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위민 정신으로 일관한 경제 전문가 김육(1580~1658, 79살, 노사).
김육은 자신의 정치 신념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투철하였고 그 신념을 평생에 걸쳐 이루어낸 의지의 정치가였다. 그는 연이은 왜란과 호란으로 전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되었던 시절에 살면서 평생을 오로지 백성을 잘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에 매진했던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모든 만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허황한 정신세계에 몰두하기보다 실제 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추구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물질의 가치는 인간을 위함에 있는 것이지 물질 그 자체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여 오늘날의 황금 만능주의와는 현격히 다른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그는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항상 강인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지만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체의 사심도 없이 고통받는 백성들 편에서 신념을 실천하였기 때문에 반대파조차 그를 무작정 매도할 수는 없었다. 그가 강인한 의지로 척벽 같은 신념을 역설하면서도 파란과 굴곡으로 점철되는 정치판에서 귀양 한번 가지 않고 생애를 마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반듯한 삶의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시대에서 가장 명분론이 횡행하던 때였다. '북벌론'에서 출발한 성리학적 명분론은 '조선 중화주의'로까지 발전되어 갔으니 그 정도의 심각성은 익히 알 수 있는 바인데, 그는 그러한 시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현실적인 주장을 줄기차게 역설했던 것이다. 그의 정치철학의 근본은 오로지 위민 정신에 있었고 이를 위해서 줄기차게 특권층의 철폐를 주장하였으며 부의 편재가 백성을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나라도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민심 논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통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하늘, 외적, 백성 세 가지이다. 그 중에서 가까운 데 있는 두려운 존재인 백성들을 안정시킨다면 멀리 있는 다른 두 가지 두려움은 자연히 해소될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에 몇 안 되는 경제 전문가이자 과학 기술자였으며, 실천적 학문을 추구하여 반계 유형원에게 이어진 실학 사상의 문을 열어놓은 인물이다.
굳세고도 단정한 인물
김육은 조선 14대 왕인 선조 133년(1580년)에 한성의 마포에서 재랑 김흥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청풍이고 자는 백후이며 호는 잠곡이다. 그의 고조부 김식은 중종대에 조광조와 함께 개혁 정치를 추진하다가 죽음을 맞은 '기묘명현'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12살 때 이미 '소학'을 통달했고 커가면서 성품이 굳세어지고 몸가짐도 단정했으며 말수도 많지 않았다. 13살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졸지에 어머니를 도와서 할머니와 어린 동생 삼남매를 보살펴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피난중에 우계 성혼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학문의 진보를 이루는 데는 큰 도움을 받았다. 19살 때 정유재란이 발생하여 이번에는 황해도 연안으로 피난하였는데 그 해에 할머니가 죽었고 이듬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전쟁은 생활의 고통과 함께 육친과의 이별까지 그에게 강요한 것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꿋꿋하게 장례 절차를 마친 후에 아버지 묘까지 이장시켜 부모를 남양주 미금 땅에 합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만큼 그는 굳건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후 한성으로 돌아와서 이모부댁에 의지하고 살다가 25살에 윤급의 딸인 파평 윤씨를 맞아 결혼을 하고, 그 이듬해인 선조 38년(1605년)에는 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후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재임으로 봉직하다가 광해군 3년(1611년)에 공자의 문묘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자 김광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5명의 명현을 공자의 문묘에 함께 모시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북인 정권은 실권자인 정인홍이 이를 반대하자 그는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유학자 명부인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해 버렸다. 정인홍은 자신의 스승인 조식보다 다름 사람이 먼저 공자의 문묘에 봉양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은 광해군 왕위 계승에 공이 큰 대북파의 거두로서 이 사건은 등극 초기에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던 광해군과 정권 실세들을 자극시켜서 김육을 비롯한 성균관 학생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
성균관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여 관직에의 진출이 봉쇄되는 것을 뜻한다. 그후에도 광해군 친위세력에 의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옥사가 연이어 일어나자 김육은 35살 되던 해인 광해군 6년(1614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가평군 잠곡으로 들어가서 칩거하고 말았다. 잠곡은 17살 때 고모부를 따라 가본 적이 있는 곳으로 어린 김육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던 곳이었다. 잠곡에 숨어들어온 그는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구워 팔아서 생계를 충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잠곡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그는 호를 회정당에서 잠곡으로 바꾸기까지 하였고, 일반 농민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민본 위주의 사상적 터를 닦았다.
본격적인 관직 진출과 지방관 생활
김육이 잠곡에 은둔하여 조용히 살고 있는동안 세상은 또 한번 바뀌고 있었다. 광해군 15년(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인조는 등극하자 광해군대에 박해를 받았던 인사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는데, 김육도 부름을 받고 올라와 의금부 도사직을 제수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벌써 44살의 중년이었다. 그러나 죄인 압송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관직에 나간지 얼마 안 되어서 파직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파직당한 다음해에 반정의 논공행상에 물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에 한성이 반란군에게 점령당하자 왕은 공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육은 인조를 따라 가서 피난길의 임금을 극진히 봉양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그 공으로 김육은 음성 현감을 제수받았고, 그 해 9월에 중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위직 진출을 위한 자격을 얻기도 했다. 당시 음성은 두 개의 면만을 관장하는 작은 현이었는데 그나마도 백성들은 수탈을 견디다 못해 흩어져서 사람을 찾기 어려웠고 논밭은 황폐해져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현실을 목도하여 그는 분연히 잘못된 정치의 폐단을 고치기 위한 건의로써 '음성현진페소'를 적어 올렸다. 현실과 동떨어진 세금과 요역이 징발이 민폐의 원인으로 이를 감하여 줄 것을 청하고, 이웃 충주가 관할하기 어려운 죽산과 진천을 음성현 소속으로 행정구역을 바꾸어 달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1년도 채 못되어 중앙으로 불려 올라와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을 역임하다가 이듬해에 사간원 헌납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그해(인조4년)에 호패청이 신설되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서 폐단만 늘어어나자 그는 이의 폐지를 건의하여 관철시키기도 했다.
정묘호란(1627년) 이듬해에 홍문관으로 자리를 옮겨서 대소직을 역임하다가 인조 10년(1632년)에 53살의 나이로 사간원 부수장으로 종3품인 사간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1636년) 3월에는 동지사로 명나라에 들어갔다가 연경에서 호란 발생과 삼전도의 굴욕 소식을 듣고는 통곡을 하기도 했다. 이듬해 6월에 1년만에 귀국한 그는 잠시 쉬다가 충청 감사를 제수받아서 또다시 목민관이 되었다. 그가 충청도에 부임하여 현지 사정을 살펴보니 전쟁을 겪고 난 후라 예전에 현감으로 일할 때보다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각종 세금으로 인한 수탈은 한층 극심해져 견디기 힘든 형편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공물의 폐단이 제일 컸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대동법' 시행에 대한 그의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대동법'이란 물품을 징수하는 공물 대신 쌀이나 무명으로 통일하여 내는 세금 징수 제도를 말한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 이미 경기 일원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하였고, 인조대에는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하고 있었다. 그는 양 도에서 실시해 본 결과 그 정당성과 유용성이 확인되었으므로 충청도에서도 실시하자고 주장하였고, 더 나아가서 충청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위하여 가장 타당한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대동법 실시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충청도의 경작토지 면적과 관청이 필요한 경비를 조사한 결과 대동법이 실시되면 백성들의 부담이 훨씬 줄어든다는 계산까지 뽑아서 재차 건의를 올렸으나 이때에는 수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고위 관리들이나 권문세가의 반대가 완강했기 때문이었다. 즉 대동법이 실시되면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그들의 이익이 침탈되는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결국 기득권 층의 방해로 일반 백성을 위한 제도가 도입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대동법 시행의 결과를 얻지 못한 채 1년여 임기를 마치고 동부승지를 제수 받아 중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동법 시행에 대한 의지는 잊지 않아서 그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중앙 정계에서의 활동
중앙 정계로 돌아온 그는 형조참의 겸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사간원 대사간, 한성부 우윤 등을 거쳐 인조 21년(1643년)에도 우의정 이경석, 서장관 유심 등과 함께 또 한번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68살의 나이에 개성 유수로 발령을 받아 세 번째 지방관 생활을 하였고, 70살이 되던 해(1649년)에 인조가 죽자 국장의 책임을 맡아 수행하였다. 국장을 마치고 효종에 의해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어 마침내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차 사임을 요청하면서 아울러 또다시 대동법 실시를 간하였다. 참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하여 줄기차게 주장을 거듭한 셈이다. 이때 대동법 실시에 따른 나라의 이해 득실에 관하여 김집과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우의정을 사직하고 양주로 내려갔으나(1650년) 효종은 그를 영중추부사에 이어 다음해(1651년)에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계속 사임을 고집하자 "지금 청나라에서 사절이 곧 도착하는데 조정안에 수장도 없이 맞아들일 수 없으니 정 사직하려면 그들이 가고 난 다음에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달래서 그를 불러들였다.
왕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그는 별수 없이 홍제원으로 나가서 청사를 영접하고는 그들이 떠나자 또다시 사직을 청하였다. 평소에도 그는 70살이 넘으면 생각에 한계가 오기 때문에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터라 거듭 물러나기를 간청한 것인데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된 효종은 그와 같은 노재상이 필요한 입장이어서 그를 계속 붙들었던 것이다. 결국 왕의 뜻을 완전히 물리칠 수 없어서 잠시나마 조정에 더 남아 있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그해(효종2년)는 그에게 있어서 굉장히 의미 있는 한 해가 되었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8월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실시되었고, 11월에는 그의 둘째 아들 우명의 딸이 세자빈으로 책정되었던 것이다. 그 해 12월에 건강이 나빠지자 영의정을 정태화에게 물려주고 우의정으로 나앉았다가 이듬해(1652년) 3월에 좌의정이 되었다.
그 다음해(1653년)에는 채유후, 이경여, 이후원 등과 함께 '인조실록' 50권을 찬진하였으며, 효종 5년(1655년) 7월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이 해 12월에 그의 계청에 따라 행전법의 과조를 제정하기도 했다. 즉 김육에 의해 화폐 유통이 추진된 것인데 그에 따라 상평청에 관전낭청이 신설되어 이를 주관하였다. 또 그 해에는 맏아들 좌명이 대사간이 되어서 부자가 함께 당상관의 지위에 재직하는 영광을 얻었다. 효종 8년(1657년)에는 '선조실록'을 개수해 내고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상소를 두 번이나 올렸다. 실로 관직 생활 내내 일관되게 백성의 편에 서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바를 줄기차게 추진한 셈인데 그의 이런 노력에 의하여 대동법이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나마 실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의 숙원이었던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을 끝내 보지 못한 채 그 이듬해(1658년)에 전라감사를 자청하여 나가서는 전라도 전 지역에 걸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대동법 시행의 의미
김육에 의하여 추진된 대동법은 공납을 대신하여 시행되었던 조세 제도이다. 왜 그가 그토록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대동법 시행을 자장하였는지를 알려면 당시의 공납에 의한 폐단을 이해하여야 한다. 공납은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여 납부하게 하는 세금인데 가짓수도 많거니와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가장 부담이 큰 조세였다. 더구나 그 지방에서 나지도 않는 물건을 납주하도록 요구하기도 하고 부가 기준이 고을의 대소에 따라 차이가 없이 동일하였으며 현지에서도 빈부를 따지지 않고 징수되었음은 물론 각 호마다 부과되어 도리어 빈민이 부호들보다 세금을 더 내는 형국이었다. 거기에다 지역에서 구하기 힘든 물품에 대하여는 대신 납부해주고 그 수수료를 받는 방납제도가 도입된 이래 공물을 심사하는 점퇴관리와 방납업자의 협잡에 의하여 백성들은 물품의 실제 가격의 몇배에 해당하는 값을 치러야 했다. 이에 따라 중과세를 견디다 못한 백성은 유망민이 되었고 농지는 경작할 자가 없으니 자연 황폐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가 재정도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일부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악법이 계속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폐단을 고치고자 김육이 줄기차게 주장한 대동법은 어떻게 보면 간단하게 시행할 수 있는 법체계였다. 즉 과세의 밥법을 토지 소유를 기준으로 하여 물품이 아닌 쌀과 베로 내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일찍이 조광조가 그 시행을 제기한 이래 율곡 등 여러 사람이 시행을 주장하였으나 적극적 도입이 저지되고 100년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어온 까닭은 대토지 소유자들인 고위 관리들의 조직적 방해 때문이었다. 대동법이 광해군 즉위 해에 경기도에 처음 도입된 이후 인조 즉위 해에 강원도에만 확대 적용된 까닭도 남부지방에 비해 관료 지주들의 소유토지가 적었던 관계로 시행에 대한 반대가 극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효종 즉위 해에 김육의 상소로 촉발된 대동법 논쟁으로 당시 조정은 완전히 둘로 갈라져 버렸다. 김집은 율곡의 제자인 김장생의 아들로서 송시열, 송준길 등 당대의 뛰어난 직계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던 서인의 영수격인 인물이었다. 직위상으로는 찬성파인 우의정 김육, 좌의정 조익, 연잉군 이시백 등이 상급자 였지만 반대파들은 서인 정권의 직계 주류의 인물들이자 일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결국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집권 세력인 서인은 파를 나누어 갈등을 빚게 되었다.
대동법을 찬성하는 김육 등을 한당이라 하였고, 반대하는 깁집 등은 산당이라 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는 명분이나 현실적 필요에서 어찌할 수 없는 대세였기 때문에 효종대에서 충청도와 전라도에 확대 실시한이후 함경도는 현종 7년(1666년), 경상도는 숙종 3년(1677년), 황해도는 숙종 34년(1708년)에 실시되었다. 실로 광해군 즉위 해(1608년)에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이후에 전국적으로 확대 정착되기까지 꼭 100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던 것이다. 각지에서 대동법이 실시될 때 그 기준이 되었던 자료는 김육이 충청도에 그것을 시행하기 위해 계획서로 제출하였던 '대동사목'이었으며, 대동법의 과세 기준은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1결당 대동미 12말로 통일하게 되었다.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부호의 부담은 늘고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은 줄었으며 국가의 재정 수입은 증가되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사회 안정에 큰 역할을 한 셈이었다.
대동법 시행으로 변화된 사회 현상은 또 있다. 그것은 공납의 폐지로 조정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공인의 등장이었다. 공납 청부업자이자 어용 상인인 공인의 등장은 수공업과 산업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초기 형태의 산업 자본가로 발전되어서 그 후 신분 제도의 변화와 사회 발전을 주도하였다. 김육이 평생을 걸고 줄기차게 추진해 온 대동법은 조선 사회의 일대 변화를 유도한 셈인데 그의 이러한 끈질긴 노력에는 어린 나이부터 가장으로서 겪은 경험과 잠곡에서의 생활이 바탕이 되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는 '소학'의 '가언'편에 나오는 송나라 성리학자 정호의 다음과 같은 말을 가슴 깊숙이 담아 두었다가 이를 현실 정치에서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것은 '일명지사 구존심어애물 어인필유소제'라는 구절로 '관직에 나간 사람은 만물을 아끼는 마음을 가진다면 반드시 사람에게도 혜택을 줄수 있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 구절을 그는 65살 때 지은 '종덕신편'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어려서 느낀 애물제인은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라고 축약해서 쓰기도 하였다.
그에 의하여 제기된 기타의 개혁조치
김육은 대동법 실시 이외에도 후기 조선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우선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역법 개정이다. 조선은 그동안 300년에 걸쳐 세종대에 만들어진 '칠정산 내외편'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절기가 맞지 않는 등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서 농업 활동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정확한 역법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예수회 소속 선교사 아담샬이 국립 천문대격인 흠천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서양의 과학 기술에 의하여 고안된 '대청 시헌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인조 23년(1645년)에 관상감 제조로 있던 김육은 행호군 한흥일이 중국에서 가져온 '신력효식'이라는 신역법에 관한 책을 연구하여 조선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러나 내용이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자 사행시에 일관을 대동시켜 역법을 배워 오게까지 하여 효종 4년(1653년)에 조선에 맞는 시헌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때 만들어진 시헌력은 고종 33년(1896년)에 태양력을 사용할 때까지 조선의 공식 달력으로 사용되었다.
두 번째로 그에 의해 제기된 과학기술은 수차를 이용한 영농방법이었다. 전답에 대한 종래의 급수방식은 일일이 사람이 퍼 올리는 원시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가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역설한 중국식 수차는 이러한 노력을 대폭 줄여줄 수 있었다. 이뿐만아니라 그는 물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선각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하천을 정비하자는 '성중구거수치계'를 제안하기도 했다. 세 번째로는 교통 및 운송 방법에 있어서 수레를 이용하자는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종래의 운송 수단은 말을 이용하는 방법이 최상이었는데 중국과 사신이 오갈 때 연변의 백성들은 이 뒷수발을 하느라 인마가 배겨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는 중국에 사신으로 오가면서 수레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고 조선의교통과 운송에도 수레를 적극 사용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고 그 편리함을 도모하자고 역설했다. 조선은 중국과 달리 산지가 많아 수레 사용이 용이하지 않다는 반대여론에 대하여 그는 중국이라고 험한 고개가 없는 것이 아니라며 당차게 밀어붙였다. 수레를 이용하면 많은 사람들이 말이나 나귀 한 마리만 가지고도 이동할 수 있으며, 수레에 장막을 설치하여 사용하면 밤에 잘 때 별도의 장막을 치는 번거로움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네 번째로는 화폐 통용을 위한 주조 사업에서 파생된 작업으로 활자를 제조하여 많은 서적을 인쇄해 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양대 전란 후에는 제대로 된 서적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책을 찍어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활자 제조와 서적의 인쇄에 대한 책임을 맡았던 교서관도 완전히 그 기능을 상실한 입장이었고, 그나마 필요한 서적은 목활자를 만들어서 근근이 찍어내고 있었다. 당시 상평청과 선혜청에서 경제 관련 일을 보고 있던 김육은 예산의 지원을 통해 교서관에서 다시 책을 만들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효종 7년(1656년0에는 궁중 약국인 내국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만병회춘' 10권을 찍어냈고, 이듬해에는 '정유식년 사마방목'을 인쇄했으며 효종 9년(1658년)의 죽기 전에는 '삼대가 시전집' 10권을 찍어내기도 하여 학문의 진전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그는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금속 합금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은 아들 좌명과 손자 석주에 이르기까지 활자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현종 9년(1668년)에는 아들 좌명이 구리를 재료로 한 '삼주갑인자'를 만들어 '기효신서'를 찍어냈고, 숙종대에는 손주 석주가 '한구자'를 만들어 많은 서적을 인쇄하였다. 다섯 번째로 안전한 조운 사업을 위하여 체재방식의 도입을 추진했다. 이 방법은 태안반도의 인근 도서에 창고를 지어놓고 세선들은 이곳에 화물을 내려놓은 후에 육지까지는 작은 배로 운반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남부지방에서 중앙으로 반입되는 세미는 주로 서해안을 따라 배로 운송되었는데, 서해안은 세계적으로 조차가 심하고 암초가 많기 때문에 미국선이 차손되기 일쑤여서 이러한 방법을 제안한 것이다.
이렇듯 김육에 의해서 제안되고 만들어진 모든 제도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위한 일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백성들이 현실의 잘못된 제도와 정치 때문에 그 피폐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향리에 있을 때에는 스스로 농사일을 하면서 생산에 종사했으며 관직에 나가서는 백성들의 궁핍을 구제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스스로 의 생활에 대하여는 엄격하고 철저하였으며 항상 검소하고 청빈하였다. 평생을 유기로 만든 제기는 사용하지 않고 항상 목기 그릇을 사용했으며, 우의정이 된 71살까지 한성에 집 한 칸 없이 셋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바쁜 공무 중에도 학문에 정진하였음은 물론 '잠곡집','해동명신록','유원총보','기묘록','구황촬요'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항상 단정한 몸가짐을 잃지 않고 살아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강인한 일면도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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