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2 - 최명희
15. 가슴애피(2/7)
암운
십일월은 중동이라 대설 동지 절기로다
바람 불고 서리 치며 눈 오고 얼암 언다
가을에 거둔 곡식 언마나(얼마나) 하였던고
몇 섬은 환자하고 몇 섬은 왕세하고
언마는 제반미요 언마는 씨앗이며
도조도 되어 내고 품값도 갚으리라
시계 돈 장리 벼를 낱낱이 수쇄하니
엄부렁하던 것이 남저지 바이 없다
그러한들 어찌할꼬 놀양이나 여투리라
콩기름 우거지로 조반석죽 다행하다
부녀야 네 할 일이 메주 쑬 일 남았구나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 두소
동지는 명일이라 일양이 생하도다
시식으로 팥죽 쑤어 인리와 줄기리라
새 책력 반포하니 내년 절후 어떠한고
해 짤라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리하다
공채 사채 요당하니 관리 면임 아니온다
시비를 닫았으니 초옥이 한가하다
단구에 조석하니 자연히 틈 없나니
등잔불 긴긴 밤에 길쌈을 힘써 하소
베틀 곁에 물레 놓고 틀고 타고 잣고 짜네
자란 아이 글 배우고 어린 아이 노는 소리
여러 소리 지껄이니 실가의 재미로다
늙은이 일 없으니 기직이나 매어 보세
외양간 살펴 보아 여물을 가끔 주소
깃 주어 받은 거름 자로 쳐야 모이나니
태평한 시절의 이야기다. 하기는 그런 시절도 있기는 했었다. 그 무렵에는 한해의 저물녘에 곡식을 모두 거두어들이고는, 그 중에 몇 섬은 팔아서 돈으로 바꾼다. 그리고 제사 때 메를 지어 올릴 깨끗한 쌀을 따로 항아리에 담아 집안의 가장 정한 곳에 모셔 둔 다음, 도지에서는 도조를 덜어 낸다. 곡식의 쓸모란 많기도 하다. 거기서 시장의 곗돈도 장만하고 무엇보다도 원수스러운 장리 쌀도 되어 내야한다. 이 장리 벼만 생각하면 한 해 농사 헛지은 것 같아 애가 터진다.
장리
보통은 봄에 씨 뿌릴 때 빌려 주고 가을에 나락 거둘 때 받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는 이것은, 빌린 돈이나 곡식의 십분지 오의 변리를 덧붙여 갚아야 한다. 빌린 것의 반몫이나 더 붙는 이 엄청난 이자에 대하여 더 말하면 무엇하리. 봄철에는 한 종지도 못되게 빌린 것 같은데 가을이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집채처럼 무거운 것이 바로 이 장리이다. 모자라는 곡식 때문에 농사꾼은 누구라도 장리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이것만은 눈알이 쓰리나 아리나 갚아야만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원뜸의 종가에서 장리를 빌어 쓰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지 않아도 옹골차지 못한 농사 때문에 늘 허기진 농사꾼들은 장리에, 공출에, 지은 것들을 다 바치고는 아무 나머지도 남기지 못한 채, 다음 농사까지의 양식으로한 됫박의 좁쌀을 애지중지 아껴서 봉다리에 담아 묶어, 천장에 매달아 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기껏 호강하여 먹는 음식이란 것이 겨우 콩나물 우거지죽이었다. 멀겋게 풀어진 미음 같은 죽물에 몇 오라기 떠 있는 콩나물 건데기가 그래도 주린 창자를 진기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메주를 안 쓸 수 없고 동지에 팥죽을 걸러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메주는 띄워서 장을 담고, 장을 걸러 낸 된장이야말로 농가의 한 해 살림에 더할 나위 없는 반찬 아닌가. 또한 동지 팥죽은 상서로운 음식이니 흉내라도 내야 한다. 하늘에 걸린 해는 순간이 다르게 짧아져, 떴는가 하면 지고 만다. 그러자니 저절로 밤은 길어 새끼 꼬고 길쌈하는 일만이 소일이 될 수밖에. 거기다 길쌈은 손끝이 곧 돈이었다. 부지런히 북을 놀리고 밤새워 허리가 휘도록 짜 내면, 그저 종지쌀이나마 덜 축나는 것이다.
그리고 외양간 마구간 닭둥우리에 깔아 준 짚북더미나 마른 풀을 틈나는 대로 걷어 내어 마당 귀퉁이에 쌓아 놓는 일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소중한 거름이 되는 때문이었다. 허나 이런 궁색하고도 번거로운 일조차도 지금보다는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고 만것이다. 그때는 쪼들리고 시달리면서도 변함 없는 세월이 찾아와 주는 것을 믿었고, 세월 또한 어김없이 되돌아와 주었다.
농사꾼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늘을 믿었고 땅을 믿었다. 하늘은 절기가 되면 비를 내려 주고 뙤약볕에 곡식을 여물게 해 주었으며, 때가 차면 익어 넘치도록 지열을 다스리고 거기다가 거둘어들이기 알맞게 날씨마저 부조해 주었다. 그뿐이랴. 땅은 하늘의 음덕을 거스리지 않았다. 한번 떨어진 싹은 두말없이 품고 있다가, 욕심없이 지표로 토해 냈고, 묵묵히 자신의 젖을 먹여 살지게 길러 주었다. 거둔 뒤에 누구의 것으로 몫 지어지든지 아무 상관 없이 탐스럽게 알곡을 채워 주는 땅은, 곡식과 식물과 산과 강의 어미였다. 땅에 떨어진 것은 무엇이든지 썩는다. 땅이 무엇을 거부하는 것은 본 일이 없다. 사람이나 짐승이 내버린 똥.오줌도 땅에 스며들면 거름이 되고, 독이 올라 욕을 하며 내뱉은 침도 땅에 떨어지면 삭아서 물이 된다. 땅은 천한 것일수록 귀하게 받아들여 새롭게 만들어 준다. 땅에서는 무엇이든지 썩어야한다. 썩은 것은 거름이 되어 곡식도 기름지게 하고 풀도 무성하게 하고 나무도 단단하게 키운다. 썩혀서 비로소 다른 생명으로 물오르게 한다. 그래서 죽어 땅에 묻히는 것을 사람들은 ‘돌아간다’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순하고 두발 없는 땅에다 한세상을 의탁하고 사는 농사꾼의 성정은 그대로 땅을 닮게 마련이었다. (이제는 끝났다.)는 생각은 해 본 일이 없는 것이다. 막바지의 비탈이나 낭떠러지에 강파르게 서서 결판을 낼 일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도 안되었다. 미우나 고우나 오늘도 보고 내일도 보고, 죽어서도 자식들은 남아서 그놈들끼리 또 마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이미 샅샅이 뒤져가 버린 공출의 뒤에다가 콩나물을 기를 콩마저도 남아 있지 않아. 요기가 될 만한 나무 뿌리를 삶은 물로 끼니를 때우는 거멍굴 사람들은 가까스로 가을을 넘기고 겨울에 들면서 까닭없이 뒤숭숭했다.
‘까닭없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자기네와 직접 피붙이가 아닌 남의 일인 데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남의 일인데도 단순히 남의 일만이 아니라 곧 자기들의 운명에도 무슨 바람이 끼칠 것만 같은 불길한 사건인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대갓집 서까래가 씨러지먼, 거그 귀영탱이다 집 짓고 살든 쥐새끼들도 따라서 쏟아져 부리제잉. 넘으 집 씨러지는디 내 둥지도 씨러지능거이 또 우리 같은 사람들 팔짜 아닝갑서?”
평순네가 근심 어린 눈으로 원뜸 쪽을 항하여 말했을 때, 턱을 쳐들고 있던 옹구네는 댓바람에 맞받아서
“아앗따아, 무신 씨러질 집칸이랑 물어나 논 곡식이랑 갓득갓득 쟁에 놨능게비이?”하고 쏘아 뱉었다.
“이노무 호랭이 물어갈 예펜네야. 꼭 머엇을 그렇게 쟁에 놔서 그런다냐? 사흘 굶은 집구석에도 도적놈 가지갈 것은 있드라고, 이런 사람사는 꼬라지 머 사람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지마는, 그래도 다 이만치라도 목심 달고 사능 거이 청암마님 덕분이고, 그 댁으 기운이 여그 끄장 덮어 중게 우리가 안 죽고 사능 거잉게 하는 말이제. 사램이, 앞으로 오는 공은 몰라도 지내간 공은 잊어 부리지 말어야제잉.”
“아이고 그리여. 충신 났고 열녀 났다. 깃대가 없어서 어쩌끄나. 북치고 장구 치고 동네방네 돌아댕김서, 내가 이런 사램이요오, 외었으면 꼭 쓰겄는디.”
그 말에 평순네는 길게 눈을 플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옹구네는 그 등판에 대고 한 마디를 덧붙여 쏘았던 것이다.
“아 어디 가먼 상전 없으께미 걱젱이냐 걱젱이? 천지에 쌔고 쌨는 거이 상전이다. 하이고매, 말도 마라 몸썰난다. 자고 새먼 손발톱이 모지라지게 해다 바쳐도 누가 눈 한 번이나 깜짝 허등게비. 매 발톱 같은 눈으로 이리 뒤집어 보고, 저리 헤집어 보고, 실밥 한 오래기만 빠져 나와도 패대기 치고, 나도 인자 이런 시상 신물나서 못 살겄다. 그렇게 떵떵 울리고 살든 대갓집도 망헐 운수 당허먼 벨 수 없이 망해야지 어쩌겄나고요.”
아까 참에 평순네에게 해붙였던 말끝의 기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지 옹구네는 볼따구니가 빨개져서 춘복이 쪽으로 돌아눕는다. 얼기설기 얽은 농막이라 시린 외풍이 선뜩했다. 춘복이는 팔베개를 한 채로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밤이 기울어 그 모습이 보일 리 없지만, 이렇게 옆엣사람 생각도 안하고 한동안 말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러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아이 그렁게 원뜸에 새서방은 사랑으다 가돠 놔도 소용없고 인자는 전주로 아조 도망을 가 부렀다 그거이제?”
아까도 한 말인데 다시 되짚는다. 춘복이는 대꾸가 없다. 무슨 생각을 해도 골똘히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먼 그 기생 첩실은 어쩠스꼬? 데꼬 살으까?”
“머 도망끄장 감서, 지집 내부리로 갔을라고요?”
“아이고매 정나미야. 갔을라고요는 무신 쎄빠질 노무 갔을라고요오? 참 내.”
옹구네는 샐쭉하여 핀잔을 준다. 그네로서는 이렇게 말을 올려붙이는 순간이 무단히 섭섭한 탓이었다. 춘복이가 투박한 대로 말을 놓을 때는 마치 자기와 한살인 듯 여겨지다가도, 이렇게 평상대로 말하면 별안간에 허망해지며 내쫓긴 듯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럿은 이제 그만 집으로 가 보라는 무언중의 신호이기도 한 셈이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몸도 마음도 식었으니 이제
한 잠 잘 일만 남았다는 시늉 같기도 하여, 문득 가슴이 선뜩해지기까지 하는 말투였다. 어쩌면 그네는 “옹구네, 우리 기양 살어 부리제.”하는 말을 은연중 애가 잦게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춘복이는, 언제나 새로 만난 남정네처럼 어설프고 약간은 심란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 심정을 말투로드러내고 마는 것이었다.
“헐 일도 잔상도 없능갑소. 무신 애들맹이로 그께잇 거를 갖꼬 다 트집이다요?”
“흥 허기사 머 나 같은 년은 마느래도 아니고 첩실도 아닝게 암칙게나 대거리헌들 따질거이 머 있당가?”
“왜 또 그러시요?”
“내가 머 무신 거마린 중 아능게빈디, 뒤집어 보먼 자개도 손해난 거없지 멀 그리여? 떠꺼머리가 맘만 먹으먼 엎어질 예펜네 공으로 챙게두고, 솔레솔레 꽂감 꼭지 빼먹는 것도 복이라먼 복인디, 맨날 그렇게 내 사정 봐 주는 사램맹이로 그리여?”
“맨날 들어도 그 소리. 인자 알었응게 그만허시오. 아닝게 아니라 나도 품삯 안 주고 연장 갈응게 좋소, 좋아.”
옹구네가 그 말에 발딱 일어나 앉는다. 짚수세미같이 엉클어진 머리채 뒤꼭지가 어둠 속에서도 우우 소리를 지르며 일어설 듯한 기세다. 그러나 그네는 아직도 아까 그 자세대로 누워 있는 춘복이를 눈이 돌아가게 흘기기만 할 쭌, 얼른 무어라고 입을 떼지 못한다. 아마 분이 치받치는데다가 야속한 생각에 몸이 떨리는 모양이었다.
“머머? 상놈 자식 안 날라고 펭상에 장개를 안 들겄다고? 핑계가 좋아서 떠을 사 먹겠네. 매급시 그러지 말드라고. 내가 홀메미라고 깜보능게빈디이. 이리 뜯어먹고, 저리 발러먹고, 공것잉게 맘대로 맛보시겨. 그러다 개뻬다구맹이로 고샅으다 동댕이쳐도 되게에. 누가 머래야? 내가 들러붙어서 찐드기맹이로 떨어지도 안허고 살자고 그러께미 장개 안 간다고 으름장 놓능거 내 다 안다고오. 그런디, 이건 알어 두어. 상놈은 상놈 낳고, 상년은 상년 낳능 게에. 그런디, 지 아무리 잘 났어도 상놈은 상년 만나 사능 거이여. 무신 천지개빅을 허겄다고 꿍꿍이여, 꿍꿍이가.”
춘복이는 아예 귀를 봉창한 듯 꿈쩍도 하지 않고, 옹구네는 더욱더 약이 올라 말끝이 착착 감기게 찰져진다. 그네는 화가 난다고 말소리가 높아지거나 빨라지지 않는다. 그럴수록 조근조근 누비듯이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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