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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63호
2020.5.05. (음 4.13)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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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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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등 텍스트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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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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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배운다는 것. 돈이란 잃거나 도둑맞을 수가 있고 건강과 정력은 약해질 수가 있다. 그러나 머리 속에 넣어둔 것은 영원히 당신의 것.
- 루이 라무르(美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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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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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누구
보름 전 이 자리를 통해서 “섬뜩한 느낌 주는 ‘살인 진드기’라는 표현은 삼가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이후 ‘진드기’(ㅈ 일보, ㅊ 교수), ‘공포의 작명’(ㅈ 일보, ㅇ 논설위원) 등의 제목으로 비슷한 뜻을 담은 칼럼이 나왔다. 줄기는 같아도 풀어내는 방식은 달랐다. 동물생태학자와 기자답게 전공과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분석을 담아 썼기 때문이다. 세상살이를 두고 ‘누구’라도 떠들 수 있지만 논리를 갖춰 매체에 글을 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엊그제 라디오에서 ‘기미, 주근깨 따위에 효과가 있다’는 치료제 광고가 나왔다. ‘(피부 고운) 공주는 아무나…’ 하는 대목에 언어 직관을 거스르는 내용이 있었다. ‘…아무나 될 수 없지만(이 치료제를 바르면 가능하다)’이 아닌 ‘(공주는) 아무나 될 수 있다’는 문장으로 끝난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방송”이란 금언에 익숙해서였을지 모른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책’처럼 유사한 보기가 많았으니까.
‘아무(어떤 사람을 특별히 정하지 않고 이르는 인칭 대명사)’는 일반적으로 ‘누구’와 뜻 차이가 없이 쓰인다. ‘나, 라도와 같은 조사와 함께 쓰일 때는 긍정의 뜻을 가진 서술어와 호응’하기도 하는 게 ‘아무’이지만 ‘흔히 부정의 뜻을 가진 서술어와 호응’(표준국어대사전)하기에 피부 치료제 광고가 낯설게 들린 것이다. <칼의 노래>를 쓴 김훈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은) 피었다’를 두고 이틀을 고민하다 ‘꽃은 피었다’로 결론 내렸다. ‘-이’는 사실을 진술한 문장, ‘-은’은 주관적인 ‘그만이 아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같은 듯 비슷한 표현도 상황에 맞춰 제대로 쓰는 게 바른 말글살이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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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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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 신미균
금요일 오후 파고다 공원 십층 석탑 밑
정년퇴직한 의자왕이 돌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파고드는 바람을
날짜 지난 신문으로 가리며
연신 굽신거리는 비둘기들의 호위를
그저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탑의 꼭대기가 서서히 왕의 어깨를 누르려고 한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온다 해도
눈도 꿈쩍 안 하던 왕이 어꺠를 움직여
햇빛 쪽으로 돌아앉는다
감기에 걸린 경순왕은 몇 번 뒤채더니 조용해졌고
소주에 찌들은 이성계는 벌써 길게 누워 버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는 알고 있다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서로 통성명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저 적당히 떨어져 앉아
무심한 척 하는 것이
퇴직한 왕의 신분에 어울린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다
담배꽁초를 주우러 다니는 연산군이 자리 때문에
멱살잡이를 하고 있다 저녁 때 까지는
구경거리가 생겼다 싶어 소리 나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려는데 경비아저씨가 나타나
싸움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늙어가는 저녁도 쉬이 찾아오지는 않고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았던 뼈마디들이
옥신각신하며 삐져나가려고
진종일이 지난 것 같은데도
허리까지 밖에 안 올라 온 탑 그림자를 말아 내리며
오늘도 의자왕은 한 무리의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서둘러 백제 여인숙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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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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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2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나를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1989년 진도 8.2의 대지진이 아르메니아 지방을 덮쳐 불과 4분 만에 온 지역을 폐허로 만들고 3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극심한 파괴와 혼란의 와중에서, 아내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한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하고 있는 학교를 향해 달려갔다. 학교 건물은 샌드위치처럼 납작하 게 찌그러져 있었다. 그는 충격을 받아 실신할 것만 같았으나, 자기가 이전에 아들에게 한 약속이 생각났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아버지는 널 위해 달려갈 거야!' 그 약속을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졌다. 폭삭 무너져 내린 학교 건물의 파편들은 그에게 절망감만 안겨 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들과의 약속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침마다 아들을 데려다 주었던 교실의 위치를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 다. 분명 건물 뒤편의 오른쪽 모퉁이 지점이 아들이 배우는 교실이었다. 그는 그 곳으로 달려가 맨손으로 잡석 더미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가 정신없이 파편 조각들을 들어 내고 있을 때 슬픔에 젖은 다른 학부모들 이 도착했다. 그들은 절망에 찬 목소리로 가슴을 치며 자식들의 이름을 불렀다. 이윽고 몇몇 부모들이 다가와 파편 더미로부터 그를 끌어 내며 말했다.
"너무 늦었어요!"
"아이들은 다 죽었다구요!"
"그래 봐야 아무 소용 없는 짓이에요!"
"어서 집으로 돌아갑시다!"
그들은 같은 처지에 놓인 그를 위로하려고 애를 썼다.
"자, 마음을 추스리고 상황을 받아들여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하다간 당신마저 다친다구요!"
그러나 그는 그 부모들에게 이 한 가지 부탁만 했다.
"나를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아들을 찾아 계속해서 돌들을 파내려 갔다. 소방대장이 달려와 그를 무너진 건물로부터 잡아 끌어내면서 소리쳤다.
"화재가 날지도 몰라요. 도처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러다간 당신까 지 위험해요. 우리가 적절한 조치를 취할 테니 당신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아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에 찬 이 아르메니아 아버지는 소방대장에게 부탁했 다.
"나를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경찰들이 몰려와서 말했다.
"당신의 마음이 괴로운 건 다 이해해요.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에요. 당신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위험에 몰아넣고 있어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우리가 대신 처리할 테니!"
그들에게도 그는 똑같은 부탁을 했다.
"나를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아무도 그를 도와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혼자서 작업을 계 속했다.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8시간 동안 그는 그렇게 혼자서 파편들을 파헤쳐 들어갔다. 12시간, 24시간, 36시간... 마침내 28시간이 지나 그가 커다란 둥근 돌 하나를 들어 냈을 때 안에 서 아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미친 듯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망드!"
그러자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예요? 나 여기 있어요. 아빠! 내가 다른 아이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아빠가 살아 계시면 틀림없이 날 구하러 오실 것이고, 또 날 구하면 다른 아이들도 구해 주실거라고 설명해 줬어요. 아빠가 나한테 약속했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아빠가 날 위해 달려올 거라구요. 아빠는 정말 약속을 지켰어 요!"
아버지가 물었다.
"그 안에 누구누구가 있니? 다들 살았니?"
"33명 중에 14명만 살았어요. 아빠. 우린 무섭고, 배고프고, 목이 말라요. 아빠가 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건물벽이 서로 무너지면서 부딪쳤기 때문에 공간 이 생겨서 겨우 살아남은 거예요."
"어서 이리 나와라, 얘야!"
"아니에요, 아빠! 다른 아이들부터 꺼내 줘요. 난 아빠가 날 꺼내 주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아빠가 날 위해 달려오리라는 걸 난 알아요!"
마크 빅터 한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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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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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牛喘月(오우천월)
吳(오나라 오) 牛(소 우) 喘(헐떡거릴 천) 月(달 월)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편의 이야기. 서진(西晉) 초, 진나라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의 상서령(尙書令)으로 만분(滿奮)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만분이 진무제를 알현하러 갔을 때, 진무제는 그에게 북쪽 창 옆에 앉도록 하였다. 그 쪽 창문에는 종이 대신 투명한 유리 병풍이 놓여 있었다. 바람을 두려워하는 만분은 이를 자세히 보지 못하고, 그 창가에 앉기를 꺼려했다. 진무제가 이를 보고 웃자, 만분은 얼른 창 가에 가서 앉으며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남쪽 오(吳)나라의 물소들은 더위를 매우 싫어하여, 여름이 되면 물속에 들어가 놀거나 나무 그늘에서 쉬는 것을 좋아합니다.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입니다. 어쩌다 밤에 밝은 달을 보게 되면 그것이 태양인줄 알고 곧 숨을 헐떡이게 됩니다. 저도 오나라의 소가 달 보고 숨을 헐떡이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臣猶吳牛, 見月而喘).
吳牛喘月 이란 지레짐작으로 공연한 일에 겁을 내고 걱정함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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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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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3편
5. 자녀교육
1897년 1월, 더반에 상륙했을 때, 나는 세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다. 누님의 열살짜리 아들과, 아홉살짜기와 다섯살짜리 내 아들 둘을 데리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어디서 교육시킬 것인가? 나는 물론 그 애들을 유럽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보낼 수 있었지만, 그것은 다만 호의와 예의로써만 되는 일이다. 다른 어떠한 인도 아이들도 거기는 다니지 못한다. 인도 아이들을 위해 기독교 선교회에서 세운 학교가 있었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을 거기 보낼 마음은 없었다. 그 학교에서 하는 교육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가르침이 다만 영어로써만이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정확치 못한 타밀어, 또는 힌두어로 되기때문이다. 이것조차도 간신히 해나가는 정도였다. 나는 그런저런 불편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가르쳐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해도 규칙적으로 할 수가 없었고, 또 그럴 듯한 구자라트어 선생을 구할 수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내 지도하에서 가르치겠다는 영어교사를 구하는 광고를 냈다. 그러면 규칙적인 교수는 그가 좀 하고, 나머지는 부족한대로 내가 불규칙적으로나마 가르쳐 주는 것으로 지탱해 가게 할 수 있을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달에 7파운드를 주고 한 영국 여자를 가정교사로 채용했다.
그렇게 얼마동안 해봤으나 도저히 만족이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내가 저희들과 하는 대화나 교제를 통해 구자라트어의 지식은 어느 정도 얻었다. 그것은 엄격한 모국어로 했다. 나는 그 애들을 인도로 돌려 보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때에도 벌써 어린애들은 부모와 떨어져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잘 정돈된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얻는 교육을 기숙사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을 내가 데리고 있었다. 조카와 큰아들을 몇달 동안 인도에 있는 기숙학교에 보냈던 일이 있지만, 곧 도로 불러왔다. 그 후 맏아이는 나이든 다음에 내게서 떨어져 인도로 가서 아메다바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갔다. 내 느낌으로는 조카놈은 내가 주는 교육으로 만족하는 듯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한창 젊은 나이에 며칠 앓지도 않고 죽고 말았다. 나머지 세 아이들은 내가 남아프리카에서 샤타그라하 운동을 하는 부모들의 자녀를 위해 시작했던 학교에서 정규의 교육을 좀 받아 본 외에는 한번도 공립학교에 다년 본 일은 없었다.
이 모든 실험들은 다 불충분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내가 해주고 싶은 만큼 많은 시간을 바칠 수가 없었다. 그들을 충분히 보살펴 줄 능력이 내게 부족하기도 했고, 또 다른 불가피한 원인도 있고 해서 내가 원하는 것만큼 그들에게 학문 교육을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하여는 내 아이들은 모두 내게 불평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학사. 석사, 심지어는 고등학교 졸업생을 만나기만 해도 자기들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뒤지는 처지라는 것을 느끼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견은, 내가 만일 이 애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공립학교에서 교육시키기로 했다면 그 애들이 오직 경험의 교육, 즉 부모와의 끊임없는 접촉에서 얻어지는 훈련은 얻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내가 현재처럼 그 애들의 일에 대해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고, 또 그애들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서 영국이나 남아프리카에서 받을 수 있었던 그 인위적인 교육은 그 애들이 오늘날 이 생활에서 보여주는 듯한 그러한 소박과 봉사의 정신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지도 못했을 것이고, 도리어 그 인위적 생활 방식은 나의 공적 활동에 대단한 방해가 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비록 학문 교육은 저희들 마음에나 내 마음에나 흡족하게 줄 수가 없었다 하더라도, 나의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볼 때에, 그들에 대한 내 의무를 내 역량껏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을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오늘날 내 맏아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흔적은, 내 젊은 시절의 훈련받지 못하고 트잡히지 못한 생활의 반영이라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때를 불완전한 지식과 방종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 맏아들의 가장 감수성이 강한 그 시기와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내 방종과 무경험의 시기로 보려고 하지않고, 도리어 그것이 나의 생애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요, 후에 이루어진 변화는 망상과 잘못된 깨달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로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젊은 시절을 각성을 대표하는 시기라 하고, 후년의 극단적 변화의 시절을 망상과 이기주의의 시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할 법은 어디 있을까? 사실 친구들로부터 아주 곤란한 질문을 받는 일이 많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학문적인 교육을 시켰다 해도 무엇이 잘못인가? 내가 그들의 날개를 그렇게 잘라 버릴 무슨 권리를 가졌단 말인가? 그들이 학위를 따고 자기 일생의 길을 자기가 택하겠다는 데 내가 왜 막아서서 방해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질문들이 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나는 많은 학생들과 접촉해 보았다. 나 자신이 직접 또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변덕스러운 교육을 다른 아이들에게도 실시해 보았고 그 결과도 보았다. 내가 아는 내 아이들과 같은 연배의 젊은이들도 많지만 1대1로 보아서 그들이 내 아이들보다 낫다거나 내 아이들이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실험의 궁극의 결과는 미래라는 자궁 속에 있다. 내가 이 토론을 하는 목적은 문화사를 배우는 학도로 하여금 세련된 가정 교육과 학교교육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과, 또 부모들의 생활 변화가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어느정도 알게 하자는 데 있다. 또한 이 장의 목적은 진리의 탐구자들에게 그 진리의 실험으로 인하여 얼마만한 거리를 들어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자유를 믿는 자들에게 그 엄격한 여신을,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자는 데 있다. 내가 만일 자존심이 없어서 다른 아이들은 받지 못하는 교육을 내 아이들에게는 줄 수 있었다고 스스로 만족하지를 못했다면, 나는 학문 교육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 아이들에게 주었던 그 자유와 자존의 실물 교육은 도저히 그 애들에게 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유냐 학문이냐 그 둘 중에서 선택을 하여야 하는 때에 자유가 천배라도 더 귀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1920년, 내가 노예의 본거지인 그들의 학교에서 불러내어 노예의 쇠사슬을 지고 학문 교육을 받느니보다는 차라리 자유를 위하여 무식한 채로 돌을 깨고 있는 편이 훨씬 더 좋다고 일러주었던 그 젊은이들은, 지금 와서는 아마 내가 왜 그 조언을 해주었는지 그 근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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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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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20년만의 부활 - 박경학
격리된 이방 지대에서 주검처럼 살아가는 내게 편지가 왔다. 20년 5개월 만에 큰딸한테서 편지가 온 것이다.
<신촌 할아버지의 격려 말씀대로 저희 사남매는 가난과 역경 속에서 굴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아버지는 이 세상에 안 계신 것으로 믿고 저희들끼리 어머니를 도와 삶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엄청난 시간이 흘렀군요.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년하고도 또 10년이 지났습니다. 어머니의 의사에 따라 저희들은 한 번도 아버지를 면회 가지 않았습니다. 편지도 드리지 않았구요. 그러나 아버지는 반드시 살아 계실 것으로 어머니와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저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처럼 말예요. 작년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남들은 꽃놀이를 간다고 야단인데 문턱에 기대 선 어머니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이젠 네 아버지에게 편지도 하고 면회도 가야겠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깃들여 있었습니다. 제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후 저는 몇 번이나 편지를 쓰려고 망설였습니다. 어머니도 편지지를 앞에 놓고 눈물만 닦다가 그만두기를 수없이 되풀이하셨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쌓이고 겹친 슬픔을, 가슴속 깊이 맺힌 한의 실뭉치를 어머니는 좀처럼 풀어헤칠 수가 없으셨던 겁니다. 저는 벌써 10년 전에 결혼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애 아빠는 기술자로 중동에 가 있는데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초라하지만 작은 집도 한 채 장만했습니다. 아들딸 둘을 둔 영이(둘째딸)도 8년 전에 결혼해 지금은 집을 사려고 조그마한 공장에서 부부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미숙(셋째딸)이는 딸만 하나 두었는데 그 애 이름이 지연이라고 합니다. 지연이는 미숙이의 어릴 때 모습과 꼭 닮았습니다. 미숙이의 남편도 중동에 가 있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습니다. 석이(아들)에게선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응석 부리던 네 살 때의 그 모습을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릴 때의 별명이 고바우였듯이 똥똥하고 눈이 작은 개구쟁이였는데 지금은 의젓한 스물네 살의 청년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 못한 것을 무척 서운하게 여기는 석이에게 아버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때는 별 감흥 없이 듣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깊은 감동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눈에 띄게 과묵하고 진실하고 부지런해졌습니다. 아버지가 나오실 때까지 집을 장만한다고 열성이 대단합니다. 몇 푼 안되는 월급을 모아 집을 산다는 것은 만만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애의 결심도 만만찮습니다. 더욱 대견하고 고마운 일은 기림동 아저씨(나의 이종 사촌 동생)가 성공한 일입니다. 맨손으로 피난 나온 아저씨는 지게를 지고 막벌이를 하는가 하면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 청계천 다리 위에서 고물장수 등 차마 볼 수 없는 고생을 하면서도 두 가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심과 잘살아야겠다는 피나는 의지가 그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저씨는 물심양면으로 저희들을 언제나 도와 주셨습니다. 작년 6월, 15년 간의 각고 끝에 지어 놓은 아저씨네로 집 구경을 갔습니다. 아저씨가 손수 돌을 다듬고 시멘트를 이겨서 지은 집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아담하고 튼튼한 집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볼품보다는 실용적인 면을 중요시한 집이었습니다. 송진 냄새가 싱싱한 응접실에는 우리 나라 지도가 커다랗게 걸려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그 지도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형님이 죽지 않고 살아 나와야 할 텐데."
혼잣말처럼 나직이 하는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억제할 수 없는 그리움과 연민의 정이 깃들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울며 헤매던 저희들은 20년이 지난 오늘, 죽었다는 아버지가 다시 환생하는 기쁨의 그날을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 사진 한 장 보내 드립니다.>
편지를 다 읽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면서도 미소가 번졌다. 나는 편지를 보다가 사진을 보고, 사진을 보다가 편지를 읽곤 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하게 되었다. 20년 7개월 만의 출감이었다. (수기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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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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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에 저녁이 오듯이 - 홍윤숙
어린 친구의 위로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한 신학생이 10여 년의 수련과 공부 끝에 마침내 사제 서품을 받아 처음으로 미사 집전의 허락을 받았다. 그날 성당에는 그의 첫미사를 축하하는 많은 시자와 하객들이 모여 와 있었다. 이제 막 사제로서 첫발을 내딛는 젊은 신부는 긴장하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미사봉헌의 준비를 하고 첫 강론의 줄거리를 짜서 암기하다시피 머리속에 정리해두기도 했다. 마침내 신부는 제대에 올라가 성스러운 미사를 집전했다. 모든 순서를 순조롭게 진행하고 이제 강론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는 강론대 앞에 섰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그만 말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부터 아버지의 집으로 갑니다." 말하자면 거룩하고 험난한 사제의 길을 떠난다는 뜻으로 강론의 첫 테마를 말하고는 다음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그는 또 한 번 되풀이해서 "나는 이제부터 아버지의 집으로 갑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뒤의 말이 계속되지 않았다.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이 캄캄했다. 청중들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히 새 사제의 강론 실력이 어떤지 기다리고 있고 높은 제단 위에는 교구 어른이신 주교님도 와 계셨다. 새 신부는 떨리는 마음으로 세번째 같은 말을 되풀이했으나 역시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참으로 딱한 일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준비했건만 머리 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고개를 떨구고 깊이 허리를 구부려 절하고는 강론대를 내려왔다. 수치심과 낙망으로 죽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더욱 큰 일은 주교님 앞을 지나가는 일이었다. 필시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앞으로 교회 안에서 사사건건 백안시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생각으로 주교님 앞으로 지나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보게."하고 주교님이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새 신부는 발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만장한 신자들 앞에서 이제 꼼짝없이 망신을 당했구나 하는 생각에 겨우 머리를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눈앞의 주교님이 환한 웃음을 만면에 띠고 "자네 집에 가거든 아버지에게 안부 전해주게나."하시는 것이었다. 순간 좌중은 물론 웃음 바다였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던 젊은 사제의 죽을것만 같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미사는 오히려 우렁차게 진행되고 신자와 하객들의 새 신부에 대한 눈길은 따뜻한 위로의 정으로 넘쳤다고 한다. 주교님의 마음속엔 긴장하여 완전히 굳어버린 젊은 새 신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위로의 정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젊은 시절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자부와 같은 웃음과 위로 앞에 새 사제는 부끄러우면서도 큰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것을 깨달은 만장한 신자와 하객들은 그 넘치는 정에 함께 기뻐했을 것이다. 인간애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대방 마음속의 수치심이나 상처를 슬쩍 덮어주는 너그러움과 유머, 그런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우리들 삶에 보이지 않는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 것이다. 만일 그때 주교가 새 신부에게 그같은 인자한 유머 대신에 험악하게 책망이라도 했다면 그것이 어쩌면 새 신부에게는 낙망과 수치심에다 분노까지 겹쳐 평생 씻지 못할 오점으로 남아 괴롭혔을 것이다.
역시 이것도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다. 한 아이가 달음박질을 하다가 넘어졌다. 아이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넘어진 채 울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일어나라고 했지만 아이는 끝내 일어나지 않고 울기만 했다. 아이의 엄마가 와서 역시 일어나라고 했지만 아이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일어나지 않으면 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울어댔다. 그때 한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때구르르 구르며 넘어졌다. 넘어져서 우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같이 일어나자."고 했다. 그러자 울던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피시시 웃었다. 두 아이는 함께 일어나 흙 묻은 옷을 털고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넘어져 운 아이는 다쳐서 아픈 게 아니다. 친구들 앞에서 넘어졌다는 일이 속상하고 어린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것이다. 상처받은 자존심은 위협이나 건성말로는 치유가 되지 않는다. 두번째 일부러 넘어져 아이의 손을 잡아준 친구는 바로 그 아이의 상처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다친 아이와 같은 처지, 같은 마음이 되어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이다. 구경하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처지가 되어 그를 위로하고 감싸준 것이다. 세상은 냉혹하다고 한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고 옆집에서 갈비를 구워도 비위가 뒤집힌다고 한다. 친구가 승진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친구가 손해를 보면 겉으로는 안된 척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해하는 것이 인심인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한평생 하는 일이 힘들고 고달픈데 우리를 에워싼 이웃의 인심조차 그처럼 각박하대서야 어떻게 살 것인가. 참으로 저 어린 사제의 곤경을 구해준 주교 같은 마음씨, 넘어져 우는 친구의 마음을 진심으로 헤아려 같이 울고 웃어준 어린이 같은 정. 인간애란 거창한 것도 거룩한 거도 아니다. 바로 우리 옆에 언제나 널려 있는 성냥개비 같은 것이다. 불만 붙이면 밝게 피어오르는.
몇 개의 얼굴을 가진 인생의 달인
샤로얀의 소설에 [웃는 샴]이라는 단편이 있다. 그가 어린 시절 만났던 한 소년의 이야기라고 한다. 소년은 잘 웃는 아이였다. 우스울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우습지 않을 때도 잘 웃었다. 짓궂은 아이들에게 얻어맞고도 웃고 옷이 찢겨지고 단추가 뜯겨져 나가도 낄낄 웃었다. 잉크를 뒤집어쓰고도 "아하하하."하고 웃었다. 한 번은 신문팔이로 거리에 서서 신문을 팔았다. 신문다발을 끼고 "석간이요, 석간. 고속도로에서 대형 자동차 사고요. 일가족 다섯 명이 사망!" 어쩌구 큰 소리로 외치면서 신문을 팔고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이 말했다. "야 임마, 네가 파는 신문의 뉴스는 슬픈 사건인데 어떻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팔 수가 있단 말이냐." 하자, 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가 지금 웃고 있었어요?" 하고 오히려 되묻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샤로얀은 알 수가 있었다. 샴은 언제나 웃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었던 것을. 얼굴을 보면 웃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언제나 울고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아, 아무도 샴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샴은 소학교를 나와 취직을 하지만 사고로 엘리베이터에 끼여 죽고 만다. 샴은 직장에서 엘리베이터로 짐을 나르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주인이 엘리베이터로 물건을 나르라고 하면 "난 엘리베이터가 싫은데..." 하면서도 낄낄 웃고 있었다니 누구도 그가 얼마나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몇 개의 얼굴로 사는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가령 부부나 부모자식지간이라 해도 말하지 않는 이상 서로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한 번도 털어놓고 이야기해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 앓으면서 살다 가는가. 샴의 경우는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비슷한 비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입을 여는 일은 마음을 여는 일이다.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선 서두르지 말고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지그시 끝까지 들어주는 참을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보면 흔히 어른들은 대충 듣거나 아니면 중도에서 중단시키고 때로는 명령하고 지시한다. 조언한다고 하면서 아이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강요하기도 한다. 결국 아이의 마음은 열리지 않고 열리는커녕 점점 더 굳게 닫혀버리고 만다. 엘리베이터에 끼여 죽은 샴의 마음을 열어 그의 속 깊은 슬픔을 들어줄 귀가 없었기에, 그는 언제나 마음과는 달리 겉으로는 웃으면서 결국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를 어떻게 보는가. 무엇을 요구하는가.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굳힌 한 사업가의 회고담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친근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지방의 유지였던 아버지는 여러모로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두려운 존재였다. 마주 앉아 아버지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본 적이 없었다. 그러한 그가 장성하여 사회의 지도급 인사가 되고 마침내 고향인 그 지방 도시의 초청을 받아 천여 명의 청중을 앞에 놓고 강연을 하게 되었다. 강연을 하면서 그는 놀랍게도 '기어코 아버지를 뛰어넘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솟구치는 쾌감에 가슴이 벅차더라고 했다. 젊은 시절 그처럼 무겁던 아버지의 중압감을 비로소 털어버리고 기어이 해냈다는 성취감에 뿌듯해지며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버지에게 "자,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을." 하고 자랑하고 싶더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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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지식/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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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역사 - 조르주 장
제1장 초라한 출발
2만 2,000년 전 인류는 라스코와 몇몇 동굴벽에 처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만 7,000년 뒤, 인류는 가장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문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들은 인류가 전해 오는 이야기를 보존하기 위해 문자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문자를 만든 배경에는 그보다 훨씬 더 세속적인 이유가 있다. 인류가 존재한 수만 년 동안 선화, 기호, 그림 등 간단한 의사소통의 수단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문자가 존재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문자를 사용하는 집단의 생각이나 느낌을 분명하게 재현할 수 있는 공식적인 기호나 상징 체계가 있어야 하며, 이체계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 합의된 것이라야 한다. 이런한 체계는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자의 역사는 그야말로 오랜 동안 천천히 진행된 복잡한 과정이다. 또한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며, 아직도 대단히 중요한 에피소드들이 누락되어 있어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문자의 역사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지금의 이라크)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다. B.C. 3000년경 이 일대는 남쪽 수메르 지역과 북쪽 아카드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역사적 사건을 보존하려는 구체적인 필요 때문에 문자를 만들었다. 수메르 사람들과 아카드 사람들은 이 일대에서 평화롭게 살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현대의 영어와 중국어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이들 사회는 고도로 문명화되어 있었는데 바빌론과 같은 대도시 주변에 크고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았다. 공동체는 통치자에 의해 다스려졌지만 종교적으로는 공동체 수호신들의 보호도 받았다. 궁정의 궁신, 사제, 상인들을 제외하면 메소포타미아의 주민은 대부분 목자 또는 농부다. 우르크 대신전 단지에서 출토된 진흙판에 새겨진 최초의 문자는 이러한 사실을 설명해 준다. 신전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 진흙판은 곡식의 포대 수와 가축의 수를 적어 놓은 것이다. 최초의 문자는 농축산물의 수확량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후대에 제작된 진흙판은 수메르인의 사회구조를 알려 준다. 예를 들어 라가시에 있는 신전의 종교적 공동체에는 18명의 빵 굽는 사람, 31명의 술 빚는 사람, 7명의 노예, 그리고 1명의 대장장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기록들을 보면 수메르 사람들이 상거래에서 은화를 사용했다는 사실과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제도를 도입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메르의 학교터에서 발견된 진흙판에는 한쪽에 선생이 쓴 글씨, 다른 한쪽에 학생이 쓴 글씨가 나란히 적혀 있어 설형문자 쓰는 법을 어떻게 가르쳤는가도 알 수가 있다.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이들이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물체의 단순한 윤곽 이상의 것으로서, 물체의 전형을 간단한 선화로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산'을 나타내는 그림문자를 겹쳐놓으면 그것은 산 너머 외부 지역에서 데려온 '여자 노예'를 의미했다(c). 학자들은 이 같은 원시 그림문자가 약 1,5000개 정도 있음을 확인했다.
[ 기원전 26세기 수메르인들의 쐐기 문자]
문맥 속에서 더 넓은 의미를 갖게 된 그림문자
B.C.29000년경 아주 흥미로운 발전이 있었다. 원시 그림문자에서 즐겨 사용되던 곡선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진흙판에 곡선을 그려 넣는 것은 어려움이 많이 따랐고, 그래서 순전히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문자에계가 급속히 발달하게 되었다. 필경사들은 진흙판에 한쪽 끝이 뽀족한 갈대를 이용하여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사물을 그려 넣었다. 수메르인은 끝부분을 삼각형으로 잘라 내 첨필(첨필: 깃촉 펜이나 만년필의 선구)을 만들었다. 그림들은 주로 쐐기꼴을 하고 있었는데, 이 특징 때문에 설형문자(설형문자,cuneiform)라는 말이 생겨났다. cuneiform은 '쐐기'를 의미하는 라틴어 cuneus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설형문자는 많은 변화를 거듭했고, 그 결과 원래 그림의 형체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필경사들이 제멋대로 기호의 형태를 변경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시의 필경사들이 사용한 것이 분명한 '기호목록'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시적인 사전 또는 학습 보조도구라고 해석된다. (원어의 scribe는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훨씬 후대의 copyist와 구분되어 사용해야 하나 마땅한 역어가 없어 이 두 가지 모두 필경사로 번역함:역주). 기호들은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인간의 발을 나타내는 기호는 '걷다' '일어서다' '움직이다' 따위 여러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뜻에 따라 발음도 달랐다. 기호가 처음의 간단한 의미보다 더 많은 내용을 나타내게 되자, 그에 따라 기호의 전체 개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는 기호의 수는 600개를 넘지 않았다.
레부스, 진정한 문자체계로 가는 초석
곧 더욱 놀라운 발전이 일어났다. 필경사들은 기호를 새겨 넣은 젖은 진흙판을 햇볕에 말리거나 드물기는 하지만 가마에 넣어 말렸다. 이 단계에서 기호는 다양한 대상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기호가 구어를 나타내면서 문자 체계에는 중대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모든 발달된 문자체계는 이같이 기호가 소리를 표상하는 체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수메르인과 이집트인의 놀라운 업적은 아이들 놀이처럼 간단히 레부스라는 체계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림문자를 사용할 때, 대상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나타내는 소리를 기록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창안했다. 예를 들어 양탄자를 나타내는 capet을 쓰고 싶다면, 그것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의 음소인 'car(달구지)'와 'pet(애완동물)'의 그림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면 수메르의 그림 문자에서 '티(ti)'는 화살을 의미했는데 이것이 '목숨'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목숨을 의미하는 단어의 음소도 '티'였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아주 간단한 실례에 불과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소를 사용하는 방법은 점점더 정교해졌다. 그래서 수메르 필경사들은 어떤 기호가 그림 문자인지 또는 음소문자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때로는 한정부호를 사용했다.
법전, 과학서, 그리고 문학작품
B.C. 2000년경 아랍족과 히브리족 따위 셈족의 선조인 아카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지배하는 주도세력으로 떠올랐다. 그에 따라 B.C. 2000년 직후에는 아카드어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구어로 자리잡았다. 설형문자는 그 체계가 잘 정비되자 아카드어와 수메르어뿐만 아니라 다른 구어도 기록할 수 있었다. 수메르어는 구어로서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자 종교문헌 속에서 문어로 보존 되었다. 이것은 라틴어가 카톨릭 교회 내에서 잘 보존된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설형문자는 곧 강대한 아시리아 왕국의 문자가 되었고, 이어 B.C. 18세기에는 바빌론 왕국의 문자체계로 정착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인 사이에서 숫자를 세기 위한 수단으로 초라하게 시작했던 문자체계는 서서히 발전되어 나갔다. 먼저 중요한 사건이나 계약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고, 이어 구어를 기록하기 위한 체계로 발달했다가 마지막으로 의사소통과 표현이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발달에 힘입어 고대 수메르인, 아카드인, 바빌로니아인, 그리고 아시리아인은 우편제도로 발달 시킬 수도 있었다. 심지어 진흙으로 봉투까지 만들었다. 설형문자는 여러분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신에 대한 찬송, 고대의 예언, 문학자료 등의 보관을 가능하게 했다. 고대 수메르인은 (길가메시의 서사시)라는 작품을 만들어 냈는데, 여기에는 '2/3는 신이고 1/3는인간'인 태양거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니네베에서 발굴된 아시리아 왕 아수르바니팔(B.C. 669-627) 기념 도서관에서 출토된 자료로 복원 되었다. 위대한 그리스 신화 (특히 헤라클레스 신화)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는 이 서사시에는 대홍수의 이야기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성경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에게 설형문자를 읽고 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호를 쓸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기호의 의미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기술이었다. 이 때문에 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의 필경사는 독립된 계급을 형성했고, 때로는 글자를 모르는 궁신이나 심지어 왕보다도 더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다. 또한 우수한 필경학교는 기강이 대단히 엄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메소포타미아 학생들에 관한 기록을 읽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문자체계는 여러 가지 언어를 표기할 수 있었다. 이 최초의 문자체계는 수메르어나 아카드어말고 다른 언어들도 기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수도를 수사(오늘날의 이란)에 두고 있던 엘람인이 사용한 엘람어도 설형문자로 기록되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B.C. 1400~1200년에 강성한 문화를 형성했던 아나톨리아(오늘날의 터키)의 히타이트족도 설형문자를 채택하여 널리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의 언어가 인도-유럽 어족에 속했고, 게다가 그들 고유의 그림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설형문자를 사용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다른 예로는 고대 페르시아어를 들 수 있다. 이 언어는 페르시아 왕국(대체로 현재의 이란 지역에 해당하며 B.C. 500년에 최고로 강성했다)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기록문자로는 메소포타미아 기호체계에서 파생된 설형문자 알파벳이 사용되었다. 이처럼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발명된 설형문자 체계는 B.C. 3000년에서 B.C.1000년 사이에 남쪽으로는 팔레스타인, 북쪽으로는 아르메니아까지 전파되었다. 특히 아르메니아 지역에서는 카난어와 우라르티아어를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다. 중동지역의 여러 부족국가들이 설형문자 체계를 도입하지 않았더라면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시대의 역사적 비밀을 파헤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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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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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V838 Monocerotis에서 태양보다 600,000 배 더 밝게 빛을 발하는 "라이트 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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