기에는 '황금살승심(黃金殺僧心),' 곧 돈이 수도자의 마음을 다 죽인다고 하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이 돈에 대해 철처하게 끄달리지 않는다면 공부할 분(分)이 좀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돈에 안 끄달릴 사람이 별로 없지요? 어린애들도 돈만 주면 좋아합니다. 내가 꼬마 친구들을 좋아하는데, 노래 불러라 해서 노래를 안 부르다가 돈 주면 그만 노래합니다. 어떤 아이는 아무리 노래를 부르라고 해도 안 부릅니다. "오천원 줄께" 해도 안 합니다. 나중에는 자기 아버지가 만원짜리 한 장을 썩 내주었더니 좋아서 받더니 그만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애미, 애비보다 돈이 최고구먼!"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도를 성취하려면 돈하고는 반대가 되어야 하는데…' 나도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한 번 내게 물어 보십시오
"스님은 돈 얼마나 모아 놓았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둘째는 여자입니다. 여자에 대해서는 여자이고, 여자에 대해서는 남자입니다. 여자는 사실 그렇게 중시할 재료는 못 됩니다. 재료가 못 된다 말입니다. 옛날 어디에서인가 있었던 일입니다. 여자 천 명을 모아 큰 절구통에 넣어서 쿵쿵 찧었습니다. 그러고서 남자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남자가 눈이 하나 멀었더라고 합니다. 어쨌든 도를 성취하려면 여자를 가깝게 하지 말라고 말해 왔습니다. 언젠가 누가 무슨 이야기 끝에, "스님, 우리 비구니를 칭찬 좀 해 주십시오."하던데, 사실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다 칭찬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일찌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같은 장애물이 두 가지만 되어도 성불할 사람 아무도 없다." 어떤 사람은 이러허게 말합니다. "그건 본능이야, 본능! 배고픈데 밥 안 먹고 살 수 있어?" 본능이라도 다릅니다. 밥 안 먹고는 살지 못하지만 여자는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여자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항상 여자를 경계하라고 하시는고?" 원수가 져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도를 성취하려면 반드시 여자를 멀리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성취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명예입니다.
명예, 이름병!
이것은 단수가 높은 것입니다. 돈도 필요없다,여자도 내 앞에서 어른거리지 못한다고 이렇게 말하지만, 그 사람의 내부 심리를 현미경이나 엑스레이 기계로 들여다보면, "내가 이토록 참으로 장한 사람이다, 큰스님이다, 도인이다"하는 이름을 내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고 또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병 가운데서도 재물병, 곧, 돈병과 여자병 이 두 가지 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이름병이라는 것입니다. 계행이 청정하여 돈도 필요없다, 여자도 감히 어른거리지 못한다고하면 천하 제일의 큰스님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큰스님, 큰스님" 하면서 옆에 와서 자꾸 절을 하면 그만 정신이 없어집니다. 여자와 재물은 벗어나도 대접받는 것에서는 벗어나기 참 힘듭니다. 실제로 재물병과 여자병은 결심만 단단히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병에 걸리면 주위에서 남들이 욕이라도 하지만, 이름병에 걸리면 남들이 더 칭찬해 주니, 그럴수록 이름병은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책을 본다든지 하여 말주변이나 늘고 또 참선이라고 좀 해서 법문이라도 하게 되면 그만 거기에 빠져버리는데, 이것도 일종의 명예병입니다. 이리하여 평생이 잘못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아니고 남도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그래서 큰스님 소리 듣고 대접받는 데 정신없다가, 마침내는 부처님이 성취하신 것과 같은 참다운 그런 대자유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이 재물병이나 여자병보다도 명예병이 더 무섭고 고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러니 우리가 서로서로 반성하여 이 세 가지를 완전히 벗어 나서 참으로 출격 대장부가 되어 크게 자유자재한 해탈도를 성취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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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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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담배연기를 바라보라
담배가 금연가에게는 어느 정도 괴로움을 끼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개중에는 담배연기를 참아내는 사람들도 많다. 최근에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어떤 문제를 갖고 있다는 등의 비판적인 목소리가 많이 들리고 있다. 그것이 애연가들에게는 어떤 약점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거꾸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처럼 떠벌이는 일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끽연 이 하나의 약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약점 하나조차 없는 인간을 우리들은 경계해야만 한다. 약점이 없는 인간이란 도대체 신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토록 이성적인 인간은 싫어한다. 그들은 어떤 경우든 냉정하기 때문에 쌀쌀맞은 것이 사실이 아닌가. 재떨이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 보면 그 분위기는 언제나 딱딱하고 서먹서먹하다. 그처럼 지나칠 정도로 말끔한 집에서 인간미를 찾아볼 수가 없다. 허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실로 유쾌하지 않는 방문이 되기 십상이다. 이같이 엄격한 사람들, 감정이 없고 시적인 맛을 모르는 사람들은 담배의 도덕적 이익과 정신적 품격을 결코 음미할 수 없다. 우리 골초들이 공격당하는 것은 예술적 방면이 아니라 도덕적인 부분이다. 그러므로 골초들이여, 당신의 예술적인 체취는 그대로 놓아두자. 다만 사소한 도덕적인 공세를 받아넘기기 위해서 약간의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은 우리들이 담배를 피울 때 평상시보다 더욱 쾌활하고 사교적이며 소탈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말이다. 골초였던 대커리는 이런 노력의 적극적인 실천자였다. 그는 담배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말했던 것이다.
'파이프는 철학자의 입술에서 예지를 끌어내고, 어리석은 자의 입을 다물게 한다. 파이프는 명상적이고 사려 깊으며 상냥하고 소탈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담배 피우는 사람의 손톱은 누렇게 그을려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만 따스하다면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아무튼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명상적이고 사려 깊으며, 상냥하고 소탈한 자리를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그런 낙을 맞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비싼 희생을 치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내 말의 요점은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은 항상 행복하며, 행복은 결국 도덕적 가치의 최고라는 점이다. W.매긴은 이렇게 단언하지 않았던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중 자살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담배의 예술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는 우리 끽연가가 잠시 금연했을 때 무엇을 잃어버리는가를 상상해 보면 금방 깨달을 수 있다. 끽연가는 누구를 막론하고 니코틴 여사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자 하는 어리석고 못난 경우를 경험한다. 하지만 그 공상적인 양심과 싸우다가 결국은 제정신으로 돌아가고 만다. 나도 그런 바보 같은 생각으로 몇 주간 담배를 끓었던 적이 있다. 한데 막바지에 이르자 내 양심은 다시 정도를 찾아가라고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나 스스로를 얼마나 책망했는지 모른다.결국 나는 다시는 사도에 빠지지 않겠노라고 맹세하였다. 또 절대로 니코틴 신전의 경건한 혈족임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어떻게 취할 것인가
술이란 다른 어느 것보다 문학적으로 위대한 공헌을 했다. 또 술은 담배와 절묘한 파트너로서 인간의 창조적인 정신을 일깨워준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음주의 쾌감, 이른바 거나함이란 것은 신비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 여성이 술취한 기분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저는 얼근한 기분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제일 좋고 행복하답니다.' 사실 그런 기분일 때는 의기양양하여 어떤 장애라도 극복할 자신이 생긴다. 감수성도 예민해지고 현실과 공상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는 듯한 예지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런 기분은 곧 해방감이다. 정신의 해방감, 육체의 해방감. 그리하여 그것은 예술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술을 욕심내는 마음은 당연하다. 사람이 어떤 감흥을 갖기 위해서 술과 차를 마시는데, 이 두 가지는 가장 극적인 대비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가장 좋은 표현이 있다. '차는 세상을 버린 사람과 같고 술은 기마무사와도 같다. 술은 아름다운 우정을 위해 있고, 차는 덕 있는 조용한 사람을 위해 있다.' 중국의 한 작가는 음주에 알맞는 심경과 장소를 이렇게 분류해 놓았다. '엄격한 자리에서의 술은 유장하게 마시고,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은 로맨틱하게 마셔라. 병자의 술은 소량이어야 하며, 슬픔의 술은 취할 정도로 마셔라. 봄 술은 정원에서, 여름 술은 들판에서, 가을 술은 쪽배 위에서, 겨울 술은 집에 틀어박혀서, 밤 술은 달빛 아래서 마시는 것이다 좋다.' 또 다른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취하는 데는 때와 장소가 있다. 꽃의 색향과 조화되려면 햇볕 아래서 꽃을 대하고 취해야 하며, 상념을 씻으려면 눈을 향해 취해야 한다. 성공을 기뻐하여 취하는 사람은 그 기분에 화합하여 노래를 한 곡 불러야 하고, 송별연에 임하여 취하는 사람은 이별의 저에 곁들여 한 곡의 음악을 연주하라. 선비가 취하면 수치를 면하기 위해 행동을 삼가야 하며, 군인이 취하면 위용을 높이기 위해 크게 술을 분부하여 위엄을 더해야 한다. 누각 위에서의 잔치는 서늘한 기운을 이용하기 위해 여름이 좋으며, 강물 위에서의 잔치는 의기양양한 자유 감회를 갖기 위해 가을이 좋다.' 술에 대한 여러 가지 예의 범절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비난할 점도 있다. 반면에 칭찬할 점도 있다.
비난할 점이라면 술을 억지로 권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쾌하고 허물없는 기분에서 나오는 것으로 술자리의 활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시끌벅적한 흥취가 술맛을 나게 한다. 한데 이런 분위기에서는 자칫 술 많이 마시기 경쟁으로 치닫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최고의 술자리는 유쾌하고 신나게 마시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얼근하게 취하도록 마시지 않는다면 술을 마시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도도한 즐거움을 갖지 말란 법은 없다. 일자 무식이라도 시흥을 알고 기도를 하지 못해도 신앙이 있으며 술 한 방울 못해도 함께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함께 임하는 사람들의 어울리고자 하는 마음일 뿐이다.
배고프지 말라, 배부르지 말라
청명한 아침 잠자리 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대체 이 세상에서 참으로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항상 나에게는 음식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의 판단으로는 집안에서 좋은 것을 먹느냐 먹지 못하느냐가 사람의 어질고 악함을 아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현대의 생활은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는 까닭에 요리나 음식문제에 무신경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패스트푸드나 통조림으로 식사를 때우곤 하는 것이다. 그것을 먹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먹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모습이 아닌가. 남에게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기 전에 우선 자신에게 그렇게 대해야만 한다. 아무리 일을 통하여 자부심을 얻고 세상에 어떤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몸에 번개처럼 밥을 밀어 넣는 행위는 이해할 수가 없다. 옛날에 공자는 요리가 서툴다고 하여 아내와 이혼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요즈음의 아내들은 대부분 공자에게 이혼장을 받아든 상태가 아닐까 한다.
공자의 식사에 대한 주문은 이랬다.
'쌀은 아주 새하얀 것이어야 하고, 다진 고기는 잘디잘게 썰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는 조건에 부합되지 않았을 경우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이런 까다로운 남편의 입맛에도 그 부인은 견뎌냈었다. 언젠가 그녀가 하루는 신선한 재료가 떨어져서 아들을 시장에 보내 술과 얼린 고기를 사오게 했다. 한 끼니를 인스턴트 식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자가 또 투정을 부렸다.
'난 집에서 담근 술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가게에서 사온 고기도 먹지 않겠다.'
이쯤 되면 어떤 부인이라도 도망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공자가 아내에게 가혹한 행동을 보인 증거는 "논어"의 '향당' 제10편 가운데 남아 있다. 음식은 사람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제 일의 처방이다. 그것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행동이 시작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병의 원인과 결과가 음식에 있다. 중국의 옛 의학자인 손사막은 음식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참된 의사는 먼저 병의 원인을 찾아낸다. 그 다음에서 우선 음식물로 치료하려고 한다. 이것이 실패하면 비로소 약의 처방을 쓴다.' 원나라의 어떤 명의는 또 이러한 음식의 효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건강에 유의하는 사람은 적게 먹고, 걱정을 없애고, 욕망을 줄이고, 감정을 억제하고, 체력에 주의하고, 말을 적게 하고, 성패를 경시하고, 슬픔과 고통에 초연하고, 어리석은 야망을 몰아내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피하고, 시력과 청력을 안정시키고, 내장의 섭생에 충실하라. 정신을 고달프게 하고 영혼을 괴롭히는 일이 없다면 어찌 병이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심신을 수양하고자 하는 자는 배가 고플 때만 먹고 결코 배를 채워서는 안 된다. 또 갈증이 날 때만 물을 마시되 배불리 마셔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을 두고 조금씩 먹어야 하고, 너무 많은 양을 쉴 새없이 먹어서는 안 된다. 배부를 때에 약간 배고픔을 느끼고, 배고플 때에 약간 배부름을 느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배를 잔뜩 채우면 폐를 해치고 공복은 정력 활동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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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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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7부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서기 81년 9월 14일~ 96년 9월 18일)
행운의 여신
참으로 운명이란 무슨 계기로 바뀔지 모르는 법이다. 인간의 행운과 불운을 행운의 여신이 변덕을 부린 결과로 여기고 싶어하는 인간의 심사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30대 중반에 불과한 트라야누스가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 발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치하에서 유대 전쟁을 치른 군단장이었다. 그러므로 트라야누스는 베시파시아누스처럼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진급한 군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기사계급 출신이라도 본국 이탈리아 태생인 로마인이다. 반면에 트라야누스는, 아버지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배려로 원로원 의원이 되고 귀족 칭호까지 받은 신분이긴 하지만 에스파냐 속주 출신이었다. 이 트라야누스가 9년 뒤에는 네르바 황제의 양자가 되어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가 되었는데, 평온한 에스파냐에서 1개 군단을 지휘하며 세월을 보냈다면 아무리 현명한 네르바 황제라도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속주 출신이 황제가 되면 기존 지배층의 반발을 살게 분명하다. 트라야누스의 이 약점을 보완해준 것이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으로서 9년 동안 쌓은 업적이었다. 로마군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 군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최전방에서 지휘를 맡는 것은 승진이다. 같은 총독이라도, 위험한 전선에서 근무하는 것과 안전한 후방에서 근무하는 것은 무게가 전혀 다르다. 30대 중반에 이 요직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 트라야누스를 황제의 길로 인도한 셈이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보다 두 살 위인 도미티아누스에게는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보내지 않았다. 다키아족과의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것을 활용하지는 못했다. 주변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평화협정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수도 빈,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는 모두 로마 군단기지에서 유래한 도시들이다. 빈에서 부다페스트까지 동쪽으로 흘러온 도나우 강은, 거기서 베오그라드까지는 거의 정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가,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흑해로 흘러든다. 고대 로마인은 시대와 무관한 지리적 거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시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도나우 강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 관점에 따르면 빈까지가 도나우 강 상류, 빈에서 베오그라드까지가 중류, 베오그라드에서 흑해까지가 하류다. 서기 1세기 말의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는 이 지역에 두 개였던 속주를 네 개로 재편성한다. 도나우 강 상류인 서쪽에 있는 판노니아 속주를 '가까운 판노니아'(판노니아 수페리오르)와 '먼 판노니아'(판노니아 인페리오르)로 나누고 ,하류인 동쪽에 있는 모에시아 속주를 '가까운 모에시아'(모에시아 수페리오르)와 '먼 모에시아'(모에시아 수페리오르)로 분할한 것이다, 방위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던 게 분명하다. 로마인들이 로마 제국의 존속은 도나우 강 중류에서 하류에 걸친 이 방위선을 지키는 데 달려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게 서기 1세기 말이었다. 도나우 강 상류 지역은 라인 강 연안의 본과 도나우 강 연안의 레겐스부르크를 잇는 '게르마니아 방벽'이 건설되면서 철벽 같은 군사적 국경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인은 카이사르가 시작하고 티베리우스가 정착시킨 정책에 따라, 아무리 국경을 철벽으로 만들더라도 국경 안팎을 단절시키지 않고 교류를 허용했다. 아니, 사람과 물자의 교류는 오히려 장려했다. 방위선 밖의 부족들에게도 로마에 병력을 제공하거나 물자를 교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로마와 우호관계가 성립되면, 우방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해도 최소한 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로마는 국경밖에도 우호적인 부족을 갖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있었다. 이른바 '분리하여 지배하라'는 정책이다. 따라서 국경 밖에 사는 부족들의 존재 자체는 위협이 아니었다. 그런 부족들이 단결하는 게 위협이었다. 다키아족이 로마에 위협적인 존재가 된 것은 족장이 왕을 자칭했을 만큼 주변의 약소 부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다키아족의 세력은 유능한 지도자 데케발루스를 얻은 덕분에 더욱 강해진다. 데케발루스는 자기 부족의 거주지인 도나우 강 하류만이 아니라 중류 지역에 사는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까지 합병하여 도나우 강 북쪽 일대에 왕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과 야지게스족은 로마에 병력을 제공하고 물자를 교역하면서 로마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부족들이다. 빈 서쪽에서 베오그라드에 이르는 도나우 강 북쪽에 사는 이들 부족은 게르만계에 속했다, 이들 세 부족이 개별적으로나마 로마에 반기를 들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로마가 다키아에 참패당한 뒤가 아니라 대승을 거두어 설욕한 뒤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같은 도나우 강 북쪽에 사는 다키아족의 압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했기 떄문일까. 어쨌든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서 다키아에 대승을 거둔 로마는 도나우 강 중류 지역에서 새로운 적과 직면하게 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중류와 하류에서 여러 적과 동시에 맞붙는 것은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첫번째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도 참패를 맛본 뒤에는 열세를 만회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여기서 로마와 다키아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다키아와 평화협정을 맺으면 로마는 중류의 세 부족에 대한 반격에 전념할 수 있고, 대국 로마를 무력이 아닌 외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아넣은 다키아는 도나우 강 북쪽 전역에서 기세를 높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뒤'기록말살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확실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로마와 다키아의 평화협정은 서기 94년 무렵에 맺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부터 도나우 강 중류 지역에서 로마군의 반격이 적극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도나우 강 중류 지역에서 로마군의 반격이 적극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 왕의 대리인으로 로마를 방문한 왕자를 우호국 군주처럼 대우했다. 평화협정 내용도 '기록말살형'때문에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려져 있다, 로마가 다키아에 참패했을 당시 포로가 된 로마 병사를 돌려받는 대가로, 포로 1인당 1년에 2아시스를 다키아 쪽에 지불한다는 조항이다. 포로가 몇 명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1인당 1년에 2아시스를 지불하는 것도 영구적인 것인지 아니면 기한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도미티아누스로서는 다키아족의 본거지까지 쳐들어갈 가능성이 멀어진 이상, 본거지에 붙잡혀 있는 로마 병사를 구해내려면 돈으로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2아시스는 공중목욕탕 입장료의 네 배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밀가루 500그램 값에 불과하다. 병사 연봉을 기준으로 하면 450분의1이다. 이만한 비용으로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 대한 걱정을 접을 수 있다면 값싼 대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협약이 로마인들의 비난을 사게 되었다 ,로마인은 1개 군단 6천 명이 전멸한 것도 참아냈다. 그러나 평화를 돈으로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돈이 아무리 상징적인 액수에 불과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패자가 승자에게 바치는 연공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평화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얻을 가티가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제정중기에 접어들고 있는 이 시대에도 로마인들에게는 새삼 생각해볼 필요도 없을 만큼 분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협정이 체결된 직후의 몇 년 동안은 자존심을 희생하여 얻은 이 평화가 큰 효력을 발휘했다. 다키아 왕은 협정을 지켰고 로마둔은 도나우 강 북쪽까지 진격하여, 오랫동안 로마와 우호관계에 있었으면서도 하필이면 이 시기에 로마 영토를 침범한 세 부족을 철저히 응징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도미티아누스는 자주 전선을 시찰하고, 군단기지를 강화하려고 애썼다. 도나우 강 남쪽에 배치된 군단기지가 석조 건물이 늘어선 도시로 변모한 것은 이 시기였다. 우호관계가 된 다키아족의 거주지와 마주보고 있는 도나우 강 하류에서도 군단기지를 도시화하는 작업이 계속 추진되었다 ,평화협정을 맺은 상대에 대해서도 방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로마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르티아나 아르메니아와 우호관계가 지속되고 있는데도 그 국경에 군단을 계속 배치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원로원이나 시민에게 불만을 살 줄 뻔히 알면서 굳이 다키아족과 평화협정을 맺은 것은 최고 통치자로서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하나의 '계측기'
철학은 배웠지만 역사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나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나 고대 로마에 대해서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가 쓰는 로마사는 학자가 쓰는 로마사가 아니라 작가가 쓰는 로마사다. 그렇긴 해도, 브레히트(독일의 작가)나 유르스나르(프랑스의 작가)의 작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작가라고 해서 제멋대로 쓸 수는 없고, 작품 소재로 선택한 이상 거기에 대해 조사하거나 연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조사와 연구의 필요성은 학자나 작가나 별차이가 없지만, 학자는 사료를 믿는 경향이 강하지만 작가는 사료가 있어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적 '증거'는 크게 역사 기술과 고고학적 성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역사 기술은 본래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남긴 기록이고, 고고학적 성과도 현재까지 발굴된 유물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믿을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이다. 역사 기술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저술한 사람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면서 한번 걸러진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고고학적 성과는... 예컨대 도시 로마를 보기로 들면 충분할 것이다. 현대의 로마는 고대 로마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로마 제국 시대에 '세계의 수도'였던 고대 로마의 전모를 철저히 밝혀내고 싶으면 전체를 발굴할 수밖에 없다. 폼페이는 매몰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이주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발굴하여 고대 도시를 실상 그대로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다, 폼페이가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적 증거나 사료는 불확실성을 갖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여기에 바탕을 두지 않고는 역사를 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과 의심을 품으면서 참고하는 것은 역시 다르다. 이 차이는 인간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차이가 아닐까.
그러면 학자가 아닌 나는 인간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로마사를 쓰면서 내가 판단기준으로 삼은 것이 하나 있다. 최고 통치자인 황제가 행한 일이 공동체(레스 푸블리카), 즉 국가에 이로웠느냐 해로웠느냐를 판정할 때. 나는 타키투스를 비롯한 역사가들의 평가보다는 그 황제의 후임자들이 그의 정책이나 사업을 계승했느냐 아니냐를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이'계측기'를 가지고 평가해보면, 로마 역사상 최고의 통치자는 뭐니뭐니 해도 역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다. 로마 제국은 결국 이 두 사람이 만든 것이다. 로마인들도 이 두 사람만 계속 '신격'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들도 나와 동감이었던 게 분명하다.그리고 이들을 뒤이은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도 타키투스나 수에토니우스한테는 나쁜 황제로 낙인이 찍혔지만, 내 '계측기'에 따른 평가에서는 상당히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악명높은 로마 황제의 전형인 네로는 어떨까. 파르티아와 항구적인 우호관계가 수립된 것은 코르불로의 훌륭한 준비 작업 덕택이긴 하지만, 코르블로에게 지시를 내린 것은 네로 황제다. 그 결과, 당시의 양대 강국의 우호관계는 무려 반 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그 관계를 깬 것은 파르티아가 아니라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였다. 파르티아와 관계가 좋았던 반 세기 동안 제위에 오른 황제는 내전 기간의 세 사람을 제외하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다. 이들은 모두 네로가 성립시킨 평화협정을 그대로 지켰다. 그리고 공격형 황제였던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수비형 황제인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우스 피우스는 네로의 외교 노선을 계승하여 또다시 반 세기 동안 파르티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외교면에서는 네로의 공적이 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네로의 '도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 건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 사업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해 있던 네로가 수도 로마의 도심에 그리스식 아르카디아. 즉 수목이 울창한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해 착수한 것이다. 오늘날의 환경보호론자가 적극적으로 지지할 게 분명한 좋은 동기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좋은 동기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카이사르처럼 "나쁜 결과로 끝난 일도 처음에는 좋은 동기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네로가 꿈꾸었던 '푸른 도심'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콜로세움을 세우고 티투스가 공중목욕탕을 짓고 트라야누스가 그보다 더 큰 공중목욕탕을 짓고 하드리아누스가 신전을 세우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 대도시의 도심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 하는 점에서 네로와 다른 로마인들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도심은 그곳에 모인 시민들이 함께 하는 일에 활용되어야 한다는 로마식 사고방식을 기준으로 하면, 그런 로마인의 심정에 어긋나는 일을 단행한 네로는 최고 통치자로서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네로와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업적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그의 업적은 모두 후임 황제들에게 계승되었다. 법을 집행할 때의 지나친 엄격함만 다소 누그러졌을 뿐이다. 미성년자 매춘 금지법도 그후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하지만 어떤 업적보다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방위선을 연결하여 국방의 기능성을 향상시킨 '리메스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 방벽)일 것이다. 타키투스 같은 문인은 이것을 무시했지만, 도미티아누스의 후임 황제들 가운데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를 보강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피아 가도와 마찬가지로, 건설의도가 분명하고 건설 장소가 올바로 선택되기만 한다면 후임자들은 그것을 보강하거나 유지 보수하는 일만 하면 된다.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은 도미티아누스의 최대업적이라 해도 좋다. 그렇다면 다키아족과의 평화협정은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타당할까. 서기 96년에 사망한 도미티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것은 네르바다. 하지만 네르바는 1년도 지나기 전에 크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아서 후계자를 명확히 한다. 네르바가 죽고 트라야누스가 제위에 오른 것은 서기 98년이다. 크라야누스는 황제가 된 뒤에도 사령관 시절의 임지인 고지 게르마니아('리메스 게르마니쿠스'도 포함된다)에 남아서 전쟁 준비에 몰두한다. 그리하여 서기 101년에 시작된 것이 역사상 유명한 '다키아 전쟁'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성립시킨 다키아족과의 평화협정은 그가 죽은 지 5년도 지나기 전에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휴짓조각이 되어버린 셈이다.
로마인들은 역시 돈을 주고 얻은 평화를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키아족은 로마에 지고도 위세를 올리고 있다"는 타키투스의 개탄이 당시 로마인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두면, 역사가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보다 네댓 살 젊었다. 둘은 말뜻 그대로 동시대인이었다. 도미티아누스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초리가 차가워졌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 자신은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황제가 가진 권력의 절대적 우월성을 믿었는지도 모른다. 이 점도 그렇지만, 고독을 사랑하고 폐쇄적인 성격이었다는 점에서도 그가 본보기로 삼은 티베리우스와 비슷하다. 티베리우스도 그랬지만, 도미티아누스도 제국 통치의 최고 책임자로서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은 누구하고도 의논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그중 하나는 교육 개혁이었다. 이것도 '게르마니아 방벽'과 마찬가지로 후임 황제들에게 계승된 정책이다. 아니,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계승되었으니까. '게르마니아 방벽' 보다 더 긴 생명을 누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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