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28호 》 2022.8.13 (음 7.16)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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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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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그루의 나무로 울창해진 숲도 한 톨의 도토리로부터 비롯된 것.
― 랠프 월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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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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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말
기억에는 ‘의미기억’과 ‘사건기억’이 있다. 의미기억은 ‘나무에는 뿌리가 있다’는 식으로 별 맥락 없이도 저장되는 일반 지식이다. 사건기억은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기억이다. 감각, 감정이 함께 저장된다. 싸리나무로 만든 칼로 놀던 모습, 사다리에서 추락하면서 느낀 공기의 촉감 같은 것들이다. 기억은 언어를 넘어선다. 모든 감각과 감정이 동원된 것이라 톡 건들기만 하면 와르르 쏟아진다. 예고되거나 꾸준하지 않고 ‘불쑥’ 떠오른다. 옥상에서 담요를 안고 오다가 맡은 엄마의 등짝 냄새 같다.
‘기억’을 말로 표현해보면 정확하게 복원되지 않는다. 서류처럼 펼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매번 지금 내 상황과 연결해 다시 경험하고 재구성한다. 타인의 증언으로도 쉽게 수정된다. 인과관계가 달라지고 평가와 의미도 변한다. 기억은 변한다. 그래서 불행하거나 불우한 기억마저 어떤 언어로 기억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결국 기억은 말을 넘어선 문제이기도 하고 말의 문제이기도 하다.
돌림병이 다시 알려주었지만, 우리는 이미 죽음을 앞뒤에 모시고 산다. 우리는 길 잃은 연약한 존재이다. 죽음이 두려우니 죽음에 대한 의례가 가장 많다. 아기들도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분하고 달리 대한다. 놀랍게도 인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노래와 시와 그림과 춤을 만들어내도록 진화해왔다. 죽음은 개인이 당면해야 할 일이지만 개인에게 모든 걸 맡기지 않는 것, 죽음에 대해 말함으로 죽음을 뛰어넘는 것, 그게 연약한 인간의 본성이다. 연약한 사람들이 하는 일은 기억과 연대, 그리고 말하기.
고쳐지지 않는다
지난달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민들이 외국어 표현을 얼마나 이해하는지 조사했더니 ‘신문맹’이라 할 만큼 심각하더라는 보도자료(☞더보기)를 냈다. 60% 이상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외국어가 31%밖에 되지 않고 세대 간 편차도 심했다. 60% 이상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단어가 60대 이하에서는 39%인데 70살 이상에서는 7%도 안 됐다.
숨을 한번 들이쉬고 다시 보자. 당연한 결과 아닐까? 모든 세대가 외국말을 잘 알면 더 이상하다. ‘QR코드, 팝업창, 키워드, 패스워드’ 등에 대해 60대 이하와 70대의 이해도 차이가 50%포인트 이상 나고, 70대의 90%가 ‘루저, 리워드, 스트리밍, 리스펙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외국어로 인한 신문맹이 우려’된다는 건 과하다.
이 칼럼을 매주 쓰면서 두가지 각오를 하고 있다. 아는 체하지 말 것(밥맛임). 중학생이 읽어도 알 수 있을 것. 쉽게 쓰려고 애쓰지만 그것이 우리말의 ‘아름다움’ 때문은 아니다. 우리말은 더럽지도 않지만 아름답지도 않다. 말에 외국어가 뒤섞이는 현상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 안에 들어온 외국어는 전염성이 있거나 민족정신을 빨아먹는 바이러스가 아니다.
민주 사회에서 언어 순화는 불가능하다. 말은 스스로 굴러가게 놔두는 게 상책이다. 언어는 퇴행하지 않는다. 그저 달라질 뿐. 지금도 잘 굴러가고 있다. 공공언어를 인권과 평등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걸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과잉된 언어 순수주의는 복잡한 언어를 옳고 그름의 문제로 단순화시킨다. 언어는 순화의 대상이 아니다. 자제의 대상일 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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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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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童詩>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 김수영
야 손들어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빵! 빵! 빵!
키크야! 너는 저놈을 쏘아라
빵! 빵! 빵! 빵!
짜키야! 너는 빨리 말을 달려
저기 돈보따리를 들고 달아나는 놈을 잡아라
쬰! 너는 저 산위에 올라가 망을 보아라
메리야 너는 내 뒤를 따라와
이놈들이 다 이성망이 부하들이다
한데다 묶어놔라
야 이놈들아 고갤숙여
너희놈 손에 돌아가신 우리 형님들
무덤 앞에 절을 구천육백삼십만번만 해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두목! 나머지 놈들 다 잡아왔습니다
아홍찐구놈도 섞여있구나
너 이놈 정동 재판소에서 언제 달아나왔으냐 깟땜!
오냐 그놈드을 물에다 거꾸로 박아놓아라
쨈보야 너는 이성망이 놈을 빨리 잡아오너라
여기 떡갈나무 잎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하와이 영사한테 보여라
그리고 돌아올 때는 구름을 타고 오너라
내가 구름운전수 제퍼슨 선생한테 말해놨으니까 시간은
2분밖에 안 걸릴 거다
이놈들이 다 이성망이 부하들이지
이놈들 여기 개미구멍으로 다 들어가
이 구멍으로 들어가면 아리조나에 있는
우리 고조할아버지 산소 망두석 밑으로 빠질 수 있으니까
쨈보야 태평양 밑의 개미 길에 미국사람들이 세워놓은 자동차란 자동차는
삭 없애버려라
저놈들이 타고 가면 안된다
야 빨리 들어가 하바! 하바!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아리조나 카보이야
<19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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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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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탁마(切磋琢磨)
- 옥, 돌, 상아 따위를 자르고 쪼고 갈고 닦아서 빛낸다는 뜻으로, '학문, 덕행을 갈고 닦음'의 비유. 《出典》'論語' 學而篇 / '詩經' 衛風篇
《論語》'學而篇'에는《詩經》에 실려 있는 시가 인용되고 있다.
자공(子貢)이 孔子께 여쭈었다.
"가난해도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면서 교만함이 없는 것은 어떠합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그러나 가난해도 도(道)를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절을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느니라." 자공(子貢)이 다시 여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끊는 듯이 하고, 닦는 듯이 하며, 쪼는 듯이 하고, 가는 듯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것을 이릅입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사(賜)야, 비로소 더불어 시를 논할 만하구나. 지난 일들을 일러 주었더니 닥쳐올 일까지 아는구나."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
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 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원 말】여절여차 여탁여마(如切如磋 如琢如磨)
【준 말】절마(切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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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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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4장
보수적 전통주의자인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사람인가?
회상의 이야기는 역사를 기억으로 보여주지만 다른 이야기(말하자면 신화의 형식)는 역사를 의미로 보기 때문에, 이 두가지 이야기 방식은 모두-그것들이 무엇을 말하든지간에-그들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다. 회상의 이야기도 의미의 이야기도 모두 현재에로 귀결된다. 나아가서 의미와 회상은 전혀 뚜렷이 구별될 수 없다. 각각 서로 다른 것을 필요로하며, 서로 그 속에 융합되어 있다. 우리는 가금 참으로서의 역사와 허위로서의 신화를 구분하지만 사실 이런 구분의 (이유가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구분은 우선 너무나 과민한 것이어서 쉽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 이야기가 회상 이야기보다 눈에 띄는 선명성이 있다고 보는한, 신화 이야기가 보다 의미 깊고 보다 지속적 타당성을 가지기 때문에 그런 구분이 통용된다. 왜냐하면 신화 이야기는 많은 의미를 준다. 즉 이것이 의미 그 자체인 것으로 통용되는 한, 적절한 신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소박하게 이해한 인생보다는 신화의 방식에서 더 중요한 의미가 드러난다. 이 <다른> 영역은 언제나 의미 있는 영역임은 물론 의미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 있는 이야기들은 전형적으로 이중적인 역사성을 지닌다. 첫째, 이야기의 형식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은 바로 (특정) 시간-요컨대 역사의 한 단락-안에서 의미 있게 연결되는 일련의 사건들로서 나타나는 인생의 의미를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둘째,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바와 같이, (실제 삶의 생생한 사건들과 구분되는) 이야기라는 <별개성> 또는 <초월성>은 전체 이야기를 먼 과거 또는 아주 먼 장소, 혹은 이 둘다에다 서러정하는 이야기 형식속에 이미 드러나 있다. 내가 의미 이야기(즉 신화)에 대립하여 명명한 회상 이야기(즉 역사)를 신종하는 현대 유럽 문명권의 사람에게는, 의미란 결국 암암리에 회상속으로 섞여 들고 만다. 즉 역사라는 것이 말하자면 그들의 신화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이 많아질수록 표면상 의미 이야기, 즉 신화들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상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근거하고 있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신화의 무대가 되는 그 해당 시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사건들이다.
의미를 주는 이야기가 먼 과거의 일로 설정될 때는, 일반적으로 그 이야기 자체는 역사적인 과거, 회상된 역사적 과거와 사실상 연관을 갖는, 그런 과거의 일이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구성된 이야기나 계보는 일반적으로 실제의 역사적인 과거의 그(이야기 속의) <다른>(<옛날의>)과거를 연결시키고 있다. 비록 다른 영역(즉 이야기 세계)의 존재들이 실제 일어나는 인간 역사에 대비되는 그것들 자신의 역사-물론 인간들이 실제 눈을 뜨고 활동하는 동안 보통 눈에 띄지 않지만-를 계속하고 있음을 우리가 적지 않게 자주 발견하게 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추상적 이론과 개념적 분석이 발명되었음에도 구하고, 아런 이야기를 사용하는 경향은 결코 서구 문명권에서는 사라진 적이 없었다. 우리(서구인들)는 역사적으로 참으로 빈번하게 다종 다양한 이론적 이데올로기나, 교설, 구호(<자유 언론>, <인권 보장> 등등)들의 노예였다. 아직도 우리는 (기억된 과거만을 유의미한 것으로 정리하는) 이른바 역사의 연구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 이야기, 정치적인 신화 창조, 상업성을 띤 <인물 만들기>나 <각종 표창>, 그리고 (통속적인) 드라마, 예술, 문학 등을 정말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사고와 감성의 제 양태로 보고 그것들에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그 나름의 독자적인 근거에서 예식의 이미지, 따라서 전통이라는 이미지를 통한 인간다움의 실현을 깨닫게 되었다. 공자가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 형식-즉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것은 아주 독특하게 적절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의 내용은 인생의 의미를 사색하는 모든 형태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마도 가장 의미를 불러일으키기 용이한 형식과 완벽하게 합치하는 것이었다. 비록 이런 방식의 이야기 형식이 <고풍스런> 사유 형식이지만, 그런 이야기 형식은 현대의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완전한 고대로의 순전한 복귀가 아니듯이, 공자에게 있어서도 고대로의 순전한 복귀가 아니었다. 공자는 인간의 본성과 (그의 자율적,능동적인) 능력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통찰에 근거를 둔 이념을 제시함에 있어서 신화적인 과거의 이야기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공자의 사유 속에는 (의미를 산출해 내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라는) 형식적인 모습이 그의 (전통에 결정적 역할을 부여하는) 가르침의 내용과 혼융되어 있다. 말하자면 공자는 그의 이사의 내용이 되는 전통에 대한 깊은 존경과 충성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아주 적절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긔 공자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바로 그의 가르침을 서구인의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구해 내어, 그것을 모든 인류에 대한 적절하고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밝히는 일이 된다. 우리는 옛날 방식에의 <복귀>를 가르치는 사람(즉 공자)을 둘러싼 문화적 갈등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자의 서술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의 가르침은 진정으로 역사적이며 내적 일관성이 있고 단지 전적으로 적절한 전통의 소유(즉 전통에로의 완벽한 복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오히려 공자의 가르침이 주는 과제는 공자 자신이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사실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갈등 많은 현재를 인간답게 하고 조화롭게 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을 얻어 낼 수 있도록 자신의 전통에서 (참신한) 영감을 찾아 내라는 것이었다. <옛 것을 되살리어 새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옛 것을 되살리려는 일>(온고)의 목적은 어쩌면 (문제 많은) 현실 속의 전통들에 대한 (진지하고도 철저한 근본적인 새로운 개혁책을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전통을) 무책임하고 자기 편한대로 대충 취급하는 미봉책을 호도하려는 완곡 어법, 즉 위선이나 자기 합리화의 일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그 점을 확실하게 부인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옛것을 믿고 또 사랑한다> 즉 전통에 대한 해석은 인간의 과거에 대한 참된 사랑과 존경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 에수, 불타는 모두 그들의 전통에 대하여 진정으로 심오하게 그리고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전통을 되살린 사람들의 본보기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유학자들이나, 기독교들 그리고 불교도들은, 그들의 현재 목적에 영합하는 말씀이나 행위라면-그것이 무슨 맥락의 전통이든지간에-(그 전통의 생생한 현장적 의미 추구를 사상해 버리고 오직 상투화된 죽은 형식적) 전통만을 조금씩 조금씩 뽑아 쓰고만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질적인 전통 묵수의) 태도는 (불가피한 것이 아닌) 자명한 전통 오용인 것이다. 전통적인 형식이나 예식들에 대하여 아무리 그것들이 현재 상황에 부적절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혀 개의하지 않고 아주 완고하고 무비판적으로 묵수하려는 사람들은 이제 누구나 다 똑같이 세 사람의 위대한 전통 개혁자(즉 공자, 예수, 불타)들의 태도와 대비되어 비판을 받아야만 한다.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를 알려는 방법으로서의 꾸준한 온고의 태도는 결코 편협하고 답답한 이상이 아니다. 온고의 태도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다 적절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유효 적절한 통찰의 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본능이나 조건에 따라 (물리적, 기게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지성적인 관습적 방식에 따라 (자율적, 능동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독특한 (자율적인) 능력과 존엄성을 갖는 것이다. (이 점은 바로 오늘날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철학적 분석가들이 말하는 바이다) 철학적 분석가들이 관습이 지니는 지성적 측면의 관점에서 보자면, 삶의 여러 형태들은 (천재의 어떤 기발한 순발력에 의해)갑자기 한번에 고안됐거나 수용된 것이 아니다. 삶의 여러 형태들은 우선적으로 앞선 시대로부터 관습으로 전래된 언어와 실천의 방대한 체계를 각 시대마다 계승하여 생겨난 것이다. 오로지 전통적인 방식들을 철저하게 쫓아서 참되게 성장함으로써만이 우리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오직 되살림으로써만, 우리는 우리들 삶의 통합성과 방향성을 유지하게 된다. 똑같은 전통을 지님으로써 사람들은 서로 결합하게 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사람이 되게끔 한다. 모든 전통의 포기는 인간들의 분열을 가져온다. 전통을 되살리려는 진정한 온고의 노력은 (분열되는) 인간들을 통합시킴에 있다.
인간 통합에 대한 이런 실제적 비젼은 단순히 정치적인 비젼만이 아니다. 비록 이러한 공자의 비젼이 기록된 역사에 있어서 가장 웅장하고 성공적인 정치적 비젼 중에 하나이자만, 그것은 철학적 비젼이요, 종교적 비젼이기까지도 하다. 공자의 비젼은 전승된 삶의 형태에 뿌리를 내린 공동체, 바로 그 공동체 안에서 생생하게 존재하는 신성스럽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나타내 준다. 우리의 현대 세게는 신기한 호기심, 광적인 변화나 위기에 대한 지향만이 너무나 지나치게 용인되고 정당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대의 세게에서 공자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 비젼은 단지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일축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공자의 관점은 그것의 발생지였고, 그 후대에 지나치게 전통에 모든 근거를 두었던 중국에서 보다도, 오히려 오늘의 우리(서양) 세게에 보다더 적합하고, 보다더 시의 적절하며, 버다더 시급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공자의 비젼이 지닌 진리를 깊이 통찰해 볼 필요가 있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 우리 시대에는 너무나 생소하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 참뜻에 무지한 것은 너무나 먼 시대적인 이질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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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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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6장 포숙아, 관중을 추천하다
오족 공자의 추방
이 날 남궁장만은 송민공의 종제(從弟) 공자 유(遊)를 군위에 올려 모셨다.그리고 무공(武公), 선공(宣公), 목공(穆公), 장공(莊公), 역대 임금의 족속(族屬)을 모조리 추방했다.오족(五族)의 모든 공자들은 남궁장만에 의해 추방되어 소읍(蕭邑) 땅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공자 어설(御說)은 박 땅으로 도망쳤다. 남궁장만이 아들과 맹획을 불러놓고 말했다.
"어설(御說)은 학문이 있고 재주가 있으며 바로 송민공의 친동생이다. 그 놈이 지금 박 땅으로 도망쳐 가 있으니 장차 변(變)을 일으키고야 말 것이다. 어설만 죽이면 다른 공자들이야 걱정할 것 없다."
이에 남궁장만의 아들 남궁우(南宮牛)는 맹획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박 땅을 쳤다. 한편 소읍의 수령 숙대심(叔大心)은 오족(五族)의 모든 공자들을 받들어 모시고, 이웃 조(曹)나라에서 군사를 청해 가지고 박 땅을 구원하러 갔다. 이에 공자 어설은 크게 기운을 얻어 박 땅의 백성을 일으켜 남궁우의 군사를 협공했다. 이 싸움에서 박 땅의 백성들은 열심히 싸워 끝내 남궁우를 죽이고, 송군들은 모두 공자 어설에게 항복했다. 맹획은 돌아갈 면목이 없어서 위나라로 달아났다. 대숙피가 공자 어설에게 계책을 말했다.
"항복한 군사를 이용해서 도성의 남궁장만에게 거짓 귀환케 하고 승리했다는 보고를 올리게 하십시오. 그런 후에 그들 군사 속에 오족의 공자들과 우리측 사람들을 끼워 보내서 들이치면 남궁장만이 제 아무리 힘이 센들 어찌 견디겠습니까?"
공자 어설은 대숙피의 계책대로 항복한 군사와 이쪽 병사들을 위장시켜 보냈다. 성문을 지키는 자는 이쪽 병사들이 숨겨진 것을 모르고 병사들을 맞이했다. 그러자 도성 안으로 들어간 오족(五族)의 공자들이 외치고 다녔다.
"역적 남궁장만 그 놈만 잡으면 된다. 다른 사람들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일이 이쯤 되고 보니 남궁장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급히 궁으로 달려가 공자 유를 모시고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궁중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한 내시가 말했다.
"임금께서는 이미 군사들에게 피살되었습니다."
남궁장만은 이미 대세가 기운줄 알고 크게 탄식했다. 그는 진나라로 도망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팔십이 넘은 노모(老母)가 한 분 있었다. '내 어찌 인륜을 어기고 늙으신 어머니를 두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칠 수 있으리오.' 그는 집으로 가 늙은 어머니를 수레에 태우고, 한 손엔 칼을 뽑아 들고 한 손으론 수레를 밀면서 지키는 군사들을 헤치고 나갔다. 그는 성문을 벗어나자 바람처럼 달아났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뒤쫓는 자는 없었다. 송나라에서 진나라까지는 2백60리였다. 그런데 남궁장만은 수레를 끌고서 하루 만에 진나라에 당도했다. 이런 신력(神力)은 고금에 보기 드문 것이었다.
송환공의 즉위
이리하여 공자 기(旣)는 공자 유(遊)를 죽이고 공자 어설을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 그가 바로 송환공(宋桓公)인 것이다. 이에 대숙피(戴叔皮)는 대부가 되고 오족(五族)중에서 이번 거사에 공로를 세운 자는 모두 공족 대부(公族 大夫)가 됐다. 그리고 숙대심(叔大心)은 다시 소읍으로 돌아갔다. 송환공은 사자를 위나라로 보내어 맹획을 넘겨달라고 했다. 그리고 사자를 진나라로 보내어 남궁장만도 잡아 보내 주기를 청할 계산이었다. 이 때 공자 목이(目夷)는 나이가 어렸다. 마침 송환공 곁에 앉았다가 말했다.
"진나라는 남궁장만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송환공이 물었다.
"왜 그런가?"
공자 목이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용력(勇力) 있는 자를 공경합니다. 우리 송나라는 남궁장만을 버렸지만 진나라는 반드시 그를 보호할 것입니다. 그러니 빈 손으로 가서 청하면 진나라가 어찌 우리 송나라를 위해 힘쓰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송환공은 크게 기뻐하며 사자에게 귀중한 보물을 많이 내주었다.
"이걸 진나라에 주고 잘 부탁하여라."
이리하여 사신들이 진 . 위 두 나라로 갔다. 우선 위나라로 간 송나라 사자를 보자 위혜공(衛惠公)은 사자로부터 송나라의 청을 듣고서 모든 신하에게 물었다.
"맹획을 돌려달라는데, 보내는 것이 좋겠느냐? 안 보내는 것이 좋겠느냐?"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위급을 면하려고 우리에게 도망 온 사람을 어찌 되돌려보내 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가 도적질을 했거나 살인 강간범이 아닌데 말입니다."
대부 공손 이(耳)가 간했다.
"천하의 악(惡)은 어디 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송나라 악이 우리의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악을 저지른 사람을 이 곳에 두어 우리 나라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우리는 송나라와 마찰없이 지내왔습니다. 이번에 맹획을 잡아 보내지 않는 일로 송나라와 사이가 멀어진다면 결코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위혜공은 송나라에서 보낸 보물도 탐나려니와 공손 이가 간하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군부에 명하여 맹획을 결박지어 송나라 사자에게 내주게 했다. 한편 진나라에 간 송나라 사자는 진선공(陳宣公)에게 귀중한 보물을 바치고 자기가 온 뜻을 말했다. 진선공 역시 그 보물이 탐났다. 그래서 쾌히 응낙했다.
"과인이 남궁장만을 잡아 보내리라."
그러나 진선공은 남궁장만의 용력을 아는지라 한 가지 계략을 꾸몄다. 하루는 진나라 결(結)이 남궁장만에게 말했다.
"우리 주공은 그대를 얻은 것이 참으로 기쁜지라 송나라에서 아무리 그대를 보내달라고 요구해도 그대를 내주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송나라 입장도 있을 것이니 무작정 떼쓰듯이 안 된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겠소. 그러니 우리 둘이서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몇 달 시간을 보내며 놀다 오면 상황도 바뀔 테니 어떻겠소?"
남궁장만이 감격하여 대답했다.
"이렇듯 생각해 주시니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말씀대로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이에 공자 결은 남궁장만과 밤새워 술을 마시며 형제의 의까지 맺었다. 이튿날이 되었다. 남궁장만은 공자 결의 집으로 가서 사례했다. 공자 결은 미리 준비해 둔지라 남궁장만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침부터 술상이 들어오고 비첩들까지 나서서 너도나도 남궁장만에게 술잔을 권했다. 남궁장만은 사양않고 계집들이 권하는 대로 술을 받아 마시며 즐기다가 크게 취했다.
붙잡힌 남궁장만
마침내 그는 크게 취하여 쓰러졌다. 공자 결이 문을 열고 바깥을 향해 신호하자 난데없는 역사(力士)들이 들어와 서피(犀皮) 포대에 대취해 쓰러진 남궁장만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들은 질긴 쇠심줄(牛筋)로 남궁장만을 넣은 서피 포대를 단단하게 묶었다. 이리하여 진선공(陳宣公)은 그 늙은 어머니까지 함께 잡아서 송나라 사자에게 내주었다. 송나라 사자가 남궁장만 모자를 잡아넣은 함거(檻車)를 몰고 돌아가는 도중에 그는 술이 깼다. 남궁장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바둥댔으나 단단하기가 무쇠 같은 서피 가죽과 쇠심줄(牛筋)로 된 질긴 포승줄에서 결코 벗어날 순 없었다. 거의 송나라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워낙 남궁장만이 용력을 쓴지라 서피 가죽이 여기저기 찢어져서 남궁장만의 손과 발이 다 포대 밖으로 삐져 나왔다. 이를 보자, 압송하던 군인들은 손발을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쇠뭉치로 치고 찌르고 짓이겼다. 마침내 송환공의 명령(命令)으로 맹획과 남궁장만은 시정(市井)으로 끌려나갔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백정이 휘두르는 무수한 쇠망치에 맞아 고기덩어리로 변했다. 송환공은 다시 백정에게 명하여 처치한 남궁장만과 맹획의 살점을 떠서 소금에 절이게 하고 그 고기를 모든 신하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신하된 자로서 능히 임금을 섬기지 못하는 자는 이 소금에 절인 고기를 보아라."
남궁장만의 팔십 노모도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처리한 후 송환공은 숙대심의 공로를 높이 사서 소읍을 부용(附庸: 屬國이란 의미)으로 승격시키고 숙대심을 소(簫)의 주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번 난에 죽은 화독의 아들에게 사마(司馬) 벼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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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광수편"
이광수(1892~?)
소설가. 호는 춘원. 평북 정주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중퇴. '창조' 동인.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편집 국장 역임. 6.25사변 때 납북. 이광수는 최남선과 함께 우리 나라 신문학의 개척자이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그는 계몽적이며 인도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썼다. 장편 소설에 "무정" "개척자" "흙" "유정" "사랑" 등이 있고, 단편 소설에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 "꿈" 등이 있다.
금강산 기행
우리는 점심을 먹고 이럭저럭 한 시간이나 넘게 기다렸으나, 이내 운무가 걷히지를 아니합니다. 나는 새로 두 시가 되면 운무가 걷히리라고 단언하고 그러나 운무 중의 비로봉도 또한 볼 만한 것이다 하며 다시 올라가기를 시작했습니다. 동으로 산마루를 밟고, 줄 타는 광대 모양으로 수십 보를 올라가면, 산이 뚝 끊어져 발 아래 천 길 낭떠러지가 있고, 거기서 북으로 꺾여 성루 같은 길로 몸을 서편으로 기울이고 다시 수십 보를 가면 뭉투룩한 봉두에 이르니 이것이 금강 만 이천 봉의 최고봉인 비로봉의 머리외다. 역시 운무가 사방으로 막혀 봉두의 바위들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 바윗돌 중에 중앙에 있는 큰 바위를 '배바위'라 하는데, '배바위'라 함은 그 모양이 배와 같다는 것이 아니라, 동해에 다니는 배들이 그 바위를 표준으로 방향을 찾는다는 데서 나온 이름이라고 안내자가 설명합니다. 이 바위 때문에 해마다 여러 천 명의 생명이 살아난다고, 그래서 선인들은 멀리서 이 바위를 향하여 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이 안내자의 말이 참이라 하면, 과연 이 바위는 거룩한 바위외다.
바위는 아주 평범하게 생겼습니다. 이 기묘한 산마루에 어떻게 이렇게 평범한 바위가 있나 하리만큼 평범한, 동그란 바위외다. 평범이란 말이 났으니 말이지, 비로봉두 자신이 극히 평범합니다. 밑에서 생각하기에는, 비로봉이라 하면 설백색의 칼끝 같은 바위가 하늘을 찌르고 섰을 것 같더니, 올라와 본즉 아주 평평하고, 흙 있고 풀 있는 한 조각의 평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저기 놓인 바위도 그 모양으로, 아무 기묘함이 없이 평범한 바위외다. 그러나, 평범한 이 봉이야말로 만 이천 중의 최고봉이요, 평범한 이 바위야말로 해마다 수천의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덕을 가진 바위외다.
위대는 평범이외다. 나는 이에서 평범의 덕을 배웁니다. 평범한 저 바위가 평범한 봉두에 앉아 개벽 이래 몇천만 년을 말없이 있건마는, 만인이 우러러보고 생명의 구주로 아는 것을 생각하면, 절세의 위인을 대하는 듯합니다. 더구나 그 이름이 문인, 시객이 지은 공상적, 유희적 이름이 아니요, 순박한 선인들의 정성으로 지은 '배바위'인 것이 더욱 좋습니다. 아마 이 바위는 문인, 시객의 흥미를 끌 만하진 못하겠지마는, 여러 십리 밖 드넓은 바다로 다니는 선인의 진로의 표적이 됩니다.
배바위야, 네 덕이 크다. 만장 봉두에 말없이 앉아 있어
창해에 가는 배의 표적이 된다 하니,
아마도 성인의 공이 이런가 하노라.
만 이천 봉이 기로써 다툴 적에
비로야, 네가 홀로 범으로 높단 말가.
배바위 이고 앉았으니 더욱 기뻐하노라.
이윽고 두 시가 되니, 문득 바람의 방향이 변하여 운무가 걷히기 시작하니, 동에 번쩍 일, 월출봉이 나서고, 서에 번쩍 영랑봉의 웅혼한 모양이 나오며, 다시 구룡연 골짜기의 봉두들이 백운 위에 드러나더니, 문득 멀리 동쪽에 짙푸른 동해의 물결이 번뜻번뜻 보입니다. 그러다가 영랑봉 머리로 칠월의 태양이 번쩍 보이자 운무의 스러짐이 더욱 빨라져, 그러기 시작한 지 불과 4, 5분 후에, 천지는 물로 씻은 듯이 본래의 제 모양을 드러내었습니다. 아아, 그 장쾌함이야 무엇에 비기겠습니까? 마치 홍몽 중에서 새로 천지를 지어 내는 것 같습니다.
"나는 천지 창조를 목격하였다."
"나는 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
하고 외쳤습니다. 이 마음은 오직 지내 본 사람이어야 알 것이외다. 어둡고 어두운 홍몽 중에 난데없이 한 가닥 밝은 빛이 비치어 거기 새로운 봉두가 드러날 때, 우리가 가지는 감정이 창조의 기쁨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나는 창조의 기쁨에 참여하였다."하고 싶습니다.
홍몽이 부판하니 하늘이요 땅이로다.
창해와 만 이천 봉 신생의 빛 마실 제,
사람이 소리를 높여 창세송을 부르더라.
천지를 창조하신 지 천만 년가 만만 년가.
부유 같은 인생으로 못 뵈옴이 한이러니,
이제나 지척에 모셔 옛 모양을 뵈오니라.
진실로 대자연이 장엄도 한저이고.
만장봉 섰는 밑에 만경파를 놓단 말가.
풍운의 불측한 변환이야 일러 무삼하리요.
참말 비로봉두에 서서 사면을 돌아 보면, 대자연의 웅대, 숭엄한 모양에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봉의 높이는 겨우 6천 9 척에 불과하니, 내 키 5척 6촌에서 이마 두 치를 감하면, 내 눈이 해발 6천 14척 4촌에 불과하지마는, 첫째는, 이 봉이 만 이천 봉 중의 최고봉인 것과, 둘째 이 봉이 바로 동해 가에선 두 가지 이유로 심히 높은 감각을 줄 뿐더러, 그리도 높고 높게만 보이던 내금강의 여러 봉이 저 아래 2천 척 내지 3, 4천 척 밑에 모형 지도 모양으로 보이고 동으로는 창해가, 거리는 40리가 넘지마는, 뛰면 빠질 듯이 바로 발 아래 들어와 보이는 것만 해도 그 광경의 웅장함을 보려든, 하물며 사방에 이 봉 높이를 당할 자가 없으므로, 한계가 무한히 넓어 지름 수백 리의 일원을 일모에 내려다봄에랴. 그 웅대하고 숭고한 맛을 비길 데가 없습니다.
비로봉에 올라서니 세상 만사 우스워라.
산해 만리를 일모에 넣었으니,
그 따위 만국 도성이 의질에나 비하리요.
금강산 만 이천 봉 발 아래로 굽어보고,
창해의 푸른 물에 하늘 닿는 곳 찾노라니,
청풍이 백운을 몰아 귓가으로 지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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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기도일기
봄꽃들의 축제
12
중부지방에 내린 큰비로 집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지금 내가 있는 곳엔 햇볕이 쨍쨍하니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다른 이의 몸과 마음이 아픈 걸 빤히 보면서도 내가 아프지 않으면 그저 겉도는 동정을 할 뿐 깊이 실감하지 못하는,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식량의 위협을 받는 북한 동포들의 소식을 들어도 그저 냉랭하기만 한 나를 반성하며 오늘은 다락방에서 혼자 울었다.
13
"언니가 무얼 알아? 뭐니뭐니 해도 여자는 아이를 낳아 키워 봐야 철도 들고 인생을 아는 거라구." 불쑥 전화를 걸어 내게 힘주어 말하는 동생에게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 "그래, 그건 나도 알어. 그러니 이제 어쩌란 말이니?"라고 대꾸해도 왠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다. 그래도 힘들고 괴로운 일만 생기면 제일 먼저 내게 전화를 걸어 "언니야?" 언니는 어쨌든 나보다 하느님 가까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급히 기도 좀 해주라. 알았지? 나중에 한턱 낼게. 꼭이야." 라고 한다. 살아갈수록 결혼도, 인생도 사실은 별것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고. 언니는 가장 좋은 몫을 택했으며, 수녀 되길 정말 잘했다고 곧잘 후렴처럼 덧붙이는 우리집 막내. 나보다 네살 아래지만 때로는 여러 면에서 언니 같기도 한 아우가 사랑스럽다.
14
"어디 아파요? 목소리가 힘이 없네."
"어때? 건강하지"
이런 말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돌며 고마워지는 마음은 내 마음이 약해졌다는 것일까?
"언제 한 번 다녀가지 그래."
"언제 좀 안 올 거야? 보고 싶은데..."
어쩌다 안부를 전해 오는 가까운 친지들의 목소리가 새삼 반갑고 포근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조금씩 더 외로움을 탄다는 말일까? 단순하고 평범한 안부의 말이 어떤 멋지고 교훈적인 말보다 훨씬 따뜻하고 깊은 여운을 남길 때가 많다. `불혹이란 자기 몫의 외로움을 겸허하게 견디는 일`이라고 고백한 어느 시인의 표현을 자주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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