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40호 》 2022.8.28 (음 8.2)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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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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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푹 쉬도록 하라. 한 해 놀린 밭에서 풍성한 수확이 나는 법.
― 오비드(고대 로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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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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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바깥
1일 3교대 노동자는 ‘갑반, 을반, 병반’ 중 하나에 속해 일한다. 갑을은 일하는 순서다. 60갑자에서도 갑을은 시간의 순서이다. 하지만 순서는 쉽게 우열로 바뀐다. 야구에서나 점수 내기 쉬운 3루가 1루보다 낫지만, 그 외에는 1등, 1등석, 1등급이 더 좋다. ‘갑’은 먼저 들어가고 좋은 자리에 앉고 목소리가 높으며 호탕하게 웃는다. ‘갑을관계’나 ‘갑질’이란 말은 서열과 위계를 뜻하는 사회학 용어가 되었다.
이럴 때 말을 바꾸려는 시도를 한다. 예전에 아파트 주민들과 경비원들이 자신들은 대등한 관계라면서 근로계약서를 ‘동행 계약서’로 바꿨다. ‘동행 조례’나 ‘갑을 명칭 지양 조례’를 제정한 지역도 있다. 헌법 개정안에는 ‘근로’를 ‘노동’으로 수정하여 노동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근로자, 근로기준법, 근로계약서, 공공근로’를 ‘노동자, 노동기준법, 노동계약서, 공공노동’으로 바꿔 부르면 그런 느낌이 든다.
말을 바꿀 때 말의 바깥을 생각하게 된다. 이름과 실상이 서로 맞아야 한다. 근로가 노동이 되고 갑을이 동행이 되어도 현실이 여전히 노동을 배반한다면 실망스럽다. 정치를 한다면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한 공자의 발언은 그저 말을 잘 다듬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름에 걸맞게 현실을 바로잡겠다는 실천의지의 표명이다. ‘정규직 안 돼도 좋으니 더 죽지만 않게 해 달라’는 노동자들 앞에서 ‘갑을’을 ‘동행’으로 바꾸자는 ‘말’은 얼마나 한가한가.
말에 민감할수록 말의 바깥을 봐야 한다. 짓궂게 묻는다면, ‘굴종적인 동행관계’보다 ‘대등한 갑을관계’가 낫다.
말의 아나키즘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에 가면 ‘밝은누리’라는 대안학교 겸 공동체가 있다. 학교와 집을 손수 짓고 적정기술과 농사를 익히며 삶과 배움의 일치를 추구한다. 그들의 ‘말글살이’는 자못 의연하여 생활 용어를 힘껏 바꿔 쓴다. ‘하늘땅살이(농사)’, ‘몸살림(수신)’, ‘고운울림(예술)’이라든가, ‘어울쉼터, 아름드리(생활관)’ 같은 말을 만들었다. 일주일을 ‘달날, 불날, 물날, 나무날, 쇠날, 흙날, 해날’로 부른다. 코로나19는 ‘코로나 돌림병’이다.
삶의 방식이 다르면 말본새도 달라진다. 이들에게 말은 도구가 아니다. 새로운 말의 발명은 인식과 태도의 변화를 이끈다. 삶의 자리에 말을 초대하고, 초대받은 말은 다시 삶을 정돈한다. 고유어로 바꾸려는 강박이 보이지만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방문객은 ‘쇠날’로 듣고 ‘금요일’이라 ‘번역’한다. 낯설지만 과잉되지 않다. 그들은 삶의 변혁을 추구하지 언어운동을 하지는 않는다.
이들을 보며 말의 아나키즘을 상상한다. 아나키즘을 ‘모든 지배의 거부’, ‘제도가 아닌 자발성에 의한 연대’라고 당돌하게 요약해 놓고 보면, 우리 사회는 말의 아나키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한국 사회는 말의 무질서나 오염을 걱정하고, 올바른 말을 병적으로 강요해 왔다. 질서는 인위이고 위계이자 명령이다. 엘리트주의고 전체주의적이다. 그래서 표준어를 참조하지 않는 자유의 영토, 작은 공동체의 자율적 합의로 만드는 언어가 여기저기 꽃피어야 한다.
이게 어찌 그곳 사람들만의 문제겠는가. 말을 법 아래가 아닌 삶의 곁에 서게 할 때 우리는 자유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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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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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四.一九> 詩 - 김수영
나는 하필이면
왜 이 詩를
잠이 와
잠이 와
잠이 와 죽겠는데
왜
지금 쓰려나
이 순간에 쓰려나
罪人들의 말이
배고픈 것보다도
잠 못 자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해서
그래 그러나
배고픈 사람이
하도 많아 그러나
詩같은 것
詩같은 것
안 쓰려고 그러나
더구나
<四.一九> 詩같은 것
안 쓰려고 그러나
껌벅껌벅
두 눈을
감아가면서
아주
금방 골아떨어질 것
같은데
밤보다도
더 소중한
잠이 안 오네
달콤한
달콤한
잠이 안 오네
보스토크가
돌아와 그러나
世界政府理想이
따분해 그러나
이 나라
백성들이
너무 지쳐 그러나
별안간
빚 갚을 것
생각나 그러나
여편네가
짜증낼까
무서워 그러나
동생들과
어머니가
걱정이 돼 그러나
참았던 오줌 마려
그래 그러나
詩같은 것
詩같은 것
써보려고 그러나
<四.一九> 詩같은 것
써보려고 그러나
<1961.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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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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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지몽(邯鄲之夢)
- 인생과 영화의 덧없음을 비유한 말. 《出典》沈旣濟 枕中記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이야기이다. 도사 여옹이 한단(邯鄲 : 河北省 所在)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山東)에 사는 노생(盧生)이라며 신세 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에 구멍이 뚫린 도자 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 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崔氏)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 경조윤(京兆尹)을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나 재상이 투기하는 바람에 단주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 간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 당했으나 그는 환관(宦官)이 힘써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수 년 후 원죄(寃罪)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제수(除授)한 뒤 연국공(燕國公)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 그 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 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애를 마쳤다. 노생이 깨어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전히 여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던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노생은 여옹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하고 한단을 떠났다.
【동의어】한단지침(邯鄲之枕), 한단몽침(邯鄲夢枕), 노생지몽(盧生之夢), 일취지몽(一炊
之夢), 영고일취(榮枯一炊), 황량지몽(黃梁之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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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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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1. 소원성취는 마음먹기 나름
자기 가치를 요청한 여성 - 제인 블루스테인
사업을 시작했을 무렵, 나는 돈이 한 푼도 없었기 때문에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담보가 아무 것도 없었다. 당시 우리 집은 부동산 계약서 상에서만 존재했다. 즉, 마지막 잔금을 치러야 그 집이 진짜 우리 것이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옷을 차려입고 내 저서를 가지고 은행으로 갔다. 나는 당당하게 대출 담당자를 찾아가서 내 책을 그의 책상에 던졌다.
"보세요, 댁은 나를 모를 거예요. 나는 이 은행에 통장을 개설하지 않았지만, 방금 수많은 사람을 돕는 사업을 시작했어요. 나는 매우 유능하고 사업자금이 필요해요."
그가 말했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일만 오천 달러요."
그는 수표를 썼다. 내가 은행 문을 걸어 나올 때, 내 안에서 이런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니?"
그 말에 나의 또 다른 목소리가 이렇게 반박했다.
"무슨 상관이야. 나는 한 시간 전보다 일만 오천 달러를 더 지녔잖아. 아무래도 삼만 달러를 요청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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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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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5. 중원의 한복판에도 순풍이 불고(3/3)
정여공의 즉위
숙첨은 마침내 부하의 계책을 받아들여 심복 부하에게 밀서를 주어 공자 돌에게 보냈다.일을 이쯤 꾸미고 났을 때 해가 동편에서 솟았다. 부하는 시치미를 떼고 서둘러 궁으로 들어가 의를 만났다.
"제군이 옛날 임금 돌과 함께 쳐들어오는 바람에 대릉 땅이 멸망했습니다."
의가 크게 놀랐다.
"과인은 사자를 초나라에 보내어 구원군을 청해야겠다. 초군이 오기를 기다려 협공하면 제군일지라도 가히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곧 숙첨을 불러 사자를 보내라고 분부했다. 그러나 숙첨은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틀이 지나도록 구원을 청하는 사자를 초나라에 보내지 않았다. 세작(細作)이 와서 보고했다.
"군사가 성 아래 이르렀습니다."
숙첨이 의에게 말했다.
"신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주공은 부하와 함께 성에 올라 굳게 지키십시오."
의는 그 말을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성 밖에선 정여공 돌과 숙첨이 미리 약조한 그대로 함께 거짓으로 맹렬히 싸우는 척하는데, 빈수무가 제군을 거느리고 질풍처럼 들이닥쳤다. 이를 보자 숙첨은 급히 병차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부하가 성 위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 군사가 패하는구나!"
이 말을 듣자 의는 부리나케 성을 내려가려고 돌아섰다. 순간 부하가 칼로 의의 등을 찍었다. 악!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의는 죽어갔다. 부하는 즉시 성문을 열도록 호령했다. 돌 일행은 물밀듯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부하는 먼저 의의 두 아들을 죽이고 정여공 돌을 군위에 모셨다. 정나라 사람들은 그 동안 세상이 뒤바뀌기를 여러 번, 거기다가 정여공의 오랜 망명 생활을 동정했기 때문에 더 이상 군위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여공을 열렬히 환영했다. 정여공은 군위에 올라 17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임금이 되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빈수무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 다짐했다.
"오는 10월에 과인이 친히 제나라에 가서 제후를 뵙고 동맹을 청하리이다."
이렇게 하여 빈수무는 맡은 임무를 성공리에 마치고 병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한편, 빈수무를 후히 대접하여 보낸 정여공은 곧바로 부하를 잡아들이라고 분부했다.
"그 놈은 대릉을 지킨 지 17년 동안 언제나 계략을 꾸미고 전력(全力)을 기울여 과인에게 항거했도다. 이번에는 목숨을 탐해 전 임금을 죽이고 과인에게 충성하니 참으로 그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 도저히 측량할 수 없도다. 끌어내 참하여라. 그리고 그 놈의 목을 내걸어 전 임금의 원수를 갚았다고 성 곳곳에 방문을 내걸어라."
부하는 마침내 목이 잘리어 죽었다. 그리고 지난날의 죄를 물어 공자 알을 죽였다. 숙첨은 살려 주는 대신 다리를 잘랐다. 이후 정여공은 숙첨을 모셔다 정경으로 삼았는데 그건 3년이나 지난 뒷날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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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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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진섭편" : 김진섭(1930~?)
수필가, 독문 학자. 호는 청천. 전남 목포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 졸업. 서울대 교수. 6.25사변 때 납북됨. 저서로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이 있다. 한국 수필 문학의 개척자. 생활의 예지와 감흥을 가지 넘치는 생활 철학의 발견으로까지 발전시켰다.
병에 대하여
문득 어쩐지 몸에 이상이 있음을 느낀다. 몇 차례씩이나 근심스러이 손을 머리에 대어 본다. 그렇다면 머리도 좀 더운 것 같다. 드디어 병은 찾아 온 것일까? 한동안 앓지 않았으니 병도 올 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약간 억울하기는 하나 조용히 누워 몸을 풀어 버리는 것도 무방하겠지. 진실로 병은 나를 찾아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 보아도 그럴 리가 없는 데 이 이상은 그러나 어인 까닭이뇨? 하여간 병의 심방이 틀림없음을 우선 확증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므로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하여 이전의 건강 상태와 현재의 증상을 혼자서 묵묵히 비교하여 보곤 한다.
원래 인생이란 순순하지 못할 뿐 아니라 흔히는 괴롭고 또 재미조차 없는 물건인데, 이 위에 병까지 뒤집어쓴다면 어이하나? 생각할수록 여러 가지가 마음에 결려 실로 걱정이 아닐 수 없으나, 일단 찾음을 받은 병은 일종 불가항력에 속하므로 내 힘만으로 물리칠 도리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병은 여기 찾아왔는지라 백사를 제지하여 관념의 눈을 감고 하여간에 병상에 몸을 이끌어 털썩 누우매 일시에 셀러에 이른바 '형이상학적 경쾌'가 퇴각을 개시함은 물론이요, 또 공동생활에 의하여 연계되었던 이제까지의 사회적 관련으로부터 졸연한 이탈이 강요되는 데서 유래하는 병상의 기묘한 고독과 무력을 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일종의 향락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은 병자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니, 오슬오슬 오한에 떨리는 몸과 뻐근히 저리는 사지 속에서 잔잔한 세류 비슷이 한 갈래 흘러 오르는 병적 쾌감은 말할 수 없이 유수하고 몽환적인 나라로 병자를 인도하여 간다.
영영 축축, 악착한 이 세상에 초연히 누운 이 통쾌한 묵살, 이 초현실적 안정, 이 풍부한 시간, 장차 어찌 될지 병의 귀추가 물론 적이 걱정이야 걱정이지만 이왕 걸린 병인지라 할 수 없는 일이잖느냐, 불평 불만의 정을 품는 것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므로 오로지 미지의 우인 병 그 자체의 음성에 경청하기로만 결심한다. 병은 실로 한 심방자와도 같으니, 그는 대체 나로부터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일까? 또 병은 한 여행과도 같으니 대체 나는 어디로 향발하여야 될 것일까? 또 병은 무엇을 경고하려는 한 친구와도 같으니 그는 말하는 것이다. '주의를 해야 되네. 이러한 곳에 자네의 결함이 있는 것이니 잘 좀 생각하고 반성해야만 된단 말일세.'라고 우정 찾아와서 병우에게 이 같은 충고를 하며 또 여행의 길로 나서게 하는 한 친구의 정의를 우리는 물리쳐야 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그의 심방을 진심으로 감사하여야 될 것이니, 우리는 다만 여장을 준비하고 조용히 길을 떠나기만 하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지가 어디며 거리가 어느 정도이며, 또 방향이 어느 쪽인가를 모르는 아득한 꿈길의 출발임은 두말할 것이 없으니,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인도자의 뒤만 따를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다.
사람은 병이 무엇인가를 안다. 그리하여 이 병에 대한 인식, 그 속에 실로 건강시에는 예상하지 못하였던 비극적 생존은 누워 있다. 병이 침입자의 인상을 주며 병자를 문득 습격할 때 모든 근친자의 동정이 또한 무력한 것이니 병실의 문이 닫쳐지는 순간 병자의 고독과 적막을 위무할 방법이라고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 고립적이요, 독자적인 영원한 격투와 고민 속에서 그가 어렴풋이 보는 것은 이 곳에 두 방문자 있음이니, 하나는 본능이란 자이요, 다른 하나는 정신이란 자이다. 이 순간에 무엇을 하자고 본능과 정신, 이 양자는 문득 각성하여 나를 심방한 것일까? 본능과 정신, 이 양자는 말하자면 병자에 대하여 의사 이상의 역할을 하는 자이니, 그들은 상호 제휴하여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에게 중대한 발언을 하여야 되는 것이요, 병자의 치유를 위하여 일치 협력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본능은 육체를 치유하여야만 되는 것이요, 정신은 영혼을 병으로부터 구출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참된 건강이란 진실로 육체적 건강을 말하는 동시에 영혼도 역시 건강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본능은 육체를 치료한다. 원래가 이것은 그러한 것으로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니,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치료는 자기 치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명의, 어떠한 신약도 이 신비로운 업무를 대행할 수는 없다. 의사와 검제는 결국 본능이 수행하는 치료를 보조하며, 간호하며, 고무함에 불과하고, 무릇 치유 과정은 그 자신의 충동에 의하여 저절로 자발적으로 자연히 성수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시에 본능은 병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 병적 징후에 직접으로 작용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는 것이니, 원시 병세는 합목적적으로 진행하는 법이며, 그 자체가 치유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적 증상은 진행될 데까지 진행되면 자연히 없어진다.
본능의 자기 치료는 그보다는 새로운 구성과 조직 속에 성립되는 것으로 병자와 의사는 이 새로운 구성과 조직을 향하여 가장 신중히 또 가장 완곡히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는 것이니 새로운 구성과 조직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물론 휴양이요, 안정이요, 정력의 절약이요, 공기요, 일광이요, 쾌활한 기분 등이다. 여타지물은 그 후에 비로소 필요하다면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환자에게 만일에 경청하는 능력이 있다면 그는 곧 본능이 전연히 단독으로 병에 대하여 유용한 것을 염원하고 유해한 것을 염기하는 사실을 인식할 것이니, 대개 병중에 환자의 좋아하는 바가 병에 이로우며, 환자의 싫어하는 것이 병에 독이 되는 이유는 실로 본능에 엄격한 명령, 그 속에서 탐지되어야 한다.
본능은 신뢰를 굳이 의욕한다. 본능이 확호한 자신을 가지고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리하여 그에 대하여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면 취할수록 보다 신속히 자기 치료의 효과는 발생하는 것이니, 이것이 실로 치료 방법의 근본 원리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본능이 육체를 치료함과 같이 정신은 영혼을 치료한다. 여기서도 치료가 자기 치료를 의미함은 물론이니, 다만 여기 있어서는 그 치료의 방향이 '하부에서' 오지 아니하고 '상부로부터' 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병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중병 상태에 처하여 있는 경우에라도 불평과 원한과 절망을 품어서는 아니 되고 일종의 철학적 달관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병에는 평온한 영혼, 쾌활한 기분, 부동의 신념이 절대로 필요하다. 병이란 흔히 뻗대는 성질의 것이므로 병의 치유에는 또한 어느 정도로 유장한 시간과 공간(병원, 온천, 요양지 등)이 필요한 것이다. 이 모든 조건은 병에 대하여 은혜를 끼치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중대한 투병의 단계는 이 모든 조건을 구비한 후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이 진지한 투병에 있어서 본능과 정신 양자가 병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는 중대한 발언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평상시에 심신을 잘 조정할 줄을 몰랐다는 것이요, 또 내가 건강을 하늘이 주신 선물로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병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이 져야만 된다는 것이요, 그리하여 건강은 그 자체가 이미 행복과 열락을 의미한다는 것 등이니, 사실 내가 아름다운 것으로 충만한 이 인생에 대하여 눈을 감고 무관심하게 지내왔다는 것, 그리하여 애와 선과 희생과 영웅적 행동에 대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안전에 제공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의 탓으로 하여 그대로 간과하여 버리고, 그와는 반대로 내가 이제까지 가장 훌륭한 선물의 낭비자로서만 살아왔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냐!
우리는 병석에 누워 흔히 내일부터는 이 인생을 다시 시작할 것을 결심하는 것이니, 병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원시 반평생을, 아니 일평생을 고생으로 산다는 것, 그리하여 사람이 고뇌를 통하여 자각과 청정과 개선에 이를 수 있으며, 모든 고뇌로부터 일편의 참된 혜지를 급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병은 여실히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병은 참으로 우리들 사람을 위하여, 다행한 교도자다. 병은 사람의 새로운 육성을 위하여, 휴양을 위하여, 또 그 순화를 위하여 막대한 진력을 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 위에 우리는 장차 병으로부터 해방되어 쾌유의 즐거운 날을 가질 것이 아니랴! 이 위에 더 여하한 위안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병은 흔히 사람을 신경지로 만든다. 환자의 이 애처로운 심리를 우리는 승인하지 못할 바 아니나 이것은 그가 아직도 정신의 그윽한 소리를 듣지 못한 탓이라 할지니, 병자가 명심해야 할 것은 병에 구이함이 없이 병으로부터 초월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대개는 자기 자신에게서 온 이 시련을 감수하여 써 자기를 육성하는 한 좋은 수단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확실히 사람은 병에서 크는 것이다. 아이들이 병에 울 때 우리는 보통 '자고 나면 낫는다.'고 말한다. 수면은 병에 있어서 약이다. 수면이 경과의 양불호를 결정하는 신묘한 복선이 되는 것도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 사실이다. 수면이라면 병중에 우리를 부단히 습격하는 저 수마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병자에게 허락된 유일한 위안은 독서다. 그런데 시력이 쇠하고 팔힘이 부족한데다가 책을 보기만 하면 우리의 정신이 잠들어 버리는 데는 감당할 도리가 없다. 무엇을 생각하다가도 곧 잠드는 것인데, 다시 잠을 깨고 나면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다. 병 중에 가장 우울한 시간은 식사 시간이니, 식사래야 미음 아니면 죽 등 속으로 가히 연설할 나위가 못 되거니와 구미가 쓰고 혀는 깔깔하여 그것일망정 약을 먹듯이 먹어야 되고 달게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 유감이기 때문이다. 병자는 식전 식후에 누워서 한가함에 맡겨 자기가 일찍이 맛본 진수 성찬의 한 가지 한 가지를 입 위에 가만히 얹어 보는 것이나, 단 한 가지라도 구미에 당기는 것이 없는 데는 삭연한 감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병으로 누워서 사람은 더욱이 먹는 재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흔히 병 중에 못 먹은 분량의 음식을 병 후에 결국은 다 찾아 먹고야 만다.
또 병상에 누워 있으면 자기가 일어나서 직접 나아가 볼 수 없는 까닭으로 자기와 완전히 격리된 이 세상은 사실 이상으로 지극히도 멀어 보이는 법이다. 그 먼 세상에서 아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먼 세상의 소식을 전할 때 병자가 받는 인상은 예상 이상으로 신선하고도 강렬하다. 이 사실은 사람이 공동 생활을 떠나서는 하루라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말하는 것밖에 없다. 사람이 병에서 크는 것과 동일한 근거에서 사람은 또한 병 때문에 늙기도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나이를 먹은 후에 병을 앓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곧 수긍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번의 병에서 통절히 경험하였다. 하여간 병을 하나의 위안으로 삼는 기술을 체득한다는 것--이것이야말로 병자에 대하여 가장 중대한 생명 철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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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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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
1
끝기도를 끝내고 나의 긴 그림자를 끌고 오는 밤의 숲길에서 나무들이 나를 부르는 침묵의 소리. 짙은 향기를 남기며 사라지는 백합들의 마지막 노랫소리. 나무층계를 오르다가 문득 올려다본 하늘의 별. 나는 그만 황홀하여 갈 길을 잃고 말았네.
2
젊은 날 사랑의 뜨거움이 불볕 더위의 여름과 같을까. 여름 속에 가만히 실눈 뜨고 나를 내려다보던 가을이 속삭인다. 불볕처럼 타오르던 사랑도 끝내는 서늘하고 담담한 바람이 되어야 한다고 - 눈먼 열정에서 풀려나야 무엇이든 제대로 볼 수 있고. 욕심을 버려야 참으로 맑고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 어서 바람 부는 가을숲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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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바람도 하늘빛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들도 기도의 말들도 모두 너무 투명해서 두려운 가을빛이다. 들국화와 억새풀이 바람 속에 그리움을 풀어헤친 언덕길에서 우린 모두 말을 아끼며 깊어지고 싶다. 가을 하늘에 조용히 떠다니는 한 조각의 구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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