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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7호 2022.12.30 금요일 (음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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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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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성공적으로 다루는 비결은 그 부모가 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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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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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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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 김수영
地上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소음도 번쩍인다
여름은 이래서 좋고 여름밤은
이래서 더욱 좋다
소음에 시달린 마당 한구석에
철늦게 핀 여름장미의 흰구름
소나기가 지나고 바람이 불듯
하더니 또 안 불고
소음은 더욱 번성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아끼는 날
소음이 더욱 번성하다 남은 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던 날
소음이 더욱 번성하기 전날
우리의 소음은 언제나 二층
땅의 二층이 하늘인 것처럼
이렇게 人情의 하늘이 가까워진
일이 없다 남을 불쌍히 생각함은
나를 불쌍히 생각함이라
나와 또 나의 아들까지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다 남은 날
땅에만 소음이 있는줄만 알았더니
하늘에도 천둥이, 우리의 귀가
들을 수 없는 더 큰 천둥이 있는줄
알았다 그것이 먼저 있는줄 알았다
地上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도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다
<1967.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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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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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경지수(明鏡止水)
明:밝을 명. 鏡:거울 경. 止:그칠 지. 水:물 수.
[출전]《莊子》〈德充符篇〉
맑은 거울과 조용한 물이라는 뜻으로, 티없이 맑고 고요한 심경을 이르는 말.
《장자(莊子)》〈덕충부편(德充符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에 왕태라는 학덕이 높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교의 비조(鼻祖)인 공자와 맞먹을 만큼 많은 제자들은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인 상계(常季)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 올자(兀者)는 어째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를 받고 있는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그분의 마음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거울 대신 비쳐볼 수 있는 물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가만히 정지(靜止)해 있는 물이니라.”
또 같은〈덕충부편〉에는 이런 글도 실려 있다.
“거울에 흐림이 없으면 먼지가 앉지 않으나 먼지가 묻으면 흐려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오랫동안 현자(賢者)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맑아져 허물이 없어진다.”
[주] 올자 : 형벌(刑罰)에 의해 발뒤꿈치를 잘린 불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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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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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11장 재편되는 북방
4. 민심은 떠나건만...
여희의 발악
여희가 병들어 누워 있는 진헌공 앞에 앉아 눈물을 찔끔거리며 말했다.
"상감은 전처의 자식 복이 없어 엄청난 꼴을 당하셨고 그래서 친척들까지 추방하고 첩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셨습니다. 만일 상감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첩은 여자 몸이며 해제는 아직 어리니 만일 다른 공자들이 타국의 힘을 빌어 쳐들어온다면 첩은 누굴 믿고 살아야겠습니까."
진헌공이 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인은 너무 근심마오. 태부 순식이 있으니. 그는 충신이라. 원래 충신은 두 가지 마음을 품지 않소. 내 어린 세자를 그에게 부탁하겠소."
다시 진헌공은 순식을 불렀다.
"과인이 듣건대 선비의 근본은 충(忠)과 신(信)이라 하니, 무엇을 충과 신이라고 하오?"
순식이 대답했다.
"전력을 다하여 주인을 섬기는 것을 충이라 하며, 죽을지언정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을 신이라고 합니다."
"과인은 어린 세자를 태부에게 부탁하오. 태부는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마오."
순식이 울며 머리를 조아렸다.
"어찌 목숨을 걸고 신하된 자로서 충성을 바치지 않으리이까."
진헌공도 추연히 눈물을 흘렸다. 이 때 여희의 흐느껴 우는 소리도 장막 뒤에서 일어났다. 수일이 지난 뒤 진헌공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여희는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원래부터 심성이 강한지라 재빨리 헤아려 해제의 손을 잡고 나아가 어린 아들을 순식의 앞으로 보냈다. 이 때 해제의 나이가 겨우 11살이었다. 순식은 주공의 유명대로 해제를 상주로 모셨다. 모든 신하들은 자기 위치에 각기 자리를 잡고 임금의 죽음을 조상하는데 그 울음소리가 공허했다. 여희는 진헌공의 유명대로 순식에게 상경 벼슬을 내리고, 양오, 동관오에게 좌우 사마의 벼슬을 가하는 동시,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국내를 순행하게 하는 한편 장차 변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시켰다. 그리고 모든 일은 일단 순식의 결재를 받아 실행하도록 분부했다. 그리고 다음 해를 새 군주의 원년으로 삼고, 모든 나라 제후에게 부고를 보냈다.
해제의 죽음
순식이 공자 해제를 상주로 세우고 발상하자, 모든 신하들은 궁 안으로 들어가서 곡했다. 그런데 노대신 호돌만은 병들었다 핑계하고 자리에 누워 궁중에 가지 않았다. 이극이 비정부에게 물었다.
"해제가 군위에 오르면 망명중인 두 공자는 장차 어찌 되는 것이오?"
비정부가 대답했다.
"워낙 이 일은 순식의 생각 여하에 매여 있소. 그러니 우리 함께 가서 순식의 속마음을 알아봅시다."
이극과 비정부는 한 수레에 같이 타고 순식의 부중으로 갔다. 순식은 마침 부중에 있어 그들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했다. 이극이 곧바로 물었다.
"주상은 세상을 떠나셨고, 중이, 이오 두 공자는 타국에 있고, 그대는 지금 이 나라 대신이 되었소. 이제 장자인 중이를 모셔다가 군위에 모시지 않고 첩의 소생을 세우면 어느 누가 복종하겠소. 또 두 공자의 일당은 여희 모자 때문에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소. 이제 주상께서 세상을 버렸으므로 그들은 반드시 귀국하여 군위에 오를 계책을 세울 것이오. 마침내 진, 책 두 나라가 밖에서 두 공자를 후원하고 백성들이 국내에서 응한다면 그 대는 장차 어찌하려오?"
순식이 대답했다.
"나는 선군의 부탁을 받고 해제의 스승이 되었던 것이오. 나는 그 외의 것은 모르오. 만일 다른 사람들이 끝까지 나를 반대한다면 나야 별수 없이 죽음으로써 선군의 은혜에 보답할 결심이오."
비정부가 순식의 말을 듣고 딱하다는 듯이 곁에서 충고했다.
"그래서 목숨을 바치면 뭘 하오. 나라를 위해서라도 생각을 돌리도록 하시오."
비정부는 강경하게 주장했다. 그러자 순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이미 충(忠)과 신(信)을 선군께 맹세했소. 비록 죽는 것이 아무런 이익도 없을지언정 어찌 선군과 언약한 맹세를 저버릴 수야 있겠소."
두 사람은 거듭거듭 권했으나 순식의 결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설득하는 일을 포기하고 순식의 부중을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서 이극이 비정부에게 말했다.
"나와 순식은 오랫동안 교류하여 서로를 잘 아는 터이므로 이해로써 거듭 충고했건만 그렇듯 고집을 부리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비정부가 말했다.
"그는 해제를 섬기고 우리는 중이를 섬기니, 피차 결심이 각각 다를 뿐이오. 일이 이쯤 된 바에야 세상에 해서 못할 일이 또 어디 있겠소."
비정부와 이극은 무엇인지 심각한 표정으로 비밀히 서로 속삭였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심복 부하인 역사 한 사람을 불러들여 뭔가 지시를 내렸다. 이튿날 그 역사는 변장하고 시위 졸개들 속에 끼어 궁중으로 들어갔다. 시위 졸개로 가장한 역사는 날카로운 단검을 숨기고 댓돌 아래서 잔심부름을 하며 바로 빈청 위에 있는 어린 상주인 해제를 노렸다. 어린 해제가 곡을 하려고 짚방석 위로 엎드렸을 때였다. 역사는 순간 나는 듯이 빈청으로 뛰어 올라가며 품에서 비수를 뽑아 들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었다. 어린 해제는 역사의 칼을 등에 맞고 곡소리 대신 죽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역사는 해제의 등에 찌른 칼을 뽑아 다시 뒷덜미를 찍었다. 쓰러진 해제는 짚방석 위에 피투성이가 되어 고꾸라졌다. 이를 본 시신(侍臣)이 그제서야 무기를 들고 역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한갓 시신의 서툰 솜씨로 어찌 역사를 당적할 수 있으랴. 시신은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역사의 칼에 맞아 죽었다. 상막 안은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이 때 순식은 이미 곡을 마치고 궁을 나가려다가 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놀라 황망히 빈청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리고 피투성이 해제의 시체를 쓰다듬으면서 그야말로 대성 통곡했다.
"내 선군의 부탁을 받고 능히 세자를 보호하지 못했으니 이는 다 나의 죄로다."
순식은 일어나 죽기를 결심하고 대궐 기등에다 자기 머리를 짓찧었다. 이를 본 양오가 급히 달려들어 순식을 말렸다. 한편 여희는 슬그머니 음욕이 동하는지라 우시를 데리고 뒷방 밀실로 가서 한바탕 재미를 보고 옷도 아직 안 입었을 때였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래서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달려나오는데, 머리에 피를 흘리며 사람들에게 부축되어 오는 순식과 마주쳤다. 순식이 울면서 외쳤다.
"세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선군의 유명을 못 지켰으니 부인 뵐 면목이 없소."
여희는 금세 어찌된 상황인지를 알아챘다. 여희가 말했다.
"임금의 널이 아직 궁중에 계시는데 대부는 어찌 자기만 생각하시오. 해제는 비록 죽었지만 아직 탁자가 있으니 대부는 그를 돕도록 하오."
이날 순식은 상막을 잘 호위하지 못했다 해서 졸개 수십 명을 죽이고, 즉시 백관과 함께 회의를 열어 탁자를 군위에 올려 모셨다. 이 때 군위에 오른 탁자의 나이가 겨우 아홉 살이었다. 해제를 죽이게 한 이극과 비정부는 시치미를 떼고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회의가 열리자 양오가 주장했다.
"이번에 세자가 살해당한 것은 이극과 비정부 두 사람의 간계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세자의 원수부터 갚아야 합니다. 그들만이 이 회의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만 보아도 그들의 죄상은 명백합니다. 청컨대 병사를 거느리고 그 두 사람부터 쳐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순식이 대답했다.
"그 두 사람은 우리 진나라 노대신이며 그들의 당은 뿌리를 깊이 박고 있소. 그러니 우리가 섣불리 그들을 쳤다가 이기지 못하면 낭패요. 우리도 모르는 체 내색 말고 내버려 두어 그들을 안심시킨 뒤에 천천히 기회를 보아 일을 도모합시다. 우선 상례부터 마치고 개원하여 새 임금의 군위부터 바로잡고, 그리고 밖으로 이웃 나라들과 친선 우호를 맺고 안으로 그들의 당을 분산시킨 연후에 기회를 보아 일을 시작해야 하오."
양오는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동관오에게 은밀히 말했다.
"순식은 충성은 대단하지만 꾀가 없는 사람이오. 먼저 할 일과 뒤에 할 일을 분별하지 못하니 앞으로 모든 걸 걸고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이극은 우시의 말을 듣고 신생의 일에 대해서도 모른 척하겠다는 겁쟁이입니다. 그러니 이극을 없애 버리기는 매우 쉬운 일일 것이오. 그러고 나면 비정부 따위야 저절로 시들어 버릴 것이오."
동관오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극을 없애 버릴 수 있을까요?"
"장사 지낼 날이 멀지 않았으니 무장병을 그날 동문 밖에 매복시켰다가 이극이 상여를 전송하러 나오거든 그 때 갑자기 덤벼들어 처치해 버리면 이극쯤이야 한 사람의 힘으로도 넉넉하오."
"음, 그렇다면 내게 좋은 수가 있소. 내가 데리고 있는 자로서 도안이란 인물이 있소. 그 인물은 능히 삼천 근의 무게를 등에 지고 땅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빨리 달음박질을 할 수 있는 천하 장사요. 그 인물에게 좋은 벼슬 한 자리를 주기로 약속하면 능히 부릴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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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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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비밀이야 - 윤영옥(여. 경기도 용인시 남동)
두 분은 고3의 비애를 알고 계십니까? 새벽 5시 30분이면 새벽별 한 번 바라볼 새 없이 버스를 타야 하고 열아홉 소녀 엉덩이보다 작은 의자에 의지해서 밤 11시까지 앉아 있어야 하는 고충을요. 졸면서 차를 타고 집에 오면 새벽 0시 30분, 씻고 눈 한 번 깜짝거리면 다시 새벽 4시, 이런 고3의 슬픔을 알고 계십니까. 아! 옛날에 춘향이는 2X8=16세에 이몽룡과 뜨거운 사랑을 했다던데, 춘향이보다 언니인 저는 근처에 있는 남학생 얼굴 쳐다볼 새도 없습니다. 정말 대학이라는 곳은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인가 봅니다. 거기다 저희 사부님들은 칠판에 온갖 아리송한 글씨를 써놓으시곤 이렇게 말하시는 겁니다.
"이거 모르면 죽어야 합니다."
"여자는 딱 두 가지입니다. 공부가 뛰어나거나, 얼굴이 뛰어나거나..."
그리고선 이내 저희들을 둘러보시고 이렇게 말하시죠.
"자, 공부합시다."
또 고3의 슬픔은 학교의 온갖 행사에서 열외된다는 것입니다. 체육대회, 학교축제, 방학, 일요일까지 반납하고 학교에서 가장 한적한 4, 5층으로 유배된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창문 밑으로 보이는 1, 2학년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련한 그 시절을 떠올리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그 애들에게도 다가올 고3을 생각하며 홀로 중얼거려도 봅니다.
"너희도 멀지 않았어."
하지만 인생은, '슬픔과 기쁨이 함께 한다'라는 제 말처럼 슬픔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기쁨도 있답니다. 고3이 되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기가 바쁘게 엄마가 말하셨습니다.
"씻으면서 양말 스타킹 빨아라."
그러나 고3이 되면서부터는 들어가기가 바쁘게 엄마는 말하십니다.
"피곤하니까 어여 씻고 자."
그리고 성적표가 나와도 별보고 나왔다 별보고 들어가니까 잔소리 들을 새도 없어 좋은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수업시간에 가끔씩 졸아도 측은한 눈길로 쳐다보시는 선생님께선 이렇게 말해주시기도 한답니다.
"침이나 닦고 주무세요."
그리고 학교측에서는 고3 전용 화장실까지 4층에 만들어 주셨다 이겁니다. 뭐, 화장실 갈 시간도 아껴서 공부해라 이거겠지만요. 화장실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이야기인데요. 저희 고3 전용 화장실을 저희 수업 중에 선생님들께서 이용하신다는 소문이 있답니다. 선생님 화장실은 1층에 있는데 급해서 그러신지 아니면 선생님들께서도 촌음을 아껴서 수업준비를 하시려고 그러신지는 몰라도 저희들 3학년 화장실을 이용하신다 이겁니다. 소문은, 1학년 때 음악 특활시간에 음악 선생님께 찾아와 "여기가 딴따라 부서인가요?"하고 물었다가 사정없이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일명 엉뚱이란 친구에게서 나왔습니다. 참, 엉뚱이는(체면을 생각해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음) 3학년에 올라와서도 지각을 자주 해서 항상 헐레벌떡 뛰어오는 아이인데, 한번은 교복 코트만 입고 치마는 입고 오지 않아서 유명해진 아이랍니다. 하루는 엉뚱이가 점심 먹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5교시 수업 중에 화장실로 뛰었답니다. 화장실에서 뱃속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들을 힘을 줘서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데 화장실에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조심스런 목소리로 "누구 있어요?"하고 사전답사의 목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우리의 엉뚱이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드롱이(아랑드롱을 닮아서)'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고는 숨을 죽였답니다. 급한 일도 참구요. 아무 소리가 없자 드롱이 선생님은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와 볼일을 보시는데 정말 들어주기 민망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랍니다. 부스럭거리면서 쟈크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뒤이어 '뿌다다닥' 갑자기 오토바이 달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남자도 애를 낳는구나!' 실제 산고의 고통소리가 비명처럼 들리더랍니다. 이에, 우리의 친구 엉뚱이는 제자된 도리로 '더 이상은 선생님의 치부를 알아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신음을 하고 계시는 옆칸의 드롱리 선생님께 '선생님 저 여기 있어요.' 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답니다. 그러자 갑자기 신음이 뚝 멈추고 한동안 안정적이 찾아오더니 부스럭거리면서 쟈크 올리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엉뚱이는 선생님 보기가 민망해서 화장실 문을 살짝 열고 밖을 바라보면서 선생님이 나가시기만 기다렸답니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옆칸에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신 드롱리 선생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시며 세면대 앞으로 가시더래요. 그리고 마침 그곳에서 손을 씻고 있는 같은 반 친구 소실이에게 다가서서 멋쩍게 웃으시더니 한 손을 입에 대고 이렇게 조용히 말씀하셨답니다.
'비밀이야.'
영문을 모르던 소실이는 엉뚱이에게 '비밀이야'의 비밀을 듣고는 학교 내의 소문으로 퍼졌습니다. 드롱리 선생님을 흠모하던 친구들은 경악을 하면서 믿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와 같이 밀어내기 같은 일을 하실 분이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증인이 있는데 어쩌겠습니까. 대학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우리는 수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런 제한된 공간에서도 비밀은 생기고 있답니다. 제 친구들은요 대학이라는 곳은 '큰 학'이라고도 하고, '공자가 지은 사서의 하나'라고도 하지만 대학은 '대단히 학수고대 하던 곳'이기도 하지요. 또 고3인 제가 오후 11까지 학교에 남아 있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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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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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조지훈편"
조지훈(1920~1968)
시인, 본명은 동탁. 경북 영양 출생. 혜화 전문 졸업. 고려대 교수, 민족 문화 연구소장 역임.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림. 지사풍의 시인으로 알려졌던 조지훈의 시는 회고적 취미, 자연적 친화성, 불교적 선의 감각 등을 그 주요한 바탕으로 삼았다. 엄한 유교적 가정에서 자라난 장자의 기풍이 있었으며 후기에는 시보다 민족 문화의 개발에 주력하였다.
돌의 미학
돌의 맛-그것도 낙목한천의 이끼 마른 수석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달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의 마당 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는 거라든가, 흰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아주 생략되고 추상된 기골이 늠연한 한 덩어리의 물체를 그려 놓고 이름하여 석수도라고 바라보고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흐뭇해진다. 무미한 속에서 최상의 미를 맛보고, 적연부동한 가운데서 뇌성벽력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이 돌의 미학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동양화, 더구나 수묵화의 정신은 애초에 사실이 아니었다. 파초 잎새 위에 백설을 듬뿍 실어 놓기도 하고, 10리 둘레의 산수풍경을 작은 화폭에다 거두기도 하고, 소쇄한 산봉우리 밑, 물을 따라 감도는 오솔길에다 나무꾼이나 산승이나 은자를 그리되, 개미 한 마리만큼 작게 그려 놓고 미소하는 그 화경은 사실이기보다는 꿈을 그린 것이었다. 이 정신이 사군자, 석수도, 서예로 추상의 길이 달린 것이 아니던가?
괴석이나 마른 나무 뿌리는 요즘의 추상파 화가들의 훌륭한 오브제가 되는 모양이다. 추상의 길을 통하여 동양화와 서양화가 융합의 손길을 잡은 것은 본질적으로 당연한 추세라 할 수 있다. '살아 있다'는 한 마디는 동양미의 가치 기준이거니와, 생명감의 무한한 파동이 바위보다 더한 것이 없다면 웃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돌의 미는 영원한 생명의 미이다. 바로 그것의 추상이다. 내가 돌의 미를 처음 맛본 것은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바라본 그 바위에서부터였다. 선사의 다실에 앉아 내다본 정원의 돌이었다. 나의 20대의 일이다. 나는 한때 일본 경도의 묘심사에서 선에 든 적이 있었다. 1천7백 측 공안을 차례로 깨쳐 간다는 지극히 형식화된 일본선은 가소로웠지만, 선의 현대화를 위해선 새로운 묘미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사뭇 유도처럼 메다꽂기도 하고, 공부가 모자라 벌을 설 때는 한겨울이라도 마당에 앉혀 놓고 밤을 새워 좌선을 강행시키는 그 수련에서 준열한 임제종풍의 살활검의 고조를 볼 수 있던 일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이 선의 수행에서 싫증이 났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다실에 가서 다도를 즐기며 정원을 내다보는 것이 낙이 되었다. 일본의 정원 미술은 다실과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다도는 선과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묘심사에는 다도의 종장 한 분이 있었다. 나는 가끔 이 노화상과 대좌하여 다도를 즐기며 화경청적의 맛을 배우곤 하였다. 녹차를 찻종에 넣는 작은 나무 국자를 찻종 전에다 땅땅땅 두드리는 것은 벌목정정의 운치요, 찻주전자를 높이 들고 소리 높여 물을 따르는 것은 바로 산골의 폭포 소리를 가져오는 것이라 한다. 일본 예술의 인공성-그 자연을 비틀어 먹는 천박한 상징의 바탕이 여기 있구나 싶어서, 나는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빈객으로서 다완을 받아 좌우의 사람에게 인사하는 법에서부터 잔을 들고 마시는 법, 나중에 골동으로서의 다완을 감상하며 주인을 추어 주는 법을 배웠다--다완이 고려 자기인 경우에는 주인의 어깨가 으쓱해진다. 이 사장이 시키는 대로 차를 권하는 주인으로서의 예의 작법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그것뿐이다. 나는 그 다도에도 흥미가 없었고, 그 뒤에 이 다도를 스스로 행해 본 적도 없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 다실에 자주 놀러 간 것은 사장과 더불어 파한으로 농담의 선문답을 하는 재미에서였다. 실상은 그것보다도 다실의 정적미에 매료되었다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다. 아담한 정원을 앞에 놓은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이 다실은 무척 맑고 따뜻하였다. 미닫이는 젊은 중들이 길거리에서 주워온 종이를 표백하여 곱게 바른 것이어서 더욱 운치가 있었다. 나중에는 이 다실에 사장과 대좌해도 피차 무언의 행을 하는 사이가 었다. 이럴 때 항상 내 눈을 빼앗아 가는 것은 정원 가장귀에 놓인 작은 바위기가 일쑤였다. 나의 선은 이 이끼 앉은 바위를 바라보며 시를, 민족을, 죽음을 화두로 삼고 있었다. 바위는 그 어떠한 문제에도 계시를 주는 성싶었다. 잔디 속에 묻혀 있는 불규칙한 징검돌은 사념의 촉수를 어느 방향으로든 끌고 비약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서도 다도도 아닌 돌의 미학을 자득하여 가지고 이 이방의 절을 떠났던 것이다. 떠나던 전날 사장은 7, 8명의 귀족 영양을 불러 다회를 열고 젊은 방랑객을 전별하였다. 그것도 이른바 인연인지 모른다. 그 1년 뒤 나는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불교 전문 강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거기서 나는 우리의 선과 우리의 돌의 진미를 맛보게 되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월정사의 동향한 1실은 창만 열면 산이요 숲이 있고, 밤이면 물 소리 바람 소리가 사철 가을이었다. 여기서 보는 바위는 인공으로 다스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암석이었다. 기골과 풍치가 사뭇 대륙적이요, 검푸르고 마른 이끼가 드문드문 앉은 거창한 것이어서 묘심사의 인공적이요 온아적정하던 돌과는 그 맛이 판이하였다. 일진의 바람을 몰고 홀연한 자세로 부동하던 그 바위의 모습은 나의 심안의 발상을 다르게 하였다. 나는 여기서 1년 동안 차보다도 술을 마셨고, 나물만 먹는 창자에 애주무량해서 뼈만 남은 몸이 되어 내가 스스로 바위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의 선도 상심낙사하는 화경청적의 다선에서 방우이목우하는 불기분방의 주선이 되고 말았다.
오대산은 동서남북 중대에 절이 있다. 서대절은 초옥수간 잡풀이 우거진 마당에, 누우면 부처도 없는 곳에 향을 사르고 정에 들어 있는 선승은 사람이 온 줄도 몰랐다. 그를 구태여 깨울 것이 없었다. 그름을 바라보고 새 소리를 들으면, 1천7백 측 공안이 아랑곳없이 나도 그대로 현묘지경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대산 상원사에는 방한암 종정이 선연을 열고 있었다. 이따금 마음이 내키면 나는 그 말석에 참하였다.
구름 노을 깊은 골에
샘물이 흐르느니
우짖는 산새 소리
길이 다시 아득해라.
일 없는 늙은 중은
바위 아래 잠든 것을
청천백일에
꽃잎이 흩날린다.
좌선을 쉴 때면 역시 바위를 내다보며 시를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바위를 내다보는 것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우리 선방에도 차를 마신다. 오가피차나 맥차, 그것도 아무런 형식이 없이 아주 자유롭고 흐뭇하게 둘러앉아 농담을 나누면서 마시는 폼이 까다롭지 않아서 별취였다. 창을 열면 산이 그대로 정원이요, 소동파의 '계성편제황장활산색기비청정신'이라는 시구 그대로 화엄의 세계였다. '차는 찬데 왜, 뜨거울까'-차와 차다의 동음을 이용하며 농담선문을 나에게 던지는 노승이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예, 보라찹니다'라고 대답한다. 역시'보리와 보리'의 동음을 이용한 것--이쯤 되면 농담도 선미가 있어서 파안대소였다. '풍려열뇌증삼계 법우주오대'의 귀로 연구에 끼이기도 하던 월정사의 생활도 미일 전쟁이 터지고 싱가포르가 함락되고 하면서부터는 숨어서 살 수 있는 암혈은 아니고 말았다. 과음의 나머지 나는 구멍 뚫린 괴석과 같은 추상의 육체를 이끌고 오대산을 떠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월정사는 6.25동란에 회신했다 한다. 내가 거처하던 동향일실--방우산장도 물론 오유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젊은 꿈이 깃든 숲 속의 그 바위는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다. 인세의 풍상에 아랑곳없는 것이 아니라, 그 풍상을 사람으로 더불어 같이 열력하면서 변하지 않는 데에 바위의 엄위와 정다움이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돌에도 피가 돈다. 나는 그것을 토함산 석굴암에서 분명히 보았다. 양공의 솜씨로 다듬어 낸 그 우람한 석상의 위용은 살아 있는 법열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인공이 아니라 숨결과 핏줄이 통하는 신라의 이상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 신라인의 꿈 속에 살아 있던 밝고 고요하고 위엄 있고 그러운 모습에 숨결과 핏줄이 통하게 한 것은, 이 불상을 조성한 희대의 예술가의 드높은 호흡과 경주된 심혈이었다. 그의 마음 위에 빛이 되어 떠오른 이상인의 모습을 모델로 삼아 거대한 화강석괴를 붙안고 밤낮을 헤아림 없이 쪼아 내고 깎아 낸 끝에 탄생된 이 불상은 벌써 인도인의 사상도 모습도 아닌 신라의 꿈과 솜씨였다. 석굴암의 중앙에 진좌한 석가상은 내가 발견한 두 번째의 돌이다. 선사의 돌에서 나는 동양적 예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지혜의 돌이었다. 그러나, 석굴암의 돌은 나에게 한국적 정감의 계시를 주었다. 그것은 예술의 돌이었다. 선사의 돌은 자연 그대로의 돌이었으나, 석굴암의 돌은 인공이 자연을 정련하여 깎고 다듬어서 오히려 자연을 연장 확대한 돌이었다. 나는 거기서 예술미와 자연미의 혼융의 극치를 보았고, 인공으로 정련된 자연, 자연에 환원된 인공이 아니면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예술은 기술을 기초로 한다. 바탕에 있어서는 예술이나 기술이 다 art다. 그러나 기술이 예술로 승화하려면 자연을 얻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공을 디디고서 인공을 뛰어넘어야 한다. 몸에 밴 기술을 망각하고 일거수 일투족이 무비법이 될 때 예도가 성립되고, 조화와 신공이 체득된다는 말이다. 나는 석굴암에서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돌에도 피가 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 앞에서 찬탄과 황홀이 아니라 감읍하였다. 그것이 불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 예술의 한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이고 그 자비로운 입 모습과 수렷이 내민 젖가슴을 우러러보았고, 풍만한 볼기살과 넓적다리께를 얼마나 어루만졌는지 모른다.
내가 석굴암을 처음 가던 날은 양력 4월 8일, 이미 복사꽃이 피고 버들이 푸른 철에 봄눈이 흩뿌리는 희한한 날씨였다. 눈 내리는 도화불국-그 길을 걸어가며, 나는 '벽장운외사 홍로설변춘'의 즉흥 1구를 얻었다. 이 무렵은 내가 오대산에서 나와서 조선어 학회의 "큰 사전" 편찬을 돕고 있을 때라 슬프고 외로울 뿐 아니라, 그저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을 때였다. 이 때에 나는 신앙인의 성지 순례와도 같은 심정으로 경주를 찾았던 것이다.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신라는 서구의 희랍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피가 돌고 있는 석상에서 영원한 신라의 꿈과 힘을 보고 돌아왔다.
돌에는 맹렬한 의욕, 사나운 의지가 있다. 나는 그것을 피난 때 대구에서 보았다. 왕모래 사토길 언덕에 서 있는 집채보다 큰 바위였다. 그 옆에는 삐쩍 마른 소나무가 하나--송충이가 솔잎을 다 갉아먹어서 하늘을 가리울 한 점의 그늘도 지니지 못한 이 소나무는 용의 비늘을 지닌 채로 이미 상당히 늙어 있었다. 또, 그 옆에는 이 바위보다도 작은 판잣집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이 살풍경한 언덕길을 가끔 나는 석양배에 취하여 찾아오곤 하였다. 그 무렵은 부산에서 백골단 땃벌 떼가 나돌고 경찰이 국회를 포위하여 발췌 개헌안을 강제 통과시키던 소위 정치 파동이 있던 임진년 여름이다. 드물게 보는 가뭄에 균열된 논 이랑에서 농부가 앙천 자실한 사진이 신문에 실릴 무렵이었다. 그저 목이 타서 자꾸 막걸리를 마셨지만, 술이란 원래 물이긴 해도 불기운이라서 가슴은 더욱 답답하기만 하였다. 막걸리집에 앉아 기우문을 쓴 것도 무슨 풍류만이 아니었다. 이 무렵에 나는 이 사나운 의지의 돌을 발견하였다. 이 세 번째 돌은 혁명의 돌이었다. 그 바위에는 큰 나방이가 한 마리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꾸만 열리지 않는 돌문 앞에 매어달려 울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주먹으로 꽝꽝 두드려 보면, 그 바위는 무슨 북처럼 울리는 것도 같았다. 이 석문을 열고 들어가면 맷방석만한 해바라기 꽃송이가 우거지고 시원한 바다가 열려지는 딴 세상이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이 바위 앞에서 바위의 내력을 상상해 본다. '태초에 꿈틀거리던 지심의 불길에서 맹렬한 폭음과 함께 퉁겨져 나온 이 바위는 비록 겉은 식고 굳었지만, 그 속은 아직도 사나운 의욕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라고--. 그보다도 처음 놓여진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풍우상설에 낡아 가는 그 자체가 그지없이 높이 보였다. 바위도 놓여진 자리에 따라 사상이 한결같지 않다. 이 각박한 불모의 미가 또한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성북동은 어느 방향으로나 5분만 가면 바위와 숲이 있어서 좋다. 요즘 낙목한천의 암석미를 맘껏 완상할 수 있는 나의 산보로는 번화의 가태를 벗고 미지의 진면목을 드러낸 풍성한 상념의 길이다. 나는 이 길에서 지나간 세월을 살피며, 돌의 미학, 바위의 사상사에 침잠한다. 내가 성북동 사람이 된 지 스물세 해, 그것도 같은 자리 같은 집에서고 보니, 나도 암석의 생리를 닮은 모양이다. 전석불생태라고 구르는 돌에 이끼가 앉지 않는다는 것이 암석미의 제1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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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 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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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3부 국어공부, 무엇이 문제인가
논술시험, 무엇이 문제인가
어떤 말로 써야 하나?
논술, 곧 주장하는 글은 어떤 말로 써야 하나 하는 것은 앞에서 충분히 말해 놓았다. 여기서는 신문에 잘 쓴 작품으로 뽑힌 학생들의 글을 가지고 좀 생각하고 싶다. 내가 만약 시장이 된다면 이란 논제가 있었는데, 이 논제에서 한문글자로 시장 이라 쓴 것 말고는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말이다. (왜 한글로 시장이라 쓰면 될 것을 한문글자를 고집해서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제목은 초등학생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같은 제목이라도 초등학생이 쓰는 것과 고등학생이 쓰는 것은 많이 다르다. 초등학생이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내가 시장이 된다면 .. 하고 쓸때에는 현실보다도 재미있는 상상의 세계에서 마치 동화속의 살미이 된 기분으로 쓰는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생은 그럴 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현실이라고 생각해서 시장이 할 일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제목으로 쓰게 되면 초등학생보다 고등학생이 더 어렵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최우수작에 뽑힌 글이다.
내가 만일 시장이 된다면 - 전주 전일고 최강
예로부터 전주는 맛과 멋의 도시로 이름이 높았다. 한때 후백제의 수도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도시였지만 지금은 과거의 영화가 잊혀진 지 오래이다. 해방 전에는 전국 6대 도시에 들었지만 산업화 이후 정부의 불평등한 정책으로 이제 전국 14대 도시 안팎 수준이다. 이러한 때에 내가 전주시장이 될 경우 전주의 발전을 위한 공약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시의 경제 능력이 시민의 삶과 직결되는 만큼 전주지역의 경제적 향상에 노력을 기울이겠다. 이제까지 산업 시설의 미비나 정부 정책에서의 소외로 전주는 경제력이 매우 약하다. 따라서 정부 예산의 확대 편성과 각종 기업과 공장 유치를 적극 추진하겠다. 또한 오염되지 않은 수려한 자연 환경과 유서 깊은 문화 유적을 활용해 관광 산업을 활성화시켜 관광 수입을 증진시키겠다. 다음으로 전주는 지방이기에 다른 대도시에 비해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삶의 질이 낮다. 따라서 전주를 멋과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 만들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 전주 대사습 놀이나 풍남제 등의 문화행사를 활성화시키겠다. 또한 시립예술단을 구성하여 예술 관련 행사를 적극 유치하겠다. 즉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문화 정책의 역점을 두겠다. 마지막으로 서해안 시대를 맞아 전주를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는 도시로 만들겠다. 즉 전주를 국제 도시의 위상을 지니도록 각종 부대 시설 및 휴식지, 편익 시설의 건설을 추진하겠다. 또한 계획중인 호남 고속 전철의 전주 통과를 관철시킬 것이며 사회 간접 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려 도시의 교통 상황을 개선하여 국제 도시로서 손색이 없도록 노력하겠다. 전주는 지금 발전과 퇴보의 기로에 서 있다. 이러한 때에 내가 전주 시장이 된다면 경제력 향상, 문화 도시 조성, 서해안 시대 대비라는 공약을 실천해 과거의 번영을 되찾을 뿐 아니라 국제 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을 경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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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제의 유의사항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할 것이라 했고, 때마침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을 선거하는 날을 앞둔 터라, 후보로 나선 사람들이 저마다 선거 공약을 광고하고 있었기에 이런 논술 제목을 내어준 것은 아주 알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글을 보면 글쓴이가 있는 전주시의 행정을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주장을 학생으로서는 아주 놀랄 만큼 잘 해 놓았다. 그런데 문장에서 쓴 말을 살피면 그다지 바람직스럽게 되어 있지 않다. 역시 이것은 학생의 몸에서 우러난 말이 아니고 어른들의 글말이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글은 모두 여섯 문단으로 짜여 있는데, 서론이라 할 첫째 문단에서는 말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실제로 행정을 어떻게 하겠다고 한 둘째 문단부터는 어른들이 사회문제나 행정 문제를 글로 쓸 때 늘 쓰고 있는 한자말체의 말로만 되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해 놓은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다. 이렇게 된 것은 결국 이런 행정 공약이란 것이 진정 자기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시장 후보자들이 다투어 발표해 놓은 것들을 보고 그것을 가려내어 썼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학생으로서는 이 이상으로 할 수 없다. 이래서 논술고사의 근본 문제를 여기서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글에서 좀 어수선하게 되어 있는 말이나, 어른들의 글말이 되어 있는 말들을 대강 들어 보겠다.
전주의 발전을 위한 공약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공약을 말하고자)
직결되는 (바로 이어지는)
산업 시설의 미비나 정부 정책에서의 소외로 (시설이 모자라거나 정부 정책에서 따돌려져)
기업과 공장 유치를 적극 추진하겠다. (공장을 적극 끌어 오겠다.)
수려한 (아름다운,빼어나게 아름다운)
문화 유적을 활용해 (살려)
관광 산업을 활성화시켜 관광 수입을 증진시키겠다. (활발하게 해서 - 올리겠다)
대도시에 비해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대도시에 대면 문화가 뒤떨어져)
풍남제 등의 문화 행사를 활성화시키겠다. (풍남제와 같은 문화 행사를 활발하게 하도록 하겠다. 더욱 풍성한 시민의 잔치가 되도록 하겠다.)
적극 유치하겠다. (끌어들이겠다.)
삶의 질 향상에 (질을 높이는 일에)
역점을 두겠다. (힘을 모으겠다)
전주를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는 (전주가 중심이 되는 일을 하는)
위상을 지니도록 (모습을 지니도록)
각종 부대 시설 및 휴식처, 편익 시설의 건설을 추진하겠다. (여러 가지 딸린 설비와 쉼터, 편리하고 유익한 시설)
교통상황을 개선하여 (사정을 고쳐)
기로에 서 있다. (갈림길에 서 있다)
조성 (만들기)
노력을 경주하겠다.(힘쓰겠다)
행정을 맡은 사람들이 시민들 앞에서 하는 말은 쉬울수록 좋다. 더구나 고등학생이 행정가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면 지금까지 어른들이 해 온 말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바로 학생들이 하는 말로, 책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 입으로 하는 일상의 말로 하고 글도 그렇게 써야 한다. 어른이고 아이고 무슨 말 무슨 글이든지 어려운 말로 쓰고 있는 것은 모조리 가짜고 속임수라고 보면 틀림 없다.
아이들이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은 어른들이 그런 말을 억지로 쓰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어려운 글을 쓰는 것을 어른들의 글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고, 또 바로 문제를 낸 글에서 어려운 말로 지시하기 때문이다. 신문에 나온 논술 연습 문제가 거의 모두 어려운 말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들어 놓은 많은 보기로도 알 수 있지만, 여기서는 지난번 대학입시에서 실제로 나왔던 문제를 두어 두어 가지 들어 보기로 한다.
예시문
소비와 경쟁은 흔히 현대사회의 주요한 특징으로 일컬어진다. 소비는 개인의 물질적, 정신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 체제를 지탱해 주는 삶의 중요한 양식이다. 국가간, 계층간의 심한 소득격차에 의해서 삶의 질과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소비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있다. 현세인들은 거의 어떤 세대보다 풍요로운 소비 위주의 삶을 향유하고 있다. 한편 경쟁의 원칙은 오늘날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거나 기존의 사회조직을 바꾸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우리가 습득한 경험이나 지식의 수명은 계속 짧아질 수밖에 없다. 이제 과거의 험이나 지식에 의해서 설명하기 곤란한 불확실하고 낯선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작성요령
1. 위의 예시문을 참조하고, 다음을 논제로 삼아 논술문을 작성하시오.
논제 :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건강한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2. 아래의 두 논점을 균형있게 관련지어 논술하시오.
논점1 : 소비사회의 문제
논점2 : 경제사회의 문제
유의사항
논제의 성명을 쓰지 말 것
글의 길이는 빈 칸을 포함하여 1,200자 안팎이 되게 할 것.
예시문 속의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지 말 것. (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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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제를 설명한 글에서 고등학생들이 그 뜻을 모르는 낱말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학생들이 알고 있는 말로 적어 놓았다고 해서 잘 되었다고 볼 수 없다. 글을 쓰도록 지시하는 글은, 글을 쓰게 되는 학생들이 보통 입으로 하는 말로, 그런 말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될 수 있는대로 늘상 입으로 지껄이는 쉬운 말로 쓰는 것이 좋다. 그래야 학생들이 쉽게 받아들여 글을 쓰고 싶어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또 낱말 하나하나는 그 뜻을 알지만, 글말이 많이 들어 있으면 글 전체의 뜻을 제대로 잡기가 힘든다. 설혹 애써서 전체의 듯을 잡았다고 해도 이제부터 써야 할 글을 또 그 모양의 글말로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니, 이래서도 못 쓰게 되고, 쓴다고 해도 남의 글 흉내내는 꼴이 되는 것이다. 위의 문제에서 밑줄을 친 말들이, 좀더 쉽거나 깨끗한 우리말로 바꾸어 써야 할 글말이다. 예시문 과 논제 만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서 다음에 다시 써 본다. 밑줄 친 말만 다듬지 않고 다른 말도 더러 고쳤다.
예시문
소비와 경쟁은 흔히 현대사회의 큰 특징이라고 한다. 소비는 사람마다 가진 물질과 정신의 욕구를 채워줄 뿐 아니라, 시장경제의 틀을 지탱해 주는 삶의 중요한 방식(모습)이다. 나라 사이, 계급층 사이에 소득의 차이가 아주 심해서 삶의 바탕과 기본되는 권리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돈이 있는 사람들은 지난날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온갖 물건들을 사 쓰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지난날의 어떤 세대보다 넉넉하게 써 없애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편 경쟁은 오늘날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퍼져가는 모습을 보인다. 경쟁의 대열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배워 얻거나 이미 있는 사회조직을 바꾸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갑자기 달라져 가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배워 얻은 경험이나 지식의 수명은 자꾸 짧아질 수밖에 없다. 이제 지난날의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확실하지 않은 낯선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논제 : 매우 급하게 바뀌어져 가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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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조금 나아진 글이 되지 않았나 싶다. 다음 또 하나.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은 공간적으로는 물론 시간적으로도 고립되어 형성될 수 없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평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보다 나은 미래를 구상하면서 현재를 살아 간다. 과거 - 현재 - 미래의 이러한 유기적 연결성을 논의의 축으로 하여 오늘날 여러분이 야 할 일을 제시하라.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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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제는 무슨 말인지 얼른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몇 번이나 읽게 되는데, 결국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말이다. 왜 이렇게 요란한 말을 늘어놓았는가. 밑줄을 친 것이 일본말법이거나 쉽게 써야 할 말들이지만 그것만 고쳐서는 안되고 글 전체를 새로 써 보았다. 다음에 고쳐 쓴 글과 견주오 보고 글이 얼마나 달이 느껴지는지, 그런데 글뜻이 달라진데가 있는지 살펴보라.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혼자 살 수 없다. 우리는 지난날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에 불려줄 더 나은 앞날의 이러한 긴밀한 연결을 생각하여 오늘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말해 보라.
앞에 적어 놓은 원문에 대면 많이 짧아졌고, 아주 쉽게 읽히는 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것도 대부분 아무 쓸데도 없는 말이다. 꼭 해야 할 말은 마지막에 나오는 말 오늘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적어 보라 하는 것 뿐이다. 다른 말들은 그것을 그렇게 이상한 말로 늘어놓은 것이다. 만약 이 논제를 내가 쓰다면 이렇게 쓸 것이다.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오늘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적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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