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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9호 2022.9.20 (음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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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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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가끔 일어난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게 하자면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 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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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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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1농 합시다
마을 꼬맹이들이 초승달을 쳐다보며 왜 저렇게 생겼냐 묻는다. “하나님이 쓰는 물잔이라 목이 마르면 물을 부어 마신다”고 했다. “정말요?”(이게 끝이면 좋으련만, 엄마한테 달려가 ‘엄마! 하나님이 초승달로 물을 따라 마신대’라며 일러바친다. 헉, 잽싸게 피신.)
인간의 본성 중에서 좋은 게 하나 있다. 뭔가를 ‘잘 못하는 능력’이다. 잘할 수 있는데도, 잘 못하는 능력. 가장 빠른 길을 알면서도 골목길을 돌아 돌아 유유자적하는 능력. 방탄소년단 수준의 춤 실력이 있지만 흥을 돋우려고 막춤을 추고, 더 먹을 수 있지만 앞사람 먹으라고 젓가락질을 멈춘다. 당신도 목발 짚은 사람이 있으면 앞질러 가기가 미안해 걸음을 늦출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의 능력을 덜 발휘하지 않는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새들은 최선을 다해 울고, 고양이는 있는 힘껏 쥐를 잡는다. 너나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회는 야수사회다.
가진 능력보다 잘 못하게 태어났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농담이다. 농담은 심각한 말의 자투리이거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간식이 아니다. 그 심각함과 진지함 자체가 ‘별것 아님(!)’이라 선언하는 것이다. 허세가 아니다. 외려 가난할수록, 나이 들수록, 난관에 처했을수록, 다른 꿈을 꿀수록 ‘실’없고 ‘속’없는 농담은 힘이 된다.
농담을 잘하려면 엉뚱하면 된다. 관행과 법칙과 질서에 비켜서면 된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마음에 사이공간이 생긴다. 거기서 놀면 된다. 다른 세상은 농담으로 앞당겨진다. 우리의 목표는 능력이 아니라, 웃음이다. 즉, 모두의 행복.
말과 유학생
대학은 사시사철 말과 글이 피어나는 꽃시장이다. 그런데 피지 못한 꽃들이 있다. 외국인 유학생.
그들은 강의실의 섬이다. 그림자처럼 뒷자리에 웅크려 앉아 있다. 말을 건네면 웃고 만다. 뭔가를 참아내고 있는 듯하다. 숙제의 첫 문장은 존댓말인데 두 번째 문장부터는 반말이다. 그러다 갑자기 전문가의 글솜씨로 탈바꿈. 자동번역기를 쓰거나 참고자료를 짜깁기한 것이다. 선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대학원생도 적지 않다. 한국 학생에게 유학생의 의견도 들으면서 생각의 지평을 넓히라고 권하지만, 실패한다. 기죽어 있는 학생에게 ‘괜찮다, 천천히 말하라. 한국어가 서툴 뿐 할 말이 없진 않다’는 격려는 무력하기만 하다.
귀찮거나 피하고 싶다가, 성적 처리 기간만 되면 고마운 존재로 바뀐다. 성적의 바닥을 깔아 준다. 대학교육을 망쳐온 상대평가제의 최대 희생양은 유학생들이다. 유학생에게 ‘B’는 꿈같은 학점이다. 한국 학생이라면 ‘성적산출근거’를 묻는 메일을 선생에게 보낼 텐데.
외국인 유학생은 수년에 걸친 등록금 동결로 쪼들린 대학의 가장 손쉬운 수입원이다. 유학생 유치 전쟁은 한국어 실력에 대한 기준을 더욱 낮추었다. 문턱을 낮춰 일단 가게 안으로 들인 다음, 말이 통하지 않는 ‘호갱’을 이리저리 뜯어내곤 나 몰라라!
대학에서 벌어지는 이 제도화되고 관습화된 차별과 무책임의 기원이 한낱 언어 문제라는 게 부끄럽고 한심하다. 자유이용권을 팔고서는 ‘키가 작으니 놀이기구는 못 탄다. 키 작은 건 너의 책임’이라니. 말 때문에 이등 학생을 만드는 건 염치없다. 뽑았으면 책임도 져라. 말을 가르쳐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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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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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洲의 여자 - 김수영
무식한 사랑이 여기 있구나
무식한 여자가 여기 있구나
평안도 기생이 여기 있구나
滿洲에서 解放을 겪고
평양에 있다가 仁川에 와서
六.二五때에 남편을 잃고 큰아이는 죽고
남은 계집애 둘을 다리고
在轉落한 여자가 여기 있구나
時代의 여자가 여기 있구나
한잔 더 주게 한잔 더 주게
그런데 여자는 술을 안 따른다
건너편 친구가 내는 외상술이니까
나는 이 우중충한 막걸리 탁상 위에서
경험과 歷史를 너한테 배운다
무식한 것이 그것들이니까―
너에게서 취하는 全身의 營養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면서 사랑의 復習을 하는 셈인가
뚱뚱해진 몸집하고 푸르스름해진 눈자위가 아무리 보아도 설어 보인다
九八년만에 만난 滿洲의 여자
잊어버렸던 여자가 여기 있구나
한잔 더 주게 한잔 더 주게
그런데 여자는 술을 안 따른다
건너편 친구가 오줌을 누러 갔으니까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는데 流行歌처럼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하는 술
피안도사투리를 마시고 있나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으니
같이 온 친구들 보기도 미안만 한데
옆상에 앉은 술친구들이 경사나 난 듯이
고함을 친다
상제보다 복재기가 더 섧다나
한잔 더 주게 한잔 더 주게
그런데 여자는 술을 안 따른다
건너편 친구가 같이 자러 가자고 쥐정만 하니까
아냐 아냐 오해야 내가 이 여자의 연인이 아니라네
나는 이 사람이 만주 술집에서 고생할 때에
연애편지를 대필해준 일이 있을 뿐이지
허고 더러 싱거운 忠告도 한 일이 있는―
충고는 허사였어 그렇지않어?
十八년 후에 이렇게 뻐젓이 서울의 茶房건너 막걸리집에서 또 만나게 됐으니
하여간 반갑다 潛入한 사랑아 무식한 사랑아
이것이 사랑의 뒤치다꺼리인가보다
평안도 사랑의 덤인가 보다
한잔 더 주게 한잔 더 주게
그런데 여자는 술을 안 따른다
건너편 친구가 벌써 곯아떨어졌으니까
<1962. 8. 下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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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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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난추(駟馬難追)
'駟馬'는 말 네 필이 끄는 수레로써 엄청나게 빠른 것을 비유한다. '駟馬難追'는 이런 駟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難追)로 빠른 것이니, '입조심을 하라'는 뜻이다. '발 없는 말[言]이 천리 간다'는 우리 속담과 같다.
선거철에 상대를 비방하는 流言과 비어(蜚語)의 퍼지는 속도가 TGV(떼제베)보다 빠른 것을 생각할 때 실감나는 警句이다. 原文은 '一言旣出 駟馬難追'(입에서 나온 말은 四頭 마차[駟馬]도 따르기 어렵다)이다. '駟不及說'(駟馬는 혓바닥을 따르지 못한다)도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또, 말이 많은 것을 千言萬語, 그 반대를 一言半句라고 하며, 여러 말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할 때는 一言以蔽之라고 말한다. 孔子는《詩經》에 실린 詩 3백篇에 대해 '一言以蔽之 曰思無邪(한 마디로 나쁜 내용이 없다)'라고 하였다.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고 한다. '자나 깨나 입조심'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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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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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당당하게 요청하라 - 마이클 제프리
내가 지그 지글러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내 저서 <미국의 위대한 연사들>을 위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들의 첫 반응은 이랬다.
"안됩니다, 그분은 너무 바빠요."
나는 대답했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연사들이라는 제목의 책에 지그 지글러가 빠진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일을 꿈도 꿀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 제가 전화를 드렸다는 말을 전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태도였다. 나는 거절을 대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가 내 작품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찬 입지를 취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승낙을 받아냈다.
마이클 헤세
내 치료사가 권했던 '요청 연습'이 또 한가지 있다. 민속 요리점에 가서 엉뚱한 음식을 아주 진지하게 주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멕시코 식당에 가서 프투치니 알프레도(이탈리아 음식)를 주문하거나, 이탈리아 식당에 가서 말했다. "치즈를 얹은 쇠고기 브리토(멕시코 요리)를 주세요." 그리고 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내가 확신을 갖고 주문하자, 웨이트리스는 내 어리석은 실수를 지적하는 대신 나의 현실로 끌려 들어 왔다. 나는 정말 이탈리아 식당에 가서 브리토를 주문했다. 웨이트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가서 확인해볼께요."
그녀는 브리토가 가능한지 주방으로 물으러 갔다. 그리고 돌아와서 그런 요리를 갖고 있지 않다며 사과했다. 내가 확신을 갖고 주문했기 때문에 그녀는 내 현실에 몰입한 것이다. 심지어 엉뚱한 주문을 했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원하고 있다, 요청하라!
당신이 앞으로 무엇인가를 요청할 사람이 당신이 요청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상상해보라. 예를 들어보자. 그들이 다른 이에게 베풀지 않는다면, 곧 심장마비로 죽게 되리라는 통보를 병원에서 지금 막 듣고 왔다고 상상하라. 그들은 의자에 앉아서 생각중이다.
"내가 어떻게 다른 이에게 봉사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당신이 그곳에 나타나서 말한다.
"나는 이번 주에 아파트에서 가구 전부를 옮겨야 해. 그래서 소형트럭을 빌려주고 이사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이번 주 토요일에 나를 도와주겠니?"
그들은 그런 요청을 열렬하게 기다려 왔고, 당신을 그들 문제의 해결책으로 환영할 것을 상상하라.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요청해 줘서 고마워! 나는 봉사할 방법을 찾고 있었어."
이 책을 위하여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을 때, 우리가 반복해서 들었던 반응은 다음과 같다.
"내가 당신에게 요청한 영역을 연구하는데 도와 드릴 기회를 줘서 고맙습니다. 나는 이 인터뷰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라. 오히려 우리가 그들과의 인터뷰로 돈을 벌고, 명성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했다는 흥분에 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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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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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8장 북방 토벌
5. 북벌 성취
답리가의 대패
"심복한 군사 몇 사람을 뽑아 피난갔던 백성으로 가장하고 여러 백성들 틈에 끼어서 먼저 무체성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성 안에서 불을 질러 내응하여라."
관중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순작은 남문을 치고, 연지름은 서문을 치고, 공자 개방은 동문을 치되, 북문만 그대로 남겨 두어 적군의 달아날 길을 일부러 터놓아라."
그리고 관중이 다시 지시했다.
"왕자 성부와 습붕은 두 길로 나누어 북문 밖 적당한 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답리가가 성을 버리고 도망치거든 앞을 끊고 사로잡아서 반드시 대령시켜라."
일일이 지시하고 관중은 제환공과 함께 성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하채했다. 한편 답리가는 겨우 성중의 불을 끄고 백성을 불러들이고, 황화원수에게 군마를 정돈시켰다. 이날 밤은 별들이 유난히 반짝였다. 밤중에 문득 함성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한 군사가 뛰어들어와 고했다.
"제군이 성문 밖을 에워쌉니다!"
황화원수는 제나라 군사가 다 한해(旱海)에서 죽은 줄로 알았다가 뜻밖에 제군이 왔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황화원수는 급히 군민을 휘몰아 성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무체성 안 여러 곳에서 불이 났다. 황화는 사람을 시켜 방화한 놈을 잡도록 했다. 물론 불을 지른 것은 낮에 백성으로 가장하고 성 안으로 들어 온 호아반과 10여 명의 제나라 군사였다. 이들은 불을 지르고 즉시 남문으로 달려가 수문병을 죽이고 성문을 열고 밖에서 기다리던 군사에게 신호하니 제군은 병차를 앞세우고 성 안으로 물밀듯 쳐들어왔다. 사세가 급한 것을 안 황화원수는 답리가를 말에 태우고, 북문 쪽에 제나라 군사가 없는 것을 보고 나서 북문을 열고 달아났다. 그들이 성을 빠져 2리쯤 갔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무수한 횃불이 어둠 속에서 춤을 추고 사방에서 징과 북소리가천지를 진동하듯 일어났다. 답리가는 정신이 아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자 성부와 습붕의 군마가 앞을 막고, 뒤에선 수작과 호아반이 성을 함몰하고 뒤쫓아오지 않는가! 황화원수는 칼을 뽑아들고 이들과 대적했으나 제나라 군사의 창에 찔려 죽고, 답리가는 왕자 성부에게 사로잡혔으며, 올률고는 병사들에게 짓밟혀 죽고 말았다. 먼동이 트니 사방은 언제 처참한 싸움이 있었냐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아침이 되고 대군의 영접을 받으며 제환공은 무체성으로 입성했다. 답리가를 대하에 꿇어앉힌 제환공은 밀로를 원조한 죄목을 꾸짖고 친히 그 목을 치니, 제나라 군사들은 답리가의 목을 북문에 높이 걸었다. 그러고 나서 제환공은 오랑캐를 훈계하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 때 융인 한 명이 들어와 고흑이 답리가와 황화원수를 꾸짖다 죽음을 당한 일을 제환공에게 말했다. 제환공은 고흑의 죽음을 탄식하고, 그 충절을 기렸다.
땅을 탐내지 않다
관중이 제환공에게 아뢰었다.
"이제 북방을 완전히 토벌하시니 주왕실에 공헌하시고, 연나라의 위급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영지, 고죽 두 나라 5백 리가 주인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이 땅은 그냥 놔두면 다시 오랑캐 땅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우리 제나라와 인접해 있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주공께서는 이 땅을 연나라에 주십시오."
제환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연장공이 소문을 듣고서 막 달려왔다. 연장공은 제군의 대승을 높이 평가하며 제환공에게 축하했다. 치하를 받고 제환공이 대답했다.
"과인이 군후의 위급을 구하고자 천리 먼길을 달려와서 다행히 오랑캐를 무찌르고 그들의 땅 5백 리를 얻었습니다. 이 땅을 군후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연장공은 깜짝 놀라 사양했다.
"아닙니다. 우리 연나라는 사직을 보존한 것만으로도 군후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어찌 공까지 가로채겠습니까. 불가한 일입니다."
제환공이 다시 권했다.
"이 북방은 중원에서 먼지라 만일에 다시 오랑캐가 득세하면 모반하기 십상입니다. 군후께서는 이를 헤아려 사양하지 마시오. 이제 동쪽과 서쪽으로 길이 열렸으니 주왕실에도 공헌하시고 북방의 방패가 되시어 중원의 번영을 이끄신다면 과인도 큰 영광이 되겠소이다."
연장공은 제환공의 간곡한 당부에 더 사양하지 못하고, 오랑캐 땅 5백 리를 받았다. 제환공은 무체성에서 삼군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그리고 이번 싸움을 도운 무종국(無終國)에게 소천산(小泉山) 일대의 땅을 줬다. 이에 호아반이 먼저 배사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제환공은 군사를 5일간 쉬게 한 후 무체성을 떠났다. 다시 비이계를 건너 석벽 아래서 차량을 내리고 군마를 정돈한 후, 천천히 행진했다. 특히 영지국의 길은 가도 가도 사방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만 남았고, 도처마다 쑥대밭이 되어 버린 싸움터뿐이었다. 제환공은 이 참혹한 풍경에 울적한 심사를 참지 못하여 연장공을 돌아보고 말했다.
"오랑캐 땅 주인이 참으로 무도하여 그 재앙이 초목에까지 미쳤소. 진정으로 다스리는 사람은 그 언행과 태도를 조심하지 않을 수 없구려."
한편 포숙아는 주공이 싸움에 이기어 회군해 온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병사들을 정돈시킨 후 규자관을 떠나 서둘러 도중까지 나가서 영접했다. 제환공이 영접 나온 포숙아에게 말했다.
"이번 싸움에 군량과 병기가 부족하지 않도록 뒤에서 신속하게 보내 준 것은 다 포대부의 공이었소."
그리고 제환공은 연장공과 함께 규자관에서 작별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를 파하고 마침내 제나라 군사는 떠났다. 연장공은 제환공을 전송하려고 나라 경계까지 따라갔건만, 그래도 그는 차마 돌아서질 못했다. 마침내 연장공은 연나라 국경을 넘어 5십여 리나 제나라 안까지 따라갔다. 제환공이 연장공에게 돌아가기를 재삼 권했다.
"자고로 제후가 서로 전송하되 자기 나라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이러다간 과인이 연후께 무례한 사람이 되겠소이다."
그러더니 연후가 들어온 지점까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까지가 이제부터 연나라 땅입니다. 이는 과인이 군후에게 사과하는 뜻입니다."
제환공은 즉석에서 감사의 표시를 했다. 연장공은 울상이 되어 받을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제환공은 한번 말한 것을 도로 거두진 않았다. 연장공은 사양을 거듭하다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이 그 땅을 받고, 그 곳에다 성을 쌓고 그 성 이름을 연류(燕留)라고 했다. 즉 제환공의 큰 은덕이 연나라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었다. 이리하여 연나라는 오랑캐의 정벌로 서북쪽으로 5백 리의 땅을 넓히게 되었고, 동쪽으로 제나라 땅 5십여 리를 얻어 비로소 북방의 거대한 대국이 됐다. 이 때, 열국의 모든 제후는 제나라 제환공이 연나라를 구제하고 추호도 땅을 탐하지 않았다는 걸 듣고서 다같이 감탄하고 감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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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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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효석편"
이효석(1907__1942)
소설가. 호는 가산.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숭실 전문 학교 교수 역임.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주옥 같은 단편 소설을 썼던 이효석은 수필에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간결체 문장의 전형을 볼 수 있다.
낙엽을 태우면서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언만, 낙엽은 어느덧 날으고 떨어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보다. 30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언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 제일 귀찮은 것이 벽의 담쟁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연돌의 붉은 빛만 남기고 집 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 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쯤에는 벌써 다시 지릅떠 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치 않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 없는 그 넓은 잎이 지름길 위에 떨어져 비라도 맞고 나면 지저분하게 흙 속에 묻혀지는 까닭에 아무래도 날아 떨어지는 쪽쪽 그 뒷시중을 해야 된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의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얕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따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떠올린다. 음영과 윤택과 색채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 꿈을 잃은 헌출한 뜰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메우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시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를 깊게 파고 다 타 버린 낙엽의 재를 - 죽어 버린 꿈의 시체를 - 땅 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없이 손수 목욕물을 긷고 혼자 불을 지피게 되는 것도 물론 이런 감격에서부터이다. 호스로 목욕통에 물을 대는 것도 즐겁거니와,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조그만 아궁이로 나무를 태우는 것도 기쁘다. 어두컴컴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어린아이의 감동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은 그 무슨 신성하고 신령스런 물건 같다. 얼굴을 붉게 태우면서 긴장된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내 꼴은 흡사 그 귀중한 선물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막 받았을 때의 그 태고적 원시의 그것과 같을는지 모른다. 새삼스럽게 마음 속으로 불의 덕을 찬미하면서 신화 속 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좀 있으면 목욕실에는 자욱하게 김이 오른다.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겼다는 듯이 동화의 감정으로 마음을 장식하면서 목욕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잠글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지상 천국은 별다른 곳이 아니다. 늘 들어가는 집 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 속에서 천국을 구하는 것이 아닐까.
물과 불과 - 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시절의 의욕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 두 가지에 있어서다. 어느 시절이나 다 같은 것이기는 하나, 가을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의 원소의 즐거운 인상 위에 서기 때문이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그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 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도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책상 앞에 붙인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새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고 경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에 창조적, 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가는 가을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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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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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밝은 마음, 밝은 말씨
겨울의 주일 오후, 나의 자그만 방에서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햇빛을 온몸에 받고 앉아 있으면 행복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어둡고 그늘진 지하의 방에 머물다가 얼마 전부터 햇볕이 잘 드는 방으로 옮겨 오니 나의 마음까지도 밝고 따스해지는 듯 기쁘고, 전에는 그저 무심히 받아 온 한 줌의 햇볕, 한 줄기의 햇살도 예사롭지 않은 큰 축복으로 여겨 집니다. 한 줄기의 따스한 햇살이 어둠을 밝게 해주고 추위를 녹여 주듯이 한마디의 따스한 햇살이 어둠을 밝게 해주고 추위를 녹여 주듯이 한마디의 따스한 말이 마음의 스산한 어둠을 밝혀 주고 고독의 추위를 녹여 준다는 사실을 오늘도 새롭게 기억하면서 또 한 번의 새해가 내게 내미는 하얀 종이 위에 나는 `밝은 마음, 밝은 말씨`라고 적어 봅니다.
요즘 내가 가장 부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밝은 표정, 밝은 말씨로 옆 사람까지도 밝은 분위기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때 한결같이 밝은 음성으로 정성스럽고 친절한 말씨를 쓰는 몇 사람의 친지를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가 몹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이쪽에서 훤히 알고 있는데도 여전히 밝고 고운 말씨를 듣게 되면 무슨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느냐고 묻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말은 마치 노래와 같은 울림으로 하루의 삶에 즐거움과 활기를 더해 주고 맑고 향기로운 여운으로 오래 기억됩니다. 상대가 비록 마음에 안 드는 말로 자신을 성가시게 할 때조차도 그라 무안하지 않도록 적당히 맞장구치며 성실한 인내를 다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자기 자신의 기분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을 먼저 헤아리고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이 느껴지는 말씨, 이기심과는 거리가 먼 인정 가득한 말씨는 우리에게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자기가 속상하고 우울하고 화가 났다는 것을 핑계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말씨로 주위의 사람들까지도 우울하고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충고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냉랭하고 모진 말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곤 하는지 이러한 잘못을 거듭해온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새삼 부끄러워집니다. 금방 후회할 줄 알면서도 생각 없이 말을 함부로 내뱉은 날은 내내 불안하고 잠자리도 편치 않음을 나는 여러 차례 경험하였습니다. 뜻 깊고 진지한 의미의 언어라기보다는 가볍고 충동적인 지껄임과 경박한 말놀음이 더 많이 난무하는 듯한 요즘 시대를 살아오면서 참으로 마음을 정화시켜 줄 고운 말, 밝은 말, 참된 말이 그리워집니다. 겉으로 긍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가시가 숨어 있거나 교묘한 위선의 그늘이 느껴지는 이중적이고 복잡한 말이 아닌 단순하고 투명한 말씨, 뒤가 없는 깨끗한 말씨를 듣고 싶습니다. 하느님 안에 우리가 어린이처럼 맑고 밝은 마음, 고운 마음을 지니며 살려고 노력한다면 매일 쓰는 말씨 또한 조금씩 더 맑고 밝고 고와지리라 믿습니다.
새해를 맞아 내가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친지들에게 자그만 선물이라도 보내고 싶어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한 줄기 햇살이 가만히 속삭여 줍니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값진 선물보다 더 낫지 않느냐? (집회서 18:17).`
잎사귀 명상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사귀가 보인다
잎 가장자리 모양도
잎맥의 모양도
꽃보다 아름다운
시가 되어 살아온다
둥글게 길쭉하게
뾰족하게 넓적하게
내가 사귄사람들의
서로 다른 얼굴이
나무 위에서 웃고 있다
마주나기잎
어긋나기잎
돌려나기잎
무리지어나기잎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운명이
삶의 나무 위에 무성하다
- 나의 시 `잎사귀 명상`
어느 날 나는 유심히 창 밖의 나뭇잎들을 바라보다가 이런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우리 수녀원의 어느 수녀님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꽃이 아닌 나뭇잎들을 작은 화병에 꽂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본 일이 있습니다. 얼마 전엔 내 옛 친구의 집을 방문했더니 어떤 화가의 여러 종류의 나뭇잎만을 소재로 한 그림달력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어찌나 아름답던지 꼭 갖고 싶다는 말을 하려다 괜한 욕심인 듯싶어서 접어 두면서 방학숙제로 동생과 함께 열심히 여러 가지 나뭇잎들을 채집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즐겁게 떠올려 보았습니다. 소나무, 참나무, 미루나무, 느티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 등등, 나무들의 종류는 참 많기도 하고 흩잎, 겹잎, 마주나기잎 등 잎사귀의 종류도 많으며 윈형, 선형, 피침형, 마름모형 등 잎사귀의 모양 또한 매우 다양합니다. 우리가 나무들을 전체적으로 감상하거나 그 꽃과 열매에 눈길이 가긴 쉬워도 나무에 달린 잎사귀 자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적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꽃도 열매도 다 떠나 보낸 뒤의 나무 위에서 바람에 한들대는 나뭇잎들의 모습은 쓸쓸하지만 아름답게 보입니다. 고운 낙엽 한 장을 주워 책갈피에 끼우는 마음도 문득, 잊고 있던 잎사귀에 대한 애정과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길을 가다 보면 어쩌면 사람들의 모습이 저토록 다를까? 새삼 놀라게 되는 적이 있고, 공동체 안에서 살다 보면 함께 사는 이들의 너무 다른 성격과 기질에 거듭 놀라고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가까운 가족, 친지, 이웃들을 살펴봐도 글들이 걷는 삶의 길, 삶의 태도 역시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누구나 한 번쯤 삶의 시작과 끝을 생각해 보는 가을. 어느 계절보다 가을을 사랑하는 나는 오늘 아침, 성당 유리창으로 비쳐 오는 상록수들의 푸른 그림자에 내 마을을 포개면서 문득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라는 나무뿌리에서 함께 그러나 서로 다르게 피어나 노래하고 기도하는 초록의 잎사귀들로 여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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