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전 (1/3)
조선조 인조 임금 때에 서울 안국동에 이름난 선비가 있었으니 성은 이요, 이름은 득춘, 자는 문채라 했다. 대대로 나라에 충성한 집안으로 이득춘은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이조참판, 홍문관-삼서의 하나로 경서에 관한 사무 담당-부제학-홍문관의 정삼품 벼슬-에 이르렀다. 사람이 충성과 효도를 겸하고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워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다. 그 부인 강씨는 집금오-근위장관-강창문의 딸로 현숙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젊어서 결혼하여 부부 사이가 다정했으나 나이 사십이 되도록 자녀가 없음이 늘 근심이었다/ 해서 이름난 산을 찾아가 기도를 드렸으나 끝내 자식이 없었다. 이에 이공이 부인을 보고 탄식했다. "우리 팔자가 복이 없어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선조를 뵙겠소?" 부인이 황송하여 사죄하기를, "제가 이씨 집안에 들어와 시부모의 사랑과 지아비의 극진한 보살핌을 입고도 이을 자식을 못 낳으니 모든 것이 저의 죄입니다. 부디 부인을 새로 얻어 저의 죄를 씻어 주소서." 이공이 듣고 부인을 위로했다. "이것은 모두 내가 복이 없는 것이니 어찌 부인을 나무라겠소." 그리곤 부인과 의논하여 금강산 명월암으로 들어가 정성껏 칠일 기도를 드렸다. 하루는 이공이 책상에 의지하여 잠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흰 수염을 나부끼며 들어오더니 말하기를, "그대의 정성이 지극함에 하늘이 감동하시어 아들을 주시니 귀하게 길러 나라에 큰 공을 세우게 하라." 하며 소매 안에서 구슬을 하나 꺼내 주었다. 이 공이 받고 감사의 뜻을 말하려고 했더니 노인은 간 곳이 없었다. 이어 구슬이 변하여 사내 아이가 되어 안방으로 아장아장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공이 놀라 문득 깨어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크게 이상하게 여긴 이공은 즉시 내실로 들어가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한 꿈을 꾸었는데 참으로 신기하오." 부인은 이공의 꿈 얘기를 다 듣자 웃으며 말했다. "저도 방금 그러한 꿈을 꾸었으니 참으로 신기하옵니다." 이공이 크게 기뻐하여 부인의 손을 잡고 웃었다. 과연 그 달부터 부인은 태기가 있더니 어느덧 날이 열 달이 찼다. 하루는 부인이 피곤하여 자리에 누웠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다. 이 순간, 하늘에서 성스러운 빛이 내리비치며 옥같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이 아이는 하늘의 별로, 세상에 내려와 그대의 집안을 빛낼 것이오. 그리고 이 아이의 짝이 될 사람은 금강산에 있으니 부디 하늘의 정하심을 어기지 마시오." 이공 부부가 크게 기뻐하며 아기를 보니 꿈에 보았던 아이와 똑같았다. 때는 갑진년-1604년-사월 십칠 일 오전 여덟 시였다. 이공이 크게 기뻐하여 이름을 시백이라 하고, 자를 명선이라 짓고 보물처럼 사랑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시백의 나이 세 살이 되자 슬기와 재주가 벌써 보통 사람과 달랐다. 그 이듬해 삼월에 부인이 또 태기가 있어 딸을 낳으니 이름을 시화라 짓고 사랑스럽게 길렀다. 차츰 자라니 얼굴이 옥같이 예뻐지고 재주가 뛰어나 소문이 자자했다.
다시 세월이 구름같이 흘러 시백의 나이 십 육 세가 되었고 시화는 십 삼 세가 되었다. 이 때에 인조 임금께서 이공의 충성스러움에 만족하시어 특별히 강원 감사-지금의 강원도 도지사-에 임명하셨다. 이공은 임금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아들 시백을 데리고 부인과 딸 시화와 작별하고 임지로 떠났다. 강원 감영에 간 이공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면서 아들에게 열심히 글공부를 가르쳤다. 이때 금강산 상상봉에 등지고 숨어사는 한 선비가 있었으니 성은 박이요, 이름은 현옥, 호를 유점대사라 했다. 학문이 깊기로 유명한 선비로 그의 부인 최씨와 함께 유점사 근처에 비취정을 짓고 세월을 보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높여 비취 선생이라고도 하고, 또는 유점처사라고 했다. 일찍이 두 딸을 두었는데 장녀는 십 칠 세였으나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아직 시집도 못 가고 아우만 일찍 시집갔다. 박처녀는 얼굴이 빌고 박색이라도 마음시가 착하고 공부가 끝없이 높아 세상 만물에 모르는 것이 없었다. 박처사는 이를 기특히 여겨 딸을 매우 사랑하며 늘 칭찬이었다. "이 아이는 재주가 이처럼 높으니 반드시 똑똑한 사람을 짝지어 주리라." 이런 때에 마침 이공이 강원 감사로 내려왔다는 말을 듣자 박처사는 부인을 보고 말했다. "내가 감영에 가서 이공을 만나 청혼하겠소." 부인이 놀라 물었다. "이감사는 유명한 집안 출신인데 어찌 시골에 묻혀 사는 집안과 인연을 맺겠습니까?" 박처사는 웃으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부인은 염려하지 마시오. 두 아이는 하늘이 정해주신 연분이니 이 감사도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오." 부인은 박처사의 신기한 재주를 알기 때문에 다시는 말이 없었다. 박처사는 즉시 나귀를 타고 감영에 이르러 군졸에게 말했다. "너의 감사께 손님이 왔다고 전하라." 군졸이 들어가 감사께 아뢰니 이감사는 즉시 들어오시도록 하라고 명했다. 박처사가 조금 후에 소박한 옷차림으로 천천히 들어오니 이 감사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여기고 마당까지 내려가 맞이하였다. 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로 절한 다음 박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금강산 산골에 묻혀 사는 박현옥이라는 천한 몸이옵니다. 이렇듯 외람되게 감사 어른을 찾아온 것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감사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박처사는 자세를 바로 하고 여쭈었다. "제가 하늘의 이치를 살펴본즉 아드님이 저의 딸과 천생 배필이옵니다. 다만 부끄러운 것은 딸아이가 얼굴이 못생기고 바탕이 천하므로 감히 아드님과 짝이 될 수는 없으나 하늘이 정하신 것을 어길 수가 없어 감사께 아뢰는 바입니다." 감사가 듣고 나서 처사의 언동이 거짓이 아님을 깨닫고 기쁜 낯으로 대답했다. "선생의 높고 밝으신 뜻과 따님의 뛰어난 바탕으로 어리석은 저의 자식을 배필로 삼고자 하시니 더 없는 영광입니다. 말씀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박 처사는 크게 기뻐하여 엎드려 절했다. "감사께서는 높으신 몸으로 천한 몸의 딸을 쾌히 허락하시니 감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는 즉시 아들 시백을 불러들여 박 처사에게 인사를 드리도록 했다. 처사가 답례하고 눈을 들어보니 참으로 영웅의 기상을 갖추고 있어 언젠가는 반드시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치리라 생각했다. "참으로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처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니 감사 역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아주 혼례식을 올릴 날을 정함이 어떻겠습니까?" 처사의 말에 감사는 쾌히 응낙했다. 이에 처사가 좋은 날을 가리니 이듬해 팔월 이십 일이 좋으므로 그 날로 정했다. 이어 주인과 손님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날이 저물었다. 그러자 처사가 몸을 일으켜 하직하고 가볍게 돌아가니 그 걸음이 바람처럼 빨랐다. 이 감사는 아들 시백과 함께 박 처사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신기함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신선이로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 어느덧 이듬해 봄철이 되었다. 상감께서는 감사가 백성들을 위해 정치를 잘함을 여기시어 이조판서와 세자빈객-세자의 스승-의 높은 벼슬을 내리시고 역말편으로 서울로 올라오시도록 했다. 이에 이공은 임금님의 높으신 성은에 감사하고 상경했다. 이윽고 박처사와 언약한 날이 거의 되어서 이공이 부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부인, 원주 감영에 내가 얼마간 있었을 때에, 금강산 박 처사의 딸과 정혼하기로 약속한 것은 부인도 이미 알 것이오. 이제 혼례일이 가가이 다가왔으니 애를 데리고 내려가서 성례하고 오겠소." 부인이 정색하며 말했다.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대한 일인데 서로 약속하여 정혼까지 하시고 어찌 어길 수 있습니까?" 이공은 부인의 참된 마음씨에 대단히 기뻐하여 다음 날 상감께 나아가서 사연을 아뢰었다. 이공의 말을 듣고 난 후 상감께서는 쾌히 승낙을 하셨다. "속히 내려가서 예식을 지내고 올라와서 안정을 찾은 다음 직책을 보살피도록 하오."하시며 게다가 상감께서 친히 금, 은, 옥 등 귀중한 보석까지 내려 주시었다. 아들과 함께 금강산 유점사 어귀에 이르러 비취정에 살고 있는 박처사의 집을 물으니, "여기에서 삼 사십 년을 살아왔지만 박처사란 이름은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하는 한결같은 동네 사람들의 말뿐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이 같은 말에 이공은 안타깝게 생각하며 혼잣말로, "아들의 혼례일이 바로 내일인데 지금까지 박처사의 집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은 그의 딸과 시백이와의 연분이 없는 것 같구나."하고 머뭇거리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선명한 학의 소리가 나더니 박처사가 나타나며 이공의 손을 꽉 잡고 웃으며 말하였다. "귀하신 분이 이렇게 천한 사람을 찾으려고 누추한 곳에 오시어 여러 날을 헤매시었으니, 이 모든 것은 저의 잘못입니다. 저의 집은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박 처사는 말을 끝맺고 바삐 시백의 손을 이끌고, 이공과 함께 몇 리를 들어가자니 산길은 어지간히 험해서 발조차 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박처사의 걸음은 어찌나 유연한지 평지를 걷는 것과 같았다. 얼마를 걷자니 빽빽한 소나무의 숲과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들로 만발한 곳에 너댓 간의 아담한 초가집이 한 채 보였다. 집 앞에 당도하자 대문 위에 피갈정이라는 금빛 글자로 현판을 달아 붙인 게 보였다. 그들이 서당에 이르자 뜰 앞에선 백학이 짝지어 노닐고, 버드나무 위에서는 노란 꾀꼬리가 지저귀니, 이공의 부자에겐 참으로 신선이 사는 고장인 듯 싶었다. 처사는 이공의 부자를 인도하여 객실로 모셨다. 객실은 수많은 서적들로 장식되었으며 그 서적에서 풍기는 냄새가 방에 가득 차 있었고 한쪽 벽에는 거문고가 세워져 있었다. 그야말로 숨어사는 선비의 거처다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처사가 이공의 부자에게 자리를 권하고 잠시 쉬게 한 다음 차를 내오게 했다. 차를 마시고 나자 곧 시녀가 저녁상을 차려 올렸다. 처사가 자시기를 권하므로 이공이 밥상을 받고 보니 반찬은 청결하고도 소담스럽게 차려 놓아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이윽고 식사를 마치고 상을 물린 후에 처사와 같이 고금의 일을 논의하고 오랜 시간을 이야기하였다. 밤은 깊어져 처사는 안방으로 들어가고, 이공의 부자도 편히 쉬었다. 이튿날 이공의 부자와 함께 아침을 먹고 난 뒤에 처사가 정감 있게 웃으며 말하였다. "벌써 날이 밝았으니 시백에게 예복을 입히고 혼례를 치를 준비를 하십시오." 처사의 말을 듣자 이공의 얼굴은 기쁨에 가득 찼다. 곧 아들에게 예복을 입혀 안채로 들어가 예식을 올리게 되었다. 시백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간 처사는 식장으로 시백을 인도하니, 신랑이 다가서서 상자 위에 기러기를 놓고 마루 위에 올라 신부와 서로 절을 한 다음 몸을 돌려 바깥채로 나왔다. 이 모습을 본 이공은 기쁨에 겨워 아들의 손을 잡고 처사에게 사례하며 말하였다. "선생과 같은 지대한 분이 미숙한 저의 자식에게 훌륭한 따님을 내주시니 저의 부자는 그야말로 행복에 겹습니다." 이공의 말이 끝나길 기다려 처사도 사례하며 말하였다. "아드님의 총명한 머리와 뛰어난 얼굴로서 딸의 몹쓸 얼굴을 대하게 되니 저는 몸둘 바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맺어 놓은 연분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바라는 유일한 청이라면 상공께서는 은덕을 내리시어 딸의 미운 얼굴을 용서하시고 잘 보살펴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공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싶더니 웃으며 대답하였다. "허허, 말씀이 너무 겸양하시군요. 선생의 말씀같이 따님의 얼굴이 아름답지 못하다 해도 여자의 보배로움은 소박하고 어진 것이 제일의 으뜸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얼굴이 고운 여자는 기박한 운명을 타고 나기 쉬우니 선생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처사는 상공의 말을 고맙게 듣고 술을 내다 주객이 진종일 마시며 즐기었다.
어둑어둑 날이 저물자 저녁을 마친 뒤, 이공이 아들에게 신방으로 들라고 이르니 시백은 분부를 받잡고 신방으로 들어갔다. 시백은 신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방안의 물건이 여자의 바느질 그릇은 도대체 보이질 않고 손오병서와 육도삼략과 같은 무술에 관한 서적만이 책장에 수북히 쌓여있기 때문이었다. 시백은 방안의 스산한 풍경을 이상히 여겨 부자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조금 있자니까 방문이 열리며 신부가 들어오는데 키는 거의 일곱 자는 되어 보이고, 퍼진 허리는 열 아름쯤 되며, 뭉뚱한 코와 내민 이마가 둥근 눈망울에 어울려 매우 흉스럽게 보였다. 손발이 부자유스러워서 다리까지 절며, 얼굴빛은 먹칠을 해놓은 것 같고, 양쪽의 혹은 두 어깨에 늘어져 가슴께를 덮었으니 신부의 모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흑살천신이라는 귀신이 아니라면, 확실히 염라대왕이 사는 곳의 우두나찰이란 귀신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신부의 흉악한 얼굴을 대하고 나니 시백은 넋이 달아나고, 거기다 역겨운 것은 신부의 몸에서 더러운 냄새가 연상 코를 지르니 신랑의 비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만 정신없이 뛰어 나와 놀라움을 진정하지 못하자, 상공이 놀라서 물었다. "어찌 이렇게 놀라서 단정치 못하게 뛰어 나오느냐?" 시백이 아직 진정되지 않음에 머뭇거리자니 상공이 급히 재촉하며 말하였다. "도대체 네가 무엇 때문에 놀랜 기색으로 나왔는지 까닭을 말해 보아라." 그러자 시백은 힘없이 부친의 가슴께를 쳐다보며 여쭈었다. "소자가 신방에 들어가 방안의 모습을 이상히 여길 때쯤 신부가 들어왔는데, 그의 몰골은 마치 지옥에나 있을 법한 검둥이 귀신같아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시백은 잠시 숨을 돌린 후 마음을 안정시키고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더더욱 소자의 마음이 상했던 것은 신부의 몸에서 더러운 악취가 물씬 풍겨 비위가 거슬렸습니다. 더 이상 마주보기 어려워 이렇게 나왔습니다." 상공이 듣고 크게 놀라서 아들의 옳지 못한 태도를 꾸짖기에 이르렀다. "네가 아무리 어리석다지만 오늘이 바로 첫날밤인데 비록 신부의 겉모양이 아름답지 못하다 해도 무엇이 그리 놀랄 일이란 말이냐! 여자의 도리는 오직 어질고 착한 것이 으뜸이어서 얼굴이 아름답지 못함은 그리 생각할 필요가 없거늘 하물며 네가 미를 얻고자 덕을 하찮게 보는 것은 옳지 못한 행실인 줄을 모르느냐?" 상공의 노한 얼굴을 보자 시백이 황송하여 땅에 무릎을 조아려 다시 여쭈었다. "본래 소자가 아우 하나 없어 외로왔고 단지 남매뿐이어서 좋은 아내를 만나서 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자녀를 낳아 뒤를 이을 본분이 여자의 행할 도리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거동은 말할 수 없이 이상하고 괴이하여 정녕 마주볼 수가 없으니 이것은 필시 조물주가 시기하고 또한 하늘조차 미워하여 이런 괴물로서 계집이라 일컬으시니, 아무리 하늘의 뜻을 어기는 행실이 되고 부모님께는 천하의 불효가 된다 할지라도 다시는 볼 수 없사오니 저의 급박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여 주시고 어서 바삐 상경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이 말이 끝나길 기다려 상공은 눈을 크게 부릅뜨며 대단히 노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꾸짖기 시작하였다. "자식된 도리로 아비의 말을 손톱만큼이나 가볍게 여기고 버릇없이 말하는구나. 여자의 정숙한 덕성을 돌아보지 않고 어여쁜 얼굴만을 요구하니 어찌 아비된 입장에서 한심스럽지 아니하며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라도 너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신방으로 들어가 신부의 착하고 어진 덕에 감격하여 잘 지내고 부디 아비의 말에 순종해라." 상공은 차츰 말소리를 낮추며 아들에게 말했으나 아들의 태도가 수그러지지 않는 것 같아 상공은 덧붙여 다짐을 주었다. "만약에 다시 한 번 거역할 때는 부자의 인연을 완전히 끊을 것임을 명심해라." 너무도 엄격한 부친의 분부에 시백은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다시 신방에 들어갔다. 신부를 마주보기가 싫어서 한쪽 구석에 옷도 벗지 않고 누웠다가 새벽닭이 울기를 기다렸다. 닭이 울자 바깥채로 나와 부친의 침소를 살피고 아침밥을 먹은 후에 또 날이 저물면 구실 삼아 신방에 들어갔다가 날이 밝으면 나왔다. 이렇게 삼 일을 간신히 보내고 날을 가려 상경하게 되었다. 처사와 이별하고 이공의 부자는 신부를 가마에 태워 출발하였다.
여러 날이 지난 뒤에 서울 본집에 당도하여 아들을 데리고 대청에 들어가 부인과 절을 한 다음에 다시 의관을 가다듬어 부인과 함께 신부를 맞이했다. 신부가 단정하게 폐백을 마치자 부인이 눈을 들어 신부를 보자니 세상에는 둘도 없을 박색이었다. 부인은 기분이 상하여 상공에게 말하였다. "어찌 저런 인물을 며느리로 삼아 살 수 있겠오?" 부인의 말에 상공의 기색이 완연히 달라지며, "부인, 신부의 외모가 아름답지는 못하나 재주가 신기하여 수많은 도법이 마음속에 가득 하다오. 덧붙여 정숙한 덕을 지녔으니 사실상 우리 집안에 빛을 끌어들일 인물인데 어찌해서 부인은 얼굴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시비하시오?" 부인은 상공의 엄한 말을 듣고 더는 말을 못했다. 조금 후에 상공이 아들과 신부에게 지시하여 사당에 올라 쌍으로 잔을 드려 조상에게 아뢰고 나서 바깥채로 나가 많은 손님을 접대하도록 했다. 날이 저물자 모든 손님들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상공은 신부에게 제 방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도록 하라고 전했다. 이럭저럭 여러 달이 지나갔다. 그러나 시백은 한 번도 신부 방에 들지 않았다. 이에 상공은 크게 성내어 아들에게 이르길, "옛날에 제갈 공명의 부인인 황씨는 퍽이나 인물이 박색이었다 한다. 하지만 공명의 사랑이 두터웠고 마침내는 벼슬길에 올라 유황숙을 도와서 일을 할 때에 황부인이 여덟 가지의 둔갑술과 바람을 일으키고 또한 비를 내리는 술법을 공명에게 가르쳐 주어서 삼국에 이름을 떨치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비록 얼굴은 아름답지 못할지언정 지아비에게 내조하는 정성은 지대했단 말이다. 부디 네가 옛일을 길이 받아들여 내 어질고 착한 며느리를 박절하게 대하지 말아라."라고 심각히 꾸짖었다. 이후 시백은 상공의 분부를 거역하지 못하고 박씨의 방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백은 한편 구석에서 옷을 입은 채로 누워 있다가 날이 밝으면 나가 버릴 뿐, 박씨에게 한 마디의 말도 붙이지 않았다. 박씨의 마음속은 말할 수 없이 아팠지만 결코 내색할 처지도 못되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박씨가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인사를 드릴 때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망설이는 기색이 엿보이므로 상공이 인사를 받고 나서 며느리에게 물어 보았다. "무슨 할 얘기가 있느냐, 아가?" 박씨는 조심스럽게 엎드려서 상공에게 여쭈었다. "어리석고 못난 저의 바탕으로 이처럼 귀한 집안에 들어와서 시부모님을 모시되 잘못이 너무 많아 아버님께 아뢰옵기 송구스럽사오나 저의 본성이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번잡한 곳은 매우 괴롭사옵기에 미천한 뜻을 아뢰옵니다. 뒤뜰에다 아담한 초당을 짓고 살기가 소원이오니 허락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상공은 불쌍한 며느리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즉시 사람을 시켜 뒤뜰에 십여 간이나 되게 초당을 짓도록 하고 아름다운 꽃들도 많이 심어 며느리의 마음을 펴게 하니 박씨는 상공의 배려에 감격하였다. 이럭저럭 일을 끝마치고 좋은 날을 잡아서 계집종 계화를 데리고 초당에 이르러서 동산 안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기이하게 생긴 아름다운 꽃들이 봄빛을 자랑하고 청학과 백학들이 번거롭게 노닐다가 주인을 반기는 듯, 모두가 선한 정경이었다. 박씨가 몹시 기뻐하며 계화에게 아버님께 가서 종이 한 장을 얻어오라고 하였다. 상공은 계화의 얘기를 이상히 여겨 즉시 글공부하는 아이에게 빛이 고운 종이 한 장을 가져오게 하고 친히 가지고 초당으로 들어갔다. 박씨는 상공이 계화와 같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뜰에 내려와 맞았다. "아가, 종이 한 장을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박씨는 고개를 숙이고 차분히 여쭈었다. "이처럼 귀한 집에 별호가 없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공은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허허, 과연 내 며느리로고. 그대의 문필에 대한 제간을 보고 싶으니 직접 내 앞에서 쓰도록 하라. 자! 어서." 박씨는 지시를 받고 계화에게 붓과 먹을 가져오라 하였다. 벼루에 먹을 갈아서 종이에 내려쓰자 먹이 채 마르기도 전에 상공이 보니 필체는 신기하여 푸른 용이 나는 듯하니 그 현판에 피화정이라 씌어 있고 그 옆에 <신미년-1631년-첫 봄에 취희당을 쓰다>라고 되어 있었다. 상공은 박씨의 필법을 다시 한 번 읽고 나서 칭찬하여 주며 흐뭇해서 말하였다. "참으로 보기 드문 훌륭한 필체로다. 그대가 아버지의 재주를 온통 물려받은 듯 싶구나." 상공이 대단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박씨는 송구스러워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칭찬에 황송하여 절하고 그 종이를 한 번 뒤적이니 별안간 금으로 쓴 현판이 되었다. 이 모습을 본 상공은 더욱 신기하게 여겨져 말하였다. "진실로 그대는 세상에서 드문 재주를 가졌구나. 시백의 마음이 어리석어 대접이 몹시 심하니 어찌 한스럽지 아니할까."
이러한 일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난 후의 어느 날 박씨는 안채에 나아가서 시부모님께 절하고 엎드려 상공에게 여쭈었다. "내일 새벽에 종에게 명하시어 종로에 있는 개주집에 가게 되면 묶어 놓은 수십 필의 말이 있사온즉, 그 중에서 비루먹은 말을 잡고 값을 물어보면 일곱 냥을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 말은 들은 체도 말고 돈 삼백 냥을 주고 사오라 하십시오." "실로 그대의 말이 이상하구나. 일곱 냥이면 살 말을 구태여 삼백 냥이나 되는 많은 돈을 주고 사오라 하니 말이다." 박씨가 대답하여 아뢰었다. "황송 하옵지만, 후일에 보시면 자연스럽게 아실 것입니다." 박씨의 대답에 상공은 믿고 있었지만 부인이 속으로 비웃으며 상공의 믿음에 핀잔을 했다. 이튿날 상공은 바깥채로 나와 가장 충실한 종을 불러내어 돈 삼백 냥을 주고 지시하였다. 종은 상공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스레 생각하기도 했지만 분부를 받들고 종로에 있는 객주집에 가 보았더니 과연 그러했다. 말의 흥정꾼을 불러 그 중에서 비루먹은 말을 손으로 가리키며 조용히 말하였다. "저기 있는 말 값은 얼마나 합니까?" 흥정꾼이 묘하게 생각하는 눈치더니 말했다. "건강한 말이 많은데 하필 연약한 말을 사려고 하십니까? 값은 일곱 냥입니다." "우리 영감님이 분부하시길 일곱 냥 하는 말을 삼백 냥 주고 사오라 하시니 이 돈을 받으시고 그 말이나 제게 주시오." 말 흥정꾼이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그 분 이상도 하시네. 일곱 냥하는 값싼 말을 어떻게 삼백 냥이나 받고 팔 수 있겠소? 절대 받을 수 없소." 상공의 종이 말하길, "이것은 우리 영감님의 분부인데 어찌 거역할 수 있겠소." 하며 삼백 냥을 억지로 주려 하니, 말 흥정꾼이 나직히 말했다. "말 값은 일곱 냥 내어놓고 그 남은 것은 우리 두 사람이 나누어 갖고 집에 돌아가서 삼백 냥을 다 준 것처럼 하시오." 상공의 종도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고 반씩 나누어 가지고 말을 끌고 돌아오니, 상공이 나와서 말을 이끌고 뒤뜰로 나가 박씨를 불러오라고 분부했다. 박씨가 나와서 보다가 상공에게 여쭈었다. "송구스럽지만 저 말을 도로 내다가 주라고 하십시오." 상공은 박씨의 말이 이상해서 물어 보았다. "네 말대로 사왔는데 어째서 도로 주라고 하느냐?" 박씨는 똑똑히 대답했다. "아버님께서는 모르고 계시겠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말 값을 덜 주고 사왔으니 무엇에 쓸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해서 도로 내어다 주라고 하였사옵니다." 상공이 놀라서 종에게 꾸짖었다. "너는 말 값을 얼마나 주고 사왔는지 솔직히 말하렸다." 종이 여쭈길, "영감께서 지시하신 대로 사왔나이다." 하니 박씨가 몸을 돌이켜 종을 꾸짖었다. "아무리 네가 어리석은 상놈이지만 상전을 속이길 예사롭게 하니 어찌 통탄하지 아니할 일인가? 네가 말 값을 흥정꾼에게 주자 그 놈의 말이 '말 값 일곱 냥만 빼어놓고 다른 나머지는 우리가 똑같이 나누어 먹자' 하니 그 말에 너의 귀가 멀어 나누어 가지고 왔거늘, 너는 나를 속이지 못할 것이다. 상전을 속인 크나큰 죄는 뒤에 다스리겠지만 어서 가서 네가 나누어 가진 돈을 말장수에게 주고 돌아오되, 만약 늦어지면 너의 목숨은 보존하기 힘들게 될 것이니라." 종이 박씨의 말을 듣고 나자 두렵고 겁이 나서 땅에 엎드려 백배 사죄하고 속히 객주집에 가서 거간꾼을 보고 꾸짖어 말하였다. "이 몹쓸 놈아, 너의 말에 솔직하여 곧이 듣고 말을 가지고 갔더니 하마터면 상전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을 뻔했다." 말 값을 모두 합쳐서 임자를 찾아가 사연을 말하고 삼백 냥을 억지로 주고 돌아와 박씨에게 말하였다. "전부 주고 돌아왔습니다." 박씨가 이르기를, "물러가 있거라." 하고, 상공께 여쭈었다. "말에게 하루 깨 한 되와 생동쌀 오 홉씩으로 죽을 쑤어서 삼 년만 먹이고 초당 앞뜰에 찬 이슬을 맞힌 다음 버려 두고 나면 쓸 곳이 꼭 있습니다." 박씨의 진중한 말에 상공은 기꺼이 허락했다.
벌써 삼 년이 다 되어서 하루는 박씨가 안채로 나아가 시부모님께 절하였다. 그때까지도 부인은 며느리의 얼굴이 보기 흉해서 눈썹을 찡그렸지만 항상 웃는 낯의 상공은 손까지 잡고 며느리에게 일렀다. "무슨 할 얘기가 있느냐, 아가?" 박씨는 담담하게 여쭈었다. "아무 달 아무 날에 명나라 황제가 돌아간 소식을 전하려고 사신이 올 것입니다. 이번에는 기필코 믿을 만한 종을 시키시어 내일 아침에 그 말을 끌고 나가서 남대문 옆에다 세워서 두면 공문을 가지고 오는 칙사가 보고 '저 말 값은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묻거든 '말 값은 삼만 팔천 냥이오.' 하면 그 사신이 그 값을 전부 주고 살 것입니다. 그 말 값을 받아오라고 하십시오." 상공은 박씨의 말을 신기하게 여겨 그의 말을 허락하고 그 이튿날 심복 종 원삼이를 불러 단단히 분부를 내리었다. "네가 이 말을 끌고 남대문 옆에 서 있으면 필시 명나라의 칙사가 이러이러 물을 것이니까 '말 값이 삼만 팔천 냥이오.' 하면 곧바로 다 치를 것이다. 주는 대로 받아 오되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원삼이가 분부를 받들고 곧 말을 끌고 남대문 옆에서 있자니 정말로 칙사가 들어오다가 그 말을 보고는 통역관을 시켜 주기에 그대로 말했더니 다시 묻지 않고 말 값을 다 주므로 받아 가지고 곧 돌아와 상공께 아뢰었다. 상공은 종의 노고에 칭찬하고 후원에 들어가 박씨에게 말 값을 받아 온 것을 말하였다. "어찌 그 말 값이 그렇게도 비싼 것이냐?" "그 말은 천리를 달리는 날쌘 말이어서 조선에서는 알아보는 사람도 없지요. 그러나 명나라는 지방이 넓고 오래지 않아 쓸데가 많으므로 칙사는 영특한 사람이기에 알아보고 삼만여 금의 비싼 값에도 아랑 곳 없이 사 갔사오나 조선은 지방이 좁아서 쓸 곳이 없사옵니다." 탄복한 상공이 말하였다. "비록 너는 여자 몸이지만 총명하여 만일 남자로 태어났다면 이 나라의 큰 기둥이 되어 보탬이 많을 것이다."
이 시절에는 나라가 태평하여 전 백성이 즐거웠고 또 상감이 성현을 모신 사당에 제사를 드리시고 과거를 베풀어서 인재를 등용시키시니 이시백이 과거를 치르고자 온갖 준비를 갖추고 나가려 했다. 이날 밤 박씨가 꿈을 꾸었는데 뒤뜰 연못 가운데 꽃이 활짝 핀 곳에 벌과 나비들이 날아들었다. 옥백으로 만든 벼룻돌을 담는 그릇이 갑자기 변하더니 푸른 용이 되어 놀다가 여의주를 얻어 물고 은색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꿈이었다. 매우 이상히 여겨져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 연못가에 나가 보니 거짓말처럼 벼룻물을 담는 그릇이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꿈에서 본 것이었다. 박씨는 그것을 가져다 간수하고 계화를 일렀다. "소서헌에 가서 상공께 잠시 들어오십사고 여쭈도록 해라." 즉시 소서헌에 다다른 계화는 시백에게 박씨의 말씀을 여쭈었다. 계화의 말을 듣고 시백은 언짢게 여기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도대체 무슨 큰 일이기에 여자가 대장부의 과거 공부를 지체하게 하느냐?" 계화가 돌아가서 그대로 전하니 박씨는 얼마 간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다시 계화를 보내어 일렀다. "무릇 여자의 도리로써 앉아서 서방님을 오시라 함이 당돌합니다만 잠시 들어오시면 과거장에서 쓰실 도구를 드릴 것이니까 한 번의 걸음을 하시기 빈다고 여쭈어라." 박씨의 명으로 계화가 마지못해 박씨의 전갈을 상세히 아뢰었다. 계화의 말을 전부 듣고 난 시백은 대단히 노하여서 쩡쩡 울리는 목소리로 꾸짖었다. "일개의 계집이 집안에 앉아 과거 공부하는 장부를 이토록 마음 산란하게 하니 어째서 큰 소리가 안 나올 수 있겠는가?" 시백은 말을 마치자 더욱 분함이 치밀어 올라 호령하고 계화에게 꾸짖어 말하였다. "시골에서 자란 너의 주인에게 일의 순서를 너무도 모른다고 분명히 전하고 여자가 되어서 어찌 장부를 마음대로 오라느니 가라느니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내 오늘 네게 벌을 주는 것은 너의 주인을 대신하려 함이니 그대로 전해라." 말을 마치고 매를 서른 대를 때리시니 계화가 울며 박씨에게 자기가 당한 얘기를 서럽게 말하자 박씨도 눈물을 흘리며 일렀다. "분명히 내 죄를 너에게 내리셨구나. 이제야 여자의 위치가 가엾다는 것을 제대로 느끼겠구나." 잠시 말을 마치고 긴 한숨을 쉰 연후에 물을 담는 그릇을 주며 전하였다. "이 벼룻물을 담은 그릇으로 먹을 갈아 글을 지으면 장원 급제하여 크게 출세해서 이름이 세상에 날 것이며 부모님께는 영원한 복을 드리므로 집안이 빛날 것이며 이제 나는 서방님에게 필요 없을 테니 내 생각은 마시고 지체 높은 귀한 집안의 아름다운 여자를 데려와 평생을 행복하게 지내시라고 여쭈어라." 계화는 박씨의 말을 새겨듣고 그대로 전하였다. 시백이 계화의 말을 듣고 나서 벼룻물을 담는 그릇을 보니까 세상에서 보기 드문 보배였다. 자기가 너무나 지나친 말을 한 것 같아 속으로 뉘우치고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계화에게 천천히 일렀다. "아가씨께 전하여라. 본디 나의 천성이 우악스럽고 급해서 아가씨의 말씀을 언짢게 여기고 너에게 심히 책망하여 벌까지 주었으나 아가씨의 성품이 워낙 온순하여 벼룻물 담는 그릇을 보내주어 과거 보는 일에까지 도움을 주니 대단히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한 행동을 분하게 여겨서 다른 집안의 여자에게 다시 혼인하라는 말씀은 조금 지나친 말인 줄 안다고 가서 여쭈어라." 명을 받들고 계화가 다시 돌아와 박씨에게 서방님의 말씀을 낱낱이 아뢰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박씨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