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치미 좋아! ‘엄치미’는 표준어 ‘꽤, 제법, 많이’에 대응하는 고장말로, 주로 경상 지역에서 쓴다. “사나라꼬(남자라고) 일로(일을) 엄치미 한다.” ‘엄치미’와 유사한 말로는 ‘엉체미~엉채미’를 들 수 있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선 ‘엉체미’를 ‘많이’의 잘못으로 풀이했다. 또 <우리말큰사전>에서 ‘엉체미’는 ‘많이’의 고장말로만 풀이했으나, <한국방언연구>에서는 함경북도 고장말로 보고한 바 있다. ‘엄치미’와 ‘엉체미’는 모두 ‘대견하다, 대단하다’라는 뜻의 경상도 고장말 ‘엄첩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여보게 만술아비/ 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 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라꼬”(박목월의 시 ‘만술 아비의 축문’) ‘엄치미’와 대응하는 또다른 형태의 경상도 고장말은 ‘엄치’다. “날이 샐라 카믄 엄치 있어야겄지?”(<토지>, 박경리) 겉으로 보면 ‘엄치’가 ‘엄치미>엄치’와 같은 변화를 겪은 고장말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꼭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나타나는 ‘엄칭이’(엄청, 많이)는 부사 ‘엄청’과 부사를 만드는 토 ‘-이’가 결합된 ‘엄청이’가 ‘엄청이>엄쳉이>엄칭이’로 변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근디, 굿값얼 앞돈만도 엄칭이 줬다미로?” 따라서 고장말 ‘엄치’나 ‘엄치미’는 ‘엄칭이>엄치이>엄치’ 혹은 ‘엄첩이>엄쳅이>엄칩이>엄치미~엄치’와 같은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돌림말 ‘돌림’으로는 모자라 ‘따돌림’을 쓰고, ‘왕따’까지 만들어 사전에 올렸다. 패거리에 끼워주지 않거나 누구를 찍어 내치기도 한다. 사람을 떼지어 괴롭히고 못살게 군다는 점에서 불공정하고 무척 비겁한 일이다. 그런데도 따돌림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성행한다. 그러니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람살이에서 늘 있는 짓거리로 인정하고 대처해야 할 문제로 봐야겠다. 따돌리고 못살게 굴고 업신여기고 속이고 감추고 폭로하고 비웃고 저주하는 데 동원되는 주된 방편이 결국 말글이다. 사회에서는 공적인 권력이나 집단이 정의·형평성을 들추어 공공연히 행사되는 까닭에 더 무섭다. 권력도 권위적인 언어로 나타난다. 신문·방송·인터넷 따위 매체가 발달하고 다양해질수록 언어폭력 역시 정교해지고 다양해진다. 소문이나 사소한 추문이 부풀려지고 굴절돼 번지는 건 하루아침이다. 힘세고 유명한 사람, 훌륭한 사람, 깨끗한 사람, 맷집 좋은 사람도 그 앞에서 속절없이 당한다. 여기서 억울한 사람이 생긴다. 예절이나 관용이 통하지 않는 악머구리 사회와 다를 게 없다. 지난봄 우리는 이땅의 권력과 언론이 쏟아낸 숱한 말글들이 봉하마을의 죽음으로 결국 악머구리 돌림말이 되고 만 것을 겪었다. 문제는 드러나지 않은 비슷한 사례가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저어새 “늪은 보랏빛 가시연의 향으로 가득하네./ 왜가리와 백로 무리 온 세상 시름을 다 잊어/ 노란 댕기로 날아오르는 저어새의 저 품새로/ 노을에 물든 물살을 가르는 나룻배의 명상” 우포늪의 저녁노을 지는 한때를 사랑하는 사람들. 우포늪에서 세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람사르 총회가 열려 자연 사랑을 새롭게 일깨웠다. 저어새는 전세계를 통틀어 1000여 마리뿐이다. 정말 드문 새인데, 여름이면 우포늪으로 찾아온다. 텃새가 아닌 여름새다. 부리와 눈과 다리를 빼면 온몸이 흰색이다. 천연기념물 205호로 몸 크기는 왜가리와 아주 비슷하다. 얼핏 보아 저어새의 두드러진 점은 부리의 생김새다. 영어로는 스푼빌(spoonbill)이다. 미루어 보건대, 스푼빌의 ‘스푼-숟가락’에서 비롯한 이름이 아닐까 한다. 젓가락 사용이 한국인의 머리를 발달시키는 하나의 고리가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밥을 떠먹는 숟가락과 저어새의 부리 모양이 닮았다. 밥이 하늘이라는데, 요즘 우리는 먹고 살아야 할 음식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저어새의 부리를 떠올리며 되돌아보게 된다. 마치 선조들이 쓰던 박물관의 큰 숟가락 같지 않은가. 새는 예의 부리로 물속을 저어(攪) 헤엄치며 먹잇감을 찾는다. 부리가 커서 일단 가까이 있는 먹을거리를 놓치지 않는다. 입이 가장 중요한 삶의 그릇이니까. 정호완/대구대 명예교수·국어학
화이바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를 추위나 충격에서 보호하기 위해 모자나 ‘헬멧’(helmet)을 쓴다. 헬멧은 주로 군인이나 야구선수, 광산과 공사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쓰며, 인라인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타는 이들도 착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전에는 헬멧을 쇠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서 총알과 포탄을 피해야 하는 군인들은 무거운 철모를 썼고, 공사장에서는 그보다는 덜 튼튼한 플라스틱 안전모를 썼다. 그러나 요즘은 가벼우면서도 강한 탄소섬유가 헬멧의 주재료로 사용된다. 이런 헬멧을 일각에서는 ‘화이바’로 일컫기도 한다. ‘화이바’는 ‘파이버’(fiber)를 달리 이르는 표현으로, 원래 영어에서는 섬유나 섬유질, 섬유질 식품을 뜻한다. 그러다가 탄소섬유 헬멧을 뜻하는 ‘카본 파이버 헬멧’(carbon fiber helmet)과 같은 긴 말이 앞뒤가 잘려 ‘파이버’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 뜻이 넓어져서 예전의 철모마저 ‘화이바’라 하기도 한다. 특정 식품의 상표명으로 쓰이는 ‘화이바’는 대개 식이섬유를 뜻한다. 또 건설이나 건축 재료로 유리섬유가 많이 활용되는데, 이는 ‘글라스 파이버’(glass fiber)가 원말이기 때문에 이를 취급하는 회사 이름에 ‘화이바’가 들어가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광통신용 광섬유(optical fiber, 옵티컬 파이버)를 취급하는 회사 이름에는 ‘화이바’ 대신 주로 ‘파이버’가 쓰인다. 어원이 같은 외래어가 가리키는 뜻에 따라 다른 꼴로 쓰이는 것이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짜다라 가 와라 ‘짜다라’는 ‘짜드라, 짜드락, 짜다락’과 함께 ‘그렇게나 많이, 정도에 넘게, 많이’의 뜻을 갖는 고장말이다. 표준어 ‘많이’에 대응하는 고장말로 주로 경상 지역에서 쓰인다. “맥지로(공연히) 소문만 짜다라 냈다가 잘 안 대 보이소, 우째 대겠능교?”(<쌈짓골> 김춘복) “산전에(생전에) 뭐 벌이서(벌어서) 짜드라 해 놨다고 쌀밥 찾고 보리밥 찾노?”(<한국구비문학대계> 경북편) ‘짜다라’가 어떻게 생겨난 말인지 그 어원을 찾기 어렵다. 다만 ‘짜다라’의 또 다른 형태인 ‘짜드라’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 ‘짜드라오다’(많은 수량이 한꺼번에 쏟아져 오다)와 ‘짜드라웃다’(여럿이 한꺼번에 야단스럽게 웃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짜드라오다’와 ‘짜드라웃다’의 ‘짜드라’가 경상 지역에 흘러들어 고장말로 쓰이게 되었는지, 아니면 고장말 ‘짜드라’가 서울말에 흘러들어 표준어로 쓰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짜다라’는 이 지역에서 ‘짜달시리, 짜달스리, 짜달스레’와 함께 ‘그다지’ 또는 ‘특별히, 별나게, 별로’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너그 집도 짜다라 잘난 것도 없더라.”(<우리 청춘의 푸른 옷> 김영현) “지 꼴리는 대로 하고 사는 게 니 아이가? 그런데 짜달시리 또 뭘 보이 주는데?”(<똥개> 곽경택)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종교 무얼 믿느냐거나 믿는 종교가 있느냐고 묻는다. 이력서나 생활기록부 등에도 종교를 묻는 칸이 따로 있기도 하다. 궁금하기도 할 터이나 대답하기 어려운 쪽도 많다. 단골·절·교회에서는 이승에 더하여 저승을 아우르는 얘기를 한다. 이승도 다 알기 어렵지만 저승 세계는 더욱 알기 어려우므로 통상적인 믿음의 대상이 되기는 어려운 영역이다. 그런데도 믿는 사람이 많다. 두려움 탓이라고 말들을 한다. 종교 따라 꾸미고 다듬은 정도가 다를 뿐 규모가 큰 종교나 덜 다듬어진 전통 무속 또는 미신이라고 하여 믿음의 대상이나 저세상 얘기에서 별다를 게 없을 성싶다. 종교의 힘은 이승에서 더 큰 작용을 한다. 자비와 평화와 무욕을 가르치고, 악행을 다스리고 마음을 씻게 하는 점에서 그렇다. 복을 빌고 죄를 뉘우치는 행위도 좋은 정성이요 가르침이다. 다만, 다른 믿음을 내치고 영역 싸움을 벌이는 짓은 사회에서 악덕으로 작용한다. 전날, 아이를 단골무당한테 팔 때가 있었다. 그렇게 단골에 이름을 올리면, 치성을 대신 드리거나 굿을 하여 명과 복을 빌고 액화를 삭여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종교는 평안을 파는 장사다. 마음을 맡기고 믿어서 평안을 얻는다면 그러지 못하는 사람에게 비할 바가 아니겠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바이크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지구에 온난화를 유발해 생태계의 균형을 깨는 주범이 인간이라고 한다. 그간 공산품을 만들면서 공해를 일으키고, 경작지를 늘리기 위해 숲을 줄였던 이기적인 우리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자연과 공생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친환경 사업인 자전거 제조업을 정부가 돕겠다고 나섰다. 우리나라의 자전거 붐을 생각하면 수입에 주로 의존하던 자전거를 자족한다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해 보인다. 자전거를 동호회에서는 ‘바이크’라고도 한다. ‘바이크’(bike)는 영어에서 온 말로, ‘바이시클’ 또는 ‘바이사이클’(bicycle)을 줄인 말이다. 아마도 먼저 앞의 ‘바이’와 뒤의 ‘ㅋ’을 따다 붙여 발음하였고, 철자는 그에 따라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영어사전에 따르면 ‘바이크’는 자전거만이 아니라 ‘모터바이크’(motorbike)라 이르는 소형 오토바이, 더 나아가 문맥에 따라 ‘모터사이클’(motorcycle), 즉 중대형 오토바이도 가리키는 수가 있다. 하지만 주로 자전거를 이른다. 한편, 날렵한 속도나 중후한 멋을 즐기는 오토바이 동호인들도 자신들이 타는 오토바이를 ‘바이크’라 이른다. 그냥 ‘오토바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밋밋하고 ‘모터사이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잘 쓰지 않는 모양이다. 근래에는 자전거의 한 종류로 바퀴가 작은 것이 인기다. 이는 프랑스 말인 ‘미니 벨로’(mini velo)라 이른다. 특히 접어지는 것은 약간 불편하지만 가지고 다닐 수도 있는 크기가 되기 때문에 더 인기가 있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