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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1호 2023.1.5 목요일 (음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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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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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든 당신이 선량한 사람이라고 해주면, 실제로는 그렇게 선량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앞으로는 선량한 사람이 되려고 한층 더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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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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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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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美人)-Y여사에게 - 김수영
美人을 보고 좋다고들 하지만
美人은 자기 얼굴이 싫을 거야
그렇지 않고야 미인일까
美人이면 미인일수록 그럴것이니
미인과 앉은 방에선 무심코
따놓은 방문이나 창문이
담배연기만 내보내려는 것은
아니렷다
<196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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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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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지교(刎頸之交)
刎:목 찌를 문. 頸:목 경. 之:갈 지(…의). 交:사귈/벗 교.
[동의어] 문경지계(刎頸之契).
[유사어] 관포지교(管鮑之交). 금란지계(金蘭之契). 단금지계(斷金之契).
[참조] 완벽(完璧). [출전]《史記》〈廉頗藺相如列傳〉
목을 베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귐. 또 그런 벗.
전국 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하 목현(繆賢)의 식객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 명옥(名玉)인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원상태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됐다.그리고 3년 후(B.C. 280), 소양왕과 혜문왕을 욕보이려는 소양왕을 가로막고 나서서 오히려 그에게 망신을 주었다. 인상여는 그 공으로 종일품(從一品)의 상경(上卿)에 올랐다.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염파(廉頗)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城)을 쳐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 테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그는 병을 핑계 대고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이 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로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로 소양왕이지요.”
“나는 그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강국인 진나라가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염파장군과 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위기를 생각하고 염파장군을 피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곧 ‘윗통을 벗은 다음 태형(笞刑)에 쓰이는 형장(荊杖)을 짊어지고[肉粗負荊:사죄의 뜻을 나타내는 행위]’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무릎을 끓었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문경지교’를 맺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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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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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2장 슬프도다, 관중이여
1. 이오 즉위
제환공의 착병
한편 제환공은 관중의 보고로 진(晋)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다는 걸 알자 모든 나라 제후를 모아 대책을 세우려고 친히 고량 땅으로 갔다. 그 곳에서 제환공은 진(奏)나라 군대가 이미 진(晋)나라를 위해 출동했다는 것과 또한 주혜왕(周惠王)이 대부 왕자 당과 군사를 역시 진(晋)나라로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제환공은 공손 습붕을 보내어 왕군과 진(素)나라 군대와 합세하게 했다. 공손 습붕은 고량을 떠나 주, 진 두 나라 군사와 합세하고 함께 이오를 진(晋)나라 군위에 앉히기로 합의했다. 또한 여이생도 굴성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과 합세했다. 진(晋)나라 일이 이렇게 일단락되는 걸 보고야 공손 습붕은 고량에서 제나라로 돌아갔다. 공손 습붕이 귀국하자 관중이 물었다.
"이번 진나라 군위는 누구로 정하셨소?"
공손 습붕이 대답했다.
"이오 공자로 정해졌습니다."
이 말을 들은 관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자 중이가 아니고 분명히 이오라 하셨소?"
습붕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오라 했습니다."
관중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진나라 내분은 끝난 것이 아니오. 진나라 백성이나 대부들이 모두 공자 중이를 받들어 모시기를 원할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심히 궁금하오."
한편 진(晋)나라에선 이극, 비정부가 국구인 호돌에게 등극하는 절차를 지시해 줍소사 하고 청했다. 호돌은 모든 신하를 거느리고 법가를 갖추어 가지고 진나라 경계까지 나가서 이오를 영접했다. 이오는 법가를 타고 강도에 당도하는 즉시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진혜공(晋惠公)인 것이다. 그리고 즉위한 그 해를 진혜공 원년으로 삼았다. 이 때가 바로 주양왕(周襄王) 2년이었다. 원래 진나라 백성들은 어질기로 이름 높은 공자 중이를 사모했기 때문에 책나라에서 중이를 모셔다가 임금으로 추대하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백성들은 중이 대신 이오가 군위에 오르게 되자 매우 실망했다. 진혜공은 즉위하자, 곧 그의 아들 어(御)를 세자로 세웠다. 그리고 호돌, 괵사를 상대부로 삼고 여이생, 극예를 중대부로 삼고 도안이를 하대부로 삼았다. 그 나머지 모든 신하들은 모두 예전 벼슬 자리에 그대로 있게 했다. 진혜공은 양유미로 하여금 왕자 당을 따라서 주(周)에 가게 하고 제나라로 돌아가는 공손 습붕에겐 한간을 딸려 보내어, 이번에 자기를 군위에 오르도록 도와 준 두 나라에 각각 감사를 드렸다. 다만 진(秦)나라 공손지만이 약속된 하서의 다섯 성을 받으려고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진혜공은 약속은 했지만 국토를 떼어 주기가 싫어서 모든 신하를 불러 놓고 상의했다. 괵사가 눈짓으로 여이생에게 암시를 보냈다. 여이생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상감께서 진나라에게 뇌물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우선 귀국해야만 군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젠 이미 귀국하사 이 나라가 상감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진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여 진후(秦侯)가 상감을 어찌하겠습니까."
이극이 반대의 뜻을 말했다.
"주공이 나라를 얻은 시작부터 이웃 강국에게 신용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기왕 약속한 바에야 아깝지만 다섯 성을 줘 버리십시오."
극예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반박했다.
"다섯 성을 내주면 우리 진(晋)나라 반쪽이 없어집니다. 진(奏)이 아무리 강한 병력을 가졌대도 우리에게서 다섯 성을 뺏지는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선군께서 생명을 걸고 오랜 세월 고초 끝에 비로소 마련한 땅인데 어찌 그냥 버릴 수 있습니까."
이극이 굽히지 않고 말했다.
"이미 선군의 땅인 걸 알았다면 왜 문서까지 내주셨소. 주겠다 하고 안 주면 진(奏)이 그냥 있겠소. 또 선군이 나라를 곡옥에 세웠을 땐 이 나라가 조그만 땅에 불과했소. 다만 몸소 정치에 힘쓰셨으므로 능히 다른 조그만 나라들을 정복해서 오늘날의 진(晋)나라를 세우신 것이오. 이제 주공께서 능히 정치에 힘쓰시고 이웃 나라와 의좋게 지내신다면 다섯 성 쯤 없어지는 걸 걱정할 것이 있습니까."
극예가 눈썹을 곧추세우면서 이극을 흘겨보며 언성을 높였다.
"이극의 말은 진(秦)나라에 대한 우리의 신의를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주공께서 준다고 하신 분양 땅 백만 평을 혹 받지 못할까 염려하고 공연히 진(奏)나라를 입에 올려 중언부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이극은 대로하여 극예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이 때 뒤에서 비정부가 재빨리 이극의 소매를 잡아당겨 참으라는 암시를 줬다. 이극은 말을 참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진혜공이 뭇 신하를 향해 물었다.
"안주면 신(信)을 잃고, 주면 우리의 힘이 약해질 테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구나.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 없으니 성을 하나나 둘쯤 주면 어떠할까?"
여이생이 급히 대답했다.
"성을 하나나 둘쯤 준다고 우리가 신(信)을 지킨 것으론 안 됩니다. 도리어 진(秦)나라 비위만 거스르고 맙니다. 그러니 차라리 딱 잘라 거절하십시오."
진혜공의 배신
진혜공은 여이생에게 진나라로 보낼 국서를 쓰게 했다. 그 국서의 대략은 다음과 같았다.
- 처음에 이오는 하서(河西) 다섯 성을 군후께 드리기로 하고, 이제 다행히 본국에 돌아와서 사직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오는 군후의 하해 같은 은혜를 잊을 수 없어 곧 약속한 바를 실천할 작정이었는데 대신들이 다 말하기를 '국호는 선군의 땅이니 주공은 타국에 망명하여 어찌 맘대로 국토를 남에게 허락하셨나이까' 하고 말을 듣지 않는지라, 과인이 대신들과 이 때문에 다투었으나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군후께선 앞으로 기한을 좀 늦추어 주십시오. 과인은 하해 같은 은혜와 전날 약속한 바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국서를 쓰긴 썼는데 갈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진혜공이 물었다.
"누가 능히 과인을 대신해서 이 국서를 가지고 진나라에 갔다오겠느냐?"
이에 비정부는 자기가 가겠노라 자청하고 나섰다. 진혜공은 쾌히 허락했다. 원래 진혜공은 귀국하기 전에 비정부에게도 부규 땅 70만 평을 주기로 약속했었다. 이제 진나라에 대해서도 다섯 성을 주지 않는 터이니 어찌 이극과 비정부에게 한 약속을 지킬 리 있으리오. 비정부는 비록 말은 못하나 속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진혜공을 깊이 원망했다. 그래서 비정부는 겸사겸사 진나라에 가서 여러 가지로 호소할 작정이었다. 비정부는 공손지를 따라 진나라로 갔다. 비정부는 진목공 에게 국서를 공손히 올렸다. 진목공이 국서를 다 읽자, 노발대발 화를 내면서 안상을 치며 호령했다.
"내 원래부터 이오가 임금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더니 과연 그 놈에게 속았구나. 이런 글을 가지고 온 저 진나라 사자 놈부터 참하여라!"
공손지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이는 비정부의 죄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주상께선 그를 용서하십시오."
진목공이 호령했다.
"그럼 어떤 놈이 이오에게 속닥거려 과인에게 약속한 바를 배신하라고 시켰느냐. 내 그 놈을 알아내어 한칼에 목을 참하고 말겠노라."
비정부가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군후께선 좌우 사람들을 잠깐 물러가게 해주십시오. 신이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진목공의 얼굴빛이 약간 부드러워지더니 좌우 신하들을 둘러보고 분부했다.
"경들은 주렴 밖으로 물러나가오."
진목공이 비정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무슨 말인가?"
"우리 진나라 모든 대부는 다 군후의 은덕에 깊이 감명하여 하서 다섯 성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여이생, 극예 두 사람만이 이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군후께선 많은 폐물을 보내고 좋은 말로 그 두 사람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두 사람이 오거든 잡아 죽이십시오. 군후께서 중이(重耳)를 밀어만 주신다면 신과 이극은 이오를 몰아내고 국내에서 군후와 호응하겠습니다. 저희들의 뜻이 이루어지면 대대로 군후를 섬기겠습니다. 뜻에 어떠하오신지요?"
진목공이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계책이 묘하오. 실은 내가 원래부터 중이의 어짐을 알고 바라던 바요."
진목공은 대부 냉지에게 많은 폐물을 가지고 비정부를 따라 진나라에 갔다오도록 분부했다. 진목공은 여이생과 극예를 감언이설로 유인해서 장차 죽일 작정이었다. 한편, 이극은 어떠했는가. 비정부가 진(秦)나라로 가서 이렇듯 계책을 꾸미고 있을 때 이극은 화도 치밀고, 가슴도 답답하여 부중으로 돌아와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더욱이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미는 것은 처음에 생각한 그대로 안 되었다는 점이었다. 원래 이극의 생각은 공자 중이를 모셔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중이는 사양하고 귀국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참에 이오가 이극에게 많은 땅을 줄 테니 자기를 귀국시켜 달라고 인편에 청해 왔다. 이극은 모든 사람들의 의견도 있고 해서 마지못해 이오를 군후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오는 즉위한 뒤 전날 약속했던 땅은 전혀 주려고 하지도 않고 괵사, 여이생, 극예 등만 중히 쓰고, 지난날의 중신들을 푸대접했다. 그래도 이극은 적어도 국가의 공적 신뢰를 위해서 진(秦)나라에 약속했던 땅 다섯 성을 주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런데 극예는 자신에게 사리 사욕을 위해서 그런 소릴 한다고 반박했었다. 이극은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분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화를 참자니 속이 편할 리 없었던 것이다. 이극은 할말이 없지 않았으나 잠자코 조문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이극의 안색이 좋을 리 없었다. 한편 극예 등은 비정부가 스스로 자원해서 진나라에 갔다 오겠다는 데 대해 의심했다. 혹 비정부와 이극이 무슨 공모라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심복 부하를 보내어 그 두 사람의 행동을 감시시켰다. 비정부도 극예 등이 사람을 보내어 자기 행동을 살피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했다. 그래서 비정부는 이극을 만나지 않고 바로 진(奏)나라로 떠났다. 한편 이극은 비정부와 상의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를 청했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아뢰었다.
"비대부께선 벌써 진나라로 떠나시고 없더이다."
이극은 말을 타고 비정부를 뒤쫓아갔다. 이극은 성 밖까지 갔으나 비정부를 뒤따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극의 일거 일동을 감시하던 자가 즉시 극예에게 가서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극예가 즉시 관복으로 갈아입고 궁에 들어가서 진혜공께 고자질로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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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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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한방에 보내자 - 송근준(남.인천 서구 가정동)
때는 바야흐로 단기 4309년 여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늘 칠판 모퉁이에 단기 년, 월, 일을 쓰셨습니다. 단군의 자손이 단기를 모르면 단군의 자손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시며 우리 민족의 유구한 우수성을 역설하시는 분으로 별명은 '단군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지금의 초등학교 화장실은 모두 수세식 변기이겠지만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그때만해도 재래식 변기(일명:푸세식)이었습니다. 지저분하지만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요즘의 정화조 통위에 볼일을 보는 구멍을 몇 개 뚫고 그 사이를 판막이로 막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밑은 모두 하나가 되는 거지요. 그리고 벽 뒤쪽에는 변을 푸는 곳이 있는 그런 화장실입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점심 시간이었습니다. 화장실, 아니 그땐 변소라고 했으니까 현장감을 더하기 위해 변소라 하겠습니다. 변소 뒤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별명이 땜통이라는 친구가 "똥통에 쥐가 있다."라고 하여 변통을 보았더니 여름장마가 지나간 후라 충만한 변통 안에서는 쥐 한마리가 유유히 수영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부에서 '쥐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쥐 잡는 날'을 지정할 만큼 쥐는 곧 우리의 적이라는 생각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변통 안의 쥐를 향하여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큰 벽돌을 온힘을 다해 들고와 큰 목소리로 "한방에 보내자."하며 변통안에 사정없이 투하하였습니다.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크림슨 타이드 영화에서 잠수함이 폭발하는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로 "사격중지, 사격중지, 아니 폭격중지."하는 소리, 아니 절규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때마침 사격과 폭격을 중지하고 변통을 보았더니 정말 쥐는 사살되었는지 사격중지라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아 아무 생각없이 오후 수업을 하기위하여 입실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단군선생님께서는 수업을 들어오시지 않는 겁니다. 그럭저럭 한 시간을 꽁으로 먹고 오후 2시간째 수업을 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단군선생님께서 새옷으로 단장을 하고 들어오셔서 대뜸 하시는 말씀이 "한방에 보내자고 한 놈 나와!"하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 친구들이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내가 머리에 털나고 똥벼락 맞았다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밑에서 똥분수를 맞는다는 얘기는 처음이다. 그렇게 사격중지, 아니 폭격중지를 외쳤는데도." 말끝을 흐리시더니 다시 완전히 이성을 잃어신 것 같은 얼굴로 "한 방에 보내자고 한 놈 나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변통에 융단폭격을 할 때 단군선생님이 변소에서 볼일을 보시면서 봉변을 당하시던 장면과 "한방에 보내자."라고 한 것이 저라는 생각이 뇌리를 강하게 스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손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때 어린 저로서도 뒤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성이 조금은 있었습니다. 짧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믿었던 융단폭격의 참전 전우들의 눈동자가 무거운 침묵과 함께 모두 저를 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땐 정말 쥐구멍이 아니라 변통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자수하여 광명 찾을 걸하는 생각은 했지만 그땐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런데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라는 속담이 진짜더라구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저는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쥐를 한방에 보내자고 한 것이지 선생님을 한방에 보내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용기있게 말하자 선생님께서는 "내가 빗발치는 파편을 그 좁은 공산에서 다 피했지만 그 한방에 완전히 폭탄 맞은 꼴 되었다. 이놈아!"하고 말씀하신 후 혼내줄 명분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고의성은 아니라는 것을 아셨던지 조금은 이성을 찾은 얼굴로 "앞으로 똥통에 돌을 던지는 놈은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하신 후 수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단군선생님께서는 6.25 당시 중위로 참전하여 군용어를 잘 쓰시는 편이었습니다. 변소에서 볼일을 보고 계실 때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사격중지, 폭격중지를 외롭게 연발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단군선생님의 명복을 방송을 통해 빌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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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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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태길편"
김태길(1920~2009)
철학자. 수필가.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 졸업. 철학 박사. 연세대. 서울대 교수 역임. 학자 특유의 논리적인 필치로 수필을 쓴 인물. 수필집으로 "웃는 갈대" "빛이 그리운 생각들" "흐르지 않는 세월" 등이 있고 "윤리와 정치"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새 인간상의 정초" 등 저서가 있다.
글을 쓴다는 것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 무언 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하게 실천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것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반성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을 어떤 형식으로든 거짓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장래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을 가라앉힘으로써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이기도 한다. 만일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이 있거든 그것을 종이 위에 적어 보라. 다음 순간, 그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은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 떠오르고,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막거니 간섭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이나 매명을 위한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한 것이요, 간혹 자기와 절실히 가까운 벗을 독자로 예상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본래 저속한 이해와는 관계가 없는 풍류가들의 예술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상한 취미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모든 진실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을 속임 없이 솔직하게 그린 글에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까운 벗에게 보인다. 벗도 칭찬을 한다.
"이만하면 어디다 발표해도 손색이 없겠다."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과 격려를 듣고도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트 한구석에 적었던 글을 원고 용지에 옮기고 그것을 어느 잡지사에 보내기로 용기를 낸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길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면서, 활자의 매력에 휘감기고 마는 것이다.
잡지나 신문은 항상 필자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두 번 글을 발표한 사람들의 이름은 곧 기자들의 수첩에 등록된다. 조만간 청탁서가 날아오고 기자의 방문을 받는다. 자진 투고자로부터 청탁을 받는 신분으로의 변화는 결코 불쾌한 체험이 아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하고, 정성을 다하여 원고를 만들어 보낸다. 청탁을 받는 일이 점차 잦아진다. 이젠 글을 씀으로써 자아가 안으로 정돈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밖으로 흐트러짐을 깨닫는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정열에 못 이겨 종이 위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눌려 짜낸다. 자연히 글의 질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 써야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길을 내 집까지 찾아온 사람에 대한 인사를 생각하고, 내가 과거에 진 신세를 생각하며, 또는 청탁을 전문으로 삼는 기자의 말솜씨에 넘어가다 보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쓰겠다고 한번 말만 떨어뜨리고 나면 곧 채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돈빚에 몰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글빚에 몰리는 사람의 괴로운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나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하나의 고역으로 전락한다. 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 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흐를 때, 그 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 붓을 들면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없이 성실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의 사실을 전체의 사실처럼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에서 흔히 발견된다. 자극을 갈망하는 독자나 신기한 것을 환영하는 독자의 심리에 영합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의 허세로써 자신을 과시하는 일이다. 현학적 표현은 사상의 유치함을 입증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스러움을 증명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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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국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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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 라이너 마리아 릴케
9월 11일 톨리에 거리에서
지금까지 내가 겪어 온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죽음도 할아버지의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죽음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들은 무기 속에다 죽음을 지니고 있었다. 죽음은 마치 포로와 같았다. 여자들은 늙고 쪼그라들어, 무대와 같이 엄청나게 큰 침대에 누워 온 가족과 하인과 개가 지켜보는 가운데, 분별 있고 주인다운 품위를 지키며 숨을 거두었다. 무론 아이들은, 심지어 아주 어린 갓난아이들조차, 아이다운 죽음을 갖지 못했다. 아이들은 정신을 가다듬어 이미 자라온 자신과 앞으로 자라게 될 자신을 합해 놓은 듯 죽어 갔다. 임신중인 여자가 서 있는 모습은 그녀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아름다움을 주는지 모른다. 가느다란 두 손을 자기도 모르게 올려놓은 커다란 몸집 속에는 두 개의 열매, 말하자면 아이와 죽음이 각각 들어 있다. 그녀의 텅 빈 얼굴에 빈틈없고 거의 생산적이기까지 한 웃음이 퍼져 나가는 것은 그녀가 이 두 가지 열매의 성장을 자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공포에 맞서서 무엇인가를 한 듯했다. 밤새 일어나 글을 쓰고 난 지금, 나는 울스가르 마을의 들판을 거쳐 먼 길을 달려온 것처럼 피곤하다. 더 이상 모든 것이 옛날 같지 않다고, 낯선 사람들이 유서 깊고 길쭉하게 생긴 시종관의 집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아마 지금도 지붕 아래 하얀 방에서는 하녀들이 잠을 잘 것이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깊고 곤한 잠을 잘 것이다.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바도 전혀 없다. 짐가방과 책가방을 달랑 들고 세상을 떠돈다. 원래 호기심이라고는 없다. 집도 없고 유산으로 물려받은 물건도 없고 개도 없다면, 삶이란 본래 어떤 것일까? 그렇지만 적어도 추억은 있을 테지. 그러면 누가 회상하는가? 추억 속에 유년시절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땅 속에 묻힌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 모든 것에 닿을 수 있기 위해서 나이를 먹는 게 틀림없다. 나이든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오늘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가을 아침이었다. 튈르리 공원으로 갔다. 동쪽을 향해 있는 모든 것은 햇빛을 받아 눈이 먼 듯했다. 햇살을 받은 것은 엷은 회색의 커튼과 같은 안개에 덮여 있었다. 희끄무레한 새벽 속에 서 있는 동상들이 아직 그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은 정원 가운데에서 햇살을 쬐고 있었다. 긴 꽃밭에는 온갖 꽃들이 잠에서 깨어나 깜짝 놀란 목소리로 "세상이 온통 붉잖아" 하고 말했다. 그때 샹젤리제로 나 있는 골목길을 돌아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남자가 한 명 나타났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것을 겨드랑이에 끼지 않고 걸음 앞쪽으로 짚어나갔다. 처음에는 가볍게 짚었으나 나중에는 때때로 힘을 주어 전령관의 지팡이 같이 소리가 커지기도 했다. 그는 기쁨의 웃음을 억누를 수 없었는지 지나치는 모든 것, 태양과 나무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걸음은 아이가 걷는 것처럼 흔들거렸지만, 옛날의 걸음걸이에 대한 회상에 듬뿍 젖어, 평소와 달리 가벼웠다.
저렇게 자그마한 달이 못하는 일이 없다니. 달 주변에 있는 세상 만물이 투명하고 경쾌하게 보이고 맑은 공기 속에서 세밀하지는 않지만 뚜렷하게 보이는 날이 있다. 바로 가까이 있는 것이 멀리 있는 듯한 색조를 띤다. 그것은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단지 보이기만 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먼 곳과의 관계가 바뀐 것일까? 강, 다리, 길게 뻗은 거리, 아낌없이 확 트인 광장이 비단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먼 곳에 놓여 있었다. 그럴 때면 퐁네프 거리에 서 있는 밝은 녹색의 자동차와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어떤 붉은 물체와 어두운 진주빛 집들의 굴뚝에 덩그러니 붙어 있는 포스터가 얼마나 멋지게 보이는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간결해져서 마치 마네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얼굴처럼 똑바르고 밝은 몇 개의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어떤 것도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이 없다. 강가의 고서점이 가게문을 열고 있다. 산뜻한 노랑색 표지와 빛깔 바랜 누런색 표지의 책, 자주빛이 도는 갈색의 제본과 초록색 대형 화첩, 이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서로 어울려서 부족함이 없는 완전함을 만들어 낸다.
아래쪽 풍경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 여자가 작은 손수레를 밀고 간다. 그 앞에는 오르간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뒤에는 아기 바구니가 비스듬히 놓여 있다. 그 속에서 모자를 쓴 갓난아이가 만족한 얼굴로 서서 앉으려 하지 않는다. 때때로 여자가 오르간을 친다. 그러면 어린 아이는 곧 바구니 속에서 발을 구르고, 초록색 여름 원피스를 입은 작은 소녀가 춤을 추며 창문 쪽을 향해 탬버린을 친다. 보는 법을 배우기로 한 지금,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내 나이 스물 여덟, 이루어 놓은 일이 없다. 카르파치오에 관한 논문을 썼지만, 그것은 엉망이었다. 희곡 "결혼"은 애매한 수법을 사용하여 무언가 잘못된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리고 시들. 아, 하지만 젊어서 쓴 시란 별 것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기다려야만 한다. 평생을 두고, 가능하면 오래 살면서 세상사의 의미와 달콤함을 주워 모아야 한다. 그런 후에라야 아마도 훌륭한 열 줄의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감정(그것을 예전에 족히 가졌었다)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를 보아야만 하고,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느껴야만 하고, 작은 꽃들이 아침이면 만들어 내는 몸짓들을 알아야만 한다. 낯선 지방의 길을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기대치 못한 만남과 오랜 시간 후에 맞게 될 이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 해명되지 않은 어린 시절, 아이를 기쁘게 하고도 이해를 받지 못했을 때 마음 상했을 것이 틀림없는 부모님(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기쁨이었다), 너무나 심각하고 중대하게 변화하면서 아주 이상하게 시작하는 어린 날의 질병, 쥐죽은 듯 조용한 방에서 보낸 날들, 바닷가에서의 아침, 바다의 일반적인 광경들, 숱한 바다들, 바스락거리며 별과 함께 높이 날아간 여행의 밤들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랑의 밤에 대한 추억과 산고의 외침에 대한 기억과 산고를 치른 뒤 가볍고 하얗게 잠든 산모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죽어 가는 사람의 곁에도 있어야 할 것이고, 창문이 열려 있어 이따금 덜컹거리는 방에서 죽은 사람 옆에 앉아 밤을 지새운 적도 있어야 한다. 여러 가지 추억을 가졌다고 해서 충분한 것도 아니다. 추억이 많다면 잊을 수 있어야 하고 그 추억이 되살아올 때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추억 자체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추억이 우리 마음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이 되고, 몸짓이 되어, 그 이름을 읽고 우리와 더 이상 나뉘어지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아주 드물게 추억의 한가운데에서 시의 첫 단어가 일어나 추억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나의 모든 시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생겨났다. 그러므로 시라고도 할 수 없다. 희곡을 쓸 때도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는지 모른다. 서로의 삶을 힘겹게 만드는 두 사람의 운명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제삼자를 필요로 할 정도로, 나는 모방자이고 바보였단 말인가? 너무나도 쉽게 실패했다. 어떤 삶이나 문학에서도 나오지만, 결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 제삼자라는 환영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틀림없이 이를 거부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제삼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주의를 그 심오한 비밀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항상 애쓰는 자연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제삼자는 희곡의 진행을 가리고 있는 칸막이와 같다. 그것은 진짜 갈등이 소리 없는 침묵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소음이 된다. 사람들은 문제가 되는 두 사람에 관해 말하는 것이 지금까지 누구에게나 아주 힘든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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