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낭만적인 시인이자 격정적인 정치가 - 정철 (1/2)
정철은 국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면서 격화되어 가던 당쟁의 와중에서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투쟁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었다. 사실 그에 대하여는 문학가로서의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정치가로서의 일면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쟁의 와중에서 너무나 첨예하게 한쪽 편에 섰던 관계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불운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권력 암투의 희생양으로 고통을 받았던 그는 평생을 정쟁의 마당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직선적인 성품으로 호오가 너무도 분명하여 교류관계도 적이 아니면 친구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정치적 융통성과 포용력이 부족했던 그는 반대파에 대하여 언제나 극렬한 감정적 대응을 하여 상대를 어떻게 하든지 제압하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타협과 양보도 차선의 가치가 될 수 있는 정치판에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치열한 성품의 그에 대하여 친구인 율곡은 충고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사리에 치우치지 말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라"고 하기도 했다. 과격하고 불같이 급한 그의 성정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소위 정여립 오반 음모사건의 처리 과정이었다. 그는 이 사건이 발생하자 맏아들의 상중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취조관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1,000여 명에 이르는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앞장을 섰다. 그는 실로 관동별곡이나 사미인곡 같은 아름다운 시를 지은 인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도 악착 같은 일면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그의 자질과 존재는 너무나 뚜렷하여 정치적 기복을 덮어주고 있으며, 풍류를 즐기면서 소요자연하던 그의 풍모는 가히 낭만적 시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풍부한 시적 상상력과 섬세하고도 연연한 감정의 세계를 맛깔스러운 글로써 잘 표현해낸 뛰어난 시인이었다. 현실 세계의 실의와 참담함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보상적 사고의 문학가였으며, 오로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지아비에 대한 여성의 사랑으로 표현해 낸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권력 암투의 희생자
정철은 조선 11대 왕인 중종31년(1536년) 한성 자하문 밖에서 호군을 지내 정유침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이며 자는 계항이고, 호는 송강이다. 인종의 후궁이었던 맏누이와 성종의 셋째 아들 계림군 유의 부인인 둘째 누이로 인하여 어려서부터 궁중에 자주 출입하면서 훗날 명종이 되는, 그보다 2살 위인 경원대군과 가깝게 지냈다. 그가 10살 되던 해에 인종이 재위 9개월만에 후사가 없이 병사하고 인종의 배다른 동생 경원대군이 불과 12살의 나이로 왕위를 잇게 되었다. 어릴 적 소꿉 친구이던 명종의 등극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집안을 풍비박산시키는 사건의 원인이 되어 그는 굴행의 나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 일파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을사사화에 그의 집안이 연루되었던 것이다. 을사사화는 왕의 외척들인 대윤과 소윤의 갈등에서 비롯된 피의 살육전이었으며, 그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즉위 당시 명종이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인종의 즉위와 함께 조정에서 쫓겨났던 그녀의 동생 윤원형 일파가 조정에 다시 등용되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윤원형은 중종대에 이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과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는데 명종의 즉위와 함께 득세하게 된 것이다. 두 세력은 같은 혈족이면서도 왕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쌓아왔고 선배격인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유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명종 즉위 후 세를 얻은 소윤측에서는 정적인 대윤을 정계에서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진행시켰다. 먼저 군기시 첨정으로 재등용된 윤원로가 나서서 윤임 일파가 대군 시절의 명종을 해치려 했다고 무고하여 제1차 제거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중신들에 의하여 망언을 조작하고 천친을 이간시킨다고 도리어 탄핵을 받아 파직된 후 유배되고 말았다. 윤원형은 그 형의 직접적인 방법이 실패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작당을 끌어들인 후 증거를 조작하여 대윤측에 역모의 모함을 뒤집어씌우는 비열한 방법을 썼다. 조정 내에서는 자신의 심복들인 이기, 임백령, 허자, 정순봉 등으로 하여금 인종 사망시 윤임이 숙빈 홍씨의 아들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려고 획책했다고 무고하도록 하는 한편, 궐 밖으로는 대윤측에서 계림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마침내 대윤 세력에게 역모 혐의를 덮어씌워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대윤측에는 기묘사화 이후 그 힘이 약화되었던 신진 사림들이 새롭게 모여 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많은 사림들이 또다시 참변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이 을사사화의 전모이며, 이때 윤임측이 옹립하려 했다는 계림군이 바로 송강의 둘째 매형이었다. 결국 계림군은 붙잡혀 처형되었고, 송강 일가도 사건에 연루되었다하여 이조정랑이던 맏형 정자는 모진 매를 맞고 귀양가는 도중에 장독으로 죽고, 아버지도 함경도 정평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송강은 10살의 어린 나이로 집안이 일거에 몰락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서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그때 정평에서 2년간 귀양살이를 하던 그의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로 이배되었다가 명종 6년(1551년)에 원자 탄생에 따른 특사로 겨우 귀양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유배지를 전전하던 그도 벌써16살의 소년이 될 만큼 세월이 흐른 뒤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 시절을 고통 속에서 보냈던 그는 이 때문에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성과 함께 배타적인 증오심을 키우게 되었다.
뒤늦은 학업과 관직 진출
귀양에서 풀린 그의 부친은 살얼음판 같은 한성 생활을 청산하고 초야에 묻혀 살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선영이 있는 전라도 담양군 창평으로 내려갔다. 16살이 되도록 제대로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던 송강은 창평에 정착하면서 처음으로 고봉 기대승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뒤이어 당시 전라도 도학의 사종으로 존중받던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21살 때에는 양송천과 임석천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뒤늦은 학업이었지만 그는 뛰어난 스승을 연이어 만나는 행운을 얻어 학문 정진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학업에 몰두하는 도중인 17살 때 문화 유씨와 결혼도 하였다. 그의 부인 유씨는 사촌 김윤제의 손녀이자 성산 지방의 부호이던 유강항의 딸로 송강이 창평에 정착한 직후 순천에 있던 둘째 형 정소를 찾아가는 도중에 지곡리 성산에 있던 김윤제의 집에 들렀던 것이 계기가 되어 혼인하게 된 것인데, 앞서의 훌륭한 스승들도 처의 외할버지인 김유제의 주선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공부하던 생활이 그리워서 훗날 처의 외가 쪽 재당숙으로 그의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서하당 김성원을 경모하며 쓴 글이 그 유명한 성산별곡이다. 송강으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온화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던 셈이다.
10년을 각고의 노력으로 학문에 몰두하던 그는 26살 때 진사시에 장원한 후 이듬해 별시문과에서 또다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합격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한 명종은 어릴 적 소꿉 친구를 친히 배알하고 연회를 베풀어 치하해 주었다. 그는 과거 급제 직후에 성균 전적 겸 지제교로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였다. 그런데 지평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왕실과 관련된 범죄 사건을 다루게 되었다. 명종의 종형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노리고 자기 처남을 죽인 살인 사건이었다. 이것이 발각되어 경양군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명종이 자기 사촌형을 살리기 위해 사건 처리 책임자인 송강에게 극형만은 면하게 해주도록 은밀한 분불르 내렸다. 그러나 송강은 그 누구라도 국법을 어길 수 없다고 버텨서 기어코 경양군 부자를 처형하고 말았다. 왕의 부탁까지 무시하는 송강의 처사에 기분이 상한 명종은 그를 이리저리 외곽의 한직으로 옮겨 다니게 하다가 4년만인 명종 21년(1566년)에야 화를 풀고 지평의 직책에 재임명하였다.
그 해 9월에는 북관어사의 명을 받아 북변지역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홍문관 수찬을 제수받고는 호당에 선발되어 율곡 등과 함께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정진했다. 그 이듬해 명종이 34살의 젊은 나이로 후사가 없이 죽자 중종의 막내 아들인 덕흥군의 3남 하성군이 16살의 나이로 등극하니 이 사람이 조선 14대 왕 선조다. 송강은 선조 원년에 32살의 나이로 청요직인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원접사 박사암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다음해에는 홍문관 수찬, 교리를 거쳐 다시 지평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정계에 자리를 잡아가던 사림과 이를 견제하려는 척사파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싹트고 있었다. 더구나 조정에는 아직 윤원형에게 아부하여 출세한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신진 사류들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이는 새시대의 시의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아래 양 세력이 첨예하게 각축하는 최일선에서 사림을 대표하여 싸우는 투사가 송강이었고, 척사파의 주동 인물은 대사헌 김개와 이조판서 홍담이었다. 결국 이 대립 과정에서 이미 정치의 대세가 되고 있던 사림이 승리하였고, 이후로 조선 정치는 완전히 사림의 주도하에 운용되었다.
송강은 선조 3년(1570년) 4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서 사직하고 3년상을 치른 뒤 복직하여 1년이 지날 때쯤 또다시 어머니 상을 당하여 불혹의 나이가 다 되어서야 상복을 벗을 수 있었다.
동, 서 붕당 발생
모친상을 마치고 조정에 다시 돌아온 송강은 내자시 정, 의정부 사인, 홍문관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그가 관직에 돌아온 그 이듬해부터 조정은 동, 서 붕당의 조짐이 완연해지기 시작했다. 동, 서 붕당의 원인은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두 사람이 불화하게 된 시기는 윤원형이 한창 세도를 부리던 명종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의정부 사인이었던 심의겸이 공무로 윤원형의 집을 방문했다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에게서 김효원이 윤원형의 문객으로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심의겸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으로 자신도 외척이지만 윤원형의 발호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효원이 윤원형의 집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김효원에 대해 나쁜 선입관을 가졌었다. 그 뒤에 이조참의로 있던 심의겸은 공석이던 이조정랑 자리에 김효원이 추천되자 전날의 나쁜 선입견으로 인하여 그 임명을 반대하였고, 그에 따라서 김효원의 청요직 진출 기회가 좌절되었다. 이에 대하여 김효원은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훗날 뒤늦게 이조정랑이 된 그는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또 같은 자리의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를 반대하였다.그 이유는 외척을 인사의 요직에 등용하는 것은 폐단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윤원형 등의 외척 세력이 전횡을 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다가 이제 겨우 제거되었는데, 다시 외척을 조정의 요직에 끌어들일 수 없다는 것이 그 요지였으나 어떻게 보면 감정적 보복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가 있었다.
사실 심의겸은 외척이기는 하지만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고, 명종 연간에는 그의 외삼촌 이양이 신진 사류들을 해치려 할 때 이양을 탄핵하여 유배되도록 함으로써 사림을 보호해 준 공로가 있었다. 따라서 심의겸은 꽤 많은 사림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심의겸의 실질적 공로를 인정하려는 세력과 실제 관계는 여하하더라도 외척이라는 명분으로 그를 배척하려는 세력 사이의 갈등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정을 완전히 두 갈래로 갈라놓고 말았다. 사림을 억누르던 세력이 제거되고 나니 이제 사림 내부에서 분파가 발생한 것이다. 심의겸 쪽에는 그의 입장과 처지를 동정하고 두둔하는 노년층들이 많았고, 김효원에게는 원칙을 중시하는 젊은층이 주로 가세해 있었다. 이때 심의겸의 집이 서쪽인 정동에 있어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서인이라고 불렀고, 김효원의 집은 동쪽인 건천동에 있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동인이라고 불렀다. 당시 동인들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완연히 세력을 이루고 있었지만, 서인들은 심정상 심의겸을 지지하는 개개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무슨 당파나 세력적 결집이 이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송강은 심의겸을 두둔하여 서인으로 분류되었는데, 그도 이미 조정의 중진으로 소장 층이 지나치게 선배를 공박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심의겸이 사림을 구한 공로와 을사사화에서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람들의 설원에 진력한 사실을 높이 평가해서 심의겸을 지지하였다. 어린 시절 을사사화로 인한 통한의 기억이 있던 송강으로서는 심의겸을 두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였다. 성격상 호오가 분명하고 일단 자신의 기치를 내세우면 절대 물러서지 않던 송강이었기 때문에 동, 서 붕당의 대립에서 어느덧 서인의 대표적 투사가 되어 버렸다. 동, 서로 나뉜 조정에서 갈등이 심화되어 갈 즈음, 선조 8년(1575년) 7월에 황해도 재령에서 종이 그 주인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양 세력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다. 그 사건은 증거도 불충분한데다 여러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었고, 피의 당사자도 사실을 극구 부인하여 쉽게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살해된 주인은 동인 계열이었고, 현지 수령은 서인들과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당해 지방관은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병이 악화되어 최종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사임하였고 후임으로 부임한 관리는 동인으로서 종이 주인을 살해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무조건 유죄 판결을 내려 버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중앙에까지 보고되어 동인들은 같은 당파인 현지관리가 판결한 대로 유죄주장을 고수하였고, 서인측은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아무리 종이라도 무고하게 인명을 해칠 수 없다며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주장했다.
조정에서 이 사건을 최종적으로 판결하여 재조사 지시를 내린 재판관은 좌의정 박순으로서 노장층이라는 이유로 서인으로 분류되던 인물이었다. 당시 대사간은 동인의 영수격인 허엽으로 김효원과 함께 박순을 그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온당치 못하게 처신했다 하여 추고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송강은 재상에 대하여 추고하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강경하게 반대하여 허엽을 대사헌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나 동, 서 붕당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는 가운데 사림의 신진 사류들인 동인들이 점점 조정의 요직에 진출했다. 이에 송강은 동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친구 율곡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점점 분열 반목하는 조정을 화합시키기 위하여 양파의 상징적 인물인 심의겸과 김효원을 함께 외직으로 내보내는 안을 개진할 뿐 송강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결국 송강은 믿었던 친구에게 협조를 기대했으나 "국가와 사림을 위해 편협되게 처신하지 말라"는 핀잔만 듣게 되었고, 조정은 점점 더 동인들이 득세하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사직한 후 낙향하고 말았다. 이는 그의 불 같은 성정과 타협을 모르는 격렬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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