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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1006호
2020.7.1. (음 5.11)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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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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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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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없이 큰 발명을 한 사람은 없다. ― 새뮤얼 스마일즈(스코틀랜드 전기작가, 1812~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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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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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1
'남녘의 오징어가 북녘에 가면 낙지가 된다. 남녘의 낙지를 북에서는 서해낙지라 한다. 북한의 오징어는 남한의 갑오징어이다.’ 남북한 언어 이질화를 다룬 자료는 물론 언론을 통해서도 제법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에서 1965년에 발행한 5전짜리, 2000년에 나온 1원50전짜리 ‘낙지 우표’는 ‘남북한이 달리 부르는 오징어’를 확인해 주는 증거이다. “개성에 가서 ‘마른 낙지’를 사왔다. 분명 ‘마른 오징어’였다”, “금강산에 가보니 오징어를 낙지라 하더라”는 북한어 연구자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광복 직후 문세영이 엮은 <수정증보 조선어사전>(1946년)의 오징어는 ‘몸은 작은 주머니 같고 열 개의 발이 있으며 등 속의 작은 뼈 같은 흰 물건이 있는 해산동물’이다. 북한 사회과학출판사가 펴낸 <조선말대사전>(2006년)의 설명 ‘(낙지) 몸은 원통 모양이고 머리부 량쪽에 발달한 눈이 있다. 다리는 여덟 개인데…’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오징어(북한의 낙지) 다리가 8개 ‘2개의 촉완(觸腕)과 8개의 다리가 있고…’(두산백과)를 참고하니 의문이 풀렸다. 먹이를 잡거나 교미할 때 쓰는 양쪽으로 길게 달린 두 개를 발로 셈하지 않은 것이다.
옛 문헌의 오징어(오적어, 烏賊魚)는 지금의 갑오징어를 가리킨다. ‘(오징어) 뼈는 두께가 3~4푼 되고 작은 배와 비슷하며 가볍고 약하다’(동의보감, 1610년), ‘등에는 기다란 타원형의 뼈가 있다’(자산어보(현산어보), 1814년), ‘오징어 뼈를 우물 가운데 담그면 잡벌레가 다 죽는다’(규합총서, 1809년)에 등장하는 오징어는 하나같이 지금의 갑오징어(참오징어)를 일컫는다. ‘군산 죽도 어장에서 많이 잡히는 것은… 민어, 오적어 등이니…’(황성신문, 1903년)에서처럼 구한말 신문에 나오는 ‘오적어’도 갑오징어이다. 죽도에서는 지금도 갑오징어가 잘 잡힌다. 오징어는 원래 갑오징어였고, 북한에서는 지금도 갑오징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징어라 부르는 것은 옛날엔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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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2
갑오징어, 건오징어, 마른오징어, 물오징어, 뼈오징어, 일본오징어, 오징어, 참오징어, 한치오징어, 화살오징어. <표준국어대사전>에 오른 ‘오징어족’이다. 갑오징어(뼈-, 참-), 마른오징어(건-), 생것을 가리키는 물오징어와 이를 두루 이르는 오징어를 빼면 달랑 다섯 종류뿐이다. 입술무늬갑오징어, 흰오징어, 창오징어, 화살오징어, 참갑오징어, 살오징어, 빨강오징어, 날개오징어, 지느러미오징어, 쇠오징어, 좀귀오징어…. 사전 밖, 바닷가의 오징어 명칭은 참으로 많다. 이 가운데 갑오징어 종류가 아닌 것들은 옛날에 ‘-꼴뚜기’라 불렸던 것들이다.
옛 문헌에 나오는 오징어(烏賊魚, 오적어)는 지금의 갑오징어를 가리킨다. ‘요즘 오징어’는 뭐라 했을까. “모양은 오적어(지금의 갑오징어)와 닮았지만 몸은 더 길고 날씬하다. 등에 타원형이 아닌 종잇장처럼 얇은 뼈만 있으며, 이것을 등뼈로 삼는다. 선비들이 바다에서 나는 귀중한 고기라 하여 ‘고록어’(高祿魚)라고 불렸다.” <자산어보>(현산어보)에 나오는 설명은 오징어를 묘사한다. 고록어는 꼴뚜기의 옛말이다. 꼴뚜기가 곧 오징어인 것이다. 현대 생물학 사전 여럿은 오징어를 여전히 ‘피둥어꼴뚜기’로 설명한다. ‘흰꼴뚜기’, ‘창꼴뚜기’, ‘화살꼴뚜기’, ‘반원니꼴뚜기’ 따위는 국립수산과학원에서 분류한 오징어 종류의 명칭이지만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남한의 갑오징어가 북한에 가면 오징어가 되고, 남한의 오징어를 북한에선 낙지라 한다. 남도의 낙지를 북에서는 서해낙지라 한다. 오징어가 옛날엔 꼴뚜기 종류를 이르는 말이었고 오적어는 갑오징어를 가리켰다. ‘참갑오징어가 오징어라는 이름을 피둥어꼴뚜기에게 넘긴 때는 대략 1930년 무렵이었다. 수산업에서 일본식으로 용어가 통일되어가는 과정 중에 일어난 일’이라는 설이 있지만 바뀐 시기와 이유는 오리무중이다. 1923년에 ‘울릉도 오징어’, 1927년에 ‘전북 고창의 오징어(갑오징어)’가 신문에 등장하는 등 갈피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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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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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육면체 - 이정주
집이란 공중에 그은 실선이다
직육면체 모서리 실선 안팎으로 들락거리면서
나는 안심한다
날이 선 칼로 고기를 자르고
찌개를 끓인 뒤
공중에 떠 있는 직사각형 실선―탁자 위에서
밥을 먹는다
직육면체 속이 김으로 꽉 찬다
나는 안심한다
옷을 벗어던지고 거웃을 드러낸 채 잠을 잔다
허공에 직육면체의 붉은 선이 깜빡이고 있다
집이란 공중에 그은 실선이다
실선 안팎으로 들락거리면서 나는 분개한다
날이 선 칼로 공간을 여러 개로 나눈 뒤
집값 올린 놈들을 불러낸다
놈들이 자다가 불려 나온다
놈들을 작은 공간들에 밀어 넣는다
멋진 관들이 실선 안에 빼곡하다
나는 깜빡이는 선을 자른다
집이 흩어진다
공중에 축포가 터진다
재개발이다
끌려 나왔던 놈들은 더 큰 집으로 옮겨 갔다
나는 쥐었던 칼을 놓는다
칼은 낙엽처럼 떨어져 내려갔다
집이란 변명이다
변명이 끝나면 직육면체는 더 이상 깜빡거리지 않는다
밤새 철거 장비들이 소리 없이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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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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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2부
내가 맞은 8.15 (2/3)
아버지는 한의사였기 때문에 살아 계실 동안 사랑에는 늘 마을 손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쓰지 않고 있는 사랑을 개방을 하건만 누구 하나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내가 그들한테로 가야 할 줄을 나는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간다야 그 시시한 잡답이 마음에 맞지 않기 때문에 힘써 가려 하다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마 지금 같으면 얼마쯤 될 듯도 합니다. 그러나 그 때는 아직 내 지식의 풋날이 지지 못한 때였습니다. 내가 잘못인 줄 알면서 그 때는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힘써 일을 하노라 하건만 아무도 나를 자기 동무로 여겨 도와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가엾게 여기기나 했을 것입니다. 혹 비웃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죄는 내게 있지 그들에 돌릴 수 없었습니다.
내 고향에서 이방인이 되고
나는 마음이 한없이 외로웠습니다. 사랑을 하고 싶은데 사랑이 받아지지 않는 사람의 외로움입니다. 내 친구라는 사람이 몇 있지만 그들은 다 서울이나 그 밖의 먼 곳에 있지 여기 집 옆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내 고향에서 이방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면 교회라도 가보려고 했는데, 힘써 해보려 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못이라 해야 할까? 저들이 잘못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고난의 백성의 운명이라 할까? 손에 고랑을 차고 용암포 거리를 끌려가도 누구 하나 아는 척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경의선 하룻길을 내내 차를 타고 가도 누구 하나 말도 걸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무척 슬펐습니다. 이제 돌아와서는 수염을 기르고 미투리를 신고 아주 판 농사꾼이 되어 보려고 시가라고는 한 달에 한번 머리 깎으러 나가는 것밖에 없어도 누구 하나 마주 서서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무슨 원수야 아니겠지만 그저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지” 하고 아주 무리 밖에 두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또 이것은 무슨 익살입니까? 하루는 그 행색으로 용암포를 나가는데 오래 밖을 나서자마자 자전거를 탄 사람이 하나 마주 왔습니다. 피긋 지나가려 하더니 다시 자전거를 멈추고 이쪽으로 왔습니다. 그러면서 일본말로 아무개 아닙니까 하고 묻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렇소” 대답을 하면서 보니 담임형사였습니다. 아마 우리 집으로 가던 길이었을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말을 듣더니 “빌어먹게 시골 할아버지 같은데” 하고 빈정댔습니다. 내가 “그럼 시골 할아버지가 시골 할애비 같지 않고 어떻게 해? 했더니 그자는 ”웃기지 말아요“ 했습니다. 어떤 데서는 시골 할아버지가 돼서 걱정, 어떤 데서는 아니 돼서 걱정, 그럼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는 때에 갑자기 김교신이 흥남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만나지는 못해도 그래도 깊은 밤 혼자 일어나 앉아 어둠 속에서 남 못 듣는 대화를 해도 그와 했는데 이제 그마저 갔다니 그럼 누구와 말을 하지? 혼잣말도 못한다면 어떻게 살아가지? 그러고 나서 겨우 112일이 지나서 해방이 됐습니다. 해방이 됐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난 두 이름 중 하나는 그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해방이 될 때에 매 마음은 무척 외롭고 슬펐습니다. 어느 때 가서는 틀림없이 망할 줄 알던 일본 제국이지만 그렇게 갑자기 그 날이 올 줄은 참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방의 소식
내게는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비밀 뉴스의 줄도 없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시골 농사꾼이었습니다. 용암포에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내게 알려주는 순간 나는 정말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농부로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또 농부답게 놀라지도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래, 기쁜 소식이구나” 했을 뿐입니다. 그 날로부터 꼭 100일이 되던 11월 23일 신의주학생사건이 터지던 날, 그것과는 정반대로 공산당으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던 순간도 꼭 같이 그러했지만, 내 마음은 그저 담담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나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저 그것이 나였습니다.
용암포 사람들이 나를 나오려고 했을 때 나는 잠깐 놀랐습니다. 평상시 나를 아는 척도 아니하던 사람들이 왜 나를 부를까? 그럼 아는 척은 아니해도 나를 알고 있었던가? 알면서도 아는 척 아니하던 사람들이 이제 아노란 것은 무슨 뜻에서일까? 처음에 축하식에 나오라는 것을 “나도 기쁘지, 아니 기쁘겠냐? 그렇지만 나는 내 식대로 축하한다고 그래라” 하고 나가지 않았는데 다시 돌아와서 기어이 나와야 한다고 할 때는 나도 더 사양할 수가 없어졌습니다. 나는 잠깐 생각했습니다. 시개가 바뀌는 대목인데 이 때에 몸가짐을 어떻게 할까? 내 옆에는 어머니를 내놓고는 의논할 집안 어른도 없고 친구도 선생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 생각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한번 결정하는 것이 크게 훗일에 관계되는 중대한 순간입니다. 마음속에 “이들이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할까? 하고 내가 존경하는 몇 이름을 불러일으켜 생각해보았으나 역시 이럴 것도 같고 저럴 것도 같고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내 양심으로 하리라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나를 조금 압니다. 정치는 내게 적당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급류에 말려들어가는 일입니다. 어찌할까? 그것이 내 문제점이었습니다.
생각 끝에 나는 심부름을 온 내 생질, 6.25 때에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한 최창복을 보고 말했습니다. “나를 나오라는 것은 나를 이용하자는 뜻이다. 그 뜻을 내가 안다. 남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알고 당하면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또 이런 때는 이용을 당해도 좋다. 당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준 다음 나는 물러서면 그만이다” 하고 거름통을 놓고 따라 나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도 몰랐습니다. 또 나는 모르고도 알았습니다. 사실 그밖에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지금도 그때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더러 지금도 이용당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용이람 이용입니다. 그러나 이용당해도 좋습니다. 전체에는 이용당해도 좋습니다. 전체는 모든 사람을 이용합니다. 쓸 때는 쓰고, 다 쓰면 사정없이 버릴 것입니다. 이용당해도 그런 줄을 알고 당하면 좋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입니다. 내가 전체를 마주 이용하잔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 만일 조금이라도 이용되는 대신 나도 또 전체를 이용하잔 생각이 있으면 도둑입니다. 나는 그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예나 이제나 변함없이 하고 있노라는 증언만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찌 감히 온전히 깨끗하다 할 수야 있습니까? 그러나 적어도 의식적으로 그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내게는 약한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나는 약해서 감히 큰일에 엄두를 못 냅니다. 이 나의 약점이 항상 나를 건져줍니다.
단번에 받은 새 시대의 세례
나는 몰랐습니다. 내 안다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었음을 용암포 제일교회 뜰에 들어서는 순간 곧 느꼈습니다. 역사의 거센 물결은 나를 삼키기 시작했습니다. 나가니 벌써 모든 것이 짜여 있었습니다. 축하식을 인도하라는 대로 단에 올라선즉 나도 생각 못했던 말이 나왔습니다. 어둡도록 행진을 했습니다. 곳곳에서 30년 40년 동안 궤짝 농짝 밑에서 잠을 자던 태극기가 나왔습니다. 열아홉 살에 3.1 운동 만세를 부르던 날 이후 27년 만에 처음 시원한 날을 보았습니다. 가슴 밑바닥에 쌓였던 묵은 시름의 가스가 다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보니 사람은 그 사람들 그대로인데, 내가 고랑을 차고 거리를 지나가도 모르는 척 지나가던 그 사람들 그대로, 내가 애써 친구가 되려 해도 곁을 주지 않던 그 사람들 그대로인데, 이제 나는 나와 그들 사이에 아무 어색함도 막힘도 없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다 훨훨 벗고 한 바다에 들어 뛰노는 것이었습니다. 그만 아니라 저기 언덕에 있는 일본 사람, 어제까지 밉고 무섭던 그들이 도리어 어떻게 잘못되어 다치기나 할까 걱정스러웠습니다. 단번에 우리는 새 시대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 다 안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속았습니다. 또 몰랐습니다. 역사가 나를 속일 리도 없고 민중이 나를 속일 리도 없지만 나는 속았습니다. 해방축하회를 마치고 내 밭으로 돌아간다고 했더니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약했던가, 그들이 강했던가. 나는 생각도 못했던 용암포읍 임시자치위원회의 회장 자리에 앉히움을 입었습니다. 나는 임금 자리를 피하다 못해 굴 속에는 타 죽은 초나라 왕자만 못했습니다. 앉히는 것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며칠 지나서 용천군 자치위원장 자리에 앉혔습니다. 또 얼마 있어 월말이 될 때 신의주로 끌려 올라가 평안북도 임시자치위원회의 문교부장 의자에 앉게 됐습니다. 내가 약하다면 약했고 밝지 못하다면 밝지 못했습니다. 권력의 야심은 없었습니다. 나 스스로는 없다 해도 남 보기에는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감히 눈같이 희었노라 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있습니다. 새 역사의 어떤 매력이 나를 매혹시켰다면 시켰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는 별별 잡것이 다 떠서 돌고 있습니다. 저것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자면서도 꾸고 깨면서도 꾸던 새 역사의 꿈에 찬 바람이 차차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때에 안의 인텔리 젊은이들로 조직된 우리청년회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내게 가까이 왔고 나도 있는 힘을 다해서 그들을 이끌어보려 했습니다. 그러는 때에 갑자기 소련군이 진주해 왔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집혔습니다. 그 때는 위원의 대부분이 공산당이 돼 버렸습니다. 그 중에는 이유필씨의 품속 칼이라던 그의 비서도 들어 있었습니다. 해방의 감격은 어디로 사라지고 시가에는 공포기분이 꽉 차게 됐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다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제 물러갈 때가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위원장께 그 말을 했더니 이 노인이 나를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만둔다 해도 같이 그만둡시다” 했습니다. 노인이 보기에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이틀 하는 동안 학생사건이 터졌습니다. 학생사건에 대하여는 이미 자세히 쓴 것이 있으니 다시 되풀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여간 그 때문에 나는 소련군 감옥에 갇히어 50일 있다가 갑자기 나가라 해서 나와보니 집은 허허 바다 속에 깨어진 널조각같이 외롭고 쓸쓸해졌습니다. 밖에 인기척만 있어도 깜짝깜짝 놀라야 했습니다. 이웃이 내 감시자가 됐습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그저 울움이 복받쳤습니다.
한 해를 지낸 후 또다시 붙들려가서 한 달을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본 내주위의 친구 들은 나를 그 이상 더 머물지 못하게 남으로 가라 권했습니다. 더구나 박승방 같은 분은 전혀 나 하나를 월남 시키기 위해 박천서 용천까지 왔습니다. 1947년 2월 26일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 문간에 기대서 하시는 어머님의 마지막 음성을 마지막이 될 줄은 알지도 못하고 들으며 그와 같이 떠나 월남 길에 올랐습니다. 평양에 잠깐 머물러 기회를 엿보다가 다시 떠나 해주를 거쳐 서울에 온 것이 3월 17일 이었습니다. 박승방 씨는 나를 데려다 주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 이후는 소식을 알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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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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蕭規曹隨(소규조수)
蕭(맑은 대쑥 소) 規(법 규) 曹(나라 조) 隨(따를 수)
한나라 양웅(楊雄)의 해조(解嘲)에 실린 이야기. 진(秦)나라 말, 소하(蕭何)는 한고조 유방을 도와 반진(反秦)의 의거를 일으켰다. 그는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고 한 왕조를 세우는데 공이 컸기 때문에, 흔히들 한신(韓信), 장량(張良) 등과 더불어 한흥삼걸(漢興三杰) 이라 부른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진나라의 함양을 공격할 때, 병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납치하는데 정신이 없었지만, 소하는 상부(相府)로 달려가서 지도와 법령 등 중요한 문건들을 수습했다.
훗날, 소하는 재상(宰相)이 되자, 이미 확보한 진나라의 문헌과 자료들을 토대로 전국의 지리나 풍토, 민심 등을 파악하여, 한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제정하였다. 당시 유방의 수하에는 조참(曹參)이라는 모사(謀士)가 있었다. 그는 유방의 동향 사람으로서 소하와도 관계가 매우 좋았으므로, 사람들은 두 사람을 소조(蕭曹) 라고 불렀다. 소하의 추천으로 승상된 조참은 모든 정책과 법령을 고치지 않고, 소하가 결정해 놓은 것을 따라(蕭規曹隨) 계속 집행하였다.
蕭規曹隨 란 전인(前人)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답습함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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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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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사과 한 알 - 이광해
휴가 기간이 끝났다. 버스 타는 데까지 바래다 주시던 아버지는 차비를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서운한 듯 말씀하셨다. 나는 군생활을 하면서 적은 월급에서 저금을 하였다. 전우들로부터 지독하다느니, 장가 밑천을 하려고 그런다느니, 그까짓 적은 돈을 저금해 뭘 하느냐는 등 핀잔을 받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자는 것이 나의 생활 신조다.
1년에 한 번 기대하던 휴가를 나오는 날, 우체국에서 저금한 돈을 찾아 동생들의 학용품과 늙으신 부모님 곁에 고기라도 사 갖고 가는 마음이란 얼마나 흐뭇한 일인지. 농촌에서 태어난 나는 늙으신 부모님이 고생으로 찌든 손으로 일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잘살아 보겠다고 혼자서 다짐을 하기도 한다. 어떤 친구들은 귀대하면 많은 돈을 집에서 가져왔다면서 자랑스러운 듯이 카페나 당구장 출입을 하지만, 내 딴엔 내가 아낀 돈으로 집에 다녀온 것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보내는 자식의 손에 돈 한 푼 쥐어 주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의 마음보다 더 아프신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문득 호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빨갛게 익은 사과를 한 알을 꺼내셨다. 그것을 내 가방에 넣어 주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면서 나는 고마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한 알의 사과라지만 내겐 너무도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사과 한 알, 버스 속에서 사과를 만져 볼 때마다 차창 밖의 높은 가을 하늘이 더 푸르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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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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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제1권
우정으로 일어서는 위인
귀족의 아들이 시골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마을 호수에서 밤낚시를 하다가 수영 실력을 믿고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발에 쥐가 나는 바람에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마침 그 마을에 사는 농부의 아들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 위험을 무릅쓰고 귀족 아들을 구해 주었습니다.
"몇 살이니?"
시골 소년은 귀족 아들보다 7살이 아래였습니다. 그러나 귀족 아들은 소년의 손을 꼭 쥐면서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두 소년은 깊이 사귀며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12살이 된 시골 소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귀족 아들이 그의 장래 희망에 대해 물었습니다.
"의학 공부를 하고 싶은데, 난 가난한 농부의 9 남매 중 여덟 번째야. 집안일을 도와야 돼. 둘째 형이 런던에서 안과 의사로 일하고 있지만 아직은 날 데려다 공부시킬 수가 없대."
귀족 아들은 아버지를 졸라 소년이 런던 세인트 메리어즈 의과대학을 졸업하게 했습니다. 소년은 오랜 연구 끝에 푸른 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이라는 기적의 약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시골 소년이 바로 1945 년 노벨 의학상을 받은 인류의 은인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한편 귀족 아들은 훌륭하게 자라 26세 때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정치가로서 자질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육, 해, 공군의 장관을 두루 거쳤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수상으로 뽑혀 영국에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 영웅이 폐렴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게 됐습니다. 그때 옛 시골 소년이 발견한 페니실린이 급송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다름 아닌 '제2차 대전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입니다. 어릴 때 싹튼 우정이 평생 동안 계속되면서 꽃을 피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의지는 자기 이성에 의해 좌우된다.
The will of man is by his reason sway'd.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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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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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2. 거꾸로 경영
백프로 믿고 맡겨라 - 신뢰 경영
질식하는 인재들
미래산업은 이른바 대기업의 '협력업체'이다 국내의 몇몇 대기업들이 우리의 고객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업의 생리에 대해서 얻어듣는 바도 많고 내가 짐작하는 바도 많다. 연구직은 말 그대로 연구하라고 맡겨진 직책이다. 그러니 연구직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기술개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러나 어떤 대기업에서는 기술개발마저도 단기간의 매출성과와 연관을 짓는다. 심지어는 연구 부서에 구체적인 매출목표를 할당하기도 한다. 당연히 그 결과에 대해 책임추궁이 뒤따르고 고과도 움직일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연구 부서에서 새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치자. 기안을 올리면 위에서는 예산절감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규모를 축소하고 액수를 깎아 내린단다.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오래된 습관일 뿐이다. 어찌어찌 해서 통과가 되었다 치자. 이번에는 우로부터 언제 날벼락이 떨어져 백지로 돌아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고광일네가 겪은 것처럼 말이다.
대기업의 연구개발부서만큼 인사이동이 많은 곳도 없다고 한다. 프로젝트가 좀 길어진다 싶으면 그 팀은 이미 풍전등화 신세란다. 하긴 연구소장쯤 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성과 없는 프로젝트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한테 불리할 테니 말이다. 3M이라는 미국 기업은 첨단 기계에서부터 사무용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아이디어 제품을 개발하고 판매한다. 3M의 리처드 카턴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회사는 정말 우연히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왔다. 그러나 무엇인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연히 라도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휴렛팩커드의 빌 휴렛도 거기에 덧붙인다.
"3M은 진정 존경할 만하고 배울 만한 기업이다. 3M조차도 그들이 무엇을 새로 개발하게 도리는지 모른다는 것이 바로 3M의 매력이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발전하리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한다. 병적일 정도의 안전주의에 중독 되어 있다. 괜한 도박을 하느니 가만히 있자는 주의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그렇다. 없는 돈으로 확실한 일에만 쓰기에도 급한데 불확실한 일에 쓸 돈이 어디 있느냐고 들 항변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3M 같은 유능한 기업이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에디슨은 어려서부터 말썽꾸러기였다.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확인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보기에 그는 말썽꾸러기일 수밖에 없었다. '있는 것'을 '그냥 있다'고만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왜'를 물었고 눈으로 확인했다. 에디슨은 줄곧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주변사람들에게 항상 욕을 먹었고, 또한 수없이 파산했다 그 덕분에 에디슨은 오늘날까지 칭송 받는 발명왕이 될 수 있었다. 끈기와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연구작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엉뚱한 착상에서 나온다. 엉뚱한 착상은 모험을 통해 검증된다. 물론 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다. 실패는 사소한 것도 있고 심각한 것도 있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성공도 없다.
요즘의 신세대 엔지니어들이란 다른 무엇보다 연구에 몰두하는 행위 그 자체가 너무 좋아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낮없이 그것에만 열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것에서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업풍토는 그들의 취향을 고려할 만큼 너그럽지 못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 그것에만 열중할 수 있다는 점이 신세대들의 장점이다. 반면에 기성사회의 복잡한 절차와 예절, 책임과 의무감 따위에는 진저리를 친다는 것이 또한 그들의 단점이기도 하다. 반짝이는 재치와 열정만 가지고 세상에 막 뛰어든 그들이 대기업의 꽉 짜여진 관료조직 속에서 받아야 할 압박감이야 오죽하겠는가.
요즘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는 더욱 셀프리더(Self Leader)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예스맨이니 복지부동이니 하는 말들은 이미 흘러간 노래가 되었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주어진 일에만 묵묵히 매달리는 사람들을 '로봇형 인간'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기획하고 스스로 행동하며 스스로 책임지는 신세대형 일꾼들을 일컬어 '셀프리더'라고 한단다. 지금까지 한국을 지탱해왔던 '로봇형 인간'들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앞으로는 발랄한 신세대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말이다. 신세대들에게는 복음처럼 들리겠지만 순종과 인내가 전부인 줄 알았던 구세대들에게는 용도폐기를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컴퓨터니 인터넷이니 하는 낯선 질서에 적응하기 위해 애달캐달하는 중늙은이들이 그래서 생겨난다. 이런 위기감은 이 땅의 모든 기업이 피부로 절감하는 있는 문제다. 그래서 체질개선 얘기가 나온다. 젊은 사람들의 창의성과 모험정신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체질개선을 하자는 것이다. 자율복장이니 자율출퇴근제니 하는 것들 말이다. 한때는 그러한 체질개선운동이 대기업마다 유행처럼 번졌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과 일부러라도 삐딱해지려는 개성 같은 것이 신세대들의 힘이다. 그러한 태도가 일과 합치되는 공간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놀이터이자 일터가 될 수 있다. 그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주지 않고서 기발한 조직개편만 계속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공무원으로 보낸 덕분에 나는 관료제도의 경직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전통'과 '합리'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비능률이다. 그것이 단순한 이벤트나 사내운동 따위로 쉽게 개선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도 잘 알고 있다. 경영주가 직원들을 전적으로 신뢰해주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직원들을 백프로 믿어주고 맡겨주는 기업만이 셀프리더들을 고용할 자격이 있다.
'우리를 가장 가치 있게 관리할 수 있는 회사는 미래산업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는 고광일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우리 미래산업이 '연구원들의 천국'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가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정말 그들을 가치 있게 관리할 자신이 있었다. 놀이터 같은 직장, 그 안에서 마음껏 망가뜨리고 부서뜨리는 에디슨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미래산업의 모습이다. "우리 회사는 정말 우연히 새로운 상품을 개발한다. 그러나 무엇인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연히 라도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요즘의 신세대 엔지니어들이란 다른 무엇보다 연구에 몰두하는 행위 그 자체가 너무 좋아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낮없이 그것에만 열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업풍토는 그들의 취향을 고려할 만큼 너그럽지 못하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주어진 일에만 묵묵히 매달리는 사람들을 '로봇형 인간'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기획하고 스스로 행동하며 스스로 책임지는 신세대형 일꾼들을 일컬어 '셀프리더'라고 한단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과 일부러 라도 삐딱해지려는 개성 같은 것이 신세대들의 힘이다. 그러한 태도가 일고 합치되는 공간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놀이터이자 일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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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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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피천득
그날
읽던 글을 멈추고 자기의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있다. 또 과거를 회상하다가 글에서 읽은 장면을 연상하는 적도 있다. 나는 "아버님의 병환"이라는 노신의 글을 읽다가 오십여 년 전 그날을 회상하였다. 엄마가 위독하시다는 전보를 받고 나는 우리집 서사 아저씨와 같이 평양 가까이 있는 강서라는 곳으로 떠났다. 나는 차창을 내다보며 울었다. 아저씨가 나를 달래느라고 애쓰던 것이 생각난다. 울다가 더 울 수 없으면 엄마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또 울었다. 그러다가 울음이 좀 가라앉았을 때 나는 멀리 어린 송아지가 엄마소 옆에 서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웬지그 송아지가 몹시 부러웠다. 기차는 하루 온종일 달렸다. 산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평양은 참 먼 곳이었다.
오후 늦게야 평양에 도착하였다. 기차에서 내려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서행 역마차를 탔다. 텁석부리 늙은 마부는 약수터에 와 계신 서울댁 부인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안됐다는 듯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늙은 말은 빨리 달리지를 못하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느린 말이었다. 이렇게 느린 말은 오랜 후에, 내가 커서 읽은 "데이비드 커퍼필드" 속에만 나온다. 바키스라는 시골 마차 마부도 어린 데이비드에게 불행한 엄마의 소식을 미리 알려준다. 윤이 나는 긴긴 머리, 그리고 나이보다 젊어보이는 데이비드의 홀어머니, 그도 아름다운 엄마였다. 소설을 읽고 있던 내 눈에서 더운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나는 데이비드와 같이 울고 있는 것이었다.
강서 약수터 엄마가 유하고 있던 그 집 앞에서 마차를 내리자 나는 "엄마" 하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어갔다. 엄마는 눈을 감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내가 왔는데도 모른 체하고 누워 있었다. 나는 울면서 엄마 팔을 막 흔들었다. 나는 엄마를 꼬집었다. 넓적다리를, 팔을, 힘껏 꼬집고 또 꼬집었다. 엄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 얼굴에 엎어져 흐느껴 울었다. 엄마의 뺨은 차갑지 않았다. 나는 이때의 안타까움을 수십 년 후에 내가 본 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에서 다시 느꼈다. 주인공의 이름은 물론 배우의 이름도 잊어서 그저 '아이'라고 부르겠다. 그 아이는 많은 고생을 겪은 뒤에 마침내 엄마를 찾게 된다. 그러나 "엄마!"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을 때 엄마는 자기 아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얀 시트와 같이 엄마는 모든 기억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때 그 아이의 표정! 그 아이의 눈 속에서 나는 어린 나를 다시 발견하고 울었다. 그래도 그 아이의 엄마는 얼마 후 다시 기억을 회복하였다.
우리 엄마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의식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나는 울다가 엎드린 채 잠이 들어버렸다. 그날 밤 시골 사람들이 나를 일으키며 나쁜 아이라고 야단을 하던 것이 기억난다. 엄마는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숨을 거두시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 엄마는 얼굴 화장을 아니 한 것은 물론 색깔 있는 옷이나 비단을 몸에 대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이쁘다고 하면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죽은 아빠에게 미안하고 무슨 죄라도 짓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수절을 의심하며 바라다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엄마는 늘 건강이 좋지 못하였다. 아빠가 밤마다 꿈에 찾아온다는 말을 하였다. 엄마는 나날이 여위어갔다. 엄마는 저고리 옷고름에 달던 은장도를 밤이면 머리맡에다 놓고 잤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녹용을 넣은 보약을 지어다 잡숫기도 하였다. 그것도 효험이 없었다. 양의의 치료를 받기 위하여 남대문 밖에 있던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을 하였지만 거기서도 건강은 회복되지 못하였다. 마침내 엄마는 약수를 먹어본다고 강서로 갔었던 것이다. 아마 자기가 세상 떠날 것을 알고 고향인 평양으로 가시지 않았나 한다. 평양 사람이 타향에서 죽게 되면 머리를 평양쪽으로 두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내가 아까 읽고 있던 노신의 글 "아버지의 병환"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연부인은 경문 사른 재를 종이에 싸서 아버지 손에 쥐어드리며 나보고 "아버지"하고 불러드리라고 재촉하였다. "아버지는 이제 숨을 거두실거다, 어서!" 했다. 나는 "아버지! 아버지!" 소릴 내서 불렀다.
"더 크게, 어서."
"아버지! 아버지!"
평온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긴장되고 눈이 약간 움직이며 괴로워했다.
"아 어서 또, 빨리!"
나는 "아버지!" 또 계속해 불렀다. 최후의 숨을 거두실 때까지. 지금도 오히려 그때의 내 목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문득 그것이 내가 아버지에 대한 최대의 잘못이었던 것을 깨닫는다.
엄마가 의식이 있어 내가 꼬집는 줄이나 아셨더라면 '나도 마지막 불효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을' 하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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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25. 실제
<그대 자신 속의 신성에 매혹되어 사로잡히지 말라. 그저 경건한 길을 가라>
두 사람이 어두운 밤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 사나운 짐승들이 우글우글하고 숲이 우거진 데다 사방이 캄캄하니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한 사람은 철학자였고, 또 한 사람은 신비가였다. 한 사람은 의심이 많았고, 또 한 사람은 신심이 깊었다. 돌연 폭풍이 몰아치면서 천둥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번갯불이 번쩍하였다. 번갯불이 번쩍하는 순간, 철학자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신비가는 제 갈 길을 살폈다. 그대는 지금 이 얘기 속의 숲보다 훨씬 더 빽빽이 우거진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리고 훨씬 더 캄캄한 속에서. 그러나 이따금 번갯불이 번쩍 하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말라.
한 사람의 장자, 한 사람의 붓다는 번갯불이다. 나는 번갯불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장자, 한 사람의 붓다, 나를 보지는 말라. 번갯불이 번쩍하는 그 순간, 길을 보라. 그때 나를 보면 길을 놓칠 터인데... 빛은 순간적으로만 번쩍인다. 아주 드문 그 순간, 영원이 시간을 관통하는 그 순간은 번개와 같다. 그러나 그 번갯불을 본다면, 장자를, 붓다를 본다면, 그 아름답고 황홀하며 매혹적인 모습과 얼굴과 눈을 본다면, 그땐 이미 길을 놓치리니.
길을 보라...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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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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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1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폭군의 녹봉을 받느니 고사리나 캐먹고 살겠다 - 백이, 숙제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를 쳐서 천하를 평정하였다.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한 무왕은 폭군이다. 내 어찌 주나라의 녹봉을 받아먹으며 목숨을 연명하리." 백이와 숙제는 이렇게 한탄하였다.
백이, 숙제의 아버지 묵태초는 은나라 사람으로 고죽국의 군주였다. 군주인 아버지가 갑자기 죽자 두 아들은 서로 왕위를 양보하였다. 아우인 숙제가 먼저 형 백이에게 말하였다.
"아버님의 뒤를 이어 마땅히 장자이신 형님께서 즉위하셔야 합니다."
백이가 펄쩍 뛰었다.
"아버님께서는 평소 숙제, 너에게 양위하려고 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님 의 뜻대로 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백이는 자신이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숙제가 계속 고집을 부려 왕위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몰래 도망을 쳤다. 그러자 숙제도 형 백이를 따라 도망쳤다. 고죽국에서는 할수 없이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왕자를 뽑았다.
"형님 어디로 가려고 하십니까?"
백이를 만난 숙제가 물었다.
"너도 왕이 되기 싫어 도망쳤구나?"
"형님이 마땅히 왕위에 오르셔야 하는데 제가 어찌 그 자리를 탐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형님을 따라가렵니다."
"소문을 들으니 서백인 창이 노인을 잘 모신다고 하더라. 그 사람에게 가서 의탁하련다."
'서백'은 서방의 제후를 뜻하며, '창' 은 주나라 문왕의 이름이다.
"저도 들었습니다. 주나라 문왕은 강가에서 낚시질하던 태공망 여상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태자의 스승으로 모셨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하여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문왕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미 문왕은 죽고, 그의 아들이 즉위하여 무왕이 되었다. 무왕은 그 때 아버지의 나무신주를 수레에 싣고 '문왕'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동방에 있는 은나라의 주왕을 치려고 하였다. 당시 주왕은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을 뿐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는데, 그 기회를 노려 주나라 무왕은 군사를 일으켜 은나라를 정복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들고 간청하였다.
"부왕이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이웃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과인은 지금 이렇게 부왕의 신주를 모시고 가는 거요. 즉 부왕이 직접 군사를 일으킨 것이며, 과인은 마땅히 신하로서 장군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있을 뿐이오. 따라서 전쟁에 이기고 돌아온 후에 부왕의 장례를 치러야 마땅하다는 것이 과인의 생각이오. 그런데 그것이 대체 뭐가 잘못됐단 말입니까?"
무왕이 진노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더구나 신하인 제후로서 감히 천자를 시해하려 한다면 그것을 어찌 어진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백이가 말하였다.
"지금 은나라 주왕은 천자입니다. 대왕은 부왕의 위패를 받들어 모시고, 스스로를 '무왕' 이라 칭하면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대왕은 제후로서 은나라 주왕의 신하에 불과할 뿐입니다."
숙제도 당당하게 말하였다.
"무엇이라고? 이런 무엄할 데가 있나? 여봐라! 당장 이 자들을 끌어다 목을 베도록 하라!"
무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곁에 있던 무사들이 칼을 빼어들고 백이와 숙제에게 달려들었다.
"잠깐 멈추시오!"
그때 이렇게 소리친 것은 무왕의 스승 태공망이었다.
"아니, 왜 그러시오? 이 자들은 겁도 없이 과인을 능멸하려 들었소."
무왕이 태공망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태공망은 무왕에게 백이와 숙제를 마땅히 놓아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사상보께서 말리시니 과인이 참겠소. 저들을 풀어줘라!"
무왕은 자기 스승을 아버지처럼 받들어 모신다는 뜻에서 태공망에게 '사상보' 라는 존칭을 쓰고 있었다.
아무튼 백이와 숙제는 태공망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다. 결국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를 쳐서 천하를 평정하였다. 그러자 온 천하가 전에 은나라에게 하던 것처럼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었다.
"이제 주나라 세상이 되었구나.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한 무왕은 폭군이다. 내 어찌 주나라의 녹봉을 받아먹으며 목숨을 연명하리."
백이가 이렇게 한탄하였다.
"형님!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숙제가 물었다.
"주나라 곡식을 먹느니 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나 캐먹고 사는 게 낫겠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여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며 숨어살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부르며 끝내 굶어죽었다.
'저 서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캐네.
무왕은 포악한 방법으로
결국 주왕의 포악함에 맞섰으나
그 잘못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네.
이제 신농과 순, 우의 시절은
홀연히 사라졌으니
내 어디로 가서 몸을 의탁할 것인가.
아아, 죽는 것이 낫겠구나,
우리의 목숨도 이제 그 운명을 다하였나니.'
신의 :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의다.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신의가 없이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 백이, 숙제는 죽음으로써 오늘까지 우리에게 신의라는 화두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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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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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그라즈 시청]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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