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 정호승(1950∼ )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벽 앞에서 사람은 넷으로 나뉜다. 벽을 벽인 줄 알지 못하는 사람, 벽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 벽을 우회하는 사람, 벽에다 문을 내는 사람. 당신은 벽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우리 사회는 지금 벽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문은 벽에다 내는 것’이라고 말한 선각은 비노바 바베였다. 간디의 직계 제자인 그는 인도 전역을 도보순례하며 토지헌납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이문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