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울분과 회한의 방랑객 김병연(1807-1863, 56살, 병사).
김병연은 그 본명보다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집안의 치욕스러운 비밀과 스스로 조상을 욕되게 한 자신에 대한 회한으로 평생을 몸부림쳐야만 했던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세상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으며 가족에게조차 타인처럼 살아야 했던 외톨이 같은 인간상, 그는 왜 그렇게 구름같이 떠돌아야만 했을까? 선비로서 수치스러운 집안 내력이 그렇게도 참기 힘들었을까? 아니면 그를 에워싼 자책의 념이 도저히 그로하여금 피를 나눈 가족과도 같이 살 수 없을 정도로 강했던 까닭이었을까? 그의 복잡한 심정을 확실하게 꼬집어 낼 수는 없지만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결국 그를 견딜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세상과 자기 스스로에 대해 다같이 분로를 가졌던 나약한 지식인의 표본이며, 자학과 세상에 대한 조롱으로 그나마 카타르시스를 가질 수 있었던 센티멘탈리스트이기도 했다.
김병연은 자기를 둘러싼 속박을 적극적으로 깨부수기보다는 스스로 더욱 자신만의 세계로 몰입해 버린 일종의 현실 도피자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로 자신을 소진시켜 버리지 않고 굴레 같은 삶을 벗어보려고 나름대로 날개를 펴고 살아간 자유인이었다. 꼼짝하지 못하도록 얽매이게 한 구속된 세상을 향해 스스로의 방법으로 저항과 울분을 터뜨렸던 소극적 사유의 소유자로서 김병연은 뜻을 이루지 못한 지식인의 또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고 세상을 향해 뛰쳐나갔다. 얼마나 잘생긴 세상인가 보겠다는 심사도 있었겠지만 스스로 자폭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발산시키는 적극적 행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보통의 용기로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교통이나 숙박이 모두 미흡하고 불안정한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한 소극적 지식인의 모습보다는 세상사를 해탈한 자유인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치욕의 가문
김삿갓의 원래 이름은 병연으로 조선 23대 왕인 순조 7년(1807년) 양주(현 의정부)에서 김안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성심이고 호는 난고라하였지만, 평생을 김삿갓으로 통했다. 삿갓 하나로 세상을 가리고 방랑하며 일생을 살았던 그였지만 태어날 무렵 그의 집안은 유복하였다. 그런데 그의 나이 여섯 살 때 그를 일생동안 온통 허무와 비통 속에서 살게 만든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서북인 차별에 불만을 가졌던 평안도 용강 출신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는데, 그때 선천부사로 재직중이던 병연의 조부 김익순이 반군들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살아 나왔다. 그런데 그 후 김익순은 반군 김창시의 목을 돈 주고 사서 자신의 전공인 양 처리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일가 '멸족'의 형벌을 받았다가 '폐족' 처분으로 사면되어 멸문지화는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폐족'이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공민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사회적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병연의 일가는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충복이었던 김성수의 도움을 받아 황해도 곡산 땅에 숨어살아야 했다. 이곳에서 병연의 아버지인 김안근이 화병으로 죽자 그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이끌고 다시 강원도 영월 땅까지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혼자 몸으로 어렵게 어린 자식들을 키우며 통한의 세월을 살아간 것이다. 그녀로서는 자식들에게도 가문의 내력을 숨긴 채 죽은 듯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비 집안의 피는 속일 수 없었던지 병연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주가 많았다. 그의 나이 25살 때 그 동안 갈고 닦은 글재주를 시험해 보기 위해 영월 감영에서 개최한 백일장에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병연은 장원을 하였는데, 그때 주어진 시제가 '논,정가산충절사 탄, 김익순죄간천'으로 홍경래의 난 당시 '가산 군수 정시의 충절을 기리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하늘까지 사무치는 죄를 통탄한다'는 내용이었다. 자기 가문의 내력을 모르는 병연은 피끓은 젊은이의 기개로서 김익순의 죄상을 공박하는 글을 써서 장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어머니가 결국은 한 많은 집안 내력을 병연에게 알려주었고, 그때부터 그는 세상과 자신을 한탄하게 되었다. 자신의 부질없는 글재주가 조상을 욕되게 하였고 '폐족' 가문 출신으로 양명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익힌 학문이 도리어 고통의 불씨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상심과 냉소로 반년 가까이 두문 불출하다가 문득 자신을 얽매고 있는 가정이라는 틀에서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껴, 병연은 백일장이 열렸던 이듬해 금강산 구경이나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그때 병연은 이미 결혼하여 돌 지난 아들까지 있는 처지였다. 길을 나서자마자 '조상을 욕되게 한 자가 하늘 아래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 큰 삿갓을 눌러쓰고 다녔다. 김병연이 김삿갓이 되어 버린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금강산과 함경도 유람
금강산을 향해 길을 나선 병연은 평창을 거쳐 대관령을 넘어 강릉 땅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벌써 양반사회를 조롱하는 시작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강릉 근처에서 참판 벼슬을 은퇴하고 낙향하여 살고 있다는 어느 대갓집에 남겨 놓은 그의 시는 교만한 양반에 대한 반감과 울분이 담겨 있다.
강호백수노여구 학슬오정가이우
환약장비준촉호 동성항우목형후
삽의탁탁천리록 쾌독관관재저구
소년다사현풍안 춘백당당도자유
'갈매기처럼 앞머리가 벗겨진 벼슬길 떠난 늙인이가 우스꽝스럽게도 황소하고 바꿀 만한 안경을 쓰고 있네. 그 꼴이 장지의 고리눈처럼 둥글고 촉나라의 범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으며, 눈동자가 두 개라던 항우를 흉내내고 형주 땅 원숭이가 물에 빠진 형상이로다. 울타리를 탁탁 뚫는 사슴으로 갑자기 의심되기도 하지만 물가에서 울어대는 비둘기처럼 글을 잘 읽겠구나. 어려서 쓸데없는 일을 많이 했는지 안경까지 걸치고도 봄날 화창한 대낮에 화려한 말을 거구로 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구나.'
강릉에서 방랑 첫해 겨울을 보낸 병연은 봄이 오자 동해 바닷가를 따라 북상하며 방랑 행각을 계속하였다. 낙산 관음굴에서 자살하려는 여인을 말리며 지었다는 시에는 병연의 천재성이 잘 나타나 있다.
차죽피죽화거죽 충타지죽랑타죽
반반죽죽생차죽 시시비비부피죽
빈객접대가세죽 시정매매세우러죽
만사불여오심죽 연연연세과연죽
'이런 대로 저런 대로. 세상 되어 가는 대로 살고,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물결 치면 치는 대로 삽시다. 밥 있으면 밥을 먹고 죽 나오면 죽을 먹으면서 이대로 살아가고, 옳은 것은 옳은 대로 틀린 것은 틀린 대로 저대로 놔둡시다. 손님 대접도 집안 형편대로 하는 것이고 시장에서 장사도 시세대로 하는 법이니,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그렇고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 대로 지냅시다.'
구미에 빠짐없이 대나무 '죽'자를 나열한 것도 특이하지만 여기서는 우리말 뜻인 '대'로 읽어서 시를 지었던 것이다. 낙산을 떠나 간성까지 북행한 병연은 어느 날 관동 8경의 하나인 청간정을 찾았다. 청간정에는 마침 한 무리의 선비들이 시회를 비판 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라도 한잔 얻어먹을 욕심에 시회에 동참하게 되자 상대들은 먼저 통성명을 요구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처음 만났을 때 이름과 함께 본관이나 출신지, 조상의 벼슬 등을 확인하며 그 뿌리를 확인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것은 조선 후기 사회로 갈수록 양반 중심 신분사회가 고착화되었다는 의미도 되지만, 반면에 돈 많은 서민들이 양반 행세하는 것이 늘어나 그 진위를 확인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즉, 신분사회가 동요, 와해되어가던 현상의 반증으로 볼 수 있는 습속이었다. 병연은 이런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결국 자신의 오욕스런 내력이 다시 반추되는 것이 싫은 그는 "시골 촌놈이 무슨 변변한 이름이나 가졌겠습니까? 성은 김가고 이름은 입이라고 합니다"하고 얼렁뚱땅 대답을 하였다. 이런 대답을 들으면 상대방도 대충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더 이상 그의 내력을 캐묻지 않았다. 그의 행색과 이러한 문답을 통해서 어느덧 그의 호칭이 김삿갓으로 통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도 청산유수와 같은 즉흥시를 지어 선비들을 놀라게 한 뒤 술 몇 잔을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병연으로서는 방랑 행각에 이골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한시는 형식이 까다로운 정형시인 데다가 운자라는 제한을 두고 있어 시 짓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무리 한문이나 학문에 대해 소양이 깊더라도 즉석에서 손쉽게 짓기는 쉽지 않았다. 바로 이점에서 즉석 시를 많이 지어낸 김삿갓의 천재성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고성에서 온정리를 통해 금강산 산행에 오른 병연은 곳곳에서 유산객들과 만나 술을 얻어 마시며 아름다운 경관을 노래한 시작을 많이 남겨놓았다. 병연은 특히 금강산을 가보지도 않은 자가 풍류를 아는 체하는 것은 무식한 소치라고 질타했다고 한다. 외금강 일대를 빠짐없이 돌아본 병연은 온정리로 다시 돌아와 며칠을 쉰 다음 이번에는 옥류동과 동석동 계곡을 유람하였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자 근처 유정사에서 하룻밤 묵기로 하고 절을 찾았다. 유정사는 워낙 넓은 절이라 유숙을 청하기 위해서는 이곳 저곳 승방을 기웃거리며 사람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한 승방에서 노승 한 사람이 젊은 선비와 필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그곳으로 달려가서 하룻밤 잠자리를 부탁하자 그들은 한창 재미있는 선문답의 흥이 깨졌다는 투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불쑥 반감이 생긴 병연은 자신도 시를 조금은 할 줄 아니 대화에 끼워 달라고 은근히 도전적 자세로 청을 하였다. 그러자 두 사람은 행색도 남루한 자가 시를 논한다는 것이 가소롭게 느껴졌지만 어디 한 수 지어 보라는 식으로 지필묵을 내주었다. 병연은 두사람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툇마루에 걸터앉아 일필휘지로 시를 써내려갔다. 어둑어둑해지는 승방 안에서 병연을 불러들이지도 않고 있던 그들은 어줍잖게 선비인 양 무언가 끄적거리는 병연이 아니꼽게 보였던지 그러지 말고 언문풍월이나 한번 하자고 제의를 하였다. 이미 두 사람을 잔뜩 비꼬는 내용으로 시를 다 지은 병연은 모른 척 한쪽으로 지필묵을 밀쳐 놓고는 그러자고 대꾸하였다. 노승은 김병연을 골려주려는 심산으로 일부러 어려운 운자를 고르려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병연은 운자를 부르라고 채근하자 노승은 금방 생각 났다는 듯이 "타"하고 운자를 부르고서는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병연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병연은 운자가 불려지자마자 절의 경내를 돌아보면서 거침없이 한 구를 뽑아 냈다.
"사방기둥 붉어타." 노승은 요행으로 첫 구는 지었겠지 하는 표정으로 또 운을 불렀다. "타" "석양행객 시장타." 이번에는 조금은 제법이다는 생각을 하며 또 운을 뗐다. "타." 병연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마지막 구를 내뱉고는 횡하니 돌아서 나와 버렸다. "네 절 인심 고약타." 노승은 대꾸를 못하고 재수 없다는 듯이 혀만 끌끌 찰 뿐이었다. 소년 선비는 방 안에 같이 있던 노승과 병연의 수작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승방을 나오다가 조금 전 병연이 밀쳐놓은 시작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소년 선비도 그 내용을 보고는 분기 탱천하여 길길이 뛰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승수단단한마랑 유두첨첨좌구신
성령동령령동정 목약흑초락백죽
'둥글둥글한 중 대가리 땀난 말 불알같고, 뾰족뾰족한 선비 머리는 앉은 개 좆 같구나. 목소리는 구리 방울이 구리 솥에 부딪친 것 같고 눈깔은 검은 후추가 흰죽에 빠진 것 같구나'
귀향, 그리고 평안도 유람
금강산 유람을 마친 병연은 안병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함흥을 둘러보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때는 겨울이라 고원 땅에 들어서자 눈으로 길이 끊겨 봄이 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봄이 오고 얼음이 녹자 그는 함흥으로 다시 방랑의 발길을 옮겼다. 함흥은 그의 조부 김익순이 선천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근무했던 곳으로 내심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함흥을 향해 길을 나섰을 때는 병연이 집 떠난 지도 벌써 3년이 지난 헌종 1년(1835년)으로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이윽고 함흥을 구경하고 난 뒤에는 단천에서 한동안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가련이라는 기녀에게 지어주었다는 시 한 수가 전해지고 있다.
가련행색가련신 가련문전방가련
가련차의전가련 가련능지가련심
'가엾은 몰골에다 초라한 몸이 가련의 집앞에서 가련을 찾는구나. 애절한 나의 뜻을 가련에게 전해주면 가련은 이 불쌍한 내마음을 알아주기나 할까?' 그의 작품으로는 희귀한 구애시 한 편을 남겨 놓았던 셈이다. 기생 가련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단천을 떠난 병연은 계속 북행 길에 나서 함경도 북쪽 지방을 모두 유랑하고는 부령 땅에서 또 한 해의 겨울을 보냈다. 다시 봄이오자 두만강 지역까지 돌아보고 나서 문득 가족 생각이 났는지 영월 땅으로 돌아왓다. 다행히 병연이 집으로 돌아오고 얼마 뒤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서 임종은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맏형 병하가 이미 죽고 없었기 때문에 상주 노릇을 하느라 3년여는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때 젊은 아내는 둘째 아이를 잉태하고 낳았다. 공허한 마음을 가눌길 없었던 그였지만 음양의 섭리는 막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때 맏아들 학균이도 잘 커서 귀엽기만 하였다. 이제는 마음을 잡고 가족들과 함께 살아보려고 노력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고통과 회한의 상념들만 물밀 듯이 밀려들 뿐이었다. 4년여 방랑길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껀만 뼛골까지 스며든 허망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병연은 또다시 방랑의 길을 나섰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회한과 가족과 같이 있으면 자신의 고통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인연의 끈이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의 아내도 그런 남편의 태도에 체념을 하고 말았다. 가족과 같이 있는 시간이 고통이었던 그는 내몰리는 심정으로 다시 방랑의 길을 나서게 되었다. 병연은 이번에는 원주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원주 근방을 구경하고 한성 방향으로 길을 떠났는데, 도성이 가까워지자 인심이 사나웠는지 지평 근방에서는 하룻밤 유숙을 청하여도 문전축객 당하기 일쑤였다. 어쩔 수 없이 한뎃잠을 자면서 고단한 나그네의 삶 비유한 시 한 수를 남겼다.
이십수하삼십객 사십가중오십식
인간기유칠십사 불여귀가삼십식
'스무 나무 아래 섧은(30) 나그네가 망할(마흔) 놈의 집에서 쉰(50)밥밖에 얻어먹지 못했으니 인간으로서 어찌 이런(일흔) 일이 있단 말인가?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서른) 밥을 먹는 것만도 못하구나'
숫자를 묘하게 배열하여 형용사로 차용한 시였다. 지평에서 겨우하루를 지새운 그는 마침내 망우리 고개를 넘어서 한성의 초입에 다다랐다. 병연은 이즈음에 우연히 유일하게 평생의 교분을 가졌던 우전 정현덕을 만났다. 정현덕은 어려서 등과한 수재로서 훗날 형조참판까지 지냈지만 대원군과 민씨 일파의 권력 투쟁 틈바구니에서 희생되어 사약까지 받은 인물이다. 병연이 정현덕보다 3살 위였지만 서로를 인정하는 사이가 되어 병연이 한성에 있는 동안 정현덕의 도움으로 편안하게 구경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이 나그네의 숙명인지, 어느 날 정현덕의 친구들과 목멱산 계곡에서 한창 풍류를 즐기다가 잠시 할 일이 있다고 자리를 뜨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병연은 그 길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파주로 향했던 것이다. 그 후 파주를 떠나 개성에 이르러서는 또 문전축객을 당했던지 개성 인심을 한탄하는 시가 남아 전해진다.
읍호개성하폐문 산명송악기무선
황혼축객비인사 예의동방자독진
'고을 이름이 개성이면서 어찌하여 문들은 모두 닫아 걸었으며 산 이름은 송악인데 왜 땔나무가 없다고 하는가? 어두워서 손님을 쫓아내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닌데 동방예의지국에서 너희들만 홀로 야만족 진나라 사람이냐?'
개성을 떠난 병연은 평양에서 그의 소문을 듣고 흠모하던 소야월이라는 기생을 만나 한동안 지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길을 나서 안주 땅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병연 일가의 비극이 시작되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는 다시 밀려드는 회한으로 몸서리를 쳐야 했다. 안주에서 그의 조부 김익순이 처형되었던 정주성을 고통 속에 지나면서 주변 아무 곳도 둘러보지 않고 오로지 걷고 도 걸어서 하루만에 철산까지 이르를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날이 어두워지자 아에 서당을 찾아 유숙을 청해 보기로 하였다. 병연의 입장에서는 문자 나부랭이라도 아는 서당 훈장이 상대하기 마음 편했다. 시골 서당 훈장은 병연의 뜻을 듣자마자 객주나 찾아보라고 구박을 하다가 자기도 스스로 심하다 싶었던지 불한당이 아닌 선비라면 재워주겠노라고 조건부로 유숙을 허락했다. 선비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자기가 부르는 운자에 맞추어 시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심 사납지 않게 아무 이문 없는 손님을 쫓아 보내는 나름대로의 방법이 시 짓기를 조건으로 내거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시골 훈장은 까다롭고 어려운 글자를 고르느라 한참을 궁리하다가 마침내 운자를 불렀다. "멱". 병연이 물었다. "무슨 멱자입니까?". 훈장이 그것 보라는 듯이 대꾸했다. "찾을 멱자도 모르시오?". 병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첫 구를 지어냈다. "허다운자하호멱(수많은 운자 중에 하필이면 멱자를 부르는가)?" 훈장은 또다시 운자를 불렀다. "멱" 이번에는 스스럼없이 곧바로 대응해 낸다. "피역유난황차멱(아까 멱자도 어려웟는데 이번에도 또 멱자인가)?" 훈장은 은근히 약이 올랐는지 공연히 운자를 떼는 소리가 커졌다.
"멱!"
"일야숙침현어멱(하룻밤 묵는 것이 멱자에 달렸구나)." 훈장은 기가 찼는지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멱" "산촌훈장단지멱(산골 훈장이 아는 글자라고는 멱자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제 훈장은 못 당하겠다는 표정으로 병연을 쳐다보며 말투마저 공손해졌다. "나도 글줄이나 한다고 자신하지만 노형처럼 사멱난운을 거뜬히 해결하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이리하여 그 곳에서는 시 짓기를 조건으로 유숙을 허락한 훈장 덕택에 하룻밤을 바깥에서 자지 않을 수 있었다. 사실 병연은 곳곳을 유람하면서 자연히 서당의 신세를 많이 질 수밖에 없었는데 훈장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는지 훈장을 조롱하는 시들이 꽤 많다. 그중에서 통렬한 우스개로 전해지는 시 한 수를 감상해 보자.
서당내조지 선생래불알
방중개존물 생도제미십
'서당에 일찍이 찾아갔지만 선생은 내다보지도 않는도다. 방안에는 모두 귀한 물건으로 가득하지만 배우는 학생은 채 열 명도 되지 않는구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시는 지독한 욕설의 나열이다. 각 구의 말미 세글자들을 음독하면 차마 입에 옮겨 담을 수조차 없는 쌍욕이 된다. 병연은 철산에서 의주까지 올라갔다가 압록강을 따라 계속 북상하여 초산에 이르렀다. 초산에서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나 한동안 가정을 꾸며 훈장 생활로 2년여를 보냈다. 첫 번째 방랑길 중에도 고원 근방에서 간질병 있는 처녀의 서방 노릇을 잠시 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두 번째로 팔자에 없는 객지 혼인을 경험한 것이다. 방랑 생활 동안 간혹 여자 경험이야 있었지만은 본격적인 살림을 차린 것은 이번의 경우를 포함하여 두 번 있었다. 병연은 어느 가을날 밤 야반도주하듯이 초산 땅을 벗어나 만포진까지 올라가며 유랑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마음으로는 백두산 등정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길이 험하고 겨울이 닥쳐오고 있어서 부득이 남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백두산 대신 겨울 묘향산을 둘러본 병연은 2년 반만에 평양을 다시 찾아왔다. 평양에 들어서자마자 북행길에서 한동안 정이 들었던 기생 소야월의 집을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병들어 죽고 없었다. 인생이 한낮 뜬구름 같이 부질없다 하지만 아직은 젊디젊은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삶의 무상함에 넋을 잃고 지내던 병연은 황해도 은율의 구원산으로 가서 심신의 허탈함을 털어 버리고 한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한성에서 지우인 정현덕과 그 친구들에게 신세를 지며 한동안 지내고 있었는데, 고관으로 있던 족제인 김병익으로부터 한성을 떠나 달라는 채근을 받고 가족이 있는 영월 땅으로 두 번째 귀향을 하게 되었다. 세상을 주무르고 있던 안동 김씨 주류의 입장에서도 그의 존재는 공연히 껄끄러웠던 모양이었다.
남도유람
영월에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벌써 42살이 되었다. 20대에 처음 집을 나와 30대가 되어서 돌아갔다가, 또다시 길을 나서 40대가 되어서 집이라고 찾아든 것이다. 아내는 이제 완전히 남처럼 무심한 처지가 되어 버렸고, 자식들도 그리 살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병연은 다시 방랑 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머리 두고 숨쉴 수 있었던 세상은 자기와는 무관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뿐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된 것이다.
이번에 그는 남도지방을 여행하기로 하였다. 집을 나서 몇 일 지나지 않아서 충주를 거쳐 문경 새재까지 나아갔으나 한창때처럼 고갯길을 쉬지 않고 넘기가 힘에 부쳤던지 문경에서 한동안 머물러 지냈다. 이곳에서는 뜻하지 않은 묘지 분쟁에 휩쓸려 옥살이까지 하다가 헌종이 죽구 철종이 등극하자 일종의 특사로 겨우 풀려났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는 풍수설이 일반에 널리 퍼져 있어 이른바 명당 자리를 잡기 위한 분쟁이 꽤 많았다. 이것을 산송이라고 하는데 심한 경우 명당이라고 알려지면 남의 땅에 시신을 몰래 묻는 투장까지 하였다. 이런 진흙탕 싸움에 어쩌다가 휘말려 들어서 공연한 옥살이로 방랑에 찌든 그의 몸만 더 상하게 되었다.
문경에서 겨우 풀려난 병연은 낙동강을 건너 대구로 들어갔다. 대구에서 며칠을 보낸 후에 운문산을 유람하고 경주, 의성을 거쳐 안동까지 올라갔다. 안동에는 그의 시조인 삼태사의 분묘가 있는 곳이고 이퇴계의 사당도 있었다. 김병연은 이곳에서 한동안 훈장 생활을 하며 지내기도 했다. 그로서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그리움과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황의 향기를 그리기 위해서였는지 그곳에서 상당 기간 머물렀다. 또한 문경에서의 옥살이 때문인지 건강이 좋지 못해 쉽게 먼길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김병연은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또다시 아무 미련 없이 북쪽으로 길을 떠나서 예천, 영주를 지나 죽령을 넘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번 허한이 들은 방랑객의 몸은 쉽게 회복되지 못하였는지 풍기쯤에 이르러 길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 지나가던 그 지방 촌부가 그를 발견하고 자기 집에 데려다 간호해주어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로서는 첫 번째 객사할 위기를 간신히 넘긴 것이다. 이집에서 꼬박 한 달 이상 누워 지내다가 늦가을쯤 아직도 말리는 촌부의 손길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너무 오래 신세를 지는 것이 바늘방석 같아 길을 나섰지만 아직 험한 길을 돌아다닐 상태는 아니었다. 결국 아픈 몸을 이끌고 영월 땅 가족들에게로 잠시 돌아가 있기로 결정하였다. 그로서는 가족에게 염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병든 몸을 의탁하여 정양할 수 있는 곳은 가족들이 있는 집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가 병든 몸을 이끌고 세 번째로 집에 돌아왔을 때의 나이는 벌써 50세였다. 20대 청춘에 집을 떠나 10년쯤마다 한 번씩 죽지 않고 얼굴이라도 보여주는 것이 반갑기는 하지만 그의 가족에게도 그는 타인 같은 존재였다. 이미 아내도 늙었고 맏아들 학균은 장가를 들어 그에게는 손자까지 생겨있었다. 첫 번 귀향 때 얻었던 둘째 아들 익균도 어언 헌헌장부가 된 것은 물론이다. 병연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자신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늙고 병든 몸으로 돌아온 자신이 가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자식들 보기도 면목이 없고 낯선 며느리에게는 부끄러운 심정까지 들었다. 결국, 건강을 어느정도 되찾자 가족들의 만류를 뒤로한 채 병연은 또 다시 집을 나섰다. 그 길로 그는 정현덕을 만나보고 싶어 곧장 한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때 정현덕은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있어 상면하지 못하자 그를 찾아보기로 하고 이번에는 충청도 쪽으로 길을 잡아 떠났다. 차령 고개를 넘어 공주, 부여를 둘러보고는 석서 전라도 방향으로 길을 잡아서 전주까지 들어갔다.
어느날 전주 명물인 완산에 올라 만경대 부근에서 산천경계를 살펴보다가 일단의 풍류패들을 만나서 같이 동참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술 얻어먹은 값으로 시 한 수를 남겼는데 거들먹거리는 양반들을 통렬히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풍류객 중 한 사람이 운자를 불렀는데 술자리의 취흥에다 그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무시하는 심사로 한글 자음을 닥치는 대로 불렀다. 일종의 희롱이었다. "기역!"
"요하패기역(허리춤에 'ㄱ'을 꿰어차고)."
"이응!"
"우비천이응(소의 코는 'ㅇ'을 뚫었구나)."
"리을!"
"귀가수리을(집에 돌아가서 'ㄹ'을 닦아야지)."
"디귿!"
"불연점디귿(그렇지 않으면 'ㄷ'에 점을 찍게 되겠구나)." 허리에는 낫을 차고 있다는 것이고 둥그런 코뚜레한 소를 그렸으니 목동의 모습을 노래한 것인데 세 번째 구의 리을은 한자의 자기 '기'자를 대신한 것이고, 마지막 구의 디귿에 점을 찍으면 망할 '망'자가 되는 것이다. 병연은 별다른 할 일도 없이 대낮부터 술이나 마시며 놀고 있는 풍류객들을 철 모르는 어린 목동에 비유하여 더 배우고 수양하여 자중하지 않으면 패가망신한다는 경고를 시로 표현한 것이다.
병연은 그 길로 전주를 떠나 지리산을 넘어 경상도 땅으로 들어가서 드디어 정현덕이 있는 동래에 도착했다. 동래에서 옛 친구를 만나 한동안 머물다가 해변을 따라 다시 전라도로 들어가서 무장 땅에서 잠시 훈장 생활로 겨울을 보내고, 그 다음해에는 전라도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이 시절 그는 몸이 많이 약해져서 힘들어하면서도 술만 만나면 정신없이 마셔대는 자학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했다. 늙고 병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파격시도 이 시절에 지은 것인데 그의 해학적 기지가 번뜩이고 있다.
천장거무집 화노접불래 국수한사발
지영반종지 강정빈사과 대취복송하
월이산영개 통시구리래
(하늘 길어서 잡을 수 없고 꽃은 늙어 나비도 오지 않는다. 국화 꽃이 찬 모래에서 피고, 가지 그림자는 땅위에 반쯤 쫓아왔다. 강변 정자 옆을 가난한 선비가 지나가다가 크게 취하여 소나무 아래 엎어졌다. 달이 옮겨가자 산 그림자마저 바귀니 부지런한 장사꾼은 벌써 시장을 통하여 이익을 얻으러 오더라). 이 시의 내용은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우리말 발음대로 읽어보면 '국수 한 사발', '지영(간장)반 종지', '강정'에 '빈사과'에다가 '대취(대추)'에 '복송하(복숭아)' 등의 음식을 늘어놓기도 하고 '월이산영개(계)'에다 '통시구리래(구린내)'까지 해학의 절정을 보여준다. 전라도에서 또 한 해의 겨울을 맞이한 그는 동복 땅에서 마침내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길에 쓰러졌다. 다행히 인근 주민에게 구조되었지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철종 14년(1863년)에 56살의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죽기 얼마 전에 둘째 아들 익균이 그를 찾아와 몇 번이나 귀향을 채근하였으나 끝내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는 자기의 시에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다. 돌아가자니 그것도 어렵고 머물러 있자니 그 또한 어렵다. 몇 날이고 방황하다가 길가에서 스러지게 된다. 가슴시린 체념이 가득 담겨져 있는 이 시처럼 그는 일생을 방랑한 나그네답게 먼 타향 땅 길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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