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5호 2023.11.09 목요일(음력 : 09. 26 )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누구든지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류머티즘과 사랑을 믿지 않는다.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왕의 화병
나같이 온순하고 청순하며 버들강아지처럼 보드라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로 눈엔 쌍심지를 돋우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끝마다 쐐기벌레처럼 톡톡 쏘아붙이며 화내는 사람을 만나면 화덕 위에서 졸아붙고 있는 청국장처럼 몸이 쪼그라들고 속에선 매캐한 탄내마저 나는 듯하여 웬만하면 초장부터 안 만나는 쪽이 심신건강에 유익하렷다.
걸핏하면 화내는 사람은 주변 인심을 잃을지는 몰라도 자기감정을 시원 방탕하게 배설하니 무병장수할 공산이 큰 반면에, 당하는 사람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을 삭일 길 없어 몸에선 열이 나고 초점 잃은 눈으로 기운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가 이내 허공 위로 긴 한숨을 내뱉고는 답답한 가슴을 팡팡 치기도 하고 맥없이 드러누워 있다가 급작스럽게 벌떡 일어나기를 거듭하며 입이 깔깔하고 볼살이 빠지며 주름은 깊어지는데 예전엔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자리에 눕는 걸로 시위라도 했건만 이젠 그마저도 보기 어려워졌다.
기록상 최초의 화병 환자는 선조였는데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리는 자가 울화병에 시달렸다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겠으나 방계로 왕위에 올라 주변의 눈치를 봐야 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굴욕을 당했으며 전쟁 뒤엔 자신들이 왕을 잘 모셨다며 휘호를 내려달라는 조정 대신들의 상소를 접하니 어찌 화병을 앓지 않고 배길쏘냐. 선조 스스로 “나는 화병을 앓고 있는데 나에게 올리는 글을 읽으니 심기가 더욱 상하여 목구멍이 붓고 가래가 끓는 걸 내시들도 다 알고 있다”고 토로하였더라.
왕의 화병에 측은지심이 발동하다가 문득, 화를 내는 왕과 화병을 앓는 왕 중에 누구를 골라야 할지 궁금해진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산막이 옛길
내 고향은 충북 괴산으로, 수려한 자연 경관을 빼곤 딱히 더 내세울 게 없는 곳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화양계곡, 선유동계곡, 쌍곡계곡 등이 여름휴가 장소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면서 여름철엔 외지인으로 북적북적해졌다. 얼마 전부터는 ‘산막이 옛길’을 찾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산막이 옛길’은 산막이 마을로 가는 총 10리의 옛길을 이르는데, 괴산군에서 자연을 즐기며 천천히 걸을 수 있도록 복원해 놓은 산책길이다.
산책길로는 제주도의 ‘올레길’, 지리산의 ‘둘레길’, 제천의 ‘자드락길’, 강릉의 ‘바우길’ 등이 유명하다. 최근 올레길, 둘레길, 자드락길, 바우길 등으로 산책을 떠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그렇다 보니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특색 있는 산책길을 개발하여 관광 상품화하고 있다.
그런데 산책길의 이름 대부분은 고유어나 그 지역의 방언으로 이름 붙여져 있다. ‘둘레길’의 ‘둘레’는 ‘사물의 테두리나 바깥 언저리’를 뜻하는 고유어이고, ‘자드락길’의 ‘자드락’은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을 뜻하는 고유어이다. 반면 ‘올레길’의 ‘올레’는 ‘골목’의 제주도 방언이고, ‘바우길’의 ‘바우’는 ‘바위’의 강원도 방언이다. ‘산막이 옛길’의 ‘산막이’는 ‘산(이) 막다’에서 파생된 말이므로 고유어로 볼 수 있다.
산책길의 이름으로 고유어나 방언이 활용되는 건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상품, 가게, 아파트 등의 이름 짓기에서는 외래어나 외국어가 더 널리 활용되기 때문이다. 많은 산책길이 특정 지역의 관광 명소로 개발된 데 말미암은 것이리라!
여하튼 고유어가 제한적이나마 대접을 받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국어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현상이 좀 더 확대될 수 있기를 바라 본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
|
시나눔 → 우리시
|
|
|
버리지 아니하면 - 한용운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 자다가 깨고 자다가 깨다가 잘 때에,
외로운 등잔불은 각근(恪勤)한 파수꾼처럼 온 밤을 지킵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일생의 등잔불이 되어서
당신의 백년을 지키겠습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여러가지 글을 볼 때에, 내가 요구만 하면,
글을 좋은 이야기도 하고, 맑은 노래도 부르고, 엄숙한 교훈도 줍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복종의 백과 전서가 되어서
당신의 요구를 수응하겠습니다.
나는 거울에 대하여 당신의 키스를 기다리는 입술을 볼 때에,
속임이 없는 거울은 내가 웃으면 거울도 웃고,
내가 찡그리면 거울도 찡그립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마음의 거울이 되어서,
속임없는 당신의 고락을 같이 하겠습니다.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원입골수(怨入骨髓)
怨:원망할 원. 入:들 입. 骨:뼈 골. 髓:골수 수.
[원말] 원입어골수(怨入於骨髓).
[동의어] 원철골수(怨徹骨髓), 한입골수(恨入骨髓).
[출전]《史記》〈秦本紀〉
원한이 뼈에 사무친다는 뜻으로, 원한이 마음 속 깊이 맺혀 잊을 수 없다는 말.
춘추시대 오패의 한 사람인 진(秦)나라 목공(繆公)은 중신 백리해(百里奚)와 건숙(蹇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 장군에게 정(鄭)나라를 치라고 명했다. 진나라 군사가 주(周)나라의 북문에 이르렀을 때 마침 이곳에 소를 팔러 온 정나라의 소장수인 현고(弦高)는 진나라 장군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정나라 주상(主上)께서는 장병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소생에게 소 12마리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 말을 듣자 생각이 달라진 세 장군은 공격 목표를 바꾸어 진(晉)나라의 속령(屬領)인 활(滑)로 쳐들어갔다.
당시 진나라는 문공(文公)이 죽어 국상(國喪)중에 있었으나 태자[太子:후의 양공(襄公)]는 즉시 용장(勇將)을 파견하여 침략군을 섬멸했다. 포로가 된 세 장군은 태자 앞에 끌려 나왔다. 그러자 목공의 딸인 태자의 모후(母后)는 그들의 구명을 청원했다.
“저들을 죽이면 강국인 진나라 목공은 ‘원한이 뼈에 사무쳐[怨入骨髓]’ 반드시 이 나라를 칠 것이오. 그러나 저들을 살려 보내는 게 좋겠소.”
태자는 모후의 말을 옳게 여겨 세 장군을 모두 풀어 주었다.
|
|
글나눔 → 추천글
|
|
|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5장 포르큐스-괴물의 출생
12. 헤르메스
헤르메스(Hermes, Mercurius)는 제우스와 마이아(아틀라스의 딸)의 아들로 아르카디아의 큘레네 산 동굴에서 태어났다. 아기 헤르메스는 얼마나 성장이 빠르던지 태어나자마자 기저귀를 채워 뉘어 둔 요람에서 기어나와 걷기 시작하였다. 대개의 신족이 조숙하다고 하지만 헤르메스는 그 중 단연 최고에 속하였다. 동굴 입구로 걸어나온 아기 헤르메스는 이 고장에 흔한 거북을 보자 집어 가지고 들어와 죽여서 악기를 만들 생각으로 등딱지를 떼어냈다. 악기를 만들 생각이라든지 거북등이 수금의 음판이 되기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잠시 후 헤르메스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피에리아의 아폴론 목장으로 향했다. 한 무리의 우아한 소들이 유유히 풀을 뜯는데 목동이 보이지 않았다. 헤르메스는 소를 훔치기로 하되 흔적없이 끌어 갈 궁리를 하여 우선 쓰러진 참나무 껍질을 벗겨 소의 발바닥에 대고 풀로 엮어매었다. 자신도 짚신의 앞을 뒤꿈치 모양이 되게 만들어 신 자국이 반대로 나게 하였다. 일설에는 소들을 뒷걸음질치게 하여 몰고 갔다고도 한다. 밤이 깊어지자 조용히 소떼를 몰았다. 다음 날 자신의 소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안 아폴론이 소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 감시를 하였던 까마귀는 어린아이가 끌고 갔다고 말했으나 아폴론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라 그저 동서로 소의 행방을 찾아 헤매었다. 실레노스와 사튜로스 일행에게 후한 보상을 주기로 하고 자신과는 딴 방향을 수소문하게도 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여라 날 수색하여도 행방이 묘연하던 차에 한 노인이 밤중에 소떼를 몰고가는 어린아이를 보았다고 하였다. 이에 아폴론은 어린이가 있는 굴을 찾아나섰고 마침내 동굴에 도착해서는 참고 있던 화를 폭발하였다. 아기의 어미 마이아는 아기가 깨겠다고 야단을 하였으나 아폴론은 요람속에서 천진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헤르메스를 깨워 소를 돌려보내라고 다그쳤다. 어린 헤르메스는 눈을 깜박이며 "소라니, 무슨 말이에요?" 하며 딴전을 피웠다. 수금의 줄을 만들기 위하여 이미 헤르메스가 자신의 소 두 마리를 잡은 것을 알게 된 아폴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헤르메스를 올림포스로 끌고 가 제우스에게 하소연하였다. 제우스는 사연을 알았으나 자기의 어린 아들이 저지른 이 깜찍하고 뻔뻔스런 언행에 기도 차고 재미도 나서 도리어 헤르메스를 부추겼다. 그러나 계속 핑계를 대는 일에 싫증이 난 헤르메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실토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만든 수금을 조용히 켜서 음률을 내는데 그 음률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어서 아폴론은 소와 수금을 맞바꾸자고 제의하였다. 제우스는 자신의 두 아들 간에 대화와 거래 모양을 바라보며 이 어린아이의 눈치 빠르고 민첩한 재치와 깜찍하게 둘러대는 외교술에 스릴까지 느꼈다. 헤르메스의 비범한 재질을 확인한 제우스는 이를 대견해 하며 그를 자신의 길잡이와 전령사자나 대사로 쓰기로 하고 또한 길 떠난 나그네의 수호신 자격을 인정하였다.
아폴론도 또한 자신이 항상 지니고 있던 황금단장 카두케오스를 동생 헤르메스에게 주었다. 카두케오스는 신의 사자라는 증표로, 단장에는 뱀 두 마리가 감긴 상이 있고 위쪽에는 한 쌍의 날개 장식이 달려 있다(현재 의무대의 기장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하여 헤르메스는 신의 전령사자로서 올림포스의 신족이 되었는데, 특히 명계의 신인 숙부 하데스는 헤르메스를 불러, 죽어가는 인간의 눈 위에 황금접시를 얹어 깊은 잠 속에서 편히 이승에서 저승으로 인도하라 하였으므로 그 후 자주 지하세계를 출입하게 되었다. 젊은 신 헤르메스는 나이든 올림포스 신들의 귀여움을 듬뿍 받아 아폴론은 그에게 자갈돌로 점을 치는 법과 피리부는 기량을 알려주었으며 아르테미스는 수렵에 가담시키기도 하였다. 성장한 후 헤르메스는 자신의 아이들을 두었는데 모두 그리스 세계에서 한 몫을 하는 이름난 인물이 되었다. 예컨대 키오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아우톨류코스는 희대의 도둑이 되고, 시칠리아 월계숲 요정에게서 낳은 다프니스는 그리스 세계 최고의 시인이요 목가의 창시자가 되었다. 또한 아프로디테와의 사이에서 낳은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카리아 샘의 요정 살마키스에게 붙잡혀 양성인 반음양체로 화신하였다. 인간 낭자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 뮤르틸로스는 커서 피사 왕 오이노마노스의 기병대장으로 이름난 기사가 되어 공주 히포다메이아를 탐내었다. 이륜마차 경주에서 자기와 견줄 자가 없다고 믿었던 피사 왕은 자신을 이기는 젊은이에게 딸을 주되 경기에 패한 자에게는 죽음을 내린다고 공포한 후 여러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마침 펠롭스가 여기에 도전을 하였는데 뮤르틸로스를 꼬여 공주는 양보할 테니 왕의 수레에서 바퀴의 빗장을 빼놓으라고 하였다. 결국 경기중 왕의 수레가 전복되어 왕은 죽었으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아서, 뮤르틸로스 자신마저 매수자의 손으로 수장당하여 죽음을 맞았다. 시신은 어느 해안으로 흘러 들어가 그 곳에서 영예로운 장례가 치러졌으며 사후 헤르메스의 아들로서 별자리에 올랐다. 그 밖의 헤르메스의 아들로는 안티아니라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르고 원정대의 보도담당 에키온, 드류오페 혹은 페넬로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신이된 판이 있다.
헤르메스는 아르카디아 태생으로 그 지역의 원초적 신이며 아폴론보다도 더 오래된 목신으로서 나라가 형성되기 전부터 정착한 신이다. 옛적 그리스 나라에 풍요를 가져오게 하고 인간의 생식이나 다산만이 아니라 조류나 가축의 증가에도 효험이 큰 수허신으로서 매우 숭배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형태의 남근 입석으로 숭배되었으나 점차 헤르메스로 발전하면서 두상(입석두상)이 조각되고 아랫부분은 가는 입석으로 바뀌었다. 이후 입석 중앙 부위에 힘찬 남근이 돌출된 조상이 곁들여져 에너지와 풍요를 상징함과 동시에 안정과 행운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믿어졌다. 이러한 남근체제(Phallocracy)는 그리스뿐만 아니라 유사 이전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존중되었을 것이다. 또한 다산이란 당연히 땅과 관련이 깊으므로 헤르메스는 지하 및 죽음과도 연관성이 가져 죽은 인간의 영혼 안내자(Psychopompos)로 신화에 등장하기도 한다.
한편 헤르메스는 다재다능한 젊은 신으로 숭배되고 청춘남녀에게 가장 친밀감을 주는 신이기도 하였다. 경기장에서는 헤름(헤르메스 입상)이 세워져 있는데 특히 유명한 올림피아 경기장의 초상은 젊고 늠름한 승리자의 상으로 헤르메스가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헤르메스는 또한 도둑, 도박, 거짓, 상거래, 웅변, 외교, 체육 의술, 혹은 평화의 수호신이자 길 떠나는 나그네의 보호신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시, 음률 및 천문에 능하고 항상 날개 달린 짚신을 신고 있으며 때로는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서 하늘의 새보다 빠른 속도로 천상에서 지하세계까지 날아다녔다. 로마에서는 신의 속성을 메르쿠류 신에 결부시켰으며 천문에서는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인 수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헤르메스의 동물은 독수리와 개이며, 제의에는 양젖과 꿀을 공양하였는데 웅변의 신으로 감미롭고 설득력 있는 재능을 가진 데 연유한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동물혀를 불에 던져서 공양을 하는 이유는 구변(말)의 보호신에게 혀가 장기이기 때문이다. 헤르메스의 조각상에는 팔다리가 없는 표현도 있는데, 말의 효력은 어디서나 우세하여 팔의 도움 없어도 널리 보급되기 때문이라 한다. 상인이나 도둑이 매우 재수가 좋아 횡재하게 되면 헤르마이온(헤르메스의 선물)이라 하는데 이 또한 헤르메스의 속성에 기인한 것이다.
판
판(Pan)은 펠로폰네소스 중앙부 아르카디아 산악지의 오랜 목신이다. 이 지역에는 소가 거의 없고 주 목축은 양떼이므로 양을 보호하는 신은 필연적으로 양과 같이 뿔과 턱수염이 나 있고 다리는 산양과 같은 반신반수의 형상이라고 생각하였다. 야산, 고원지대, 동굴 등 조용한 자연을 좋아하고 또한 낮잠을 즐기는데, 방해를 받으면 크게 화를 내면서도 자신은 시끄럽고 유쾌하게 지냈다. 이름난 악사이기도 한 판이 부는 피리는 7개의 갈대로 만든 것이고 이 피리는 오늘날에도 아르카디아 목동이 즐겨부는 악기다.
판은 모든 것을 상징하는 신으로 그리스 종교의 배경이 되는 사회적 혹은 도덕적 가치관의 저변과 속속들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판은 그리스의 어떤 신보다도 생활속에서 친밀한 신이며 본능적 욕구의 인성화로 상상속에도 존재하였다. 또한 새나 짐승을 기르는 옛 인간들 자신의 심성의 영혼과도 동일시 되었으며 인간에게 우호적인 도깨비신이기도 하였다. 판은 헤르메스의 아들이라 하지만 어미니는 확실하지 않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 직전에 아테네에서는 발이 빠른 필리피데스를 급히 스파르타로 보내 공동의 적 페르시아 침입군을 칠 원군을 요청하였다. 급히 달리고 있던 필리피데스는 파르테니온 산을 지날 때에야 비로소 같이 달리는 주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즉 판이 같이 뛰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피데스는 신의 이름을 대고 아테네 사람들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이처럼 판은 아테네와 친숙하였으며 전에도 그러하였듯이 다시 도움을 주었으므로 아테네에서는 하나같이 판의 영예를 높이 올렸다. 이에 따라 승리를 거둔 아테네에서는 판을 숭배하고 아크로폴리스 동굴 신전에다 모셨다. 이 때부터 판 숭배는 아르카디아 이외의 나라로 보급되어 나갔다.
판은 한적하고 쓸쓸한 곳에서 이겨낼 수 없는 돌발적이고 이유없는 공포발작을 일으키게도 하고, 동물들에게도 이유없이 놀라 짖거나 도망치게 하기도 하였다. 또한 판은 기운좋고 장난이 심한 신이자 묵축에 다산을 가져오게 하는 신이므로 당연히 성행위와 관계가 깊어 사람들은 다산을 기원하는 예배를 올렸다. 올림포스 신들도 판을 존중하고 일설에는 아폴론의 예언술도 이 신이 전수하였다고 한다. 판의 사랑신화는 후기에 첨가된 것이고, 이 신과 관련해서는 에코, 슈링크스(갈대로 화신), 프튜스(소나무로 화신) 등의 요정들이 있으나 모두 판을 피하여 물체로 전환하였다 한다.
헤르마프로디토스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us)는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태어난 후 프리지아의 이다 산 샘의 요정 나이아데스에게 위탁 양육되었다. 열다섯 살 되던 해에 호기심이 나서 세상구경에 나섰는데 소아시아의 카리아에서 경관이 뛰어난 한 호숫가를 발견하고 목욕을 하였다. 이 때 호수의 요정 살마키스가 그에게 연정을 느끼고 먼저 유혹을 하였으나 마음이 내키지 않은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요정의 애원에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 살마키스는 물 속을 헤엄쳐 가서 그를 끌어안고 신들에게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한 몸이 되게 해주기를 간청하였다. 신이 마침내 그녀의 기원을 들어주니 둘은 서로 붙어 한몸이 되었다. 그러나 각자의 성 기능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양성체가 되었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신에 감사를 올리며 살마키스 호에서 목욕하는 사람은 누구든 남성다움이 없어지고 아름다운 여성의 몸이 되도록 탄원하였다. 스트라보 시대에도 이 호수는 여성화의 징험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대에는 남녀 양성을 가진 신을 생식.번식.다산의 상징으로 숭배하였으며, 특히 사랑의 여신 숭배지 키프로스 아마토스 도시에서는 턱수염이 난 남성 아프로디토스 신을 모시며 이성의 옷을 입고 예배하는 복장도착의 습성이 있었으며 배우자 없이도 생산이 가능한 여자의 자율적 생식(자가생식)이 있었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아비와 어미 이름을 합친 합성명칭이며 미술에서는 유방을 가진 아름다움 젊은이, 또는 남근을 가진 미녀상으로 묘사되고 디오뉴소스를 수행하는 모습을 부조한 비각이 많다. 현재 헤르마프로디즘은 반음양, 자웅동체, 남녀추니라는 뜻으로 쓰인다.
프리아푸스
프리아푸스(Priapus)는 성욕을 유발하는 옛 신으로 로마인은 정원을 보호하는 신으로 존경하였다. 그는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아비는 헤르메스, 아도니스, 이오뉴소스 등 설이 다양한데 맨 나중 설이 보다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인도 순례에서 돌아온 디오뉴소스와 아프로디테가 사랑을 나눈 후 헬레스폰트의 람프사코스에서 낳았다는 것이다. 아이의 팔다리가 기형이고 성기가 특히 거대한 괴물로 태어났는데, 질투가 심한 헤라가 출생을 도왔기 때문이라고 하며 창피해서 산에다 버렸으나 양치기가 구해 내었다. 후기에 Propter deformidatem et memebri virilis magnitudinem이라는 긴 이름이 붙여졌다. 그의 출생지로 알려진 람프사코스에서 특히 존중받았으며 생산력을 상징하는 힘찬 남근으로 표현되고 그리스에는 알렉산더 대왕 때 전파되어 숭배되었다. 희생공양으로는 성욕이 유달리 강한 나귀가 선택되었다. 병적으로 일어나는 음경의 지속적 발기증을 뜻하는 프리아피즘이라는 용어는 그 이름에서 기원한 것이다. 북유럽에서는 메이퀸 축제 전야에 제단 앞에 성스러운 옛 프리아푸스 남근상을 배치하고 화환을 걸어 거리로 운반하는 성대한 성의식 광연이 개최되었다. 후기에는 메이폴(오월의 기둥)로 대치되어 대지의 자궁에 삽입시켜 뿌린 씨의 결실을 축원하는 봄 축제로 발전했으며 남근숭배 양상의 변화와 더불어 계속 전승되었다. 미혼남녀의 성적유희를 해금하는 전승도 성행하였다.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행복의 비밀
26
행복은 다른 사람이나를 위해 친절을 베풀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찾아온다.
27
행복은 한 조각의 꿈이다. 오직 고통만이 영원한 실재로 남아 있다. 이것은 논란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인생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행복이 아니다. 오히려 불행의 예방이 우선적인 척도가 될 수 있다. 행복하다는 말은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28
우리의 인생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인내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삶의 고역을 참아 왔다는 사실이다.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란 일생 동안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이다. 쾌락과 욕망의 충족을 만족시키면서 살아온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무한한 욕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쾌락의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자기 자신에게는 불만을, 다른 사람에게는 질투를 느끼게 될 것이다.
29
고통이 없고 동시에 권태가 없는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이다. 그것은 행복의 절정이다.
30
우리가 흔히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뿌리도 잎도 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고통을 그 대가로 지불하면서까지 쾌락을 즐길 필요가 없다. 고통을 그 대가로 지불하면서까지 쾌락을 즐길 필요가 없다.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영원한 고통을 감내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생이라는 고뇌 의장을 즐거운 장소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쾌락과 즐거움 대신에 고통이 없는 상태를 위해 노력하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이 없는 상태보다는 쾌락의 삶을 선택한다.
|
|
독서실 → 철학
|
|
|
인간과 욕망 - 마르틴 콜랭
제 3 부
무의식적 욕망
스피노자는 노력을 존재의 구성원리로 삼으면서 욕망에다 중요성을 부여한다. 바로 욕망이 노력의 인간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경험함으로써 존재는 세계에 대해, 그리고 타인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된다. 욕망은 개인을 구조화하며 또한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도 구조화한다. 정신의 인과관계를 다루고 있는 스피노자 철학의 욕망에 대한 이 개념은 욕망과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문들과 관련이 있다. 분명히 스피노자 철학에 있어서 욕망은 그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지만 그 자신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그의 결정은 습관, 갈등, 충돌, 내력들로 이루어진 개인의 경험이 형성되는 외부로부터 오며 이곳에서 (인식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는 질서에 따라) 행동 속에 존재하는 독특한 본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정돈되는 것은 아닌가? 스피노자가 했던 것처럼 인간본성에 속하고 올바른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질서를 제시함으로써 두 세기 후에 프로이트(1856-1939)에 의해 더 깊이 연구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은 아닌가? 라깡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놀랄 만한 점은 이론을 전개하는 이성을 행동으로써, 즉 주체도 모르는 사이에 논리적으로 사유하고 기능하는 것으로써 보여준다는 것이며, 이는 고전적으로는 비이성의 분야에 속했던 것이다"
합리성의 새로운 영역
- 욕망과 주체
이러한 영역이란 광기와 꿈처럼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명백하게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의 영역에 해당한다. 데카르트는 "광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여 광기에 대한 과장된 표현이 신중한 이성에게 일으킬 만한 문제점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합리적인 담화는 광기를 대상으로 삼을 줄도 모르고 반론을 제기할 줄도 모를 것이다. 광기란 모든 합리성에서 벗어난 것이고 철학은 모든 불규칙한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프로이트는 여기에 복잡한 메카니즘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거기서 논리적 구조를 도출해 내기 위해 이러한 영역에의 금기를 깨뜨려 가며 비이성적 분야에 대한 분석의 문을 연다. 여기에 라깡은 "무의식은 마치 언어처럼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분석을 더욱 심화시킨다.
광기란 더 이상 귀신이 들린 것도 횡설수설하거나 헛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다.광기란 진정한 말이다. 광기는 형언할 수 없는 욕망 자체를 다르게(그것을 분명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야기 한다. 이 욕망은 야만적이고 불확실하지만 쉽게 인식되거나 욕구와 일치하는 것이 아닌 무의식적인 욕망으로서 주체 자신에 의해 작동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내력이 이러저러함을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그것은 더 이상 정념의 문제가 아니라 충동의 역동적 작용에 관한 문제이다. 충동은 인간의 개성을 구성하고 특수한 방법으로 그 개성을 표현하며 타인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체험하게 한다. 플라톤에서 데카르트에까지 철학의 계속된 문제점은 인간의 감정에 대한 힘의 문제로서 더 이상 존재이유를 갖지 않는다. 그 대신 주체와 그의 욕망간에는 수많은 관계가 나타나며, 이들의 관계는 지배가 아닌 구성의 관계를 갖는다. 욕망이 언제나 법칙과 금지에 관계하는 한, 주체를 구성하고 그 주체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 욕망이다. 그럴 경우 욕망은 의지와 더 이상 관련이 없으며, 욕망은 의지를 표현하지 않고 의지도 욕망에 대해 아무 힘을 갖지 못한다. 주체라고 해서 자신의 욕망에 있어서도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주체를 구조화시킨다.
- 무의식의 현실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트는 의문을 제기한다.
"무의식적 욕망에 있어서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일 우리가 가장 진실한 표현으로 귀결된 무의식적인 욕망과 마주해 있다면, 우리는 심리적인 현실이 물질적 현실과 혼동될 수 없는 특수한 존재형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심리적인 현실은 무의식의 현실이고 고도로 잘 조직된 체계이며 갈등을 일으키는힘이 작용되는 곳으로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무의식은 의식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이야기한다. 꿈과 신경쇠약의 증후들은 해석이 풀어 내려고 애쓰는 무의식의 요소들이다. 그러나 정신분석 자체는 우리에게 단순한 편견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편견은 깊이 감추어져 있고 진실한 연장된 현실과 존재와 외관의 현대적 구분인 눈속임의 외양을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의식의 현실은 무의식의 현실보다 더 진실하지도 덜 진실하지도 않으며, 심리적 현실이 물질적 현실보다 더 진실하거나 덜 진실한 것도 아니다. 심리적, 무의식적 현실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다른 메카니즘에 지배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과 논리적인 분석에 의해 무의식을 의식으로 환원시키려 하는 것은 축소행위(헛되고 오만한)가 될 것이다. 정신적 물질의 구성을 주관하는 법칙을 추출해 내고 이들을 구조화시키는 언어를 분석하는 것이야말로 프로이트가 처음으로 시도한 방대한 작업이다. 무의식적인 욕망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 욕망이 표현되며 동시에 숨겨지는 언어의 통로를 따라가야만 한다.
꿈은 욕망의 성취이다.
무의식적 욕망이란 항상 타협의 형태로 성취되는데, 이는 곧 대체적인 형태이며 특수한 심리현상의 개별적 현상에 있어서 오직 유일한 가능태이다. 이상한 행동, 신경증, 꿈을 꾸는 것 등은 모두 표현되고자 하는 무의식적 충동력과 이 무의식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힘 사이의 타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위의 힘은 불쾌한 것들로부터 자아를 보호해야 할 임무가 있다. 그러나 "꿈의 해석" 속에서 프로이트는 다른 형태의 심리형성을 설명할 수 있는 모델을 설정해 놓았다. 이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누구건 꿈의 영상이 왜 나타나는지 그 근원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공포증이나 강박관념, 망상에 빠지는 것을 이해하거나 이것들을 치유시키려고 한다면 이는 전혀 부질없는 일이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
무의식적인 욕망은 꿈의 작업을 통해 변형되어 표현된다.
"꿈의 내용은 우리에게 또 다른 표현방법으로써 꿈속의 생각을 베껴 놓은 것으로 나타난다"
잠재력이라고 일컬어지는 꿈속의 생각은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활성화되어진다. 하지만 변장을 하고 있는 무의식적 욕망을 어떻게 해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꿈을 구성하는 텍스트는 변형작업을 거쳐 나온 요소들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해석작업을 통해 변형된 요소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렇지만 무의식적 욕망이 해석을 통해 판독된 잠재적인 꿈속의 생각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프로이트의 의견은 이렇다.
"우리가 꾸는 대부분의 꿈속에서 우리는 유독 강하게 표현되는 핵심부분만을 인식한다. 이것은 보통 욕망의 성취에 대한 직접적 표현이다"
이 핵심부분은 꿈속에서의 잠재적 생각의 주제가 되지 못하며 분석에 의해서만 밝혀져 나타난다. 그러므로 꿈을 꾸는 사람이 그 핵심부를 즉시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욕망이 어떻게 꿈속에서 나타나는가? 이것들은 어떻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충족될 수 있는 것인지?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는 꿈의 얼개와 욕망의 충족에 관여하는 꿈의 작용을 분석함으로써만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 꿈의 작업
꽤 많은 형태로 나타나는 꿈의 뚜렷한 내용은 꿈속의 생각(또는 잠재적인 내용)을 그림수수께끼로 베껴 그려 놓은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설명한다. 이러한 작업에 대해 그는 네 개의 커다란 양식을 설정하였다:압축, 감정전이, 형상화, 2차적 구상.
1. 압축 : 꿈속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생각의 관념을 명백한 내용의 한 가지 영상으로 만드는 작업을 일컫는다.
2. 감정전이 : 꿈속에서 나타나는 생각의 여러 요소들을 심리적으로 강렬하게 전이시킨다. 예를 들어 강한 관심을 끌게 하는 요소가 마치 미미한 가치만 지닌 것처럼 취급되는 경우를 말한다.
3. 형상화 : 관념들을 영상들로 변형시킨다. 그래서 꿈으로는 표현할 방도가 없는 논리적 관계(이야기의 골격)가 변장을 하여 나타난다. 이를테면 인과관계는 연속적으로 표현된다.
4. 2차적 구상 : 해체된 채 흩어져 있는 꿈의 소재들을 하나의 응집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개조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꿈속의 분명한 내용은 잠을 자려는 욕구(혼미하지 않은 의식을 요구한다)와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생겨난 심리적 흥분 사이의 타협에 의한 것이다. 꿈은 대부분 알아보기 힘들고 왜곡된 형태로 욕망을 실현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타협은 의식(특히 도덕 의식)의 요구까지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실현된 욕망은 우리가 그 욕망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현실에 있어서는 그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한 욕망으로 보인다. 이러한 욕망들은 설사 우리가 이것들을 거의 표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의식적이다. 그러나 욕망을 꿈속에서 충족시키는 것이 실제의 완벽한 충족보다 더 많이 관여된다. 그 이유는 꿈에서의 충족이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게 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족은 환각적이다. 위와 같은 꿈의 표현은 욕망과 욕구간의 차이를 나타내 주며 단지 무엇이 결핍된 것인가를 보여 주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간단한 꿈의 예들(기상시간을 미루면서 자신은 이미 잠에서 깨어 화장을 하는 중이라고 잠꼬대를 하는 순간을 생각해 보라) 중에서 특히 꿈의 작업에 의한 변형을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꿈을 예로 든다.
"만약 잠자는 어린 아이가 하는 말들이 꿈의 일부에 속한다는 나의 의견에 동의한다면, 내가 수집한 꿈들 중에서 가장 최근에 속하는 것 한 가지를 이야기하겠다. 내 막내 손녀딸은 열 아홉 달 짜리이다. 이 아이가 어느 날 구토를 하기에 하룻동안 식이요법을 시켰다. 그날 밤 우리는 그 아이가 잠을 자면서 흥분된 상태로 소리지르는 것을 들었다. '안나 프로이트, 딸기, 커다란 딸기, 과자, 수프' 안나는 그 자신이 그것들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집어 넣었다. 또 이러한 메뉴는 모두 그 애가 먹고 싶어한 것들임에 틀림없다. 아이가 잠꼬대 속에서 두 가지 형태로 딸기를 말한 것은 가족들의 처방책에 대한 일종의시위이다. 실제로 그 애는 하녀가 그 애가 병이 난 것은 커다란 딸기 한 접시를 다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기억했다. 이것에 대한 보복이 꿈에서 나타난 것이다"
라깡, "세미나"
위의 예에서 라깡은 가장 단순한 욕망 조차도 매우 불확실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과자들의 환영으로 나타난 꿈의 식이요법 때문에 생긴 결핍을 충분히 충족시켜 주는 시나리오를 펼쳐 놓는다.
"어린 안나 프로이트를 예로 든 것에서 발음이 분명치 않은 유아어로 그녀에 관해 이야기 한 것이므로 그 애는 또한 플랑이나 과자에 대해서도 꿈을 꾼다. 이는 마치 영양실조로 죽을 지경인 사람이 만족감을 얻기 위해 빵껍질이나 물 한 컵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팡타그뤼엘식의 호화스런 식사를 꿈꾸는 것과 같은 식이다"
욕망의 형성이 결핍을 인식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즉 무의식 체계의 특징은 욕망이 투자하는 그의 이런저런 대상을 바꾸는 운동성에 있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