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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여자가 있었으니 / 에바토트
첫째날, 내가 추위에 몸을 떨며 캄캄한 암흑 속으로 나아가
잔가지들을 주워 모아 모닥불을 피웠을 때
그분께서 덜덜 떨며 동굴 밖으로 나와
모닥불에 손을 쬐면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셨다.
둘째날, 내가 새벽부터 일어나 강에서 물을 길어다가
그분의 얼굴에 먼지가 묻지 않도록 마당에 물을 뿌렸을 때
그분께서 밖으로 나와
내가 손바닥에 부어 주는 물로 얼굴을 씻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씀하시기를
'지붕 위를 하늘이라 부르고, 마른곳을 땅이라 부르며,물은 바다에 모이게 하자' 하셨다.
셋째날, 내가 일찌감치 일어나 열매들을 따 모으고
작은 씨앗들을 두 돌멩이 사이에 넣고 갈아
반죽을 만들고 빵을 구웠을 때
그분께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빵과 열매들을 드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땅으로 하여금 풀과 채소와 각종 씨 맺는 열매들을 키우게 하자' 하셨다.
넷째날, 내가 허둥지둥 일어나 잎사귀 달린 나뭇가지로
마당을 쓸고, 빨랬감을 물에 담그고, 단지들을 문지르고
연장들을 닦고, 자루 달린 긴 낫을 숫돌에 갈고 있을 때
그분께서 느지막이 일어나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빛이 있어 그 빛으로 낮과 밤을 나누자' 하셨다.
다섯째날, 내가 아침부터 뛰어다니며 구유를 채우고
말에게 건초를 주고, 양털을 깍고, 거위를 배불리 먹이고
염소들에게 풀을 뜯기고, 암닭들에게 줄 옥수수를 갈고
오리들 멀일 쐐기품을 베고, 돼지 먹일 부엌 찌끼를 데우고.
소젖을 짜고, 고양이에게 우유를 부어 주었을 때
그분께서 길게 하품을 하고
눈에서 잠을 부벼 내며 말씀하시기를
'모든 생물로 하여금 번성하여 땅을 뒤덮게 하자' 하셨다.
여섯째날, 찌르는 통증에 잠을 깬 내가 아이를 낳고
몸을 씻기고,포대기로 싸고, 젖을 먹였을때
그분께서 아이를 들여다보며 아이의 작은 손이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잡게 하시고
자기를 닮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미소지으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은 모든 것이 참으로 보기에 좋더라' 하셨다.
일곱째날, 아이의 울음소리에 잠이 깬 나는
서둘러 기저귀를 갈고 젖을 먹여 달랜 뒤, 불을 켜고
창물을 열어 실내를 환기시키고, 신문을 가져오고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조용히 청소를 한 뒤
아침을 만들었다. 그때
커피 내음에 잠이 깬 그분께서 텔레비전을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씀하시기를
'일곱째날은 쉬자' 하셨다.
199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된 에바토트의 시집에 실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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