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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61호
2020.5.02. (음 4.10)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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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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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등 텍스트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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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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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더러 끔찍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매혹적이고 활기에 찬 경험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삶을 철저하게 누렸다. 한쪽 귀에는 탄식소리가 들려 오더라도, 다른 쪽 귀에는 언제나 노랫소리가 들렸다. - 숀 오케이시(아일랜드 극작가, 1880~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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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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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진드기
‘전신이 나른해지고, 구역질이 나는 경우가 많다. 그 후 고열과 설사 등 증상을 보이는 한편, 혈소판이나 백혈구가 급감한다. 2011년에 병원균이 확인된 전염병이다.’(위키백과) 중증 열성 혈소판 감소 증후군(Severe fever with thrombocytopenia syndrome, SFTS)의 설명이다. 중국과 일본에 이어 지난주 국내에서도 이 전염병 감염으로 의심되던 환자가 숨졌다. “이 병의 위험성이 일본 뇌염 등 많이 알려진 곤충 매개 감염병에 견주어 더 큰 것은 아니다”라는 질병관리본부의 발표에도 불안감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야외 활동이 잦아지는 시기인데다 매개체가 이른바 ‘살인 진드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에스에프티에스(SFTS)로 의심되는 환자가 사망했다는 뉴스를 듣는 순간 공포를 느꼈다. “매개 진드기 중에 전염시킬 바이러스를 지닌 개체는 ‘100마리 중 1마리 미만’이라는 전문가의 설명도 두려움을 덜어내지는 못했다. 신문기사를 ‘읽는 것’과 뉴스를 ‘듣는 것’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인(사람 죽이는) 진드기’라는 표현이 영화 <연가시>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으니 말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것의 원이름은 ‘작은소참진드기’다.‘
신증후군 출혈열’(유행성 출혈열)을 옮기는 설치류나 조류독감의 하나인 ‘H5N1’을 옮기는 조류, 뇌염과 말라리아를 전염시키는 모기 따위를 두고 ‘살인 쥐’, ‘살인 새’, ‘살인 모기’라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맹독을 지녔다는 이유로 ‘살인 뱀’이나 ‘살인 벌’이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살인 진드기’ 의심 1명 사망” 같은 기사 제목은 어색하고 ‘살인 진드기’라는 표현은 왠지 섬뜩하다. ‘살인 진드기’의 따옴표를 드러낼 수 없는 라디오에서는 앞에 ‘이른바’, ‘속칭’을 붙이고, ‘중증 열성 혈소판 감소 증후군’(SFTS)이 길어서 부담스럽다면 영어 약자 ‘에스에프티에스’를 쓰는 것도 방법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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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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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 털이 자라네 - 조병완
부끄러워
부끄러워
털이 자라네
팬티속에서 치모는 은밀하게 자라고
--치모가 없는 뱀은 부끄러움을 모르지
거짓도 모르지 위선도 모르지 뱀이 부러워라
손의 죄악 몰래 감추니
날개는커녕 겨드랑이 털이 자라네
뱉어내는 말들이 부끄러워 콧수염은
자꾸 자라 입을 덮으려 하네
잘라도
잘라도
털이 자라네
머릿속엔 부끄러운 생각이 얼마나 많기에
머리카락은 이렇게도 무성히 자라는가
한가닥씩 들추어 다듬어야
겨우 깊어지는 생
뻔뻔히 살려고 털을 자르네
아, 털에 덮인 오늘
가닥도 안 추리고 털을 자르네
부끄러워
생이 부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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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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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2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긍정적인 생각의 힘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국의 대외 정책은 혼란에 빠졌다. 그 결과 전쟁 에 참가한 사람들의 고통만 갈수록 커져 갔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제랄드 L. 커피 대위의 기적적인 일화가 꽃피어났다. 제랄드 대위는 전투기를 타고 가다가 1966년 2월 3일 중국 해 상공에서 총격 을 받고 추락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 후 7년 동안 그는 월맹군의 포로 가 되어 여러 곳의 포로 수용소로 끌려 다녀야만 했다. 제랄드 대위뿐 아니라 다른 포로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운동과 기도, 그리고 서로간의 끈질긴 대화의 힘 덕분이었다. 포로로 붙잡힌 뒤 제랄드 대위는 며칠 동안 베트남식의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고문에 못 이겨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서명을 해 주고 말았다. 그런 다음 그는 홀로 감방에 내던져진 채 고통으로 몸부림 쳤다. 적에게 협조 했다는 죄책감이 더욱더 그를 괴롭혔다. 이때까지도 그는 감옥의 다른 감방들 속에 미국인 죄수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6번 감방에 갇힌 팔 부러진 사람, 내 말 들리는가?" 목소리의 주인공은 로빈슨 리스너 대령이었다. 그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말을 해도 안전하다. 하트 브레이크(고통) 호텔에 온 걸 환영한다." 제랄드 대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의 조종사 보브 한센에 대해 무슨 소식이라도 들으셨나요?" 로빈슨 대령이 말했다.
"전혀 듣지 못했네, 대위. 그런데 자넨 벽을 두들겨서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만 하네. 그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믿을 만한 통신법이지." 로빈슨 대령은 '우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곳에 다른 사람들도 갇 혀 있다는 걸 의미하는 말이었다. 제랄드 대위는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제 전 다른 사람들 곁으로 돌아왔군요.' 로빈슨 대령이 물었다.
"저 자들이 자네를 고문하던가, 제랄드 대위?" 대위가 대답했다.
"네. 그리고 전 그들이 저한테서 뭔가를 알아냈을까 봐 무척 걱정이 됩니다. 로빈슨 대령이 말했다.
"잘 듣게. 일단 저들이 한 인간을 파괴시키려고 마음 먹으면 저들은 얼마든 지 그렇게 할 수 있네. 중요한 건 자네가 어떻게 하면 집으로 돌아가는가 하는 거야. 이곳의 계명을 따르도록 하게. 자네의 능력을 다해서 최대한으로 저항하 게. 만일 저들이 자네를 파괴하려고 하면 파괴되는 대로 그냥 내맡기고 있지 말 게. 입으로라도 자네의 상처를 핥고 다시 일어서는 거야. 알겠나?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게. 혼자 처져 있으면 안 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서 로가 서로를 돌봐 주는 일이지."
제랄드 대위는 사소한 규정 위반으로 여러 날씩 밧줄에 매달리는 고문을 당하 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옆방에 갇힌 친구가 벽을 두드려 그에게 '강하게 매달려 있으라.'고 말해 주고, 모두가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노라고 전하곤 했다. 제랄드 대위는 말한다.
"그리고 그 친구가 고문을 당할 때는 내가 똑같은 위로의 메시지를 벽을 통 해 전했습니다."
마침내 제랄드 대위는 아내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사랑하는 제랄드
아름다운 봄이 왔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 모두는 당신이 그리워요. 아이들은 잘 해내고 있어요. 킴은 이제 호수 전체를 누비며 수상 스키를 타고 있구요. 사내아이들은 물 속으로 자맥질을 하고 있고, 어린 제랄드는 고무 튜브에 매달 려 물장구를 치고 있어요.
제랄드 대위는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편지를 읽어 내려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내의 편지를 접어 가슴에 대었다. 문득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린 제랄드라니? 제랄드가 누구지?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그가 포로로 붙잡히기 직전에 태어난 아이가 사내아이 였으며, 아내가 그 아이에게 제랄드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던 것이다. 아내로선 그 전에 보낸 편지들이 전혀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 태어난 아들에 대해 당연한 듯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랄드 대위는 말한다.
"아내의 편지를 읽고서 난 많은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가족이 잘 지내고 있음을 알고 안도감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막내아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의 편지는 이렇게 끝맺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리고 다른 더 많은 사람들도, 당신이 하루 빨리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몸조심하세요, 여보. 사랑해요.
수용소에 갇힌 포로들은 수많은 시간을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며 보냈다. 눈을 감으면 영화를 찍듯이 카메라가 집 안을 세세하게 비추었다. 그들은 그 카메라를 따라 자기 집의 방에서 방으로 돌아다니곤 했다. 병사들은 집으로 돌 아가면 어떤 기분일까를 수없이 상상하곤 했다. 제랄드 대위가 견뎌 낼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의 친구들과 그의 믿음이었다. 일요일이 되면 감방의 최고참이 벽을 두드려 신호를 보냈다. 일요 예배 시간을 알리는 것이었다. 두 발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각자의 독방에서 일어나 함께 하는 모습으로 시편 23장을 암송하곤 했다. '주께서 내 적의 눈앞에서 내게 식탁을 준비해 주시고, 기름으로 내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제랄드 대위는 말한다.
"이 끔찍한 장소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잔이 넘치고 있음을 난 깨달 았습니다. 왜냐하면 언제가 되든,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아름답고 자유로운 나 라로 돌아가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평화 협정이 조인되고, 1973년 2월 3일 포로가 된지 꼭 7년째 되는 날에 제랄드 대위는 두 명의 베트남 병사 앞으로 불려나갔다. 그들이 말했다.
"오늘 우리는 너의 소지품을 돌려 주겠다."
제랄드가 물었다.
"무슨 소지품을 말하는가?"
그들이 말했다.
"여기 있다."
제랄드는 침을 삼키며 그 베트남 병사가 엄지손가락과 집게 손가락 사이에 들고 있는 걸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결혼 반지였다.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는 그의 것이었다. 제랄드는 그것을 자신의 손가락에 끼 었다. 조금 헐렁해지긴 했지만, 의심할 바없이 자신의 반지였다. 제랄드는 그 반 지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다. 제랄드 대위는 말한다.
"내가 이 반지를 빼앗겼을 때 내 아이들은 열두 살과 열세 살이었습니다. 갑 자기 난 늙고 지친 내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7년 동안 나는 계속해서 중세의 토굴 감옥에 갇혀 있었고, 내 팔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벌레들과 끊임 없이 씨름을 해야 했으며, 그밖의 것들은 신만이 아십니다. 이제 나이를 먹고 많 이 변했을 내 아이들이 내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걸 반길 것인가, 우리의 재결합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이 걱정스러웠습니다. 난 아내 베아트리체에 대해서도 생각 했습니다. 내가 아내에게 아무 이상이 없을까? 아내가 아직도 날 사랑할까? 그녀가 이 긴 세월 동안 내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가를 그녀는 조 금이라도 알기나 할까?"
하노이 공항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은 안개에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한 가 지만은 제랄드 대위에게 선명하게 보였다. 햇빛에 반짝이며 첫 번째 석방 포로 들을 싣고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C- 141 공군 수송기 꼬리에 그려진 미국 성조기였다. 수송기 옆에 서 있는 수십 명의 미군 병사들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그들이 두 줄로 늘어서자 베트남 병사가 그들의 이름과 계급과 소속을 말했다.
"제랄드 L. 커피. 미 해군 중령." 포로로 갇혀 있는 동안 그는 두 계급 승진을 했던 것이다. 제랄드 중령은 앞으로 걸어가면서 빳빳하게 다린 파란색 공군 제복을 입은 미국 대령을 쳐다보았다.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보는 미군 군복이었다. 제랄드 중령은 대령에게 짧게 경례를 올렸다.
"중령 제랄드 L. 커피, 귀대를 보고합니다."
대령은 두 손을 내밀어 제랄드 중령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돌아온 걸 환영하네. 제랄드 중령."
탑승이 끝나자마자 조종사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비행기를 활주로 끝으로 몰고 갔다. 마지막으로 엔진 점검이 끝난 뒤 마침내 비행기는 활주로를 향해 내 달렸다. 비행기가 이륙 하자 조종사의 목소리가 기내에 울려퍼졌다. 그것은 강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신사 여러분, 탑승을 축하합니다. 우리는 이제 막 북부 베트남을 떠났습니 다." 그제야 포로들은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필리핀에 있는 클라크 공군 기지에 도착 했다. 군중들이 깃발을 흔들며 그들을 환영했다. 이 시간 미국인 전체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그들의 귀환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 자신은 알 턱이 없었다.
그들이 집으로 전화를 걸 수 있도록 특별 전화기가 설치되었다. 아내 베아트 리체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플로리다의 샌포드로 전화기를 걸기 위해 기다 리는 몇 분 동안 제랄드 중령은 자꾸만 입술이 탔다. 마침내 전화가 걸렸다.
"여보, 나야. 믿을 수 있겠어?"
아내가 대답했다.
"그럼요, 여보. 우리 모두 당신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 켜봤어요. 미국인 전체가 당신을 봤을 거예요. 당신 정말 멋져 보였어요."
"난 잘 모르겠어. 난 많이 말랐어. 하지만 병이 든 건 아니오. 다만 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군."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제랄드는 아내와 아이들과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그 주 일요일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미사에 참석했다. 교구 신부의 환영 인사를 들은 뒤 제랄드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이 긍정주의자의 계 명에 대해 잘 요약해 준다고 난 생각한다.
"그 세월 동안 내 생존의 열쇠는 믿음이었습니다. 내 최선을 다해 의무를 마 치고 언젠가는 영광스럽게 집으로 돌아간다는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를 포함해 내 동료들에 대한 믿음, 때로는 절망에 차서 내가 의지하고 동시에 내게 의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 내 조국에 대한 믿음, 내 조국의 헌법에 대한 믿음, 우리의 국가적 목표에 대한 믿음. 그리고 물론 신에 대한 믿음이 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끝없는 여 행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여행길을 걸으면서 모든 모퉁이마다에서 배우고 성 장해야만 합니다. 때로는 장애물에 걸려 비틀거리지만, 항상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향해 걸어나가야 합니다."
데이빗 맥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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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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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4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 제5장 장년시절
수도의 혼미
크라수스의 죽음을 알게 된 원로원 의원들은 설욕전을 강구하기보다는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한 모퉁이가 무너져버린 '삼두정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더 관심을 쏟았다. 크라수스가 재능이 있어서 '삼두'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크라수스가 있기 때문에 '삼두'체제가 성립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남은 '이두'가 앞으로도 동맹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카이사르의 존재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원로원 주도의 과두정이야말로 로마가 계속 지켜야 할 정치제제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원로원파는 크라수스가 죽은 지금이야말로 폼페이우스를 카이사르한테서 떼어내어 자기네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폼페이우스도 '삼두정치'로 가장 이익을 본 것은 카이사르이고, 자기는 그것을 너무 많이 도와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카이사르와는 장인과 사위의 인연을 맺었지만, 그 아내가 죽은 지금은 그 인연도 없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을 당시에는 진심으로 슬퍼했으니까, 카이사르와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지만,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폼페이우스의 정치 이념이 원로원파와 가까웠던 것은 아니지만, 카이사르처럼 원로원 주도의 기존 정치체제는 이제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확신까지는 갖고 있지 않았다. 폼페이우스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인간(호모 폴리티쿠스)은 아니다. '삼두정치'도 그가 말을 꺼내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카이사르가 먼저 생각했고, 기원전 60년 당시에는 원로원에 여러 가지로 망신다하는 일이 많았던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생각에 편승했을 뿐이다. 폼페이우스에게는 크라수스가 죽은 뒤에도 실력자 체제를 계속 유지해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아직 53세인데도, 해적을 소탕할 당시의 그 과단성은 어디로 사라졌나 싶을 만큼 우유부단해진 지 오래였다. 원로원파의 유혹에도 그는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아직도 로마 정계에서 으뜸이다. 원로원파는 그 점을 고려하여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제일가는 실력자의 불투명한 태도는 수도로마의 질서를 혼란시키는 원인이 된 원외단의 폭력사태를 방치하는 결과를 낳았다. '민중파'를 외치는 클로디우스 일파와 '원로원파'를 내세우는 밀로 일파의 싸움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기원전 53년 여름에 실시되어야 할 이듬해 집정관 선거도 계속 연기되었다. 집정관을 선출하기 위한 민회가 폭력으로 얼룩지는 바람에 회의조차 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집정관 선출을 위한 민회는 결국 이듬해로 연기되었지만, 그래도 결정되지 않아서 진통을 겪다가, 기원전 52년도 집정관은 폼페이수스 한 사람으로한다는 원로원파와 카이사르의 타협으로 겨우 해결을 보았다. 폼페이우스의 관심을 사고 싶어하는 원로원파와 수도의 정세가 안정되어야만 갈리아에서 마음놓고 활동할 수 있는 카이사르의 이해가 일치한 것이다. 그러나 원로원파는 과두정을 지키고 싶었다. 술라의 독재관 시대는 독재를 허락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악몽이다. 독재관(딕타토르)에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이라고 부르지 않고 '단독 집정관'이라는 명칭을 신설하여, 두 명을 뽑는 것이 상례인 집정관을 한 명만 뽑기로 한 이 이례적인 결정을 얼버무렸다. 이렇게 얼버무려서라도 일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클로디우스가 밀로 일파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밀을 싼 값으로 배급하던 것을 아예 무료 배급으로 바꾸어 서민층에게 인기가 높았던 클로이우스의 뜻밖의 죽음에 서민층의 분노는 폭발했고, 포로 로마노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가한 서민들은 폭동 일보 직전의 상황에 있었다.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그리고 원로원파도 카이사르도 인정했듯이, 서민층을 납득시킬 수 있는 인물은 이 서점에서 폼페이우스밖에 없었다.
클로디우스를 잃은 서민층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같은 원로원파라는 인연 때문에 밀로의 변호를 맡은 키케로가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실패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죽일 생각은 없이 우연히 만나서 싸움이 붙었고, 클로디우스의 죽음은 그 우발적인 싸움의 결과일 뿐이라는 키케로의 변호를 배심원조차 납득하지 않았던 것이다. 밀로는 마르세유로 자진 망명하여 사형을 면했다. 크라수스의 죽음, 클로디우스의 죽음, 폼페이우스의 단독 집정관 취임 등. 당시에 신문이 있었다면 제 1면을 장식할 기삿거리가 푸짐했던 것이 기원전 53년과 기원관 52년의 로마였지만, 카이사르는 거기에 신경쓸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갈리아 중앙부에 불온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겨울철 숙영지를 지키고 있는 군단장들한테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의 집정관 취임을 확인한 뒤에야 카이사르는 드디어 알프스를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정세가 안정되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이탈리아 북부에 꼼짝없이 붙잡혀 있느라 갈리아로는 늦게 떠날 수밖에 없었던 카이사르에게는, 늦은 출발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다지 불리하지도 않았다. 불온한 움직임이 표면에 드러나고, 봉기의 목적과 참가한 부족들과 통솔자가 명확해졌을 때 가는 편이 전략을 세우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늦었다 해도, 알프스는 아직 눈에 파묻혀 있는 계절이다. 봉기하는 쪽도 빨랐지만, 카이사르도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갈리아 전쟁 7년째 - 기원전 52년. 카이사르 48세
기원전 52년의 봉기는 역사상 갈리아 민족의 처음으로 대동단결하여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치밀한 준비 끝에 모든 부족이 총궐기하여 카이사르에게 저항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단결심이 희박한 갈리아인인 만큼 실상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것이 눈동이처럼 커졌을 뿐이다. 따라서 갈리아 중앙부의 두 군데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로마군 군단장들도 뒤늦게야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사자들이 정확한 계획도 없이 궐기했으니까 남이 그것을 예측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움직이는 것이 늦었기 때문에 오히려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진 단계에서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계기를 만든 것은 지난해 족장 아코가 극형에 처해진 일로 원한에 사무쳐 있던 카르누테스족이었다. 그들은 겨울 동안 주변의 부족장들과 접촉하여, 내일은 당신들도 아코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라고 부추겼다. 이것이 부족장들의 가슴속에 숨어 있던 불안을 구체화시켰다. 궐기하려면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는 설득에는 부족장들을 납득시키는 몇몇요인도 갖추어져 있었다. 로마군이 이기는 것은 카이사르가 지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지금 알프스 너머의 이탈리아 북부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갈리아에서 월동하고 있는 10개 군단과 카이사르의 합류를 저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승리할 가망도 충분하다는 것이 첫 번째 요인이었다. 두 번째는 수도 로마의 정세가 불안정하여, 카이사르가 쉽사리 갈리아로 돌아올 수는 없으리라는 것. 세 번째는 카이사르에게 밀려 라인 강 너머로 쫓겨난 게르만인들이 갈리아로 쳐들어오지 못하는 지금이야말로 카이사르에게 대항하여 일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
갈리아 중앙부가 지금까지 줄곧 안정을 유지한 것은 게르만인의 침입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게르만인의 침입을 막은 것은 카이사르지만, 게르만인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이 고개를 쳐든 것이다. 갈리아인이 자유와 독립을 갈구한 것뿐이라면, 카이사르가 갈리아 북동부 지방과 브리타니아 원정에 전념하고 있던 2, 3년 전에 궐기해도 좋았을 것이다. 따라서 카르누테스족이 단순한 선동만으로 궐기를 재촉했다면, 다른 부족들도 계속 같은 보조를 취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카르누테스족은 다른 부족들에게 서약을 시킨 것만으로는 안심하지 못하고,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었다. 카르누테스족의 본거지는 케나붐(오늘날의 오를레앙)이다. 카이사르는 아무래도 갈리아에서의 통상권을 넘겨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고 있었던 모양인데, 케나붐에는 카이사르의 교역 장려책에 따라 사업차 찾아온 로마 시민들이 많이 채류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카이사르의 명령을 받고 군량을 구입하러 온 사람도 있었다. 카르누테스족은 이 민간인들을 습격하여 죽였다. 로마인, 그중에서도 특히 카이사르는 이런 짓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결행한 것이다. 이 사건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 마을에서 저마을로 전해지는 갈리아의 정보 전달법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갈리아 전역에 알려졌다. 오를레앙에서 해뜰녘에 일어난 이 사건이 밤 9시가 되기 전에 240킬로미터나 떨어진 아르베르니아(오늘날의 오베르뉴 지방)에 알려졌을 정도다.
베르킨게토릭스
아르베르니족은 산악지대를 사이에 두고 프로빈키아 속주와 접해 있는 '장발의 갈리아'에서는 가장 남쪽 지방에 사는 부족이다. 강력한 부족이지만, 지금까지는 카이사르에게 반항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된 것은 부족 내부의 친로마파와 반로마파의 대립에서 친로마파가 승리하여, 반로마파의 우두머리였던 인물을 공개 처형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부족장은 처형당한 자의 동생이었는데, 로마에 우호적인 이 인물 밑에서 아르베르니족은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형당한 인물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베르킨게토릭스. 오를레앙의 변고를 안 이 젊은이는 당장 광장으로 나가서, 지금이야말로 로마에 맞서 일어날 때라고 열번을 토했다. 부족장을 비롯한 친로마파는 이것을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부족장의 조카인 이 젊은이를 아르베느리족의 도읍인 게르고비아에서 추방해버렸다. 그러나 추방당한 뒤에도 베르킨게토릭스는 동지들을 모아 로마에 대항할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동지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감행하여 숙부인 친로마파 부족장을 추방하고, 그 자신이 아르베르니 족장 자리에 앉았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아르베르니 족장의 이름으로 갈리아의 모든 부족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에 대한 궐기를 촉구했다. 카르누테스족을 비롯한 봉기파가 우선 이 호소에 응했다. 그밖에 중부 갈리아의 많은 부족들도 호응해왔다. 주요 부족들 가운데 응하지 않은 것은 하이두이족뿐이었다.
아직 30대 중반인 베르킨게토릭스는 여기서 갈리아 민족에게는 보기 드문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궐기한 부족들의 총사령관에 추대된 그는 승부의 열쇠는 갈리아인의 대동간결에 있다고 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강권을 휘둘렀다. 첫째, 서약을 지킨다는 보증으로 인질을 제공하라고 각 부족에게 명령했다. 둘째, 반군에 제공해야 할 병력을 각 부족에게 할당하고, 신속하게 병력을 공출하라고 명령했다. 할당제는 무기 생산과 공출에도 적용되었다. 셋째, 베르킨게토릭스는 병력 중에서도 기병의 증강을 특별히 배려했다. 로마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에 대해 갈리아의 전통적 주력인 기병을 활용하여 대결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젊은 총사령관은 이런 일들을 설득보다는 엄벌주의로 실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약속을 늦게 지키거나 지키지 않은 부족에게는 불로 지지거나 귀를 잘라내거나 눈알을 도려내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전쟁에 패한 것도 아닌데 다른 부족에게 이처럼 가혹하게 대한 예는 갈리아에는 일찍이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젊은 아르베르니 족장이 보인 이 엄격함이 분열하기 쉬운 갈리아인을 통합시켰다.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들어가기 전에, 카이사르는 여기까지 정보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군단과 합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세곳에 나뉘어 월동하고 있는 군단을 모두 남쪽의 프로빈키아 속주, 즉 남프랑스에 집결시킬 것인가. 하지만 이것은 중부 갈리아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길에 베르킨게토릭스와 그 군대에 습격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가 직접 군단의 겨울철 숙영지로 갈 것인가. 하지만 카이사르는 급히 편성한 1개 군단밖에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가까웠다. 이런 상태로 반로마의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한 중부 갈리아로 들어가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예년처럼 토리노에서 수사 골짜기를 거쳐 알프스를 넘은 다음 프로빈키아 속주의 동쪽 끝에 있는 론 강에 도착한 뒤에도 카이사르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에게 유리한 조건은 봉기한 것이 갈리아 중부뿐이고, 센 강 이북의 갈리아 북동부나 가론 강 이남의 아퀴타니아 지방은 봉기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이때 카이사르의 머릿속은 어떻게 군단과 합류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터인데, 알프스를 넘으면서 틈틈이 (유추론)(데아날로기아)이라는 제목의 문장복본 비슷한 책을 썼다. 첫머리에 소개한 카이사르의 문장은 바로 이 저서에서 나온 것이다. 원고를 탈고하자마자 로마로 보내 필사본으로 간행한 이 책은 정치 이념에서는 카이사르와 대결하는 월로원파에 속해 있지만 명석한 문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카이사르의 동지였던 키케로에게 바쳐졌다.
이런 일로 여가를 선용하는 동안, 적이 그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베르킨게토릭스의 지휘를 받게 된 중부 갈리아인들이 로마의 프로빈키아 속주를 공격해온 것이다. 프로빈키아를 공격함으로써 카이사르가 그곳의 방위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어 카이사르와 군단의 합류를 늦추는 것이 베르킨게토릭스의 의도였다. 확실히 이 전략은 옳았다. 하지만 상대는 카이사르였다. 적이 프로빈키아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받은 카이사르는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을 모두 버리고 나르본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거기서 당장 방어체제를 확립했다. 속주 안에 있는 각 부족의 전력을 통합하여 수비대를 편성하고, 거기에 키살피나 속주(이탈리아 북부)에서 새로 편성하여 데려온 1개 군단을 배치한 다음, 수비에 전념하기는커녕 오히려 공세로 나왔다. 베르킨게토릭스한테서 병력을 나누어 받아 프로빈키아 공격을 전담하고 있던 룩테리우스는 로마군의 신속한 대응에 깜짝 놀랐다. 이에 겁먹은 룩테리우스는 프러빈키아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휘하 병사들과 함께 북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적이 등을 돌린 것을 알자마자 카이사르는 다음 행동으로 옮아갔다. 기병대만 이끌고 눈덮인 산맥을 넘는 모험을 결행했다. 총사령과이 몸소 반격에 나선 것이다. 프랑스 중부와 남부 사이에는 마치 프로빈키아를 북풍에서 지켜주는 듯한 느낌으로 산들이 굽이치고 있다. 아직 봄도 되기 전에 이 산들을 넘는 것은 상인들조차도 하지 않는 모험이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한 길 높이로 쌓인 눈을 헤치고 길을 뚫으면서 어렵게 행군했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아르베르니족은 서쪽에서의 공격이 실패한 것을 안 직후에 동쪽에도 설마했던 적이 출현했기 때문에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산을 넘은 기병대에게 카이사르는 되도록 야단스럽게 주변을 약탈하고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아르베르니족은 갈리아 중부에서 월동중인 로마 군단을 공격하려 하고 있던 베르킨게토릭스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냉정한 베르킨게토릭스도 동족의 애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로마군 숙영지 공격을 일단 중지하고,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정세는 카이사르가 예측한 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갈리아 전쟁기)가 지리에 대한 기술로 시작되는 것이 상징하듯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머릿속에는 갈리아의 지형이 당시로서는 최대한 정확하게 입력되어 있었던 것 같다. 카이사르는 중부 갈리아라는 '장기판'앞에서 상대의 수를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에 갖고 있는 힘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반대로 갈리아인 중에서는 보기 드문 지도자였던 베르킨게토릭스는 많은 점에서 뛰어난 이눌이었지만, 장기판만은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았던 듯싶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다음 수를 그는 읽지 못했다. 물론 카이사르는 중부에서 남쪽의 아르베르니족 땅으로 가고 있는 갈리아군을 기다리지 않았다. 직접 적지로 뛰어들어 교란작전을 벌이는 것은 이틀 만에 그만두고, 뒷일은 막료인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 맡겼다. 다만 이 젊은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는 진영에서 사흘 거리가 넘는 곳까지 약탈하러 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적의 본대가 다가오면 그것도 중지하고 뒤따라오라고 명령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병력을 이끌고 장기판의 서쪽에서남하하면, 카이사르가 소수의 기병만 이끌고 장기판의 동쪽으로 북상하는 느낌이다. 같은 거리를 가더라도 홀가분한 카이사르가 빠른 것은 당연하다. 그는 재빨리 비엔으로 들어갔다. 비엔은 리옹에서 남쪽으로 30킬로미터쯤 내려간 곳에 있는 론 강 연변의 도시인데, 토리노에서 출발하여 알프스를 넘는 교통로에서는 갈리아 쪽의 관문 같은 존재다. 토리노에서는 300킬로미터 거리다. 프로빈키아 속주의 북쪽 끝에 있는 이 도시에서 카이사르는 작년 겨울에 고용해두라고 명령한 게르만 기병 400기를 인수했다. 이리하여 그는 다음 행동으로 옮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르베르니족과 함께 갈리아 중부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인 하이두이족은 아직 베르킨게토릭스의 호소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낙관적으로 생각지 않았다. 비엔에서 로마의 2개 군단이 월동하고 있는 링고네스족의 땅으로 가려면 하이두이족의 땅을 지나가야 한다. 우호부족의 땅을 지나갈 때에도 그는 기병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할 만큼 신중했다. 이것은 신중한 방책인 동시에 적을 앞지르려면 신속하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카이사르에게는 필수불가결한 방책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카이사르는 링고네스족의 땅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2개 군단과 합류할 수 있었다. 그는 당장 라인 강 서쪽 연안의 트레베리족의 땅에서 월동하고 있는 2개 군단에 전령을 보내, 아게딩쿰(오늘날의 상스)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그와 동시에 그 자신도 방금 합류한 2개 군단을 이끌고, 6개 군단이 월동하고 있는 상스로 갔다. 카이사르와 로마 군단의 합류가 끝난 뒤에야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의 10개 군단이 모두 카이사르의 지휘하에 들어간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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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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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遂自薦(모수자천)
毛(털 모) 遂(이를 수) 自(스스로 자) 薦(천거할 천)
사기(史記) 평원군우경(平原君虞卿)열전의 이야기다.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은 자신의 집에 수많은 식객들을 두고 있었다. 조나라 효왕(孝王) 9년, 기원전 257년,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단(邯鄲)이 포위되었다. 이에 평원군은 초(楚)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사신으로 가게 되자, 식객중에서 자신을 수행할 사람 20명을 뽑고자 했다. 몇번이고 고르고 골랐지만 끝내 한 사람을 채우지 못했다. 이때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자신를 추천하고 나섰다. 평원군은 유능한 사람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송곳처럼 금방 드러나게 되는 법인데, 당신은 삼년 동안이나 내 집에 있으면서도 무슨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소. 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수는 제가 지금 초나라 수행을 원하는 것은, 저를 자루 안에 넣어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군께서 저를 좀더 일찍 자루에 넣어주셨더라면, 저의 재능도 일찍 드러났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毛遂自薦 이란 자신의 재능을 알리며 자기가 자신을 추천함 을 비유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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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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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3편
3. 시험
그리하여 배들은 부두 안으로 들어오고 선객들은 상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스콤 씨는 선장에게 말하기를, 백인들이 나에 대하여 극도로 분노하고 있어 내 생명이 위태하니, 내 가족과 나는 해가 진 후에 상륙하는 것이 좋을 것이며, 그러면 그때 부두 감독관 타텀 씨가 집까지 호송해 줄 거라고 했다. 선장은 그 소식을 내게 알려 주었고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했다. 그러나 그런 지 반시간도 못되어서 로턴 씨가 선장한테 오더니 말하기를, 간디 씨가 반대만 안한다면 내가 그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기선회사 법률고문으로서 말합니다만, 당신은 에스콤 씨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실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라고 했다.그러고 나서 그는 나한테로 와서 대략 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 당신이 만일 겁만 내지 않는다면 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부인과 아이들은 차로 루스톰지댁으로 보내고, 당신과 나는 걸어서 그리로 갑시다. 나는 당신이 도둑이나 되는 양 밤에 시내로 들어간다는 으견엔 도무지 찬성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가 당신을 해할 염려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평온합니다. 백인들은 다 헤어졌습니다. 어쨌든 나는 당신이 시내에 몰래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주저없이 동의했다. 내 아내와 아이들은 차로 무사히 루스톰지 씨 댁으로 갔다. 선장의 허락을 얻어 나는 로턴 씨와 함께 상륙했다. 루스톰지 씨네 집은 부두에서 약 2마일이었다. 육지로 올라서자 젊은이들 몇이 나를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간디, 간디하며 5,6명 쯤 되는 남자들도 달려와 합세하여 떠들었다. 로턴 씨는 군중이 몰려들자 겁이 나서 인력거를 불렀다. 나는 평생 인력거를 탄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첫경험이었다. 그러나 그 젊은이들이 나를 거기 오르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인력거꾼 보고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을 하니 인력거꾼은 그만 도망가고 말았다. 우리가 걸어가는 동안 군중은 점점 불어서 마침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어졌다. 그들은 우선 로턴 씨를 붙잡아 나와 따로 매어 놓았다. 그러고는 내게 돌, 벽돌, 썩은 계란을 던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 터번을 잡아 벗기자, 다른 자들은 나를 때리고 발로 차고 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이 아찔해져서 어떤 집 앞 울짱을 붙잡고 숨을 돌리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치고 받고 때려 눕혔다. 이때 나를 아는 경찰서장 부인이 마침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 용감한 부인은 달려와서, 해가 내리 쪼이지도 않는데, 양산을 펴 들고 군중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이렇게 한 것이 폭도들의 폭행을 막아 주었다. 알렉산더 부인을 다치지 않고 나를 때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에 한 인도 청년이 이 현장을 목격하고 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서장 알렉산더 씨는 경찰차 한 대를 보내어 나를 호위하여 목적지까지 안전히 호송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시간에 맞춰 왔다. 경찰서는 우리가 가는 길 중간에 있었으므로 거기 도착하자 서장은 나보고 서안에 피신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고맙지만 사절한다고 했다. 나는 말하기를, 그들은 자기네가 잘못한 줄 알기만 하면 틀림없이 곧 평온해질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공명정대한 지각이 있는 사람들임을 믿습니다. 고 했다. 경찰의 호송을 받아나는 그 이상 더 해를 입지 않고 루스톰지 씨 집에 도착하였다. 나는 온몸에 멍이 들었다. 그러나 상처난 곳은 다만 한 곳 뿐이었다. 그배의 의사 다디바르조르 씨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가능한 한의 치료를 해주었다.
안은 평온했지만 밖에는 백인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차차 밤은 되어 가는데, 군중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간디를 내놓아라! 하고 외쳤다. 눈치 빠른 서장은 벌써 거기에 와서 군중을 제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위협이 아니라 익살로써 했다. 그러나 그는 걱정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는 내게 이런 의미의 말을 보내 왔다. 당신이 만일 당신 친구의 집과 가산을 건지려거든, 그리고 또 당신 가족을 구하려거든 내가 하라는 대로 변장을 하고 이 집에서 빠져 나가시오. 그렇게 해서 나는 같은 한 날에 두 개의 서로 반대되는 처지에 놓였었다. 생명에 대한 위험이 가상만이 아닐 때에 로턴 씨는 내게, 버젓이 나가라고 충고를 해주어서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위험이 정말 확실할 때에는 다른 친구가 그것과는 정반대의 충고를 해주어서 나는 그것도 받아들였다. 내가 정말 내 생명이 위태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랬는지 또는 내가 정말 내 친구의 생명과 재산이나 또는 아내와 어린것들의 생명을 위험속에 넣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누가 능히 알 수 있겠는가? 또 내가 첫번 경우에 군중과 용감히 직면했을 때나, 또 시키는 대로 변장을 하고 도망을 갔을 때나 다 잘했다고 어느 누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 옳았느니 글렀느니 시비를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가능하면 거기서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하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또 우리가 사람을 그 외면의 행동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충분한 자료에 근거하지 않는 한, 그것은 한낱 믿을 수 없는 추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렇고, 도망갈 준비를 하느라고 나는 상처마저 잊었다. 서장이 가르쳐 준 대로 나는 인도인 순경의 제복을 입고, 머리에는 마드라스 목도리를 쓰고는 그 한 끝을 빙빙 둘러 감아 마치 헬멧같이 보이게 하였다. 형사 둘이 나와 동행을 했는데, 한 사람은 인도인 장사꾼같이 변장을 하고 얼굴에 칠을 하여 인도인 같이 보이게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 변장했는지 지금은 잊었다. 뒷길로 빠져 옆집 상점에 가서 창고 안에 쌓인 부대 사이를 통해 그 상점 문을 나와 군중 사이를 뚫고 골목 끝에 나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은 자동차에까지 갔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금 전에 알렉산더 씨가 피난처로 제공해 주겠다던 그 경찰서까지 갔다. 나는 서장과 형사들에게 감사를 드렸다. 내가 도망하고 있는 동안, 알렉산더 씨는 군중을 웃기며 붙들어 두느라고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늙은 간디 목을 졸라라
시금털털한 사과나무 가지에.
내가 무사히 경찰서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들은 다음 그는 그 소식을 이렇게 군중에게 외쳤다. 자, 여러분의 제물은 이미 옆집 상점을 통해 솜씨있게 도망갔소. 이젠 댁으로 돌아가면 어떻소. 더러는 화를 냈고, 더러는 허허 웃었고, 더러는 그 소리를 믿지 않으려 했다. 정말 그러시면. 하고 서장은 말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대표를 한두 명 뽑으시오. 그러면 내가 그들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들이만일 간디를 찾아낸다면 나는 그를 여러분들께 기꺼이 넘겨 드리지요. 그러나 만일 못 찾아낸다면 해산하여야 하오. 나는 분명히 여러분들이 루스톰지 씨 집을 파괴하거나, 간디 부인과 아이들을 해치자는 것이 아닌 줄로 확신하오. 군중들은 대표를 보내어 그 집을 뒤졌다. 그들이 곧 실망의 소식을 가지고돌아오자, 군중은 마침내 흩어졌다. 대개는 서장의 재치있는 사건 처리에 탄복을 하기도 하고 또 몇몇은 투덜거렸다. 당시 식민지 담당 국무장관이었던 고 체임벌린 씨는 전보를 보내 나의 가해자를 기소하도록 하라고 나탈 정부에 지시하였다. 에스콤 씨는 사람을 시켜 나를 부른 다음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며 말했다. 믿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이 입은 지극히 작은 상처 하나 때문에도 마음이 평안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물론 로턴 씨의 조언을 들어 가장 흉악한 것에도 정면으로 대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만일 나의 제의를 좋게 받아들이셨더라면 이 불상사는 분명히 일어나지 않았으리라고 믿습니다. 범인을 확인만 해 주신다면 나는 즉시로 그들을 체포. 기소하겠습니다. 체임벌린 씨도 내가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아무도 고소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둘 확인하려면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들을 벌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럴 뿐 아니라 나는 가해자를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은 내가 인도에서 나탈에 있는 백인들에 대해 과장해서 말을 했고, 또 그들을 중상한 것으로 믿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보도를 믿었다면 분개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지도자들과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당신이 잘못하신 것입니다. 당신들은 민중을 올바르게 지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도 로이터를 그대로 믿고 내가 함부로 과장을 했으리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아무도 책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그들은 자기들이 한 일을 뉘우칠 줄로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만, 그것을 글로 써 주시기 바랍니다. 에스콤 씨는 말했다. 왜그런고 하니, 그 뜻을 내가 체임벌린 씨에게 전보를 쳐 보내야 하겠기에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이라도 급히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최후의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로턴 씨나 그밖의 친구분들과 의논을 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가해자에게 벌을 주는 권리를 포기하신다면, 평온을 회복하는데 있어서 나를 많이 도와 주시는 게 됩니다. 당신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고맙습니다. 나는 말했다. 나는 누구와도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당신한테 오기 전에 이미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내 가해자를 고소하지 말자는 것은 내 확신합니다. 그리고 내 결정을 지금 곧 글로 써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필요한 성명서를 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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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골수에 스며든 손 기운 - 이주홍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아름다운 여자도 알기 전에 맨 먼저 내 어머니가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보다 유난히 가난했던 어머니는 한 번도 남들처럼 고운 옷 입으신 모습을 보여 주시지 않으셨고, 보름이나 한 달 만에나 끓일까말까 한 고깃국이었음에도 고기를 아버지와 내게 사양하시고 혼자서는 언제나 뼈다귀만 쫄쫄 소리내어 빠시는 것으로 만족해 하셨다.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들처럼 착한 사람이 되려면 공부를 착실히 해야 한다는 따위의 재촉은 하지 않으셨다. 내가 책상머리에 앉아 있으면 공부를 하는가 어쩌는가 하여 미소 지은 눈으로 내 하는 양을 지켜보고 계실 뿐이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선 나를 자랑하는 일이 없다가 내가 보이지 않는 데에서만 이웃 어머니들에게 내 장점을 자랑하시던 어머니였다. 어릴 적부터 양친을 여윈 아버지는 고아처럼 삼촌 밑에서 설움으로 지내 왔기 때문에 어머니 역시 같은 운명에 휩싸여 무진한 설움을 참아 내지 않으면 안되셨다. 아버지의 삼촌 곧 나의 종조부께서는 엄할 땐 엄해도 아낄 땐 아껴 주셨지만 숙모, 아버지의 숙모 곧 내 종조모만은 천하의 보기 드문 악녀였다. 어머니께서 옛날이야기를 들을 때 매구(마귀) 할망이 나오면 그 매구가 바로 종조모로 상상이 되었을 만큼 그녀는 못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가 거위를 겁내어 소스라쳐 옆으로 비켜나면 일부로 거위를 부채질해 나를 물게 해놓고 혼자서 웃으며 좋아하던 징그러운 여자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한 마디의 말씀도 없이 그 집에 가서 부엌일을 하고, 방아를 찧고, 빨래를 해주면서 천 날이 하루같이 말없이 시중을 들어 주었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깜깜해져서야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드릴 밥을 이고서 10리 길이나 되는 무서운 귀신바위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느 고대 소설의 불행한 여주인공보다도 더 가련했던 어머니! 그러나 그 어머니의 손에 잡혀 어두운 고갯길을 넘어지며 자빠지며 함께 걸어 다닌 나는 세상에서 둘도 없이 행복한 아이였다. 거위는 꽥꽥 소리를 지르며 나를 물어뜯어도 행복은 아주 나를 외면해 버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골수에까지 스며들던 어머니의 그 따스한 손 기운이 지금까지 내 팔목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지금은 평생을 괴롭히던 가난을 욕 주고, 부른 밥 편한 잠으로 모시고 싶어도 어머니는 이미 이 누리에 계시지 않는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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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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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에 저녁이 오듯이 - 홍윤숙
고독은 생명의 불이며 창조적 동력
흔히 사람들은 고독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혼자이기 때문이라든가 마음이 비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고독은 비어서도 혼자여서도 아니다. 인간의 내부에 타고 있는 생명의 불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여 살아 있기 때문이며 살아 있기에 겪어야 하는 갖가지 갈망, 곧 생명의 불 때문이었다. 고독은 다름 아닌 생명체의 본질이며 근원태다. 하여 생명의 불인 고독은 생명을 움직이는 힘, 동력이다. 인간의 생명을 타락 파멸도 시키고, 승화 발전도 시키는 불이다. 불이란 옳게 사용하면 약이 되고 잘못 사용하면 독이된다. 성냥 한 개비로 온 곳간을 불살라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고독은 노쇠와 구음이다. 하여 나이 먹은 사람은 자신의 노쇠와 죽음을 이기기 위해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고 보약으로 체력을 기르며 은행의 잔고를 불리느라 애쓴다. 인간이 태어나 결코 죽지 않는 존재라면 인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노쇠하고 죽기 때문에 그 고독을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싸우는 것이다. 결국 고독은 존재의 병, 죽음에의 병인 동시에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힘, 살아 있는 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애쓰는 힘, 곧 창조적 동력이다.
모든 창조적 작업은 바로 인간의 고독한 음지에서 싹트는 꽃이다. 지난 수십 년 나를 움직여온 힘도 바로 내 안의 결핍감과 고독감이었다. 그 신산한 고독의 불길이 나로 하여금 무슨 일엔가 열중하게 만들었고 열중하는 한 나는 내 안의 구멍 뚫린 결핍감을 메울 수 있었고 고독을 순화하고 다스릴 수 있었다. 순화하고 다스린다 함은 고독으로부터 도피하여 잊어버리는 일이 아니었다. 고독 속에 오히려 몸을 던져 친숙해지는 일이었다. 겸허하게 고독을 수용하고 고독과 화해하는 일이었다. 하여 나의 일은 바로 일차적으로 내가 안고 있는 숙명적인 병과 나아가 죽음이란 최대의 고독까지도 포함해서 고독과 친숙하고 그것을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거느리고 나가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같이 고독과 얼마간이라도 친숙해질 때 나의 삶은 오히려 밝고 평안해지며 이웃과 사물을 유심히 보게 되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따뜻한 눈길을 보내게 되던 것이다. 결국 고독의 참다운 인식은 모든 존재에 대하여 반항이 아니라 순명으로, 거부가 아니라 수용으로, 부정이 아니라 긍정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임을 알 것도 같았다.
결코 완성할 수도 정복할 수도 없는.
생텍쥐페리의 [바람과 모래와 별]가운데 사랑에 대하여 이같이 말한 글이 있다. "아마도 사랑이란 진정한 당신 자신의 모습으로 당신이 스스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여기 '사랑'을 고독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즉 '고독이란 나를 나 자신으로, 나의 본질, 나의 고유한 특성으로, 나의 원래의 진실함으로, 결국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생명의 불'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거론하고 이제 이 나이에 이르러 생각하니 사람의 한 생애란 고독에서 출발하여 허망으로 끝나는 한마당 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그 고독이나 허망함이 몇 살쯤 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목숨 있는 날까지 목덜미를 잡고 놓지 않는 일이다. 거울에 비친 물체의 모습처럼 자기 앞의 생을 거울에 비춰본다면 아마도 거기 자신의 생의 무게와 부피만한 고독과 허망이 떠오를 것이다. 생의 그림자는 고독이다. 그리고 그것을 진실로 깨닫는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노년에 이르러서이다. 하여 지금 나는 나이 먹어 더욱 무거워진 생의 고독 앞에 만신창이로 던져져 있다. 그 숱한 그리고 어두운 생의 그림자들, 고독의 벼랑, 그 중에도 위험한 벼랑은 나의 시다. 아니 머리맡의 저 백지다. 밤마다 부적처럼 잠자리를 지키는 무위의 백지. 한밤중 백지를 대하고 있으면 나는 평생 단 한 줄의 글도 써보지 못한 여자처럼 막막하고 아득해진다. 모든 생각과 말은 해체되어버리고 온갖 사물의 운동은 정지해버린다. 보이지 않는 압착기로 살 속의 물이란 물이 한 방울도 남김없이 짜여지고 어느덧 내가 한 장의 백지, 물기 없이 마른 백지가 되어버린다.
백지의 고독, 백지의 절망, 이러한 놀이가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인가. 수없이 반복되고 거듭해온 일이다. 그래도 나는 그 놀이에 열중하여 밤새는 줄을 몰랐었다. 절망감에 며칠씩 또는 몇 달씩 달아나 버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내 앞엔 더 큰 고독이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백지 앞에 돌아와 앉는다. 그리고 백지 속에 차라리 뛰어들어 고독과 씨름한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 싸우다 보면 어느덧 조금씩 고독은 다스려지고 평화를 회복하게 된다. 고독, 쓴다는 그 무형의 고독에 나를 던져 넣어 피하지 않고 한데 어울림으로써 오히려 작으나마 결핍에서 충만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소생하게 되던 것이다. 무언가를 쓴다는 일, 내게 있어 그 일은 참으로 거대한 고독이다. 결코 완성할 수도 정복할 수도 없는 절대고독의 아성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일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전에는 그 아성에 도전하여 대결할 수 있는 기력과 정열이 있었다. 그래서 호시탐탐 나를 괴롭히는 고독과 잠깐씩이나마 손잡고 화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나는 백기를 들고 그 앞에 앉아 있다. 이제 나는 고독과 친숙하여 그를 다스릴 여력이 없음을 느낀다. 다스리지 못하는 이상 그는 나의 적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 그는 나를 가차없이 강타하여 쓰러뜨릴 것이다. 밤마다 머리맡의 흰 백지가 그렇게 고독의 비수를 갈며 나를 저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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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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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포리스트 카터
빨간 여우 슬리크
할아버지가 다른 개들 앞에서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모드 할멈과 늙다리 링거를 오두막집으로 몰아넣은 것은 한겨울의 늦은 오후였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미 알고 계신 듯했다. 할머니의 검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것과 똑같은 사슴가죽 셔츠를 나에게 입혀주신 다음 한손은 할아버지 어깨에, 그리고 나머지 한손은 내 어깨에 올려놓으셨다. 왠지 어른이 다 된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번도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계속 두 분 뒤를 따라다녔다. 할머니가 비스킷과 고기가 든 주머니를 건네주면서 말씀하셨다. `오늘 밤새도록 베란다에 앉아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마, 아마 네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게야.` 밖으로 나가자 할아버지가 휘파람을 불어 개들을 불러모았다. 드디어 집을 나선 우리는 개울을 따라 나 있는 계곡길을 걸어올라갔다. 개들은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할아버지가 개를 기르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옥수수밭 때문이었다. 봄, 여름이 되면 할아버지는 모드와 링거에게 사슴이나 너구리, 산돼지, 까마귀 같은 짐승들이 옥수수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망보는 일을 맡겼다.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모드도 사람인 자신처럼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하기 때문에 여우사냥에는 아무 쓸모가 없지만, 청력과 시력은 아주 날카로워서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는 일이 있고, 또 그런 일을 맡기면 아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다. 개든 사람이든 간에 자기가 아무데도 쓸모없다고 느끼는 건 대단히 좋지 않다는 게 할아버지의 설명이셨다.
반면에 링거는 예전에는 뛰어난 사냥개였지만 지금은 너무 나이를 먹었다. 이제는 꼬리를 질질 끌고 다녀 볼꼴사나운데다가 옛날만큼 잘 보거나 듣지도 못했다. 할아버지가 링거를 모드와 짝지어준 것은, 링거가 모드를 도울 수 있게 하여 나이가 들어도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 일은 링거에게 뿌듯한 자신감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옥수수밭에서 일하는 계절이 되면 링거는 목을 한껏 치켜세운채 네 다리를 씩씩하게 내딛으면서 주위를 돌아다니곤 했다. 옥수수가 자라는 계절이 되면 할아버지는 모드와 링거를 계곡에 있는 헛간에 데려다놓았다. 헛간이 옥수수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 마리 개는 충성스럽도록 열심히 옥수수밭을 지켰다. 모드가 링거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다. 모드는 옥수수밭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이면 밭임자는 자기라는 듯이 컹컹거리며 달려가 그놈들을 쫓아냈다. 그러면 링거도 모드를 똑같이 따라 했다. 이렇게 옥수수밭 사이를 달려갈 때, 냄새를 맡지 못하는 모드는 너구리 따위를 못 보고 지나치고 마는 일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모드 뒤를 따라 달리는 링거는 그렇지 않았다. 눈과 귀가 좋지 않은 링거는 땅에다 코를 대고서 냄새를 맡아가면서 너구리를 밭에서 몰아냈다. 아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너구리가 저 멀리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악착같이 따라가곤 했다. 그렇게 기운을 쓰고 난 링거는 완전히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링거와 모드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개를 기르는 또 다른 이유는 여우몰이를 하는 즐거움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여우몰이는 보통 사냥과는 달랐다. 할아버지는 절대 개를 써서 짐승을 잡지 않으셨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짐승들이 어디서 먹이를 먹고 물을 마시는지, 습관은 어떻고 다니는 길은 어디인지, 심지어 사고방식과 성격은 어떤지까지도 알고 계셨다. 아무리 뛰어난 개라도 할아버지의 이런 지식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이를테면 붉은 여우는 개한테 쫓길 때면 원을 그리며 달리는 습성이 있다. 가운데에 있는 자신의 굴을 중심으로 대략 지름 1.5킬로미터 정도,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큰 원을 그리기도 한다. 이렇게 달아나면서도 여우는 계속 잔재주를 부린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고, 물을 건너거나 눈속임 발자국을 만들어놓기도 하고. 그래도 그 원을 포기하는 일은 절대 없다. 여우는 피곤해지기 시작하면 자기 굴로 모아질 때까지 원을 줄여간다. 결국에 가서 여우는 자기 굴에 몸을 숨기는데, 산사람들은 이걸 `굴에 들었다`고 한다. 달리면 달릴수록 붉은 여우의 몸은 더워졌다. 그럴 때면 개들이 자취를 쉽게 잡아낼 수 있을 만큼 강한 냄새가 나는 침이 입에서 뚝뚝 떨어지고, 그럴수록 개들이 짖는 소리도 커져간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여우의 침을 `뜨거운 자취`라고 불렀다. 반면에 회색 여우는 8자 모양을 그리면서 달아난다. 8자 가운데 선이 교차하는 바로 그곳에 회색 여우의 굴이 있다.
할아버지는 너구리가 꾀를 내는 것도 읽을 수 있었다. 너구리가 잔꾀를 부리는 걸 보면 할아버지는 즐겁게 웃으셨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맹세하지만 너구리도 종종 자신을 즐겁게 해준다는 말을 하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야생 칠면조들이 다니는 길도 잘 알고 있었고, 물가에서 벌집까지 날아가는 벌을 눈만으로 쫓아갈 수도 있었다. 또 사슴의 호기심 많은 성격을 이용해서 사람 가까이 오게 할 수도 있었으며, 깃털 하나 건드리지 않고 메추라기 무리 속을 살금살금 걸어다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필요한 만큼을 빼고는 절대로 동물들을 괴롭히지 않으셨다. 동물들도 이점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놀이들을 즐기긴 했지만 매달리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백인 산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할아버지만큼 참을성이 없었고 무모했다. 그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사냥감을 쫓으며 여기저기 쑤시고 다닐 때면 동물들은 모두 은신처로 숨어버렸다. 아마 그 사람들은 야생 칠면조 열두 마리를 보았을 때, 왜 열두 마리 모두 죽이면 안되는지 절대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할아버지를 고참 산사람으로 존경했다. 이것은 사거리 가게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 드러나는 눈의 표정이나 모자 끝에 손을 갖다내는 걸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의 사냥감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불평하면서도, 할아버지가 사시는 계곡과 숲으로 총을 들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주 머리를 흔들곤 하셨지만, 그렇다고 무슨 말을 하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저 사람들은 체로키의 이치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하셨다.
뒤에서 촐랑거리며 뛰어다니는 개들을 데리고, 나는 할아버지 등뒤에 바짝 붙어 걸음을 잽싸게 놀렸다. 신비스러울 만큼 흥분되는 시간이 계곡 속을 흐르고 있었다. 이제 날은 완전히 저물었다. 아직 살아 있는 해가 서서히 죽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은 저녁 노을의 붉은색에서 피처럼 거무칙칙한 빛으로 변해가며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져갔다. 저녁 바람조차도 귓가에서 가만가만 살랑거렸다. 흡사 드러내놓고 떠들어대서는 안되는 이야기를 갖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낮 동물들은 보금자리를 찾아들고 대신 밤 동물들이 먹이를 찾으로 나오는 시간이었다. 헛간이 있는 풀밭을 가로질러가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는 바람에 나도 할아버지의 다리에 머리를 부딪치고 멈추어섰다. 계곡 저 아래쪽에서 올빼미 한 마리가 우리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기껏해야 할아버지 키 높이 정도나 될까? 그 정도로 낮게 날아오던 올빼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야말로 숨소리나 날개짓 소리 한번 내지 않고, 곧바로 헛간 속으로 날아들어가 마치 유령처럼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외양간 올빼미란다. 밤이 되면 여자가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들릴 때가 자주 있지? 올빼미가 쥐 잡을 때 내는 소리란다.`
나는 그 올빼미가 쥐 잡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러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헛간 쪽에 서시게 한 다음 가만가만 걸어서, 하지만 잽싸게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서서히 어둠이 우리를 덮쳐눌렀다. 올라갈수록 양쪽 산이 좁혀져왔다. 이윽고 길이 Y자 모양으로 갈라지는 곳에 이르렀다. 할아버지는 왼쪽 길을 택하셨다. 여기서부터는 개천 오른쪽으로 난 좁다란 둑길을 제외하고는 길이 없었다. 양쪽 팔을 벌리면 산이 만져지기라도 할 것처럼 좁은 길이어서 할아버지는 이 길을 `칼길`이라 불렀다. 깎아지르듯이 뾰족하게 솟은 산은 위쪽으로 시커먼 나무 그림자들을 달고 있어서 마치 새의 깃털처럼 보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 몇개가 희미하게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산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산은 목이 쉰 것처럼 컬컬하면서도 기다랗게 이어지는 그 울음소리를 재빨리 삼켰다가는 몇번이고 도로 뱉어냈다. 그럴 때마다 그 소리는 점점 더 멀리 퍼져나갔다. 얼마나 많은 산과 계곡을 지나쳐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그 소리는 소리라기보다는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그렇게 사그라져갔다.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든 나는 종종걸음을 치며 할아버지 발꿈치에 바짝 따라붙었다. 개들이라도 내 뒤에 있어주면 좋으련만 그놈들은 하나같이 할아버지 앞에서 왔다갔다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서 여우몰이에 보내달라는듯이 코를 킁킁거리면서. 칼길은 꽤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콸콸거리며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냇물이 `하늘협곡`이라 불리는 곳을 가로지르면서내는 소리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둑길을 벗어나 위로 펼쳐진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할아버지는 개들을 풀어놓았다. 그냥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면서 `가라!`고 했을 뿐이지만, 개들은 낮게 컹컹거리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산속으로 흩어졌다. 할아버지는 어린애들이 좋아라고 산딸기 따러 가는 모습같다고 하셨다. 우리는 시내 위쪽 소나무숲 속에 앉았다. 그곳은 따뜻했다. 소나무 관목이 열을 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름이라면 졸참나무나 호두나무 그늘에 앉는 편이 나을 것이다. 소나무 밑에 앉으면 더 더울 테니 말이다.
시냇물에 비친 별들이 물결에 흔들리기도 하고 물살을 타고 부서지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이제 좀 있으면 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붉은 여우 슬리크의 자취를 찾아냈을 때 개들이 보내는 신호였다. 슬리크(교활하다는 뜻-옮긴이)는 할아버지가 그 여우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지금 슬리크의 영토 안에 앉아 있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가 슬리크를 알게 된 것은 대략 5년쯤 전이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여우 사냥꾼이라면 누구나 여우를 죽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한번도 여우를 죽인 적이 없었다. 여우몰이를 하는 이유는 개들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개들이 쫓아다니는 소리를 듣기만 하시다가 여우가 굴로 들어갔다 싶으면 개들을 도로 다 불러들였다. 말하자면 여우몰이는 개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놀이였다. 슬리크는 단조로운 생활이 지겨워지면 자진해서 오두막집과 밭 언저리까지 내려와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개들더러 자기를 쫓아오라고 부추기는 셈이었다. 그러면 흥분한 개들은 할아버지가 채 말릴 새도 없이 컹컹거리고 짖어대면서, 슬리크를 쫓아 계곡 위쪽으로 올라가곤 했다. 할아버지는 슬리크가 심술이 나고 쫓겨다니고 싶어하지 않을 때 슬리크앞에 나타나는 걸 즐기셨다. 그 여우는 굴속에 들어가고 싶어지면 개들을 따돌리려고 온갖 속임수를 다 썼다. 반대로 쫓기는 게 재미있을 때는 계속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장난을 치곤 했다. 할아버지는 가장 좋은 건 오두막집 주위를 어슬렁거려 할아버지를 골치 아프게 만든 벌을 받는다는 걸 슬리크가 알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약간 이지러진 달이 산 위로 올라왔다. 달빛은 소나무숲 속을 지나면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을 만들어내고, 시냇물 위로 빛을 쏟아부어 칼길 위로 은빛 돛단배 모양의 안개가 천천히 올라가도록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두 다리를 뻗었다. 나도 똑같이 흉내내며 내 책임으로 맡겨진 음식보따리를 내 옆으로 끌어당겨놓았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길고, 어딘지 텅 빈 것 같은 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가 낮은 소리로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리핏 놈이군. 그런데 개자식, 거짓말을 하고 있어. 뭘 찾아야 되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런데 참을성이 없는 거야. 그래서 사냥감 냄새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어. 잘 들어봐. 짖는 소리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리핏 자신도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 거야.`
정말 그랬다. 짖는 소리는 과연 그렇게 들렸다.
`거짓말을 하다니, 정말 개자식이에요.`
내가 말했다. 나와 할아버지는 근처에 할머니가 계시지 않을 때는 멋대로 욕을 하곤 했다. 금방 다른 개들이 리핏을 둘러싸고 나무라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럴때는 개들이 컹컹거리며 짖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산에서는 이런 개를 `허풍쟁이 개`라고 불렀다. 다시 주위는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얼마 안 있어 이번에는 굵다랗게 짖는 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길고도 멀리까지 가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는 흥분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진짜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다른 개들도 함께 짖어대기 시작했다.
`블루보이구나. 산에 들어오면 저놈 코가 제일 예민해지지. 바로 이어서 짖는 건 리틀레드이고. 저건 베쓰군.`
미친 듯이 짖는 소리가 새로 끼여들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리고 저건 늙다리 리핏이고. 결국 다 끝나고 나서 끼여드는군.`
이제 개들은 합창이라도 하듯이 큰소리로 짖어대면서 점점 멀어져갔다. 개들의 합창이 앞뒤로 계속 메아리를 치는 바람에 우리 주위는 온통 개들천지인 것처럼 느껴졌다. 소리는 한참 동안 그러고 나더니 사라졌다.
`클린치산 뒤편에 있나보다.`
귀를 쫑긋 세워보았지만 나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 뒤편 산 쪽에서 날아온 쏙독새의 울음소리가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처럼 하늘을 찢고 지나갔다.
`쉬이이이이...`
계곡 맞은편에 있던 부엉이가 그 소리에 대답했다.
`부...부...부엉엉엉엉엉...`
할아버지가 낮은 소리로 웃으셨다.
`부엉이는 계곡에 살고 쏙독새는 산등성이에 사는데, 때때로 쏙독새는 물가로 내려와 사냥을 하는 게 더 쉽겠다고 생각하지. 부엉이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고.`
시냇물에서 물고기 한마리가 물방울을 튀기면서 펄쩍 뛰어올랐다. 걱정이 된 나는 작은 소리로 할아버지에게 속삭였다.
`할아버지, 개들이 길을 잃은 건 아닐까요?`
`아니, 그렇지 않다. 좀 있으면 개 짖는 소리를 듣게 될 거야. 클린치산 저편으로 나와서 저기 산등성이를 돌아 우리 있는 곳으로 올 테니 걱정 말아라.`
정말 할아버지 말씀대로였다. 처음에는 멀리서 어렴풋하게 들릴 듯 말듯하던 개짖는 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커져갔다. 멍멍거리고 컹컹거리는 그 소리들은 우리 앞의 산등성이를 따라 보이지 않는 선을 그리면서 꽤 오랫동안 들려왔다. 그러더니 저 아래쪽 어딘가에서 계곡을 건넜는지, 짖는 소리는 다시 우리 뒤쪽의 산등성이를 돌아서 클린치산 쪽에서 들려왔다.
`슬리크 놈이 원을 좁혀가나보다. 이번에 시내를 건너고 나면 슬리크 놈이 개들을 끌고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일 게야.`
할아버지 말이 맞았다. 개들이 시냇물 건너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앉은 자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짖는 소리를 들은 할아버지는 윗몸을 똑바로 일으켜세우시더니 내 팔을 잡았다.
`봐! 저놈이야.`
할아버지가 속삭였다. 시내 둑 위에 있는 버드나무 사이로 한 마리 여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슬리크였다! 여우는 혀를 축 늘어뜨리고 더부룩한 꼬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채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그러더니 뾰족한 귀를 쫑긋 세운 채 마치 행진을 하는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도 하고, 덤불이 나타나면 빙 돌아서 가기도 했다. 또 걸음을 멈추고 앞다리를 들어올려 날름날름 핥기도 했다. 그렇게 속임수를 쓰고 난 슬리크는 개짖는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며 다시 종종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 발 아래쪽 시내에는 바위들이 물 위로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그중 대여섯 개는 징검다리를 이루며 시냇물 한가운데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바위들 있는 곳에 왔을 때 슬리크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개들하고의 거리를 재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우리에게 등을 보인 채 시냇물을 바라보는 자세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달빛을 받아 털빛이 붉게 반사되었다. 개 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내 팔을 꽉 붙들었다.
`이제부터 잘 봐!`
슬리크는 시냇가 둔덕에서 첫번째 바위 위로 폴짝 뛰었다. 그곳에 잠깐 서 있는가 했더니 갑자기 살랑살랑 춤추는 듯한 몸짓을 했다. 두번째 바위위로 폴짝 건너간 여우는 다시 한번 춤을 추었고, 그 다음 바위에서도, 또 그 다음 바위에서도 결국 여우는 시냇물 한가운데에 있는 마지막 바위위로 올라섰다. 여우는 다시 바위 하나하나씩을 되짚어 물가에서 가장 가까운 바위 위로 돌아왔다. 그곳에 가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슬리크는 마침내 물속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찰박거리며 헤엄치는 여우의 모습은 순식간에 상류 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최대한 치밀하게 시간을 잰 것이 틀림없었다. 그놈이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개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더라도 말이다.
블루보이가 코를 땅바닥에 대고 제일 앞서 왔다. 리핏이 그와 한덩어리를 이루면서 뒤를 따랐고, 그 다음은 베쓰와 리틀레드가 또 다른 짝을 이루며 바싹 따라붙었다. 때때로 그중 한 놈이 코를 하늘로 치켜들고 `우우우...우우...!` 하고 울어대는 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흥분해서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마련이다. 개들이 징검다리 바위들 있는 곳까지 왔다. 블루보이는 조금도 주저하지않고 바위에서 바위로 건너뛰었다. 다른 개들도 모두 블루보이 뒤를 바싹 쫓았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마지막 바위에 이르렀을 때 블루보이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리핏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리핏은 전혀 의심할 건더기가 없다는 듯이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더니 반대편 개울가로 헤엄쳐가기 시작했다. 베쓰도 리핏을 따라 물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치기 시작했다. 블루보이는 코를 치켜들고 공중에 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리틀레드도 블루보이와 함께 바위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윽고 두 마리는 바위를 되짚어 우리가 있는 쪽 시냇가로 올라섰다. 이번에도 역시 블루보이가 앞장섰다. 드디어 슬리크의 자취를 찾아낸 블루보이가 길고 큰 소리로 짖었다. 리틀레드도 맞장구를 치듯이 함께 짖었다. 헤엄을 치던 베쓰도 몸을 돌려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왔다. 리핏만이 어쩔 줄 몰라하면서 시냇가 저쪽에서 아래위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리핏은 짖기도 하고 끙끙거리기도 하다가, 땅에 코를 대고 왔다갔다 뛰어다니기도 했다. 리핏은 블루보이가 짖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다이빙이라도 하듯이 물속에 첨벙 뛰어들어 헤엄을 쳤다. 어찌나 텀벙거리면서 헤엄을 치는지 머리꼭대기까지 물보라가 일었다. 개울가로 올라선 리핏은 그제서야 간신히 여우의 자취를 찾아내 다른 개들을 쫓아갔다.
할아버지와 나는 그야말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 너무 많이 웃다가 언덕에서 굴러떨어질 뻔했을 정도였다. 나는 소나무 줄기에다 발을 버티고 앉아 있었는데, 웃느라고 발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그만 도꼬마리 덤불 속에 처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나를 일으켜세우고 머리에 붙은 가시 열매들을 떼주었지만 그 사이에도 우리는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슬리크가 그런 속임수를 쓸 거라는 걸 미리 알고 계셨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슬리크도 근처 어딘가에 앉아서 개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고 하셨다. 슬리크가 개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은 자기 냄새를 뚜렷하게 남기기 위해서였다. 슬리크는 개들이 흥분하면 감각보다 감정이 앞선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리핏과 베쓰의 경우에는 그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블루보이와 리틀레드는 그렇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예전에도 이런 일을 많이 봤다고 하셨다. 사람들 중에도 감정이 앞서는 바람에 리핏처럼 호되게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시면서, 내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았다.
벌써 날이 밝았는데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시냇가로 내려와 자리를 잡은 우리는 건빵과 고기를 먹었다. 개들은 우리 뒤쪽에서 한바퀴 빙 돌아가며 짖어대더니, 이제는 우리 앞에 보이는 능선으로 와 있었다. 산꼭대기 위에 올라선 아침 햇살에 계곡을 가로질러 서 있던 나뭇잎들이 반짝이고, 굴뚝새와 홍관조가 깨어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칼로 베어낸 삼나무 껍질의 한쪽 끝을 비틀어 국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그걸로 차고 맑은 계곡물을 떠 마셨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개울바닥의 자갈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였다. 삼맛이 나는 그 물을 마시니 배가 더 고픈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건빵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슬리크 놈을 다시 한번 보게 될 텐데 이번에는 맞은편 개울가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하지만 절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개미가 내 발 위로 기어올랐지만 나는 꾹 참고 가만히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셨다. 할아버지는 개미를 털어내는 건 괜찮다. 그 정도는 슬리크도 못 볼 거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개미를 발에서 털어낼 수 있었다. 잠시 뒤 개들이 다시 시내 아래쪽에 나타났다. 그때 우리 눈에 슬리크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우는 혀를 길게 빼문 채 맞은편 시냇가를 느릿느릿 올라오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낮게 휘파람을 불자 슬리크는 걸음을 멈추고 시내 너머에 있는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일분 정도 그 자리에 서 있던 여우는 우리를 비웃듯이 코를 킁킁거리며 총총걸음으로 사라져버렸다. 슬리크가 코를 킁킁거린 건 이런 번잡한 일을 만들어낸 자기 자신한테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라는 게 할아버지의 설명이었다. 나는 슬리크가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르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여우가 `둔갑술`을 부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당신은 실제로 그걸 본 적이 있다고 하셨다. 몇년 전 여우몰이를 나갔다가 풀밭 위쪽에 있는 언덕에 앉아 있을 때였다고 한다. 얼마 안 있어 붉은 여우가 개들한테 쫓겨서 달려오더니 속이 빈 나무 앞에서 멈추었다. 그놈이 나무 앞에서 두세 번 짖자 그 빈 나무 속에서 다른 여우 한 마리가 나왔다. 그러자 첫번째 놈은 나무 속으로 들어가고 두번째 놈이 쫓아오는 개들을 끌고서 총총걸음으로 달아났다. 할아버지가 나무 곁으로 가보니 그 속에서 여우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더란다. 개들이 바로 코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자신의 잔재주에 얼마나 자신이 있었던지 개들이 그렇게 가까이 지나가도 여우는 쥐뿔도 신경을 안 쓰더라는 것이다. 시내 둑 위로 블루보이와 다른 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들은 한두 걸음마다 계속 짖어댔다. 그만큼 여우의 체취가 강했던 것이다. 개들이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무리에서 떨어졌는지 한 마리만 심하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욕설을 퍼부었다.
`개자식! 리핏 놈! 잘난 척 덤벙거리더니 또 슬리크한테 속았구나. 앞장서 가다가 길을 잃다니.`
산에서는 이런 개들을 `사기꾼`이라 부른다. 리핏이 우리 있는 쪽으로 찾아오도록 하려면 큰소리로 고함을 질러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다른 개들도 그 소리를 듣고 우리한테로 올것이다. 결국 이쯤에서 우리는 여우몰이를 포기해야 했다. 나는 도저히 할아버지처럼 길게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그 소리는 요들송하고 비슷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도 숨을 꽤 잘 참는 편이라고 칭찬해주셨다. 얼마 후에 개들이 우리 있는 곳으로 왔다. 리핏은 자기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슬금슬금 다른 개들 꽁무니에 가 숨었다. 아마 그러면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이번 일이 리핏한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번 일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다른 사람을 속이려 하면 도리어 자기 자신이 곤란에 빠지게 된다는 걸 깨달았을 거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하늘협곡을 떠난 것은 오후가 되고 나서였다. 우리는 칼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내려갔다. 개들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천천히 걸었다. 지쳐서 그랬을 것이다. 나도 피곤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그렇게 어슬렁거리면서 천천히 걷지 않으셨더라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두막집의 빈터와 할머니가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은 저녁 땅거미가 깔릴 무렵이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마중하려고 길까지 나와 계셨다, 아직 걸을 힘이 남아 있었는데도 할머니는 나를 안아주셨다. 나머지 한쪽 팔은 할아버지의 허리에 두르신 채. 피곤하긴 무척 피곤했었나보다. 어느새 할머니 어깨에 기대어 곯아떨어진 나는 언제 오두막집에 도착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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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오타고 지방 하웨아 호수 위로 비치는 틈새빛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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