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52호 》 2022.9.11 (음 8.16)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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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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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를 느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말 것. 결코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니까. ― G.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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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와 ‘맞는다’
몇 주 전 원고에 “불문율이 언어의 본질에 맞다”고 했더니 신문엔 “맞는다”로 고쳐 실렸다. 넷플릭스 영화를 봐도 등장인물은 ‘맞다’라 하는데 자막엔 늘 ‘맞는다’로 나온다. ‘‘맞다’는 무조건 ‘맞는다’로 고쳐 쓰라’는 지침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하도 한결같아서 찾아보니, ‘맞다’는 동사이고 동사의 현재형에는 ‘-는-’을 붙여야 하므로 ‘맞는다’가 맞다(!)는 것. 하지만 ‘맞다’는 동사와 형용사를 넘나드는 존재다. 이름하여 ‘형용사적 동사’ 또는 ‘형용성 동사’. 왜 이런 이름이 달렸을까? 우리가 그렇게 쓰기 때문이다.
동사는 ‘먹어라, 먹자’처럼 명령이나 청유형이 가능하다. 안 그러면 형용사다. ‘맞다’는 ‘(이 옷이) 맞아라, 맞자’라고 안 쓴다. 감탄할 때 동사는 ‘먹는구나’처럼 ‘-는구나’를, 형용사는 ‘춥구나’처럼 ‘-구나’를 붙인다. ‘맞다’는 ‘맞는구나’로도 ‘맞구나’로도 쓴다. 형용사는 ‘와, 맛있다! 멋지다!’처럼 기본꼴로 감탄사처럼 쓸 수 있다. ‘맞다’도 비슷하다. 비 그친 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맞다, 우산!’, 머리 아플 땐, ‘맞다, 게○○!’.
‘맞다’가 동사인지, 형용사인지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이나 반응하는 모습이 문제다. 누군가 ‘이게 맞다’고 하면, 자기 입에 붙어 자연스럽게 쓰는 말을 너무 쉽게 부정하고 고친다. 이 일사불란함이 지루하다.
말은 늘 변한다. 전문가는 풍속의 감시자가 아니라, 변화를 받아 적고 설명하는 존재일 뿐이다. 고칠 건 사전이나 설명이지, 당신의 말이 아니다. 명령에 거역하라.
이름 바꾸기
내 이름은 웃긴다. 발음이 절지동물과 닮아 별명이 ‘왕지네’였다. 모르는 이에게 이름을 불러주면 열에 아홉 ‘진혜’나 ‘진회’로 적는다. “‘바다 해’ 자입니다”라거나 “해바라기 할 때 해 자입니다”, “‘ㅕㅣ’가 아니라 ‘ㅏㅣ’예요”라 해야 한다. 어감도 묵직하거나 톡 쏘는 맛이 없어서, 줏대도 없고 집요함도 모자란다. 이게 다 이름 탓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꾸어야 할까? 우리 사회는 걸핏하면 이름을 바꾸던데. 사람들 반응이 시들하고 전망이 안 보이고 시대에 뒤처진 느낌일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이름 바꾸기다. 회사명, 주소명, 건물명, 학과명, 가게명, 정당명, 정부 부처명. 불합리를 바로잡고 합리성과 혁신 의지를 듬뿍 담아! 한국 현대사는 간판 교체사이다.
이름 바꾸기는 연속성의 거부이자 과거와 단절하려는 몸부림이다. 하지만 대부분 근본적이지 않고 선택적이라는 게 문제다. 실패하고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과거만 지목될 뿐.
모든 이름에는 이름의 질감이 있다. 이름을 그대로 두면 부끄럽고 불합리하며 분했던 순간도 도망가지 못한다. 나는 그 질감이 좋다. 그 부끄러움과 불합리가 좋다. 우여곡절을 겪는 의미를 같은 이름 안에 쌓아 놓는 것. 의미는 시시때때로 변하는데, 이름마저 자주 바뀌면 어지럼증이 심해진다. 나는 문화라는 게 ‘이유는 잘 모르지만, 옛날부터 그렇게 써 왔어’라고 말하는 거라 생각한다. 단절은 세탁과 표백의 상큼함과 뽀송함을 줄지는 몰라도, 역사의 냄새와 질감을 회피하게도 만든다. 이름 바꾸기를 성과로 내세우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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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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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 김수영
어서 일을 해요 變化는 끝났소
어서 일을 해요
미지근한 물이 고인 조고마한 논과
대숲 속의 초가집과
나무로 만든 장기와
게으르게 움직이는 물소와
(아니 물소는 湖南地方에서는 못 보았는데)
덜컥거리는 수레와
어서 또 일을 해요 變化는 끝났소
편지봉투모양으로 누렇게 결은
時間과 땅
수레를 털털거리게 하는 慾心의 돌
기름을 주라
어서 기름을 주라
털털거리는 수레에다는 기름을 주라
慾心은 끝났어
논도 얼어붙고
대숲 사이로 侵入하는 무자비한 푸른 하늘
쉬었다 가든 거꾸로 가든 모로 가든
어서 또 가요 기름을 발랐으니 어서 또 가요
타마구를 발랐으니 어서 또 가요
미친놈뽄으로 어서 또 가요 變化는 끝났어요
어서 또 가요
실같은 바람따라 어서 또 가요
더러운 日記는 찢어버려도
짜장 재주를 부릴 줄 아는 나이와 詩
배짱도 생겨가는 나이와 詩
정말 무서운 나이와 詩는
동그랗게 되어가는 나이와 詩
辭典을 보면 쓰는 나이와 詩
辭典을 詩같은 나이의 詩
辭典이 앞을 가는 變化의 詩
감기가 가도 감기가 가도
줄곧 앞을 가는 辭典의 詩
詩.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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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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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천금(一字千金)
[출전]《史記》〈呂不韋列傳〉
戰國時代 末期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과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은 각 수천 명, 초 (楚)나라 춘신군(春申君)과 위(魏)나라 신릉군(信陵君)은 각 3000여 명의 식객(食客)을 거느리며 저마다 유능한 식객이 많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편 이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일개 상인 출신으로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의 상국(相國:宰相)이 되어, 어린(13세) 왕 정(政:훗날의 시황제)으로부터 중부(仲父)라 불리며 위세를 떨친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B.C.235, 정의 친아버지라는 설도 있음)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정의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가 태자가 되기 전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기화가거(奇貨可居)'라며 천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오늘날의 영화를 거둔 여불위였다. 그는 막대한 사제(私財)를 풀어 3000여 명의 식객을 모아들였다. 당시 列國들 사이에는 著述사업이 유행이었다. 呂不韋는 食客들을 동원해 古今의 정치, 경제, 사상, 문화, 역사 등을 모두 網羅한 백과사전格인 책을 완성해 마치 자기가 편찬한 양 '呂氏春秋'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수도인 咸陽 성문에 걸어놓고 "누구든지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뺀다면 천금을 주겠다.(有能增省一字者予千金)"고 豪言했다.《史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呂不韋는 자기 誇示겸 우수인사 誘致 목적으로 이 말을 했지만, 지금 '一字千金'은 '심금을 울리는 아주 빼어난 글'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과 脈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유사어】일자백금(一字百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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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2. 거절을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모두가 두려워한다 - 마르시아 마틴
나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이 지구상에서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눈을 내리깔며 생각한다.
"아, 저기 저 사람은 굉장히 잘나고, 매우 자신만만하고, 전부 다 알고 있고, 모든 것을 다 갖췄어. 나는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냐."
우리는 모두 마음속으로 공포와 자기 의심을 품고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다른 사람들은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그들도 두려워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나는 앞에 모인 많은 학생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중에서 여기 다른 학생들이 항상 자신만만하다고 확신하는 사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만만하다고 확신하고 일제히 손을 들었다. 그 다음에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너희들 중에서 자신만만한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일종의 경기의 출발점을 형성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출발점, 즉 모두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앞으로 전진하여 원하는 것을 요청할 수 있는 작은 용기를 갖는다.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라
숭리자는 패배자가 꺼려하는 일에 습관을 붙인 사람이다. - 에드 포어맨
당신이 맨 처음 자전거를 타거나, 운전대 앞에 앉았을 때를 기억하는가? 그 일은 불편한 것 이상이었다. 당신은 꼴사납고 어색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당신의 다섯 아이들은 각각 꼴사나운 단계를 거치고 걸음마를 배웠다. 아이들은 불안하게 흔들흔들 뒤뚱거리고 자주 주저앉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한 결과, 그들 육체의 위대한 주인이 되고 자유자재로 몸을 놀리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당신이 잡을 수 없을 만큼 빨리 달린다.
우리는 빠짐없이 끔찍한 단계를 거쳐야 새로운 행동을 습득할 수 있다. 만약 어렸을 때 그런 단계를 생략했다면, 지금 그것을 거쳐야 한다. 우리는 첫 연설과 첫 데이트, 첫 면접과 첫 학예회, 명사와의 첫 대면과 첫 성경험을 할 때의 그 불편한 기분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과하고 그 다음의 첫 번째 경험-새로운 직장에서 첫날, 첫 아이, 첫 사업 시작, 첫 고객, 첫 번째 은행 융자와 첫 번째 저당, 그리고 첫 번째 라디오 인터뷰와 토크쇼 출연 등등으로 발전했다.
우리중 대다수는 두려움과 자기 비하, 용기와 협조의 부족으로 피했던 그 초기의 첫 번째 경험 일부를 거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몸에 익힐 때까지 한동안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껴야 하는 첫 번째 것이 많이 남아 있다. 사랑하는 이의 첫 죽음, 암이나 에이즈에 걸린 첫 친구, 원치 않은 첫 임신, 첫 발병이나 사고 경험, 첫 번째 이혼, 나이를 드는 첫 번째 징조, 첫 소송과 첫 유언서 작성, 자녀의 첫 탈선이나 진학 실패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인생은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다. 또한, 원치 않은 고통이나 잠재적인 모험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그 선택은 모두 당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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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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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8장 북방 토벌
3. 남방에 이는 바람
투곡어도, 영윤이 되다
여기서 잠시 투곡어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관중이 살았던 시기에 관중을 제외하고 가장 뛰어난 인재가 그 사람이었다는 평가도 전해지고 있으며, 관중조차 진심으로 탐냈다는 초나라의 영윤 자문(子文)이 바로 그였다. 그의 조부는 투약오(鬪若敖)였는데 운나라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서 투백비를 낳았다. 그런데 투백비가 아직 어릴 때 투약오가 죽는 바람에 운나라 여인은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이렇게 해서 투백비는 운나라에 가서 살며 그 곳 궁중을 드나들었다. 그 때 운나라 궁중의 운부인은 투백비를 매우 아꼈다. 잘 생긴데다가 지혜가 남달랐던 것이다. 한편 운부인에게 투백비와 나이가 비슷한 운녀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들 둘은 소꿉동무로 함께 자랐다. 어른들은 이들 둘이 점차 장성해 가면서도 같이 노는 걸 그저 대견한 듯이 바라볼 뿐 그대로 뒀다. 어느덧 둘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어른들은 이를 몰랐다. 마침내 운부인의 딸이 아이를 가졌다. 그제서야 운부인은 깜짝 놀라 투백비의 궁중 출입을 금하고, 자기 딸 운녀를 병든 것으로 소문을 내어 궁궐의 별실 속에 감금하다시피 감춰 놓았다. 빠른 것은 세월이라 그런 중에도 운녀의 뱃속의 아이는 열 달이 되니 세상에 태어났다. 사내아이였다. 운부인은 딸이 낳은 사내아이를 시녀에게 시켜 비밀히 몽택(夢澤)이란 연못에 갖다 버리고 남편인 운후에게는 딸의 부정을 감쪽같이 숨겼다. 한편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한 투백비는 혼자서 괴로워하다 마침내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나라인 초나라로 돌아갔다.
어느 날 운후는 몽택으로 사냥을 갔다. 그는 몽택 물가에 맹호 한 마리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좌우에 명하여 범을 잡도록 했다. 화살이 빗발치듯 날았으나 한 대도 범을 맞추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범은 화살이 날아와도 두려운 빛도 없이 꼼짝하지 않으므로 운후는 괴이하게 여겨 못 가까이 가서 범의 동정을 살필 것을 명하니, 명을 받은 자가 동정을 살피고 돌아와 아뢰었다.
"범이 갓난아기에게 젖을 빨리고 있습니다. 사람을 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운후는 매우 감탄했다.
"그 갓난아기는 보통 아기가 아니라 신의 자식일 것이다. 갓난아기와 범을 놀라게 하지 말라."
운후는 다른 곳으로 가서 사냥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가 낮에 있었던 일을 부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부인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부군(夫君)은 모르시겠지만, 그 범이 보호했다는 아이는 첩이 버린 아기입니다."
운후가 크게 놀라 물었다.
"부인은 그 아기를 어디서 얻어다 버렸소?"
운부인은 자초지종을 소상히 말했다.
"부군은 과도히 첩을 허물하지 마십시오. 그 갓난아기는 사실 우리 여아(女兒)가 투백비와 관계해서 난 것입니다. 첩은 여아의 이름을 더럽힐까 두려워서 시자에게 명하여 비밀히 그 갓난아기를 몽택에 버리게 했습니다. 첩이 듣건대, 옛날에 강원은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자 물에 버렸다 하더이다. 그러나 날짐승들이 모여들어 그 갓난아기를 끌어내 날개로 보호했기 때문에 강원은 자기 소생이 신물(神物)인 줄을 알고 다시 데려와 길렀고 이름을 기(棄)라 하였습니다. 기는 장성하여 벼슬이 후직에 이르렀고, 드디어 주(周)나라 시조(始祖)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 여아가 낳은 아기를 범이 젖을 빨리며 보호했다니 그 아기도 반드시 후일에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데려와 우리가 기르면 어떻겠습니까?"
운후는 부인의 뜻을 응낙하고, 즉시 사람을 몽택에 보내어 외손자를 데려왔다. 그리고 딸에게 내주어 기르게 했다. 그 이듬해에 운후는 딸을 초나라로 보내어 투백비와 결혼을 시켰다. 초나라 사람은 젖을 곡(穀)이라고 하며 범을 어도라고 했다. 그래서 투백비는 범이 젖을 먹였다는 뜻에서 그 아들 이름을 곡어도라고 지었다. 그리고 자(字)를 자문(子女)이라고 했다. 지금도 운몽현(雲夢懸)에 도향이란 곳이 있다. 즉 자문이 출생한 곳이다. 투곡어도는 점차 자라면서 뛰어난 재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번 본 것과 들은 것은 결코 잊지를 않는가 하면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어찌나 조리있고 분명한지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은 누구나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투씨(鬪式) 집안에서는 모두가 칭찬했다.
"장차 집안과 나라를 크게 빛낼 인물이다."
또한 투곡어도는 무예가 출중하여 간혹 문 부인이 출타할 때는 호위역을 분부받곤 했다. 그래서 문 부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자원이 죽자 초나라에는 영윤 벼슬 자리가 비게 되었다. 그래서 초성왕은 투렴을 불러다가 영윤을 삼으려 했다. 투렴이 극력 사양했다.
"지금 우리 초나라는 땅도 넓고 군사도 강합니다. 그러니 제나라에는 그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제나라에는 관중이라는 정승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밑에 영척이라는 어진 인물이 있어 정사를 처리하는데 우리가 도저히 당적해낼 수 없습니다. 신은 영척에게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가지고는 제나라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윤 벼슬을 절대로 맡지 못하겠습니다."
초성왕이 한탄했다.
"어찌하여 우리 초나라에는 관중이나 영척 같은 어진 인재가 없단 말인가."
투렴이 아뢰었다.
"찾아보면 어찌 없겠습니까. 투곡어도가 있습니다. 그의 재주는 아직 관중, 영척에 이르지 못하나 나이가 있으므로 곧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성왕은 좌우 시립해 있는 문무 백관들 가운데 말단에 서 있는 투곡어도를 바라보았다.
사실 호감가는 젊은이고 언젠가는 영윤 벼슬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인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직은 어리지 않을까.'
그런데 곁에 있던 많은 신하들이 일제히 아뢰었다.
"투곡어도를 등용하십시오. 그는 나이가 어리지만 반드시 영윤의 직책을 완수하고 중원 땅을 앞에 두고 제나라와 맞겨눌 수 있을 것입니다."
초성왕은 그제서야 그를 영윤으로 삼은 후 모든 신하들에게 분부했다.
"제나라에서는 관중을 중부(仲父)라 부르고 마치 부형처럼 대접했다고 들었소. 따라서 우리 초나라에서는 투곡어도라 부르지 말고 자문(子文)이라 부르시오. 짐은 이제부터 자문과 모든 일을 상의해서 할 것이오."
이후 사람들은 그를 투곡어도라 부르지 않고 영윤 자문(子文)이라 불렀다. 그 때가 주혜왕 13년, 제환공이 위나라를 쳐서 항복을 받고, 위의공의 장자 개방(開方)을 데리고 승전가를 부르며 귀국한 그 이듬해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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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헌구편"
이헌구(1905~1982)
평론가. 함북 명천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불문과 졸업. 문학 박사. 민중 일보 사장, 공보처 차장, 이화 여대 문리대학장 역임. 일제 시대에 민족적 자유 정신과 세계적 양식을 추구하는 일련의 평론을 발표하다가 일제 말기에는 붓을 꺾었었다. 해방 후에는 반공 자유 문화를 일관성 있게 제창하였다. 정확한 비평 논조와 문장으로 지목된 평론가였으며 그 면모를 여기에 실린 수필들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시인의 사명
평화로운 시대에 있어서 시인의 존재는 가장 비싼 문화의 장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인이 처하여 있는 국가가 비운에 빠지거나 통일을 잃거나 하는 때에 있어서, 시인은 그 비싼 문화의 장식에서 떠나, 혹은 예언자로, 또는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선구자적 지위에 놓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도 군대도 가지지 못하고, 제정 러시아의 가혹한 탄압 아래 있던 폴란드 인에게는, 시인의 존재가 오직 국민의 재생을 예언하며, 굴욕된 정신 생활을 격려하는 크나큰 축도를 드리는 예언자로 생각되었으며, 아직도 통일된 국가를 가지지 못하고 이산되어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시성 단테는 '오로지 유일한 이탈리아'로 숭모되어 왔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때에, 독일군의 잔혹한 압제하에 있었던 벨기에 인에게 있어서, 시인 베르하렌은 조국의 한 신령으로 추앙되었었다.
우리가, 과거 40년간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 밑에서, 인류가 정당히 가질 수 있는 모든 자유와, 의욕과, 사색과, 행동을 여지없이 박탈당하고 있던 중에서도, 오히려 우리의 시가는 문학의 다른 어느 부문에서보다도 훨씬 생기를 띠고 찬란하여, 예술의 아름다운 경지를 지켜 왔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언어를 풍요하게 하는, 높은 문화의 생산자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1, 2년 전부터, 저들은 민족 문화 말살의 최악의 행동을 전개시키기에 사력을 다하여, 한국 문화 전멸 운동으로 나왔으니, 어론 기관은 폐쇄 당하고, 한글 운동을 탄압되고, 드디어는 창씨 제도라는 인류사에 없는 야만 정책을 베풀어서까지 우리 민족의 문화를 없애 버리려 들었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모든 시인의 붓은 꺾이어지고, 아니, 불타는 정의와 민족애의 시혼은 저들의 칼끝 아래서 저주받고 절단되어 버렸고 오직 일부의 반동적인 문학만이, 불가항력이라기보다 착각된 의식전도로 민족적 불행의 사실을 연출함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8월 15일에 이르기까지의 약 5년간의 혼란기와 반동기에 있어서, 시인들은 오로지 침묵함으로써 웅변 이상으로 우리의 시가와 민족의 정신을 지켜 온 영광의 전사였다. 이제, 우리의 모든 감정과 지혜와 심혼은 해방되었다. 폐쇄되었던 시의 전당의 철비는 일격에 깨뜨려지고 말았다. 우리의 말이 홍수처럼 밀려나오고, 우리의 감상이 조수처럼 부풀어오르는 자리에서, 시인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 터지는 듯한 흥분 속에 휩싸여졌다. 그리하여 저들이 우리에게 준 지옥의 낙형에서 소생하였다. 선정이라고 가르치던 억압에서, 미덕으로 꾸미어 내던 약탈에서, 굴욕을 충절이라고 깨우치려 들던 그 모욕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들은 아름답지 못한 과거를 불살라 버리고, 우리 혈관 속으로 흘러든, 그 불순한 피의 원소를 모조리 씻어 낸 다음, 우리의 심경에 일점의 흐림도 없이, 재생하는 조국의 광복만을 비추어 볼 것이 아닌가? 폴란드의 모든 시인처럼, 단테나 베르하렌과 같이, 우리의 진정한 시혼으로 하여금, 해방의 역사 위에 빛나는 시의 기념탑을 세워야 하고, 유일한 예언자나 신령처럼 숭앙되어야 할 이 땅의 시인들이 아닌가? 시인아, 이제 너는 불사의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선구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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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새 아줌마의 편지
항상 새를 좋아하고 사랑해 왔지만 나는 요즘 더욱 새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이젠 단순히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새들의 생태를 살펴보고 연구하는 일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책들을 뒤적이게 되었다. 이 모두가 몇년 전에 알게 된 일본의 와키타 가즈요 아줌마 덕분이다. 스스로 새에 미쳤다고 해서 내가 새 아줌마라는 별명을 붙였더니 편지를 쓸 때마다 새 아줌마라고 쓰고, 늘 대여섯 장 되는 편지를 새 이야기로만 가득 채우는 자칭 아마추어 사진작가 와키타 가즈요 아줌마를 나는 사진으로만 보았을 뿐 아직 만난 일이 없다. 일본어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나에게 한국에 온 일이 없는 그가 하늘빛, 분홍빛 편지지에 한국말로 써 보내는 정성스런 편지는 맞춤법이나 문법이 어찌나 완벽한지 누가 읽어도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뜻있는 일본인들과 같이 한국어를 공부했고 그 동아리에서는 1년에 한 번 정도 각자가 좋아하는 한국시, 수필, 소설 등을 일어로 번역하여 돌려보기로 했으며, 그것을 문집으로 묶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국문학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다고 했다. 크리스천인 와키타 가즈요 아줌마는 문학을 통해 하느님을 잊고 사는 듯한 일본인에게 하느님을 전하고 싶고, 자신의 자그만 봉사가 늘 미묘한 한일관계를 우호적으로 증진시키는 데 한 몫을 하게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자기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준 어느 수녀님으로부터 나의 시집들을 선물받고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천리향`과 `수녀`라는 시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상업적인 목적이 아닌 순수한 뜻으로 나의 시들을 번역하고 싶으니 꼭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서로 연락을 하게 되었다. 산과 들로 다니며 직접 찍은 새들의 사진에 일일이 설명을 곁들여 나에게 보내 주고, 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법, 친해지는 법을 소상히적어 보내 주는 와키타 아줌마께 나는 가끔 우리 나라의 새들이 그려진 우표나 크리스마스 실, 새에 대한 신문 기사나 시들을 모아 보내곤 한다. 한 번은 우리 수녀원 뜰의 까치를 서툰 솜씨로 찍어 보냈더니 일본에선 거의 못 보는 새라며 반가워했다.
`처음 보는 한국의 새 우표는 아주 멋이 있어서 감격했습니다. 거기 인쇄된 새들은 일본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이른바 진조들인데 그런 새들을 한국우표들을 통해서 만나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일본의 새 아줌마를 위해 귀중한 우표를 보내 주신 수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국의 텃새라는 크리스마스 실을 보니 모두 이곳에서도 볼 수 있는 새들이기에 아주 기뻤습니다. 흔히 가깝고도 멀다고 표현되는 일한관계지만 먼 듯하면서도 실은 가까운 나라임을 새들이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수녀님과 마찬가지로 저도 마음만은 10대 소녀인가 봅니다. 방안은 새들의 사진, 달력, 공원에서 주운 깃털, 새 그림이 인쇄된 손수건, 방석 등 여러 가지로 어수선합니다. 남이 보면 웃을지 모르겠지만 저에겐 모두 소중한 물건들입니다. 요즘도 틈만 있으면 우리 남편과 함께 들이나 강가에 가서 새들의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새 이름에 관해서는 그러니까 수녀님보다 좀 많이 알고 있는 셈이지요. 새들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만 보고 많은 사람들은 새들을 크게 부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새들의 생활이란 수녀님께서도 쓰신 것처럼 자유로운 반면에 실로 고독하고 가혹한 조건에 차 있습니다. 병이 들어도 누가 도와 주는 것도 아니고 또 언제 무서운 적들의 먹이가 될지 모르는 데다 겨울에는 이사라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새들의 관찰을 통해 자연과 친해지게 되면서부터 제일 좋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세속적인 일이나 물질에 대한 욕망이 많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하루살이 생활을 하면서도 결코 욕심을 내지 않으며 필요 이상의 양식을 탐내지 않는 새들, 모든 것을 자연계에 의존하는 동시에 그 은혜를 다시 자연계로 환원할 줄 아는 그들에게 저희는 좀더 겸허한 마음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새들에 대한 아줌마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의 편지들은 항상 자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그리움을 담고 있다. 얼마 전에 그는 을숙도와 주남 저수지가 등장하는 한국 시인들의 신춘문예 당선작인 시들을 몇 장 복사해 보냈다. 아름다운 한국시들을 발견할 때마다 고생하며 한국말 공부한 보람을 느끼며, 특히 새가 등장하는 시들을 읽을 때마다 깊은 감동을 받는다고 했다. 날더러 더욱 새와 친해지고 새에 대한 시들을 많이 써달라고 주문하는 새 아줌마, 아직 한번도 만난 일은 없지만 새 이야기를 하면서 가까워진 와키타 가즈요 아줌마의 웃는 얼굴을 사진으로 들여다보며 언제나 삶에 대한 기쁨과 희망, 새에 대한 애정이 출렁이는 그의 최근 편지를 다시 읽어 본다.
`...나무 위에서 혼자 쓸쓸히 우는 티티새 소리를 듣고 있으니 가슴이 뭉클해지곤 합니다. 철새들 중에는 아직 어린 새들도 있답니다. 아시면 웃으시겠지만 철새들이 이동할 시기에는 하느님께 기도할 때마다 맨 마지막으로 철새들의 안전과 무사함을 비는 것이 일과처럼 되고 있습니다. 작은 몸으로 있는 힘을 다 내어 날개치면서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날아가는 철새들. 그 목숨을 건 여행은 정말 감동적이고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이곳에서 날아간 철새들이 그곳 수녀원에서 잠시 놀다 갈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을 만나시면 안부 전해 주십시오. ...이곳에선 동백꽃이 하나둘 피기 시작했는데 그 꽃을 매우 좋아하는 동박새나 직박구리들은 오죽이나 기뻐하고 있을까 싶어 저도 즐거워집니다. 먹이가 적어지는 이 시기에 그 빨간 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내려주신 크리스마스 선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들의 식사 풍경은 언제 보아도 흐뭇한 것인데 엄마새가 먼저 새끼들에게 큰 조각을 먹이고 자기는 작은 것을 아주 조금밖에 먹지 않는 모습을 보면 무언가 찡하게 가슴에 와닿습니다. 어떤 짐승이고 사람이 그들을 사랑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 주면 그들도 사람을 신뢰하고 편안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날려 보내 주신 새들과 나비떼는 예쁜 꽃카드와 함께 현해탄을 건너 무사히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선물을 독차지하는 것이 미안해 카드는 젊은 친구에게, 나비 실은 새에 미친 또 한 사람의 새 아줌마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습니다.둘이서 기쁨을 나누면 기쁨은 곱절이 된다고 말들을 하는데 저는 덕분에 세 배나 커진 기쁨을 맛보게 된 셈입니다. ...주님께서 수녀님의 시의 꽃밭을 축복해 주셔서 더욱더 향기로운 꽃들이 많이 피어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안녀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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