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25호 - 2024.07.11 목요일(음력 : 06.06)
angelo@nownforever.co.kr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태만 이라고 한다면, 어느 회사, 정부 관청, 골프클럽, 대학교수진 치고 어느 정도씩 태만 이 없는 데가 없을 것.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젠트리피케이션보다 ‘둥지 내몰림
요즘 KBS 월화드라마 ‘동네 변호사 조들호’가 배우 박신양씨의 혼신의 연기를 앞세워 시청자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극중에서 조들호(박신양 분)는 노숙자 방화 살인 사건의 피고인 변지식(김기천 분)의 변호사로서 변지식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변지식은 과거 자신이 운영하던 식당이 손님들로 넘쳐나자 집주인이 식당을 비우라며 자신을 쫓아낸 것에 격분해 식당에 불을 지른 일이 있었고 담당 검사인 신지욱(류수영 분)은 이 부분을 부각시켜 변지식이 방화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며 조들호와 맞서는 내용이다.
그런데 변지식이 집주인에게 쫓겨나는 장면을 보면서 요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란 말이 떠올랐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지역을 고급으로 품위 있게 바꾸다’는 뜻의 영어 ‘gentrify’의 명사형으로 본래는 낙후된 지역에 외부인이 들어와 지역이 다시 활성화되는 현상을 뜻했지만, 최근에는 서울의 서촌이나 홍익대 주변처럼 임대료가 저렴한 도심에 문을 연 상점들이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지면서 유동인구가 늘어나고 임대료가 치솟게 된 결과, 소규모 가게들이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원래의 동네를 떠나게 되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런데 젠트리피케이션은 그 뜻을 알기 어려운 외국어일뿐더러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부정적인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때문에 더더욱 언중들이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그래서 국립국어원에서는 지난달 ‘말다듬기 위원회’회의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둥지 내몰림’으로 다듬어 언중들에게 공포했다. 앞으로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둥지 내몰림’으로 순화해 사용하자.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첫 단추를 ‘꿰다’
우리 축구 국가대표팀은 지난달 열린 러시아 월드컵 예선전 레바논과의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한 신문은 “이로써 한국은 조별 예선 7경기를 모두 무실점 승리로 마치면서 새해 첫 단추를 만족스럽게 꿰었다.”고 전했다. 한편 그날 결승골을 넣은 이정협 선수는 경기 전 인터뷰에서 “첫 단추를 잘 꿰서 한국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여기서 ‘첫 단추를 꿰다’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보통은 ‘단추를 꿴다’라고는 잘 하지 않는다. ‘단추를 낀다’ 또는 ‘끼운다’라고 말하는데 유독 ‘첫 단추’와 어울려 쓰일 때는 ‘꿰다’로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첫 단추를 끼우다’라고 하거나 ‘끼우다’의 준말인 ‘끼다’를 써서 ‘첫 단추를 끼다’라고 해야 한다.
‘꿰다’는 ‘끈이나 실 따위를 구멍이나 틈의 한쪽에 넣어 다른 쪽으로 나가게 하다’는 뜻을 지닌다. 그러니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나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라는 노래 가사처럼, 어떤 물건을 끈 같은 데 엮어서 연결할 때 쓰는 말이다. ‘끼우다’는 ‘벌어진 틈 사이로 빠지지 않게 밀어 넣다’란 뜻이므로 ‘수첩 사이에 볼펜을 끼우다’, ‘문틈에 편지를 끼워 넣다’처럼 쓴다.
만약 단추의 구멍에 줄이나 실을 통과시켜 목걸이처럼 만드는 것이라면 ‘단추를 실에 꿰었다’라고 ‘꿰다’를 쓸 수 있다. 하지만 옷에 있는 단춧구멍에 맞춰 단추를 잠그는 경우에는 ‘단추를 끼웠다’라고 해야 한다. 물론 ‘끼우다’ 대신 ‘채우다’를 쓸 수도 있다.
첫 단추를 잘 채워야 옷매무새가 어그러지지 않는다. 이에 어떤 일의 시작이나 첫 출발을 비유하는 말로 ‘첫 단추’라는 말을 곧잘 쓰는데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고 해야지 ‘첫 단추를 잘 꿰야 한다’고 하면 안 된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지 말입니다’
요즘 군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한 편이 화제이다. 그리고 그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쓰는 말투 ‘-지 말입니다’ 역시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말투는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유행어가 되었다.
최고의 제품이지 말입니다.
역시 봄에는 꽃구경이지 말입니다.
오늘 일찍 퇴근하지 말입니다.
이 ‘-지 말입니다’는 군대의 화법에서 왔다. 군대에서 해요체를 못 쓰게 하기 때문에 ‘-지요’와 같은 말 대신 ‘-지 말입니다’가 쓰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지금은 그 쓰임이 줄었다고 해도 한동안 군대에서 이 말투가 상당 기간 사용되었다. 이 군대식 화법이 드라마를 통해 일반 사회에 전파되어 일시에 유행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화법의 확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우리말의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다만 유행어는 말 그대로 유행어일 뿐이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또 유행어는 지루한 언어생활에 양념 구실도 하는 장점도 있다. 그러니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지 말입니다’의 유행이 잘못된 병영 언어를 개선하는 계기가 될 것도 같다. 최근 뉴스에 따르면 국방부는 병영 언어문화 개선 지침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른바 ‘다나까’ 말투만 너무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해요’체를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개선 지침이 나온 때가 화제의 드라마 첫 방영일과 같은 날이다.
병을 앓고 나면 건강한 면역력이 생긴다. 그렇듯이 어법에 어긋난 말투 ‘-지 말입니다’의 유행이 뜻하지 않게도 군대의 경직된 언어문화를 치료하는 좋은 약이 되지 않을까 싶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
시나눔 → 우리시
|
3. 주막에서
오후 - 천상병
그날을 위하여
오후는
아무 소리도 없이
귀를 기울이면
그래도
나는 나의 어머니를 부르며
울고 있다.
멀리 가까이
떠도는 하늘에
슬픔은 갈매기처럼
날아가곤 날아가곤 한다.
그것은
그 어느날의 일이었단다.
그 어느날의 일이었단다.
그리하여
고요한 오후는
물과 같이 나에게로 와서
나를 울리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면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
바다 2 - 정지용
한 백년 진흙 속에
숨었다 나온 듯이,|
게처럼 옆으로
기여가 보노니,
머언 푸른 하늘 알로
가이 없는 모래 밭.
~~~~~~~~~~~~~~~~~~~
陶醉의 彼岸(도취의 피안) - 김수영
내가 사는 지붕 우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
울고가는 울음소리에도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
사람이야 말할수없이 애처로운 것이지만
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도
저 날짐승이라 할까
내가 있는 방 우에 와서 앉거나
또는 그의 그림자가 혹시나 떨어질까보아 두려워하는 것도
나는 아무것에도 취하여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는
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너에게 보이거나
들키거나 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의 얇은 지붕 우에서 솔개미같은
사나운 놈이 약한 날짐승들이 오기를 노리면서 기다리고
더운 날과 추운 날을 가리지 않고
늙은 버섯처럼 숨어있기 때문에도 아니다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있을 운명...
그것이 사람의 발자욱소리보다도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주는 것이 나는 싫다
나야 늙어가는 몸 우에 하잘것없이 앉아있으면 그만이고
너는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잠시라도 나는 취하는 것이 싫다는 말이다
나의 초라한 검은 지붕에
너의 날개소리를 남기지 말고
네가 던지는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아라
차라리 앉아있는 기계와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가는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이랑 한층 더 맑게 하여다우
짐승이여 짐승이여 날짐승이여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 무수한 날짐승들이여
<1954>
|
|
독서실 → 철학
|
|
|
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가야산 법석을(法席)을 펴며
이처럼 무더운 삼복 더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이 먼 곳을 찾아 와서 이러한 수련법회를 가지는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고 또 바르게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불법(佛法)은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우리들 자성(自性)을 깨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말과문자의 이해와 터득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학생들을 모아놓고 말과 문자로써 불교를 설명하는 까닭은, 비록 말과 문자를 아는 것만으로 바른 불법을 얻을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하여도, 불법을 알리려면 먼저 그 말과 문자를 가지고 설명하는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불법 그 자체는 결코 말과 문자에 매이지 아니한 것이나, 다만 말과 문자를 빌어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하여야 자성을 깨칠 수 있는지를 설명할 뿐인 것으로서, 지금 설법하고 있는 이 말과 문자가 실지의 불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하늘에 있는 달을 보라고 할 때에 그냥 말로만 "달을 보라" 하면 사람들은 잘 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을 듣고 곧바로 달을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달을 보라"고 말함과 동시에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주면 많은 사람들이 좀더 쉽게 고개를 들어 달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럴 때에 손가락만 쳐다보고 달은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볼 뿐 영원토록 달은 보지 못하고 만다는 것이다. 불법(佛法), 곧,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팔만사천 법문(法門)도 따지고 보면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말과 문자를 좇느라고 그에 얽매이는 일이 없이 궁극의 목표인 저 달, 곧, 불법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문자로도 나타낼 수없는 불법(佛法)을 바로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우리의 자성(自性)을 바로 깨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면 또 그 자성은 어떻게 하여야만 바로 깨칠 수 있는가? 그것은 선정(禪定)을 닦음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선정을 닦아야 하는가? 선정을 닦는 데는 화두참구(話頭參究)가 가장 빠른 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성취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화두참구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니 이 법문을 들을 때에도 화두를 잘 챙겨서 화두 가운데서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화두를 내버리고 말만 들으면 이 법회를 하는 근본 뜻과는 완전히 어긋나게 됩니다.
지금 여기 모인 대중 가운데는 화두참구를 잘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또 안다 하여도 마음에 간직하여 화두참구를 부지런히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모두들 고생고생하며 이 무더운 날 부처님 앞에서 삼천 배(拜)를 했읍니다. 그 고생이 헛되지 않도록 화두를 가지지 아니한 사람들을 위해서 화두를 말할 터이니 앞으로 열심히 참구해 봅시다.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삼 서근이니라.
여가시불(如何是佛)
마삼근(麻三斤)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守初)선사는 크게 깨친 대 선지식이었읍니다. 그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하니 수초 큰스님은 "삼 서근"이라고 대답하였읍니다. 이 대답이 퍽이나 엉뚱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 이것이 화두(話頭)입니다.
우리 대중은 이 법문을 들으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하며, 의심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의심하는 것이 바로 화두참구하는 법입니다. 이 화두에서 큰스님이 '삼 서근' 이라고 대답한 말씀은 말 자체에 그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깊숙한 곳에 그 뜻이 있읍니다. 그것을 언외현지(言外玄旨)라 하니, 곧, 말 밖에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밖의 깊은 뜻, 곧, '삼 서근'이라고 대답한 그 근본 뜻을 바로 참구하 여야만 불법(佛法)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 서근'이라고 한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지, 그러지 않고 이것을 그냥 놓아 둔 채로 라면 아무리 팔만 대장경을 다 외운다 하여도 그것은 외도(外道)가 될뿐입니다.
이미 화두를 가진 사람은 그 화두를 참구하고,화두를 미처 배우지 아니한 사람은 지금 일러준 이 '삼 서근'이라는 화두를 참구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이를 테면 법문을 들을 때나 좌선을 할 때나 밖에 나가 돌아다닐 때나 또는 다른 사람과 말할 때나 늘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했는가?' 하고 의심하는 화두참구가 우리 생활의 생명선이 되어야 합니다. 화두참구를 마음속으 로 계속하면서 법문을 들어야만 자성을 바로 깨칠 수 있읍니다. 그저 말만 따라가서는 절대로 불법을 바로 알 수 없으며 자성을 바로 깨칠수 없습니다. 화두참구를 부지런히 하면서 이 법문을 잘 들어주길 바랍니다.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
"부처님을 물었는데 어째서 삼 서근이라 하였는가?"
불기 2512년(1968년) 8월
해인사 대적광전
|
|
|
독서실 → 한국소설
|
|
|
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7. 7월 재판 (1/2)
잡아들여야 할 놈들은 아직도 많았다. 이제 세상은 뒤집힌 것이다. 4.19가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고 해서 부정선거 관련자만을 잡아들여 가지고 다스리는 것만으로는 국민 감정이 진정될 리가 없었다. 혁명을 혁명답게 승화시키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승만 정권 12년간에 걸쳐 얼마나 많은 비정과 부정이 저질러졌던가! 어디 그뿐인가. 이승만의 독재정치 지속을 위해서 저지른 <정치 음모극>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승만의 최대의 암살사건을 비롯해서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 김성주(金聖株) 불법감금 총살사건, 간첩죄를 적용하여 합법을 가장해서 죽인 조봉암(曺奉岩) 사건, 부통령 장면 암살 미수사건, 민주당 전복 음모사건 등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이 모든 사건은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꾀하기 위해 저질렀던 사건들이었다. 사건 관련자들은 단매에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었다. 그러한 정치음모극은 역사를 바로잡아 놓기 위해서도 분명히 흑백을 가려 놓아야만 했다. 그러자면 사건 관련자들이 살아 있고 세상이 뒤집힌 이 기회에 손을 대어야만 했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관련자들이 자연사해 버릴 수도 있고 또 증거를 인멸해 버릴 우려도 없지 않다. 분명히 해놓을 절호의 기회였다. 정치 음모극에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을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서도 저질러진 정치 음모극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야 옳았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허정은 이런 사건들을 파헤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비혁명적 방법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하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구국청년단 대표 고정훈(高貞勳)만이,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배후에는 김준연(金俊淵)을 비롯한 OOO, OOO 등이 있다. 이들을 잡아들여 엄중 취조를 하면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는 백일하에 밝혀질 수 있다"며 목청을 돋구고 있을 뿐이었다. 고정훈이 김구 암살문제만을 거론했던 것은 아니었다. 국회위원장이었던 신익희가 함상훈(咸尙勳)이 떠들어댔던 사건, 동해안 반란사건의 내막, 김성주 사건 등에 대해서도 폭로했다. 6.25 전쟁 때는 육군 중령으로서 KLO부대 책임자였고, 군에서 나온 뒤에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 입수가 가장 용이한 위치에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모든 정치 음모극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놓고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흑막을 보이려는 그의 투쟁은 메아리 없는 포효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척결해 줄 과도정권이 그의 포효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사건에 따라서는 국회에서 조사단을 구성하기도 했고 또 검찰에서 진상 조사를 했었다. 그러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인가 뭔가 때문에 지나간 사건을 다시 심리하기는 어렵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뭐가 혁명이란 말인가?" 이러한 의문이 제기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4월혁명>은 혁명이면서도 혁명이라 하기가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대체토론에 붙여졌을 때, 무소속의 박세경(朴世徑)이 의정단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
4.19와 4.26의 사태를 신문에서는 혁명이라고 하나, 혁명이라고 할 때는 어떤 조직적인 단체가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므로 이 사태가 과연 혁명이냐 하는 것을 글깨나 배웠다는 식자라면 누구나 이 말에 공감하고 있었을 줄로 안다. 혁명이란 어떤 조직적인 단체가 혁명 대상을 뒤집어 엎고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비로소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4월혁명에는 조직적인 단체가 없었다. 과도정권이라는 것도 이승만이 임명했던 외무장관이 수반이 되어 정부를 이끌어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 판국에 4월혁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수작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만한 일이기도 했다. 더구나 4월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었던 3.15 부정선거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을 하자면 마땅히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률을 따로 특별히 만들어서 재판을 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혁명재판>이라 할 처음부터 특별입법 따위는 생각도 않고 있었다. 기존의 법률로써 재판을 하려 했다. 특별입법을 하자 해도 아직은 국회가 자유당 국회이기 때문에 혁명입법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만일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든 <혁명입법에 반대하는 자들은 민주 반역자다. 그런 자들은 다른 죄상을 들추어 내서라도 이 사회에서 도태시켜 버리고 말겠다>는 이 한마디로 엄포를 놓아도 따라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과도정권은 처음부터 혁명입법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 가지고 무슨 재간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하겠다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3.15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자 언론에서는 <혁명재판> 어쩌구 했으나, 혁명재판 운운하기에는 좀 멋적었던지 아니면 그 모순성을 깨달았던지 <7월재판>이라 호칭을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7월에 들어서면서 재판이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7월재판이라 일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도 여기에서는 7월재판이라 표현하기로 한다. 한데, 그까짓 명령에 따라 움직였던 송사리떼들에 재판 따위야 소개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들도 민초(民草)와 다름없는 불쌍한 무리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른바 <원흉(元兇)>들에 대한 재판만 소개하기로 한다.
7월재판의 첫 공판이 열린 것은 1960년 7월 5일이었다. 그 무렵은 민.참의원 선거전이 한창 열기를 띄어가기 시작했다.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자들에 대한 7월재판은 모두 부정선거관리, 부정선거모의, 부정선거지령, 부정선거자금 등 4개 부분으로 나누어 심리되었다. 이 밖에 발표명령자를 가려내기 위한 것과 정치깡패 등이 7월재판에서 다루어졌다. 7월 5일의 첫 공판은 <부정선거관리>에 대한 것이 먼저 심판대에 올랐다. 심판대에 오른 피고인들은 전 내무부 장관 최인규를 비롯해서 전 내무부 차관 이성우(李成雨), 전 치안국장 이강학(李康學), 전 내무부 선거대책위원장이었던 한희석(韓熙錫) 등 5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날 법정에 출정했던 피고인들은 5명만이 아니다.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자들은 전원이 출정했다. 이들 부정선거 관리문제로 해서 재판에 회부된 자들을 심판할 법관은 주심에 부장판사인 정영조(鄭永祚), 배석판사에 석은만(石銀萬), 유현석(柳鉉錫)이었고, 관여 검사는 김병리(金秉離), 오탁근(吳鐸根), 황은환(黃銀煥) 등 7명이다. 여기에 이들 피고인들의 범죄사실을 변호하기 위해 동원된 변호삭 무려 38명이나 되었다. 그러니 법정 안이 얼마나 장관이었겠는가. 이렇게 많은 변호사들이 한꺼번에 출정했다는 것은 해방 따라서 변호사들은 신바람이 나 있었다. (해방 후 처음인 대사건에서 한번 멋들어진 변론을 펼쳐 보이리라.) 저마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고 있었다. 하긴 변호사로서의 명성은 이런 사건에서 빛을 발하게 되는 법이니 변호사들이 신바람이 나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7월재판의 첫 공판은 서울 지방법원의 대법정이었다. 300여 명 가량의 방청객들이 몰려들어 가뜩이나 삼복더위에 시달리고 있는 법정 안을 더욱더 물켜 놓았다. KBS에서는 이 역사적인 심판을 중계하겠다고 아나운서와 엔지니어 등 중계반이 파견되어 마이크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법정 밖 뜰에는 미처 방청권을 얻지 못한 시민들이 입추의 여지 무릅쓰고 공판이 열리기만을 학수고대하고있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오랏줄에 묶인 배제인(裵濟人)을 선두로 해서 손창환(孫昌煥), 최재유(崔在裕), 최인규(崔仁圭)의 순으로 입정했다. 어제까지 국회부의장이었던 이재학(李在鶴)의 얼굴도 보였고임철호(林哲鎬)의 얼굴도 보였다. 출정 피고인들은 모두 30명이었다. 그들 뒤를 이어 불구속의 곽의영(郭義榮)과 유각경(兪珏卿)이 입정했다. 남성만의 피의자 속에 뚱뚱한 여자가 한 사람 끼어 있다는 것은 다분히 이채롭기만 했다. 그들 피고인들은 모두가 하얀 모시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푸른 수의를 걸치고 금방 손질한 것처럼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여기가 법정이 아니라면 꼭 더위를 피해 마실 나온 동네 아저씨로 보기에 알맞을 것 같았다.
"단기 4293년 형(形) 제 3173호......."
재판장 정영조가 개정을 선언했다. 법정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삽시간에 숨을 죽였다. 먼저 간단한 인정심문이 있었다.
"피고인 최인규."
재판장의 호명에 최인규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구속되어 있는 사이에 죄과에 대한 번민을 했는지 장관 재직 때보다는 조금 야위어 보였다.
"피고인 최인규의 나이는?"
"마흔 둘입니다."
사뭇 달랐다. 꽤나 고분고분한 목소리였다.
"재산은 얼마나 되는가."
"한 3,4천만환쯤 됩니다."
"자유당원으로서의 직책은?"
"국회의원이므로 자동적인 중앙위원이 되었습니다."
"전과는 없는가?"
"없습니다."
"피고인 이성우, 나이는?"
"마흔 살입니다."
"재산은 얼마나 되는가?"
"동산, 부동산 합해서 1억환입니다."
"정당 관계는?"
"없습니다."
"피고인 이강학, 나이는?"
"서름 여덟입니다."
"3천만환쯤 됩니다."
"학력은?"
"일본대학 경제과를 나왔습니다. 경력 가운데 일본군 육군소좌(陸軍少佐:소령)라 함은 소위(少尉)의 잘못입니다."
이강학은 묻지 않은 말까지도 곁들였다.
"피고인 최병환은 몇 살인가?"
"마흔 셋입니다."
"재산은?"
"부동산이 오백만환, 동산이 백만환쯤 됩니다."
"정당 관계는 없는가?"
"없습니다."
"학력은?"
"홍익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피고인 한희석 나이는?"
"주소는?"
"이사한 지 이틀 만에 일을 당했기 때문에 지금은 어딘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하긴 그럴 것이었다. 4.19가 터지자 겁을 집어먹었던 그는 부랴부랴 거처를 옮겼던 것이었으니까.
"재산은?"
"글세요. 집이 남아 있었더라면 3천만환쯤 될 텐데, 가재 도구까지 다 깨어졌으니 지금은 알 수가 없습니다."
"자유당에 언제 가입했나?"
"4285년 5.20 선거 전에 가입했습니다."
"자유당 선거대책위원장이었지?"
"네, 기획위원회 의장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수심이 가득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는데 유독 한희석만이 벙긋벙긋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이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 웃음은 이 재판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자신을 조소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어서 관여 검사 김병리가 일어나그들에 대한 공소장을 낭독했다. 공소장 낭독은 1시간이나 걸렸다.
"첫째, 공무원이 지방장관들에게 선거운동을 지시 강요했고, 둘째는 선거인 명부를 거짓으로 꾸몄으며, 셋째는 수많은 선거자금을 뿌려 투표권을 사들이게 했다. 넷째는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깨뜨리고 3인조, 9인조를 동원해서 공개투표를 동원해서 야당참관인을 축출했고, 여섯째는 4할 무더기표를 사전 투입했는가 하면, 일곱째는 직권을 남용했고, 여덟째는 허위 공문서를 만들어 이것을 행사했다......."
이것이 공소장의 내용이었다. 공소장의 낭독이 끝나자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그들은 재판장의 물음에 대체적으로 시인하는 진술을 했다.사실심리는 짤막한 시간 동안에 간단히 몇 가지만 묻는 데 불과했다. 부정선거 관리에 관련된 피고인들에 대한 인정심문과 범죄사실에 대한 간단한 심문이 끝나자, 이어서 부정선거 모의에 관련된 피고인들에 대한 인정심문과 공소장이 낭독되었다. 이 사건에 관련된 피고인들은 꽤나 최인규, 이강학, 한희석을 비롯해서 이재학, 이중재(李重宰), 정기섭(鄭起燮), 정문흠, 유각경, 이존화(李存華), 정존수, 박용익, 조순, 장경근(張璟根), 박만원(朴晩元), 임철호 등 무려 15명에 이르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공소장은 부장검사 오탁근(吳鐸根)이 낭독했다. <야당이 한강 백사장을 연설 장소로 사용하려고 해도 그것을 관권으로 쓰지 못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민주당의 선거연설을 경찰로 하여금 방해케 했고,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수가 너무 많아지자 전국의 각급 선거위원회로 하여금 득표수를 조절케 했으며 공무원으로 하여금 선거운동을 하도록 강요하는 모의를 했다.> 공소장 낭독이 끝나자, 재판장 정영조는 피고인들을 한바퀴 훑어보고 엄숙한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을 지금 검사가 낭독했으니까, 각자는 자기의 범죄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 범죄사실에 대해서 심문하겠는데 순순히 다 진술하겠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해서 재판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바란다."
이 말을 들은 전 피고인들은 감히 <네> 하고 대답하기도 송구한 듯 고개만 가볍게 숙였을 뿐이었다. 이어서 인정심문에 들어갔다.
"이중재 피고인의 가족은?"
"조모와 처와 4남 2녀가 있습니다."
"재산 관계는?"
"검찰에서 진술한 경력이 틀림이 없는가?"
"네, 없습니다."
"언제 자유당에 입당했지?"
"4288년 11월입니다."
"누구의 권유를 받았는가?"
"이기붕의 권유입니다."
"지금 자유당 중앙위원이며, 기획위원회 부의장이지?"
"네."
"피고인 박만원! 가족과 재산은?"
"양친이 계시고 처와 4남 4녀로 모두 열둘입니다. 재산은 모두 4천만환 가량 됩니다."
"피고인 박용익, 가족과 재산은?"
"3천만환 가량 됩니다."
"이재학과의 관계는?"
"학교 동창입니다."
"자유당 원내총무는 언제 했지?"
"작년입니다."
"피고인 조순, 가족 관계와 재산은?"
"서울에 처와 3남 3녀가 있고 고향에
"모친과 아우가 있습니다. 재산은 한 1천5백만환 가량 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동산이 많다던데?"
"서울에 2천만환 가량 나가는 집이 있고 잡혀 있는 지프차가 한 대 있습니다."
"지프가 어디 부동산인가!"
재판장 정영조는 처음으로 피고인의 엉뚱한 진술을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만주 파견 연락원으로 해방될 때까지 종사했다던데 사실인가?"
"네, 사실입니다."
독립운동에 종사했다고 해서 그럴까? 재판장 정영조는 다음 질문부터는 깍듯이 존대말을 썼다.
"만주에 언제 어떻게 갔소?"
"스물두 살 때 갔습니다. 농민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등살에 못 이겨 망명을 했습니다."
"임시정부 연락원이란 우리나라의 연락이요?"
"아닙니다. 중국 내의 연락입니다."
이존화는 국내에서 농민운동을 하다가 22세 때 만주로 망명했다고 했다. 망명 뒤에는 임시정부 연락원으로서 독립운동에 기록에서도 <이존화>란 이름 석 자를 발견할 수 없으니 어찌된 노릇일까? 하긴군사 쿠데타 후의 일이지만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의 정보원(밀정) 노릇하던 놈도 경력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내세우던 판국이었으니까. 오죽하면 해방 직후 <미국 가서 박사 못 되고, 만주 가서 독립군 못되고, 중국 가서 장군 못 된 건 바보>라는 말이 돌기까지 했겠는가! 그건 그렇고.
"피고인 유각경, 가족과 재산은?"
"2남 2녀입니다. 집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아마 한 2천만환은 나갈 것입니다."
"학교는?"
"정신(貞信)을 나오고 부모가 북경으로 유학을 보내서 거기서 전문학교를..."
"대한부인회 최고위원은 언제 되었나?"
"한 6년 되었습니다."
"최고위원이 몇인가?"
"박마리아, 임영신, 저하고 셋입니다."
"피고인 정기섭, 가족과 재산!"
"노모가 계시고 저의 내외와 6남 5녀가 있습니다. 또 손자가 여덟 명, 손녀가 세명, 또 제 선친의 아우 둘이 있어 모두 스물 일곱 명입니다. 재산은 한 5천만환 됩니다. 병원을 하니까 동산 부동산이 많습니다."
"피고인 정존수, 가족과 재산?"
"처와 4남 1녀가 있고, 재산은 한
"2천만환 가량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고인 이재학, 재산은?"
"한 1천만환 가량 됩니다."
"그건 집만 5백만환쯤 나가기 때문에......."
"피고인 임철호, 가족과 재산은?" |
"내외하고 2남 1녀를 데리고 있습니다. 재산은 모두 합해서 3천 5백만환 가량 된다고 했는데 빚이 한 5,6백만환 됩니다."
"피고인 정문흠, 가족과 재산은?"
"제 내외하고 자식 내외, 손자 셋, 손녀 둘 이렇게 아홉 명입니다. 재산은 동지들이 돈을 모아서 사주었는데, 집이 한 1천2백만환 나갈 것 같고 자동차까지 합해서 한 1천 5백만환 가량 되지 않나 싶습니다."
"교육은?"
"교육은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독립운동자로서 공부는 둘째로 하고 총 쏘기만 배웠지요."
강조했다. 공부는 둘째로 하고 총쏘기만 배웠다는 그는 언제 어디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다는 것일까? 언제 어디서 누구하고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것인지 좀 구체적으로 진술했던들 독립운동사 연구에 도움이라도 됐을 것을. 이상은 피고인들에 대한 인정심문 가운데서 가족 관계와 재산 관계만 발췌해서 소개했다.
그러면 어째서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가족 관계와 재산 관계만을 발췌해서 소개했는가? 그것은 이들이 선택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들은 자손 관계에 있어 얼마나 다복했던가. 재산 관계에 있어서는 얼마나 유복했던가! 이기붕을 위해서 부정선거를 모의했던가? 이날, 필자도 법정에 들어가 이들의 재판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정치를 한다면서 역사를 두려워할 줄 몰랐기 때문에 저들은 오랏줄에 묶여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역사(歷史)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정치인에게는 반드시 역사의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역사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끄는 '도나우 군단'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에 수도 로마에서 쾌적한 생활을 마음껏 들기고 있던 비텔리우스 황제와 그 휘하의 '라인 군단'병사들도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도나우 군단'을 맞아 싸우기 위한 작전도 세웠다. 이번에도 포 강을 떠나는 군대를 이끌지 않고, 수도 로마에 남기로 했다. 발렌스는 병에 걸려 몸져누워 있었기 때문에 카이키나가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포 강을 사수한다는 점은 지난번과 마찬가지지만, 지난번에는 적이 서쪽에서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라인 군단'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맞아 싸우는 쪽의 전선기지는 피아첸차, 공격하는 쪽의 전선기지는 크레모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적이 동쪽에서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도나우 군단'이다. 판노니아와 달마티아 속주에서 본국 이탈리아로 들어온 뒤 맨 처음 만나는 주요 도시는 아퀼레이아다. 이곳 아퀼레이아에서 포 강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아퀼레이라에서 안니아 가도를 따라 파타비움(오늘날의 파도바)까지 가서, 포필리아 가도를 따라 남하하는 방법이다. 강 어귀 근처에서 포 강을 건넌 뒤 남하를 계속하면 라벤나에 이른다. 라벤나 남쪽에 있는 루비콘 강을 건너 아리미눔(오늘날의 리미니)에 들어가기만 하면, 거기서 로마까지는 플라미니아 가도만 곧장 따라가면 된다. 두 번째는 파도바에서 평원을 가로질러 곧장 남하하는 방법이다. 포강을 건넌 뒤에도 아이밀리아 가도를 향해 계속 남하한다. 아이밀리아 가도는 피아첸차에서 리미니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도로다. 이 가도 연변에는 북이탈리아 일대가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이쪽의 갈리아) 속주라고 불리던 시대의 군단기지나 퇴역병의 식민지에서 유래한 도시들이 늘어서 있다. 플라켄티아(오늘날의 피아첸차), 파르마, 무티나(모데나), 보노니아(볼로냐), 알리미눔(리미니) 등이 그런 도시들이다.
첫 번째 길의 이점은 거리가 짧다는 점이지만, 강 어귀 일대의 진 땅을 가야 하는 불리함도 있었다. 두 번째 길을 택하면 거리가 조금 길어지지만 굳은 땅을 행군하는 이점이 있다. 비텔리우스 진영의 총지휘를 맡은 카이키나는 적이 이 두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하거나 양쪽으로 나뉘어 포 강을 건널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는 북상하는 병력과 헤어져 라벤나로 갔다. 라벤나에 주둔해 있는 함대의 동향이 적군을 저지하는 데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함대라 해도 해상에서만 근무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군은 해병을 상륙시켜 육군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카이키나의 짐작은 빗나갔다는 게 일찌감치 분명해졌다. 이탈리아에 들어온 '도나우 군단'은 이 두 길을 택하지 않고, 아퀼레이아에서 포스투미아 가도를 따라 서쪽의 베로나로 향했다. 포스투미아 가도는 베로나를 지나 베드리아쿰과 크레모나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전략으로 보면 카이키나의 예측이 정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수를 저질렀다.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승자였던 그는 패자가 된 '도나우 군단' 병사들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모욕당하는 쪽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만이 같은 인간을 모욕할 수 있는 법이다.
'도나우 군단' 병사들은 과거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무의식중에 일찍이 굴욕감으로 눈물을 삼킨 곳을 설욕전의 장소로 택하는 법이다. 그들에게는 그 장소가 베드리아쿰과 크레모나였다. 이것을 카이키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이치에 맞는 전략이라 해도 인간적 요소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탁상공론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라벤나에 도착한 카이키나는 예측이 빗나간 데 절망했는지, 중대한 방향 전환을 단행했다. 그것은 비텔리우스 쪽에서 보면 배신이지만, 카이키나로서는 비텔리우스를 버리는 행위였다. 이 결단은 숨은 베스파시아누스파였던 라벤나 함대 제독의 설득 때문인지, 아니면 카이키나의 심중에 싹트기 시작한 생각이 제독과 이야기하면서 구체화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카이키나는 자기편을 버리고 적에게 붙는다 해도 자기 혼자서는 의미가 없고, 휘하 병력도 함께 데려가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도나우 군단'이 베로나에 집결하기 시작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 포 강 사수를 목표로 하는 비텔리우스 진영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제1군은 포 강 바로 건너편에 있는 크레모나에 들어가 그곳을 전선기지로 삼았다. 제2군도 포 강을 건넜지만, 거기서 바로 북쪽에 있는 베로나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 호스틸리아(오늘날의 오스틸리아)를 장악하는 작전으로 나왔다. 드디어 그들도 '도나우 군단'이 포 강을 건너 수도 로마로 향하기 전에 우선 베드리아쿰과 크레모나로 갈 작정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크레모나와 오스틸리아 양쪽에서 병력을 내보내, 베로나에 집결한 뒤에는 서쪽으로 갈 적을 협공하는 작전도 펼 수 있었다. 이 작전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작전을 수행할 비텔리우스 쪽 병력은 6만 명을 헤아리는 대군이다. 반대로 '도나우 군단'은 속주별, 군단별로 뿔뿔이 흩어져 베로나에 도착하는 중이어서, 아직 군단 전체가 집결하지도 않았다. 만약 카이키나가 이 기회를 이용할 작정이었다면 승리는 분명 그의 차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 앞에서 카이키나가 행한 연설은 출전이 아니라 '배반'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장교급에 속하는 자들은 카이키나의 의견에 찬동했다. 비텔리우스 황제를 버린 사람은 카이키나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백인대장과 일반 병사들은 단호히 반대했다. 그들이 비텔리우스를 존경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비텔리우스가 그들의 사령관이었던 기간은 한 달도 채 안되고, 황제가 된 뒤에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게 없었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었다.
백인대장이나 일반 병사들은 '도나우 군단' 병사들의 보복이 두려웠을 것이다. 반 년 전의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패배한 '도나우 군단' 병사들을 모욕하고 냉혹하게 다루라고 명령한 것은 비텔리우스와 카이키나, 그리고 그 밑에 있던 상급 장교들이었다. 하지만 그 명령을 실행한 것은 하급 장교나 일반 병사들이다. 죽고 싶을 정도의 굴욕감을 맛본 '도나우 군단'의 동료들과 직접 맞부딪치고, 그들의 가슴 속에 불타는 원한을 가까이에서 눈으로 본 것은 그들뿐이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포로와 그 수용소에서 근무한 병사의 관계와 비슷하다. 게다가 이 경우에는 양쪽 다 로마 시민이고 로마군 병사였다. 배반에 반대한 병사들은 카이키나를 붙잡아서 쇠사슬로 묶고 감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비텔리우스 진영은 총지휘를 맡을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래서는 더 이상 군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도나우 군단' 쪽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도나우 방위선을 지키는 '도나우 군단'은 세 개의 속주에 나뉘어 주둔해 있었고, 그 책임자인 속주 총독 세 사람 가운데 두 명은 아까도 말했듯이 병사들의 압력에 대처하지 못하고 본국 이탈리아로 달아나버렸지만, 도나우 강 하류를 맡고 있는 모에시아 속주 총독만은 본국으로 가는 병사들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 역시 비텔리우스를 반대하고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한 것이다. 이 사투르니누스 총독이 휘하의 3개 군단과 함께 이탈리아에 들어오자, 판노니아의 2개 군단을 이끌고 먼저 도착해 있던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처지가 미묘해졌다. 사투르니누스는 3개 군단을 맡고 있는 사령관이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실제로는 2개 군단을 이끌고 있었지만 공식 지위는 1개 군단의 군단장일 뿐이다. 속주 총독이 도착하면 '도나우 군단' 전체의 총지휘관은 당연히 총독에게 양보해야 한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이것이 불만이었다. 또한 그를 따라온 판노니아의 2개 군단도 온후한 사투르니누스보다 혈기왕성한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지휘를 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군단장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총독인 사투르니누스에게 파도바에 남아서 뒤늦게 이탈리아로 들어올 우군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사투르니누스에게는 정황을 파악하는 통찰력이 있었는지, 이 요구를 군말없이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도나우 군단'의 지휘계통은 통일되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를 두고 평시에는 부적당하지만 전시에는 도움이 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평시에도 활약할 수 있는 인재가 아니면, 전시에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이 될 수 없다.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통솔력이야말로 지도자의 첫 번째 조건이기 때문이다. 통솔하는 역량이 필요불가결한 이유는 목표 달성이 완벽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가령 전투에서는 압승을 거두지 않으면 안된다. 적군과 아군이 서로 찔러서 둘 다 죽는 것은 단순한 전쟁광이나 생각할 만한 일이다.
인류가 도저히 초월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악이 한 가지 이점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제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압승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중간한 승리로는 전쟁과 별다름이 없는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압승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적의 사망자 수가 아니다. 그보다 아군의 희생자가 적은 편이 더 중요하다. 승리가 진정한 승리이기 위해 서는 적이 또다시 싸움을 걸어오지 못할 상태로 해둘 필요가 있다. 문자 그대로 승부를 결판내는 결전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을 마구 죽이기보다 아군의 병력을 계속 유지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희생자가 적으면 사기가 떨어지는 것도 피할 수 있다. 어제까지 고락을 함께한 전우가 사방에서 픽픽 쓰러져 죽는데도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성을 무시한 허황된 소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쓸데없는 희생을 치르지 않고 승리를 얻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지도자에게는 휘하 병사들에 대한 완벽한 통솔력이 요구된다. 단숨에 압승을 거두기 위한 전략이나 전술을 구사할 때에도 휘하 병사들을 완벽하게 통솔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5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통솔하는 능력은 누구나 타고나는게 아니다. 고대 서양의 전쟁사를 보아도 그런 능력을 타고난 사람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한니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들은 모두 수적으로 열세인 병력을 가지고 압승을 거두었으니까, 전략과 전술에도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휘하 병사들을 통솔하는 뛰어난 역량이야말로 그들이 승리한 진짜 원인이었다.
5만 명에 이르는 '도나우 군단'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입장에 있었지만,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에게는 이 통솔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비텔리우스 진영의 총사령관 카이키나도 이런 재능을 타고났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도 수만 명의 병력을 지휘해본 경험은 있었지만, 부하들에게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전선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카이키나의 배신을 안 발렌스는 병석에서 일어나. 배를 타고 남프랑스로 가서 군대를 재편하여 서쪽에서 '도나우 군단'을 공격하려 했지만, 남프랑스에 상륙하자마자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는 갈리아인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어버렸다. 양쪽 다 유능한 사령관이 없는 상태에서, 적군과 아군을 합치면 10만 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격돌할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가 어떤 결과로 끝날지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서기 69년 10월 24일에 벌어진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는 제1차 전투와 마찬가지로 혼전 상태로 시작되어 끝났다. 공격과 수비가 바뀌었다고는 하나, 참전한 병사들은 제1차 때와 마찬가지로 비텔리우스파와 오토파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공격하는 쪽이 이겼다. 다만 이번의 승자는 지난번의 패배를 설욕하고 그때 당한 굴욕을 앙갚음하겠다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게다가 압승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적병이 도망치는 것을 허용했다. 그래서 이튿날까지 처참한 전투가 이어졌고, 비텔리우스파 병사들이 도망쳐 들어간 크레모나를 공략하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도나우 군단' 병사들은 반 년 전에 크레모나의 원형경기장 건설 현장에서 혹사당한 것과 그때 크레모나 주민에게 모욕당한 것도 잊지 않았다. 기원전 3세기에 탄생하여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크레모나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반항한 사람도 반항하지 않은 사람도 무차별로 살해되었다. 같은 로마 시민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자행된 이 잔학행위는 듣는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것이 이틀 동안 계속된 전투와 그 후 나흘 동안 계속된 전투와 그 후 나흘 동안 계속된 크레모나 공략의 결과였다. 비전투원인 크레모나 주민까지 포함하여 양쪽의 사망자 수는 무려 4만 2천 명.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격돌한 파르살로스 전투에서는 양군을 합하여 8만 명이 참전했지만, 전사자 수는 폼페이우스 쪽이 6천 명, 카이사르 쪽은 200명, 합해서 6천 200명이었다. 패배한 폼페이우스 진영은 2만 4천 명이 포로가 되었지만,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는 포로가 나오지 않았다. '도나우 군단' 병사들이 '라인 군단' 병사만이 아니라 크레모나 주민까지도 마구잡이로 죽였기 때문이다. 통솔력이 없는 지도자가 이끄는 집단은 더 이상 전사가 아니라 야수떼와 마찬가지였다.
베드리아쿰에서 비텔리우스파 군대가 패배하고 크레모나에서 참극이 벌어졌다는 소식은 당장 수도 로마에 전해졌다. 비텔리우스는 오토처럼 자살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남하해올 게 뻔한 '도나우 군단'을 맞아 싸울 준비를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맞아 싸울 병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베드리아쿰에 이어 크레모나에서도 참패한 비텔리우스파 병사들이 황제가 있는 수도 로마로 도망쳐왔기 때문이다. 타키투스의 붓은 이 무렵의 비텔리우스 황제를 이렇게 묘사라고 있다.
"정원의 나무 그늘에 숨어서 납작 업드린 채, 음식을 받을 때에만 얼굴을 들 뿐,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일절 신경쓰지 않는 짐승."
뚱뚱한 비텔리우스를 아는 사람에게는 그를 눈앞에서 보는 듯이 생생한 묘사다. 하지만 우두머리가 이 꼴인데도 비텔리우스파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맞아 싸울 준비에 몰두했다.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쳐내려올 '도나우 군단' 병사들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공격에 나선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도 비텔리우스파 패잔병들이 필사적으로 나오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폐허가 된 크레모나를 떠나 포 강을 건넌 다음, 아이밀리아 가도를 따라 리미니까지 가서 플라미니아 가도를 지나 수도 로마 근교에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50일이나 걸렸다. 빠른 말이라면 닷새 만에 달릴 수 있는 거리를 그 열 배인 50일이나 걸린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비텔리우스파 패잔병들이 매복해 있을 것을 우려하여, 손으로 더듬듯 신중하게 행군했기 때문이다. 아이밀리아 가도는 탁 트인 평지를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도로지만, 플라미니아 가도는 아펜니노 산맥을 뚫고 나아간다. 둘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통솔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5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모두 살피는 것은 꿈 같은 예기이고, 결국은 선두에 선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뒤를 무질서하게 따라가는 행군이 되어버렸다. 그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발렌스는 처형되고 카이키나는 석방된 것이 그 증거다. 섯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와 크레모나 파괴로 복수심을 채우자, 그제야 비로소 동쪽에서 다가오는 무키아누스와 '유프라테스 군단'의 도착을 기다릴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판노니아 주둔군 1개 군단을 지휘하던 일개 군단장에 불과하다. 한편 무키아누스는 4개 군단의 지휘권을 갖는 시리아 속주 총독이고, 지금은 황제를 자칭한 베스파시아누스의 대리인 자격으로 비텔리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본국 이탈리아로 오고 있다. 이처럼 군대 내부의 지위에도 압도적인 차이가 있는데다 사회적 지위에도 차이가 있었다. 무키아누스는 본국 출신의 원로원 계급이지만,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속주 출신이다. 나이도 무키아누스는 50대 후반인데,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30대 초반이다. 인간은 뭔가에 열중하여 행동하고 있을 때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일을, 그 행동이 일단락되면 당장 걱정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로마인끼리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영토를 침범한 다키아족을 격퇴한 뒤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돌린 무키아누스와 '유프라테스 군단'이 이탈리아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비텔리우스를 폐위시키고 베스파시아누스를 제위에 앉히는 주인공 역할을 자기가 맡기로 했다. 그의 허영심이 이긴 셈이지만, 난세에는 그런 인재가 적합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넷째, 베드리아쿰 전투를 치르고 크레모나를 파괴한 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만이 아니라 '도나우 군단'의 모든 병사들에게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도 이유로 들 수 있지 않을까. 복수를 끝내고 원한을 풀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나우 군단'이 이탈리아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비텔리우스 황제가 원군 파견을 명령했는데도 침묵만 지켰던 에스파냐와 브리타니아의 5개 군단이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 결과를 안 뒤에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상황이 이런 만큼,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비텔리우스도 이제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비텔리우스 살해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천천히 내려오는 '도나우 군단'의 수도 접근을 저지하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간 비텔리우스파는 몇 차례에 걸쳐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 저항도 12월 15일에 병사들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먹고 자는 일밖에 하지 않은 비텔리우스는 이튿날인 16일에 그 소식을 들었다. 54세의 황제는 상복 차림으로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서 나와 포로 포로 로마노로 갔다. 로마의 서민들이 오랜만에 보는 황제의 모습이었다. 비텔리우스는 포로 로마노의 연단 위에서 그를 에워싼 시민들에게 국가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퇴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집정관에게 칼을 내밀면서, 자신의 생사는 시민들에게 맡기겠다고 말했다. 집정관은 황제가 내민 칼을 받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비텔리우스는, 황제의 표장은 콘코르디아 신전에 돌려놓고 자기는 사저로 거처를 옮기겠다고 말했다. 이 말에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시민들 사이에서 항의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황제가 있을 곳은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황궁뿐이다. 그러니까 황궁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항의를 들어면서 비텔리우스는 거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포로 로마노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황제를 팔라티노 이외에 어디에도 보내지 않겠다는 듯, 성도를 제외한 모든 길을 가로막았다. 비텔리우스는 민중의 함성에 떠밀리듯 비아 사크라를 지나 팔라티노 언덕으로 올라가서 황궁에 다시 틀어박혔다.
이튿날인 17일, 비텔리우스가 밝힌 퇴위의 뜻을 받아들여 원로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지위를 비텔리우스에서 베스파시아누스한테로 평화롭게 이양하려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유력한 원로원 의원이 수도 경찰청장이며 베스파시아누스의 친형인 사비누스를 찾아갔다. 하지만 비텔리우스파 패잔병들이 이것을 알고 흥분했다. 자기들한테도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이 결정된 데 화가 난 것이다. 또한 자기들한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이 결정된 데 화가 난 것이다. 또한 자기들만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는 것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들의 불안과 분노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인 사비누스를 향해 폭발했다. 18일, 황제가 누구로 바뀌든 행정 관료로서의 임무를 철저히 수행해온 사비누스도 신변에 위험을 느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조카, 즉 베스파시아누스도 신변에 위험을 느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조카, 즉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아들 도미티아누스를 데리고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피신했다. 카피톨리노 언덕은 최고신 유피테르에게 바쳐진 신전을 비롯하여 신들을 모신 신전밖에 없는 로마의 유일한 성역이다. 여기에 숨어 있으면 폭도로 변한 비텔리우스파 병사들도 건드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불안과 분노를 터뜨릴 곳을 잃어버린 병사들은 그 성역을 에워쌌다.
그날 밤 사비누스는 키피톨리노 언덕 바로 옆에 있는 팔라티노 황궁으로 심부름꾼을 보내, 병사들에게 포위를 풀도록 명령해 달라고 비텔리우스에게 부탁했다. 심부름꾼이 가져온 황제의 회답은, 카피톨리노를 포위한 것은 병사들이 멋대로 한 짓이니까 자기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비텔리우스는 이제 더 이상 병사들에게 무언가를 시킬 힘도 없고, 병사들을 말릴 힘도 없었다. 19일, 아직 동도 트기 전에 비텔리우스파 병사들은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우르르 올라갔다. 오르막길을 비추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횃불들이 신전 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들을 태우는 데 사용되었다. 모여든 로마인들 앞에서 해가 높이 떠오른 뒤에도 오랫동안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 타키투스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분개할 만한 광경이었다. 로마인의 수호신들에게 바쳐진 신전이 외국인도 아닌 로마인의 손으로 불타버린 것이다. 그것도 뜻밖의 화재가 아니라 일부러 불을 질렀다.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이후 무려 822년째 되던 해에 처음으로 일어난 수치스러운 사건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신전을 보고, 횃불을 던진 비텔리우스파 병사들도 망연자실하여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고 한다. 그 틈에 도미티아누스는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비누스는 병사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어버렸다. 병사들은 붙잡은 사비누스를 비텔리우스 앞으로 끌고 갔다. 사비누스는 수도 경찰청장 자리에만 12년 동안이나 앉아 있었던, 문자 그대로 공복이었다. 비텔리우스는 그를 살려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부하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그날 밤 자정이 지났을 때,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끄는 '도나우 군단' 선발대가 로마에서 북쪽으로 15킬로미터 지점까지 접근했다는 소식이 황궁에 전해졌다. 이것이 사비누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병사들은 비텔리우스가 팔짱을 낀 채 지켜보는 앞에서 사비누스를 죽이고, 그 시신을 테베레 강에 던져버렸다. 사비누스가 살아 있었다면 수도 로마가 무력 충돌의 무대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겠지만, 이것으로 그 유일한 가능성마저 사라져버렸다. 이튿날인 12월 20일,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제3권 참조) 당시 수도가 무력 충돌의 무대가 된 지 무려 150년 만에 또다시 로마 시내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시가전을 피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텔리우스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여제사장을 통해 자기는 퇴위할 테니까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편지를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에게 보냈다. 원로원 계급과 기사계급에 속하는 유력자들 중에는 개별적으로나마 설득하는 역할을 자청한 이들도 있었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 자신도 제국의 수도를 시가전 무대로 삼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비텔리우스가 휘하 병사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듯이,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에게도 그럴 힘이 없었다. 밀어붙이는 기세로 공격하는 쪽과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혀 수세에 몰려 있는 쪽을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사비누스가 살해된 것은 실로 중대한 일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친형을 죽인 행위는 결코 묵과할 수 없다는 명분을 공격하는 쪽에 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불가피해진 시가전을 되도록 빨리 결말내기 위한 방책을 궁리했다. 휘하 병력을 삼분하여, 제1군은 근위대 막사를 공격하게 하고, 제2군은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포로로마노로 직행하게 하고, 제3군은 테베레 강을 따라 남하하여 포로로마노와 마찬가지로 공공건물이 늘어서 있는 마르스 광장을 장악하게 했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참으로 합리적인 작전처럼 보인다. '도나우 군단'은 북이탈리아에서 로마로 통하는 플라미니아 가도를 남하해 왔으니까, 수도를 공격한다면 북쪽에서 공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갖고 있는 전략이나 전술적 재능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제국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수도 로마만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제국의 안전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 및 유프라테스 강이라는 3대 방위선을 비롯한 국경선을 지킴으로써 유지해야 하고, 그 중심인 '세계의 수도' 로마에는 성벽이 필요없다고 생각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공화정 시대 로마의 방벽이었던 세르비우스 성벽을 허문 지 120년이 지났다. 군데군데에 아직 성벽이 남아있긴 했지만, 성벽은 완전히 이어진 상태로 도시 전체를 둘러싸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방위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된 3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서기 69년 말 당시 '세계의 수도' 로마는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지 않은 도시였다. 북이탈리아의 크레모나는 대도시가 아닌데도 공성전을 벌일 필요가 있었지만, 대도시 로마는 동서남북 어디에서나 군대가 진입할 수 있었다. 몇 개로 나뉜 병력이 사방에서 진입하면, 이들을 맞아 싸우는 비텔리우스파 병력도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수비군을 분산하고 고립시키면, 항복을 빨리 받아내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그리고 로마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100킬로미터쯤 내려간 타라키나(오늘날의 테라치나)에는 비텔리우스의 친동생인 루키우스가 이끄는 부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가 베스파시아누스 진영의 승리로 끝난 뒤에도 계속 비텔리우스를 지지한 것은 라인 강 연안을 제외하고는 아프리카 속주뿐이었다. 루키우스는 여차하면 아프리카로 달아날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는 로마 시내에는 '도나우 군단'을 맞아 싸우는 비텔리우스파 병사들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면 남쪽으로 달아나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 결과, 서기 69년 12월 20일의 시가전은 로마의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역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가장 치열한 전투는 근위대 막사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막사니까 사방을 지키는 방벽이 있다. 안에는 무기도 충분하다. 게다가 공격하는 쪽도 그들을 맞아 싸우는 쪽도 모두 전투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은 비텔리우스가 휘하의 '라인 군단'에서 선발하여 재편성한 16개 대대 1만 6천 명의 근위병이다. 이 병사들은 반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거처였던 막사를 공격하고 있었다. 전투는 온종일 계속되었다. 최후의 한 명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은 비텔리우스파 근위병들은 모두 정면에서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적에게 등을 보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벌어진 시가전은 그와는 반대였다. 그 상황을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수도의 민중은 이날 시내에서 벌어진 전투를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검투사 시합이라도 구경하듯 관전했다. 용감하게 싸우는 자에게는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고전하는 자에게는 더욱 열심히 싸우라고 야유를 보낸다. 열세에 놓인 병사가 가게나 주택 안으로 도망쳐 들어오면, 민중은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민중은 병사들이 싸움에 열중해 있는 틈에 병사들의 권리인 전리품을 약삭빠르게 가로채고 있었다. 수도 전역에서 개탄스러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병사들이 격돌하고, 사망자가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부상자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데, 공중목욕탕이나 선술집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시체가 겹겹이 쌓이고 피가 강을 이루고 있는데, 그 옆에서는 창녀들이 손님과 화대를 흥정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평화를 만끽하면서 쾌락을 즐기고 있는데, 그 바로 옆에서는 패잔병이 처참한 꼴로 끌려간다. 요컨대 로마 전체가 광기와 타락의 도시로 변한 듯했다. 수도 안에서 벌어진 시가전은 로마 역사상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술라가 두 번, 킨나가 한 번 결행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민중의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수도 민중은 내전의 향방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가전이라는 구경거리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시가전이 마침 휴일인 사투르니누스 축제와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탓도 있어서, 축제일에 제공되는 구경거리를 즐기듯 시가전을 즐긴 것이다. 비텔리우스 쪽이 이기든 베스파시아누스 쪽이 이기든,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수도 시민은 이렇게 국가의 재난조차도 쾌락으로 바꾸어버렸다."
애국자 타키투스의 개탄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로마인끼리의 시가전을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검투사 시합처럼 관전한 서민들이 오히려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서기 69년 말에 수도에서 벌어진 시가전은 로마 제국의 재난이었다. 하지만 민중은 알아차리고 있었다. 비록 의식하지는 않았다 해도, 어느 쪽이 이기든 달라지는 것은 황제의 얼굴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제의 얼굴이 몇 번 바뀌다 보면 무능한 사람은 자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제의 얼굴이 몇 번 바뀌다 보면 무능한 사람은 자연히 도태되고 조금은 나은 '얼굴'이 황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도 민중의 지혜로 알았을 게 분명하다. 역사가 타키투스의 특징은 그가 역사가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역사가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무슨 일이든 빠짐없이 서술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그가 애당초 전달하려 했던 생각과는 반대되는 생각을 전달해버리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위의 글을 통해 타키투스는 국가의 재난조차도 구경거리로 바꾸어버린 로마의 민중을 통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나 같은 독자는 오히려 로마 민중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래도 후세의 역사 역사가들은 대부분 타키투스의 서술을 그대로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점은 밝혀 두어야 할 것이다. 술라가 킨나의 내전(제3권 참조) 당시 민중이 무관심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생활 환경이 개선되느냐 아니냐가 내전의 행방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내전은 원로원 계급과 평민계급의 대립에서 일어났다. 술라가 원로원파였고, 술라와 맞서 싸운 마리우스나 킨나는 평민파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민중에게는 성원할 상대가 분명했다.
서기 69년 12월에 벌어진 시가전으로 돌아가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근위대 막사를 제외한 다른 전선에서는 이미 승부가 판가름나 있었다. 이제까지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 틀어박힌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비텔리우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황궁에서 나왔다. 몰래 로마를 빠져나가 테라치나에 있는 동생에게 갈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수비대도 거느리지 않은 게 묘하다. 일단 황궁을 나오기는 했지만, 마음이 변했는지 황궁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잠깐 사이에 황궁에서는 말단 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달아나버렸다. 아무도 없는 황궁에 들어간 비텔리우스는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기 방으로 가지 않고 평소에 수위들이 대기하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도나우 군단' 병사들이 그곳에 숨어 있는 황제를 찾아내어 밖으로 끌어낸 것은 그 직후였다. 손을 뒤로 결박당한 비텔리우스는 돼지처럼 병사들에게 내몰려 팔라티노 언덕 바로 밑에 있는 포로 로마노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이없이 살해되었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시가전을 총지휘해야 할 그가 이 시점에 어디에 있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황제의 주검은 처형당한 중죄인처럼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여덟 달 동안 황제 노릇을 한 뒤 54세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이리하여 로마는 불과 1년 사이에 세 황제의 죽음을 치렀다. 이로써 역사상 '삼황제 시대'라 불리고, 타키투스에 따르면 '하마터면 제국의 마지막 1년이 될 뻔했던' 서기 69년도 이윽고 끝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무키아누스가 로마에 도착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오른팔, 아니 두뇌는, 비텔리우스가 반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군대와 함께 입성하여 승리를 과시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다. 무키아누스는 수도 로마에 내전의 승자로 나타난 게 아니라, 내전으로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우는 재건자로 나타난 게 아니라, 내전으로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우는 재건자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 냉철하고 노련한 통치자는 당장에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우선 테라치나로 군대를 보내 비텔리우스의 동생이 이끌고 있던 부대를 분쇄했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사형에 처해졌다. 비정한 처사이긴 하지만, 비텔리우스파 잔당에게 비빌 언덕을 주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그 사이에 원로원을 소집하여, 이듬해인 서기 70년을 담당할 집정관으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를 당선시켰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 머물러 있었고, 티투스도 내년 봄에 시작될 예루살렘 공략전을 준비하는 경우에는 로마에 없어도 집정관에 취임할 수 있다. 실권자로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인 이들 두 사람을 집정관 자리에 앉힌 것은 로마 제국의 질서 회복에 착수했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비텔리우스 타도의 실질적 공로자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에게는 원로원을 움직여 무공훈장을 수여하긴 했지만, 그밖의 보상은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여기에 승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개 군단장인 그에 비해 무키아누스는 속주 총독이고, 태도 또한 결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에게 심취해 있던 도미티아누스가 아무리 부탁해도, 무키아누스는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인 베스파시아누스의 둘째아들의 부탁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처사에 불만을 품은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배를 타고 이집트까지 가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직접 호소했다. 하지만 새 황제의 태도도 야심만만했던 34세의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베시파시아누스와 무키아누스의 2인3각이 그만큼 완벽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전시에는 적합한 인재라 해도 평시에까지 적합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역사가 타키투스도 말했듯이, 이로써 전쟁 상태는 끝났어도 평화와 질서가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평화와 질서를 재건하기 위해서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본국으로 돌아오는 서기 70년 가을까지 사실상의 황제 역할을 하게 된다. 무키아누스의 의지를 천명하기 위한 첫 번째 사업은 불타버린 유피테르 신전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평화의 첫 번째 조건인 질서 회복은 신전 복구 같은 평화적인 사업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아직 공적인 신분은 시리아 속주 총독에 불과한 무키아누스가 무엇보다 먼저 직면해야 했던 과제는 라인 강 주변에서 속주병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
|
독서실 → 한국사
|
|
|
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김해 - 국제결혼의 현장
[수로왕과허왕후]
인도의 공주 허황옥
김해는 김수로왕과 왕비 허황옥간의 국제결혼이 이루어진 낭만적인 고장이다. 삼국유사에는 허왕후가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임을 밝혀놓았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허왕후는 신랑인 수로를 만나기 위해 2만 리가 넘는 머나먼 바닷길을 항해해 왔다는 얘기가 된다. 삼국유사에는 아득한 1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로맨스가 그야말로 극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설화는 초기의 가야국이 벌인 남방제국과의 해상무역 활동이 빚어낸 로맨스일지도 모른다. 수로왕은 신하에게 왕후가 될 사람이 오는 길목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서기 48년 음력 7월 27일이었다. 그리하여 유천간은 빠른 매와 준마를 가지고 망산도에 대기하며 신귀간은 승점에서 기다린다. 이윽고 붉은 돛과 기를 단 배가 북쪽을 향해 오는 것이 보인다. 이에 유천간 등이 망산도에서 불을 들어주니 배에 탔던 사람들이 상륙한다. 신귀간 등이 왕에게 알리고 가락국의 중신들이 허황옥을 영접한다. 그러나 허왕옥은 "내가 한번도 그대들을 본 적이 없는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가겠는가"하고 말한다. 이에 왕궁에 이 사실을 알리자, 수로는 곧 대궐 밖 60보쯤 되는 곳에 행재소를 꾸미라고 명한다. 황옥은 곧장 근처의 쭈삣한 산 위에 올라가 비단옷을 벗어 그것을 폐백으로 산신령에게 보낸다. 그런 다음 황옥은 수로왕이 있는 행재소로 다가간다. 그들은 곧 유궁에 든다. 그곳에서 '마침내 합환의 기쁨을 이루어 맑고도 아름다운 이틀 밤과 환한 낮을 보내고'(삼국유사) 2박3일 만인 8월 1일에 본궁으로 들어간다. 삼국유사에는 허왕후가 처음 배를 대었던 나루를 주포촌, 비단옷을 벗은 언덕을 능현, 붉은 깃발이 들어온 해변을 기출변이라 했음을 적고 있다.
평야 속에 묻힌 로맨스의 현장
수로와 허왕후의 2박3일의 신혼꿈이 무르익은 이 얘기의 현장은 어디일까. 김해 주위에는 허왕후가 배를 대고 상륙하여 수로왕을 향해 다가간 옛자취를 현재 거의 남기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지형이 많이 변해 옛날에 바다이던 곳이 지금은 육지로 바뀌어 버렸다. 낙동강 하류라 오랜 세월 동안 물에 떠내려온 흙이 쌓여 퇴적된 데다가 간척사업으로 바다를 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로와 허왕후의 로맨스의 현장은 태반이 김해평야 속에 묻혀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보면 조선 때만 해도 김해 앞까지 바다(강하구)였으며 김해 앞바다에는 네 개의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섬들이 대부분 평야에 묻혀 그 봉우리들만 뾰족하게 들 가운데 솟아 있을 뿐이다. 우선 처음 배를 발견한 망산도는 어디일까. 현재 망산도는 김해에서 20km이상 남쪽인 창원군 응동면 용원리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되어 있다. 속칭 '부인당'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마을에는 유주각이라는 사당이 있다. 사당 안에는 '대가락국태조왕비문태보허씨유주지지'라 새긴 비석이 있다. 허왕후가 배를 댄 곳을 기념하기 위한 표시인 셈이다. 용원리 뒷산은 거북산이며, 이 산에서 흘러 용원리 마을을 통과하여 바다로 흘러드는 용원강의 하구에 망산도가 위치한다. 망산도는 썰물 때는 물이 빠져 뭍과 연결되며 밀물 때는 바닷물에 둘러싸인다. 이 섬의 남쪽 1백m 바다 속에는 석주(쪽박)섬이 있어서 허왕후가 돌배를 타고 왔다가 파선한 형해라고 이 마을의 주민들은 믿고 있다. 이 마을의 사당에는 음력 3월 15일에 김해 김씨 종손들에 의해 제사가 올려진다. 이 사당은 기우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을 삼국유사에 나오는 망산도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은 듯하다. 무엇보다도 김해에서 많이 떨어져 있으며, 근처에 높은 산이 있어 '궁성 남쪽 섬에서 배를 보았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모순된다. 그렇다면 망산도는 어디일까. 대동여지도를 보면 김해 앞바다 가운데 있는 45개의 섬 중에 '망산'이라 표시된 섬이 보인다. 현재 김해평야 가운데 솟은 송산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처음 배를 발견한 망산도는 현재 송산의 기슭이며, 유천간이 대기하다가 불을 들어 표시한 곳은 땅 속에 묻혀버렸음을 알 수 있다. 왕후가 처음 배를 댄 곳인 주포도 잘 알 수 없다. 일부 학자들은 주포가 낙동강 하구, 최후의 우회지역인 녹산면 생곡리 장낙나루로 보기도 한다. 김해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고장이다. 80년대 초에 들렀을 때만 해도 과거의 지형이 너무나 변해버렸고, 또 변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최근 다시 들렀을 때, 시가지의 변모가 너무 급격하게 이루어져 다시 한번 어지러움을 느껴야 했다. 특히 망산도가 있는 용원리 지역은 상전벽해의 대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만을 이루고 있는 신호리와 용원리지역 일대의 광활한 바다가 간척사업으로 묻혀버렸다. 삼성자동차 공장과 그 협력업체들이 그 곳에 들어설 예정이다. 망산도는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는 속에서 겨우 바다에 접해 형체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바다는 극심하게 오염되어 버려 망산도는 시궁창 위에 떠 있었다. 망산도가 있는 인근의 용원리 지역은 유흥가가 조성되고 있고, 주변의 산들도 깎아 내리고 있어서 옛날의 풍경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부족연맹 설화의 가능성
그 다음 배에서 내린 허왕후가 산신령에게 폐백을 드린 능현은 어디일까. 현재 그 위치도 미상이다. 그러나 옛 지도인 여지도서의 김해부지국에는 능현이 명월산 줄기에 표시되어 있다. 명월산은 지금의 김해 부근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는 낙동강 하구의 바다에 임한 산이 명월산으로 표시되었다. 오늘날 지도와 대조해본다면 옥녀봉이 있는 산에 해당될 듯하다. 이곳에는 명월사지가 있다. 능현은 이 산의 동쪽 높은 봉우리(해발 3백 20m)로 추정된다. 이 언덕에서 응달리 쪽으로 뻗친 '장유치'고갯길을 걸어 왕비는 수로왕의 행재소 쪽으로 갔다고 추측이 된다. 행재소의 위치도 미상이다. 삼국유사에는 궁궐에서 60보라 되어 있다. 1보를 1백 10cm로 잡을 때 궁궐 밖 70m 지점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수치는 믿기 어려워 60보는 6천 내지 6백 보의 오기라는 주장이 많이 나오고 있다.
왕의 행재소에 이른 허왕후는 곧 인사를 한 후 왕과 함께 유궁에 든다. 유궁은 글자대로라면 휘장을 친 궁전이란 뜻이지만 신방에 휘장을 친 고사로 미루어 신혼을 위한 궁으로 보인다. 유궁의 자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옛 왕후사 자리이다. 왕후사는 바로 수로와 허왕후의 신혼자리에다 후대(가야의 김질왕대)에 세워진 절이라 되어있다. 수로왕릉을 모신 숭신전의 전지에는 '왕후사는 현 김해읍에서 남쪽 30리 지점인 김해군 장유면 응달리 태정마을 뒷산에 있다'라 기록되어 있다. 현재 장유암이 있는 자리이다. 이상으로 미루어보면 왕후는 능현에서 '장유치'고개를 넘어 응달리에 이르며, 곧 왕의 행재소로 갔다가 그 근방에 임시로 세워진 신방으로 옮겼다는 얘기가 된다. 이처럼 수로와 허왕후와의 '로맨스'가 깃든 현장은 추측으로만 찾을 수밖에 없도록 모든 지형이 변했다. 그러나 이상의 지형고증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현지에 가보면 느낄 것이다. 그 동안 이 일대를 답사하여 옛 자리를 고증하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들의 자료를 분석하여 더욱 확실한 자리고증이 세워졌으면 한다. 수로와 허왕후의 결혼을 삼국유사에서는 국제결혼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둘의 결혼은 북에서 내려온 선진 철기 문화를 가진 수로족과 이 일대에 터를 잡고 농경과 어로에 종사하던 허후족들이 연맹을 결성하는 과정이 미화된 설화롤 보는 견해도 있다.
모례샘과 도리사 - 고구려접경 신라불교의 전래지
불교포교의 방해세력인 지방호족
구미시 해평면의 도리사는 삼국유사에 아도설화와 함께 신라의 첫 사찰로 소개되고 있다. 도리사는 냉산(또는 태조산)의 정상 가까운 곳에 선산의 넓은 들과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앉아 있다. 냉산은 왕건이 정상에 숭신산성을 쌓고 견훤과 싸운 곳이다. 지금도 정상에는 50m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다. 도리사에서 숭신산성과 아도가 열반했다는 금수굴, 낙산리 3층석탑을 잇는 4km의 등산로는 고사목군락과 기암절벽 등이 어우러진 솔바람소리 그윽한 산길이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9대 눌지왕(427~457년)때이며, 공인된 것은 23대 법흥왕 14년(527년)이다. 전래되고부터 공인되기까지 근 1백년이 걸린 셈이다. 신라의 불교는 대부분 고구려를 통해 들어왔다.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인 구미 해평지역(선산군)일대가 그 통로였다. 이 통로를 통해 묵호자 아도 등의 초기 포교승려들이 잠입해 들어와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받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계속했다. 고구려나 백제에 불교가 들어갈 때는 별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왕실에서 쌍수를 들어 환영할 정도로 순탄했다. 그런데 유독 신라에서만 불교가 공인되기까지 1백 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 그 기간 중에는 이차돈이 순교라는 피의 과정이 있어야만 했다. 이는 신라가 지리적으로 외진 동쪽에 위치하여, 고구려나 백제보다도 고유신앙을 더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초기의 6부장과 같은 강력한 지방호족 세력들이 잔존해 있어서 왕실의 힘을 견제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해볼 수도 있다. 다소 억지스런 추측이지만 신라의 왕실은 재래적인 신앙을 고수하려는 이들 지방호족들을 규합할 정신적인 지주로서 불교를 채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하여 불교를 공인하려는 왕실과 이를 배척하려는 지방호족과의 갈등이 불교포교를 방해했을 가능성이 짙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차돈의 순교'는 왕실이 불교를 공인할 명분을 마련하기 위해 벌인 '어마어마한 정치 드라마'일지도 모른다. 실제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되며, 곧이어 즉위한 진흥왕에 의해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된다.
초기 불교 포교의 거점
이처럼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불러일으킨 불교는 공인 전까지만 해도 구미시 도개면과 해평면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신라왕실을 오락가락했다. 이 일대는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였다. 또한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었던 만큼, 승려들이 포교를 목적으로 밀입국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눌지왕 때 묵호자라는 승려가 고구려로부터 국경을 넘어 일선군(현 구미시 도개면 일대)으로 잠입해 들어왔다. 그는 곧 모례(모체 또는 모록)의 집 지하실에 숨어들었다. 묵호자는 마침 신라의 공주가 병이 났을 때 그 병을 치유한다는 구실로 서라벌 왕실에 잠시 모습을 나타내지만, 곧 행적을 감추어버린다. 그 후 21대 비처왕 때에 아도라는 승려가 시종자 3명과 함께 역시 모례의 집에 숨어든다. 아도는 그곳에서 수년 만에 죽고, 시종자 세 사람이 그곳에 남아 경률을 강독하며 포교활동을 벌인다. 이상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초기의 포교얘기이다. 삼국유사에는 이에 덧붙여 아도의 비문을 소개하고 있다. 비문에 의하면 아도는 고구려인으로 5세에 출가, 15세에 위나라로 가서 현창화상에게 배운다. 19세에 귀국하여 어머니의 명에 따라 불교포교의 임무를 띠고 신라로 들어온다. 그때가 미추왕 2년이었다. 그는 서라벌에 기거하면서 왕에게 불교승인을 요청했으나 강력한 불교반대 세력으로 인하여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곧 일선군 모례의 집으로 피신한다. 그 이듬해 공주의 병이 심하자 아도는 대궐로 들어가 병을 치유한다. 이로 말미암아 왕의 허가를 얻어내어 천경림에 띠풀로 지붕을 인 흥륜사를 세운다. 그러나 얼마 후 미추왕이 죽자 곧 불교배척의 바람이 불어닥쳐 아도는 다시 모례의 집에 피신하여 그곳에서 죽는다. 이상의 비문에서 밝힌 아도의 얘기는 연대기술에 의문되는 점이 있다. 아도가 흥륜사를 지은 것이 미추왕 3년(264년)이라 하나, 이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서기 372년보다 근 1백년이 앞선다. 그러므로 앞 (삼국유사)에서 본 것처럼 아도는 묵호자가 온 이후인 21대 비처왕 때 신라에 왔다고 봄이 타당할 듯하다. 어쨌든 묵호자나 아도는 신라 불교의 개척자들이며, 모례는 그 후견인이었던 듯하다. 이들의 얘기는 눌지왕 이후 법흥왕까지 1백 년 동안 숱하게 이루어졌던 승려들의 포교활동 중 대표적인 것으로 삼국유사에 수록된 것 같다.
풍부한 초기불교의 유적지들
신라불교의 발상지인 구미의 도계 해평지역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초기 불교의 유적이 꽤 있다. 도개면 도개리에는 모례의 집터임을 알려주는 모례샘이 있으며, 샘 주위로 모례와 아도의 행적을 떠올려주는 설화들이 많이 깔려 있다. 해평면 냉산 정상부근에 있는 도리사 역시 아도의 자취를 간직한 절이다.
[구미 도리사]
모례샘은 신라초기에 만들어진 우물로 최근까지도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하여 주민들의 중요한 급수원으로 쓰였다. 지금은 집집마다 상수도가 들어서서 식수로 쓰여지지는 않고, 샘 주위의 몇 집이 허드렛물로 쓰고 있을 뿐이다. 우물의 모양은 특이해 약 두 길의 깊이 위에 길이 1.2m, 높이 40cm의 화강암 판석을 우물 정자 형으로 서로 얽어맨 모양이다. 이 마을 입구와 앞들에는 계주석(배를 매어놓은 말뚝)이 두 개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모례의 집이 배가 떠내려가는 형상이라 해서 떠내려가지 못하게 매어두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이 마을의 한 노인은 설명한다. 이 마을에 전해오는 설화에 의하면 아도는 당시 모례의 집에 신분을 숨기고 머슴으로 일했다. 모례는 부호였다. 아도는 소 1천 마리와 양 1천 마리를 길렀다. 3년 후 모례로부터 품삯을 받아 냉산 기슭에 절을 세웠다. 그 절에는 겨울 눈 속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절 이름을 도리사라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도리사의 위치
이 마을의 동편 청화산 골짜기는 지금도 '우실' 또는 '소천골'로 불린다. 남쪽 냉산 기슭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마을 동편의 다곡 마을은 옛날 모례집에서 먹이던 소의 외양간터라는 얘기도 전해온다. 마을 동편의 산기슭에는 아도가 혼자 독경하던 절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은 없다. 도리사는 해평면 소재지에서 북쪽 선상행 길을 따라 8km쯤 가다가 개울을 따라 오른쪽으로 4km쯤 걸으면 닿는 냉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다. 지금은 입구에 '해동최초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라 쓰여진 일주문이 서 있다. 입구에서 절 아래까지 포장이 되어 있다. 도리사는 신라불교의 개산지이며 아도가 처음 불법을 설법한 '초전법륜의 터'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아도의 사적비(조선 인조 17년 건립)가 있으며, 고려 때의 화엄석탑(보물 4백 70호)과 세존사리탑이 있다. 1976년에 이 사리탑에서 사리가 나와 도리사는 한 때 크게 알려졌다.
[태조산 도리사]
그러나 원래의 도리사터는 냉산 아래 (현 주차장터)라고 한다. 지금도 절터가 남아 있다. 이곳의 절터가 어느 때 없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번성할 때는 승려가 1천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 컸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현 도리사터는 아도가 정진하던 금당암이며, 1986년에 발견된 '도리사중수기'에 의하면 정사년(1677년) 6월에 화재로 대웅전 등이 타버려 기유년(1729)봄에 대인선사가 중창하여 금당암을 도리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세존 진신사리는 금동육각사리함과 함께 세존사리탑의 복원 중 발견했다. 사리발견 당시 필자는 도리사에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사리를 구경하려는 신도와 승려들이 수개월 동안 연일 몰려들었다. 고요한 산중이 저자거리처럼 되었다. 사리 발견으로 도리사는 새롭게 부각됐다. 그 후 절 아래까지 도로가 포장되고, 적은 사리를 안치한 적멸보궁(불상을 모시지 않고 법당만 있는 사찰의 건물)이 조성돼, 불교인들의 중요한 순례지로 바뀌었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