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4호 - 2023.11.25. 토요일(음력 :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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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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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만약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친지들과 작별인사를 할 때 우리는 더 다정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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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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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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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과 리액션
한국 현대사에서 ‘반동’이란 말은 혁명과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지난날 반공드라마에 흔히 쓰이던 ‘반동 종간나 ××’라는 말은 공산혁명에 반대하고 봉건질서를 옹호하는 사람에게 붙이던 경멸의 딱지였다.
하지만 애초에 ‘반동’은 자연과학(물리학) 용어였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알려진 뉴턴의 제3법칙이 대표적이다.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 힘을 가하면, 힘을 받는 물체도 힘을 가하는 물체의 반대 방향으로 같은 크기의 힘을 가한다’는 것이다. 정치 영역으로 확장된 ‘반동’은 역사의 발전과 진보를 방해하고, 낡고 오래되고 사라져야 할 구습을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이자, 자기 이익이나 관행에 집착하는 자를 뜻하게 되었다.
‘반동’은 ‘진보’에 대한 반작용이니, 이 말을 쓰려면 역사의 진보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의 진보란 게 뭔가. 사회적 모순의 혁파? 남북의 평화공존? 더 많은 자유와 평등? 기후정의? 더 편리하고 효율적인 생활환경? 불편하더라도 뭇 생명과 공존하는 생태적 삶? 오늘보다 나은 내일? 진보는 하나로 요약할 수 없다.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옅어진 시대이니, 반동이란 말도 쓰지 않는다. 반동을 뜻하는 영어 ‘리액션’을 더 많이 쓴다. ‘리액션’은 어떤 행동을 보고 취하는 반응. 박수 치고 환호성 지르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맞장구치는 것. ‘좋은 소통’은 상대방의 말에 성심성의껏 리액션하는 것.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기도 버거운 상황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작용은 꿈도 못 꾼다. 기껏해야 리액션,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는 리액션. 새로운 시작보다는 반응하기, 진보보다는 안락과 안위. 반동의 시대엔 리액션이 살길인가 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마징가 Z'와 'DMZ'
“디엠제트예요? 디엠지예요?”생방송을 앞둔 후배가 급하게 전화를 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디엠제트로 나와 있거든?”
“요즘 다 ‘디엠지’라고 하는데요? ‘디엠제트’ 너무 어색해요.”
“외래어라서. 외래어는 우리말로 굳어진 건데 디엠제트가 표준어야. 이상하면 그냥 비무장지대라고 하면 어때?”
DMZ (demilitarized zoneㆍ비무장지대)는 군사 용어이다. 최근 뉴스에 “DMZ”가 자주 등장하면서 아나운서들은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알파벳 ‘Z’의 발음이 문제이다. ‘Z’의 영국식 발음은 제드〔zed〕, 미국식 발음은 지:〔zi:〕이다. 국어사전에 알파벳 스물여섯 번째의 자모이름은 ‘제트’라고 표기되어 있다. ‘제트(Z)’를 ‘지’로 표기하면 ‘쥐(G)’와 헛갈릴 염려가 있다고 한다. 일리 있게 들리지만 ‘디엠지’라고 했을 때 ‘DMG’로 알아듣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마징가 제트’와 ‘전격 제트 작전’을 보고 자란 나와 같은 중년 세대들은 그나마 ‘제트’를 인정한다. 그런데 미국식 영어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제트’는 영 낯설다. 아시아나 항공을 가리키는 ‘OZ’는 ‘오지’ 아니냐고 항변한다. 알파벳 송을 예로 든다. 이 용어를 가장 많이 쓰는 군대에서도 요즘은 모두 ‘디엠지’라고 한단다. 이쯤 되면 정리가 필요하다.
외래어는 표기법은 정해져 있지만 발음법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버스(bus)’라고 쓰지만 ‘버쓰’ 혹은 ‘뻐쓰’라고 발음한다. 발음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인정하는 셈이다. 조금 다른 문제이지만 ‘제트’와 ‘지’에도 이러한 융통성이 발휘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 아닐까?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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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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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먼 산 - 천상병
먼 산은
나이 많은 영감님 같다
그 뒤는 하늘이고
슬기로운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다 제각기이고
통일이 없지만
하늘의 이치를 알게 되면
달라지리라고.
먼 산은
애오라지 역사의 거물
우리 인간은
그 침묵에서 배워야 하리.
∼∼∼∼∼∼∼∼∼∼∼∼∼∼∼∼∼∼∼∼∼∼∼∼∼∼∼∼∼∼
님의 손길 - 한용운
님의 사랑은 강철을 녹이는 물보다도 뜨거운데,
님의 손길은 너무 차서 한도가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서늘한 것도 보고 찬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님의 손길같이 찬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국화 핀 서리 아침에 떨어진 잎새를 울리고
오는, 가을 바람도 님의 손길보다는 차지 못합니다.
달이 작고 별에 뽈나는 밤에, 얼음 위에 쌓인 눈도
님의 손길보다는 차지 못합니다.
나의 작은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은
님의 손길이 아니고는 끄는 수가 없습니다.
님의 손길의 온도를 측량할만한 한란계는
나의 가슴 밖에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님의 사랑은 불보다도 뜨거워서,
근심 산(山)을 태우고 한(恨)바다를 말리는데,
님의 손길은 너무도 차서 한도가 없습니다.
∼∼∼∼∼∼∼∼∼∼∼∼∼∼∼∼∼∼∼∼∼∼∼∼∼∼∼∼∼∼∼∼~~~~∼∼
딸레 - 정지용
딸레와 쬐그만 아주머니,
앵도 나무 밑에서
우리는 늘 셋동무.
딸레는 잘못 하다
눈이 멀어 나갔네.
눈먼 딸레 찾으러 갔다 오니,
쬐그만 아주머니 마자
누가 다려 갔네.
방울 혼자 흔들다
나는 싫여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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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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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망타진(一網打盡)
一:한 일. 網:그물 망. 打:칠 타. 盡:다할 진.
[준말] 망타(網打). [출전]《宋史》〈人宗紀〉,《東軒筆錄》
한 번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다 잡는다는 뜻. 곧 범인들이나 어떤 무리를 한꺼번에 모조리 잡는다는 말.
북송(北宋) 4대 황제인 인종(仁宗) 때의 일이다. 당시 북방에는 거란[契丹:요(遼)]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중국의 일부였던 안남(安南)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도 인종은 연약 외교로 일관했다. 그러나 내치(內治)에는 괄목할 만한 치적이 적지 않았다.
전한(前漢) 5대 황제인 문제(文帝)와 더불어 어진 임금으로 이름난 인종은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장려했다. 그리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여 문치(文治)를 폄으로써 이른바 ‘경력(慶曆:인종의 연호)의 치’로 불리는 군주 정치의 모범적 성세(聖世)를 이룩했다.
이 때의 역사적인 명신으로는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구양수(歐陽脩)/사마광(司馬光)/주돈이/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조의(朝議)를 같이하다 보니 명론탁설(名論卓說)이 백출(百出)했고 따라서 충돌도 잦았다. 결국 조신(朝臣)이 양 당으로 나뉘어 교대로 정권을 잡게 되자 20년간에 내각이 17회나 바뀌었는데, 후세의 역사가는 이 단명 내각의 시대를 가리켜 ‘경력의 당의(黨議)’라 일컫고 있다.
이 무렵, 청렴 강직하기로 이름난 두연(杜衍)이 재상이 되었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황제가 상신(相臣)들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조서를 내리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내강(內降)이라 했다. 그러나 두연은 이 같은 관행은 올바른 정도(政道)를 어지럽히는 것이라하여 내강이 있어도 이를 묵살, 보류했다가 10여 통쯤 쌓이면 그대로 황제에게 돌려보태곤 했다. 이러한 두연의 소행은 성지(聖旨)를 함부로 굽히는 짓이라하여 조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때 공교롭게도 관직에 있는 두연의 사위인 소순흠(蘇舜欽)이 공금을 유용하는 부정을 저질렀다. 그러자 평소 두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어사(御史:검찰총장) 왕공진(王拱辰)은 쾌재를 부르고 소순흠을 엄히 문초했다. 그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모두 공범으로 몰아 잡아 가둔 뒤 재상 두연에게 이렇게 모고했다.
“범인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했습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유명한 두연도 재임 70일 만에 재상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주] 안남 : 인도차이나 동쪽의 한 지방, 당나라의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에서 유래한 명칭이어서 베트남인들은 쓰지 않는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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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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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책 - 베르나르 베르베르
우리의 계약
만일 그대가 나와 함께 가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겐 계약이 하나 필요하다. 나의 의무는 그대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는 것이고, 그대가 할 일은 나날의 근심 걱정을 잠시 잊어버리고 되어 가는 대로 완전히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당장 갈라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반대로, 그대가 이 계약에 도장을 찍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합의의 신호로 한 가지 동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잘 것 없는 작은 손짓이지만, 그것을 나는 약속의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자, 그럼 갈까? 라는 문장을 읽거든, 책장을 넘기라. 그대가 책장을 넘기면, 나는 계약이 성립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간절히 원할 때만 계약에 합의하기 바란다. 차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전적으로 그대에게 달려 있다. 한 차례의 모험 여행을 제안하는 것은 나이지만, 그 여행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대뿐이다. 그 여행의 원동력은 바로 그대 스스로를 기쁘게 하려는 의지다. 내 말들이 시사하는 여행의 무대를 짓는 것은 바로 그대의 상상력이다. 등장 인물들이 마음결을 짜는 것은 바로 남을 이해할 줄 아는 그대의 능력이다. 나는 단지 보조자, 하찮은 안내자일 뿐이다. 그대가 이 페이지를 넘기면, 우리는 그 여행을 함께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자, 그럼 갈까? 그대의 신뢰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잘된 일이다. 이제 가장 먼저 할 일은 여행 준비를 하는 것이다. 가방, 여권, 썬글라스, 썬크림, 수영복 따위는 필요없다. 하지만, 마치 비행기를 타고 이륙할 때처럼 탁 트인 활주로와 알맞은 시간을 선택해야 한다. 그대의 이륙장소 그대가 나를 읽을 장소로는 조용한 곳이 알맞을 것이다. 그곳은 좋은 파동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아마도 그곳은 그대의 아파트, 어느 카페나 도서관, 그대의 일터나 휴양지일 것이다. 아니면, 지하철 차량이나 버스, 기차, 비행기, 여객선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곳은 그대의 신경이 쓰이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빛도 충분히 비치고 공기도 잘 통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제 자리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대의 자리
힘살이나 뼈마디에 무리가 가지 않고, 몸 어디에도 긴장이 생기지 않도록 편안한 자리를 찾아야 한다. 달아 맨 그물 침대라든가 몸을 푹 파묻을 수 있는 푹신하고 긴 의자가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아니면, 갓 깎아 놓은 부드러운 잔디밭이나 포근한 침대도 괜찮다. 다만, 침대일 경우에는 발치의 이불깃이 들춰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발가락에 찬바람이 닿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와 침대를 함께 쓰는 사람이 자기의 차가운 발을 그대의 살에 대려고 하면 단호하게 거부하라. 그 사람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거나 협박을 하거든, 온당하게 분담되지 않는 가사 노동이나 쓰고 나서 마개를 막지 않은 채로 둔 치약 튜브, 아무 데나 굴러 다니는 그이 옷가지와 소지품, 주말마다 그대를 성가시게 하는 그의 부모 등에 대해서 그에게(또는 그녀에게)따짐조로 말하라. 그대들 두 사람을 이간하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이 처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면, 그대 역시 지배를 당할 까닭이 없겠기에 하는 소리다. 그대에겐 고요하고 평온한 시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대 인생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아무도 그대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도 그 무엇으로 그대를 위협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 어떤 걱정거리로 그대 마음을 흔들지 않을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를 읽기 위해서는 한 시간의 그런 평온함이 필요하다. 체! 하면서 그대가 못마땅해 해도 하는 수 없다. 나는 한 권의 책이지만, 우리가 이렇게 만나고 있는 동안은 독점욕이 강한 애인이기도 하다. 나를 읽고 난 뒤에는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지만, 나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나에게 주의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만일 그대의 잠동무가 그대를 성가시게 하는데도 좋건 싫건 그것에 익숙해 져서 당당히 맞설 엄두가 안 나거든, 나를 다시 덮어도 상관없다. 아직 늦지는 않았으니, 그대가 원하면 우리 계약은 없었던 일로 하겠다. 그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책, 아수라장 같은 악조건에서 읽어도 괜찮은 책들은 쌔고쌨다. 심지어는 읽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사주기만 하면 된다고 애걸하는 책들도 있는 판국이니 말이다. 그대가 여기까지 독서를 계속했다면, 이제 그대의 마지막 속박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대의 속박에서 벗어나라
먼저 신발, 허리띠, 손목시계, 반지, 보석 등 그대의 살갗을 누르는 모든 것을 벗고 풀고 빼어 낸다. 그대의 귀고리가 귓불을 자극하지는 않는지? 그렇다면, 그것도 떼어 내라. 귓불을 뚫고 단 귀고리 때문에 귓불이 가렵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당장에 떼어 버리라. 모기가 있다면, 모기장을 치라. 춥거나 더우면, 온도를 알맞게 조절하라. 쾌적한 기분이 든 연후에야 독서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화가 울리지 않도록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초인종의 전원도 끊어 놓으라. 텔레비젼도 켜놓지 않는 편이 좋다. 실망을 안겨 주기가 십상인 세상 소식은 잊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있다면, 그들이 잠들기를 기다리고, 거실에 어지러히 널려 있는 장난감들을 정돈하라. 먹고 난 그릇들이 아직 식탁에 있거든 얼른 가져다가 개수통에 넣으라. 껌을 씹고 있다면 뱉으라. 담뱃불도 끄고, 담뱃재와 꽁초 냄새에 절지 않도록 재떨이를 비우라. 음악도 필요치 않다. 곧 알게 되겠지만, 내가 그대의 머리속에 음악이 흐르게 할 테니까 말이다. 나는 그대의 모든 감각을 사로잡을 만큼 강력하다. 말의 위력이 바로 그런 것이다. 더욱 느긋한 기분으로 그대에게 마련된 이 평온한 시간을 즐기라. 그대가 책장 하나를 넘길 때마다 우리는 여정의 한 구간을 지나는 셈이고, 그때마다 그대는 더욱 느긋해지면서도 한결 명철해질 것이다. 자, 침을 한 번 삼키고 눈을 한 번 깜박이고, 깊은 숨을 쉬라. 우리의 비상이 곧 시작될 것이다.
그대 몸에 고요가 깃들인다
이제 그대의 몸에 대해서 생각하라. 살아가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그대의 몸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결이 그대를 앞뒤로 가만가만 흔들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그대의 숨결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느껴 보라. 앞으로 갈 때 숨을 들이쉬고, 뒤로 갈 때 숨을 내쉬라. 숨을 들이쉴 때는, 그대의 피가 사지 끝에서 실핏줄과 정맥을 거쳐 심장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라. 수천의 붉은 개울이 도도한 강물이 되어 흐르는 모습을. 빨펌프처럼 그대의 염통이 강물을 빨아들인다. 그 고동을 느껴 보라. 숨을 내쉴 때는, 그대의 염통이 피를 허파 쪽으로 되밀어 내는광경을 상상하라. 온갖 스트레스와 탄산가스가 그대의 숨을 통해 밖으로 빠져 나간다. 그 숨결을 느껴 보라. 들숨. 날숨. 깨끗한 공기로 그대의 피를 정화하고 핏속에 기를 가득 담으라. 들숨. 날숨. 이제 그대를 가만가만 흔들고 있는 이 부드럽고 한가로운 물결과 그대 몸은 하나가 된다. 앞으로. 뒤로. 턱뼈의 긴장이 풀어지고 눈의 깜박임도 더욱 느려진다. 온몸이 한결 가뿐하고 느즈러진 느낌이다. 자, 이제 몸도 마음도 차분해 졌으니, 이 완전한 이완의 순간을 놓치지 말고 날아오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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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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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6
배우는 일에 열정을 가지는 것이 좋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것을 배우더라도 우리가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사색한 것들뿐이다. 사색은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고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것처럼 그 대상에 대한 관찰이 지속되어야만 가능하다.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사색이 호흡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7
시인은 상상력을 통해 인간과 사물 모두를 살아 움직이도록 만든다. 그리고 상상력을 더욱 넓히기 위해 나중에는 그 사물들을 놓아버린다. 시인은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풍요로움을 안겨준다. 그러나 철학자는 인생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완성된 사상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는 철학자 자신과 동일하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철학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8
현명하고 신중한 판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악행은 저승에서 그 대가를 받지만 어리석은 행동은 현실에서 처벌받는다. 사람의 머리는 사자의 발톱보다 날카로운 무기가 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현명하다. 현실에서 손해를 입는 사람은 악당이 아니라 신중함과 지각이 없는 사람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점은 자신의 감정과 충동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다른 동물들이 지니지 못한 이성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9
바보나 성자가 아니라면, 냉소와 폭력과 타락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10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림을 바라보면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림을 바라보면 실망하게 된다. 무질서하고 때로는 추하게까지 보이는 물감들이 마구 칠해져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을 실행하는 과정 속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일을 경험한다. 우리는 때때로 진행하던 일이 마무리 단계에서 처음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식으로 결과를 맺는 것을 보고 당황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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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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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 제1장 선각의 인맥
문화재를 통해 일제와 대결한 간송 전형필
1930년대에는 일제의 의한 이 땅의 민족색 말살정책이 유형 무형으로 강화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문화의 비약적 개화기였고 동시에 민족의 문화유산에 대한 존중과 인식이 사회적으로 크게 계몽된 시기였다. 문화재에 대한 재인식과 사랑은 당시 여유 있는 인사와 수집가들에 의해 옛 서화와 책, 기타 도자기, 불상 등 모든 종류의 고미술품이 수집·보호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중엔 일본인 권력자 혹은 골동상과 결탁한 무리들도 많았고, 또 자신의 부나 안목을 자랑하려는 수집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민족혼을 지킨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재산을 아끼지 않은 민족문화재의 참다운 수호자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간송 전형필이었다. 같은 세대의 고유섭과 송석하가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을 학술적으로 조사·연구한 반면 간송은 개인적인 상속재산으로 그것들의 수집·보호에 심혈을 기울임으로써, 모든 것이 갈취·파괴당하던 일제 하 식민지에서 민족적인 사명의 하나를 감당한 제3의 공로자였다. 그러한 간송의 업적은 사학자 김상기 박사의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 단적으로 파악된다.
"회고컨대 일제 침략시기에 있어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날로 일인을 비롯하여 기타 외국인의 손에 수탈되고 있을 제, 선생은 문화재 수호를 그의 사명으로 여기고 일생을 통하여 사재를 기울여 저들과 경쟁하면서 수많은 문화재를 구입 또는 회수할 제, 때로는 일본까지 건너가 우리의 국보급 문화재를 국제적 경쟁 속에서 고가로 매환(사서 되가져옴)하여 국제사회에 화제를 던지기도 하였다."(한국민족미술연구소 발행)
간송은 1906년에, 당시 서울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잡다시피했던 큰 부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휘문보고(지금의 휘문중고교)를 거쳐 1929년에 일본 도쿄의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일찍부터 남달리 생각하는 것이 깊고 도량이 넓었던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자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어떤 민족적인 과제가 있는가를 자문하게 되었다. 그때 그에게 재산가만이 가능한 민족문화재의 수호에 나서도록 권하고 혹은 영향을 준 인사와 선배들이 있었다. (근역서화징)의 편저자로 문화재 수집·보호의 대선배이자 구안의 선각자였고 3·1운동 때엔 민족대표의 한 분이었던 위창 오세창은 특히 간송의 명예로운 생애의 초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사였다. 위창댁을 드나들면서 서화와 고서에 대한 견식과 안목을 높이는 한편 본격적으로 수집을 시작하게 된 간송은 주위에서 일본인에게 빼앗겨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중요한 문화재가 있으면 값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들였다. 그러한 그의 재산 선용과 민족적인 사명감을 정신적으로 격려해준 사람으로는 위창 외에도 문인화가로 교양 있는 수집가였던 영운 김용진과 휘문고보 시절의 은사인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회동(1920년대 중엽 이후 전통적인 묵화로 전향) 등이 있었다.
서화와 고서로부터 시작되었던 간송의 컬렉션은 차차 고려 및 조선시대의 도자기, 기타 불교 조각품 등으로 수집 대상이 확대되어 갔다. 그것은 사적인 취향과 단순한 독점의 만족감을 떠난, 민족문화재의 광범위한 보호로서의 사명감을 가진 수집이었다. 그의 안목은 갈수록 높아졌고 따라서 그가 잡는 물건들은 예외 없이 민족미의 정수들이었다 그의 눈은 당시 탐욕스런 일본인 수집가와 골동상을 앞지르곤 했다. 어쩌다 일본인에게 놓친 물건이 있을 때면 있는 힘을 다하여 사오고야 마는 투쟁을 벌였다. 그것은 문화재를 통한 일제와의 대결이었다.
일제에게 국토를 침탈당하고 있는 현실 상황에서 미래의 광복을 지향하는 민족문화재의 수집·보호와 훗날의 사회적 기여야말로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이라고 확신하게 된 간송은 순수환 협력자가 추천하는 미술품과 스스로 주목한 문화재들을 지체 없이 사들이느라고 여차하면 부동산까지 처분했다. 가령 일본인에게 빼앗기게 된 국보급의 고려청자 하나를 시급히 일본에서 되사오기 위해 시골의 농장 하나를 팔아야 했던 일도 있었다. 확고한 목적의식으로 시작된 간송의 컬렉션은 급속도로 그 내용이 풍부해져 갔다. 1930년대 중엽엔 벌써 개인미술관의 시설을 필요로 했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즈음 서울 성북동의 유서 깊은 선잠단(양잠의 창시자라는 중국 원비 서릉씨를 제사 지내던 곳으로 고려시대 이후 왕비가 양잠의 의식을 베풀었다) 일대의 숲 속에 우아한 양식 별장을 짓고 살던 프랑스인이 있었다. 구한말에 이 땅에 건너와서 비료장사를 하여 크게 돈을 벌었던 브레상이라는 독신자였다. 그런데 이 프랑스인이 마침 귀국한다고 별장과 숲을 내놓게 되었다. 간송은 그 지대와 숲과 별장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즉각 그것을 사들이고 별도로 자신의 미술관 건물을 숲 속에 세우는 구상을 서둘렀다. 1936년, 성북동의 선잠단 숲 속에는 드디어 한국 최초의 개인미술관이자 나라를 잃은 민족의 역사적 문화재 보호에 몸과 재산을 바치기로 결심한 한 장한 청년 독지가의 의지를 상징하는 아담한 2층 건물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 건물에는 민족문화의 정화들이 수북하게 모여진 집이라는 뜻의 '보화각' (지금의 간송미술관)이라는 현판이 걸렸는데, 그때 그런 이름을 지어주고 또 현판 글씨를 써준 이는 바로 위창 오세창이었다.
보화각은 간송의 의지와 결의를 더욱 넓혀주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빚나는 민족미술의 전통을 연구하고 계승시키는 장소로서 보화각이 기능하기를 원했다. 그는 컬렉션의 내용을 더 많은 걸작 미술품과 중요 문화재로 계속 채워 나갔고, 문고에는 한국 미술문화 연구에 필요한 모든 서적을 국내외에서 사들였다. 1930년대에 이미 실천전으로 목표했던 간송의 앞서와 같은 원대하고 치밀한 계획은 일제의 태평양전쟁 패망과 조국의 해방, 그리고 미구에 닥친 비극적인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지연되다가 그의 생전에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말았지만, 그가 수집하여 고스란히 보존시킨 수만 점의 각종 문화재들은 지난날의 그의 큰 뜻과 업적을 대변해주고도 남는다. 한국전쟁 때에 유실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하게 오늘도 보호되어있는 보화각 컬렉션은 간송이 57세로 작고한 지 4년 후인 1965년부터 고인의 유지를 잇는 학국민족미술연구소(소장 전영우는 간송의 둘째 아들)에서 정리를 맡아 순차적인 공개와 목록 정리가 이루어졌다.
개인 수집으로는 국내 최대의 보고인 간송 컬렉션은 한국전쟁 때 하마터면 북한 인민군들에 의해 몽땅 북으로 옮겨져 갈 뻔했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전격적인 9·28 서울 수복으로 그 임무를 맡았던 북에서 온 요원들은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후 1·4후퇴 때엔 부산 지역의 안전지대로 모두 옮겨짐으로써 전란으로부터 보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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