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1104호
2022.7.11 (음 6.13)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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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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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지지한다면서도 선동을 두려워하는 자는, 천둥과 번개 없이 비가 내려 주기를 바라는 사람. - 프레드릭 더글러스(18세기 美 노예폐지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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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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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열의 힘
대통령의 나들이를 보도하다가 잇달아 방송 사고를 내는 것을 보니 무척 오래전 사고를 또 되돌아보게 된다. 1950년대에 일어난 수준 이하의 활자 오식 사고였다. 어느 신문사에서 한자로 ‘대통령’이라고 인쇄해야 하는데 실수로 개 견(犬) 자의 ‘견통령’이라고 식자를 해버린 것이다. 신문사 대표가 구속되기까지 했었다.
요즘은 언어 규범 체계도 정비되고 편집과 인쇄의 첨단화가 이루어진 마당에 아직도 오류 소동이 일어나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도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그림 문서에서 사고가 났다. 구겨진 태극기만이 문제가 아니라 매체의 정보 전달과 검증 체계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꽤 오래전부터 언론계에서는 ‘교열 부서’를 없애고 외주화에 힘썼다. ‘그까짓’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무에 그리 중요한가 싶었던 모양이다. 정보화 기술의 진전이 교열 부서를 만만해 보이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보 전달의 고도화로 단순 맞춤법 정도가 아니라 정보 경로, 저작권, 그림 문서의 출처 등 과거보다 교열 대상이 폭증했다. 활자를 쓸 때보다 더 큰 대형 사고가 나기 쉬워진 면도 있다.
사실 언론 매체처럼 다량의 언어 정보를 생산하는 기관일수록 ‘유능한 교열팀’이 더욱 필요하다. 기사의 언어적 적절성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맞는 ‘사회적 감수성’을 문장에 반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오히려 교열 부서를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언론 매체는 편집의 자유도 필요하지만 언어에 대한 책임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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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시대상
꽤 널리 사용되었는데 어느 결엔가 사람들이 쓰지 않게 되면서 사라져 가는 말들이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권에서 ‘사쿠라’라는 말이 허다히 사용됐고 80년대만 해도 ‘다방’에 가면 ‘레지’라는 종업원들이 차 시중을 들었다. ‘북한’을 가리켜 보통 ‘북괴’라고 했다. 넘치도록 흔하게 쓰던 말들인데 이젠 마치 근대 이전의 어휘처럼 느껴진다.
교실에 아이들이 넘쳐나고 버스에는 승객들이 타져나갈 듯해서 교실과 버스 모두 ‘콩나물시루’라는 말로 표현을 했다. 시장에는 ‘미제’와 ‘일제’ 물건이 더 인기가 많았고, ‘양키 물건’ 파는 아줌마들도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국산품 애용’이라는 구호가 여기저기 휘날렸고 ‘전매청’ 직원들은 ‘양담배’ 단속을 다녔다.
일반적으로 어휘가 많을수록 좋은 일이라고 생각들 하는데 돌이켜보니 그동안 사라져 간 어휘가 그리 아깝거나 아쉬운 말들이 아니다. 추억에 담아둘 만은 하지만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고달픈 단어들이었기 때문이다. 없어져 준 게 고맙기만 하다. 그런 점에서 언어도 진화와 도태가 필요하다.
지금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먼 훗날 지긋지긋했던 말로 기억에 남을 것은 무엇이며, 없어져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될 어휘는 무엇일까? 아마도 갖가지 혐오 발언, 갑질 언어, 차별 언어, 막말과 독설, 그리고 각종 망언 등, 이러한 말들의 목록이 그 언젠가 지금의 시대를 평가하고 규정하는 도구가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말들 때문에 지금 이 시대가 되돌아보기 싫은 ‘어둠의 시대’로 낙인찍히지 말았으면 한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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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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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 김수영
부정한 마음아
밤이 밤의 창을 때리는구나
너는 이런 밤을 무수한 거부 속에 헛되이 보냈구나
또 지금 헛되이 보내고 있구나
하늘아래 비치는 별이 아깝구나
사랑이여
무된 밤에는 무된 사람을 축복하자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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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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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교(水魚之交)
/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 《出典》'三國志' 蜀志 諸葛傳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와 같은 용장이 있었지만, 천하의 계교를 세울 만한 지략이 뛰어난 모사(謀士)가 없었다. 이러한 때에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은 사람을 얻었으므로, 유비의 기쁨은 몹시 컸다. 그리고 제갈공명이 금후에 취해야 할 방침으로,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눌러서 그 곳을 근거지로 할 것과 서쪽과 남쪽의 이민족을 어루만져 뒤의 근심을 끊을 것과 내정을 다스려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실리를 올릴 것과 손권과 결탁하여 조조를 고립시킨 후 시기를 보아 조조를 토벌할 것 등의 천하 평정의 계책을 말하자 유비는 그 계책에 전적으로 찬성하여 그 실현에 힘을 다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제갈공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어 두 사람의 교분은 날이 갈수록 친밀해졌다. 그러자 관우나 장비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젊은 제갈공명(이 때 공명의 나이는 28세)만 중하게 여기고 자기들은 가볍게 취급받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이 이리 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 등을 위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즉 나와 제갈공명은 물고기와 물과 같은 사이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자, 관우와 장비 등은 더 이상 불만을 표시하지 않게 되었다.
於是與亮情好日密 關羽張飛等不悅 先生解之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諸君勿復言 羽
飛乃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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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 /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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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1장
신성한 예식을 통한 인간의 공동체
공자가 정확하게 인간적인 덕의 정수로서 꿰뚫어보았던 묘한 힘에 대해 알아보려는 것이 지금부터의 과제이다. 결국 우리는 그 묘한 힘을 통하여 마침내 공자가 핵심으로 생각했던 인간의 존재적 거룩함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 공자의 가르침 속에 담겨져 있는 이 거룩함의 중심적 역할은, 그 가르침의 존재적 핵심을 우리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20세기인 (오늘날)에까지 크게 무시되어져 왔다. 특별히 분석에 필요한 것'여기서 제안된 것'은 현대적 철학적 이해를 이용하여 재해석하는 일이다. 사실 그러한 재해석은, 철학적.반성적 작업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그늘에 가려져 왔던 우리 자신 (서양)의 철학적 사유의 차원을 밝혀 줄 것이다.
<논어>, 적어도 좀더 논어다운 맛이 나는 <핵심>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철학적 통찰은, (당대) 그것과 대립하였던 제자백가의 이념들이 공자의 학설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곧 바로 은폐되어 버렸다. <논어>속의 주술적, 종교적 측면들에 대한 일정한 강조를 요구하는 이런 통찰은 일반적으로 현대에 들어와서 서양 학문의 영향을 받은 해석들에서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점은 결코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 <논어> 독해의 주요한 흐름은 경험적, 인본주의적, 현대 지향적 가르침으로거나, 아니면 플라톤의 합리주의적 이론에 필적하는 또 다른 것(이상적 관념론)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사실 <논어>의 가르침은 <초자연적인 괴력>에 대한 미신 또는 진지한 믿음을 명백히 거부하는 주요한 첫걸음으로 자주 해석되어 왔다. 틀림없이 <논어>의 세계는 질적인 면에서 모세, 아이스퀼로스, 예수, 석가모니, 노자, 또는 우파니샤드 학자들의 세계와 상당히 다르다. 분명한 몇가지 면에서, 사실 <논어>는 인본주의자이며 동시에-여하튼 필요할 때 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낼만큼 충분히 전통적이라는 의미의-전통주의자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공자는 말하였다. <백성들의 자기가 해야 할 일에 힘써라! 귀신은 거리를 두고 경외하라> 공자의 행동은 언제나 도리에 합당했으며, 그는 <괴이한 일이나, 억지 폭력으로 하는 일이나, 어지럽히는 일이나, (상식에 맞지 않는) 신기한 일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초월적,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노골적인 질문에는 <사람을 섬기는 일도 다 할 수 없는 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고 대답하였다. <논어>의 중심 내용을 검토해 보면 주제나 핵심 개념들이 주로 인간의 본성, 도덕행위, 인간 관계에 관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당장 알 수 있다. 그점은 바로 항상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몇가지 주제, 말하자면 예, 인, 서, 충, 학, 악 및 가족적, 사회적 관계나 '군주, 부친 등등에 대한' 의무 등을 규정하는 각종의 개념들을 열거하면 충분하다. 더 나아가서 <논어>의 이러한 현세 지향적, 실천적인 인본주의는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행위란 술수나, 행운이나, 신비적 주술이나 그 밖에 어떤 순전히 의타적인 권능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통하여 한층 더 심화되고 있다. 인간의 심성은 타고난 <본성> 성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근면한 학문과 실천적 연마의 질과 양에 따라서 심성을 <형성해 낼> 수 있다. 고상한 심성은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첫째는 어려움이다> <지식인의 책임은 무겁고, 그가 갈 길은 멀다. 인의 실천을 자기 소임으로 삼았으니, 또한 힘들지 않겠는가?> 공자의 걱정은 <덕을 닦지 못하고, 학문을 강의하지 못하고, 의로운 일을 알고도 몸소 그곳으로 가지 못하며, 좋지 못한 것을 개선하지 못할가> 하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은 자기의 할 일은 경이나 기적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충실하고 진실한 인간, 값진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하여 언제나 자신을 <갈고 닦고 쪼고 단련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모든 면은 <논어>의 반주술적인 외양을 보여주는 듯싶다. 여기서는 초월적인 신의 후광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적이고 분명히 세속적인 무미 건조한 도덕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논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묘한 힘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 주는 것 같은 언급들을 때때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신묘함>이라는 말은, 어떤 특정인이 예를 올리는 그의 몸짓이나 음송 등을 통하여 자기의 의지를 아무런 억지나 무리없이 올바르고 (자연스럽게) 움직여 나가는 힘을 말한다. 심묘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 즉 책략이나 꾀를 쓸 수 없다. 그는 강제적 억지나 물리력을 쓰지 않으며 공리성을 따지고 검증하여 책략이나 술수를 얻어 내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적절한 예에 맞는 배치나 배열을 해놓고 예에 맞는 적절한 몸짓과 말을 하면서 예식을 끝마치려고 할 뿐이다. 자기 스스로는 조금도 억지나 무리함 없이, 그의 행위를 자연스럽게 끝낸 셈이다. 시의를 적절하게 맞추는 공자의 말씀은 위에 언급한 방법에 핵심이 되는 근원적인 어떤 신비력을 강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 '아래의 인용문들에 나타난 한문 개념들은 모두 공자 사상에서 핵심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개념들은 근원적인 가치를 갖는 인간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나, 상태 및 모형들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필요로 하는 한, 이들 개념에 대해서는 이 책의 뒷부분에서 논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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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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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요록
제4장
2. 노환공의 죽음
대책 회의
그 때 포숙아의 집에서 공자 소백과 공자 규 세 사람이 모여 앉아 상의하고 있었다. 공자 규가, 제양공의 초청을 받아 노환공 부부가 함께 임치에 온 것을 시작으로 하여, 어젯밤 궁중 밀실에서 있었던 일과 그 일을 노환공이 눈치챈 듯하다는 것까지를 이야기했다. 포숙아는 벌써 10년도 더 된 옛날, 문강이 노나라로 시집갈 때의 일을 생각해냈다. 소백이 찾아와 '문란해졌다'고 화를 내던 모습이 마치 어제처럼 느껴졌다. 그 때 소백이 그랬다. '바꿔야겠어!' 포숙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제양공으로 제나라의 장래를 생각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군위를 새로 정해야 합니다."
일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우선 제양공부터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중차대한 일을 어떻게 성사시킨단 말인가? 포숙아도 마땅한 대안은 없었다. 일을 주도할 막강한 인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군사를 거느린 장군 한 명도 동조자로 모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비수를 품에 감추고 제양공을 해치우기 위하여 궁으로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공자들 가운데 제일 연장자는 무지(無知)입니다. 일단 그를 앞세우고 사건을 일으켜 제양공을 몰아내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습니다만 그는 어딘가 체통없이 불평만 일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힘으로 따지면 공자 팽생이 나설 수도 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면서 포숙아는 두 사람을 응시했다.
"팽생은 안 됩니다."
소백이 머리를 흔들었다. 바로 그 때였다.
"그렇습니다. 팽생은 결코 안 됩니다."
소홀이 방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소홀은 노환공이 방금 수레 안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세 사람에게 전했다.
"아아! 끝내는 매부를 살해하고 말았구나."
실내에는 탄식이 가득했다.
"팽생을 시켜 수레 안에서 감쪽같이 노환공을 죽였다는 소문입니다."
"그 두 놈이 바로 제나라를 망칠 역적이오!"
소백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포숙아가 재빨리 분위기를 바꾸면서 소홀을 소백 곁에 앉히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소홀에게 간략히 전해 주었다.
"여기서 제나라 군위를 새로 세워야 한다는 데까지는 이의가 없네만 누구를 앞장 세워야 할지 모르겠네.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가?"
포숙아가 소홀에게 물었다. 소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오히려 모든 공자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는 것 이 바람직하네. 그래서 일단은 제양공을 군위에서 추방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는 가장 공로가 큰 공자가 군위를 이어야겠지......."
포숙아가 물었다.
"공자들끼리 다투게 한단 말인가?"
소홀이 대답했다.
"다투는 것이 아니라 모두 제양공을 타도하는데 앞장 선다는 것이 좋은 표현이겠지. 실제로도 그렇고, 지금 한 공자를 내세워 다음 군위를 정해 놓고 제양공과 싸운다면 여러 모로 승산이 없네. 한계가 많다는 말일세."
"......."
네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 포숙아는 입을 열었다.
"우선 두 분 공자께서는 궁으로 가시어 조상(弔喪)부터 하셔야지요. 그러고 나서 대책을 세웁시다."
공자 규와 소백 두 사람은 죽은 노환공을 조문하기 위해 궁으로 갔고, 포숙아와 소홀 두 사람은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관중의 집으로 갔다. 한편 제양공은 노환공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거짓 슬픔을 가장하여 한바탕 통곡을 했다. 그리고 극진히 노환공의 시신을 염(殮)하고, 즉시 입관시켜 노나라로 호송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사자를 노나라로 보내어 참혹한 소식을 전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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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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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가득히 사랑을 - 노은
등꽃을 바라보며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또옥또옥 연보라 포도송이가 떨어지고 있다. 아니, 그것은 포도송이가 아니고 연하디 연한 꽃잎이다. 어찌 보면 포도송이 같은 연보라 꽃송이들이 하염없이 지고 있다. 등꽃을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추억이 시달린다. 그렇다. 추억이 때로는 감미로운 시달림을 주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추억은 가슴 저 깊은 곳에 머물러 사는 정든 친구이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듬뿍 든 친구, 때로는 마음 밖으로 멀리멀리 쫓아버리고 싶어지는 친구, 그러나 슬그머니 손을 잡으면 마음이 따스해지는 좋은 친구이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추억의 꽃송이가 나풀나풀 떨어지고 있다. 연보라 추억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저리게 한다. 내가 어릴 적에 살던 집 마당에는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한 그루는 장독대 옆에 서 있던 감나무인데, 그 감나무는 나와 나이가 같다. 내가 태어나던 그 해에 아버지께서 심으신 나무였다. 그 감나무에서는 해마다 작은 감들이 열리곤 했다. 바람이 불면 뚝뚝 떨어지는 감들은 떫어서 그냥 먹을 수가 없었다. 작은 항아리에 물을 담아 그 속에 며칠 동안 담가 두면 떫은맛이 사라져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떫은맛을 우려내는 일을 재미로 했을 뿐 그 작은 감을 먹었던 기억은 없다.
나와 나이가 같은 감나무보다 내가 더 좋아했던 나무는 샘가에 서 있던 등나무였다. 연보라 꽃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그 나무는 내가 초등학교 삼학년 때 아버지께서 심어 주신 나무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아버지께서 나무를 심고 계셨다. "이 나무가 바로 등나무란다. 지금은 어리지만 내년에는 포도송이처럼 예쁜 꽃이 주렁주렁 필 거란다. 연보랏빛 꽃이 아주 곱게 필 거야." 그 나무는 나처럼 어린 나무였다. 어쩌면 초등학교 삼학년 학생 같은 어린 소녀 나무였다. 그 나무가 자라 우리 집 대문 주위를 얼마나 아름답게 장식했었던가. 곱디고운 연보라 꽃송이가 주렁주렁 피어난 샘가를 바라보기만 하여도 기쁨이 목까지 차 오르곤 하였다.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도 우리 집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그 고운 연보라 꽃을 바라보며 행복과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어머니보다도 먼저 나를 반기는 나무, 골목을 들어서면 내게 미소와 향기를 건네는 나무, 그 나무를 바라보면 '아, 우리 집에 다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버지께서 심으신 등나무. 아버지께서 그 나무를 심으실 때 어린 소녀였던 나는 아버지 곁에 쪼그리고 앉아 그 어린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 나무는 내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것이다.
나무와 함께 나도 자라 여고생이 되었지만, 그 나무를 심으셨던 아버지는 나무가 자라 무성한 잎새들로 뒤덮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먼저 돌아가셨다. 내가 자라 여고생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 무엇이 그리도 급하셨던 걸까. 아버지께서는 그 나무가 자라 우리 집 샘가와 대문 곁에 무성한 꽃 그늘을 드리우리라는 것을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꽃 그늘 아래 이 딸과 함께 나란히 서지 못하리라는 것은 아마 모르셨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등나무는 자라 무심히 꽃 그늘을 드리웠다. 아버지 말씀대로 그 꽃은 꼭 포도송이 같았다. 아버지가 심으신 등나무가 올해는 더 많이 자랐다고, 꽃송이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피어났다고 나는 혼자 중얼거리곤 하였다. 아버지가 안 계시는데도 변함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변함없이 꽃이 피고 자라는 당나무처럼 나도 자라고 있다고 말이다. 나는 그 집에서 태어나서 여고생이 될 때까지 살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집에서 돌아가셨다. 내게 등나무의 추억을 남기고 가셨다. 그 집을 떠난 지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 집 샘가의 등나무 꽃 그늘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연보라 꽃 그늘에 서면 아버지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나는 다시 초등학교 삼학년짜리 어린 소녀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버지 곁에 쪼그리고 앉아 어린 등나무를 바라보며 이 나무 이름이 무엇이냐고. 이 나무에서도 꽃이 필 거냐고 종알거리는 어린 소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가끔 내가 살던 그 집에 가 보고 싶어진다. 그 집에 가서 나처럼 나이 든 감나무도 만나고, 아버지의 추억이 서린 등나무도 만나고 싶다. 두 나무 모두 아주 커다란 나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듬직한 모습으로 묵묵히 나를 반길 것도 같다. 내가 살던 그 집에 가 보지 못한 지도 어느새 이십 년이 넘었다. 내가 태어나고 내 친구 감나무가 태어나고 아버지의 손길이 깃든 등나무가 자란 그 집은 이제 내 정든 추억의 무대가 되었을 뿐, 현실감 없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지난 시절의 추억들이 빛 바랜 흑백사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낡은 추억은 손때 묻은 사진첩처럼 정답다. 지금 내가 사는 집에서는 등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근무하는 학교 뒤뜰에 등나무 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다. 어느 날 문득 그 연보라 꽃송이들을 바라보았을 때 가슴에 가득 차 오르던 기쁨은 그 꽃송이들 같은 연보랏빛이었다. 싱그러운 초록 잎새와 연보라 꽃송이들 사이로 내비치는 하늘이 고와서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 잎새들 사이로 내 어린 시절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꽃송이들 사이로 아버지의 온화한 미소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가 안타깝다. 이 비에 또옥또옥 등꽃이 떨어지겠지... 아버지가 심어주신 그 등나무는 얼마나 자랐을까. 그 나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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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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