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일러두기
1. 이 책의 원 제목은 <공자:신성스러운 세속인>(Confucius:The Secular as Sacred)이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신성스러운' 차원과 '세속적' 차원의 이분법적 구분이 우리들에게는 그 의미가 충분히 명확하게 파고들지 못하기 때문에 옮긴이는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에 따라 제목을 <공자의 철학:서양에서 바라본 예에 대하 새로운 이해>로 붙여 보았다.
2. 번역 과정에서 원문에 대한 이해를 돕거나 그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옮긴이의 말이 삽입되는 경우 그 삽입 부분을 ( )로 표시하여 덧붙였다.
3. 옮긴이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논어>에서 인용된 문장의 원문을 옮긴이 주라 표시하여 게재하였다. 그리고 인용문의 우리말 번역에는 극히 특정한 오역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핑가레트의 해석을 따랐다.
머리말
공자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가 무미 건조하고 답답한 도덕 군자라고 생각하였다.그의 어록인 <논어>는 온통 구닥다리 냄새가 나서 더 이상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중에 꼼꼼히 읽어 보면서 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내가 아는 어떤 위대한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깊은 통찰력과 탁견을 가진 사상가로 다가오게 되었다. 공자가 오늘날 우리 현대인에게 스승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그는 이미 통용되고 있는 개념들에 단순히 색다른 조명을 해주는 그런 철학자가 아니라, 현대인을 깨우치는 진정한 큰 스승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이미 어딘가에 언급되어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를 가르칠 새로운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철학적 연구들의 최근의 업적들을 잘 알고 있는 이점을 가진 나는, 아주 최근에 이룩된 철학적 업적들 중에 가장 특징적인 몇몇 문제들과 내용이나 사상적인 면에서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명백한 통찰들이 이미 <논어> 속에 있음을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공자는 아주 최근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시대'현대'보다 앞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공자의 사상이 수세기 동안 서구인에게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상당히 소홀하게 취급될 수 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여하튼 지금 우리는 공자의 생각과 기본적으로 같은 사고 패턴들로부터 손쉽게 서구적 사고의 새로운 흐름을 읽어 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공자의 문제 제기 방식은 바로 서구 사사의 흐름들을 신선한 각도에서 자리 매김해 주기 때문이다. (공자 사상에는) 이런 <서구의 철학적 경향에> 필적하는 극단적으로 새로운 사상 경향이 있다는 결론을 갖게 됨에 따라, 나는 이미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런 생각들을 <논어>에서 읽어 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다. 그것이 얼마만큼 성공적이었는가는 독자들이 판단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다만, 나의 주요 목표-물론 성공했을 경우, 나의 기쁨-는 공자 사상에서 특출한 것이 무엇이냐를 찾으려는 것, 즉 그가 (오늘날의) 나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비우려는 것이었다. 고대의 어떤 낯선 사상가가 헤아려 보았던, 그리고 그 내용은 이미 우리들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그런 것을 제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현학적 즐거음을 추구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공자를 서구 언어로 번역한 초기의 사람들은 유식한 천주교 학자나 사제, 그리고 신앙이 돈독한 개신교 선교사들로서, 그들은 그들의 탁월한 지성적 웅합성을 통하여 얻어 낸 큰 업적들 때문에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공자를 기독교회에서 마치 소크라테스를 경탄했던 그런 방식으로 감탄해 하는 경향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이교도이지만, 최고의 진리와 가장 완벽한 생활에 헌신했다는 점에서는 성인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는 오직 기독교적 계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을 열망했던 안타까운 이교도로 평가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논어>가 거의 기독교 윤리로, 혹은 윤곽이 흐린 기독교신학으로서 읽혀지는 곳에서는, 공자 또한 경이롭고 (안타까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런 견강부회적인 목적과 관련하여 좀더 지적하자면, 이런 (왜곡된) 독해는 때때로 번역 과정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어떤 경우이든 <논어> 텍스트는, 사유 구조가 기독교 개념틀이나 유럽적 개념틀에 본능적으로 그리고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매어 있는 그런 사람들에 의하여 독해되어 왔다.
아주 최근에는 좀더 인간학적으로 다면적 관심을 가진 비종교적인 학자들이 <논어>를 번역해 냈다. 특수하게 기독교적인 요소는 최근의 번역에서는 사라졌다. 그러나 유럽 문화를 비경으로 하는 기본 가상들은 때때로 그대로 남아 있다. 유럽적 관념이 영향을 미치지 않은 번역에서도-지금 상당히 서구 학자들에게 친숙한-불교와 도교적 사고가 또한 해석상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런 잘못은 여러 면에서 누적된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적 관념들이, 아무리 서구적인 그것과 여러 면에서 상이하다 할지라도, 서구적인 그것과 공유하는 (공자 사상과의) 분명한 근본적 편차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두 사상은 인간의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면을 보다 선호한다는 점이다. 불교와 유럽적 사고의 주류를 꿰뚫어 보면, 개개인의 마음, 그 개개인의 내면적 삶과 내면적 실재성이 인간 이해의 초점이 된다. 물론 나도 이런 나의 주장이 상당한 예외를 용인해야 하는, 너무나 거대한 일반론이라는 것을 안다. 이 책에서 제기되었던 연구 과제를 마무리지운 후에야 비로소 나는 이런 일반론이 유지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새로운, 나에게는 굉장히 계발적인 (사유) 방식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이런 일반론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나에게 분명하게 보이는 점은 개개의 번역들 사이에 서로 다른 차이의 (필요성)들이 아무리 강조된다고 할지라도 모든 번역들의 구석구석에는 <논어>에 대한 (번역자 개개인들의 상당히 자의적인) 주관적, 심리적 독해가 얼마든지 추정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주 무의식적으로 생긴 그만큼 심리적 편차가 더크다고 추정된다. 바로 이런 근본적 편차와 관련하여 이제까지 현존하는 번역 모두는 잘못 독해되었다는 것이 이 책이 내 거는 하나의 주제이다. 내 주장이 옳다면, 이들 (기존의) 번역들은 공자의 실제 인물상이 아닌 다른 인물상을 애써 찾아서 소개해 온 것이다. 그것들은 결과적으로 공자인간관의 분명한 비서구적, 비불교적 특질들을 그려 내지도 못하였고, 그런 면을 용인하지도 않고 있다. 이런 사실을 규명해 내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 책에서 분명히 제시하기 위한, 내 주장 전거의 중요한 출전은 <논어> 원전이었다. 원전이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원전이 무엇을 말하고 있지 않으며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를 찾아 보려고 노력하였다. 원전은 다만 절대적 명백성을 가지고 말해 줄 수 있는 그만큼만 말해 줄 수 있다. 그 이상을 넘는 것에는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그런 경우 물론 대답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의 철학에서 아예) 제기되지 않았던 질문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주로 어법상의 문제를 다루는 사람은 원전의 어법적 뉘앙스를 흐려 놓는 번역을 내놓을 것이다. 주로 정신 내용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은 그런 어법상의 뉘앙스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하거나 그런 뉘앙스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도 없을 것이다. 현대에 나온 <논어>의 어떤 번역도 전문적 서구 철학자가 한 것은 아직 없다. 따라서 당대의 (서구) 철학적 개념들이나 테크닉이 적절하게 능숙하게 배어 있는 번역은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런 몇 가지 점들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나는 공자의 말로부터 그의 가르침을 찾아 내어 보려고 노력해 왔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가능한한 엄밀하게 <논어>의 앞부분, 좀더 확실하게 믿을 만한 어록 부분, 즉 주로 전체 20장 중 처음 15장의 틀 안에 머물러 왔으며, 이런 부분에 대해서조차도 나는 학자들이 후대에 이 초기 어록들에 삽입, 해석해 놓은 것들에 대하여도 매우 신중하게 대처했음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의 이 책의 연구 목적은 실제 역사 인물인 공자가 그의 <어록> 모두, 또는 그 중의 어떤 부분을 말했다는 것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정신에 입각하여 몇몇 어록들을 삭제해 내고, 독자적인 학적 연구'부록:<논어> 원전 텍스트에 관하여 참조'에 기초하여 우리는 역사-사회적 맥락, 언어학적 문체 그리고 철학적 내용과 연관하여 하나의 통일성을 갖는 <논어> 텍스트를 갖게 되었다. 바로 이 텍스트, 이것만을 나는 이 책에서 해석하고자 노력하였다.
나는 후대의 유학자들의 주석들에 의거한 해설적 재료들을 소개하는 것을 극히 자제하였다. <제자백가> 시대의 각기 다른 학파의 철학적 사상은 서로 상충하고 또한 융합함으로써 공자의 학설을 아주 다른 모습으로 개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순수 공자의 모습을 찾으려는 시도들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뿐 결코 완전 무결한 성공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경전과 독해는 이미 수많은 해설, 주석, 편집 선택과 순전한 이념적 조작 등으로 원상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궁극적으로 우리의 관심은 철학적인 것이다. 따라서 내가 문제 삼는 것은 해석에 책임질 수 있는 선택된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다. 나는 바로 그 생각을 늘 마음속에 간직해 왔다. 물론 내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텍스트에 대한 책임 있는 철학적 독해는 조심스러운 역사적 그리고 언어학적 분석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나아가서 이 점은, 나 자신 중국학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서양 학자들이 쓴, 물론 방대한 양의 중국학 학문 업적에 대한 이들의 훌륭한 개요를 포함하는, 2차 문헌과 주석들을 상당히 참고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학문적)목적이나 방법에 합치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주요 과제, 즉 <논어>에 대한 집중적이고 사려 깊은 연구에서 나는 그 원전 텍스트로부터 나 자신 고유의 독해를 해낸 것이다. 적절한 철학적 문제가 텍스트 문제에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경우, 내 자신도 그 텍스트 분석이 바로 철학적 요점 파악에 아주 적절히 요구된다고 믿는한, 나는 자신의 독자적인 텍스트 분석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실린 어록의 번역문-비록 그것들이 광범한 토의에 의거한 것이요, 주요한 번역들과 학적 논문들에서 상당 부분 빌려 온 것이며, 많은 경우 단순히 인용한 것이지만-에는 나 자신이 책임을 져야만 한다. 나의 주목적은 <논어> 텍스트가 가진 철학적 뉘앙스를 부각하려는 안목을 가지고 번역문을 선택하거나 재번역하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 이 (<논어>속의) 철학적 의미들이 '비록 늘 즉시 분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본질상 뚜렷이 현대적인 특정 개념이나 의미 함축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과 마찬가지로 중요성을 갖는 다른 경우에는,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애매모호하여, 침묵하거나 관심을 가질 수 없는 텍스트의 부분도 있었다. 그런 의미들을 뚜렷이 드러나게 하자면, 다른 문화적 (즉 동양적) 전통의 학자들이 정례적으로 설명을 하고 분명하게 밝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나는 번역상의 철학적인 비판적 지적에 합당한 나의 이유를 끄집어 내기 위해 텍스트와 그와 관련된 문제들을 토구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주제를 입증하기 위하여 의미를 억지로 조작하려는 괴상한 시도라고 간주될 만한 것은 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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