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1호 - 2024.02.23. 금요일(음력 : 01. 14.)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평범한 날이여, 그대의 귀한 가치를 깨닫게 하여라. ― 매리 J.아이리언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끄물끄물’ ‘꾸물꾸물’
반가운 단비가 내렸다. 올 가을 들어 전국적으로 비다운 비가 내린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우리도 이제 물 부족 사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때가 되었다.
비 때문에 요 며칠 맑은 하늘을 보지 못했다. 자꾸 흐려져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를 ‘끄물끄물’하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끄물끄물’의 발음이 어려워서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꾸물꾸물’로 잘못 쓰고 있다. ‘꾸물꾸물’은 매우 느리게 자꾸 움직이는 모양, 혹은 게으르고 굼뜨게 행동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 ‘끄물끄물’과는 뜻이 다르다. 이렇게 기억하면 쉽다. “날씨가 끄물끄물하다고 너까지 꾸물꾸물거리는 거니?”
날씨와 관련해서 자주 혼동하는 말 중에 ‘작열’과 ‘작렬’이 있다. ‘작열하는 태양’이 맞을까? ‘작렬하는 태양’이 맞을까? ‘작열(灼熱)’은 ‘사를 작’에 ‘더울 열’을 써서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작열하는 태양’ ‘작열하는 사막’과 같이 쓰는 것이 맞다. 비유적으로는 ‘분노가 작열하다’와 같이 쓸 수 있다.
반면에 ‘작렬(炸裂)’은 ‘터질 작’에 ‘찢을 렬’을 써서 ‘터져서 퍼진다’는 뜻이 있다. 포탄이 터지는 것처럼 박수가 터져 나온다거나 경기에서 공격이 연속해서 나올 때 ‘박수가 작렬하다’ ‘골이 작렬하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요즘 방송이나 광고 등에서 ‘ㅇㅇ작렬’이라는 말을 많이 접한다. 매력이 넘칠 때, 혹은 연속해서 실수를 해댈 때 ‘매력 작렬’ ‘실수 작렬’ 등과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작열’의 발음을 〔자결〕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작열’과 ‘작렬’ 모두 발음은 〔장녈〕로 같다.
아무튼 당분간은 맑게 갠 하늘보다 ‘끄물끄물’한 하늘이 더 반가울 것 같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가던 길 그냥 가든가
“딴 여자 찾아보던가/ 아니면 가던 길 지나가던가” 요즘 인기 있는 걸 그룹의 노래 가사다. 노래만 들을 때는 몰랐는데 텔레비전 화면에 가사가 자막으로 나오니 잘못된 표기가 눈에 띈다. 바로 ‘찾아보던가, 지나가던가’의 ‘던가’인데, ‘든가’로 써야 맞다. 그러면 ‘가던 길’도 ‘가든 길’로 써야 하나? ‘던’과 ‘든’은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하기 쉬운데 쓰임이 다른 말이므로 구분해서 써야 한다.
‘던’은 지난 일을 나타내는 ‘더’에 관형사형 어미 ‘ㄴ’이 붙어서 된 말로, 앞말이 과거에 일어난 일임을 나타낸다. ‘새집은 이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크다’거나 ‘깊던 물이 얕아졌다’처럼, ‘던’은 항상 과거와 관련 있는 상황에 쓰인다. 이 문장들에서 ‘살던’ 일은 지금이 아닌 과거의 일이고, 물이 깊었던 것도 이미 지나간 시절의 일이다.
‘든’은 ‘든지’ 또는 ‘든가’가 줄어진 말로, 선택과 관련된 상황에서 쓰인다. ‘노래를 부르든 춤을 추든 마음대로 해라’ ‘어디서 무엇을 하든 이것만은 기억하기 바란다’처럼 여러 대상들 중에 무엇이든 선택이 가능할 때 쓴다. 위 첫 번째 예문은 노래를 부르는 일과 춤을 추는 일 중에서 무엇을 해도 좋다는 의미다. 두 번째 문장에서는 둘 이상이 직접 나열되진 않았지만 ‘어디서 무엇을’이라는 말이 다양하게 열린 가능성을 나타내므로 역시 선택의 의미가 들어 있다.
인용한 노래 가사는 ‘딴 여자를 찾든지 말든지’ ‘가던 길을 계속 가든지 말든지’ 상관 않겠다는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선택의 ‘든’을 사용해서 ‘찾아보든가, 지나가든가’로 써야 맞다. 다만 ‘가던 길’의 ‘던’은 길을 걸어가는 행위가 잠시 전이긴 하지만 분명히 과거의 일이므로 ‘던’을 쓰는 게 맞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
|
시나눔 → 우리시
|
|
|
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강물 -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
산골물 - 한용운
산골 물아
어데서 나서 어데로 가는가.
무슨 일로 그리 쉬지 않고 가는가.
가면 다시 오려는가.
물은 아무 말도 없이
수없이 얼크러진 등 댕담이.칡덩쿨 속으로
작은 달이 넘어가고
큰 달은 돌아가면서
쫄쫄쫄쫄 쇠소리가
양안 청산(兩眼淸山)에 반향(反響)한다.
그러면
산에서 나서 바다로 이르는 성공의 비결이
이렇단 말인가.
물이야 무슨 마음이 있으랴마는
세간(世間)의 열패자(劣敗者)인 나는
이렇게 설법(說法)을 듣노라.
∼∼∼∼∼∼∼∼∼∼∼∼∼∼∼∼∼∼∼∼∼∼∼∼∼∼∼∼∼∼∼∼~~~~∼∼
석류 - 정지용
장미꽃 처럼 곱게 피여 가는 화로에 숯불,
입춘때 밤은 마른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 겨울 지난 석류열매를 쪼기여
홍보석 같은 알을 한알 두알 맛 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녀릿녀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 해 시월 상ㅅ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작은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졸음 조는 옥토끼가 한 쌍.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고기의 손가락, 손가락,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실, 은실
아아 석류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신라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창업수성(創業守成)
創:비롯할/시작할 창. 業:업 업. 守:지킬 수. 成:이룰 성.
[원말] 이창업 난수성(易創業難守成).
[출전]《唐書》〈房玄齡專〉,《貞觀政要》〈君道篇〉,《資治通鑑》
일을 시작하기는 쉬우나 이룬 것을 지키기는 어렵다는 말.
수(隋:581~619)나라 말의 혼란기에 이세민(李世民)은 아버지인 이연(李淵)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관중(關中)을 장악했다. 이듬해(618) 2세 양제(煬帝)가 암살되자 이세민은 양제의 손자인 3세 공제(恭帝)를 폐하고 당(唐:618~907) 나라를 ‘창업’했다.
626년 고조(高祖) 이연에 이어 제위에 오른 2세 태종(太宗) 이세민은 우선 사치를 경계하고, 천하 통일을 완수하고, 외정(外征)을 통해 국토를 넓히고, 제도적으로 민생 안정을 꾀하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고, 학문?문화 창달에 힘씀으로써 후세 군왕이 치세(治世)의 본보기로 삼는 성세(盛世)를 이룩했다. 이 성세를 일컬어 ‘정관의 치[貞觀之治:태종 정관 연간(627~649)의 치세]’라고 한다.
‘정관의 치’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결단력이 뛰어난 좌복야(左僕射) 두여회(杜如晦), 기획력이 빼어난 우복야(右僕射) 방현령(房玄齡), 강직한 대부(大夫) 위징(魏徵) 등과 같은 많은 현신들이 선정(善政)에 힘쓰는 태종을 잘 보필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태종은 이들 현신이 모인 자리에 이런 질문을 했다.
“창업과 수성은 어느 쪽이 어렵소?”
방현령이 대답했다.
“창업은 우후 죽순(雨後竹筍)처럼 일어난 군웅 가운데 최후의 승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창업이 어려운 줄로 아나이다.”
그러나 위징의 대답은 달랐다.
“예로부터 임금의 자리는 간난(艱難) 속에서 어렵게 얻어, 안일(安逸) 속에서 쉽게 잃는 법이옵니다.그런 만큼 수성이 어려운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러자 태종이 말했다.
“방공(房公)은 짐과 더불어 천하를 얻고, 구사 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났소. 그래서 창업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리고 위공(魏公)은 짐과 함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항상 부귀에서 싹트는 교사(驕奢:교만하고 사치함)와 방심에서 오는 화란(禍亂)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래서 수성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러나 이제 창업의 어려움은 끝났소. 그래서 짐은 앞으로 제공(諸公)과 함께 수성에 힘쓸까 하오.”
|
|
독서실 → 한국소설
|
|
|
사기 3
3권 - 끝
14, 칠국반란
황제 효경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원앙을 돌아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조조의 문제는 며칠 안으로 결단을 내리겠소. 그 대신 그대를 태상(종묘등의 제사장)으로 삼고 오왕의 조카 유광을 종정(황족을 주관하는 대신)으로 삼을 테니 함께 여장을 갖추어 즉시 오나라에 다녀오시오."
"유광을 종정으로 임명하신 건 절묘합니다. 오왕 유비도 제 조카만은 소홀하게 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조조를 처리하시는 데 있어 작은 인정에 이끌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앙과 유광이 오나라로 떠난 열흘 뒤였다. 아침 일찍 황제는 중위를 시켜 조조를 입조하도록 했다. 조조는 멋모르고 조복으로 정장한 채 궁으로 들어왔다.
"그대와 잠시 함께 다녀올 데가 있소. 수레에 오르시오."
조조는 여전히 의심없이 황제 효경이 이끄는 대로 수레에 올랐다. 그런데 한참동안 황제의 입에서 아무 말이 없자 조조는 갑자기 의심이 생겼다.
"폐하, 지금 어디로 납시는 겁니까?"
"답답하오. 그래서 그대와 동시로 나가 바람이나 좀 쐬고 올까하오."
숲속 길이 끝나자 시야가 훤히 트이며 푸른 들판이 나왔다.
"짐을 원망하지 마오."
"예에?"
그 순간이었다.
"폐하!"
하얗게 질린 조조가 형리들에게 끌려가며 황제를 돌아보았다.
"울부짖어도 소용없소. 7국의 대란을 종식시키려면 그대의 목이 반드시 필요하오."
"하지만!" "모두 그대의 자업자득이오!"
조조는 이상 더 말을 못했다. 망나니들이 달려들어 조조의 목을 순식간에 잘라버렸기 때문이었다. 한편 원앙과 유광은 오나라에 도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파견임무를 잘 알고 있었다. 원앙은 오왕에게 종묘의 뜻을 받들라는 설득을 하기 위해 왔고, 종정 유광은 황실 친척을 도우러 왔다는 뜻을 전달할 의무가 있었다.
"아무래도 종정께서 먼저 입궐해 오왕을 잘 타일러 황제의 조칙에 배례받도록 하시오. 그런 연후에 제가 들어가 오왕을 설득하겠소이다."
유광은 고개를 끄덕거린 뒤 마지못한 듯 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왕 유비는 용상에 버티고 앉은 채 황제의 조칙을 받들려 하지 않았다.
"과인은 이미 동쪽의 황제가 되어 있는데 누가 누구에게 배례를 하란 말인가!"
오왕 유비의 호통에 한나라 종정 유광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나라 태상 원앙과 함께 왔습니다. 그를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무어? 원앙과 함께 왔다고? 그가 온 것은 결국 과인을 설득하려고 온 게 아닌가!"
"한나라 황제의 이름으로 보낸 특사이오니 한 번 만나기만 하십시오."
"좋다, 그를 불러들여라."
원앙이 들어왔다. 그러나 유비는 처음부터 원앙의 변론을 들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딱 한 마디의 대답만 듣겠소. 여기서 주살되겠소 아니면 반군의 장군이 되어주겠소?"
"저는 황제폐하의 사자로서 대왕께 모반을 거두어 주십사 하는 말씀을 전하러 왔을 뿐입니다."
"그럼 나의 장군이 될 수 없다는 얘기요?"
"저의 임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택했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소. 여봐라, 저놈을 당장 베어버려라!"
위사들이 달려오는 것을 본 유광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폐하의 사자를 죽인 그 결과에 대해 삼촌께선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유지도 무언가를 잠깐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렇다면 저자를 객사에 가두고 5백 명의 군사를 사방으로 풀어 단단히 지키게 하라. 내일 저자를 끌어내어 목을 베겠다. 이는 과인이 한나라 황제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속절없이 갇힌 몸이 되었다. 결국 원앙은 설득 한 번 못해보고 죽을 시간만 기다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아, 내 생명도 여기서 허무하게 끝장이 나는구나!' 깊은 밤이었다. 잠깐 선잠이 들었다고 생각되었는데, 누군가가 가만히 흔드는 통에 눈을 떴다.
"누구요?"
"어서 도망치십시오. 내일 아침이면 오왕은 당신을 벨 것입니다!"
원앙은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이라 의심스러운 눈길로 다시 물었다.
"그대는 도대체 누구요?"
"여기 오나라 교위 사마올시다."
"교위 사마가 왜?"
"당신께 은혜를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를 자세히 보십시오. 잘 모르시겠습니까?"
"아!"
어둠 속에서 교위 사마라는 자의 얼굴을 살피던 원앙은 깜짝 놀랐다. 전날 오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의 종사였다.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쉿!"
원앙이 오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 누군가가 와서 원앙에게 귀띔했다.
"재상께서 총애하시는 시비가 재상부의 속관 한 놈과 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내 시비가 속관과 밀통을 했다고?"
"종사직에 있는 환수와 그렇고 그런 사이입니다."
한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던 원앙은 밀고자에게 말했다.
"알겠네, 그렇지만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걸 결코 입밖에 내지 말게."
원앙은 모른 척하고 환수에게 더욱 잘해주었다. 그런데 밀고자가 참지 못하고 환수에게 가서 귀띔했다.
"여보게, 재상께선 자네가 그분의 시비와 밀통한 사실을 알고 계시네!"
"무어? 알고 계신다고? 그렇다면 나는 사형 당할 게 아닌가!"
"법대로 한다면 자넨 죽은 목숨이지!"
환수는 덜컥 겁이 났다. 그날 밤 슬그머니 재상부를 빠져나가 고향으로 출행랑을 쳤다. 밀고자가 다시 재상 원앙에게 고해 바쳤다.
"그놈이 결국 도망을 쳤습니다!"
"어디로 간다더냐?"
"모르긴 해도 고향 쪽으로 달아났겠지요."
"아무한테도 그런 사실을 소문내지 말아라."
원앙은 말을 달려 환수가 도망친 쪽으로 추격해 갔다. 종사 환수는 속절없이 잡혔다.
"내 시비의 말을 들어보니 자네와 좋아하는 사이라고 하더구나. 내 진작에 자네와 결혼시키려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자네가 도망쳤다고 하지 않던가. 돌아가서 그녀와 결혼해 행복하게 잘 살게. 종사직에 그대로 있으면서 성실하게 일 열심히 하고 말일세."
환수는 원앙에 대한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환수가 교위 사마가 되어 원앙을 철통같이 감시하는 입장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 '옳지! 이런 기회에 그분에게 은혜를 갚자!' 환수는 자신의 옷가지와 소지품들을 남김없이 처분해 진한 탁주 2석을 마련했다. 그런 후 자신의 담당 구역인 남서쪽 모퉁이의 병사들에게로 갔다.
"추운 날씨에 목도 마르겠지. 경비 서느라고 수고하는데 내가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있나. 자, 맘껏 들게!"
때마침 몹시 속이 출출하던 차라 병사들은 좋아라 하고 교위 사마 환수가 가지고 온 술을 마셨다. 차가운 겨울 날씨인데다 주리고 목말라 있을 때 마신 술이어서 병사들은 금새 깊이 취해 떨어졌다. 깨어있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전날의 종사 환수입니다. 나리의 시비와 밀통을 한 데도 불구하고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위 사마가 되어 운 좋게도 나리를 지키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앙은 잠깐 생각한 뒤에 대꾸했다.
"하지만 난 사양하겠네."
"아니,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죽지 않으면 자네가 죽네. 자네에겐 양친이 계시지 않은가. 난 부모가 계시지 않으니 내 목숨에 대해선 걱정 말게."
"그 일 때문이라면 안심하십시오. 양친은 벌써 멀찍이 안전하게 모셔놓았습니다. 어서 도망이나 하십시오."
"그렇다면 자네의 은혜를 입겠네."
칼로 군막을 자른 환수는 원앙을 인도해 술에 골아 떨어져 있는 병사들 사이로 빠져 나왔다.
"자 여기서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아나야 합니다."
"고맙네. 몸조심하게."
원앙은 칙사의 증거로 받은 기와 절모를 풀어 품 속에 감춘 뒤 깃대를 지팡이 삼아 8리 쯤 걸었더니 날이 샜다. 말발굽 소리가 났다. 원앙은 덤불 속으로 얼른 몸을 감춘 뒤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 양나라 기병들이로구나! 이제야 살았다!"
말을 빌려 탄 원앙은 장안으로 길을 재촉했다. 한편 태위 주아부(주발의 아들)가 대군을 형양으로 집결시키기 위해 육두 마차를 몰아 낙양으로 갔다. 그런데 주아부는 뜻밖에도 극맹을 거기서 만났다. 극맹은 임협(용맹스런 사내. 오늘의 개념으로는 '주먹')이었다. 주아부는 그를 보자 감격에 겨워 소리질렀다.
"오, 반갑구려! 7국의 반란으로 내가 역전거를 타고 이곳에 도착하는 일조차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소."
"무슨 뜻입니까?"
"모반한 제후들이 하나같이 떠들기를 '천하의 호걸 극맹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다'고 했소이다."
"허망한 제 명성이나마 그들이 필요로 했던 게지요."
"그러나 당신은 엄연히 이곳에 그대로 계시니 지극히 안심이오."
"그건 왜 그렇습니까?"
극맹의 대꾸에 주아부는 여전히 감격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말이오. 오, 초가 반란을 일으키면서도 사실상 극맹을 끌어넣지 못했던 게 아니오. 극맹 없는 저자들의 거사는 이미 끝장난 거나 다름없다는 얘기요!"
"저를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오. 그대의 명성에는 큰 무게가 실려 있소. 어쨌건 나는 걱정않고 형양으로 가겠으니 부디 낙양이나 지켜주시오. 실상 이쯤이면 형양 이동에는 근심될 만한 인물이 아무도 없겠소이다."
극맹과 헤어진 태위 주아부는 서둘러 형양으로 말을 몰았다. 가는 도중이었다. 주관 진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기어코 입을 열었다.
"정말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극맹이 어떤 인물이기에 장군님께서는 그토록 높게 평가하십니까?"
"그는 유협일세. 백성들은 장군의 말보다 협객의 말을 더욱 신용하지."
"한비자는 '선비는 학문으로 법을 어지럽히고, 협객은 힘으로 금법을 범한다'며 선비이건 협객이건 싸잡아 비난하고 있던데요."
"글쎄, 그건 한비의 생각일 뿐이지. 나는 말일세. 설사 협객의 행위가 반드시 정의에 합치되는 것은 아니나, 그들의 말에는 신용이 있고 행동은 과감하고, 한 본 승낙한 일에는 반드시 열과 성의를 다하는 특성이 있네. 자신의 몸을 버려 남의 고난을 돌볼 때에는 일신의 생사 존망은 생각지 않는단 말일세."
"그럴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재능이나 덕을 자랑하는 일을 수치로 여기고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협객에게서는 본받을 일이 많다는 거지. 어쨌건 서민들이 임협을 사랑하는 까닭은 위급할 때 법보다 먼저 확실하게 제 몸을 지켜주기 때문이야."
"저로서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걸요."
"벼슬없는 포의의 무리지만 그들은 은혜에는 반드시 보답하고 허락한 일은 확실하게 이행하며, 천리 먼 데서도 의리를 지켜 죽음 또한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의 평판 따위도 돌보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어떻게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장군님이 협객에 대해 칭찬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이행하는 그 결단의 순간이 임시변통이 아니라 평소에 닦은 미덕이라 보셨기 때문입니까?"
"적어도 극맹의 경우에는 그렇지. 그는 스스로가 현인이며 호걸이기를 수양한 사람일세".
부관 진상이 그래도 주아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자 주아부는 다른 사례로 진상을 설득하려 했다.
"태상 벼슬에 있는 원앙을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명예를 좋아하고 자신의 현명에 자긍심을 갖고는 있지만 그분의 깐깐한 성격으로 해서 그 명예도 조조처럼 위태롭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그분은 훌륭합니다."
"바로 그 원앙의 얘기일세. 오나라 재상으로 있다가 조조의 무고로 쫓겨나 시골집에 은거해 있을 적의 사건일세."
주아부가 진상에게 들려준 원앙에 관한 얘기는 이런 것이었다. 원앙은 시골집으로 돌아와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닭싸움과 개 경주등으로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낙양의 협객 극맹이 원앙이 살고 있는 시골집을 방문했다.
"아, 어서 오시오. 무슨 바람이 불어 초야에 묻힌 사람을 찾아 이 먼데까지 찾아오셨소."
"벗이 있는 데라면 천 리인들 멀겠소."
그 때부터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고 매일을 즐기며 지냈다. 그런데 인근에 안릉이라는 부호가 있었는데 그는 원앙을 존경해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런 안릉이 극맹과 원앙이 친하다는 소문을 듣고 원앙에게 따지러 찾아왔다.
"원장군, 세상에 이런 일도 있소. 극맹이란 인물은 사람백정에 시기도박꾼으로 소문난 하잘것없는 시정 잡배 아니겠소."
안릉의 편견에 원앙은 화가 났다.
"그래서?"
"내 말은 장군처럼 고귀한 신분이 어째서 그런 자와 가깝게 지내느냐하는 얘기인 것이오!"
"여보시오. 내가 왜 극맹과 사귀는지 진정 그 이유를 알고 싶소?"
"너무나 뜻밖이라 그렇소."
"그의 모친이 별세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한 수레가 몇 대였는지 알고 있소?"
"수레 대수와 그의 인격과 무슨 관계라도 있소?"
"있고 말고. 그때 1천 대의 수레가 문상을 왔소. 그의 삶이 어떻든 그것은 그에게 어떤 비범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니겠소."
"이해할 수 없소이다."
"어떤 사람이 그의 집 대문을 화급하게 두드려 구원을 호소했을 때 그는 모친을 구실 삼아 상대의 부탁을 거절하거나 집에 있으면서도 없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소. 그래서 천하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사람은 계심(계포의 동생으로 역시 협객임)과 극맹뿐이라는 칭송이 나왔던 거요."
부호 안릉은 원앙의 설득에도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런 안릉의 태도에 원앙은 더욱 화가 났다.
"지금 당신은 외출할 때 신변 호위용으로 몇 명의 기병까지 달고 다니지만 정작 당신한테 화급한 일이 생겼을 때 그까짓 자들이 당신을 구하러 달려와 줄 것 같소?"
"그야 당해 봐야 알겠지요."
"당신의 돈 때문에 당신을 보호해 주는 척할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정작 목숨까지 내놓고 당신을 보호하진 않을거요."
"그렇다면 극맹은 달려와 줄 것 같소?"
"그의 모친 장례식 때 1천 대의 수레가 달려간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그래 극맹이 하찮은 인간이라 생각되오?"
"그렇지만 극맹같은 인간은 선비들이 말하는 도를 터득한 어진 인간은 아니지 않소."
"알아듣지 못하는 군. 좋소. 당신 같은 사람과는 오늘로써 절교하겠소!"
원앙과 극맹 사이에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태위 주아부의 설명을 듣고난 부관 진상도 안릉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금새 반발했다.
"그런데도 유가와 묵가에서 협객 따위는 모두 배척했습니다."
주아부도 화가 났다.
"딱 한 마디만 더하고 그만두겠네. 어떤 백성이 이렇게 솔직히 말하더군. '인의같은 걸 내가 왜 굳이 받들어야 하는가. 나한테 이익을 주는 사람이 바로 덕이 있는 사람으로 알면 그 뿐인데'하고서 말이야!"
마침내 태위 주아부는 형양에 도착했다. 우선 부친 주발의 빈객이었던 등도위부터 만나보는 게 좋을 듯해서 말머리를 그쪽으로 돌렸다.
"좋은 계책을 주십시오."
그러자 등도위는 사양하지 않고 대답했다.
"오왕 유비의 군은 생각보다 정예로워 정면대결로는 어렵습니다. 초왕 유무의 군은 경솔해 지구전을 견디지 못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장군은 병사를 창읍(산동성)으로 철수시켜 누벽을 쌓고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하면 싸움은 누가 하게 되는 것입니까?"
"양왕 유무에게 오군을 맡기시지요."
"양왕에게 오군을 상대로 맡겨요?"
"양왕의 충성심을 저울질하는 계기도 되겠지요. 어쨌건 오군은 정예병을 모조리 투입해 양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럼 저는 두더지처럼 가만히 땅 밑에 엎드려 있으란 얘깁니까?"
태위 주아부의 되물음에 등도위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누벽을 높이 쌓고 꼼짝없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만 기동력 좋은 경장비병 수천을 회수와 사수의 합류점으로 보내 그곳을 차단하면 오군의 군량미 수송로를 막는 형태가 되어 양군과 싸우는 오군은 전투에 지치는 데다가 양식까지 바닥나 허덕거리게 되겠지요. 바로 그 때 장군의 날쌘 군사로 하여금 오군을 치면 간단히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아부는 그제서야 등도위의 설명에 이해가 갔다.
"좋은 계략인 것 같습니다."
한편 오나라에서는 유비가 진격을 개시하려하자 대장군 전녹백이 오왕께 진언했다.
"특별한 계략도 세우지 않고 한 덩어리로 진격하면 싸움에 이길 수가 없습니다."
"묘책이라도 있다는 얘기요?"
"저에게 5만 명만 주십시오. 별도로 양자강과 회수를 거슬러 올라가 회남과 장수를 수중에 넣고 무관으로 해서 관중으로 들어가 기다렸다가 대왕과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그거 기책이로군!"
막 승낙하려는 순간 전부터 전녹백과 사이가 좋지 않던 오나라 태자 유자화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대왕께서는 지금 반군의 이름을 내걸고 뛰는 군사를 남에게 빌려주려 하십니까!"
"내가 어째 남입니까! 오나라 대장군입니다!"
전녹백이 소리쳤지만 유자화는 여전히 반대했다.
"대장군이라도 어차피 그는 남입니다. 반란군사를 따로 빌려주었다는 얘기는 저로선 아직 들은 바가 없습니다. 만일 빌려간 군사로 대왕을 배신하면 어찌하시렵니까. 더구나 병권을 둘로 갈라놓았을 경우의 폐해도 심각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가?"
결국 오왕은 전녹백의 진언을 물리치고 말았다. 전녹백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렇다면 반란군은 이미 패했다.!'
이번에는 오군의 젊은 장수 환구가 진언했다.
"우리 오군에게는 보병이 많고 보병에게는 험난한 지형이 유리합니다. 한군에게는 전차와 기병이 많아 평지에서 유리합니다."
"그래서?"
"대왕께선 진격하시는 도중 항복하지 않는 성읍과 오래 다투실 게 아니라 그냥 재빨리 서쪽으로 달려가 낙양의 무기창고부터 점령하는 작전을 사용하시라 진언 드리는 바입니다."
젊은 장수 환구의 제안에 오왕 유비는 어리둥절했다.
"험지에서 유리한 보병이 다수인 우리 오군과 평지에서 유리한 기병이 많은 한군과의 차이는 이해하겠소. 그런데 항복않는 성읍은 그냥 내버려두고 우리가 전진하자는 것은 무슨 뜻이오?"
"더딘 보병으로 성읍을 모조리 항복시키느라 미적거리다가는 재빠른 한군의 기병대에게 전멸 당한다는 뜻입니다."
"그대의 의견 역시 그럴듯하오."
"그러니까 막강한 우리 보병으로 서둘러 진격로를 거쳐 오창부터 확보한 뒤, 그곳의 양곡을 보급받으며 험난한 지형에 의지한다면 우선 동맹군의 신뢰를 얻을 수 있으며 풍부한 양곡으로 하여 그들을 쉽게 호령할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굳이 관중으로 들어가기 전에 천하는 이미 평정된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됩니다."
"그 참 절묘하오!"
환구의 계략을 채택하려는 순간 노장들 모두가 한목소리로 떠들었다.
"안 됩니다! 젊은애의 그런 무모한 계략에 속지 마십시오! 대왕의 원래 계략이 최선입니다."
"그런가?"
결국 환구의 계략도 무시되고 말았다. 환구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렇다면 오군도 이미 끝장이다!'
주구라는 재사가 있었다. 하비로부터 오나라로 망명해와서 비록 술장사를 하고 있었지만 감추고 있는 책략만은 출중했다. 그러나 오왕한테서 신임을 받지 못해 아무 벼슬에도 임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오군이 회수를 건너기 직전이었다. 가만히 숨어 있던 주구가 오왕 앞으로 나타났다.
"대왕, 제가 무능하다하여 임용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왕 유비는 주구를 알아보고 비아냥거렸다.
"물론 그대가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직에도 임용하지 않았지."
"그래서 장군이 되려는 뜻은 없습니다. 다만...."
"물론 그대에게 군사를 맡길 생각은 도무지 없네."
"하지만 절부 하나쯤은 빌려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무엇에 쓰게?"
"대왕을 위해 공을 세우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비의 관리들을 설득시켜 대왕께 협조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절부 하나로?"
"그나마도 반드시 한나라 조정에서 발부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왕 유비는 주구의 큰소리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지만 때가 때인지라 절부 하나쯤 아낄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다.
"속는 셈 치고 하나 주지."
그러자 태자 유자화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빈정거렸다
"참으로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러나 오왕 유비는 이번만큼은 고집을 부렸다.
"아니다. 한나라 조정에서 발부한 절부 따위 아껴서 무엇하나. 더구나 이젠 우리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물건이 아니냐. 주구의 큰소리가 사실이라면 다행스런 일이고 우리가 속아보았자 해될 일도 없지."
결국 주구는 오왕으로부터 절부 하나를 얻어냈다. 주구는 밤을 도와 하비로 말을 달렸다. 즈음에 하비에서는 오나라가 모반해 이쪽으로 진격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굳게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일단 주구는 여사에다 숙소를 정했다. 그런 후 절부의 위력을 휘둘러 현령들을 불러들였다. 미리 부하들을 시켜 현령들이 여사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죄를 뒤집어씌워 베어버리도록 일렀다. 그런 다음 주구는 고향의 형제들과 친했던 토호들을 따로 불러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나라 반란군이 곧 이곳으로 도착할 것이오. 그런데 그들의 세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이곳에 도착하는 즉시 한 식경도 못되어 쑥밭을 만들게 분명하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토호 한 사람이 그렇게 물었다.
"미리 항복하십시오. 그 대신 집집마다 안전은 약속하겠소. 더구나 유능한 자는 제후에 봉해질 것이오."
관리들이 바깥으로 뛰어나가 주구의 말을 전했다. 그랬더니 하비 백성들은 모조리 항복하고 말았다. 주구가 얻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하비의 병력 3만 명까지 고스란히 주구의 수하로 몰려들었다. 그제서야 주구는 오왕 유비에게 하비성의 사정을 보고했다.
ㅡ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여 성양성까지 공략하겠습니다.
역시 주구는 운이 좋았다. 성양성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군사가 10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그 군사력으로 성양성의 중위(왕국의 최고 무신)까지 죽이는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오나라로 갔던 전령이 뜻밖의 소식을 가져왔다.
"큰일났습니다! 오왕께서 한나라 주아부 장군의 주력부대한테 철저하게 깨어져 왕께서는 도망해 어딘가로 숨어버렸습니다!"
오왕 유비가 패하여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주구는 기가 찼다.
"무어야! 아, 내가 그토록 허술한 자와 대사를 도모했다니!"
그토록 쉽게 깨어지는 오왕이라면 아무리 협력해도 거사가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행동하지?' 주구는 하릴없이 군대를 철수시켜 다시 하비로 향했다. '다 된 밥에 재 뿌렸네!' 울화가 치민 주구는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쳐대다가 그냥 쓰러져버렸다. 잔등에 나는 악성 종기인 등창이 터진 것이다. '애초에 운이 없는 자라 이렇게 밖엔 될 수 없겠지!' 주구는 하비에 채 닿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앞서 오왕 유비는 초왕 유무와 함께 극벽(하남성)을 격파할 때만 해도 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 기세가 하도 날카로워 양왕 유무는 여섯 명의 장군을 내보냈지만 결국은 쫓겨서 양나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태위 주아부에게 전황을 보고하면서 구원군을 요청했지만 그 때마다 묵살당했다. 양왕은 화가 났다. 황제 효경에게 고자질했다.
ㅡ 주아부는 나가 싸우지도 않고 굳게 성문을 닫고 있으며, 구원을 요청해도 번번이 묵살하고 있습니다. 원정군의 대장군이 이토록 비겁해도 되겠습니까!
황제 효경은 노했다.
ㅡ 주아부는 누벽에서 나와 양나라를 구원하라.
주아부도 지지 않았다.
ㅡ싸움터에서는 황제의 명령도 듣지 않는 수가 있습니다. 성문을 굳게 닫고 적과 마주 싸우지 않고 있는 것은 오군이 지칠 때를 기다리는 전략상의 이유 때문입니다.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그쯤되니 황제도 어쩔 수가 없었고. 양왕 유무도 별 수가 없었다. 한편 군량미 보급로를 끊긴 오군은 초조했다. 오왕 유비가 장수들을 모은 뒤 비장한 목소리로 결의를 전했다.
"사졸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서쪽으로 전진하려 하나 주아부는 나와서 굳이 싸우려 하지 않으니 우리는 얻는 것도 없다. 이제 밤을 타서 죽기살기로 누벽의 남동방을 공격하자!"
대단한 기세로 공격해 오는 오군을 바라보던 주아부는 즉시 장수들을 불러 지시했다.
"오직 우리는 지키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오군은 남서쪽으로 공격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불리하니 남서쪽의 수비를 굳게 하는 척하면서 북서쪽으로 유도하라. 그 땐 우리가 적을 쉽게 부술 수있다."
아니나다를까, 오왕 유비의 군사는 한밤중이 되어 북서쪽으로 침범해왔다.
"제대로 됐지! 이젠 누벽 밖으로 내달아 마음대로 쳐부셔라!"
대장군 주아부는 군사들을 독려한 뒤, 몇 명의 사졸들을 불러 첩자의 임무를 주었다.
"머잖아 오왕 유비의 군사들은 오왕에게서 이반해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굶주림 때문이었다. 무릇 군사들이란 굶주리면서까지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는 없는 일이다. 보아하니 오왕은 휘하의 군사 몇 명을 거느리고 양자강을 건너 도망갈 것 같다."
첩자의 임무를 받은 지휘자가 물었다.
"양자강을 건너면 곧장 단도(강소성)가 아닙니까. 그곳은 바로 동월쪽일 텐데요."
"잘 보았다. 그 쪽에서 오왕이 얻을 수 있는 1만 명의 병력이 있기로 그가 그 쪽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흩어졌던 도망병까지 거두어들이면 꽤 막강한 군사력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 되지요?"
"매수!"
"예에?"
주아부는 첩자들을 가깝게 불러모은 뒤 하나의 계략을 일러주었다. 며칠 후였다. 주아부 군사한테 철저하게 깨진 오왕은 간신히 야음을 타서 양자강을 건너 동월에 도착했다. 오왕은 동월의 협력 약속만을 믿고 군막으로 나가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용감무쌍하게 싸워달라. 나중에 큰상을 내릴 것이다."
그 때였다. 병사 하나가 비틀거리며 유비 앞으로 걸어왔다.
"오왕께서는 오랑케라며 항상 저희들을 업신여기시더니 갑자기 대왕을 위하여 용감무쌍하게 싸워달라고 하시는데 그건 또 무슨 논리입니까!"
"무어야?"
"미친 놈! 에잇 죽거라!"
병사는 정작 미친 척하고 갈래창으로 오왕 유비의 목을 삽시에 찔러버렸다.
"앗!"
"이자는 여전히 주아부 장군이 우리 동월을 매수한 사실을 모르고 있군!"
거만금을 받은 동월왕은 오왕의 머리를 그릇에 담아 역전거로 달려 주아부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뒤늦게 부왕 유비가 척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들 유자화와 유자구는 민월로 도망쳐버렸다. 나머지 군사들은 주아부 군사나 양나라 군사에게 맥없이 항복했다. 주구가 등창이 터져 죽은 것은 그런 소식을 듣던 바로 그즈음이었다. 초왕 유무도 오왕의 패사를 듣게 된 것은 그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초왕 유무는 군막 안에 혼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왕 유비가 피살됐다면 나도 끝장이 아닌가!' 날이 새도록 기척이 없더니, 초왕 유무의 시체는 이튿날 경비병에 의해 발견되었다. 스스로 단검으로 목숨을 끊고만 것이다. 그동안 교서왕 유앙과 교동왕 유응거, 치천왕 유현은 제나라 수도 임치를 포위해 격렬하게 공격하고 있었으나 석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내심 초조했다. 바로 그 때 주아부의 막료 장수 퇴당이 반란 3국의 뒤를 치며 쳐들어왔다. 교서왕 유앙이 유웅거와 유현을 급히 불렀다.
"아무래도 한군을 이길 승산은 없는 것 같소. 오왕이 죽어버린 마당에는 말이오. 그러니 각각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소?"
교동왕 유웅거와 치천왕 유현이 동시에 대답했다.
"우리들도 진작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유웅거와 유현이 각각의 군사들을 철수시켜 돌아가고 나서였다. 그 소문을 들은 교서왕의 태자 유덕이 부왕 유앙한테로 달려왔다. 유앙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마침 잘 왔다. 어차피 우리는 모반의 혐의를 벗어날 길이 없기로 나는 웃옷을 벗고 맨발로 짚방석에 꿇어앉아 물만 마시며 모친인 태후께 죄를 빌며 회오의 정을 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면 태후께서 황제한테 대신 죄를 빌어 나를 용서해 주지 않겠느냐?"
그런데 뜻밖에도 유덕의 반응은 달랐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한군은 멀리서 왔기 때문에 몹시 지쳐 있습니다. 습격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단 말입니다. 원컨대 아버님의 병사를 제게 넘겨주십시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냐?"
"한군을 치겠습니다."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
"그 때 바다 멀리 섬으로 도망쳐도 늦지 않습니다."
"기껏 싸워보다 안 되면 도망치겠다는 게 네 계략이냐. 그만두어라. 한군만 피로한 게 아니라 우리 군사도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지쳐있는 상태다. 항복할 궁리나 해야겠다. 바로 그 때 퇴당한테서 서신이 도착했다.
ㅡ 저는 조칙을 받들어 불의의 군사를 주멸하러 왔습니다. 항복하는 자에게는 그 죄를 용서해 전과 같은 대우를 하고, 항복치 않는 자는 주멸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교서왕 유앙은 퇴당의 서신을 읽는 순간 무릎을 쳤다. '옳지!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퇴당에게 편지를 구차하게 보낼게 아니라 직접 퇴당의 군사가 있는 누벽 앞에 가서 땅에다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태자 유덕의 진언을 뿌리친 유앙은 편지 대신 직접 장군 퇴당이 쌓고 있는 누벽 밑으로 접근해 갔다.
"장군 퇴당을 잠깐 만나뵙게 해주시오."
퇴당은 그가 유앙이라는 사실을 금새 알아보았다. 그러나 모른 척하고 물었다. '내가 한나라 장수 퇴당입니다. 그대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나를 찾고 있습니까."
"보내주신 서신을 받고 이렇게 달려 왔습니다."
"아, 그렇다면 그대가 바로 교서왕이 되십니까."
유앙은 머리를 땅에다 조아렸다.
"유앙은 한나라의 법을 충실히 지키지 못했으며. 천하 백성들을 놀라게 한 일을 저질렀으며, 장군께 또한 궁벽한 먼 나라에까지 오시도록 하는 괴로움을 끼쳐드렸습니다. 인육을 잘게 썰어 젓 담그는 형벌을 받아도 할말이 없습니다."
퇴당은 짐짓 군을 지휘하는 종과 북을 두손에 쥐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군사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우선 애초에 병사를 동원하게 된 경위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유앙은 무릎으로 걸어나가 다시 절하면서 대답했다.
"귀국의 어사대부 조조는 황제의 권력을 대행하는 신하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자는 고조황제께서 정하신 법령을 함부로 변조해 제후들의 영지를 침탈했습니다. 저희들은 그것이 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7국이 병사를 동원해 천하를 교란시키는 그의 정책을 응징하는 뜻으로 조조를 죽이려 거사했던 바입니다."
"조조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들으니 조조는 이미 주살되었다 하므로 저희들은 삼가 군대를 해산시키고 이제 귀국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퇴당은 이마를 찌푸렸다.
"한가지 묻겠습니다. 왕께서는 그토록 조조가 나쁜 인간이라고 생각하셨다면서 왜 한 번도 폐하께 그런 사실을 상주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오왕 유비가 처리할 일이었습니다."
"황제의 조칙도 없고 호부(출병허가서)도 없었을 텐데 무슨 근거로 정의를 수호하는 나라들을 공격했지요?"
한의 장군 퇴당의 되물음에 교서왕 유앙은 황급히 대답했다.
"나라를 친 게 아니라 조조를 죽여달라는 상징으로 짐짓 접전했을 뿐입니다."
"접전을 했을 뿐이라고요? 그게 말씀이라 하고 계십니까! 한나라 군대를 거세게 공략하고서도 그것을 반역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교서왕께선 조조를 주살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결국 폐하께 반역행위를 했다고 밖엔 볼 수 없겠는데요!"
"그건....!"
"아니 되겠습니다. 황제의 조서를 읽어보시고 스스로 판단해서 스스로를 도모하십시오!"
ㅡ교서왕 유앙은 지은 죄를 자인하고 스스로를 도모하라....
퇴당이 건네주는 황제의 조서를 모두 읽은 유앙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렇습니다. 저같은 인간은 죽어도 죄가 남겠습니다!"
체념한 유양은 마침내 짐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태후와 태자도 뒤따라 독배를 들고는 죽었다. 치천왕 유현, 제남왕 유벽광 등도 유앙과 비슷한 조서를 받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 나라들은 모조리 몰수되어 한나라의 직할지로 편입되었다. 조나라 왕 유수는 장군 역기에 의해 10개월 만에 항복해 목이 베어졌다. 그런데 제북왕 유지만은 동맹군들에 협박당해 어쩔 수없이 반란군에 가맹했으나 그의 신하에 의해 감금됨으로써 죽음을 면한 채 치천왕으로 자리를 옮기는 행운을 얻었다. 교위 등공이 오, 초의 반란군을 치면서 빛나는 공을 세우며 장군이 되어 돌아왔을 때였다. 그 때 황제 효경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지금 전선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이니까 묻는다만, 그자들에게 조조가 죽었다고 말했을 때 어떤 반응들을 보였소? 과연 그들이 전투를 즉각 중지했는가 말이오."
"천만에요. 오왕의 경우 반역할 생각을 했던 것은 벌써 수십년 전부터였습니다. 태자가 입조했다가 사고로 피살된 때부터라 볼 수 잇습니다. 그러니까 반란국들은 영지가 삭감당한 데서 일단 그 분노가 터지고 조조를 주살하는 것을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결국 그자들의 참뜻은 조조를 주살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는 뜻이군."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신이 걱정하는 바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게 무어요?"
"조조가 처형되는 것을 보고 천하의 인사들이 입을 다무는 일입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오?"
황제 효경의 되물음에 등공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조조는 나중에 제후왕들이 강대하게 되면 결국은 제어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돼 그들의 영지를 삭감하고 세력을 약화시키는 법령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오로지 폐하의 권위를 높이고 사직을 안전하게 하고자 하는 발상 때문이었는데, 폐하께선 오히려 그런 조조를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이런 조처는 안으로 충신들의 입을 봉하고 밖으로는 제후들의 원수를 갚아준 결과가 됩니다. 폐하를 위해서는 양책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대의 말이 옳소. 짐도 후회가 되오."
한편 원앙은 은퇴해 초야에 묻혀 지냈다. 그러나 황제 효경은 나라에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러들여 의논하곤 했다. 양왕 유무가 자진하여 황태제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도 효경은 원앙을 불러 극비리에 그 옳고 그름을 물었던 것이었고, 조조의 처리문제도 원앙에게 지혜를 빌려서 일을 완결지었다. 그런 일들로 인해 원망하는 적이 많아지고 있었다. 다만 원앙은 자신에게 숨은 적이 많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지낼 뿐이었다. 어느날 밤이었다. 잔칫집에서 한 잔 거나하게 얻어 마시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골목길에서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요"
"당신을 척살하러 온 자객입니다."
"무어요?"
"적어도 당신을 죽이겠다는 자객이 스무 명도 더 될 텐데 이토록 혼자서 어둔 밤거리를 나다니시다니!"
"도대체 무슨 얘기요? 내가 도대체 남한테 어떤 깊은 원한을 샀기에 나를 죽이겠다는 거요?"
"양왕 유무께서 그분의 형님인 폐하께 황태제가 되고싶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앗,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아무리 극비리에 나눈 얘기겠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습니다. 양왕께선 벌써 그날의 사정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께서는 폐하께 양왕의 황태제 추천을 반대하셨다면서요."
"그렇소.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적극 반대했소."
"뿐만 아니라 폐하께서 당신께 마지막 하문을 하실 때마다 양왕이 황제가 되는 부당함을 강력하게 지적하셨다지요?"
"그건 거짓말이오. 딱 한 번 하문하셨소. 그나마도 오래 전 일이오!"
자객은 원앙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어쨌건 제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죽이러 먼데서 여기까지 쫓아왔는지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럼 누구의 사주에 의해 제가 당신을 척살하러 온지는 알겠지요?"
"양나라 왕 유무요?"
"그렇습니다. 황제가 되는 길을 방해놓았다고 해서 앙심을 품고 저를 시켜 당신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왜 나를 그냥 죽이지 않고 그런 비밀을 알려주는 거요?"
자객은 한동안 달빛을 받고 선 원앙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말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을 죽이지 않고 그냥 양나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건 왜 그렇소?"
"성중으로 들어와 당신을 찾기 위해 원앙의 사람됨을 물은 즉 말하는 사람들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당신을 칭찬합디다. 제가 비록 돈에 팔린 자객이긴 하지만 당신처럼 인덕있는 분을 어찌 척살 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맙소..!"
자객과 헤어졌는데 그 자객이 금새 되돌아왔다.
"참, 꼭 전해드릴 말이 있었는데 깜박 잊고 그냥 갈 뻔했습니다. 당신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밤길이든지 한적한 장소라든지.... 양나라에서 오는 자객만 해도 저 외에 열 명은 더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원앙은 불안했다. 집안에 가만 앉아 있어도 심란함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집 뒤 언덕으로부터 난데없는 바윗돌이 굴러 마당으로 떨어졌다. 시퍼런 독사가 방에서 발견되었다. 칼든 복면의 사내가 달빛으로 그림자를 만들며 방문 앞으로 달려 지났다. 그 말고도 집안에 해괴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원앙은 우울했다. 병이 날 정도로 울적함에 시달렸다. '이토록 공포에 떨고만 있을 게 아니라 유명한 점복가인 배생한테로 가서 내 운명을 점쳐보면 될 게 아닌가!' 이튿날 아침 일찍 원앙은 배생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자객을 만난 이후 집안에서 속출했던 기괴한 사건들을 고백했다. 한참동안 산통을 흔들던 배생은 드디어 떨리는 손으로 괘를 만들어냈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를 어쩌나! 당신 앞으로는 크나 큰 위험이 달려들고 있습니다!"
"피할 방법을 없겠소?"
"글쎄요. 그나마도 집안이 가장 안전한 장소로 나와 있습니다."
불안을 견디지 못한 원앙은 성문 외곽으로 도망치다가 앞을 가로막는 자들과 만났다. 원앙은 그날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36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때때로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37
베푸는 사랑은 그 마음이 진정한 것일 때,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에게도 많은 것을 선물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자연의 이름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법률과 관습의 테두리밖에 있다.
38
삶의 단순함과 그로 인한 따분함을 생각하면 인생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한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인식과 통찰이 모든 면에 있어서 진보를 가져오지 못하고 사물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역시 분명해지지 않는다면 인생은 얼마나 지루할 것인가? 그러나 인생은 지루하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가지 체험을 하고 보다 성숙한 자아를 갖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사물들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된다. 그것은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의 사고가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집중시키고 일에 몰두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생긴다. 어제의 시간은 분명히 오늘과 다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루하루는 언제나 새롭게 우리를 가르친다.
39
비극은 인간을 체념으로 인도하면서 생존의 의지를 포기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희극은 생존에 대한 욕구를 자극한다. 희극도 삶의 고뇌와 염세적인 장면을 그려내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행복에 이르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인생은 고달픈 것이지만 언제인가는 웃음을 꽃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관객들에게 희망을 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희극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40
우리가 겪는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시간이다. 그것은 우리를 끝없이 몰아내며 채찍질한다. 그러나 시간의 채찍질을 누군가가 멈추게 해준다면 이번에는 권태라는 적이 나타날 것이다.
|
|
독서실 → 한국사
|
|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5장 한국전쟁과 잃어버린 국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지켜낸 박물관 유물들
북한공산군이 38선을 넘어 전격적으로 남침을 감행한 1950년 6월 25일은 전쟁 도발자가 치밀하게 계산한 일요일이어서 국립박물관엔 책임 있는 직원이 아무도 출근하고 있지 않았다. 김재원 관장이 그의 사택으로 급히 달려온 박물관 연구원 최순우로부터 사태의 위급함을 안 것은 그날 오후였다. 서울 거리는 벌써 완전히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외출 혹은 휴가 장병의 즉시 귀가를 독촉하는 급박한 목소리가 거듭 울리고 있었다. 26일 아침, 모두 불안스럽게 출근한 박물관 직원들은 정확한 전황을 알길이 없는 채 만약에 대비한 비상조치를 서둘렀다. 진열장에서 모든 유물과 미술품들을 꺼내 안전한 창고 속에 격납했다. 어떤 상황 아래서도 박물관 소장의 국가 문화재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의 임무였다. 당시 서울 국립박물관의 직원들은 김관장 외에 이홍직·김원룡·황수영·최순우 등이었다. 27일 밤엔 서울 시내에 공산군의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28일, 공산군은 마침내 서울에 들어왔고 박물관은 고립되고 말았다. 박물관 직원 가운데 유물 보호를 포기하고 혼자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탈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김관장 이하 모든 직원은 경복궁안의 관사를 중심으로 모여 전세의 귀추를 초초하게 지켜볼 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7월 5일게였다. 북에서 온 이른바 물질조사 조사보존위원회의 서울 지구 책임자라는 김아무개가 박물관을 접수한다고 찾아왔다. 그는 뒤켠의 관사에서 직원들을 불러내어 유물 보호를 계속 맡도록 하라고 말할 뿐 당장은 별다른 행동이 없었다. 김관장만 관사에 연금당하는 상태였다. 한국 전쟁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낸 공산당원 하나가 박물관에도 있었다. 사진실에 근무하던 김영욱이었다. 그가 박물관 책임자로서 상부 공산당 조직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상성분이 비교적 온건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박물관 직원들은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8월에 들어서자 B29의 실지 서울 폭격이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도심지나 고궁은 피했기 때문에 박물관 창고의 유물은 안전했다. 유엔군의 공중공격과 위협은 날로 심해지고 공산군의 패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부 발물관 직원들은 몰래 숨겨둔 라디오의 단파 방송으로 유엔군의 참전과 철수했던 국군의 북진 기세를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박물관에 김아무개가 다시 나타나 유물소개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라는 심각한 지시를 해왔다. 전세가 악화되자 북으로 실러 가려는 건지, 아니면 서울 안의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려는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직원들은 "빨리 모든 유물을 포장하라" 는 독촉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만 점의 박물관 물건을 모두 포장하여 신속히 이동시킨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큰 철조와 석조 미술품은 그대로 두고 중요하고 작은 것만 수천 점이 포장되었다. 그것들은 일단 경복궁에서 덕수궁미술관의 더 완벽한 지하창고로 옮겨졌다. 덕수궁미술관(당시 관장은 이규필) 소장의 미술품도 중요한 겻은 역시 모두 포장되어 지하창고로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 때, 공산당 관계책임자들은 덕수궁도 불아했음인지 이번엔 종묘 경내의 숲 속에 땅굴을 파도록 박물관과 미술관 직원들을 동원시켰다. 이곳으로 성북동의 간송미술관 소장품을 포함한 기타 민간 소장품즐도 모두 옮겨올 계획이었다. 밤마다 땅굴 파는 작업이 강행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유엔군의 극적인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의 임박으로 중단되고, 공산군과 공산당 조직은 서울 시가전 대비와 북으로으 후퇴를 서두르느라고 갈팡질팡이었다. 9월 20일, 한국군 해병대를 선두로 한 유엔군은 드디어 한강을 건너 서울 탈환의 마지막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때 경복궁 뒤뜰의 박물관 관사에서는 김재원 관장이 급히 영어로 된 신분증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드디어 박물관이 위치한 경복궁에도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앙청이 불붙고, 몇 채의 고건물이 말아갔다. 남쪽에서 쫓겨 온 공산군의 일부가 궁 안으로 밀어닥쳐서 개인호를 파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서울에서의 마지막 저항과 시가전을 준비하고있었다.
박물관 직원들은 무서운 포화 속을 뚫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유물이 있는 덕수궁으로 갔다. 3개월간의 공산치하에서 박물관 책임당원으로 등장했던 김영욱은 한 직원에게 "나는 북으로 떠납니다. 같이 가자곤 않겠습니다" 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덕수궁미술관 지하창고에 모두 무사히 모인 박물관 직원들은 각자 최후의 안전처를 선택하여 미술관 건물과 옆의 석조전 지하실 금고 같은 곳으로 들어가 숨었다. 석조전에 포탄 하나가 명중하여 불길이 치솟았다. 유물이 보관돼 있는 미술관 건물이 불붙지 않은 것이 천행이었다. 최악의 공포속에 며칠이 지나갔다. 9월 26일, 유엔군은 마침내 서울을 완전 탈환했다. 유물들과 박물관 직원들은 극적으로 모두 무사했다. 석조전이 불탈 때 동료직원의 안전을 확인하려고 밖으로 나온 이홍직 학예감이 가까이에서 작렬한 포탄의 파편을 이마에 맞는 부상을 당했을 뿐이었다.
9월 28일 정부 수복. 29일,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대동하고 공로로 서울 귀환. 수도 서울 탈환식 거행. 유엔군은 계속 북으로 공산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30일엔 북진하는 유엔군에게 38선 돌파명령이 내려지고, 10월 18일엔 '평양 입성' 이라는 전격적인 공세가 감행되었다. 그리고 11월 1일엔 마지막 선인 신의주와 한.만국경에 육박하고 있었다. 전쟁의 종식과 국토통일은 목전에 있었다. 그러나 거기가 고비였다. 10월 중순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정부가 중공군의 개입 기미를 발표한 것은 서울이 수복된 지 20일 후인 10월 17일이었다. 국립박무관에선 평양박물관 접수문제를 숙의하던 참이었다.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정세를 주목한 김재원관장은 백낙준 문교부장관을 은밀히 만나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 소장의 문화재를 남쪽의 안전지역으로 소개하는 대책이 긴급하다는 점을 협으했다. 백장관도 그 중요성을 금세 깨달았다. 그는 그 즉시 이대통령에게 가서 설명했다. 이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문화재의 인식이 높았다.
"극비로 속히 서울을 떠나게 하라. 부산의 안전처로 운반하되 민심이 동요치 않도록 비밀을 유지하다. 그리고 우반 도중의 보호에 최선을 다하되, 모든 기관이 협력하라."
대통령의 긴급 비밀지령이었다. 미국대사관에도 협력을 요청했다. 앞에서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던 나머지 국가 문화재의 철수작전을 펼 겨를이 없었지만, 만약에 대처하는 이번 비밀 소개계획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미국대사관에선 크네츠 문정관(뒤에 워싱턴 인류학박물관 근무)이 최대의 협력으로 트럭을 마련해주고, 유엔군 작전열차 소에 특별 회차도 주선했다. 10월말, 국립박물관은 비밀 간부회의를 갖고 부산으로의 유물 운반계획에 착수했다. 김관장과 소수의 간부직원들만이 진행시킨 비밀 작업이었다. 덕수궁미술관 지하창고에 그대로 보호돼 있던 박물관과 미술관 소장품들은 밤중에 트럭에 실려 서울역으로 운반돼 갔다. 서울역에서 군용열차의 특별 회차에 실린 박물관과 미술관 유물들이 아무도 모르게 부산으로 출발한 것은 11월 4일이었다. 예측했던 대로 중공군의 개입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약 1주일 만에 부산에 도착한 1차 소개 유물들은 사전에 연락이 되어 급히 안전창고로 개조한 미공보관 건물(한국전쟁 발발 당시엔 대사관이 사용해다) 차고에 격납되었다. 유물관 간부들뿐이었다. 이들은 1.4후퇴 때까지 3차에 걸쳐 박물관과 미술관 유물을 무사히 부산으로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 중요한 물건은 거의 서울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물건은 있었다. 서역벽화 같은 큰 덩어리의 귀중한 유물이었다.
행방불명되어 사라진 국보들
인해전술로 유엔군을 위협한 중공군이 재차 서울을 유린했을 때에도 박물관에 남아 있던 유물엔 큰 피해가 없었다. 이번엔 북으로 실어 가려고 한 증거가 뚜렷했으나 기동력의 부족과 유엔군의 폭격으로 인한 위험 때문에 결국 뜻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1951년 3월 14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다음날엔 정부 선발대가 서울로 올아왔다. 부산에 내려가 있던 박물관과 미술관에선 이번에도 미국대사관에 협조를 요청하여 서울에 남아 있는 물건의 각별한 보호조치를 강구했다. 미국대사관이 이기봉 서울특별시장을 위해 내준 비행기에 국립박물관의 선발대로 최순우 연구관이 편승하여 서울에 올라온 것은 3월 29일의 일이었다. 두 번에 걸쳐 무참히 파괴되고 부탄 이때의 서울은 그럴 겨를이 없던 전쟁 초기와는 달리 거의 대부분의 시민이 남쪽으로 피난하고 있어 군인과 경찰 선발대를 제외하면 황량하고 텅빈 도시였다. 박물관 직원으로서 혼자 서울에 올라온 최연구관은 이번에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 지내던 나이 많은 수위 한 사람을 겨우 찾아내어 박물관에 남아 있던 서역벽화를 위시한 물건들의 포장과 부산으로의 4·5차 운반에 도움을 받았을 뿐이었다. 중공군이 다시 구파발까지 육박해 오는 춘계공세의 위험을 무릅쓴 임무수행이었다.
2차 서울수복 후의 두 차례에 걸친 나머지 유물의 부산 이동으로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소장품은 거의 완벽하게 보호되었다. 부산의 미국대사관 차고를 임시 창고로 빌었던 유물상자들은 뒤에 경남 도지사의 주선으로 부산 시내의 한 약품회사 창고인 4층 콘크리트 건물로 모두 옮겨져 보호되다가 휴전과 함께 서서히 서울로 올라왔다. 한국전쟁 중에도 국립박물관 미술관 소자으이 국보와 기타 미술문화재들은 그처럼 완벽하게 보호되었지만 개인 소장품과 지방 사찰의 건물과 국보급 유물중엔 적절한 대책이 없었던 탓으로 영원히 사라지거나 행방불명이 된 것들도 있었다. 1948년 10월게 강원도 오대산 골짜기(양양면 서면)에서 목기를 만들어 팔던 사람들이 산집을 짓다가 땅 속에서 기적적으로 출토시킨 국보급의 신라종이 있었다. 정원 20년(신라 애장왕 5년, 804년)에 만들어졌다는 명문이 들어 있던 이 동종은 같은 오대산지역의 '상원사동종'(725년명, 현재 국보 제36호)과 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771년명, 현재 국보 제29호)에 이은 제3의 신라종으로 그것은 해방 직후의 최대의 발견이었다. 발견자인 산 속의 선량한 목기공들은 그 사실을 즉시 관계당국에 신고했었다. 문교부의 정보 연락을 받은 국립박물관의 황수영 연구관이 현장으로 달려간 것은 다음해 6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동종의 출토지는 38선에 접근한 삼엄한 전투지구여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는 겨우 월정사까지 가서 자세한 얘기만 들은 후, 군에 협조를 요청하여 가능한 한 빨리 월정사로 옮겨다 놓도록 당부하고는 일단 돌아왔다. 그후 동종이 계획대로 무사히 월정사로 옮겨져 왔다는 연락을 받고 이홍직 연구관과 함께 두 번째로 오대산을 찾아간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정초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기적의 새로운 국보급 신라종을 보았다. '상원사동종' 및 '성덕대왕신종' 과 양식을 같이하는 높이 약 1m의 전형적인 신라종으로서 종몸 안쪽에 이두문으로 된 147자의 명문이 나타나있었다. 입체적으로 사진도 찍고 종소리도 한번 울려 보았다. 맑고 신비스런 신라의 음향이 오대산의 자운을 흔들었다.
[상원사동종]
임진왜란 같은 때 왜병이 약탈에서 종을 보호하려고 중들이 땅 속 깊이 묻어 감추었던 것일까? 현장 조사에서 출토지 근처가 선림사터란 것만 밝혀졌을 뿐 수수께끼의 동종이었다. 그러나 다시 소생했으니 기적이었다. 한데, 누가 예측했을까. 한국전쟁 중 월정사가 불탈 때, 땅속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한 지 겨우 3년 만에 이 제3의 국보급 신라종은 누구도 보호대책을 쓰지 않아 무참히 녹아버리고 말았다. 비운의 신라종이었다. 한국정쟁 직전인 1950년 5월에 국립박물관에선 해방 후 처음인 국보특별전이 열렸다. 개인 소장품들도 거의 출품됐다. 그중에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초대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창랑 장택상의 소장이었던 당시 국보 제413호의 '청화백자진사도문재접'도 포함돼 있었다. 해방 전까지 나이토라는 일본인이 갖고 있던 물건이었다. 창랑이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 확실치 않으나 그것을 국보특별전에 출품하고 있었다. 안으로 큼집하고 탐스런 복숭하 셋을 꽃처럼 맞추어 배열하고, 그 사이에 가느다란 잎사귀를 장식적으로 그려 넣은 호화롭고 귀족적인 대접으로 일제 때부터 보물로 지정되었던 걸작 조선자기였다. 전시 기간이 끝나자 이 대접은 노량진에 있던 창랑의 별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한 달도 안되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비극적인 3년간의 전란 끝에 휴전이 성립되고, 국보들의 안전 여부가 확인될 때였다. 창랑의 별장에선 '동란 중에 불타 없어졌다' 는 대답이었다. 확인한 그렇다고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청랑의 국보 대접은 그후 '동란 중 소실'로 국보목록에서 자동삭제되었지만, 이렇다할 해명자도 없이 '행방불명' 으로 처리되다가 1962년의 문화재 재지정 때에 와서야 국보 해제가 된 도자기가 또 하나 있다. 역시 한국전쟁 직전의 국보특별전에 나왔던 물건이었다. 당시 소장자는 장아무개였다. 미군정 말기에 수량과 내막을 알 수 없는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불법반출시키고 자신도 일본에 건너가 살다가 죽은 골동상인이다. 해방이 되자 일본사람들의 소장품이었던 문화재를 가장 많이 독점해 갖고 있었다는 장아무개는 전에 아가와라는 일본인이 소장했던 지정보물인 고려자기 '철채백화당초문매병' 을 어느새 입수하고 있었다.
국보특별전을 기획하며 과거의 지정문화재들의 행방을 찾던 국립박물관의 관계직원이 그 고려자기가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아 다행히 장아무개의 소유가 되어 서울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거처를 수소문해보니, 그는 일본에 건너가 있고 물건만 박태식(뒤에 H증권 사장)이란 사림에게 잡혀져 있었다. 박씨는 그때 돈 5백만 환을 장아무개에게 빌려주고 그 담보로 도자기와 불상 등 약 50점의 고미술품을 맡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국보 고려자기(해방 후의 지정번호는 국보 제372호)가 들어 있었다. 박씨는 장아무개의 측의 허락을 받고 그 국보 고려자기를 국립박물관의 특별전에 출품했고 전시기간이 끝난 후 장아무개 측은 박씨에게 담보로 잡혔던 물건들을 도로 찾아버렸다(박태식의 증언).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고 국보 '철재백화당초문매병' 은 영원히 사라졌다. 장아무개가 다른 물건과 함께 일본으로 반출시켰다는 유력한 설이 있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협의자는 일본에 정착해 살았으나 그 국보 고려자기의 행방엔 일언반구의 증언도 없이 침묵을 지키다가 죽었다. 조국애나 민족의식이라곤 추호도 없던 골동상인이었다. 8.15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부주의로 파괴되었다는 2점의 국보 고려자기가 있다. 그중의 하나는 당시 소장자의 해명이 애매하여 '행방불명'으로 여겨져 있고, 또 하나는 조각난 것이 확인되었으나 한국전쟁 후의 처리 여부가 불분명한 채로 세상에서 아주 잊혀져 있다. 해방 직전에 광산왕 최창학이 일본인 소장자 이도로부터 사 가졌던 '청자상감보상화문대접' 과 '보주문합자' 이다. 해방 후 과거의 지정보물을, 소재지나 건재 여부도 정확히 조사함이 없이 국보 명칭으로 모두 재지정할 때 국보 제371호의 번호가 붙여졌던 물건으로서 과거의 소장자가 밝힌 바로는 대접을 3만 원에, 그리고 합자를 2만 원에 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국보 고려자기 입수 사실은 해방 후 몇 해가 지나도록 당국이 확인하고 있지 못했다. 국보 소재지의 변동 신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전후의로 무질서한 사회상이었다. 최창학뿐 아니라 8·15로 인한 국보 유전 시기를 틈타 그것들을 입수해 가졌던 골동상인이나 돈 있는 수집가 가운데 그 사실을 당국에 자진해서 신고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국보특별전이 기획됐다. 최창학이 과거에 이도가 가졌던 국보 고려자기 2점을 입수하고 있다는 정보를 수장가 사회에서 확인한 국립박물관의 최순우 연구관이 출품을 부탁하려고 그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해명이었다.
"내가 입수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8·15직전, 시골에 소개돼 갔다가 돌아와서 금고 속에 넣어 두었던 그 물건을 꺼내려다가 그만 실수하여 모두 깨졌다. 그래서 버리고 말았다."
그는 다섯 조각이 난 청자대접의 조각을 내보였다. 그러나 합자는 그때 아주 바스러졌기 때문에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해명이었다. 아무리 바스러졌기로서니 물건이 지정된 보물이었는데 뒤에라도 관계당국자나 박물관 전문가에게 확인도 안 시키고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었을까. 확실히 다섯 조각이 났던 대접은 잘 붙여 수리한다면 원형만은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조각들조차 한국전쟁과 소장자의 타계로 영영 증발하고 말았다. 완전히 바스러졌다는 합자와 능히 복원할 수 있었던 깨진 대접 조각들이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풍문이 있었으나 이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 다음은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된 국보 불상 한 쌍의 수수께끼이다. 동란 직전인 5월에 국보특별전을 끝낸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관장과 김원룡·최순우 연구관 일해이 광주 조선대학의 특별초청으로 한국의 고미수에 관한 강연을 하러 내려갔다. 강연 일정을 마친 일행은 광주 일원의 문화재와 유적을 살피게 되었다. 그들은 무승산 기슭의 고찰인 증심사에 전해 오던 당시 국보 제211호의 '금동석가여래입상' 과 제212호의 '금동보살입상' 을 보러 찾아갔다. 그런데, 절에 이르러 주지에게 들으니, "무등산 일대에 공비 출몰이 심하여 작은 국보 불상들은 경찰서로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 는 것이었다. 김관장 일행은 그 길로 경찰서로 향했다. 국보가 옮겨진 사실과 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서장은 안전한 금고 속에 귀중히 모셔 두었던 두 불상을 내보이며 '부득이한 보호조치' 라고 설명했다. 사실 거기까진 참으로 잘한 국보 보호의 잠정적 대책이었다. 그러나 1933년에 증심사 오층석탑 속에서 발견된 자그마한 이 두 국보 신라불(높이 15cm내외)은 그때 국립박물관의 김관장 일행이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예기치 못했던 비극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장은 위급한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금고 속의 국보 불상엔 신경을 못 썼고, 그후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휴전 후, 서울에서 관계전문가가 현지에 내려가 보았으나 두 국보 불상의 행방을 알거나 증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경찰서장도 여럿이 바뀌고 있었다. 불상을 보호한다고 가져갔던 경찰서자의 변명은 의심하자면 충분히 위문스러웠다. 아무리 정세가 급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아주 귀중하게 금고 속에 모셔 보호하고 있던 작은 국보 불상 2개쯤 살릴수 없이 버리고 떠났을까. 그러나 때가 때였던 만큼 증심사 국보 불상의 행방불명은 어떤 책임 추궁도 없이 기정사실로 돼버렸고, 10년 후의 국보 재지정 때에 가서는 이미 없어진 물건으로 처리하여 목록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후전선 바로 남쪽에 위치하지만 강원도 간서의 건봉사는 한국전쟁 전까지는 38선 이북이었다. 이곳에 일제 때에 이미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마지금니화엄경' 권46과 정호 2년명(고려 고종 1년, 1214)의 '동제은상감향로' 가보존 돼 있었다. 해방후 서류상의 국보 번호 제412와 제419호였다. 이 두 국보도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이 되었다. 화엄경은 1951년 5월 20일 건봉사 건물들이 폭격으로 불탈 때 없어졌고, 향로는 한국전쟁 전에 북한에서 외금강 신계사의 유물수집소로 이전시켰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한국전쟁 당시의 주지로부터 들었다는 어떤 증언자의 말을 빌리면, 향로도 한국전쟁 때까지 그대로 건봉사에 보관돼 있었고, 절이 온통 불탈 때 누군가가 밖으로 굴려내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니 그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얘기인지 이 또한 믿기 어렵다. 한국전쟁 당시 국보 제276호였던 진주의 유서 깊은 촉석루가 원인 모를 폭탄에 맞아 완저히 불타버린 것은 유엔군이 진주를 점거했던 공산군을 격퇴시킨 지 20일 후인 1950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공중에서 느닷없이 낙하해 온 폭탄 하낙 촉석루 지붕 한복판에 직총으로 맞아 작렬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중했던 2층 누각의 고건축물은 화염속에 사라져 갔다. 돌발적인 참사였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퇴각당했던 공산군의 박격포탄이었을까? 현재의 건물은 1959년 진주 시민들이 복원한 것으로 과거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시키고 있다. 진주의 전설적인 명승지인 남강의 절벽 위에 위치하는 촉석루는 역사가 밝혀주고 있듯이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왜장 게다니를 끼고 남강물로 떨어져 죽은 조국의 상징적 명소이다. 진주 시민들은 과거의 국보 건축물을 재현시키는 동시에 논개의 구국정신을 길이 살리는 명소를 되꾸민 것이다. 촉석루가 불탈 때, 경북 안동에서는 국보 제302호로 지정 보호되던 문묘 대성전에 직격탄이 명중하여 박살이 났다. 이 대성전 건물은 전북 장수의 향교 건물과 함께 조선 초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문화재였다.
휴전이 성립되고 2년 후인 1955년, 지리산의 빨치산들이 마지막으로 소탕될 때였다. 전남 승주군에 위치하는 명찰인 송광사의 여러 국보 건축물 중 백운당과 청운당이 그동안 절을 점령하고 있던 빨치산들의 방화로 깡그리 불타버리고 말았다. 국보 제404호로 지정돼 있던 건물이었다. 불길은 대웅전에서부터 치솟았다. 이어서 백운당과 청운당으로 번지면서 송광사 경내는 순식간에 온통 불바다로 변했다. 산밑 마을로 쫓겨 가있던 3명의 스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필사적으로 불을 끄려고 했지만 그 엄청난 불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한 스님이 마을로 다시 뛰어 내려가서 사람들을 동원시켰을 때는 이미 대웅전과 국보 건물인 백운당.청운당은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협력으로 스님들은 다른 국보 건물인 국사당(현재 국보 제56호)과 하사당(현재 보물 제263호)만은 살릴 수 있었다. 그때 화재를 면한 약사전도 지금도 보물 제302호로 지정돼 있다. 신라 말엽에 창건된 국내 최대 명찰의 하나인 송광사는 지금도 국보와 보물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절로서 유명하다. 빨치산 점령 하의 최악의 수난과 화재 때 국보 건물 두 채와 많은 부속건물을 잃긴 했으나 스님들은 나머지 국보와 기타 유물들을 잘 보호했다. 현재 이 절엔 건물 아닌 불교 미술품과 고문서로 10점의 국보와 보물이 간직돼 있다.
같은 전남지역인 장흥군의 보림사 대웅전이 포탄에 맞아 불타 없어진 것도 한국전쟁 중의 참화였다. 2층 팔작지부에 속속들이 웅건한 건축양식을 보여주던 조선 초기(추정)의 이 대웅전 건물은 당시 국보 제240호로 지정돼 있었다. 여기서도 국보 건물의 대웅전은 잃었으나 나머지 국보 석탑과 부도 및 탑비엔 큰 피해가 없었다. 곡성군 관음사의 국보 건물이었던 원통전의 경우는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봄에 빨치산들이 불질러 타버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작고한 고건축 전문가 임천은 일제 때(1930년 전후)에 실화로 불탔다고 증언한 적이 있어 확실한 내막을 알수 없으나 해방 후에도 국보 제273호로 지정문화재 목록에 올라 있었다. 이 관음사는 또 국보 제214호의 '금동관세음보살좌상'도 소장하고 있었는데, 원통전이 불탈 때였는지 아니면 한국전쟁 때의 어떤 수난으로였는지는 모르지만 크게 깨져 국보의 면모를 상실했고, 지금은 목록에서 삭제돼 있다.
|
|
독서실 → 한국소설
|
|
|
격동 30년 - 이영신
7. 국무총리 장면, 숨어버리다
갈아입은 장면은 마냥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군사문제에 대해선 전혀 백지인 장면은 이런 경우 뭘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인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마냥 서성거리며 나름대로 생각을 모아 보고만 있었다. (30사단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거나 해병대가 장난을 치려 했다는 것은 곧 쿠데타를 하려 했다는 얘기가 아닐까?) 장면은 아까부터 이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장도영이 애매모호하게 보고를 할 것이 아니라 <각하.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속히 통수권을 발동해서 1군 휘하의 전투사단에 출동명령를 내려주십시오.> 하고 건의했다면 장면은 지체없이 통수권을 통수권 문제인데 국군에 대한 통수권이 상징적인 대통령한테 있느냐, 아니면 통치권자인 국무총리한테 있느냐 해서 윤보선과 장면은 적지않은 입씨름을 벌여 왔던 것이다. 국군 통수권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어느 쪽에 있었던간에 장도영이 쿠데타를 분쇄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응책을 건의했다면 물론 장면은 그 건의를 이의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장도영은 애매모호하게 보고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면은 전혀 상황을 알 수가 없어 답답한 나머지 방안만 서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경우 군사문제에 밝은 측근이라도 한 사람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유엔군 사령관한테 주어져 있으니 속히 매그루더 장군한테 연락하셔서 쿠데타 저지책을 강구해 달라 하십시오> 하고 한마디만 건의했던들 장면은 그 건의 또한 지체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장면은 군사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백지였기 때문에 국군의 작전 지휘권이 유엔군 사령관한테 있다는 것조차도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방안을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장면은 불현듯 사람이 그리워졌던 모양이었다.
"이태희 검찰총장을 오시라고 해!"
경호책임자인 조인호에게 명했다. 새벽 3시 15분, 새벽 3시 10분에 중앙청 앞에 당도한 육군본부로 질주해 갔다.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제6군단 포병단장 육군 대령 문재준은 서울 시청 앞에 이르자 대열에서 이탈했다. 반도호텔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가 반도호텔에 이르러 보니 주변 일대가 마냥 죽은 듯이 고요에 묻혀 있기만 했다. 새벽 3시 15분. 그 시간에 공수단은 반도호텔 앞에 진출해 있어야 옳았다. 그것이 쿠데타의 작전계획이었는데 공수단 장병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찌된 노릇이야? 박치옥 이놈이 막상 거사 순간에 변심을 해버린 게 아냐?) 그런 의심이 일기도 했다. 문재준으로서는 의심을 품을 만도 했다. 박치옥이 장도영의 심복이라는 것을 알고 문재준은 즉히 차를 돌려 남산으로 달렸다. 새벽 3시 20분. 문재준은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박정희와 만나기로 사전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데, 여긴 또 어찌된 노릇인가? 남산 야외음악당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는 것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쿠데타를 하겠다는 놈들이 어째서 모두이 모양이야?) 문재준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원래 그는 열정가였다. 함경남도 함주(咸州) 태생인 그는 관북의 명문인 함흥의 미션계인 영생(永生)중학교 출신이었다. 열정가는 성미가 좀 급하다. 성미가 급하다 보니 상황판단도 즉흥적으로 (모조리 배신했어, 모조리!) 문재준은 박치옥도, 박정희도 모두 거사 직전에 변심해 버린 것이라고 단정했다. 지프에 동승해 있던 대위가 물었다.
"사령관님, 오늘이 5월 16일이 맞습니까?"
"물론 5월 16일이구 말구."
문재준은 대꾸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대위는 울고 있었다.
"사령관님, 우리가 속은 겁니다. 속은 게 틀림없습니다."
대위는 쿠데타 꾀임에 빠진 것으로 곡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육군본부로 가보세."
문재준은 육군본부로 차를 몰라고 운전병에게 명했다. 새벽 3시 20분. 해병대 선두부대가 한강 인도교 남쪽 입구에 도착한 것은 새벽 3시 20분이었다. 예정돼 있던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었던 것이다. 막상 한강 인도교에 당도해 보니 GMC 두 대가 여덟 팔자로 길 한복판을 가로막고있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으로 살펴보니 헌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도 보였다. 선두부대인 오정근(吳定根) 대대의 제2중대장 해병 대위 이준섭(李俊燮)은 트럭 운전대에서 뛰어내리자, 팔자형으로 길을 가로막아 놓은 트럭 쪽으로 달려갔다. 치워달라고 하고자 해서였다.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도 쿠데타에 가담돼 있다>라고 듣고 있던 이준섭은 한강 다리에 산개해 있는 육군 헌병들이 쿠데타 저지를 위해서 출동한 부대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이준섭이 달려오는 것을 보자 김석률이 쑥 앞으로 나섰다. 같은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것을 본 이준섭은 반갑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기왕에 내민 손이다. 김석률은 해병대가 쿠데타군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상대방이 먼저 손을 내밀기에 그 손을 잡았다. 희극이라고 해야 옳을지 비극이라고 해야 옳을지 표현하기 어려운 한순간의 장면이었다. 이준섭이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해서 김석률은 엄청나게 핀트가 빗나간 대꾸를 했다.
"우리는 어떤 부대도 한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라는 육군 참모총장의 명령을 받고 여기 나와 있는 거요."
"뭐요?"
이준섭은 그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전의 환한 웃음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는 결연히 선언하듯이 말했다.
"우리는 해병대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해병대요. 즉시 장애물을 치워 주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
김석률은 단 한마디로 이준섭의 요구를 무시했다.
"치우란 말이오!"
"못 치워요!"
"치우란 말이오!"
"못 치운다고 하잖았소!"
언성이 높아졌다. 언성이 높아지자 살기가 돌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해병대 선두부대 대대방 오정근은 급히 지프에서 뛰어내려 출동부대 후미에 따라오고 있던 김윤근한테로 달려갔다.
"여단장님, 무장한 헌병대가 다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찌된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오정근은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이 쿠데타에 가담돼 있다고 듣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무장 헌병대의 출동을 보고
"박 장군 얘기를 들으니 육군 제30사단에서 비밀이 새게 된 모양이오."
비로소 사실을 털어놨다.
"하지만......."
오정근이 다시 의문을 말하려고 하자, 김윤근이 그 말을 가로막듯 명령하는 것이었다.
"그대로 돌파하시오."
그 명령에 오정근은 해병대와 육군의 두 대위가 맞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지금 연천(連川)으로 야간훈련 나가는 중이오. 그러니 장애물을 비켜 주시오."
그는 김석률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김석률의 태도는 단호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육군 참모총장의 훈련을 위한 출동이라면 돌아서 가 주십시오."
"돌아서 가라니? 돌아서 가라면 어디로 돌아가란 말인가?"
오정근이 비로소 눈을 부릅뜨며 거칠게 반문했다.
"어서 비켜!"
"못 비킵니다."
또다시 입씨름이 벌어졌다. 쿠데타를 일으킨 측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측이 처음엔 이렇게 입씨름으로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한강 다리에서 오정근과 김석률이 입씨름을 벌이고 있을 때, 김윤근은 해병대 출동부대 후미에 따라오고 있던 박정희한테로 달려갔다.
"작전이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실패라니요?"
해병대가 정지하고 있는 사이에 공수단도 어느 사이엔가 달려와 해병대의 후미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 공수단으로 하여금 돌파시키는 것이 어떻겠소?"
박정희가 제의를 했다. 바로 이때였다.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울리며 하늘 높이 환하게 불꽃이 이루어졌다. 해병대가 일제히 하늘에 대고 공포를 소아댔던 것이다. 그와 함께 앞으로 달려나온 해병대 트럭이 팔자형으로 세워 놓은 두 대의 트럭을 밀어냈다. 팔자형 트럭 뒷편에 산개해 있던 50명의 육군 헌병들은 총성이 울려퍼지면서 트럭이 판단을 했던 모양이었다. 김석률이 미처 사격개시의 명령도 내리기 전에 해병대 트럭을 향해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해병대도 공포탄만 쏘아대고 있을 수 없었다. 헌병들을 향해서 실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6.25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매듭지어진 지 8년 만에 내부에서 골육상잔의 비극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가 정확히 새벽 3시 30분이었다. 해병대가 저지하는 헌병대를 향해서 공포탄 대신 실탄을 퍼붓기 시작한 바로 그 시각. 장면의 입인 공보비서 송원영의 제기동(祭基洞) 집 침실의 전화벨이 송원영은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송 비서관님이시죠?"
송원영은 잠결에도 목소리에 낯이 익다고 느꼈다. 장면의 경호원 중 한 사람인 박 경위였다.
"무슨 일이오, 이 밤중에?"
"송 비서관님, 놀라지 마십시오."
"놀라지 말라니?"
그제야 송원영은 비몽사몽 상태에서 확 깨어났다.
"놀라지 말라니, 무슨 일이 생겼소?"
"아, 그럼 거기서는 총 소리를 못 들으셨군요?"
"총소리?"
"네, 지금 한강 쪽에서 총격 소리가 나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소리요. 총격 소리라니?"
"네, 다름이 아니라 해병대 병사들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려서 경찰관이 휘협발사를 해서 낸 총소립니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경호원 박 경위와 송원영의 전화통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경호원 박은 누구한테 들었기에, 해병대 병사들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려서 경찰관이 위협발사를 해서 낸 총소리 운운했던 것일까?
국방차관보 신응균(申應均), 장면 정권 때 차관보라는 직제가 유일하게 국방부에만 마련되어 있었다. 그는 예비역 육군 중장으로 1959년에 예편을 했다. 육군본부에 비상이 걸리자 육군본부로 해병대가 교전을 하고 있다고 보고를 받자 급히 한강으로 차를 몰았다. 한강교 북쪽 입구에서 보니 아닌게 아니라 총격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사격 중지!"
신응균은 헌병들에게 사격중지를 명했다. 헌병들이 사격을 중지하자 해병대도 사격을 중지했다. 신응균은 사격전이 멎자 해병대 쪽으로 다가갔다. 만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용기였다. 지금 피를 본 쿠데타군은 눈이 뒤집혀 있을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신응균이 해병대 쪽으로 다가간 것이다.
"그쪽 책임자가 누구요? 책임자는 나오시오!"
신응균의 호통에 박정희가 그의 앞으로
"아, 박 장군 아니오?"
신응균은 놀랐다. 해병대의 난동에 육군의 장성이 왜 끼여 있단 말인가? 신응균은 나이는 박정희보다 4살이나 아래였으나 일본 육군사관학교는 박정희보다 4기나 선배였다. 신응균은 53기였고 박정희는 57기였다.
"어찌된 노릇이오, 박 장군?"
신응균은 다그쳐 물었다.
"우리는 지금 혁명을 일으켰소!"
박정희는 허리팔을 하면서 대꾸했다.
"혁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서 원대복귀하도록 하시오."
신응균은 명령했다.
"원대복귀?"
박정희는 코웃음을 치면서 생각했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도영 장군이 전군에 비상을 건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쾌재를 불렀다. 이제 쿠데타는 의심의 여지 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던 것이다.
"혁명군 앞으로 전진!"
해병대는 의기양양해져서 맹목적인 사격을 가하며 거의 뛰다시피하며 한강 다리를 건넜다. 해병대가 전진하자 지금껏 저지하고 있던 헌병들은 삼십육계 위주상계라는 듯이 개미떼 흩어지듯 흩어져 도망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신응균은 다리 한가운데 서서 그러한 주위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쿠데타에 있어서의 코미디 같은 시각. 포천을 떠난 제6군단 포병단은 무풍지대를 가듯이 서울로 진입해 들어왔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 조용한 것이 오히려 출동부대를 불안하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쿠데타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어느 구석에 어떤 함정이 마련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제6군단 포병단이 중앙청 앞에 당도한 것이 3시 13분, 여기에서 17분 만에 육군본부 광장에 들어섰다. 쿠데타군은 그 어떤 장애에 부닥치거나 저항을 받은 일이 없었다. 쿠데타라고 하기가 싱거울 정도로 그들은 수월하게 육군본부로 진입해서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쿠데타 와중에 있어서의 코미디 한토막이 있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인 육군 소장 송석하(宋錫夏)는 육군본부에 비상이 걸리자 지체없이 육군본부로 나와 있었다. 그는 제6군단 포병단이 육군본부로 출동, 연병장에 집결했다는 부관의 보고를 받자 즉시 연병장으로 달려나갔다.
"당신들 어떻게 나왔어?"
그는 한 장교를 붙들고 물었다. 어깨에 별을 두 개나 달고 있는 것을 본 그 장교는 차례 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작전명령을 받고 출동했습니다."
"오, 그래?"
송석하는 반가웠다. 작전명령을 받고 나온 것이 틀림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잘 나왔어. 지금 해병대 반란군이 한강을 건너려 하고 있으니 빨리 부대를 한강으로 이동시켜 진압토록 하라."
곁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장교들은 하마터면 풀썩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쿠데타군더러 쿠데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했으니 폭소를 터뜨릴 만한 일이기도 했다. 한데, 송석하의 명령을 받은 장교가 우물쭈물하자 송석하는 호통을 쳤다.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건가. 빨리 한강으로 출동하라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다른 장교가 나섰다.
"장군, 우리는 육군본부를 장악하라는 작명을 받고 출동했습니다. 작전명령일 수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작전참모부장인데?"
송석하는 어떻게 해서든 포병단을 한강 방어에 투입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각하, 저희는 군단 작명에 의해서 출동했습니다. 군단장 명령 없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장교들이 송석하의 명령을 거부하자, 송석하도 더 이상 뭘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동안이나 장교들을 노려보고 있다가 별관으로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새벽 3시 30분. 같은 시각. 한강다리 북쪽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남한강 파출소의 당직 순경은 수십 대의 취해 공포를 쏘며 한강을 건너오고 있다고 치안국 당직자에게 전화보고를 했다. 이날 밤의 치안국 당직자는 총경 최석원(崔錫元)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최석원은 즉시 내무부 당직자 숙직실로 달려가 잠자리에 들어 있던 사무관 이상혁9李相赫)을 깨웠다.
"술 취한 군인이 수십 대의 트럭에 분승......?"
이상혁은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최석원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군기가 문란해졌다고 해서 술 취한 군인들이 수십 대의 트럭에 분승해서 공포를 쏘며 한강 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려야 되지 않겠소?"
최석원의 재촉에 두 사람은 먼저 내무부 정무차관인 김원만(金元萬)한테 전화를 걸었다. 김원만은 서울 용산 을구 출신 민의원 의원이었다.
"알겠소, 내 곧 내무부로 나가겠소."
김원만은 보고에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이때 김원만의 집은 갈월동 언덕진 곳에 있었다. 전화를 끊은 그의 귀에 총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아니라 공기를 찢는 금속성 총소리였다. 한강과 갈월동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데다가 집이 언덕진 곳에 있기 때문에 총소리는 좀더 분명하게 울려왔던 것이다. 김원만에게 보고가 끝나자 두 사람은 이상규(李相圭)에게 전화보고를 했다. 김원만과 이상규는 곧 내무부로 달려나왔다.
"총소리가 한강 쪽에서 요란했어. 뭐가 어찌 됐다는 것인지 시경에 좀 알아봐."
이상규의 독촉에 이상혁이 서울시 경찰국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야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순경인 것 같았다.
"총알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전화를 받은 순경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뭐? 총알이?"
"네, 모두 도망쳤습니다. 저는 책상 밑에 엎드려서 이 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저도 도망쳐야겠으니 전화를 끊겠습니다."
송수화기를 든 채 전화내용을 보고하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김원만도 이상규도 최석원도 어디로 도망쳤는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경비 순경 서너 명만이 긴장에 쌓여 이상혁의 거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혁은 기가 막혔다. 도망을 치려거든 함께 도망쳐야 할 일이 아닌가. 서울 시경에 상황을 알아보라고 재촉을 해놓고 전화를 걸고 있는 사이에 모조리 도망치다니, 괘씸한 생각이 불끈 치밀어 올라왔다. 그렇다고 노여움을 터뜨릴 상대도 없는데 여기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들고 있던 송수화기를 내동댕이치다시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 3시 30분. 506방첩대의 무전기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영등포 방면에서, 육군본부에서 쿠데타군의 움직임을 빼놓지 않고 보고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무전기가 3시 30분쯤에 한강의 총소리까지도 전해 주었다. 그 총소리로 한강 다리에서 쿠데타군과 저지군이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총소리들이 무전기를 통해서 전해진 직후 육군본부가 쿠데타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뭐, 육군본부가?"
보고를 듣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멍청한 표정이 돼 버렸다. 그 둘레에 모여 앉아 있던 국방부 수뇌나 장도영의 참모진이나 서로 상대방의 감정의 추이만 살피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국방장관 현석호를 위시해서 국방부 정무차관 우희창, 사무차관 김업(金業), 참모차장 장창국, 정보참모부장 김용배 등이 506방첩대에 나타난 것이 새벽 2시에서 3시 20분 사이였다. 모두 장도영의 전화 연락을 받고 이리로 나와 있었던 것이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비서관 체제
역사 현상을 크게 나누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과 유명하지 않은 사실로 양분된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뉴스가 되었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하지만 민간기업 경영자가 기자회견을 열고 발표할 만한 일만 하고 있으면 경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 경영이 파탄날 것은 뻔하다. 따라서 제국을 경영하는 일은 대부분 통상적인 행정이라 해도 좋을 수수한 일로 채워진다. 그런 일이라면 휘하 장수나 총독이나 장관들한테 맡겨둘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이들은 명령받은 일을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들에게 명령할 필요가 있다. 식민도시를 어디에 건설할 것인지, 원주민 도시 가운데 어떤 것을 지방자치단체로 인정하여 자치권을 부여할 것인지, 당시의 고속도로인 로마식 가도를 속주의 어디에서 어디까지 뚫을 것인지, 이런 일은 행정이 아니라 정치에 속한다. 따라서 원로원과 로마 시민한테 제국 통치를 위임받은 '제일인자'가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고대의 로마 제국은 오늘날의 서부 및 중부 유럽에 중근동과 북아프리카를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었다. 통상적인 일만 해도 막대한 양이었다. 게다가 고생은 막심한데도 보답은 적다. 어쨌든 뉴스가 되지 않는 일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 일을 맡고 있는 사람이 확고한 인식과 상당한 각오를 갖지 않고는 계속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황제를 꿈도 꾸지 않았고, 황제가 되기 전에는 역사 연구와 저술로 50년을 보낸 사람이다. 따라서 뉴스가 되지 않는 일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뉴스가 되는 일인 브리타니아 원정 외에는 뉴스거리가 될 만한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라인 강 방위선에서도 수세로 일관했고, 도나우 강에서도 방위체제를 확립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다만 이 제4대 황제는, 같은 클라우디우스 씨족 출신인 제2대 황체 티베리우스와는 달리, 오만한 귀족성에 두시받침된 각오까지는 갖고 있지 않았다. 마음씨 착한 그는 진심으로 원로원의 협력을 원했다. 재판제도 개혁안을 법제화해줄 것을 원로원에 요구하는 자리에서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생각한 이 개혁안은 여러분의 동의를 얻어야만 비로소 법이됩니다. 그러니까 자유롭고 진지하게 토론한 뒤에 찬반을 결정해주시오. 이 개혁안에 반대한다면, 이 자리에서 대안을 제출해주시오. 대안을 만드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면, 충분히 시간을 들여도 좋소. 의장인 집정관 한 사람만 내 제안에 대해 의견을 말할 뿐, 다른 의원들은 그저 '찬성이오!' 하고 외치기만 하고, 회의장 밖에 나가서는 '내의견을 제시했다'고 말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런 것이 원로원의 권위에 어울리는 행동이라고는 말할 수 없소."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한 직후 원로원 의원들의 입가에 떠올랐던 냉소는 사라졌다. 공적인 자리에서 연설하는 데에도 익숙해졌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도 이제는 말을 더듬지 않게 되었다. 또한 비텔리우스처럼 황제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는 원로원 의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 입법'이라 해도 좋은 황제의 제안이 국가의 법, 즉 국가의 정책이 되려면 원로원 의결을 필요로 하는 것은 로마식 제정의 근간이었다. '종신독재관'인 카이사르도, 공식적으로는 '제일인자'로 통한 아우구스투스도, 카프리 섬에 은둔한 채 제국을 통치한 티베리우스도 이 근간을 지켜왔다.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라면, 행정의 최고책임자인 황제가 하는 일도 정치이고, 입법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원로원이 하는 일도 정치다. 이것이 로마 제정의 정치체제라면, 그것이 효율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황제나 원로원이 결정한 일을 충실하고 정확하게 수행할 기관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관료조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제정 시대가 진행될수록 제국 경영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에서 통치능력을 유지하려면 기능을 조직화할 수밖에 없었다.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제국을 통치한 티베리우스는 이미 기능별 조직화를 실현했을게 분명하다. 카프리 섬에 지금도 남아 있는 유적을보면, 황제가 거처하는 별장 가까이나 같은 섬 안에 상당한 규모의 관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비밀주의자였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조직어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티베리우스의 조카인 클라우디우스는 매사에 솔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통치를 돕는 비서관 체제도 공공현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관료 양성기관도 없었고, 관료를 배출하는 사회계층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는 조직은 무엇일까. 로마 사회에서는 그것이 부유하고 유력한 집안이었다. 노예가 없는 로마인 가정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로마인 유력자의 가정은 역할에 따라 조직된 노예나 해방노예들이 떠받치고 있었다. 이 고용인들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마요르도무스'다. 집사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마조르도모'의 어원인 '마요르도무스'도 대개는 해방노예다 고용인인 노예의 자식이 주인집 자식과 함께 공부하는 관습은 이 체제를 존속시킬 필요성에서 나온 지혜였다. 인적 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방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클라우디우스가 50세가 될 때까지 그 자신은 물론 다른 누구도 그가 황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파벌이 형성되지도 않았고 '브레인'도 없었다. 또한 신체적인 결함 때문에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람도 없었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신체적 결함에도 개의치 않고 그에게 복종하는 자기 집 고용인들에게 협력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고용인들을 거느리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황궁은 이를테면 총독관저 같은 곳이다. 클라우디우스 집안의 노예나 해방노예들 가운데 우수한 사람들로 관저에서 일하는 비서관 조직이 형성되었다. 우수한 해방노예라면, 당시에는 거의 다 그리스인이었다. 나르키소스나 팔라스 같은 이름은 그리스 자유시민의 이름이 아니다. 미소년 노예에게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러나 나르키소스의 나이는 주인인 클라우디우스와 동갑이거나 그보다 조금 아래렸던 모양이다. 50대인 나르키소스라면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들은 대단히 우수한 관료였기 때문에 그들을 박탈할 클라우디우스도 만족했다. 이들 해방노예에게 부과된 임무는 다음과 같이 나뉘어 있었다.
'아브 에피스톨리스'(ab epistulis)-직역하면 '편지' 담당이다. 로마인의 언어인 라틴어와 제국 동방의 통용어인 그리스어로 된 보고서는 모두 이 부서에 모인다. 그 보고서를 개봉하고, 읽고, 검토하고, 자신의 의견과 함께 황제에게 보고하여 황제의 결정을 청하고, 포고문이나 긴급조치령으로 대처할 경우에는 그 문서 작성을 '아 스투디스'에 의뢰하고, 작성된 문서를 공표한다. 긴급조치가 아니라 항구적인 법률로 만들고 싶은 경우에는 황제 입법의 형태로 원로원에 법안을 제출하여 의결을 요구한다. 명칭은 '편지' 담당이지만, 로마사 연구자들은 내각의 총무처 장관같은 존재였다는 데 의견이 일치해 있다. 정치인이 장관에 임명되는 나라에서는 관료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차관 같은 존재일까. 클라우디우스는 자기 집 고용인인 해방노예 나르키소스를 이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임무상 누구보다도 자주 황제를 만나는 나르키소스한테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클리우디우스 황제의 일정을 조정하는 일이다. 가족 이외에는 어떤 사람도 나르키소스를 통하지 않고는 황제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아 라티오니부스'(a rationibus)-직역하면 '회계' 담당이다. 하지만 이 부서의 임무는 국가 재정을 총괄하는 것이었고, 클라우디우스가 책임자로 임명한 해방노예 팔라스 밑에는 국세를 담당하는 부서가 딸려 있었다. 원로원 속주에서 들어오는 속주세, 황제 속주에서 들어오는 속주세, 노예를 해방할 때 내는 5퍼센트의 노예해방세, 5퍼센트의 상속세, 1퍼센트의 매상세, 그리고 황제의 개인 영지인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세금을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다. 각 세금을 담당하는 책임자도 해방노예였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무관료들도 노예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 리벨리스'(a libellis)-직역하면 '청원서' 담당이다. 이 부서의 임무는 제국 각지에서 황제에게 보내오는 청원서나 진정서를 접수하는 것이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자기 집에서 일하던 해방노예 칼리스투스를 이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어떤 청원서를 보내도, 칼리스투스가 황제에게 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클라우디우스는 알 수가 없다. 칼리스투스라는 '필터'를 통과한 청원서만 황제에게 전달되고, 황제는 칼리스투스와 함께 그것을 검토하여 어떤 회신을 보낼 것인가를 결정한다. 실제로 회신을 작성하는 일은 다음 부서로 넘어간다.
'수브스크립터오'(subscriptio)-직역하면 '필기' 담당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황제에게 보내온 청원서나 진정서에 대한 황제의 회신을 작성하는 것이 이 부서의 임무다.
'아 코그니티오니부스'(a cognitionibus)-직역하면 '지식,정보' 담당이지만, 황제에게 모여드는 모든 서류를 정리하여, 필요하면 당장 참고할 수 있도록 해두는 것이 이 부서의 임무다. 특히 사법 관계 서류는 클라우디우스의 강한 관심을 반영하여 법무부 문서실처럼 정비되어 있었다.
'아 스투디스'(a studis)-의역하면 '공부' 담당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 부서는 연구를 좋아하는 클라우디우스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어서 재미있다. 하지만 이 부서의 임무는 황제의 연구를 돕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이름으로 나가는 포고문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연설문은 자신에게도 학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클라우디우스가 직접 썼지만, 대리석이나 동판에 새겨지는 포고문은 정말로 학식이 있었던 노예들이 작성했다.
이것이 클라우디우스가 실행한 비서관 체제다. 황제의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이 체제의 목적이다. 이것은 강철 같은 건강과는 거리가 먼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의 두 어깨에 걸린 최고통치자의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생각해낸 제도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 비서관 체제는 훌륭하게 기능을 발휘했다. 클라우디우스는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지만, 태어난 지 1년 뒤에 아버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땅에서 병사했기 때문에 어머니 안토니아와 함께 수도 로마로 돌아왔다. 그리고 50세에 황제가 될 때까지 신체적 결함 때문에 정치에서도 군사에서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본국 이탈리아를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50년을 보냈다. 이탈리아에서도 그의 행동반경은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한정되지 않았을까. 북부 이탈리아도, 나폴리 남쪽의 남부 이탈리아도 모른 채 50년을 지냈을 것으로 여겨진다. 황제가 된 뒤에도 본국 밖으로 나간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에서 배를 타고 마르세유까지 간 다음, 갈리아를 가로질러 도버 해협을 건너서 브리타니아에 갔다가 다시 같은 길로 돌아온 6개월의 외유가 클라우디우스의 유일한 여행 경험이었다. 그가 로마의 속주를 본 것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데도 통치자로서 그의 눈은 제국 전역에 골고루 미치고 있었다.
독일의 역사가 몸젠은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 있는 금석문을 수집하고 간행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인물이다. 그리하여 후세의 우리들도 로마 황제들이 남긴 업적 가운데 유명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 즉 통상적인 행정의 성과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유명한 역사적 사실에만 눈을 돌리는 경향이 강한 고대의 역사가들에게 비난만 당했던 티베리우스나 클라우디우스만 해도, 그의 정책은 그 광대한 제국 전역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로마식 가도를 만들고,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동맹국을 재편성하고, 적당한 왕위 계승자가 없는 동맹국을 속주화하는 등,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자기 눈으로 본적도 없고 자기 발로 밟은 적도 없는 지역인데, 그 지역의 실정에 정확히 들어맞는 배려를 한 것은 50년 동안 책을 통해 축적한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게 분명하다. 하지만 책에서 얻은 지식은 현실과의 대조를 거쳐야만 비로소 인식이 될 수 있다. 인식은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성을 통해 사물의 궁극적인 의미를 깨닫는 것이지만, 쉽게 말하면 무엇이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축적된 지식이 있었다. 뜻밖에 황제의 자리에 올랏지만, 그것을 계기로 솟아난 의지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과의 대조'까지도 스스로 할 수 있었던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는 다양한 인생 경험을 갖고 있었지만, 클라우디우스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그래서 통치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현실과의 대조'는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클라우디우스를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잘 도와준 것은 비서실잘이라고 해도 좋은 나르키소스였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체제에는 장단점이 있듯이, 해방노예나 노예를 활용하는 것이 특징인 비서관 체제에도 단점은 있었다. 몇 년 동안 전선에서 적과 싸운 장수가 귀국해도 나르키소스를 통하지 않고는 황제에게 인사를 하거나 보고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원로원 의원이 황제를 면담하고 싶어도, 나르키소스는 '제일인자'가 만나줄 형편이 안되니까 자기가 이야기를 듣고 황제에게 전하겠다고 대답한다. 또한 각 속주에서 세무를 담당하는 '황제 재무관'이 파견되어 있는데, 이들의 보고를 받는 사람은 재무 담당 비서관인 팔라스였다. 로마 사회는 계층간의 유동성이 강한 게 특징이긴 했지만, 원로원계급, 기사계급, 평민, 해방노예, 노예로 계층이 나뉘어 있었다. 원로원 의원은 물론 원로원 계급에 속한다. 전략 단위인 2개 군단이상을 지휘하는 사령관에 기사계급 출신이 등용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어나긴 했지만, 대다수는 원로원 의석을 가진 신분이다. 속주 총독은 모두 원로원 계급에 속하고, 황제 재무관에는 경제인인 기사계급 출신이 임명되는 게 보통이었다. 로마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는 이들이 아무리 황제의 신뢰가 두텁다 해도 원래는 노예에 불과했던 비서관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는 황제와 연락도 취할 수 없다. 이들 사이에 불만과 분노가 퍼지기 시작했다. 로마를 짊어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비서진 중에서도 특히 거만한 나르키소스와 팔르스와 칼리스투스를 '해방노예 3인방'이라고 부르며 증오하게 되었다. 게다가 해방노예를 기용하는 이 체제에는 또 다른 단점도 있었다.
로마 사회에서는 시민 생활을 하기에 충분한 재산이 있고 자식도 있으면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으니까, 해방노예들 중에는 경제계에서 성공한 사람도 있고 지방자치단체에서 활악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원래는 노예다. 다시 말해서 배경이 없는 몸이다. 또한 클라우디우스도 영원히 황제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건 자기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실력으로 지위를 높이려는 의욕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게 되지만,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믿을 건 돈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황제한테 충실할 뿐 아니라 일에서도 유능하고 열성적인 이 비서관들은 공공사업을 발주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이들은 이것을 이용한 축재에도 열성을 쏟게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자신은 축재에 무관심했지만, 황제의 측근들은 축재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다. 팔라스는 무려 3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축재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는 자격 조건이 '10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이었던 시대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를 보이거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축재에 열을 올리는 것은 최고권력자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측근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그들이 이런 유혹을 완전히 극복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인간은 유혹에 약한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복하는 것은 어렵다 해도 억누를 수는 있다. 카이사르도 아우구스투스도 티베리우스도 남의 협력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통치한 것은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협력자는 늘상 있었다. 다만 이들을 수족으로 일해주는 부하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 경외심은 부하들에 대한 무언의 브레이크이기도 하다. 경외심의 사전적 의미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공경만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될 필요도 있는 것이다. 클라우디우스의 성격에는 부하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없었다. 바꿔 말하면 얕잡아 보이기 쉽다는 뜻이다. 그 결과 노예 출신 비서관들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상대가 클라우디우스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은 비서진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