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39호 - 2024.07.25 목요일(음력 : 06.20)
angelo@nownforever.co.kr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아무리 괴로운 시간이라 해도 한 시간은 60분을 넘지 않는다. - 모리스 맨덜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온데간데없다
감쪽같이 자취를 감춰서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을 가리킬 때 쓸 수 있는 표현으로 ‘온데간데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온데간데없다’는 어떻게 띄어쓰기를 해야 할까. ‘데’가 장소를 뜻하는 의존명사이기 때문에 ‘온 데 간 데 없다’처럼 띄어 써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온데간데없다’는 한 단어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말이기 때문에 모든 음절을 붙여서 ‘온데간데없다’처럼 붙여 써야 한다. ‘온데간데없다’가 원래는 ‘온 데 간 데 없다’처럼 어구(語句)의 형식으로 띄어서 썼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 어구의 구성이 하나의 어휘처럼 강력한 결합력을 생성하게 되었고 언중들도 이를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기에 이르면서 이제는 한 단어로 사전에 등재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보잘것없다’가 있다. ‘보잘것없다’도 원래는 관형형 어미와 명사는 띄어 쓰는 원칙에 따라 ‘보잘 것 없다’로 써야 하지만 언중들이 이를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게 되면서 이제는 한 단어로 사전에 등재되었고 따라서 모든 음절을 붙여서 ‘보잘것없다’로 써야 한다. ‘첫날밤’의 경우도 ‘첫’이 관형사이고 ‘날’과 ‘밤’이 모두 명사이기 때문에 ‘첫 날 밤’으로 모두 띄어 써야 하지만 ‘첫날밤’이 ‘결혼한 신랑과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 자는 밤’을 뜻하는 한 단어이기 때문에 붙여 써야 한다.
‘큰코다치다’도 ‘크게 봉변을 당하거나 무안을 당하다’는 뜻의 한 단어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고 ‘가는귀먹다’는 ‘작은 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귀가 조금 먹다’는 뜻의 한 단어이며 ‘이제나저제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을 때 쓰는 한 단어이므로 모두 음절을 붙여 써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소개하다’와 ‘소개시키다’는 뜻이 다르다. 그런데 이 둘을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소개시키다’는 ‘소개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나는 아내가 될 사람을 어머니에게 소개시키고 선물꾸러미를 내밀었다.” 어느 소설에서 따온 문장인데, 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나의 아내가 될 사람을 누군가로 하여금 어머니에게 소개하게 하고 나는 선물꾸러미만 내밀었다’는 뜻이 된다. 남을 시켜 아내될 사람을 소개하다니, 민망한 일이다. ‘소개시키고’를 ‘소개하고’로 고쳐야 내가 직접 소개하고 선물도 드린 것이 된다.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제삼자가 아닌, 이 말을 들은 사람이 직접 소개를 해 줄 것을 원하는 것이라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줘.”라고 해야 한다.
‘-하다’를 써서 그대로 뜻이 통하면 ‘-시키다’를 쓸 필요가 없다. “그는 마음먹은 대로 성주의 모습을 수천 조각으로 나눌 수도 있고 다시 결합시킬 수도 있었다. 어느 한 부분을 실물보다 크게 확대시킬 수도 있었고 작게 축소시킬 수도 있었다.” 이 예도 어느 소설에서 따온 것인데, 여기서 ‘결합시킬, 확대시킬, 축소시킬’은 각각 ‘결합할, 확대할, 축소할’로 바꾸어도 원뜻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럴 때는 ‘-하다’를 쓰는 것이 좋다.
때로는 ‘-시키다’를 쓸 자리에 ‘-하다’를 잘못 쓰는 경우도 있다. 서비스센터 같은 곳에 가면 “손님, 그 신청서는 2번 창구에서 접수하시면 됩니다.”와 같은 말을 듣곤 하는데, 이때는 ‘접수시키시면’이라고 해야 맞다. 신청서를 받는, 즉 접수하는 사람은 창구 직원이기 때문이다. 만약 ‘접수하다’를 그대로 쓰고 싶다면, “손님, 그 신청서는 2번 창구에서 접수합니다.”라고 하면 된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
|
시나눔 → 우리시
|
|
|
간의 반란 - 천상병
60 먹은 노인과 마주앉았다.
걱정할 거 없네
그러면 어쩌지요?
될 대로 될 걸세
보지도 못한 내 간이
괘씸하게도 구테타를 일으켰다.
그 쪼무레기가 뭘 할까마는
아직도 살고픈 목숨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원래 구테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수습을
늙은 의사에게 묻는데,
대책이라고는 시간 따름인가!
∼∼∼∼∼∼∼∼∼∼∼∼∼∼
난초 - 정지용
난초닢은
차라리 수묵색.
난초닢에
엷은 안개와 꿈이 오다.
난초닢은
한밤에 여는 다문 입술이 있다.
난초닢은
별빛에 눈떴다 돌아 눕다.
난초닢은
드러난 팔구비를 어쨔지 못한다.
난초닢에
적은 밤이 오다.
난초닢은
칩다.
~~~~~~~~~~~~~~~~~~~
거리 1 - 김수영
오래간만에 거리에 나와보니
나의 눈을 흡수하는 모든 물건
그 중에도
빈 사무실에 놓인 무심한
집물 이것저것
누가 찾아오지나 않을까 망설이면서
앉아있는 마음
여기는 도회의 중심지
고개를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태연하다
- 일은 나를 부르는 듯이
내가 일 우에 앉아있는 듯이
그러나 필경 내가 일을 끌고 가는 것이다
일을 끌고 가는 것은 나다
헌 옷과 낡은 구두가 그리 모양수통하지 않다 느끼면서
나는 옛날에 죽은 친구를
잠시 생각한다
벽 우에 걸어놓은 지도가
한없이 푸르다
이 푸른 바다와 산과 들 우에
화려한 태양이 날개를 펴고 걸어가는 것이다
구름도 필요없고
항구가 없어도 아쉽지 않은
내가 바로 바라다보는
저 허연 석회천장 -
저것도
꿈이 아닌 꿈을 가리키는
내일의 지도다
스으라여
너는 이 세상을 점으로 가리켰지만
나는
나의 눈을 찌르는 이 따가운 가옥과
집물과 사람들의 음성과 거리의 소리들을
커다란 해양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조고마한 물방울로
그려보려 하는데
차리리 어떠할까
- 이것은 구차한 선비의 보잘것없는 일일 것인가.
<1955. 3. 10>
|
|
독서실 → 철학
|
|
|
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 3 편 영혼과 윤회
제 2 장 윤회는 있다
3. 연령역행
2) 전생요법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정신 상태를 세 가지 단계로 나눕니다. 우리가 모여서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의식상태입니다. 의식상태 안에 잠재의식이 있고 잠재의식 속에 무의식상태가 있습니다. 무의식상태는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입니다. 프로이드 Sigmund Freud가 잠재의식은 웬만큼 연구하여 발표하였지만, 무의식에 대해서는 뚜렷한 연구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 무의식 상태에 대해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영국의 캐논 Sir Alexander Cannon 박사입니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전생조사에 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영혼도 있을 수 없고, 윤회도 없다고 철두철미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최면술을 이용한 무의식 상태에서 전생회귀를 시켜보니 사람들에게서 전생이 나타나는 경우를 자주 대하게 되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곧 연령역행을 통하여 열살, 한살, 출생이전으로 역행시키면 때로는 저 로마시대로까지 역행되어 전생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실험 대상자들이 한 말을 역사의 기록과 대조하여 조사해 보면 모두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1,382명에 대한 전생 자료를 수집하여 1952년에 [잠재력 The Power Within]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을 '캐논 보고서'라고도 하는데, 이 캐논 보고서에 의하면, 병이 들어서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 않는 경우에 전생회귀를 통하여 조사를 해보면 그런 병들은 전생에서 넘어온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전생에서의 발병 원인에 의거해서 치료함으로써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전생요법'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만 보면 겁을 냅니다. 바다를 구경한 적도 없고 큰 강옆에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물만 보면 겁을 내는데 아무리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생회귀를 시켜보니 그는 전생에 지중해를 내왕하는 큰 상선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어서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닷물 속으로 던져져서 빠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러니 금생에서도 물만 보면 겁을 내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밝힌 뒤에 이 원인에 의거해서 치료를 하니 그의 병이 나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높은 계단을 무서워하며 오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보니 그는 전생에 중국의 장군이었는데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곳만보면 겁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캐논 보고서의 이런 사례들에 의거해서 학자들이 전생요법을 개발하여 요즈음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1977년 10월 3일자 타임Time 지에 보면 이에 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잡지에서 자신있게 보도할 때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전생이 있다는 것은 물론이고, 병을 치료하는 한 방법으로서 전생요법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는데도 전생과 윤회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전생이 있고 윤회를 한다고 할 때 어떤 법칙에서 윤회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과연 내가 원하기만 하면 마음대로 김 씨가 되고 남자가 되고 할 수 있는가? 캐논보고서에서 살펴 보면 그것은 순전히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법칙에 의한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인과법칙이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입니다. 콩심은 데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입니다. 착한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원인에는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긴다 이 말입니다. 이제 전생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 사람이 전생에 착한 사람이었는지, 악한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서 그 사람의 금생의 생활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비교해 봅니다. 전생에 악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불행한 사람이고 전생에 착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받는 그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하는 그것이다.
欲知前生事 (욕지전생사)
今生受者是 (금생수자지)
欲知來生事 (욕지래생사)
今生作者是 (금생작자시)
전생에 내가 착한 사람이었나 악한 사람이었나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받는 것, 곧, 지금 내가 행복한 사람이냐 불행한 사람이냐를 살펴볼 것이며 내생에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 불행하게 살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지금 자신의 하는 일을 보면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는 이 인과(因果)를 인도말인 카르마 Karma라고 합니다. 본디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이라는 뜻이 담긴 이 말은 이제 세계적인 학술용어가 되었습니다.
4. 전생투시(前生透視)
인과 문제에 대해 가장 큰 업적을 쌓은 사람은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Edgar Cayce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전기(傳記)도 많이 나와 있는데 사람들은 그를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기적인'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행하는 기적은 이런 것입니다. 남의 병을 진찰하는데 환자의 주소와 이름만 가르쳐 주면 수천리나 멀리 떨어져있어도 그 사람의 병을 모두 진찰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찰하여 처방을 내고 병을 치료 해주면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치료한 사람은 무려 3 만명이 넘습니다. 그는 미국 뉴욕에 앉아서 영국 런던에 있는 귀족들을 진찰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의 로마에 있는 사람들도 진찰할 수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구가 영국 런던에 갔는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케이시에게 물어봅니다. 그의 답을 듣고서 바로 런던에 전화를 해보았더니 케이시의 말이 모두 맞았습니다. 이런 신기한 투시력을 가진 케이시가 병을 진찰하다 보니 병이 전생에서 넘어오는 것이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전생을 꿰뚫어보는 힘이 있어 환자의 전생에서 병의 원인을 찾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교도였습니다. 예수교에는 전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종교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병을 치료하는 것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학자들이 종교와 학문과는 다르다고 그를 설득하여 이것을 학문적으로 끝까지 조사해 보자고 의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병을 치료하는 것은 그만두고, 전생 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500명의 전생을 조사하였습니다. 그의 죽음(1947년)뒤에도 버지니아 비치 Virginia Beach에서는 그의 원거리 진찰과 전생투시에 대한 수많은 기록을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며 많은 책들이 발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능력의 비밀]과 [윤회의 비밀], 이 두 권은 공산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에드가 케이시의 전생투시에 의해 전생과 금생과의 인과를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낳고 사는 부부인데도 그 사이가 무척 나빠서 그전생을 알아보니 서로가 원한이 맺힌 사이였습니다. 거꾸로 내외간에 잘 지내는 사람을 알아보니 전생에 아버지와 딸 관계이거나 혹은 어머니와 아들 관계였습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하겠지만 우리들이 몰라서 그렇지 본래 인과란 그렇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숙명통(宿命通 ; 전생의 일을 환히 아는 능력)을 하여 전생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다만 우리들이 업장은 두텁고 눈이 어두워 이해가 가지 않으니 곤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때에 현대의과학자들이 연구한 전생과 윤회 및 인과에 대한 좋은 자료를 소개하면 부처님 말씀을 믿고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은 난장이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알아보니 부처님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아만이 많아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면 내생에는 키 작은 과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남을 올려다보아야하고 남은 자기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와 인과는 현대의 과학적 자료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대소승의 천경만론(千經萬論) 가운데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믿으면 그만이지, 캐논이든 스티븐슨이든 그런 과학자가 무엇이라고 그들이 수집한 자료를 인용하여 새로이 윤회를 설명하려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운허(耘虛)스님은 올해 연세가 여든아홉입니다. '운허스님'하면 전국적으로 다 아는 큰스님 아닙니까? 한글 대장경 역경 사업을 주관하신 데에다, 학식으로나 덕행으로나 두루 존경받는 어른입니다. 그 스님께서 몇 년 전에 백련암에 오셨는데,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내가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경전에 대해 박식하시고 역경 사업에서도 큰일을 하시는 데, 그러면 전생을 믿으십니까?"
"허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안 믿을 수 있습니까?"
"안 믿을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실 것이아니라, 실제로 확실히 믿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글쎄요, 부처님 말씀에 분명히 전생이 있다고 하셨으니 믿기는 믿지만, 명확하게 이해는 되지 않습니다."
경전에 대해 그렇게 뛰어난 학식을 지니고 있고 수행도 잘하시는 분이 '믿기는 믿지만 명확하게 이해는 안 된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실 수있는 것은 양심입니다. 그래서 스님께 [사자와의 대화]라는 책을 드리며 한번 읽어보시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 대학생 수련대회 때 대학생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봉은사(奉恩寺)의 운허 큰스님께서 법문(法門) 때에 하시는 말씀이 해인사에 가서 [사자와의 대화]라는 책을 얻어와서 읽어보니 얼마나 좋은지 여러 차례 권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학자의 양심입니다. 운허스님은 나보다 스무살이나 더 많은 분입니다. 그런 점잖은 스님이 아니라면 내가 대중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분명히 윤회와 전생을 말씀하셔서 믿기는 믿지만 이해는 가지 않았는데, 브라이드 머피 사건의 전생 기록을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 학생들을 모아놓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뒤에 스님을 다시 만났을 때 직접 물어보았더니 과연'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시에는 잘 받아들여 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 보기로 근대 천체물리학에서 가장 중대하고도 큰 발견인 지동설(地動說)이 처음 주창되었을 때를 들 수 있습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이 나오기 전까지는, 지구는 고정되어 가만히 있고 해가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하는 천동설(天動說)이 기독교 교리로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 Copernicns가 지동설을 주장하자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땅이 움직이다니, 그러면 물이 모두 엎질러질 것 아닌가?"
"사람이 거꾸로 허공 속으로 떨어져버릴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이런저런 의심을 품고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반박 하였습니다.무엇보다도 지동설은 그때까지의 기독교 교리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는데, 가장 먼저 희생당한 사람은 후스Huss라는 종교개혁가였습니다. 그 무렵에 천주교에서 가장 큰 신학자이면서 또한 과학자요 철학자였던 브루노Bruno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도 지동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처음에 지동설을 주장하다, 사형에 처한다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자기의 주장을 꺾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용기있는 다른 학자들은 그래도 그것을 주장 하였으며, 브루노도 또한 지동설을 끝까지 주장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교황청으로서는 큰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주교의 대표적인 성직자가 지동설을 주장하고 나서니 큰일이 아닐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브루노를 불러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지동설을 버리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랬으나 브루노는 변함없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분형(焚刑)이다 !"
"아무리 분형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지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결국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나무십자가에 매달려 불에 태워 죽이는 분형(焚刑)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도 그의 사람됨이 훌륭하여 사람들은 그를 죽이기가 아까왔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지동설만 취소하면 살려주겠노라고 몇번이나 권유하였지만, 그는 끝끝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분형에 처하는 날, 나무 십자가에 붙들어매어 놓고 불을 붙였습니다. 발 밑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을때 브루노에게 십자가를 들이대며 말했습니다.
"회개하라 ! 지동설을 취소하면 살려줄 터이다."
이에 브루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
브루노는 결국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지동설은 타 죽지 않고 뒤에 과학적으로 증명됨으로써 영구히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새로운 주장이나 이론은, 아무리 옳은 것이어도, 당대에 널리 이해받지 못하여 박해도 받고 죽기도 하고 바보 취급을 당하기도 하는 둥 온갖 수모을 받기 마련인 것입니다. 불교의 윤회설도 도를 닦아 숙명통을 얻기 전에는 전생이 있음을 우리 중생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행히도 요즈음에 정신과학이나 초심리학 같은 분야에서 연구가 진일보함에 따라 여러 방면에서 증명되고 있으니, 보기를 들면, 첫째가 전생기억으로 스티븐슨 씨가 무려 2,000건 이상의 사례를 발표하였고, 둘째는 전생회귀로 브록샴테이프나 캐논 보고서가 그것이며, 셋째는 전생투시로 에드가 케이시에게서 볼 수 있는데, 이들을 통하여 우리는 윤회에 대해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생이 판명됨으로써, 그것을 금생과 맞추어 보면, 인과가 있는지 없는지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전생에 지은 그대로 금생에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에드가 케이시도 2,500명의 사례를 조사해 보았더니 전생과 금생이 인과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니 어떻게 인과(因果)를 부정하겠습니까?
이리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전생이 있다. 윤회가 있다, 인과가 있다 하는 것이 정신과학의 발달로 객관적인 사실로서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이 우주의 진리를 다 깨달은 부처님께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캐논이나 케이시 같은 과학자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의 연구결과를 보기로 이야기한 것은, 부처님께서 이미 삼천여 년 전에 모두 말씀하신 것인데, 현대과학이 이제야 그것에 가까이 오고 있음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제 문제는 영혼이 있고, 인과에 의해 윤회를 한다고 하니 어떻게해야 할 것인가, 이대로 받고 말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잘못했으니 금생에 받아야 할까? 그것이야 당연하지요. 그러면 내생에는 어떻게 될까? 그것이야 뻔하지, 내생에는 불행하게 되지. 아무리 착하게 하려 해도 자꾸 남을 해치게 되고 또 그것을 받아야 할테니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과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도둑질하고, 살인도 하고, 거짓을 일삼고 등등으로 온갖 짓을 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예사입니다. 그러나 인과가 있음을 확실히 알면 죄 지을 수없는 것입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 불교의 근본 목표는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영원토록 영원토록 계속해서 윤회를 하여 영원토록 상주불멸인데, 불교가 무슨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물을지고 모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필요한 것입니다.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윤회를 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이란 악업은 많이 지어도 선업은 많이 쌓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어 업을 짓고, 윤회를 하고, 업을짓고, 고(苦)를 받고 하지만, 그러나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법을 따라서 수도를 하면 결국에는 자성(自性)을 깨쳐서 생사해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윤회도, 인과도 모두 벗어나 대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스님, 불교에서는 윤회가 있다고 하는데, 윤회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왜?"
"죽고 나면 끝이라고 하면 무엇이든 해서 우선 편하게 살겠는데, 내생이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니, 겁이 나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있어야지요?"
"글쎄, 나도 인과가 없고 내생이 없었으면 좋겠어. 아무리 잘한다고 애써도 잘못하는 것이 더 많을 터이니, 그리하여 내생에 고를 더 받을 터이니, 인과가 없으면 좋겠어. 그런데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내생이 없으면 좋겠다고 말한다고 없어질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해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게 할 수가 있을까? 그럴 수가 없지."
지금까지 영혼이 있다, 윤회가 있다, 인과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으니, 이제부터는 해탈의 길, 대자유의 길, 성불(成佛)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
|
|
독서실 → 수필
|
|
|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인간임을 자랑스러워하라
인간의 권위는 끊임없이 의심받고 있다. 그것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창조의 힘보다 파괴의 정도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 자체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도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인간은 동물 중에서 가장 경탄스러운 동물이라고 생각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
왜인가? 그것은 지구상의 생명체 중에서 문명을 만들어낸 존재는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동물 중에는 인간보다 나은 특징을 갖고 있는 종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강력한 근육을 가진 말이나, 화려한 갈기를 가진 사자, 예민한 후각과 충성심을 갖춘 개, 날카로운 부리와 시력을 가진 독수리, 방향 감각이 유달리 예민한 비둘기,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앵무새나 공작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여러 장점을 가진 동물들보다는 원숭이에게 남다른 호감을 갖는다. 하지만 이 원숭이보다 인간인 편이 낫다는 것은, 인간 속에 있는 원숭이의 호기심과 영리함 때문이다. 부지런함이나 조직적인 면으로 보면 개미가 인간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훈련된 기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처럼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짓지는 못한다. 만일 개미나 코끼리가 거대한 잠망경을 발명하거나 별을 관찰한다면, 혹은 바다표범이 복잡한 미적분을 풀어낼 수 있고, 비버가 파나마 운하를 개통시킬 수 있다면 나는 언제라도 그들에게 세계의 지배자나 창조자로서의 영광을 양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확실히 인간은 자신을 자랑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자랑만큼 자신의 권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먼저 발견해야만 할 것 같다. 그것을 나는 곧 유희적 호기심, 꿈꾸는 능력, 그 꿈을 고쳐가는 유머감각, 그리고 행동의 변덕스러움과 자유분방함이라고 생각한다. 이 네 가지를 합하면 이른바 미국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동양식으로 바꾸어 놓은 꼴이 되는 것 같다. 동양 문학에 묘사되어 있는 자유인의 모습, 그것이상으로 개인주의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릴 스는 없지 않겠는가?
재미있게 살아가라
인간이 숱한 종들 중에서 놀랄만한 생명체로 발전할 수 있었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동기란 인간의 유희적 호기심이었다. 인류 문명의 발달은 인간이 두 다리로 걷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때부터 비로소 두 손이 자유를 찾게 된 것이다. 자유로워진 두 손은 무엇을 더듬고 의심하고 즐기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들의 모습을 살펴보라. 그들이 두 발로 자신들의 몸뚱이를 지탱한 채 마주앉아 손으로 귀를 잡아당기고 털을 매만져 준다. 그런 행위로부터 아인슈타인은 출발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과학적인 진실이 있다. 손의 자유는 인간에게 연장을 사용할 수 있게끔 하였으며, 수치심을 알게 하였고, 여성을 예속하게 하였다. 또 언어의 발달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이 두 발로 무엇인가를 찾아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을 찾아다녔을까? 그것은 곧 만족감이며 쾌감이며 즐거움이었다. 그렇다. 우리들은 사는 재미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본능이며 축복이다. 그것은 그 누구도 찾아줄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이다. 아무 재미도 없이 호흡만으로 연명하는 삶은 곧 뇌사 상태의 식물인간과 다를 게 없다. 삶인가 죽음인가는 뭔가를 추구하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두 발의 두 얼굴
이간의 직립이란 대자연이 창조를 계획함에 있어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동물들에게는 전혀 수치심을 발견할 수 없다. 한데 인간만이 두 다리로 일어섬으로 해서 본래 신체의 뒷면이 있던 부분이 정면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놀라운 사태와 더불어 주로 여성들에게 난처하고 불편한 일이 일어났다. 즉 유산이 많아지고 월경이 불순해진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네 발 짐승이 순응하기에는 불편한 자세임에 분명하다. 그 자세 때문에 여성의 기관은 오랫동안 비능률적인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것이 그렇지 않은 남성들에 대한 예속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한편 이 무렵에는 남녀가 매일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호기심이 많고 놀이를 좋아하는 동물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유스런 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색욕을 키워나갔다. 손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많은 오락들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직립 자세는 어린아이가 걷는 번을 배우는 데 곤란을 주었고 유아 기간을 길게 만들었다. 소나 코끼리의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설 수 있지만, 인간의 새끼는 같은 것을 배우는 데만 2, 3년이 걸려E자. 또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깨우치는 데는 맙소사 수십 년이 걸려도 모자랄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인간의 여자들은 힘센 남자에게 저항하지 않고 유혹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익혔다. 그녀들을 그런 생존 전략의 한 방편으로 언어를 보다 활발하고 다양하게 발전시켰다.
정신이여 반항하라
두 발로 걸어다니는 인간의 새로운 자세는 그 정신으로 하여금 온갖 문제들, 또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회적 질환들을 자유롭게 유희적으로 탐구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호기심이었다. 이 호기심은 먹이를 찾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인간 정신의 작용일 뿐이었다. 그 행위 자체는 진실로 가치 있는 인간의 학문과 학식이 갖는 특징이다. 즉 사물 자체에 갖추어진 재미이며, 있는 그대로를 알고 싶어하는 한가한 유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경찰관을 싫어하고, 사상을 단속하려 드는 정부의 모든 기관과 형식을 싫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인간의 예지를 모욕하고 있다. 사상의 자유가 인간 정신의 최고 활동이라면 자유에 대한 압박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식견이 좁은 정치가나 종교인들은 신앙과 사상이 인간 세상의 평화나 질서에 공헌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를 비추어보면 언제나 인간을 짓누르는 압제가 되곤 했다. 그들은 인간의 외부적 행동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내부적 사상과 신앙을 지배하려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지독한 믿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획일성을 견디어 나가리라. 그들은 연화가 좋아지거나 싫어지거나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정부가 선전으로 문학을 혼란시키고, 정책으로 예술을 교란시키고, 애국심으로 인류학을 교란시키고, 현존통치자에 대한 예배로서 종교를 혼란에 빠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상을 단속하는 자가 인간성 그 자체에 지나치게 위배되는 행위를 하면, 그 순간 그러한 시도는 몰락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천하에 인간의 사상을 훔치는 것보다 더 큰 도둑질은 없다. 사상과 자유를 빼앗겨 버리면 사람은 다시 네 발로 기는 시대로 회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에게 도덕적 신앙과 종교적 신앙만큼 귀하고 소중하며 친근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믿는 것을, 또 믿을 권리를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자에 대한 증오만큼 큰 것이 없다. 인간에게는 반항심이 있으며 양심에는 억제하기 힘든 자유가 있음으로, 반드시 싸워 일어서는 것이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5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재위:서기 69년 12월 21일~ 79년 6월 24일)
진두 지휘
서기 79년 8월 24일에 발생한 대참사가 수도 로마에 전해진 것은 이틀도 지나지 않은 26일께였을 것이다. 군사대륙이기도 한 로마는 정보전달의 중요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 그것이 확정된 뒤에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한 시점에서 신속하게 전달하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참사가 일어난 것은 나폴리 만 연안이다. 이 일대에 별장을 소유하는 것이 신분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었으니까, 수도에 사는 유력자들에게도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원로원 계급 출신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었던 티투스는 이 일대에 별장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황제다. 불과 두 달 전에 즉위했다고는 하지만, 안전과 식량을 보장하는 것이 가장 큰 책무로 되어 있는 황제였다. 또한 좋은 황제가 되겠다는 의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여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재민 대책본부를 현지에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이 직접 진두 지휘를 맡았다. 분화 당시의 바람은 동남쪽을 향해 불고 있었다. 베수비오 화산에서 동쪽과 남쪽으로 선을 그으면 서로 90도 직각을 이루는 두 선 사이에도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을지 모르나 지진 피해는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나폴리 만을 둘러싸고 있는 연안 일대가 모두 재해지역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남부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지방도시였던 폼페이는 4.5미터 높이로 쌓인 돌멩이와 화산재에 파묻힌데다 그 직후에 내린 비로 그것이 단단히 굳어버렸기 때문에, 시선을 발굴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신전의 원기둥이나 원형경기장의 윗부분은 아직 지표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바람에 실려온 흙이 쌓이고, 식물이 뿌리를 뻗어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근대에 발굴될 때까지 폼페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티투스 황제의 선의와는 관계없이,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비롯하여 베수비오 분화로 매몰된 도시와 마을은 서기 79년 당시에는 그대로 방치해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화를 면한 이재민도 많았다. 캄파냐 지방은 이탈리아에서도 풍요로운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밀도도 당시에는 다른 어느 곳보다 높았다. 티투스 진두 지휘하는 대책본부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로마인들은 침상 위에 매트리스를 깔고 거기에 한쪽 팔꿈치를 괸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하지 않으면 식사라고 부를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식탁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먹는 것은 어린애나 노예의 식사법이고, 식당에 방 한 칸을 할애할 수 있을 만큼 널찍한 집에 사는 사람의 식사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처럼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식사는 로마 시대에도 저녁식사뿐이었다. 아침과 점심은 식탁 앞에 앉아서 재빨리 끝낸다.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을 경우에는 저녁식사도 그렇게 해치운다. 하지만 이것은 로마인들에게는 현대인들이 패스트푸드점 같은 곳에서 선 채로 음식을 입에 쑤셔넣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재해지역에서 구호대책에 몰두하는 티투스의 일상도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식사법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다. 황제가 결코 빠질 수 없는 행사가 없는 한, 수도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티투스가 재해대책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살아 있을 때부터 사실상의 공동 황제로서 나라를 다스려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통상적인 임무에도 익숙해져 있었고, 그 일을 계속 수행하는 더 필요한 사람과 체제도 정비되어 있었다. 그런 티투스가 시행한 재해대책은 타키투스의 '역사'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을 게 분명하지만, 이 시기를 다룬 부분이 증세를 거치는 동안 소실되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가족이 없는 희생자의 재산을 국고에 넣는 관례를 이번 경우에는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가족도 없이 사망한 사람들의 재산은 같은 고향출신 이재민을 지원하는 데 보태기로 결정했다. 폼페이는 해외 교역도 왕성했던 도시다. 폼페이 주민 중에는 해외에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가족 전체가 희생되는 바람에 상속자도 없는 이런 재산은 국가 소유가 되지 않고, 다행히 재난을 면한 사람들의 피해복구비로 쓰였다. 세제 면에서의 지원책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비슷한 참사가 속주에서 일어나면 우선 속주세를 3년 내지 5년 동안 면제해주지만, 캄파냐 지방은 본국 이탈리아에 있다. 본국에는 원래 속주세라는 이름의 직접세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관세나 매상제는 면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회간접자본 복구. 이것만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고, 서기 79년 같은 대참사의 경우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복구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다. 서기 62년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폼페이만한 도시에는 자력으로 복구할 수 있었지만. 서기 80년으로 해가 바뀌어도 티투스 황제는 여전히 현지의 대책본부에서 재해대책에 몰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80년 4월에 수도 로마에서 화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캄파냐 지방에 있던 티투스는 황급히 로마로 돌아온다. 이렇게 재난이 연달아 일어나니, 40세의 황제는 잠시도 몸을 쉴 틈이 없었다.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시작된 불길이 언덕을 내려와 인접해 있는 마르스 광장의 남쪽 절반을 태운 서기 80년의 화재는 '로마의 대화재'로 알려진 네로 시대의 화재만큼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일대에는 각종 공공 건축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견고한 석조건물이라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불이 꺼진 뒤에 방치해두면 붕괴 위험이 늘 따라다닌다. 특히 피해가 큰 건축물은 테베레 강에 인접한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이었다. 트라시메노 호반에서 한니발과 싸우다가 전사한 플라미니우스가 집정관 시절에 건설한 것이 북이탈리아로 통하는 두 간선도로 가운데 하나인 플라미니아 가도와 이 경기장이다. 건설된 지 300년, 가도는 간선도로의 기능을 계속 발휘하고 있었지만, 플라미니우스 경기장도 경기장과 소년들의 체력 훈련장으로 건재해 있었다. 그런데 서기 80년의 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손상이 너무 심해서 복구를 포기하고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불탄 자리가 오랫동안 그대로 놓여 있을 턱이 없었다. 원래 두꺼운 돌벽이 늘어서 있는 구조다. 그 하나하나가 민가로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오늘날에는 유대인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계 로마 시민들의 거주지역이 되어 있다.
하지만 '플라미니우스 경기장'(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은 300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친숙해진 공공장소다. 게다가 건설자 플라미니우스는 평민계급의 영웅이었다. 그 경기장도 원래 평민 전용 운동장으로 건설되었다. 그후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은 공화정 시대가 끝날때까지 평민계급의 근거지였고, 민회는 포로 로마노에서 열려도 호민관이 소집하는 평민집회는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공화정이 끝나고 제정으로 바뀐 지 한 세기가 지났다. 하지만 통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사용할 수 없게 된 플라미니우스경기장을 대신할 경기장을 평민계급에게 마련해주어야 할 필요성을 당연히 깨달을 것이다. 티투스도 그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알지 못했어도 그에게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을 대신할 다른 경기장을 세우는 일은 다음 황제인 도미티아누스가 즉위할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스타디움도미니아티)은 오늘날 나보나 광장이라는 아름다운 광장으로 탈바꿈했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 다음으로 큰 피해를 입은 공공 건축물은 그 바로 북쪽에 있었던 아우구스투스의 '옥타비아 화랑'(포르티쿠스 옥타비아)과 카이사르가 건설한 '사이프타 율리아'였던 모양이다.
이런 공공 건축물을 복구하기 위해 티투스 황제가 먼저 개인 재산을 내놓았다. 그러자 로마의 부유층도 다투어 돈을 기부했다. 공공 건축물 복구비는 무도 이런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공공사업에 돈을 기부하는 것은 로마인들에게는 요즘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존경받는 사람의 의무)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착공된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 통칭 '콜로세움'도 서기 80년에 드디어 완성되었다. 티투스는 베수비오 분화와 수도 로마의 화재 등 잇따른 재난으로 우울해져 있는 시민들의 기운을 복돋워주기 위해, 콜로세움에서 처음 열리는 행사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결정했다. 완공된 직후라서 눈부시게 빛났을 콜로세움은 나들이옷을 차려입은 남녀노소로 가득 메워졌을 것이다. 맨 위층은 노예한테도 개방되었다.
준공 축하행사가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사람들의 열광이 검투사 시합에 모아졌을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 위험한 격투기의 주인공인 검투사 가운데 3분의 2는 노예 출신이었지만, 나머지 3분의 1은 자유민이었다. 위험하긴 해도 높은 보수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민들중에도 직업으로 검투사를 선택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또한 이 격투기를 잘하는 사람은 인기 스타가 되어, 유복한 여자들에게 유혹을 받는 것도 결코 꿈은 아니었다. 요즘 같으면 권투나 씨름 선수와 비슷한 존재였다. 티투스 황제는 '티투스 목욕탕'(테르마이 티티)이라고 불리게 되는 로마식 공중목욕탕-목욕 시설 외에 체육관, 도서관, 오락실, 정원까지 갖춘 목욕탕-을 네로의 꿈으로 끝난 '도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 자리에 세웠다. 티투스 자신도 이곳으로 목욕을 하러 갔다고 한다. 황제가 온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금지하지도 않았다. 황제는 친구나 친지를 데리고 목욕탕에 다녔겠지만, 벌거벗으면 황제도 일반 시민도 노예도 마찬가지였다. 티투스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로마식 목욕탕에는 원래 남탕과 여탕은 구별되어 있지만 신분에 따른 구별은 없었다. 원로원 의원과 서민이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 가끔 별장에 가서 지내곤 했던 소 플리니우스도, 별장에서 며칠 지내기 위해 일부러 욕실을 만들 필요는 없다면서, 가까운 도시의 공중목욕탕을 이용했다. 로마인들의 목욕법은 온욕, 증기욕, 냉욕을 차례로 거치는 방식이어서, 목욕물을 데우기만 하면 되는 욕실처럼 만들기가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
서기 81년에 발생한 전염병을 두고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전례없는 전염병"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표현만 가지고는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규모가 어떻든, 전염벼은 발생했다. 티투스는 전염병이 발생하자마자 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면, 평소에는 각자 진료소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총동원되었다.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고, 그래서 직접세를 면제받는 특전도 누리고 있으니까, 대부분 그리스인인 의료 관계자들도 로마인과 똑같은 의무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런 제도 덕분인지, 아니면 전염병의 규모가 원래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가을로 접어들자 전염병은 가을에 자리를 내주듯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전염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티투스가 병으로 쓰러졌다. 잇따른 재난으로 심신에 피로가 쌓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티투스는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 요양하러 간 고향 온천에 가고 싶어했다.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온천까지 따라갔다. 하지만 온천에 도착한지 얼마 되기도 전에 티투스는 세상을 떠난다. 서기 81년 9월 13일이었다. 서기 40년 12월 30일에 태어났으니까, 41세도 채우지 못하고 죽은 셈이다. 그의 치세는 2년 3개월에 불과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진심으로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다. 유대 공주와의 결혼에 반대하여 경기장에서 야유를 보냈던 일반 시민들도, 그 항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독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티투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현지에서 재해대책을 진두 지휘한 황제. 공중목욕탕에도 자주 나타난 황제. 서민들에게 티투스는 이상적인 황제를 구현하고 있었다. 로마 시대에는 황제가 시민들에게 보너스를 주는 것이 상례가 되어 있었지만, 티투스는 보너스를 한번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가 거듭된 재난에 사재를 내놓은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의 권력을 견제하는 기관이라는 인식 때문에 전통적으로 반황제세력이 강한 원로원도 티투스의 죽음을 슬퍼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반황제파 원로원 의원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고발자의 탄핵이었지만. 티투스는 그런 고발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남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다는 것이 그럴 때 티투스가 으레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황제와 협력하여 제국을 통치하는 것이 원로원이다. 황제로서 적격자인지 아닌지도 그들에게는 평가 기준이 되었다.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 대한 통치도 잊지 않았던 티투스는 그런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한 예로 에스파냐,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키프로스 섬, 아시아 속주라고 불린 소아시아 서부 지역의 도로망을 정비한 것을 들 수 있다. 본국 이탈리아에서도 79년 하반기에 마르키아 수도를 수리했고, 80년에는 아우렐리아가도와 플라미니아 가도 일부를 정비했다. 79년부터는 오늘날의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서 크로아티아의 풀라에 이르는 가도를 새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완전한 신규 사업이었기 때문에, 이 가도는 티투스의 씨족 이름인 플라비우스를 따서 '비아 플라비아', 즉 플라비아가도로 명명되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승전을 기리는 개선문은 공사를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에야 겨우 완공되었다. 속주 출신을 원로원에 맞아들이는 일에도 아버지처럼 적극적이어서 속주민한테도 평판이 좋았지만,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만은 예외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공략하여 신전을 불태운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로마인과 공생하기로 작정한 유대인들은 티투스를 싫어하지 않았다. 제국의 각 도시에 있었던 유대인 사회에서 티투스를 비난했다는 사료는 오늘날까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유대전쟁기를 쓴 요세푸스와 티투스의 우정은 12년 전에 두 사람이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티투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고,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도 끝까지 변치않았다. 그러나 빈정대기 좋아하는 로마인은 칭찬만 해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동시대인 가운데 한 사람은 이런 말을 남겼다.
"치세가 짧으면 누구나 좋은 황제일 수 있다."
티투스가 치세 2년 만에 세상을 떠난 뒤 제위를 물려받은 사람은 동생인 도미티아누스다. 이 도미티아누스의 치세는 15년 동안 이어지게 된다.
|
|
독서실 → 한국사
|
|
|
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밀교 유적지 - 금광사
명랑법사가 세운 금광사
남산의 북쪽 끝, 남산성터의 서쪽 아래 골짜기를 시켸골(식기곡 또는 식혜곡으로도 적는다)이라 한다. 이 골짜기에 옛날 금광사가 있었다고 한다. 오릉에서 남쪽으로 뻗은 국도를 따라가다가 왼쪽에 있는 나정으로 향하는 길을 들어서서 쭉 들어가면 6부장 재실이 나타난다. 재실의 동남쪽 남산 기슭에 배리마을이 있다. 배리마을 일대는 남간사지이다. 금광사는 이 마을의 남쪽 개울가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 마을의 동쪽 남산 골짜기의 끝에는 일성왕릉이 있으며 왕릉 아래에는 일성왕을 모신 숭성재라는 재실이 있다. 재실의 앞은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가 바로 금광사의 강당터로 알려지고 있다. 저수지 아래는 들이 있다. 저수지와 들녘의 창림사지 사이에는 일제침략기 때 금광지라는 못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금광지는 69년초에 불도저에 의해 메워졌다. 이때 이 못에서 불상조각과 계단석 및 금강경을 새긴 경석이 발견되어 이 못 이 금강사지임을 추측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금광사지는 남간사지와 인접해 있다. 남간사지 역시 추측에 불과하다. 배리마을 중간에 있는 채소밭에는 석탑의 심초석과 주춧돌들이 많은데, 이곳이 옛부터 남간사지 또는 금광사지 등으로 추측되어져 왔다. 10여 년 전 이곳에서 '사제사'라는 명문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학계를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했다. 아무튼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 일대에 금광사지가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금광사는 신라 밀교의 비의를 간직한 절 중의 하나이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법흥왕 15년(528)이었다. 그후 1세기 사이에 단편적인 초기 밀교가 당나라를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본격적인 밀교의 도입은 유명한 명랑법사 때부터이다. 명랑은 신라선덕 여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가 밀교를 수학한 후 3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도중 서해의 용궁에 들어가 신인의 비법을 전해 받고, 용왕으로부터 황금 1천 냥을 선사받았다. 그는 바다 위로 올라오지 않고 바다를 잠행하여, 땅 속의 수맥을 따라 자기집 우물 밑으로 솟아나왔다. 이에 집을 절로 바꾸어 금광사라 했으며 선사받은 황금을 불상을 조성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명랑은 신라 사간(신라관등 제8위=사창) 재량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남간부인이다. 그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지 30년 후(문무왕9년) 당나라 군사가 신라를 치기 위해 50만 대군을 끌고 바다로부터 공격해 왔다. 명랑은 문무왕의 청을 받아 낭산 남쪽 신유림에 단을 만들어 5불의 신상을 안치한 후 20명의 밀교승을 거느리고 문두루비법을 행했다. 그때 바다에서는 홀연히 폭풍이 일면서 당나라 군사를 몰살시켰다. 이 단을 설치했던 곳에 세워졌던 절이 유명한 사천왕사이다. 이 얘기 중 그의 어머니가 남간부인이라 한 것은 그의 집이 바로 남간사가 있던 마을에 위치했음을 추측하게 해주는 것이다. 배리마을에는 신라 때부터 전해오는 우물이 두 개 있는데, 그중 한 우물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혹 이들 우물 중 하나가 바로 명랑의 집 우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주술과 샤먼의 비의
신라 밀교의 시작은 이처럼 허황하고 신비스러운 신통력으로 떠오른다. 명랑의 이 허황한 신통력은 신라불교의 특징인 호국불교와 연결되면서 외적의 퇴치라는 신출귀몰(?)한 전과를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에 전래된 밀교가 초기 및 중기 밀교의 단계이며, 주로 주술과 샤먼에 의한 비의가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밀교승들이 이따금 나타나 황당무계한 신통력을 부리는 광경이 보인다. 명랑의 시대만 해도 밀본이 있었다. 밀본은 귀신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선덕여왕의 병을 신기한 비법으로 치료했다. 밀본이 왕의 침실 밖에서 '약사경'을 읽자 그가 가졌던 육환장이 침실 안으로 날아들어, 한 마리 늙은 여우와 법척을 찔러 뜰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왕의 병이 거뜬하게 나았다. 밀본은 이밖에도 많은 이적을 보이고 있다.
명랑은 신인종의 개조이다. 명랑보다 조금 늦게 혜통이 나왔다. 혜통은 당나라로 건너가 선무외삼장에게서 밀교를 수학하고 문무왕 5년(665년)에 귀국했다. 그는 신라에 돌아온 후 갖가지 이적을 보였다. 총지종과 명랑의 신인종은 신라밀교의 2대산맥을 이룬다. 이밖에 다라니비밀법에 정통했던 명효, 신라밀교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한 혜일을 비롯 의림, 현초, 오진, 불가사의, 균량, 혜초 등이 모두 밀교승이었다.
신라의 밀교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흥성했다. 고려초기의 밀교는 국난퇴치를 위한 비법으로 각광을 받았다. 고려 건국초 왜구가 침범해 왔을 때 태조는 신인종계의 광학, 대연에게 비법을 어명하여 개성에 현성사를 건립, 밀교 근본 도량으로 삼게 했을 정도였다. 문종 28년(1074년)에 외적이 침입했을 때는 사천왕사에 문두루비밀도량을 설치했으며, 예종 3년(1108년)과 4년에는 연속적으로 문두루도량을 설치하기도 했다. 고려의 밀교는 묘청, 신돈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의 내용은 잘 알 수 없다.
밀교는 정통 대승불교의 입장에서는 분명 이단적인 것이다. 그것은 소승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밀교가 전파되고 꽤 성세를 보인 것은 그 비법이 호국불교와 연결되는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의 밀교는 대부분 신기함과 허황함으로만 떠오르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신라의 밀교도량은 금광사를 비롯하여 사천왕사와 금곡사 등이 있다. 금곡사는 밀본이 머물렀던 절이다. 금곡사는 현재 월성군 안강읍 두류리의 비장산 동쪽 기슭에 절터만 남아 있다. 이곳에는 원광법사의 부도인 3층석탑이 폐탑으로 남아 있다. 이 탑은 파손되어 흩어진 것을 일부 수습하여 사면에 불상을 새긴 탑신과 그 위에 두 개의 육개석을 올려놓았다. 절터 주위에는 탑재가 꽤 흩어져 있어서 그 수습이 아쉽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