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9호 - 2023.11.15 화요일(음력 : 1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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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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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우리 뜻대로 되기를 바라서 기도를 한다. ― 헬가 B.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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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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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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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금 봉투
사람의 일 중에서 형식과 절차가 제일 엄격히 갖춰진 것이 장례이다. 특별히 줏대 있는 집안이 아니라면, 장례식장에서 시키는 대로 빈소를 꾸미고 염습과 입관, 발인, 운구, 화장, 봉안 절차를 밟으면 된다. 문상객이 할 일도 일정하다. 단정한 옷을 입고 빈소에 국화를 올려놓거나 향을 피워 절이나 기도를 하고 상주들과 인사하고 조의금을 내고 식사한다(술잔을 부딪치면 안 된다는 확고한 금칙과 함께). 유일한(!) 고민거리는 조의금으로 5만원을 할 건가, 10만원을 할 건가 정도?
장례식장마다 봉투에 ‘부의’(賻儀)나 ‘조의’(弔儀)라고 인쇄되어 있으니, 예전처럼 봉투에 더듬거리며 한자를 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이상한 일이지만, 예전에도 한글로 ‘부의’라고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급하게 가지 않는 한, 봉투를 따로 준비한다. 장례식장 이름까지 박혀 있는 봉투가 어쩐지 상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빈 봉투에 ‘슬픔을 함께합니다’라는 식의 어쭙잖은 문구를 적는다. 글자를 쓰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다른 시간을 경험하는 일이겠거니 하면서(물론 별 소용 없는 일이다. 봉투의 쓸모는 ‘누가’와 ‘얼마’를 표시하는 데 있으니).
글 쓰다 죽은 어느 망자 빈소에 즐비하게 늘어선 조화 사이로 이런 문구의 조기를 본다. “우리 슬픔이 모였습니다. 보라, 우리는 우리의 도타운 글이 있나니.” 알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에 올려놓은 힘없는 말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우리는 늘 언어 뒤를 따른다. 앞이나 옆이 아니라, 항상 뒤에 있다. 언어가 가자는 길로만 따라가고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언어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다. 비록 새로운 말을 시도하자마자 그 또한 상투화의 길로 가지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후텁지근한
말복이 코앞이다. 올해 중복(7월 23일)에서 말복(8월 12일)까지의 간격은 20일로 예년에 비해 열흘 정도 늦게 말복이 오는 셈이다. 중복에서 말복이 달을 넘기는 월복(越伏) 때문인지 더위가 꺾일 줄을 모른다.
중동에서 온 사람에게 그렇게 더운 곳에서 어찌 사느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해서 오히려 한국의 끈끈한 여름 날씨가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이렇듯 온도와 습도가 함께 높아 찌는 듯 견디기 어려운 더위를 ‘무더위’라고 한다. 무척 심한 더위가 무더위가 아니냐고 하는 사람을 보고 웃었던 적이 있다. 우스갯소리였지만 실제로 젊은 세대들은 그렇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무더위’의 ‘무’는 ‘물’에서 온 말이다.
요즘 같은 극심한 더위를 ‘불볕더위’라고 한다. ‘햇볕이 몹시 뜨겁게 내리쬘 때의 더위’를 말하는데 ‘불볕더위’라는 말 대신 요즘은 ‘폭염(暴炎)’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다. 같은 뜻이라도 한자어를 쓰면 훨씬 센 느낌을 받는 모양이다. 폭염(暴炎), 폭서(暴暑), 혹서(酷暑)에 비하면 ‘불볕더위’는 정겹게 들린다. 말이 세져서 더위도 점점 사나워지는 건 아닐까?
더위와 관련해서 하나 더 보탠다. “‘후텁지근하다’가 맞아요? ‘후덥지근하다’가 맞아요?”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둘 다 맞다. 그런데 요즘의 날씨를 말하려 했다면 ‘후텁지근하다’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후텁지근하다’는 ‘불쾌할 정도로 끈끈하고 무더운 기운이 있다’는 뜻으로 온도와 습도가 높은 것을 모두 포함한다. 반면에 ‘후덥지근하다’는 ‘열기 때문에 답답할 정도로 더운 느낌이 있다’는 뜻으로 온도가 높은 경우에만 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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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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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행복 - 천상병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명상 - 한용운
아득한 명상의 작은 배를 타고 가이없이 출렁거리는 달빛의 물결에 표류되어
멀고 먼 별나라를 넘고 또 넘어서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이 나라에는 어린아기의 미소와 봄아침과 바다소리가 합하여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은 옥쇄의 귀한 줄도 모르고, 황금이 밟고 다니는
미인의 청춘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이 나라 사람은 웃음을 좋아하고, 푸른 하늘을 좋아합니다.
명상의 배를 이 나라의 궁전에 매었더니,
이 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님이 오시면, 그의 가슴에 천국을 꾸미려고 돌아왔습니다.
달빛의 물결은 흰구름을 머리에 이고, 춤추는
어린 풀의 장단을 맟추어 우쭐거립니다.
∼∼∼∼∼∼∼∼∼∼∼∼∼∼∼∼∼∼∼∼∼∼∼∼∼∼∼∼∼∼∼∼~~~~∼∼
띠 - 정지용
하늘 우에 사는 사람
머리에다 띠를 띠고,
이땅우에 사는 사람
허리에다 띠를 띠고,
땅속나라 사는 사람
발목에다 띠를 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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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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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참마속(泣斬馬謖)
泣:울 읍. 斬:벨 참. 馬:말 마. 謖:일어날 속.
[출전]《三國志》〈蜀志 諸葛亮專〉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 곧
①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情)을 버림의 비유.
② 큰 목적을 위해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가차없이 버림의 비유.
삼국시대 초엽인 촉(蜀)나라 건흥(建興) 5년(227) 3월, 제갈량(諸葛亮)은 대군을 이끌고 성도(成都)를 출발했다. 곧 한중(漢中:섬서성 내)을 석권하고 기산(祁山:감숙성 내)으로 진출하여 위(魏)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자는 중달(中達), 179~251]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만큼 군량 수송로의 가정(街亭:한중 동쪽)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을 잃으면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중책을 맡길 만한 장수가 없어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는 제갈량과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명참모 마량(馬良)의 동생으로, 평소 제갈량이 아끼는 재기 발랄한 장수였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리다.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는가?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 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도로를 사수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적을 유인해서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 진을 쳤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한 채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식수가 끊겼다. 마속은 전병력으로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용장인 장합(張?)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전군을 한중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228) 5월,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은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은 정말 아까운 장수요. 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끌리어 군율을 저버리는 것은 마속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가 되오.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없이 처단하여 대의(大義)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는 법이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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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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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7장 아르고 호 선원
2. 네메시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네메시스 상]
네메시스(Nemesis)는 그리스에서 가장 수수께기의 여신이다. 원래는 따뜻하고 인정 많은 전원의 여신으로 숭배되어, 예배자들에게 행운과 선물을 내리는 징험이 있었으나 점차로 여러 영험을 기원하게 되고 초기의 행운과 기회를 주는 기능은 의인신인 튜케(로마에서는 포르투나)에게 물려주고 주로 염원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하여 응징하는 여신으로 존경받았다. 그리스인 내면의 깊숙한 심리에 내재하는 한이 오만에 대한 보복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것이다.
신화에서는 뉵스의 딸이고 아비는 에레보스 혹은 오케아노스라 한다. 그녀의 미모에 매료된 제우스가 포옹하려고 가까이 왔을 때는 여러 동물 형태로 모양을 바꾸어 지상과 바다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결국 거위로 변신한 네메시스에게 제우스는 백조로 변신하여 접근, 관계를 하였다. 이 장면은 좀더 수식되어, 아프로디테가 독수리로 변하여 백조를 뒤쫓는 시늉을 하므로 백조는 거위의 샅으로 피신하였다 한다. 그리고 거위가 잠들자 백조는 교합을 하고 그 결과 회임한 거위는 호숫가에 알을 낳았다. 이 알을 목동이 주워 스파르타 튠다레오스의 왕비 레다에게 바쳤고 여기에서 헬레나와 디오스쿠리(제우스의 아들들로 폴륙스와 카스토르를 말함)가 태어났다. 이 전설에서는 레다가 디오스쿠리의 양육을 맡았으며, 헬레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많은 영웅들이 전사한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네메시스는 인간과 신들의 분수 넘친 행동에 끊임없이 화를 내고 지나친 행운이나 성공으로 오만해지면 제동을 걸고 틀림없이 처벌을 내렸다. 현세에서는 물론 사후세계까지 위력을 발휘하였으므로 종교적으로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겠다. 실제로 불의로 졸부가 된 거만한 왕이나 폭력을 일삼는 영웅은 반드시 응보천벌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분수를 넘어 지나칠 때는 세계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으므로 신에게 틀림없이 벌을 받게 된다는 그리스인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 예컨대 크로이소스 왕은 지나치게 부자이고 힘이 강하며 탐욕스러웠으므로, 네메시스는 페르시아의 큐로스 왕국을 원정하도록 부추겨 결과적으로 그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오만, 맹목적인 어리석음 및 보복이 의인신화된 것이 휴브리스, 아테 및 네메시스 여신들이며 여기에서 휴브리스-아테-네메시스라는 원리가 정립되었다. 스토아 학파는 시간이 되면 모든 것이 원래의 구성요소로 환원되어 버리는 자연세계의 지배원칙으로 네메시스를 숭배하였다. 제우스조차 두려워한 이 네메시스 여신은 모든 신에게 생명과 죽음을 내리는 여신이라 하여 '피할 수 없는' 뜻을 가진 아드라스테이아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휴브리스는 코로스의 딸, 아테는 제우스와 에리스의 딸이라 하며 리타이도 등장시켜 아테의 터무니 없는 충동을 경감시키는 마음씨 좋은 여신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네메시스의 응징은 디케(정의), 포이나(형벌) 및 에리뉴에스(복수)의 3여신의 참여하에 내려졌다. 로마에서는 행운과 기회를 내리는 네메시스의 영험을 제우스의 달 튜케에 양도케 하여 튜케를 받들고 도시의 수호신으로 존경하였다. 또한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과 융화시켜 이시튜케라고도 불렀다. 가장 이름난 네메시스의 성지는 아티카의 마라톤 근교 렘노스인데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여신 조상이 있다. 파우사니아스에 의하면 그 입석은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점거했을 때 사령관이 전승비로 하고자 파리아 섬에서 가져온 백색 대리석인데,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이 패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계획을 중단하고 방치한 돌이라 한다. 페르시아가 승리를 과신하고 터무니 없는 위세를 표출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 것이다. 10년 전 마라톤에서 아테네 군이 승리하여 페르시아의 침범을 격퇴한 것도 네메시스의 징험이라 한다.
네메시스 여신상은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운 모습에 한 손에는 사과나무 가지, 또 한 손에는 수레바퀴를 들고 있으며, 머리에는 수사슴(악타이온의 변신)이 장식된 은관을 쓰고 허리에는 응징의 채찍을 차고 있다. 수레바퀴는 계절을 돌리는 상징이었는데, 로마 시대에 와서 포르투나 여신과 관련시켜 반바퀴를 돌리면 거룩한 제왕은 번영의 극치에 달하여 생을 마치게 되며 이는 관의 사슴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그러나 온 바퀴가 돌 때는 전에 쫓아낸 경쟁자에게 보복을 당한다는 징조로 보았다. 채찍은 원래 여신이 나무와 곡식을 채찍질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사과나무 가지는 제왕이 사후에 낙원으로 입국할 수 있는 여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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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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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행복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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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대한 절제를 황금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가난이나 빈곤 때문에 추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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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을 만족시키는 과정을 통해 행복을 성취하려는 행동을 삼가라. 공허한 욕망으로 만들어진 집은 손쉽게 붕괴되기 마련이다. 행복의 건축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자신의 능력과 지혜에 따라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뜻하지 않은 불행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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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다른 어떤 사람이 될 수 없다. 나는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의 내부를 잘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행복의 땅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행복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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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고통의 순간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기보다는 고통 속에 빠진 채 그곳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한다. 그리고 고통으로 패인 상처만을 어루만지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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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에 대해 모르고 있던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된다. 지금 맞이하고 있는 고통의 순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공허한 쾌락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또다른 고통일 뿐이다. 진정한 천국은 쾌락이 있는 곳이 아니라 불행이 없는 곳이다. 그곳이 바로 행복의 안식처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내가 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은 틀릴 수 있다. 이러한 불균형 때문에 우리는 자주 어려움과 고통을 만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가 생길 때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거나 증오하면서 정신적인 상처를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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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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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 제1장 선각의 인맥
근대적인 금석고증학의 선구자 추사 김정희
1928년에 최초의 한국 서화가 인명사전인 위창 오세창의 편저 (근역서화징)이 간행되었을 때 육당 최남선은 신문에 기고한 서평의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선이 세계에 있어 오랜 문화국이요, 가장 의의 있는 문화적 일민방임은 이제 새삼스레 들출 것 아니어니와 예술 업적도 타국에 떨어지지 아니함을 본다. 다만 타에 비하여 조선은 그러함을 아는 이가 적고, 또 누구든지 그러함을 환히 알도록 작품을 많이 또 고루 전존하지 못하고, 또 작가와 작풍 및 그 계통·영향 등에 관한 기록·연구가 행하지 아니하여 예술적인 외관이 번듯하지 못할 따름이다. 오늘날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어의에는 당연히 조선예술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음으로 인함이다."
이어서 육당은 위창의 (근역서화징) 편저와 그의 수십 년의 연구생활이야말로
"조선의 예술적 기업을 호지함이며 가장 암혹한 운중에서 가장 섬삭한 전광"
이라고 감격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다.
사실 위창 오세창은 이 땅의 문화유산, 곧 민족문화재에 대한 최초의 근대적인 연구가였고 수집가였다. 3·1운동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항일투쟁의 선봉에도 섰던 위창은 서예와 서화감식안에서도 당대의 제일인자였다. 위창의 선각적인 문화재 연구 업적과 공헌은 오늘의 고고학 및 미술사학계의 선구였다. 그러나 문화재에 대한 근대적인 인식과 새로운 가치관은 18세기 이후 중국에서 전파된 새로운 과학적 학풍인 고증학의 실학사상이 싹틀 때에 여명기를 가졌다. 이 여명기의 최대의 거인은 말할 것도 없이 추사 김정희였다. 24세 때(1809년)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다녀온 후로 추사는 '실사구시' 의 실학사상으로 근대적인 금석고증학의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처음으로 한국 금석학의 체계를 세운 연구학자였다.
추사의 금석학 연구의 가장 전설적인 기록은 서울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서 그때까지 아무도 정확히 그 역사와 내용을 알지 못했던 이끼 낀 돌비석의 비문각자를 판독·고증한 일이다. 순조 16년(1816년) 7월 어느날의 일이었다. 금석학과 고증학에 한창 심취하고 있던 31세의 추사는 김경연이란 친구와 비봉 꼭대기의 수수께끼의 옛 비석을 조사·판독하기 위하여 가파른 암벽을 기어 올라갔다. 그들은 조선 한양 도읍 때의 유명한 배후인물인 무학대사와 관련이 있다는 막연한 전설의 비문을 이끼 속으로 짚어 나가다가 깜짝 놀랐다. 비문내용이 무학대사는커녕 1천 수백 년 전 신라 진흥왕(6세기 중엽)의 순수비임을 선명하게 밝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추사 자신도 예기치 못했던 감격적인 발견이었다. 추사가 김경연과 더불어 북한산 승가사에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비봉의 정상까지 올라가서 고색 짙고 마멸이 심한 돌비석의 비문을 처음으로 판독·고증할 때까지 그것이 (삼국사기)에도 빠져 있는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기념비임을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보다도 오히려 엉뚱한 전설이 비석의 역사적 가치와 정체를 흐려놓고 있었다. 가령 1750년께에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는 이런 전설을 적고 있다.
"무학대사가 이태조를 도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자 백운대로부터 산줄기를 따라 내려오다가 이 비봉에 이르렀더니, '무학은 이곳을 잘못 찾아왔다' 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어 발길을 되돌렸다."
추사는 비봉의 비문을 탁본해 가지고 내려와서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의 내용을 더욱 신중히 고증하였다. 그는 비문의 '남천군주' 라는 네 글자를 주목했다. 그리고 결론짓기를, (삼국사기)의 기록인 "진흥왕 29년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두다" 로 미루어 진흥왕 29년(568년) 이후에 세워진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 결론은 오늘의 학자들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추사가 비봉의 비를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로 고증했다는 사실에 누구보다도 놀라움과 반가움을 표시한 사람은 운석 조인영이었다. 뒷날 영의정을 지내는 운석은 그해에 마침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그곳의 금석학 연구가인 유희해와 친교를 맺게 되었고, 귀국하면서 조선의 금석문 탁본을 수집하여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던 터라 추사가 새로 발견했다는 신라 비문은 그의 청나라인 친구를 위해 다시 없는 선물감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다음해(1817년) 6월 8일, 추사는 운석을 데리고 두번째로 비봉에 올라가서 그들이 실력껏 읽을 수 있었던 68자를 최후로 확인하였다. 그런 후에 그들은 그 비문 탁본을 즉시 중국의 유희해에게 보내주었다. 그 외에도 운석은 태고사의 '원증국사비' (고려말) 등 97종의 금석문 탁본을 마련하여 보내줌으로써 유는 청나라에 가만히 앉아서 (해동금석원)과 (해동금석존고)라는 조선의 금석문 책을 2권씩이나 펴낼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추사가 발견한 북한산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새로운 귀중한 금석문사료는 국내가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청나라에서 꾸며진 책 속에 먼저 수록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비봉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판독한 추사는 또 그러한 사실에 대해 큰 자부심과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비석측면에 굳이 새겨놓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각자가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는 병자년(1816년) 7월에 김정희·김경연이 와서 읽었다."
"정축년(1817년) 6월 8일에는 김정희·조인영 같이 와서 읽을 수 있는 68자를 심정했다."
오늘 같으면 문화재의 현상 변경으로 법에 저촉되는 행위이다. 전의 고구려와 백제 땅이었던 곳을 점령하여 신라의 국토를 크게 확장시킨 진흥왕은 재위 29년(568년)에 새로운 국경을 순방하며 국위를 선양했다. 그리고 그때의 행차를 기념하여 여러 곳에 '순수정계비'를 세웠다. 추사가 북한산 비봉에서 발견한 것은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이 '진흥왕 정계비' 는 북한 지역인 함경남도의 황초령과 마운령의 두 곳과 경남 창녕 것을 합해 모두 네 곳에서 발견되었고, 창녕 것은 지금 국보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창녕 것은 맨 먼저 세워진 것으로 건립연대가 서기 561년(진흥왕22년)으로 비문에 나타나 있다. 추사 자신은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를 처음으로 발견한 후, (동국문헌비고)에 이미 (해동집고록)을 빌려 기록되어 있는 황초령비의 내용을 참작함으로써 그의 북한산비의 고증에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황초령비를 직접 볼 기회는 없었고, 다만 간접으로만 그 내용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1852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추사는 그와 친숙한 사이였던 함경관찰사 윤정현의 도움으로 일찍부터 알려져 있던 황초령의 진흥왕 정계비 탁본을 입수하여 북한산 것과 대조하며 자신의 눈으로 또 한번 고증·판독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학문적인 기쁨과 고증의 감동을 또다시 기념하기 위하여 '진흥북수고경' 이라는 여섯 자의 현판글씨를 자신의 독창적인 '추사체'로 자필하여 함경도로 보내주었다. 그후 이 현판은 황초령비를 보호하기 위해 관찰사가 지은 비각에 걸려 있었고, 현재 우리는 그 목각현판의 탁본을 볼 수 있다. 현판뿐 아니라 추사는 그에게 탁본을 보내준 관찰사 윤정현을 대신하여 황초령비의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재인식시키는 새로운 비문을 짓고, 또 스스로 써서 보냄으로써 유적의 해설비로서 옆에 세우세 하였다. 비문에는 '윤정현 서' 라고 되어 있으나 그 자체가 추사의 글씨라고 금석학자 임창순 선생은 감정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이 신라 진흥왕비는 동북 정계로 구지는 황초령인데 돌이 위아래로 떨어져 나가고 글자가 185자만이 남았다. 지금 중령으로 옮겨 비각으로 덮고, 암벽에 끼워놓았다. 황초령과 멀지 않아 경계에 큰 차는 없다. 옛날 탁본을 가지고 보면 첫줄 '왕' 자 아래에 '순수관경간석명기' 의 글자가 있다. 아울러 기록하여 없어진 것을 보충한다."
황초령비를 위해 특별히 현판과 새로운 비문을 쓴 직후, 추사는 근대 한국 최초의 고고학적 연구논문인 (금석과안록)을 남겼다. 곧 그가 직접 발견한 북한산비와 탁본으로 확인한 황초령비에 대한 고증과 해설을 기록한 필사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다. (금석과안록)에서 추사가 시도한 과학적 논증은, 1) '진흥'은 시호가 아니라 생존시에 사용한 칭호이며, 2) (삼국사기)는 진흥왕의 북순 사실을 빠뜨렸고, 신라의 국경을 안변까지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3) 진흥왕은 독자적인 연호를 썼고, '짐'·'제왕' 이란 말을 쓴 것은 그때 신라가 독립국으로서의 체제를 확고히 갖추고 있었음을 뜻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 추사는 비문에 나타나는 신라의 지명·관명·인명 등을 분석했다.
[ 국보 제3호 - '진흥왕 순수비' : 국립중앙박물관]
1786년에 판서의 아들로 태어나서 1856년에 71세로 타계한 추사 김정희는 일찍이 청나라에 갔을 때, 당시 북경의 유명한 석학이던 완과 옹방강을 가까이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이후 추사는 그들과 계속 친교를 맺으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의 타고난 총명과 끊임없는 탐구는 이윽고 경학·사학·고증학·서예·금석학에 걸쳐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깊고 넓은 학문과 예술의 경지를 개척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암행어사와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나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전후 10년간의 귀양살이-제주도와 북청에서-를 당하는 파란 많은 생애를 보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속에서 그의 학문과 예술은 찬연하게 연마되었다. 그의 글씨는 대단히 창조적이고 뛰어난 명필로서 한국미술사에 빛나고 있고, 또한 서화의 감정과 평론에서도 그는 당대의 거벽이었다. 따라서 그의 학문과 예술사상은 그의 뒤를 잇는 세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대대로 청나라를 내왕하던 역관 집안에 태어나 역시 역관이 되었던 역매 오경석은 추사보다 45세나 아래였으나 어려서부터 추사의 학문과 예술의 경지를 흠모한 문인이었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23세 때(1853년)부터는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저쪽의 새로운 학문사상과 서양의 문물을 접촉하였다. 그렇지만 청나라를 내왕하기 전부터 가졌던 금석학에 대한 관심이나 시·서·화에 대한 각별한 취미와 연구는 당대의 거성인 추사와 그의 직계 제자들에 의해 자극과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대의 역관 집안이어서 청나라의 진귀한 서화를 포함하여 국내외의 미술품이 집에 많았다는 가정환경이 역매를 당시 서울 장안의 대표적인 교양인사들과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 행운의 조건이었다. 그가 추사의 가장 가까운 제자이며 친구였던 우선 이상적을 진작부터 접촉하면서 많은 것을 가르쳐 받고 또 그를 통해 추사의 세계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이었던 것은, 그러한 가정적인 조건이 작용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역매보다 27세나 위인 우선은 당시 추사 다음 가는 안목과 교양을 지닌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매가 청나라에 가기 훨씬 전에 이미 수차례에 걸쳐 그곳을 다녀왔고, 그때마다 그가 수집 및 입수할 수 있었던 중국의 금석문과 서화들을 추사와 더불어 감상하고 고증하는 기쁨을 나누곤 했었다. 그때의 여러 가지 일화들을 우선은 그의 (은송당집)(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풍부하게 기록하여 남기고 있다. 추사는 멀리 제주도에 유배당해 있을 때 우선을 생각하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렸는데 ,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유명한 '세한도' 가 바로 그것이다. 고고한 품격으로 문기 짙은 노송과 초당을 그리면서 지기지우를 생각한 추사의 '세한도' 를 서울에서 전해 받은 우선은 감동하였고, 1844년에 청나라에 가는 길에 그것을 가지고 가서 일찍부터 추사를 알고 있던 그곳 명가들에게 보여 절찬을 받았다고 전한다. 우선 추사보다 18세 아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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