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 - 오세영 (1942~ )
주렁주렁 열린 감,
가을 오자 나무들 일제히 등불을
켜 들었다.
제 갈 길 환히 밝히려
어떤 것은 높은 가지 끝에서 어떤 것은 또
낮은 줄기 밑동에서
저마다 치켜든
붉고 푸른 사과 등,
밝고 노란 오렌지 등,
……
보아라 나무들도
밤의 먼 여행을 떠나는 낙엽들을 위해선 이처럼
등불을 예비하지 않던가.
이제는 감을 먹더라도 가슴에 홍시처럼 환하게 불 밝힐 생각을 하라. 이제는 사과를 먹더라도 사과 먹은 가슴이 그대로 등불이 돼라. 그리하여 그 불이 자신을 밝히고 다른 사람을 밝히고 이 세상 모든 어둠의 길을 밝힐 수 있도록 하라.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