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여백 - 박이문
2. 망상의 변
나는 정말 무엇을 좋아하는가?
어쨌든 무엇인가에 미칠 수 있을 만큼 정열적인 성격이 부럽고 무엇인가 미칠 만큼 좋아할 수 있는 것을 가진 사람이 부럽다. 타는 듯한 정열로 무엇인가를 정말 좋아하여 그것에 매몰하는 삶의 즐거운 긴장감과 충만감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 여자 혹은 남자에 미쳐 망신을 당하거나 목숨을 버리는 이들이 있다. 카르멘과 그의 호세가 다 같이 그러했다. 음악에 혹은 연극에 미친 평범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있다. 강아지라면 정신을 잃는 이들이 있다. 시인 보들레르를 아니면 작가 베케트를 미치다시피 좋아해서 그들의 시나 연극 구절들을 즐겨 외우는 이들도 있다. 낚시에 미치는 이들도 있다. 한 작가를 아니 한 작품만을 죽어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정말 목숨을 바치고 미칠 만큼 좋아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진 이는 축복받았다. 충만감으로 채워진 그들의 삶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어떤가? 나는 정말 좋아하는 것을 갖고 있는가? 내가 미칠 만큼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자주 이런 물음을 걸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22세의 젊은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일기 속에서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가치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처절한 어조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그는 목숨을 바칠 만큼 귀중한 가치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느끼게 되는 삶의 공허함을 고백했던 것이다. 나는 이미 육십 중반을 넘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22세의 키에르케고르가 느꼈을 삶의 궁극적 공허감 속에서 그의 애절한 외침을 반복하는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내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좋아하고 아낄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단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정말 죽어라 좋아했던 무엇이 있었던가? 자신 있는 대답이 없어 마음이 허전해진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달라진 것이 없다. 마찬가지다. 꼭 한 가지 목숨을 걸고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 너무 많은 것들을 동시에 좋아해서인가? 아니면 나에게 뜨거운 감정이나 정열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타협적이기 때문인가? 남달리 현명해서 모든 가치의 상대성을 남달리 투명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가? 삶은 부단한 행동의 연속이고 행동이 가치를 전제한다면, 가치는 삶의 길잡이에 비유된다. 그러나 서로 다르고 때로는 모순된 가치가 우리의 행동을 자극하고 우리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가치, 즉 삶의 방향 선택은 불가피하다. 삶은 행동의 연속이며, 가치 선택을 전제하지 않은 행동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가 어떤 가치를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데 있다면, 선택은 반드시 어떤 규범을 전제하는 이상, 이 문제의 문제는 그런 규범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를 알아내는 데 있다. 이성에 의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이성은 내가 꼭 택해야 할 가치를, 내가 목숨을 걸고 좋아해야 할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무엇을 꼭 좋아해야 할지 모를 뿐만 아니라 무엇을 정말 좋아하는 지를 모른다면 가치 선택의 지침이 될 수 있는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렇게 살아도 좋고 저렇게 살아도 좋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내가 미칠 만큼 좋아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 내게 가장 귀중한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물음이 생긴다.
공허감
그 원인이나 동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든간에 나는 사춘기에 허무주의자였다. 인간의 삶이 갈등과 혼란의 끝없는 고통의 반복에 불과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궁극적 의미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허무주의가 인생 자체에 부정이나 포기는 물론 삶의 다양하고도 귀중한 경험의 부정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행복하고 즐거운 허무주의가 있을 수 있다. 허무주의는 철학적으로 투명한 지적 결론이다. 그러나 파스칼,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프로이트, 사르트르가 밝혔고, 특히 도스토예프스키가 강조했듯이 삶은 지적 사고이기에 앞서 둔탁하고 뜨거운 감성적 격동이다. 그러기에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불행한 허무주의자가 있는 반면 충만한 하루하루의 삶을 즐겁게 살아가는 행복한 허무주의자도 있을 수 있다. 사춘기에 나는 육체적 및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면서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했을 만큼 극심한 허무주의에 빠져 있으면서도 한 번밖에 없는 삶에 그만큼 더 애착을 가졌고, 이순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허무주의자로 남아 있는 나는, 남과 더불어 삶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아울러 인간의 숭고한 미덕에 깊은 경의를 보내고, 인간의 놀라운 지적/기술적 업적에 감탄하고, 자연의 무한한 아름다움에 무한한 감동을 피부로 느끼면서 더욱 열심히 살면서 때로는 삶의 충만감으로 행복하다. 무한히 펼쳐진 하늘의 빈 공간이 시야를 막는 도시와 산들로 충만한 공간보다 시각적으로 더 아름다울 수 있듯이, 속이 비어 있는 범종이나 큰 북이 속이 가득찬 바위나 돌보다 깊고 은은한 소리를 낼 수 있듯이, 무한히 공허한 우주, 빈 존재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삶이 백화점같이 잡다한 물건으로 가득 찬 삶보다 낫고, 하나의 선시(봉선 선, 때 시)나 불교적 교리처럼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삶이 더욱 충만할 수 있다.
공허감은 무엇인가의 부재 의식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욕망과 추구를 전제하지 않는 곳에 부재가 의식될 수 없고, 갈망과 추구는 언제나 어떤 대상을 전제하며 그래서 공허감은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의 부재가 가져오는 좌절된 의식이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좌절된 욕망이 다 같이 공허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배고픔과 빈곤, 어떤 특정한 목적이나 사회적 실패는 다 같이 욕망 좌절의 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좌절 의식은 공허감이 아니라 부족감을 의미한다. 부족감은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음식이나 돈이 생기거나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고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면 해소된다. 그러한 인간은 물질적 혹은 사회적으로 충족된 후에도 어쩐지 부족감을 느낄 때가 있다. 포식을 한 축재자도 무엇인가 아직도 부족함을 느끼기 쉽고, 위대한 예술 작품을 창조한 베토벤이나 위대한 이론을 발명한 아인슈타인도 아직 채워질 수 없는 부족감을 의식했을 것이며, 세계를 정복한 나폴레옹도 역시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부족함을 체험했으리라 짐작된다. 공허감이 부족감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물질적, 직업적, 지적, 기술적, 사회적 부족감이 아니라 궁극적 '가치'에 대한 부족감, '의미' 부재에 대한 의식이다.
모든 인간은 돌이나 물건처럼 그냥 존재하지 않고, 개나 돼지처럼 그냥 먹고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성서"에 씌어 있는 것처럼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공자가 효도에 대해 "금지효자(이제 금, 갈 지, 효도 효, 놈 자), 시위능양(옳을 시, 이를 위, 능할 능, 기를 양), 지어태마(이를 지, 어조사 어, 클 태, 말 마), 개능유양(다 개, 능할 능, 있을 유, 기를 양), 불경(아니 불, 공경할 경), 하이별호(어찌 하, 써 이, 나눌 별, 인가 호)" 즉 "요즘 효도란 봉양만 잘하면 되는 줄 안다. 그것쯤이야 개나 망아지도 할 수 있는 일인데, 존경하지 않는다면 다를 데가 없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은 정신적 동물로서 자신의 삶은 물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가치/의미'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유일하고 특수한 존재이다. 공허감은 필연적으로 의미에 대한 의식, 더 정확히 말해서 오직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의미 부재 의식이다. 그러나 어떠한 인간도 공허감, 즉 삶, 우주 그리고 모든 존재의 궁극적 의미 부재를 한 번이라도 그리고 순간적이나마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렇다. 아무리 만족스럽더라도 당신이나 남들이 한 일, 하고 있는 일, 앞으로 하게 될 일의 궁극적 의미를 생각해보라. 당신의 존재,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의미, 자연 아니 모든 존재 전체의 궁극적 의미를 따져 보라! 그 의미가 어디에 있으며 언제 찾을 수 있겠는가? 철학과 종교는 이러한 물음과 이러한 물음에 대한 탐구의 두 가지 다른 표현이며 대답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언제나 원시적이나마 철학적 사유가 있었고, 어떤 형태로인가 종교가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궁극적 '의미'를 발견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종교적 신앙은 그러한 확신의 한 표현 형태이다. 따라서 그들로부터 공허감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를 남들 이상 애타게 찾으면서도 발견한 것이라고는 오직 의미 부재 즉 공허감뿐이라고 말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인간의 삶, 자연의 모든 현상에 궁극적 의미가 정말 있으며 그래서 공허란 느낄 필요가 없는 감정인가 아니면 모든 것은 사실 궁극적으로 공허한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결정적 대답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고 그로부터 어떤 필연적 결론도 논리적으로 나올 수 없다. 위와 같은 대답들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내릴 수 있는 절대적 확신은 아무데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깊은 공허감을 느껴본 사람은 그런 것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인간답고 그만큼 가치 있고, 공허감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인간의 삶은 공허감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삶보다 더 공허하다. 모든 궁극적 의미에 대한 욕망과 추구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주는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며, 따라서 인간의 유일하며 각별한 존엄성의 근거이다. 그렇다면 공허감을 느껴보지 못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마스크를 쓴 개나 돼지와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에서 행복한 돼지보다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은 영원한 진리이다. 그렇다면 공허감은 삶의 의미를 의식하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첫째 조건이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공허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정신적 여백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공허감을 느껴볼 여유도 없이 너나할 것없이 물질적 충만만을 위해서 서로 싸우면서 떠들고, 만들고, 팔고, 사고, 소유하고 소비하기에만 바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로 채워진 오늘의 삶은 어떠한 삶보다 더욱 공허해 보인다. 참다운 삶의 충만한 의미는 한 인간의 삶,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의 궁극적 공허를 느꼈을 때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돈벌이나 출세, 자연의 개발이나 애국적 사업에 바쁘기만 했던 활동을 잠시 잊고 무한한 우주 공간의 공허와 영원한 시간의 공허의 멀고도 은은한, 무한히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울림에 잠시나마 귀를 기울이고 그것의 깊고도 깊은 의미를 잠깐이나마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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