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 수 10,289 추천 수 1 댓글 0
김신용(1945∼ ), ‘그 불빛’
그 불빛
회현동 굴다리 밑에서 새어나오던 그 불빛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진열대 위에 책 몇 권 올려놓고
내 늦은 귀가 길을 멈추게 하던,
흐린 진열창에 비쳐진 그 책들을 보며, 들어갈까? 말까?
호주머니 속의 그날 벌이를 가늠하며, 내 발걸음을 망설이게 하던 그 불빛
그렇게 망설이다가 지고 있던 지게를 벗어 굴다리 벽에 세워두고
유리문을 들어서면, 졸리운 듯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던 여자
언제나 내가 보고 싶던 그 달의 문예지 같은 얼굴로, 나를 맞아주곤 했었다
그 문예지를 손에 들고,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망설이다가
기어코 책을 사, 그날 지불해야 할 양동의 방세와 밥값 걱정 때문에 더 무거워진
등에, 다시 지게를 얹고 저만큼 걸어가면
그런 내 뒷모습을 무슨 회귀동물처럼 바라보던 그 불빛!
언젠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혹시 글을 쓰세요? 작가 지망생이에요? 하고 물어와
나를 당황하게 했던-, 그리고 그날은 눈이 내렸던가?
거리마다 송년의 불빛들로 반짝이던 그날
청계천 노점에서 막걸리 몇 잔에 얼큰해져 돌아오는 길
꼭 거쳐야 할 경유지인 것처럼 그 불빛을 찾아들어, 글만 쓰면 배가 고파진다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주제에 글을 써야 하느냐고-, 술주정 같은 푸념을 했을 때
그 서점의 여자는 묵은 책의 먼지들 털 듯 말했었다.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세요-.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 속은 하얗게 비어 왔었고
눈앞이 아득히 흐려졌었다
그 불빛,
아무리 배가 고파도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라는-,그 傳言.
마치 죽비처럼 내 등짝을 후려쳐, 부끄럼으로 눈 내린 밤길을 더 비틀거리게 했던-,
지금도 글을 쓰다가 문득 눈앞이 아득히 흐려질 때, 꺼내보곤 하는
회현동 굴다리 밑의
그 불빛
일용직 잡부로 나날의 연명에만도 힘에 부쳤을 그에게 시를 쓰게 했던 그 서점의 여자가 왜 나는 까닭도 없이 보고 싶은 것일까? 은유의 달팽이로 세상의 배춧잎을 기어오르며 살아야 했던 한국의 랭보 시인. 물컹, 슬픔의 덩어리가 마음의 손 가득 안겨오는 그의 시편들에는 우리가 애써 지운 아픈 근대의 시간들이 들어있다. 시인이여, 아프지 마라, 부디 더 오래 살아남아 모래알 서걱이는 시안(詩眼)을 자극해다오.
이재무<시인>
번호 | 제목 | 글쓴이 | 조회 수 | 날짜 |
---|---|---|---|---|
공지 | 부활 - 친구야 너는 아니 (시:이해인) | 風文 | 53,383 | 2023.12.30 |
3930 | 빨래하는 맨드라미 - 이은봉 | 風磬 | 26,797 | 2006.07.05 |
3929 | 동네 이발소에서 - 송경동 | 風磬 | 24,328 | 2006.07.05 |
3928 | 사평역에서 - 곽재구 | 風磬 | 22,554 | 2006.08.22 |
3927 | 여름날 - 신경림 | 風磬 | 19,261 | 2006.08.25 |
3926 | 고향 - 정지용 | 風磬 | 19,190 | 2006.08.25 |
3925 | 인사동 밭벼 - 손세실리아 | 風磬 | 17,999 | 2006.08.25 |
3924 | 시를 쓰는 가을밤 - 이원규 | 風磬 | 21,592 | 2006.08.25 |
3923 | 휴전선 - 박봉우 | 風磬 | 23,260 | 2006.08.26 |
3922 | 홍시들 - 조태일 | 風磬 | 19,647 | 2006.08.26 |
3921 | 늦가을 - 김지하 | 風磬 | 17,891 | 2006.08.26 |
3920 | 빛의 환쟁이 - 정기복 | 風磬 | 15,490 | 2006.08.27 |
3919 | 바다와 나비 - 김기림 | 風磬 | 18,995 | 2006.08.27 |
3918 | 木瓜茶 - 박용래 | 윤영환 | 18,908 | 2006.09.02 |
3917 | 白樺 - 백석 | 윤영환 | 15,389 | 2006.09.02 |
3916 | 11월의 노래 - 김용택 | 윤영환 | 32,621 | 2006.09.02 |
3915 | 얼음 - 김진경 | 윤영환 | 19,355 | 2006.09.02 |
3914 | 바람이 불어와 너를 비우고 지나가듯 - 박정원 | 윤영환 | 21,225 | 2006.09.02 |
3913 | 겨울날 - 정호승 | 윤영환 | 16,803 | 2006.09.04 |
3912 | 춘란 - 김지하 | 윤영환 | 20,777 | 2006.09.04 |
3911 | 돌베개의 詩 - 이형기 | 윤영환 | 25,661 | 2006.09.04 |
3910 | 빈집 - 기형도 | 윤영환 | 12,697 | 2006.09.04 |
3909 | 9월 - 오세영 | 風磬 | 13,009 | 2006.09.05 |
3908 | 종소리 - 이재무 | 風磬 | 17,437 | 2006.09.07 |