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1022호
2020.7.20. (음 5.30) / 발송인:
|
|
|
nowmaster@nate.com
|
※ 한자 등 텍스트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
|
|
글나눔 → 오늘의 어록
|
|
|
급진주의자란 두 다리가 모두 허공에 둥둥 뜬 사람. ― 프랭클린 D.루즈벨트
|
|
|
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말의 토착화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한때 ‘양담배’가 문제된 적이 있었다. 전매제품인 국산 담배 소비를 방해하는 불법 상품이었다. 주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왔다. 전문 단속반이 있었고, 다방 같은 데서 몰래 단골한테만 팔기도 했다. 이름은 서양에서 왔다는 ‘양-’이라는 접두사를 붙이고 있었지만 사실상 모두 미제 담배였다. 미국은 곧 서양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가게에서 합법적으로 외국 담배들을 판다. 그것도 미국 것만이 아니라 다양하다. 그러면서 어느새 ‘양담배’라는 말을 듣기 어려워졌다. 자유스러워지면서 동시에 그 이름을 잃어버린 것이다. 담배 종류를 일컫는 말도 달라졌다. 미국 담배, 일본 담배, 독일 담배처럼 생산한 나라를 일컫지 않고 구체적인 상표를 말하게 되었다. 제품의 국적보다 개별화된 상호와 상품명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양-’이라는 접두사가 사실상 무의미해진 말도 대단히 많다. ‘양복, 양파, 양말, 양옥, 양배추, 양철’ 등의 어휘도 이 이상 서양에서 왔다는 표지가 무의미해졌다. 마치 우리 토산품인 양 수입품은 보기 어렵고 국내산이 자연스럽게 잘 소비된다. 실물이 토착화되면서 말도 토착화되어 버렸다. 원래 의미가 남아 있는 ‘양’자 돌림은 ‘양주’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양주의 의미도 이미 서양 술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서양의 ‘와인, 보드카, 코냑’ 등이 아닌 위스키를 주로 가리킨다. 그만큼 의미의 폭이 좁아져버렸다. 그러면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점점 ‘서양’이라는 거대 관념이 상품 세계 속에서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 ‘서양 세계’와 ‘우리 세계’가 동질화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한다면 실체는 지구화되고 있고, 기호는 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물결에 놀라 외국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화는 세계가 다양한 문물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 문물을 자유롭게 우리 것으로 만드는 역할은 우리의 언어가 담당해야 할 일이다.
………………………………………………………………………………………………………………
국가와 교과서
새삼스레 교과서, 그것도 국정교과서 문제를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다.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교과서를 누가 편찬하느냐의 문제가 일차적 사안이 된 것이 참 안타깝기 짝이 없다.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 같은 느낌이다. 국가가 역사교과서를 편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통령이 직접 집필할 상황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장관이 직접 팔을 걷어붙일 일도 아니다. 결국은 전공자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국가가 한다는 일들은 구체적으로 보면 결국은 실무자나 전문가들의 일이다. 단지 ‘국가의 이름으로’ 낼 뿐이다.
국가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면 국가기관이나 정권, 정파가 개입할 기회가 많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체제나 정치세력들은 국가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을 담으려 할 것이다. 민족이나 국민의 이름을 이용해도 되지만 그것은 좀 부담스러운 점이 많다. 국가라는 존재를 내밀어야 하루하루 살아가는 보통 국민들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고로 역사는 국가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국가는 역사에 대해서 사실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렇기에 국가가 역사에 대해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특정 정치세력이 무언가 자신들의 말을 역사에 끼워 넣으려 한다는 의심을 사기 쉽다. 더구나 역사 문제에 대해 꺼림칙한 면이 많은 정권일수록 이런 일에는 자제할 필요가 있다. 자칫 역사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참에 모든 사람이 ‘국가’의 참뜻을 되돌아볼 기회를 가지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국가는 매우 추상적인 관념이다. 국가가 구체적인 실체를 가지려면 권력을 쥔 집단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들이 국가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국민’들 앞에서 관철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국민이 진정 국가의 주인이 되려면 부단히 목소리를 내는 길밖에 없다. 침묵하면 체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
|
|
시나눔 → 우리나라 詩
|
|
|
집시의 시집 - 기형도
1
우리는 너무 어렸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다. 그러나 어른들도 그를 그냥
일꾼이라 불렀다.
2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손을 가리켜 신(神)의 공장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굶주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무엇엔가 굶주려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만들었다.
그는 마법사였다. 어떤 아이는 실제로 그가 토마토를 가지고
둥근 금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가 어디서 흘러
들어왔는지 어른들도 몰랐다. 우리는 그가 트럭의 고장 고등어의
고장 아니, 포도의 고장에서 왔을 거라고 서로 심하게 다툰 적도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저녁 때마다 그는 농장의
검은 목책에 기대앉아 이상한 노래들을 불렀다.
모든 풍요의 아버지인 구름
모든 질서의 아버지인 햇빛
숲에서 날 찾으려거든 장화를 벗어주어요.
나는 나무들의 가신(家臣), 짐승들의 다정한 맏형.
그의 말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우리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우리의 튼튼한 발을 칭찬했다.
어른들은 참된 즐거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세상을 자물통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은
신기한 폭탄, 꿈꾸는 부족(部族)에겐 발견의 도화선. 우리는
그를 믿었다. 어느 날은 비에 젖은 빵, 어떤 날은 작은 홍당무를
먹으며 그는 부드럽게 노래불렀다. 우리는 그때마다 놀라움에
떨며 그를 읽었다.
나는 즐거운 노동자, 항상 조용히 취해 있네
술집에서 나를 만나려거든 신성한 저녁에 오게
가장 더러운 옷을 입은 사내를 찾아주오
사냥해온 별
모든 사물들의 도장(圖章)
모든 정신들의 장식
랄라라, 기쁨들이여!
주오(週誤)들이여! 겸손한 친화력이여!
추수가 끝나고 여름 옷차림 그대로 읍내 쪽으로 흘러갔다.
어른들은 안심했다. 그러나 우리는 벌써 병정놀이들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코밑에 수염이 돋기 시작한 아이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한동안 그 사내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오랜 뒤에 누군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우리는
이미 그의 얼굴조차 기억하기 힘들었다.
상급반에 진학하면서 우리는 혈통과 교육에 대해 배웠다.
오래지 않아...
3
우리는 완전히 그를 잊었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였을지조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저녁마다 연필을
깎다가 잠드는 버릇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했다.
|
|
|
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
|
|
우주의 신비 - 폴 할펀
우주의 운명
펜지어스와 윌슨의 발견으로 시작하여, 20세기의 마지막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은 우주론의 역사에서 대표적인 시기가 되었다. 우리는 공간적으로 더욱 멀리 손길을 뻗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단지 수십 년 전만을 상상할 수 있는 것에 비하여 훨씬 더 먼 과거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 좀더 깊고 넓은 우주의 지식에 대해 알 게 되었다. 진실을 추구하는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 왔다. 우리는 우주가 한때 무척 뜨거웠으며 또한 상상할 수 없으리 만치 작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초기 우주는 매우 균일했을 것 - 또는 어떤 주요한 불균일성이 있었더라도 우주가 인플레이션적으로 성장하는 시기 동안에 그 불균일성이 어떻게든 평 평해졌을 것 - 이라고 추정하였다 하지만 이런 전체적인 균일성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주는 은하의 전신이 되는 작은 씨앗으로 얼룩져 있었음에 틀림없다.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간단한 원자가 형성되고, 우주 복사가 자유롭게 되어 공간의 모든부분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결국 펜지어스,윌슨 스무트 그리고 다른 이들에 의하여 파악되었다. ) 그 시기 동안 새롭게 형성된 원자들은 모여서 우주에서 밀도가 높은 부분을 형성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무거운 암흑 물질로 가득 찬 지역일 것이다. 점차 응고되는 뜨거운 물질들은 은하, 은하단, 그리고 초은하단의 구조를 만드는 거대한 구름으로 형성된다 동시에 우주의 거품, 필라멘트, 그리고 허공, 또한 거대한 벽들과 같은 거대한 구조들도 형성되었다.
우주가 팽창하는 동안 이러한 물체들은 점점 성장하고 또 서로 멀어지게 되었다 배경 복사는 점차로 식어 가게 되었다. 곧 은하들은 별을 만들게 된다. 최초의 별 - 종족2 - 은 주로 수소 기체로부터 형성되었다. 때로는 강렬한 폭발을 수반하는 그 별들의 죽음이 만든 잿더미에서부터 젊은 별들의 모임 - 종족 1 - 이 만들어졌다. 후자의 종족에 속하는 형태의 별들은 행성계를 가지고 형성되었다. 이런 행성계의 일부분에는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지구라고 불리는 이런 행성 중의 하나에서, 당신은 당신의 세계에 대한 이런 역사 서적을 읽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상당히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위에서 기술한 이런 모든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천문학자와 물리학자들이 30여 년 간에 걸쳐 수집한 자료, 특별히 우주 배경 복사와 관련된 자료와 또한 알려진 기본 입자의 오늘날의 물리량에 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우리 인류는 오늘날 대폭발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주의 밀도는 여전히 모르고 있다. 우주는 열려 있는가, 닫혀 있는가, 또는 편평한가? (이것들은 6장에서 논의된 프리드먼의 모델에 의하여 나열된 선택들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무한히 팽창할 것인가? 어느 정도 팽창하다가 언젠가는 수축할 것인가? 또는 이들 두 극단적인 경우의 경계선에서 비틀거릴 것인가? 만일 우주가 열려 있거나 편평하다면, 그것의 궁극적인 운명은 절대적인 정지 상태일 것이다. 점진적으로 우주가 팽창해 나감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별들이 그들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백색 왜성, 중성자별, 블랙흘이 될 것이다
[허블 우주 망원경이 찍은 시리우스 A와 시리우스 B의 사진. 밝은 시리우스 A의 밑에 희미하고 작은 점처럼 보이는 백색왜성 시리우스 B가 보인다.]
백색 왜성은 필연적으로 다 타 버리고 난 뒤 암혹왜성 같은 생명이 없는 천체로 남게 될 것이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빛나는 별의 죽음과, 호킹 과정으로 불리는 블랙흘의 증발과 함께 우주공간에는 사용 가능한 어떠한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별들의 에너지를 유도하는 힘이 없으므로, 또는 어떠한 연료로부터도 방출되는 에너지가 없으므로 모든 물리적 현상은 완전히 멈추게 될 것이다. 열적 죽음이라 불리는 이러한 마지막 단계는 시간 자체의 죽음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이와는 달리 만일 우주가 닫혀 있다면, 우주가 이지러지는 마지막 시기는 결코 극적이지 않다. 먼 미래의 한 순간에 우주의 허블 팽창은 멈추고 전체적인 수축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늘의 모든 은하들은 역과정을 겪으며 마치 우주 자체가 수축하듯이 서로를 향하여 모여들게 된다. 대폭발의 역과정 시간과 매우 비슷하게 마침내 우주는 수학적인 특이점으로 모여들게 된다. 이론가들은 이러한 다른 가능성들은 오메가 파라미터에 의하여 기술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 이것은 우주가 다시 수축하는 데 필요한 임계 질량에 비하여 우주 안에 질량이 얼마나 많은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현재 천문학자들이 오메가 값을 결정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이런 방법 중 하나가 우주 안에 빛을 내는 물질과 암흑 물질이 얼마나 있는가를 측정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빛을 내는 물질이 우주를 닫힌 상태로 만들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더 나아가 현재의 발견을 토대로 암흑 물질이 닫힌 우주나 편평한 우주를 만들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추정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우주는 열린 것이라는 주장을지지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서 우주의 궁극적인 운명을 끌어내는 것은 이른감이 있다. 첫째, 빛을 내지 않는 물질에 대한 연구가 아직 초보적인 단계이다. 우리가 논의해 온 것처럼 천문학자들의 암흑 물질의 본성과 양에 대한 평가는 새로운 관측 자료가 나오는 대로 개정될 것이다. 이러한 각각의 재평가들을 통해 그들의 우주 질량 추정은 개선될 것이다. 더 나아가 오메가 값을 계산하는 방법은 정확한 우주의 임계 질량의 결정에 달려 있다. 불행하게도 임계 질량은 허블 상수의 함수이다. 아직 천문학자들이 허블 상수를 정확하게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임계 질량 역시 부정확하다.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하여, UC 버클리 대학의 펄뮤터(Saul Perlmutter), 페니팩커(Carl Pennypacker) 그리고 골드하버(Gerson Goldhaber) 등이 이끄는 영국과 미국의 과학자들은 다른 독립적인 방법으로 오메가 값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감속 파라미터(deceleration parameter)' 라 불리는 관련된 상수의 값을 찾는 중인데, 이것은 우주 팽창의 시간에 대한 변화량의 함수로 정의된다. 프리드먼의 우주에서 그 상수의 값은 정확하게 오메가 값의 절반이다. 따라서 감속 파라미터가 1/2보다 적으냐, 1/2과 같으냐, 그리고 1/2보다 많으냐 하는 것은 각각 우주가 열려 있는가, 편평한가, 그리고 닫혀 있는가를 나타낸다. 영국-미국 연구팀은 아프리카 해안의 북서쪽 외각의 카나리 제도에 있는 강력한 아이작 뉴턴 망원경을 사용하고 있으며, 멀리 있는 초신성 폭발의 거리와 후퇴 속도를 측정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들이 연구하는 초신성은 아주 멀리 있어서 그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기까지는 수십억 년이 걸린다. 따라서 이러한 천체들은 우주 역사의 초기 단계 - 아마도 허블 팽창이 달랐던 시기 - 를 나타내 준다 영국-미국 연구팀은 이러한 차이점을 기록해서 감속 파라미터를 계산하고, 이러한 결과를 우주의 운명을 예측하는 데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케플러 초신성 SN 1604의 잔해]
현대의 천문학자들은 때때로 자신들이 이상한 역설의 거미줄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일반상대성 이론에 따라 그들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물질의 분포를 분석함으로써 우주의 운명을 찾아낸다. 아직은 이러한 물질이 어떻게 분포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때때로 우주의 향후 행동을 가정하곤 한다. 우주가 열렸거나, 닫혔거나 또는 편평하거나 간에, 예를 들면 인플레이션 우주론은 현재 우주가 편평하다는 것을 가정 한다. 이러한 예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연구자들은 우주의 형태와 구조에 대해 겸허한 자세를 갖는 것을 배우려고 한다. 즉 대폭발의 본성에 관한 모든 불필요한 가정을 피하려고 한다. 우주의 나이에 관한 현대적 추정,계층적 구조,그리고 물질의 분포등 많은 것들이 합쳐져서 많은 연구자들은 특별한 반대의견 없이 우주의 '임의로 만들어진 모델'에 동의하고 있다. 다소 황당한 이 이론들은 현재 알려져 있는 우주론적인 자료에 부합되도록 상세하게 수정되고 있다. 때로는 이런 이론들은 프리드먼 모델에서 벗어나기도 하며, 아인슈타인의 우주 상수와 같은 비정상적인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단지 미래의 관측만이 이러한 제거된 요소들이 필요한 것이었는지를 말해 줄 것이다. 현재는 우주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분명 매우 적절한 시기이다. 달리 말하면 최근 수년간 항성, 은하, 그리고 다른 천체들에 대하여 많은 것들이 알려져 왔다. 그리고 거의 몇 주 동안은 허블 우주 망원경을 통하여 새로운 발견들이 계속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나이의 문제, 암흑물질의 딜레마,거대한 흡입구의 비밀, 그리고 우주의 운명에 관한 문제 등은 상당히 유능한 과학자들이 곤혹스러움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는 상황으로 만든다. 우주가 좀더 친숙한 것이 되어 감에 따라, 그것은 점점 더 기묘한 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신이 직접 망원경을 붙잡고 밤하늘로 달려가, 당신 스스로의 힘으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고 싶게 만든다.
|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 안에 으뜸가는 미인. 임금이 혹하여 나라가 뒤집혀도 모를 만한 미인.
《出典》'漢書' 李夫人傳
'傾國'이 '傾城(경성)'과 아울러 美人을 일컫는 말로 쓰여지게 된 것은 이연년(李延年)의 다음과 같은 詩에서 유래한다.
북방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
세상을 끊고 홀로 서 있네.
한 번 돌아보면 성을 기울이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를 기울게 하네.
어찌 성을 기울이고 나라를 기울임을 알지 못하랴.
아름다운 사람은 두 번 얻기 어렵네.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무제는 곧 그녀를 불러들여 보니 더없이 예뻤고 춤도 능숙해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여인이 이부인(李夫人)이다. 傾國(경국)이란 말은 李白의 名花傾國兩相歡(명화경국양상환) 구절과 백거이의 '장한가'의 한왕은 색(色)을 중히 여겨 傾國을 생각한다. 라는 구절과 항우에게서 자기 妻子(처자)를 변설로써 찾아준 후공(侯公)을 漢高祖가 이는 천하의 변사이다. 그가 있는 곳에 나라를 기울이게 할 수 있다고 칭찬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
|
|
|
글나눔 → 삶 속의 글
|
|
|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조약돌 하나라도 - 임옥숙
저는 햇수로 7년째 투병 생활중인 스물다섯의 여자입니다. 뭐라고 마땅히 이름붙일 것일 없어서 '투병 생활'이라고 억지로 끌어다 붙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사치스런 이름이고, 사실 제 몸에서 정상인 신체 기관은 눈과 귀뿐입니다. 사고 때 뇌신경을 건드린 까닭에 언어 장애가 와서 의사 표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신체적 이상이 찾아왔습니다. 사고 직후에는 안면 근육은 물론 전신이 마비되어 약 한 달 간 눈을 못 뜨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의식도 없는데 두 팔로 허공을 부여잡고 몸이 자꾸 치솟아 간호원이 두 다리를 꽉 누르고 있었지요. 언니의 등에 업혀서 퇴원을 했으나 저를 간호할 문제였습니다.
저는 식물 인간을 간신히 면했을 뿐 걷지도 말하지도 못했으니, 누군가 시중을 들어 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장사하시느라, 언니는 회사에, 동생은 학교에 다니느라 제 곁에서 간호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이에 나을 병이 아니니 그것이 문제였지요. 궁여지책으로 분가해 사는 올케가 연년생의 젖먹이 조카 둘을 데리고 출퇴근을 하면서 저의 병 수발을 했습니다.
약 1년 후 걸음이 갓난아기 걸음마 정도가 되어 저 혼자 집을 지키게 되었을 때, 저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나만의 성을 두텁게 쌓고 그 안으로만 숨어 들어갔습니다. 오랫동안 가족들 외의 남들하고는 접촉이 없는 밀폐된 생활을 해온 탓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제겐 여러 사람들과 쉬이 어울릴 수 없는 신체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저는 매우 세심하고 상처 받기 쉬운 성격이어서 더 더욱 그러했지요. 사람들의 경멸하는 눈초리가 두려워서 저 스스로 달팽이처럼 내부의 세계로만 침잠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는 죽음을 생각했지요. 가족들이 자신의 생활 무대로 떠나 버린 텅빈 방에 남아서 저는 온종일 죽음만을 생각했습니다.
죽음의 천사-그렇습니다. 죽음을 천사에 비유하듯이, 그때의 내겐 죽음이 천사처럼 여겼습니다. 발전도 희망도 없는 이 삶에서 탈출할 길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지요. 해질녘 강둑을 방황하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맥없는 발길을 돌리기도 했고, 남의 눈에 띄어 슬그머니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온 것 또한 몇 번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수없이 죽음의 시도를 꾀했으나 실패한 뒤의 어느 날 밤 저는 짤막한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는 몰래 집을 나갔습니다.
<먼저 가는 불효 자식을 부디 용서해 주세요. 이것이 저의 마지막 효도입니다.>
차가운 빗방울이 이마를 때리고 지나갔습니다. 정신없이 걷던 발길을 멈추고 칠흙같이 어두운 강변에 혼자 서 있었습니다. 강변은 무덤같이 조용했습니다. 마주 보이는 강 건너 마을의 아파트 창문마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만이 조용히 강을 건너오고 있었을 뿐... 자갈을 밟는 내 발자국 소리가 어둠 속을 공허하게 울리고는 사라져 갔습니다. 발 밑으로 찰랑거리는 물결이 지나갈 때, 저는 하늘에 무수히 박혀 꽃같이 빛나는 별들을 우러러보며 마지막 기도를 했지요.
"하느님, 이 가여운 영혼을 받아 주세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니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동시에 죽는다는 일도 별 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곧 이어서 이대로 죽기는 너무나 허망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일망정 그래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자문자답했습니다. 그래, 좀더 살다가 죽자. 좀더 살다가 "그동안 열심히 살다 이제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하고 떳떳이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살아 보자!
그때부터 두 평 남짓한 셋방에서 지겨운 병마와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어코 승리하고 말리라고 전 결심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무한정하며 불가사의한 것이니까요. 사람의 잠재된 능력이란 개발하기에 따라 큰 힘을 발휘한다고 하더군요. 죽음이란 단순히 육체의 소멸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날 깨달았습니다. 모든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 그래서 죽음이 슬프다는 것도 그날 알았지요.
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으나, 일단 결심한 바가 있는 터여서 저는 태연했고 침묵으로 모든 답변을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다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삶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남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남이 못 갖춘 것을 나는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맹인에게는 없는 빛, 나는 그 빛의 충만함 속에서 살고 있다, 신체 중 일부가 없어진 사람이나 신체 내부에서 쉼 없이 솟구치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보다 나는 행복하다, 그렇게 저는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아에게는 없는 부모가 있으니 행복하고, 경련하는 턱을 베개에 얹고서 왼손으로 20초에 한 자씩이나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쓸 수 있으니 그 또한 행복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행복의 원리는 간단하다. 자신의 욕망을 줄이면 된다. 냇가의 조약돌이 쓸데 없다고 전부 걷어 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 인생에서 고난과 시련의 돌을 제거하면 환희와 승리의 노래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저는 믿습니다. 저도 반드시 쓸모가 있으리라고.
조약돌 하나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쓸모 없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에게랴!
(제2회 샘터 수기 당선작)
|
|
|
글나눔 → 추천글
|
|
|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제주목사 이시방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은의도 저버리고 세상 만났다고 나불대는 얄팍한 세속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가실 날이 없다. 더구나 저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나는 그를 모르노라.” 너무한 얘기다. 조선 왕조에서 폐출되어 임금 자리를 쫓겨난 인물로 광해군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신세도 졌고, 또 역대로 평화롭게 사귀어 온 명나라의 세력이 날로 기울어가고, 만주족 청의 세력은 나날이 강성해지는 틈바구니에서, 등거리 양면외교로 고식적이나마 잘 버티어 온 왕조의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사생활에는 엉망이어서 하필이면 선왕의 후궁인 개시를 사랑하여 수령방백이 그녀의 손에 좌우되고, 동기간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심지어는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여 아무리 계모라도 폐모하기에 이르자, 뜻있는 이들이 군사를 일으켜 능양군을 세우고 왕위에서 몰아내니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이렇게 왕위에서 폐출되었어도 호칭에는 군을 붙였는데,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도 복위되기 전 노산군으로 불리었고, 연산군은 나면서부터 세자라 폐위와 함께 주어진 칭호이었으며 광해군은 본래의 군호가 그것이었다. 이렇게 군으로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무리 실덕하여 왕노릇한 것도 없거나, 세자로 있던 것이 아니라 해도 선왕의 아들인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인지라, 왕자로서의 예우만은 지키는 체통이었던 것이다. 그 분들의 최후도 노산군 단종은 목을 졸려 비명에 돌아간 분이니까 말할 것도 없고, 연산군은 폐위 강봉되어 강화 교동으로 귀양갔다가 오래지 않아 더위에 곽란으로 급서하였다 하는데, 향년이 33세이니 아무래도 타살의 혐의가 짙다. 아무튼 그의 묘는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있는데 묘역을 꾸민 석물이랑 그래도 왕자의 예모를 갖추고 있다.
광해군은 선조 8년(1575년)에 태어나 1608년부터 15년간 왕위에 있다가 밀려나 인조 19년(1641년)까지 생존했으니 그런대로 천수를 다한 것이라 하겠다. 그 사이에도 공신들 사이에서는 슬쩍 해치워버리자는 공론도 있었으나 모진 목숨을 부지하여 처음에는 강화도에서 귀양살이 하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그야말로 볼 일 다 본 터에 대접이 온전할 까닭이 없다. 겹겹이 막히어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 들여 보내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에 없이 공궤가 깨끗하고 좋아져서 폐주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처우가 달라졌을 제는, 아마도 전일 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 제주목사로 왔는가 보이.”
그랬더니 따라와 모시고 지내는 늙은 궁녀가 그런다.
“그렇진 않을 것이옵니다.”
“그것을 그대가 어찌 아노?”
“생각해 보십시오. 마마께서 재위하시는 동안 신하들 승진이나 보직을 모두 궁인들의 말이나 듣고 처리하셨사온대, 그렇게 뒷구멍으로 손을 써서 출세한 사람이라면, 제 밑이구려서라도 일부러 마마께 박하게 굴어, 전혀 그렇지 않았던 양으로 꾸밀 것이지, 그런 용렬한 인간들이 어떻게 감히 마마를 특별히 정성껏 받들어 모시겠습니까? 아마 옳은 가문에서 바로 배운 공자가 도임해 왔을 것이옵니다.”
뒤에 차차 알아보니, 새로 취임한 목사는 이시방으로 반정공신 중에도 원훈인 이귀의 둘째 아들이요, 자신도 형 시백과 함께 정사 이등공신에 오른 사람이다. 말하자면 광해군을 내어 쫓은 가문이요, 장본인이다. 그가 제주목사로 와 보니 광해군이 거기 안치돼 있어 주방에다 단단히 이른 것이다.
“비록 실수는 했어도 왕자요. 십여 년이나 임금으로 받들던 분이다. 추호라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니라.”
그러다가 인조 19년(1641년) 광해군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바닷길이 하도 멀어 일일이 중앙에 품해 지시를 기다릴 길이 없다. 곧장 섬 안의 관원들을 데리고 소복하고 들어가 친히 수시걷고 염습까지 말끔히 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아마 망인도 영혼이 있었더면 그랬을 것이다.
“나는 못된 놈의 꼬임에 빠져 어머니도 폐했는데, 이미 왕의 몸도 아닌 나를...”
이 사실이 알려지자 대간은, 무슨 일이고 트집잡아 따지는 관원인지라, 멋대로 처사한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모두들 잘한 일이라고 공론이 돌아서 무사하였다. 그는 뒤에 벼슬이 호조판서에까지 올랐고 시호를 충정이라 하였으며 자손도 크게 번창하였다. 그가 수습한 광해군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송릉리에 부인과 함께 모셔져 있다.
|
|
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
|
|
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1장 이것은 괴로움이다
열세번째 이야기 - 아름다움의 허상
옛날 부처님이 라열기국기사굴산에 계실 때였다. 그때 성안에는 연화라는 이름의 한 음녀가 있었다. 그녀는 얼굴과 몸매가 아름답기로 나라 안에 견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대신의 자제들이 모두 찾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화는 문득 세상을 버리고 비구니가 될 작정을 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려고 길을 떠났다가 도중에 어떤 샘물앞에 이르게 되었다. 연화는 물을 마시고 손을 씻다가 샘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는데, 왜 세상을 버리고 사문이 되겠는가? 젊은것도 한때인데 마음껏 즐겨야지.' 그때 부처님은 연화가 제도될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부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부인의 모습은 우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어 연화보다 천만 배는 뛰어났다. 부인의 모습으로 변한 부처님은 연화가 돌아오고 있는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연화는 그 부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자못 친근감을 느껴 물었다.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남편이나 아이들 그리고 시종들은 어디에 두고 홀로 길을 걷고 계십니까?"
"성안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저기 있는 샘물에 가서 잠시 쉬면서 이야기나 나누는 게 어떨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두 여인은 샘물가로 가서 서로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 부인은 잠시 연화의 무릎을 베고 누웠는데 이내 자는 듯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얼굴이 문드러지면서 악취가 나고 배가 터져 벌레들이 기어나왔다. 또 이빨이 빠지고 머리털이 흩어져 사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모양을 본 연화는 놀랍고도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부인이 어떻게 갑자기 죽을 수 있을까? 이런 부인의 목숨도 무상한 것인데, 어찌 나의 수명을 장담할 수 있을까? 아, 역시 부처님에게 가야겠구나.' 이윽고 부처님이 계시는 곳에 도착한 연화는 절을 하고 나서 좀전에 당한 일을 말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연화에게 말했다.
"사람으로서 믿지 못할 네 가지 일이 있느니라. 첫째, 젊음은 반드시 늙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둘째는 건강한 것도 끝내는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부모 형제와 친척들이 모여 화목하게 산다 해도 결국은 헤어져야 하는 법이며, 넷째는 아무리 재산을 쌓아둔다 해도 마침내는 흩어지고 마는 법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늙으면 몸이 쇠약해지고 젊어도 병들면 몸이 무너져 썩고 허물어져 가나니 죽음도 결국은 그러한 것이리라. 이 몸을 어디에 쓰랴 온갖 더러움이 새어나는 곳이거늘 병이 들면 괴롭고 늙음과 죽음의 근심이 떠나지 않는다네. 쾌락만 쫓다가 못된 짓만 하면서 큰 변이 일어날 것을 알지 못하지만 목숨은 무상한 것이라네. 자식도 믿을 바 못 되고 부모형제도 마찬가지리 죽음이 임박하면 아무리 친한 어버이도 의지할 수 없다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연화는 신체란 좀전에 본 부인의 목숨처럼 영원한 것이 아니며 오직 도덕과 열반만이 영원한 안락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부처님에게 비구니가 되겠다고 말했다. 부처님이 칭찬하시자 연화의 머리카락이 저절로 떨어져 비구니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하여 곧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법구비유경>
|
|
독서실 → 인물
|
|
|
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위민 정신으로 일관한 경제 전문가 김육(1580~1658, 79살, 노사).
김육은 자신의 정치 신념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투철하였고 그 신념을 평생에 걸쳐 이루어낸 의지의 정치가였다. 그는 연이은 왜란과 호란으로 전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되었던 시절에 살면서 평생을 오로지 백성을 잘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에 매진했던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모든 만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허황한 정신세계에 몰두하기보다 실제 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추구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물질의 가치는 인간을 위함에 있는 것이지 물질 그 자체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여 오늘날의 황금 만능주의와는 현격히 다른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그는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항상 강인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지만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체의 사심도 없이 고통받는 백성들 편에서 신념을 실천하였기 때문에 반대파조차 그를 무작정 매도할 수는 없었다. 그가 강인한 의지로 척벽 같은 신념을 역설하면서도 파란과 굴곡으로 점철되는 정치판에서 귀양 한번 가지 않고 생애를 마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반듯한 삶의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시대에서 가장 명분론이 횡행하던 때였다. '북벌론'에서 출발한 성리학적 명분론은 '조선 중화주의'로까지 발전되어 갔으니 그 정도의 심각성은 익히 알 수 있는 바인데, 그는 그러한 시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현실적인 주장을 줄기차게 역설했던 것이다. 그의 정치철학의 근본은 오로지 위민 정신에 있었고 이를 위해서 줄기차게 특권층의 철폐를 주장하였으며 부의 편재가 백성을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나라도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민심 논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통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하늘, 외적, 백성 세 가지이다. 그 중에서 가까운 데 있는 두려운 존재인 백성들을 안정시킨다면 멀리 있는 다른 두 가지 두려움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에 몇 안 되는 경제 전문가이자 과학 기술자였으며, 실천적 학문을 추구하여 반계 유형원에게 이어진 실학 사상의 문을 열어놓은 인물이다.
굳세고도 단정한 인물
김육은 조선 14대 왕인 선조 133년(1580년)에 한성의 마포에서 재랑 김흥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청풍이고 자는 백후이며 호는 잠곡이다. 그의 고조부 김식은 중종대에 조광조와 함께 개혁 정치를 추진하다가 죽음을 맞은 '기묘명현'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12살 때 이미 '소학'을 통달했고 커가면서 성품이 굳세어지고 몸가짐도 단정했으며 말수도 많지 않았다. 13살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졸지에 어머니를 도와서 할머니와 어린 동생 삼남매를 보살펴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피난중에 우계 성혼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학문의 진보를 이루는 데는 큰 도움을 받았다. 19살 때 정유재란이 발생하여 이번에는 황해도 연안으로 피난하였는데 그 해에 할머니가 죽었고 이듬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전쟁은 생활의 고통과 함께 육친과의 이별까지 그에게 강요한 것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꿋꿋하게 장례 절차를 마친 후에 아버지 묘까지 이장시켜 부모를 남양주 미금 땅에 합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만큼 그는 굳건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후 한성으로 돌아와서 이모부댁에 의지하고 살다가 25살에 윤급의 딸인 파평 윤씨를 맞아 결혼을 하고, 그 이듬해인 선조 38년(1605년)에는 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후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재임으로 봉직하다가 광해군 3년(1611년)에 공자의 문묘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자 김광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5명의 명현을 공자의 문묘에 함께 모시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북인 정권은 실권자인 정인홍이 이를 반대하자 그는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유학자 명부인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해 버렸다. 정인홍은 자신의 스승인 조식보다 다름 사람이 먼저 공자의 문묘에 봉양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은 광해군 왕위 계승에 공이 큰 대북파의 거두로서 이 사건은 등극 초기에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던 광해군과 정권 실세들을 자극시켜서 김육을 비롯한 성균관 학생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
성균관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여 관직에의 진출이 봉쇄되는 것을 뜻한다. 그후에도 광해군 친위세력에 의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옥사가 연이어 일어나자 김육은 35살 되던 해인 광해군 6년(1614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가평군 잠곡으로 들어가서 칩거하고 말았다. 잠곡은 17살 때 고모부를 따라 가본 적이 있는 곳으로 어린 김육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던 곳이었다. 잠곡에 숨어들어온 그는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구워 팔아서 생계를 충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잠곡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그는 호를 회정당에서 잠곡으로 바꾸기까지 하였고, 일반 농민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민본 위주의 사상적 터를 닦았다.
본격적인 관직 진출과 지방관 생활
김육이 잠곡에 은둔하여 조용히 살고 있는동안 세상은 또 한번 바뀌고 있었다. 광해군 15년(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인조는 등극하자 광해군대에 박해를 받았던 인사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는데, 김육도 부름을 받고 올라와 의금부 도사직을 제수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벌써 44살의 중년이었다. 그러나 죄인 압송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관직에 나간지 얼마 안 되어서 파직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파직당한 다음해에 반정의 논공행상에 물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에 한성이 반란군에게 점령당하자 왕은 공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육은 인조를 따라 가서 피난길의 임금을 극진히 봉양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그 공으로 김육은 음성 현감을 제수받았고, 그 해 9월에 중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위직 진출을 위한 자격을 얻기도 했다. 당시 음성은 두 개의 면만을 관장하는 작은 현이었는데 그나마도 백성들은 수탈을 견디다 못해 흩어져서 사람을 찾기 어려웠고 논밭은 황폐해져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현실을 목도하여 그는 분연히 잘못된 정치의 폐단을 고치기 위한 건의로써 '음성현진페소'를 적어 올렸다. 현실과 동떨어진 세금과 요역이 징발이 민폐의 원인으로 이를 감하여 줄 것을 청하고, 이웃 충주가 관할하기 어려운 죽산과 진천을 음성현 소속으로 행정구역을 바꾸어 달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1년도 채 못되어 중앙으로 불려 올라와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을 역임하다가 이듬해에 사간원 헌납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그해(인조4년)에 호패청이 신설되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서 폐단만 늘어어나자 그는 이의 폐지를 건의하여 관철시키기도 했다.
정묘호란(1627년) 이듬해에 홍문관으로 자리를 옮겨서 대소직을 역임하다가 인조 10년(1632년)에 53살의 나이로 사간원 부수장으로 종3품인 사간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1636년) 3월에는 동지사로 명나라에 들어갔다가 연경에서 호란 발생과 삼전도의 굴욕 소식을 듣고는 통곡을 하기도 했다. 이듬해 6월에 1년만에 귀국한 그는 잠시 쉬다가 충청 감사를 제수받아서 또다시 목민관이 되었다. 그가 충청도에 부임하여 현지 사정을 살펴보니 전쟁을 겪고 난 후라 예전에 현감으로 일할 때보다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각종 세금으로 인한 수탈은 한층 극심해져 견디기 힘든 형편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공물의 폐단이 제일 컸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대동법' 시행에 대한 그의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대동법'이란 물품을 징수하는 공물 대신 쌀이나 무명으로 통일하여 내는 세금 징수 제도를 말한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 이미 경기 일원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하였고, 인조대에는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하고 있었다. 그는 양 도에서 실시해 본 결과 그 정당성과 유용성이 확인되었으므로 충청도에서도 실시하자고 주장하였고, 더 나아가서 충청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위하여 가장 타당한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대동법 실시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충청도의 경작토지 면적과 관청이 필요한 경비를 조사한 결과 대동법이 실시되면 백성들의 부담이 훨씬 줄어든다는 계산까지 뽑아서 재차 건의를 올렸으나 이때에는 수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고위 관리들이나 권문세가의 반대가 완강했기 때문이었다. 즉 대동법이 실시되면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그들의 이익이 침탈되는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결국 기득권 층의 방해로 일반 백성을 위한 제도가 도입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대동법 시행의 결과를 얻지 못한 채 1년여 임기를 마치고 동부승지를 제수 받아 중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동법 시행에 대한 의지는 잊지 않아서 그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중앙 정계에서의 활동
중앙 정계로 돌아온 그는 형조참의 겸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사간원 대사간, 한성부 우윤 등을 거쳐 인조 21년(1643년)에도 우의정 이경석, 서장관 유심 등과 함께 또 한번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68살의 나이에 개성 유수로 발령을 받아 세 번째 지방관 생활을 하였고, 70살이 되던 해(1649년)에 인조가 죽자 국장의 책임을 맡아 수행하였다. 국장을 마치고 효종에 의해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어 마침내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차 사임을 요청하면서 아울러 또다시 대동법 실시를 간하였다. 참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하여 줄기차게 주장을 거듭한 셈이다. 이때 대동법 실시에 따른 나라의 이해 득실에 관하여 김집과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우의정을 사직하고 양주로 내려갔으나(1650년) 효종은 그를 영중추부사에 이어 다음해(1651년)에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계속 사임을 고집하자 "지금 청나라에서 사절이 곧 도착하는데 조정안에 수장도 없이 맞아들일 수 없으니 정 사직하려면 그들이 가고 난 다음에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달래서 그를 불러들였다.
왕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그는 별수 없이 홍제원으로 나가서 청사를 영접하고는 그들이 떠나자 또다시 사직을 청하였다. 평소에도 그는 70살이 넘으면 생각에 한계가 오기 때문에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터라 거듭 물러나기를 간청한 것인데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된 효종은 그와 같은 노재상이 필요한 입장이어서 그를 계속 붙들었던 것이다. 결국 왕의 뜻을 완전히 물리칠 수 없어서 잠시나마 조정에 더 남아 있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그해(효종2년)는 그에게 있어서 굉장히 의미 있는 한 해가 되었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8월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실시되었고, 11월에는 그의 둘째 아들 우명의 딸이 세자빈으로 책정되었던 것이다. 그 해 12월에 건강이 나빠지자 영의정을 정태화에게 물려주고 우의정으로 나앉았다가 이듬해(1652년) 3월에 좌의정이 되었다.
그 다음해(1653년)에는 채유후, 이경여, 이후원 등과 함께 '인조실록' 50권을 찬진하였으며, 효종 5년(1655년) 7월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이 해 12월에 그의 계청에 따라 행전법의 과조를 제정하기도 했다. 즉 김육에 의해 화폐 유통이 추진된 것인데 그에 따라 상평청에 관전낭청이 신설되어 이를 주관하였다. 또 그 해에는 맏아들 좌명이 대사간이 되어서 부자가 함께 당상관의 지위에 재직하는 영광을 얻었다. 효종 8년(1657년)에는 '선조실록'을 개수해 내고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상소를 두 번이나 올렸다. 실로 관직 생활 내내 일관되게 백성의 편에 서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바를 줄기차게 추진한 셈인데 그의 이런 노력에 의하여 대동법이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나마 실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의 숙원이었던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을 끝내 보지 못한 채 그 이듬해(1658년)에 전라감사를 자청하여 나가서는 전라도 전 지역에 걸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대동법 시행의 의미
김육에 의하여 추진된 대동법은 공납을 대신하여 시행되었던 조세 제도이다. 왜 그가 그토록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대동법 시행을 자장하였는지를 알려면 당시의 공납에 의한 폐단을 이해하여야 한다. 공납은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여 납부하게 하는 세금인데 가짓수도 많거니와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가장 부담이 큰 조세였다. 더구나 그 지방에서 나지도 않는 물건을 납주하도록 요구하기도 하고 부가 기준이 고을의 대소에 따라 차이가 없이 동일하였으며 현지에서도 빈부를 따지지 않고 징수되었음은 물론 각 호마다 부과되어 도리어 빈민이 부호들보다 세금을 더 내는 형국이었다. 거기에다 지역에서 구하기 힘든 물품에 대하여는 대신 납부해주고 그 수수료를 받는 방납제도가 도입된 이래 공물을 심사하는 점퇴관리와 방납업자의 협잡에 의하여 백성들은 물품의 실제 가격의 몇배에 해당하는 값을 치러야 했다. 이에 따라 중과세를 견디다 못한 백성은 유망민이 되었고 농지는 경작할 자가 없으니 자연 황폐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가 재정도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일부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악법이 계속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폐단을 고치고자 김육이 줄기차게 주장한 대동법은 어떻게 보면 간단하게 시행할 수 있는 법체계였다. 즉 과세의 밥법을 토지 소유를 기준으로 하여 물품이 아닌 쌀과 베로 내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일찍이 조광조가 그 시행을 제기한 이래 율곡 등 여러 사람이 시행을 주장하였으나 적극적 도입이 저지되고 100년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어온 까닭은 대토지 소유자들인 고위 관리들의 조직적 방해 때문이었다. 대동법이 광해군 즉위 해에 경기도에 처음 도입된 이후 인조 즉위 해에 강원도에만 확대 적용된 까닭도 남부지방에 비해 관료 지주들의 소유토지가 적었던 관계로 시행에 대한 반대가 극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효종 즉위 해에 김육의 상소로 촉발된 대동법 논쟁으로 당시 조정은 완전히 둘로 갈라져 버렸다. 김집은 율곡의 제자인 김장생의 아들로서 송시열, 송준길 등 당대의 뛰어난 직계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던 서인의 영수격인 인물이었다. 직위상으로는 찬성파인 우의정 김육, 좌의정 조익, 연잉군 이시백 등이 상급자 였지만 반대파들은 서인 정권의 직계 주류의 인물들이자 일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결국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집권 세력인 서인은 파를 나누어 갈등을 빚게 되었다.
대동법을 찬성하는 김육 등을 한당이라 하였고, 반대하는 깁집 등은 산당이라 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는 명분이나 현실적 필요에서 어찌할 수 없는 대세였기 때문에 효종대에서 충청도와 전라도에 확대 실시한이후 함경도는 현종 7년(1666년), 경상도는 숙종 3년(1677년), 황해도는 숙종 34년(1708년)에 실시되었다. 실로 광해군 즉위 해(1608년)에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이후에 전국적으로 확대 정착되기까지 꼭 100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던 것이다. 각지에서 대동법이 실시될 때 그 기준이 되었던 자료는 김육이 충청도에 그것을 시행하기 위해 계획서로 제출하였던 '대동사목'이었으며, 대동법의 과세 기준은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1결당 대동미 12말로 통일하게 되었다.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부호의 부담은 늘고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은 줄었으며 국가의 재정 수입은 증가되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사회 안정에 큰 역할을 한 셈이었다.
대동법 시행으로 변화된 사회 현상은 또 있다. 그것은 공납의 폐지로 조정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공인의 등장이었다. 공납 청부업자이자 어용 상인인 공인의 등장은 수공업과 산업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초기 형태의 산업 자본가로 발전되어서 그 후 신분 제도의 변화와 사회 발전을 주도하였다. 김육이 평생을 걸고 줄기차게 추진해 온 대동법은 조선 사회의 일대 변화를 유도한 셈인데 그의 이러한 끈질긴 노력에는 어린 나이부터 가장으로서 겪은 경험과 잠곡에서의 생활이 바탕이 되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는 '소학'의 '가언'편에 나오는 송나라 성리학자 정호의 다음과 같은 말을 가슴 깊숙이 담아 두었다가 이를 현실 정치에서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것은 '일명지사 구존심어애물 어인필유소제'라는 구절로 '관직에 나간 사람은 만물을 아끼는 마음을 가진다면 반드시 사람에게도 혜택을 줄수 있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 구절을 그는 65살 때 지은 '종덕신편'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어려서 느낀 애물제인은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라고 축약해서 쓰기도 하였다.
그에 의하여 제기된 기타의 개혁조치
김육은 대동법 실시 이외에도 후기 조선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우선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역법 개정이다. 조선은 그동안 300년에 걸쳐 세종대에 만들어진 '칠정산 내외편'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절기가 맞지 않는 등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서 농업 활동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정확한 역법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예수회 소속 선교사 아담샬이 국립 천문대격인 흠천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서양의 과학 기술에 의하여 고안된 '대청 시헌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인조 23년(1645년)에 관상감 제조로 있던 김육은 행호군 한흥일이 중국에서 가져온 '신력효식'이라는 신역법에 관한 책을 연구하여 조선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러나 내용이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자 사행시에 일관을 대동시켜 역법을 배워 오게까지 하여 효종 4년(1653년)에 조선에 맞는 시헌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때 만들어진 시헌력은 고종 33년(1896년)에 태양력을 사용할 때까지 조선의 공식 달력으로 사용되었다.
두 번째로 그에 의해 제기된 과학기술은 수차를 이용한 영농방법이었다. 전답에 대한 종래의 급수방식은 일일이 사람이 퍼 올리는 원시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가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역설한 중국식 수차는 이러한 노력을 대폭 줄여줄 수 있었다. 이뿐만아니라 그는 물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선각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하천을 정비하자는 '성중구거수치계'를 제안하기도 했다. 세 번째로는 교통 및 운송 방법에 있어서 수레를 이용하자는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종래의 운송 수단은 말을 이용하는 방법이 최상이었는데 중국과 사신이 오갈 때 연변의 백성들은 이 뒷수발을 하느라 인마가 배겨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는 중국에 사신으로 오가면서 수레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고 조선의교통과 운송에도 수레를 적극 사용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고 그 편리함을 도모하자고 역설했다. 조선은 중국과 달리 산지가 많아 수레 사용이 용이하지 않다는 반대여론에 대하여 그는 중국이라고 험한 고개가 없는 것이 아니라며 당차게 밀어붙였다. 수레를 이용하면 많은 사람들이 말이나 나귀 한 마리만 가지고도 이동할 수 있으며, 수레에 장막을 설치하여 사용하면 밤에 잘 때 별도의 장막을 치는 번거로움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네 번째로는 화폐 통용을 위한 주조 사업에서 파생된 작업으로 활자를 제조하여 많은 서적을 인쇄해 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양대 전란 후에는 제대로 된 서적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책을 찍어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활자 제조와 서적의 인쇄에 대한 책임을 맡았던 교서관도 완전히 그 기능을 상실한 입장이었고, 그나마 필요한 서적은 목활자를 만들어서 근근이 찍어내고 있었다. 당시 상평청과 선혜청에서 경제 관련 일을 보고 있던 김육은 예산의 지원을 통해 교서관에서 다시 책을 만들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효종 7년(1656년0에는 궁중 약국인 내국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만병회춘' 10권을 찍어냈고, 이듬해에는 '정유식년 사마방목'을 인쇄했으며 효종 9년(1658년)의 죽기 전에는 '삼대가 시전집' 10권을 찍어내기도 하여 학문의 진전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그는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금속 합금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은 아들 좌명과 손자 석주에 이르기까지 활자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현종 9년(1668년)에는 아들 좌명이 구리를 재료로 한 '삼주갑인자'를 만들어 '기효신서'를 찍어냈고, 숙종대에는 손주 석주가 '한구자'를 만들어 많은 서적을 인쇄하였다. 다섯 번째로 안전한 조운 사업을 위하여 체재방식의 도입을 추진했다. 이 방법은 태안반도의 인근 도서에 창고를 지어놓고 세선들은 이곳에 화물을 내려놓은 후에 육지까지는 작은 배로 운반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남부지방에서 중앙으로 반입되는 세미는 주로 서해안을 따라 배로 운송되었는데, 서해안은 세계적으로 조차가 심하고 암초가 많기 때문에 미국선이 차손되기 일쑤여서 이러한 방법을 제안한 것이다.
이렇듯 김육에 의해서 제안되고 만들어진 모든 제도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위한 일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백성들이 현실의 잘못된 제도와 정치 때문에 그 피폐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향리에 있을 때에는 스스로 농사일을 하면서 생산에 종사했으며 관직에 나가서는 백성들의 궁핍을 구제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스스로 의 생활에 대하여는 엄격하고 철저하였으며 항상 검소하고 청빈하였다. 평생을 유기로 만든 제기는 사용하지 않고 항상 목기 그릇을 사용했으며, 우의정이 된 71살까지 한성에 집 한 칸 없이 셋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바쁜 공무 중에도 학문에 정진하였음은 물론 '잠곡집','해동명신록','유원총보','기묘록','구황촬요'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항상 단정한 몸가짐을 잃지 않고 살아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강인한 일면도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
|
글나눔 → 추천글
|
|
|
|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41. 실패
<그대 혼자 자기 고집대로 하면 전체와 분리되어 실패하리니, 성공은 신 속에 더불어 있는 것>
내 속안의 너에게 말한다.
왜 그다지도 수선스러운지?
우린 알지, 새들과 짐승들과 개미들을
사랑하는 한 영혼이 있음을
어머니 자궁 속에서
너에게 빛을 주셨을
하나의 영혼을.
이제 천하의 고아가 되어
떠도는 게 당연한 일 아닐까?
아닐까? 사실
넌 자기 자신을 외면하고
혼자 암흑 속으로 들어갔으니.
거기서 얽히고설켜
알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으니.
네가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수상쩍은 까닭이 바로 그것 아닌가.
그대는 아는가? 그대가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도 그 핵심을 못보는가? 그대는 아마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한 적이 전혀 없다고. 그러나 설혹 그대가 달리 한다 하더라도 또 실패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아마 생각할 것이다. 아직 완숙하지 못해서라고. 그러나 가령 그대가 숙달된다 하더라도 또 실패할 것이다. "세상이 날 거부하는가" 혹은 "아~ 난 사람들의 질투에 희생되누나" 하고. 그대는 자시의 실패 원인을 계속 찾고 있으나 실패의 진짜 배경을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인도의 신비가 까비르는, 실패란 그대가 신을 잃었음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게 바로 실패의 근본 원인이다. 신 속에 더불어 있음, 거기에 성공이 있다. 신 속에 더불어 있음. 그대가 비롯하여 되돌아가는 우주 혼, 도를 앎.
|
|
독서실 → 동서고전
|
|
|
|
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2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자신을 낮출수록 명예는 높아진다 - 신릉군
잠시 수레에서 내린 후영은 백정노릇을 하는 친구 주해를 만나 오랫동안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었다. 그러나 수레에 앉아 말고삐를 잡은 채 기다리고 있는 신릉군의 얼굴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위나라 공자 무기는 소왕의 막내아들이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했을 때, 그는 신릉군에 봉해졌다. 신릉군은 부귀한 몸이지만 가난한 선비들에게까지 겸손하였다. 그는 유능한 인물이면서 자신보다 못난 사람들에게도 머리를 숙여 더욱 존경을 받았다. 나이 칠순이 된 후영이란 선비가 있었는데, 그는 그때까지도 이문의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었다. 신릉군은 그가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후한 예물을 보내 빈객으로 초청하였다. 후영은 예물을 받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몸을 수양하고 행동을 조심하며 수십 년을 살아왔습니다. 제가 지금 곤궁하다 하여 공자의 재물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신릉군은 빈객들을 모아 술잔치를 베풀게 하고, 자신이 직접 가서 후영을 수레의 상석인 왼쪽에 앉게 하였다. 이때 예물조차 받지 않은 후영은 사양 한번 하지 않고 성큼 수레의 상석에 올라앉았다. 신릉군은 손수 말고삐를 잡고 말을 몰면서 더욱 정중하게 후영을 대하였다. 후영이 신릉군에게 말하였다.
"제가 잘 아는 사람 중에 저자거리에서 푸줏간을 하는 주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잠시 그 친구를 만나고 가시지요."
신릉군은 수레를 몰고 저자거리로 들어섰다. 잠시 수레에서 내린 후영은 백정노릇을 하는 친구 주해를 만나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었다. 그는 사방을 곁눈질하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면서, 신릉군의 얼굴빛을 살폈다. 그러나 수레에 앉아 말고삐를 잡은 채 기다리고 있는 신릉군의 얼굴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 얼굴빛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온화해졌다.
한편 신릉군을 따르던 하인들은 자신의 주군을 오래도록 기다리게 하는 후영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집에서는 지금 한창 주연을 벌이기 위해 위나라 장상들과 종실, 빈객들이 모여 신릉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영은 계속해서 주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저자거리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신릉군의 행차를 구경하였다. 신릉군은 집에 도착하여 연회석상으로 나갈 때도 후영을 상석에 모셨다. 주연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후영이 신릉군에게 술잔을 올린 후 말하였다.
"오늘 제가 공자님께 큰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용서라니요? 무슨 무례를 범했다고 그러십니까?"
신릉군은 웃는 낯으로 물었다.
"자자거리에서 무례를 무릅쓰고 제 친구 주해와 너무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무례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옆에서 들어보니 두 분이 하는 이야기가 별로 중요한 것 같지는 않던데요?"
후영이 말하였다.
"맞습니다. 저는 그때 공자님께서 어떤 인품이신지 한번 시험해본 것뿐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할 이야기도 없는데 친구와 긴 시간을 끌면서 잡담을 나누어본 것입니다. 과연 공자님께서는 대단한 인품의 소유자십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화를내고 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혼자 가버렸을 것입니다."
"허허허, 현명한 선비를 모시려면 그 정도 시간이야 기다릴 수 있어야지요."
"아닙니다. 그곳에서는 저자거리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제가 하찮은 문지기이고, 제 친구가 푸줏간을 하는 백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레에 앉아 저를 기다리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랬을 테지요."
"사실을 말씀드리면, 제가 저자거리에서 취한 행동은 공자님의 명예를 높여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후영의 말을 듣고 신릉군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명예를 높이다니요?"
"이제 저자거리의 사람들은 저를 보고 소인배라고 수근댈것이고, 공자님을 성인이라 하여 더욱 존경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낮의 일로 공자님의 명예는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신릉군은 감탄하였다.
"과연 그렇군요.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저의 명성을 높여주신 선비님의 깊은 심중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후부터 신릉군은 후영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겸손 : 가을 들판의 꼴불견은 고개 숙인 벼이삭들 가운데 뻣뻣하게 고개를 세운 피이삭이다. 잘 익은 벼일수록 고개는 아래로 숙여지는 법이다. 자연 현상은 그런데 인간 사회는 그와 반대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지위 높은 사람이 조금만 겸손해도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 된다. 고개 숙일줄 모르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피이삭이면서 벼이삭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인의 때문에 왕명을 어기다
신릉군은 안희왕의 침실에서 병부를 훔쳐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 병부는 군사를 출동시킬 때 왕이 장군에게 주는 군사 통솔권의 표시로, 왕과 장군이 각각 반씩 쪼개어 지니게 되어 있었다.
안희왕 20년에 진나라 소왕이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격파하고, 곧바로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였다. 조나라에서는 곧 위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조나라 혜문왕의 동생 평원군은 위나라 신릉군의 누이를 아내로 두고 있었다. 따라서 조나라와 위나라는 사돈 관계인 셈이었다. 위나라 안희왕은 곧 장군 진비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구원케 하였다. 한편 이런 사실을 안 진나라 소왕은 즉시 위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이제 조나라의 항복은 시간 문제요. 만일 위나라가 조나라에 가담한다면, 우리 진나라 군대는 조나라를 공략한 즉시 위나라에 보복을 할 것이오."
안희왕은 겁을 먹었다. 그래서 즉시 장군 진비에게 전령을 보내어 위나라 군대를 국경인 업성에 머물게 하고 조나라 한단이 어떻게 될지 관망만 하라고 명하였다. 조나라의 평원군은 다급하였다. 그래서 계속 처남인 신릉군에게 사자를 보내어 위나라 구원군으로 하여금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한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해달라고 독촉하였다. 신릉군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안희왕에게 가서 국경에 머물러 있는 위나라 구원군의 출병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 혼자라도 가야겠다."
신릉군은 식객들에게 호소하여 전차 백여 대를 준비해 진나라 군대를 토벌하러 가기로 결심하였다. 이때 이문의 문지기를 하는 후영이 신릉군을 찾아와 말하였다.
"분투를 빕니다. 이 늙은이는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신릉군은 몇 리쯤 가면서 생각하였다. 후영을 현인이라 생각하여 평소 존경하였는데, 겨우 한다는 소리가 도움은 주지 못할 망정 '분투를 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가서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되돌아온 신릉군은 후영을 찾아갔다.
"다시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아무리 다급하기로 독단으로 식객들을 끌고 가서 진나라 대군과 싸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비유하건대 그것은 고깃덩어리를 굶주린 범에게 던져주는 것과 같아서 아무런 공도 세울 수 없습니다. 계책이 필요합니다."
"그 계책이 뭐요?"
신릉군은 두 번 절한 뒤 후영에게 물었다.
"제가 들으니 지금 10만 대군을 이끌고 국경에 가 있는 진비 장군의 병부가 대왕의 침실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여희가 대왕의 총애를 받아 침실을 출입한다 들었습니다. 여희의 힘이라면 그 병부를 훔쳐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님께서는 여희의 아버지 원수를 갚아준 분이니, 직접 부탁을 하면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병부를 가지고 진비 장군에게 가서 보여주면 공자님께서 군대의 지휘권을 인계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다급한 신릉군은 일단 후영의 말대로 여희에게 부탁하여 안희왕의 침실에서 병부를 훔쳐내는 데 성공하였다. 신릉군이 훔친 병부를 가지고 국경으로 출발하려 하자, 후영이 다시 찾아와 말하였다.
"전비 장군은 공자님께서 가지고 간 병부가 자신의 것과 꼭 맞다 하더라도 의심을 할 지 모릅니다. 그러니 저의 친구 주해를 데리고 가십시오. 그는 개나 돼지를 때려잡는 백정으로 그의 힘을 따를 자가 없습니다. 진비가 만약 공자님께 군사 통솔권을 이양하지 않을 경우 주해를 시켜 쳐죽이도록 하십시오."
"진비는 용맹스런 장군인데 꼭 그를 죽여야만 한단 말이오?"
신릉군은 진비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대를 위해 소가 희생될 수밖에 없질 않습니까?"
신릉군은 후영의 말대로 주해를 찾아갔다. 그 전에도 신릉군은 후영의 소개로 주해를 몇 번 찾아가 집으로 초청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해가 아주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저같이 신분이 낮은 백정을 몇 번씩 찾아와 주셨는데, 이번에는 그 보답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전에 집으로 초청을 해주셨을 때 거절했던 것은, 저 나름대로 그런 하찮은 예의는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공자님께서 위난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이제 몸을 바쳐 그 은혜에 보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주해는 당장에 만사를 걷어치우고 신릉군을 따라나섰다.
신릉군은 곧 훔친 병부를 가지고 위나라 국경인 업성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진비에게 왕명이라 속인후 병부를 내밀어 군사 지휘권을 인도하라고 요구하였다.
"지금 공자께서는 호위군도 거느리지 않고 와서 군사 지휘권을 달라고 하십니다. 병부는 틀림이 없으나 정말 왕명인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때 신릉군 옆에 있던 주해는 40근짜리 철봉으로 진비를 내리쳐 죽였다. 이렇게 하여 진비의 군사를 장악한 신릉군은 전군에 포고령을 내렸다.
"군사들 중에서 부자가 함께 종군하고 있는 자는 아버지의 귀국을 허락하고, 형제가 종군하고 있으면 형의 귀국을 허락한다. 그리고 외아들인데 종군하고 있는 자는 돌아가서 부모님을 공양토록 하라!"
군사들은 신릉군의 이같은 배려에 모두들 머리 숙여 고마움의 표시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귀국을 하게 된 군사를 빼고 나자 8만의 병력이 남았다.
신릉군은 8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향해 진군하였다. 한단을 공격하던 진나라 군대는 위나라 군대가 들이닥치자 포위망을 풀고 철수하였다. 조나라 왕과 평원군은 신릉군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로부터 현자라 불리어 온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신릉군을 능가할 사람은 없습니다."
한편 위나라 안희왕은 신릉군이 병부를 훔치고, 왕명을 가장하고, 장군 진비를 죽인 사실을 보고받고 크게 분노하였다. 신릉군도 각오하고 있던 바였으므로, 일단 위나라 군대를 아래 장수에게 맡겨 귀국시킨 후 그는 식객들과 함께 조나라에 남았다.
인의 : 큰 인물은 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줄 안다. 그러나 버리는 것은 곧 또다른 것을 얻는 것이다. 재물을 버리면 명예를 얻고, 몸을 바치면 고귀한 이름이 남는다.
|
|
|
|
사진 / 그림
|
|
|
|
[노르웨이 설리에 자치 구역의 스타드 반도 Indre Fure에서 보는 바다.]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9.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