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38선을 넘나들어 (1/4)
개천절
오늘이 개천절이래, 그제는 국군의 날이라나, 오는 9일은 한글날이고, 24일은 유엔날이고, 그런데 또 어제 2일은 간디의 생일이지. 10월에는 좋은 날이 많다. 오늘을 개천절로 작정한 것은 누가 한 일일까? 단군 할아버지일까? 단군 할아버지는 음력 10월 3일에 나시고 나라를 여셨는데 터무니없는 양력 10월 3일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양력으로 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 아니다. 양력으로 하려거든 4,292년 전 그날의 양력 날짜거나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을 세우던 해의 이날을 양력으로 작정해 국경일로 발표하는 그해의 음력 10월 3일인 날로 했어야 이치에 맞는 일 아닌가? 정부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작정했을까? 그저 10월 3일이니 어렵게 양력으로 환산하느니 어쩌느니 할 것 없이 편리하에 하느라고 한 일인가? 그렇게 생각없이 했다면 잘못이다. 이제라도 고쳐야 한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말썽을 하자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조그만 일이 아니다. 한번 작정해 놓으면 오고 오는 현 세대의 겨레의 모든 사람이 지켜가야 하는 날인데, 그야말로 역사적 결정인데 왜 조그만 일이냐? 그러나 문제는 그 날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그 소지에 있다. 나라 일을 진리 위에서 하자느냐? 편리할 대로 하자느냐? 하기는 헨리 소로가 진리를 말했느니라. 정부는 기껏해야 편리기관에 지나지 않으니 모든 것을 편리주의로만 하자는 것도 무리 아니다.
그러나 아니다. 정부는 편리기관이어도 그 하는 정치는 편리주의일 수는 없다. 일정한 표준원리가 있어 거기 따라서 해야 할 것이다.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 나라지, 허튼 일로 이랬다저랬다하는 것은 나라가 아니다. 소로의 말대로 편리기관인 정부가 사실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불편리인 것은 정치란 정치하는 놈마다 원리를 따라 지키려 하지는 않고 손쉽게 유리하게 하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가 그렇게 모든 것을 진리에 따라 하려 하지 않고 제 맘에 따라 형편에 따라 편리대로 하는 것은 정부 자체를 한개 편리기관으로 알지 않고 제가 곧 목적인 것처럼, 즉 정부가 곧 나라인것 처럼 정부가 곧 진리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곧 나라라고 주장하는 정부마다 협잡이요, 도둑놈의 소굴이다.
내가 보기엔 우리 정부의 하는 일은 일정한 원리가 없다. 한글날을 양력으로 환산해서 했으면 개천절도 그렇게 해야 옳지 않으가? 그만한 일에도 일정한 원리 표준이 없으니 어떻게 크고 복잡한 일에서 기대할 수 있을까? 뜯어먹을 것이 없는 문제에서도 그러니 하물며 먹을 것이 붙어 있는 문제에서는 얼마나 할까? 한글날은 한글학자들이 그렇게 작성했기 때문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러면 개천절은 왜 역사가에게 좀 문의하지 않나? 또 나라 역사 기록을 맡은 사람들은 왜 거기 대해 한마디 항의도 없나? 글쎄 양력 10월 3일로 작정하면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나? 나라는 주먹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이치로 다스린다. 이치가 힘이다. 이유없는 주먹 그것은 짐승의 발톱이다. 이유 없는 정치! 그것은 백성을 무엇으로 아나? 그저 한바탕 가지고 놀기 위한 장기쪽으로 아나, 맘대로 먹을 고기로 아나? 이유를 밝혀라!
할아버지 생신날, 나라 세운 날이 어느날인지 따져볼 생각도 없이 되는 대로 아무 날로나 하는 그 사람들 나는 믿을 수 없다. 할아버지 난 날을 존중 아니하는 사람들이 어찌 그의 삶인 이 역사를 존중하겠으며, 이 씨알의 목숨은 소중히 알아주겠느냐? 이왕 편할 대로 하거든 정월 초하루로 하지, 왜 그래. 양력 그 날도 아닌, 음력 그 날도 아닌, 난데없는 개천절, 난데없어진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생신도 잃어버리신 우리할아버지! 생일도 잃어버리신 우리 할아버지! 생일도 잃어버린 우리나라! 나라밖에 아무것도 없는 씨알의 한 사람으로 감히 버마재비의 도끼를 들어 항의한다. 개천절을 바로잡아라! 내 말이 옳다, 생각하는 한배들은 “옳소!” 해라.
다리부러진 장수
오늘도 뜻모를 태극기가 집집마다 꽂혔겠지. 언제 신문 보니 문교부에서 국기의 뜻을 설명하기 위해 위원을 정했더니 모여서 의논들 하다가 알 수 없어 그만두 었다고 하였더라. 국기는 나라의 상징이라고 보고 절을 하라더구나. 뜻도 모르는 그 기를 보고 절하라면 뜻모를 나라에 살아요 하란 말이야? 뜻모르는 그 기를 보고 절하라면 뜻모를 신을 섬겨 그 종 노릇을 하란 말이냐? 뜻모를 큰 기를 띄우고 그 밑에서 축하한답시고 웅변을 하면 너희는 뜻도 모르고 지껄인단 말이냐? 글쎄 이런 부끄러운 일이 또 어디 있으며, 이런 슬픈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나도 언제 남더러 봐달라기나 하는 듯 그 앞에 허리가 부러지게 절한 일은 없지만 그 뜻은 안다. 나라를 사랑하면 사랑하고 국기를 존중하면 존중했지, 절을 하잔 것은 무엇이며, 또 절할 맘이 있으면 정성껏 할 사람은 하는 것이지만 우선 그 뜻은 알아야지. 하는 일이 어째 모두 그러냐? 지나가는 자동차보고 박수해라 절해라 하고 국기 뜻은 알려주지도 않고 띄우라기만 하고, 대통령을 정말 뵙겠다면야 깍듯이 절이라도 하고 늙으신 뼈가 으스러지도록 까지도 안아드렸겠지만 자동차보고야 왜 인사를 하라느냐? 그 안에 계신 줄 알고 하라고? 계신 줄 알라면야 경무대에 계신 줄 알고 우리나라에 계신 줄 알면 그만이지, 내맘에 계시면 그만이지, 하필 달려가는 자동차보고 하라고? 일이 바쁘고 또 세상엔 어떤 놈이 있을지 몰라 경계를 새도 못 들어가게 하는 판에 절을 받으실 맘도 여유도 있을 리가 없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 생각해본다면 모든 민중이 자기 지나가는 줄 알지도 못하고 제 하는 일에 입을 해벌리고 먼지 먹으며 떠드는 꼴이 보기 좋을까?
충성을 해도 좀 생각을 해가며 해라. 대통령이 자신이 원치도 않는 일을 나서서 우쭐거려 민중을 강제하는 것은 대통령에 대한 대접도 아니요, 사실은 중간에서 제가 그 절을 도둑해 받고 싶어서 하는 일이다. 하나, 딴 소리는 그만두고 국기 문제만은, 그 뜻을 아직도 모른다면 교육은 그 동안 무어라고 했을까? 국기가 문제냐? 나라 정신이 문제지. 나라 정신이 분명하면야 국기의 뜻이 환할 것이지. 나라가 된 지 벌써 언제인데 아직도 그 기의 뜻을 모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풀어 밝히라고 뽑았던 위원들이 못하거든 즉시로 온 국민에 널리 물을 것이지, 왜 나라는 옛날 고려시대 모양으로 누구집 사랑방에서 하는 정치냐? 신문 잡지는 무얼 하잔 거며 라디오는 뭘 하잔 것이냐? 이런 때에 널리 국민에 현상모집이라도 하여 보는 것이 좋지 않은가? 알기는 다 아는 뜻인데 누가 그것을 분명히 말하느냐가 문제이어서 하는 일 아닌가? 그러면 적어도 이런 것은 온 국민에 물어야 옳은 일이다. 학자만이 반드시 아는 것 아니요, 더구나 벼슬아치에 가까이 다니는 사람만이 아는 것이 아니다. 본래 먹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다. 먹는 것이 많은 배에서 생각은 못 나온다. 몇몇이 이러구저러구해 보다가 모르겠으니 우선은 이렇다 하고 두자 하고 마는 것은 너무도 민중을 무시한 일이다. 너나 나나 할 것없이 이 백성이 형편이 없는 백성이다!
오늘도 그 뜻 알 수 없이 펄럭거리는 기 밑에서 개천절이라고 웅변하겠지. 북진통일 부르짖겠지. 38선 이북엔 한 걸음도 못 나가서면서 북진은 무슨 북진, 통일은 무슨 통일? 우리 어린이들에게 지금 백두산은 신화의 나라다. 정부 관청은 시회냐? 시를 짓는 것이 정치요, 교육이냐? 통일도 시로 하고 생활향상도 시로 하고 행복도 시로 하느냐! 2천만이 다 시인이냐? 세계문화에 경사났구나! 어려서 철없을 때 떠들어대던 어른들의 책망이 “다리 부러진 장수, 성 안에서 떠들듯 떠들기는 왜 이리 하느냐? 하더라. 나가 싸우지도 못하는 놈이 떠들어서는 무엇하느냐?”하더라. 나가 싸우지도 못하는 놈이 떠들어서는 무엇하느냐? 그래 알았다. 나가지 못하니깐 떠들지. 아무도 저를 싸움에 내세워 죽게 될 염려없는 줄아니까 열심히나 있는 뜻 떠드는 거지. 대한민국도 다리 부러진 장수냐? 미국이 다시 전쟁나기 허락 아니할 줄을 뻔히 알기 때문에 이왕이면 큰소리 쳐 인기가 얻자는 거냐? 네가 우리를 뭘로 알았느냐? 네 발이 정말 38선 위에 놓이는 것을 보기전엔 우리는 너를 영웅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가 정말 그 선을 뚫는 날 우리는 너를 결코 그저 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아니 오려나? 다리 부러져 업혀다니며 빈이름 내잔 입장수가 아니라, 두다리로 땅을 디디고 서면 머리털로 하늘을 가리키는 정말 장수, 정말 영웅 아니 오려나? 한 사람은 아니 오려나? 부릅뜬 눈초리 찢어져 피가 나는 그따위 장수 말 아니라 “나로다!” 하고 나서면 그 눈에서 쏘는 거룩한 인자의 빛에 쏘여 칼과 몽치를 들었던 무리, 눈 가리고 엎디는 사람 말이지. 그가 맨발로 맨손 들고 가슴 헤치고 38선에 서는 날 민중은 가만 아니 있을것이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를 따라 넘지. 그는 우리를 강아지처럼 모가지를 매어 끄는 이가 아니요, 당나귀처럼 뒤에서 권총으로 위험해 내모는 이도 아니다. 그 맘의 줄로 우리맘의 줄을 한데 묶어 앞장을 서는 이지. 그가 나서는 날 우리는 삶, 죽음을 잊고 그를 따라 나설 것이요,우리가 한꺼번에 38선을 넘으면 누가 감히 막을까. 거기는 소련도 중공도, 원자무기도 전술도 없다.
개천절이 뭐냐? 하늘이 열린 날이다. 하늘을 누가 여나? 맘이 열린사람, 흔히 열린 사람이 아니고는 안니된다. 하늘이 저거냐? 민중의 가슴이 하늘이지, 개천절이라니 저 때아닌 가을비 쏟는 푸르뎅뎅한 하늘인 줄 아느냐?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다. 할아버지께서 하늘을 여셨다는 것은 무지와 죄에 막힌 백성의 마음을 열었단 말이야. 어이(어버이) 마음 거룩하게 여니 새끼 마음이 정성되게 저절로 열리지.그래 거기 하늘이 있다. 거기가 나라다. 정치하려거든 백성을 원수같이 알고 마음 닫고 몸까지 무장하고 누구를 쏘겠다는듯 권총을 들고 나서지 말고, 어이 마음으로 가슴열고 나오너라. 그럼 자식답게 믿는 마음 여기 있다. 마음과 마음이 뚫려 우주를 두고 돌아 마지않는 진리의 물결이 거침없이 드나드는데 38선이 다 뭐라더냐?
이것을 시라느냐? 결코 시가 아니다. 어제가 바로 그의 생일인 간디가 아주 완전은 못하여도 어느 정도 비슷한 것, 요즘 말로 근사한 것을 보여주지 않던가? 노상빈말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확실한 가능성이 있는 길을 보여주었다. 맨손으로 대영제국을 물리치고 4억 인도 민족을 해방했다면 맨손으로 38선을 못 뚫겠나? 또 시라 하자. 사람 시다. 그러나 시거든 어느 시가 나은가? 총 칼 들고 피와 불과 비명속에 쳐들어가 죽은 형제의 시체에 침뱉는 시와, 몸을 뚫고 솟는 혼의 불길이 사랑과 참의 거룩한 빛으로 타올라 그 흉악한 얼굴을 녹여 천사 같게 하고 그 손에서 무기가 스스로 떨어지는 그 시와, 어는 것이 정말 시일까? 정말 시를 가졌으면 정말이김을 얻었지. 다윗 모르나? 호머 모르나? 사보너롤라, 크롬웰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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