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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6호 - 2024.07.12 금요일(음력 : 06.07)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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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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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잘 참는 것은 그 외에 딴 방법도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 ― 마야 안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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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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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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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뜻한 순우리말
지난 주 서울 여의도에서 ‘여의도 봄꽃축제’가 열렸다. 여의도에는 2,000주 가까이 되는 왕벚나무들이 국회대로인 윤중로를 따라 조성돼 있는데, 올해도 수만 명의 시민들이 여의도를 찾아 벚꽃이 수놓은 화려한 봄의 향연을 만끽했다. 벚꽃은 벚나무의 잎이 돋아나기 전에 흰색이나 연분홍색의 화사한 꽃들이 마치 구름처럼 나무 전체를 뒤덮어 보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만드는데, 이처럼 벚나무에서 벚꽃이 새롭게 피어난 모습을 표현하는 말로 ‘새뜻하다’라는 말을 추천하고 싶다.
‘새뜻하다’는 ‘새롭고 산뜻하다’는 뜻의 순우리말인데, ‘새뜻하게 옷을 차려 입었다’, ‘5월이 되자 산과 들은 온통 새뜻한 연한 녹색으로 물들었다’ 등으로 쓸 수 있는 말이다. ‘새뜻하다’는 시각적인 모양을 나타내는 말 이외에도 ‘새뜻하게 마음먹고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해지길 바랍니다’처럼 기분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말로도 사용할 수 있다. 만물이 새롭게 생동하는 계절인 봄은 ‘새뜻하다’라는 말과 아주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마치 겨우내 움츠렸던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새로운 계절, 봄을 맞아 그동안 움츠렸던 마음에도 새로운 희망과 꿈이 싹터 ‘새뜻하게’ 마음먹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올해 기분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지 않을까.
‘새뜻하다’처럼 우리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지만 어감이나 의미가 예쁜 순우리말로 ‘도담스럽다(보기에 야무지고 탐스러운 데가 있다)’, ‘깨끔하다(깨끗하고 아담하다)’, ‘미쁘다(믿음성이 있다)’ 등의 형용사들이 있다. 이처럼 그동안 사전 속에 숨어있던 새뜻한 순우리말들을 끄집어내 우리가 일상생활에 널리 사용한다면 우리말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을 것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부셔버릴거야
“당신… 부셔버릴거야.” 90년대 방영한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을 배신한 연인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했던 말이다. 드라마 역사상 명대사로 꼽히는 표현이지만 표준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깝다. ‘부숴버릴거야’라고 해야 맞다.
이런 실수는 발음이 비슷한 ‘부수다’와 ‘부시다’를 잘 구분하지 못한 탓이다. ‘부수다’는 ‘도둑이 문을 부수고 침입했다.’거나 ‘과자를 부숴서 아이에게 주었다.’처럼 물건을 깨뜨리거나 여러 조각으로 잘게 나눌 때 쓰는 말이다. ‘부시다’는 ‘솥을 말끔히 부셔 놓아라.’처럼 그릇 따위를 깨끗하게 하거나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라고 할 때처럼 빛이 강렬하여 마주 바라보기 어려운 상황에 쓰는 말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인생을 산산이 깨뜨려 못쓰게 만들겠다는 뜻을 나타내려면 ‘부숴버리다’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부숴버리다’와 달리 ‘부서지다’는 ‘부숴지다’로 쓰면 안 되고 반드시 ‘부서지다’로 써야 한다. 이미 중세국어에서부터 ‘부수다’와 ‘부서지다’는 각기 다른 말로 존재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부수다’의 어간 ‘부수-’에 ‘-어지다’가 결합하면 ‘부숴지다’가 되는데 왜 ‘부서지다’만 맞고 ‘부숴지다’는 틀렸다고 하는 걸까. 이것은 사실 선택의 문제로, 우리가 ‘부서지다’만 표준어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뜻이 같고 발음이 비슷한 말이 여러 개 있으면 그 중 하나만을 표준어로 삼는 것이 원칙이다. 혼란을 피하기 위한 것인데, 예를 들어 ‘봉숭아/봉선화’, ‘아내/안해’ 중에서 ‘봉숭아’, ‘아내’만을 표준어로 인정하는 식이다. 마찬가지 원칙에 따라 ‘부서지다’와 ‘부숴지다’ 중에서는 오래 전부터 써 왔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부서지다’를 표준어로 정한 것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개비리길과 에메랄드로
도롱뇽 소송 사건으로 유명한 경남 양산의 천성산에 최근 산책로인 누리길이 완성되었다. 이처럼 전국 곳곳에 자연과 더불어 걷는 길들이 앞다퉈 만들어지고 있는데, 누리길처럼 대부분 이름들이 토속어의 멋을 담고 있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남해 바랫길, 태안 노을길, 강릉 바우길 등이 다 그렇다.
필자가 사는 창원에서 멀지 않은 창녕 남지에는 개비리길이 있다.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벼랑길이다. 갯벌 즉 개의 비리(벼랑의 방언)에서 온 이름일 수 있지만 사람들은 개가 다닌 벼랑길이라는 어원 풀이를 더 좋아한다. 여기에는 작은 전설 하나가 깃들어 있다. 황씨 할아버지네 어미 개가 낳은 새끼 중 유난히 약한 놈이 있어 시집간 딸이 데려갔다. 그러자 어미 개가 매일 찾아와 젖을 먹였는데, 통행이 끊긴 폭설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눈이 드문 벼랑 면의 좁은 길로 다닌 것이었는데, 이를 안 사람들이 이 길을 ‘개비리길’로 불렀다는 것이다.
남해안의 통영에는 ‘토영 이야길’이 있다. ‘토영’은 통영, ‘이야’는 가까운 언니, 누나를 허물없이 부를 때 쓰는 이 지역 방언이다. 그러니 토영 이야길은 허물없는 사람들끼리 도란도란 함께 걷기 좋은 길이라는 뜻이다. 길목마다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이름이다.
이런 이름들과는 전혀 딴판인 길 이름들도 있다. (청라)에메랄드로, (청라)크리스탈로, 아카데미로, 하모니로, 파인토피아로, 골든루트로, 사파이어로 등이 그것이다. 몇 해 전부터 신도시 중심으로 생겨나 쓰이고 있는 도로명들이다. 누리길, 개비리길, 올레길에 비하면 이런 외국풍의 이름은 무미건조한 느낌이 든다. 전설도, 이야기도 깃들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도심에도 정감 있는 이름들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한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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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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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막에서
곡 신동엽 - 천상병
어느 구름 개인 날
어쩌다 하늘이
그 옆얼굴을 내보일 때.
그 맑은 눈
한 곬으로 쏠리는 곳
네 무덤 있거라.
잡초무더기
저만치 가장자리에
꽃 그 외로움을 자랑하듯
신동엽!
꼭 너는 그런 사내였다.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그 잠깐만 두어두고
너는 갔다.
저쪽 저
영광의 나라로!
∼∼∼∼∼∼∼∼∼∼∼∼∼∼
바다 3 - 정지용
외로운 마음이
한종일 두고
바다를 불러-
바다 우로
밤이
걸어 온다.
~~~~~~~~~~~~~~~~~~~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 김수영
비가 그친 후 어느날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가는 것이 직선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드리는 것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느냐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같이 흰 단추가 달려있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자꾸 뻐근하여만가는 목을 돌려
시간과 함께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것
그것은 혹시 한자루의 부채
그러나 그것은 보일락말락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것
하나의 가냘픈 물체에 도저히 고정될 수 없는
나의 눈이며 나의 정신이며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사상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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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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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1장 종교의 목표
1. 영원한 행복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삼대 종교의 하나라고 일컬어집니다. 이들 종교는 저마다 내세우는 교조(敎祖)가 다르므로 그 내용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읍니다. 그러나 그 교조와 내용은 서로 다르다할지라도 종교가 갖는 궁극적인 목표는 다 같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서울로 간다고 할 때에 북쪽에서 가든 남쪽에서 가든 바다에서 가든 육지에서 가든 비록 그 방향과 수단은 제각기 다르지만 서울에 간다고 하는 근본 목표는 다 같듯이, 종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어느 종교에서나 다 같습니다.
그러면 그 공통되는 종교의 목표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相對)적이고 유한(有限)한 세계에서부터 절대(絶對)적이고 무한(無限)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같이, 태어남과 죽음이 있어 고통과 번뇌가 가득찬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에는 오히려 괴로움만 더해 줄 뿐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는 이 고통의 현실을 벗어난 자유의 세계로서 영원한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이고 무한한 이세계 곧 생멸의 피안(此岸)에서부터 절대적이고 무한한 저 세계, 곧 해탈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야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근본 목표인 것입니다. 이렇듯 종교의 근본 목표인 영원한 행복은 바로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 욕망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은 이 유한한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각 종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에 들어가도록 그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불교에서는 그 궁극의 목표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여러 경전에서도 말씀하셨지만, 특히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괴로움을 버리고
구경의 즐거움을 얻는다.
離一切苦 (이일체고)
得究竟樂 (득구경락)
이 말씀은 모든 괴로움을 다 버리고 구경(究竟)의 즐거움, 곧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곧 상대적이고 유한한 생멸(生滅)세계를 떠나 절대적이고 무한한 해탈(解脫)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반의 종교가 갖는 목표와 꼭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와 '유한'의 행멸세계를 버리고, '절대'와'무한'의 자유세계에 가려고 노력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에 누가 서울에 간다고 한다면 왜 가는지 까닭부터 알고 가야지 무조건 서울만 가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행동일 터이요, 그 사람은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터 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이고 무한한 자유세계로 가려고 한다면 먼저 왜 가려고 하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부터 아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세상에는 천지만물이 있고, 인간은 그 모든 생물과 무생물 중에서 으뜸가는 존재라 하여 만물의 영장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의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인간은 대체로 삶을 값어치있게 만들기 위하여 저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더러 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사람도 있고 또사람마다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도 하지만, 인간이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뭇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현실적 삶의 모습이 얼마나 행복과 가까운지는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간이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심지어 산다는 것 조차도 짐스러울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이 괴로움의 바다이다.
三界火宅 (삼계화택)
四生苦海 (사생고해)
라고 표현합니다. 삼계(三界)란 중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를 일컫는 말인데 이것을 불타는 집이라고 하고, 사생(四生)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일컫는 말인데 그 전체가 괴로움의 바다라고 하였습니다. 곧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십니다. 인생이란 이와 같이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고생만 하다가 끝내 죽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살다가 때에 따라서는 좋은 일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것일 뿐, 인생을 전체로서 볼 때는 괴로움의 연속이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고, 그토록 괴로운 삶이니 더 이상 살고 싶지않다고 하여 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덜 고생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시작 된 이래로 사람들은 이 고생스러운 삶 가운데서 좀 더 행복하게 살 길을 찾아 여러가지 방법을 모색 해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고 유한하여서 모순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모순의 세계란 곧 투쟁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고 하여도 곧 종말이 오고야 맙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원한 행복을 생각하게 되고, 그 영원한 행복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을 추구하는 데에서부터 인간의 종교가 성립된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세계에서는 이룰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안의 세계 곧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를 구상하여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종교의 근본 취지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듯이, 모든 사람이 저 먼 피안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행복을 추구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추구하는 행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 면빌어 먹는 거지에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때가 되어 밥 한끼 잘 얻어먹는 것이 행복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거지로서는 밥 한끼 잘 얻어 먹으면 그것으로 다른 모든 시름은 다 잊고 만족해 할 수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사람들은 때와 장소와 처지에 따라 서로 다른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대개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것은 거지가 밥 한끼 잘 얻어먹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원한 행복이란 공연한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수천년의 인류 역사가 지나가는 동안에 세속적인 기준 으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는 몇 사람의 경우를 보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2. 록펠러
첫번째로 록펠러 Rocrefeller(1839~1937)의 경우를 봅시다. 미국의 록펠러 1세는 당대에 자수성가(自手成家)하여 세계적인 갑부가 되어 아흔 아홉살까지 산 사람입니다. 그만하면 누가 보든지 참으로 행복하게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산도 많아 세계적인 재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더러 나이 아흔 아홉이 되도록 장수하였으니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록펠러는 만년에 이르러 위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암이란 지금의 발달된 현대의학으로도 웬만해서는 고치지 못하는 병인데 지금보다 오십 년 전인 그 때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세계적인 갑부로서 온갖 부를 누렸고 아흔 아홉살의 천수를 누렸으니 그만하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 싶은데도, 그는 자기가 암에 걸려 곧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되자 도저히 그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명을 일년 더 연장시켜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온 세계에 광고를 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 광고 비만도 이백만 불이나 들었다고 합니다. 이백만 불이면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아마 이백만 불 아니라 이백억 불을 들인다 해도 목숨을 연장하는 이러한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록펠러가 낸 그 광고를 보고 의학분야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은 록펠러를 한 해라도 더 살려놓으면 자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욕심에서 각양각색의 방법을 다 동원하고 제시 하였습니다만, 결국 록펠러는 더 살지못하고 아흔 아홉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좀 더 살고 싶은 것, 이것이 인간의 본능 입니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닙니다. 저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는 개미나 벌레까지도 죽는 것은 다 싫어 합니다.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좀 더 편안하게 살았으면 하는 욕망은 생명을 가진 생명체의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본능적인 욕망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고 또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산다 해도, 그것은 어느 한 순간이면 끝나고 맙니다. 이 유한한 생멸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사람의 욕구는 결코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맹상군
호화코 부귀코야 맹상군만 하련마는
백년이 못다하여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요.
맹상군은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사람인데, 왕자(王者)로서 정승을 지낸 이로, 천하의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지녔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가장 호화롭게 산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누구나 이구 동성으로 맹상군이라고 말할 만큼 참으로 세상의 행복을 누리며 산 사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맹상군도 백 년을 못 살고 일흔이 가까와서 죽고 말았습니다. 살았을 적의 그의 공명에 따라 장례를 후히 지내고 그 무덤도 산과 같이 거창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것이 덧없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 이제는 무덤 옆에 밭을 갈던 농부가 제 땅을 넓히려고 맹상군 무덤 위에다가 밭을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한 것인지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온갖 영화를 다 누리며 호화롭게 살던 맹상군도 그러한데 하물며 특별히 두드러진 것 없이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그 유명한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의 경우는 또 어떠한지 봅시다. 그는 춘추전국 시대의 맹상군보다 후대의 사람으로 6국(六國)을 정벌하고 중국 천하를 통일하여 진(秦)나라 대 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영웅 가운데 영웅입니다,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보니 모든 것이 자기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좋은 물건, 좋은 음식, 좋은 옷, 미인들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자기가 거처하는 궁궐을 지어 아방궁(阿房宮)이라 불렀는데 집의 길이가 무려 칠백 리에 뻗쳤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한양의 궁궐 둘레가 사십 리라고 하니 진시황의 궁궐 둘레는 천 리가 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뒷날 항우(項羽)라는 장사가 나타나서 진나라를 패망시키고 아방궁을 불태우는데 석달 동안이나 탔다고 합니다. 집이 다 타는 데에 석달이나 걸렸으니 아방궁의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시황이 그렇듯 천하를 자기 것으로 하여 호사스럽게 살면서도 딱한 가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자기 목숨이지만 이것만큼은 자신의 권세로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기운은 자꾸 쇠약해져서 마침내는 죽고 말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에 영(令)을 내려 죽지 않는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오는 사람에게는 수만 금의 상금을 주고 벼슬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얼마 뒤에 서시라는 사람이 나타나 진시황에게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가면 바다 가운데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불사초라고하는 약초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시황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 약초를 캐오는 데에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서 씨가 대답하기를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삼천 명과 그들을 싣고 갈 배만 준비해주시면 가서 불사초를 구해 오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진시황은 곧 영을 내려, 서 씨의 요구대로 동남동녀 각 삼천 명과 그들이 먹을 식량과 의복 따위를 수십 척의 배에 실어 보내어 삼신산의 불사초를 캐오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씨의 생각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그는 진시황이 호사가 넘치다 보니 사람의 힘으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공연한 짓을 하는 것 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堯)나라의 팽조(彭祖)가 팔백 년을 살았지만 끝내 죽고 말았는데 자기가 살면 얼마나 살 것인가 하고 속으로 생각한 그는,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욕망에 집착한 진시황의 약점을 이용하여, 처녀 총각 육천 명을 데리고 저 바다 가운데 좋은 섬에 가서 자기의 왕국을 하나 만들어 잘살아 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리하여 만든 나라가 일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남쪽, 남해 금산 밑에 가면 바위에 '서씨각(徐氏刻)'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씨가 중국을 출발해서 남해 앞을 지나갔을 것으로추측되는 기록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어찌하였든 서 씨는 그렇게 처녀 총각 육천 명을 배에 싣고 제 갈길로 가 버렸고, 이를 알 리가 없는 진시황은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불사초를 구해오기만 기다렸습니다. 결국 진시왕은 자기가 서 씨에게 속은 것을 알고 원통해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버렸습니다. 제 아무리 진시황이라도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죽어도 그냥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서, 죽고 난 뒤에 자기의 무덤을 생전의 아방궁처럼 꾸미도록 엄명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여산(驪山)에 터널을 뚫고 산 밑의 흙을 다 파내고 지하 궁궐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죽은 뒤에도 음식을 차려놓고, 궁녀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게 생긴 궁녀 삼천명을 뽑아 언제든지 자기 옆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자기의 무덤이 있는 방을 지킬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진시황이 죽고 난 뒤에 신하들은 그의 명령대로 궁녀 삼천명을 뽑아 묘를 지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봉해 버렸습니다.
얼마 뒤에 유방과 항우가 들고 일어나 진나라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항우가 먼저 함양에 들어가 아방궁을 불 태우고, 여산의 묘를 파헤쳐서 그 속에 갇혀 있던 삼천 명의 궁녀들을 살려 주어 제 갈 길로 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우도 그 삼천 명의 궁녀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궁녀는 남 주기가 싫어서 자기가 차지했으니, 그 미인이 천하에 유명한 우미인(虞美人)입니다. 나중에 항우가 유방과 싸우다가 해하(咳下)에서 대패하고 오강(烏江)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천하를 덮어도
때가 이롭지 못하니 천리마도 앞을 달리지 않는구나.
천리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거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나는 장차 어찌할거나.
항우가 당장 망해서 죽게 되었는데 천리마는 버려도 우미인은 버리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가 마침내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이같이 허무할 뿐만 아니라 그 욕심으로 인해 자기와 남에게도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진시황의 아방궁을 짓고 거대한 무덤을 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했겠습니까!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눈물 위에서 진시황은 일시적인 행복은 누렸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삼천 궁녀를 그 속에 가둬 춤추게 하는 등 별별 짓을 다했어도, 결국 영원한 행복은 성취하지 못하고만 것입니다. 어떠한 한계도 없는 영원한 행복을 구하고자 했으면서도 그 행복의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이런 일들이 앞에서 본 록펠러나 맹상군이나 진시황에게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그런 처지에 놓이면 그와 같은 욕망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곧 죽게 된 사람도 죽음을 피하고 좀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서 아무리 강한 권력이나 명예나 금력을 가졌다고 해도 실지로 성취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해답을 주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인 영원한 행복을 해결해 나가는 데에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종교가 인간이 원하는 영원한 행복을 해결해 줄 수있을까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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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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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7. 7월 재판 (2/2)
3.15 부정선거 관련자들을 심판하는 재판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법관(法官)이란 느낌이 든다. 하루종일 범법자들과 <했느냐, 안 했느냐?> 하고 범죄 내용을 파헤치느라 씨름을 하고 있어야 하니 <저노릇을 하려고 그 어렵고 고된 사법시험의 난관을 뚫고자 고생을 했는가?> 하고 오히려 동정을 하게 된다. 부정선거관리와 부정선거모의 관련자들에 대한 1차적인 공판이 끝나자 관계사법관들은 이어서 <부정선거지령>관련자들에 대한 공판을 진행했다. 그러자니 그들 사법관들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어떠했겠는가! 부정선거지령에 관한 피고인들은 모두가 전직 장관들이었다. 홍진기(전 법무부 장관)를 비롯해서 송인상(宋仁相:전 재무장관), 최재유(崔在裕:전 문교장관), 이근직(李根直:전 농림장관), 구용서(具鎔書:전 상공장관), 손창환(孫昌煥:전 보사장관), 김일환(金一煥:전 교통장관), 곽의영(郭義榮:전 체신장관) 등 9명이었다. 그들에 대한 공소장은 부장검사 염창렬(廉昌烈)이 낭독했다.
"피고인 등은 기타 국무위원과 같이 각기 자유당 중앙위원으로 있는......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안건 의결 및 양해 사항 등의 합의에 관여하여 오던 자들인 바...... 이들은 이승만, 이기붕을 각각 정.부통령에 당선케 할 목적으로 작년 3월 국무회의에서 공무원의 선거운동을 의결하고 이를 각 부처를 통하여 전국 공무원에게 지시하여 <공무원 친목회>라는 선거운동을 하게 하였고...... 지금 3월 15일에는 자유당 기획위원인 한희석, 이존화 등으로부터 자유당의 투표율이 95퍼센트를 초과한다는 통고가 있자, 이날 국무회의 투표수를 조작 삭감케 하도록 이강을 통하여 각 도지사, 경찰국장에게 지시하도록 의결, 투표수를 제멋대로 증감케 하였다......."
이것이 공소장의 주요 골자였다. 이들에 대한 첫번째 공판 역시 인정심문에 그쳤던 것이나 장관 감투를 쓰고 있던 이들의 생활상을 엿보기 위해서 인정심문의 내용을 개략적이나마 소개하기로 한다.
심문은 먼저 재무부 장관이었던 송인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재판장 경어를 또 때로는 경어인지 하대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말투를 썼다. 어째서 그랬을까?
"송인상, 가족과 재산 관계를 말하시오."
"부모가 있고 아내와 1남 4녀가 있습니다. 재산은 3천만환입니다."
"교육 관계는?"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 상과대학 전신)를 졸업했습니다."
"정당에 가입한 일은?"
"부흥부 장관으로 있을 때 자유당 중앙위원이 되었습니다."
정당에 가입한 일이 있느냐는데 부흥부 장관으로 있을 때 자유당 중앙위원이 되었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당에 입당을 해야 중앙위원이 되구말구 하는 게 아니겠소?"
"국무위원이 한 분만 빼놓고 다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판장 정영조는 애매모호한 대답에 역정이 솟구치는 모양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심문을 되풀이했다.
"결국은 가입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에 된 것이 아닌가?"
"가입원을 낸 일은 없습니다."
"가입원을 낸 일은 없어도 중앙위원을
"감수했으니 의사표명이나 같잖아!"
송인상의 이 답변을 통해서 자유당은 국무위원으로 등용한 인물은 의무적으로 당에 입당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재판장은 송인상에 이어 홍진기에 대한 인정심문을 시작했다.
"예, 모친과 처와 2남 4녀입니다."
홍진기의 태도는 송인상보다 한껏 더 공손했다. 법정 태도만이라도 좋은 인상을 주어 형량을 가볍게 해보자는 속셈인 것 같았다.
"재산은?"
"예, 약 3천만환 가량 됩니다."
홍진기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의 모친은 왕십리에서 채소 장사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하찮은 장사를 하면서도 자식을 고등교육까지 시킨 것을 보면 홍진기의 모친은 상당히 여장부였던 것 같다. 한데, 그렇듯 가난했던 홍진기가 어느 사이에 3천만환씩이나 되는 재산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
"교육과 경력은 검찰에서 말한 것이..."
"네."
"법무부 장관은 언제 했소?"
"4291년 2월 20일부터 4293년 3월 28일까지 했습니다."
"그 후 내무부 장관으로 갔지? 사임한 것은?"
"4월 25일입니다."
"피고인은 본 건 이외에도 다른 사건으로 제소된 적이 있지?"
"네, 있습니다."
"무슨 사건이요?"
"살인교사, 무고교사로 되어 있습니다."
홍진기는 부정선거 지령사건 이외에도 발포명령자 사건과 이른바 민주당 전복음모사건으로 기소되어 있었다. 이 민주당 전복음모사건에 대해서는 필자가 있지만 사건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1952년 6월 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있었던 6.25 2주년 기념식장에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범인은 김시현(金時顯)과 유시태(柳時泰)였다. 한데, 1958년에 이르러 마산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김시현이 재심을 청구하는 탄원서를 냈다. 이 탄원서에 김시현은 <이승만을 암살하려 한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민주당 전신)의 조병옥, 장면, 서상일 등의 교사에 의하여 암살하려 했던 것이다>라고 밝혔던 것이다. 물론, 김시현이 탄원서에서 밝힌 조병옥, 허위였다. 김시현은 어떻게 해서 이런 허위를 날조해서 재심을 탄원하게 되었던 것인가? 바로 배후에서 이기붕, 홍진기 등이 이태희(李台熙)라는 사람을 내세워 <그렇게 탄원하기만 하면 밝은 햇빛을 쏘이게 해줄 뿐만 아니라 여생을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교사해서 그런 날조된 탄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목적은 물론 이 탄원서를 근거로 해서 조병옥, 장면 등을 때려 잡자는 데 있었음은 새삼 부연할 필요도 없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이 사건을 세칭 <민주당 전복음모사건>이라 일컫게 되었고 4.19가 터지자, 홍진기는 <무고교사혐의>로 기소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족은 처와 2남 4녀가 있습니다. 재산은 2천만환입니다."
"정당 관계는?"
"다른 피고의 말과 같이 4292년 10월경에 자동적으로 자유당 중앙위원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고인 신현확, 가족과 재산은?"
"처와 1남 4녀가 있고 재산은 약 3천만환 됩니다."
"교육은?"
"경성제대(京城帝大:서울대학 전신) 문학부를 졸업했습니다."
"피고인 이근직, 가족과 재산은?"
"가족은 3남 3녀에 처가 있습니다. 재산은 2천만환 됩니다."
"피고인 구용서, 가족과 재산 관계를
"아내와 1남 1녀입니다. 재산은 3천만환입니다."
"피고인 손창환, 가족과 재산은?"
"처와 2남 1녀가 있고 재산은 병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시설까지 하면 한 5천만환 됩니다."
"정당 관계는?"
"없습니다."
"다른 장관은 다 자유당 중앙위원이 되었다는데, 피고인 한 사람만 안 된 이유가 뭐요?"
"저 자신은 정당에 취미가 없고, 또 대한적십자 총재이고 해서 보사부 장관이라 해도 사회복지 사업은 정당을 초월해서 해야 사업이라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가족은 모친, 처, 2남 5녀입니다. 재산은 1천만환 정도입니다. 집이 작기 때문에......."
"피고인 곽의영, 가족과 재산은?"
"딸이 다섯이고 아들이 셋, 해서 8남매이고 모친하고 처, 그리고 제 남동생이 있어 열두 식구올시다. 재산은 서울에 집이 하나 있고 지프차가 있으며 모친이 농사 짓는 부동산이 있습니다."
"재산이 전부 얼마나 돼?"
"약 2천만환 가량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이들 피고인들은 마치 똑같이 의논이나 한 듯이 그들의 재산 정도가 2천만환이 아니면 3천만환이라고 진술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집만 호가하고 있는 집들이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덩그라니 집 한 채 이외에는 전혀 재산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그들의 재산 정도를 줄여서 답변했던 것이 분명했다. 행여 곧이곧대로 답변했다가 <권력을 미끼로 부정축재를 한 게 아니냐?> 하고 재산 형성에 대한 추문을 받을 것이 두려워 재산 정도를 줄여서 답변했던 것일까? 부정선거지령 관련자들에 대한 인정심문이 끝나자, 이어 부정선거자금 관련자들에 대한 공판이 열렸다. 이 사건으로 법정에 세워진 인물들은 박용익, 송인상을 포함해서 금융계의 거물들이라는 김영찬(金永燦:전 산업은행 총재), 김진형(金鎭炯:전 한국은행 총재), 배제인(전 한국은행 업무담당 부총재) 등 6명이었다. 이 공판에 관여한 검사는 이용훈(李龍薰), 이택규(李宅硅) 두 사람이었다. 검사의 공소장 낭독에 이어 인정심문이 있었을 뿐 구체적인 사실심리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이들에 대한 인정심문 내용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런 죽일 놈들, 이놈들 이거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게 아냐?"
이 무렵의 말투는 누구라 할 것이 없이<죽일 놈 살릴 놈> 하며 거칠기만 했다.
"이런 놈들을 데려다 놓고 뭐 이것저것 물을 게 뭐가 있어? 모조리 광화문 네거리에 세워 놓고 탕탕 해 버리고 말 일이지."
"그러게 말일세. 어차피 이놈들 모조리 죽여 버릴 놈들 아닌가. 공연히 시간 낭비하고 있을 게 뭐야, 에이 답답한 친구들 같으니."
"옳은 말일세. 이런 놈들은 모조리 요절을 내가지고 옛날처럼 광화문 네거리에 효수를 해야 옳아, 그래야 정권 쥔 놈들이 다시는 극악무도한 짓을 못하는 법이라고."
파고다 공원이든 또는 다방이든 두세 사람 모이기만 하면 화제는 의논이나 한 듯이 꼭 같았다. 바로 어제 있었던 부정선거관리 관련자들에 대한 것이 어제 공판은 KBS 라디오 방송으로 전국에 중계되었다. 또 신문에서도 상세히 보도되었다.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이 좀 사나이답게, 그리고 정직한 자세로 재판을 받았다면 오히려 동정을 받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직하지가 못했다. 인정심문에서 재판장이,
"그대들의 재산 정도는 각각 어느 정도지?" 하고 물었을 때 정직하게 대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의논이라도 한 듯이 줄이고 또 줄여서 대답을 했다. 앞의 인정심문 내용을 통해서 독자들도,
"그래 자유당 내에서도 최고위직에 있던 자들의 재산 정도가 기껏해야 몇 품게 되었을 것으로 알지만 그때에도 역시 일반 대중은 그런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야아, 이놈들 이거 웃겨도 보통 웃기는 놈들이 아니구나. 그래 배제인, 손창환이가 기껏해야 5천만환 정도의 재산밖에 갖고 있지 않단 말야?"
"자유당 선거대책위원인 이존화란 놈은 또 어떻고. 그놈 고작 재산이 2백만환밖에 안 된다고 하잖았어?"
죽일 놈, 살릴 놈하며 욕설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내무부 지방국장이었던 최병환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재산이 고작 6백만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내무부의 경우, 지방 국장직은 관료로서는 노른자위라고 했다. 시장, 군수의 인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는 최병환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단돈 한푼도 긁어먹지 않았단 말인가? 그의 재산 정도가 고작 6백만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청백리>라 할 수 있었다. 자고로 청백리란 재물에만 탐을 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권력에 빌붙는 것까지도 치사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만일 권력이 부당한 요구가 있게 되면 기꺼이 괘관(掛冠)해 버리는 것이 청백리의 마음가짐이었다. 최병환이 청백리였다면 부정선거를 자행하려는 무리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것이 아니라 깨끗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 앉아야만 옳았다. 한마디로 개수작이었다. 재산 정도를 밝힌 부정선거관리 관련자들의 개수작을 종합해 보니까, 되지 않았다.
"이런 좁쌀 같은 놈들을 장관이다 뭐다 감투를 씌워가지고 고굉지신역을 당부했으니 이승만이 망하지 않고 배겨날 수가 있어?"
마침내는 욕설이 이승만에게까지 미쳤다. 이승만은 먹지 않아도 될 욕설까지도 공짜로 먹게 된 것이다.
"왜 사나이답게 떳떳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해! 내 재산이 얼마다 하고 사실대로 밝혔다고 해서 누가 빼앗을 것도 아닌 바에야 왜 좀 떳떳하게 굴지를 못해?"
일반 서민대중의 이들에 대한 욕설을 여기에 소개하자면 한이 없다. 하여간에 그들은 또 부정축재자로 불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는지도 모를 된 몸, 부정축재자로 몰리면 또 어떤가. 몸뚱이 하나만 제외하고는 모조리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민족 앞에 저지른 죄과를 속죄하겠다고 했던들 그들은 오히려 동정을 받았을 것이고 그들의 인생에 막을 내리고 관뚜껑을 닫게 되었을 때 그들에 대한 평가는 좀더 달라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정선거관리와 부정선거모의에 관련된 자들에 대한 공판이 열린 다음날, 검찰은 부정선거관리에 관한 5명의 피고인들에게 국가보안법 제1조 반국가 단체 구성죄를 적용키로 하고 이들을 추가 기소했다. 국가보안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이 법의 제1조를 적용하게 될 경우, 무기징역에서 사형(死刑)까지의 중형이 내려질 수 있기 세상사(世上事)란 참으로 기기묘묘하다 할 수밖에 없다. 최인규, 한희석이 속해 있던 자유당이라는 집단의 패거리들이 종래 시행되고 있던 <국가보안법>을 보안해서 다시 만들지만 않았던들 그들이 법의적용을 받는 일은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느낌이 들어서 하는 소리다. 종래 시행되고 있던 국가보안법은 1948년 11월, 제헌국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때 법률을 만들게 되었던 배경은 지하로 들어가 준동하고 있는 남로당(南勞黨)을 때려잡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 독립정부 수립과 함께 지하로 들어간 공산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파괴를 목적으로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일으키는가 하면 무장 게릴라 전법을 써 약탈, 방화, 살인을 있었다. 여기에 곁들여 김일성 괴뢰집단은 어떠했는가 하면 그놈들 역시 무장 게릴라를 남파해서 양민을 학살하는 등 만행의 도수가 점점 짙어만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놈의 공산주의자 놈들을 응징하고자 해서 만든 법률이었다. 그런 까닭에 법조문도 고작 6개조에 불과했다.공산주의자들을 응징하는 데 많은 법조문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유당은 10년 뒤인 1958년 11월에 이르러 <전문 3장 40조 부칙>이라는 방대한 법률로 개작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시행중에 있는 국가보안법으로는 규정 형식이 단순해서 6.25 사변 이후의 착잡한 정세, 특히 현재 북한 괴뢰정권의 어렵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은 보완개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당이 진정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에만 목적을 두고 있었다면 굳이 이 법률의 개정을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전문 40조나 되는 이 법률 조항을 하나하나 깊이 따져볼 때, 자유당의 속셈은 반드시 그들이 내세운 이유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꿰뚫어 볼 수가 있다.
"이 국가보안법 개정 법률안은 공산주의자나 간첩을 때려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2년 뒤에 있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입을 틀어막고 여차하면 야당을 때려잡자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민주당은 당의 존폐를 걸고 이 법률안의 통과를 막겠다."
같이 자유당의 속셈은 민주당의 입을 틀어막고 국가보안법으로 올가미를 씌워 때려잡자는 데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야당의 입을 틀어막고 때려잡지 않고는 앞으로 있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도저히 승산이없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이 법률안 저지에 당의 목숨을 걸었다. 11월 19일의 법사위원회에서 자유당이 이 법안을 전격적으로 모조리 가결시키자 민주당은 소속 의원 전원을 동원, 의사당 본회의장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본회의에서 통과되는 것을 막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자유당도 속수무책으로 가만히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너희 야당놈들이 본회의장을 점거해서 그런다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할 줄 알았어?"
자유당에서는 마침내 의장의 직권으로 <경위권(警衛權)>을 발동시켰다. 그러나 국회에는 경위의 소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당에서는 편법으로 전국에서 무술깨나 쓰는 경찰관을 선발, 상경하게 해서 국회 경위로 임시 채용하는 형식을 취해 그들로 하여금 본회의장에 진출시켜 농성중에 있는 민주당 국회의원을 번쩍 들어서 의사당 밖으로 내동댕이치도록 했다.
"야아! 이놈들아, 너희놈들이 이 따위 야만적인 짓을 할 수 있어?"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끌려나각지 않으려고 고래고래 악을 쓰며 버텼으나 없었다.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깝다>는 우리 속담이 바로 그대로였다. 이것이 11월 24일,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농성을 벌인 지 닷새 만의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헌정사에서 <24파동>이라 일컫고 있는 것이다. 자유당은 농성중인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깡그리 의사당 밖으로 내몰고 나자, 저희들끼리 오손도손 모여 앉아 단 1분도 못 되는 사이에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켜 버리고 말았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자유당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기는 했으나, 야당 특히 민주당을 때려잡는 일에는 단 한 번도 써보지를 못하고 만들었던 법률에 되려 거꾸로 그 법률을 만든 장본인인 최인규, 한희석이 얻어맞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세상사 요지경 속 같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가보안법 제1조를 적용하게 될 경우,운명의 결과가 어찌될 것인지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두번째 공판에 끌려나온 부정선거 관리 피고인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들은 이제 살아남기는 글렀다는 체념의 표정들이었다. 자승자박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야당을 때려잡기 위해서 만들어 놓았던 올가미가 자기들 모가지에 씌워졌으니 이게 도무지 무슨 꼴이란 말인가!
<억울하거든 출세하라!> 7월 재판이 시작되자 다방가에서는 한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억울하거든 출세하라. 출세, 한국적 출세는 관리가 되어 고관대작이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라고 하면서도 고관대작으로 출세를 하기만 하면 갖가지 특권이 부여되었다. 최인규, 홍진기 등 이른바 3.15 부정선거원흉들이 영어의 신세가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무엇이 특권이었던가? 재판을 질질 끌어주는 것이 특권이라 할 수 있었다. 재판을 질질 끌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하루라도 더, 한 시간이라도 더 생을 누릴 수가 있었다. 해당되었다. 아무리 법이 온정을 베푼다고 해도 그들은 도저히 살아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숱한 젊은 꽃들이 목숨을 빼앗기고 다치고 했는데, 원흉으로 지목된 자들이 죽음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아마도 어쩌면 당사자들도 생을 체념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재판을 질질 끄는 것이다. 하루라도 더 생을 누리라고 해서. 혹시 또 누가 알겠는가. 세상이 또다시 뒤집히는 일이 있을는지. 그렇게 되면 살아날 구멍이 생길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까 재판을 질질 끄는 것이다. 물론 질질 끄는 구실은 얼마든지 제시할 수가 있었다.
"원흉들이라 캐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이 한마디면 족했다. 한데, 원흉들의 재판 양상과는 달리 출세하지 못한 자에 대한 재판은 글자 그대로 <전격적>이었다. 그들 보잘 것 없는 저질들한테서는 캐낼 것도 없고 오로지 저지른 죄과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에 전격적으로 재판을 진행했던 것일까? 7월 7일 서울 지방법원에서 열린 밤초 경관에 대한 재판에서는 두 경찰관들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7월 재판의 첫 판결에서 극형선고를 받은 경찰관은 서울 성북(城北) 경찰서에 근무하던 순경 정완종(鄭玩鍾)과 권희용(權熙瑢)이었다. 먼저 그들에 대한 기소장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관내 북선(北仙) 파출소 앞에서 경비근무중, 때마침 이승만 정권 타도를 외치며 지프차를 타고 지나가는 서라벌 고교생 오경섭(吳京燮), 박천기(朴天基)에게 발포를 하였으며 총탄에 쓰러지면서 신음하는 17세 소년들에게 달려들어 <공산당 같은 놈이다> 하면서 총을 쏘았다. 총에 맞은 오경섭 군이 <물을 달라>고 하자 사경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게 복부에 상해를 입혔다. 동료인 김원철(金元哲) 순경이 제지한 일까지 있다(이상 정 피고). 또한 데모대원 박천기 군을 뒤쫓아 발포하였다(권 피고).
그들 두 경찰관이 기소장 내용과 같은 받았다고 해서 동정은커녕 정상조차 참작하려 하지 않은 재판장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어린 소년에게 두 번씩이나 총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악마와도 같은 그들의 비정한 인간성에 누구나가 치를 떨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언론에서도 박수 갈채를 보냈다.
<이번 판결은 과연 법이 법 구실을 했다. 살인자는 사(死)라는 원칙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국민의 총의를 그대로 반영했다는 데서 환성이 오른다.......>
한데, 정상은 마땅히 참작됐어야 옳았다. 우선 인간이란 피를 보게 되면 극도로 흥분을 하게 된다. 두 눈에는 핏발이 서고 이성은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다. 이래서 가능하다. 상사의 명령도 있었겠다, 다른 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잔학 행위는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두 피고에게 사형이 언도되자 그들의 가족들은,
"진정 억울하오. 명령에 따라 행동했는데 어떻게 그런 가혹한 형벌을 내릴 수 있단 말이오. 쏘라고 한 놈이 원수요"
하면서 통곡을 터뜨렸는데 명령에 따른 행동은 마땅히 참작되었어야 옳았다. 재판관은 판결문에서 뭐라고 했던가?
본건 공소 내용에 지적된 바, 피고인들이 4.19 의거 당시 데모 군중에게 실탄을 발사하여 사상자를 발생케 한 사실을 또한 피해자측의 각 증언과 증거물 등에 의하여 공소 내용에 대한 증거가 있다고 인정한다. 피고들은 경찰관으로서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거 학생들을 살상하였음은 재판사상 용서될 수 없는 일이며 양형의 차이나 정상을 참작할 수 없으므로 사형을 언도한다.
언론 또한 이 판결에 맞장구를 쳤다. <사정(私情)은 사정이요, 대의(大義)는 대의다. 아무리 쏘라고 했더라도 대의를 만분의 일이라도 염두에 두었더라면 쏘는 체 마는 체하고 그 자리를 슬쩍 피했을 수도 있었을 걸.......> 행위를 매도하며 판결문을 지지했다.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수작을 언론에서는 지껄이고 있었다. 경찰은 군대와 마찬가지로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생명이다. <쏘는 체 마는 체>, 또 <그 자리를 슬쩍 피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수작인가? 4.19 사태가 의거로써 가치를 지니게 되었으니 망정이지 만일 이 사태가 진압되었더라면 쏘는 체 마는 체했던 경찰관의 운명은 어찌 됐을 것인가? 상명불복죄가 적용하게 되었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된다. 재하자(在下者)는 유구무언이다. <데모 학생들을 쏘라>는 상사의 명령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명령에 따랐다. <출세하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 데모 학생에게 총격을 가해 살상을 일삼았다가 체포되어 7월 재판에 회부된 경찰관은 앞의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마산 경찰서의 박종표(朴鍾杓)가 <살인 경관>이라 해서 체포되었고 서울의 김종호(金鍾浩), 심영구(沈泳求), 이태수(李泰洙) 등도 태평로 파출소 앞에서 데모 학생에게 총질한 것이 <살인 경찰관>이라 해서 체포되었다. 또 서울역전 파출소의 주임으로 있던 백기순(白基淳)도 같은 혐의로 체포, 구속되었다. 그런데 4.19 사태 때 200명 가까운 청년 학생들이 희생이 되었고 헤아리기 어려운 수의 젊은이들이 총상을 입었는데, 이들을 살인 경찰관에 대한 극형 언도는 4.19 사태에 희생된 자의 유가족이나 또는 부상자, 그리고 일반 국민의 가슴속을 후련하게 해주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언도 그 자체도 국민의 가슴을 후련케 해주자 하는 목적의식이 다분히 적용되었던 것 같은 인상이 짙었다. 이 판결 결과 뒤에 발포멸령자에 대해서 내려졌던 판결을 비교해 보면 더욱더 그런 느낌이 짙어진다. 뭐가 법관의 양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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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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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제국의 변경에서는
제5권에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벌어진 내전을 기술하고 있을 때 내 머릿속을 오간 생각 가운데 하나는 왜 속주민이 봉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두 사람이 저마다 자기 주변에 병력을 집결시켰기 때문에, 그때까지 로마에 정복당한 지방들은 군사적으로 공백상태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제패는 얼마 전에야 끝났을 뿐이고, 폼페이이우스가 동방을 제패한 것도 기껏해야 10년 전의 일이었다. 로마 세계의 동서 양쪽에는 두 사람에게 패배한 자들이 아직 건재해 있었다. 이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되찾을 마음만 있었다면, 로마인끼리 서로 싸우고 있는 이때야말로 다시없이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전이 계속된 3년 반 동안 로마에 반기를 들고일어난 속주는 하나도 없었다. 카이사르에 의해 라인강 동쪽으로 쫓겨난 게르만족도 얌전했다. 카이사르가 출현하기 전에는 집요할 정도로 라인 강을 넘어오던 게르만족이 내전 중에는 라인 강을 건너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로마인끼리 싸운 내전은 그것만이 아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부터 옥타비아누스 시절의 아우구스쿠스가 종결시킬 때까지 14년 동안 계속된 내전도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상대로 싸웠고 그 다음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맞서 싸운 이 내전은 대부분 냉전 상태였고, 열전을 벌인 것은 필리피 회전과 악티움 해전뿐이니까, 이 경우에는 비교 대상이 되기 어렵다. 서기 69년의 내전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싸운 120년 전의 내전밖에 없다. 서기 69년의 내전은 불과 1년 만에 해결되었다. 하지만 네로 황제의 결단 덕분에 좋은 관계를 맺은 동방 국경을 빼고는, 그 1년 사이에 로마인끼리 싸우고 있는 기회를 틈타 반란을 일으킨 민족이 많았다.
아직도 완전히 제패하지 못한 브리타니아에서는 로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원주민 부족을 진압하느라, 주둔군 3개 군단 가운데 1개 군단만이 본국 이탈리아로 돌아오라는 명령에 응할 수 있었다. 도나우 강 방위선에서는 다키아족이 로마 영토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서쪽으로 행군하던 무키아누스가 방위선을 지키기 위해 잔류한 군단병과 함께 다키아족을 격퇴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라인 강 방위선에서는 로마군의 보조전력인 보조병들이 주전력인 군단병을 공격하는 로마 역사상 최초의 불상사가 일어났다. 게르만계인 이 보조병들은 라인 강 동쪽 연안에 사는 게르만계 부족과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역시 로마의 속주민인 갈리아인들까지 끌어들였다,. 갈리아인들은 갈리아 제국을 건설하여 로마의 지배에서 독립하려고까지 했으니,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격돌한 3년 동안은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삼황제 시대'인 1년 동안은 왜 이렇게 변경이 시끄러웠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유명인사였다., 로마에 대한 봉기를 이끌 수 있을 만한 신분과 힘을 가진 속주의 유력자라면 두 사람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반대로 갈바와 오토와 비텔리우스는 지명도가 아주 낮았다. 이름을 모르면, 행동을 일으킬 때 느끼는 위압감도 없다. 둘째,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동방을 제패한 인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고 게르만족을 무찌른 인물로, 그 눈부신 군사적 업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속주의 유력자들과 로마의 방위선밖에 사는 사람들은 이들 두 사람에게 완패당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세 황제는 이런 점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뒤떨어진다. 갈바도오토도 비텔리우스도 속주 총독은 지냈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은 없다. 속주민이나 변경 부족들이 전력을 다해 싸웠는데도 패배한 상대는 아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도 이 점은 마찬가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유대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세 번째 이유는 전쟁터가 어디였느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싸울 당시의 전쟁터는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스,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거쳐 마지막에는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왔으니까, 로마 세계 전역을 망라하고 있다. 반대로 서기 69년의 전쟁터는 북이탈리아에 국한되어 있었고, 그것도 두 번 다 반경 30킬로미터에 불과한 같은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수도 로마를 전쟁터에 포함시킨다 해도, 이탈리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드넓은 로마 제국의 변경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국의 중심이라 해도 머나먼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투에 불과하다.
요컨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싸움은 아프리카의 대초원 전역을 무대로 벌어지는 거대한 코끼리들의 격전이라고 해도 좋다. 여는 코끼리보다 더욱 거대한 수코끼리가 이끄는 어마어마한 코끼리떼가 대초원도 비좁다는 듯이 지축을 울리며 정면으로 격돌한 것과 같은 느낌이다. 백수의 왕 사자조차도 겁을 먹고 초원 한구석에 웅크린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섣불리 초원 한복판에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종횡무진으로 질주하는 코끼리떼에 자칫 밟혀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백수의 왕 사자도 이럴진대, 평소에는 무리를 지어 사자한테도 대담하게 맞서는 하이에나라 해도 숨을 죽이고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기 69년에는 대초원 중앙의 한 곳에서 암사자를 차지하기 위해 수사자끼리 싸운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동물들이 꼼짝도 못할 만한 충격을 주는 격투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원전 1세기의 내전은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로 계속 가느냐, 아니면 새로운 정치체제인 제정을 선택하느냐를 놓고, 말하자면 국가의 기틀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하면, 제정을 선택한 지 100년이 지난 서기 1세기의 내전은 누가 제정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따라서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대초원 주변에서는 각 동물들이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비텔리우스의 죽음으로 전쟁 상태는 끝났지만 그것이 곧 평화 회복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타키투스의 말은 옳다. 사자끼리는 승부가 끝났지만, 대초원의 다른 곳에서는 무질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오른팔인 무키아누스의 과제였다.
속주병 반란
오늘날 네덜란드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각양각색으로 아름답게 핀 튤립이고, 해수면보다 낮은 땅을 엄청난 노력 끝에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바꾸어놓은 근면한 민족의 이미지다. 네덜란드인은 월드컵에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여 전세계를 경탄시킨 민족이기도 하다. 인종 혼합에 너그러운 나라여서 오늘날에는 흑인 네덜란드의 백인 축구선수를 떠올리면 된다. 로마인들은 이 네덜란드인의 선조를 바타비족이라고 불렀다. 라인 강 어귀 근처에 살고 있던 이 게르만계 부족은 로마의 속주민이 아니다. 속주민이 아니니까 속주세를 낼 의무도 없다. 하지만 로마인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달인이기도 하다. 속주로 삼아 로마 영토에 편입시키지는 않았지만, 동맹관계는 맺고 있었다. 바타비족이 로마에 병력을 제공하는 대신, 로마는 그것을 격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협약이다. 이같은 관계는 라인 강을 북쪽 방위선으로 생각한 최초의 인물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시작되었다. 카이사르가 라인 강을 방위선으로 삼을 작정이었던 것은 다음 몇 가지 사실로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첫째, 그가 갈리아를 제패했을 때 이미 라인 강 서쪽에 정착해 있던 게르만족은 그 땅에서 그대로 살도록 허락했다. 나중에 저지 게르마니와 고지 게르마니아의 두 속주로 분리된 라인 강 서안 일대, 그러니까 오늘날의 네덜란드 남부와 독일 서부, 벨기에 동부와 스위스는, 카이사르가 오기 전에는 라인 강을 건너 서쪽의 갈리아로 이주한 게르만족의 주거지였다. 바꿔 말하면 이 지방 주민은 갈리아인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오늘날의 프랑스에 거주한 갈라아인과는 다른 게르만계 갈리아인이었다. 둘째, 카이사르는 강 동쪽에 살면서 로마와 항상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던 게르만계 우비족에게 라인 강 서쪽으로 이주할 것을 권하고, 후세에 퀄른을 이들의 근거지로 내주었다. 이것은 라인 강이라는 로마의 방위선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다른 갈라이인들에게 그랬듯이 이들 게르만계 갈리아인에게도 자신의 씨족 이름인 '율리우스'를 주어, 그들과도 '클리엔데스'(영어로는 클라이언트) 관계를 맞었다.
현대식으로 생각하면 본가와 분가의 관계나 두목과 부하의 관계, 또는 후원회 체제와 비슷하다. 말하자면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공동운명체를 구축한 것이다. 카이사르가 이들 부족의 유력자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 것이 그 증거다. 로마 시민권은 세습권이니까, 이들은 자손 대대로 로마 시민이 된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로마의 패권 밑에 들어온 갈리아인이나 게르만계 갈리아인 외에도 이 방식을 적용했다. 이는 로마의 패권이 미치지 않는 라인 강 동쪽의 부족들을 회유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 결과 라인 강 어귀의 북쪽, 오늘날의 암스테르담 주변에 살고 있던 바타비족의 부족장과 그 친족들도 로마 시민이 되어 '율리우스'를 씨족 이름으로 삼게 되었다. 이 방식이 실시되었을 당시에는 키케로와 소 카토와 브루투스도 자기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책략이라고 카이사르를 비난했지만, 이런 비난은 근시안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씨족 이름을 하사한 것은 그것이 그 상황에서는 가장 손쉬운 방책이었기 때문일 뿐이다. 카이사르가 죽고 그의 혈통을 이어받은 '율리우스-클라디우스 왕조' 가 무너진 뒤에도 '율리우스'들과 로마의 공동운명체적 관계가 지속된 것이 그 증거다. 카이사르는 이들과 자신의 '클리엔테스' 관계가 이들의 자손과 로마 제국의 '클리엔테스'관계로 계승되어 가리라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런 방책이야말로 백년대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는 100년이 아니라 적어도 400년은 계속되었지만. 바타비족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었을 때 그들은 로마에 병력을 제공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로마인의 지휘를 받다, 로마군의 주전력인 군단병을 보조하는 '보조병'으로서 보조부대에 복무하는 것이다. 로마인이 병력을 제공받는 것은 단순히 병력 확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고용을 보장해주는 의미도 있었다. 생활이 안정되면 인간은 보수적이 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보수적이 되면, 로마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과격한 행위에 호소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보조병을 활용하는 이런 제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군제를 확립한 뒤에는 로마군의 정식 편제로 정착했다. 복무기간도 25년으로 명확하게 정해졌고, 만기 제대할 때는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으니까, 바타비족 중에도 로마 시민이 급증했을 것이다. 하지만 '율리우스'라는 씨족 이름을 가질 권리는 부족장급에 한정되어 있었다. 제3대 황제 칼리굴라까지는 율리우스 씨족 출신이다. 황제와 같은 씨족 이름을 갖는 것은 같은 부족에 속하는 다른 남자들과의 차이를 나타내는 특권으로서도 효용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카이사르는 매사에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율리우스'라는 이름을 하사한 목적도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 특권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속주민이나 로마의 동맹국 백성으로 구성되는 보조부대는 같은 지방이나 같은 부족 출신끼리 부대를 만든다. 이 부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은 병사들이 속해 있는 부족의 족장급이 맡는 게 보통이었다. 로마 시민만으로 편성되는 군단의 지휘관을 등용할 때는 철저하게 실력제일주의를 채택한 서기 1세기에도 보조부대의 지휘관을 등용할 때는 권위를 먼저 앞세운 것도 흥미롭다. 합리적 사고와 문명도는 비례 관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거야 어쨌든, 서기 69년 당시 8천 명으로 구성된 바타비족 부대를 통솔하고 있던 지휘관의 이름은 율리우스 키빌리스였다. 물론 로마 시민권 소유자다. 그리고 이 '율리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로마인끼리 싸우고 있는 틈을 노려, 라인 강 하류 일대에서 로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 사건은 결국 1년도 지나기 전에 해결되지만, 거기에 대해 서술하기 전에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서술에는 이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씨족 이름이 번거로울 정도로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여느 때라면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되도록이면 개인 이름(프라이노멘), 씨족 이름(노멘), 가문 이름(코그노멘)을 셋 다 쓰지 않고 가문 이름만 쓰는데(예컨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경우 카이사르라고만 쓰는 것처럼). 여기서 씨족 이름까지 덧붙여 쓰는데에는 다른 목적이 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나 율리우스 클라시쿠스처럼 씨족 이름과 가문 이름을 둘 다 쓰는 것은 이들이 120년 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씨족 이름을 받은 자들의 후손임을 느끼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 이게 뭐야.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몽땅 카이사르가 뿌린 씨잖아. 정말로 그렇다. 어이가 없을 만큼 모두 '율리우스'다. 그렇다면 '영웅전'의 저자인 플루타르코스가 아무리 칭찬해도 카이사르의 피정복민동화정책은 결국 실패한 정책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율리우스'를 씨족 이름으로 가진 비로마인은 반란 주모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속주병 반란으로 시작하여 갈리아 제국 건설까지 시도한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계획이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갈리아의 다른 '율리우스'들이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건 관계자 외에도 많은 '율리우스'가 존재했고, 로마 제국에 대한 그들의 공헌은 몇 사람의 이름만 들어보아도 분명하다. 유대인 출신으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적극 협력한 이집트 장관의 이름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다. 이 시기에 그는 티투스를 도와서 예루살렘 공략전을 펴고 있었다.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수도 연구서를 쓰고, 서기 69년 당시에는 수도 로마의 법무관이었던 사람의 이름은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원로원 회의 소집권은 집정관과 법무관만 갖고 있다.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를 집정관에 선출하여 질서 회복에 박차를 가하려 한 무키아누스도, 법무관 프론티누스의 협력이 없었다면 그 생각을 실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은 역사가 타키투스의 장인이며 브리타니아 제패를 완성한 율리우스 아그리콜라다. 이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120년 전에 카이사르가 뿌린 씨는 당당한 거목으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일을 할 때는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몇 가지 위험이 있었다 해도, 그것으로 그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카이사르의 동화정책을 로마 황제들이 아무도 고치려 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다. 속주병 반란을 해결하고 제국 재건에 착수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도 이 정책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카이사르적 사고방식의 효용성에 의심을 품은 통치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카이사르의 동화정책에 수반된 위험은, 반란 주모자로 '율리우스'가 등장할 때마다 이 사람도 '율리우스'인가 하고 웃어넘기면 될 정도의 위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드러난 '율리우스' 이외의 문제는 후세의 역사가 몸젠이 유례없는 불상사로 단죄할 만큼 심각했다. 그것은 내전의 폐해가 다른 방면에도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율리우스 키빌리스
바타비족의 지도자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서기 69년에 몇 살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인물이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네로 황제 시대인 62년에 브리타니아 제패를 추진하고 있던 파울리누스 휘하에서 바타비족 부대를 이끌고 참전했을 때였다. 아무리 '율리우스'라는 씨족 이름을 가진 신분이라 해도 젊은 나이에 8개 대대 8천 명의 병사를 지휘한 경우는 없으니까, 적어도 마흔 살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기 69년에는 40대 후반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로마군에서 복무한 경험은 서기 62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게 분명하니까, 이 바타비족 사내는 일개 졸병이라면 만기 제대할 수 있는 25년을 로마군에서 보낸 게 아닐까. 로마군은 보조부대 지휘관도 작전회의에 참석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두되와 의욕만 있으면 로마군의 장점은 물론 단점까지도 모두 알 수 있다. 실제로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그것을 모두 알고 최대한 이용했다. 또한 이때가지만 해도 보조부대는 이따금 원정할 때를 제외하면 그 부대 병사들의 출신지 근처에 주둔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라인강 어귀 일대 출신인 바타비족 부대도 '저지 게르마니아'라고 불리는 지방, 즉 오늘날 독일의 본에서 라인 강 어귀에 이르는 하류 연안에 주둔해 있었을 것이다. 비텔리우스도 황제를 자칭하기 전에는 저지 게르마니아를 맡고 있던 사령관이었다. 그리고 황제를 자칭하고 나선 그의 뜻을 받들어 병력을 이끌고 본국 이탈리아로 쳐들어간 카이키나와 발렌스도 저지 게르마니아군에 소속된 군단장이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 참전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그때의 혼전은 주전력인 군단병과 보조전력인 보조병이 한데 뒤섞여 싸웠다는 데 특징이 있다. 양쪽 다 총지휘를 맡은 사령관의 능력이 부족했던 결과다. 그리고 그때의 전투는 군단병도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보조병들에게 심어주는 부산물을 낳았다. 4월15일에 벌어진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승리한 뒤 보조병들은 주둔지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이끄는 바타비족 부대의 반란은 귀환 명령을 받은 보조병들과 함께 라인 강 연안에 도착한 여름에 일어났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왜 로마에 반기를 들었을까. 역사가 타키투스의 주장은 이렇다. 비텔리우스를 지지하는 '라인 군단'의 나머지 부대가 이탈리아로 남하하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서 그들의 발목을 라인강 연안 기지에 묶어둘 속셈으로, 베스파시아누스 쪽에서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를 통해 율리우스 키빌리스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타키투스의 '역사'에 입각한 후세 연구자들도 대부분 이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다. 속주병 반란이 베스파시아누스의 사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황제가 되려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는 치명타가 되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기존 지배층에 속하지 않는 '신참자'(호모 노부스)다. 그런 처지에서 로마 시민도 아닌 속주병에게 로마 시민인 군단병을 혼내주라고 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원로원도 일반 시민도 격분할 것이다. 마키아벨리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면'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릴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속주병에게 반란을 사주하는 것은 절대로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었다. 냉철한 무키아누스가 그런 명령을 내릴 리는 없다.
그렇긴 하지만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혈기왕성하면서도 생각이 얕은 사내였으니까, 어쩌면 베스파시아누스나 무키아누스의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닌데 혼자 생각으로 율리우스 키빌리스에게 그런 연락을 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1년 동안 황제가 네 명이나 연달아 나타났다는 사라진 이 혼란을 활용한 것은 바타비족이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속셈은 로마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지만, 비텔리우스파 병사들이 지키는 라인 강 연안의 기지를 공격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 기지를 기치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낮에도 어두컴컴한 숲이야말로 게르만족의 본향이다. 로마에 맞서 봉기하기로 결심한 율리우스 키빌리스도 회합지로 숲을 선택했다. 연회를 위장하여 초대한 바타비족 유력자들 앞에서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게르만족의 혼을 역설하고, 지금이야말로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날 기회라고 강조했다. 정예 병력이 이탈리아에 가 있는 지금, 기지를 지키는 군단병은 노약자들뿐이다. 그런데 기지에는 빼앗을 만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다. 라인 강 방위선을 지키는 군단의 영광도 먼 옛날의 일이고, 지금은 그것도 명칭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로마 군단이라 해도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웅변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그것도 명칭으로만 남아 있을 뿐' 이라는 말을 좀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 군단은 제1군단이나 제2군단처럼 숫자로 불리기도 했지만, 정식 명칭은 제1 XX군단이었다. XX에 들어가는 명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군단을 편성한 사람의 이름을 딴 경우. 제2 아우구스타 군단(브리타니아 주둔)과 제8 아우구스타 군단(모에시아 주둔)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땄다. 제7 클라우디아 군단(모에시아 주둔)과 제11 클라우디아 군단(달마티아 주둔)은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편성한 군단이다. 둘째, 지원자를 모집한 지방의 이름을 딴 경우. 제1 게르마니카 군단(저지 게르마니아 주둔), 제16 갈리아 군단(저지 게르마니아 주둔), 제4 마케도니카 군단(고지 게르마니아 주둔), 제9 히스파나 군단(브리타니아 주둔)은 각각 갈리아 동부와 서부, 그리스 북부, 그리고 에스파냐에서 군단이 편성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제5 알라우다 군단은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대결할 당시 남프랑스의 갈리아인들을 모아서 편성한 군단이다. 알라우다는 남프랑스에 많은 종달새를 말한다. 셋째,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위세 좋은 이름을 붙인 경우.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예로 것은 이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군단이었다. 제3 라팍스 군단(고지 게르마니아 주둔). 이것을 번역하면 제3 맹호군단이 된다. 제13 풀미나타 군단(시리아 주둔)은 제13 벼락군단이라는 뜻이다. 제15 프리미게나 군단(저지 게르마니아 주군)과 제22 프리미게나 군단(고지 게르마니아 주둔)은 제15 무적군단과 제22 무적군단으로 의역할 수밖에 없다. 이런 명칭은 소속 군단병들의 기분을 고양시켜 주었겠지만,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지적하지 않아도 제삼자가 들으면 웃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바타비족 유력자들에게 말을 이었다.
우리 보조병은 이제 더 이상 로마 군단병에 뒤지지 않는다. 보병도 기병도 그 전력이 결코 로마 군단병보다 못하지 않다. 우리가 로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 부족들이 맨 먼저 뒤따를 것이다. 라인 강 서쪽의 갈리아인도 우리와 같은 게르만족이니까 동조하고 나설 것이다. 그리고 이 봉기의 물결은 갈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그러려면 로마인끼리 싸우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비텔리우스 진영의 '라인 군단' 기지를 공격해도 베스파시아누스 쪽에서는 구원하러 달려오지 않을 테고, 그럴 여유도 없다. 설득은 성공했다. 바타비족 유력자들은 모두 가슴을 두드려 찬성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당장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우선 바타비족이 사는 라인 강 어귀의 서쪽을 거주지로 삼고 있는 칸니네파티족에게 몰래 연락을 취했다. 이 부족은 언어도 풍습도 바타비족과 같지만, 부족 구성원의 수는 훨씬 적다. 그래서 바타니족과 칸니네파티족은 본가와 분가 같은 관계가 있다 칸니네파티족도 동의한다는 대답을 보내왔다. 이어서 키빌리스는 강 어귀 북쪽에 사는 프리시족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그들한테서도 기대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이리하여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라인 강 어귀에 살고 있는 부족들의 공동투쟁 전선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이루어지자마자 키빌리스는,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 참전한 뒤 고지 게르마니아 주요 기지인 마인츠로 돌아가 있던 보조부대에도 밀사를 보냈다. 그는 이들을 포섭하는 데에도 성공한 모양이다. 이 보조부대는 베스파시아누스 지지를 기치로 내건 '도나우 군단'이 접근하는 것을 알고, 비텔리우스 황제가 이탈리아로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도 이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북쪽으로 올라가 키빌리스와 합류한 것이 그 증거다. 이 정도까지 우군을 확보한 단계에서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비로소 반란의 불길을 댕겼다. 라인 강 어귀의 최전방 요새를 지키고 있던 수비대를 습격한 것이다. 최전방 기지에는 부대장을 비롯한 몇 명밖에는 군단병을 배치하지 않는 것이 로마군의 상례다. 최전방 기지에 근무하는 병사는 대부분 속주병이다. 중과부적이라고 판단한 부대장은 요새를 포기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반란의 서전은 키빌리스의 부전승으로 끝났다. 그후에 공격한 몇 개의 요새도 속주병들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두 손을 들고 요새에서 나온 속주병에 대한 조치도 교묘했다. 율리우스 키빌리스는, 자기를 따라 로마에 반기를 들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원래 그는 베스파시아누스파를 자칭하고 있었다. 투항한 병사들에게 그는 이렇게만 말했다. 내 휘하에 들어와 싸우든지 고행으로 돌아가든지 마음대로 하라. 속주 출신 병사들은 대부분 고행에서는 먹고 살 수 없으니까 로마군 보조부대로 자원한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베스파시아누스파를 자칭하는 키빌리스가 로마군 장수로 보였을 게 분명하다. 바타비족 보조부대를 이끌고 있는 키빌리스 휘하에 들어가도, 이 단계에서는 로마에 대한 배반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란을 진행시키는 방법도 교묘했다. 불길을 올린 것은 로마 제국의 가장 북쪽에 있는 지방이었다. 거기서 조금씩 번져나간 불길은 라인강 하루의 저지 게르마니아 속주를 완전히 뒤덮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본국 이탈리아에서 진압군이 파견된다 해도, 행군하는 데에만 두 달은 너끈히 걸리는 거리였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키빌리스는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으로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동쪽으로 내민 손은 브룩테리족과 텡테리족을 포섭한다. 이들 두 부족은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지 않은 게르만 야만족이다. 그리고 서쪽으로 내민 손은 네르비족과 퉁그리족을 향하고 있었다. 이들 두 부족은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한 뒤 로마의 속주민이 된 게르만계 갈리아인이다. 이들 두 부족에도 보조병으로 로마군에서 복무하고 있는 남자들이 많았다. 이 무렵에는 저지 게르마니아의 로마군도 키빌리스를 진압하러 나서게 되었지만, 키빌리스가 이들 두 부족한테 유혹의 손길을 뻗고 있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키빌리스를 진압하러 갈 때 이들 두 부족 출신으로 구성된 보조부대를 데려갔다.
전쟁터에서는 농담이 아닐까 싶은 사태가 벌어졌다. 로마군의 좌익과 우익에 배치되어 있던 이들 두 부족의 보조부대가 전투개시 명령이 떨어졌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않은 것은 처음 얼마동안뿐이고, 얼마 후 움직이기 시작한 부대는 통째로 키빌리스 진영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그후 벌어진 광경은 전투가 아니라 참극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로마인은 군단병과 백인대장, 대대장까지 몰살당했다. 기세가 오른 키빌리스는 같은 수법으로 라인 강은 지키는 함대까지 수중에 넣었다. 선원이나 노잡이는 속주민이니까, 로마 시민인 함장만 죽이면 일은 간단했다. 라인 강 함대를 손에 넣은 것은 전술적으로도 유리했다. 로마의 군단기지는 모두 라인 강을 따라 건설되어 있다. 함대를 손에 넣으면 육지와 강에서 군단기지를 공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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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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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운제산 오어사 - 불교 대중화운동의 산실
[오어사]
오어산의 유래
포항에서 남쪽으로 19km 떨어진 곳에 있는 운제산은 신라 2대 남해왕의 아내인 운제부인이 산신으로 머물러 있는 영산이다. 산의 골짜기가 깊고 수목이 울창해 이곳은 언제나 정적이 감돈다. 최근 이 산에서는 가뭄해소를 비는 기우제가 몇 차례 지내져 산의 정적을 깨뜨렸다. 94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가뭄은, 동해안 지역이 특히 심해, 이곳에서 지내는 기우제가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기우제는 산의 정상부근에 있는 운제부인을 모셨던 성모당터에서 지내진다. 산밑의 주민들은 이 산의 성모가 비를 내리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어왔다. 이러한 믿음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것이기도 하다. 오어사는 이 산의 동쪽 기슭에 있다. 이 절은 신라초기에 닦여졌으며 항사사라고도 불리웠다. 절의 주소는 포항시 오천면 리사동. 절 동쪽에는 오어지라는 큰 호수가 있다. 이곳은 신라의 중 혜공이 만년을 보냈던 절이다. 혜공은 원효보다 앞선 시기의 사람으로 기행으로 유명했던 승려이다. 그가 만년에 이 절에 머물자 후학인 원효는 경과 소를 짓다가 의심이 나면 경주에서 이곳으로 달려와 묻고 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 삼국유사에는 오어사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루는 혜공과 원효가 만나 개천을 따라가며 고기를 잡아 먹었다. 그런 다음 둘이 똑같이 바위 위에 앉아 똥을 누었다. 혜공이 똥을 가리키며 원효에게 "네 똥은 내 고기구나"라고 놀렸다. 그래서 절 이름을 오어사로 했다는 것이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혜공은 그때 고기를 먹었지만, 대변 속의 고기들은 그대로 살아서 물로 들어 갔다고 한다. 불교의 살생금지의 가르침을 이런 식으로 빗대어 떠올리는 그들의 해학정신이 돋보인다. 혜공은 그 해학이 뛰어나고 기이한 행동을 많이 했다. 혜공은 대안, 혜숙 등과 더불어 당시 대중불교의 기치를 들었던 3대 고승의 한 사람이다.
대중불교의 실천자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 등 어려운 과정을 거쳐 불교를 공인하지만, 초기에는 귀족불교에 머물렀다. 진흥왕에 의한 불교문화진흥과 그 후대 왕들의 보호 및 원광, 자장 등 고승들의 활동은 신라불교를 흥성시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실 귀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인 것이었다. 국가적인 것이었던 만큼 불교는 고답적이고 이념적이었다. 흔히 신라불교를 '호국불교'라고 특징짓는다. 그것은 왕실이 국민(또는 지방호족)들의 의식을 왕권에 지향시키고, 결속시키려는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불교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혜공과 대안, 혜숙 등은 그러한 이념적이고 귀족적인 불교에 반발하고, 불교를 서민대중 속에 끌어내린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기행과 익살 및 남루한 행색은 하화중생(중생과 더불어 사는 삶의 자세)하는 불교 본래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한 모습이었으며,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해체정신의 표출로도 볼 수 있다. '초원에서 사냥하고 여자와 누웠다가/술집에서 노래하고 우물에서 잠잔다'라고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들을 찬탄하고 있다.
혜숙은 진평왕 때 사람이다. 일찍이 승려 화랑도로 있다가 물러나 안강의 적선촌이라는 마을에 살았다. 그는 당시 왕도인 경주를 중심한 귀족적인 불교의 범주를 벗어나 시골사람들을 교화했다. 혜공도 혜숙과 거의 동시대 사람이지만 주로 선덕왕 때 활동한 고승이다. 그는 귀족집 품팔이 노파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불가사의한 행동이 많아 성인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승려들의 귀족적인 위치와 호화웅장한 절을 버리고 매일 술에 취하여 마을의 골목을 떠돌며 서민들을 교화했다. 허름한 옷에 삼태기를 지고 있는 그는 초부 목동이나 뒷골목의 건달, 술주정꾼과도 쉽게 친했다. 언제나 삼태기를 짊어지고 다녔으므로 부궤화상이라 불리웠으며, 그가 있던 절은 부개사라 불렸다고 한다.
때때로 그는 부개사의 우물 속에 들어가 몇 달씩 나오지 않기도 했다. 영묘사에 선덕여왕이 들렀을 때 그를 사모한 지귀의 심화로 불이 났으나, 그 사실을 미리 알고 화재를 예방한 얘기는 유명하다. 그는 임종할 때도 예사롭지 않아 공중에 높이 떠서 사라졌다고 한다. 혜숙과 혜공뿐만 아니라 대안 역시 기이한 행동으로 일관한 승려였다. 그는 항상 남루한 차림으로 장터거리를 떠돌았다. 언제나 구리로 만든 그릇을 두드리면서 대안, 대안하고 외치며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름마저 대안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들은 승속을 초월하여 당시 사회를 누볐다. 그래서 때로 미친 중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혜숙은 시골마을에서, 헤공은 왕성 안의 골목거리에서, 대안은 장터를 중심으로 각각 교화에 힘씀으로써 신라불교는 급격히 대중화의 물결을 타게 된다. 이들의 불교 대중화운동은 원효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한테까지도 불교의 뜻을 알림으로써 비로소 불교 대중화의 완성을 보게 된다. 이들은 당시 불교가 '위로만'치닫는 데 대해 '아래로' 향한 몸짓을 과감히 보여준 인물들이다. 그들은 대승불교의 진면목을 몸소 보여주며, 참다운 자유를 실천해보인 위대한 행위자들이었다.
옛자취 없는 명승지
혜공과 헤숙은 물론 대안의 자취는 지금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헤숙이 있었던 절은 삼국유사에 안강현 북쪽 혜숙사라 하지만 그 절터는 확실치 않다. 현 안강읍 북쪽 9km지점인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에 있는 치동부락이 그 흔적이 아닌가 추측될 뿐이다. 치동부락은 '치실'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그것은 '적곡' 또는 '적선'의 어원을 떠올려 준다. 이곳에는 치동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바로 혜숙사가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혜공이 있었다는 부개사터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만년에 그가 있었던 오어사만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 절에도 혜공과 원효 등의 자취는 전무하다. 오어사는 20년 전만 해도 대웅전이 덩그러니 서 있었을 뿐, 퇴락하여 황량했다. 그래서 이 절의 주지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3년 전 대웅전을 보수하고, 나한전 설선당 및 요사체 등이 지어져 비로소 절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원효와 혜공이 놀았던 모의천(현 항사천)냇물은 큰 호수로 변해 새로운 명승지의 면모로 바뀌었다. 이곳이 혜공과 원효의 설화가 깃든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인근에는 별로 없다. 다만 혜공의 그 '걸림없는 자유행'처럼 바람만이 운제산 계곡을 불어댈 뿐이다.
아진포 - 석탈해 설화의 유적지
[석탈해 왕릉]
토함산의 산신이 된 석탈해왕
석탈해가 처음 상륙했던 바닷가로 가려면, 경주에서 토함산을 넘어야 한다. 보문단지에 이어 보문호를 끼고 돌아, 황룡계곡을 지나면 추령재이다. 추령재를 넘으면 감포가는 길로 접어든다. 봄날 진달래가 흐드러진 추령 넘는 고갯길은 기막힌 드라이브코스이다. 추령재휴게소에서 차를 한잔 하면서 동해 쪽을 바라본다. 오른쪽으로 수많은 골짜기로 주름을 이루면서 잡목림의 수해를 이룬 산이 토함산이다. 석굴암은 추령재에서 멀지 않다. 석탈해를 찾기 위해 넘는 토함산길은 감회가 어리게 마련이다. 토함산신이 바로 석탈해이기 때문이다.
석탈해는 죽은 지 오랜 뒤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다음에 문무왕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묻힌 소천구에서 뼈를 수습하여 그 뼈로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해달라고 부탁한다. 문무왕은 꿈에서 깨어난 후, 곧 그 뼈를 수습하여 만든 소상(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토함산에 사당을 세워 안치한다. 석탈해는 해골 둘레가 3자 2치, 몸통뼈 길이가 9자 7치였으며, 이빨은 응고되어 하나 같고, 뼈마디가 모두 이어진 이른바 천하무적의 역사였다. 그리하여 그를 받들어 토함산신으로 삼았다. 이 석탈해 사당은 조선시대 초기까지 전해져, 제사가 이어졌다고 한다. 석탈해가 토함산의 산신이 된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석탈해는 동해안을 통해 신라에 잠입하며, 이 산을 넘어 서라벌에 진출했다. 그러니까 그는 그가 넘었던 산을 지키는 셈이다. 잘 알려지다시피 토함산은 신라 당시 신성시되던 5악 중 동악으로 꼽힌 산이다. 토함산이 특히 신성시된 것은 이 산이 동해와 바로 이어져 수도 서라벌의 국방상 요새였기 때문이다. 토함산에서 감포일대는 '동해구'라 해서 옛부터 성역시된 지역이다. 그것은 이곳으로 외적이 침입하면 곧바로 수도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문무왕이 사후에 뼈를 동해에 수장해 동해 용이 된 것과, 석탈해가 토함산신이 된 것은 신라인의 나라수호의 열망의 표시일 것이다. 문무왕은 석탈해를 토함산신으로 세운 다음 그것으로 불안을 잠재우지 못해 그 너머 동해구의 입구를 자신이 직접 지키려한 것일까. 토함산에서 동해 쪽을 향하는 눈길에는 그런 마음으로 서걱거린다.
신라 2대 남해왕 때의 어느 맑은 날, 동해 하지촌의 아진포 바닷가에서 문득 까치들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그곳에 살던 노파는 이상히 여겨 배를 타고 까치 우는 곳으로 다가갔다. 배가 한 척 있었다. 까치들은 그 배 위에서 울고 있었다. 그 배에는 길이가 20자, 넓이가 13자나 되는 커다란 상자가 실려 있었다. 노파는 배를 끌어다가 바닷가에 대고는 길흉을 알 수 없어 망설이다 하늘에 맹세한 후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이목이 수려한 남자가 온갖 보물과 노비들을 거느린 채 들어 있었다.
아진의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노파는 그 남자를 데려다가 음식과 숙소를 제공했다. 7일 만에 그 남자는 비로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원래 용성국 사람인데 우리나라에는 28용왕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함달과로 적녀국의 왕비를 맞아 7년 만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이에 흉조라 하여 궤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면서 임의대로 인연있는 땅에 가서 나라를 세우라고 축원해서 여기까지 왔다." 이 말을 마치자 그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거느린 채 토함산으로 올라갔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석탈해의 이야기이다. 석탈해는 신라 제4대 임금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탈해는 그 출생부터가 특이하다. 그는 용성국(또는 다파나국이라고도 한다)의 왕과 적녀국(그냥 녀국이라고도 한다)의 여자 사이에서 출생했으며 알로 태어나 버림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처음 김해 금관가야에 들러 수로왕과 세력다툼을 했다. 그 다툼에서 패한 후 사로국의 동해안에 도착한 것이라는 기록도 나오고 있다. 그는 그후 토함산에서 은거하다 서라벌에 그 모습을 내보이며, 호공이 살던 반월성을 기지로 뺏고, 남해왕의 딸과 결혼하여 정치의 표면에 부상된다. 그리하여 3대 노례왕에 이어 4대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를 종합해보면 그는 대단한 풍운아였던 것 같다.
동해변에서 온 이주집단
그에 대해서는 알에서 출생하며, 까치 '토템'을 가지는 등, 건국신화의 양상으로 그 출생과정이 묘사되어 초기 임금인 박혁거세와 같은 불가사의한 인물로 떠올려지고 있다. 설화로 봐서 석탈해는 이주민집단의 실력자로 추측된다. 그는 경주평야에 이주해 올 때 이미 상당한 정치적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어쩌면 동해변을 거점으로 해상활동을 하던 집단의 일원이었을까. 금관가야의 수로왕과 세력을 다투다가 배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석씨족은 신라 개국초기에 경주 평야에 들어오며 석탈해가 가진 정치적 역량으로 곧 그의 세력을 경주에 뿌리내렸다. 그리하여 사로국의 중심지역인 반월성을 차지했으며, 다시 경주지역을 지배하던 박씨족과 결혼하여 연맹체제를 구축, 사로국의 실력자로 부상되었음직하다. 그는 마침내 남해왕이 죽을 때 노례와 탈해에게 서로 의논하여 왕위를 이으라는 당부를 받아낼 정도로 그 세력이 막강해진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사이좋게 연장자인 노례가 먼저 임금이 되고 그 다음 탈해가 보위에 오르는 것이다. 또는 석탈해의 설화를 모계설화의 잔영으로 보려는 학자들도 있다. 설화에 나오는 아진의선 노파는 혁거세왕의 뱃꾼의 어미라 되어 있다. 이는 서술성모와 마찬가지로 그 지방 씨족사회의 여추장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으로 비중이 주어지기도 한다. 탈해의 부계가 불분명한 것은 이 때문일까. 그리하여 석탈해 이후 여계가 남계로 바뀌면서 동시에 씨족연합이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이러한 추측을 펴는 이들의 주장이다. 여추장의 아들인 탈해와 남해왕의 딸의 결혼은 씨족연합의 한 유리한 조건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신라는 지방의 호족들을 규합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만큼 동해안의 큰 세력인 석씨족과의 동맹은 왕실로서는 바람직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석탈해는 4대 왕이 되지만 곧이어 5대부터는 다시 박씨계가 왕권을 잡는다. 그러나 석씨계의 세력은 더욱 커져 9대 벌휴왕 때 다시 왕권을 장악, 16대 걸해왕까지 8대에 걸친 석씨 왕조를 전개하게 된다.
외롭게 남은 상륙기념비
탈해가 처음 배를 대었던 아진포는 옛 월성군 지역인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이다. 감포 남쪽에 있는 대본해수욕장에서 울산 가는 바닷길을 약 8km쯤 달리면 닿는 바다마을이다. 대동여지도에 보면 이곳은 하서지로 표시되어 있다. 이곳의 수남마을에는 석탈해가 이곳에서 상륙했음을 표시한 '신라석씨탈해왕탄강유허비'라 새긴 비를 안치한 비각이 솔숲 속에 서 있다. 이 비는 4백 년 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비각 앞에는 하마비가 있다. 이 비각의 동쪽 2백m 지점에 옛날 석탈해의 배를 댔다는 홈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바위는 흙에 묻혀 상부만 약간 돌출해 있었는데, 태풍 사라호 때 흙과 자갈이 패여나가 큰 바위가 드러난 적이 있었다"라고 양남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한 주민은 말했다. 이 바위는 지금은 완전히 매몰되었다. 이곳에 75년부터 원자력발전소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해 그 터를 닦으면서 묻혀버린 것이다. 더불어 이 일대의 마을들이 인근 야산으로 이주해 나가고 새로이 발전소 건물과 사원아파트들이 들어차버려 옛 아진포의 정취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탈해의 상륙지점을 표시한 비각 앞에서도, 바다는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 비각은 10여 년 전까지 홍응생 씨가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홍씨는 81년에 82세로 작고했다. 이곳에는 석씨 문중 소유의 전답이 5마지기 가량 있어서 그걸로 생활을 하며 비각을 청소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이 동네도 흩어졌다. 이 일대의 마을들, 수남부락과 읍천리 등은 모두 석탈해가 개척한 마을로 이곳 주민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석탈해의 유적은 비각뿐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있었던 홈바위와 석탈해가 장성하도록 기른 곳이라는 장아라는 지역도 발전소로 철거되고 묻혀버렸다. 다만 비각을 둘러싼 소나무 위에는 여전히 까치가 울면서 맴돌아 그날의 설화를 무심히 떠올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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