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길
모든 길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 만든 것이다. 생명체가 만들지 않은 길은 없다. 흔히 보는 시멘트나 보도블록 촘촘한 길도 살아있는 사람이, 쇠똥구리가 지나다니며 만든 좁은 길도 살아있는 쇠똥구리가, 지각의 뒤틀림으로 만들어진 험한 절벽 같은 길도 살아있는 지구가 만든 길이다. 개미집이나 벌집을 반으로 쪼개보라. 수많은 생명길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건 그렇고,
인생길은 죽은 자는 걷지 못한다. 살아 숨 쉬는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삶 길이다. 혹 저승길이 있다 해도 살아있는 자가 걸을 길도 아니고 걷지도 못한다. 삶 길은 산자만의 길이다. 그러나 당신이나 나나 다른 삶 길을 걸으며 산다. 한 배에서 난 형제도 서로 길이 다르다. 하물며 당신이 걷는 길과 내 길이 같을까.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의 삶 길은 몇 갈래나 될까? 사람 수만큼? 아니면 그 이상?
그런 그렇고,
각자 걷던 삶 길을 걷다가 도반이 되고 사랑을 말하며 같은 공간에서 자리를 잡고 평생을 사는 부부는 길이 같을까? 다른 배 다른 유전자가 다른 삶 속에서 자라나 서로가 손잡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건 잠재의식 속에 있던 가고 싶은 길 때문이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걷다가 같은 길을 걷던 당신을 만난 게다. 외로웠고, 덜 힘들게 걷고 싶었고, 손도 잡고 힘 따라 서로 업어 줄 수 있고, 지름길을 서로 논하기도 하고, 때 아닌 우울한 비를 만나면 나란히 그 우울한 비를 피해앉아 서로를 토닥이며 마저 걷고 싶은 것은 당신의 길이 좋아 보여서다.
당신과 같이 걸으면 행복한 삶 길이 될 것 같아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당신이 걷는 길이 좋아서 나의 길을 포기하고 당신이 걷던 길을 같이 걷고 싶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당신이 걷는 길을 통해 내 길을 가고 싶은 것일 게다. 누구든 같이 걸을 수는 있어도 자신의 길은 따로 있다. 삶 길 속에서 갈림길을 만나면 언제든 따로 걷거나 반대로 걸을 수 있다. 또는 지금껏 당신이 걷는 길이 좋아 보였지만 더 좋은 길을 가는 사람을 보고 그를 따라가면 그만이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좋은 참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남이 걷는 길에 올라타며 사는가. 그도 아니면 외길 인생인가. 길 위에 내동댕이쳐져 이리저리 뒹굴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길은 알기는 알고 있는가. 혹 가고 싶은 길도 없는 것은 아닌가. 어디에 서있는지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새 길은 닦기 힘들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남들이 갔던 길 따라감은 창피한가?
“난 소중하니까! 난 나야! 난 특별해! 난 내 길이 있고 꿈이 있어. 난 내가 걷는 길을 지금 후회하지 않아!”
발버둥치거나 힘겨워할 필요 없다. 무엇하러 새로운 길을 닦는가. 왜 특별한 길을 걸으려 애쓰는가. 남들 걷는 그 길이 다 그 길 같아서?
그건 그렇고,
당신과 똑같은 시공간에 살다 간 인간은 없다. 바로 당신이 사는 지금, 이 순간 이 길이 새 길이다. 초침을 보라. 매 초 당신은 새로운 삶 길을 걷고 있다.어느 누구도 당신과 같은 삶 길을 같이 걸어 온 이는 없다. 내가 숨 쉬는 찰라가 늘 내가 가고 있는 새 길이며 특별한 내 길이다.
왜 자연스레 새로 만들며 걷는 이 길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가.
내 삶은 나 말고 그 누구도 살아 본적 없음에 기뻐할 줄 알자.
그 짜릿한 고통과 눈물 나던 행복을 참 아는 사람 나뿐임에 벅차지 않은가?
내가 걸어 온 길은 나뿐이었고 걷는 지금도 나뿐이다.
다 속았어도 내가 했던 거짓말을 아는 것도 나뿐이다.
가는 길에 도반이 있어도 발이 네 개임을 잊지 말자.
그건 그렇고,
걸음을 멈추게 되고 더 이상 걷지 못할 때 나 외의 길도 사라진다.
그것이 유아독존이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내 길이며 그 길을 ‘참 나가 걸음’을 알면 유아독존이다.
그래야만 당신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당신’이라는 단어를 ‘남’으로 받지 말자.
유아독존을 보편적인 불교 경전해석에서 떠나 보자. 내가 없으면 너도 없다.
내가 없으면 부모도 없는 것이고 부모가 없으면 나도 없다.
이 세상에 나는 나뿐이다. 그걸 알아야 ‘너’가 보이는 게다.
내가 걷는 내 삶 길도 나 홀로 걷는 것이지 잘난 과학이 나를 복제한들 같이 걷겠나?
우리는 숨 쉬고 있는 지금 말고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너무 많은 걸음을 쉰다.
내가 걷는 이 길을 ‘참 나가 걸음’을 알기에도 벅차다.
그건 그렇고,
주변 노동하는 동료에게 물으니
“먹고사느라 하지 누가 이런 일 하고 싶어 하겠어요?”란다.
이 말은 잘 걷고 있는데도 모르거나 저 길을 걷기 싫어하는 말이 된다. 그럼 왜 걷나?
어쨌든 지금 걷고 있는 삶 길이 싫은 게다.
좋은 길만 갔던 인간 오라해보라. 한 놈도 없다.
지금 기쁘지 않으니 오늘도 이달도, 올해도 억지로 걷는 게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걸어가야 하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진실로 나는 기뻐 까무러치고 있나?
허허 참.
아 지금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건 그렇고,
나는 잘 걷고 있다. 교만하다. 의뭉스럽게 잘 산다.
그렇게 믿고 내 길을 가는 게 삶 길이다.
혹
걷다가 사람을 만나면 홀대말자. 내 길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다.
혹
걷다가 사람을 만나면 홀대하자. 내 길이 곧 낭떠러지가 될 수도 있다.
혹
걷다가 사람을 만난다면 그냥 내 길을 가자. 대신 그의 길도 축복해주자.
혹
걷다가 쓰러진 사람을 만나면 돕자. 나도 쓰러질 수 있으니.
누구나
걷다가 반드시 길이 막힌다. 지혜의 눈을 닦으면 보인다.
걷는 건 다리요 보는 건 눈이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내 지혜가 닦는다.
나는 지혜그릇이 넓지 않아 힘들게 힘들게 봐야 보이는 삶 길이다.
그건 그렇고,
얼마나 좋은 길을 걷고 있는가는 나밖에 모른다.
내가 가는 길에 대해 누구든 말할 수 있어도 저울질은 못한다.
제 길도 평하기 버겁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름답고 바르게 걸어 마음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람을 나는 봤다.
찾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다. 보이는데 보는 눈을 내가 못가진 것이다.
타인의 삶 길은 내 삶 길을 어떻게 걷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내가 행복하면 모든 것이 예뻐 보이듯 내가 우울하면 모든 것이 밉다.
삶 길이 좀 험할 뿐 숨 쉬니 걸어야 하고 걷다보면 시야가 트인다.
죽음이 나를 맞지 않아
내겐 삶 길이 보이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높낮이는 없다. 같은 선에서 출발하는 무한한 트랙이다.
어떻게 뛰고 어떻게 걷느냐는 내 몫이지 남을 노려보지 말라.
금매달 따서 마음이 호화로운자와 떨어져 걷자.
시상식은 어느 날 어느 때 각자 열리며 홀로 맞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취한다.
많이도 마셨다.
잘란다.
아~ 이노래 좋다. "하얀 나비".
그런데 조관우가 부른다. 그래서 더 좋다.
살아 있어야 이렇게 행복하다.
부귀공명이 이 노래 한자락과 막걸리에 비하겠는가.
그건 그렇고 : 2011.07.17. 22:26 風磬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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