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랑이 지난주에 동의어를 설명하면서 “말은 본뜻에다 다른 뜻을 더하기도 하고 아예 다른 뜻으로 옮겨가기도 한다”고 했다. 어느 시점에서 어느 낱말의 형태와 의미가 특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형태와 의미가 바뀌기도 한다는 말이다. ‘어리다’는 원래 ‘어리석다’는 뜻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뜻의 말이 되었다. 이화·동화·유추·오분석 등의 언어현상이 이런 변화를 일으킨다. 때로는 비유·상징 등의 수사(修辭)가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복지부 출입 기자와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신문 기사에서 잘라온 구절이다. ‘실랑이’는 본래 ‘실랑이질’로서 남을 못살게 굴어 시달리게 하는 짓이란 뜻이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것이 실랑이였다. 양쪽이 서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옥신각신하는 데는 ‘승강이’라는 말을 썼다. 기사 내용을 보면 출입기자와 벌인 것은 실랑이가 아니라 승강이였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은 ‘실랑이’에 ‘승강이’의 뜻을 보태놓았다. 두 말을 유의어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전은 언어현상에 대해 다분히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언어대중이 많이 쓰는 말도 사전적 해석으로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사람이 그렇게 쓴다면 사전도 물러설 수밖에 없다. ‘말 나고 문법 났지, 문법 나고 말 났나’ 하는 빈정거림이 이럴 때는 설득력을 갖게 된다. 우재욱/시인
할미새 메말랐던 조산천에 맑은 물이 소리를 내며 흐른다. 장맛비 덕분이다. 너무 반갑다. 냇물 주위에 사는 이들은 갑자기 넉넉해진 듯. 바랭이 이삭을 까먹으려는 아침 참새들이 바빠 보인다. 할미새도 한몫을 한다. 작은 할미새 새끼들이 어미를 따라서 참새들이 머물다 간 자리로 옮아 다니기도 하면서 아침거리를 찾아 날고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의 고향 마을에도 할미새들이 많이 날고 있을 것이다. 저 녀석들은 어렸을 적부터 할미새라 했을까. 새끼도 태어나면서부터 할머니가 되었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달리 할아버지 새도 없고. 냇물을 따라 할미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저승으로 가신 외할머니가 떠오름은 어인 일인가. 얼핏 보아서는 까만 머리 밑으로 제비처럼 가슴패기 언저리에 흰 띠를 둘렀다. 영 석연치가 않다. 몇 녀석의 할미새들이 날아오름을 보며 긴 꼬리에 흰 줄기가 하얀 머리로 댕기를 늘어뜨리던 할머니 모습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그렇지. 본디 할미새는 검정이며 회색, 흰색의 깃을 한 무리가 많다. 마치 하얀 머리칼의 할머니와 같다는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그 이름과 달리 매우 부지런히 움직인다. 매우 바쁘다. 냇가 바위나 나뭇가지 위에서 꼬리를 쉴 새 없이 위아래로 흔들고 지저귄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숲으로 날아드는 새를 본다. 정호완/대구대 명예교수·국어학
선크림 꽤 길었던 장마도 지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휴가철에는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서 산과 바다로 몰려든다. 평소에는 인파가 부담스럽고 짜증스럽지만, 북적이지 않는 휴가지는 맞지 않는 옷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인 듯하다. 휴가용품 가운데에는 햇빛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 포함된다. 선글라스·양산·그늘막·모자 등이 몸에 걸치거나 야외에 쳐서 햇빛을 막아주는 것이라면, 선크림(sun cream)은 피부에 직접 바름으로써 자외선의 공격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선크림’은 우리식 영어 표현으로서, 외래어의 주요 공급처였던 이웃 일본이나 영어의 본고장인 미국 또는 영국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영어권에서는 ‘선블록 크림’(sunblock cream)이나 ‘선스크린 크림’(sunscreen cream), 또는 ‘크림’을 빼고 간단히 ‘선블록’이나 ‘선스크린’이라 이른다. (영어권의 어떤 주장에는 ‘선블록’이 나무 그늘·양산 등 그늘을 실제로 만들어주는 것만 뜻한다는 것도 있지만 소수 의견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모두 햇빛을 막아준다는 뜻이 들어 있는데, 우리의 ‘선크림’에는 그런 뜻이 엿보이지 않는다. 물론 우리끼리 꽤 통하는 말이니 이 말의 사용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어느 누가 들어도 쉽게 이해되는 말이면 더 낫지 싶다. 그런 면에서 ‘자외선 차단제’보다 더 좋은 말은 없을까.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관
놉샹이 영조 3년(1727년), 강화유수의 장계에 따르면 병법을 수련하던(武學) 노놉샹(魯老邑尙) 등 세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임금께서 조원명에게 이르기를 강화부에 일러 이재민 구호를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놉샹’은 무슨 뜻의 말일까? 이름접미사에 ‘샹’이 보인다. ‘감샹이·곱샹이·귀샹이·귿샹이·늦샹이·되샹이·미샹이·밉샹이·애샹이·일샹이·접샹이·좀샹이·험샹이’에서 확인된다. ‘곱상하다·밉상·험상궂다’ 따위 말을 살필 때 ‘샹’은 얼굴 생김새나 사람의 인상을 이르는 말로 생각된다. ‘좀샹이’는 ‘좀생이’인 듯도 하다. 그렇다면 ‘감샹이’는 얼굴이 가뭇한 것일까? 귀샹이는 귀하게 생긴 얼굴임이 분명하다. ‘놉샹이’는 높게 생겼다는 말일까? ‘놉샹이’ 비슷한 이름에 티베트 사람 이름 ‘롭상’이 있다. ‘롭상’(친절)은 몽골 사람 이름에도 자주 보이고, 인도로 망명해 있는 달라이라마가 두 살 때 받은 법명(나왕 롭상 텐진 가초) 가운데에도 보인다. 강화도에 살던 놉샹이란 분이 티베트와 연고가 있을 가능성은 물론 없다. 다만 북방 지역과의 오랜 교류의 자취일 수는 있을 듯하다. 얼굴도 곱상이 아닌데다 마음마저 밉상이면 정말 험상궂게 보일까? 애샹이나 일샹이, 아니면 좀샹이에게 물어나 볼거나?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싸목싸목 허소! ‘싸목싸목’은 표준어 ‘천천히’에 대응하는 고장말로, 주로 전라도에서 쓰는 말이다. ‘싸목싸목’은 본디 천천히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흉내말이었으나, 점차 다른 행위로까지 그 의미의 폭을 넓혀 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싸목싸목’이 ‘가다’나 ‘오다’, ‘걷다’ 같은 동사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자, 싸목싸목 가봅시다.”(<타오르는 강> 문순태) “안 엉칠라면 싸목싸목 씹어서 묵어사(먹어야) 쓴다.”(<녹두장군> 송기숙) ‘싸목싸목’의 또다른 형태는 ‘싸묵싸묵’인데, 이는 ‘싸목싸목>싸묵싸묵’과 같은 소리의 변화를 경험한 결과이다. “날도 풀리고 희은이도 컸으니께 싸묵싸묵 돌아댕겨 봐야지.”(<목련꽃 그늘 아래서> 한창훈) ‘싸목싸목’과 마찬가지로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흉내말에서 유래하여 ‘천천히’의 의미를 갖는 ‘싸박싸박’과 ‘장감장감’을 들 수 있는데, 이 또한 전라도에서 두루 쓰이는 고장말이다. ‘싸박싸박’은 눈 쌓인 길을 사박사박 걷는 모양을, 장감장감은 비 내리는 길을 까치발을 디디며 징검징검 걷는 모양을 본뜬 말이다. 그래서인지 표준어의 ‘천천히’와 고장말 ‘싸목싸목, 싸박싸박, 장감장감’은 말맛이 다르다. “츤츤히 장감장감 걸어라 잉.”(<불의 나라> 박범신) “해 떨어질라문 안직 멀었네. 싸박싸박 걸어가소!”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질투 형태는 다르지만 뜻이 같은 낱말을 동의어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동의어는 뜻이 완전히 똑같아서 어떤 문맥에서도 의미 변화 없이 대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동의어를 완전동의어라 한다. 하지만 완전동의어는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말이란 개념뿐만 아니라 느낌까지 싣고 있어서 문장 환경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암산’과 ‘속셈’은 한자말과 우리말이라는 차이밖에 없을 것 같지만 ‘속셈’이라고 하면 ‘암산’에는 없는 ‘꿍꿍이속’이라는 뜻이 떠오른다. 그래서 둘 이상의 낱말이 뜻이나 문장 구성에서 많은 부분 일치하고, 문맥에서도 상당한 경우 자연스럽게 대치될 수 있을 때 일반적으로 동의어라고 한다. 이런 동의어를 부분동의어 또는 유의어라 한다. “세월은 젊음을 질투한다. 시간도 청춘을 시샘한다.” 신문 칼럼에서 잘라온 구절이다. ‘질투’와 ‘시샘’은 유의어다. 그런데 말은 본뜻에다 다른 뜻을 더하기도 하고, 아예 다른 뜻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질투’는 본래 이성 사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할 때 시기하는 것을 뜻했지만, 지금은 ‘시샘’의 뜻까지도 포함한다. ‘시샘’은 ‘시새움’의 준말로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공연히 미워함을 뜻한다. 시샘은 가까운 사람에게 가지는 미움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그걸 일러준다.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라면 배가 아플 까닭이 없다. 우재욱/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